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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공산당

북조선공산당에서 넘어옴
(창당) 조선공산당
사회노동당
(개별 합류)[1]
파일:조선공산당 마크.png
<colbgcolor=#E10F14><colcolor=#fff> 조선공산당
朝鮮共産黨
Communist Party of Korea
슬로건 만국 프로레타리아트는 단결하라!
약칭 조공, 공산당
목적 혁명을 통한 조선 독립
부르주아민주주의[2] 정부 수립
창당일 1925년 4월 17일
해산일 1946년 11월 23일 (남조선로동당으로 통합)
중앙당사 서울특별시 중구 소공동 74번지 근택빌딩 2층
(現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7길 27)[3]
책임비서 김재봉
강달룡
김철수
안광천
김준연
김세연
차금봉
박헌영
기관지 대중신문·이론투쟁·현계단[4], 청년조선[5], 혁명·불꽃,[6] 볼셰비키·노력자신문[7], 레닌주의[8], 콤뮤니스트, 적기[9], 공산주의자[10], 해방일보[11]
청년조직 고려공산청년회
외곽 단체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전국농민조합총연맹
조선부녀총동맹
후계 정당 사회노동당[12]
남조선로동당
「조선공산당 선언」
① 민주공화국을 건설하되, 국가의 최고급 일체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조직한 직접 · 비밀 · 보통 및 평등의 선거로 성립한 입법부에 있을 것
② 직접 · 비밀 · 보통 및 평등의 선거로 광대한 지방자치를 건설할 것
③ 전 국민의 무장을 실시하고 국민경찰을 조직할 것
④ 일본의 군대, 헌병 및 경찰을 조선에서 철폐할 것
⑤ 인민의 신체 혹 가택을 침범하지 못할 것
⑥ 무제한의 양심, 언론, 출판, 집회, 결사 및 동맹파업의 자유를 가질 것
⑦ 문벌을 타파하고 전 인민이 절대평등의 권리를 가질 것
⑧ 여자를 모든 압박에서 해탈할 것
⑨ 공사 각 기관에서 조선어를 국어로 할 것
⑩ 학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무료 의무 및 보통 및 직업교육을 남녀 16세까지 실시할 것. 빈민 학령 자녀의 의식과 교육용품을 국가의 경비로 공급할 것
⑪ 각종 간접세를 폐지하고, 소득세 및 상속세를 누진율로 할 것
⑫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과 우의적 연맹을 체결할 것
1926년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

1. 개요2. 1920년대 공산주의 배경3. 1925년 창당
3.1. 1차 조선공산당3.2. 2차 조선공산당3.3. 3차 조선공산당3.4. 서상파 조선공산당(12월 당)3.5. 4차 조선공산당
4. 초기 당재건운동
4.1. 조선공산당 재건설준비위원회4.2. 조선공산당재조직중앙간부/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4.3. 조선공산당재건동맹4.4. 조선공산당조직준비위원회
5. 경성트로이카6. 경성콤그룹7. 원산 공산주의자 그룹8. 1945년 재건
8.1. 조선인민공화국8.2. 중앙위원회 구성8.3. 북조선분국 설치8.4. 주요 활동과 몰락
9. 관련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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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25년 4월 17일 창건된 한반도공산주의 정당이자 독립운동 단체.

광복 후 1945년 8월 16일과 8월 20일 각각 장안파와 재건파가 출범하였다. 9월 8일 열성자대회를 열어 통합문제를 논의하여 9월 11일 조선공산당이 정식 재건되었다. 1946년 11월 23일 남조선로동당으로 합당하였다.

2. 1920년대 공산주의 배경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14px-Hammer_and_sickle.svg.png 일제강점기 한국 공산주의 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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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이전
한인사회당 사회혁명당 전로한인공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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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파 ML파 제2차 조선공산당
정우회
춘경원당 제3차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일본총국
제4차 조선공산당
조선반제동맹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
조선공산당재조직중앙간부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
조선공산당재건동맹
조선공산당조직준비위원회
경성 트로이카 권영태·김희성 그룹
이관술·박진홍 그룹 원산 공산주의자 그룹
경성 콤그룹
경성 콤그룹 공산주의자 협의회
광복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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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주의 운동의 기원에 대해 1980년대까지의 학계 연구는 사회주의와 민족주의를 대립하는 운동으로 봤지만, 1990년대 이후 학계 연구로 식민지의 특수성으로 인해 한국 사회주의는 민족주의의 한 분파에서 출발했음이 밝혀졌음을 이준식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가 말하는 한국 사회주의의 기원에 대해 밝힌 "역사 연구자들의 노력"은 임경석 교수의 연구가 대표적이다.
정부가 뒤늦게 사회주의자를 독립유공자로 지정하게 된 데에는(중략)사회주의자로 분류되는 혁명가 대부분이 계급 혁명에 앞서 민족 혁명을 주장하고 그것의 실현을 위해 온몸을 바쳐 싸웠다는 사실이 역사 연구자들의 노력에 의해 하나둘 밝혀지면서 포상의 근거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중략) 사회주의 계열의 운동조차 그 출발점은 사실상 민족주의였다.

1980년대 중반까지 사회주의운동사 연구를 주도해 온 몇몇 연구자들은 사회주의 운동이 코민테른과 소련의 지도 아래 계급 혁명을 추구한 것으로 보았다.(대표적인 보기가 서대숙, 《한국공산주의운동사 연구》, 김준엽•김창순, 《한국공산주의운동사》, 로버트 스칼라피노•이정식, 《한국공산주의운동사》 등이다.) (중략) 그러나 일제강점기 사회주의자들이 꿈꾼 것은 계급 차별이 없는 사회만은 아니었다. 그것보다 더 강력하게 당시 사회주의자들을 혁명 운동으로 이끈 것은 민족 해방에의 열정이었다. 기본적으로 일제강점기 사회주의자들은 민족 문제 해결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인식하고 있었다. 사회주의자에게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민족 해방이었다. 민족 해방을 이룬 뒤 계급 해방을 이루자는 일종의 2단계 혁명론이 대세를 이루었다.

