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군의 영관급 장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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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9176e><colcolor=#fff> 시위혼성여단 제1연대 제3대대장 대리 임재덕 林在悳 | ||
출생 | 1870년 12월 4일 | |
사망 | 몰년 미상 | |
본관 | 평택 임씨 | |
학력 | 세이조학교 (졸업) | |
군사 경력 | ||
임관 | 일본 육군사관학교 (11기) | |
복무 | 대한제국 육군 | |
1900년 ~ 1907년 | ||
최종 계급 | 참령 |
1. 개요
구한말의 군인.2. 생애
1895년 일본에 유학, 후쿠자와 유키치가 세운 세이조학교를 거쳐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11기로 졸업했다.[1] 이후 일본 육군 제1사단 보병 제1연대에서 견습사관으로 복무하고 1900년 7월 17일에 한국 육군참위로 임용, 동년 12월에 귀국했다. 이후 5년간 무엇을 했는지는 불명이나 1905년 부위로 진급했고 같은 해에 다시 정위로 쾌속진급했다.[2]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일본의 승전을 축하하는 관병식 시찰위원이 되었다.사실 육사 11기로 들어간 한국인 21명은 상당한 부침이 있었다. 일본 육사 11기 강용희, 권승록, 권호선, 김관현, 김교선, 김규복, 김봉석, 김성은, 김형섭, 김홍남, 김홍진, 김희선, 노백린, 방영주, 어담, 윤치성, 이기옥, 임재덕, 장인근, 장호익, 조택현 21명은 본래 1895년과 1896년에 일본에 보내진 관비유학생 192명에 속했다. 이들은 아관파천으로 친일내각이 무너지자 새롭게 구성된 내각에서 이전 정권의 인물들로 분류되어 학비 지원이 끊겼다. 일본 정부는 군인 자원을 상대로 학비를 지원해 세이조대학과 일본 육사에 입학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일본군 군인으로 임관은 해주지 않았다.[3] 이들은 대한제국군 참위로 임관은 이뤄졌으나 후속 조치가 없어 생활고에 빠지게 되었다.
이중에서 6명이 선발대로 돌아왔다. 김규복, 김성은, 노백린, 어담, 윤치성, 임재덕이다. 이들은 한국의 군부와 원수부에 탄원서를 냈다. 김규복은 이 와중에 병사했다. 1901년 2월에는 김형섭, 김홍남, 김홍진, 김희선, 장인근이 귀국했는데 민영환이 일본 육사 11기 출신들을 채용하자고 거듭 상소하였고 고종도 생각을 바꿔 이들을 육군무관학교의 교관 등으로 고용하였다. 그전까지 무관학교는 러시아식 교육을 하였으나 노백린 등이 교관으로 들어오면서 일본식 교육으로 바뀌게 된다.
일본에 잔류해있던 권호선, 장호익, 조택현은 쿠데타를 기획하게 되고 혁명일심회 사건을 일으킨다. 이들은 고종과 황태자 순종을 폐하고 미국에 체류 중인 의친왕을 황제로 옹립한단 계획을 세운다. 유길준이 이에 협력했다. 혁명일심회 인원들도 1902년에 장교로 발령받았는데 경무청에 체포되었다. 이들은 러일전쟁을 앞두고 일부 처형되었다. 김봉석은 밀고하여 감형받았다. #
요약하자면 임재덕이 포함된 일본 육사 11기 유학파는 아관파천 이후 정부의 냉대를 받았으나 민영환에 의해 다시 등용되었다. 일부는 쿠데타 음모에 연루되었다.
