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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카르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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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수도 특별 지역
자바섬
면적 660.982km²
인구 11,135,191명(2024.6)[도시권]
인구밀도 16,846명/km²(2024.6)
기후 열대 몬순 기후(Am)
1인당 GDP $21,166 / $67,842(PPP)(2023)
GDP $2,259억(2023, 인도네시아 통계청)
지니 계수 42.3(2024, 인도네시아 통계청)[인도네시아]
HDI 0.836(2023)
종교 이슬람 83.83% 개신교 8.56% 가톨릭 3.89% 불교 3.50% 힌두교 0.18% 유교 0.02%(2022)
시간대 UTC+7
지역번호 21
ISO 3166-2 ID-J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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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 트라이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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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카르타 도심의 야경
파일:인도네시아 국립 박물관1.jpg
인도네시아 국립 박물관

1. 개요2. 어원3. 역사
3.1. 식민지 이전3.2. 동인도 회사의 지배3.3. 프랑스와 영국의 지배3.4. 네덜란드의 지배
3.4.1. 19세기3.4.2. 윤리정책 시대
3.5. 일본의 점령3.6. 독립전쟁3.7. 인도네시아 치하
3.7.1. 법적 지위3.7.2. 수카르노 시대3.7.3. 알리 사디킨 시대3.7.4. 1998년 5월3.7.5. 오늘날
4. 지리
4.1. 기후4.2. 인구
4.2.1. 민족 구성4.2.2. 종교 구성
4.3. 지역
4.3.1. 중앙자카르타 행정시4.3.2. 동자카르타 행정시4.3.3. 서자카르타 행정시4.3.4. 북자카르타 행정시4.3.5. 남자카르타 행정시4.3.6. 스리부 제도 행정군
4.4. 빈민촌4.5. 도시권
5. 경제
5.1. 타 지역과의 비교
6. 언어
6.1. 종족어와 인도네시아어6.2. 브타위어6.3. 구어체 인도네시아어6.4. 자카르타의 영어
7. 교통8. 관광9. 쇼핑몰10. 사건사고11. 수몰 위기12. 매체에서13. 기타14. 둘러보기15.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Jakarta

인도네시아 수도이자 최대도시이다. 애칭은 '커다란 두리안'(The Big Durian)[3]이다. 자바섬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바다와 접한다.

1년 내내 30℃ 정도를 유지하는 전형적인 열대 기후 지역이며 건기와 우기가 뚜렷한 계절풍성(몬순) 기후를 띠고 있다. 물론 건기에도 스콜은 쏟아진다.

2. 어원

자카르타라는 이름은 '이루어진 승리' 정도의 뜻인 자바어산스크리트어 차용어인 '자야카르타(Jayakarta)'에서 유래했다.[4]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이는 '자야(jaya)'와 '카르타(karta)'의 합성이다. 자야(jaya)는 자바어의 산스크리트어 차용어로 '승리'라는 뜻이며, 카르타('karta')는 자바에서 도시 이름으로 접미사처럼 종종 쓰이는 단어로, 자바어로 두 가지 뜻이 있는데 '번영(하는)'이라는 뜻이거나, 산스크리트어로 '하다, 만들다' 동사 kṛ에 행위자형 접미사 -tṛ를 붙여 단수 주격 형태를 만든 것을 차용한 '행위자, 성취자'라는 뜻이다.

'자야카르타'는 네덜란드 점령 이전 반튼 술탄국이 사용한 지명이었다. 네덜란드 식민지 시절엔 '바타비아'(Batavia)라고 칭했는데 게르만 네덜란드인의 선조 중 하나로 고대에 네덜란드의 라인강 삼각주에 거주하던 게르만족의 일파 바타비족(Batavi)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대항해시대 시리즈를 플레이해봤다면 익숙할 것이다. 인도네시아 독립 이후에 다시 '자카르타(Djakarta)'라는 이름으로 돌아왔다가 1970년대 인도네시아어의 표기법이 개정되면서 지금의 철자가 되었다.

3. 역사

3.1. 식민지 이전

자카르타는 원래 16세기 초에는 순다 왕국의 항구로서 '순다클라파(Sunda Kelapa)'로 불렸다. 순다 왕국은 이곳을 비롯한 항구들에서 이루어지는 후추 무역으로 경제적으로 번성했다. '순다클라파'는 오늘날까지도 자카르타 북부 칠리웅강 어귀에 있는 항구 명칭으로 남아 있다.

15~16세기에 신진 이슬람 세력이 발흥해 순다의 영역을 잠식하면서 순다 왕국은 약화되었다. 순다 왕국은 당시 동남아시아 해역에 진출한 신진 유럽 세력 포르투갈에 기대를 걸고 1522년 순다–포르투갈 조약을 맺었다. 이로써 순다가 순다 지역의 후추 무역에 접근할 권한을 포르투갈에 제공하는 대가로, 자바 중북부를 중심으로 하는 이슬람 세력 드막 술탄국에 대항해 포르투갈이 순다에 군사적 지원을 제공한다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 협정으로 약간의 포르투갈 병력이 순다클라파에서 순다의 방어를 도왔지만, 상승세를 탄 드막 술탄국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파타힐라(Fatahillah) 장군이 이끄는 드막 군대는 1527년 순다와 포르투갈 연합군을 물리치고 순다클라파를 점령했고[5], 파타힐라는 승리를 기념해 이곳의 이름을 '자야카르타'로 개칭했다. 이후 드막은 이곳을 포함한 자바 서부 지역에 봉신국으로 반튼 술탄국을 세웠는데, 반튼은 드막이 16세기 중반에 계승 분쟁으로 약화되자 독립하고 군주가 스스로 '술탄'을 칭했다. 자야카르타는 무역 국가 반튼의 무역항으로 남았다.

3.2. 동인도 회사의 지배

16세기 말 네덜란드 세력이 동인도 해역에 당도했다. 1610년 자야카르타를 통치한 반튼 지방관 자야위카르타 공(Pangeran Jayawikarta, 자야카르타 공[Pangeran Jayakarta]으로도 알려져 있음)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자야카르타에 상관을 개설하는 것을 허락했다. 자야위카르타 공은 네덜란드 세력을 위협으로 느끼고 네덜란드인들과 경쟁 관계에 있던 영국 동인도 회사 역시 받아들여 1615년 이들도 자야카르타에 상관을 개설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후 자야위카르타 공과 네덜란드 세력 간 관계가 점차 악화되었다. 마침내 1618년 영국 함대의 지원을 받은 자야카르타 수비군이 네덜란드 상관을 공격했고, 네덜란드 세력은 자야카르타에서 일시 철수했다. 자야위카르타 공은 이때 독자적 판단으로 네덜란드를 물리치기 위해 영국 세력과 동맹을 맺었는데, 반튼 중앙은 이 동맹을 인정하지 않았다.

동인도 회사의 얀 피터르스존 쿤 총독[6]은 1619년 5월 28일 말루쿠 제도의 네덜란드 거점에서 지원군을 이끌고 자야카르타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자야위카르타와 영국 연합 세력이 전투에서 패배했고, 둘 모두가 내쫓긴 가운데 쿤의 군대는 자야카르타를 점령했다. 쿤은 1619년 5월 30일 자야카르타 전체를 파괴했고, 이후 지역을 점거해 자기 방식대로 재건하고 동인도 무역의 핵심 거점으로 삼았다.[7] 1621년 1월 18일 자야카르타는 네덜란드인들에 의해 '바타비아'라고 개칭되었고[8] 자바섬 서부의 주요 식민지 도시 중 하나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바타비아는 인도네시아에서 얻은 향신료를 유럽에 수출하기 적합한 위치에 있었다. 인도네시아 지도를 펼쳐보면 자카르타는 인도양을 통해 유럽을 향한 대서양으로 빠르게 나아가기 좋은 위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바타비아 자체도 농업에 적합한 몬순 기후대에 위치해, 17세기부터 바타비아와 인근 배후지에서 식량 작물과 사탕수수 재배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바타비아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최초로 획득한 동인도 식민지 가운데 하나로, 사실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 전체를 식민지화한 것은 20세기 초이지만 상징적인 의미에서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를 300년(또는 330년, 340년, 350년[9]) 동안 식민 지배했다"고 할 때 이 자카르타 점거 연도를 기준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10] 그러나 초기에는 네덜란드의 바타비아 지배가 그렇게 공고하지는 않았다. 자바 중부와 동부를 석권한 마타람 술탄국은 1628년과 1629년 두 차례 자바 서부로 원정하면서 바타비아를 포위 공격하기도 했다.

바타비아의 원래 주인 반튼 술탄국과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관계는 1619년 바타비아 점령 직후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반튼 중앙은 네덜란드와의 적대 행위를 지방관 자야위카르타 공의 독자적 판단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네덜란드 세력은 반튼 지역의 후추 무역을 독점하려 시도했고, 결국 1630년대 이에 반발한 반튼과의 전쟁이 벌어졌다. 1633년 11월의 전투에서 직전 마타람과의 전쟁으로 약화된 동인도 회사군은 반튼군에 패배했고, 이어 1634년 1월 동인도 회사 함대가 자바 서부 반튼 해역을 봉쇄했지만 반튼 함대는 화공으로 포위를 풀었다. 동인도 회사는 반튼을 당장 굴복시키지 못하고 1639년 평화 조약을 맺어야 했다. 하지만 이 평화 조약은 반튼과의 반목을 완전히 종식시키지 못했고, 1650년대에도 반튼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분쟁이 벌어졌다가 1659년 휴전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17세기 후반, 반튼 술탄국 내부에서 술탄과 왕자 사이에 정치적 반목이 발생했고, 네덜란드 세력은 술탄과 왕자 사이의 내전에 개입해 왕자의 편을 들어 승리했다. 결과적으로 반튼 내정에 동인도 회사의 영향력이 강해졌고, 1687년 이후 반튼 술탄국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사실상 보호국이 되었다. 동인도 회사는 덤으로 자바와 인접한 수마트라 남부 후추 산지 람풍(반튼의 영역)의 후추 무역 관리권까지 획득했다. 이로 인해 17세기 말 바타비아에 인접한 자바 서부, 수마트라 남부의 배후지가 마치 베네치아 공화국 치하의 육지 베네토처럼 정치적, 경제적으로 안정화되었고, 동인도 회사의 세력은 자바에 확실히 뿌리내릴 수 있게 되었다.

1740년, 바타비아에서 네덜란드인들이 주도해 화인 1만 명가량이 학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이는 자바 중부와 동부를 휩쓴 자바 전쟁의 발단이 되었다. 자바 전쟁 과정에서 동인도 회사는 1741년 자바 중부의 핵심 거점 스마랑을 화인 반란군 세력과 연합한 마타람 술탄국 군대에 함락당할 뻔하기도 했다. 만약 그렇다면 자바 중부에서 동인도 회사의 세력은 소멸하고 바타비아를 중심으로 한 자바 서부 세력권 역시 위태로워질 것이었지만, 스마랑 포위전은 가까스로 동인도 회사의 승리로 끝났고, 자바 전쟁은 서부로 확전되지 않았다.

3.3. 프랑스와 영국의 지배

프랑스 혁명과 이어진 나폴레옹 전쟁 과정에서는 바타비아가 프랑스 산하 괴뢰국 또는 프랑스 자체의 통치를 받기도 했고, 자바를 잠시 점령한 영국의 통치를 받기도 했다. 19세기 초 프랑스 산하 홀란트 왕국의 동인도 총독 헤르만 빌럼 단덜스(총독 재임 1808~1811)는 자바에서 다양한 행정적, 경제적 개편을 단행했다.

우선 단덜스는 1808년 11월 바타비아의 옛 주인 반튼 술탄국의 모든 영토를 빼앗아 직할령으로 만듦으로써 자바 서부 전역에 대한 간접 지배를 청산했다. 영토를 빼앗긴 반튼 술탄은 명예직으로만 존재하다 자바를 넘겨받은 영국 세력의 토머스 스탬포드 래플스가 1813년 당시 술탄에게 술탄위 포기를 종용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또 단덜스는 재임기에 바타비아의 행정 중심지를 북쪽에 위치한 구시가지(오늘날의 코타 투아 지역)에서 보다 남쪽에 위치한 벨테브레던(Weltevreden, 오늘날의 감비르[Gambir] 지역)으로 옮겼다. 이때부터 오늘날 자카르타 중부 지역의 개발이 조금씩 시작되었다.

