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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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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
4·19 革命 | April Revolution
[1]
파일:attachment/f0020275_4af4c6d42e8b7.jpg
4월 19일경무대로 향하는 시위대.
사진이 촬영된 지점은 현재의 서울광장 인근[2]
파일:external/pds16.egloos.com/f0020275_4b002cb180049.jpg
철거되는 이승만 대통령 동상[3]
날짜
1960년 3월 15일[4] ~ 1960년 4월 26일
장소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대한민국|]] 전역
원인 이승만 정권의 불법적인 장기 집권 및 독재정치의 도전으로인한 [5]와 탄압
3.15 부정선거
김주열 열사의 사망
정치깡패를 동원한 이승만 정부고려대학교 4.18 학생 시위 진압
목적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시위 당사자 대한민국 국민
민주당
자유당 정권[6]
내무부 치안국
주요 인물 이승만 대통령
이기붕 국회의장
홍진기 내무장관
장면 부통령
윤보선 민의원 의원
참여 인원 10만 명 이상
사상자 사망 186명[7]
부상 1,500여 명
결과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및 하와이 망명
이기붕 암살
허정 과도내각 출범
대한민국 제2공화국 수립
장면 내각 출범

1. 개요2. 배경: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2.1. 언론의 영향력2.2. 높은 교육 수준2.3. 도시화와 대중매체의 보급2.4. 청년실업 문제2.5. 이승만의 정권 유지 능력 퇴보2.6. 소결
3. 혁명의 시작4. 혁명의 진행5. 이승만의 하야
5.1. 4월 26일, 승리의 화요일5.2. 이승만의 최후의 몸부림5.3. 제2공화국의 출범
6. 그날 이후
6.1. 한계와 의의6.2. 북진통일론의 폐지6.3. 4.19 세대6.4. 국립 4·19 민주묘지6.5. 기타
7. 창작물에서8. 관련 어록9. 뒷이야기10. 관련 단체11. 자료 영상12.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 운동으로 독립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대한민국 헌법 전문
1960년 4월 대한민국에서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항거해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서 대한민국 제1공화국을 끝낸 민주주의 시민 혁명. 국제적으로는 아시아에서 드물게 성공한 민주 혁명으로 평가된다.

2.28 학생민주의거3.15 부정선거로 인한 시위가 4.19 혁명의 서막으로서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당 정권이 저지른 3.15 부정선거에 시민들이 항거하여 대대적으로 일어난 이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2. 배경: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이 하위 문단의 서술은 『한국민주화운동사』 1권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작성된 것이다. 따라서 좀 더 학술적이고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는 데는 해당 서적을 읽는 것을 추천한다.
6.25 전쟁휴전 협정으로 일시적으로 총성이 멎은 지 불과 7년밖에 지나지 않았던 1960년에는 이미 국민들 사이에 민주주의를 향한 강렬한 열망이 들끓고 있었다.

하지만 6.25 전쟁의 후유증으로 인해 나라 전체가 가난에 허덕이던 시절에[8] 어떻게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으로 민주시위가 가능했냐는 것이 의아할 수 있다. 이에는 다음과 같은 사회적 배경이 있었다.

2.1. 언론의 영향력

1950년대 당시 언론인들은 최대의 지식인 계층에 속했다. 친정부적 성격을 띤 <서울신문>을 제외하고[9] 대부분의 논조는 이승만 정부에 매우 비판적이었으며 사회 참여적인 성격이 몹시 강했다. 각 언론사들의 주필들은 다양한 논설, 사설, 칼럼을 통해 민주적 가치를 독자들에게 지속적으로 환기하였다.

그래서 이승만은 초기의 언론 자유에 대한 신념을 버리고 탄압 정책으로 전환했다. 그의 언론 탄압 이력은 적어도 1955년으로부터 시작된다. 어째 리스트가 좀 많긴 하지만 4.19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당시의 시대상이 이와 같았고 이미 언론에 대한 탄압과 정치깡패를 동원한 테러 행위, 날조 및 공작행위는 곪을 대로 곪아서 터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그리고 이들 언론을 구독하는 국민들은 점차 '민주주의 국가에서 용납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는 현실을 자각하고 있었다.

2.2. 높은 교육 수준

물론 오늘날의 교육 수준에 비교할 수 없지만 당시의 교육열은 사실상 붐에 가까운 것이었다. 1948년부터 1960년까지 제1공화국 정부의 국가 총예산의 평균 10.5%는 교육 관련 지출이었다. 이 외에도 국민학교(초등학교) 의무교육제가 채택되었으며 빈민층일수록 학구열은 더욱 높았다. 그 이유는 교육을 통해 그 누구라도 신분이 상승할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사실 지금도 그렇지만 한국은 전통적으로 유교적 사고방식에 특히 고려조선 내내 시행한 과거 제도의 영향으로 '배운 사람'에 대한 고평가나 존중의 분위기가 있어 왔고 입신양명 등 공부로 인한 성공을 장려하는 등 교육열이 꽤나 높은 국가였고, 전국적으로 서당이라는 교육시설은 널리 퍼져있었고, 상급학교인 향교와 서원도 각 군현마다 몇곳은 있었기 때문에(물론 서원은 흥선대원군에 의해 대부분 철거되었다.) 문맹률은 전근대 기준으로는 상당히 낮았던 나라였다.(1930년 일제가 실시한 국세조사에서 문맹률 자료가 77%, 노년층은 79%로 나오는데 이를 토대로 추정해보면 조선말기의 문해율은 20% 중반 수준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런 교육열은 인프라의 부족에 가로막혔다. 자신이 가르치는 교육을 통해 양반이 될 수 있다는 식의 선전이 있었지만 교육의 물적 인프라가 부족했고 교육의 대가로 일제에 대한 충성을 요구하였다. 1920년대까지 보통학교보다 서당에서 글을 깨우치는 사람이 많았던[13] 현실에 비하면 교육환경이 나빠졌다고 볼 수는 없었지만 일제가 내지와 외지를 차별했던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이미 내지에서는 1900년대부터 실시해 오던 초등교육에 대한 의무교육을 식민지 조선에서는 1945년 패망할 때까지 실시하지 않았고 식민 통치 중반까지만 해도 내지인과 외지인에 대해 교육제도 자체에서도 차등을 두었다. 이후 일제가 강제 동화 정책으로 선회하며 내지와 외지는 명목상으로는 동일한 교육제도를 적용받게 되었지만 그 수에서 큰 차이가 존재했다. 또한 학교 인프라 확충이나 학비부담 경감과 같은 사안에 대해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사실 일제시대, 일본 제국 정부는 중일전쟁이나 태평양 전쟁 같은 전쟁에 국가 예산의 대부분을 쏟아부었기 때문에 본토도 아닌 식민지 조선을 위한 교육에 예산을 많이 투자할 수 없었다. 애초에 내지인 일본열도에서조차 대학은 7개의 제국대학과 극소수의 관립대학 및 사립대학밖에 없었고, 당장 1944년만 해도 일본 정부 예산의 90%가 군비였다.(...)

그나마 서당과 같은 구시대적인 교육기관은 1940년대 기준으로 초등교육기관이 거의 대체하여 50% 정도를 달성하였지만 광복 직후 미군정이 실시한 조사에서 문맹률(한국어든 일본어든 둘 중 어느것도 읽을 수 없는 비율)이 78%로 여전히 매우 높았다.[14] 최고 교육기관인 대학은 경성제국대학 딱 하나만을 만들었고 그마저도 입학생의 절반 이상이 일본인들이던 상황.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 살던 일본인들은 약 80만 명이었고 조선인들은 2천만 명이었는데, 단 하나뿐인 경성제국대학에 입학하는 학생들의 절반 이상이 조선 거주 인구의 5%도 안 되던 일본인들이었다면 조선인들이 교육에 있어서 일본인들에 비해 얼마나 차별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 거기에 식민지 조선에서는 사립대학은 설립을 전부 불허하고 대학보다 한 단계 낮은 전문학교의 지위만을 유지할 수 있도록 통제하였다. 즉 해방 이후의 이런 상황은 30년 이상 억눌려 왔던 교육열이 힘 풀린 용수철이 튀어 오르듯 폭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945년에서 1960년까지 학생 수는 3배로 증가했고 문맹퇴치 5개년 사업을 통해 비문해율은 1945년 78%에서 1958년 4.1%까지 떨어졌다.[15] 그와 함께 초 ~ 중등 교육과정에는 민주주의의 정신과 이상에 대한 교육이 반복적이고도 일관성 있게 포함되어 있었다. 국제정치적으로는 스탈린주의가 좁게는 북한, 넓게는 소련에 이르러 세계를 양분해 첨예한 대립각을 형성하던 시대였기에 한국도 이런 정세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게다가 대학에 진학하고자 하는 분위기가 매우 강해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많은 대학생들이 생겨났다. 1945년 대학생 수는 7,819명[16]이었는데 1960년에는 9만 7,819명으로 대학생만 무려 9만 명이 늘었다. 통계청 기록에 의하면 대학 재학생 수는 6만 9,961명. 오늘날에 비하면 결코 많은 수는 아니지만 당시 한국과 국민소득이 비슷한 다른 제3세계 국가와 비교하면 확실히 높은 비율이였다.