흥미로운 것은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자들이 이전부터 존재하던 독립 운동의 한 분파에서 갈라져 나온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제1차 세계 대전을 전후해 고양되고 있는 국제 혁명 운동의 분위기를 적극 활용하려고 한 일부 혁명적 민족주의자들이 사회주의를 새로운 독립운동의 이념으로 받아들임으로써 한국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민족의 독립을 위한 활동을 벌이다가 사회주의를 수용하게 된 사회주의자들에게 운동의 일차적인 과제는 독립이었다. 민족 해방을 위한 새로운 이념으로 사회주의를 받아들였다는 것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사회주의 운동에서 활약한 인물들의 출신 배경을 살펴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찾아볼 수 있다. 상당수가 사회주의를 수용하기 이전에 이미 독립 운동에 종사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준식, 독립운동가 김한 학술회의 기조발제

독립운동가 중 급진적 분파가 공산주의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인다. 1920년대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연구하고 공부하는 모임과 독서회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여기에 힘 입어 공산주의 운동가들은 공산주의 단체를 세우기 시작했다. 국내에서는 서울청년회', '신사상연구회' 등이 세워졌고, 일본에서는 유학생을 중심으로 '북성회'가 만들어졌다. '서울청년회'는 서울파, '신사상연구회'는 화요파, '북성회'는 북풍파의 기원이 된다. 이런 단체들은 국내외 공산주의 운동의 전파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해주었고, 국외에 있던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와도 관계를 맺으며 성장했다.[13] 1924년에는 러시아 한인 2세들을 주축으로 조선노동당이 결성되었다.

박찬승 교수에 따르면 독립운동가들이 사회주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다음 이유 때문이다. 우선 제국주의 열강들이 조선 독립의 열망을 철저히 외면하고 있었던 반면, 소련 정부는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했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식민지 조선 대중들의 처지가 사회주의 이념 확산의 토양이 되었다. 농민 · 노동자 등 절대 다수의 대중은 민족적 · 계급적 억압을 받고 있었다. 그들의 비참한 처지를 개선할 길은 해방과 혁명의 길 외에는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피지배계급 중심의 혁명철학인 사회주의 이념은 그 성격상 식민지 조선의 대중들에게 효과적인 무기를 제공하며 그들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3. 1925년 창당

3.1. 1차 조선공산당

코민테른은 1922년 12월 블라디보스토크에 코민테른 산하 꼬르뷰로(고려국)를 설치했다. 꼬르뷰로의 지시에 따라 김재봉 · 김찬 · 신철 등이 국내에 파견되어, 1923년 6월경 조선공산당의 준비기관으로서 꼬르뷰로 국내부 청년회를 조직했다. 주로 화요회계와 북풍회계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청년회와 노농단체 내부에 조직 기반을 넓혀, 1925년 조선공산당이 조직될 즈음에는 서울에 8개, 지방에 10개의 당 야체이카(3~5명으로 이루어진 세포 조직)와 130명의 당원을 확보하고 있었다.출처: 박찬승

한편 서울청년회계는 별도로 공산당 결성을 추진했다. 서울청년회계도 청년회와 노농단체를 중심으로 조직 기반을 넓혀, 이를 토대로 1924년 5월 고려공산동맹을 조직했다. 꼬르뷰로 국내부와 서울청년회계는 경쟁적으로 전위당을 준비하고 있었다.출처: 박찬승 참고로 서울파 연구는 전명혁 교수의 연구가 대표적이다.

꼬르뷰로 국내부는 4단체(화요회, 북풍회, 조선노동당, 무산자동맹회) 합동을 추진하고,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와 조선기자대회를 추진했다. 서울에서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와 전조선기자대회가 열려 경찰의 눈이 그쪽으로 쏠려 있는 가운데, 1925년 4월 17일 오후 중국음식점 아서원에서 조선공산당 창당대회가 비밀리에 열렸다. 김재봉을 책임비서로 선출하고, 김찬 · 조동호 · 김약수 · 정운해 · 주종건 · 유진희 등 7명으로 중앙집행위원회를 구성했다.출처: 박찬승 다음 날인 4월 18일에는 박헌영의 집에서 공산주의자 20명이 모여 조선공산당 산하 청년조직인 고려공산청년회를 조직했다.[14] 4월 18일 김찬의 집에서 제1차 중앙집행위원회를 열어 각 부문에 야체이카를 조직할 사람들을 뽑았다.

1920년대는 문화 통치기라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같은 시위가 가능했다. 일제의 폭압적 통치는 1930년대 이후부터 심해져 1940년대 전시체제 하 극에 달한다(민족 말살 통치기).

조선공산당은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청의 창립 인준을 받기 위해 조동호를 정식 대표로, 조봉암을 부대표로 지명하여 모스크바에 파견했다. 1926년 3월 코민테른은 조선공산당을 코민테른 지부로서 인정하고, 여타 그룹들을 공산단체로 인정하면서 통일된 당을 만들 것을 촉구했다.출처: 박찬승

1차 조선공산당은 수차례 집행위원회를 열어 기관지 발행, 만주총국 설립, 고려공청 지원, 노농총동맹 분립 등을 논의했다. 고려공청은 조선청년총동맹에 들어가 27개의 군 동맹과 9개의 도 연맹을 조직하고 모스크바 공산대학에 21명의 학생을 파견했다.출처: 박찬승

조선총독부는 1925년 5월 치안유지법을 실시한다고 공포했다. 치안유지법 제1조는 “국체를 변혁 또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할 목적으로 결사를 조직한다든가 또는 그 사정을 알고 이에 가입하는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한다”라고 규정했다. 공산주의운동가들을 탄압하기 위한 법령이었다. 이후 조선의 사회주의운동가들은 대부분 치안유지법 위반의 사상범으로 투옥되었다.출처: 박찬승

1925년 11월 신의주 고려공청 회원의 부주의한 경찰 폭행 사건으로 조선공산당에서 코민테른에 보내는 문서가 경찰에 발각되어 조선공산당의 실체와 조직이 드러나 대대적인 검거선풍이 불었다. 그 결과 당 책임비서 김재봉, 고려공청 책임비서 박헌영 등 모두 220명이 검거되었다. 이 가운데 치안유지법과 정치범처벌령, 출판법 위반 등으로 101명이 재판에 회부되어 83명이 유죄판결을 받고 2명은 옥중에서 사망했다.출처: 박찬승