3.4. 네덜란드의 지배

3.4.1. 19세기

1816년 영국이 다시 네덜란드로 동인도를 반환한 후 바타비아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수도로 기능했으며, 네덜란드가 디파나가라 전쟁을 거쳐 자바를 완전히 식민지화함에 따라 바타비아는 자바 중부의 스마랑, 자바 동부의 수라바야와 함께 자바 서부를 대표하는 네덜란드 세력의 주요 항구로 번성했다. 1818년, 새로운 행정 중심지에 '왕의 광장(Koningsplein)'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광장이 설치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 인도네시아 독립 후의 '독립 광장(Medan Merdeka)'이 되었다. 1835년과 1870년 두 차례에 걸쳐 도시에서 전염병이 크게 돌았고, 그때마다 주민들이 전염병의 전파 지역이었던 북부 항구에서 멀어져 남쪽으로 이주하면서 바타비아는 남쪽으로 계속 확장되었다.

바타비아는 동인도 전체의 중심지로서 행정·물류·통신·보건·교육·주거 시설·문화 시설 등 각종 분야의 근대적 인프라 도입에 있어서는 대체로 동인도의 모든 도시 가운데 최우선[11] 순위에 놓였다. 1856년 바타비아와 인근 도시 바위텐조르흐(오늘날의 보고르)를 잇는 동인도 최초의 전신선이 개통했으며, 1859년에는 바타비아와 싱가포르를 잇는 동인도 최초의 국제 전신선도 개통되었다. 1861년에는 바타비아 최초의 가스 공장이 문을 열었고, 1862년부터 이에 기반해 바타비아의 거리에 가스등이 켜지기 시작했다. 1873년 바타비아와 바위텐조르흐(보고르)가 철도로 연결되었고, 1877년에는 북부에 새로운 근대적 항만 탄중프리옥 항구가 개항했다. 인도네시아 대학교의 전신으로 꼽히는 자바 의학교는 1849년 처음 바타비아에 설립될 때는 토착민 의료 보조원을 양성하는 2년제 학교였지만, 1875년 교육 과정이 7년으로 늘어나고 정식으로 의사 자격을 수여하게 되었다. 이곳은 19세기 당시 동인도에서 토착민이 정식으로 근대적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유일한 교육 기관이기도 했다. 1899년, 바타비아에는 방콕 다음 동남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노면전차가 개통되었다. 이는 서울서울 전차보다도 한 달가량 이른 것이었다.

3.4.2. 윤리정책 시대

윤리정책 시대(1901~1942), 식민 당국은 토착민에 대해 보다 포용적인 자세를 취해 많은 토착민이 근대적 교육과 노동 시장 참여 기회를 얻었고, 네덜란드어를 배우고 도시 문화와 근대적 인프라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동시에 자바 해안 도시로의 유럽계 이민도 장려되었고, 바타비아의 유럽계 인구도 계속해서 증가했다. 20세기 초부터 동인도 지방 자치가 발전함에 따라, 바타비아는 동인도 최초로 시의회(1903년 창설)와 시장(1916년부터)이 있는 도시가 되었다. 1926년, 동인도 정부가 새로 서부자바주를 설치하면서 바타비아가 서부자바 산하에 편입되었다.

윤리정책 시대 바타비아는 근대적 항만과 도로를 갖추었고, 우편, 전신, 전화, 철도, 신문, 병원 등 다양한 근대적 생활 요소도 갖추어졌으며 유럽식 식당과 카페가 성업하는 도시였다. 1920년대 무렵 식민 치하에서 자바의 철도 인프라는 거의 완성 단계에 접어들어 요금을 낼 돈만 있다면 자바 어디로든 철도로 이동할 수 있었고, 이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특히 20세기에 새로 도시 문화 향유자로 편입된 토착민 도시민들도) 철도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1907년, 정식으로 토착민 대상의 네덜란드어 초등학교(HIS, Hollandsch-Inlandsche School)가 개설되었고[12], 이에 따라 네덜란드어 중등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토착민의 수도 점차 늘어났다. 토착민 의사를 양성했던 19세기의 자바 의학교는 1927년 의학대학(Geneeskundige Hogeschool)으로서 본토 네덜란드와 동일 학제를 사용하는 의대로 정식 개편되었으며, 이에 더해 1924년 법률대학(Rechts Hogeschool)도 새로 개설되었다. 1925년, 콜사인 'BRX'를 사용하는 라디오 방송국이 동인도 최초로 바타비아에 개설되었으며, 뒤이어 동인도 각지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도시민의 대다수를 이룬 토착민들의 생활 여건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이들 가운데 대부분은 도시 하층민에 속했고, 가난했으므로 아무리 근대적 시설이 확충되더라도 이들에게는 그림의 떡인 경우가 많았다. 계속해서 바타비아와 인근 지역으로 인구가 밀집되면서 열악했던 토착민 주거 지역을 중심으로 콜레라, 이질, 말라리아[13] 등 질병이 일상적으로 퍼졌는데, 특히 1913년에는 바타비아를 포함한 자바 전역에 대규모로 전염병이 창궐했다. 설상가상으로 1918~1919년 동인도 전역에서 스페인 독감이 창궐해 동인도에서 최소 150만, 최대 440만 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벌어졌다.[14] 식민 정부의 후원으로 열대의학 연구는 상당한 결실을 빚었지만, 동인도에서 가장 발달한 도시인 바타비아에서조차 근대적 의료 시설이 확충되는 속도가 인구 증가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의료 지식의 부족으로 각기병 등 오늘날 거의 찾아보기 힘든 병들도 쉽게 발생했다. 크리스티안 에이크만은 동인도에서 수행한 각기병 연구로 노벨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한편으로 근대적 의료 지식과 시설에 접근하기 어려운 중류, 하류 계급의 토착민들은 병에 걸리면 자바 전통 의학에 의존하거나 각종 민간 요법으로 어떻게든 버텨내는 경우가 많았다.

바타비아는 19세기에 수라바야에 이어 인구 규모로는 동인도에서 두 번째인 도시였지만, 20세기 초 본격적으로 근대 대도시로 발전함에 따라 인구가 빠르게 증가하면서 수라바야를 인구로도 앞질렀다. 1930년대 50만 명 이상이 거주하게 된 바타비아는 어엿한 근대 대도시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폭증하는 인구를 수용할 주택의 공급은 턱없이 부족해 각종 신도시 개발 계획이 논의되었다.

바타비아에서 최초의 현대적인 계획 주거 지구로 설계된 곳은 오늘날까지 전통 부촌으로 유명한 멘텡(Menteng) 지역이다. 오늘날 독립 광장 바로 아래에 위치한 이곳은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주로 농경지였으며, 토착민 농민들이 주로 거주했고 이때 바타비아의 시가지는 대부분 이보다 북쪽에 있었다. 이곳은 네덜란드 건축가 피터르 모연(Pieter Moojen)에 의해 1910년대부터 계획되어 1930년대까지 개발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식민지 시대 말 멘텡에는 주로 유럽인과 화인, 극소수의 토착민으로 구성된 부유층 및 상위 중산층이 거주하는 고급 주택가가 형성되었다.

오늘날 멘텡 지역은 자카르타 중부(중앙자카르타 행정시)에 속하지만, 결과적으로 멘텡 개발은 자카르타 남부로의 시가지 확장에 중요한 기점이 되었다. 이 외에도 윤리정책 시대부터 바타비아 각지에 신도시가 계획되었지만 실현된 것은 많지 않다. 오늘날의 크바요란바루(Kebayoran Baru) 지역이 바로 식민지 시대 말기에 계획된 남자카르타의 대표적인 신도시였다. 네덜란드가 독립전쟁기에 귀환한 와중인 1948년 7월부터 이곳의 신도시 개발 계획이 수립되었고, 1949년 3월 토착민 도시 계획가 모 수실로(Moh. Soesilo)가 신도시 마스터플랜을 수립했다. 이렇게 시작된 크바요란바루 신도시 개발은 인도네시아가 이어받아 1955년에 완료했다.

바타비아는 동인도의 정치 중심지로서 다양한 정치 집단이 활동하는 곳이기도 했다. 특히 1928년 10월 바타비아에서 열린 청년 대회에서는 토착민 민족주의자들이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요구하며 메라 푸티를 내걸고 위대한 인도네시아를 부르며, 네덜란드 식민주의자들이 지은 이름 '바타비아'를 거부하고 이 도시를 옛 이름 '자야카르타'를 되살려 '자카르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활동은 즉각적으로 식민 정부의 탄압을 받았다.

3.5. 일본의 점령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후 일본은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를 점령하고 1942년에 이 도시의 이름을 인도네시아 민족주의자들이 염원하던 대로 '자카르타'로 바꾸었다.

일본군이 자카르타를 점령한 것은 1942년 3월 8일이었다. 일본군은 한동안 군정으로 도시를 다스리다가, 1942년 8월 8일 자카르타를 특별시(特別市)로 승격시켰다. 자카르타에 처음으로 행정적으로 특별 지위가 부여된 것이었다. 또한 자카르타 특별시의 행정은 토착민 달란 압둘라(Dahlan Abdullah)가 17일 동안 시장 대행으로 담당하다 8월 25일 첫 특별시장으로 일본인 쓰카모토 사카에가 임명되었다. 달란 압둘라는 오늘날 상징적인 의미에서 '최초의 토착민 자카르타 시장(지사)'으로 기억되고 있다.

3.6. 독립전쟁

1945년 8월 17일에 인도네시아 독립이 선언되면서 자카르타가 인도네시아의 수도로 선포되었다. 독립 전 자카르타 시장은 일본인 하세가와 시게오였는데, 하세가와는 독립 선포 후 1945년 9월 7일까지 일단 엉거주춤하게 자카르타를 통치했지만 토착민 관리들이 그에게 접근해 자카르타 시장직을 토착민 부시장 수위료(Suwiryo)에게 넘길 것을 권했다. 하세가와는 이를 거부했지만 그 뒤로 출근하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수위료가 시장직을 대행했다. 이어 9월 23일 자카르타 시 정부는 수위료를 정식으로 새로운 자카르타 시장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돌아온 네덜란드군이 자카르타를 1946년 1월 재점령했고, 독립파 인도네시아 공화국은 독립전쟁기 동안 욕야카르타를 임시 수도로 사용했으며[15] 도시는 한동안 네덜란드군이 실효 지배했다. 도시의 실질 행정을 담당한 네덜란드령 동인도 민정부(NICA, Nederlandsch-Indische Civiele Administratie)는 자카르타를 다시 '바타비아'로 칭했다. 네덜란드 점령 이후에도 시장 수위료는 쫓겨나지 않고 도시 행정을 한동안 계속 담당했다. 대신 네덜란드 민정부는 비공식 네덜란드인 시장 아르히발트 보하르트(Archibald Bogaardt)를 두고 유럽인 관련 사안을 맡기는 데 만족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국민당 소속 공화파인 수위료와의 동거가 불편했던 네덜란드 민정부는 1947년 7월 20일 네덜란드 1차 공세가 시작되기 직전 전격 수위료 시장을 체포했다.

전쟁의 진행에 따라 1차 공세를 통해 서부자바 지역을 점령한 네덜란드는 서부자바 지역에 네덜란드의 괴뢰국 '파순단 자치국'을 세웠는데, 바타비아가 향후 동인도 연방[16]의 수도가 될 것인데도 파순단에 포함되어야 하는지를 놓고 법적인 문제가 제기되었다. 따라서 1948년 법령으로 '바타비아 연방 지구'가 창설되어 바타비아는 폭넓은 자치권을 얻었고, 바타비아 시장과 별개로 바타비아 연방 지구 지사가 1948년 11월 2일 새로이 임명되었다.

수위료 이후 바타비아 정부는 네덜란드인 시장들이 2년가량 관리했다. 그러나 독립전쟁 후기에 네덜란드는 동인도에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독립군을 진압하는 한편으로 민간에는 유화 정책을 펼쳐 많은 지역의 주지사, 시장 등에 토착민을 임명했다. 네덜란드가 임명한 마지막 시장 사스트로물료노 및 연방 지구 지사 힐만 자야디닝랏 역시 토착민 정치인이었다.

