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 <colbgcolor=#c00d45,#c00d45><rowcolor=#fff> 내란 | 주도 세력 |
제2차 왕자의 난 | 이방간, 박포 | |
조사의의 난 | 이성계, 조사의 | |
이징옥의 난 | 이징옥 | |
단종 복위 운동 | 사육신 | |
김처의의 난 | 김처의 | |
이시애의 난 | 이시애 | |
임꺽정의 난 | 임꺽정 | |
정여립의 난 | 정여립 | |
송유진의 난 | 송유진 | |
이몽학의 난 | 이몽학 | |
이괄의 난 | 이괄 | |
이인거의 난 | 이인거 | |
삼수의 옥 | 정인중 등 노론 | |
이인좌의 난 | 이인좌 | |
나주 괘서 사건 | 윤지 | |
정유역변 | 홍상범 | |
황사영 백서 사건 | 황사영 | |
홍경래의 난 | 홍경래 | |
임술농민봉기 | 유계춘 등 진주 사람 | |
이필제의 난 | 이필제 | |
이재선 추대사건 | 안기영 등, 이하응 | |
임오군란 | 김장손, 유춘만 등 오군영의 일원 | |
갑신정변 | 김옥균 등 급진 개화파 | |
제1차 이준용 옹립 사건 | 이하응, 위안스카이 | |
이재면 추대 사건 | 이하응, 위안스카이 | |
동학 농민 혁명 | 전봉준 등 동학 농민군 | |
제2차 이준용 옹립 사건 | 이하응 | |
조선군 훈련대 반란사건 | 이두황 등 조선군 훈련대 | |
갑오의병 | 김원교, 서상철 등 | |
을미의병 | 유인석 등 조선 의병 | |
춘생문 사건 | 임최수, 이도철 등 친러파, 친미파 | |
신축민란 | 이재수, 오대현, 강우백 등 | |
혁명일심회사건 | 유길준, 장호익, 권호선, 조택현등 | |
을사의병 | 최익현 등 조선 의병 | |
고종 퇴위 반대 운동 | 고종, 시위혼성여단 등 양위 반대파와 민간인 시위대 | |
정미의병 | 이인영 등 13도 창의군 | |
※ 대한제국기의 사건 포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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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전쟁·전투 | 교전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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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러 국경 분쟁 | | ||
고종 퇴위 반대 운동 1907 | | ||
남대문 전투 1907 | | ||
정미의병 1907 | 서울 진공 작전 1907 | | |
남한 대토벌 작전 1909 | | }}}}}}}}} |
대한제국의 국권 피탈 과정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1875년 9월 20일 | 운요호 사건 | 일본의 근대적 군사 도발 |
1876년 2월 27일 | 강화도 조약 | 최초의 근대적ㆍ불평등 조약 체결 | |
1882년 7월 23일 | 임오군란 | 군란을 제압한 청군 주둔 | |
1882년 8월 30일 | 제물포 조약 | 군란을 이유로 일본공사관 경비 병력 주둔 | |
1884년 12월 4일 | 갑신정변 | 일본의 지원을 받은 급진개화파의 정변, 청군에 의해 진압 | |
1885년 1월 9일 | 한성조약 | 갑신정변으로 입은 피해에 대한 사과 및 배상을 요구하는 일본의 함대 무력 시위. 이로 인한 조선과 일본의 협상 제물포 조약에 의거한 경비 병력 주둔 재확인 | |
1885년 4월 18일 | 톈진 조약 | 갑신정변 이후 조선에 대한 청일 양국의 논의 파병된 청일 양국 군대 철수 및 향후 조선 출병시 상호 통지 | |
1894년 7월 23일 | 갑오사변 | 동학 농민 혁명 진압을 위해 청나라에 파병 요청, 제물포 조약과 톈진 조약을 빌미로 일본이 파병 전주 화약 후 조선의 양국 군대 철수 요청 이를 무시한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친일내각을 구성하고 갑오개혁 추진 | |
1894년 7월 25일 | 청일전쟁 | 서해 아산만 풍도에서 일본군이 청군을 기습하며 전쟁 발발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에 반발한 동학의 2차 봉기 및 갑오의병 발발 | |
1895년 4월 17일 | 시모노세키 조약 | 청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로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속방화 상실 | |
1895년 4월 23일 | 삼국간섭 |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압력으로 일본이 요동반도 반환 친일내각의 붕괴와 친러파의 대두 | |
1895년 10월 8일 | 을미사변 | 일본이 명성황후 살해 후 친일내각을 재구성 하고 을미개혁 추진, 이에 항거한 을미의병의 발발 | |
1896년 2월 11일 | 아관파천 | 고종이 감금돼 있던 경복궁을 탈출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망명 친일 내각 몰락, 친러 내각이 구성되고 근대화 추진과 대한제국 구상 | |
1896년 5월 14일 | 베베르-고무라 각서 | 일본제국이 한반도 세력권은 러시아 제국에 포함됨을 공인함. 러일 양국이 각국의 군대를 조선에 파견하는 것을 동의함. | |
1896년 6월 9일 |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 | 일본제국과 러시아제국은 조선이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차관을 도입하고자 한다면 합의하에 제공하고, 러시아와 일본에 한반도 내 전신선의 보호권이 있음을 명시. 양국은 한반도에서 소요사태 발생시 군대를 투입할 권한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함. | |
1897년 10월 12일 | 대한제국 선포 | 경운궁으로 환궁했던 고종이 황제에 오르고 제국을 선포, 광무개혁 추진 | |
1898년 4월 25일 | 니시-로젠 협정 | 러시아와 일본 간 협정. 대한제국에 대한 내정 불간섭, 대한제국의 군사적 지원 요청 시 상호협상 없이는 응하지 않을 것, 한일 양국 간 경제적 교류에 대해 러시아가 저해치 않을 것을 약속 | |
1902년 1월 30일 | 1차 영일동맹 | 일본이 대한제국에 특별한 이익이 있다고 영국이 승인 | |
1904년 1월 21일 | 대한제국 중립선언 | 대한제국은 러·일간 전쟁 시 중립임을 세계 각국에 선언 | |
1904년 2월 6일 | 러일전쟁 | 일본군의 러시아군 기습 공격으로 전쟁 발발. 일본군의 인천, 부산, 마산, 원산 상륙과 서울 및 경운궁 점령 | |
1904년 2월 23일 | 한일의정서 | 일본군의 대한제국 거점 주둔 | |
1904년 5월 31일 | 대한시설강령 발표 | 일본의 대한제국에 대한 이권 강화 | |
1904년 8월 22일 | 한일 외국인고문 용빙에 관한 협정서 (제1차 한일협약) | 외국인 고문을 두어 일본이 국정에 간섭(고문정치) | |
1905년 2월 2일 | 시마네현 고시 제40호 | 일본이 독도에 대한 자국 영토 편입을 일방적으로 선언 | |
1905년 4월 1일 | 한일통신기관협정서 | 대한제국의 통신 주권 침해 | |
1905년 4월 16일 | 대한제국군 감축 | 일본의 강요로 친위대 해산, 시위대와 진위대 감축 | |
1905년 7월 29일 | 가쓰라-태프트 밀약 |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해 종주권, 외교권을 대행할 것을 미국이 승인 | |
1905년 8월 12일 | 2차 영일동맹 |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해 정치상⋅군사상⋅경제상 특별한 이익이 있다고 영국이 승인 | |
1905년 8월 13일 | 한국 연해 및 내하의 항행에 관한 약정서 | 대한제국의 연근해 주권 침해 | |
1905년 9월 5일 | 포츠머스 조약 |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해 관리, 감독, 보호할 것을 러시아가 승인 | |
1905년 11월 17일 | 을사조약 (제2차 한일협약) |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 일본인 통감이 외교권 행사(통감정치), 한국의 보호국화 을사의병 발발 | |
1907년 7월 20일 | 고종 황제 퇴위 | 헤이그 특사를 파견한 고종 황제가 이토 히로부미의 협박으로 강제 퇴위, 고종 퇴위 반대 운동이 일어났으나 일본군에 진압됨. 순종 황제 즉위 | |
1907년 7월 24일 | 정미 7조약 (제3차 한일협약) | 일본인 차관의 내정 간섭(차관정치) 부속각서에 대한제국군 해산 명시 | |
1907년 8월 1일 | 대한제국군 해산 | 시위대 해산을 시작으로 8~9월 진위대 해산 남대문 전투, 정미의병 발발 | |
1909년 7월 12일 | 기유각서 | 대한제국의 사법권⋅교도 행정권 박탈, 일본이 대행 한국의 속령화 | |
1909년 9월 1일 | 남한대토벌 | 10월 말까지 두달에 걸친 일제의 남한 내 모든 의병 소탕, 항일의병의 만주 이동 | |
1909년 9월 4일 | 간도협약 | 조선과 대한제국의 간도영유권 시도 전면 수포화, 일본의 만주 철도부설권 확보 | |
1910년 6월 24일 | 한일약정각서 | 대한제국의 경찰권 박탈, 일본이 대행 | |
1910년 8월 29일 (체결일 8월 22일) | 경술국치 (한일병합조약) | 대한제국 멸망 및 강제합병 | |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2조 (a)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비롯한 한국에 대한 일체의 권리와, 소유권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 제2조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 |
1907년 7월 20일 경운궁에서 퇴궐하는 이토 히로부미 통감. 주변에 기관총을 장비한 일본군이 삼엄한 경계를 서는 모습을 통해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엿볼 수 있다. | |
일시 | |
1907년 7월 19일 ~ 8월 1일 ([age(1907-07-19)]주년) | |
장소 | |
한성부를 중심으로 한 대한제국 전역 | |
원인 | |
일본의 고종 강제 퇴위 추진에 대한 전국적 반발 | |
교전 세력 | |
대한제국 근황파 및 민간인 시위대 | 한국통감부 한국주차군 이완용 내각 |
지휘관 | |
|
|
전력 | |
시위혼성여단
| 일본 한국주차군
|
피해 | |
불명 | |
결과 | |
일본의 무력 진압 고종 강제 양위 및 순종 즉위 | |
영향 | |
정미7조약 체결 및 대한제국군 해산 결정 남대문 전투와 정미의병 발발 |
1. 개요
[한국 군대의 무장해제 외 황제의 일본 移送說 및 宗廟에의 양위 보고]
(신문전보 발송 20, July, 1907, 1.00 p.m.)
