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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부/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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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전반적인 평가
2.1. 이승만, 박정희, 노태우와의 비교
2.1.1. 이승만2.1.2. 박정희2.1.3. 노태우2.1.4. 총평
3. 긍정적 평가4. 부정적 평가5. 둘러보기

1. 개요

파일:wjse.jpg
대한민국 제11·12대 대통령 전두환전두환 정부에 대한 평가를 다룬 문서.

2. 전반적인 평가

전두환은 반역자다. 선거를 치르지 않고 대통령에 올랐다는 건 용납할 수 없다.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은 대통령도 아니며, 그 비극을 국민들이 기억해야 한다. 세상에 인간으로서 전쟁을 하는 것도 아니고, 자국 국민을 그렇게 수백 명을 죽일 수 있나. 우리 역사에 길이길이 크게 기록돼야 한다.
김영삼[1][2]

전두환 개인을 넘어 전두환 정부는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최악의 평가를 받는다. 가장 큰 이유는, 전두환이 7년 6개월간의 대통령 집권 기간 동안 벌인 행적들의 후유증은 퇴임 후 40년 가까이 지난 2020년대 현재에도 대한민국 사회 곳곳에 상처와 고질병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특히 인터넷 상의 일부 네티즌들을 제외하면, 온도 차이는 있겠지만 성향을 불문하고 거의 모든 대한민국 국민으로부터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심지어 극우 성향인 뉴라이트 인사들조차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대놓고 전두환을 '위대한 지도자'라는 식으로 미화하는 것은 피하고 있다. 당연히 주류 보수 세력에게도 전두환에 대한 인식은 매우 나쁘다. 1990년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민자당계 보수정당(현 국민의힘) 내에서 온건 보수의 뿌리인 김영삼계와는 완전히 상극이며, 친박으로 대표되는 강경 보수 계파도 박정희의 계승을 내세우지 전두환은 언급을 피하는 모습을 보인다. 박정희-박근혜 부녀를 지지하는 노년층의 전두환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는 "박정희가 차린 밥상에 숟가락만 얹었다"이며, 그 중 일부는 전두환이 박정희의 비호를 받고 성장한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부정하면서까지 박정희와 전두환의 연결고리를 끊어내려 한다.

전두환이 극우 세력을 제외한 거의 모든 국민에게 부정적인 평가만 받는 이유는 크게 보면 일단 최소한의 명분도 없는[3] 두 차례쿠데타를 일으키고, 유권자들에 의해 제대로 된 선거[4]로 뽑힌 경력이 없지만 민주 국가의 수장인 대통령을 참칭했으며, 무엇보다 집권 과정에서 독재에 저항하는 자국민에 대한 대규모의 학살을 자행했기 때문이다. 국민을 상대로 3.15 부정선거라는 사기를 치고 6.25 전쟁과 정권 말기 3.15 의거 당시 김주열 열사가 세상을 뜬 일로 인해 까이는 이승만이나 독재자라는 평가를 받는 박정희도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되었고,[5] 적어도 상당 부분의 임기 동안은 겉보기로라도 민주주의를 내세우기는 했다는 것을 감안하면[6] 전두환은[7] 정통성과 정당성이 모두 결여된 대한민국 헌정 사상 가장 반민주적인 대통령이었으며 이로 인해 한국에서 간선제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망쳐버린 인물이다.

한국의 역사 교과서에도 전두환 정부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절대로 따르지 말아야 할 반면교사이자 역사적 실패작으로 가르치고 있다.[8] 심지어 2010년대부터 창궐하기 시작한 일베저장소디시인사이드의 몇몇 극우 성향 갤러리의 유저들조차 전두환에 대한 진지한 찬양은 하지 않는다. 이들이 전두환을 찬양하는 것은 단순히 호남 지방에 대한 맹목적인 혐오에서 비롯되었거나,[9] 반사회적 성향을 가진 이들이 현실에서 하지 못할 말을 인터넷 상에서 내뱉음으로써 나름의 재미를 느끼려는 목적이 크다.

물론 김재익 경제수석을 중용하여 박정희 정부 시절부터 다져진 경제 기반과 3저 호황을 토대로 경제 최전성기를 달렸으며, 1988 서울 올림픽 유치에 성공하고 유신 시기의 과도한 중앙집권적 체제와 통금 시간 해제나 두발, 교복 자율화 같은 극도로 보수화된 검열 정책을 일부 완화하는[10] 등 공이 어느정도 있지만, 1980년대에 다른 친서방 독재 국가들은 대부분 민주화되거나 점진적으로 통제가 완화되었을 시기임에도 불구하고[11] 시계를 거꾸로 되돌려 제4공화국과 같이 폭압적인 독재 정권을 유지했으며,[12] 경제 성장의 성과도 박정희 정부가 쌓아놓은 토대와 3저 호황이라는 요인이 컸고[13] 검열 정책의 완화도 우민화 정책의 일원이라서 의도가 불순했다고 비판을 받고 있다. 애초에 업적을 남긴 폭군이나 독재자들도 과오가 너무 크면 그 업적이 무용지물이 되는 경우는 언급하기도 버거울 정도로 흔하다.[14] 특히 저 수준의 독재를 한국이 중진국 지위를 확립한 후에 저질렀다는 것과[15] 한국이 선진국[16]에 진입하고도 한참이나 더 지난 뒤에야 편히 죽었다는 것[17] 역시 전두환에 대한 한국인들의 분노를 더욱 들끓게 만들었다.

