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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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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설명3. 작위 서임 기준4. 특권5. 종전 이후6. 화족이거나 관련 있는 인물
6.1. 실존 인물6.2. 가상 인물

1. 개요

화족[ruby(華, ruby=か)][ruby(族,ruby=ぞく)]은 과거 일본에 존재했던 귀족 계급이다. 원래 뜻은 지체가 높은 사람이나 나라에 공훈이 있는 사람의 집안이나 자손을 뜻하는 보통명사였으나 전근대 일본에서 공가公家 중 두 번째로 가격家格이 높은 집단인 청화가淸華家의 다른 이름으로 쓰이게 되면서 일본에서 귀족의 명칭으로 쓰이게 되었다.

봉호 없이 작위만 썼고 또 작위 뒤에 반드시 을 붙였는데 작위 앞에 영지 이름이 붙어 봉호를 이루고 작위 뒤에 을 안 붙이는 한국, 월남, 중국 등의 동아시아 국가와는 다른 일본만의 특징으로 일본에서 봉호가 발달하지 못 해서 생긴 걸로 추정된다.

서양의 작위와는 달리 작위를 중복하여 수여받을 수 없었다. 예를 들어 남작이 백작 작위를 받는다면, 서양권에서는 백작 겸 남작이 되겠지만 일본에서는 기존에 소유하던 남작 작위는 소멸하고 백작이 되는 것이다.

2. 설명

화족은 메이지 유신 이후 사농공상신분제도를 개편하면서 1884년에 생긴 새로운 신분이었다. 근거 법령은 메이지 17년 궁내성에서 제정한 법령 '화족령'과, 1907년에 이를 폐지하고 새로이 제정한 메이지 40년 황실령 제2호인 '화족령'이다.

기존의 사농공상 제도를 없애면서 모두를 같은 신분으로 내리고[1] 그 상태에서 당시 유력한 정치인들과 고위 계층 (다이묘들과 공경들), 그리고 부르주아를 묶어 새로운 귀족인 화족으로 분류했다. 화족에는 고대 중국 서주의 봉건제에서도 쓰였던 오등작의 다섯 계급인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이 있었는데 이는 이전부터 있던 신분질서를 서양식으로 체계적으로 정리해 제도화한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화족을 5등작으로 나누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제출된 초안들을 보면 다음과 같이 변했다.

공후백자남 5등작 안이 제출된 것은 1878년의 일로, 『예기(禮記)』에 등장하는 『王者之制禄爵 公侯伯子男 凡五等』라는 구절에서 따왔다고 한다. 동양에서 전통적으로 사용하던 작위명이기도 하다.

첫 서임은 1884년 7월 7일 거행되었는데 공작 11명, 후작 24명, 백작 76명, 자작 324명, 남작 74명으로 총원 509명이었다.

화족 대우를 받는 사람은 화족과 같은 호적에 있는 사람들 뿐으로, 화족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차남 이하로 태어나서 분가하면 평민 취급을 받았지만 화족들끼리 양자를 활발하게 주고받았고 양자 또는 서자에 의한 계승도 드물지 않았는데 친자+적자가 아니면 작위를 계승할 수 없었던 유럽 귀족들과 대조되는 부분이다.

고위 화족가문에서 작위가 낮은 분가가 파생하는 경우도 있었다. 한 예로 고노에 후미마로의 동생 히데마로도 분가하면서 자작위를 받았다.[2]

일제강점기에 구 대한제국 황실도 이 체계에 편입되어서 이왕가(李王家)로 불렸다. 정확히는 왕공족(王公族)이라 하여 화족과는 별개의 규범으로 신분이 규정되었는데, 왕공족의 위치는 명목상으로는 "황족 이하, 화족 이상"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또한 한일합방 전후 일본에 협조한 공로로 조선귀족으로 서임된 조선인들도 근거 법령은 다르나 화족과 같은 이름의 작위를 받고 같은 이름의 작위를 가진 화족과 동등한 지위로 규정되었다.