3.7. 인도네시아 치하

1949년 12월 27일 전쟁이 끝난 직후 인도네시아 합중공화국 정부가 자카르타에 성립해 자카르타가 인도네시아의 실효 지배하에 놓였다. 이때 식민 지배가 끝남을 상징하듯 1949년 12월 28일 17시 55분, 동인도 총독 관저가 '독립궁(Istana Merdeka)'으로 개칭되어 인도네시아 대통령궁이 되었다. 1950년에는 주변 지역을 포함하도록 시 경계가 대폭 확장되었다.

3.7.1. 법적 지위

인도네시아 합중공화국은 엄연히 네덜란드와의 합의를 통해 성립된 정치체였으므로 독립전쟁기 네덜란드 괴뢰국들은 해체되지 않고 그대로 연방 구성체가 되었는데, 이에 따라 파순단 자치국은 연방 구성국 중 하나가 되었고, 바타비아 연방 지구는 '자카르타 연방 지구'로 개칭되어 파순단에서 자치를 누리는 연방 수도가 되었다. 그러나 연방제는 빠르게 붕괴하기 시작했고, 1950년 3월 11일 결국 파순단 자치국이 인도네시아 공화국으로 흡수 소멸해 서부자바주가 됨에 따라, 유지할 이유가 없어진 자카르타 연방 지구도 함께 해체되고 자카르타는 인도네시아 공화국 서부자바주 산하의 시로 돌아갔다.

그러나 자카르타의 인구가 빠르게 증가하고 국가 수도로서의 특별한 기능이 요청됨에 따라, 1959년 자카르타는 서부자바주에서 분리되어 주와 동격인 1급 행정 구역으로 승격되었다. 나아가 1960년부터 자카르타의 행정 책임자를 가리키는 명칭도 기존처럼 주 산하 2급 행정 구역의 장을 뜻하는 '시장(wali kota)'이 아니라 주지사와 동격인 '지사(gubernur)'가 되었다. 1961년, 자카르타는 법적으로 오늘날과 같은 '수도 특별 지역(Daerah Chusus Ibukota)'의 지위를 얻었다. 이후 인도네시아어 맞춤법 개정에 따라 가운데 단어 'Chusus'의 표기가 'Khusus'로 변경되었다. 이 지위는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다. 특히 1974년, 지방정부에 관한 법률 5호에서 자카르타 수도 특별 지역은 인도네시아의 수도이자 26개 1급 행정 구역 중 하나로 명시되었다.

3.7.2. 수카르노 시대

독립 이후 자카르타는 수카르노가 이끄는 새로운 국가의 수도로서 수카르노가 품은 정치적 비전의 실험장이 되었다. 본래 건축가로서 건축이 지닌 힘에 매료되었던 수카르노는 당당한 기념비적 건축물들을 자카르타에 지어 국가의 위신을 드높이고자 했다. 과거에 '왕의 광장'이었던 독립 광장 한가운데에는 거대한 기념탑 모나스(Monumen Nasional)가 세워졌고, 호텔 인도네시아, 사리나 쇼핑 센터, 신흥국 회의 빌딩(Gedung CONEFO), 이스티클랄 모스크(Masjid Istiqlal) 등 오늘날 자카르타의 모더니즘 건축 랜드마크 중 일부가 이때 만들어졌다.

수카르노 시대에는 증가하는 인구에 대응하기 위해 다양한 자카르타의 신도시가 개발되었다. 앞서 서술된 남자카르타의 크바요란바루 외에도 프좀퐁안(Pejompongan, 중앙자카르타), 트븟(Tebet, 남자카르타), 풀로마스(Pulo Mas, 동자카르타), 츰파카푸티(Cempaka Putih, 중앙자카르타) 등이 수카르노 시대에 중산층 거주 지역으로 개발된 신도시였다. 이 과정에서 자카르타의 신개발 지역을 가로지르는 수디르만 대로(Jalan Jenderal Sudirman)와 탐린 대로(Jalan M.H. Thamrin)가 개통되었으며, 특히 수디르만 대로는 크바요란바루 신도시와 중앙자카르타를 연결했다. 과거 식민지 시대의 중심지는 보존되었지만, 도시 개발은 남부를 포함해 보다 다중심화되어 갔다.

3.7.3. 알리 사디킨 시대

20세기 후반 자카르타의 역사에서 수카르노 다음으로 자주 언급되는 인물은 단연 1966년부터 1977년까지 자카르타 지사를 역임한 알리 사디킨(Ali Sadikin, 애칭 '방 알리[Bang Ali]')이라고 할 수 있다. 수하르토 시대 초입에 자카르타 지사를 맡은 그는 자카르타가 진정한 다기능적 대도시가 될 수 있도록 다양한 인프라 개발, 도시 환경 개선 프로젝트에 박차를 가했다.

그의 정책 가운데 일부는 논란이 되었지만, 좋든 싫든 그의 자취는 오늘날까지 자카르타에 짙게 남아 있다. 그를 좋아하는 사람도, 싫어하는 사람도 많았는데 사회 개혁을 원하는 청년층에게는 지지받는 편이었다. 1977~1978년, 자카르타, 반둥, 욕야카르타에서 벌어진 대규모 반수하르토 학생 시위 국면에서 자카르타의 운동권 대학생들이 알리 사디킨을 수하르토를 대체하는 대통령으로 지지하기도 했다.

알리 사디킨은 많은 도로와 교량을 건설해 자카르타의 교통 인프라를 개선하고, 병원과 학교를 지었으며, 문화와 예술을 장려했는데 특히 오늘날까지도 영향력 있는 문화 예술 센터인 '타만 이스마일 마르주키(Taman Ismail Marzuki)'가 그의 손으로 지어졌다. 또 안촐 드림랜드, 라구난 동물원 등 대형 위락시설을 짓고 도시 곳곳에 공원을 만들기도 했다. 식민지 시대 번화했지만 당시 쇠락하던 옛 화인 상업 지구 스넨(Senen)을 재개발하는 프로젝트도 진행되었다.

지사는 신도시 개발을 계속해 기존의 남북 축에 더해 동서 축으로도 개발을 확대해 나갔으며, 서민 주택 개량 사업도 벌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개발 사업 과정에서 사업 부지에 살던 빈민촌 거주자들이 집을 잃고 내쫓기는 일도 가끔 벌어졌다. 지사는 인구 증가 속도를 늦추기 위해 출산을 억제하는 가족 계획을 시행하기도 했다. 그는 도시 환경을 개선한다는 명목으로 베착(becak, 자전거 인력거)과 불법 노점상을 없애려고 시도했고, 나아가 인구 폭증을 막기 위해 자카르타로의 신규 전입을 막으려고까지 시도했지만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자카르타의 베착 금지령이 실효를 본 것은 훨씬 나중인 수랴디 수디르자 지사(재임 1992~1997) 시대로 평가된다. 그러나 최근에는 오히려 아니스 바스웨단 지사(재임 2017~2022)가 베착을 부활시키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알리 사디킨의 여러 대규모 프로젝트에는 막대한 예산이 필요했다. 이를 충당할 세수 확대를 위해 그는 악명 높은 여러 정책을 펼치기도 했는데, 야간 유흥시설을 개발하고, 도박을 합법화한 것 등이었다. 무엇보다도 논란이 된 일은 그가 북자카르타의 크라맛자야(Kramat Jaya) 지역에서 사실상의 공창제를 실시해, 기존에 다양한 인근 지역에 퍼져 있던 성매매 여성들을 한곳으로 모아 1972년 성매매 집결지 '크라맛퉁각(Kramat Tunggak)'을 설치한 것이었다. 크라맛퉁각 집결지는 점점 커져 1990년대의 최대 번성기에 12헥타르에 달하는 지역에서 2천 명의 성매매 여성들이 일하는 곳이 되어 동남아시아 최대 규모라고까지 일컬어졌다. 1999년 지사 수티요소의 정책으로 결국 폐쇄될 무렵, 크라맛퉁각에서는 277개의 성매매 업소에서 258명의 포주와 1615명의 성매매 여성들이 일하고 있었다고 한다.[17]

알리 사디킨 지사의 행보 가운데는 당시 기준으로 상당히 사회적으로 진보적인 것도 있었다. 그는 인도네시아 문화에서 전통적인 여장남자 또는 제3의 성으로 취급되는 '와리아(waria)'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단체를 설립했고, 나아가 1975년 그는 인도네시아에서 최초로 법적 성별 정정을 인정받은 트랜스여성 비비안 루비안티(Vivian Rubianti)의 결혼식에 직접 참석하기까지 했다.

3.7.4. 1998년 5월

1997년 시작된 아시아 금융 위기로 인해 인도네시아에 초유의 경제난이 닥쳤고 각지에서 도저히 억누를 수 없는 규모로 동시다발적 민생 안정, 반독재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터져나왔다. 1998년 5월 12일, 자카르타에 위치한 트리삭티 대학교에서 인도네시아군이 학생 시위대에 발포해 학생 4명이 사망하고 15명이 부상당하는 비극이 벌어졌다. 사람들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자카르타는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결국 일련의 사건 끝에 1998년 5월 21일 수하르토 대통령이 사임함으로써 그의 오랜 독재는 막을 내렸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무고한 화인들이 약탈, 강간, 살해를 당하기도 했다.

3.7.5. 오늘날

자카르타는 민주화 이후에도 인도네시아의 정치, 경제, 문화 중심지라는 위상을 유지해 왔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자카르타의 대중 교통 수단은 광역 전철과 버스 정도뿐이었다. 1997년부터 2007년까지 재임한 수티요소(Sutiyoso) 지사는 2001년 자카르타의 대중 교통을 개선하기 위해 지하철, 모노레일, BRT, 수상 운송이라는 네 가지 대안을 제시했다. 이 가운데 특히 지하철과 BRT가 주요 검토 대상이 되었고, 수티요소 지사 재임기에 외자 도입 필요성이 없고 요구 기술 수준이 낮은 BRT 프로젝트가 우선 추진되어 2004년 트랜스 자카르타가 개통했다. 자카르타에 지하철경전철이 개통된 것은 나중인 2019년의 일이다.

2007년, 지방 자치 확대에 따라 최초로 5년 임기의 자카르타 지사를 직접 보통 선거로 선출하는 선거가 실시되어 첫 민선 지사로 민주당의 파우지 보워(Fauzi Bowo)가 당선되었다.

2012년, 두 번째 민선 지사로 투쟁민주당조코 위도도가 당선되었다. 그는 이후 2014년 대선에 출마해 인도네시아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그의 러닝메이트 부지사 바수키 차하야 푸르나마(애칭 아혹[Ahok], 위대한 인도네시아 운동당)가 2014년 11월 지사직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아혹이 신성모독법으로 재판을 받고 형을 선고받아 2017년 5월 9일 지사직을 잃었고, 2017년 10월까지 아혹의 남은 임기는 아혹의 부지사였던 자롯 사이풀 히다얏(Djarot Saiful Hidayat, 투쟁민주당)이 다시 지사가 되어 채웠다.

2017년, 지사 선거에서 무소속 아니스 바스웨단이 당선되었다. 2022년 아니스의 임기가 끝난 뒤, 개정된 선거법에 따라 2024년 전국 동시 지방선거를 치르기 위해 2024년까지 지사 선거가 연기되었고, 그동안 헤루 부디 하르토노(Heru Budi Hartono)가 지사 대행을 맡고 있다.

4. 지리

4.1. 기후

열대 기후적도 근처에 위치하여 1년 내내 낮 기온 29-33도, 밤 기온 25도 정도의 일정한 온도와 12시간(±30분) 정도의 일일 일조시간을 유지한다.

열대 기후 하위의 세부 분류에서는 보통 열대 몬순 기후로 분류된다. 자카르타의 최소 우월인 8월 강수량은 평균 45~54mm 수준이고 연 평균 강수량은 1,800mm 전후 수준이며, 전통적인 쾨펜의 기후 구분에 따른 열대 몬순 기후의 조건인 최소 우월 강수량이 60mm 미만이고 (100 - 0.04×[연 평균 강수량])mm 이상임을 만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8월 강수량이 기후 변화 등으로 60mm를 넘어갈 수도 있는데, 이러면 열대 우림 기후로 바뀔 것이다.

