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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02 02:11:50

독일 연방군의 과거 청산과 전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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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독일 연방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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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개별 사례
2.1. 프로이센군과 독일 시민군, 독일 제국군에 대하여2.2. 구 국방군에 대한 관점과 과거사 청산
2.2.1. 건군 초기와 1960년대까지2.2.2. 변화의 시작2.2.3. 오늘날의 공식적인 평가2.2.4. 여전한 논란
2.2.4.1. 과거 청산인가 또다른 깨끗한 국방군 신화인가?2.2.4.2. 전통 단절에 따른 군사적 모델의 상실
2.2.5. 결론
2.3. 구 국가인민군에 대한 관점
3. 시사점4. 기타

파일:das-ehrenmal-des-deutschen-heeres-heute.jpg
코블렌츠 에렌브라이트슈타인 요새 내에 있는 독일 육군 기념관(Das Ehrenmal des Deutschen Heeres)과 연방군 의장대. 550만 명의 제국군 및 국방군 전사자들과 연방군 순직자들을 포함한 독일 육군의 모든 망자들을 추모하는 시설이다.[1] 다만 연방군은 이 기념관이 침략전쟁 또는 절멸전쟁을 기념하거나 군인들을 영웅화하려는 것이 아닌, 단순히 전쟁과 폭정 아래 사망한 모든 독일 육군의 군인들의 죽음을 기억하는 곳이라고 설명한다. 일본에 빗대자면 야스쿠니 신사보다는 치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에 상응한다.

1. 개요

전쟁과 평화, 삶과 죽음, 환희와 슬픔. 군인만큼 존재에 있어 그토록 명확한 명과 암을 가진 직업은 많지 않다. 이러한 감정들을 다루거나 정리하고 대처하기 위해서는 명확한 도덕적 지침이 필요하다.

따라서 독일 연방군은 기억과 추모 문화를 육성한다. 이는 독일 군대들의 과거사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통해 모든 군인들이 제복을 입은 시민의 모범이 되게끔 하며, 연방군의 자아상에 사회의 거울로써의 명성을 가져다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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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ieg und Frieden, Leben und Tod, Freude und Leid: Nur wenige Berufe konfrontieren Menschen so sehr mit den hellen und dunklen Seiten ihrer Existenz wie jener der Soldatin oder des Soldaten. Um mit diesen Emotionen umgehen, sie einordnen und verarbeiten zu können, ist ein solider moralischer Kompass erforderlich.

Die Bundeswehr pflegt daher eine Kultur der Erinnerung und des Gedenkens: Durch die kritische Auseinandersetzung mit der Vergangenheit der deutschen Streitkräfte sollen alle Soldatinnen und Soldaten in die Lage versetzt werden, dem Leitbild des Staatsbürgers in Uniform folgen und dem Selbstverständnis der Bundeswehr als Spiegel der Gesellschaft Geltung verschaffen zu können.}}}

- 독일연방공화국 국방부, <연방군의 기억문화(Gedenkkultur der Bundeswehr)>

Die Tradition der Bundeswehr, 연방군의 전통

독일 연방군의 인적 기반은 구 나치 독일 시대의 국방군이다.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따르는 독일연방공화국의 군대의 전통이 국가사회주의를 따르며 대량의 반인륜 범죄를 저질렀던 나치 독일의 군대에 기반한다는 사실은 그동안 논란이 되어 왔다. 건군 초기 연방군에게 있어 국방군은 그들 자신의 옛 경력이자 빛나는 전과를 거둔 우상이었으나 냉전 중후반부터는 애증의 대상이 되었으며, 오늘날 들어서는 단절해야 할 대상으로 전락했다. 동시에 연방군은 독일 재통일 이후 오랜 기간 주적이자 동포였던 국가인민군을 포용하면서도 그들과의 역사적 정통성은 부정한다.

이렇듯 서로 다른 시대 간에 이어져 오는 역사적인 연속성이 존재하는 상황 속에, 연방군이 그들 자신의 전통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전후 80년 및 재통일 30년이 되어가는 오늘날까지도 현재진행형이다. 독일군의 이러한 노력은 한국군에 있어서도 모델로써 큰 시사점을 가지고 있다.

2. 개별 사례

2.1. 프로이센군과 독일 시민군, 독일 제국군에 대하여

파일:Y4EDMJG52JEL3GD5IKOOV4TUFI.jpg
▲ 2021년 독일 국회의사당 앞에서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참전용사들을 기리기 위해 개최된 대분열행진(Großer Zapfenstreich)을 거행하는 국방부 경비대(Wachbataillon). 자펜슈트라이히(Zapfenstreich)는 원래 란츠크네히트 용병대의 귀영 나팔신호를 뜻했으나 점차 군 행사로 의미가 확대되었다. 대분열행진은 대불전쟁 당시인 1813년에 최초로 고안되었으며 19세기 이래로 프로이센 왕국군의 최고로 영예로운 행사로 자리매김했다. 과거에는 군주들에게, 그리고 오늘날에는 연방총리 및 대통령, 국방장관 및 고위 군 장교들 등을 환송하기 위해 열린다. 이 전통은 동독 국가인민군에서도 유지하였으며 오스트리아 연방군 역시 과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시절에 도입하여 오늘까지 이어가고 있다.
20세기까지 독일의 군대들은 소규모 국가들과 왕조들의 체제를 안정화하는 요소였다. 이러한 특징은 국가와 사회 내에서 군대의 우월한 지위를 보장했다. 그들의 다양한 역사에는 독일의 발전이 반영되어 있으며, 이는 기억하고 보존할 가치가 있는 독일 군사사의 역할 모델들 및 사건들의 근원이다. 독일 군대는 현대적인 참모 업무, 임무형지휘, 최전선 지휘 및 장군참모 시스템처럼 오늘날에도 여전히 의미있는 수많은 진보적이고 선구적인 방식과 구조 및 원칙을 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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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s zum 20. Jahrhundert waren deutsche Streitkräfte stabilisierender Bestandteil einer vornehmlich kleinstaatlichen und überwiegend dynastischen Ordnung. Dies begründete ihre herausgehobene Stellung in Staat und Gesellschaft. Ihre vielfältige Geschichte spiegelt die Entwicklung Deutschlands und ist Quelle erinnerungs- und damit bewahrungswürdiger Vorbilder und Geschehnisse der deutschen (Militär-)Geschichte. So entwickelten deutsche Streitkräfte zahlreiche fortschrittliche und richtungsweisende Verfahren, Strukturen und Prinzipien, die noch heute Bedeutung haben, etwa die moderne Stabsarbeit, das Führen mit Auftrag, das Führen von vorne oder das Generalstabswesen.}}}

