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성동 臺城洞 | Daeseongdong | |
<nopad> 대성동의 모습 | |
<colbgcolor=#000><colcolor=#fff> 국가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구분 | 마을 |
별칭 | 대성동 자유의 마을 |
인구 | 138명[1] |
행정구역 |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2] 조산리 |
[clearfix]
1. 개요
대성동 자유의 마을 입구 대성동의 '대성'이 'Daeseong'인데 'TAE SUNG'이라고 되어있다.[3] |
대성동: 비무장지대의 유일한 민간인 마을에 가다 | 2024.4.5. BBC News 코리아 |
공동경비구역 인근에 위치한 마을이다. '동'이 붙어서 행정구역 단위가 동인 줄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실제 행정구역상으로는 경기도 파주시(옛 장단군) 군내면 조산리이며 모든 행정 업무는 장단면[4]에서 처리한다. '대성동 자유의 마을'이라고도 불린다.
행정구역은 아니지만 이 지역의 도로명주소로 '대성동길'이라는 이름이 부여되어 주소에도 '대성동'이 적히게 되었다. 도로명주소로 적을 때는 리를 빼고 도로명을 대신 넣어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대성동길'이 된다. 신 우편번호(기초구역번호)는 대성동 전역이 '10800'이다.
정전 협정에 따른 남방한계선 이북 비무장지대에 남아있는 유일한 남측 마을이다. 2024년 기준 49세대 총 138명이 거주 중. 조금만 옆쪽으로 가면 바로 군사분계선이, 북쪽으로 올라가면 판문점이 있으며, 바로 코 앞에는 북한 인공기가 보이며, 북한 기정동 마을도 육안으로 흐릿하지만 볼 수 있다.
재미 없기로 유명한 대남방송도 매일 들을 수 있다. 남북관계가 급격하게 악화되었을 때는 대남방송을 아침부터 새벽까지 틀어놓아 소음공해가 가공할 수준이었다고 한다. 2018 제1차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북이 DMZ 내 대북방송, 대남방송 송출을 중단하기로 합의하면서 잠시 들을 수 없게 됐다가, 북미회담 결렬 후 남북관계가 점점 악화되면서 2024년 6월부터 대북방송 송출이 재개되자 북한 역시 대남방송을 재개했다.
2. 마을 특징
DMZ에서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영화관은? 편의점은? | 2019.7.3. 14F 일사에프 |
주민 대부분은 농업(벼, 고추 재배)을 생업으로 삼고 있으며 돼지, 사슴 등을 일부 기른다. 마을 주민들의 소득은 2006년 기준 가구당 연 6,700만 원 정도로 중위 소득 분위를 아득히 넘어서는 수치며, 일반 농민들이나 웬만한 중산층보단 제법 많은 편이다. 또한 세금 면제 혜택도 있다.[5]
말만 경기도 파주시 땅이지 사실상 유엔군사령부령이라고 봐도 된다. 다만 유엔은 국가가 아니므로 토지 소유를 못하기 때문에 소유는 파주시가 하되 위임 받은 유엔군으로부터 통치를 받는다. 그렇다고 해서 이곳이 치외법권 지역은 아니다.
마을 주위는 군부대 아니면 농지다. 경작권이 주어지지만 토지에 대한 소유권은 가질 수 없다. 북한의 도발이 심했을 때에는 농사 짓는데 경호원으로 대한민국 육군의 병력이 따라가기도 했다.
만약 유엔군에게 행패를 부리면 해당 주민은 4개월간 추방을 당하는데, 이는 사실상 주민권 박탈을 의미한다. 위에서 보다시피 1년에 8개월 이상 살아야 주민권 유지니까. 또 이장은 주민들이 선출하여 뽑지만, 유엔군사령관[6]의 직권으로 이장을 파면 시킬 수 있다.
