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5-03-17 01:44:58

하코보 아르벤스


파일:과테말라 대통령기.svg
과테말라 공화국 대통령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 #4997d0; color: #fff;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rowcolor=#fff>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마리아노 리베라 파스 호세 베난시오 로페스 마리아노 리베라 파스 라파엘 카레라
<rowcolor=#fff>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후안 안토니오 마르티네스 호세 베르나르도 에스코바르 마리아노 파레데스 라파엘 카레라
<rowcolor=#fff>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페드로 데 아이시네나 이 피뇰 비센테 세르나 이 세르나 미겔 가르시아 그라나도스 후스토 루피노 바리오스
<rowcolor=#fff> 제13대 제14대 제15대 제16대
알레한드로 M. 시니발디 마누엘 바리야스 호세 마리아 레이나 바리오스 마누엘 에스트라다 카브레라
<rowcolor=#fff>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카를로스 에레라 호세 마리아 오레야나 라사로 차콘 곤살레스 호세 마리아 레이나 안드라데
<rowcolor=#fff> 제21대 제22대 제23대 제24대
호르헤 우비코 후안 페데리코 폰세 바이데스 혁명정부위원회 후안 호세 아레발로
<rowcolor=#fff> 제25대 제26대 제27대 제28대
하코보 아르벤스 카를로스 엔리케 디아스 데 레온 엘페고 에르난 몬손 아기레 카를로스 카스티요 아르마스
<rowcolor=#fff> 제29대 제30대 제31대 제32대
루이스 아르투로 곤살레스 로페스 오스카르 멘도사 아수르디아 기예르모 플로레스 아벤다뇨 미겔 이디고라스 푸엔테스
<rowcolor=#fff> 제33대 제34대 제35대 제36대
엔리케 페랄타 아수르디아 훌리오 세사르 멘데스 몬테네그로 카를로스 마누엘 아라나 오소리오 키엘 에우헤니오 라우헤루드 가르시아
<rowcolor=#fff> 제37대 제38대 제39대 제40대
페르난도 루메오 루카스 가르시아 에프라인 리오스 몬트 오스카르 움베르토 메히아 빅토레스 비니시오 세레소
<rowcolor=#fff> 제41대 제42대 제43대 제44대
호르헤 세라노 엘리아스 구스타보 아돌포 에스피나 살게로 라미로 데 레온 카르피오 알바로 아르수
<rowcolor=#fff> 제45대 제46대 제47대 제48대
알폰소 포르티요 오스카르 베르헤르 알바로 콜롬 오토 페레스 몰리나
<rowcolor=#fff> 제49대 제50대 제51대 제52대
알레한드로 말도나도 지미 모랄레스 알레한드로 잠마테이 베르나르도 아레발로 }}}}}}}}}
과테말라 공화국 제25대 대통령
하코보 아르벤스
Jacobo Árbenz
파일:하코보 아르벤스.jpg
<colbgcolor=#4997d0><colcolor=#fff> 본명 후안 하코보 아르벤스 구스만
Juan Jacobo Árbenz Guzmán
출생 1913년 9월 14일
과테말라 케찰테낭고
사망 1971년 1월 27일 (향년 57세)
멕시코 멕시코시티
재임기간 제25대 대통령
1951년 3월 15일 ~ 1954년 6월 27일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4997d0><colcolor=#fff> 부모 아버지 한스 야콥 아르벤스 그뢰블리(1883~1934)
어머니 옥타비아 구스만 카바예로스(1885~1936)
형제자매 1남 2녀 중 1남
누나 안나 아라벨라 아르벤스(1912~1938)
여동생 옥타비아 실비아 아르벤스(1919~1999)
배우자 마리아 크리스티나 빌라노바(1915~2009, 1939년 결혼)
자녀 장녀 이레나 아라벨라 아르벤스 빌라노바(1939~1965)
차녀 마리아 레오노라 아르벤스 빌라노바(1942~2004)
장남 후안 하코보 안토니오 테헤다 빌라노바(1946~?)
복무 기간 1932년 ~ 1954년
최종 계급 대령
참전 경력 과테말라 혁명
1954년 과테말라 쿠데타
학력 과테말라 폴리텍 대학교
정당 [[혁명행동당|
혁명행동당
]]
}}}}}}}}}

1. 개요2. 생애
2.1. 과테말라 혁명2.2. 대통령 재임기2.3. 몰락
3.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과테말라군인이자 제25대 대통령(1951~1954)이다. 전임 후안 호세 아레발로에 이어 2번째로 민주선거로 선출된 대통령이다.

