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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안드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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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가톨릭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金大建
파일:fatherkimandrew.jpg
김대건 신부의 성화[1]
본명 김대건()
아명 김재복()
보명(譜名) 지식()
출생 1821년 8월 21일
충청도 면천군 범서면 송산리
(現 충청남도 당진시 우강면 솔뫼로 132, 솔뫼성지)[2]
사망 1846년 9월 16일 (향년 25세)
한성부 서부 용산방 새남터
(現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촌로 80-8, 새남터성지)
국적 파일:조선 어기.svg 조선
본관 김해 김씨[3]
종교 가톨릭
사인 참수형
직업 사제(1845년 사제수품)
세례명 안드레아
성인명 성 김대건 안드레아
(Sanctus Andreas Kim Taegŏn)[4]
시복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
시성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5]
축일 7월 5일[6], 9월 20일[7]
수호 한국 성직자
파일:external/img.seoul.co.kr/SSI_20080604171518_V.jpg
김대건 신부 흉상

1. 개요2. 생애3. 기타4. 유골 판매 논란5.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김대건은 한국 최초의 가톨릭 사제(신부)[8]이자 마찬가지로 한국 그리스도교 최초의 성직자로, 세례명은 안드레아다.

피에르 모방 신부의 천거로 마카오에서 유학하며 신학을 공부해 사제로 서품되고 귀국하였으나, 단 1년밖에 사목생활을 하지 못하고 붙잡혀 군난을 받고 1846년(헌종 12), 병오박해로 25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약 80년의 세월이 흐른 1925년에 동료 순교자 78명과 함께 시복되었고, 그로부터 다시 59년의 세월이 흐른 1984년, 한국의 동료 순교자 102명과 함께 시성됐다.

2. 생애

임해군광해군 형제의 외조부인 해녕부원군 김희철[9]의 동생 김희현의 9대손이다. 집안 대대로 가톨릭 집안인데 그의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신앙을 이어왔고 증조할아버지(김진후), 큰할아버지(김택현), 아버지(김제준)가 순교했다. 그의 증조할아버지인 김진후도 마찬가지로 세례명을 받았는데 '비오'. 아버지 김제준은 이냐시오이다. 충청도 솔뫼[10](지금의 충청남도 당진시)에서 태어났으나 출생 몇 년 만에 가족이 천주교 박해를 피해 경기도 안성시미리내 성지 인근 은이공소)으로 이주하여 그 곳에서 성장하였다.

1836년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에서 온 선교사피에르 모방 신부가 은이공소에 왔을 때에 세례성사를 받았다. 모방 신부는 선교지의 주민들을 신학생으로 선발하여 교육하고 성직서품을 주는 파리외방전교회의 전통에 따라 신학생 셋을 선발했다. 당시 선발 기준은 1. 세속화되지 않은 16세 미만, 2. 부모가 가톨릭 신자인터라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배운 사람일 것, 3. 당사자가 성직자가 되려는 뜻이 있어야 함이었다. 선발된 사람은 조선 가톨릭교회의 사정을 이해하는 정하상 바오로의 도움을 받았다. 최양업 토마스, 김대건 안드레아, 최방제 프란치스코 신학생은 부친과 함께 모방 신부가 숙식하던 정하상 바오로 댁에 도착했으며, 이 중 김대건은 두 신학생보다 6개월 늦게 한문라틴어를 배웠다.

1834년에 입국하여 활동한 중국인 유방제 파치피코 신부[11]와 함께 중국과 조선의 국경을 출발했다. 중국인 안내원들이 옆에서 돌보았고 1837년 6월 마카오에 도착했는데 마카오는 명나라 시대부터 포르투갈의 영구 임대 영지였기 때문이다. 중국 마카오까지 가서 비밀리에 사제 수업을 받았는데[12], 마카오에서 아편 문제로 인해 대내 정세가 혼란해지자 필리핀으로 피신해 사제 수업을 이어나가기도 했다.[13]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프랑스어, 라틴어, 신학, 서양 철학 등을 가르쳤으며 신학생들은 낮에는 공부하고 저녁에는 산책하면서 견문을 넓혔다. 그러나 세 사람 중 최방제 신학생은 성실히 공부하다 1837년 11월에 16세의 어린 나이에 위열으로 죽고 말았다. 1839년에는 기해박해로 자신의 부친 김제준 이냐시오, 은사 피에르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 등이 순교하는 슬픔을 겪었다. 당시 순교한 이들 중에는 신학교 동기생이자 김대건에 이어 2번째 조선인 사제가 되는 최양업의 부모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이성례 마리아도 있었다.