3.2. 2차 조선공산당

제1차 조선공산당의 김재봉, 김찬, 주종건 등은 검거되기 전에 후계당 조직을 준비했다. 그리하여 1925년 12월 말부터 1926년 1월 초 사이에 강달영(강달룡)을 책임비서로, 이준태 · 이봉수 · 김철수 · 홍남표 · 권오설 등을 중앙집행위원으로 하는 제2차 조선공산당이 구성되었다. 고려공청은 1차당의 중앙집행위원이던 권오설을 책임비서로 하여 6인으로 구성된 중앙집행위를 새로 조직했다. 이후 2차당은 조직을 확장해 146명의 당원과 119명의 후보당원을 확보했다. 또 해외에도 조직을 만들어 만주에 만주부, 도쿄상하이에 임시연락부를 설치했다. 2차당은 민족주의자들과의 연대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출처: 박찬승

2차당이 조직한 6.10 만세운동은 조선공산당의 가장 성공적인 대중투쟁이었다. 6.10 만세운동 투쟁지도특별위원회는 상하이로 피신한 김찬 · 김단야, 그리고 조봉암 등의 1차당 지도부의 지도를 받고, 권동진 등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의 지원을 받으면서 여러 종의 삐라를 만드는 등 전국적 규모의 대중시위를 준비했다.출처: 박찬승

조선공산당은 천도교 구파, 조선노농총동맹과 연대하여 6.10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했다. 그에 따라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인 권오설이 운동의 총책임을 맡게 되었다. 권오설은 지방에서는 천도교나 조선노농총동맹 조직에 의지하고, 서울에서는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조직을 이용한다는 계획을 세웠다.출처: 박찬승
파일:권오설.jpg
파일:권오직.jpg
6.10 만세 운동을 기획한 권오설권오설의 동생 권오직은 이후 조선공산당 재건운동가로 활약한다.

고려공산청년회의 지도를 받는 조선학생과학연구회와 경성의 각 학교 대표 40여 명은 5월 20일 모임을 갖고 투쟁 방법 및 자금 조달 등에 대해 의논했다. 학생들은 박두종(YMCA 영어과), 이천진(경성제국대학), 박하균(연희전문학교), 이병립(연희전문), 이선호(중앙고등보통학교) 등이 선임되었다. 이들은 박용규(중앙고보), 곽대형(중동학교) 등이 따로 운동을 준비하는 것을 알고, 서로 역할을 분담했다. 그런데 천도교에서 준비하던 전단이 일본 경찰에 의해 우연히 발각되고, 이어서 조선공산당 조직이 6월 6일 발각되는 바람에 준비해둔 전단은 모두 압수되었다. 이에 조선학생과학연구회 측은 급히 격문과 전단을 다시 인쇄했다. 또 6월 8일과 9일, 태극기조선독립만세기, 격문 약 1만 매를 제작했다. 중앙고보의 이선호는 10일 아침 학교에서 류면희, 임종업, 이현상 등에게 이것을 나누어주고 시위현장에서 뿌리도록 지시했다.출처: 박찬승

10일 오전 8시 반 순종황제의 장례 행렬이 종로 3가 단성사 앞을 막 통과할 즈음, 이선호가 길로 튀어나와 격문을 뿌리고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류면희 · 임종업 · 이현상 등은 격문을 뿌리고 만세를 선도했다. 연도에 도열해 있던 중앙고등보통학교 학생들도 만세를 불렀다.출처: 박찬승
현재 세계 정세는 식민지 민중 대 제국주의 군벌의 투쟁과 무산자 계급 대 자본가 계급의 투쟁으로 전개되고 있다. 제국주의 군벌에 대한 식민지 민중의 투쟁은 민족적 정치적 해방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며, 자본가 계급에 대한 무산자 계급의 투쟁은 계급적 경제적 해방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

그러므로 식민지에 있어서는 민족 해방이 곧 계급 해방이고 정치적 해방이 곧 경제적 해방이라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식민지 민족이 총체적으로 무산자 계급이며 제국주의가 곧 자본주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는 당면한 적인 침략국 일본으로부터 정치적 경제적인 모든 권리를 탈환하지 않으면 죽음의 땅을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형제여! 자매여! 눈물을 그치고 규탄하라! 전 세계의 피압박 민족과 무산자 대중은 모두 함께 정의의 깃발을 들고 우리와 함께 보조를 맞춰나갈 것이며, 붕괴하고 있는 제국주의의 하나인 일본 지배 계급도 운명이 다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에게도 명백하다.(중략)

형제여! 자매여! 최후까지 싸워 완전 독립을 쟁쥐하자! 혁명적 민족운동자 단체 만세! 조선독립만세!
6.10 만세운동 전단[15]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6.10 만세 운동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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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삼대의 배경이다.

3.3. 3차 조선공산당

파일:김철수일제감시대상카드.jpg
파일:김광수일제감시대상카드.jpg
3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김철수 김철수의 동생 김광수

강달영을 포함한 100여명이 6.10 만세 운동 준비과정에서 체포되어 2차당은 와해됐다. 따라서 1926년 9월경 제2차 조선공산당의 중앙위원이던 김철수를 중심으로 제3차 조선공산당이 결성되었다. 3차 고려공청도 제2차 고려공청 회원이던 고광수를 중심으로 재조직되었다. 김철수와 고광수는 조직을 확대할 필요성을 느끼고 서울청년회계와 통일을 추진한다. 김철수는 상해계였으며 파벌 관념이 적었고, 전선 통일에 적극적이었다. 그에 따라 서울청년회계 신파(조기승 · 이인수 · 김병일 · 신철호 · 한명찬 등)는 제3차 조선공산당에 참여하게 되었다.또 1926년 여름 안광천 등 일본 유학생 출신의 일월회가 대거 귀국하여 국내 운동에 가세함으로써, 제3차 조선공산당은 이들로부터 인력을 충원 받았다.출처: 박찬승