2. 생애

1913년 서부 케찰테낭고에서 상당히 잘사는 중산층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한스 야콥 아르벤츠 그뢰블리(Hans Jakob Arbenz Gröbli)는 1901년 스위스에서 과테말라로 이민한 독일계 과테말라인 약사였고, 어머니 옥타비아 구스만 카바예로스(Octavia Guzmán Caballeros)는 메스티소 중산층 출신의 초등학교 교사였다. 1935년 사관학교(Escuela Politécnica)를 졸업하고 1944년까지 육군에 복무하여 출세가도를 달렸다. 복무 중 독재자 호르헤 우비코(1931~1944)의 탄압을 당하는 농업 노동자의 참상을 목격하고 진보적인 사상을 갖게 되었다. 1938년 마리아 빌라노바(María Vilanova)와 결혼했는데 빌라노바는 공산주의자 호세 마누엘 포르투니(José Manuel Fortuny)와 함께 아르벤스의 사상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2.1. 과테말라 혁명

우비코는 1944년 7월 노동자 총파업과 학생들의 시위, 군부의 반대로 퇴진했다. 한동안 과테말라는 후안 페데리코 폰세 바이데스를 필두로 한 삼두정의 통치를 받았다. 폰세 바이데스는 민정이양을 거부하고 자신을 정점으로 하는 또다른 군사정권을 꿈꾸었다. 이에 당시 대위였던 아르벤스는 카를로스 알다나 산도발(Carlos Aldana Sandoval) 소령과 혁명을 모의했고 알다나는 모의 막판에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아라나(Francisco Javier Arana) 소령을 설득하여 같은 편으로 끌어들였다.[1] 같은 해 10월 19일 아르벤스와 아라나는 마타모로스 병영에서 학생과 시민에게 무기를 지급하여 반정부 봉기를 일으켜 수도 과테말라시티를 장악했다. 다음날 폰세 바이데스는 혁명군에게 무조건 항복하였다.

아르벤스와 아라나는 명망있는 민간 인사 호르헤 토리에요 가리도(Jorge Toriello Garrido)까지 포함한 또다른 삼두정을 구성하고 민정이양을 추진했다. 같은 해 12월 과테말라 사상 최초의 민주선거를 통해 후안 호세 아레발로 박사가 대선에서 승리했다. 아르벤스는 아레발로 정부에서 국방장관(1944~1950)으로 임명되었고 아라나는 초대 국방참모총장(Jefe de las Fuerzas Armadas de Guatemala)에 임명되었다. 여기까지야 혁명 동지들의 승리 기념 파티 겸 자리 나눠먹기라고 볼 수도 있겠다. 문제는 신설 국방참모총장이 국방장관의 상관으로 정해졌다는 것이다. 즉 제복군인의 최선임이 국방장관보다 공식적으로 우위에 있어 문민통제가 쓰레기통에 처박힌 상황이었다.

아라나는 국방참모총장으로서 군 인사에 전권을 행사하고, 아레발로가 소속된 혁명행동당(Partido Acción Revolucionaria)에 정부를 보호하는 "대가"로 1950년 과테말라 대통령 선거에 후보로 공천되기로 약속을 받는 정치협약까지 맺었다. 또한 아르벤스와 아라나는 정부의 정책 노선을 둘러싸고 각각 좌파 세력과 중도 온건~보수 세력을 대표하여 정치 투쟁을 벌였다. 아라나는 1949년 7월 16일 정부와 군대 내의 아르벤스 지지자들을 해임하지 않을 경우 쿠데타를 일으키겠다고 최후통첩을 보냈다. 이에 아레발로는 아르벤스 등과 대책을 모의했고 아르벤스는 18일 아라나가 포함된 차량 행렬에 소규모 부대를 보냈다. 총격전 끝에 아라나가 사살당했는데, 역사가들은 아르벤스가 아라나 사살보단 체포를 명령했다고 추정하지만 아무튼 아라나의 죽음으로 가장 큰 이익을 본 집단은 아르벤스를 위시한 좌파 세력이었다. 아라나 사후 아르벤스는 혁명행동당의 후보로 1950년 대선에 출마하여 넉넉한 표차로 당선되었다.

2.2. 대통령 재임기

아르벤스는 1951년 3월 15일 대통령에 취임하여 전임 아레발로의 사회개혁 정책을 보다 폭넓고 급진적으로 추진했다. 아르벤스의 개혁은 투표권 확대, 결사의 자유, 공산당 합법화[2], 공개토론 허용 등을 포함했다. 가장 중요한 개혁은 대규모 부동산에 속한 미경작지를 무토지 농업 노동자들에게 분배하는 전면적인 농지개혁이었다. 농지개혁은 900호 법령(Decreto 900)에 기초하여 실행되었고 이 법이 존재한 18개월간 10만 가구, 약 50만여 명이 150만 에이커의 토지를 받았다. 토지를 받은 농민 대부분은 원주민들이었다.