한 마디로 전혀 안 그런 것 같지만 살벌한 동네다. 마을 안에도 무장한 군인들이 있고, 버스 타고 가다가 잘 보면 위장해놓은 초소 같은 게 보이기도 한다. 농지로 가는 길에도 탈북하는 북한군들을 안내하는 표지판, 전화와 무전기 등이 설치되어 있다. 즉 전쟁이 터지면 3분만에 쑥대밭이 될 동네다. 북한군이 아무리 열악해도 이런 손바닥만한 동네는 흔적도 없이 날려버릴 능력은 당연히 있다.
휴전 이후 초기 14년 간은 참정권이 제한된 채 살아왔다가 1967년이 돼서야 투표권이 주어졌다. 이후 대성동 주민들은 투표일에 모두 함께 마을 밖으로 외출하는 문화가 생겼다고 한다. 그래서 대성동 마을 사람들의 투표율은 매번 거의 100%에 이른다. 후술한 대로 원주민 및 그 자손들만 거주 자격이 주어지기 때문에 주민들끼리는 서로 단합이 안 될래야 안 될 수가 없다.
2.1. 편의시설의 부실
대성동은 각종 편의시설이 바깥과 비교하여 부실하다. 시설이 부실한 이유는 정전협정 규정상 비무장지대에서는 상업 활동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문산이 가까운 곳에 위치하기 때문에 기본적인 문화 생활은 문산에 의존한다.- 마트와 편의점은 물론, 흔한 슈퍼마켓이나 구멍가게도 없다. 물론 마을에서 공동 관리하는 직판장이 있지만, 직판장은 PX와 마찬가지로 과자와 아이스크림, 음료수 정도의 간단한 간식거리와 잡 물품 정도나 취급하는 구멍가게 수준에 불과하기 때문에 제대로 장을 보려면 무조건 자가용을 타고 문산읍으로 나가야 된다. 그마저도 통일대교에서 검문소가 있기에 시간을 오래 잡아먹는다. 물론 거주민이고 다 아는 사람이므로 외부인보다는 검문 절차가 매우 간소하다.
- 학교는 대성동초등학교가 유일하며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중학교, 고등학교 진학 시에는 대개 가까운 문산 쪽으로 나가야 한다. 그 때문에 교육 목적의 장기 미거주는 8개월 거주 의무의 예외 조항 중 주요 사유가 된다. 유치원은 대성동초등학교 병설유치원이 있었으나 2007년에 폐원해 문산 쪽으로 나가야 한다.
- 이발소 및 미용실도 없다. 이용하려면 통일대교를 건너서 문산으로 나가야 되기 때문에 매우 불편하다. 자가용 시대가 열리기 전까지는 교통이 몹시 불편했기에 집에서 이발기를 구입해 이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남자 아이들은 이발 횟수를 최대한 줄이려고 머리를 아주 짧게 밀어버렸다. 심한 경우는 머리를 거의 삭발 수준으로 밀어버리기까지 했을 정도라고 한다.
- 대중교통은 93번대 시내버스 노선 단 하나뿐이며 이 외의 다른 노선은 없다. 그마저도 1일 3회로 운행 횟수가 매우 적으며 아주 애매한 시간대에 운행하기 때문에 탑승하기가 상당히 힘들다.
- 아날로그 방송 시절에는 난시청 지역이라 텔레비전 수신료가 면제였을 정도. 케이블 TV도 들어오지 않는 지역이다. 북한과 너무 가까운 지역이라 증폭기랑 고감도 안테나로 어찌어찌 해결할 수는 있으나, 전파방해로 인해서 수신하기가 곤란하다. 그리고 북한은 PAL-D/K 방식을 사용한다.
- 전화 모뎀이 아닌 ADSL 이상의 고속 통신망 인터넷은 2012년이 되어서야 공급되었다. 즉 모바일 네트워크 구축과 스마트폰 사용도 2012년 이후부터 가능해진 것. 그나마 2019년 6월 KT에서 5G를 설치해줬다. #
- 건축 당시 건축물 대장에 등재하지 않은 탓에 주민들이 집에 대한 소유권이 없다.[8] 그로 인해 주민들은 집에 인터넷 연결을 한다든가, 집의 노후화로 인하여 보수, 증축, 재건축, 리모델링을 하려고 하면 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또한 허가를 받고 나서도 재건축이나 리모델링 등을 하려면 시공업자들을 대성동으로 불러야 하는데, 민통선 이북 지역이기에 외부인을 불러내는 것이 매우 까다롭다.