1926년 12월에 열린 제2차 당대회에서 김철수가 책임비서직을 사임하고, 안광천을 책임비서로 한 중앙간부진이 새로이 선출되었다. 김철수는 당재건을 보고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갔다. 이후에도 제3차 조선공산당은 일제의 주시를 피하고 당내 기밀을 유지하기 위해 간부진을 자주 교체했다. 책임비서직은 김준연, 김세연 등으로 바뀌었다. 고려공청의 책임비서직도 고광수, 양명, 하필원, 김철 등의 순으로 바뀌었다. 그 밖에 3차당의 주요 간부진은 한위건 · 최익한 · 권태석 · 조기승 · 김월성 등이었다. 이들은 대체로 서울계 신파, 일월회계, 그리고 만주 고려공청파가 합세한 형태를 취했다. 이와 같이 3파가 연합한 이들 그룹을 세간에서는 이른바 ‘ML파’라고 불렀으며, 제3차 조선공산당도 흔히 ‘ML당’이라 불리게 되었다.출처: 박찬승

3차당은 강원도를 제외한 각도에 도 간부를 두었으며, 국내 야체이카도 약 40개에 달했다. 당원도 200명 정도를 확보했다. 3차당은 만주총국과 상해부를 재건하고 일본부도 설치했다. 특히 일본부의 활동이 활발하여 『대중신문』, 『이론투쟁』, 『현계단』 등 기관지를 발행하기도 했다.출처: 박찬승
파일:박락종.jpg
파일:송언필.jpg
조선공산당 일본부 책임비서 박낙종독립운동가 송언필

3차당의 가장 두드러진 활동은 민족주의 세력과 함께 신간회근우회를 조직한 것이다. 1926년 4월 화요회 · 북풍회 · 조선노동당 · 무산자동맹의 4단체는 발전적 해체를 결의하고 정우회를 조직했다. 정우회는 11월 15일 「정우회선언」을 발표하여 사회주의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의 제휴가 필요하다고 선언했다. 이는 이후 사회주의자들이 신간회 결성에 참여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제3차 조선공산당 역시 1928년 초 경찰에 발각되어 30여 명의 주요 간부가 검거됨으로써 조직이 무너졌다.출처: 박찬승

3.4. 서상파 조선공산당(12월 당)

제3차 조선공산당에 참여하지 않은 서울청년회계 구파의 이영 · 이운혁 등은 1927년 12월 서울의 요리점 춘경원에서 독자적인 조선공산당을 조직했다. 이를 흔히 ‘춘경원 공산당’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 조직은 코민테른의 승인을 얻지 못했으며, 1928년 4월~6월 간부 대부분이 경찰에 검거됨으로써 종막을 고했다.출처: 박찬승

3.5. 4차 조선공산당

1928년 2월에 제4차 조선공산당이 조직되었다. 3월에는 노동자 출신 차금봉이 책임비서로, 정치부장 안광천, 정치부 위원 양명·한명찬(韓明燦), 조직부장 김한경(金漢卿), 조직부 위원 한해(韓海)·이성태(李星泰)·윤택근(尹澤根) 등 대부분 새로운 세대의 활동가들로 교체되었다. 1920년대 1~3차 조선공산당의 주요 핵심멤버들이 양반, 지식인 계층 출신들이었던 것과 달리 차금봉은 철도 노동자 출신으로 '노동자 출신으로 최초로 정당의 책임비서가 된 인물'이다. 고려공청도 김재명을 책임비서로 하는 새 간부진을 구성했다.

4차 조선공산당의 1928년 3월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는 「조선민족해방운동 관한 테제(정치논강)」에서 당시 조선혁명의 성격을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으로 파악하면서, “조선의 장래 권력형태는 조선사회의 정세에 기초한 혁명적 인민공화국이어야 한다. 조선에 소비에트공화국을 건설하는 것은 좌익소아병적 견해이고 부르조아공화국을 건설하는 것은 우경적 견해”라고 하였다.[16]

4차당은 일본부를 일본총국으로 개칭하고 만주총국과 북경지부 간부진도 재정비했다. 국내에서는 신간회 32개 지회에서 당원들이 활동 중이었다. 근우회 내에도 조원숙을 책임자로 하는 야체이카(세포조직)가 조직되어 있었다. 기관지도 더 확보하여 일본에서 『청년조선』, 만주에서 『혁명』, 『불꽃』을 추가로 간행했다.출처: 박찬승

그러나 1928년 7월~10월 사이에 170명이 검거되며, 4차당도 사실상 해체 상태에 들어갔다. 특히 그해 12월에 나온 코민테른의 「12월테제」는 조선공산당의 해체를 사실상 기정사실화했다.출처: 박찬승

4. 초기 당재건운동

4.1. 조선공산당 재건설준비위원회

이동휘와 김규열은 1929년 3월 중국 상하이에서 김철수 · 윤자영 · 오산세 · 김일수 · 최동욱, 김영만, 김영식, 안상훈 등과 당재건 방침을 협의했다. 그 결과 당재건을 위한 조직으로 ‘조선공산당 재건설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중국 길림성에 당재건운동의 근거지를 두기로 했다(책임자 김철수). 기관지로 비밀잡지 『볼셰비키』와 대중기관지 『노력자신문』을 발간했다. 이후 그들은 흥남의 공장 등지에 세포 조직을 만드는 데 열중했다. 그러나 코민테른은 1930년 6월 ‘조선공산당 재건설준비위원회’를 해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코민테른 측은 조선공산당 재건에 관한 모든 책임을 중국공산당(당내 조선국내공작위원회)에 맡겼다고 통보해왔다. 결국 1931년 3월 재건설준비위원회를 해산하고 대신 ‘좌익노동조합전국평의회준비회’를 만들었다. ‘전국평의회준비회’는 1931년 2월~3월 2개의 세포조직과 25명 남짓의 노동자 · 지식인을 획득했다. 이를 바탕으로 오성세 등은 4월 25일경 메이데이 투쟁을 준비했다. 4월 30일이 되자 신설동 종연방직공장, 서대문 대창직물공장, 철도국 용산공장 등에서 전단을 뿌렸다. 이 때문에 발각되어 6월까지 45명이 구속 기소되었다.출처: 박찬승

4.2. 조선공산당재조직중앙간부/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

1929년 5월 길림에서 한해 · 한빈 · 고광수 등이 ‘조선공산당재조직중앙간부’를 만들어 당재건운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한해는 그해 9월에 병으로 사망했다. 한빈은 부산에 들어와 공장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조직운동을 하다가 1930년 3월 체포되었다.출처: 박찬승