- 2018년 전통 규정에서 명시한 1918년까지의 독일군에 대한 평가.#
1870/71년에 프로이센적인 기호들로 위아래로 점철된 제국이 세워짐에 따라, 언뜻 보기에 1807년의 군사 개혁가들과[2] 1848/49년의 혁명가들은[3] 실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연방군의 전통을 확립하는 기둥에 앞으로도 절대적으로 적합하다. 비록 모든 면에서 그들이 현대적인 민주주의의 개념에 걸맞지 않더라도 그들이 보여주었던 이상은 연방군 전통의 주축이 되기 충분한 이유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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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e Reformer von 1807 und die Revolutionäre von 1848/49 sind auf den ersten Blick zwar gescheitert, da die Reichsgründung dann 1870/71 von oben und unter preußischem Vorzeichen erfolgte. Gleichwohl, als traditionsstiftende Säulen für die Bundeswehr sind sie aufgrund der Ideen, die sie verkörperten, weiterhin uneingeschränkt geeignet, selbst wenn sie nicht in allem unseren heutigen Vorstellungen von Demokratie gerecht werden.}}}
연방군은 독일 제국군프로이센 왕국군을 비롯한 구 독일 군대들의 그 외의 측면에 있어서 기억하고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경우에는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연방군의 상징인 철십자는 프로이센 시절부터 그 기원을 소급할 수 있다. 현 독일 군복의 야전회색(Feldgrau)은 1907년 제국군의 복제 개정 당시 도입한 것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최고의 영예로 꼽히는 대분열행진은 프로이센 시절에서 크게 달라진 바 없다. 행사에서 울려퍼지는 노래 역시 요크 행진곡이나 프로이센의 영광과 같이 옛 시대의 행진곡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으며 이를 거행하는 국방부 근위대 역시 옛 프로이센 근위대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인적, 사상적인 측면에서 프로이센군의 영향력은 두드러진다. 샤른호르스트 중장과 그나이제나우 원수와 같은 프로이센 군사 개혁가들이 나폴레옹에 맞서기 위해 도입한 란트베어를 비롯한 국민개병제 및 인민전쟁 이론, 그리고 헬무트 폰 몰트케 원수가 계승하여 발전시킨 임무형지휘 등의 군사이론은 비단 제국군과 국방군의 군사운용뿐만 아니라 연방군의 내적 지휘 및 제복을 입은 시민 이론에도 핵심적인 요소로 자리잡고 있다. 연방군은 1955년 샤른호르스트 중장 탄생 200주년을 맞아 최초의 자원병들을 대상으로 군 임명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나폴레옹 전쟁 종전 이후 1848년 혁명과 같이 곳곳에서 벌어졌던 자유주의 운동에 가담했던 개별 프로이센 군인들 역시 연방군의 선배로써 인정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연방군은 그들의 유산 중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거스르는 것들은 수용하지 않는다. 가령 시민들과 자유주의를 총칼로 진압하고 그들의 지배를 저버린 채 보수적인 제국 체제를 건설한 것은 비판의 대상이다. 연방군은 단순히 독일 통일의 군사적 동력이었다는 이유만으로 프로이센군과 독일 제국군을 칭송하지 않는다. 프로이센적 가치에 기반한 무조건적인 복종이나 문민통제를 무시하고 군주에게 충성하며 국가 내의 국가라고까지 불릴 정도로 독립적이었던 행태 역시 마찬가지로 전통이 아니다. 이렇듯 독일 군국주의의 근원이었다는 부정적인 이미지는 제국군을 전통에 포함하는 데 걸림돌로 작용한다. 물론 전통 규정에서도 프로이센군과 제국군 그리고 국가방위군을 비롯한 독일사의 다른 군대들을 하술할 국방군이나 국가인민군처럼 별도의 항목을 할애하여 콕 집어서 배제하고 있지는 않다.

2018년 전통규정의 개정 이후 연방군 자체의 역사를 부각하고자 하는 노력이 이어지면서 독일 제국군에 대한 언급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가령 제국군의 오토 폰 에미히(Otto von Emmich)[4] 보병대장의 이름을 땄던 에미히-캄브라이 병영은 2018년 라겐슈타인 병장 병영(Hauptfeldwebel-Lagenstein-Kaserne)으로 개칭되었는데 이는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참전하여 전사한 토비아스 라겐슈타인(Tobias Lagenstein) 병장의 이름을 딴 것이다. 상술한 대분열행진의 경우에도 군국주의적이라는 이유로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적지 않기에 연방군은 별도의 장소에서 조용하게 행사를 치르는 편이다.[5] 예외적으로 2021년 행사의 경우 미국-아프간전 참전용사와 전사자들에 대한 최고의 예우를 전하기 위해 의사당 앞에서 공개적으로 개최되었는데, 이 모습에서 나치를 연상한 독일인들과 여타 유럽인들의 반발이 적지 않았다.# 즉 제국군과 프로이센군 자체는 청산 대상으로 지목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후신이자 반인륜 범죄를 저질렀던 국방군과 직접적인 연속성을 가지고 있기에 그 접점이 청산의 대상이 되거나, 또는 논란이 벌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 외 전반적으로 제국군과 프로이센군은 직접적인 언급만 줄어들고 있을 뿐 여전히 독일 군대와 군사학의 근원으로써 깊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재단 "민주주의 역사의 장소들(Orte der Demokratiegeschichte)"은 연방군와 제국군의 조직구조와 문화 사이에 연속성과 전환, 그리고 변혁이 공존한다고 평가한다.# 대분열행진을 다시 예로 들자면 연방군은 19세기 이래로 내려오는 전통적인 행사라는 입장을 고수하나 그와는 별개로 국방군과 히틀러가 이 행사를 나치 프로파간다에 적극 이용한 것 역시 사실이기에 비판을 받는다. 그러나 오늘날 대분열행진 중반의 "탈모 후 묵념" 부분은 비단 독일어뿐만이 아닌 여러 언어로 명령이 하달되며, 이 명령을 받들어 함께 묵념하는 수많은 다양한 인종과 집단들로 구성된 독일 군인들의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자유롭고 다원적인 독일 사회를 보여준다.# 이는 옛 제국 시절 전통의 현대적인 수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2. 구 국방군에 대한 관점과 과거사 청산

제3제국은 연방군의 전통에 포함되지 않는다. 국방군 역시 이 공포정권의 도구로서 제2차 세계대전 도중 벌어진 범죄에 연루되었다. 이는 모든 부대, 군종 및 군사지휘와 분야에 적용된다.
{{{#!folding [ 독일어 원문 펼치기 · 접기 ]
Das Dritte Reich kann keine Tradition in der Bundeswehr begründen. Auch die Wehrmacht, als Instrument dieses Terrorregimes, war in Verbrechen während des Zweiten Weltkriegs verstrickt. Dies gilt für alle Truppenverbände, Teilstreitkräfte, die Militärverwaltung und den Rüstungsbereich.}}}

- 나치 독일과 국방군에 대한 연방군의 공식 입장. 출처는 독일 연방군 공식 홈페이지의 <연방군의 전통(Die Tradition der Bundeswehr)>.
나치 독일과 그 군대인 독일 국방군은 연방군 전통에 있어 가장 쟁점이 되는 시대이다. 오늘날 독일 연방군은 공식적으로 국방군과의 전통적인 연속성을 부정한다. 연방군은 2018년 개정된 전통 규정(Traditionserlass)을 통해 "국방군은 자유민주주의 법치국가의 군대가 전통으로써 수용할 수 없다(Für die Streitkräfte eines demokratischen Rechtsstaates ist die Wehrmacht als Institution nicht traditionswürdig)"고 명시한 바 있다. 다만, 조직으로서의 국방군이 아닌, 당시 벌어졌던 전쟁 범죄와 무관하고 나치 정부에 불복종하며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였던 국방군 군인 개개인에 대해서는 면밀한 역사적 조사를 거쳐 선배 군인으로써 기릴 수 있다고도 하여 가능성 자체는 열어 놓았다. 단순히 '잘 싸우는' 것만으로는 군사 전통으로 기념할 수 없으며 현 독일이 추구하는 가치와 그 행적이 합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2.2.1. 건군 초기와 1960년대까지

▲ 1956년, 독일 연방군의 창설을 보도하는 브리티시 파테. 연방군을 '새로운 국방군(New Wehrmacht)'이라고 소개하고 있으며, 그들이 '신뢰할 수 있는 존재가 되기를' 바라는 논조로 보도를 마무리하고 있다.