그럼에도 신학 공부에 매진하여 마침내 1845년 중국 상하이 김가항 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14] 최초의 조선인 천주교 사제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김대건은 나이 15세에 달아나 광동(廣東)에 들어가서 양교(洋敎)를 배우고, 계묘년(1843년)에 현석문(玄錫文)등과 결탁하여 몰래 돌아와 도하(都下)에서 교주(敎主)가 되었다. 이 해 봄에 해서(海西)에 가서 고기잡이하는 당선(唐船)[15]을 만나 광동에 있는 양한(洋漢)[16]에게 글을 부치려 하다가 그 지방 사람에게 잡혔는데, 처음에는 중국 사람이라 하였으나, 마침내 그 본말(本末)을 사실대로 고하였다.
― 《헌종실록》 13년

김대건은 순교한 앵베르 주교의 후임으로 제3대 조선대목구장에 임명된 페레올 주교와 함께 상하이에서 라파엘 호를 타고 충청남도 강경을 거쳐[17] 입국했으며 입국 후에는 은이공소를 중심으로 미사와 고해성사 집전 등을 수행하였다. 페레올 주교는 김대건 신부에게 선교사들이 입국할 수 있는 길을 개척할 것을 지시했다.[18]

김대건 신부는 중국 어선들이 조기잡이를 위해 조선 해안에 온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1846년 6월 5일 선교사 입국로 개척을 위한 조선 지도[19]와 편지들을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에게 보내려 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그만 발각되었는데 해주목에 위치한 황해감영의 조사로 천주교 신부라는 사실이 밝혀져 순위도에서 체포된다.

체포된 김대건 신부의 죄목은 '혹세무민'과 '청나라 밀입국' 혐의를 씌웠고 최종적으로는 '천주교를 믿는다'는 죄명으로 사형을 선고받는다. 투옥된 김대건은 관원으로부터 "당신이 천주교인이요?"라는 질문을 받았고[20] 이에 당당히 "그렇소. 나는 천주교인이오"라고 답했는데 그 대가로 가혹한 취조와 고문을 겪어야 했다.
이 말하기를,
"김대건(金大建)의 일은 어떻게 처치할 것인가?"
하자, 권돈인이 말하기를,
"김대건의 일은 한 시각이라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사교(邪敎)에 의탁하여 인심을 속여 현혹하였으니, 그 한 짓을 밝혀 보면 오로지 의혹하여 현혹시키고 선동하여 어지럽히려는 계책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사술뿐만 아니라 그는 본래 조선인으로서 본국을 배반하여 다른 나라 지경을 범하였고, 스스로 사학(邪學)을 칭하였으며, 그가 말한 것은 마치 공동(恐動)하는 것이 있는 듯하니, 생각하면 모르는 사이에 뼈가 오싹하고 쓸개가 흔들립니다. 이를 안법(按法)하여 주벌(誅罰)하지 않으면 구실을 찾는 단서가 되기에 알맞고, 또 약함을 보이는 것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 《헌종실록