- 체제 선전을 위해 건물들이 북한 쪽에서 잘 보이도록 남향이 아닌 북향으로 지어진 탓에 일조량이 매우 적어 여름에도 보일러나 전기장판 같은 난방 기구를 틀어야 잠을 제대로 청할 수 있을 정도로 춥다.[9] 거기에다가 북향집의 특성상 바람도 잘 안 드는 탓에, 북태평양 기단의 영향으로 고온 다습한 기후를 띠는 여름에는 집이 매우 습해진다. 겨울에도 온수가 나오지 않아서 찬물로 샤워해야 하는 지경이다. 2015년 리모델링 직전의 한 가정은 겨울에 월 40만 원의 난방비를 써야 했다. # 특히 2018년 여름에는 전국적으로 폭염이 닥치면서 집을 리모델링하지 않은 가정은 낮에는 폭염, 밤에는 한파라는 끔찍한 혼종의 상황을 겪었다. 해비타트 블로그.
- 그 외에도 모든 기반 시설이 1980년대 이후 새로 지어지지 않아 매우 낙후되어 있었다가 2015년 7월부터 경기도와 정부, 유관 기관들이 나서 마을을 새롭게 단장하는 '대성동 프로젝트'가 시작되어 건물 보수부터 통신 시설, 환경 디자인, 농업용수 수도 시설 설치까지 완전히 뜯어고쳐서 겨우 나아졌다.
이 때문에 젊은이들은 밖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자유롭게 지내는 것에 익숙해지다 보니 다시 들어가고 싶어하는 경우가 적다.
2.2. 교육
자세한 내용은 대성동초등학교 문서 참고하십시오.마을 안에 있는 교육 시설은 1967년에 개교한 대성동초등학교가 있다. 유치원과 중학교 이후 진학은 문산 쪽으로 나가야만 한다.
2.3. 교통
대성동으로 가는 데만 관문이 3개가 있고, 처음 들어갈 때도 '평화의 다리'라는 다리를 건너가야 한다. 평화의 다리에는 바리케이트가 쫙 깔려있고 중간에 대한민국 육군의 감시초소가 있다. 평화의 다리에 처음 들어갈 때도 대한민국 육군의 군사경찰이 차를 멈추게 하고 신분증 검사를 한다. 들어가는 마지막 관문에는 '평화의 마을 대성동'이라는 큰 표지판이 있다. 이름은 '평화의 마을'인데 군사경찰에 바리케이드로 통제되어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라는 의견도 있다. 군사경찰에 바리케이드로 통제되고 있는 상황이 '평화'라는 이름과 극명한 대비를 이루고는 있지만, 물론 마을 안의 분위기는 고요하고 평화롭다.이곳을 방문할 때 반드시 파란색 손수건을 창문으로 펄럭이게 해야 하는데, 달지 않고 무단으로 들어갔다가는 총에 맞아도 뭐라 하지 못하는 지역이다. 사실 저 파란색 손수건은 DMZ 출입 차량이라면 해놓아야 되는 건데, 원칙적으로 파란색(남색)은 대한민국 국군 계통, 하얀색은 유엔군사령부, 빨간색과 노란색은 북중 공산군이 써먹는다. 그리고 중립국감시위원회는 저 4색이 들어간 깃발을 달아놓으며, 이 깃발은 중립국감시위원회의 마크이기도 하다. 과거 개성공업지구로 넘어가는 차들을 보면 빨간색 깃발을 단 대한민국 번호판 트럭들이 보이기도 했다.