이렇게 대학생의 수가 늘어난 것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이승만의 교육정책 때문이었다. 당시 1공의 최우선 목표 중 하나가 문맹을 퇴치하고 교육제도를 개선하며 학생 엘리트를 양성한다는 것이었다. 한국 정부가 미국의 원조금으로 미국 내 한국인 유학생들의 학비를 대 줬는데 이에 대해 미국은 '한국은 우리가 밥 사 먹으라고 준 돈으로 뭐하냐'고 혀를 차기도 했다. 이는 미국이 1957년부터 원조금을 줄이기 시작한 원인 중 하나다.

제1공화국 국방비 다음으로 늘 교육비에 많이 투자해 1945년 대비 대학생이 12배나 증가해 동시기 영국보다 대학입학률이 높았다.[17] 국가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저들을 교육시켰으니 당연히 자신들에게 교육의 은혜를 베푼 국가와 정부에 절대적으로 충성하고 또 자신을 위해 견마지로로 일할 것이라 믿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일반 상식과 민주주의에 대한 고등교육을 받은 이들은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의 독재를 두 눈 뜨고 지켜보진 않았다. 즉, 이승만과 1공은 결과적으로 그들 자신을 타도할 자산을 그들이 나서서 키운 셈이었다.

2.3. 도시화와 대중매체의 보급

6.25 전쟁 이후 수많은 탈북민들이 남한에 정착하고 인구 구조가 새롭게 재편되면서 열 개 남짓의 도시들이 수 배의 급격한 인구 성장을 보였다. 총인구 대 도시 인구 비율은 1949년에 17.2%였는데 1960년에는 28%로 늘었다. 교육받고 계몽되고 깨어 있는 국민들이 도시를 중심으로 집중되면서 일종의 상승 효과가 나타났기 때문. 이들은 밤을 새워가며 시국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하고 개탄하였다.

당시의 교육 수준과 관련하여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1955년 전국 대학 중 85개 대학은 도시에 있거나 적어도 근교에 위치해 있었으며 특히 서울 소재 대학만 29개에 달했다. 이러다 보니 1960년 기준으로 전국에 있는 대학생들 두 명 중 한 명은 서울에 사는 대학생이었다.

게다가 앞서도 말했듯이 당시 언론사들은 매우 활발하고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정작 이를 읽을 만한 식자층이 없었더라면 언론인들의 목소리는 곧 잊혔을 것이다. 그러나 1961년 <한국신문연감> 통계자료에 의하면 전국의 일간지 보급률은 100명당 2.96부에 그쳤으나 서울의 일간지 보급률은 100명당 무려 25.5부에 달했다. 참고로 당시 유네스코에서 정한 근대화 기준 보급률이 100명당 10부였다.

2.4. 청년실업 문제

문제는 이렇게 대학을 졸업한 훌륭한 인재들이 일할 만한 일자리가 없었다는 것. 당시 한국의 경제는 대단히 낙후되었기에 실업률 자체가 높은 건 어쩔 수 없었으나[18] 고등 교육을 받은 대학생조차 일하기 힘들다는 점은 심각한 문제였다. 그래서 "대학은 예비 실업자 양성소인가"라는 자조적인 조롱이 유행하기도 했으며 실업률은 2명에 1명 꼴인 50%에 달했고 미래에 대한 비전을 찾을 수가 없었던 분위기였다. 거기다 그 무렵 들어 미국도 점차 경제 원조를 삭감하고 있던 추세였다. 그래서 사회 전반, 전 세대에서 이승만 정부에 대한 지지를 조금씩 철회하던 중이었다.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이 당시엔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은 이미 사회에서 '배운 사람' 축에 속했고 이런 '배운 사람'은 유교적 전통에 입각해서 사회 문제에 적극 뛰어들고 비판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지배적이었다는 것이다. 유교적 전통에 따르면 많이 배운 사람일수록 사회를 이끌어야 하는 책임 역시 크다. 실제로 조선 시대에도 유학을 배운 학생들이 평시에는 상소 등의 적극적 의사 표출을 하고 나라가 위험에 처하면 자산을 정리해서 의병장이 되곤 했다.

이 시대의 실업에 대한 비판적인 언급들은 '배운 사람'으로서 사회에 뛰어들지 않거나 제대로 된 사람 구실을 못 할 때 주어지는 비판으로, 오늘날의 청년실업 문제와는 사회적으로 주어지는 비판의 형태가 본질적으로 다르던 시대임을 염두에 둬야 한다.

청년실업 문제를 이 자리에서 언급하는 것은 상당히 21세기적 사고방식으로, 이런 '대학생이라면'이라는 태도는 20세기를 통틀어 대학가에 오랫동안 있어왔다.

2.5. 이승만의 정권 유지 능력 퇴보

이승만 대통령은 실세 2인자의 출현을 막고 정권의 핵심인물들 간에 균형을 유지하는 방법으로 심복이나 측근을 신뢰하지 않으면서 정권을 유지하였는데 나이가 80대에 접어들자 판단력이 흐려졌는지 평소에 많이 접견하는 자유당의 고위인사들을 무조건 신임하게 되었으며 특히 대통령 경호를 책임지는 곽영주 경무관은 "부부통령"이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대통령의 신임을 마패로 삼아 각종 권력형 범죄를 저질러 물의를 일으켰고 이는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가뜩이나 언론과 지식인, 대학생의 반정부 성향이 강해지던 마당에 4.19 혁명으로 이어지는 기폭제가 되었다.

이는 곽영주 말고도 이승만 정권 실세들은 이승만의 눈과 귀를 가리고 이승만이 국가사정을 알지 못하게 하였다. 미국의 지원 축소로 경제가 악화되고 실업률이 높아지고 기본적 의식주도 챙기지도 못하는 국민들이 있는 것을 이승만을 알지 못했고 심지어 4.19혁명 초기때 이승만에게 공산당 폭동으로 인식하게 할 정도로 이승만을 국내현실과 차단시켰다.

물론 이걸 가지고 이승만은 잘못이 없다거나 곽영주, 이기붕, 최인규 등 자유당의 이승만 측근들이 이승만을 이용했다느니 하는 식으로 해석하면 곤란하다. 애초에 이승만 본인부터가 본인이 아니면 안 된다는 독선과 아집이 강했고, 본인을 따르지 않고 반대편에 서 있으면 '친일'이니[19] '좌경주의'니[20] 하는 식으로 낙인을 찍어 배제하거나 무시[21], 아예 상종도 하지 않으려 드는 사람이었다. 후술하겠지만 결국 최종적으로 하야를 결정할 때조차도 "내가 없으면 안 되니 하야하지 못하겠다"고 할 정도로 권력에 대한 집착도 나이 여든이 된 지경에서조차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이런 사람이었으니 주위에 그에 영합해 권력을 누리려는 '문고리'들이 꾀는 것은 어찌 보면 필연적인 것이었다.

2.6. 소결

종합해 보면 국민들의 민주주의 의식 고취는 거의 필연에 가까운 일이었다. 코흘리개 어린 시절부터 아득바득 학교에 갔더니 민주주의라는 것을 지겹도록 가르친다. 물론 원래 의도는 북한을 괴뢰국으로 만들고 남한과 이승만 정권의 정통성을 주장하자는 거였지만. 당시를 배경으로 삼은 이문열 동명소설이 원작인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영화판을 보면 도덕시간 때마다 학생들이 주야장천 읽는 대목이 다 민주주의 관련이다. 그러면서 여전히 반에서 민주주의는 갖다버리고 독재하는 엄석대(와 이승만, 자유당 정권)와 대비를 이룬다.