더군다나 박정희의 사례처럼 경제 호황기의 대통령은 보통 XX하면 어떠냐 경제만 살리면 그만이지라는 말처럼 아무리 욕을 먹어도 지지율이 상승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대중들에게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경우가 많은 것까지 감안하면 한국 역사상 최고 호황기에 집권했는데도 인기는커녕 거의 모든 국민들에게 기록말살형 수준의 지탄만 받고 있다는 것은 정말 경이로운 수준이다.[18][19]

이렇기 때문에 전두환은 90세로 장수했지만 죽을 때까지 단 한 번도 편하게 밖을 돌아다니지 못했다. 대통령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어딜 가든 경호원을 동원해야 했으며, 숨어 살았다는 말이 적절할 정도로 전두환의 저택은 늘 경비가 삼엄했다. 재임 기간 동안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남은 여생을 골프를 치고 다니며 호화스럽게 살았지만, 한평생 국민들의 증오를 한 몸에 받은데다가 여러 미디어에서 자신의 악행을 낱낱이 고발하는 영화나 다큐멘터리 등이 나오는 상황에 과연 전두환이 진정으로 행복하게 살았을지는 의문이 든다. 전두환은 죽기 전 전방 고지에 묻히고 싶다고 말했으나, 2021년에 사망한 이후에도 아직 유해를 묻을 장지를 구하지 못해[20] 2024년 기준 아직까지 유해가 생전 자택에 보관 중이라는 것만 해도 전두환이 얼마나 국민들의 증오를 받고 있는지 알 수 있다.[21]

심지어 전두환 시대를 농담삼아 일제강점기 시즌3라고 디스하는 사람들도 소수나마 있는데, 박정희 유신 체제 시기와 마찬가지로 전두환 정부 당시 벌어졌던 인권 탄압과 역대 대통령 중 가장 잔학한 학살 행위[22]를 감안하면 마냥 농담으로 치부하기도 어렵다. 사실 전두환의 행각을 보면 과장 하나 안 보태고 아시아의 장 베델 보카사라고 불려도 할 말이 없을 수준이다.[23]

호칭 역시 대부분의 언론들은 전 대통령을 빼고 전두환 씨라고 부른다. 전직 대통령 예우를 박탈당한 이명박박근혜도 언론에서는 대부분 전 대통령이라고 부르고 있고, 함께 재판을 받았던 노태우 역시 생전에도 지금도 최소한 '씨'로만 불리진 않고 '전 대통령'도 혼용되고 있다. 사실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 박탈이 전 대통령이라는 호칭까지 금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언론에서 전 대통령이라고 호칭하지 않는 것은 결국 민주주의 체제의 한국 헌정사에 완전히 반대되는 인물이기에 그를 대통령으로 암묵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신호라고 볼 수 있다.[24]

2.1. 이승만, 박정희, 노태우와의 비교

대한민국 임시정부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대통령임에도 불구하고 내치 실정으로 인해 4.19 혁명으로 쫓겨났기에 국부로서 평가받지 못하는 이승만 정부나, 정보 기관을 통해 이승만 정부보다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고 군사 독재를 지속한 박정희 정부 모두 독재 정부로 평가받으나 전두환 정부에 비해서는 공 또한 부각되는 경우가 많다.[25]

이승만은 전두환을 넘는 학살, 박정희는 전두환을 넘는 억압적 통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둘은 과가 있는 만큼 분명히 공도 인정되며, 보수 세력에서만큼은 확실한 지지를 받는다. 사실 전두환 역시 인사 능력이 좋은 편인 등 업적이 없는 것은 아니나 국가의 기틀을 잡은 이 둘보다는 확실히 미약하며, 만약 전두환이 이승만의 한미상호방위조약, 농지개혁, 평화선 선언이나 박정희의 경제 성장, 노태우북방외교, 남북기본합의서, 범죄와의 전쟁 같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한 커다란 업적이 있었다면 지금보다 평가가 훨씬 좋았겠지만[26] 과를 상쇄할 만큼 큰 공은 없기에 자신이 세운 공들도 모조리 존재를 부정당하는 것이다.

2.1.1. 이승만

이승만은 독재 정치와 여러 인사 실패,[27] 부정부패와 부정선거,[28] 우상화, 악질 친일반민족행위자 총애[29], 정치깡패와 극단주의 세력의 활동, 언론 탄압, 반공을 명분으로 자행한 학살로 인해 내치에 대한 평가는 좋지 않지만,[30] 한국 독립을 위해 힘쓴 독립운동가고, 북한과 적대적인 스탠스를 유지함으로써 민주주의 진영에 대한민국을 알박기하고 농지개혁에 성공했으며[31]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한미동맹을 굳건히 하고 평화선으로 독도를 일본으로부터 지켜내는 등 외교적 치적은 있다는 점에서 옹호하는 여론도 있다. 또한 경제와 사회적 내치는 최악이었지만 당시는 6.25 전쟁으로 인해 모든 것이 박살났던 시대였으며, 교육 과정에 집중 투자하여 전문 인재를 양성하여 추후 국가 발전에 기여했다.

학살로 따지자면 이승만은 자신의 정권 유지를 위한 민간인 학살이라는 측면에서 규모와 잔혹성 모두 광주 학살이 애들 장난으로 보일 정도였는데,[32]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반공권 독재자 중에서는 잔혹성, 규모 모두 스페인프란시스코 프랑코, 인도네시아수하르토 외에는 적수가 전혀 없는 수준이다. 다만 전두환의 학살이 이승만의 학살보다 임팩트가 큰 이유는 이승만의 학살은 갓 독립한 최빈국에서 조선인민유격대남조선로동당 같은 반군 토벌을 명목으로 하거나 전시에 벌어졌던 것이지만, 전두환의 학살은 중진국으로 자리잡은 국가에서 전쟁은 커녕 나라에 반군도 전무했던 평화 상태에서 일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승만 집권기의 한국은 오늘날로 치면 부룬디나 소말리아 같은 아프리카 최빈국 수준이었으나, 광주 학살 당시 한국은 하위 중소득국(Lower-middle income country)으로서 엄연한 중진국이었기에[33] 학살의 잔혹성이 더욱 부각되었다.[34] 이런 면에서는 아르헨티나호르헤 비델라가 학살 규모 면에서는 이승만, 수하르토보다 작긴 하나 세계 평균 이상으로 잘 살던 중진국에서 학정을 저지른 것이기에 악행이 더욱 부각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셈이다.[35]

2.1.2. 박정희

박정희는 5.16 군사정변으로 집권하고 친위 쿠데타10월 유신까지 저지른 군정독재자에, 김영삼 질산 테러 사건, 김대중 납치 사건으로 나타나는 가혹한 정적 탄압, 간첩 조작, 권위주의 정책을 일삼은 것은 본질적으로는 전두환과 비슷하다. 특히 유신 시대에 한해서는 중앙 집권적 체제와 사회적 억압은 오히려 전두환 정부보다 훨씬 심했으며 집권 말기에는 미국과의 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았다.