건기와 우기가 뚜렷하기는 하지만 건기와 우기를 막론하고 습도가 높다. 우기의 습도는 매우 높아 80-85% 수준이고 비가 잘 오지 않는 6-10월의 건기 습도도 75-80%에 달한다[18]. 그러나 똑같이 습도 높은 오키나와, 대만, 홍콩, 베트남 등 타 지역들에서 올 경우 그렇게 습하게는 느껴지지 않는다.

고온다습한 지역이기는 하지만 방콕, 쿠알라룸푸르, 호찌민시, 싱가포르, 다윈, 케언즈 등 인접국 대도시보다 연중 평균 기온은 근소하게 낮은 편이고 인도차이나 내륙 지역이나 북인도 내륙 지역처럼 특정 계절에 낮 기온 40-45도의 극심한 고온을 보이지도 않는다[19].

기록 역사 상 최고 기온도 38-39도 정도[20]서울[21]보다도 낮다.

단 더위를 피할 만한 기반 시설이 부족한 편이다 보니 연중 내내 이어지는 더위로 인해 열사병이나 열경련 환자는 꾸준히 발생하고 있다. 자카르타는 아직 에어컨 없는 차량이나 전동차도 많다.

크게 건기와 우기가 있는데, 우기의 한복판에 해당하는 11월~2월 자카르타에는 매일같이 폭우가 내리며, 북부 자카르타는 거의 매년 홍수에 시달린다. 원래 대략 4년 주기로 침수됐는데 이상기후의 영향인지 최근 2, 3년은 연속으로 침수되고 있다. 아침에 맑다가도 오후 중엔 어김없이 비가 오니 우비나 우산을 들고 다니는 것이 좋다.[22]

4.2. 인구

네덜란드령 동인도 시대 바타비아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19세기 내내 그리고 20세기 초까지 수라바야보다 인구가 적은 제2도시였다.

1900년 인구는 11만 6천 명으로 바타비아는 같은 동남아시아에서도 당시 이미 60만에 달하는 인구를 자랑했던 방콕이나 22만 인구로 인구가 아주 많지는 않아도[23] 비교적 잘 개발된 싱가포르 등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으로 규모가 작은 도시였다.

그러나 20세기 전반 식민 치하에서 도시 개발과 이민 장려 정책이 펼쳐지면서 바타비아의 인구는 빠르게 증가했다. 1930년 바타비아의 인구는 53만 3천 명을 기록해 30년 만에 5배 가까이로 폭증했고, 수라바야를 앞질러 싱가포르[24]와 비슷해졌다. 식민지 시대 수라바야나 반둥 등 다른 도시들보다 더욱 개발이 집중된 바타비아는 이 무렵 근대 대도시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인도네시아 독립 전후에는 인구가 80만에서 100만을 오가는 정도였지만 1950년대 초부터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했다. 1950년대 전반 인구가 이미 100~200만에 달해 자카르타는 동남아시아에서 방콕, 마닐라, 양곤, 사이공과 함께 인구로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도시였다. 그러나 오늘날에 비하면 인구가 크게 적었다.

인도네시아 독립 이후로도 자카르타는 개발의 중심이 되어 이촌향도 현상으로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자카르타의 인구는 1961년 291만, 1971년 458만, 1980년 650만 명을 거쳐 1990년대 중반에 900만을 넘어섰다. 2011년 기준 마침내 천만을 넘겨 10,187,595명에 이르렀지만 인구 증가세는 출산율이 줄어서 1990년대부터 꺾였다.

2024년 6월 기준 인구 추정치는 약 1114만 명이다. 도심이 조금 과포화됐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꽤 인구가 많다.

면적은 661km2로, 서울보다 조금 더 큰 도시에 조금 더 많은 인구가 거주한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 위에 언급한 것처럼 포화되었다는 느낌을 자주 받는다. 서울 수도권도 2000만명의 인구가 좁은 땅에 낑겨 살아 포화된 느낌이 크지만 자카르타 수도권은 더하다.

2018년 10월 9일 블룸버그 통신은 자카르타가 2030년에 도쿄를 제치고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가 될 거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4.2.1. 민족 구성

인도네시아 전국에서 이주민이 몰리는 곳이므로 인구 구성도 매우 다양하다. 자바인 36%, 브타위인 28%, 순다인 15%, 화교(중국계) 7%, 바탁인 3%, 미낭카바우인 3%, 말레이인 1%, 기타 7%가 섞여 산다.
민족명 비율 인구(2010년 기준)
자바인 36.17% 3,453,453
브타위인 28.29% 2,700,722
순다인 14.61% 1,395,025
중국계 인도네시아인 6.62% 632,372
바탁인 3.42% 326,645
미낭카바우인 2.85% 272,018
말레이인 0.97% 92,088
기타 7.07% 675,218

4.2.2. 종교 구성

종교명 비율(2020년 기준) 인구(2020년 기준 만 단위)
이슬람 83.68% 928만 명
개신교 8.60% 95만 명
가톨릭 3.93% 43만 명
불교 3.59% 39만 명
힌두교 0.16% 1.7만 명
유교 0.03% 0.3만 명
100% 1110만 명

4.3. 지역

자카르타 특별 지역은 5개 행정시(kota administrasi), 1개 행정군(kabupaten administrasi)으로 구성되어 총 6개의 2급 행정 구역으로 나뉜다.

'행정시'와 '행정군'은 인도네시아에서 오직 자카르타에만 있는 행정 단위로, 거대한 인구를 보유한 자카르타를 분리해 관할하기 위해 설치된 것이다.

각각의 행정시에는 시장(wali kota)이, 행정군에는 군수(bupati)가 있으며, 자카르타 전체를 관리하는 행정 책임자는 시장이 아니라 지사(gubernur)다. 2급 행정 구역들은 총 44개에 달하는 3급 행정 구역 면(kecamatan)으로 분할된다.

서울특별시하고 비교하자면 행정시들은 서북권, 도심권, 동북권, 강남 핵심지 등 구보다 크고 어느 정도 특색이 있는 시내 권역에 해당하고, 1~3개 면이 구 하나에 대응하는 규모라고 볼 수 있다. 면 가운데 큰 것은 인구가 60만을 넘는 것도 있지만, 작은 면은 10만에 미달하기도 한다.

다음은 각 2급 행정 구역의 목록과 간략한 특징이다.

4.3.1. 중앙자카르타 행정시

파일:2000px-Jakarta_Panorama.jpg
이스티클랄 성원에서 보이는 자카르타 중심부 전경.
중앙 우측의 기념탑이 모나스다.


자카르타 시청(자카르타 전체의 시청), 인도네시아 대통령궁, 인도네시아 국회의사당, 인도네시아 대법원이 있는 인도네시아의 행정·정치·사법 중심지이다. 남자카르타와 더불어 자카르타에서 가장 잘 개발된 지역이며, 각종 박물관과 모나스(모나스 타워), 이스티클랄 성원, 자카르타 대성당 등 대규모의 기념비적 건축물들도 있다. 주요 업무 지구 일부도 중앙자카르타에 있다. 자카르타에서 가장 큰 공원 중 하나인 모나스 공원(모나스와 독립 광장을 포함)을 비롯해, 멘텡 공원(Taman Menteng), 수로파티 공원(Taman Suropati), 들소 광장 공원(Taman Lapangan Banteng) 등 여러 유명 공원들도 위치해 있다. 멘텡 지역은 자카르타에서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전통의 부촌이다. 글로라(Gelora) 지역에는 유명한 글로라 붕 카르노[25] 스포츠 복합시설이 있다. 행정시 중에서는 인구가 가장 적어 2020년 기준 간신히 100만을 넘기는 수준이다.

자카르타의 행정시마다 따로 GRDP를 계산할 경우 자카르타에서 중앙자카르타가 가장 규모가 크며(명목 $509억, 2021), 1인당으로는 명목 $47,735(PPP $141,293, 2021)에 달한다. 그러나 자카르타 내부 지역들의 경제 구조와 생활권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중앙자카르타가 실거주 인구가 적고 통근 목적지가 되는 경우가 많음을 감안하면, 이 수치에는 실제 생활 수준을 반영하지 않는 착시 효과가 어느 정도 있다.

4.3.2. 동자카르타 행정시

파일:Diatas_Fly_Over_Kampung_Melayu_-_panoramio.jpg
동자카르타의 캄풍믈라유(Kampung Melayu) 지역

원래는 습지대, 요컨대 이 많아 인간이 활동하기 힘든 곳이었다. 네덜란드령 동인도 시절에는 설탕 공장이 밀집해 있던 산업 지역이었으며, 오늘날에도 대형 공단이 있는 공업·주거 지역으로 남아 있다. 2020년 기준 인구가 3,037,139명으로 자카르타의 2급 행정 구역 중 가장 많고, 총면적도 자카르타의 행정시 중 가장 크다. 자카르타의 주요 시외버스 터미널인 캄풍 람부탄 버스 터미널이 있다. 자카르타의 유명한 교정 시설인 치피낭 교도소(LP Cipinang)도 있다. 문화 시설이나 쇼핑몰은 적은 편이라 관광 목적으로 자카르타를 방문한다면 그다지 갈 일이 없지만, 타만 미니가 동자카르타에 있기는 하다.

현지인 학생 기준 자카르타(그리고 아마도 인도네시아) 최고의 명문 고등학교 MH 탐린 공립 영재고등학교(SMANU MH Thamrin)가 동자카르타에 있다.

4.3.3. 서자카르타 행정시

파일:Kali_Besar.jpg
서자카르타 구시가지 인근의 브사르천(Kali Besar)

역사적인 유적이 많은 곳으로 자카르타 구시가지의 일부가 있어 다양한 식민지 시대의 오래된 건물을 볼 수 있고, 자카르타 차이나타운도 위치해 있다. 오늘날에도 화교나 화교 후손이 꽤 많이 사는 지역이기도 하다. 자카르타 역사박물관, 와양 박물관, 인도네시아 은행 박물관 등 많은 박물관이 구시가지에 있고, 자카르타의 대표적인 광장 중 하나로 꼽히는 파타힐라 광장이 구시가지 안에 있다. 경제적으로는 소규모 공장들이 밀집해 있는 곳이다. 역동적인 인도네시아 현대 미술을 접할 수 있는 누산타라 현대미술관(MACAN)도 서자카르타에 위치한다.

4.3.4. 북자카르타 행정시

파일:Marina_Ancol_Jakarta_-_panoramio.jpg
북자카르타 해안 지역의 마리나 안촐

자카르타의 바다에 접하는 면들을 모두 포괄하는 행정시로, 소재한 탄중프리옥 항구는 자카르타 해상 물류의 중심이다. 자카르타 구시가지의 일부를 포함하며, 다종다양한 공장들도 산재해 있다. 그러나 거주 환경은 전반적으로 열악하며, 계절성 침수의 위험이 크고 수몰되고 있는 해안 근처의 북자카르타는 주거 지역으로 신규 개발하기에도 별로 적절하지 않다. 자카르타에서 가장 슬럼이 많은 지역으로, 인도네시아 정부 통계에 따르면 2010년대 말 기준 자카르타 슬럼의 39%가 북자카르타에 위치한다.[26] 인간개발지수가 자바 본토의 행정시 가운데 자카르타에서 가장 낮은(2023년 0.819) 곳이다. 예외적으로, 북자카르타 해안 지역에 위치한 판타이인다카푹(Pantai Indah Kapuk) 지역은 바다 전망이 훌륭한 고급 주거 지역으로 꼽힌다. 북자카르타에서 비교적 주거 환경이 좋은 계획 지구 클라파가딩(Kelapa Gading)에는 자카르타의 한인들이 모여 사는 소규모 한인 타운이 있다.
관광지로는 구시가지 외에도 해변 안촐(Ancol) 지역이 유명하다. 안촐 지역의 '안촐 드림랜드'(Ancol Dreamland, Taman Impian Jaya Ancol)는 테마파크, 아쿠아리움, 해변 휴양지, 동물원, 호텔, 골프장 등을 포함하는 552헥타르에 달하는 동남아시아 최대 규모의 관광 단지다.
남자카르타, 동자카르타, 서자카르타, 중앙자카르타 지역에는 괜찮은 중학교, 고등학교, 국제학교 등이 대체로 고루 분포하는 것과 달리, 북자카르타 지역만은 (자카르타 기준으로) 학군이 좋은 지역이 상기한 클라파가딩 등 일부 지역으로 한정되어 있다. 클라파가딩에는 우수한 사립학교와 국제학교가 몇 군데 있다.