Herald Paris
20일 이른 아침 대궐과 모든 전략지점을 경비하는 기관총과 시의 전체지역을 순찰하는 일본군 기병들의 모습은 소란 진정에 효과가 있었음. 그러나 한국인들 사이의 흥분은 군 당국의 모든 사전조치에 의해서도 진정되지 않는 것이 분명함. 다음은 어제 있었던 한국 군대의 폭동으로 큰 화제가 된 사건들임. 즉 군관학교 학생들이 비밀리에 여러 곳에 많은 탄약을 저장한 것이 발견되었고, 한국 군대는 여러 관청을 공격하여 점령하려고 했음. 한국 군대에서 가장 우수한 平壤聯隊가[1] 황제를 구출하기 위해 대궐을 점령할 계획이 발각되어 모든 한국 군대가 무장해제 되는 결과로 귀착되었음. ( ) ( )은 일본당국의 입장에서는 양위는 일본의 요구를 만족시켜 주는 것이 못되며 오직 계획 중 제1단계에 불과하다는 것을 고취했음. 황제가 일본으로 이송된다는 풍문이 되살아나자 바로 이것이 다른 무엇보다도 한국인의 감정을 세차게 요동치게 했음. 아직까지는 伊藤과[2] 林은[3] 東京政府의[4] 계획을 드러내고 있지 않지만 황제의 이송은 분명 아마도 그가 섭정하여 황태자를 조종할 우려에 비추어 그 실현성을 노리고 있을 것임. 오늘 아침 일찍이 대궐의 고위관리가 종묘에 보고하여 황실 조상들의 신령들에게 정식으로 왕위의 변화를 알리고 지금 즉위식을 위한 준비를 서두르고 있음. 군사령부는 어제의 폭동으로 일본인 피살 10명, 부상 30명을 발표했음. 한국인은 피살 4명 외에는 발표되지 않았으나 이는 분명 극소수 한국 군인을 제외하고는 사상자의 정도를 감추기 위한 것일 것임. 폭동에 참가한 한국인들에게는 돌멩이 외에는 무기가 없었음.
Ohl.
(신문전보 발송 20, July, 1907, 1.00 p.m.)
Herald Paris
20일 이른 아침 대궐과 모든 전략지점을 경비하는 기관총과 시의 전체지역을 순찰하는 일본군 기병들의 모습은 소란 진정에 효과가 있었음. 그러나 한국인들 사이의 흥분은 군 당국의 모든 사전조치에 의해서도 진정되지 않는 것이 분명함. 다음은 어제 있었던 한국 군대의 폭동으로 큰 화제가 된 사건들임. 즉 군관학교 학생들이 비밀리에 여러 곳에 많은 탄약을 저장한 것이 발견되었고, 한국 군대는 여러 관청을 공격하여 점령하려고 했음. 한국 군대에서 가장 우수한 平壤聯隊가[1] 황제를 구출하기 위해 대궐을 점령할 계획이 발각되어 모든 한국 군대가 무장해제 되는 결과로 귀착되었음. ( ) ( )은 일본당국의 입장에서는 양위는 일본의 요구를 만족시켜 주는 것이 못되며 오직 계획 중 제1단계에 불과하다는 것을 고취했음. 황제가 일본으로 이송된다는 풍문이 되살아나자 바로 이것이 다른 무엇보다도 한국인의 감정을 세차게 요동치게 했음. 아직까지는 伊藤과[2] 林은[3] 東京政府의[4] 계획을 드러내고 있지 않지만 황제의 이송은 분명 아마도 그가 섭정하여 황태자를 조종할 우려에 비추어 그 실현성을 노리고 있을 것임. 오늘 아침 일찍이 대궐의 고위관리가 종묘에 보고하여 황실 조상들의 신령들에게 정식으로 왕위의 변화를 알리고 지금 즉위식을 위한 준비를 서두르고 있음. 군사령부는 어제의 폭동으로 일본인 피살 10명, 부상 30명을 발표했음. 한국인은 피살 4명 외에는 발표되지 않았으나 이는 분명 극소수 한국 군인을 제외하고는 사상자의 정도를 감추기 위한 것일 것임. 폭동에 참가한 한국인들에게는 돌멩이 외에는 무기가 없었음.
Ohl.
고종의 강제 양위를 계기로 1907년 7월 말 벌어진 전국적인 근황 운동이자 한국 독립운동. 민군이 함께한 운동이었으며 시위혼성여단의 정변 시도와 민간인 시위대의 집회가 이어졌다.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일본이 고종의 남은 황제권을 회수하여 강제 퇴위시키려 시도하자 7월 19일부터 경운궁 앞에서 양위에 반대하는 대대적인 시위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한편 정위 임재덕이 이끄는 시위혼성여단 제1보병연대 제3대대가 주도하여 일본의 꼭두각시인 이완용 내각의 주요인사들을 처단하고 주요 관청들을 장악, 황제의 퇴위를 저지하려 하였다. 그러나 친일내각을 통하여 정보를 입수한 이토 히로부미의 한국통감부 및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이끄는 한국주차군의 반격으로 실패하고 진압당했다.
정변 진압 이후에도 혼란은 가시지 않았다. 시위혼성여단 장병들은 무장해제를 거부하며 일본과 대치상태를 이어나갔다. 민간인들의 시위는 한성부를 넘어 전국 각지로 번져나갔다. 그들은 이완용을 비롯한 친일파 각료들의 가택과 일진회를 공격하는 등 항쟁의 주력으로 부상한다. 그러자 통감부는 신속히 본국에서 증원군을 불러오고 정미7조약 체결, 보안법 제정, 대한제국군 해산으로 응수하며 한국 정부의 남은 저항여력을 10일 만에 전부 분쇄했다.
하지만 일부 시위대 장병들은 군대해산에 분개하여 남대문 전투를 일으켰고, 의병들과 함께 전국적 항쟁인 정미의병의 신호탄을 쏘아 올리게 된다. 즉 남대문 전투와 정미의병은 개별적, 단발적으로 벌어진 사건이 아니다. 이는 고종의 강제 양위에 대한 한국 민군의 거국적 반발로 이미 긴장이 오를 대로 오른 상태에서 박승환의 자결을 계기로 결국 항쟁이 촉발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1907년 7월 19일부터 본격화된 한국인들의 항쟁은 이후 의병전쟁을 거쳐 국외무장독립투쟁과 3.1 운동으로 이어진다.
현재까지 본 사건을 지칭하는 합의된 명칭은 없다.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 심철기는 "고종황제 강제퇴위와 의병전쟁"에서 "고종황제강제퇴위 반대운동"이라고 지칭했으며 충남대 교수 김상기는 논문 高宗의 헤이그특사 파견과 국내항일투쟁에서 "고종퇴위 반대투쟁"이라고, 우리역사넷은 "고종양위 반대 운동"이라 이름붙였다.
2. 주요 인물
2.1. 양위 반대파
※ 8월 1일 남대문 전투 시점까지 포함.※ 독립운동가로 인정받는 사람은 볼드 표시
2.2. 진압군
- 이완용 내각
- 한국통감부
- 통감 이토 히로부미
- 대한제국 경무청 -> 경시청[7]
- 한국주차군사령부
- 일본 해군
- 제2함대 - 함대사령관 데라가키 이조(寺垣猪三) 해군소장[15]
- 카사기급 방호순양함 카사기
- 니타카급 방호순양함 니타카
- 비방호순양함[16] 치하야
- 그 외 구축함 3척
3. 전개
3.1. 배경: 헤이그 특사와 고종의 강제 퇴위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를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헤이그 특사#s-|]]번 문단을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헤이그 특사#|]] 부분을
참고하십시오.(3) [헤이그(海牙) 체재 한국 황제의 밀사 성명·자격 조회 및 對韓 조치에 관한 件]
往電第五五號
明治四十年七月三日 午前二時 發[17]
伊藤 統監[18]
林 外務大臣[19]
貴電 제119호에 대한 건 헤이그(海牙)에서 운동중인 한국인 3명의 이름은 무엇이고, 그들 배후에서 미국인 헐버트라는 자가 지휘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과연 사실인지 여부와 또 그 한국인은 한국 황제폐하의 칙명에 따라 평화회의 위원으로 대우를 받고자 노력하는지 여부를, 都筑 大使에게[20] 확인하도록 전보로 지시 바람. 한국인의 이름은 都筑을 통해 네리도프에게[21] 물었으며, 이름을 확인한 후에 적절한 기회를 봐서 都筑이 그 3명을 면담하여 직접 칙명에 의한 것인지 여부를 밝히는 데에는 지장이 없을 것으로 보임. 그 운동이 참으로 칙명에 의한 것이라면 우리정부도 이 기회에 한국에 대한 국면 일변의 행동을 취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함. 곧 앞에 기록한 음모가 확실하면 稅權[22]·兵權[23] 또는 재판권을 우리 측이 장악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으로 믿음. 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은 시국의 진전에 따라 제의할 것임.
그리고 또 貴電 제118호로 러시아 外務大臣이[24] 프란손에[25] 대한 훈령은 실제로 이것을 발신한 것인지 아닌지 넌지시 본인에게 추궁할 예정임.
往電第五五號
明治四十年七月三日 午前二時 發[17]
伊藤 統監[18]
林 外務大臣[19]
貴電 제119호에 대한 건 헤이그(海牙)에서 운동중인 한국인 3명의 이름은 무엇이고, 그들 배후에서 미국인 헐버트라는 자가 지휘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과연 사실인지 여부와 또 그 한국인은 한국 황제폐하의 칙명에 따라 평화회의 위원으로 대우를 받고자 노력하는지 여부를, 都筑 大使에게[20] 확인하도록 전보로 지시 바람. 한국인의 이름은 都筑을 통해 네리도프에게[21] 물었으며, 이름을 확인한 후에 적절한 기회를 봐서 都筑이 그 3명을 면담하여 직접 칙명에 의한 것인지 여부를 밝히는 데에는 지장이 없을 것으로 보임. 그 운동이 참으로 칙명에 의한 것이라면 우리정부도 이 기회에 한국에 대한 국면 일변의 행동을 취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함. 곧 앞에 기록한 음모가 확실하면 稅權[22]·兵權[23] 또는 재판권을 우리 측이 장악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으로 믿음. 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은 시국의 진전에 따라 제의할 것임.
그리고 또 貴電 제118호로 러시아 外務大臣이[24] 프란손에[25] 대한 훈령은 실제로 이것을 발신한 것인지 아닌지 넌지시 본인에게 추궁할 예정임.
[황제에 대한 內閣의 양위 권고를 알게 된 한국인들의 반응]
(신문전보 Seidaimon post Office, 18th, 9.55 Rec'd)
Herald Paris
오늘 한국의 수도는 격심한 흥분 속에 있음. 조약에 의해 한국이 일본의 보호권을 수락한 이후 한국인들은 일본의 요구로 간주되는 내각의 엄청난 권고와 폭로에 의해 처음으로 불타올랐음. 황제에 대한 한국인들의 극심한 애정으로 각계각층은 삽시간에 깊은 비통 속에 빠졌음. 일본은 이에 몹시 분격하여 황제에게 섭정에 통치권을 이양하고 사과하는 창피를 당할 것을 요구했음. 이 폭로로 죄를 지은 대신에게는 거리낌 없이 생명에 대한 위협이 뒤따랐음. 거기에 李 公이[26] 헤이그에서 다른 나라 대표들 면전에서 자살했다는 보도가 있었음. 확증은 없으면서도 지방신문은 상세한 사항을 극적으로 게재하여 흥분의 도를 더했는데, 마침 伊藤과[27] 내각대신들이 황제와 공식회견을 가진다는 뜻밖의 발표가 있었음. 伊藤과 長谷川[28] 將軍은 경찰이 도열한 가운데 대궐까지 군대 호위 하에 나아갔음. 2시간 계속된 회견 후 한국인들은 황제가 일본으로 이송된다는 풍문을 퍼뜨림으로써 당연히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었음. 한국인들은 많은 비밀회합을 가졌는데, 林 子爵의[29] 오늘밤 도착은 큰 시위 표시라고 말했음. 외부대신에 대한 일본인들의 열렬한 환영은 그의 동포들에게 극단적인 수단을 취할 것을 몹시 바라는 지시와도 같았음. 오늘밤 대궐의 경찰은 황제를 유괴하려는 어떤 노력으로 유혈을 예고하는 한국인 측의 군사상의 준비와 봉기에 대비해 증원될 것임.
