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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6 23:27:41

라파엘 카레라



파일:과테말라 대통령기.jpg
과테말라 공화국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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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테말라 공화국 제4•8대 대통령
라파엘 카레라
Rafael Carrera
파일:1000026894.jpg
<colbgcolor=#0287e0><colcolor=#fff> 출생 1814년 10월 24일
누에바에스파냐 과테말라 총독부 누에바 과테말라 데 라 아순시온
(現 과테말라 과테말라 시티 )
사망 1865년 4월 14일 (향년 50세)
과테말라 과테말라 시티
재임기간 제4대 대통령
1844년 12월 14일 ~ 1848년 8월 16일
재임기간 제8대 대통령
1851년 11월 6일 ~ 1865년 4월 14일
서명 파일:Firma_de_Rafael_Carrera._Museo_Nacional_de_Historia.svg.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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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287e0><colcolor=#fff> 부모 아버지 시몬 카레라
어머니 후아나 투르시오스
배우자 페트로나 가르시아 모랄레스
자녀 호세 프란시스코 카레라 가르시아
학력 없음[1]
종교 로마 가톨릭[2]
정당
보수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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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약력3. 생애4. 1839년 쿠데타. 또 다시 반란.5. 로스알토스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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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무도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실패하지 않는 계획, 내 방법으로 하나하나 성공할 수 밖에 없는 계획을 가지고 있으며 이 계획이 우리에게 가장 완전한 승리를 안겨줄 것이다. 나는 제군과 함께 아세투노[3]로 갈 것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모든 사람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백성들과 함께 이곳에 다시 올 것이다...
프란시스코 모라산(Francisco Morazán)의 2차 과테말라 침공 직후 자기 병사들에게.

호세 라파엘 카레라 이 투르시오스(José Rafael Carrera y Turcios)는 과테말라의 4대, 8대 대통령이다. 과테말라 근대사의 가장 중요한 인물로서, 과테말라 독립의 아버지이자 과테말라 보수주의의 상징격인 인물이다. 그의 정치 인생을 간단히 설명하면 독립전쟁가부장적 보수주의 두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2. 약력

3. 생애

파일:350px-Retratogalvez_2014-06-22_11-25.jpg
마리아노 갈베스 과테말라 주지사
“정부는 주의 여러 마을을 괴롭히고 지주와 상인을 계속해서 충격에 빠뜨리는 무장 단체의 과잉을 진압하기 위한 조치가 지금까지 원하는 효과를 얻지 못했다는 점을 고통스럽게 보고 있습니다. 시민인 라파엘 카레라(Rafael Carrera)에게 이 문제에 대한 반복적인 지시가 내려졌고, 비록 그가 정부의 뜻을 묵인한다고 선언했지만, 그의 이름으로 자행된 무질서에 대한 불만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여러 곳에서 관찰되는 경보에 대한 보고도 끊이지 않습니다. 점수를 부여하고 해당 사령관의 승인을 받은 것으로 알려집니다.

그리고 3일 후:
“카레라 군대가 이 수도를 침공하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위험은 임박하고 강력하다. 시골의 모든 주민, 특히 법원 근처의 주민이 그의 깃발 아래 있다... 통치자는 다음과 같이 국가 보존을 제공할 수 없다고 선언하지 않으면 범죄자가 될 것이다. 규칙적인 질서는 헌법에 규정되어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정력적으로 행동하고 파벌을 파괴할 수 있도록 광범위한 권한이 필요하다."


- 펠리페 몰리나[4]가 국회에서 발췌한 내용: 헤르난데스 데 레온(Hernández de León Federico) (1959년 2월 27일). “천문력의 장: 마리아노 갈베스(Mariano Gálvez)의 자유주의 정권의 몰락.” 라 호라 신문[5]
과테말라 시티 출신이다. 1814년 메스티소로 태어
나 전문적인 공부를 하지 못했고 문맹이었다.