4.3.5. 남자카르타 행정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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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6. 스리부 제도 행정군

행정군 명칭 '크풀라우안스리부(kepulauan seribu)'는 '천 개의 섬'이라는 뜻이다. 자바 본토가 아니라 자바 인근의 섬들로 구성된 곳이며, 자카르타 도심에서 쉽게 방문할 수 있는 자연 관광 지역이다. 도쿄오가사와라 제도의 관계처럼 자카르타의 일부라는 인식이 다소 희미하다.

4.4. 빈민촌

인구가 급격하게 성장한 개발도상국의 대도시가 대개 그렇듯, 자카르타 역시 일부 지역에는 주민들이 현대적 기준에서 비참할 정도로 낮은 생활 수준을 영위하는 빈민촌(슬럼)이 형성되어 있다. 상기했듯 북자카르타 지역에 특히 슬럼이 밀집되어 있지만, 서자카르타나 남자카르타 지역도 슬럼이 많다. 자카르타에서 중산층 이상이 거주하는 고급 주거 지역, 일반 서민 주거 지역, 그리고 빈민촌은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다. 중산층 이상의 자카르타 주민들은 평소에 슬럼이나 슬럼 주민을 볼 일이 없는 깨끗하고 현대적인 지역에서만 생활한다.

빈민촌에서는 기본적으로 정상적인 전기와 수도, 방수 시설을 이용하기 어렵다. 그나마 정상적으로 등록된 주거지에서 최소한의 관리를 받는다면 약간 낫지만, 이런 곳에는 5~6명의 가족이 좁은 방 하나에 몰려 사는 등의 유형이 많아 프라이버시 문제도 심하다. 상태가 심각한 곳은 일반적으로 주거지로 선호되지 않는 기찻길 옆이나 오염된 강 옆에 무허가 주택이 떼로 밀집된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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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카르타 망가라이(Manggarai) 지역의 슬럼.
오염이 심각한 칠리웅강 변에 있다.

4.5. 도시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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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경제

자카르타는 명실상부한 인도네시아 경제의 중심 도시이자 동남아시아 경제의 중심 도시 중 하나로, 인도네시아 금융, 제조업, 의료업, 물류, 통신, IT, 교육 등에서 핵심적인 입지를 차지하는 지역이다. 단, 오늘날 많은 기업의 본사나 사무실이 자카르타에 위치하기는 하지만, 공장들은 자카르타 인근 위성도시 브카시, 탕그랑 등지의 대형 산업단지에 있는 경우가 많다.

자카르타 시내 수디르만 중심 업무 지구(Sudirman Central Business District, SCBD), 메가 쿠닝안(Mega Kuningan) 등의 지역을 포괄하는 '골든 트라이앵글'(Golden Triangle) 지역은 각종 고층 빌딩이 늘어선 핵심 경제 지역으로 서울강남역 인근 지역 내지 테헤란로 일대, 또는 여의도와 유사한 기능을 한다.

주요 관광지는 아니라고 해도 어느 정도 관광업도 발달해 있는 편이며, 인도네시아의 관문으로서 관광객들도 많이 찾는 곳이다.

상당히 현대화가 진행되어 서비스업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으며, 쇼핑 문화가 독특한 방식으로 발달해 있기도 하다.

5.1. 타 지역과의 비교

자카르타의 경제적 위상은 타 지역과 비교할 때 더욱 두드러진다.

자카르타의 지역총생산(GRDP)은 2019년 인도네시아 통계청 추계 기준 명목 2009억 달러로 인도네시아의 모든 일급 행정구역(주/특별 지역) 가운데 1위였으며, 인구가 거의 4배에 달하는 2위 동부자바(1664억 달러)보다도 높다.

자카르타 하나로만 경제 규모가 페루, 그리스, 또는 뉴질랜드 전체에 필적하는 수준이다.

자카르타의 1인당 GRDP는 같은 2019년 통계 기준 $19,029(PPP $55,184)로 인도네시아의 모든 일급 행정 구역 중 압도적인 1위였으며, 인도네시아 전체 1인당 GDP($4,242)의 약 4.5배였다. 도시 단위로도 인구 100만 이상인 도시 중[27] 2위 수라바야($14,180)에 비해 큰 차이로 1위였다.

상기한 인도네시아 통계청 추계와 말레이시아, 태국, 필리핀 통계청 추계, IMF 추계 자료를 가지고 동남아시아 지역의 모든 광역 행정 구역과 함께 싱가포르, 브루나이, 동티모르를 비교할 때, 2019년 GDP(GRDP) 기준 자카르타 특별 지역의 경제 규모($2009억)는 가장 규모가 큰 싱가포르($3774억) 다음의 2위였으며, 3위 방콕($1738억)보다 컸으며 미얀마 전체의 약 3배였다. 자카르타의 1인당 GDP(GRDP) $19,029는 싱가포르($64,103), 브루나이($33,097), 쿠알라룸푸르($30,008), 방콕($19,749) 다음이었고, 메트로 마닐라($9,507)의 2배 수준이었다.

남아메리카 지역에서 인도네시아와 유사한 위치에 있는 브라질과 비교하면, 2018년 기준 브라질의 경제 중심지 상파울루는 GRDP $2740억(1인당 $22,502)으로 자카르타와 유사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브라질의 경우 1인당 GRDP가 상파울루와 비슷한 브라질리아나 인구가 600만 이상인 다른 중심 도시 리우데자네이루 등이 있고, 국가 전체의 1인당 GDP 역시 인도네시아의 약 2배(2018년 $9,194, 2021년 추산 $7,010)이므로, 상파울루 한 곳으로의 집중도는 인도네시아보다 낮다.

6. 언어

6.1. 종족어와 인도네시아어

자카르타는 지배적인 종족 집단 없이 마치 인도네시아의 축소판처럼 자바인, 브타위인(자카르타 토착 혼혈 종족), 순다인, 화인, 바탁인, 미낭카바우인, 말레이인 등 온갖 종족이 어울려 사는 곳이다. 이 때문에 다른 인도네시아 대도시에서 흔히 보이는 것처럼 지배적인 일상 언어(종족어)와 공식어(인도네시아어)가 분리되지 않고, 기본적으로 거의 모든 사람이 일상어와 공식어로 인도네시아어를 사용한다. 사용자 규모가 큰 토착어 자바어, 순다어, 미낭카바우어 정도는 각 종족의 가정 내에서는 종종 쓰이지만, 다종족 소통 환경에서는 쓰이지 않는다.[28] 이 경우에도 2세대나 3세대부터는 종족어 학습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아 종족어에 대한 지식이 불완전하고, 점점 인도네시아어를 주 언어로 사용하도록 동화되는 경우가 많다.

말레이인은 원래 수마트라, 보르네오 등지 출신으로 마인어 방언을 쓰는 집단인데, 자카르타에 거주하는 경우 방언을 고수하기보다 주위에 동화되어 자카르타식 인도네시아어(아래 절)를 사용하게 되는 경우가 흔하다. 반자르어, 발리어 등 보다 사용자 규모가 작은 종족어 화자는 풍부한 종족어 콘텐츠를 접하기 어렵고 종족어를 사용하는 동류 집단도 만나기 어려워 자연스럽게 인도네시아어만 사용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화인과 바탁인은 본래 유력한 종족어(중국어 남방 방언, 바탁어군)가 있는 집단임에도 불구하고, 노인 세대를 제외하고는 오늘날 대체로 인도네시아어(혹은 드물게 영어)를 주 언어로 사용한다. 비슷하게 다종족이 거주하는 대도시 메단에서는 화인이 대체로 복건화(메단 호키엔) 또는 보통화를, 바탁인이 바탁어를 고수하고 있는 것과 다르다. 자카르타를 포함한 자바 지역 화인이 중국어를 잘 안 쓰는 이유는 복합적인데, 정착 역사가 긴 자바 프라나칸은 원래부터 말레이어나 자바어를 생활 언어로 사용하는 동화가 꽤 진행되기도 했고, 20세기 후반 수하르토 정권이 화인들의 중국어 사용을 정책적으로 제한하기도 했다.

자카르타에서는 종족 간 결혼이 이루어지는 경우도 흔하다. 이럴 경우 가정에서 대개 종족어보다는 인도네시아어로 소통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자녀가 특별한 종족 정체성 없이 그냥 '자카르타 사람', '인도네시아인' 정도의 지역적 정체성만 가지고 자라나는 경우도 종종 있다.

6.2. 브타위어

네덜란드 식민 지배 과정에서 온갖 종족이 섞여 형성된 자카르타의 토착 종족 집단인 브타위인들은 역사적으로 브타위어(자카르타 말레이어)라는 언어를 사용해 왔다. 이는 오늘날 자카르타의 구어체 인도네시아어(이하 절)에 큰 영향을 주었다. 브타위어의 대략적인 특징은 표준 인도네시아어와 같은 어원의 단어에서 어말 모음 a가 종종 é로 상승하는 것, 어말의 자음 k가 자주 생략되는 것, 빠르고 역동적인 억양, dong, nih, ya, lah 같은 어감을 나타내는 간투사의 잦은 사용 등이 있다.

브타위어는 마인어와 문법적 구조가 거의 같지만, 일부 접사가 다르고 어휘 영역에서는 말레이어뿐 아니라 포르투갈어, 네덜란드어, 민남어, 객가어, 자바어, 순다어 등이 상당한 비율로 섞여 있다. 이에 따라 학자들은 브타위어를 말레이어의 방언이라기보다는 말레이어 기반 크리올어로 분류하기를 선호한다.

브타위어 단어는 '브타위어 사전(kamus bahasa Betawi)' 등으로 검색해 보면 쉽게 찾을 수 있다. (인도네시아어 윅셔너리의 브타위 단어) 다만 브타위어는 기본적으로 기록되지 않고 구어로 쓰였으므로 같은 말도 다양한 형태가 있을 수 있고, 사람/지역/동류 집단에 따라 다른 형태가 쓰이기도 한다. 대표적인 브타위 단어로는 gué/gua('나', 복건화 我[goa]를 차용), lu/lo('너', 복건화 汝[lu]를 차용), enggak/nggak/gak/kagak(표준어의 tidak, 문장 성분 부정), kagak/ora(표준어의 tidak, 부정 대답), amé(표준어의 dengan), baé(표준어의 saja), sapé(표준어의 siapa), kualat('젠장'), antepin(표준어의 biarkan), sonoh(표준어의 sana), ngapa(표준어의 mengapa), pegimana/begimané(표준어의 bagaimana), mumpung('~하는 한/동안'), kudu(표준어의 harus, 어원은 자바어), kelolodan(표준어의 tersedak), nyarap(표준어의 sarapan), ngibul('거짓말하다'), benahin('정리정돈하다'), belepotan(표준어의 kotor) 등이 있다.

betot(표준어의 tarik), geblek(표준어의 bodoh), méwék([실망스러운 표정으로] 울다), céngéng('울보'), bejibun(표준어의 banyak), girang(표준어의 senang) 등 일부 브타위 단어는 아예 웬만한 인도네시아어 사전에는 표제어로 등재되어 있다. 다만 브타위어 단어가 모두 자카르타 구어체에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며, 브타위인이 아니면 잘 모르는, 또는 잊힌 브타위어 단어도 수두룩하다. 요즘은 브타위인들조차 옛 브타위 단어를 잘 몰라서, 브타위 문화유산 보존 차원에서 브타위어 단어를 일부러 찾아서 쓰려고 노력하는 브타위인도 있다.