3. 작위 서임 기준


이토 히로부미처럼 공을 세운 정도에 따라 작위가 승급되는 사례도 꽤 있었으며 여자는 화족 가문의 당주가 될 수 없어서 남자 계승자가 끊기면 작위는 반납되었지만 서양자(壻養子: 사위를 양자로 삼는 것)나 외손에게 계승할 수 있어서 후계 단절로 반납된 가문은 공작 가문은 없고 후작 가문이 각각 딱 하나 있었는데 후작 중 후계 단절로 작위가 반납된 가문은 당시 황족이었던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의 둘째 아들이라 양자를 딱히 세울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공작 가문이 후계가 단절된 사례는 없고 작위 반납 사례는 마쓰카타 마사요시의 아들인 마쓰카타 켄(松方嚴)이 금 해금으로 인한 쇼와 대공황의 책임으로 작위를 반납한 것이 유일하다. 화족 작위를 받은 본인이나 후계자가 1대화족주의자여서 습작 수속을 하지 않아 작위가 끊기는 사례도 있었다. 1928년 화족 가문은 공작 18개, 후작 40개, 백작 108개, 자작 379개, 남작 409개(조선귀족 제외)로 총 954개였는데 1944년에는 1016개로 늘어났다. 1907년 이후에는 후계자에게 작위를 물려주고 은거가 가능해졌다.

참고로 위의 다이묘의 작위 서임 고쿠다카 기준은 보신전쟁 이후에 새로 산출한 고쿠다카 기준이다. 따라서 에도 시대 중후반 기준으로 생각하면 대입이 안 되는 가문들이 있다.[26] 이것 때문에 고쿠다카를 새로 조사할 때 호리에 번(堀江藩)을 다스리던 하타모토 오사와 모토스미(大澤基壽)가 실제로는 5500석도 안 되고 유신에 공도 없었는데 메이지 정부에 1만 석 이상이라고 거짓말을 하여 남작 작위를 받았다가 적발되어 작위가 박탈된 사건도 있다.[27]

일본의 화족이란 엄밀히 따지면 작위를 소유한 당사자만을 의미한다. 화족의 직계 혈족, 자제 등은 화족이 아니다. 그러나 황실법상 황족은 왕공족 또는 화족이랑만 결혼할수 있다는 점에 모순이 생겨, 화족의 자제는 화족에 준한다는 해석을 내렸다.

4. 특권


일본어 위키백과에는 공작, 후작 항목에 역대 화족들 명단이, 백작 자작 남작 항목에 해당 가문 명단이 있으며 화족 작위를 받은 사람들의 명단(승계자 제외)은 여기를 참조.

5. 종전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한 후 GHQ 지도 아래 1947년 5월 3일에 일본국 헌법으로 개헌되면서 화족 제도는 사라졌다. 이는 일본국 헌법 제 14조 2항에 "화족 및 기타 귀족 제도를 인정하지 않는다."[31]라고 규정한 데 따른 것으로써, 이에 따라 헌법이 발효되기 하루 전인 5월 2일에 화족령을 폐지하였다.

개헌 당시 일본 정부 내부에서는 이미 작위를 받은 화족에 대해서만 생존 중에 한해 지위를 유지하고 정치적 권력은 주지 않는 방향으로 제도를 개편하자는 제안도 있었고, 쇼와 천황은 천황을 대대로 모셔온 일부 화족 가문의 화족 지위를 보전하는 것을 선호하여 그 뜻에 공감한 총리 시데하라 기주로를 통해 제안했으나, GHQ(연합군 총사령부)를 설득할 수 없을 것이라는 일본 정부 내 각료들의 강한 반대로 인해 뜻을 접었다.

같은 해 10월 14일 황적이탈구황족과 달리 화족들의 재산은 몰수되지 않았으며 그들의 대부분은 미군정 이후에도 대부분 명문가로 남았고 지금도 여전히 일본의 상류층으로 군림하고 있다. 물론 모두 그런 것도 아니어서 신직계 화족 가문들은 메이지 시대에 재산 관리 실패로 인해 연금 외의 재산이 없는 경우가 부지기수라 지위를 빼앗긴 뒤 진짜 몰락해 버렸고 공경계 화족들도 최상위 가문들을 제외하면 실질적인 재산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었다. 다이묘 집안으로서 작위를 받은 화족들은 재산이 많았지만 이마저도 후작 이상에서나 해당되는 이야기고 석고(고쿠다카) 5만 석 이하 다이묘에서 시작된 화족들은 다이쇼 시대에 접어들면서 재정난에 시달리다가 결국 패망과 함께 지위를 잃고 평민으로 전락하면서 일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나마 석고 5~10만 석 이상 재산이 많았던 다이묘 출신 백/후작 이상 되는 집안조차 고도 성장기를 거치면서 사기 등에 걸려서 몰락하거나 땅만 넓었지 수익이 낮은 부동산으로 인해 고생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대신 사극에 나올 법한 유명 다이묘의 직계 후손들은 계속 세를 유지하며 현대에도 지역 의원 등 지역 유지로 사는 경우도 있다.