한편 같은 해에 프랑스 해군의 장 바티스트 세실 제독은 프랑스 군함 3척을 이끌고 충청도 외연도 앞바다에 나타나 1839년 기해박해 때 프랑스 선교사들이 처형된 사건에 항의하고 통상을 요구하는 서신을 전달했는데, 조선 정부는 김대건 신부를 통하여 프랑스와의 외교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김대건은 프랑스어(신학수업인 라틴어 공부만 하도록 해야 한다는 메스트르 신부의 의견를 수렴한 파리외방전교회에서 김대건 신학생의 프랑스어 학습을 중단하게 함), 라틴어를 배움으로써 서양언어를 배웠고, 이는 그가 서양을 이해하는 지식인임을 뜻한다.[21] 즉 국가적으로도 굉장히 쓸모있는 인재였던 것이다.[22] 김대건 신부가 조정 관리들 앞에서 즉석에서 깃털펜을 만들어 가늘고 꼬부랑대는 서양 글자 필기체를 능숙하게 써 보이자[23] 조정 관리들이 놀라서 마술보듯 신기하게 보았다는 일화가 있다. 당시 조선 관리들 대부분은 철펜이나 깃털펜의 존재 자체를 몰랐기 때문에 서양인들은 으로 그 가늘고 꼬부랑거리는 서양 글자를 쓰는 능력자들의 집합체인 줄 알았다고 한다. 당시 조선에서는 훌륭한 서예 능력은 곧 인신 수양의 결과이자 선비로서의 자질이며 업무에 필요한 핵심 능력이었으니 그 가늘고 조그만 서양 글자를 붓으로 쓴다고 생각했다면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조선 조정의 몇몇 대신들도 그의 능력이 너무나도 아깝다고 여겨 "천주교만 버리면 살려줄 뿐 아니라 벼슬도 내리고 후한 보상을 하겠다"면서 설득해 보았지만 김대건은 강력히 거부했다. 다만 배교는 거부해도 조정에서 프랑스와의 협상을 요청해 오면 그 일은 협조할 생각이었는데, 천주교 사제 신분으로 조선 정부를 대신하여 프랑스와 협상을 좋게 이끌어 내는데 성공만 한다면, 천주교 공인까지는 몰라도 천주교의 이미지가 올라갈 건 확실하니 김대건 신부로서도 해볼만한 일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프랑스 함대가 자신들의 입장이 담긴 문서만을 일방적으로 전달하고 떠나면서 이런 기대는 물거품이 되었다. 조선 조정은 어쩔 수 없었는지 그에게 배교를 다시 권했으나, 김대건은 일언지하에 거부했다. 결국 사형 판결이 내려졌고, 1846년 김대건 신부의 순교 이후 강화도 조약 체결 전까지 조선은 통상수교거부정책을 강하게 추진한다. 김대건 신부는 새남터 형장에서 다른 신자들처럼 참수를 당하며 순교하였는데, 이 때 편안한 자세로 형을 받아들였다. 최초의 조선인 천주교 사제로서 그가 소명을 수행할 수 있었던 시간은 불과 13개월이었다.
나의 마지막 시간이 다다랐으니 잘 들으시오. 내가 외국인과 연락한 것은 나의 종교를 위해서이고 나의 천주를 위해서입니다. 이제 내가 죽는 것은 그분을 위해서입니다. 나를 위해 영원한 생명이 바야흐로 시작되려 합니다. 여러분도 사후에 행복하려면 천주를 믿으시오.
―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순교 직전

본래 사형을 받은 죄수는 통상 4일 뒤에 연고자가 시신을 찾아 가는 것이 관례였으나 김대건 신부의 경우는 참수된 자리에 시신을 파묻고 경비를 두어 지키게 했다. 당시 17세의 소년 이민식 빈첸시오는 파수 군졸의 눈을 피해 김대건 신부 순교 40일이 지난 후에 시신을 한강 새남터 백사장에서 빼내는데 성공했다. 그리고는 시신을 안거나 업으며 험한 산길로 밤에만 걸어서 닷새 만에 자신의 고향 선산이 있는 지금의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에 도착하여 무사히 안장시킬 수 있었는데[24] 이 곳이 바로 오늘날 미리내 성지이다. 1857년 교황 비오 9세가경자로 선포한 것을 시작으로 1925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 때문에 그의 이름 전체를 다시 세례명으로 쓸 수 있는데 이 경우 본명인 '대건'과 세례명인 '안드레아'를 모두 합쳐 세례명으로 쓰기 때문에 홍길동이란 사람이 이 이름으로 세례성사를 받으면 교적홍길동 대건 안드레아라는 식으로 올라가게 된다. 이것은 본명을 갖고 있는 한국 출신 성인의 경우에는 모두 마찬가지다.

파일:external/serony.com/Saint-Andrea-3.png

참수된 후 신자들이 수습한 김대건 신부의 두개골으로 방부 처리한 후 보존되어 있었기 때문에 한국 천주교의 의뢰로 한국의 법의학자들이 이 두개골의 측정치를 이용하여 김대건의 생전 모습을 3번에 걸쳐 복원하였는데 최종적으로 복원된 김대건의 얼굴은 흔히 알려진 초상화와 마찬가지로 갸름한 얼굴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김대건 신부의 유해는 미리내 성지에 안장되어 있으며 경당 바로 밑에 묘소가 조성되어 있다. 김대건 신부의 아래 턱뼈는 미리내 성지 내의 조그만 성당인 성 요셉 성당 제단 아래에 모셔져 있으며 치아는 절두산 성지 순교기념관에 분리안치, 기타 여러 뼛조각들도 성유물로 전 세계에 산재되어 있는데, 가톨릭대 성신교정 대성당 및 이천시 어농성지 성당에도 김대건 신부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2021년에는 탄생 200주년을 맞아 일부 유해를 부르키나파소에 안치한다.#