6.3. 구어체 인도네시아어

상기한 브타위어에 강한 기저 영향을 받아 bahasa gaul, bahasa sehari-hari 등으로 불리는 인도네시아어의 자카르타 구어체가 형성되었다. 구어체에서는 브타위어 단어와 조어법이 폭넓게 사용된다. 다만 브타위어와 구어체 인도네시아어는 엄밀히 말하면 별개이고, 오늘날 자카르타 구어체의 단어는 브타위어와 직접 관련이 없는 경우도 많다. 구어의 특성상 '찰진' 말을 다들 쓰기 시작하면 그게 그냥 구어가 되는 것이다. 자카르타 구어체는 수마트라의 리아우 말레이어를 기반으로 표준화한 표준 문어체 인도네시아어와는 상당히 다르고, 기본적으로 구어여서 계속 바뀌는데다 잘 문자화되어 있지도 않은 경우가 많다.

우선 어휘 수준에서 간단히 예를 들어 본다. gué/gua('나')처럼 민남어 어원인 경우에는 브타위어를 거쳐서 들어온 경우가 많다. banget('정말', '진짜'), bakal(표준어의 akan), kaya('~처럼', '~같이'. 표준어의 seperti) 등처럼 자바어에서 온 것이나 ngomong('말하다')처럼 순다어에서 온 것도 많다. 인도네시아어 안에서 말을 다른 의미로 쓰는 경우도 있는데, 대표적으로 sama를 dengan처럼 쓰는 구어체 용법이 있다. 오늘날의 자카르타 구어체에서는 영어를 종종 섞어 쓰기도 하는데(아래 절에서 상세히 다룸), 그냥 가져오는 게 아니라 prénjon('friend zone'), prik('freak')처럼 일정한 규칙에 따라 과감하게 인도네시아어화시키는 경우가 많다. 발음이 좋은 사람은 그대로 쓰기도 하지만 잘난 척한다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최근에는 케이팝한국 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젊은층 사이에서 oppa, gwenchana 같은 말도 유행어로 쓰인다.

다른 도시에서 쓰이는 인도네시아어 또는 말레이어도 나름의 지역색이 있지만[29], 자카르타가 인도네시아의 수도이고, 문화적으로 영향력이 큰 도시인 관계로(토크쇼, 코미디, 드라마 등 방송 콘텐츠 상당수에서 자카르타 구어체가 쓰인다) 다른 도시에 가도 자카르타 구어체가 곧잘 통한다. 인도네시아에서 그냥 구어체(bahasa gaul)라고 하면 자카르타(내지 자보데타벡) 구어체를 뜻한다.

구어체의 두드러지는 특징 몇 가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더 자세한 정보는 영어 위키 문서에 어느 정도 정리되어 있으니 참조하면 좋다.
구어체가 계속 바뀌기는 하지만, 표준 인도네시아어로 읽고 듣기가 가능하다면 다양한 구어체 레퍼런스를 구할 수 있으므로 의지만 있다면 구어체를 배우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 구어체 사전이나 언어 문화를 다룬 글도 서적이나 온라인 매체 기사 형태로 많이 나오고 있다. 인도네시아어로 대화하는 인도네시아인 친구를 사귀거나 인도네시아 대중 매체를 접한다면 아마 배우기 싫어도 말을 알아듣기 위해 어느 정도는 배우게 될 것이다.

자카르타에 거주하는 외국인이라면, 표준 인도네시아어만 써도 큰 문제는 없긴 하지만(현지인들도 당연히 상대방이 구어체를 모르는 외국인인 것 같으면 표준어 내지 표준어라고 생각하는 말을 써 준다) 자주 쓰이는 구어체 표현 몇 가지는 익혀 두면 좋다. 가끔만 구어체를 섞어 줘도 표준어만 쓸 때보다 현지인들이 좀 더 친근하게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6.4. 자카르타의 영어

자카르타는 발리와 함께 인도네시아에서 영어가 비교적 잘 통하는 지역이다. 특히 생활 수준이 높은 중앙자카르타와 남자카르타 지역에서 그렇다. 자카르타의 잘 교육받은 중산층이나 상류층은 영어를 즐겨 사용하며, 간혹 가정 내에서 영어로 대화하기도 한다. 영어는 이들에게 교육의 증표이자 현대적으로 사고하고 생활함을 보여주는 자격증 같은 것이다. 현지인들끼리 인도네시아어로 대화하는 도중에 영어 단어를 문장 한가운데 섞어 쓰는 일도 흔하다. 남자카르타의 쇼핑몰을 걸어다니면 이런 식의 대화가 종종 들릴 것이다. 유명 관광지인 발리의 경우 현지 주민이 관광하러 온 외국인과는 생활 영어로 대화하지만 현지인들끼리는 거의 순수하게 인도네시아어나 발리어로 대화하는데, 자카르타에서는 그냥 현지인들끼리도 영어 섞인 인도네시아어를 자연스럽게 쓴다.

다른 지역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인도네시아어에 영어를 섞어 쓰는 것을 재수 없게 느끼는 경우가 많다. 한국에서 보그체판교 사투리에 느끼는 뜨악함과 비슷하거나 좀 더 심하다. 이런 말투가 인도네시아 웹에서는 거의 밈화되어 조롱거리가 되기도 하고, 실제로 현지 코미디에서 종종 쓰인다. '남자카르타 애(anak Jaksel)'들이 쓰는 말이라고 하면 딱 이런 인상이다. 특히 literally, that(which) is, that's why, even, the point is, while, basically, honestly, at least, not yet, otw(on the way), fyi(for your information) 등 부사(구)나 접속사가 많이 쓰인다. guys, dude, prefer, confirm, comfortable, healing, better, more, overthinking, discuss, make sure 등 명사, 형용사, 동사도 적당히 갖다 쓴다. 어말 자음이 2개 이상일 때 첫 1개를 제외하고 생략하거나 v를 f로 발음하는 식으로 인도네시아어화하기도 한다.


예시 영상. 인도네시아어를 몰라도 중간중간에 쓰이는 (적당히 구수하게 인도네시아어화된) 영어를 들을 수 있다.

7. 교통

파일:traffic1.jpg

자카르타 대도시권 대중교통
철도 간선급행버스체계 통합 운임 제도
자카르타 시내 자카르타 MRT | 자카르타 LRT 트랜스 자카르타 Tarif Integrasi
자카르타 대도시권 LRT 자보데벡 | 자카르타 대도시권 광역전철, 공항철도 트란스파쿠안(보고르), 트란스 파트리옷(브카시),
트란스 데폭(데폭), 트란스 코타 땅그랑(땅그랑),
트란스 자보데타벡(광역버스)
없음



인구 1,000만이 넘는 엄청난 규모의 도시이니 만큼 교통체증이 매우 심각하다. 대중교통 시설이 열악하다 보니 주로 이용되는 수단은 자동차오토바이다.

거기에다 도로 사정도 좋지 않아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뒤섞여 달리니 더 막힌다. 그 때문에 자카르타의 교통체증은 더욱 심해지고, 따라서 대기오염도 매우 심각한 편이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규모의 도시인데도 옆나라 싱가포르말레이시아쿠알라룸푸르에 비해 도시철도 노선이 많이 부족한 편이다. 2019년 개통한 자카르타 MRT, 자카르타 LRT, 그리고 도시철도는 아니지만 하단에 나오는 KRL 광역통근철도가 운행 중이며 현재 위성도시를 잇는 수도권 LRT도 2021년 개통을 목표로 공사 중이다. [30]

그 외에도 트랜스자카르타에서 운영하는 BRT 노선이 운행 중. 이게 은근히 쓸만하다. 운임도 2.000루피아~3.500루피아로, 한국 돈으로 200~400원 정도인데 들어갈 때 한번 내고 끝이다(!). 노선도 엄청나게 늘었고 버스마다 안전요원이 타고 있어 치안도 괜찮은 편이다. 물론 긴장을 놓지 않는 편이 좋긴 하다.

2000년대에는 노후화된 대우와 현대버스를 사용해서 문이 제대로 닫히지 않거나 좌석상태가 심각했는데, 중국제 버스로 교체되는가 싶더니 스카니아 버스를 대량 도입해서 이제 거의 모든 노선에서 노후버스는 찾아 볼 수 없다. 대부분 버스전용차로를 사용해서 교통정체의 영향도 적은 편.

파일:stasiun-gambir-jakarta-pusat-sabtu-21122019-a.jpg
철도 교통은 시내 감비르(Gambir)역을 기점으로 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서울역 정도의 중요한 포지션이며, 자바섬의 대도시인 반둥[31], 족자카르타, 수라바야등 을 잇는 노선들이 운행 중이다.

역사는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자카르타의 주요역인 만큼 깔끔한 편이고, KFC, 스타벅스, 편의점 등 편의시설들이 잘 들어서 있다.

항상 붐비는 만큼 소지품에 유의해야 한다. 2021년 부터는 모든 기차 철도 노선의 기점을 Manggarai역으로 옮길 예정이라고 한다. 현재 자카르타~반둥을 잇는 고속철도가 2023년 6월 개통 목표로 Halim역이 건설 중이다. KCIC 참조.

당연히 인도네시아의 수도인 만큼 교통사정은 발리나 수라바야, 욕야카르타 등의 다른 주요도시 보다는 낫다. 발리의 경우 시내버스조차도 발달되어 있지 않아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주민들이 많으며, 관광객들은 관광버스나 택시에 의존하는 편이다.

일반 승용차의 경우 대부분 일본 브랜드인데 일본에서 팔지 못하는 Euro II 또는 Euro III 수준의 차량들이 많이 판매되므로 대기오염이 매우 매우 심각하다. 거기에 오토바이까지 득실거리니 상황이 나아질 리가 없다. 자카르타 중심가의 경우 거리에서 30분 이상 1시간 정도 있으면 숨쉬기가 힘들 정도이다.

차를 타고 자카르타에서 반둥으로 가다보면 고속도로로 1시간이면 갈 거리를 3시간 정도 걸리는데 하도 낡은 차들이 많아서 언덕에서 힘을 내지 못해서 뒷차들까지 꼬리를 물고 정체된다. 거기에 매연은 보너스다. 그런데 이것도 3번 정도 하다보면 참을성이 생긴다.

팔렘방과 함께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의 공동개최지이기도 하다. 평상시에도 교통체증이 심각한데 아시아 각 나라의 선수들과 관광객이 단체로 몰려오면 얼마나 교통체증이 심해질 지 우려했으며 정부도 이와 같은 우려를 했는지 최근들어 팔렘방[32]에도 도로나 경전철과 같은 교통 시설을 급히 확충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결국 제대로 된 시설을 완비하지는 못해 아시안게임 개최 후 평가에서 교통이 상당히 좋지 않은 평가를 받았다. #

항공교통으로는 수카르노 하타 국제공항이 있다. 앞서 말했듯이 자카르타는 교통체증이 매우 심각하므로[33], 비행기를 타야 한다면 미리미리 가는 것이 좋다.[34] 출근 시간과 퇴근 시간, 그리고 비 오는 날에는 교통체증이 굉장히 심해지는 양상을 보이는데, 자카르타에서 서울(인천)까지 직항으로 운행하는 대한항공아시아나는 밤에 출발하므로 더더욱 미리 가있는 편이 안심이다.

공항 내 터미널 간 이동을 할 경우에는 공항 내 경전철인 스카이 트레인을 이용할 수 있다. 아슬아슬하게 맞춰서 공항으로 출발했는데 비 오는 금요일 저녁이라면...충공깽

파일:27005153748_80ac002eda_b.jpg
파일:Sitting-on-the-train-Jakarta-Airport-Train.jpg
참고로 2017년부터는 시내 망가라이(Manggarai)역[35]을 기점으로 하는 공항철도가 운행 중이다. 교통체증 영향도 받지 않아 시간도 절약되고 시설도 인천국제공항철도 정도로 깔끔하니 이용하는 것을 추천한다.