게다가 인구의 적지 않은 수가 의외로 가방끈이 길었다. 검열과 탄압이 있었지만 의외로 정부에 대한 언론의 비판 기능은 매우 살아있으며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었고 이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민주주의 의식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렇게 쓴 사설과 기사들을 독자들이 무리 없이 읽을 수 있다. 주위에는 신문을 구독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이 전국 팔도 각 도시마다 집중되었으니 조직적 시위를 도모하기도 쉽다. 게다가 이런 인재들이 일을 하지 못하고 놀고 있으니 "하아. 이것 참 나라꼴이 수상하다!"는 여론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4.19 혁명은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촉발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사회 분위기는 결국 이승만 정권 스스로 만든 셈이니 아이러니. 이승만 정권이 말한 '민주주의'는 지극히 정권편의적인 냉전반공주의적 문맥에서만 국한한 '민주주의' 였지만 신생 대한민국 국민들이 공부하고 종교처럼 믿고 추구하기 시작한 민주주의는 진정한 의미에서 국민주권과 정치적 자유에 기반한 그 민주주의였던 것이다.

3. 혁명의 시작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3.15 부정선거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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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장기집권 음모와 조기 선거 실시

1950년대 중반 이후 이승만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은 점점 더 높아져 갔다. 하지만 이승만과 자유당은 국민들의 이런 여론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들은 여전히 장기집권을 바라고 있었고 야당과 민주세력을 탄압하는 데만 급급했다. 그러는 사이 1960년 제5대 정부통령 선거를 맞이하게 되었다. 자유당은 대통령 후보로 다시 나온 이승만과 부통령 후보로 나온 이기붕을 당선시키고자 했다. 당시 이승만이 단일후보가 되어 대통령 당선은 거진 확정된 상태였지만 이승만이 80을 넘는 고령이었기에 권력 유지를 위해서는 대통령 유사시 권력을 이어받는 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이 이겨야만 했다.

1959년 6월 30일 열린 자유당 전당대회는 뜻밖에도 정부통령 후보지명대회가 되었다. 진행 도중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겠다는 이 대통령의 '유시'가 있자 돌연히 정회한 뒤 전당대회를 정부통령 후보 지명대회로 바꾸었다. 통상 5월에 선거가 치러지므로 무려 10개월 또는 11개월 전에 후보를 지명한 것이다. 1956년 정부통령 선거에서는 선거 실시 두 달 전에, 1952년에는 발췌개헌이 늦어서 17일 전에 후보를 정했다. 다른 나라의 예를 보거나 1960년대 이후 한국의 예를 보더라도 이 같은 후보 지명은 너무나 조기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승만이 조기에 후보를 정하도록 한 것은 장관이나 자유당이 일찍부터 선거운동에 돌입하여 총력전을 펴라는 지시와 다름없었다. 아닌 게 아니라 최인규는 그해 11월부터 거의 매일같이 경찰 간부와 군수, 시장, 구청장 등 공무원들을 안배해 불러서 만반의 대책을 세우도록 독려했다.

7월 31일, 이승만의 최대 라이벌 조봉암진보당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상고심을 맡았던 대법원의 그 재판부에서 7월 30일 재심을 기각하여 변호인들이 다시 재심을 청구하려 했는데 그 다음 날 바로 처형된 것이었다. '신두영 국무회의 비망록'에 따르면 이승만은 조봉암을 어떻게든 제거하라고 지시했다.#

이로써 이승만과 대통령 당선을 두고 경쟁할 사람은 이승만에 맞서 싸울 투지가 별로 없었던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밖에 남지 않았다.[22] 자유당 전당대회에서의 후보지명보다 더 놀라운 사태는 그 다음에 일어났다. 이승만은 12월 11일 '반드시 농번기를 피해 조기선거를 해야 한다'고 피력한 이후 계속 그 주장을 했고 다음 해 1월 27일에는 '농번기 전의 선거가 자신의 수 년 동안 지론'이라고 못 박듯이 말했다. 당시는 하지(양력 6월 21일, 22일 경) 무렵에 모내기를 많이 했으므로 5월 초는 농번기가 아니었다.

발췌개헌으로 변칙적으로 치러진 1952년의 정부통령선거를 제외하면 1948년 5.10 선거, 1950년 5.30 선거, 1954년 5.20 선거, 1956년 5.15 선거, 1958년 5.2 선거 등 정부통령선거와 국회의원선거가 모두 5월에 치러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또 5.2 선거 때까지 이승만은 '농번기 때문에 안 된다'는 주장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돌연히 농번기를 피해 조기선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조기선거 실시에 대한 이승만의 주장은 두 가지 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지적된다. 하나는 조병옥의 건강에 관련된 문제였다. 조병옥이 중병을 앓고 있음은 1960년 1월 중순에 보도되었다.# 조병옥은 1월 29일 '조기선거는 등 뒤에다가 총을 쏘는 격'이라고 반대하면서 병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야당과 언론은 하소연도 하고 비열한 짓이라고 비난도 퍼부었지만 그러한 반대에도 아랑곳 없이 정부는 2월 3일에 '3월 15일 정부통령선거'를 실시한다고 공표했다. 조병옥은 이후 2월 15일 미육군병원에서 사망했다.

언론과 야당에서 조기선거를 반대한 이유는 또 있었다. 대통령 취임이 8월 15일이어서 만일 3월 15일에 야당 후보가 당선된다면 그간의 이승만 정권 행태로 미루어 볼 때 5개월 동안 아무 일도 안 일어난다는 보장이 있겠냐는 것이었다.

정부통령후보 등록 마감일인 2월 13일, 이승만은 국민을 상대로 무서운 발언을 했다. "1956년 선거에서처럼 대통령과 부통령 당선자가 서로 다른 당에서 나오면, 자신이 대통령에 당선되더라도 응종치 않겠다"고 말한 것이다.# 그가 다른 선거보다도 1960년에 치러질 정부통령선거에 더욱 큰 관심을 보이고 총기획자로서 역할을 한 것은 1956년의 정부통령선거 때문이었다. 8.5 정부통령선거가 치러진 1952년의 전시체제 상황도 아니고 1954년 5.20 총선이 치러진 준전시체제 상황도 아니어서 유권자들이 조심스럽게라도 자신의 의사를 표출했던 1956년 선거에서 이승만은 자존심에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었다. 유효표 721만여 표 중 이승만이 504만여 표, 조봉암이 216만여 표로 발표되었는데, 대부분이 신익희의 추모표인 무효표 185만여 표를 감안하면 이승만은 전체 투표자의 절반을 약간 넘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항상 '민의를 따르겠다'면서 국민의 절대 다수가 자신을 지지하고 있다고 과시했던 이승만으로서는 상당히 치욕적인 득표수였다. 더구나 부정 투, 개표가 적은 서울의 경우 이승만은 20만여 표밖에 얻지 못했고 무효표가 28만여 표였다(조봉암은 11만여 표). 죽은 신익희보다 표가 훨씬 적게 나온 것이다. 사실 자유당은 서울 시민들에게 미움의 대상 그 자체였고 선거 때마다 시민들로부터 심한 야유를 받았기 때문에 서울에서 선거운동을 할 수 없었다.

헌법 위에 군림해 헌법을 유린하는 발언을 또 다시 공공연히 한 것이지만 그의 담화는 단순히 국민을 협박한 것만이 아니었다. 이는 최인규나 자유당 간부들에게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기붕을 당선시켜야 한다'는 지시로 들릴 수 있었다. 최인규는 나중에 법정에서 2.13 담화가 자신에게 큰 압박을 가해왔음을 고백했다.[23] 실제로 당시 내무부장관이었던 최인규는 이에 매우 적극적이어서 "공무원은 누구나 국가원수인 이 대통령에게 충성을 다할 것이며, 차기 선거에서는 이 박사, 이 의장을 정부통령으로 꼭 당선시키기 위해 선거운동을 하라"고 말하거나 경찰들에게 "선거운동을 한 공무원의 신분은 내가 보장하겠다."며 불법행위를 독려하는 등 공공연하게 선거 부정을 저지르고 다녔다. 선거 직전인 3월 3일에는 경찰의 양심선언으로 민주당이 3.15 부정선거의 진상을 폭로했지만 정부는 이를 무시하고 계속 부정선거를 획책했다.

3.2. 2월 28일, 대구 학생 시위

시위의 시작은 2월 28일 대구에서 학생들이 시위를 벌인 것이었다. 당시 민주당 정부통령 후보 장면 유세일이 일요일이었는데 당국에서는 학생들이 유세장에 갈 수 없게끔 '영화 관람'이나 '추가시험' 등의 명목으로 일요일인데도 불구하고 학생들을 강제로 등교하도록 지시했던 것. 이에 반발한 경북고 학생들이 "학원을 정치도구화 하지 말라!"고 가두시위를 벌였고 이에 호응한 대구의 여러 고등학교 학생들은 27일 시위를 벌였다.[24] 구체적으로는 대구고, 경북고, 경북여고, 경북대사대부고, 계성고, 대구공고등 8개 학교 총 1,200여 명이었다.