OHL
(신문전보 Seidaimon post Office, 18th, 9.55 Rec'd)
Herald Paris
오늘 한국의 수도는 격심한 흥분 속에 있음. 조약에 의해 한국이 일본의 보호권을 수락한 이후 한국인들은 일본의 요구로 간주되는 내각의 엄청난 권고와 폭로에 의해 처음으로 불타올랐음. 황제에 대한 한국인들의 극심한 애정으로 각계각층은 삽시간에 깊은 비통 속에 빠졌음. 일본은 이에 몹시 분격하여 황제에게 섭정에 통치권을 이양하고 사과하는 창피를 당할 것을 요구했음. 이 폭로로 죄를 지은 대신에게는 거리낌 없이 생명에 대한 위협이 뒤따랐음. 거기에 李 公이[26] 헤이그에서 다른 나라 대표들 면전에서 자살했다는 보도가 있었음. 확증은 없으면서도 지방신문은 상세한 사항을 극적으로 게재하여 흥분의 도를 더했는데, 마침 伊藤과[27] 내각대신들이 황제와 공식회견을 가진다는 뜻밖의 발표가 있었음. 伊藤과 長谷川[28] 將軍은 경찰이 도열한 가운데 대궐까지 군대 호위 하에 나아갔음. 2시간 계속된 회견 후 한국인들은 황제가 일본으로 이송된다는 풍문을 퍼뜨림으로써 당연히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었음. 한국인들은 많은 비밀회합을 가졌는데, 林 子爵의[29] 오늘밤 도착은 큰 시위 표시라고 말했음. 외부대신에 대한 일본인들의 열렬한 환영은 그의 동포들에게 극단적인 수단을 취할 것을 몹시 바라는 지시와도 같았음. 오늘밤 대궐의 경찰은 황제를 유괴하려는 어떤 노력으로 유혈을 예고하는 한국인 측의 군사상의 준비와 봉기에 대비해 증원될 것임.
OHL
고종이 보낸 헤이그 특사가 발각당하자 일본은 이를 기회로 하여 한국의 남은 권리를 박탈하고자 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한국 황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일본이 직접 이를 한국에 요구할 경우 한국 국민들의 반발이 격심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므로, 일본은 우선 꼭두각시 이완용 내각에 지시하여 한국 정부 스스로가 고종을 끌어내리게끔 하였다. 이에 이완용과 송병준을 비롯한 친일 각료들은 어전에서 고종을 며칠에 걸쳐 협박하였다. 내부대신 송병준은 일진회원들을 동원해 경운궁을 포위했고, 법부대신 조중응은 궁과 외부의 전화선을 끊어 고종을 고립시켰다. 결국 7월 19일 고종은 양위 문서에 서명한다.
3.2. 7월 19일
[양위 결정과정과 국민의 동요 및 시위상황]
(十九日 午後二時三十分發電)[30]
Herald Paris
양위 문제가 절정에 도달했음. 황제와 대신들이 합석한 각의가 계속된 밤 내내, 대신들은 상황에 비추어 가능한 유일한 조치를 충심으로 촉구했음. 대궐에서 나온 믿을만한 소식에 의하면 황제는 식사를 계속 하면서도 최대한으로 장시간을 양위에 반대해 싸우다가 마침내 일본의 대포가 대궐을 조준하고 있다는 위급한 호소에 굴복하고 말았음. 전 황제가 믿을만한 추종자들에게 실토하기를, 미국 및 러시아영사관을 피신처로 할 수 있는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하면서 최후에는 자살을 위해 아편을 입수하기 위한 여러 번의 노력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음. 아침 일찍 대신들이 준비한 양위선언문에 옥새를 찍었음. 왕위를 계승받는 황태자는 지금, 밤 동안 대궐 근처에서 흥분한 한국인 군중을 진정시키고 있다는 소문이 자자함. 황제에게는 진정시키려고 하는 여러 가지 노력이 있었음. 시위는 소총으로 무장된 규모가 큰 일본 경찰에 의해 저지되었음. 이른 아침시간 거리에는 사람들이 흐느껴 울면서 운집했으며, 관보에서 완전히 확인된 10시에는 대궐 정문 주변에 1만 명의 한국인이 모여들었음. 시위는 처음에는 평화로웠으나 격정에 사로잡힌 연사의 영향으로 서로가 흥분하기 시작했음. 연설의 공격목표는 일본인들과 특히 일본인들의 앞잡이로 드러난 내각대신들이었음. 동요의 도가 매우 격렬해졌으므로 육군장교의 지휘 하에 경찰은 소총의 개머리판으로 밀어붙이면서 내쫓았으며 여러 번의 충돌에서 경찰은 돌에 맞았음. 한국인 몇 사람이 심하게 얻어맞았으나 중상자는 없었음. 흥분이 더욱 심해지자 대궐과 한국인들에게 죄를 지은 대신들의 저택 주변은 엄중 경계에 들어갔으니, 황제는 40년 동안 이 나라의 애국심의 구현대상이었던 셈이며, 양위를 국가의 최종적인 파멸로 간주하고 있는 것임.
Ohl
(十九日 午後二時三十分發電)[30]
Herald Paris
양위 문제가 절정에 도달했음. 황제와 대신들이 합석한 각의가 계속된 밤 내내, 대신들은 상황에 비추어 가능한 유일한 조치를 충심으로 촉구했음. 대궐에서 나온 믿을만한 소식에 의하면 황제는 식사를 계속 하면서도 최대한으로 장시간을 양위에 반대해 싸우다가 마침내 일본의 대포가 대궐을 조준하고 있다는 위급한 호소에 굴복하고 말았음. 전 황제가 믿을만한 추종자들에게 실토하기를, 미국 및 러시아영사관을 피신처로 할 수 있는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하면서 최후에는 자살을 위해 아편을 입수하기 위한 여러 번의 노력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음. 아침 일찍 대신들이 준비한 양위선언문에 옥새를 찍었음. 왕위를 계승받는 황태자는 지금, 밤 동안 대궐 근처에서 흥분한 한국인 군중을 진정시키고 있다는 소문이 자자함. 황제에게는 진정시키려고 하는 여러 가지 노력이 있었음. 시위는 소총으로 무장된 규모가 큰 일본 경찰에 의해 저지되었음. 이른 아침시간 거리에는 사람들이 흐느껴 울면서 운집했으며, 관보에서 완전히 확인된 10시에는 대궐 정문 주변에 1만 명의 한국인이 모여들었음. 시위는 처음에는 평화로웠으나 격정에 사로잡힌 연사의 영향으로 서로가 흥분하기 시작했음. 연설의 공격목표는 일본인들과 특히 일본인들의 앞잡이로 드러난 내각대신들이었음. 동요의 도가 매우 격렬해졌으므로 육군장교의 지휘 하에 경찰은 소총의 개머리판으로 밀어붙이면서 내쫓았으며 여러 번의 충돌에서 경찰은 돌에 맞았음. 한국인 몇 사람이 심하게 얻어맞았으나 중상자는 없었음. 흥분이 더욱 심해지자 대궐과 한국인들에게 죄를 지은 대신들의 저택 주변은 엄중 경계에 들어갔으니, 황제는 40년 동안 이 나라의 애국심의 구현대상이었던 셈이며, 양위를 국가의 최종적인 파멸로 간주하고 있는 것임.
Ohl
황태자 대리(皇太子代理)의 소식이 전해지자, 도내(都下)의 인민들이 격분하여 아침부터 종로 등 각처에 모여 혹은 통곡하고, 혹은 내각대신들을 성토하였으며, 일부 시민은 표훈원(表勳院)으로 몰려가 투석하는 등 항의운동을 일으켰다.
한편 동우회(同友會)에서는 전일 이래 다시 동회 사무소에 집합하여 국권을 수호하기 위한 각종 결의를 하고, ‘국민결사회(國民決死會)’라는 것을 만들어 군중들에게 연설하여 이들을 격동시켰다.
이때 종로에서는 군중과 경찰이 충돌하여 사상자를 내었는데, 오후 4시 50분경 시위보병 제1연대 제3대대 병사의 일부가 무기를 가지고 병영을 탈출하여 종로에 나타나 2대로 나뉘어, 1대는 종로 순사파출소를 습격하여 건물·전화기 등을 파괴하고, 다른 1대는 전방 도로에서 경계하며 일본 경찰관에게 사격하여 30여 명의 사상자를 내게 하였다.
또 약 30분 후에 제2대대의 한국군 수 명이 병영을 나와 경무청에 발포하였다.
한편 격분한 시민들은 밤 11시경 일진회의 기관지인 국민신보사를 습격하여 건물을 파괴하고 들어가 사원을 구타·부상시켰다.
출전: 官報 隆熙 元年 9月 5日·7日
한편 동우회(同友會)에서는 전일 이래 다시 동회 사무소에 집합하여 국권을 수호하기 위한 각종 결의를 하고, ‘국민결사회(國民決死會)’라는 것을 만들어 군중들에게 연설하여 이들을 격동시켰다.
이때 종로에서는 군중과 경찰이 충돌하여 사상자를 내었는데, 오후 4시 50분경 시위보병 제1연대 제3대대 병사의 일부가 무기를 가지고 병영을 탈출하여 종로에 나타나 2대로 나뉘어, 1대는 종로 순사파출소를 습격하여 건물·전화기 등을 파괴하고, 다른 1대는 전방 도로에서 경계하며 일본 경찰관에게 사격하여 30여 명의 사상자를 내게 하였다.
또 약 30분 후에 제2대대의 한국군 수 명이 병영을 나와 경무청에 발포하였다.
한편 격분한 시민들은 밤 11시경 일진회의 기관지인 국민신보사를 습격하여 건물을 파괴하고 들어가 사원을 구타·부상시켰다.
출전: 官報 隆熙 元年 9月 5日·7日
이준 열사가 헤이그에서 자결하고, 일본이 황제를 압박하여 퇴위시킬 것이며 일본 외무대신 하야시 다다스가 한국에 들어온다는 소식은 한성부 주민들에게도 퍼져나갔다. 여기에 고종이 일본으로 압송될 것이라는 소문마저 퍼져버리자 동우회를 비롯한 시민단체들의 궐기가 7월 17일부터 이어졌다. 이 와중에 7월 19일 새벽 3시에 고종이 결국 퇴위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민심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다.