자카르타는 대기오염이 심해지자 특단의 조치로 2025년부터는 10년 이상의 노후 자동차 운행을 금지시킬 것이라고 밝혔다.#

7.1. 자카르타의 대중교통

자카르타 대도시권 대중교통
철도 간선급행버스체계 통합 운임 제도
자카르타 시내 자카르타 MRT | 자카르타 LRT 트랜스 자카르타 Tarif Integrasi
자카르타 대도시권 LRT 자보데벡 | 자카르타 대도시권 광역전철, 공항철도 트란스파쿠안(보고르), 트란스 파트리옷(브카시),
트란스 데폭(데폭), 트란스 코타 땅그랑(땅그랑),
트란스 자보데타벡(광역버스)
없음


8. 관광

파일:메르데카 궁전1.jpg파일:모나스1.jpg
옛 바타비아 총독궁이자 현 대통령궁인 므르데카 궁 인근 독립 기념탑인 모나스

자카르타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동남아 일대의 해상 무역을 장악하고 자원을 모으기 위한 거점으로 이용하기 위하여 당시 자바섬에서 무역항으로 적합한 곳을 획득하고 개발한 곳이다. 네덜란드 점령 이전에도 반튼 술탄국의 유력한 무역항이기는 했지만 네덜란드가 도시를 획득한 시점에 네덜란드의 쿤 총독이 1619년에 기존 도시를 파괴했고, 과거의 도시를 복구하는 데 별 신경을 쓰지 않아 그 이후부터는 네덜란드인들과 이들이 데려온 화인들의 도시 건축과 문화가 주로 발달하였다.

따라서 주된 볼거리는 네덜란드 식민지 시대의 유적이나 현대적인 랜드마크들이다.

대표적인 관광지로는 모나스, 자카르타 국립 박물관, 안촐 유원지, 자카르타 씨월드, 타만 미니 등이 있다. 그러나 휴양 목적의 관광이라면 발리나 롬복으로, 전통 시대 유적(보로부두르, 프람바난 사원)이나 므라피산, 스메루산 등 자바의 장대한 화산을 둘러보는 것이 목적이라면 욕야카르타(족자카르타)로, 고원 지대의 수려한 경관에 관심 있다면 반둥이나 워노소보로 가는 것이 좋다. 자카르타는 위와 같은 성격의 관광지로서 본격적으로 개발된 곳이라고 하긴 어렵다.

파일:자카르타 모스크.webp
수용 인원 기준 세계 최대 규모의 이슬람 사원인 이스티클랄 모스크
파일:자카르타워킹투어.jpg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코타 투아(Kota Tua)[36] 지역이 볼 만하다. 네덜란드 식민지 시대 건물들이 많다.

대표적으로는 자카르타 역사박물관[37], 시온 교회(Gereja Sion, 1695년 건립), 루아르 바탕 모스크(1739년 건립), 토코 메라(Toko Merah)[38], 자카르타 코타 역[39], 만디리 은행 박물관(Museum Bank Mandiri)[40] 등 역사적 건축물이 많으며 무엇보다도 1837년에 건립되어 바타비아를 방문한 여러 유명인이 다녀간 카페 바타비아(Café Batavia)가 유명하다.

인도네시아의 수도이며 동남아시아 수위권의 대도시이므로 서점, 박물관, 갤러리 등은 많으며 골라서 갈 수 있다.

박물관으로는 국립박물관, 역사박물관, 만디리 은행 박물관 외에도 인도네시아 국립 미술관[41], 인도네시아 은행 박물관(Museum Bank Indonesia), 와양 박물관 등이 둘러보기 좋으며, 인도네시아 현대 미술에 관심이 있다면 갤러리를 순회해보는 것도 좋다.

9. 쇼핑몰

자카르타에 사는 사람들은 휴일에 놀러간다고 하면 주로 쇼핑몰을 가는 편이다.[42] 다른 동남아시아 개발도상국 수준의 국가에서도 으레 그렇듯이[43], 자카르타에서 쇼핑몰이라고 하면 백화점보다 더 큰 개념으로 백화점은 물론 마트, 음식점, 노래방, 게임방, 영화관[44] 등 거의 모든 오락 시설이 모여있는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카르타의 쇼핑몰은 말 그대로 굉장히 규모가 큰데, 건물 자체도 큰 데다가 그 안은 명품 매장으로 즐비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자카르타의 쇼핑몰로는 그랜드 인도네시아, 플라자 인도네시아, 퍼시픽 플레이스, 리포 몰, 플라자 스나얀, 스나얀 시티, 간다리아 시티, 폰독인다 몰 등이 있으며, 대표적인 영화관으로는 XXI와 CGV blitz[45]가 있다.

쇼핑몰에 입점한 한국 음식점들도 종종 볼 수 있다. 현지에 진출한 한국 대형 요식업계 음식점들로는 교촌치킨, 비비고, 뚜레쥬르 등이 있다. 한국 기업 외에도 자카르타에서 사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한국 음식점들과 한국 마트들도 꽤나 많은 편이니 웬만한 한국 음식은 다 먹을 수 있는 편이다.

한인 마트로는 무궁화마트나 K마트 등이 있으나 실제로는 슈퍼마켓 수준. 무궁화마트 본점 2층에는 빵가게와 잡화점, 여행사도 있으며, K마트에는 빵 코너와 분식 코너가 있다. 한인 마트 중 가장 규모가 큰 무궁화마트의 경우, 단순히 판매뿐만 아니라 유통도 하기 때문에 다른 마트에 비해 한국 상품을 가장 많이 판매하며 여러 지점도 운영 중이다. 물론 각 마트마다, 지점마다 제품 입고 현황이 다르니 그때그때 사정에 맞는 마트에 방문하는 것이 좋다.

다만 엄연히 해외인 만큼 한국에 비해 한국산 제품의 수가 현저히 적고 신선도도 떨어지며 수출용 제품은 맛이 본래와는 다른 경우가 많다. 신제품은 몇 개월 후에야 나오는데 나가사키 짬뽕, 꼬꼬면, 불닭볶음면 등은 출시된 지 약 8개월이 지나서야 마트에 들어왔다. 게다가 허니버터칩 등 수입조차 되지 않는 제품군도 많다.

때문에 자카르타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은 한국에 방문했을 때 한국 음식들을 많이들 사간다. 한편 가까운 싱가포르/홍콩/쿠알라룸푸르/방콕 등에 관광 겸 원정 쇼핑을 다니기도 한다. 특히 붙어 있고 노선이 많은 싱가포르로 자주 쇼핑 원정과 여행을 겸해 떠나고는 한다. 애초 인도네시아 교민들이 고국 방문 시 싱가포르항공을 매우 선호한다.[46]

10. 사건사고

2016년 1월 14일 자카르타에서 IS의 소행으로 추정되는 자살폭탄테러가 일어나 7명이 사망하였다. 자세한 것은 2016 자카르타 테러 사건 참고.

2016년 12월 아혹 주지사 사건으로 빈번히 데모가 일어나니 주의할 것. 사건의 개요는 화교 혈통의 루터교도 주지사인 바수키 아혹이 2016년 9월 27일 정부 정책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이 쿠란의 특정 구절을 곡해하는 자들에게 속고 있기 때문일 수 있지만 자신은 그것도 이해할 만하다고 한 것이다.

이때 쿠란의 장 이름을 인용했는데, 무슬림들은 쿠란은 무슬림만의 전유물이라며 기독교도에 중국계인 아혹 주지사가 쿠란을 모독했다고 반발하고 있다.

그리고 정말로 신성모독 죄로 2년을 선고받았다. 한 재판관은 그가 무슬림들에게 상처를 입혔다고 의견을 피력했다. 무슬림들은 형이 너무 낮다며 5년으로 늘려야한다고 요구하고 있으며, 아혹은 항소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2020년 1월 1일에 폭우가 내린 뒤 이로 인해 침수가 발생하면서 최소 9명이 숨지고 주택·건물 수천 채가 침수됐다.# 그리고 사망자가 21명으로 늘어났다.#

2021년 3월 31일 무려 자카르타 경찰청 본부에 총기테러 사건이 발생했다. 25세 여성이 총기를 들고 경찰청에 들어가서 총질 뒤에 경찰관들의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인도네시아 경찰본부에서 IS관련 단체의 소행이라고 하였다.

11. 수몰 위기

영국 BBC는 자카르타가 세계 평균의 2배 이상 빨리 잠겨 2050년에는 도시의 일부 지역이 완전히 잠길 수 있다고 보도했다. 심한 지역은 1년에 무려 25cm나 가라앉았단 말도 있다.

애초에 강하구의 범람원 지역에 위치한데다, 그 위에 나무를 베고 콘크리트를 들이 부으면서, 부족한 상하도 시설을 위해 우물을 파내게 되는데 자카르타의 인구가 폭증함에 따라 콘크리트 아래 지반에 빗물이 흘러가는데 한계가 있어 지반이 가라앉는 중이라고 한다.
물론 이러한 보도들은 원론적 경고에 가깝지만 문제는 인도네시아라는 나라가 아직까지 제대로 된 대책이 없다는 것이다.

조코 위도도 대통령이 2019년 대선에서 승리한 뒤에 수도자바섬 밖의 계획도시 누산타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자카르타로의 인구 집중이 심각한데다 교통과 주택 문제가 심각하고, 지구온난화와 과도한 지하수 사용으로 인한 지반침하 문제까지 겹쳐서 앞으로도 수도로서 제 기능을 할지 의문부호가 많았는데 이를 수도 이전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다. 자카르타 주민들 90% 가량이 지하수 취수 펌프 등을 이용해 지하수를 끌어올려 쓰고 있는데, 이는 칠리웅 강을 비롯한 자카르타의 강들이 심각하게 오염되어 있어 생활용수로 사용할 수 없고, 2020년 기준 상수도 보급률이 64%에 불과하기 때문에 지하수 외에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이 지하수 사용이 지반침하 원인의 75%를 차지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2019년 8월 26일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열고 "새 수도를 보르네오섬의 동(東) 칼리만탄의 북프나잠 파세르군(Penajam Paser Utara)과 쿠타이 카르타느가라(Kutai Kartanegara)군 일부에 건설하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기사1 기사2 인구가 비교적 적은 낙후 지역이나 자원 수급에 있어서는 중요한 지역이다.

2020년에 코로나19로 인해 보르네오 칼리만탄 지역으로 수도를 천도하려는 계획이 연기됐다.#

2022년 1월 18일에 인도네시아 의회는 천도를 위한 법안을 통과시켰다.#




2024년 10월 현재 수도 이전 비용 43조원 가량의 80%를 민간에서 충당하려다 투자가 잘 안들어와서 여전히 공정률 15%에 머물고 있다. 또한 정치적 반대도 만만치 않았고, 프라보워 수비안토 대통령 당선인도 전임의 수도 이전을 지지한다고 하지만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다른 공약도 재원이 필요한지라 본 사업이 좌초 위기라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12. 매체에서

12.1. 게임

12.1.1. 도미네이션즈

부두 원정 목적지 중 하나로 등장한다.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순다 켈라파(도미네이션즈) 문서
번 문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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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12.2. 음악

자카르타는 한국 음악에서 서울이 그렇듯 인도네시아 음악에서 흔히 배경이나 주제로 쓰이곤 한다. 대표적인 예로 80년대 곡 "Antara Anyer dan Jakarta"는 오늘날까지도 인도네시아에서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Sheila Majid - Antara Anyer dan Jakarta (1986)

이하는 비교적 최근에 나온 자카르타가 제목이나 소재로 언급된 유명한 곡들이다.