다음 날인 28일, 당시 경북고 3학년이었던 학생회장 이대우는 "부정에 항의하고 신성한 권리를 지키는 것"을 요지로 하는 결의문을 낭독하였다. 같은 경북고 3학년의 중퇴생이던 하청일이 초안을 작성한 결의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인류 역사 이래 이런 강압적이고 횡포한 처사가 있었던가. 근세 우리나라 역사상 이런 야만적이고 폭압적인 일이 그 어느 역사 속에 끼어 있었던가. 우리는 배움에 불타는 신성한 각오와 장차 동아를 짊어지고 나갈 꿋꿋한 역군이요, 사회악에 물들지 않은 백합같이 순결한 청춘이요, 학도이다.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서슴치 말고 일어서라! 학도들의 붉은 피가 지금 이 순간에도 뛰놀고 있으며, 정의에 배반되는 불의를 쳐부수기 위해 이 목숨 다할 때까지 투쟁하는 것이 우리의 기백이며, 정의감에 입각한 이성의 호소인 것이다.

하지만 당국에서는 이를 공산당의 사주에 의해 벌어진 일이라고 일축하면서 경찰을 동원해 강제 해산시켰다. 당시 이강학 내무부 치안국장은 "학생들이 북한에 이용당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허나 이런 그들의 주장과 무관하게 2.28 학생민주의거역사적인 4.19 혁명의 첫 도화선을 당기는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그 선봉에 대구시가 있었다는 점과[25] 종래의 동원형 강제 궐기대회가 아닌 광복 이후 최초의 자발적 학생 반정부 시위의 성격을 지녔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참고로 오늘날 대구에는 이 의거를 기념하는 시설물들이 존재한다. 2.28 기념탑이 경북고와 두류공원,[26] 그리고 경북대사대부고에 있으며 대구의 번화가 동성로 근처에는 2.28기념중앙공원이 있고 명덕역 근처에는 2.28 민주운동기념회관이 있다. 이승만에 대한 재평가가 주로 어느 지역에서 이뤄지는 지를 생각해보면 아이러니한 역사의 흐름이다.

다시 돌아와 이 시위를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서 시위가 확산되어 수많은 학생들이 들고 일어났다. 이에 이승만 정부는 관제시위를 통해 맞불 작전에 돌입하였으며 "학생들은 자중하라, 학원으로 돌아가라"는 구호를 외치게 했는데 대항하여 학생들은 "관치행정이 민주주의냐, 썩은 정치 갈아보자" 등의 구호를 외쳤다. 어떤 이들은 "대학생들은 어디 있는가? 왜 침묵하는가?"라며 우회적으로 참여를 호소하기도 했다.

이후 선거 직전에도 대구를 이어서 전국 각지에서 시위가 발생했다. 3월 1일에서는 서울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고 공명선거를 촉구하는 삐라가 각지에서 뿌러졌고 3월 5일과 3월 13일에는 학생들의 시위가 발생했다. 학생들은 정권의 사주로 나온 어용시위대의 방해에도 굴하지 않고 시위를 진행했다. 3월 10일에는 부산에서 삐라가 뿌려지고 12일에 고등학생 130여 명이 거리로 나와 시위를 벌였다. 수원에서 3월 10일, 13일 두 차례에 걸쳐 고등학생들의 열띤 데모가 벌어졌다. 대전에서는 3월 8일, 10일에 대전고등학생 1,000여 명이 집결해 격렬한 시위를 벌이다 경찰과 충돌하여 수십여 명이 연행되는 일이 일어났다.[27] 충주, 청주, 전주 등에서도 학생들의 시위가 이어졌다.

선거 전날 시위는 더욱 더 타올라 서울, 부산, 인천, 원주, 포항 등지에서 각 지역 고등학생 수십 또는 수백여 명이 스크럼을 짜고 학원의 자유와 공명선거 실시를 외쳤다. 모두 3월 15일에 치러지는 선거가 올바른 공정선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학생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2월 28일 '공명선거추진위원회'라는 것을 조직하여 부정선거를 배격할 것을 결의했다.

한편 2.28 의거 이후부터 3.15 선거까지 발생한 주요 시위와 참여 학생들의 수는 다음과 같다.

3.3. 부정선거3월 15일, 광주 3.15 의거, 제1차 마산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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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5일, 대대적인 부정선거가 일어났다. 선거 당시 발생한 폭력과 부정은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먼저 경찰과 정부당국은 선거 전에 이미 투표함에 30~40%의 투표지를 미리 넣어놓았다. 물론 이 투표지는 죄다 이승만과 이기붕으로 기표된 표였다.[36] 대리투표는 기본이었고 물품을 뿌려 자유당 투표를 독려하는가 하면 투표를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3인조나 5인조로 묶어서 투표를 시키기도 했다. 3인조와 5인조로 투표할 경우에는 조장에게 투표지를 확인받아야 했다. 당연히 조장은 자유당 지지자였다. 심지어는 완장부대와 정치깡패를 동원하여 공포 분위기를 형성해 투표하는 시민들에게 위압감을 주었고 야당 참관인에게는 위협, 폭행 등 무력을 가하거나 투표소 시계를 조작해서 선거가 종료되지도 않았는데 투표 끝났다며 선거장 밖으로 쫓아내기도 했다. 이런 부정선거를 견디지 못하고 선거가 끝나기 전인 오후 4시 30분, 민주당 중앙당은 "3.15 선거는 불법 무효다."라고 발표했다.

선거 결과는 당연하게도 이승만과 이기붕의 압승이었다. 조작이 너무 완벽해서 양 후보의 득표율이 90%를 넘자 당황한 정부가 임의로 득표율을 낮춰 이승만이 전체의 88.7%, 이기붕은 전체의 79%의 득표율을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자유당 간부의 증언에 따르면 장면의 압도적인 우세가 예상되었던 대구에서 이기붕 5,000표에 장면 32표라는 충공깽한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이런 어이없는 상황이 전개되자 투표권을 우롱당한 국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당장 투표 당일인 1960년 3월 15일 오후 12시 45분에 광주 금남로에서 최초로 시위가 일어났으며(광주 3.15 의거), 시민과 학생들이 모여 '곡(哭) 민주주의 장송'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시위를 벌이다 진압 과정에서 10여명이 부상당하였다. 한편 마산에서는 아침부터 장군동 제1투표소에서 민주당 참관인과 자유당원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는데, 참관인이 투표함을 엎어버리자 그 투표함에서 미리 기표해 둔 용지가 우르르 쏟아지며 부정선거가 적발되었고 이에 민주당 도의원이던 정남규 등은 10시 30분경 '선거 포기'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뒤이어 부정선거에 폭발한 시민들이 오후 3시 42분부터 오동동 민주당 경남도당사와 불종거리 등에서 들고 일어났다가 경찰에게 강제 진압당했고, 투표가 종료된 그날 저녁에는 마산시청(현 마산세무서)와 자유당 당사가 있던 자산동 일대에 3,000여 명이 모여 시위를 벌였다. (제1차 마산 의거) 이 때 경찰의 집단 발포로 김주열 열사를 포함해 9명이 사망하고 80여 명이 부상당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3.15 의거 항목 참조.

한편 김주열 열사의 경우 밤 10시 쯤 최루탄에 눈을 관통당하여 사망하였는데 3월 15일 당시에는 실종자로 처리되었다가[37] 4월 11일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며 제2차 마산 의거의 도화선이 되었으며 이 4.11 의거는 전국적으로 번져나가 4.19 혁명의 불씨가 되었다.

4. 혁명의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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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이승만의 하야

5.1. 4월 26일, 승리의 화요일


"미국으로 망명하라는 건가?"
"그렇습니다. 그것만이 오직 유일한 길입니다."
이승만 대통령과 시민 대표 5명과의 면담 中
장안에 모이신 데모시민 여러분, 우리는 인제 늦은 감이 있으나, 민주주의를, (음,) 돌아온 것 같습니다. 그러니, 군인 탱크에 타신 분은 내려주시고, 지금 농성을 하신 분은 일어나셔가지고 제각기, 제각기 해산 해주셨으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시민 대표의 해산 선언

상황은 이승만에게 명백히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26일 아침 김정렬 국방장관이 강경하게 이 대통령에게 하야를 진언했고[38][39] 부인 프란체스카도 귀에 대고 결심을 재촉했으며 4월 25일 외무장관으로 입각한 허정도 하야를 권유했다. 김정렬 회고록에 따르면 이미 이때 이승만은 결국 하야로 가닥을 잡고 있었다. 이승만은 박찬일 비서관을 불러 성명서를 쓸 것을 지시했다. 초안에는 대통령 하야, 내각책임제, 재선거 등이 적혀있었지만 이승만은 그렇게 쓰면 안된다고 새로 쓰게 했다. 송요찬의 건의로 이기붕의 공직 사퇴 내용도 첨가되었다. 두 번째로 쓰인 성명서가 밑에 있는 성명서다.