다만 연방군의 국방군에 대한 평가가 처음부터 이렇게 엄격했던 것은 아니다. 연방군의 창설에는 수많은 전직 국방군 인사들이 관여하였으며 그들을 통해 두 군대 간의 실질적인 계승이 이루어졌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공산권의 위협이 가시화되자 연방군 창설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게하르트 폰 슈베린을 중심으로 하여 총리에게 국방 관련 자문을 하는 슈베린 위원회가 설치되었고, 10월에는 독일 국방부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암트 블랑크(Amt Blank)가 설치되어 연방군 창설을 준비했다.

이와 관련된 최초의 문헌이자 "독일군 재무장의 대헌장(大憲章)"으로도 불리는 "힘머로트 비망록(Himmeroder Denkschrift)"은 명백히 새로운 국방군의 건설을 목표로 하였다. 이는 1950년 아데나워 총리가 힘머로트 수도원에서 비밀리에 개최한 힘머로더 회의의 결과를 기록한 문서로, 훗날 연방정보국이 되는 겔렌 조직 요원들을 포함한 전직 국방군 장교 15명이 모여 독일군 재건을 논의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훗날 연방군에서 대장이 되는 아돌프 호이징거한스 슈파이델이다. 그 외에도 몬테카시노 전투 등지에서 활약했던 프리돌린 폰 셍거 운트 에테를린 기갑중장, 히틀러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을 명시한 국방군 복무신조를 만든 헤르만 푀르취 보병대장 등이 참여했다. 그들이 형성한 새 독일군의 청사진은 옛 국방군의 그것과 거의 동일했다. 동시에 그들은 국방군친위대 장병들에 대한 모략을 멈추고 그들을 석방할 것을 결의했다.

이후 1955년 연방군이 창설되자 명백히 나치 정권과 유착했던 이들을 제외한 많은 국방군 군인들이 그 수뇌부로 편입된다. 국방군에서 영관급 이상의 계급으로 복무했던 553명의 장교들이 연방군에 입대 신청을 하였고, 심사위원회는 이 중 자그마치 470명을 받아들였다. 창군의 핵심 인원들은 국방군의 두뇌였던 장군참모단의 일원들이 주를 이루었다. 또한 정치학자 데틀레프 발트에 따르면 구 제국군, 그리고 국방군과 마찬가지로 연방군 각 군종 간의 통합적인 참모회의는 존재하지 않았다. 각 군은 개별적으로 설립되었으며 유일한 통솔자인 연방군총감직은 창군 2년차에야 신설되었다. 그마저도 초기에는 통솔 권한이 부재하였기에 휘하 군에 지시를 내리는 것이 불가능했다. 연방군은 내적 지휘 철학을 도입하여 군의 문민통제를 실현할 것을 명시했으나 보수적인 장교단은 그 책임을 유명무실한 연방군총감직의 것으로 돌림으로써 사실상 개혁을 반대했다. 결국 당시의 연방군은 체제, 계획, 구성원 모두가 국방군의 그것을 계승했다.#

이렇듯 아데나워 정권 당시 횡행하던 독일 사회의 집단적인 책임 의식 망각에서 군인들 역시 자유롭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에게 있어 국방군의 역사적 죄과를 인정하는 것은 자신들의 군사적 전문성과 영광을 무너뜨리는 일이었기에, 그들은 누구보다도 국방군의 나치 부역 혐의를 부정하고 연방군의 전통과 잇고자 했다. 소련에 대적한다는 점에서 구 국방군의 임무를 이어받은 것이기도 했다. 상술한 국방군 무오설이 바로 이 맥락에서 등장한 것이다. 1950년대 말부터 시민사회의 나치 청산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1965년 전통 규정(Traditionserlass)이 최초로 도입되었을 때조차도, 연방군의 공식 입장은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가담자들을 영웅으로 평가할지언정 국방군 자체에 대해서는 모호한 표현으로 뭉뚱그리면서 그들을 사실상 포용했다. 쥐트도이체 차이퉁은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연방군이 보수적이고 반동적인 성향을 띄었다고 표현한다.# 당시 "새로운 국방군(Neue Wehrmacht)"이라는 표현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연방군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자주 사용되었다. 연방군이 국방군과 결별을 고하는 데에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2.2.2. 변화의 시작

파일:1280px-General_Ulrich_de_Maizière_-_Generalinspekteur_der_Bundeswehr.jpg
▲ "연방군의 아버지(Vater der Bundeswehr)"라고 평가받는 제4대 연방군총감 울리히 데메지에르(Ulrich de Maizière) 대장. 프랑스계로, 대전기에는 육군 장군참모였으며 육군총사령부의 작전장교로 복무했다. 국방군에서의 최종 계급은 중령이다. 전후 연방군 재건에도 참여했으며 1960년 내적 지휘 학교, 이어 지휘참모대학의 교장직을 역임하며 연방군의 철학적 기틀을 수립했다. 이후 연방군총감직까지 역임하고 대장으로 예편, 2005년에 사망했다.
독일연방공화국의 역사에서 재무장은 복잡한 길이다. 이는 결국 1945년 이전의 과거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적 가치로의 새로운 지향점을 설정하는 문제였다. 이러한 방식으로의 건군은 위험이 없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1955년이나 1960년 당시에는 1969년 이후의 철저한 개혁 정책이 실제로 단행될 지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혁이 없었다면 연방군과 독일연방공화국의 성격이 어떠했을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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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e Wiederbewaffnung steht für einen komplizierten Weg in der Geschichte der Bundesrepublik, schließlich ging es darum, an die Vergangenheit von vor 1945 anzuknüpfen und zugleich eine neue Richtung hin zu demokratisch-freiheitlichen Werten einzuschlagen. Die Aufstellung von Streitkräften war in dieser Form nicht ohne Risiken, da man 1955 oder 1960 nicht voraussehen konnte, dass eine dezidierte Reformpolitik nach 1969 tatsächlich eingeleitet werden würde. Ohne diese Reformen ist das Profil der Bundeswehr und der Bundesrepublik heute nicht zu denken.}}}

- 독일 정치학자 데틀레프 발트(Detlef Bald).#

물론 그렇다고 하여 이 말이 연방군이 나치즘을 추종하였다는 것은 아니다. 나치와 국방군을 분리해서 바라보는 태도가 문제였던 것이다. 독일 군사사연구소의 게하르트 그로스 대령의 저서 <독일군의 신화와 진실>에 따르면, 건군 당시 독일 정부의 목표는 "과거 국방군의 타격력을 갖추되 이념과 정치적인 측면에서 과거 국방군과는 철저히 단절된, 의회의 통제를 받는 군대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로스 대령은 당시 독일의 건군 목표가 양가적이었다고 설명한다. 구조적인 혁신을 통해 민주화된 군대이자, 전술 및 작전적인 측면에서는 과거의 전통을 추구하는 군대였다.