그러나 박정희는 1960년대까지는 국민들의 민심도 읽으며 어느 정도 초심을 유지하고 있었고, 국가 인프라 구축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여 경제 성장의 토대를 마련해 대한민국을 일개 최빈국에서 신흥 공업 국가로 성장시키며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기틀을 만드는 등 공이 확고하기에[36] 절대 다수의 국민들로부터 부정적인 평가만 받는 전두환과 정반대로 김대중과 함께 정치 성향에 따라 평가가 가장 심하게 갈린다. 단적으로 말해서 박정희는 반대 성향인 민주당 지지자들 중에서도 공과를 확실히 하며 공을 인정하는 경우가 적지 않으나, 전두환은 똑같은 보수 성향의 국민의힘 지지자들 중에서도 공을 우세하게 보는 사람이 적다. 그리고 최소한 1972년 10월 유신 전까지는 어느 정도 민주적인 틀은 유지했으며,[37] 일단 3번이나 정당한 선거에 의해 당선된 대통령이라는 점에서 이를 짐작할 수 있다.[38]

물론 박정희도 자신의 권력에 위협이 될 만한 사람들을 숙청하고 반독재 민주화 운동가들과 문화계, 예술계 인사들을 중앙정보부를 이용해 탄압한 것은 전두환과 유사했지만, 적어도 전두환처럼 아예 대놓고 자국민을 무자비하게 대량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르지는 않았다.[39] 게다가 박정희는 5.16 군사정변 당시 장면 총리를 비롯한 민주당 내 신파와 윤보선 대통령을 비롯한 민주당 내 구파의 정치 분쟁에 환멸을 느낀 시민들로부터 환영받기도 했으며, 둘째 딸 박근혜가 아버지 박정희의 부정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보수정당의 대표를 거쳐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에는 그 경제적 공에 의한 박정희의 후광이 있었다.[40] 만약 박정희가 권력욕을 버리고 3선 개헌10월 유신이라는 잘못된 선택으로 흑화하지 않은 뒤 권력을 순순히 포기했다면[41] 독재자라는 이미지가 희석/미화됨으로써 그의 과를 고려하더라도 평가가 지금과 상당 부분 달라졌을 것이고,[42] 궁정동 안가에서 김재규의 총탄에 맞아 암살당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43]

다만 박정희는 살아서 퇴임한 것이 아니라 임기 중에 암살당했기 때문에 만약 살아서 퇴임했다면 전두환처럼 유죄 판결을 받고 현충원에 안장되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 5.18처럼 대놓고 죽인 것이 아니어서 그렇지 중앙정보부, 인혁당 사건 같은 사법살인이 박정희 잘못이었다. 단순히 통치 기간 도중에 벌어진 일의 경중에 대해서 따지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면, 군부 쿠데타로 정권을 획득해 독재 정치를 펼친 선례를 만들고, 하나회를 묵인함으로서 간접적으로 전두환 정부의 탄생에 기여했다는 점 때문에, 반란 수괴지만 정반대로 군부 독재의 연결고리를 끊어낸(혹은 그 상징인) 노태우보다는 박정희가 전두환과 자주 묶여서 언급되는 편이다.

2.1.3. 노태우

전두환과 함께 12.12 군사반란을 주도한 하나회의 2인자이면서 전두환의 오랜 벗이자 후임자였던 노태우는 쿠데타로 실권을 장악하고, 야당 정치인들에게 잔혹한 탄압을 가하며 간접 선거로 대통령이 된 절친 전두환과는 정반대로 야권 대선주자들인 삼김정정당당하게 대결하여 국민의 직접선거로 당선되었기 때문에 민주적인 정통성과 정당성이 확실히 보장된 대통령이다.[44] 더군다나 회고록을 통해 12.12 군사반란을 정당화하거나, 1995년에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망언[45]을 남겼지만 그 이후로는 뒤늦게나마 자신의 죄를 후회했고 죽기 전에나마 장남 노재헌을 통해 5.18 피해자들에게 사죄의 뜻을 지속적으로 전해왔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논란이 있었지만 장례도 국가장으로 치러지는 등 전두환보다는 대중적인 인식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양호하다.

덤으로 대통령 노태우는 많은 업적이 있지만 그런 업적에도 불구하고 노태우의 공들이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던 이유는 12.12 군사반란의 주역이었다는 점과 전두환의 절친한 친구였다는 점에 기인한다. 이 때문에 노태우 집권 당시 여전히 군사 정권의 영향력이 남아있었지만, 민주화를 향한 과도기적 시기[46]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전두환보다 그래도 평가는 낫다고 볼 수 있다.[47]

2.1.4. 총평

전두환 정부는 최소한의 명분도 없는 두 차례의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고 서울의 봄5.18 민주화운동 등의 진압 과정 중에 시민 학살을 저질렀으며, 임기 초기 삼청교육대 등 인권 유린과 제4공화국 시절인 1975년부터 운영되던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 은폐[48],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49], 부림사건 등 반독재 인사들에 대한 간첩 조작과 고문을 자행했고, 집권 상당기간을 사실상 일당제로 일관하며 사실상 형식적 민주주의까지 뿌리뽑았다. 1987년에는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여 직선제 개헌을 끝까지 거부했고,[50] 퇴임 후에도 자신의 끄나풀들을 노태우 정부에 박아놓고 막후 권력을 시도했으며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으며 과거 비자금에 대한 추징금 납부 거부, 아들이나 친동생[51]탈세 문제, 손녀 전수현의 한국 비하 발언 등으로 대다수 국민들에게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래 최악의 정부로 인식되고 있다. 당장 동시대 군사 내란의 주범이자 하나회의 일원으로 같이 법원에 섰던 친구이자 후임자였던 노태우는 12.12 군사반란과 5.18 민주화운동 당시 신군부의 유혈 진압 개입 등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했으며, 막대한 추징금을 완납한 것과도 무척 대비되는 부분이다. 정리하자면 쿠데타랑 정적 탄압은 박정희도 했던 거라 논외로 치더라도 전시도 아닌 평시에 대규모로 민간인 학살 + 헌정 사상 유일무이한 일당독재 + 업적이 있더라도 과를 상쇄할 정도의 큰 업적이 있는 것도 아님 + 전무한 정통성을 확보해야 한다며 은인까지 격하한 배은망덕함[52][53] + 마지막까지 뻔뻔함으로 일관하며 천수를 누리다 떠남이 연이어 겹쳤다.