그때 송요찬 계엄사령관이 시민대표, 설송웅 등 학생대표 5명과 이승만 대통령의 면담을 주선했다. 고려대 정치학과 유일나 등이 경무대 후원에서 이승만과 면담했다. 유일나가 "각하께서 하야하시는 길만이 나라를 구하는 길입니다"라고 직언했고 이승만이 "뭘 하라고?"라고 알아듣지 못하자 옆에서 곽영주가 "step down"이라고 속삭였다. 이승만은 "날더러 저 하와이나 외국에 가서 살란 말인가?"라고 물었고 유일나는 "국민이 원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때 미국 대사 맥카나기가 도착했다. 이승만은 대사를 기다리게 한 다음에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물었다. 유일나는 이집트 나세르의 예를 들며 북한과 대치 중이니만큼 2년간 군정을 한 다음에 민정으로 이양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했다. 허정이 옆에서 반대의 뜻을 밝혔고 이승만은 그게 송요찬의 지시로 한 말인 줄 알고 한국과 이집트는 상황이 다르다고 반대했다. 결국 이승만은 시민 대표와의 면담을 받아들였다.

10시 20분경 드디어 이승만이 시민들의 요구에 굴복하여 사임할 것을 발표했다. 비슷한 시간인 9시 45분경 파고다공원에 몰려든 데모 군중이 이승만 동상의 목에 철사줄을 걸어 쓰러뜨렸다. 현재는 그 자리에 백범 김구 선생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10시 40분에 이승만은 맥카나기 대사와 면담했는데 미국의 사퇴 압박을 전하려던 대사는 사퇴 성명서를 듣고 성명 지지 의사를 전달했다.

나는 해방 후 본국에 들어와서 우리 여러 애국애족하는 동포들과 더불어 잘 지내왔으니 이제는 세상을 떠나도 한이 없으나 나는 무엇이든지 국민이 원하는 것만이 있다면 민의를 따라서 하고저 한 것이며 또 그렇게 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보고를 들으면 사랑하는 우리 청소년 학도들을 위시하여 우리 애국애족하는 동포들이 내게 몇 가지 결심을 요구하고 있다하니 여기에 대해서 내가 아래 말하는 바를 뜻대로 할 것이며 한 가지 내가 부탁하고자 하는 바는 이북에서 우리를 침략하고 공산군이 호시탐탐하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들에게 기회를 주지 말도록 힘써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첫째는, 국민이 원하면 대통령직을 사임할 것이며

둘째는, 지난번 정부통령 선거를 많은 부정이 있었다고 하니 선거를 다시 하도록 지시하였고

셋째는, 선거로 인한 모든 불미스러운 것을 없애게 위해서 이미 이기붕 의장을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가겠다고 결정한 것이다.

넷째는, 내가 이미 합의를 준 것이지만 만일 국민이 원하면 내각 책임제 개헌을 할 것이다.

이상은 이번 사태를 당해서 내가 굳게 결심하는 바이니 나의 이 뜻을 뭇 사랑하는 모든 동포들이 양해해 주어서 이제부터는 다 각각 자기들의 맡은 바를 해 나가며 다시 일손을 회복시키도록 모든 사람들이 다 힘써주기를 내가 사랑하는 남녀 애국 동포들에게 간곡히 부탁하는 바이다.
-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성명, 1960. 4. 26

짐작하겠지만 "국민이 원한다면" 이라는 표현이 논란의 여지가 있었는데 이에 수석국무위원 허정은 기자들에게 "이는 단지 문구상 표현에 불과하고 사실상 하야하는 것"이라고 확인해 주었다.

시민들은 방송을 듣고 경무대 앞에서 만세를 부르며 승리를 환호하였다. 시민들은 새로이 "질서를 지킵시다" 플래카드를 만들어 가지고 다니며 사회를 안정시키고자 하였으며 길거리를 자발적으로 청소하는 학생들도 적지 않았다.

※ 4월 26일 시위 사망자 명단 : 보기 / 접기
||<-4> 4월 26일 시위 사망자 및 상이후사망자 ||
강명석 김경이 김두호 김선길
김영호 박완식 박춘봉 손흥구
심점구 안정수 윤석헌 이강섭
이연하 이재섬 이판갑 이한수
임기택 장영옥 정태성 정태훈
조진구 최장성 양대춘 함장호
안창원 송시환

5.2. 이승만의 최후의 몸부림

4월 27일 이승만은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해야 하는데 갑자기 막무가내로 거부했다. 이미 방송으로 다 나갔는데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비서들의 잇따른 사임서 사인 요구에 버텼다. 허정도 설득하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했고 김정렬이 나서서 또 촉구했지만 이승만의 대답은 역시 사임하면 온 국가가 혼란에 빠질 것이 확실하다는 것이었다. 허정이 질서를 확고히 유지할 수 있다고 역설하자 그때서야 어쩔 수 없었던지 사임서에 사인을 해 국회에 제출할 수 있었다.[40]

5.3. 제2공화국의 출범


이리하여 오후 2시 국회는 이 대통령 즉시 하야, 정부통령 선거 재개, 내각제 개헌 등을 만장일치로 결의하였고 다음 날 오후 3시에 국회에 제출된 이 대통령 사임서가 즉시 수리되었으며 헌법 규정에 따라 허정 외무장관이 대통령 권한대행으로서 과도내각을 수립했다.[41] 후에 대한민국 제2공화국이 출범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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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9일, 하와이로 망명가는 이승만을 신문 보도한 경향신문.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나면서 자유당 정권과 이승만 추종자들은 저항할 여지도 없이 힘을 잃었으며 집이 무너진 이기붕은 이화장으로 도망친 28일 장남 이강석의 자결 총격에 의해 일가족이 모두 동반자살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42] 그리고 이승만은 망명지인 하와이에서 1965년 7월 19일에 사망하였다.[43][44]

참고로 망명은 사진에서 배웅하고 있는 허정 권한대행의 주도로 각료들도 모르게 비밀리에 진행되었는데 이승만은 떠나는 순간까지도 "하와이에서 잠시 쉬다 아이크가 오기 전에 곧 돌아오겠다"고 허세 섞인 너스레를 떨었다고 한다.[45]

6. 그날 이후

1961년 4월 27일, 혁명 1주년 기념식 당시 영상. 도열한 병사들과 학생 대표단
기념조각상과 오열하는 유가족들의 모습이 담겼다.

6.1. 한계와 의의

이승만의 하야와 더불어 4.19는 주도세력인 학생들에 의해 혁명으로 불리기 시작하였다. 지식인들도 그에 동조하였다. 어느 역사학자는 4.19를 절대왕정의 구체제를 무너뜨린 프랑스 혁명에 비유하였으며 어느 경제학자는 4.19를 국가 독점 자본주의를 해체한 민주적 혁명으로 평가하였다. 이러한 풍조 속에서 4.19가 혁명이었음은 국민의 상식으로 정착되어 갔다. 그렇지만 그 혁명의 뜻이 무엇인지는 심각하게 논의되거나 합의된 바가 없었다. 4.19는 한국의 역사에서 일반 대중이 봉기하여 정권을 쓰러뜨린 최초의 사건이었다. 조선대한제국, 일제강점기까지 일반 백성은 정치에 참여할 권리를 누리지 못했다. 조선, 대한제국 시대엔 소수의 양반 신분과 갑오개혁 이후 그들의 잔존 세력만이, 일제시대에는 사실상 소수 부유층, 친일파 조선인과 일본인만이 조정의 정치에 참여할 권리를 인정받았을 뿐이다. 한국인들은 세금을 냈지만 정치적 권리는 탄압받았다. 한국인들이 정치적 주권자로 성립하는 것은 1948년 대한민국의 성립에 의해서였다. 그 국민이 봉기하여 정부를 타도한 것이 4.19인데 이런 일은 한국사에서 전례가 없었다. 이후 4.19는 보통의 한국인들에게 국가의 주권은 국민에 있다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를 상징하는 역사적 사건으로 승화되어 갔다.

지도자가 중심이 되어 이루어진 조직적인 혁명이 아니었고 민중에 의해 자발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혁명 결과 권력은 야당인 민주당에게로 돌아갔고 반공보수가 아직까지 당내의 정책이었던 민주당은 시민들의 요구사항에 부응하지 못하였다. 무엇보다 장면 내각 때 경찰 내 발포 책임자에게 무죄 선고를 하자 시민들은 크게 실망하게 된다.