1837년, 중앙아메리카 연방 공화국의 대통령 프란시스코 모라잔에 맞서 무장 투쟁이 시작되었다. 카레라는 프란시스코 모라잔과 같은 자유주의자이자 과테말라 주 주지사 호세 마리아노 갈베스와 싸웠다. 카레라는 반란군의 최고 지도자였으며 그 중에는 수많은 원주민도 있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독립의 아버지(Padre de la Constitución )'.

원주민의 지지를 얻은 이유는 1837년 6월 9일 과테말라 정부가 1820년 카디스의 코르테스(Cortes de Cádiz)에 의해 식민지 시대부터 억압받았던 원주민에게서 조공을 다시 걷어들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독립군은 게릴라전을 통해 투쟁을 시작했다. 즉,정부군과 맞닥뜨리지 않고 친정부적인 마을만 공격했다.

그 시간, 갈베스를 지지하던 성직자들은 갈베스에게서 뒤돌아서기 시작했고, 갈베스가 강물을 중독시켜 콜레라를 과테말라에 퍼뜨렸다고 비난했다.[6] 이 비난은 카레라에게는 유리하게 돌아가 과테말라 주 인구의 대부분이 마리아노 갈베스에게서 돌아서는 계기가 된다. 어쨌든 칼레라와 갈베스는 여러 전투를 벌이게 되는데,마타퀘스쿠인틀라(Mataquescuintla) 막사 전투가 유명하다. 산타 로사(Santa Rosa)의 암벨리스(Ambelis) 장군은 테오도로 메히아(Teodoro Mejía)가 지휘하는 군대를 격파했다. [7]

1838년 1월 13일에는 과테말라 수비대가 공격을 받는다. 이러한 전투 중 일부에서는 강도, 폭행, 급습같은 무방비 상태의 시민들에 대한 살인 등 어느 한쪽이 어느 곳을 비난할 수 없는 행위가 동반된다. 특히 갈베스 정부는 카레라가 반란군의 지도자라는 사실을 알고 마타퀘스쿠인틀라를 침공하여 무력으로 카레라의 아내 페트로나 가르시아를 체포했었다.(마타퀘스쿠인틀라 전투) 이를 알게 된 카레라는 아내에게 가해진 분노에 대해 복수를 다짐하고 풀려난 아내와 함께 투쟁을 다시 시작했다.

복수에 대한 열망에 불타올랐던 페트로나 가르시아는 정부군을 기습하여 수많은 잔학 행위를 저질렀고, 수많은 피를 묻혔다.[8]

그러던 어느 날 동료 종교인이 이끄는 한 교회 지붕으로 교회 안에 수많은 원주민들이 모인 가운데 편지 한 장이 던져졌다. 이 편지는 카레라의 반란에 동참하라고 명령하는 내용의 성모 마리아의 계시라고 적혀 있었다.
[9]

농민군의 폭력적인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과테말라 주지사 마리아노 갈베스는 반군에 대한 초토화 작전을 승인했다. 또한 그런 제시를 한 사령관을 칭찬했다고 한다.. 이렇게 나라꼴이 돌아가자 답답해 하던 참모진들 중 몇몇은 이 작전은 "반란을 증가시키는 데에만 기여할 뿐이지. 반란을 막을 수 없으니 이 전술을 중단해달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갈베스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1838년 초, 과테말라의 자유주의자이자 점점 몰락해 가는 갈베스의 막장행위에 실망한 호세 프란시스코 바룬디아 이 세페다(José Francisco Barrundia y Cepeda)는 갈베스에게서 돌아서고 과테말라 시티를 카레라에게 바쳤다.[10]

결국 갈베스는 1838년 1월 31일 라파엘 카레라가 이끄는 반란군 앞에 무릎을 꿇고 주지사 자리를 사임하게 된다. 이 승리는 세페다의 항복이 기여한 점이 컸다.

종교 만세! 외국 이단자들에게 죽음을!을 외치며 농민들로 구성된 반란군은 과테말라 시티를 점령하고 갈베스가 거주했던 궁전과 영국 장교 윌리엄 홀 [11]의 집을 포함하여 전 정부 건물들을 약탈하고 파괴했다.