당연히 전술한 것처럼 공식 석상이나 사석에서 전두환을 공개적으로 옹호하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철저하게 금기시되며, 만약 진짜로 전두환을 공식 석상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했다간 십자포화를 각오해야 한다.[54] 이 때문에 극우 인사들조차 인터넷에서나 전두환을 미화하지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전두환을 미화하는 발언을 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전두환의 장례식에 조문하러 온 사람들도 5공화국 내란 주범이었던 하나회의 살아남은 주축 세력, 주류에서 밀려나거나 은퇴해서 속된 말로 퇴물인 정치인들 정도였고, 강성 극우파인 조원진우리공화당 외의 정당은 물론이고 주요 언론들도도 공식적으로 추모 의사나 성명을 밝히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는 헌정사 최초로 전직 대통령 사망에 대통령의 조화와 조의 표현을 하지 않은 결정을 내렸다.[55] 이는 당시 야당이었던 국민의힘도 마찬가지여서 단지 어찌되었던 국가의 대통령이었으니 조문 의사는 각자 개인의 역량에 맡긴다 정도로 표현한 정도였다. 이는 여야 당 지도부가 조문을 왔던데다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국가장까지 치러준 친구였던 노태우의 장례식과도 비교되는 부분이다.[56][57]

거기다가 어떠한 사과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의 잔혹한 악행들을 정당화를 넘어 자랑스럽게 여기는 망언들을 이어나가며 2020년대까지도 아흔 가까이 건강을 누려오다 얼마 앓지도 않은 채 악행에 비하면 너무 과분한 수준의 죽음을 맞았던 데다가[58][59], 생전에 추징금도 완납하지 않았고[60] 회고록 등지에서 5.18 민주화운동 과정에서의 민간인 학살과 제5공화국의 국가적 범죄에 대해 반성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역사 왜곡을 시도했다는 점이 드러나며 부정적인 재조명이 멈출 틀도 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사후 2년 뒤인 2023년에는 손자 전우원의 폭로로 전두환 일가의 비자금 은폐 정황과 자손들에게 정치적 세뇌 교육을 시킨 것[61] 등이 적나라하게 드러났고, 전두환과 전재용-박상아 부부의 아동 학대 의혹이 제기된 데다[62] 동년에 전우원이 국립 5.18 민주묘지에 가서 5.18 희생자들에게 사죄하며 할아버지 전두환의 악행에 참회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 국민들에게 동정 여론을 사며 한국 국민들에게 전두환에 대한 평가는 거의 아돌프 히틀러, 폴 포트, 마시아스 응게마와 동급 수준으로 부정적으로 추락하고 있다.

사망한 지 2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그를 비판하는 영화가 개봉하고, 영화가 크게 흥행함과 동시에 여전히 전두환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나오는 등 사실상 그를 지지하던 민정계가 전부 노환으로 세상을 떠나거나 어느 정당에서도 힘을 잃은 현 시점의 대한민국 내에서는 모든 세력에게 까이는, 심하게 말하자면 북한의 김씨 일가와 다를 바 없는 독재자 취급을 받고 있다.[63] 더욱이 국민의힘은 박정희 세력과 김영삼계, 일부 김대중계와 친이, 범민주계 이탈자 등등을 전부 포섭하려 하지만 전두환은 확실하게 선을 긋고 전두환의 흔적을 필사적으로 지우려 하고 있으며, 친 전두환 세력은 정계에 입문시킬 생각조차 않고 오히려 이들의 정계 입문을 필사적으로 막고 있을 정도다.

결론적으로 전두환은 민주주의를 일찍 이룩할 수 있었던 한국의 현대사에 비극을 초래한 최악의 독재자라고 할 수 있다. 10.26 사건 이후 민주화의 희망이 보였던 때에[64] 아무런 명분 없는 쿠데타를 일으켜 헌정 질서를 파괴했다. 또한 5.18 민주화운동을 무력 진압하는 과정에서 유아, 임산부 등 신분을 가리지 않고 자국민 수백 명을 학살했으며[65],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되어 유권자의 직접적인 지지를 전혀 받지 않은 대통령이 되었다. 즉 엄밀히 말해 대통령직을 참칭한 것이다. 자신의 7년 임기가 끝나는 1987년에도 호헌 철폐 조치를 통해 노태우를 꼭두각시로 앉히고 상왕 노릇을 통해 계속 권력을 행사하려 했고, 무고한 학생과 시민들을 고문하고 시위를 진압해 무력화시키려고 했다. 권력이 끝나는 순간까지도 독재의 달콤한 맛을 결코 놓으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6월 항쟁을 통해 직선제 요구를 받아들이고, 문민정부가 출범한 뒤 그는 사법처리되었다. 그러나 2년 만에 특별사면으로 풀려나왔고, 이후 사망할 때까지 집행받은 추징금을 완납하지 않은 채 매우 풍족한 여생을 보내다 사망했다. 자신이 저지른 쿠데타와 민간인 학살에 대해 죽음을 앞둔 그 순간까지도 반성하지 않은 건 덤. 이러한 그의 행보 때문에 대한민국 사회는 전두환을 정당한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일부 극우층을 제외한 대부분의 유권자들에게 공정한 평가를 받을 가치조차 상실한 독재자로 낙인찍혀있다.