한편 경찰에 대한 민중의 반감은 극에 달한 데다[46] 자유당 정권 내내 억압되었던 시민들의 요구가 한꺼번에 폭발하자 시위로 시작하여 시위로 끝나는 하루가 이어지기도 했고[47] 경찰서 등 관공서 건물에 대한 파손이 이어지기도 했다. 이는 곧 대한민국 헌법의 4차 개정의 빌미가 되었고 법률불소급의 원칙을 무시한 이 개정은 이후 줄곧 "소급입법개헌" 이라고도 불리고 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서 시국이 안정되고 나라가 정상적으로 발전할 것이라는 희망이 생겼다고 하는데 정치권은 민주당 신파인 장면 총리와 구파인 윤보선 대통령 사이에 치킨게임으로 여전히 혼란스러웠고 그 틈을 타서 1961년 5월 16일 박정희는 군사정변을 일으켰다(5.16 군사정변).[48] 장면은 가르멜 봉쇄수녀원으로 도망가서 나오지 않았고 윤보선은 기민하게 대처하지 못해 정변은 성공하게 되었다.[49]

기존의 정부에 실망한 지식인들은 박정희가 군사정변을 일으키자 지지하는 성명을 냈다. 실제로 4.19에 열성적으로 참여한 서울대학생회는 4.19를 계승한 군사혁명으로 환영식을 하였으며 정통성까지 확보하여 날개를 단 호랑이가 되었다고 평해지는 제5대 대통령 선거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보듯이 군부의 슬로건에 동감하였다고 볼 여지가 충분하다. 그리고 박정희 집권기에도 (공식적인 차원에서는 "의거"로 많이 불렸지만) "의거" 못지않는 "혁명"으로 많이 언급되었다.#

정치학자들 사이에서는 4.19를 혁명으로 부를 수 있는가에 대해서 몇 번 이의가 제기된 적이 있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이의는 4.19 자체를 부정하는 의미에서의 이의제기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혁명'의 성격과 정의에 관한 학문적인 논쟁의 일종으로 봐야 할 것이다. 따라서 혁명이라는 명칭의 학문적 논쟁은 단순한 극우파의 유사학문은 아니다. 일례로 프랑스 혁명만 하더라도 학계에서는 현대에 그 '혁명'이라는 명칭을 엄정한 시험대에 올리고 있으며 전체주의 비판으로 유명한 한나 아렌트는 프랑스 혁명이 '혁명'으로 시작했으나 '반란'으로 끝나버렸다고 평가하기까지 한다.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기 전, 프랑스 제1공화국이 태어나는 그때에도 이미 공화국은 사산(死産) 됐다는 게 아렌트의 평가다. 혁명은 해방(liberation)이 아니라 자유(freedom)를 지향하는 활동이고 결국 자유(freedom)가 얼마나 헌법에 잘 스며들고 성공적인 체제가 들어서는지가 중요하다는게 그녀의 설명이다. 때문에 아랜트는 미국 혁명프랑스 혁명보다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 이런 엄정한 잣대로 평가한다면 4.19가 혁명이냐 아니냐를 가리는 기준은 제2공화국에 대한 평가와 크게 관련될 것이다. 만약 제2공화국이 근본적으로 자유를 헌법에 명시하는데 실패한 체제라면 4.19는 의거, 혹은 미완의 혁명일 것이다. 반대로 만약 제2공화국이 성공적으로 자유를 헌법에 명시했는데 단지 5.16 반란이라는 외부적 요인으로 붕괴한 것이라면 4.19는 혁명일 것이다.

그래도 4.19는 정권을 뒤집은 사건이며 한국 시민들에게 민주주의 정신을 똑바로 심어주었다. 현행 대한민국 헌법 전문(前文)에도 4.19 정신을 이어받는다는 문구가 있다.[50][51] 또한 4.19 혁명은 한국 민주주의의 첫 승리였고 근현대사에서 처음으로 직접 정권을 끌어내렸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의를 가진다. 그래서 어떤 역사학자들은 8.15 광복이 '첫 번째 해방'이었다면, 4월 혁명은 '두 번째 해방'이었다고 언급한다.

6.2. 북진통일론의 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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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지배 집단의 등골을 오싹하게 하는 시련이, 전쟁 전의 시기를 상기시키는 시련이 시작되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명백한 좌경화 경향이었다.
브루스 커밍스

4.19 전에는 평화통일론을 내세웠다고 이승만 정부하에서 간첩으로 몰려 여러 고초를 겪고 결국 사형을 당한 조봉암의 경우처럼 통일은 오로지 북진통일이고 그외의 방안은 탄압받았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가 물러나고 드디어 다양한 통일 논의가 펼쳐지게 되었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라는 구호가 4.19 혁명 1주기에 거리에 걸렸으며 남북학생회담과 남북통일 관련 단체들이 생겨나 통일에 대한 열망이 표면 위로 드러난 상황이었다.

대표적으로 유엔 감시하 남북 통일 선거, 미국과 소련의 세력 균형을 위한 중립화 통일론, 남북이 자주적으로 협상하여 통일하자는 등 3가지 방안이 논의되었다. 서울대, 고려대, 경희대 등 통일을 위한 학생 단체들이 생겨났으며 민간단체들도 많이 생기게 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아이러니하게도 반공을 국시로 내세웠던 남조선로동당 출신 박정희5.16 군사정변에 짓밟히게 된다.

6.3. 4.19 세대

4.19 세대 구술 증언록.

4.19 혁명 기간에 대학생으로 운동에 참여하고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세대를 4.19 세대라고 한다. 당시 대학생이 그렇게 많지 않았기 때문에 86세대만큼 대중적이지는 않지만 맨땅의 대한민국에서 독재정권을 타도하여 최소한의 민주적 원칙을 수호하였고 산업 발달을 실질적으로 이끌어낸 위대한 분들이라고 할 수 있다. 앞에도 서술되었지만 4.19 세대는 6월 항쟁 당시 넥타이부대가 되었다.[52]

한편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로 칭송하는 일부는 '4.19 세대나 6.3 세대가 이승만을 다시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53][54] 이 주장은 보수층의 집권이 장기화되며 차츰 보수 계열 정치인들 가운데서도 심심찮게 언급되기 시작했다. 김문수, 김무성 그리고 이명박 전 대통령.

2011년 4월 17일 이승만의 유족인 이인수[55]가 공식적으로 사과하였으나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고 동상 건립 시도 및 이승만 기념관 건립 사업으로 인한 이벤트성 퍼포먼스라고 대차게 까인 데다[56] 희생자들과 4.19 단체 또한 사과에 대해서 진정성이 없다며 사죄에 대해서 거부한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결국 이인수는 당초 의도했던 대로 4.19 민주묘지에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사과문을 읽었다. 근데 인터뷰를 잘 들어보면 4.19 혁명을 4.19 의거라고 칭했다!

거기에 뉴라이트는 이인수 혼자만의 생각일 뿐 4.19 혁명은 북한의 입김이 크며 이승만을 몰락시켰으므로 사과하면 안 된다는 태도를 보였다.

참고로 4.19동지회는 2006년 당시 뉴라이트 학술회에서 4.19 혁명의 의의와 위상에 관련한 문제로 이영훈 교수를 비롯한 참가진들에게 항의를 격하게 한 바[57] 있다. 당시 학술회에 참가한 교수 4인(안병직 외 3인)[58]이 부상으로 병원에 후송되었고 학술회는 취소되었다. 뉴라이트들도 문제 있는 것이 4.19를 진압하려던 정부 요인이 후에 세운 언론사[59]에 많이 기고하는 교수도 포함되어 학술회 자체가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2023년 3월 26일 박범진, 이영일, 한화갑 등 4.19 세대 인사 50여명이 이승만 탄신 148주기를 맞아 그의 묘역을 참배했고, 9월 1일 이인수가 4.19 묘역을 참배하고 사과 의사를 밝혔다.#

6.4. 국립 4·19 민주묘지

서울특별시 강북구 4.19로8길 17 (수유동)에는 국립 4.19 민주묘지가 있다. 워낙 큰 랜드마크인지라 인근의 경전철 역명도 4.19민주묘지역으로 정해졌다.[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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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번째 컷은 정의의 불꽃 조각상이다.

1961. 02. 01 국무회의에서 공원묘지 설립 결의
1962. 12. 21 기공식(재건국민운동 본부)
1963. 09. 20 묘지준공 및 기념탑 제막

국가보훈부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계절을 좀 타기는 하지만 참배객들도 꾸준히 있는 편이며 인근 주민들은 은근히 동네 공원으로 여기고 드나들기도 한다. 가끔 어디선가 노동자들이 와서 단합대회도 한다. 기념관은 당시 사건 개요를 순서대로 둘러볼 수 있는 구조로 정리되어 있으며 희생자 김주열 열사가 오웅진 신부와 주고받은 편지 등[61] 나무위키에 작성된 글들도 일부 볼 수가 있다. 참배시 간단하게 싸 온 음식들을 취식하는 것도 가능하다.