마을로 들어오면 유엔군에 자신이 방문했다는 것을 신고해야 한다. 방문자가 있을 경우 군인들이 집에 찾아와서 방문자를 확인한다. 다만 외부인이 이 마을을 출입하려면 일주일 전에 신청을 한 후 신원 확인을 거쳐야 가능하다. 주민이 아닌 경우에는 오전 9시부터 17시 30분까지만 출입이 가능하다. 다만 사람이 죽으면 외부 조문객이 들어와야 하는데, 규칙대로라면 장례식이 다 끝난 후에나 조문할 수 있지만 예외는 있다.[10]
현지 주민의 경우 매일 19시가 되면 대한민국 육군의 민사행정경찰(민정경찰)이 가구별 인원을 점검하고 0시부터 5시까지는 통행이 금지된다. 이 통행금지를 어기면 1차 위반 시 경고, 2차 위반 시에는 7일 추방, 5차 위반이면 주민권이 박탈된다. 다만 밤중에 병이 나거나 돌발적인 사태가 일어나 나가야 할 일도 있고, 돌아와야 할 일도 있으므로 그럴 때는 부대와 연락하고 오간다.
6.25 전쟁 전에는 이 마을 사람들은 물건을 살 때 개성장에 갔다. 걸어서 9km만 가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쟁이 일어나면서 개성장에 가는 길이 막혔고, 그 다음부터는 고립된 생활을 해야 했다.[11]
휴전 이후에는 '민사표'라고 해서 미군들이 군용 트럭으로 1주일에 1번 문산으로 사람들을 실어다 주었다. 생활용품을 사려면 문산으로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농산물 역시 이 미군 군용 트럭을 통해 판매하였다. 하지만 돌아오는 차는 마련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한 번 나간 사람은 1주일간 문산 밖에서 살아야 했다. 그래서 문산에 지낼 친척집이 없는 사람은 마을 밖으로 나가는 것이 힘들었다. 여관비를 내야 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장을 자주 보러 나갈 수 없었다. 교통이 불편해 유엔군 트럭이 일주일에 한 번씩 마을에 들어와 생필품을 나눠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군용 트럭에는 문이 없었기 때문에 흙길을 지나다 보면 옷이 흩날리는 흙먼지로 더러워지기 일쑤였다. 결혼식에 가는 사람들은 담요를 덮고 가거나 아예 보자기에 옷을 싸가지고 가서 결혼식장 근처에서 갈아입기도 했다. 이 군용 트럭의 운행은 나중에는 1주일 2번으로 늘었다.
미니버스를 도입한 적이 있었으나 운영 적자로 금세 중단되었다. 이후 1972년 마을버스를 기증해 버스 운행이 일주일에 3번으로 늘었다. 1970년대 말부터 버스가 매일 한 번씩 다니다가 횟수가 늘어 지금은 하루 3번 문산터미널까지 왕복한다(오전 6시, 정오, 오후 6시). 문산읍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신일여객[12] 93번 따복버스를 타고 갈 수 있다. 마을로 들어가려면 패스라는 출입증이 필요하고 군 부대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백연리에 있는 통일촌과 진동면에 위치한 해마루촌 역시 마찬가지. 노인 주민들은 거동이 불편하기 때문에 버스 운전 기사가 혈압약 등 주기적으로 받아야 하는 약을 전달해주기도 한다.
경제가 발전하면서 자가용이 늘어났다. 그래서 현재 집집마다 1대 이상 자가용을 보유하고 있고 마을 출입 역시 개인 자가용을 이용한다. 대성동 주민들의 의식주 생활.
군사 지역이라 차량 내비게이션도 여기에서는 먹통이 된다.[13] 같은 이유로 네이버 지도나 카카오맵에서도 이 마을은 로드뷰를 제공하지 않는다. 구글 스트리트뷰에서 대성동초등학교와 인근 지역을 볼 수는 있지만, 대성동을 위성 사진만 보고 알아서 찾아야 한다. 잘못 찾아서 도라산역 쪽만 보고 있으면 못 찾는다.[14]
철도 교통으로는 장단역이 있었으나 6.25 전쟁으로 인해 폐역이 되어 현재는 운행되지 않는다. 때문에 철도 교통을 이용하려면 어쩔 수 없이 임진강역으로 이동해서 경의중앙선 전철을 타야 한다. 그러나 이 임진강역도 하루에 평일 2회, 주말과 공휴일에는 4회밖에 운행을 안하고, 이것마저도 문산역까지만 운행되는 셔틀이기 때문에 이용하기 매우 불편하다.
