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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8 23:39:16

케찰테낭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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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찰테낭고
Quetzaltenango
Xelajú
파일:케찰테낭고 시기.jpg
국가 <colcolor=#000000> 파일:과테말라 국기.svg 과테말라
지역 케찰테낭고 주
면적 120㎢
시간대 UTC-6
인구 204,075명[1]
인구 밀도 1,700.63명/㎢

1. 개요2. 역사3. 현재4. 관광과 교통

[clearfix]

1. 개요

케찰테낭고과테말라 서부의 도시이자 동명의 주(Departamento de Quetzaltenango)의 주도이다. 또한 과테말라의 3대 대도시권 중 하나인 로스알토스 대도시권(Área Metropolitana de Los Altos)의 종주도시이다.[2] 과테말라시티에서 206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면적은 120㎢, 인구는 2018년도 과테말라 국가통계청(INE) 추계 기준 2022년 20만 4,075명으로 사실상 과테말라시티의 뒤를 이어 과테말라 제2의 도시나 다름없다.[3] 해발고도 2,330m가 넘는 곳에 위치하여 평지에 비해 상대적으로 쾌적한 편이다. 마야어로는 셸라후(Xelajú) 또는 더 일반적으로 셸라(Xela)라고 부르며 '10개의 산 아래'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2. 역사

파일:1896년 케찰테낭고 전경.jpg
1896년 케찰테낭고 전경
케찰테낭고는 스페인인 콩키스타도르가 도래하기 전부터 현지 마야인들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정복 당시에는 쿠마르카흐 왕국(키체족)의 영토였다. 1524년 케찰테낭고는 에르난 코르테스의 친구 페드로 데알바라도에 정복되었다. 당시 스페인인에 대항해 영웅적으로 키체족을 이끌었던 추장 테쿤 우만(Tecún Umán)이 케찰테낭고 또는 그 인근에서 전사했다고 추정된다.[4] 도시로서 케찰테낭고의 역사가 시작된 것은 스페인인의 지배가 막 종료된 1825년이었다. 중앙아메리카 연방공화국에 편입된 케찰테낭고는 1838년부터 1840년까지, 그리고 1848년부터 1849년까지 존속한 연방 내 로스알토스국(國)의 수도였다. 이후 과테말라에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830년대 도시의 인구는 7,442명이었다. 이 가운데 3,298명은 라디노인, 4,149명은 마야인(키체족)이었다. 도시는 인근에서 생산된 곡물과 과채류, 가축의 집산지였으며 특히 가축은 엘살바도르로 수출되었다. 인구는 1889년 2만 명으로 증가했다. 1896년 주간지 라 일루스트라시온 과테말테카(La Ilustración Guatemalteca)의 기사에 따르면 케찰테낭고는 상업이 발달한 부유한 도시였다. 해당 기사에 따르면 은행, 전등, 전화기와 다수의 초등학교, 중학교가 있었으며, 특히 과테말라에서 2번째로 큰 병원이 있었다. 1902년 케찰테낭고는 대지진과 화산 분화로 초토화되고 주민 5천여 명이 사망하는 참사를 겪었다. 뒤이은 재건으로 기존의 스페인 식민지 시대 건축 양식 건물들이 신고전주의 양식의 건물들로 대체되어 케찰테낭고는 완전히 변모했다.[5] 재건된 도시의 1921년 인구는 2만 4,488명으로 당시 과테말라 3위의 도시였다.

1930년부터는 현재까지 과테말라 유일의 전철로 남아있는 로스알토스 철도(Ferrocarril de Los Altos)가 운영되었다. 케찰테낭고와 산펠리페 주 레탈울레우를 연결하던 이 노선은 1933년 산사태로 폐쇄되었다. 오늘날 도심에는 당시 철도에 관한 박물관이 있다. 1950~60년대에 여러 공장이 세워져 공업도시가 되었고, 과테말라 내전이 끝난 1990년대 말부터는 경제호황을 맞이했다. 그 동안 인구는 1940년 3만 3,538명, 1964년 4만 5,195명, 1994년 9만 801명, 2002년 12만 7,569명으로 증가했다. 2010년대부터는 기업들의 대대적인 투자를 받아 상업, 교육을 비롯한 서비스업, 의류와 주류를 비롯한 제조업뿐만 아니라 건설업도 호황을 맞이했다.