양위 소식을 들은 시민들이 궁으로 향하면서 19일 오전 10시에는 덕수궁 대한문 및 포덕문 앞에 자그마치 1만에 달하는 군중이 운집했다. 참고로 "한국호구표"에서 1907년 당시 한성부 내 한국인 인구가 199,325명이라 밝히고 있으므로, 1만 명의 시위대는 2025년 기준으로 대략 40~50만 명이 운집한 것과 상응한다. 시위는 처음에는 평화로웠으나 갈수록 분위기가 격앙되었다. 대한문 앞의 군중들은 결국 무력으로 해산되었으나 한성 곳곳으로 데모가 번졌다. 군중들은 진압하려는 일본 경찰과 군대 및 그 꼭두각시인 한국 순검들에게 석전으로 응수했다. 일진회의 기관지인 국민신보사 역시 공격받아 파괴되었다.
오후 4시가 지나면서는 군대가 시위대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대한제국 육군의 주력부대인 시위혼성여단[31] 제1연대 3대대 장병 30명이[32] 고종이 결국 양위하게 된 것에 격분하여 무장탈영, 양위를 반대하는 민간인 시위대에 합세하여 진압중이던 일본 경찰에게 발포했다. "헌병사령관 보고(1907년 7월 20일)"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10명이 사망하고 25명이 부상을 입었다. 곧이어 2대대 장병들 역시 병영 문을 박차고 뛰쳐나와 경찰에 발포하였다.
3.3. 7월 19일 밤, 시위 1연대 3대대의 정변 시도
[한국 황제 양위로 인한 한국군대의 동요 및 일본군의 조치에 관한 件]
往電第七三號
明治四十年七月二十日 午前二時三○分 發[33]
統監
珍田 外務次官[34]
林 大臣으로부터
어제 19일 오후 한국 國務大臣에[35] 대한 京城의[36] 인심은 한층 더 격앙되었으며, 특히 侍衛隊(近衛隊)는[37] 매우 격분하여 같은 날 한밤중에 궁중에 난입하여 각 국무대신을 살해하려는 계획을 세우는 등 형세가 극히 험악함. 軍部와[38] 法部[39] 양 대신은 궁중을 벗어나 이날 밤 11시경 統監 관저에[40] 이르러 이상의 급보를 전하고는, 아울러 往電 제68호 한국 황제의 위임에 따라, 우리 병력으로 앞에 기록한 각 대신의 보호를 요청하였음. 그에 따라 長谷川 司令官은[41] 곧 우리 주둔군을 왕궁의 각 요소에 배치하고, 때에 따라 적절한 행동을 취하도록 명하였음. 그 후 우리 군대는 동 11시 58분 각각 배치를 완료하였음. 이상을 우선 급히 전보함.
- 1907년 07월 20일자 통감부문서
往電第七三號
明治四十年七月二十日 午前二時三○分 發[33]
統監
珍田 外務次官[34]
林 大臣으로부터
어제 19일 오후 한국 國務大臣에[35] 대한 京城의[36] 인심은 한층 더 격앙되었으며, 특히 侍衛隊(近衛隊)는[37] 매우 격분하여 같은 날 한밤중에 궁중에 난입하여 각 국무대신을 살해하려는 계획을 세우는 등 형세가 극히 험악함. 軍部와[38] 法部[39] 양 대신은 궁중을 벗어나 이날 밤 11시경 統監 관저에[40] 이르러 이상의 급보를 전하고는, 아울러 往電 제68호 한국 황제의 위임에 따라, 우리 병력으로 앞에 기록한 각 대신의 보호를 요청하였음. 그에 따라 長谷川 司令官은[41] 곧 우리 주둔군을 왕궁의 각 요소에 배치하고, 때에 따라 적절한 행동을 취하도록 명하였음. 그 후 우리 군대는 동 11시 58분 각각 배치를 완료하였음. 이상을 우선 급히 전보함.
- 1907년 07월 20일자 통감부문서
[일본 군대의 대궐 경비 하에서의 황태자의 즉위식 및 외국 사신의 접견]
(신문전보 발송 20/7/1907, 3.30 p.m.)
Associated San Francisco
어젯밤 전 황제가 한밤중에 대궐에 들어가 양위에 책임이 있는 내각대신 전원을 살해하도록 비밀리에 황실경비대에 명령한 음모가 伊藤에게[42] 보고되어 일본 군대가 대궐을 수비 중이라는 공식발표가 있었음. 상기 음모의 실현 가능성을 알리기 위해 11시에 伊藤을 방문한 한국 군부대신과 법무대신은 즉각적인 도움을 간청했음. 전 황제의 폭동진압 요청을 이미 받고 있는 伊藤은 즉시 長谷川에게 군대 출동을 명령했으며 그 군대는 한국 경비대의 계획된 공격이 대궐 통용문 반대쪽 병영으로부터 있기 전인 4시 반에 도착했음. 황태자의 즉위식은 오늘 10시에 거행되었음. 일본 및 외국 관리들에 대한 접견 희망에 따라 문관 및 무관 참모들은 4시 30분에 알현하였음. 즉위식 후 전 황제는 내각대신들과 작별했음. 長谷川 부대는 여전히 대궐을 수비 중이며 平壤聯隊는[43] 증원 차 아침에 서울에 도착했음. 20일.
McCormick
(신문전보 발송 20/7/1907, 3.30 p.m.)
Associated San Francisco
어젯밤 전 황제가 한밤중에 대궐에 들어가 양위에 책임이 있는 내각대신 전원을 살해하도록 비밀리에 황실경비대에 명령한 음모가 伊藤에게[42] 보고되어 일본 군대가 대궐을 수비 중이라는 공식발표가 있었음. 상기 음모의 실현 가능성을 알리기 위해 11시에 伊藤을 방문한 한국 군부대신과 법무대신은 즉각적인 도움을 간청했음. 전 황제의 폭동진압 요청을 이미 받고 있는 伊藤은 즉시 長谷川에게 군대 출동을 명령했으며 그 군대는 한국 경비대의 계획된 공격이 대궐 통용문 반대쪽 병영으로부터 있기 전인 4시 반에 도착했음. 황태자의 즉위식은 오늘 10시에 거행되었음. 일본 및 외국 관리들에 대한 접견 희망에 따라 문관 및 무관 참모들은 4시 30분에 알현하였음. 즉위식 후 전 황제는 내각대신들과 작별했음. 長谷川 부대는 여전히 대궐을 수비 중이며 平壤聯隊는[43] 증원 차 아침에 서울에 도착했음. 20일.
McCormick
한편 상술한 바와 같이 군 내에서도 격앙된 분위기가 흐르기 시작하면서, 정위 임재덕이 이끄는 시위혼성여단 1연대 3대대는 경운궁으로 진격하여 고종의 신병을 확보하고 퇴위를 저지한다는 계획을 세운다. 그 외 통감부문서에 따르면 군사학교 역시 가담하여 각지에 탄약을 옮겨 보관했으며,[44] 이외에도 각 관청을 공격해 점령하려던 것으로 파악된다.
1907년 7월 20일자 통감부문서에서[45] 나타나는 정황에 따르면 시위대를 호출한 것은 다름아닌 황제 고종 본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친일 내각이 경운궁에 한데 모인 순간을 고종이 노렸다고 판단했다. 정황상 고종은 시위연대를 불러와 이완용 등의 친일 내각을 한꺼번에 일망타진하고 양위를 무효화하려던 것으로 보인다. 시위 제1연대 3대대는 가장 반일 성향이 강한 부대로 여겨졌다. 그들은 궁내부 대신 박영효[46], 시종원경 이도재, 남정철 그리고 4명의 고위 군 장교와 공모하여 작전을 계획했다. 대한기년사의 기록으로 미루어 보면 이 4명의 장교는 어담, 이희두, 이갑, 그리고 김재풍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19일 밤 시행되려던 이 계획은 친일파인 군부대신 이병무와 법부대신 조중응에게 간파당하고 말았다. 19일 밤 11시 경 통감 관저로 급히 달려온 이 둘을 통해 정보를 입수한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주차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에게 일본군 출동을 명령했으며, 하세가와는 우선 신속히 제51보병연대[47] 3대대를 파견하였다. 또한 평양에 주둔한 52연대의 1개 대대를 한성으로 불러들였으며 한성의 나머지 부대들은 각 병영에 1개 소대씩 남긴 뒤 주차군사령부로 모이도록 하였다. 야포병 제17연대 소속 포대의 대포 6문은 한성부 시내를 감제하는 남산 화성대(和城臺)에 방렬하여 유사시 포격이 가능하도록 했다.
대관정(大觀亭)에 주둔하여[48] 경운궁 대한문과 가까운 위치에 있던 일본 제51연대는 한국군의 공격이 있기 30분 전인 4시 반에 경운궁에 도착하여 포덕문을 차단하고 궐내에 2문의 기관총을 설치했다. 그리고 한국군 1연대 3대대를 포위해 고종 구출 시도를 저지한다.
3.4. 8월 1일까지
[양위 후의 한국 정세 및 對韓정책 稟申 件]
往電第八○號 電信案
明治四十年七月二十二日[49]
統監[50]
珍田 外務次官[51]
林 外相으로부터[52] 西園寺 首相에게[53]
현재 京城의 형세를 보건대 원래 先帝는[54] 閣臣의[55] 권고에 따라 그 본심이 아닌 양위를 한 것이기 때문에 이후 여러 가지 음험한 수단으로 군주권을 회복하려고 기도하는 듯함. 다음의 사실은 즉 이것을 증명하는 것임.
첫째, 閣臣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 18일 조칙에서 양위의 의미를 명백히 하려는 閣臣의 요구에 대하여 先帝는 이를 거부하고 굳이 황태자로 하여금 대리시킨다고 운운하는 문자를 내놓게 했다고 말함. 이 일은 선례를 들어 일본에서 사용하는 ‘대리’의 글자와 다른 의의가 있다고 설명하지만 필경 섭정의 뜻이며, 실은 先帝가 후일 君權을[56] 회복하기 위하여 미리 발판을 만들어 두려고 하는 내심을 가진 데 따른 것임을 의심할 바 없음. 朴泳孝[57] 등이 이미 이 설을 주장한다고 함.
둘째, 양위 조칙을 공포한 날 밤에 先帝가 시위대(한국 근위병)를 궁중에 부른 것은 그 진의가 병력으로 閣員을[58] 진압하여 시의에 따라서는 이를 살육하려고 꾀한 데 있었다는 증적이 현저함.
다만 이 거동은 통감의 명에 의하여 한국 병정 출동 예정시각 약 30분 전에 우리 군대를 궁중에 들어오게 하여 겨우 이를 방지할 수 있었음.
셋째, 朴泳孝는 지난 18일 先帝에 의하여 궁내대신에 임명되었는데 병으로 사퇴하고 어제 양위식에도 참석하지 않았으므로 閣臣은 이를 처벌할 것을 청했더니 차제에 불길하다는 이유로 처벌을 면하고 다만 사직을 받아들이는 데 그치는 것을 총리대신에게 명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제 20일, 즉 양위 후 이틀 후에 同 先帝는 朴泳孝를 궁내대신에 親任하는 식을 올렸으나 閣臣은 조금도 이를 알지 못했음.