아르벤스는 보다 철저한 토지개혁을 위해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 소유의 미경작지도 수용하여 분배하고자 했다. 1953년과 1954년 두 차례에 걸쳐 총 40만 7천 에이커가 수용되었는데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는 과테말라 측의 보상안에 불만을 느꼈다. 또한 아르벤스는 근대적 인프라 사업에 대대적으로 투자하여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의 자회사인 철도회사 중미국제철도(IRCA)와 발전회사 일렉트릭본드앤셰어(Electric Bond and Share)를 장기적으로 대체하고자 했다. 아르벤스가 자기 회사의 이익을 직접 위협한다고 생각한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는 미국 정부에 아르벤스 정부에 대한 쿠데타를 사주했다. 여기에 당시 공고해지던 냉전체제 하의 반공논리에 경도된 미국은 공산주의 세력을 상대로 선거기간뿐만 아니라 선거 후에도 지지를 얻고자 했던 아르벤스를 단순 좌경 민족주의자가 아니라 공산주의자로 의심했다.[3]

미국은 1954년 3월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서 열린 미주기구 회의에서 과테말라를 직접 언급하지 않은 채 공산주의 세력을 비난하는 식으로 아르벤스에 압력을 넣었지만 아르벤스가 굴복하지 않자 CIA를 통한 간접 개입으로 전환했다. 미국의 개입이 임박함을 느낀 아르벤스와 과테말라 노동당은 정규군을 해산하고 농민 민병대를 창설하며 이들의 무장을 위해 1954년 5월 체코슬로바키아로부터 무기를 수입했고 이에 미국은 아예 아르벤스 정권 타도를 결행하기에 이른다.

2.3. 몰락

1954년 6월 18일 CIA의 지원을 받은 망명 장교 카를로스 카스티요 아르마스의 반란군이 온두라스 국경에서 월경하여 아르벤스 정부를 공격했다. 정부군에 비하면 반란군은 수백여 명으로 한줌에 불과했으나 아르벤스 반대파가 가담하면서 숫자가 순식간에 불어났다. 군부는 반란군에 압도적으로 많은 피해를 입혔으나 반란군의 뒤에 미국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이미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다. 군부가 지지를 거두자 아르벤스도 27일 사임하고 외국으로 망명했다. 아르벤스는 멕시코, 스위스, 프랑스, 동구권, 우루과이, 쿠바 등 라틴아메리카와 유럽을 떠돌다가 1970년 멕시코의 수도 멕시코시티에 정착하여 1971년 그곳에서 죽었다.

망명생활도 순탄하지는 않았는데 무려 16년이나 세계의 절반을 떠돌아다니는 고달픈 삶을 살았고, 그의 딸은 자살로 삶을 마쳤다. 아르벤스 자신도 죽을 때는 욕조에서 익사하여 그닥 곱게 죽지는 못했다.

3. 둘러보기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4997D0 33%,#fff 33%,#fff 66%,#4997D0 33%)"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colcolor=#4997D0><colbgcolor=#fff> 상징 국가 · 케찰
역사 역사 전반 · 멕시코 제1제국 · 중앙아메리카 연방 공화국 · 과테말라 내전 · 2022년 과테말라 지진
정치·치안·사법 정치 전반 · 바모스 · 국가희망동맹
외교 외교 전반 · 이베로-아메리카 공동체 · 중미 통합 체제 · TIAR
경제 경제 전반 · 과테말라 케찰 · 바나나 공화국
국방 과테말라군
문화 문화 전반 · 요리 · 과테말라 축구 국가대표팀 · 과테말라 풋살 국가대표팀 · 스페인어 · 마야어
인물 테쿤 우만 · 라파엘 카레라 · 후스토 루피노 바리오스 · 호르헤 우비코 · 미겔 앙헬 아스투리아스 · 하코보 아르벤스 · 카를로스 카스티요 아르마스 · 리고베르타 멘추 · 알레한드로 잠마테이 · 루이스 폰 안 · 베르나르도 아레발로
지리 과테말라시티 · 코반 · 케찰테낭고 · 우에우에테낭고 · 안티과과테말라 · 미스코 · 비야누에바 · 푸에르토바리오스 · 할라파 · 중앙아메리카 · 유카탄 반도 · 티칼 · 라틴아메리카
민족 과테말라인 · 마야인 · 도곤족 · 메스티소
}}}}}}}}} ||
[1] 정작 알다나는 혁명의 성공을 확신하지 못하여 혁명 자체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그래도 혁명으로 들어선 후안 호세 아레발로 정부와 아레발로의 후임 아르벤스 정부에서 공공사업부 장관과 통신부 장관, 주미대사 등 요직을 지내면서 나름 대접을 받다가 1954년 과테말라 쿠데타 후 해외로 망명했다.[2] 1952년 과테말라 공산당이 과테말라 노동당(Partido Guatemalteco del Trabajo)이라는 명칭으로 합법화되었다.[3] 과테말라 노동당은 1953년 총선으로 58석 중 4석만 차지했으나 실제 영향력은 그 이상이었다. 과테말라 노동당은 노조와 학원, 정부에 진출하여 상당한 발언권을 행사하고 있었고 아르벤스는 개혁에 대한 지지를 얻기 위해 노동당에 접근했다. 냉전 종식 후 흔히 알려진 것처럼 아르벤스가 공산주의 세력과 아예 아무런 연관이 없던 것은 아니고 아르벤스 자신이 스스로 공산주의 세력에 접근하기는 했다. 당장 아르벤스의 측근으로 그에게 많은 조언을 해주었던 호세 마누엘 포르투니(José Manuel Fortuny)도 1949년 창당한 과테말라 공산당의 원년멤버였고 1998년 공산당이 해체된 뒤에도 죽을 때까지 공산주의 신념을 유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