따라서 나치즘은 연합군 군정 당시부터 비판의 대상이었으며 자유민주주의를 기치로 내건 새 독일연방공화국과 제1세계에서는 더더욱 용인될 수 없는 것이었다. 이 미묘한 분리 의식은 부정적으로는 깨끗한 국방군 신화의 탄생을 야기하였을 지 몰라도, 훗날 독일 사회와 연방군이 치열한 과거사 고찰을 통해 나치의 유산을 몰아내는 초석이 되기도 하였다. 나치는 타협의 대상이 아니되, 그 협력자의 범주가 어떻게 되느냐에 대한 문제였다.

이미 아데나워 행정부 초기 군 재건을 비밀리에 논의하던 당시부터, 새 독일 군대를 위해서는 새로운 군사철학이 필요하다는 요구가 대두되었다. 이에 울리히 데메지에르(Ulrich de Maizière) 등이 주도하여 내적 지휘제복을 입은 시민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창시했다. 이 군사 철학은 임무의 이해에 따른 개별 군인의 판단력을 중시한다는 점에서는 기존 독일 임무형지휘의 핵심 속성을 계승하며, 군의 근원을 인간과 시민으로 상정한다는 점에서는 민주평화론에 기반한다. 군인들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명심하고 그 내에서 지휘하며, 정치교육(Politische Bildung)을[6] 통해 장병들 스스로가 이를 체화하여 자발적으로 따르는 것이다. 주권의식을 가진 민주적 시민으로써의 자세와 신념을 갖춤으로써, 군의 정치개입을 방지함과 동시에 자발적이고 강인한 전투 의지를 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7] 이는 지도자 원리에 따른 구 독일 국방군의 무조건적인 복종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이는 연방군이 점차 국방군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준 가장 핵심적인 철학이다. 내적 지휘 교범(Handbuch Innere Führung)이 1957년에 연방군에 도입되었을 때에는 실제로 이를 제대로 이해했던 이들이 많지 않았으나, 시간이 지나며 점차 연방군에 녹아들기 시작하였다.

또한 독일 시민사회의 변화는 군으로 하여금 구 국방군과의 단절에 박차를 가하게 만들었다. 1965년 아돌프 아이히만모사드에 잡혀 목이 달아났으며 아우슈비츠 재판으로 유대인 대학살이 본격적으로 재조명되었다. 얼마 후에는 68 혁명이 시작되며 패러다임이 본격적으로 바뀌기 시작하였으며 1970년대 말부터 신세대 학자들의 과거사 비판이 이루어졌다. 연합군의 문서들 역시 속속 공개되면서 독일인들과 연방군은 국방군이 생산했던 편협한 시각에서 벗어나 다각적으로 과거 역사를 조망할 수 있었다. 시민사회에 하버마스가 있었다면 군 내에서는 현대 독일의 가장 중요한 군사 역사가로 꼽히는 만프레트 메서슈미트가 1970년 연방군 소속 군사사연구소(Militärgeschichtliches Forschungsamt)의 수석 연구원으로 부임하여 <독일국과 제2차 세계대전(Das Deutsche Reich und der Zweite Weltkrieg)> 총서 발간을 진두지휘하며 국방군 신화에 균열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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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5대 총리 헬무트 슈미트.

전통 규정 역시 헬무트 슈미트가 총리로 재직하던 1982년에 최초로 개정되었다. 새 규정은 '과거의 독일 군대의 발전 과정에 어두운 역사가 있었으며(Die Geschichte deutscher Streitkräfte hat sich nicht ohne tiefe Einbrüche entwickelt.)' '국가사회주의 범죄에 군이 연루되었다(In den Nationalsozialismus waren Streitkräfte teils schuldhaft verstrickt)'고 인정하였으며, 불의한 제3제국은 전통의 대상이 될 수 없다(Ein Unrechtsregime, wie das Dritte Reich, kann Tradition nicht begründen.)고 명시하면서 구 국방군과 간접적으로 선을 그었다.

시작일 뿐이었으나, 이 정도의 변화마저도 국방군을 옹호하는 전통적인 입장의 장교단 및 예비역들이 반발하기에는 충분했다. 많은 장교들이 내적 지휘 철학의 도입 초기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이는 10년 가까이 그저 피상적인 구호에 머물렀다. 내적 지휘 철학은 창시자 중 하나인 데메지에르가 독일군 합참의장에 해당하는 연방군총감으로 부임한 후에야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한편 1980년대 말 독일 연방군 협회의 회장직에 오른 예비역 공군소장 위르겐 슈라이버(Jürgen Schreiber)는 만프레트 메서슈미트의 비판적인 연구가 독일군에 대한 중상모략이라고 격렬하게 비난했다.

그러나 그러한 반발은 변화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고무적이기는 했으나 여전히 많은 부분에서 모호하다는 비판을 받은 1982년 전통 규정은 이후 30년 가까이 그대로 유지되었으나, 그 외의 측면에 있어서는 꾸준히 단절이 추진되었다. 사학계의 연구가 진척되면서 국방군의 범죄와 나치 부역이 낱낱히 밝혀지자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체제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연방군의 입장에서 그들을 더는 옹호할 수 없게 되었다. 전통적인 군인의 덕목에 충실하게 복무하여 귀감이 될 만한 이들은 달리 말하자면 범죄 정권의 절멸전쟁에 적극 조력하였다는 것이 되었으므로 내적 지휘와 제복을 입은 시민으로써는 부적절한 사례가 되었다. 국방군 시절을 경험한 이들이 1980년대를 마지막으로 일선에서 은퇴하면서 전후 세대가 완전히 연방군의 수뇌부를 채우기 시작한 것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깨끗한 국방군 신화를 해체하는 데 크게 기여한 사학자인 볼프람 베테는 연방군이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국방군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고 평가한다.

1995년, 국방장관 폴커 뤼헤는 창군 40주년 행사에서 국방군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며 그들이 기관으로써 연방군의 전통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하였다. 건군 50주년을 맞은 2005년에는 콘도르 군단원들에 대한 추모가 중지되었고, 공군 제74전투비행대대에서 베르너 묄더스의 이름이 빠졌다. 그리고 2017년 네오나치 중위 프랑코 A.가 군 내에서 무기를 빼돌려 테러 모의를 하다 체포되는 스캔들이 벌어지자,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국방장관은[8] 전통 규정을 한 차례 개정하였다. 현행 규정이 바로 이것으로, 기관으로써의 독일 국방군은 전통이 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구 국방군의 인물들과 장비, 그리고 상징들은 네오 나치를 비롯한 극우파의 구심점 역할을 하기에 이를 철저하게 뿌리뽑고자 한 것이다. 옛 독일 군사 영웅들의 이름을 딴 병영들 역시 점진적으로 연방군 장병들에게서 따온 이름으로 바뀌고 있으며 군 내에 있는 국방군 유물들 역시 대거 수거되었다. 국방군 시절 작곡된 군가가 여럿 포함되었던 연방군 군가집 <전우들아 노래하자!(Kameraden singt!)> 역시 배포가 중지되어 재검토에 들어갔다.