게다가 전두환은 사망하고 3년이 지난 2024년 현재까지 자신이 묻힐 묘지조차 구하지 못한 상태다. 당장 아르헨티나의 군사독재자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도 고향 사람들의 반대로 고향에 안장되지는 못했어도 비델라가 사망한 당해에 어찌저찌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외곽의 공동묘지에 안장될 수 있었고, 심지어 킬링필드로 악명 높은 캄보디아폴 포트조차도 고국에서의 무덤 자리는 구할 수 있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대한민국 국민들이 전두환을 얼마나 증오하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3. 긍정적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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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부정적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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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영삼은 전두환뿐만 아니라 이승만, 이명박을 제외한 모든 대통령들을 부정적으로 평가했으며 그중에서도 전두환을 가장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전두환은 단순히 정치적 정적이나 라이벌 수준이 아니라 절대악에 가까울 정도로 김영삼을 핍박했다. 실제로 당시 김영삼의 정치적 동료였던 김대중은 사형 선고를 받아 사실상 정치 생명이 문제가 아니라 목숨이 위태로울 지경이었으며, 김영삼은 목숨만 살려놓았지 실질적으로 정치적인 손발을 다 끊어놓은 상태였다. 그 무렵 김영삼이 김대중을 만나러 가기 위해 전두환 정부가 심어놓은 전경들을 밀어내려다 실패하고 일갈하는 장면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명장면 중 하나로 기억되어 있다. 영상 보기[2] 이와 대비되게 김영삼은 전두환의 일생의 동지였던 노태우를 전두환보다 훨씬 호의적으로 평가했다. 노태우는 그래도 직선제로 당선된 대통령이었고 대통령 시기에도 김영삼과 꽤 가깝게 지냈었다.[3] 5.16 군사정변은 사회 혼란 수습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그 당시에는 국민들의 환호를 받았는데, 12.12 군사반란은 그조차 전무했다. 이 때문에 5.16 군사정변은 문민정부 이전까지만 해도 '5.16 군사혁명'이라고 불렸지만 12.12 군사반란은 전두환 정부 시절에도 '12.12 군사혁명'이라 불리기는커녕 '12.12 사태'라고만 언급되었다.[4] 선거인단에 의한 간선제 방식이었다.[5] 이승만은 4번의 당선 중 처음 1번은 국민이 뽑은 국회의원에 의한 정당한 간선제, 다음 2번은 직선제로 정당하게 뽑혔고 마지막은 부정이 많았던 직선제여서 취소가 됐다. 박정희도 5번의 당선 중 앞의 3번은 직선제로 뽑혔으며, 나머지 2번은 비민주적인 간선제를 이용해서 뽑혔다. 반면 전두환은 2번 당선되었는데 둘 다 비민주적인 간선제였다.[6] 당장 제1공화국제3공화국비자유민주주의 체제로 분류하는 경우도 있다.[7] 1985년 극초반까지 대한민국은 민주정의당관제야당만 허용된 사실상 일당제 국가였다.[8] 청와대에 있는 역대 대통령 초상화청남대에 설치되어있는 전직 대통령 동상 등 전두환에 대한 미술품들을 철거해야 한다는 여론이 압도적으로 높고, 실제로 청남대에서는 전두환 동상 철거를 논의하기도" 했었지만 최종적으로 철거는 안하고 대신 노태우와 함께 '내란 혐의로 전직 대통령 예우를 박탈당했다'는 문구가 붙었다.[9] 이러한 점에서 이승만의 친일파 등용과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10] 그러나 독재 체제를 완화했지만 간첩 조작 사건과 정치범 수감자들은 오히려 유신 독재 시절보다 더 많았을뿐더러 국제그룹 해체 사건(부산의 경제는 이로 인해 점점 쇠퇴하기 시작했으니 부산 시민들 입장에서는 부산의 경제를 무너뜨린 주범인 셈이다.), 수지 김 간첩 조작 사건 등 유신 시기의 박정희 정부도 기겁할 기괴한 사건들을 일으켰다.[11] 그 일례로 아르헨티나의 군사 독재는 전두환의 집권 초기인 1983년에 종결되었고, 대만에도 민주화의 서광이 조금씩 비쳤으며, 칠레아우구스토 피노체트마저 집권 초기에 비해서는 통제를 어느 정도 완화했다. 다만 공산권, 친공산권 국가들은 저때까지도 전부 독재 국가였는데, 물론 이들 중에서 소련과 척을 진 경우도 있었지만 그런 국가들도 전원 독재 국가였다. 제3세계의 리더격이던 유고슬라비아도 조금 덜 독재했을 뿐이다. 한편 독재 구도는 바뀌지 않았으나 캄보디아폴 포트는 그보다 정도가 훨씬 덜한 베트남의 군사적 개입으로 실각했다.[12] 박정희 정부 시기가 전 세계적으로 독재자들의 춘추전국시대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잔혹한 독재자들이 즐비했던 점과는 대조적이다. 게다가 4공화국이 폭압적인 독재 정권이라고는 하지만 동시대의 다른 독재자들에 비하면 온건한 축에 들어간다.[13]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박정희가 뿌린 씨앗이 자라고 자란 끝에 전두환이 집권한 시기에 완전히 익은 열매를 맺은 격이다. 실제로 대통령과 밥솥에서도 "박정희가 지은 밥을 전두환이 부하들과 함께 맛있게 먹어치웠다"는 내용이 있다.