고경흠은 상하이에서 양명, 한위건과 협의하여 1931년 2월 국내에 들어와 권대형 · 이종림 · 서인식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을 만들었다. 이 조직은 1931년 4월 ‘공산주의자협의회’[17], 두 달 뒤 다시 ‘조선공산주의자재건협의회’로 바뀌었다.『콤뮤니스트』라는 기관지를 발행했는데 이것이 경찰의 수사망에 걸려 1932년 18명이 구속되면서 와해됐다.출처: 박찬승

4.3. 조선공산당재건동맹

안광천은 상하이에서 『레닌주의』라는 정치신문을 만들면서 당재건운동을 시작했다. 그는 1929년 가을에 김원봉과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을 만들고 베이징에 레닌주의정치학교를 세우고 6개월 과정으로 활동가를 양성했다. 레닌주의정치학교를 졸업한 활동가들은 국내에 들어와 당재건운동에 나섰다. 그 대표적인 조직이 ‘조선공산당 강릉공작위원회’였다. 위원회는 강릉에서 적색노조, 적색농조, 소년부(독서회) 등의 조직을 만들어 활동하면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경찰은 1933년 종연방직 파업을 수사하던 중 레닌주의 그룹을 알아내고 130명을 검거했다.출처: 박찬승

4.4. 조선공산당조직준비위원회

코민테른은 1928년 「12월테제」 발표 이후 국제레닌대학이나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마친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을 통해 당재건운동에 개입했다. 모스크바에서는 1929년 김단야 · 조두원 · 김정하를 조선에 파견했다.# 김단야·권오직 등은 1929년 서울에서 조선공산당조직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서울·평양·부산을 ‘트로이카’ 지역으로 설정하고 전국 8개 지역에 조직가를 확보하는 조직사업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조직의 모든 내용을 알고 있는 연락원이 체포되자, 1929년 12월 김단야는 국내를 벗어나 1930년 2월 모스크바로 돌아갔다. 김단야의 망명 이후 준비위원회는 권오직·채규항(蔡奎恒)·박민영(朴珉英)이 맡았다. 준비위원회는 1930년 1월 조선공산당 경성구 조직위원회를 조직하는 등 활동을 벌이다 1930년 3·1 운동 11주년 기념 격문으로 인해 대부분 체포되었다.출처

한편 모스크바로 간 김단야는 9월에 다시 상하이로 가서 『콤뮤니스트』를 발행했고, 박헌영도 여기 참여했다.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산하 조선위원회는 이를 지원했다. 박헌영과 김단야는 신의주를 통해 『콤뮤니스트』를 국내로 반입했으며, 국내에서 김형선이 일부 인쇄하기도 했다. 콤뮤니스트 그룹은 국내에 9개의 공장 세포 조직을 갖고 있었으며, 이들에게 『콤뮤니스트』를 배포했다. 또 각 지역에서 따로 『볼셰비키』, 『노동자』 등의 기관지를 만들기도 했다. 이 그룹의 조직은 1932년 경찰의 수사망에 걸려들어 체포되기 시작했다. 국내 연결자인 김형선이 먼저 체포되었고, 상하이에서 박헌영까지 붙잡히자 활동이 어려워졌다.출처: 박찬승 김단야는 모스크바로 돌아갔다.

5. 경성트로이카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경성 트로이카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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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경성콤그룹

1939년에는 이관술, 만기출소한 이순금, 김삼룡, 이현상 등 이재유 그룹을 주축으로 경성콤그룹을 결성하여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이어갔다. 경성콤그룹에는 이후 화요파의 박헌영도 영입되었다.

7. 원산 공산주의자 그룹

식민지 조선 남부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의 꽃[18]경성 트로이카-경성콤그룹이라면 식민지 조선 북부에는 이주하 중심의 원산 공산주의자 그룹이 있었다. 리강국, 최용달 등이 활동했다.
원산그룹사건은 혜산사건[19]과 달리 코민테른·중국공산당·일본공산당 등과 전연 연락 없이 완전히 사상적 전과자에 의한 일군의 적색노동조합 조직운동을 기초로 했으며, 아래로부터 시작된 점에서 현저한 특색이 있다. 테러 행위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수뇌부의 높은 사회주의 의식 수준, 인민전선전술의 정확한 파악, 그 운동 전개의 교묘한 점, 특히 대중 획득을 위한 적극적인 문서 활동의 전개 등은 혜산사건에 비할 바 아니고, 그 대상이 국경 산악지대의 의식수준이 낮은 농민과 원산 같은 수준 높은 노동자와의 차이가 있다고 해도 현저히 운동이 첨예화되고 있는 것으로 이 점 주목된다. 만약에 원산의 이 운동이 1, 2년 더 지속되었더라면 원산철도 2천 수백여 명의 종업원은 물론이고 원산의 노동자 대부분을 조직원으로 포섭하여 어느 때고 무장봉기에 동원할 준비가 완료되었을 것이다.
원산그룹에 대한 일제 경찰의 기록 [최용탁의 근대사 에세이 제38회] 역사에서 사라진 원산그룹