2.2.3. 오늘날의 공식적인 평가

에르빈 롬멜을 제외한 그 어떤 군사지도자 중에서도 만슈타인만큼 그 작전 수행 능력에 대해 모든 면에서 그토록 많은 찬사를 받은 이는 거의 없다. 그는 1940년 낫질 작전을 입안하여 프랑스의 마지노선을 돌파하고 프랑스의 패배에 쐐기를 박았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1942년 스탈린그라드에 포위된 제6군에 대한 그의 행동은 논쟁적이다. 군 내 저항세력은 만슈타인을 얻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그는 모호한 답변으로 모든 제안들을 흘려넘겼다. 만슈타인 지휘하의 11군이 담당하는 크림 지역에서는 친위대 보안대(SD) 소속 특수작전집단과 국방군 간의 광범위한 협력으로 유대인, 집시, 크림차크 유대인들에 대한 박해나 처형 또는 추방이 이루어졌다. 만슈타인이 서명한 1941년 11월의 군사명령은 "유대교에 대해 가혹하게 갚아 줄 필요"가 있다고 선전하였다. 1945년 이후 만슈타인은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이 열리는 동안과 그 이후에도 회고록을 작성함으로써 '깨끗한 국방군(sauberen Wehrmacht)' 신화와 '군사 지도자 신화(Heerführermythos)'의 숭배 대상이자 대표적인 대상으로 떠올랐다. 연방군 창군 당시 그는 블랑크국(Amt Blank)에 참여하여 초기 전통의 상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것은 1965년에 발표된 최초의 전통 규정(Traditionserlass)이 담고 있는 정신은 아니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만슈타인의 군사적 능력은 주목할 만하나, 그는 현대적인 군인윤리의 모델로써는 적합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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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um ein Heerführer neben Erwin Rommel ist von allen Seiten mit so viel Lob für sein operatives Können bedacht worden wie Manstein. Er gilt als Urheber des Sichelschnitt-Plans, mit dem 1940 der Durchbruch durch die französische Maginotlinie gewagt und die Niederlage Frankreichs besiegelt wurde. Umstritten hingegen war 1942 sein Agieren gegenüber der eingeschlossenen 6. Armee in Stalingrad. Von Seiten des militärischen Widerstands wurden große Anstrengungen gemacht, Manstein zu gewinnen. Der jedoch verschloss sich allen Nachfragen mit sibyllinischen Antworten. In Mansteins Befehlsbereich der 11. Armee kam es auf der Krim zur üblichen Zusammenarbeit der Einsatzgruppen des SS-Sicherheitsdienstes (SD) und der Wehrmacht bei der Verfolgung, Ermordung oder Verschleppung von Juden, Zigeunern und Krimchaken. In einem von Manstein unterzeichneten Armeebefehl vom November 1941 wurde die „Notwendigkeit der harten Sühne am Judentum“ propagiert. Nach 1945 trat Manstein während der Nürnberger Kriegsverbrecherprozesse und später als Memoirenschreiber als Kult- und Leitfigur des Mythos der „sauberen Wehrmacht“ und eines „Heerführermythos“ hervor. Beim Aufbau der Bundeswehr beriet er das Amt Blank und formte das frühe Traditionsbild – wenn auch nicht im Sinne des 1965 vorgelegten ersten Traditionserlasses. Nach den heutigen Maßstäben wird man das operative Talent des Feldmarschalls achten, als beispielgebendes Vorbild eines zeitgemäßen militärischen Berufsethos kann Manstein nicht gelten.}}}

- 대표적인 국방군 장성인 에리히 폰 만슈타인 원수에 대한 현대 독일 연방군의 공식적인 평가. 만슈타인은 전후 서독군 창설에 중요한 조언자로 활약했던 인물이기도 하지만, 현 연방군은 그의 문제적 행적으로 인해 그를 전통에 편입시키지 않고 있다.[9]

연방군이 공식적으로 펴낸 《전통: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며, 우리는 누구인가(Tradition: Woher wir kommen, wohin wir gehen, wer wir sind)》에서 국방군에 대한 연방군의 보다 자세한 입장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이 부분을 저술한 페터 리프(Peter Lieb) 박사는 국방군의 대표적인 범죄들, 가령 친위특무대와의 협력을 통한 홀로코스트 조력 등을 소개한다.

하지만 43페이지의 국방군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 부분에서 그는 국방군이 대량 학살 범죄를 저지른 사실을 긍정하면서도 그들의 범죄가 20세기 초 세계 각지에서 벌어진 대량 학살 범죄보다 더 악랄하지는 않았다는 투로 운을 뗀다. 비교하자면 러시아 내전 당시 백군의 학살이나 2차 대전 당시 소련군포로 학대 및 서방연합군의 전략 폭격 역시 잔인함과 급진성에 있어서는 국방군 못지 않았다는 것이다. 동시에 국방군은 친위대와는 근본적으로 달랐으며 나치 독일의 기관들 중에서는 그나마 덜 폭력적인 편이었고, 서유럽 지역에서는 때로 현지인들과 함께 나치 정부의 침투를 막으려 하기도 했다고도 주장한다.

얼핏 이는 국방군에 대한 적극적인 옹호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리프 박사는 국방군이 여타 독일 기관들보다 덜 악랄한지 아닌지에 대한 여부는 부차적인 문제일 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방군이 나치당이라는 범죄 정권을 위해 싸웠다는 핵심적인 사실은 변하지 않으며 이를 항상 유념해야 한다고도 강조한다. 이 사실만으로도 조직으로서의 독일 국방군은 연방군의 전통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이 거대한 조직 내에 나치즘을 충실히 따른 자들과 그렇지 않고 인간성을 지킨 자들이 공존하므로 이들을 분리해서 바라봐야 한다고 말한다. 1800만명의 독일 국방군 병사들을 모두 범죄자들로 싸잡는 태도는 지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이 서적에서 연방군이 구 국방군에 대하여 매우 조심스러운 접근을 취하고 있으며, 그들의 범죄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여전히 애매모호한 입장을 보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연방군의 이러한 입장에 대한 논란은 후술한다.

2.2.4. 여전한 논란

2.2.4.1. 과거 청산인가 또다른 깨끗한 국방군 신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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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아우구스트도르프에 위치한 롬멜 원수 병영(GFM-Rommel-Kaserne)[10] 정문. 연방 육군 제21전차여단이 사용한다. 독일 역사학계와 녹색당, 그리고 시민사회에서는 국방부에 롬멜 원수 병영을 비롯하여 국방군의 이름을 딴 병영들의 명칭을 개칭해야 한다는 압력을 넣어 왔다.# 2018년에 독일 국방부는 롬멜이 히틀러에 대한 저항자에 가깝다고 판단하여 연방군의 전통에 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렸으며# 본 병영의 명칭 역시 계속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 사학계에서는 이것이 롬멜 신화에 입각한 결정이라는 비판을 가했다.
북부독일방송의 시사 코미디 프로그램인 extra3의 2017년 스케치, <리포트: 연방군의 나치(die Reporter: Nazis bei der Bundeswehr>.