정말 돈 걱정이 없던 화족들은 당대에 재산을 모아서 귀족원 의원이 되고 남작위를 받은 소수 부르주아들 뿐이다.[32] 그런데 이들은 화족 지위를 잃어도 자기 재산과 사업 수완으로 부를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이라 단지 상류층에 들어갔다는 상징으로 화족 자리를 얻었을 뿐이었으니 의미가 없다. 황족들조차 돈이 없어서 처가에 신세를 지는 판국이었다.[33] 그래서 이방자 비가 이왕가의 영친왕에게 시집갈 때 황족들이 부러워했다. 당시 이왕가는 합방 전 대한제국 황실이 가지고 있던 재산을 거의 대부분 유지해서 관리하던 전답이 어마어마한 수준이었고, 막대한 재산을 운용했다. 그리고 일본 황족들과 달리 궁내성 산하에 이왕가를 담당하는 이왕직이라는 기관이 있어 이곳을 통해 원하는 만큼 돈을 가져다 쓸 수 있었다고 한다. 다만 이왕가도 일제 패망 후 전재산이 대한민국 국고로 환수되어 몰락했다.

화족의 사전적인 정의는 전근대의 귀족과 같이 법률로 규정한 특권 집단이지만 실제로 세간에 통용되고 인식되던 화족의 이미지는 전근대 유럽의 귀족보다는 근대의 부르주아, 정치인, 고위 관료, 군인 등의 기득권층 집합체에 가깝다. 특히 부르주아를 대표하는 재벌이 가장 일반적이고 널리 알려진 이미지인데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에 속하는 소설 이누가미 일족에 나오는 이누가미 가문의 모습이 바로 세간에 흔히 알려진 모습에 가깝다. 즉, 화족의 서열은 작위 순으로 정해져 있기는 했지만 단순히 작위만 높은 가문보다는 작위는 다소 낮더라도 재력이나 영향력이 컸던 가문이 세간에 알려진 화족의 이미지를 더 잘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화족들의 친목 단체였던 화족회관은 1947년에 카스미 회관(霞會館)이라는 사단법인으로 이름을 바꾸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34]

살아남은 화족 가문은 현재 일본정치, 경제, 사법체계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일본 정치인들이 자신의 혈족이나 측근들에게 자신의 선거구를 물려주는 관습도 있어 문제가 되고 있다. 이들은 총선이나 재보궐선거에서 한번 패배했더라도 다음 공천에는 아무런 무리가 없을 정도의 세력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보니 선거 때 격전지에 속하는 일이 드문 지역의 경우는 아예 대를 이어 수성하기도 한다. 물론 평판 관리도 하고 지역 주민들에게 여러가지 이권을 보장해주는 등 민심을 얻어서 그 지위를 유지하는 것이다.

현대 화족들은 대부분 보수적인 기득권층이기는 하지만 극우 세력과는 거리가 멀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애시당초 제국주의 일본부터가 표면적으로나마 다민족을 표방했기도 했고, 일본이 지금처럼 단일민족 색채를 강하게 띠게 된 것은 패전 이후라는 맥락을 알아야 한다. 아키히토 상황, 나루히토 천황, 하토야마 유키오일본 총리, 호소카와 모리히로 전 일본 총리[35] 등 오히려 화족 서열에서 최상위에 있는 이들은 극우 세력과 대립각을 세운다. 일본 국내외의 정치학계에서도 현재 일본의 우경화를 부추기는 세력으로 일본회의를 언급하는 반면, 카스미 회관이 문제가 된다고 보는 경우는 드물다. 카스미 회관은 구 화족들의 친목 단체지, 정치적인 집단으로 보기 어려우며, 실제로 카스미 회관에서 소개하는 주요 활동이나 관련 인터뷰 등을 보면 일본의 전통과 문화에 대한 연구 및 계승 등 학술적인 면에 집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일본회의 자체가 화족 구성원이 많은 준 혈족 집단이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하지만 사실 일본 현지에서는 일본회의의 사상적 구심점은 생장의 집(生長の家)이라는 신흥종교가 담당했다. 때문에 전통적인 신토와도 동떨어졌다는 설이 주류다.