8. 1945년 재건

8.1. 조선인민공화국

조선공산당 정식 재건 전 좌익이 주도한 조선인민공화국이 먼저 선포된다.
공산당 재건운동가들이 대중 속에서 활동한 결과 대중에 뿌리내린 지도중심을 형성하고 점차 공산주의자들이 민족해방운동의 주도권을 획득해 갔다. 지역과 대중에 뿌리박은 운동을 전개함으로써 해방 후 각 지역에서 인민위원회나 전국노동조합평의회 등이 급속하게 결성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박한용, 일제강점기 조선 반제동맹 연구, p4
해방직후 한국에서는 일대 혁명적 고양이 일어났으며, 그 속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커다란 영향력을 갖고 있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8·15후 분출하는 대중운동을 지도할 수 있었던 사회주의자들의 정치적, 조직적 역량이 일제 말기에 어떻게 준비됐는지를 연구할 필요성이 제기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 기초하여 일제 말기의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에 관한 연구가 최근에 와서야 비로소 이루어지고 있다. 치안유지법 위반사건은 중일전쟁 발발 후 점차 감소 경향을 띠며 1940년에 그 최저 상태를 기록했으나,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1941년부터 양상이 역전되어, 그 증가 추세는 일제의 패망 시기까지도 계속된다고 한다. 이 시기 사회주의자들은 서울지방에서만도 경성콤그룹을 비롯하여 공산주의자협의회, 스딸린단, 화요회그룹, ‘자유와 독립’ 그룹 등과 같은 비밀 단체를 결성해서 활동했다. 경성콤그룹은 1936년 12월에 검거된 이재유그룹의 잔존 성원들이 이관술의 지도하에 재결집되어 활동하다가 박헌영을 조직의 지도자로 맞아들여 결성된 것이었다. 이 단체는 기존의 각파 사회주의자를 망라하여 구성된 것으로서 서울지역의 노동자·학생층은 물론 함경도를 포함한 지방에까지 자신의 조직활동을 확장했다. 이 단체는 1940~41년에 몇 차례의 검거사건으로 약화되긴 했으나 해방직전까지 줄곧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사회주의자들이 참가한 비밀단체 가운데에는 건국동맹과 같은 통일전선 단체도 있었다.
韓國史硏究의 回顧와 展望#
<colbgcolor=#247a87><colcolor=#fff>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중앙인민위원 이승만, 여운형, 허헌, 김규식, 이관술, 김구, 김성수, 김원봉, 이용설, 홍남표, 김병로, 신익희, 안재홍, 이주상, 조만식, 김기갑, 최용달, 리강국, 김용암, 강진, 이주하, 하필원, 김계림, 박낙종, 김태준, 이만규, 이여성, 김일성, 정백, 김형선, 이정윤, 김점권, 한명찬, 유축운, 리승엽, 강기덕, 조두원, 리기석, 김철수, 김상혁, 정태식, 정종근, 조동우, 서중석, 박문규, 박광희, 김세용, 강병도, 이순근, 김무정, 장기욱, 정진태, 이순금, 이상훈
후보위원 최창익, 황태성, 홍덕유, 이청원, 최근우, 김준연, 한빈, 양명, 최원택, 안기성, 정재달, 김오성, 권오직, 김두수, 장순명, 이광, 최성환, 이림수, 현준혁, 김덕영
고문 오세창, 권동진, 김창숙, 정운영, 이시영, 홍명희, 김상은, 장도빈, 김용기, 김관식, 리영출처

조선인민공화국은 당대 대중에게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 아래 설문조사는 미군정이 통치한 지 2년이 되어가는 1947년 7월 6일 시행된 점, 이미 파괴된 인민위원회를 선호한다고 응답한 점을 볼 때 단순히 국호를 묻는 투표가 아니라 조선인민공화국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신임투표이다. 즉 당대 대중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보다 조선공산당이 주도한 조선인민공화국에 대한 선호를 보여준다.
<colbgcolor=#247a87><colcolor=#fff>(1) 국호는?
1위 조선인민공화국 1708표 70%
2위 대한민국 604표 24%
3위 기타 8표 1%
4위 기권 139표 4%
(2) 정권 형태?
1위 인민위원회 1757표 71%
2위 종래 제도 327표 14%
3위 기타 262표 10%
4위 기권 113표 5%
(3) 토지개혁 방식?
1위 무상몰수 무상분배 1673표 68%
2위 유상몰수 유상분배 427표 17%
3위 유상몰수 무상분배 260표 10%
4위 기권 99표 5%
1947년 7월 6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조선신문기자회가 서울시내 중요지점 10개소에서 통행인 2495명에게 실시한 여론조사출처

8.2. 중앙위원회 구성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전 정당
대한제국 ~ 미군정
(1897 ~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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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정당 조선의 붕당
황국협회 독립협회
신민회
대한민국 임시정부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의열단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한국독립당 대한인국민회
한국혁명당 한국독립당 대한인동지회 흥사단
신한독립당 신간회
민족혁명당 한국국민당 흥업구락부 수양동우회
경성 콤그룹 조선건국동맹 조선민족혁명당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전국평의회 건국준비위원회 조선독립동맹 한국독립당 독립촉성중앙협의회 조선민족당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 한국민주당 <colbgcolor=#f00000> 조선민주당
독립노농당 남조선로동당 대동청년단 조선민족청년단 청년조선총동맹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서북청년회
남조선로동당 사회노동당
근로인민당
진보정당 조선로동당 (남로당파) 진보정당 조선로동당 (연안파) 보수정당 / 민주당계 / 진보정당 }}}}}}}}}}}}}}}

8.15 광복 이후, 1945년 8월 16일과 8월 20일 각각 장안파와 재건파가 출범하였다.

장안파 조선공산당은 서울 YMCA 빌딩 바로 옆의 장안빌딩에서 결성했다해서 '장안파'라고 불렸다. 장안파는 강령이나 규약, 당면목표를 제대로 제시하지 못했을 뿐더러 조직력 면에서 매우 취약했다. 구성원 대부분이 1930년대 이후 공산주의 운동에서 떠나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결성 10여 일 만에 '재건파'의 해체 요구로 그 세력이 대부분 와해된다.

박헌영경성 콤그룹 조직원들을 만나 경성콤그룹을 중심으로 조선공산당 재건위원회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재건파이다.

박헌영이 장안파를 제압하고 8월 24일 장안파가 해산되었다.

다만 이영, 정백 등 일부는 한동안 독자세력을 유지했다.

그리고 장안파 잔여세력 외 또다른 박헌영 반대파로 영등포 지구당이 있었다.

9월 8일 열성자대회를 열어 통합문제를 논의하였다. 박헌영이 권력을 장악하였다.

9월 11일 서울에서 발표된 중앙위원회 명단은 다음과 같다. 앞에 있는 숫자가 서열이다. 김일성은 일제강점기에도 조선공산당 활동을 한 적 없고(김일성은 중국공산당에서 활동) 광복 후 저 명단 발표 때도 외국에 있었고 앞으로도 조선공산당 중앙이 있는 서울에서 활동할 일 없고 평양에서도 아직 권력을 장악하기 전인데 박헌영 계열이 소련이 김일성을 밀어준다는 등의 정보를 갖고 있어서 서열 2위에 넣은 것.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중앙위원
1.박헌영, 2.김일성, 3.이주하, 4.박창빈, 5.리승엽, 6.강진, 7.최용건, 8.홍남표, 9.김삼룡, 10.이현상, 11.이주상, 12.이순금, 13.무정, 14.서중석, 15.이인동, 16.조복례, 17.권오직, 18.박광희, 19.김점권, 20.허성택, 21.김용범, 22.홍덕유, 23.주자복, 24.문갑송, 25.강문석, 26.최창익, 27.김근, 28.오기섭
중앙검열위원
1.이관술, 2.서완석, 3.김형선, 4.최원택

중앙위원회 소속 중앙기구의 인선은 다음과 같다.