3. 현재

파일:케찰테낭고 시립극장 내부.jpg
케찰테낭고 시립극장(Teatro Municipal de Quetzaltenango) 내부
2022년 현재 케찰테낭고는 인구 20만 4,075명으로 과테말라에서 명목상으로는 제3, 실질적으로는 제2의 도시로 과테말라 서부의 중심지이다. 주민의 53%는 라디노인이고 45%는 마야인을 비롯한 아메리카 원주민, 나머지 2%는 주로 멕시코와 페루에서 이주한 외국인이다. 케찰테낭고는 또한 교육문화의 중심지로, 일명 문화의 요람(Cuna de la Cultura)으로 불린다. 과테말라에서 가장 유명한 학자와 작가, 음악가들이 도시에 살고 있다. 특히 교육의 도시로 유명한데, 1개 사립 종합대학교(Universidad de Occidente), 7개 단과대학을 비롯해 거의 800개에 달하는 교육기관이 있다. 과테말라 전역에서 수천여 명의 학생들이 이곳에서 공부하기 위해 몰려들며, 졸업한 학생들은 다시 다른 지역으로 가거나 멕시코같은 더 부유한 나라들로 이주한다. 도시의 성인문맹률은 7%로 과테말라 전국의 19%에 비해 압도적으로 낮다. 이런 교육환경 덕분에 외국에서 스페인어 어학연수를 하러 오는 학생들도 있으며 이들로부터 벌어들이는 돈은 매년 약 240만 달러에 달한다.

4. 관광과 교통

케찰테낭고는 과테말라시티, 안티과과테말라, 티칼, 아티틀란 호수[6]과 함께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방문하는 관광지로 손꼽힌다. 티칼이 마야 유적으로, 안티과과테말라가 스페인 식민지 시대 바로크 양식 건축물로 유명하다면 케찰테낭고는 1902년 지진과 화산 분출로 싹 밀린 후 세워진 신고전주의 양식 건축물, 그리고 인근의 화산 지대로 유명하다. 시내에는 신고전주의 양식 건축물뿐만 아니라 역사, 고고학, 예술, 전통문화를 주제로 한 박물관과 문화센터가 여러개 있다. 인구의 40%가 아메리카 원주민인 도시이므로 마야 문화도 체험할 수 있다. 스페인의 지배로부터 중앙아메리카의 독립(9월 15일)을 기념하는 축제가 매년 9월 12일부터 18일까지 거행된다. 이때는 케찰테낭고 곳곳에서 콘서트와 퍼레이드가 벌어지고 과테말라 전통요리를 비롯한 각국의 요리를 판매한다.

케찰테낭고 남쪽의 화산지대는 과테말라 생태관광의 중심지로 매년 수많은 관광객을 끌어모은다. 1902년 분화로 생성되어 아직까지도 활동하고 있는 높이 3,772m의 산타마리아 화산, 산타마리아 화산의 측화산인 산티아구이토 화산, 시내에서 바로 남쪽으로 떨어진 세로케마도 화산, 남서쪽에 있는 시에테오레하스 화산이 유명하다.

케찰테낭고로 접근하는 루트는 북동쪽에 면한 케찰테낭고 공항과 도시 북동쪽으로 면한 팬 아메리칸 하이웨이가 있다. 이 고속도로로 수도 과테말라시티와 이어져 있다. 케찰테낭고는 관광 및 교육도시인 동시에 서부 교통의 중심지이기도 하므로 서부의 관광지로 가려는 사람들은 케찰테낭고를 경유하는 경우가 많다.

과테말라 주재 교민이 아니라면 이곳에 방문하고자 하는 경우에는 과테말라에서 직접 들어오기보다는 환승저항이 심하더라도 멕시코에서 들어오는 것이 낫다. OCC 타파출라 지점에서 광역버스를 타고 시우다드 이달고에서 멕시코에서 국경을 넘고 나면, 인력거를 통해 테쿤 우만 종합버스터미널까지 가서 에서 코아테페케(Coatepeque)로 이동한 뒤 케찰테낭고로 가는 버스로 환승하는 것이 낫다. 과테말라시티의 치안이 매우 불안한데 케찰테낭고 인근지역의 치안은 비교적 안정적이기 때문이다.


[1] 2022년, 과테말라 국가통계청(INE) 추계(2018)[2] 나머지 2개는 과테말라시티를 종주도시로 하는 과테말라 대도시권(Área Metropolitana de Guatemala), 중부 코반을 중심으로 하는 라스베라파세스 연담도시권(Conurbación Metropolitana de las Verapaces)이다. 여기서 라스베라파세스는 특정 지역명이 아니라 알타베라파스 주(Departamento de Alta Verapaz)와 바하베라파스 주(Departamento de Baja Verapaz)를 한데 묶어 부르는 말이다.[3] 도시 인구와 도시권 인구 자체는 코반이 많지만, 코반은 면적이 넓어서 그런 것이고 사실상 케찰테낭고가 제2의 도시로 취급된다.[4] 오늘날 과테말라의 국조(國鳥)로 케찰이 지정된 것은 테쿤 우만과 관련이 있다. 전설에 따르면 스페인인에 살해되어 피로 물든 테쿤 우만의 가슴에 케찰 한마리가 앉았다가 다시 날아갔는데 원래 흰색이었던 케찰의 배가 그때부터 붉게 물들었다고 한다.[5] 중앙아메리카 지역이 환태평양 조산대가 그대로 관통하는 지질학적 특성상 지진이나 화산활동이 워낙 잦기 때문에 이렇게 지진 한번에 도시의 풍경이 싹 바뀌는 것은 빈번하게 일어난다. 당장 과테말라시티마나과도 지진으로 풍경이 여러번 변했다.[6] 케찰테낭고와 과테말라시티 사이에 있는 큰 호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