[14] 일례로 프란시스코 프랑코수하르토의 경우 경제 개발 면에서는 많은 공적을 남겼으나, 악행이 너무 커 일반적으로 반공권 최악의 학살자라는 점만 부각되고 있다. '과오가 엄청나게 크지만 업적도 엄청나게 커서' 과오가 업적을 완전히 가리지 못하는 가장 유명한 사례인 이오시프 스탈린의 경우에도, 사망 직후에는 후임인 니키타 흐루쇼프에 의해 처참하게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모든 면에서 부관참시를 당했으며 이후 소련이 망하는 그 순간까지 재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의 업적이 재조명되면서 어느 정도 재평가를 받기 시작한 것은 아무리 빠르게 잡아도 냉전이 끝난 이후의 일이며, 심지어 어느 정도 재평가를 받은 지금도 '스탈린'하면 떠오르는 일반적인 이미지는 대숙청, 굴라그, 카틴 학살, 홀로도모르 같은 흉흉한 사건들이다.[15] 한국의 1인당 GDP는 1983년 세계 평균의 80%를 넘겼고, 1984년 90%를 넘기며 세계 평균급에 이르렀으며, 1987년 세계 평균을 넘겼다. 오늘날로 치면 튀르키예, 중국, 말레이시아와 비슷한 수준이라고 봐도 무방하다.[16] 한국은 이미 2002년, IMF 외환위기를 논외로 치면 1994년 선진국에 진입했다.[17] 전두환을 제외하면 고국이 선진국에 진입한 후에 죽은 자국민을 학살한(리콴유 같은 예외도 있으므로) 독재자는 그리스요르요스 파파도풀로스 밖에 없고, 더구나 파파도풀로스는 말년의 거의 전부를 감옥에서 지내다 옥사하며 죗값을 제대로 치렀고 죽은 것도 21세기 이전(1999년)이기에 전두환보다는 임팩트가 매우 옅을 수 밖에 없다.[18] 이것은 그만큼 당시 전두환 정부가 부정축재를 비롯해 고압적이고 파국적인 행태를 벌여왔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19] 실제로 경제 호황기에 집권하면서 인권 탄압을 자행한 세계의 독재자들 중 전두환은 국민들에게 가장 많은 욕을 먹는다.[20] 처음에는 캠핑장 부지로 쓰겠다고 해서 땅 주인이 허가했다가 전두환의 묘소로 사용할 것이라는 전두환 일가의 의도를 알고 나서는 땅 주인이 자신의 땅에 전두환의 유해가 묻히는 것을 극도로 반대했다고 한다.[21] 차라리 본인의 유언대로 하되 묘소는 만들지 않고 유골만 뿌리는 식으로 하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 동화경모공원에 묻힌 노태우처럼 민간 묘지에 안장되기엔 그의 이미지 때문에 어느 추모공원에서도 안 받아줄 것이고, 조상들과 친척들이 묻힌 합천 선산에 묻혔다간 다른 친척들의 반발은 말할 것도 없고 전두환은 물론 같이 묻힌 선조들의 묘도 전두환에게 분노한 이들에 의해 훼손될 수도 있다.[22] 5.18 민주화운동 당시 벌어졌던 학살, 삼청교육대 등. 형제복지원은 정부 차원에서 벌어진 것은 아니지만 주범을 두둔하며 형을 깎아준 것까지 감안하면 사실상 공범이라 봐도 무방하다.[23] 명분 없는 쿠데타로 집권 + 부정축재를 통해 사치를 부림 + 군대를 동원하며(자국민 학살에 보카사는 외국 군대, 전두환은 특전사까지 동원했다) 손수 발포를 명령해 자국민 수백 명을 학살 +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을 뻔했지만 얼마 안 가 사면됨 + 자유인으로서 여생을 보내다 악행에 비하면 매우 편안히 죽은 것이 겹친다.[24] 위에 언급된 김영삼 역시 전두환에 대해 대통령도 아니라는 식으로 말했고 실제로 정당한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가 생전 악평을 내렸던 박정희, 노태우, 김대중, 노무현, 박근혜 등도 악평의 수위와는 별개로 대통령이라는 직위 자체는 인정했다. 김대중과 노무현의 경우에는 '그래도 한때 동지였던 옛 정이 있으니 깔 때 까더라도 대통령 취급은 해줬다.'[25] 물론 어디까지나 공 또한 언급되는 것이 거의 암묵적으로 금지된 전두환과 달리 모든 정치 세력에서도 인정받을 만한 공도 같이 언급될 뿐이지, 6.25 전쟁 및 정권 말기의 이승만이나 제4공화국 시기(특히 긴급조치 9호가 떨어진 1975년 5월 13일부터 1979년에 벌어진 10.26 사태까지가 제일 극심했다고 볼 수 있다.)의 박정희 역시 전두환과 다를 바가 없는 독재자이기에 제6공화국의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공이 언급될 뿐 과도 분명히 언급되고 있다. 대통령으로써는 평가가 좋은 편인 노태우 역시 대통령으로서는 몰라도 정치 생애를 종합하면 하나회의 핵심 인물로서 12.12 군사반란의 책임이 있기에 공과를 구분하는 평가를 받는다.[26] 상술한 바와 같이 이오시프 스탈린도 전두환은 가볍게 능가하는 학정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소련을 양대 초강대국으로 만든 공도 엄청나기에 최소한 러시아 내에서는 옹호 여론이 더 많으며, 프란시스코 프랑코도 스페인 내에서는 한국에서의 박정희 이상으로 호불호가 심하게 갈린다.[27] 인사의 경우 오히려 역대 최상급인 전두환과 달리 이승만은 역대 최하급으로 평가받고 있다.[28] 대한민국 부통령 선거에서는 이기붕을 비롯한 이승만의 측근들이 저질렀기에 본인이 직접적으로 관여하지는 않았다.[29] 그나마 공무원, 법조인 같은 실무 부역자들과 군인들은 일제의 우민화 교육 때문에 문맹률이 78%에 달했던 당시 시대상 국가 유지 같은 현실적인 이유로 울며 겨자 먹기로 등용할 수밖에 없었다. 진짜 문제는 이승만이 권력에 눈이 먼 것과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믿음이 혼합되며 노덕술, 김창룡 같은 악질 친일파까지 등용, 총애하면서 자신의 지지층이자 반공 투사로 신분을 세탁한 악질 친일파에 대한 외부의 청산 노력에 대해 빨갱이 몰이를 했다는 것이다.[30] 일제강점기 미화로 논란을 빚은 뉴라이트가 앞장서서 이승만을 고평가하고 있는 것에 대한 반감도 이승만의 부정적 평가 상승에 일조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승만은 강경한 반공 성향까지 능가할 정도의 극단적인 혐일이었다. 전술한 것처럼 악질 친일파들을 총애한 것으로 인해 일부 반이승만 세력들에게 친일파라고 까이고 있지만, 영해를 침범한 일본 어선을 상대로 함포 사격을 하고 일본인 어부들을 4,000명 가까이 나포하면서 40명 이상의 일본인 어부들을 죽이거나 재일교포 강제 북송을 저지하려 테러 공작까지 시도할 정도로 역대 대통령 중에서 반일 성향이 극단적으로 심했다.