"연방군의 모든 것이 적합(recht)합니다/연방군은 우파적(recht)인 것들로 가득합니다"[11]라는 나래이터의 중의적인 대사에서 알 수 있듯 연방군의 수박 겉핥기식 나치 청산을 비꼬았다.

그러나 2018년의 개정 이후에도 국방군에 대한 입장은 여전히 모호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나치 독일 시절 군인이었던 이들은 인권을 부정한 나치 침략전쟁의 부역자이므로 연방군의 역사에 편입되기 부적합하며, 군인이 아니었던 이들은 군인이 아니기에 연방군의 전통에 편입될 수 없다. 하지만 저항자들을 선배로써 기릴 수 있다는 간단한 조항만으로 저항자와 절멸전쟁 부역자 사이의 아주 미묘한 회색지대에 놓인 국방군 군인들의 역사적 죄과를 가려내어 '충직한 수호자이되 나치의 침략전쟁에 부역 책임이 없는 군인을 과연 찾을 수 있는지'가 비판자들이 던지는 의문이다. "전통: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며 우리는 누구인가"에 실린 페터 리프 박사의 평가 역시 같은 말을 장황하게 늘여서 설명했을 뿐, 같은 문제를 공유한다고도 볼 수 있다.

국방군이 친위대와 함께 나치당의 침략전쟁과 인종말살 정책을 적극 수행한 군사 집단임이 명백하다면, 이는 곧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의 가담자들처럼 나치 정부에 저항한 이들이나 헬무트 슈미트 전 총리와 같이 그들의 사상에 찬동하지 않았던 이들 역시 저항과는 별개로 군인으로서 그 범죄 전쟁에 적극 가담하였다는 말과 같다. 대표적인 저항자인 히틀러 암살미수사건의 가담자들 중에는 방첩국장 빌헬름 카나리스나 북부집단군 제4기갑군의 에리히 회프너와 같이 전장에서의 전쟁범죄 행위가 확인된 이들이 다수 존재한다. 회프너는 친위특무대와 협조하였던 대표적인 인물이며 카나리스 역시 정치장교 명령에 서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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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군 예비역 중위 헬무트 슈미트,[12] 1940년
(출처:헬무트 슈미트 총리 재단)
헬무트 슈미트 총리는 이론의 여지 없이 민주주의자였고 독일연방공화국의 민주주의에 큰 공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용맹하게 복무한 국방군 군인이기도 했죠. 그는 레닌그라드 포위전에도 종군했습니다만 이 일을 주제삼았던 적은 없습니다. 우린 (그때) 그가 무엇을 했고 하지 않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제 말은, 이 사진이 개인의 도덕과 제도적 도덕에 관한 다양한 물음을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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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mut Schmidt, der zweifellos ein Demokrat war mit großen Verdiensten für die Demokratie der Bundesrepublik Deutschland, hat als braver Soldat in der Wehrmacht gedient. Er hat an der Belagerung Leningrads teilgenommen. Er hat das nicht thematisiert. Man weiß nicht, was er gemacht oder nicht gemacht hat. Das heißt, gerade an diesem Foto gab es und gibt es die Möglichkeit, diverse Fragen in Bezug auf die persönliche Ethik und auch die institutionelle Ethik zu stellen.}}}

- 독일 사학자 미하엘 볼프존(Michael Wolffsohn),[13] Deutschlandfunk와의 2018년 인터뷰에서 헬무트 슈미트 전 총리의 국방군 시절 사진에 대해 평하며.#

전후 민주주의 확립과 군의 역사 청산에 기여했던 헬무트 슈미트 역시 아이러니하게도 2차대전 때는 독일 국방군 장교였고, 가장 끔찍한 민간인 피해를 낳았던 전장 중 하나인 레닌그라드 포위전에 참가한 경력도 있다. 그는 이에 대해 별다른 입장을 내놓지 않았으며 그가 전장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는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다. 제복을 입은 시민이라는 내적 지휘 모델의 주창자이자 연방군의 아버지라 불리는 제4대 연방군총감 울리히 데메지에르 역시 대전기에는 브랸스크 일대의 소련군 파르티잔 토벌 작전이자 수많은 민간인 피해자들을 낳았던 집시 남작 작전(Unternehmen Zigeunerbaron)에 동원되었다. 심지어 유대인들을 숨겨 주었던 빌헬름 호젠펠트 대위마저도 대량 학살 정책에 대해 비판했을지언정 나치즘에 대해서는 '차악'으로 여겼다. 사학자 니콜라스 스타가르트가 저술한 <독일인의 전쟁>에 따르면 호젠펠트는 끝까지 애국주의자였고 나치 독일이 정복한 거대한 판도에 대해 자랑스러워했다. 스타가르트는 당대 독일인들 중 호젠펠트 정도까지 생각한 독일인은 거의 없었다고 말한다.

때문에 국방군 관련 논쟁은 프랑코 A 스캔들과 규칙 개정 이후에도 끝나지 않았다. 2017년 올라프 숄츠를 비롯한 사민당원들은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국방장관이 슈미트 총리의 군 복무 사진을 함부르크의 연방군 사관학교에서[14] 내린 것에 대해 강하게 반발했다. 그들은 국방군과의 전통 단절에 큰 공을 세웠던 슈미트가 극우 인사인 것처럼 간주되는 것에 가장 불만을 표했다.# 대표적으로 게르하르트 슈뢰더 내각에서 국방장관을 지냈던 루돌프 샤핑(Rudolf Scharping)은 라이엔 장관의 방침을 마녀 사냥이라 부르며 비판했다.

기민당 역시 연방군의 전통을 세우는 수단으로 국방군을 다루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고, 많은 독일인들은 라이엔 장관의 명령이 국방군에 징집되어 '단순히' 복무했던 조상들에 대한 모욕이라 여겨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이에 대해 라이엔 장관은 이제는 독일 국방군을 기리는 어떠한 상징물도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는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며 정책을 밀어붙였다.# 한편 그러면서도 막상 정말 논란이 되고 있는 에르빈 롬멜 원수의 이름을 딴 병영들의 이름은 바꾸지 않았다. 라이엔 장관과 국방부는 롬멜이 나치에 대한 저항자에 가깝다고 판단하여 병영 명칭을 개칭하지 않았다고 답변했는데, 사학계는 이에 대해 낡아빠진 롬멜 신화라며 비판을 가했다.
2.2.4.2. 전통 단절에 따른 군사적 모델의 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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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사사 및 폭력문화학자 죙케 나이첼의 서적, <독일 전사들(Deutsche Krieger)>.[15] 전통적인 군인 모델로의 회귀를 주장했다. 이에 대해서는 독일 사회와 연방군이 과거의 범죄 때문에 의식적으로 부정하고 있는 군사적 측면에 대해 조명했다는 긍정적인 반응과 함께, 그가 자료를 선택적으로 취하였다는 비판과 군사 영웅화의 위험성을 가볍게 바라본다는 지적이 공존한다. 출판 당시 독일에서 가장 논쟁적인 서적 중 하나였다.
오늘 우리 모두는 국방군 그 자체가 범죄 조직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친위대와의 모든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말이지요. 분명한 것은 그들 중 그 누구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새하얬던 이들은 없었다는 겁니다. 모두 회색이었어요. 데메지에르는 좀 밝은 회색이었고 다른 이들은 어두운 회색이었다 정도뿐이지요. 그리고 우리는 이 회색 색조를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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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ute wissen wir, dass die Wehrmacht, trotz aller Unterschiede zur SS, selbst eine kriminelle Organisation war. Keiner ging aus dem Zweiten Weltkrieg weiß hervor. Es geht um Grautöne: Bei de Maizière ist es ein helles Grau, bei anderen ein dunkles Grau. Und wir sollten diese Grautöne zulassen.}}}