또한 폭도들을 막기 위해 카레라는 대성당의 주임 안토니오 라라사발(Antonio Larrazábal)에게 1829년 이래로 닫혀 있던 대성당의 문을 열어달라고 요청했다.[12]

그러자 라라사발은 "무장한 반란군들은 물론이고 어떤 반란군도 신성한 구역에는 들어오지 못한다"며 강하게 반대했다. 그러자 카레라는 자신의 목에 을 대고 다시 문을 열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라라자발은 이 카레라라는 자가 보통 인물이 아님을 알고 정문를 열라는 명령을 내렸고, 반란군들은 그곳에 들어갔지만 약탈은 하지 않았다.

이로써 반란은 끝난 줄 알았다. 아니 끝났어야 했다.

4. 1839년 쿠데타. 또 다시 반란.

파일:350px-Map_of_Journey.jpg
1839년 과테말라 지도.[13]
과테말라인들은 다양한 측면이나 자유분방한 파벌들이 자신들의 운명을 마음대로 처리하는 냉담한 무관심으로 오랜 시간을 보냈다. 법도 없고, 공중도덕도 없고, 정부도 없고, 어떠한 소득도 없이, 악은 극에 달해 갔다. 만약 자신들이 스스로 행동하고 무고한 사람들의 절대적인 소유자라고 생각하는 소수의 사람들의 먹이가 되는 데 동의하려면 원주민 이상의 존재가 되어야 했다."


- 라 호라 신문 창간호의 헤드라인 글귀: 에르난데스 데 레온.F(1959년 4월 20일). “천문력의 장: 1839년의 쿠데타.” 라 호라 신문 (과테말라).
파일:Serapio_Cruz.jpg
경험이 풍부했던 과테말라 군장교 세라피오 크루즈(Serapio Cruz)원수.[14]
1838년 3월 카레라와 그의 군대가 마타케스쿠인틀라 로 돌아왔을 때, 과테말라 크리올(최근 귀환한 아이시네나 일족(Clan Aycinena)[15]을 포함하여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 모두)은 프란시스코 모라잔 장군에게 국가를 진정시키기 위해 과테말라로 올 것을 요청하고 그에게 독재를 위한 돈을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리하여 1838년 4월 14일 과테말라 주에서 보수주의자들은 권력을 잃었고 카레라는 미타 산맥에 갇혔다.

이 모든 건 과테말라를 침공하여 산수르 [16]에 도착하자마자 카레라의 장인인 파스쿠알 알바레즈를 처형하고 머리를 파이크에 박은 모라잔과 호세 프란시스코 바룬디아 이 세페다의 자유주의 세력의 기습으로 시작 되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카레라와 아내 페트로나는 이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모라잔과 한 판 붙기 위해 출동했고 마타케스쿠인틀라에 도착하여 "지금 여기서 무덤에 묻힌다 해도 모라잔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카레라는 이후 여러 사절을 받았는데, 특히 자신을 죽이지는 않겠지만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겠다고 말한 사절로 온 바룬디아를 보내버린 후 이를 기회로 본 모라잔은 강력한 초토화 공세를 시작하여 자신이 지나가는 길에 있는 모든 마을을 파괴하고 약탈했다. 이후 모라잔은 적은 물품을 강탈하고 카레라에게 군대를 가지고 "너거들이 좋아하는 게릴라전으로 한번 막아보시지?"라고 조롱했다.

카레라가 완전히 패배했다고 믿었던 모라잔과 바룬디아는 과테말라 시티로 향했고 그곳에서 발렌수엘라(Pedro José Valenzuela) 주지사와 아이시네나 일족의 구성원들로부터 구세주로 받아들여지기까지 했고 심지어 후원까지 받았으며 발렌수엘라와 바룬디아는 과테말라의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라잔에게 충성을 바쳤다. 양 쪽의 크리올들은 마침내 시골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는 모라잔과 같은 지도자가 나왔다는 사실에 새벽까지 축하했다.