2012년 4.19 혁명 52주년 행사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이 새누리당 비대위원장이었을 때 화환 때문에 비난을 받기도 했다. 보통 정부주관의 행사들에 화환을 보낼 때 정부에서 지정한 권장 '규격'이 있다고 하는데 박근혜 비대위원장은 일반 장례식장용 화환을 보냈다는 지적을 받았다.

파일:attachment/419-7.jpg

6.5. 기타

호남 지역에서 4.19 운동이 크게 벌어진 곳 중 한 곳인 광주광역시에는 4.19 정신을 기리기 위해서 2012년 4월 14일 금남 56번 버스를 419번 버스로 바꾸었다. 금남 56번이 광주에서 4.19 혁명 당시 활발하게 활동하던 광주고등학교 앞을 지나기 때문.

현재 은퇴한 한국사 강사 설민석의 아버지 설송웅[62]씨가 이승만을 직접 대면한 시민 대표 중 한 명이다. 설민석의 말에 따르면 컬러링도 애국가고 휴대폰 번호도 0419로 끝나는 등 평생의 자랑이라고. 설민석 한국사 교재에도 당시 설송웅을 찍은 사진이 매년 실렸다.설송웅 인터뷰

대구광역시에서는 4.19 혁명도 높이 평가하고 있지만 혁명의 발단이었던 2.28 학생민주의거도 높게 평가하고 있다. 명덕역 근처에 2.28 민주운동기념회관이 있으며 지방 단위 말고 국가 단위 행사로 격을 높여야 한다는 목소리도 꾸준히 나오고 있다. 이후 2018년부터 2월 28일이 국가기념일로 격상되었다.

창원시[63]에서도 본격적인 혁명의 발단이 된 3.15를 더 높이 평가하고 있으며 최초 총격이 있었던 무학초등학교 앞 삼거리에 '3.15 의거탑'과 '3.15 회관'을 지어 기렸다.[64] 현재 마산회원구 구암동에 4.19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설립한 국립묘지도 '3.15 민주묘지'이며 마산 시가지를 통과하는 대로를 3.15대로로 명명하여 기리고 있다.
2013년부터 4.19 혁명 국민문화제라는 이름으로 강북구에서 각종 다채로운 행사를 주최하고 있다.[65]

2020년 국민의힘에서 강령에 4.19 혁명을 새롭게 추가시켰다.

6.5.1. 세계기록유산 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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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王朝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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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大藏經板-諸經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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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 민주화운동 기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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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亂中日記)』:
이순신 장군의 진중일기(陣中日記)

새마을운동 기록물

KBS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기록물

한국의 유교책판

조선통신사에 관한 기록 –
17세기~19세기 한일 간 평화구축과
문화교류의 역사

조선왕실 어보와 어책

국채보상운동 기록물

4.19혁명 기록물

동학농민혁명기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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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파일: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로고.svg
이름 한국어 4.19혁명 기록물
영어 Archives of the April 19 Revolution
불어 Archives de la révolution du 19 avril
국가·위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소장·관리
등재유형 기록유산
등재연도 2023년
제작시기 1960년
[clearfix]
2023년 5월 18일 기록물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대한민국의 문화유산이 세계기록유산 대표목록에 이름을 올리는 건 2017년 이후 약 6년 만이다. # [66]

혁명의 원인과 전개 과정, 혁명 직후의 처리 과정을 보여주는 기록유산으로 국가기관과 국회·정당의 자료, 언론 기사, 개인의 기록, 수습조사서, 사진과 영상 등 1,019점으로 구성된다. 독재에 맞서 비폭력으로 민주주의를 이룬 역사적 기록으로서 의미가 있다. 4.19는 제3세계에서 최초로 성공한 비폭력 시민혁명이자 유럽의 1968년 혁명, 미국의 반전 운동, 일본의 안보 투쟁 등 1960년대 세계 학생운동에 영향을 미친 시발점이라는 평가를 받기 때문이다.

7. 창작물에서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4.19 혁명/창작물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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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관련 어록

시간이 없는 관계로 어머님, 뵙지 못하고 떠납니다. 끝까지 부정선거 데모로 싸우겠습니다. 지금 저와 저의 모든 친구들 그리고 대한민국 모든 학생들은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위하여 피를 흘립니다. 어머니 데모에 나간 저를 책하지 마십시오. 우리들이 아니면 누가 데모를 하겠습니까? 저는 아직 철없는 줄 압니다. 그러나 조국과 민족을 위하는 길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의 모든 학우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나선 것입니다. 저는 생명을 바쳐 싸우려고 합니다. 데모하다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 어머니 저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무척 비통하게 생각하시겠지만, 온 겨레의 앞날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기뻐해 주세요. 이미 저의 마음은 거리로 나가 있습니다. 너무도 조급하여 손이 잘 놀려지지 않는군요. 부디 몸 건강히 계세요. 거듭 말씀 드리지만 저의 목숨은 이미 바치려고 결심했습니다. 시간이 없는 관계상 이만 그치겠습니다.
시위에 참가한 한성여자중학교 2학년 진영숙의 편지. 진영숙은 시위 중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민주주의의 나무는 국민들의 피를 먹고 자란다.[67]
사상계1960년 5월호
‘진정한 다수’라는 것이 선거로만 표시되는 것은 아니다. 선거가 진정 다수 결정에 무능력할 때는 결론으로는 또 한 가지 폭력에 의한 진정 다수 결정이란 것이 있을 수 있는 것이요, 그것을 가리켜 혁명이라고 할 것이다.
경향신문 칼럼 『여적』 1959년 2월 4일자[68]
아! 슬퍼요
아침하늘이 밝아 오면은
달음박질 소리가 들려옵니다.
저녁놀이 사라질 때면
탕탕탕탕 총소리가 들려옵니다.
아침하늘과 저녁 놀을
오빠와 언니들은
피로 물들였어요.

오빠와 언니들은
책가방을 안고서
왜 총에 맞았나요

도둑질을 했나요
강도질을 했나요
무슨 나쁜짓을 했기에
점심도 안 먹고
저녁도 안 먹고
말없이 쓰러졌나요
자꾸만 자꾸만
눈물이 납니다.

잊을 수 없는 4월 19일
학교에서 파하는 길에
총알은 날아오고
피는 길을 덮는데
외로이 남은 책가방
무겁기도 하더군요

나는 알아요 우리는 알아요
엄마 아빠 아무 말 안해도
오빠와 언니들이
왜 피를 흘렸는지를

오빠와 언니들이
배우다 남은 학교에
배우다 남은 책상에서
우리는 오빠와 언니들의
뒤를 따르렵니다.
수송국민학교[69] 학생 강명희, 《나는 알아요》
어둡고 괴로워라 밤이 길더니
삼천리 이 강산에 먼동이 튼다
동무야 자리 차고 일어나거라
산 넘어 바다 건너 태평양 넘어
아 아 자유의 자유의 종이 울린다

한숨아 나가거라 현해탄건너
설움아 눈물아 너와도 하직
동무야 두손들어 만세부르자
아득한 시베리아 넓은벌판에
아 아 해방의 해방의 깃발날린다

유구한 오천년 조국의 역사
앞으로도 억만년 더욱 빛나리
동무야 발맞추어 함께나가자
우리의 앞길이 양양하구나
아 아 청춘의 청춘의 피가끓는다
해방가(독립행진곡) 박태원 작사, 김성태 작곡