White Shoes & The Couples Company - Kisah dari Selatan Jakarta (2010)


For Revenge, Stereo Wall - Jakarta Hari Ini


Maudy Ayunda - Jakarta Ramai


Kunto Aji - Jakarta Jakarta

13. 기타

1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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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관련 문서



[도시권] 35,386,000명(2023)[인도네시아] 전체는 37.9[3] 뉴욕시의 별명인 The Big Apple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인도네시아의 뉴욕시와 같다는 것. 하필 두리안인 이유에 대해선 호불호가 명확히 갈리는 두리안과 마찬가지로, 자카르타 역시 매력과 그림자가 또렷하게 공존하기에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이 명확히 갈려서라고 한다.[4] 인도네시아는 산스크리트어가 인명, 지명으로 널리 쓰인다.[5] 포르투갈 세력은 1511년 말라카 점령 이후 발빠르게 수마트라와 자바 지역으로도 지역 세력들과 제휴해 진출하려 시도했지만, 이처럼 1527년 드막에 패배해 축출된 것으로 자바로의 진출 시도는 좌절되었다. 비슷한 시점에 수마트라에서는 파사이 술탄국을 영향권하로 편입하며 제한적 성공을 거두었지만, 아체 술탄국이 1524년 파사이-포르투갈 연합군을 물리치고 파사이를 점령함에 따라 수마트라 진출 역시 좌절되었다. 이후 포르투갈은 17세기 초까지 수마트라로 몇 번 더 진출을 시도하지만 모두 실패했다.[6] 자야카르타 점령 전인 1618년 동인도 회사의 동인도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1618년 시점에 동인도 해역에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직접 통치는 말루쿠 제도 일부에만 국한되어 있었고, 나머지 일부 지역에는 군데군데 지역 통치자와의 합의로 상관들을 설치했거나 설치하려 시도하는 중이었다.[7] 오늘날 자카르타에 식민지 시대 이전의 유물이나 유적은 거의 없는데, 자야카르타가 믈라카반자르마신 등에 비해 그렇게 번성하지 못한 항구여서일 수도 있겠지만, 직접적인 원인은 쿤 총독이 자야카르타 점령 과정에서 도시를 파괴했고 재건 과정에서 기존의 건물들을 복구하지 않았던 까닭이다.[8] 원래 쿤 총독은 자기 고향 호른의 이름을 따 '니우호른(Nieuw-Hoorn)'으로 개칭하기를 희망했지만 동인도 회사 상부가 거부했다.[9] 단 350년의 경우 자야카르타 점령과는 연도가 안 맞는데, 16세기 말 네덜란드 세력의 동인도 해역 최초 진입 시점이나 1605년 암본 점령 등이 기준이라고 할 수 있지만, 어차피 그다지 엄밀한 이야기는 아니다.[10] 사실 이건 영국홍콩을 한때 점거했다고 "영국이 중국을 150년 동안 식민 지배했다"고 하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이상한 말이지만, 어쨌든 중국과 달리 인도네시아는 결과적으로 전역이 네덜란드 산하에 들어갔으므로 오늘날까지 쓰이고 있다. 심지어 인도네시아인들도 외국인들에게 인도네시아 역사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할 때 거두절미하고 단순화해서 "네덜란드의 300년(330년, 350년) 식민지 역사" 운운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11] 항상 그런 것은 아니었는데, 가령 동인도 최초로 철도가 놓인 도시는 바타비아가 아닌 스마랑이었다.[12] 토착민 대상의 초등 교육은 원래 말레이어나 자바어로 이루어졌으며, 초급 과정 3년, 중급 과정 2년이었다. 그러나 토착어 초등 교육을 받았다고 해도, 토착어 초등 교사 과정을 제외하면 토착어로만 교육받은 학생들에게는 더 이상의 근대적 교육이 제도적으로 제공되지 않았다. HIS가 생기기 이전까지 네덜란드어 교육을 받고 상급 학교로 진학하기를 원하는 소수의 엘리트 토착민 학생은 유럽계가 다니는 초등학교(ELS, Europeesche Lagere School)에 토착민에게 허용된 소수의 쿼터를 노려 가까스로 입학해야 했다.[13] 바타비아의 말라리아는 오래전부터 유명했다. 18세기에는 바로 이 말라리아 때문에 바타비아에 온 유럽인이 죽어나간다고 해서 바타비아가 "유럽인의 무덤"이라고까지 불릴 지경이었다. 원래 바타비아 북부, 동부와 인근 지역은 저지대에 습지대가 많아 말라리아를 매개하는 모기가 창궐하기 좋은 환경이었다. 19세기와 20세기에 바타비아 중부와 남부로 인구 이동이 이루어진 원인 중 하나도 모기를 피하려는 것이었다.[14] 당시 인구 조사와 역학 조사가 불완전한 관계로 사망자 수는 지역별 연간 사망자 수 통계의 평년 대비 변화 등으로 추정할 수밖에 없다. 식민 정부의 센서스에 따르면 1920년 자바의 총인구는 약 3500만 명이었고, 동인도 총인구는 공식 집계가 없었다. 1930년 센서스에 따르면 동인도 총인구는 6073만 명이었고, 자바의 총인구는 4172만 명이었다.[15] 네덜란드 2차 공세로 잠시 욕야카르타마저 점령되었을 때는 수마트라의 부키팅기가 임시 수도가 되었다.[16] 동인도 총독 대행 휘베르튀스 판모크의 구상에 따라, 동인도는 여러 자치체의 연방이 될 예정이었다.[17] 크라맛퉁각의 역사에 대해서는 한 블로그 글이 잘 소개하고 있다. 알리 사디킨은 방콕을 방문한 후, 방콕의 '성 산업'이 특정 지역에 밀집되어 있었던 것에서 크라맛퉁각을 착안했다고 한다. 1999년 집결지가 폐쇄된 후, 2004년 집결지가 있던 자리에는 크라맛퉁각이라는 이름을 지우기 위해 새로운 모스크 '자카르타 이슬람 센터'가 들어섰다.[18] 비교하자면, 서울 수도권의 경우 1-4월 평균 습도가 56-60%, 장마철 및 직후인 7-8월 평균 습도가 75-80%, 나머지는 60-70% 정도이다. 즉 자카르타는 일 년 내내 서울 수도권의 장마철 이상의 습도를 유지한다는 뜻이다.[19] 사실 자카르타는 인도네시아에서 비교적 예측 가능하고 안정된 온화한 기후를 보이는 편이며, 인도네시아에서 '더운 곳'으로 손꼽히는 도시 지역은 가끔 낮 기온이 40도에 육박하기도 하는 메단, 프칸바루 등 수마트라 북동부 지역이나 건조한 소순다 열도비마(Bima) 등이다.[20] 2014년 10월 11일[21] 39.6도, 2018년 8월 1일[22] 참고로 막상 현지인들은 우산을 별로 안 갖고 다닌다. 폭우가 와도 금방 그치기 때문이다.[23] 싱가포르는 나라가 포화될까 봐 해협식민지 시절부터 출산을 그리 장려하지 않아 인구가 급증하지는 않았다. 현재도 싱가포르의 인구는 싱가포르 여권 소지자는 350만 명(2018)에 불과하고 영주권자와 장기 비자 소지자까지 합쳐야 겨우 560만 명(2018)이 된다.[24] 1931년 식민지 시절에 56만명이 됐는데 중국 대륙말레이 반도 본토에서 이민을 받으면서 인구가 늘어났다.[25] '카르노 동지'. 수카르노를 가리킨다.[26] 슬럼의 28%가 서자카르타, 19%가 남자카르타, 12%가 동자카르타, 11%가 중앙자카르타, 1%가 크풀라우안스리부에 위치한다. 겹치는 지역은 양쪽 모두 포함으로 보인다. 출처: "Slums remain a fact of life in Jakarta, ministry finds," The Jakarta Post, last modified May 18, 2019.[27] 모든 도시 중에는 자바 설탕·담배 산업의 주요 중심지인 동부자바크디리(Kediri, 인구 약 30만)가 1인당 GDP $34,270으로 1위였다.[28] 다만 마치 한국인들이 해외여행을 하다 한국인을 만나면 한국어를 쓰는 것처럼 가정 밖에서도 같은 종족끼리는 종종 종족어로 소통할 때가 있다. 공적인 회의에서도 그러한데, 가령 참가자가 모두 자바인이면(또는 대부분 자바인이고 자바어가 가능한 화인이나 마두라인이 약간 섞인 정도라면) 일단은 인도네시아어를 쓰다가 한 명이 손을 들고 "이제부터 잠깐 자바어로 하시죠" 하면 다들 말을 바꿔 자바어를 쓰기 시작한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고, 진지한 대화는 공적인 자리에서 같은 종족끼리도 인도네시아어로 하다가 회의가 길어지면 잠깐 편한 시간을 갖자는 느낌으로 차도 마시고 다과 몇 개 집어 먹듯이 종족어를 쓰는 것이다. 다종족 사회인 인도네시아에서는 일상적인 풍경이다.[29] 다른 지역의 구어체도 문어체와 꽤 차이가 있다. 잘 정리된 방언 레퍼런스를 찾을 수 있는 말레이어권 도시로 팔렘방이 있는데, '무시어'라고도 하는 팔렘방 방언은 자카르타 방언과 좋은 비교가 된다. 팔렘방 방언은 전통 시대에 자바어의 큰 영향을 받아 자바어에서 온 외래어를 많이 쓰는데, 대표적으로 '사람'의 뜻으로 표준어의 orang보다 자바어에서 온 wong을 더 많이 쓴다. 심지어 자바어처럼 존댓말이 따로 있을 정도다. 이 외에도 cak mano(표준어의 bagaimana), cak itu(표준어의 begitu), la(표준어의 sudah) 등 특이한 어휘가 많다.[30] 이 중 MRT는 일본 기술로 지어졌고 LRT는 한국 기술로 지어졌다. LRT에서는 김포 도시철도 1000호대 전동차의 형제기가 운행 중이다.[31] 자카르타~반둥 기차 노선은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복잡한 노선 중 하나다.[32] 시내와 공항을 잇는 경전철이 팔렘방 도시철도를 겸해서 운영중이다. 수도권을 제외한 지방도시에 최초로 개통된 도시철도이다.[33] 공항 내 도로도 차가 막힌다. 그리고 주차장도 항상 꽉 차있다. 총체적 난국[34] 이는 동남아시아 대도시인 방콕, 호치민, 마닐라 등에도 해당된다. 교통체증으로 비행기를 놓치게 되는 경우가 생길수 있다.[35] 자카르타의 중심부에 위치하며,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이용객수가 많은 기차역이다.[36] 구시가지를 뜻한다.[37] 네덜란드 식민지 시절 1707년에 지어진 구 바타비아 시청이다. 요금은 학생 3.000 루피아, 성인 5.000 루피아.[38] 1730년에 지어진 네덜란드 동인도 총독 판임호프의 저택이다.[39] 1887년에 구 역사 건립[40] 1933년 건립된 구 네덜란드 무역협회 건물로 몇 안 되는 인도네시아에서 볼 수 있는 전간기 네덜란드 신즉물주의 건축양식의 사례다[41] 상설 전시에서는 인도네시아 미술사를 식민 시대부터 현대까지 자세하게 연구하여 소개하고 있다.[42] 문재인 전 대통령이 인도네시아에 국빈 방문을 했을 때 조코위 인도네시아 대통령과 함께 쇼핑몰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43] 정확히 말하면 어지간히도 경제 사정이 좋은 개발도상국은 쇼핑몰이 백화점 개념을 쌈싸먹는 수준이다. 사실, 명백히 선진국으로 분류되는 대한민국조차도 백화점도 대형 마트도 없는 지역은 쇼핑몰이 이들을 대체하는 복합문화시설로 기능하는 경우가 많다. 선진국인 싱가포르의 경우도 쇼핑몰과 백화점의 개념이 따로 구분되지 않았으며 쇼핑몰이 마을 중심지를 겸하는 영미권 국가들이 아주 많다.[44] 한국보다 영화표가 몇백 원에서 몇천 원 정도 더 싸다는 메리트가 있지만, 영화 자막은 당연히 인도네시아어로 나온다. 이런 경우는 미국이나 영국 영화처럼 영어를 쓰는 경우이고 한국 영화 같은 경우는 영어와 인도네시아어 둘 다 나오기도 한다. 2014년 기준으로 인도네시아에서 개봉된 한국 영화는 명량, 미스터 고 등이 있다.[45] 그 CGV 맞다. 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현지 영화관 회사를 CJ가 사들인 것. 가끔 영화관 내에 같은 CJ 계열인 뚜레쥬르까지 입점해있는 모습도 볼 수 있다.[46] 자카르타 직항이 있긴 하나 가격 때문에 창이 경유편을 자주 이용한다.[47] 인도네시아는 민증이나 여권에 종교를 적으며 무신론은 적을 수 없다. 공인된 종교만 적어야 한다. 현지 자바계나 말레이계는 무종교여도 사회적으로는 무슬림 코스프레하며 화교의 경우 기독교나 불교라고 적고 크리스천 혹은 불자 코스프레 한다.[48] 물론 이쪽도 1970, 1978 두 번은 개최권 반납으로 인해 떠맡은 대회여서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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