2.4. 특산물
쌀을 비롯하여 산나물, 장단콩 등을 재배 생산한다.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모든 농산물은 유엔군사령부의 공인 인증 마크 및 유엔기가 표기되는데, 국산 농산물 중에서는 매우 특이한 방식이지만 이 지역이 유엔군사령부 관할 지역이라 그런 것이다.대성동 주민의 농산물 생산을 공인허가 받을시에 이 마크가 들어가는데, 이를 통하여 적법하게 출하되었음을 인증함과 동시에 관련 수익이 과세 대상으로 잡히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이 공인 마크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은 대한민국에서 오직 이곳이 유일하다.
2.5. 의무 면제 혜택
대성동 주민들은 병역의 의무와 납세의 의무가 모두 면제된다. 대성동 마을은 정전 협정 제10항에 의해 국제연합군사령부에서 관할하고 있기 때문에, 이에 따라 민사행정 및 구제사업은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이 책임지며, 유엔군사령관이 관할하고 유엔군사령부의 통제를 받기 때문이다.[15] 즉 군대를 안 가고, 세금도 안 낸다.하지만 이들에게 면세는 그리 큰 혜택이 아니다. 대성동 주민들의 절대 다수는 농업 및 관련 사업에 종사하고 있고, 대한민국의 세법상 농산어업 등으로 거두는 소득이나 관련 비용은 대부분 면세 또는 저율 과세 혜택을 주고 있기 때문에 규정을 바꾸어 세금을 내게 된다고 해도 어차피 낼 것이 거의 없다.
대성동 주민은 휴전 협정 당시 DMZ 안쪽에 살던 사람들과 그 자손으로 한정되고, 위에 적힌 것처럼 셀 수 없이 많은 불편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에 혜택을 줄 만하다고 여겨 문제 삼지 않는 국민이 대다수다. 날이 어두워지면 통행금지고, 이를 무단으로 어겼다가는 잡혀간다고 생각해 보라. 오고 가는데 수속이 필요하고, 친인척이 방문하는데도 통행증을 신청해야 하고, 통행증 없으면 아예 못 들어간다고 말이다. 현재 한국의 전국에서 유일하게 평시에도 전시통제를 당하는 마을이다. 몇몇 사람들은 부럽다고 하지만 상술한 제약들을 보면 절대 부럽지 않다. '의무와 권리는 항상 함께 한다'는 개념에서 보면 알기 쉽다. 즉 '권리가 제약 받는 만큼 의무도 면제된다', 또는 '의무가 면제되는 만큼 권리도 제약 받는다'는 것이다.
3. 거주민의 자격
정전협정 당시 거주했던 원주민들과 그 자손들만이 거주할 수 있으며, 여기에 해당한다 하더라도 1년 중 8개월 이상을 대성동에서 거주하지 않으면 주민권이 박탈된다. 입원, 대성동 외부 학교 재학, 대성동 외부 학교에 다니는 자녀 양육 정도만이 예외 사유로 지정되어 있다. 즉 주거와 거주·이전의 자유가 제한된다. 남성이 외지인 여성과 결혼하는 경우는 주민으로 남을 수 있지만, 여성이 외지인 남성과 결혼한다면 마을을 떠나야 한다.[16] 다만 여성이 외지인 남성과 결혼하더라도 주민권 유지가 가능한 방법이 있는데, 외지인 남성이 데릴사위로 들어가는 것이다. 외지인 남성이 데릴사위로 들어가서 입주하게 되면 그때부터 현지인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데릴사위를 들이는 게 허가되는 조건이 처가 쪽이 아들이 없는 경우[17]에 한정되며, 그마저도 바로 OK인 게 아니라 입국 심사에 준하는 까다로운 심사를 거치고 나서야 겨우 허가가 난다. 그래서 대성동 마을에 데릴사위로 들어간 외지 출신의 남성은 정전협정 이후로 2명밖에 없었다.대성동 주민이 32세가 되면 대성동에서 계속 살아갈지, 대성동을 떠나서 살지를 결정해야 한다. 다만 대성동을 떠나서 살기로 결정한 사람이라도 자신이 나고 자란 대성동으로 귀농해서 인생 말년을 보내고 싶은 사람도 있을 테니 원한다면 나중에 다시 대성동으로 들어와서 살 수도 있다. 하지만 자의로 대성동을 떠난 사람이 대성동 주민으로 복귀하고자 하는 경우 주민회의를 거치고 유엔군사령관의 허가를 받아야 주민으로 복귀할 권리를 얻게 된다. 어찌보면 자유 없는 자유의 마을인 셈이다. 물론 이럼에도 휴전선 건너편에 비하면 자유가 있는 건 사실이다.