여담으로 우마무스메를 한다면 들어봤을 아리마 기념의 유래가 된 아리마 요리야스(有馬賴寧)[36]가 백작(伯爵)이다.

6. 화족이거나 관련 있는 인물

6.1. 실존 인물

6.2. 가상 인물


[1] 화족에 편입되지 못한 무사 계급은 사족으로 분류되었으나 현실적으로 호적에 사족(士族)이라고 기재되는 외에 아무 특전이 없었으므로 그야말로 이름뿐인 존재가 되었다. 그러니 사실상 화족 이외의 특권계급은 사라진 것이다. 다만 많은 봉토를 갖고 있던 고위 사족이 아닌 대부분의 하급 무사들은 이미 이전부터 사실상 사회적 특권이 없다시피 했고 오히려 무사의 농업 종사 금지가 해제되어 전객이 되든지 상업에 종사하는 대신 농업에 종사할 수 있게 되었다. 사족 같은 경우는 메이지 유신 때 일시적으로 공채를 일괄 지급하고 나중에 유상몰수했는데 이 기간에 공채를 미리 처분하고 사업에 뛰어든 사족들만 개이득.[2] 분가할 시에는 보통 3단계 아래의 작위를 받는다. 예를 들면 공작가에서는 자작가, 후작가에서는 남작가가 분가되는 게 표준이었다.[3] 섭관직을 독점하던 다섯 최고위 공가를 이른다.[4] 막부 항복 이후 종가 가주가 된 도쿠가와 이에사토와 그 가문[5] 방계라고는 하지만 히사미츠는 번주의 친부이자 이전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동생으로서 실질적으로 다이묘나 마찬가지였다.[6] 백작, 후작을 거쳐 1907년 공작으로 승급했다.[7] 의아하게 보일 수도 있으나 서양의 작위 체계에서 Prince가 Duke보다 절대적으로 높지는 않다. Prince는 유럽 내에서도 지역에 따라 위상이 다르다. Duke 작위가 없는 동유럽(슬라브족)에서는 공작과 동격이며, Fürst로 불리는 독일어권에서는 공작(Herzog)보다 낮은 후작, 서유럽에서는 대공(Grand Duke)보다 낮지만 공작(Duke)보다는 높은 작위이다.[8] 여담으로 일본인들은 직계 황족인 친왕(親王)이나 방계 황족인 (王)도 Prince로 번역했다. 가령 쇼토쿠 태자의 경우에도 영어로는 Prince Shotoku로 표기한다.[9] 작위와는 상관없이 왕가 또는 통치가문의 후손들은 Prince를 관습적으로 쓴다. 진짜 왕자도 사용하고, 방계 혈족도 사용한다. 다만 서양에서는 동아시아와는 달리 의 자손들은 프린스 칭호를 쓸 자격이 없는데, 적법한 혼인에서 태어난 적자만 가능하다.[10] 다만 고요제이 천황(後陽成天皇)의 12대손으로 황족의 피를 이어 받았다.[11] 도쿠가와 막부 쇼군의 분가인 오와리 도쿠가와 가, 기이 도쿠가와 가, 미토 도쿠가와 가의 3개 가문을 말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9남(오와리 번), 10남(기이 번), 11남(미토 번)의 후손들이다. 이중 미토 도쿠가와 가는 2대 후작 도쿠가와 쿠니유키가 미토 고몬 시절부터 이어진 대일본사 편찬을 완료한 공적으로 공작가로 승작되었다.[12] 다만 고산케는 모두 실소출이 15만석을 훨씬 넘는 다이묘였기 때문에 특별 취급을 받지 않아도 어차피 후작이 되었을 것이다.[13] 어삼가처럼 도쿠가와 막부 계승권은 있으나 영지가 따로 없었던 가문.[14] 쓰시마 번은 석고만으로 보면 본섬과 히젠의 월경지를 포함해도 2만 석 미만으로 자작급에 불과하나 조선과의 외교를 담당하는 역할을 맡아 에도 막부에서 10만석급 다이묘 격으로 대접받았으며 신정부에서도 이러한 특수성이 그대로 인정되어 백작이 되었다. 덕혜옹주의 전 남편이었던 소 다케유키 백작이 이에 포함된다.[15] 기본적으로 천황을 알현할 수 없었던 지하가들은 사족으로 분류되었다.[16] 히가시쿠니 시게코의 차남이 양자로 들어간 미부(壬生) 백작가와는 다른 집안이다.