위 외에 군대의 동요와 난민의 폭거 등은 先帝의 사주에서 나왔거나 혹은 先帝의 뜻을 받들어 일어나는 것으로 직간접으로 내각대신의 사업을 저지하고 방해하려고 도모하는 것이 명백함.
요컨대 현재의 형세는 한편으로 先帝는 음험한 수단으로 군주권을 회복하려고 하고, 다른 한편으로 閣臣은 新帝를[59] 옹립하여 정부를 유지하려고 하여 아직 전쟁은 없지만 사실 君位 쟁탈, 즉 내란의 정황에 있음. 그리고 先帝는 다년간 국가의 군주였으므로 威福에[60] 의하여 많은 방면에 다대한 세력을 가지고 있지만, 내각대신은 다만 일본의 후원을 믿고 있을 뿐으로 달리 신뢰할 만한 실력이 없음.
그러므로 우리의 보호가 없다면 현 내각원은 결국에는 先帝의 음험한 수단 때문에 멸망하는 수밖에 없을 것임.
일이 만약 이에 이른다면 한국은 무질서·무정부의 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며, 일본은 이를 간과할 수 없어 병력으로 간섭할 필요가 생기게 될 것이므로 지금을 위해 도모하건대 우리 원조로 수립된 현 내각을 보호하고 新帝를 옹립시켜 先帝가 음험한 수단을 행하지 못하는 정부의 위치를 견고히 하는 것이 우리 세력을 확장하는 것이 방책이라고 생각함.
사정이 위와 같으므로 이번 사건에 관한 협상 담판은 아직 이를 개시할 단계에 이르지 않았음. 일의 진행상황을 관망하면서 시기가 되는 것을 기다려야 함. 어쨌든 지금 2~3일 정도 경과하면 형세의 발전이 다소 명백해질 것이므로 그 모양에 따라 本官의 진퇴에 관하여 다시 廟議를[61] 괴롭히는 바가 있을 것임.
往電第八○號 電信案
明治四十年七月二十二日[49]
統監[50]
珍田 外務次官[51]
林 外相으로부터[52] 西園寺 首相에게[53]
현재 京城의 형세를 보건대 원래 先帝는[54] 閣臣의[55] 권고에 따라 그 본심이 아닌 양위를 한 것이기 때문에 이후 여러 가지 음험한 수단으로 군주권을 회복하려고 기도하는 듯함. 다음의 사실은 즉 이것을 증명하는 것임.
첫째, 閣臣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 18일 조칙에서 양위의 의미를 명백히 하려는 閣臣의 요구에 대하여 先帝는 이를 거부하고 굳이 황태자로 하여금 대리시킨다고 운운하는 문자를 내놓게 했다고 말함. 이 일은 선례를 들어 일본에서 사용하는 ‘대리’의 글자와 다른 의의가 있다고 설명하지만 필경 섭정의 뜻이며, 실은 先帝가 후일 君權을[56] 회복하기 위하여 미리 발판을 만들어 두려고 하는 내심을 가진 데 따른 것임을 의심할 바 없음. 朴泳孝[57] 등이 이미 이 설을 주장한다고 함.
둘째, 양위 조칙을 공포한 날 밤에 先帝가 시위대(한국 근위병)를 궁중에 부른 것은 그 진의가 병력으로 閣員을[58] 진압하여 시의에 따라서는 이를 살육하려고 꾀한 데 있었다는 증적이 현저함.
다만 이 거동은 통감의 명에 의하여 한국 병정 출동 예정시각 약 30분 전에 우리 군대를 궁중에 들어오게 하여 겨우 이를 방지할 수 있었음.
셋째, 朴泳孝는 지난 18일 先帝에 의하여 궁내대신에 임명되었는데 병으로 사퇴하고 어제 양위식에도 참석하지 않았으므로 閣臣은 이를 처벌할 것을 청했더니 차제에 불길하다는 이유로 처벌을 면하고 다만 사직을 받아들이는 데 그치는 것을 총리대신에게 명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제 20일, 즉 양위 후 이틀 후에 同 先帝는 朴泳孝를 궁내대신에 親任하는 식을 올렸으나 閣臣은 조금도 이를 알지 못했음.
위 외에 군대의 동요와 난민의 폭거 등은 先帝의 사주에서 나왔거나 혹은 先帝의 뜻을 받들어 일어나는 것으로 직간접으로 내각대신의 사업을 저지하고 방해하려고 도모하는 것이 명백함.
요컨대 현재의 형세는 한편으로 先帝는 음험한 수단으로 군주권을 회복하려고 하고, 다른 한편으로 閣臣은 新帝를[59] 옹립하여 정부를 유지하려고 하여 아직 전쟁은 없지만 사실 君位 쟁탈, 즉 내란의 정황에 있음. 그리고 先帝는 다년간 국가의 군주였으므로 威福에[60] 의하여 많은 방면에 다대한 세력을 가지고 있지만, 내각대신은 다만 일본의 후원을 믿고 있을 뿐으로 달리 신뢰할 만한 실력이 없음.
그러므로 우리의 보호가 없다면 현 내각원은 결국에는 先帝의 음험한 수단 때문에 멸망하는 수밖에 없을 것임.
일이 만약 이에 이른다면 한국은 무질서·무정부의 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며, 일본은 이를 간과할 수 없어 병력으로 간섭할 필요가 생기게 될 것이므로 지금을 위해 도모하건대 우리 원조로 수립된 현 내각을 보호하고 新帝를 옹립시켜 先帝가 음험한 수단을 행하지 못하는 정부의 위치를 견고히 하는 것이 우리 세력을 확장하는 것이 방책이라고 생각함.
사정이 위와 같으므로 이번 사건에 관한 협상 담판은 아직 이를 개시할 단계에 이르지 않았음. 일의 진행상황을 관망하면서 시기가 되는 것을 기다려야 함. 어쨌든 지금 2~3일 정도 경과하면 형세의 발전이 다소 명백해질 것이므로 그 모양에 따라 本官의 진퇴에 관하여 다시 廟議를[61] 괴롭히는 바가 있을 것임.
한국인들 공모하다.
새로운 황제의 즉위로 많은 음모가 시작됨
박영효는 체포됨
한국인 반란을 막기 위해 일본군 서울로 급파 – 시모노세키에서 명령을 기다리는 전 사단 - 늙은 황제의 "참견".
7월 22일, 도쿄 – 서울로부터의 전보에 따르면 광범위한 음모가 현재 진행 중이다. 궁은 이제 음모와 모략의 온상이라고 한다. 새 황제의 즉위는 그의 어머니인 민 황후(Princess Ming) 세력과 영친왕 이은(Prince Ying)의 어머니 사이의 질투심을 악화시켰는데, 그들은 각각 많은 추종자를 거느리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서로를 불신하는 정치인들에게 이용되고 있다. 불만은 빠르게 확산되고 있으며, 한반도 전역에서 민중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체포되고 있다.
궁내부 대신으로 재임명된 박영효와 시종원경 이도재도 폭동을 선동했다는 혐의로 새 황제의 승인을 받아 체포됐다.
서울에서 보도되는 바에 따르면 퇴위한 황제는 자신이 새 정부에 전적으로 간섭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며 새 황제는 자신의 대리인일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자리에서 물러나도록 강제당했고 관행에 따라 새로운 연호를 가진 새로운 시대의 시작에 동의해야 했다.
하세가와 장군이 현재 한국에 10,000명의 일본군을 주둔시키고 있지만 일본 천황의 사신들이 증원을 요구하고 있어 당장 파병될 가능성이 크다. 현재 시모노세키에는 일본군 한 사단 전체가 이동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62] 이 사단은 수송 준비가 완료되는 대로 서울로 파견될 것이며, 소요가 신속히 진압되지 않는 한 더 많은 일본군이 뒤따를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일본인 민간인들은 군대보다 더 빨리 서울로 몰려오고 있다. 그리고 그들 중 많은 사람은 철저히 무장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군은 반란을 자주 일으키고 지휘 체계는 없지만, 전혀 겁을 먹지 않는다. 한국인들은 많은 양의 탄약과 모든 종류의 무기를 보유하고 있다.
출전: "The Ogdensburg Journal" 1907년 7월 23일
새로운 황제의 즉위로 많은 음모가 시작됨
박영효는 체포됨
한국인 반란을 막기 위해 일본군 서울로 급파 – 시모노세키에서 명령을 기다리는 전 사단 - 늙은 황제의 "참견".
7월 22일, 도쿄 – 서울로부터의 전보에 따르면 광범위한 음모가 현재 진행 중이다. 궁은 이제 음모와 모략의 온상이라고 한다. 새 황제의 즉위는 그의 어머니인 민 황후(Princess Ming) 세력과 영친왕 이은(Prince Ying)의 어머니 사이의 질투심을 악화시켰는데, 그들은 각각 많은 추종자를 거느리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서로를 불신하는 정치인들에게 이용되고 있다. 불만은 빠르게 확산되고 있으며, 한반도 전역에서 민중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체포되고 있다.
궁내부 대신으로 재임명된 박영효와 시종원경 이도재도 폭동을 선동했다는 혐의로 새 황제의 승인을 받아 체포됐다.
서울에서 보도되는 바에 따르면 퇴위한 황제는 자신이 새 정부에 전적으로 간섭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며 새 황제는 자신의 대리인일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자리에서 물러나도록 강제당했고 관행에 따라 새로운 연호를 가진 새로운 시대의 시작에 동의해야 했다.
하세가와 장군이 현재 한국에 10,000명의 일본군을 주둔시키고 있지만 일본 천황의 사신들이 증원을 요구하고 있어 당장 파병될 가능성이 크다. 현재 시모노세키에는 일본군 한 사단 전체가 이동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62] 이 사단은 수송 준비가 완료되는 대로 서울로 파견될 것이며, 소요가 신속히 진압되지 않는 한 더 많은 일본군이 뒤따를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일본인 민간인들은 군대보다 더 빨리 서울로 몰려오고 있다. 그리고 그들 중 많은 사람은 철저히 무장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군은 반란을 자주 일으키고 지휘 체계는 없지만, 전혀 겁을 먹지 않는다. 한국인들은 많은 양의 탄약과 모든 종류의 무기를 보유하고 있다.
출전: "The Ogdensburg Journal" 1907년 7월 23일
20일이 되어도 한성부 전반에 퍼져나간 격앙된 분위기는 가시지 않았다. 일본군은 한국군 주요 병영들의 입구에 기관총까지 배치하여 틀어막곤 무장해제를 시도하였으나, 시위 제1연대는 무기를 내려놓기를 계속 거부했다. 이토 통감이 고종을 알현하려던 시도는 안전 문제로 하세가와 사령관에게 제지당하기도 했다.[63]
한편 대한계년사에 따르면 그날 밤 친일파 군부대신 이병무는 군부청사 경비를 위해 일본군을 파견하겠다는 뜻을 전달한다. 군부 참모국장 조성근 참령이 어떤 근거로 일본군을 파견하느냐며 항의하였으나 이병무는 일본군 측의 명령이라며 일방적으로 통보하곤 반발을 묵살했다.[64] 7월 25일에는 제2연대 제1대대장 이기표(李基豹) 참령이 여단사령부의 회의에서 소위 '불순한 언동'을 했다는 이유로 면직되었으며 이는 2연대 1대대 장병들의 불만을 자극했다.