4. 외부인 출입 여부
이곳에 들어갈 수 있는 이들은 대성동 현 거주자 및 원주민이나 대성동 지역 부대 군인, 유엔군사령부 소속 군인 등이 가능하다.그 외로는 아래에 해당되는 이유를 소명한 사람도 들어갈 수 있다. 다만 열거된 자격 또는 면허를 갖춘 사람은 자격증, 면허증을 출입 허가 신청시는 물론, 들어가는 경우에도 지참하고 보여주어야 한다.
- 보건의료: 의사 면허증 또는 간호사 면허증 지참
- 교육학술 연구: 대학교 및 대학원 교원증 지참 또는 학술연구 증서 지참
- 몇몇 직렬(예: 세무직, 경찰공무원 등)을 제외한 국가공무원: 공무원증 지참
- 지방공무원(경기도 또는 파주시 한정): 공무원증 지참
- 소방공무원: 공무원증 지참[18]
- 영양사 및 조리사: 영양사 면허증 및 조리사 면허증 또는 자격증 지참
- 종교인: 관련 증서 지참[19]
- 사회복지 및 자원봉사자: 사회복지사 자격증 및 지역 행정장 임명장 또는 자원봉사증 지참[20]
이와 같은 이유가 아니고 단순히 사진작가, 여행자라는 이유로 대성동 마을 방문 허가는 원칙적으로 나오지 않는다. 또한 사진작가 중 출사를 원하는 경우 반드시 유엔군사령부 허가를 받아야 하며 촬영 목적과 카메라 기종 등을 알려줘야 한다.
5. 국내 최고 높이의 국기 게양대
대성동에 있는 국내 최고 높이의 국기 게양대 |
대성동 마을에는 국내 최고 높이의 국기 게양대가 있다. 높이는 99.8m이며, 국기의 가로 크기는 19m, 세로 크기는 12m이다. #
냉전 시절에는 북한의 기정동 마을의 인공기 깃대와 대성동 마을의 태극기 깃대의 높이를 서로 높이는 경쟁을 하기도 했지만, 1988 서울 올림픽 언저리를 기점으로 쓰잘데기 없는 짓이라고 판단한 남측이 먼저 그만 두며 경쟁이 끝났다고 한다. 도덕 교과서에도 실려있었던 일화이다.
덕분에 이 마을의 태극기와 북측의 인공기가 굉장히 높은 곳에 매달려 있다. 특히 기정동 깃대는 약 160m에 달하는 그 높이로 인해 기네스북에 올라가 있었지만 2010년에 아제르바이잔 바쿠 깃대에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국기 게양대 타이틀을 뺏겼다.[21]
이곳에 게양되는 태극기는 깃대가 높다 보니 비바람에 찢어지는 경우가 있어서 일정 기간마다 새 태극기로 교체해주는데, 그 비용은 파주시에서 전액 부담하고 게양/하기식은 대한민국 육군 병력과 마을 주민들이 함께 한다. 태극기 크기가 어마어마하게 큰데, 북한 인공기에 비해서 원단이 훨씬 좋아 크기에 비해 무게는 아주 가볍다고 한다. 깃대가 매우 높아 태극기를 교체할 때 기계를 이용한다.