지난 17일 밤, 칠대신(七大臣)이 대리사(代理事)를 상주할 때, 시위삼대(侍衛三隊) 참령(參領) 임재덕(林在德) 씨가 궁궐 안에 당직으로 들어가 있었는데, 군대(軍大)[4] 이병무(李秉武) 씨가 그에게 지휘하여 말하기를 “헌병(憲兵) 70명이 궁문 밖에 도착했으니, 즉시 문을 열라.” 하였다. 이에 임 씨가 반대하며 말하기를 “병정이 무기를 가지고 궁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은 이미 국가의 헌법이 되었으니, 대황제 폐하의 칙교(勅敎)를 받지 않고 대감(大監)의 명령으로는 궁문을 열 수 없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군대(軍大)가 말하기를 “복장을 벗고 평복으로 들어오라.” 하고 서로 다투는 사이, 헌병대장 이한용(李漢用) 씨가 칼을 뽑아 높이 들며 큰 소리로 말하기를 “하나의 참령이 감히 군부대신에게 어찌 항거하는가!” 하고 문을 밀치고 들어왔다. 헌병들은 평복 차림에 육혈포(六穴砲)를 각각 가지고 있었다. 그 이튿날, 군대(軍大)가 몰래 일본 사령부에 통지하여 말하기를 “시위삼대가 의심스러운 행동이 있으니, 무기를 회수하라.” 하니, 일본 헌병이 해당 영(營)에 도착하여 무기를 회수하려 하였다. 이에 임재덕 씨가 일본 헌병에게 맞서 말하기를 “군기에 관해서는 우리 대한제국 황제의 칙령을 아직 받지 않았으니, 결단코 회수할 수 없습니다.” 하자, 일본 헌병이 아무 말 없이 물러갔다.
그런데 재작일(21일)에 임재덕 씨가 그 대대 병정들의 소요 사건으로 인해 육군법원에 체포되어, 첫 심문을 받을 때에 양주먹으로 땅을 치며 크게 말하기를 “병정들의 소요를 금하지 못한 일로 나를 꾸짖는다면 그 책임이 없지 않으나, 그러나 이 소요는 병정들의 충의에서 우러난 분노에 따른 것이니, 병정들에게 어찌 죄가 있겠는가!” 하고 일장 변명을 하였다고 한다.
"隊長被捉", 대한매일신보(국한문)[大韓每日申報(국한문)], 19070723
그러자 군대(軍大)가 말하기를 “복장을 벗고 평복으로 들어오라.” 하고 서로 다투는 사이, 헌병대장 이한용(李漢用) 씨가 칼을 뽑아 높이 들며 큰 소리로 말하기를 “하나의 참령이 감히 군부대신에게 어찌 항거하는가!” 하고 문을 밀치고 들어왔다. 헌병들은 평복 차림에 육혈포(六穴砲)를 각각 가지고 있었다. 그 이튿날, 군대(軍大)가 몰래 일본 사령부에 통지하여 말하기를 “시위삼대가 의심스러운 행동이 있으니, 무기를 회수하라.” 하니, 일본 헌병이 해당 영(營)에 도착하여 무기를 회수하려 하였다. 이에 임재덕 씨가 일본 헌병에게 맞서 말하기를 “군기에 관해서는 우리 대한제국 황제의 칙령을 아직 받지 않았으니, 결단코 회수할 수 없습니다.” 하자, 일본 헌병이 아무 말 없이 물러갔다.
그런데 재작일(21일)에 임재덕 씨가 그 대대 병정들의 소요 사건으로 인해 육군법원에 체포되어, 첫 심문을 받을 때에 양주먹으로 땅을 치며 크게 말하기를 “병정들의 소요를 금하지 못한 일로 나를 꾸짖는다면 그 책임이 없지 않으나, 그러나 이 소요는 병정들의 충의에서 우러난 분노에 따른 것이니, 병정들에게 어찌 죄가 있겠는가!” 하고 일장 변명을 하였다고 한다.
"隊長被捉", 대한매일신보(국한문)[大韓每日申報(국한문)], 19070723
1907년 4월에 시위혼성여단이 세워지면서 여단장인 양성환 참장의 선임부관이 되었다. 7월 1일에는 제1연대 제3대대장인 이용승(李容昇)이 육군연성학교로 전보되자 임재덕이 부관 자리에서 3대대장 대리로 옮겼다. 고종 퇴위 반대 운동 당시인 7월 17일에는 황궁수위대장 임무를 수행하다 고종을 겁박하기 위해 경운궁에 헌병들을 끌고 난입하려던 군부대신 이병무를 막아섰고, 이 과정에서 갈등을 빚었다.