[17] 당상가문에서 가문을 이어 줄 아들을 제외한 아들들을 나라현에 위치한 고후쿠지에 승려로 출가시켰다가 메이지 유신에 의해 환속 후 분가한 집안들을 말한다.[18] 와카야마시에 위치[19] 소에다마치에 위치[20] 시마네현 오다시에 위치[21] 이즈모타이샤의 오야가미(祖神)로 모시는 신사[22] 교토시 시모교구에 위치[23] 교토시 시모교구에 위치[24] 본산은 미에현 츠시이고 본사는 도치기현 모오카시에 위치[25] 도치기현 야스시에 위치[26] 예를 들어 요네자와 우에스기 가문도 중후반 기준으로 고쿠다가가 18만석이므로 후작위에 해당할 것 같지만 보신 전쟁에서 오우에쓰열번동맹의 맹주로써 신정부군에 대항한 것 때문에 감봉 처분을 받아 14만 7천석이 되었기 때문에 백작위를 받았다.[27] 판적봉환 때 제출된 각 번의 고쿠다카를 보면 가관이다. 최소한 다이묘나 쇼군의 가신이 남작이 되려면 1만 석은 되어야하고 유신에 훈공이 있어야 하는데 어떻게든 1만 석을 채우겠다는 훈공이 없는 하타모토들과 실제 고쿠다카가 1만 석에 미달되는 소규모 번사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1만 석을 인정 받으려고 애를 썼다.[28] 다만 직계 황족은 화족 중에서도 오섭가(五摂家)나 황족 또는 왕공족과 결혼해야 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귀천상혼으로 신적강하를 당했다.[29] 화족 이상에 한한다 등[30] 가문의 회의 의결을 거쳐야 한다 등[31] 이 해에 화족제 폐지로 인해 궁색해진 가문의 이야기를 다룬 「안조 가의 무도회」(安城家の舞踏会)라는 영화가 상영되기도 했는데 몰락한 화족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기 전에 마지막 무도회를 연다는 내용이었다.[32] 에도 시대 중기부터 부를 쌓은 상인 집안인 미쓰이, 스미토모 가문이나 미쓰비시 재벌을 세운 이와사키 남작가, 세계 최초로 진주 인공양식에 성공한 후 진주 판매로 소득세 납세액 1위를 기록하면서 귀족원 의원이 된 미키모토 가문이 이에 해당된다.[33] 이방자 비의 친정어머니 나시모토 이츠코는 사가 번주 나베시마 후작 가문의 딸인데 나베시마 가문에서는 매달 2천엔씩 화장품이라는 명목으로 시집간 이츠코에게 돈을 보내 왔다고 한다. 나베시마 가문이 다스리던 사가 번에는 오랫동안 일본 유일의 개항장이던 나가사키가 있었는데 여기서 무역을 해 많은 돈을 벌었다.[34] 2017년 마이니치신문 기사(유료)에 따르면 '구 화족가의 남성 당주성인이 된 직계 자식을 회원으로 하여 650가문 740명의 회원'이 있다고 하며 천황 부부도 매년 1월에 1회 방문하여 교류한다고 한다.[35] 고노에 후미마로의 외손자로, 제79대 일본 내각총리대신이었다.[36] 전쟁 이전에 중의원 의원, 귀족원 의원, 제1차 고노에 내각의 농림대신을 역임한 바 있다.[37] 시일야방성대곡에서 이토를 언급할 때는 '이등(이토) 후작'이라고 표기하는데 이 때 이토는 공작으로 승작되기 전이었기 때문이다.[38] 집안이 공작가지만 아버지가 가문을 잇지 않았기 때문에 겐야 본인은 성인이 될 때까지 자신이 화족 출신이라는 것을 전혀 몰랐다.[39] 금전 마련 목적으로 신분을 팔았고 이를 야마다가 사서 선우진에게 주게 된다.[40] 귀족가문의 후예라고 작중에서 언급한다.[41] 작중 시점에서는 이미 몰락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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