- 죙케 나이첼, 2017년 슈피겔 지와의 인터뷰에서#

연방군이 과거 청산과 올바른 군사전통의 확립이라는 지극히 정치적인 문제에 매몰되어 본연의 임무를 잊어가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 역시 조심스레 대두되고 있다. 군대의 본질적인 속성은 무력집단, 즉 무기를 사용하여 적을 살상하는 국가 유일의 전문가이다. 비판자들의 주장은 나치 시대의 반동으로 인해 군국주의의 요소를 청산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것이 군대의 본질적인 임무를 훼손하지는 않아야 한다는 것이 주된 골자다.

이 주장은 현대 독일의 대표적인 군사사학자 중 하나로 꼽히는 포츠담 대학교의 죙케 나이첼(Sönke Neizel) 교수가 제기하고 있다. 그 역시 국방군의 범죄를 공론화한 인물로써 과거 벌어졌던 전쟁 범죄를 잘 알고 있는 인물이지만,[16] 라이엔 장관이 추진하는 국방군 지우기에 대해서는 그저 역사적 엑소시즘(Historischen Exorzismus)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과거의 역사에서 현대 연방군의 가치에 적합하고 적합하지 않고를 선택적으로 취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17]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군인의 본연의 임무인 죽음과 죽어감에 대해 솔직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된 논지이다. 연방군에게 군인으로써 요구되는 본질적인 능력은 '죽일 수 있는' 능력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는 연방군이 역사전통을 구분하지 못하고 두 개념을 혼용하고 있다고도 지적했다.# 과거의 잘못을 답습하지 않고 현대의 가치에 걸맞는 전통을 수립하는 것은 물론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거 독일군의 죄 때문에 군사적인 모든 것이 거부당하고, 연방군이 전투 프로로써의 자신감과 결속력을 잃어버리는 것만큼은 지양해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결국 나이첼은 전통과 역사를 구분하고 국방군의 실용적이고 전사적인 장인정신만큼은 본받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국방군의 바로 그 전문성만을 바라보다가는 그들이 누구를 위하여, 어떠한 전쟁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군사적 전문성을 발휘하여 무슨 결과를 낳았는지를 간과할 수 있다는 비판이 만만찮게 제기되고 있다. 정치와 군사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며 따라서 국방군의 군사적 전문성을 전통으로 편입한다는 것은 단지 군사적인 측면에의 전통 확립뿐만이 아니라 범죄 정권의 군사적 성과를 칭송하는 방향으로 악용될 수도 있기에 매우 위험하다. 가령 극우 정당인 AfD 소속 정치인인 알렉산더 가울란트는 2017년에 "프랑스인들이 그들의 황제를, 영국인들이 전시총리 처칠을 존경한다면 우리 독일인들은 국방군이 이뤄낸 전과에 대해 자랑스러워할 필요가 있다"고 발언하여 논란에 휩싸인 바 있다.

2018년 차이트(Zeit) 지에 실린 죙케 나이첼과 사학자 한네스 헤어(Hannes Heer)간의 전통에 관한 논쟁은 군사 전통에 대한 이러한 두 가지 시각의 충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헤어는 이제껏 국방군 전시회[18] 등의 과거사 및 정치 교육이 연방군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바 없다고 지적하며 사회 및 국가가 요구하는 윤리적 규칙(ethische Regeln)을 수립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이러한 가치의 틀을 먼저 정한 다음 그 안에서 군인의 전투 동기를 부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방군은 전통이 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죄까지 외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반면 나이첼은 연방군 병사들에게 과도한 정치 교육은 불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국방군의 범죄에만 집중하면 군인들이 필요로 하는 것에 대해 놓치게 된다고 지적했다. 프랑코 A. 사건과 같은 우익 극단주의자들의 발호는 일반적인 사례가 아니며 군인은 군인으로서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둘 간의 논쟁은 결국 팽팽하게 평행선을 달렸고, 연방군과 정부과 과거사와 아프간전이나 말리 내전 파병에 대해 말을 아끼는 것을 비판하며 마무리되었다.

2.2.5. 결론

결국 국방군에 대한 연방군의 역사적 평가는 일견 명확한 것처럼 보이나 파고들어 보면 속사정이 매우 복잡하다. 해체와 재창설 과정과 건군 당시부터 채택된 내적 지휘 및 제복을 입은 시민 이론 덕에 연방군은 구 국방군과의 단절을 추진하고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가치를 추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국가의 방위군이라는 속성 상 실질적 연속성 역시 분명하게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며, 극우 전체주의의 졸개였던 국방군이 저지른 죄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수호자라는 연방군에게 있어 지나치게 무겁고 부적절하다. 동시에 범죄가 너무나도 광범위하게 저질러진 데다 저항자와 가해자도 복잡하게 뒤섞여 있어 쉽게 판단을 내리기도 힘들다. 이 와중에 구 독일 군대가 남긴 유무형의 긍정적 유산 역시 분명히 남아 있으나, 국방군이 남긴 너무도 거대한 범죄 때문에 이는 쉽사리 취하기 힘든 독이 든 성배가 되었다.

이처럼 연방군이 그들의 역사와 군사 전통을 어떻게 바라볼 지에 대한 지극히 독일적인 딜레마는 나치 독일이 패망한 지 80년이 되어가는 오늘날에도 현재진행형이다.#

2.3. 구 국가인민군에 대한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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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 연방군 군복을 새로 받아 입고 있는 국가인민군 제1포병연대 장교.
독일 연방군은 흡수한 옛 적성세력인 국가인민군과의 연속성 역시 부정한다. 연방군은 2018년 개정한 전통 규정(Traditionserlass)에서[19] 국가인민군이 "사회주의 독재의 주요 무력집단(Hauptwaffenträger einer sozialistischen Diktatur)" 이었으므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따르는 현 독일연방공화국의 군대의 전통으로써 부적합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다만 이는 전체 조직의 경우이다. 연방군은 면밀한 역사적 조사를 거쳐 개별 인민군 군인의 행적이 현 독일군이 추구하는 가치에 적합하다고 파악될 경우에 한해 선배 군인으로써 기릴 수 있다고도 명시했다. 동독 사회주의통일당 일당독재정권에 불복종하거나, 독일 재통일 당시 기여한 경우가 해당된다.#