한편 7월 19일 무렵에는 그의 대대에서 시위대에 가담하는 탈영자가 나오자, 병사들을 통제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같은 달 21일에 이갑과 함께 징계성으로 면직되었다. 당시 상황을 기록한 매천야록과 대한매일신보의 보도기사에 따르면 그는 '본인이 장병들을 통제하지 못한 것은 죄라면 죄겠지만, 장병들이 들고 일어난 이유는 충의심(忠義心)에서[5] 우러난 것인데 군부대신은 이를 알고나 있는 거냐'며 분통을 터뜨렸다고 전한다.
대한제국 군대 해산이 일어나고 며칠 뒤인 9월 16일에 다시 정위로 재임용되었다. 육군무관학교 교관 등으로 근무하다가 1909년에 참령으로 진급했고 경술국치 하루 전인 1910년 8월 28일에 태극장을 하사받았다.
2.1. 1908년 이후의 모순된 행적
친일파 처단하며 “죽어도 몹시 죽어야 할 것이다”
...(전략)... 용문동 의병 주둔지 지휘소 앞에 임재덕과 김원흥이 결박된 채 무릎이 꿇렸다. 홍범도가 나섰다.
“너희 두 놈은 내 말을 들어라. 김원홍 이놈! 네가 수년을 진위대 참령으로 국록을 수만원을 받아먹다가, 나라가 망할 것 같으면 시골에서 감자 농사하며 먹고사는 것이 그 나라 국민의 도리이거든. 도리어 나라의 역적이 되니, 너 같은 놈은 죽어도 몹시 죽어야 할 것이다. 임재덕도 너와 같이 사형에 다 청한다.”
두 사람은 깎아 세운 두 나무 기둥에 각각 묶였다. 홍범도는 지시했다. “석유통의 위 딱지를 떼어 저놈들 목욕시키고, 불 달아놓아라”라고. 지시는 즉각 실행됐다. 일본군 토벌대를 지휘하던 전직 한국군 고급 장교와 일진회 간부는 그렇게 생애를 마쳤다.
"내 남편 홍범도…비구니 출신 아내 ‘불 고문’ 견디며 남긴 말", [한겨레21] 임경석의 역사극장
...(전략)... 용문동 의병 주둔지 지휘소 앞에 임재덕과 김원흥이 결박된 채 무릎이 꿇렸다. 홍범도가 나섰다.
“너희 두 놈은 내 말을 들어라. 김원홍 이놈! 네가 수년을 진위대 참령으로 국록을 수만원을 받아먹다가, 나라가 망할 것 같으면 시골에서 감자 농사하며 먹고사는 것이 그 나라 국민의 도리이거든. 도리어 나라의 역적이 되니, 너 같은 놈은 죽어도 몹시 죽어야 할 것이다. 임재덕도 너와 같이 사형에 다 청한다.”
두 사람은 깎아 세운 두 나무 기둥에 각각 묶였다. 홍범도는 지시했다. “석유통의 위 딱지를 떼어 저놈들 목욕시키고, 불 달아놓아라”라고. 지시는 즉각 실행됐다. 일본군 토벌대를 지휘하던 전직 한국군 고급 장교와 일진회 간부는 그렇게 생애를 마쳤다.
"내 남편 홍범도…비구니 출신 아내 ‘불 고문’ 견디며 남긴 말", [한겨레21] 임경석의 역사극장
[별지]
제3순사대장 임재덕(林在德) 앞으로
북청 수비구 사령관 4월 30일
명령
1. 홍범도(洪凡道)가 인솔하는 폭도 일단은 현재 갑산 북방 근거리의 지역에 있으며, 또 그 일부는 삼수(三水) 부근에 출몰하고 있다.
2. 귀관은 그 대를 인솔하고 5월 1일 북청을 출발, 갑산 부근에 도착하여 적당한 지점에 위치하고 폭도 귀순 권유에 노력할 것이다.
3. 현재 구류 중인 차도선(車道善)의 일행 김기학(金基學), 김좌봉(金佐鳳) 및 홍범도의 처자 등은 귀순 권유의 수단으로 필요에 따라 수의(隨意) 사용함을 허용한다. 다만 도망하지 않는 확증이 없는 한 그들을 함부로 방면(放釋)해서는 안 된다.