6. 사건사고
- 1958년 7월 마을 사람들과 주한미군들 사이에서 통역관 역할을 하던 이영기 씨가 월북하고, 또 같은 해 12월 8일 이대성 씨가 5~6명에게 끌려가 살해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 1975년 8월 26일에는 농부 김세연 씨가 대성동 마을에서 납북된 적이 있었다. 김세연 씨는 대성동 주민이 아닌 외부인이지만, 대성동 마을 주민의 농사를 도와주기 위해 들어왔다고 한다. 대성동 주민이 낮에 일을 하던 도중 인기척이 느껴져 뒤를 돌아보니 북한군이 김세연 씨를 북쪽으로 끌고 가고 있었다고 한다.
- 남측과 유엔군사령부는 북측에 남측으로의 송환을 요구하였다. 북측의 '스스로 월북하였다'라는 주장에 유엔사령부는 군사분계선으로 김세연 씨를 데리고 와서 '남북 중에 선택하도록 하자'고 제의하였지만 북측은 거부하였다.
- 이후 김세연 씨는 대남전단을 통해 알려졌다. '남한에서 초등학교도 못 다녔던 김세연 씨가 북한에서는 대학을 다닌다'라는 내용이었다.
* 이후 김세연 씨는 또 다른 대남전단에 등장하였는데, 왼쪽 2번째에 서있는 김세연은 부대명이 안 적혀 있고 머슴이라고 적혀있다. 하지만 지금은 생사를 알 수 없다. 또한 위 사진에서 '양'이라는 큰 글씨 밑에 있는 윤치기라는 사람은 동해경비사령부 직속 공병대대 3중대 2소대 소대장으로 1979년에 월북하여 국기훈장 2급과 정착금 20,000원을 받았고 조선인민군에 특별임관되어 상위 계급을 받았으나 1980년대쯤 탈북했다고 한다.
- 2020년 6월 16일, 북한의 일방적인 개성공단 남북공동연락사무소의 폭파로 인하여 마을 주민들이 안전을 위해 군의 통제를 받아 대피하였다. #
7. 관련 미디어
7.1. 도서
- 희망의 단지 DMZ: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모르는 동서남북 우리땅 (황선미 저. 이마주, 2019.)
- 대성동 DMZ의 숨겨진 마을 (임종업 저. 소동, 2021.)
7.2. 영상
- KBS 해피선데이 1박 2일 (2018.6.24. / 2018.7.1.) - 2018년 '판문점을 가다' 특집 방송분
- 채널A 이제 만나러 갑니다 591회 (2023.4.16.)
8. 여담
- 바로 근처 북한에도 비슷한 입장의 마을인 기정동이 있다. 다만 대성동과는 달리 북한 기정동 마을은 현재 거주자가 거의 없어 유령 마을 수준이다. 지어놓은 주택들도 선전용으로 외관만 그럴싸하게 지어놓은 것이라 내부는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는 수준이라고 한다. 인근 마을에서 여기로 출퇴근 시키며 선전 활동에만 쓰고 있는 동네인데, 탈북에 대한 우려도 있다.
- 마을을 유지하는 이유는 역시 명분과 위신. 민간인 거주는 실효지배의 중요한 조건이다 보니 여러 혜택을 주어서라도 유지하는 중이다. 애초에 민간인을 거주시킬 이유가 없었다면 차고스 제도처럼 진즉에 강제로라도 이주 시켰을 것이다.