구 인민군은 서독과 적이었으며, 베를린 장벽 일대에서 동독을 탈출하는 이들을 총살하는 등 인권 유린을 자행한 바 있으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연방군이 인민군을 전통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그러나 일부는 새 전통규정이 끔찍한 전쟁 범죄를 저지른 바 있던 독일 국방군과 어쨌건 전쟁은 벌이지 않은 데다 통일 당시에도 반발하지 않고 조용히 해체된 국가인민군을 동등하게 취급해버림으로써 국방군의 역사적 죄과를 희석해버렸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위에도 언급된 미하엘 볼프존 교수는 인민군이 연방군의 전통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고 말하면서도, 전통 규정이 국방군과 인민군을 대하는 공식이 너무 똑같다는 것을 지적했다. 전직 인민군 장병들이 가입한 전우회의 일종인 "국가인민군 및 독일민주공화국 국경수비대 전통 보존 협회" 회장인 게르하르트 마테스(Gerhard Matthes) 역시 인민군이 연방군의 전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긍정하나, 그래도 조금 다르게 자신들을 대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며 섭섭함을 표하기도 했다.#

3. 시사점

독일 연방군의 전통에 대한 독일 사회의 치열한 논쟁은 어두운 과거를 대하는 방식과 민주적 질서 속에서의 군의 위치와 역할에 대해 깊게 고찰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한국 시민사회 일각에서는 독일군의 사례를 대한민국 국군의 개혁 모델로 보고 있기도 하다.# 물론 국군 역시 이미 육군사관학교 군사심리학과 교수진들과 국방정신전력원 주도로 내적 지휘와 제복을 입은 시민 원칙을 연구하고 있으나## 실제 적용에 있어서는 매우 피상적인 수준 또는 병영생활 개선의 측면에서만 머무르고 있다.

한편 국가인민군에 대한 연방군의 청산 과정은 남한 주도의 평화통일 후 북한군을 어떻게 다룰지에 대한 하나의 예시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한국에서도 시사점을 갖는다. 인민군을 전통으로 인정하지 않는 독일의 사례는 통일 후 한국군이 북한군의 법통을 거부하는 근거 중 하나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북한군은 평화를 유지했던 동독군과 달리 대한민국을 상대로 침략전쟁을 벌여 수많은 이들을 살상한 바 있기에, 실제 북한군에 대한 역사 청산은 독일의 사례보다 철저하게 진행될 가능성이 더 높다.

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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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에렌브라이트슈타인 요새는 지금은 해체된 연방 육군 제3군단 사령부와 인접한다. 동시에 과거 그나이제나우클라우제비츠, 몰트케 원수와 힌덴부르크 등 주요 독일 지휘관들이 업무를 보았던 상징성 역시 가지고 있어 부지로 채택되었다.[2] 나폴레옹 전쟁 당시 샤른호르스트 중장과 그나이제나우 원수, 하르덴베르크 백작 등의 프로이센 군사개혁가들을 의미한다.[3] 1848년 혁명 당시 자유주의 혁명가들을 의미한다.[4] 1차 대전의 벨기에 침공 당시 리에주 요새 함락에 일익을 담당했다. 1915년 사망.[5] 보통은 국방부 청사인 벤틀러블록 건물 뒷편의 연병장에서 치른다.[6] '짓다'는 뜻의 동사 bilden의 명사형인 빌둥(Bildung)이란 흔히 '교육'이나 '교양'으로 번역된다. 하지만 이는 그렇게 일대일로 번역할 수는 없는 지극히 독일적인 단어이다. 풀어보자면 개인의 소질에 적합한 무언가, 즉 철학 등을 체화하여 자신에게 걸맞는 방향으로의 내적인 생장을 이룬다는 보다 깊은 의미를 내포한다. 즉 전인 교육에 보다 가깝다. 빌둥은 엘리트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고는 있으나 독일 바이마르 고전주의 시대(1772-1805)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이래로 지금까지도 독일 교육학에 핵심적인 개념으로 기능한다. 독문학에도 18세기 말의 '성장/교양소설(Bildungsroman)'로 큰 영향을 미쳤다. 빌둥의 의미를 현재와 같이 정립한 인물 중 하나인 괴테의 소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Wilhelm Meisters Lehrjahre)> 등이 대표적이다.#[7] 민주평화론에 따르면 민주주의 국가는 권위주의 국가에 비해 더 평화를 추구하나, 전쟁이 벌어질 경우 국민들의 일치된 의지와 자발적인 참여를 이끌어내기에 훨씬 더 높은 승률을 보인다고 해석한다.[8] 메르켈 내각에서 국방장관직을 역임했다.[9] 출처는 《전통: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며, 우리는 누구인가(Tradition: Woher wir kommen, wohin wir gehen, wer wir sind)》 25p.[10] 독일 해군에는 롬멜의 이름을 딴 구축함도 있었으나 현재는 퇴역했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11] Bei der Bundeswehr geht alles mit rechten Dingen zu.[12] 2차 대전 당시 그는 41년부터 42년까지 6개월간 소련 전선에서, 그리고 대부분의 기간 동안 독일 국내에서 방공포병 장교로 복무했다.[13] 영국령 팔레스타인 출신 유대계 독일인으로, 독일 현대사가 전공이다. 1981년부터 2012년까지 오랜 기간 동안 뮌헨 독일 연방군 사관학교에서 독일 현대사를 강의한 바 있다. 유대계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 나치 독일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지만 기본적으로는 정치적으로 보수 우파에 속한다. 가령 그는 현대 독일 내 반유대주의가 지속되는 원인으로 아랍인 이민자들을 꼽았고, 테러리스트들을 대할 때에는 고문을 포함한 비상식적 방법을 동원해도 된다고 주장하여 독일 좌파 측의 비판을 받은 바 있다.[14] 독일의 2대 군사학교 중 하나인 함부르크 독일 연방군 대학교의 공식 명칭은 헬무트 슈미트 대학교이다. 빌리 브란트 정부 당시 국방장관직을 맡고 있던 슈미트 총리가 1972년에 설립하여 그의 이름을 땄다.[15] 부제는 '독일 제국부터 베를린 공화국까지의 군사사(Vom Kaiserreich zur Berliner Republik - eine Militärgeschichte)' 이다.[16] 죙케 나이첼은 2011년에 하랄트 벨처와 함께 대전기 국방군 병사들의 심리에 대해 공동으로 연구한 <나치의 병사들(Soldaten)>을 저술한 바 있다. 이 책은 깨끗한 국방군 신화를 결정적으로 무너뜨린 서적으로 손꼽힌다. 2015년에 국내에도 번역되었다.[17] 가령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은 대표적인 의인이지만 폴란드인들을 열등하게 바라봤다는 점에서는 결격사유가 있다. 그 이전 시대의 그나이제나우 역시 프랑스인들을 증오했다는 점에서는 연방군의 가치에 반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막상 현 연방군은 그를 기리고 있다.[18] Wehrmachtsausstellung. 1995년 함부르크사회조사연구소 주도로 시작되어 독일 전국을 순회한 전시회로, 국방군의 전쟁범죄를 조망하여 독일 사회에 만연했던 깨끗한 국방군 신화를 박살냈다. 한네스 헤어가 바로 이 전시회 주최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 중 하나다.[19] 기존의 마지막 개정은 냉전 말기인 1982년이었다. 따라서 통일 이후 30년 가까이 지난 오늘날에 적합하지 않는 부분이 상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