주의
근무상 주의사항은 단천(端川) 파견 시에 준 것과 같다.
8. 폭도 토벌 경황 제83호. 메이지 41년(1908) 5월 12일 제13사단 참모부 발신.
제3순사대장 임재덕(林在德) 앞으로
북청 수비구 사령관 4월 30일
명령
1. 홍범도(洪凡道)가 인솔하는 폭도 일단은 현재 갑산 북방 근거리의 지역에 있으며, 또 그 일부는 삼수(三水) 부근에 출몰하고 있다.
2. 귀관은 그 대를 인솔하고 5월 1일 북청을 출발, 갑산 부근에 도착하여 적당한 지점에 위치하고 폭도 귀순 권유에 노력할 것이다.
3. 현재 구류 중인 차도선(車道善)의 일행 김기학(金基學), 김좌봉(金佐鳳) 및 홍범도의 처자 등은 귀순 권유의 수단으로 필요에 따라 수의(隨意) 사용함을 허용한다. 다만 도망하지 않는 확증이 없는 한 그들을 함부로 방면(放釋)해서는 안 된다.
주의
근무상 주의사항은 단천(端川) 파견 시에 준 것과 같다.
8. 폭도 토벌 경황 제83호. 메이지 41년(1908) 5월 12일 제13사단 참모부 발신.
2024년 한겨레에 칼럼을 작성한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는 1908년 4월 말에서 5월 초 사이에 임재덕이 일본군의 명령을 받고 홍범도를 진압하기 위해 갔다가 그의 첫째 아내를 고문하여 잔혹하게 살해했고, 결국 홍범도에게 잡혀 화형당했다고 다소 극적인 어투로 설명한 바 있다. 그는 주장의 근거로 반병률 교수가 홍범도의 일지를 모아 펴낸 "홍범도 장군"을 인용했다.
일단 당시 임재덕이 홍범도 의진을 진압하는 데 투입되었으며 홍범도의 아내와 자식을 인질로 사용한 것은 상술한 일본 13사단 참모부의 문서와 조선폭도토벌지에서도 교차검증되는 명백한 사실이다. 따라서 그가 홍범도의 아내를 고문치사에 이르게 하였다는 증언은 상당히 신빙성이 높은 편이다. 다만 임재덕이 왜 갑자기 이러한 잔혹한 모습을 보여준 이유가 무엇인지는 미상이다. 대한협회에 따르면 임재덕은 이보다 앞서 단천군의 의병을 진압할 때에는 다짜고짜 총칼을 들이미는 대신 말로 설득하여 평화롭게 해산시키기도 했기 때문. 이때 그는 애민정신이 높다고 칭송받기도 했다. 물론 대한협회가 평상시 의병운동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시각을 견지해 왔음을 감안하면 임재덕에 대한 그들의 평가 역시 온전히 믿기는 힘들다.
북청군 신설 이른바 순사대관 임재덕, 김원흥 두 사람은 단천군에 출장하여 대한협회 회원 윤대유, 최병선, 김병협 등과 맺어 함께 주민들에게 연설하기를, “일진회는 나라를 팔아먹는 도적 무리 중에서도 가장 큰 자들이며, 지방대를 폐지하고 관리들을 착취하여 그 죄가 하늘에 가득하다. 우두머리 송병준은 일본에 갇혀 있고, 회장 이용구는 문을 닫고 나오지 않으니, 북쪽 백성들의 의거는 떳떳하고 바른 길이다.” 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폭도의 활약은 폭군을 돕는 것일 뿐인데, 만약 정계(政界)의 지휘가 없다면 어찌 이처럼 할 수 있었겠는가. 그렇다면 정부의 여러 대신들은 이용구 씨와 더불어 재판하는 데 그칠 것이며, 공연히 무고한 생령을 죽이는 것은 나라를 망하게 하려는 본뜻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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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靑郡新設 所謂巡査隊官 林在德 金元興 諸氏은 出張端川郡야 締結大韓協會會員 尹大有 崔秉瑄 金秉協 諸人야 會同人民演說曰 一進會는 莫重國土賣食賊이오 地方隊를 革罷고 官吏을 勒削야 其罪貫天야 領首 宋秉畯은 在囚日本고 會長 李容九은 杜門不出여스니 北民擧義가 堂堂正道라니 暴徒効力은 助桀爲虐인바 若無政界指揮오면 豈敢如是리이오. 然則 政府諸公은 與李容九氏로 裁判乃已거이오 徒傷無辜生靈者 豈非亡國之本意乎아.}}}{{{#!folding [ 원문 펼치기 · 접기 ]
1908년 4월 6일, 함경남도 일진회 평의원장 엄주하가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에게 보낸 상서 "상정부서(上政府書)"
퇴관 장교 여러 분이 대한공업회를 조직한 것은 이미 보도한 바와 같거니와, 그제(再昨日)에 훈련원에서 발기총회를 열고 임원을 조직하였는데, 총재는 조희연 씨로, 회장은 윤치성 씨로, 총무는 임재덕 씨로 선임하였다 하더라.