- 60년 전에 기정동 마을에 사는 큰 형님을 두고 헤어진 주민이 있다. #
- Warhammer 40,000 한국 커뮤니티에서 카디아가 망하기 전까지 대성동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9. 관련 문서
[1] 2024년 4월 기준 #[2] 파주시 장단면 소속.[3]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에 영향을 받았다 하더라도 'Taesong'과 같은 표기였어야 한다.[4] 민통선 내 장단면, 군내면, 진동면, 진서면까지 4개면을 관할.[5] 신문 기사, 주민 인터뷰.[6] 주한미군사령관과 한미연합군사령관도 겸임하고 있다.[7] 무궁화 위성은 1996년에 송출했다.[8] 실제로 지적편집도를 보면 구획대로 되어있지 않고 복잡하게 되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9] 엄밀히 말하자면 해당 지역은 군사분계선이 서쪽에 위치하여 집을 서향으로 지었다. 물론 북향이나 서향이나 햇빛 적은 건 마찬가지. 참고로 서향도 여름에 덥다는 이유로 기피되는 편이다.[10] 김문수 경기도지사가 2011년에 1박 2일간 머무른 적이 있다.[11] 실제로 대성동 마을을 포함한 경기 장단군 일대는 분단 전만 하더라도 개성시의 영향력이 매우 큰 지역이고, 이 일대 사람들 역시 개성에 대한 연고 의식이 강했다. 분단, 아니 휴전선이 개성과 대성동 사이로 그이지만 않았다면 이 지역 주민들은 개성 사람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다.[12] 1970년부터 운행한 노선으로, 원래 서부여객 소속이었다가 2003년 파주신성교통으로, 2016년 신성여객 경영난 사태로 신일여객에게 넘겼다.[13] 물론 오픈 소스를 기반으로 한 오픈스트리트맵은 길찾기가 지원되며 내비게이션 사용도 가능하다.[14] '조산리' 쪽을 보면 된다. 여담으로 구글 스트리트뷰는 북한도 볼 수 있다.[15] 그래서 대성동 마을에서 범죄가 발생했을 시 한국 경찰이 대성동으로 들어갈 수 없으며, 때문에 범죄자를 일반 한국 경찰이 체포할 수 없다. 그렇다고 이곳이 치외법권 지대인 것은 아니며, 대성동 주민이 범법 행위를 하면 일단 대성동에서 추방되는 형식을 거친 후 외부에서 체포하는 형식으로 범죄인 인도 절차가 진행되고 나서 대한민국 법률에 의하여 규제를 받는다. 즉 중범죄를 저지르면 대한민국 법률에 따른 처벌은 물론 주민권 박탈에 대성동에서 추방까지 덤으로 당한다고 봐야 한다.[16] 성차별이 아닌 병역기피 목적으로 악용되는 사례를 막기 위한 제도다. 군필자만 받으면 되지 않냐는 의문이 들 수도 있겠지만 병역 의무는 군대 2년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그리고 예비군이나 민방위까지 끝난 사람이 굳이 대성동까지 찾아와서 살아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평생을 GOP, GP 같은 곳에서 사는 것이나 다름없다.[17] 즉, 처가 될 현지인 여성에게 오빠나 남동생이 없는 경우. 물론 있어도 이론상으로는 가능한데, 현지인 여성이 본인의 본관 변경을 법원에 제소해서 해당 여성이 새로운 가문의 1대가 되는 방법으로 기존의 호적에서 스스로 제적되면 된다. 그런데 사실 마을 자체가 편리성 면에서는 살기 좋은 환경이 아니어서, 이렇게까지 해서 들어올 남성이 얼마나 많을지는 의문이다. 실제로 요즘에는 허용 조건에 포함되는 남성이라도 들이기가 힘들다. 애초에 자발적으로 대성동 거주를 원치 않기 때문. 실제로 대성동 거주 문제 때문에 파혼한 사례가 있다고 할 정도이다. 또한 그 이전에 장노년층들이 거의 다수다.[18] 의용소방대원이 포함될 수 있냐는 강학상 논란이 있다.[19] 불교 승려는 종단에서 발급한 승려증, 개신교 목사는 안수증명서, 천주교 신부는 성품성사 통지서, 원불교는 교도증 등이 있다.[20] 봉사 목적과 대상 인원, 시간 등을 알려줘야 한다. 봉사 시간 이외에 이곳에서 머무는 것은 불법이므로 봉사 시간 내에만 활동해야 한다.[21] 이후 타지키스탄 두샨베 깃대, 2015년 9월 사우디아라비아 제다의 170m짜리 깃대가 타이틀을 이어가게 된다.[22] 대성동 마을을 소재로 한 OTT 드라마.[23] 유엔군사령부 군정 지역이라는 관점이 있다.[24] 유엔군사령부의 군정 기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