[31] 이건 조봉암 농림부장관의 노력이 크게 작용했다.[32] 113만 명은 후에 유족회에 가족이 학살당했다고 신고한 사람의 수로, 중복도 포함된 데다가 정확히 누구에게 학살당했는지 구분하지 않았다.[33] 당시 한국은 오늘날로 치면 1인당 GDP 9,000달러대 국가와 비슷한 포지션이었다.[34] 당시의 한국 이상의 경제적 포지션 국가 중 이에 비견되는 잔혹성의 폭동적 시위 진압 사건이 일어난 경우는 1961년 파리 학살이 전부다. 1989년 루마니아 혁명에서도 어느 의미에서는 5.18 이상으로 잔혹한 학살이 벌어졌지만, 혁명 당시 루마니아는 세계 평균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후진국 신세였다.[35] 덤으로 비델라는 이승만, 수하르토와 달리 독립운동에 가담한 인물도 아니었으며, 최소한의 업적도 없이 오히려 아르헨티나 경제의 근간을 박살낸 주범이었다.[36] 특히 경제 성장 같은 경우는 민주당계 정치인들조차도 인정하는 수준이다. 박정희를 경제 관련으로 비판하더라도 경제 성장 과정에서의 문제점들을 위주로 비판하거나 경제 성장에 있어서는 근로자들의 공이 더 컸다고 평가하는 정도지 경제 성장의 성과 자체는 부인하지 않는다.[37] 오늘날로 치면 튀르키예, 우크라이나 전쟁 이전의 러시아와 유사한 비자유민주주의 체제인 셈이다. 헝가리싱가포르도 비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대표 주자로 인식되지만 당연히 제3공화국 시기 대한민국과 전술한 국가들보다는 훨씬 온건하다.[38] 5대, 6대, 7대 3번의 선거는 직선제 대선에서 승리했다. 물론 군인표는 전부 민주공화당에게 의무적으로 투표되다시피 하고, 경찰이 선거운동에 개입하는 등 21세기 관점에서 보면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존재했었다.[39] 부마민주항쟁 당시 시위대를 학살하려고 했다는 주장이 있지만, 이는 김재규 혼자만의 증언으로 교차 검증이 불가능하다.[40] 박정희의 딸 박근혜는 물론 박정희의 손윗조카인 박재홍, 박준홍, 처남인 육인수가 박정희의 이름으로 정치인이 된 것과 달리 전두환의 처자식들은 부정축재 등 법적인 논란이 있어서 정계에 입문한 적도, 입문을 시도한 적도 없다. 기껏해야 전두환의 처제와 결혼해 동서가 된 김상구와 전두환의 전 사위였던 윤상현이 전부고 김상구와 윤상현 역시 전두환의 인척임을 전면으로 내세우지 않고 국회의원이 되었다. 게다가 윤상현은 오래 전에 이혼해 남남인 지 오래라는 식으로 전두환 일가와의 연도 부정하고 있고, SNL 주간다에서 이 재혼을 가지고 희화성 질문을 하자 "전두환 전 대통령도 참 대단한 분이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의 아내와 아이들을 사랑한다."라며 한때 전두환의 사위였던 것에 대해 흑역사로 생각하며 쓴웃음을 지었을 정도였다.[41] 가령 유신을 저지르지 않고도 김종필 등을 7·8대 대통령으로 세워놓고 상왕으로서 권력을 유지하는 방법도 있었다.[42] 특히 박정희 개인이나 측근 비리, 정적 탄압, 사회 통제, 여성 편력은 10월 유신, 3선 개헌 이후에 상당수가 몰려있으며, 박정희의 업적들 역시 절대다수가 육영수 피습 이전에 몰려 있다.[43] 썰전의 패널이었던 이철희의 이야기에 따르면, 1980년대 초 대학가에서는 70년대 학번과 80년대 학번이 각각 박정희와 전두환 중 어느 쪽이 더 나쁜 놈이냐를 주제로 자주 논쟁을 벌였다고 한다. 이철희는 박정희는 최소한 자국민에게 총 들고 학살은 안 했다며 전두환은 비교도 못할 만큼 나쁜 사람이라고 평했다. 그리고 "저희 대학 다닐 때도 박정희 대통령 건드리는 애들은 별로 없었다. 박정희는 대부분 인정하는 분위기였지만 전두환은 절대 용서치 못할 존재..."라는 말도 남겼다.[44] 김옥숙이순자에게 이를 빌미삼아서 체육관 선거로 뽑힌 누구와는 다르게 소영이 아빠국민투표로 당선됐잖아요^^라는 말을 농담하듯이 간접적으로 하면서 돌려까 한 방 먹이고, 이순자도 뭐라고는 못하고 그냥 허허 웃으면서 넘겼다는 얘기가 있다.[45] 경북고등학교 동창회 모임에서 자신의 모교 친구와 후배들에게 중국 문화대혁명 당시 수천만이 희생된 걸 감안하면 1980년에 광주에서 일어난 신군부의 진압 행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말한 발언이 당시 동아일보의 시사주간지 <NEWS+(현 주간동아)>를 통해 보도되면서 이후 5.18 희생자 유족들과 자국민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46] 자신의 상관 박정희가 만들고 친구 전두환이 열심히 써먹은 교련은 노태우 본인이 군인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교련의 교과 내용도 군사 교육과 정훈 교육에서 실용 및 안전 교육, 통일 안보 교육으로 순화시켜 교련 폐지에 불을 당긴 것이 대표적인 예시 중 하나다. 교련이 선택 과목으로 격하된 것은 그보다 뒤의 일이지만, 군부 출신 대통령이 직접 교련을 순화시켰다는 것만으로도 장족의 발전이었다.[47] 대만의 장징궈~리덩후이와도 유사한 셈이다.[48] 사건이 진행 중일 당시에는 직접적으로 형제복지원 사건에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진상이 드러나자 주범 박인근을 두둔하며 형량을 깎아주는 등 사건을 은폐했다.[49] 한 마디로 진짜로 내란을 일으킨 내란수괴무고한 정치인이 자신을 비판한다는 이유만으로 내란음모범이라는 누명을 씌운 것이다.[50] 후에 이 조치는 6월 항쟁을 점화하는 역할을 한다.[51] 후자는 새마을운동의 이미지를 실추시킨 주범이다.[52] 사실상 이걸로 보수층에서의 지지도 잃은 것과 마찬가지다.[53] 실제로 전두환의 계엄사는 1980년 "시대를 대표하는 사회악·정치 악이라 할 수 있는 권력형 부정축재자 10명을 수사당국에 연행하여 그 동안 집중적인 수사를 전개하여 왔다"고 밝히며 그 명단을 공개했는데, 그 권력형 부정축재자들은 모두 박정희가 생전에 아끼던 측근들이었다. 