양위 당일의 격앙된 민중들과 한국 군대의 폭동 상황
(신문전보, 20 July, 1907, 8.20 p.m.)
Herald Paris
한국인들에게 당장 더 중요한 일은 없다고 주장하면서 온종일 흥분의 열기가 가득 차서 사업은 중단되고 상점들은 철시하였으며 승객들에 대한 군중들의 몇 건의 습격이 있은 후 전차 운행도 중단되었음. 平壤聯隊의[65] 대규모 반란과 폭도들에 대한 군인들의 전체적인 공감에 관한 보고가 있어 長谷川은[66] 황실경비대 지역에 다수의 일본 군대를 배치했음. YMCA 주재 하에 거행된 이른 아침의 집회에서 2,000명이 양위를 강요한 대신들에게 황제를 대신해 복수하려는 그들의 계획 추진에 있어 필요하다면 오늘 죽을 것을 맹세하고 죽음의 표식을 했음. 2시에 3,000명에서 5,000명에 이르는 격앙된 폭도들이 西大門을 지나 총리대신 李完用의[67] 저택으로 돌진하며 경비병을 깔보면서 묵직한 대문을 부수고 큰 저택 안의 모든 건물에 불을 놓아 완전히 파괴했음. 가족들은 도주했으나 하녀 몇 명이 불에 타죽은 것으로 믿어짐. 되돌아온 폭도들은 병영으로 난입하여 군인들의 묵인 하에 여러 정의 총을 탈취한 다음에 방화하기 위해 군부대신의 저택으로 갔으나 일본 군대와 경찰에 의해 격퇴되었음. 습격대 3명이 살해되고 약간 명이 부상했음. 모든 대신들의 저택에 방화하기로 계획되어 있었음. 죽음을 각오한 이 한국적인 도의심은 주목할 만함. 4시에 또 다른 폭동이 어제의 살육 현장인 鐘路에[68]서 있었음. 군대에서 도주한 자들이 이 폭동을 촉진하여 일본 경찰에 대한 사격을 유도했음. 사격은 반시간 동안 계속되었음. 사상자의 명단은 많지 않음. 伊藤은[69] 공식적인 대궐 방문의 시간을 늦추었으며, 한편 영사들은 계속 기다렸음. 지연은 분명하게 적절한 군대 보호를 확보하기 위한 것임. 모든 길가에는 기관총이 설치되어 있음. 통로에 연한 길가는 깨끗이 치워졌음. 伊藤은 엄중한 군대의 호위 아래 나아갔고, 사고는 없었음.
Ohl
(신문전보, 20 July, 1907, 8.20 p.m.)
Herald Paris
한국인들에게 당장 더 중요한 일은 없다고 주장하면서 온종일 흥분의 열기가 가득 차서 사업은 중단되고 상점들은 철시하였으며 승객들에 대한 군중들의 몇 건의 습격이 있은 후 전차 운행도 중단되었음. 平壤聯隊의[65] 대규모 반란과 폭도들에 대한 군인들의 전체적인 공감에 관한 보고가 있어 長谷川은[66] 황실경비대 지역에 다수의 일본 군대를 배치했음. YMCA 주재 하에 거행된 이른 아침의 집회에서 2,000명이 양위를 강요한 대신들에게 황제를 대신해 복수하려는 그들의 계획 추진에 있어 필요하다면 오늘 죽을 것을 맹세하고 죽음의 표식을 했음. 2시에 3,000명에서 5,000명에 이르는 격앙된 폭도들이 西大門을 지나 총리대신 李完用의[67] 저택으로 돌진하며 경비병을 깔보면서 묵직한 대문을 부수고 큰 저택 안의 모든 건물에 불을 놓아 완전히 파괴했음. 가족들은 도주했으나 하녀 몇 명이 불에 타죽은 것으로 믿어짐. 되돌아온 폭도들은 병영으로 난입하여 군인들의 묵인 하에 여러 정의 총을 탈취한 다음에 방화하기 위해 군부대신의 저택으로 갔으나 일본 군대와 경찰에 의해 격퇴되었음. 습격대 3명이 살해되고 약간 명이 부상했음. 모든 대신들의 저택에 방화하기로 계획되어 있었음. 죽음을 각오한 이 한국적인 도의심은 주목할 만함. 4시에 또 다른 폭동이 어제의 살육 현장인 鐘路에[68]서 있었음. 군대에서 도주한 자들이 이 폭동을 촉진하여 일본 경찰에 대한 사격을 유도했음. 사격은 반시간 동안 계속되었음. 사상자의 명단은 많지 않음. 伊藤은[69] 공식적인 대궐 방문의 시간을 늦추었으며, 한편 영사들은 계속 기다렸음. 지연은 분명하게 적절한 군대 보호를 확보하기 위한 것임. 모든 길가에는 기관총이 설치되어 있음. 통로에 연한 길가는 깨끗이 치워졌음. 伊藤은 엄중한 군대의 호위 아래 나아갔고, 사고는 없었음.
Ohl
민간 시위대 역시 극심하게 반발했다. 그들은 일본인 및 그들에 부역한 이완용 내각의 주요인사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관저에 대한 공격 시도는 일본군의 대응으로 격퇴되었으나, 총리대신 이완용의 자택은 동우회(同友會)가 이끄는 시위대의 우선적인 타겟이 되어 송두리째 불타버렸다. 이완용의 전재산은 물론이고 조상의 위패까지 소실되었고, 그와 그의 일가족도 살해당할 뻔했으나 일본군에 의해 구조되었다. 이후 이완용은 더럼 스티븐스의 가택에 잠시 의탁했다. 이지용은 재산을 미리 성북구 일대로 옮겼음에도 성북구 주민들이 그의 사저를 불태워버리면서 전재산을 잃었고, 이근호가 소유하던 정자 역시 방화당해 사라졌다. 이병무의 가택에서도 공방전이 벌어졌으나 여기는 가택을 경비하던 일본군이 군중에 실탄까지 발포하며 해산시켰다. 대한계년사에 따르면 이완용 내각의 대부분의 대신들은 진고개 일대의 일본인 여관 또는 송병준의 자택 등으로 피신했다. 그들은 26일이 되어서야 제대로 출근할 수 있었다.
지방으로도 반발이 퍼져나갔다. 역시 대한계년사에 따르면 평양 주민들 역시 격분하여 서울로 상경하기 위해 기차역으로 몰려들어 일본 경찰이 급히 저지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곳곳의 일진회 지부 역시 공격당했기에 일진회원들은 정변 이후 며칠간은 숨어다녀야 했다. 초량에서는 학생들이 동맹휴학에 들어갔고 동래의 학생들은 격문을 작성했다. 안성 주민들은 일진회 지부를 파괴하곤 겸사겸사 이재극의 별장을 불살랐다. 대전 근처 봉암 일대에서도 주민들이 모여들어 집회를 열었다. 고성에서는 진위대 장병들이 일본인을 사살했다.
3.5. 일본과 친일내각의 대응
[平壤의 상황, 서울의 분위기 및 下關으로부터의 일본군 증원 결정]
(신문전보 발송 20/7/1907, 4.45 p.m.)
Associated San Francisco
20일 平壤에서는[70] 철시를 하고 토착민들은 이미 양위가 끝난 것도 모른 채 흥분하고 있음. 聯隊가[71] 서울로 출발함으로써 그 지역에는 800명에 불과한 일본 군대만 남게 되어 일본인들의 안전이 문제가 됨.
서울은 지금 현재 36시간 철시 중이며 사람들은 어제의 성공적인 (일본인) 살해에 고무되어 오늘은 더욱 많은 토착민 군중들이 당연히 보다 큰 힘을 표시하려고 할 것임. 長谷川은 대궐 광장에 2門의 기관총을 설치하였음. 한국 군대가 매우 우세하다고 여겨지는 반면, 일본 군대는 전적으로 부족하여 下關에서[72] 증원군이 오기로 결정되었음.
적대행위는 오직 일본인에게만 있을 뿐, 다른 외국인들은 안전함. 며칠 후에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들을 알게 되면 내륙지방의 수많은 일본인들이 우려됨.
McCormick
(신문전보 발송 20/7/1907, 4.45 p.m.)
Associated San Francisco
20일 平壤에서는[70] 철시를 하고 토착민들은 이미 양위가 끝난 것도 모른 채 흥분하고 있음. 聯隊가[71] 서울로 출발함으로써 그 지역에는 800명에 불과한 일본 군대만 남게 되어 일본인들의 안전이 문제가 됨.
서울은 지금 현재 36시간 철시 중이며 사람들은 어제의 성공적인 (일본인) 살해에 고무되어 오늘은 더욱 많은 토착민 군중들이 당연히 보다 큰 힘을 표시하려고 할 것임. 長谷川은 대궐 광장에 2門의 기관총을 설치하였음. 한국 군대가 매우 우세하다고 여겨지는 반면, 일본 군대는 전적으로 부족하여 下關에서[72] 증원군이 오기로 결정되었음.
적대행위는 오직 일본인에게만 있을 뿐, 다른 외국인들은 안전함. 며칠 후에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들을 알게 되면 내륙지방의 수많은 일본인들이 우려됨.
McCormick
왕전(往電) 제79호
메이지 40년(1907) 7월 21일 오후 11시 청산(靑山)에서 발
수신: 이토 통감, 진다 외무차관
극비: 사이온지 수상께
경성의 현재 상황은 착잡하여, 장차 파급될 바를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한국 군대의 상황이 불안하여 어떠한 사변을 일으킬지 가늠하기 어렵고, 한편으로는 거류 외국인들이 모두 우리 보호를 신뢰하는 형편이므로, 이 시기에 최근의 병영에서 혼성 1여단을 속히 본지에 파견하는 것이 필요 조치라고 생각합니다.
지방은 아직 경성의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당장은 별다른 일이 없으나, 수일 뒤에는 다소의 요란이 일어날 것을 오늘로부터 미리 예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907년 7월 21일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본국 외무성에 보낸 기밀 문서. 출전: "統監府文書" 4, 六-(75)
메이지 40년(1907) 7월 21일 오후 11시 청산(靑山)에서 발
수신: 이토 통감, 진다 외무차관
극비: 사이온지 수상께
경성의 현재 상황은 착잡하여, 장차 파급될 바를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한국 군대의 상황이 불안하여 어떠한 사변을 일으킬지 가늠하기 어렵고, 한편으로는 거류 외국인들이 모두 우리 보호를 신뢰하는 형편이므로, 이 시기에 최근의 병영에서 혼성 1여단을 속히 본지에 파견하는 것이 필요 조치라고 생각합니다.
지방은 아직 경성의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당장은 별다른 일이 없으나, 수일 뒤에는 다소의 요란이 일어날 것을 오늘로부터 미리 예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907년 7월 21일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본국 외무성에 보낸 기밀 문서. 출전: "統監府文書" 4, 六-(75)
[일본군 증원으로 인한 서울의 平穩과 북쪽의 폭동에 대한 우려]
(신문전보, 24/7/'07, 7.25 p.m.)