8.3. 북조선분국 설치

파일:북한 국장.svg
북한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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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역사적 사건
<colbgcolor=#ccc,#333><colcolor=black,white> 김일성
시대
해방 (1945) ·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설치 (1945) ·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설립 (1946) · 북조선인민위원회 설립 (1947) · 제1기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 (1948)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 (1948) · 북·남조선로동당 합당 (1949) · 6.25 전쟁 (1950~1953) · 박헌영-리승엽 간첩 사건 (1953~1955) · 8월 종파사건 (1956) · 중국 인민지원군 철수 (1958) · 재일교포 북송 (1959~1984) · 조소동맹조약 (1961) · 조중동맹조약 (1961) · 갑산파 숙청 사건 (1967) · 1.21 사태 (1968) · 푸에블로호 피랍사건 (1968) ·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1968) · 7.4 남북 공동 성명 (1972) · 사회주의헌법 제정 (1972) ·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1976) · 아웅 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 (1983) ·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1987) · 제13차 평양세계학생축전 (1989) · 남북기본합의서 (1991) · 남북 유엔 동시 가입 (1991) · 북일수교협상 (1991~1992) · 제1차 북핵 위기 (1993~1994) · 서울불바다 발언 사건 (1994) · 김일성 사망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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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왜곡*
항일무장투쟁 타도제국주의동맹 (1926) · 카륜회의 (1930) · 명월구회의 (1931) · 조선인민혁명군 (1932) · 민생단 사건 (1932~1936) · 남호두회의 (1936) · 미혼진회의 (1936) · 동강회의 (1936) · 조국광복회 (1936)
6.25 전쟁 전쟁 발발 책임 · 승패 인식
백두혈통
우상화
김응우 (제너럴 셔먼호 사건) · 김형직 · 강반석 · 김정숙 · 김정일 출생지 왜곡
관련 서적 미제와 일제의 조선침략 죄행 · 백두혈통 우상화 교과서 · 세기와 더불어 · 조선력사
* 괄호 안의 연도는 북한의 주장에 근거한 연도이며, 실제 역사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단체 및 사건이거나 실제와는 다른 연도일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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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달 후 북한에서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설치된다.[20] 서울의 조선공산당의 통제력이 삼팔선 이북에 미치지 못하는 상황에서 소련군정을 등에 업은 김일성이 주도했다. 북조선분국의 책임비서는 평양 지역에서 가장 거물급 공산주의자였던 김용범이 맡았지만 실제 주도권은 소련군의 지원을 받고 대중적인 인지도도 높았던 김일성이 갖고 있었다. 또한 김용범 본인이 박헌영보다는 김일성을 지지하는 쪽이어서 북조선분국에 대한 박헌영의 영향력은 갈수록 줄어들게 되었다. 박헌영은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감소시킬 수 있는 분국 설치에 부정적이었으나 소군정의 압박을 물리치지 못했다.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은 1946년 초쯤부터는 아예 이름을 북조선공산당으로 부르기 시작했으며 1946년 8월에는 김두봉조선신민당과의 합당을 통해 북조선로동당이 되었다. 오늘날 북한의 조선로동당은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만들어진 1945년 10월 10일을 공식적인 창당기념일로 하고 있다.[21]

8.4. 주요 활동과 몰락

1945년 8.15 광복 이후 미군정기 초기 조선공산당은 미군정 당국으로부터 합법적인 정당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에 온건하게 군정청에 협조했다. 조선공산당은 지금은 사회주의 혁명의 시기가 아니며 선거를 통해 평화적으로 국가를 수립해야 한다는 평화혁명론을 채택했다.
해방 후 조선공산당 중앙이 공식 채택한 8월 테제는 무엇보다 사회주의 세력의 전통적 혁명론을 수정하여 평화혁명론, 곧 평화적인 사회주의 이행전략을 구체화하였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일제시기 이래 사회주의 세력의 일반적인 혁명노선은 무장봉기 노선이나 폭력혁명론이었다. 일반적으로 사회주의세력의 전략전술에서 평화혁명론의 가능성은 극히 제한적이거나 부정되어 왔지만, 해방 후에는 조선공산당의 혁명이행 방식으로 발전하였다. 따라서 평화혁명론은 기존의 전통적인 무장봉기전략을 철회하고, 평화적인 방식의 국가건설 전망을 도출하는 근거가 되었다.
(중략)
평화혁명론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국가권력 장악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선거주의 이행노선에 가까웠다. 실제로 사회주의 세력은 정부수립의 방식으로 선거를 고려하고 있었다. 곧 인공수립이나 미소공위를 통한 정부수립의 마지막 절차도 총선거였다.
김무용,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노선과 국가건설 운동, 2005, p55~57
사회주의혁명의 과업과 성질을 운운하는 것과 같은 극좌적 경향과 싸워야 한다. (중략) 우리가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의 중요 과업(완전 독립과 토지 혁명)을 완전 해결은커녕 이제 시초의 첫걸음을 내디디고 있는 처지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후략)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8월 테제

다음은 신탁통치 오보사건 이후 존스턴 기자회견 오보사건 당시의 기자와 박헌영의 실제 문답이다.
기자: 조선은 소비에트화하지 않는가?
박헌영: 조선은 그런 단계에 이르지 않았다. 조선은 현재 민주주의 변혁 과정에서 봉건 잔재를 청소하는 과정에 있다.