모라잔은 자원을 사용하여 로스알토스[17]를 지원한 다음 발렌수엘라를 아이시네나 일족과 가까웠던 마리아노 리베라 파스(Mariano Rivera Paz)로 대체했지만 1829년에 압수한 자산을 반환하지는 않았다. 이에 아이시네나 일족은 복수로 후안 호세 데 아이시네나 피뇰(Juan José de Aycinena y Piñol)이라는 과테말라에서 제일 큰 산 카를로스 대학의 교장을 이용해 산살바도르에서 중앙아메리카 연방을 해체하는 데 찬성표를 던졌고 , 이로 인해 모라잔은 죽어가는 연방을 위해 엘살바도르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모라잔은 자신이 패배했다고 생각했던 카레라가 기사회생 할 수 있는 기회를 줬고 과테말라 동부에 탄압을 강화했다.

모라잔이 엘살바도르로 갔다는 것을 안 카레라는 소규모의 병력으로 살라마[18]를 점령하려했지만 패배하여 전투에서 자신의 형 라우레아노 호세 카레라(Laureano José Carrera y Turcios)를 잃는다. 카레라는 몇 명의 병사들과 함께 중상을 입은 채 사나라테(Sanarate)를 향해 도망갔다.

절반 회복되었을 때 카레라는 후티아파[19]에 주둔하던 적부대를 공격 하고 얻은 전리품은 자신과 협조하고 과테말라 시티 근처의 페타파[20]공격을 지원해 주는 이들에게 나눠줬으며 덕분에 페타파에서 승리했지만 상당한 사상자가 발생했다.

페타파에서 승리한 후 그해 9월 카레라는 과테말라주의 주도를 공격하려 했으나 자유주의파의 명장 카를로스 살라자르 카스트로(Carlos Salazar Castro)가 빌라 누에바(Villa Nueva (Guatemala) 들판에서 카레라를 격파 하고 카레라는 다시 동쪽으로 후퇴해야 했다. 이때 카를로스 살라자르는 그 전에 있던 마리아노 리베라 파스 대신 주지사에 임명된다. 당연히 리베라는 반발했지만 할 수 있는게 없었다.

안티과과테말라와 케트살테낭고를 점령하려는 여러 번의 시도가 실패한 후, 카레라는 포위되어 부상을 입었고 , 중앙아메리카 연방의회의장, 프란시스코 파본 아이시네나(Manuel Francisco Pavón Aycinena)의 명령을 받은 로스알토스의 총사령관, 멕시코 출신 장군 아우구스틴 구즈만(Agustín Guzmán) 앞에 항복해야 했다.

모라잔은 이렇게 항복한 카레라를 죽일 수 있었지만 엘살바도르에서 엘살바도르의 또 다른 독립군 지도자 프란시스코 페레라(Francisco Ferrera)의 공격 에 대응하려면 과테말라 농민들의 지원이 필요했기 때문에 죽이지 못했다. 결국 이것이 카레라의 목숨을 또 살린 것이다.

대신 모라잔은 카레라를 마타케스쿠인틀라의 사령관으로등용했지만 무기는 주지 않았다. 카레라가 마타케스쿠인틀라에서 사령관으로 있을 때 페레라는 카레라를 초대했고 카레라는 이 초대에 응했다. 모라잔이 엘살바도르를 공격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카레라는 과테말라 시티를 공격하기로 결정했고 이에 페레라는 카레라에게 천 자루의 소총과 탄약을 지원하기로 했다.

한편, 카레라를 아니꼽게 본 사람들이 카레라의 처벌을 권고함에도 불구하고 명장,카를로스 살라자르는 평화적으로 협상하려고 했다. 심지어는 카레라에게 진심을 보여주기 위해 빌라 누에바 전투 이후 과테말라 시티에 있던 요새를 철거했다 .

살라자르의 선의 아닌 동정과 페레라의 지원을 이용하여 1839년 4월 13일 카레라는 과테말라 시티 광장을 기습적으로 침공한 후 점령한다. 아쉽게도 명장,살라자르 카스트로, 바룬디아 및 마리아노 갈베스는 카레라가 도착하기 전에 달아났다.[21]

살라자르가 없어지자 카레라는 뒷방으로 쫓겨난 마리아노 리베라 파스를 다시 과테말라 주지사로 복위했다. 리베라는 카레라를 육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지만, 사실상 과테말라에서 절대적인 권한을 갖고 있던 사람은 카레라였다. 이후 카레라는 페레라와의 동맹을 그대로 유지하게 된다.