Herald New York
일본에서 파견된 군대와 헌병의 증원군이 도착하여 서울 정세는 보다 조용해짐. 平壤의 일본수비대는 놀랄 만큼 감소되었다는 현지 보고가 있음. 그 밖의 사항에서 서울은 안심이 되나 북쪽 사람들 사이에서는 전체적인 보복행위를 우려하고 있음. 북부 한국인들은 남쪽보다 훨씬 호전적임. 북부 주둔지에 있는 한국 군인들은 장교들의 묵인 하에 많은 수량의 무기와 탄약을 버리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었음. 수송선으로 북쪽에서 급파된 군대는 12사단의 분견대와 함께 오늘 濟物浦에[73] 도착했음. 長谷川은 서울 사태가 곧 호전되리라고 언명했음. 순양함 ‘가사기’, ‘니이타카’ 및 ‘치하야’호는 寺垣 해군소장의[74] 지휘 하에 濟物浦에 도착했음. 수요일 오후 7시.
Ohl
(신문전보, 24/7/'07, 7.25 p.m.)
Herald New York
일본에서 파견된 군대와 헌병의 증원군이 도착하여 서울 정세는 보다 조용해짐. 平壤의 일본수비대는 놀랄 만큼 감소되었다는 현지 보고가 있음. 그 밖의 사항에서 서울은 안심이 되나 북쪽 사람들 사이에서는 전체적인 보복행위를 우려하고 있음. 북부 한국인들은 남쪽보다 훨씬 호전적임. 북부 주둔지에 있는 한국 군인들은 장교들의 묵인 하에 많은 수량의 무기와 탄약을 버리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었음. 수송선으로 북쪽에서 급파된 군대는 12사단의 분견대와 함께 오늘 濟物浦에[73] 도착했음. 長谷川은 서울 사태가 곧 호전되리라고 언명했음. 순양함 ‘가사기’, ‘니이타카’ 및 ‘치하야’호는 寺垣 해군소장의[74] 지휘 하에 濟物浦에 도착했음. 수요일 오후 7시.
Ohl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일본은 한국 민군의 저항을 정말로 심각하게 우려하기 시작했다. 일본이 보기에, 지지자 없는 꼭두각시 이완용 내각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진 반면 고종과 그 지지세력은 여전히 건재했다. 또한 일본군이 전국에 분산배치되어 한성부에는 대략 2,300명에 불과한 반면, 한성의 한국군은 대략 6,000명으로[75] 일본군의 수를 웃도는데다 9만에서 10만발에 달하는 탄약을 가지고 있다고 예상되었다. 이는 통감부가 1907년 초 기존에 2개 사단 체제였던 한국주차군 규모를 1개 사단 규모로 줄였기 때문이었다.[76] 러시아의 위협이 감소하고 을사의병이 진압되었다는 오판으로 이와 같은 결정을 내린 것이었는데, 이 때문에 1907년 7월 한국 국민들과 군대의 대대적인 반발에 직면하자 바로 병력부족에 직면한 것.
통감부와 한국주차군은 우선 분대들을 보내어 20일 오후 5시에 대한제국군의 조병창이자 중화기와 탄약들이 보관되어 있던 용산 군기창을, 그리고 21일 오전 12시 30분에 군부 예하 탄약고를 장악했다. 반발을 억누를 군대도 더 필요했으므로 통감부는 7월 21일 본국에 혼성 1개 여단의 증원을 요청했다. 시모노세키의 제12사단 예하 제12보병여단이[77] 파병되었으며 이들은 7월 26일 제물포에 도착했다. 같은 달 22일에는 원산에서 일본군 1,000명이 구축함 3척에 분승하여 제물포를 향해 출발했다. 일본 해군 역시 7월 22일 제2함대 소속 순양함들을 부산에서 제물포로 급파하였고, 이들은 24일에 인천에 도착했다.
증원군에 힘입어 한국주차군은 한성 곳곳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우선 평양에서 불러들인 52연대 소속 보병대대가 20일 아침 한성에 속속 도착하였다. 정변을 진압한 13사단 51연대 3대대는 경운궁 앞, 대관정, 남대문, 서소문, 을지로 1가 부근, 남대문 정거장 등을 장악했다. 51연대 2대대는 광화문 앞 육조거리, 탑골공원, 종로 4가 일대, 돈의문 앞, 서대문정거장 등에 배치되었다. 동대문 방향에는 52연대 1대대와 2대대가, 운현궁에는 52연대 1대대가 주둔했다.
7월 22일, 정변의 주모자로 꼽힌 박영효와 이도재, 임재덕과 그 외 4명의 고위 장교는 이완용 내각의 탄핵으로 체포된다. 정변에 가담한 경무사 김재풍도 적극적인 친일부역자인 구연수로 교체되어[78] 이로써 한국 경찰은 완전히 일본 손에 떨어진다.
4. 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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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시위대의 해산과 부활 과정에서 일제에 대한 반감을 갖고 있던 시위대 군인들은 1907년 7월 19일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 황제가 강제로 퇴위당하자 시위를 벌이던 군중들과 합세해 일본경찰을 향해 발포하여 항거하였다. 이들은 항거하는 민중과 합세하였고 지방의 진위대도 통영에서 군중들과 함께 항거를 벌이는 등 일제에 대한 항거를 이어나갔다. 이는 을미사변 이후 국권의 잠식을 국왕의 곁에서 지켜보던 시위대의 일제에 대한 항의의 표시였다.
성강현, "군대 해산 과정에서의 서소문전투 연구"
이때부터 계엄에 준하는[79] 공포 분위기 속에서 한국군 해산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다. 양위로부터 나흘도 채 지나지 않은 7월 24일 통감부 청사에서 정미 7조약이 체결되어 한국의 내정이 완전히 일본 손에 떨어졌고, 7월 27일에 일본은 한국으로 하여금 보안법을 반포하여 항일운동을 하는 집회나 인물을 체포하도록 했다. 같은 날 경무청 역시 경시청으로 개편되어 통감부에 완전히 예속되었다. 또한 7월 28일에는 군대 해산계획 초안이 마련되었고 해산 시작 일자는 8월 1일로 결정되었다. 성강현, "군대 해산 과정에서의 서소문전투 연구"
그러나 해산식 당일 결국 한일 양국 군대가 충돌하며 남대문 전투가 벌어진 것을 시작으로, 이미 불만이 팽배했던 각지에서 의병들이 봉기하며 최장 1915년까지[80] 8년간 이어질 한말 의병 전쟁이 본격적으로 발발한다.
5. 기타
5.1. 가담자들의 이모저모
박성환[81]
박성환은 경성 반촌 사람이다. 성환은 을미변(을미사변) 이후로 일찍이 보수(報讐)의[82] 뜻을 품었는데, 일본의 압박이 날로 심해지고 국가의 큰 명운이 점점 위태로워지자, 성환은 눈물을 흘리며 강개하여, 한 몸의 죽음으로써 보답하고자 하였다. 정미년에 황위가 폐해되자, 성환은 궁중에서 일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화가 임금께 미칠까 두려워 그만두었다.
기려수필의 기록
박성환은 경성 반촌 사람이다. 성환은 을미변(을미사변) 이후로 일찍이 보수(報讐)의[82] 뜻을 품었는데, 일본의 압박이 날로 심해지고 국가의 큰 명운이 점점 위태로워지자, 성환은 눈물을 흘리며 강개하여, 한 몸의 죽음으로써 보답하고자 하였다. 정미년에 황위가 폐해되자, 성환은 궁중에서 일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화가 임금께 미칠까 두려워 그만두었다.
기려수필의 기록
- 군대해산 당일 자결하여 남대문 전투의 단초가 된 시위혼성여단 제1보병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 참령이 7월 19일의 거사에 참여하려 했다는 이야기는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송상도가 항일운동가들의 약력을 기록한 기려수필(騎驢隨筆)에 언급된다.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역시 그렇게 설명한다.
그러나 이는 일본 통감부 내부 문건 또는 다른 기록들과 교차검증되지 않았다. 정변 가담자 처분과정에서도 이갑과 어담, 임재덕 등과 달리 박승환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는다. 물론 국가와 군주를 지키지 못한 책임을 통감하며 자결하였던 그이니만큼, 공식 기록에서 누락되었을 뿐 실제로도 19일 밤의 거사를 지지했을 가능성은 충분한 편이다.
이 시기 어담의 행적에서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충군’이다. 1907년 6월 헤이그특사건을 빌미로 통감부와 이완용내각이 고종황제에게 양위를 압박하자 박영효,이도재 등 양위반대파가 그들에게 맞섰고, 어담 역시 반대파에 가담한 혐의로 수감되었다. 어담은 재판에서 자신의 혐의를 부인했지만 당시 시종무관으로서 고종황제의 명령에 따라 양위를 막으려는 황제 측근파와 행동을 같이 했었던 것으로 보인다.(중략)
어담의 ‘충군’은 시종무관이라는 자신의 직책을 충실히 이행한 것에 불과한 것일 수 있다. 또 일진회, 이완용내각과의 대립 역시 ‘충군’에서 기인한 것이기보다는 추종하는 일본세력의 차이에 따른 정치적 대립일 수 있다. 하지만 어떠한 이유에서건 그의 활동은 황제에게 충성하고 복종하는 '충군’의 형태로 나타났다. 다만 어담의 ‘충군’은 ‘애국’또는 ‘애족’과 결합되지 않았다. 이는 ‘충군’이 곧 ‘애국’이라고 여겼던 유학자들의 인식 및 행동과도 차이가 있었다. 그의 ‘충군’은 대한제국이라는 국가체 또는 ‘민족’과 결합되어 ‘충군애국’, 또는 ‘충군애족’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이후 그의 ‘충군’대상은 일본제국의 천황으로 바뀌면서 ‘친일매국’의 길로 나아갔다.
김소영, "한말 魚潭의 ‘친일’ 행적과 정체성 형성 과정"
어담의 ‘충군’은 시종무관이라는 자신의 직책을 충실히 이행한 것에 불과한 것일 수 있다. 또 일진회, 이완용내각과의 대립 역시 ‘충군’에서 기인한 것이기보다는 추종하는 일본세력의 차이에 따른 정치적 대립일 수 있다. 하지만 어떠한 이유에서건 그의 활동은 황제에게 충성하고 복종하는 '충군’의 형태로 나타났다. 다만 어담의 ‘충군’은 ‘애국’또는 ‘애족’과 결합되지 않았다. 이는 ‘충군’이 곧 ‘애국’이라고 여겼던 유학자들의 인식 및 행동과도 차이가 있었다. 그의 ‘충군’은 대한제국이라는 국가체 또는 ‘민족’과 결합되어 ‘충군애국’, 또는 ‘충군애족’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이후 그의 ‘충군’대상은 일본제국의 천황으로 바뀌면서 ‘친일매국’의 길로 나아갔다.
김소영, "한말 魚潭의 ‘친일’ 행적과 정체성 형성 과정"
- 훗날 일본군에서 중장까지 진급하는 친일파 어담 역시 고종의 시종무관으로 정변에 가담하였는데, 이는 그가 친일파였을지언정 본질적으로는 근황파였기 때문이다. 일진회의 사례가 근대화와 친일을 같은 노선에 둔 사례라면, 어담의 사례는 충군과 친일이 같은 선상에 있던 사례다.