출전: "工會任員", 대한매일신보(국한문)[大韓每日申報(국한文)], 1909년 9월 7일
출전: "工會任員", 대한매일신보(국한문)[大韓每日申報(국한文)], 1909년 9월 7일
다만 그 외 임재덕이 일진회 간부라거나 홍범도에게 결국 잡혀 죽었다는 임 교수의 주장은 설득력이 낮다. 우선 1909년 8월 6일자 황성신문 기사에 등에서 홍범도에게 처단당했다는 임재덕이 멀쩡히 살아서 참령으로 진급한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 또한 임재덕은 고종 퇴위 반대 운동 당시부터 대표적인 양위반대파 군인으로 활동했던 인물이기에 일진회와는 오히려 대립하는 입장이었다. 각사등록에 수록된 1908년 4월 6일자 함경남도 일진회지부 평의원장 엄주하가 이완용에게 보낸 문서에 따르면, 임재덕은 본인이 진압할 대상인 의병들 앞에 나아가 일장연설을 하면서 일진회원들을 두고 나라 팔아먹은 도적떼 중에서도 가장 최악인 놈들이라는 투로 평하였다. 그리고는 의병들을 두둔하며 봉기의 정당성을 긍정했다.
또한 임재덕은 1909년 9월 7일부터 윤치성과 신규식을 비롯한 일련의 퇴역 군 장교들이 군인구락부 회비와 삼청동 기기창의 시설들을 이용해 설립한 민족자강운동 단체인 대한공업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해 총무가 되었다. 한편 "한민족독립운동사"에서는 저명한 일본 군사사학자 사사키 하루타카(佐佐木春隆) 교수의 저서 "한국독립운동의 연구(韓國獨立運動の硏究)" 및 야마모토 시치헤이(山本七平) 교수의 저서 "홍사익 중장의 처형(洪思翊中將の處刑)"을 인용하여 임재덕이 1910년대에 결국 만주로 망명하여 한국독립운동에 가담했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종합하자면 임재덕 정위가 일본군의 명령을 받아 정미의병을 진압하며 홍범도 의진을 공격한 것은 사실이다. 그의 아내를 고문했을 가능성도 높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의병들을 두둔했고 일진회와는 대립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독립운동에 참여하였을 가능성도 매우 높다. 따라서 임재덕이 정확히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여전히 미궁 속에 있다. 그는 공식적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도, 독립유공자로도 기록되지 않았다.