4월 13일 쿠데타 당시 시우다드 비에하(Ciudad Vieja)에 있던 중앙아메리카 연방의장, 마누엘 프란시스코 파본 아이시네나는 과테말라 시티로 건너가 카레라와 협력하기 시작했다. 한 마디로 모라잔에게 뻑큐을 날린 셈

5. 로스알토스멸망

로스알토스가 분리된 후 제헌의회는 1839년 9월 12일 다음 법령에 따라 과테말라 주를 7개 주와 2개 구역으로 나누었다.
과테말라 제헌의회:
로스알토스를 구성하는 부서가 분리된 후 새롭고 편리한 영토 분할의 필요성을 고려했다. 정부는 이 문제에 관해 제시한 데이터와 보고서를 바탕으로 다음과 같이 결정했다.

과테말라 주는 과테말라 시티, 사카테페케스, 치말테낭고, 에스쿠인틀라, 마타케스쿠인틀라, 치키물라, 베라파즈(Verapaz, Guatemala)등 7개 주로 나뉜다.그들은 또한 이사발과 페텐이라는 정부에 즉시 의존하는 두 개의 별도 구역을 구성한다.언급된 부서와 구역에는 이 법본에 표시된 인구와 장소가 포함된다.더 정확한 데이터가 수집되고 다른 법률에 따라 영토를 영구적으로 분할하기 위해 작성해야 하는 등록이 있는 한, 정부는 도시나 장소를 서로 추가하거나 분리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다. 각 주지사에게 보고하기 전에 국민 자신의 최선의 봉사와 선익에 근거하여 이를 요청하는 경우 정부는 각 부서의 영역을 구분하기 위해 취하는 조치를 통해 당혹감을 피하고 전체에서 최고의 혜택을 촉진하기 위해 공개 가능한 경우 정부와 주정부의 이해가 동일하도록 보장할 것이다.