기자: 조선에 소비에트국이 건설되면 소련에 편입되는가?
박헌영: 현 계단은 봉건적 잔재를 청소하는 민주주의 변혁 과정에 있으므로 사회주의 조선이 언제 건설될지 모르나 10년 혹은 20년 후에 건설된다 하더라도 조선은 언제나 독립한 나라로 자립한다.출처

한편 질문이 상당히 악의적이며 실제로 대답엔 그다지 문제가 없었는데도 질문 내용 자체가 존스턴 기자회견 오보사건의 오보 내용이 된다. 이에 기자회견에 참석했던 미국인 기자 로버트 콘월이 다음과 같이 존스턴에게 반박했었다.
나는 박헌영이 1월 5일 회견에서 조선인에 의해 조선인을 위해 통치되는 민주주의 조선 이외의 다른 어떠한 것을 원한다고 말하는 것도 듣지 못했다.출처

1946년 5월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조선공산당은 사실상 불법화된다.[22]
조선공산당은 7월 22일 하지에게 장문의 서한을 보내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은 공산당에 대한 가장 악질적인 파괴공작이라고 비판하고, 8개 요구조건을 제시하고, 자위적 수단을 취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김무용,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노선과 국가건설 운동, p151

조선공산당은 정판사 사건의 공판기일을 너무 이르게 잡음으로써 변론 준비 기간을 주지 않으려는 것에 분노하여 7월 '신전술'이라는 방식을 채택해서 강경 노선으로 전환한다. 초창기 미군정에 온건한 노선을 취했던 조선공산당은 정판사 사건을 전후로 '대중적인 투쟁'을 결의하면서 9월 총파업으로 미군정에 맞섰다. 정판사 사건 이전까지만해도 조선공산당은 대중들로부터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일제강점기 항일 독립운동에 있어서 사회주의 계열이 주류였으니까. 하지만, 이 정판사 사건으로 대중들로부터 '공산당'에 대한 이미지가 급격히 매우 나빠지기 시작한다. 경남 하동군의 또 다른 농부는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나는 인민공화국과 공산당이 조선의 재건에 참여할 수 있도록 열심히 일해왔다. 하지만 나는 ‘위조지폐 사건’에 대해 듣고서 충격을 받았다. 당신들은 당신들의 행위에 대해서 할복으로 사죄해야 한다.”

그러나 조선공산당 간부들에 대한 체포령은 대중의 통념과 달리 정판사 사건 때문이 아니다. 박헌영의 경우 적대적 선전활동이 맥아더 포고령 위반이라며 체포령을 내렸다. 그런데 당시 이주하도 비슷한 혐의로 체포되어 6개월 형을 받았다. 이렇게 체포해도 몇 개월 못 가둬두면서 탄압하는 인상을 줘 정치적 부담만 되는 체포령을 내린 것은 현대사의 미스터리 중 하나라고 한다. 대표적으로 서중석의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가 의문을 제기한다.

9월 총파업 도중 노동자에게 발포하자 대구 시민이 분노해서 대구 10.1 사건이 일어난다.

조선공산당은 대중적인 정당이 되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1946년 11월 23일, 남조선신민당, 조선인민당과 3당 합당을 추진했다.

결과적으로 공산당 대회파(=반박헌영파)는 사회노동당을 결성하였고 같은 시기에 공산당 간부파(=박헌영파)는 남로당을 결성하였다.자세한 정보

대회파의 요구는 박헌영 측근 위주로 밀실정치하지 말고 당대회를 열어서 당의 노선을 결정하자는 것이었다. (대회파에 우호적이었던) 고준석에 따르면 대회파는 공산당에서 40% 정도의 지지를 얻었다고 한다.

합당 이후의 조선공산당의 행보는 남조선로동당, 사회노동당 참고.

9. 관련 인물



[1] 합당 반대파[2] 1946년의 공산주의자가 보기에 민주주의는 부르주아민주주의, 인민민주주의, 프롤레타리아민주주의가 있는데 그들 입장에서 자유민주주의가 부르주아민주주의이다.[3] 조선공산당의 기관지였던 해방일보, 발행처였던 조선정판사도 같은 빌딩에 입주해있었다. 이후 이 빌딩은 천주교 서울대교구에서 인수하여 경향신문 본사로 사용했다.[4] 박낙종 중심 조선공산당 일본부의 기관지[5] 일본총국 기관지[6] 만주총국 기관지[7] 이동휘 중심 조선공산당 재건설준비위원회의 기관지[8] 안광천 그룹 기관지[9] 경성트로이카 기관지[10] 경성콤그룹 기관지[11] 1945-1946년 재건 조선공산당 기관지[12] 남조선로동당으로의 합당을 반대하는 세력들이 창당한 당이다.[13] 파벌들 간의 관계는 다음과 같다. 화요파는 이르쿠츠크파와 가까웠다. 서울파는 국내 공산주의 운동을 강조했기에 국외 파벌은 물론이고 국내 파벌들까지도 껄끄럽게 봤다. 북풍파는 조선공산당 창당 전후로 주도권을 놓고 화요파와 다투었다.[14] 조선노동당은 1924년 11월의 공안사건에 연루되어 함부로 나다니기에는 어려운 탓에 그 쪽 인사들은 별로 참석하지 못했다. 조선노동당은 아서원에서의 회동 이후에 조선공산당에 참여한다.[15] 출처:안재성, 잃어버린 한국 현대사[16] 출처: 전명혁이 쓴 한국민족문화대백과[17] 일제 말 공산주의자협의회와는 다른 조직이다.[18] 실제로 김경일 교수가 경성트로이카에 꽃이라는 표현을 쓴다.[19] 혜산사건은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이 아니라 중국공산당이 지도한 사건이다. 나중에 북한 갑산파가 되는 세력과 관계있다고 한다. 일제 경찰은 갑산파보다 이주하 그룹을 훨씬 높게 평가하는 게 흥미로운 부분.[20] 형식상 조선공산당 중앙의 산하이기는 했지만 상당한 자율권을 인정받았다.[21] 다만 북조선분국이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고 처음부터 북조선공산당이었다고 주장한다.[22] 위조화폐 항목에서 알 수 있듯이 위조화폐를 이용해 적국의 경제를 교란시키는 것은 2차대전때 나치독일에 의해서 시행된 작전이며, 미군정이 발행한 통화가 100억 원이라면 천분의 1인 1000만 원은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다. 현대의 통화량과 대비하자면 2022년 한국은행이 발표한 본원통화는 276조원 규모인데 그 천분의 1은 2760억원으로 그 정도 액수의 위폐가 시중에 돌아다닌다면 한국경제는 엉망진창이 된다. 정판사 위조지폐사건이 재판과정에서 부당하게 진행되었다는 것, 미군정이 경제정책에서 실패를 했다는 것과는 별개로 1000만원의 위조지폐발행이 진실이었다면 국가전복수준의 죄가 맞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