3. 기타

4. 유골 판매 논란

2022년 3월 26일, 김대건 신부의 척추뼈가 담긴 함을 1천만 원에 판매한다는 글이 번개장터에 올라와 교계가 발칵 뒤집힌 적이 있었다. 낚시글 수준도 아닌 게, 상품 사진을 본 가톨릭계에서도 '유해함 형태를 갖춘 것은 확실'하다고 할 정도였다.#

2022년 6월 8일,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김대건 신부의 유해 관리 부실 논란과 관련해 공식 사과했다. 이어 김대건 신부의 유해가 교회 기관 외에도 사제와 수녀, 신자 등 개인에게 나눠져 유해 분배와 관리에 논란이 있다는 연합뉴스 보도와 관련해 "무분별하게 분배된 것이 아니라 교회 책임자들이 관례와 전통에 맞게 분배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5. 관련 문서


[1] 왼쪽의 한복 입은 초상화는 김대건 신부가 정하상 바오로 외 101명의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시성된 1980년대부터 사용되고 있으며, 한국 최초의 천주교 사제로서 김대건 신부가 갖는 민족적 대표성을 강조한다. 오른쪽의 초상화는 가톨릭 성직자의 정복인 수단을 입고 비레타를 갖추어 쓴 모습을 그린 1971년작 성화이며, 그가 시성되기 전부터 '복자 김대건 안드레아'의 성화로서 사용되었다. 시성 당시에는 한국인으로서의 민족성을 강조하여 한동안 왼쪽 성화가 많이 쓰였으나, 오늘날에는 성직자로서의 정체성이 강조된 오른쪽 성화도 다시 많이 쓰이고 있다.[2] 출생 후 몇 년 뒤에 경기도 용인시로 이주했기 때문에 헌종실록에는 용인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다.[3] 안경공파 13세손. 증조부 김진후(金震厚), 조부 김택현(金澤鉉), 아버지 김제준(金濟俊)이 각각 경파(京派) 16세손, 17세손, 18세손 항렬자를 사용한다. 그리고 전술한 보명(譜名)인 김지식(金芝植)의 식(植) 자가 경파 19세손 항렬자다. 2000년 증조부 김진후를 1대 파조(派祖)로 하는 천주교성인공파가 분파되었으므로 현재는 천주교성인공파 4세손이 된다.[4] 마치 '김태곤'으로 잘못 쓴 것으로 보이나, 과거 한국어의 로마자 표기 방법으로 널리 쓰인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을 따른 것이다. 2000년 이후 국내에서는 새로운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이 공식화되었으나, 이미 굳어진 성인명의 정식 표기는 바뀌지 않았다.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은 여전히 학술적인 상황에서 널리 쓰이기도 한다.) 영문 위키백과 표제도 'Andrew Kim Taegon'이며 타언어 또한 대개 Taegon 내지는 Tae-gon으로 표기한다. 다만 현행 로마자 표기법을 따른 Dae(-)geon 등의 여러 표기가 국내외에서 혼용되기도 한다.[5] 김대건 안드레아, 정하상 바오로와 101위 동료 순교자 시성.[6]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신심 미사를 거행할 수 있는 날.[7]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8] 한국 천주교 사제 인명록에 등재된 수품 번호에서도 당연히 1번을 받았으므로 대한민국에서도 최초의 사제로 인정된다.[9] 안경공 김영정의 증손이다. 인조반정 이후 해녕부원군 작위를 추탈당했다.[10] 김대건 신부 생가 일원은 현재 성지로 조성되어 있다. 2014년에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때,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 성지를 순례하고 '젊은이와의 대화' 행사를 진행했다.[11] 본명 여항덕. 