그리고 전두환 정부는 박정희 시대를 부정부패와 비리, 독재의 시대로 규정하길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헌법 개정 과정에선 전문에 적혀 있던 '5.16 혁명정신'을 빼버렸고, 미국 망명 당시 ABC 방송을 통해 한국의 정치범 고문을 폭로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주장에 봉두완(민주정의당 대변인을 역임한 초선의원)은 "무슨 근거로 저런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3년 전 박정희 독재정권 시절 얘기를 하는 것 같은데요."라고 말했다. #[54] 그 일례로 윤석열 대통령이 후보 경선 시절 공개적인 자리에서 전두환을 옹호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가 여권에서는 물론 같은 야권 진영인 홍준표, 원희룡에게 마저 십자포화를 당할 정도였다. 또한 2007년 초에는 당시 한나라당의 대권주자였던 원희룡이 새해를 맞아 전두환에게 세배를 하러 갔다가 언론의 집중 포화를 맞은 적이 있다. 이 사건은 당내에서 개혁보수 이미지를 띄던 원희룡의 정치 경력에 심각한 타격을 입혀, 현재까지도 이 사건을 이유로 원희룡에게 부정적인 평을 내리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55] 문재인은 1980년 5.17 내란 당시 신군부에 의해 체포되어 수감 생활을 했던 전력이 있다. 1980년대에는 노무현과 함께 부산에서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며 전두환 정부와 맞서 싸웠던 인물이다.[56] 물론 이조차도 "군사반란으로 인한 내란죄로 대법원에서 유죄를 확정받아 전직 대통령 예우가 박탈당한 사람한테 국가장을 왜 베푸느냐?"라는 논란은 있었다. 만약 전두환이 없었더라면 상대적으로 노태우에 대한 온화한 시선 역시 적어졌을 것이다. 또한 2020년까지 건강하게 대외 활동을 하면서 여러 발언들로 온 국민을 상대로 어그로를 끈 전두환과 달리 노태우는 2000년대 중반부터 건강이 나빠져 대외 활동을 거의 하지 못해 언론과의 노출이 줄어들었다는 것도 한 몫 했다.[57] 여기에 더해 장례식에 조문객이 1명도 안 왔다는 말도 있는데 일국의 대통령을 했던 유명인사이니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5공 시절 호의호식했던 전두환의 측근들이나 하나회 멤버들은 전부 조문하러 왔다. 그 외에는 국민의힘 소속 일부 소수 정치인들이 개인 자격으로 오거나 극우 성향의 일반 시민들이나 어그로를 끌기 위한 방문한 BJ도 있었다. 소문에는 일베 캐릭터 탈을 쓰고 나타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조문객들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전두환 정권 시절을 미화하는 발언을 서슴치 않았고, 심지어 5.18 북한 개입설까지 꺼내는 조문객들도 있었다. 기자가 여기에 반문을 하자 옆에서 지켜보던 일반인 조문객이 기자에게 호통을 치며 “빨갱이를 조심하라” 고 소란을 피우는 등 3일장 내내 분위기가 말이 아니었다. 이렇듯 아무도 안 온 건 아니지만 대통령의 장례식이라기엔 영 격이 떨어지는 혼란스러운 현장이었다. 역사의 큰 혼란만 몰고 다녔던 전두환다운 장례식이었다.[58] 참고로 한국은 자국민을 학살한 독재자가 21세기까지 살아있던 유일무이한 선진국이다. 당장 대만장제스스페인프란시스코 프랑코는 거의 반 세기 전인 1975년에 사망했으며, 그리스요르요스 파파도풀로스도 전두환이 사망하기 20년도 더 전인 1999년에 사망했었다.[59] 물론 현재까지 독재체제를 유지하는 싱가포르, 한국과 똑같은 시기에 독재정권이 종식된 대만, 90년대에 공산주의 체제에서 벗어난 동유럽 국가들도 있지만, 싱가포르는 단 한 명의 정적도 죽이지 않는 매우 온건한 독재체제를 유지 중이며, 나머지 국가들의 민주화 전 마지막 독재자들 역시 자국민 학살은 전혀 저지르지 않았다.[60] 세간의 오해와 달리 아예 한 푼도 안 낸 것은 아니나, 약 2,200억 원 중 900억 원 가량이 미납 상태며 납부한 추징금 상당수가 자의가 아닌 2013년에 타의로 인해 반강제로 납부되어 부정적 평가가 거두어질 일도 없어졌다. 노태우, 이명박, 박근혜는 추징금을 자발적으로 완납해 더 비교되고 있다.[61] 5.18은 폭동이고 우리(전두환 일가)는 피해자다, 전두환은 민주주의를 수호한 인물이다 등의 내용이었다고 한다.[62] 전두환이 전우원에게 부당하게 폭력을 행사하고, 전재용의 아동 방임과 불륜, 계모 박상아의 전우원에 대한 폭언 등이 거론되었다.[63] 물론 실제 악행은 북한 쪽이 더 심하나, 이는 그만큼 대한민국 국민들이 전두환에게 큰 분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루마니아엘레나 차우셰스쿠, 방글라데시에서의 셰이크 하시나와도 비슷한 셈. 애초에 자신의 부당한 집권에 정당하게 반대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국민 수백 명을 도륙낸 전적이 있으니 한국 국민들에게 전두환이 김씨 일가와 동렬로 취급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64] 만약 12.12 군사반란 없이 1980년에 민주주의 체제가 들어섰다면 장징궈~리덩후이 집권 당시의 대만이나 카네이션 혁명 당시의 포르투갈처럼 군사정권-문민정권 사이의 과도기를 거쳐 민주화를 이룰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전두환을 위시로 한 신군부의 쿠데타로 이 기회는 날아갔으며, 대한민국은 1987년이 되어서야 완전한 민주헌법체제를 이룰 수 있었다.[65] 5.18 사망자가 165명이란 것도 독재정권 하에서 축소된 수치로, 실질 사망자는 정확히 832명이라는 군 조사 당국자의 증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