3. 여담
1909년에 직위가 폐관되면서 참령으로 승진한다는 내용이 보도되었다. #1918년에 임재덕의 모친상 부고가 매일신보에 실렸다. 여기서는 임재덕이 전 부령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선영이 있는 충남 아산에 묻힌다고 보도되었다. #
4. 관원이력
이름
임재덕 (林在德)
민족 구분
한국인
본관지
1. 평택
출전: 『관원이력』 15책, 404
생년월일
1. 1870년 12월 4일
출전: 『관원이력』 15책, 404
현주소
1. 한성 북서 순화방 사장감계 동곡동 제40통 제6호
출전: 『관원이력』 15책, 404
학력
1. 1895년 10월 20일 일본국 도쿄 유학
동년 11월 16일 게이오의숙(慶應義塾) 입학
1896년 11월 19일 세이조학교(成城學校) 입학
1898년 11월 20일 졸업
동년 11월 21일 사관학교 입학[6]
1899년 11월 20일 졸업
1899년 11월 21일 견습 보병 제1연대 배속
1900년 9월 17일 일본 유학 명령
동년 12월 3일 귀국 명령
출전: 『관원이력』 15책, 404
경력 및 활동
1. 1900년 7월 17일 육군 참위 임명
1905년 3월 25일 육군유년학교 학도대 부속 보임
동년 4월 13일 육군 보병 부위 승진
동년 8월 1일 육군 연성학교 교관 보임
동년 10월 23일 육군 보병 정위 승진, 무관학교 교관 보임
동년 12월 14일 군부 군무국 보병과원 보임
1906년 4월 23일 일본국 개선관병 무시찰위원 명, 특별서훈 훈6등 팔괘장
동년 5월 3일 일본국에서 특별서훈 훈5등 서보장
동년 10월 18일 군부 교육국 편수과원 보임
1907년 1월 24일 황태자 전하 가례 기념장 수훈
동년 4월 30일 시위혼성여단 부관 보임
동년 7월 2일 시위보병 제1연대 제3대대장 보임
동년 7월 21일 면관·구나(拘拿), 사졸의 망동을 능히 제지하지 못한 사건으로 인함
1907년 8월 29일 무죄 방면
동년 9월 4일 징계 면제
동년 9월 16일 육군 보병 정위 임명
동년 9월 17일 군부부속 보임
1907년 현재 군부부속 육군 보병 정위
출전: 『관원이력』 15책, 404
참고 문헌
『대한제국관원이력서』
임재덕 (林在德)
민족 구분
한국인
본관지
1. 평택
출전: 『관원이력』 15책, 404
생년월일
1. 1870년 12월 4일
출전: 『관원이력』 15책, 404
현주소
1. 한성 북서 순화방 사장감계 동곡동 제40통 제6호
출전: 『관원이력』 15책, 404
학력
1. 1895년 10월 20일 일본국 도쿄 유학
동년 11월 16일 게이오의숙(慶應義塾) 입학
1896년 11월 19일 세이조학교(成城學校) 입학
1898년 11월 20일 졸업
동년 11월 21일 사관학교 입학[6]
1899년 11월 20일 졸업
1899년 11월 21일 견습 보병 제1연대 배속
1900년 9월 17일 일본 유학 명령
동년 12월 3일 귀국 명령
출전: 『관원이력』 15책, 404
경력 및 활동
1. 1900년 7월 17일 육군 참위 임명
1905년 3월 25일 육군유년학교 학도대 부속 보임
동년 4월 13일 육군 보병 부위 승진
동년 8월 1일 육군 연성학교 교관 보임
동년 10월 23일 육군 보병 정위 승진, 무관학교 교관 보임
동년 12월 14일 군부 군무국 보병과원 보임
1906년 4월 23일 일본국 개선관병 무시찰위원 명, 특별서훈 훈6등 팔괘장
동년 5월 3일 일본국에서 특별서훈 훈5등 서보장
동년 10월 18일 군부 교육국 편수과원 보임
1907년 1월 24일 황태자 전하 가례 기념장 수훈
동년 4월 30일 시위혼성여단 부관 보임
동년 7월 2일 시위보병 제1연대 제3대대장 보임
동년 7월 21일 면관·구나(拘拿), 사졸의 망동을 능히 제지하지 못한 사건으로 인함
1907년 8월 29일 무죄 방면
동년 9월 4일 징계 면제
동년 9월 16일 육군 보병 정위 임명
동년 9월 17일 군부부속 보임
1907년 현재 군부부속 육군 보병 정위
출전: 『관원이력』 15책, 404
참고 문헌
『대한제국관원이력서』
5. 참고자료
- 네이버 블로그 대한제국의 일본 육사 출신들
- 조선일보 1907년 남대문, 누가 박승환 대대장을 죽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