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보다 먼저 조선에 들어와 선교에 헌신적으로 임했지만, 외국인 선교사들과 갈등이 심했을 뿐만 아니라 서양인 선교사들의 존재가 조선 교회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자의적인 판단으로 주교의 입국을 방해했다는 이유와 서울에만 머무르며 사리사욕을 챙겼다는 괘씸죄로 주교대리 모방 신부에 의해 모든 성무집행이 정지되었고(#), 결국 중국 고향 가는 길에 세 신학생을 데리고 마카오로 떠나게 된다.[12] 김대건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개명한 것이다.[13] 현재 필리핀 마닐라 광역권 교외에 속한 롤롬보이에 김대건 신부를 기념하는 성지와 성당이 건립돼 있고, 필리핀에 파견된 한국인 수녀들이 관리하고 있다.[14] 사제 서품식이 열렸던 김가항 성당은 2010년대까지 남아있다가 상하이 현지의 도심 개발 과정에서 철거되었고, 일부 자재를 들여와 천주교 수원교구 은이성지에서 복원되었다.[15] 중국 배[16] 중국 광동성 아오먼 또는 마카오에 위치했던(1847년 홍콩으로 이전)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을 말함.[17] 처음으로 한국 땅에 상륙한 곳 인근에 나바위 성당이 있다. 주소지는 전라북도 익산시지만 강경역과 멀지 않다.[18] 페레올 주교는 이후에도 조선에서 사목하다가 입국 8년 만인 1853년 과로로 선종했다. 그의 유해는 "순교자 곁에 묻히고 싶다"는 생전 고인의 뜻에 따라안성미리내 성지의 김대건 신부 묘지 옆에 나란히 안장되었다.[19] 해당 지도는 여기서 열람 가능하다. 잘 보면 당시 조선과 청나라가 영유권을 두고 분쟁을 벌인 간도도 표시되어 있다.[20] 이 질문은 김대건 신부의 탄생 200주년인 2021년 희년을 맞아 한국천주교회의 연중 표어로 채택되었다.[21] 조선은 중기부터 대외 관계가 매우 폐쇄적이었기에 당시에 조선 역관들이 할 수 있었던 외국어라고는 중국어(한학), 일본어(왜학), 만주어(여진학), 몽골어(몽학) 이 4개 언어밖에 없었으며 라틴어는 접해본 사람조차 없었다. (그나마도 후술할 문순득이 약간이나마 스페인어를 알았다.) 과거 시험에서도 서양어 역관은 개항을 하고 과거 제도가 폐지되기 전까지 단 한번도 뽑은 적이 없다.[22] 실제로 중인이었던 문순득이 스페인어와 필리핀어를 좀 할 줄 안다고 무려 종2품 벼슬을 하사 받았다.[23] 원래는 다른 신부에게서 받은 편지를 김대건 신부 자신이 쓴 것으로 진술하는 과정에서 "한 사람이 여러 모양으로 글씨를 쓰는 것은, 탄성이 좋은 금속펜을 쓰는 서양에서는 어렵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에 심문하던 관리가 "철필(금속펜)이 없으니 이것으로 써서 증명해 보일 수는 없느냐"라며 깃털을 건네주자, 김대건 신부는 깃털 끝을 다양한 모양으로 깎아서 다양한 글씨체로 서양 글씨를 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24] 김대건의 시신을 수습해 안장한 이민식(세례명 빈첸시오, 1829~1921)은 이후 92세까지 장수했다. 그 결과 1886년(조불수호통상조약) 57세의 나이로 조선에서 천주교 신앙의 자유가 실현되는 기쁨을 경험했지만 한편으로는 이후 벌어지는 국권 침탈 등의 불행한 역사도 함께 지켜봐야 했다. 그의 유해도 미리내 성지에 묻혔다.[25] 바티칸은 이번 김대건 신부의 성상 설치를 시작으로, 세계 각국을 대표하는 비서양권 성인/순교자들의 성상 설치를 확대하여 세계 보편 교회로서 천주교의 면모를 강조하겠다는 방침이다.[26] 김대건 신부의 성상을 비서양권 성인/순교자들 중에서 가장 먼저 설치한 이유 또한 축복식에서 설명했는데 당시 조선이라는 가톨릭과는 전혀 관계가 없고 선교를 위하여 방문한 선교사도 없던 곳에서 자발적으로 신앙이 꽃핀 기적이 행해진 곳에서 등장한 첫 번째 성직자임을 명시하며 수도회의 창설자가 아니지만 그들보다 어려운 고난을 이겨내고 순직하여 하느님의 종이된 인물이라 설명했다.[27] 당시에는 본명 박형재로 활동.[28] #[29] 다만 대전교구는 해외 파견 3곳을 포함하고 있다.[30] 스테인드글래스에 "A.Kim"(안드레아 김)으로 새겨져 있다. 곁에 적힌 "Paul Miki"는 앞서 16세기 일본에서 순교한 26위 순교자들의 일원인 바오로 미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