그는 적어도 고종의 시종무관을 역임하는 동안만큼은 일본군에 협조하지 않았으며, 몇 년 후에는 순종 면전에다 대고 모욕하는 발언을 내뱉은 불충을 저지른 송병준에게 칼을 빼들어 달려들기도 했다. 다만 그의 근황의식에는 민족의식이 결여되어 있었기에 경술국치 이후에는 충성의 대상이 일본 천황으로 옮겨가고 만다. 이희두와 남정철 등 훗날 친일파가 된 양위 반대파 역시 비슷한 케이스일 가능성이 높다.
어담은 과도기적 근황파 엘리트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는 복합적인 인물이다. 그 외 충군을 기치로 삼았던 대한제국 해산군 고위 장교들 다수 역시 고종의 양위와 군대해산을 계기로 저항의 동력을 잃었으나, 일부 민족의식을 각성한 해산군 장병들과 민간 저항세력은 고종이 물러나게 된 이후에도 수호의 대상을 군주가 아닌 민족으로 서서히 바꾸어 나가며 항쟁을 이어가 1910년대 무장독립운동의 토대를 닦는다. - 박영효의 경우 근황의식조차도 부재했으며, 그저 정치적 대립자인 이완용을 끌어내리고자 가담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둘의 사이가 가까워진 것은 1911년 조선귀족회에서 같이 활동하면서부터이다.
- 민간 시위의 주축이 된 동우회는 본래 한일 우호를 위해 결성된 단체였고, 실제로 지도부에는 나중에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모시는 신사를 건립하려던 다카하시 히사시(高橋久司) 등의 일본인 인사들까지 포진했다. 그러나 고종의 강제 양위 소식이 들려오자 분노한 동우회원들은 지도부를 갈아치우고 시위의 전면에 나서 이완용의 사저를 불태워버리기에 이른다.
- 정변의 주역인 임재덕 정위의 이후 행보는 매우 불명확하다. 독립운동에 기여하였다는 기록과 친일파가 되었다는 기록이 모두 존재한다.
6. 매체에서
7. 출처
- 서인한, 《대한제국의 군사제도》
- 신편 한국사
- 한국 근대 사료 DB
- 통감부문서
- 대한기년사
- 황선익, <일본군의 한성 점령과 군대 해산: 駐箚部隊의 개편과 공간 占奪을 중심으로>
- 김상기, <‘제14연대 진중일지’를 통해 본 일본군의 의병탄압>
- 성강현, <군대 해산 과정에서의 서소문전투 연구>
- 유한철, <日帝 韓國駐箚軍의 韓國 侵略過程과 組織>
- 김소영, <한말 魚潭의 ‘친일’ 행적과 정체성 형성 과정>
- 심철기, "고종황제 강제퇴위와 의병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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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평양연대. 대한제국군 시위혼성여단 제1연대를 의미.[2] 이토. 통감 이토 히로부미.[3] 하야시. 일본 외무대신 하야시 다다스.[4] 도쿄 정부. 일본 정부를 의미.[5] 육군무관학교인지 육군연성학교인지 불명확함.[6] 여단장 양성환 참장을 비롯한 여단사령부 수뇌부 대다수가 운동에 동조하였는지는 알 수 없음. 기병대와 포병대, 공병대 역시 지지 여부 불확실함.[7] 7월 27일부로 개편.[8] 정변에 가담한 경무사 김재풍이 체포된 후 친일내각에 의해 임명.[9] 1905년 사할린에서 창설되었고 동년 10월 한국에 배치되었다. 1908년 11월 6사단과 의병토벌 임무를 교대하고 귀국했다. 1925년 우가키 군축으로 폐지되었으나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재창설되었고 1945년 패망과 동시에 해체되었다.[10] 연대장 시바 케사이치(志波今朝一) 대좌[11] 대대장 사카베 기유(坂部義勇) 소좌[12] 1898년 북규슈에서 창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한반도에 최초로 진주한 부대이다.[13] 직후 정미의병이 발발하자 한반도 중부지방 의병들을 토벌했다. 1909년 5월 임시한국파견대와 임무교대.[14] 1875년 구마모토 진대 소속으로 창설된 부대이다. 진대 제도가 사단제로 바뀐 1888년부터 구마모토를 근거지로 하는 6사단에 소속되었으나 1898년부터 12사단으로 소속이 바뀌었다. 한반도 배치 후 대한제국군 진위대를 강제 해산시켰으며, 이후 대전에 본부를 두고 주로 한반도 남부지역 의병을 토벌했다. 14연대가 남긴 진중일지는 당대 일본군의 의병 진압 및 학살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다. 1945년 본토 결전을 대비하다 종전 후 해산.[15] 카가 번 출신. 1857년생으로 1873년부터 해군에 몸담았으며 러일전쟁 당시에는 전함 시키시마의 함장으로 참전했다. 쓰시마 해전에도 참가하여 러시아 함대기함 크냐지 수보로프와 전함 오슬라비야를 함대와 함께 격침시켰다. 1906년 소장 진급 후 2함대사령관이 되었으며 1912년 중장으로 퇴역.[16] 방호순양함만큼의 장갑도 갖추지 않은 순양함들로, 주로 식민지 초계 등에 사용되었다. 일본 해군에서는 통보함(通報艦)으로 분류했다.[17] 메이지 40년(1907년) 7월 3일 오전 2시에 발신.[18] 이토 통감. 당시 한국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의미.[19] 하야시 외무대신. 당시 일본 외상 하야시 다다스를 의미.[20] 스즈키 대사. 당시 헤이그에 특명전권대사로 파견되었던 스즈키 가오루(都筑馨六)를 의미.[21] 러시아 외교관 알렉산드르 넬리도프(Алекса́ндр Нели́дов) 백작을 의미.[22] 세권. 세금을 걷는 권리.[23] 병권. 군사를 운용할 권리.[24] 외무대신. 당시 러시아 외무대신은 알렉산드르 이즈볼스키(Алекса́ндр Изво́льский) 백작이다.[25] 러일전쟁 이후 한국주재 러시아총영사 게오르기 플란손(Георгий Пласон)을 의미.[26] 이준 열사를 의미.[27] 이토.[28] 하세가와 요시미치.[29] 일본 외상 하야시 다다스.[30] (1907년 7월) 19일 오후 2시 30분 발신 전보.[31] 1904년까지만 해도 한성부 내에는 친위대 2개 연대, 시위대 2개 연대, 징상 평양진위대 1개 대대와 호위대 1개 대대까지 거의 1만에 달하는 군대가 주둔하였으나, 일본이 강제한 군축으로 시위대를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해산되었다. 시위대 역시 시위혼성여단으로 감축된 상태였다.[32] 또는 100명. 둘 다 하세가와 요시미치의 보고에서 언급되는 숫자다.[33] 메이지 40년(1907년) 7월 20일 오전 2시 30분에 발신.[34] 일본 외무성 차관 진다 스테미(珍田捨巳)를 의미.[35] 국무대신.[36] 경성. 한성부를 의미.[37] 시위대 혼성여단을 의미.[38] 군부. 당시 군부대신은 이병무다.[39] 법부. 당시 법부대신은 조중응.[40] 한국통감부를 의미. 당시 통감은 이토 히로부미.[41] 장곡천 사령관. 한국주차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 대장을 의미.[42] 이토. 이토 히로부미.[43] 평양연대. 여기서는 평양 주둔 일본 제52보병연대를 의미.[44] 상술한 바와 같이 육군무관학교인지 육군연성학교인지 불명확함.[45] 해당 문서명: 暴徒의 統監官舍 습격 기도 등 상황보고[46] 이완용 내각의 일원이자 친일파인 박영효가 가담한 것이 의외인데, 이에 대해서는 후술한다.[47] 1905년 창설된 연대로, 사할린에 배치되었다가 한반도로 왔다.[48] 본디 호머 헐버트의 집이 있던 곳으로, 1899년 독일 제국 하인리히 폰 프로이센 황자의 숙소로 사용된 것을 시작으로 대한제국의 영빈관으로 쓰였다. 그러나 1904년 10월 13일부터 한국주차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숙소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일본 한국주차군의 사실상의 사령부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1개 중대를 대관정에 상시 배치하여 유사시 경운궁으로 출동할 수 있게 했다. 이후 용산기지가 완공되며 조선 주차 일본군은 그곳으로 이전한다.[49] 메이지 40년(1907년) 7월 22일.[50] 통감.[51] 진다 외무차관.[52] 하야시 외상. 당시 일본 외무대신 하야시 다다스(林董)를 의미.[53] 사이온지 수상. 당시 일본 총리대신 사이온지 긴모치를 의미.[54] 선제. 선황제를 의미. 여기서는 고종을 지칭함.[55] 각신. 여기서는 내각 신료, 즉 이완용 내각의 친일대신들을 지칭함.[56] 군권. 군주권을 의미.[57] 박영효.[58] 각원. 내각 구성원을 뜻함. 역시 이완용 내각의 대신들을 의미.[59] 신제. 신황제. 여기서는 순종을 의미.[60] 위복. 위협과 복덕. 당근과 채찍을 구사한다는 의미.[61] 묘의. 조정의 회의.[62] 12사단을 의미한다.[63] 이토는 결국 입궐했다.[64] 이때 조성근은 분을 참지 못해 전화기를 부숴버렸다.[65] 평양연대. 시위혼성여단 제1연대를 의미함. 원래 평양연대라 할 수 있는 진위 제4연대는 이미 폐지된 상태였기에 시위 1연대를 왜 평양연대라 지칭하였는지는 알 수 없음.[66] 하세가와 요시미치.[67] 이완용.[68] 종로.[69] 이토. 이토 히로부미.[70] 평양.[71] 연대. 평양 주둔 일본군 제52보병연대를 의미.[72] 시모노세키. 일본 12사단 주둔지.[73] 제물포.[74] 제2함대사령관 데라가키 이조(寺垣猪三) 소장을 의미.[75] 어떤 기준에서 6,000명이라 한 지는 불명. 당시 한성에는 2,300명 정도의 시위혼성여단만이 남아 있었으며 6,000명은 한국군 전체 숫자였다. 다른 문서에서는 4,500명이라고도 한다.[76] 일본은 1905년 10월부터 한반도에 13사단과 15사단을 두었으나, 1907년 주차군을 상설화한 대신 13사단만 남기고 15사단은 귀국시켰다.[77] 예하부대는 제14보병연대, 제47보병연대.[78] 구연수는 을미사변 당시 적극 가담한 부역자로, 아관파천 직후 일본으로 도망쳤으나 1907년 일본의 위세를 업고 귀국했다.[79] 통감 이토의 반대로 실제로 계엄이 선포되지는 않았으나, 통감부가 한성 곳곳에 일본군을 증원하여 한국군과 시민들을 압박하고 있었기에 사실상 계엄 상태나 다름없었다.[80] 채응언의 체포 기준.[81] 일부 기록들에서는 박승환의 이름을 박성환으로 표기한다.[82] 복수를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