- 마누엘 피네다 몬트(Manuel Pineda Mont), 과테말라 법률 편집본, 1859년

[1] 메스티소였던 카레라는 기초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러니까 문맹이었다. 그렇지만 머리가 영특했기에 대통령이 되자 마자 글 공부를 해 이름서명은 쓰거나 읽을 수 있었다.[2] 원래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그에 따라 반가톨릭을 규제하고 성직자에게 교육을 맡기기도 했다. 그리고 사실 라틴아메리카에서 바티칸과 외교관계를 최초로 맺었던 곳이 과테말라고 이 양반 집권기다.[3] 정확히는 과테말라시티 안에 위치해있는 주[4] Felipe Francisco Molina y Bedoya. 코스타리코 출신의 외교관.코스타리코를 대표해 여러 국가와 협정을 맸었다.[5] La Hora (Guatemala) 1920년 6월 19일 기업인 클레멘테 마로킨(Clemente Marroquín Rojas)이 창간한 과테말라 일간지.발행은 과테말라 시티에서 하고 있다.[6] 이건 갈베스 입장에선 좀 억울한게 콜레라가 발생한 건 맞지만 이건 갈베스 개인의 문제라기보다 인구 증가와 의료 시설의 낮은 수용력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다. 이 시기에는 흔히 있었던 일이었기에 갈베스 한 명에게 모든걸 다 덮어씌우기에는 좀 억울하다는 것이다.[7] 그러나 1837년 12월 7일 할라파 광장에서 결국 패배한다.[8] 그래서 그런지 어떤 동료 종교인들의 기록에 따르면 많은 동료들이 "난 카레라보다 저 여자가 더 무서워..."같은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한 마디로 여장부였던 셈(...)[9] 아직까지 이 편지가 언제 누가 어디서 던졌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분명한건 이 편지로 인해 카레라의 반란이 커졌다는 것.[10] 당시 과테말라의 상황은 영 좋지 못했다. 교통 체계는 엉망이었고 경제는 마비되어갔다. 결국 자유주의자들은 이 엉망진창인 나라꼴을 바꾸기 위해 카레라와 협상하는 지점에 이르러버린 것이다.[11] William Hall 흑인노바스코샤 출생인 중 최초로 빅토리아 십자무공훈장을 받은 영국의 병참장교였다. 영국 왕립 해군 소속이었으며 대영제국의 정책을 만드는 데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지만, 이 사람이 참여한 행동은 영국이 아닌 세계의 많은 지역에 대한 식민 통치를 확장하고 강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이었다. 홀이 일으킨 갈등은 오늘날 영국 동인도 회사의 식민 통치에 대한 인식을 만듬으로서 우리가 흔히 아는 제국주의의 끝을 보여준 인물이다. 세포이 항쟁이 일어났을 때도 참가해 공헌을 세웠다.여러모로 인식이 안 좋은 인물[12] 무슨 뜻이냐면 당시 대성당은 그냥 성당이 아니었다. 아무리 카레라여도 대성당 주임의 승인을 받지 못하면 정당성이 세워지지 않고 정당성이 세워지지 않는 것은 곧 반란을 말하는 것이기에 반란을 막기 위해서는 자신의 정당성을 대성당 주임에게 인증받아야 했다. 그렇기에 대성당의 문이 열려야지만 정식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것.[13] 유카탄치아파스같은 멕시코와의 국경이 정의되지 않았으며 벨리즈는 아직 영국령 식민지였다.[14] 카리스마 넘치는 성격이었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던 카레라는 크루즈를 동료로 삼았고, 그 이후에는 그의 여동생 중 한 사람을 연인으로 삼고싶어할 만큼 크루즈를 아끼고 신뢰했었다.[15] 19세기 과테말라의 부유한 상인이자 식민지 시절 스페인과 직접 협상을 벌였던 후안 페르민 데 아이시네나(Juan Fermín de Aycinena e Irigoyen)후작의 후손들을 일컫는 말이다. 이들은 과테말라에서 상업독점권을 갖고 있었고 정부와 가톨릭 교회에서 모두 한자리 해 먹고 있던 인물들이었다.[16] 팔렌시아(Palencia)에 위치해 있는 도시[17] 1830년대 성립된 중앙아메리카 연방 공화국의 여러 구성국들 중 6번째 구성국(Estado)이었다. 수도는 케찰테낭고과테말라 서부와 멕시코 치아파스주의 일부에 자리잡았다. 로스알토스란 말은 스페인어로 고지대를 뜻한다. 과테말라를 더 쉽게 통치하기 위해 과테말라에서 때어내 강제로 독립시켜 연방에 편입시킨 현재의 미국을 이루는 주들과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진 구성국이라고 보면 된다[18] (Salamá) 과테말라의 도시로 바하베라파스 주의 주도이며 면적은 776km2, 높이는 940m, 인구는 56,359명(2010년 기준)이다. 과테말라의 수도인 과테말라 시티에서 15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스페인어로는 물 위의 테이블이라는 뜻이다.[19] (Departamento de Jutiapa) 과테말라 남동부에 위치한 주. 주도는 후티아파이며 면적은 3,216km2, 인구는 389,085명(2002년 기준)이다. 북쪽으로는 할라파 주와 치키물라 주, 서쪽으로는 산타로사 주, 남쪽으로는 태평양과 접하며 동쪽으로는 엘살바도르와 국경을 접한다. 17개 지방 자치체를 관할한다.산악지대가 많고 남쪽은 바다와 접해있어서 관광업도 발전했다.또한 엘살바도르와 국경 지역이다.[20] (San Miguel Petapa) 과테말라 과테말라주의 도시로 면적은 30km2, 인구는 94,228명(2002년 기준)이다.페타파는 원주민어로 물의 침대를 뜻한다.[21] 예시로 살라자르 카스트로 같은 경우엔 잠옷을 입은 채로 자기 집 지붕을 뛰어넘어부리나케 피난처로 뛰어들어갔다. 나중에는 농부로 변장하여 국경을 넘어 과테말라를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