9. 뒷이야기

1965년 이승만이 사망하자 그의 유해를 국내로 들여와 장례를 치르는 과정에서 국민장이나 국장으로 치러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그러나 이때 4.19에 참가한 시민들은 강력히 반대했다링크.
조국의 근대화 작업에 총력을 기울여야 할 시대적 요청 앞에 근시안적 상황판단으로 고 이승만 박사에 대하여 국민장 또는 국장 운운하는 것은 역사를 후퇴시키는 반민주적 처사라고 결론 지을 수밖에 없다. 이박사는 국민의 총의(모두의 뜻)와 역사 4월 혁명의 심판으로 악정자(나쁜 정치를 한 사람)라는 규정을 받았다. 그것이 특정 소수인에 의한 단순한 정권 변동이 아닌 바에야, 영영 회복할 수 없는 정치생명의 파멸선고였던 것이다. 인간에게는 동정이 있어도 역사에는 동정이 있을 수 없다. 4월 혁명을 단순한 정권의 변동만으로 생각한다면 우리의 장래는 불행하기 마련이다. 비록 4.19가 학생들에 의한 독재와 부지(부정)선거에의 규탄 항거였지만, 그것은 민주주의 기본이념의 재확인이었음은 물론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는 젊은 세대의 이념추구를 위한 현실참여였던 것이다. 이박사는 악정(나쁜 정치)의 통수자로서 불의 부정의 책임자다. 더구나 민의에 의한 혁명에 도괴(무너짐)된 정부의 제1인자이며, 스스로 도망했던 책임의 회피자이다. 수백, 수천의 생명을 빼앗고 젊음을 불구로 만든 간접살인자였다. 이러한 사람에 대하여 세월의 흐름과 함께 지나친 관용을 보인다는 것은 오로지 후진 한국의 분별없는 역사의식이요 낙후된 민족의 자기 모독일 수밖에 없다. 4.19의 영령과 부상자를 영웅이라 추앙했던 때는 언제이고, 원흉인 이승만을 국민장 또는 국장으로 하자는 것은 또 무엇이냐.
필자=4월 혁명 부상자

10. 관련 단체

11. 자료 영상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아카이브에서 제작한 소개 영상
당시 혁명을 보도하는 영국 방송 British Pathé. 시위대의 공격을 받아 파괴된 경찰 차량들, 시위와 전투로 인해 혼잡한 거리의 모습, 환호하는 서울 시민들, 학생 시위대의 모습, 강제로 시위대를 연행하는 경찰들의 모습 등이 담겼다.

12. 관련 문서


[1] 그냥 이렇게 4월 혁명으로 부르는 게 보통이지만 'April 19 Revolution'이나 '4·19 운동(April 19 Movement)'이라는 명칭도 쓰인다.[2] 뒤쪽에 보면 대한체육회 건물이 보이는데 이 건물 터에 더 플라자 호텔이 세워졌다. 정확히는 대한체육회 건물은 1966년에 철거되었고 건물이 있던 곳은 길거리로 편입되었으며 대한체육회 건물 뒤에 1976년 더 플라자 호텔이 준공되었다.[3] 이승만 정권 중 세워진 이 동상은 이승만의 81세 생일을 맞아 공사를 시작했기에 높이를 일부러 81척(25m)으로 맞춘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동상은 4.19 이후 분노한 시위대에 의해 끌어내려져 산산조각났다. 또 탑골공원에 있던 동상도 4.19 당시 시위대가 끌어내려 거리에 질질 끌고 다녔고 각 대학에 세워진 이승만 동상들도 혁명 이후 학생들에 의해 차츰 철거되었다. # 이 당시 파괴된 남산과 탑골공원 동상 잔해 일부가 성균관대학교 근처 명륜동 부근에 남아 있었는데 동상 잔해의 소유권을 두고 법정 싸움도 있었다고 한다.[4] 더 넓게는 2.28 학생민주의거가 일어난 2월 28일부터 잡기도 한다.[5] 사실상 자신의 직속 수하였던 이기붕을 통한 돌려막기는 독재정치의 도전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현대의 사례로 보면 블라디미르 푸틴드미트리 메드베데프가 대통령직을 돌려먹으면서 연임제한을 피했지만 실세는 푸틴이었단 점을 들어 푸틴을 독재자로 규정하고 있다.[6] 쉽게 풀어서 설명하자면, 이승만 정부 라고 봐도된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자유당 소속 대통령 이기 때문이다.[7] 1960년까지 집계[8] 1960년 당시 사정이 나은 도시의 공식 실업률만 30%에 달했으며 전 인구의 70%가 거주하던 농촌은 도시보다도 훨씬 열악했다. 너무 세금이 안 걷혀서 원조 농산물을 시장에 판 돈이 국가예산의 절반을 차지했을 정도.[9] 실제로 4.19 혁명 당시 서울신문사는 상당히 큰 재산 손실을 입었다. 민중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10] 경찰이 이따위 소리를 한 이유는 간단하다. 정권의 견찰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고바우 영감에서도 야당의원이 다리를 저는 걸 본 고바우 영감이 어쩌다 그리 다쳤나고 묻자 야당 의원이 '푸른 제복을 입은 개에게 물렸다고'라고 말했고, 후에 장면 내각 시절 가장 많은 숙청이 이뤄진 곳이 경찰이라는 곳에서 보듯 경찰이 얼마나 정권에 빌붙었는지 알 수 있다. 장면 내각의 민주당 자체도 당 이념이라든가 노선에서 자유당과 보수-진보 수준의 차이가 아닌데도 말이다.[11] 원래 제목은 '6.25의 뜻'이었는데 바꾼 것이다. 마감이 임박해 계창호(사상계 편집장)가 함석헌이 다 쓸 때까지 기다렸다가 제목을 못 붙인 원고를 넘겨받아 지프차로 귀사하는 동안에 붙인 것이라고.[12] 장준하 역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13] 출처는 매년 발행되던 조선총독부 사건통계로, 해당 항목에서 서당이 보통학교에게 추월당한 시기는 1920년대 중반이다.[14] 같은 시기 일본 본토의 초등교육기관 취학률은 90%를 상회하였고 문맹률은 26%에 불과했다.[15] 이는 북한에서도 마찬가지여서 1950년대 들면 북한에서 문맹은 거의 퇴치되는 수준까지 다다랐다.(공식적으로 1949년에 문맹이 전부 퇴치되었다고 한다. 물론 신빙성이 있는지 의문이겠지만 그만큼 문맹 퇴치가 빨리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지금도 논란이 있다.) 다만 북한은 1956년 8월 종파사건 때 반대파의 싹이 확 잘려 버리는 바람에 이후 학생운동이 꽃을 피우지 못했다.[16] 참고로 현재와 비교하자면 웬만한 대규모 대학의 전체 학생 수가 약 1만 명 정도 된다. 즉, 1945년 당시에는 전국의 대학생 규모가 현재의 1개 대학 학생수만도 못했던 것.[17] 당연하지만 대학 교육의 질적인 수준에서는 큰 차이가 있었다.[18]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발표할 무렵 집계된 실업률만 30%에 달했으니, 아마 진짜 실업자들을 엄밀히 다 조사하면 실제 실업률은 훨씬 높았을 것이다. 얼마나 실업률이 높았느냐 하면 군대를 제대하자 취직이 하도 안 되어서 군대에 있던 자기 부하 장교한테 뇌물을 주고 다시 군인이 되게 해 달라는 청탁 사건까지 있었을 정도였다. 당시는 똥군기가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심했는데도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건 그만큼 살기 어려웠다는 말밖에 안된다. 출처: 실업이 바꾼 세계사/ 도현신 지음/ 서해문집/ 2017년 11월 25일 발행/ 246~247쪽[19] 부산정치파동 때의 일화로 이승만은 발췌 개헌안이 날치기 통과된 뒤에 2개 대대 규모의 병력을 부산에 배치해서(참고로 이때가 1952년으로 6.25 전쟁이 한창이었다)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것을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이종찬이 군대는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며 군의 정치적 중립을 강조한 '육군본부 훈령 217호#'를 전 육군에 하달했는데, 이로 인해 이승만은 이종찬에게 불쾌함을 품어 이종찬이 총장직에서 사임하게 된 것은 물론, 이종찬이 해임되기 얼마 전 신임 유엔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가 부임해 이승만이 장군들을 소개하며 인사시키는 자리에서 이승만은 이종찬을 소개하며 대놓고 면전에서 그의 할아버지 이하영을 들먹이며 이 사람(이종찬)의 할아버지는 한일합방 때 도장 찍어 나라 팔아먹은 양반이라고 제대로 모욕해 버렸다. # 제1공화국의 3대 전남도지사(1951년 12월 17일~1953년 11월 22일)로 이승만과 김구 모두와 친분이 있었던 이을식(1897~2007)은 2005년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피란수도 부산에서 이승만이 대통령 연임을 위한 직선제 개헌을 시도, 강행했을 때, 이승만을 찾아가 "초대 대통령만 하시고 (물러나서) 조지 워싱턴처럼 국부 노릇만 하시라"고 진언했으나 이승만은 오히려 이을식에게 화를 냈고, 이후 이을식은 이승만이 하야할 때까지 그와 만나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20] 3대 대선 직후인 1956년 5월 26일 국내 기자단이 '이번 선거를 어떻게 보십니까?'라는 질문에 이승만은 "이번 선거 결과로 보아 친일하는 사람과 용공주의자들을 지지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라고 발언한다. '친일하는 사람'과 '용공주의자'라는 것은 3대 대선에서 이승만 본인의 경쟁 후보였던 해공 신익희와 죽산 조봉암을 가리킨 것인데, 당시 신익희는 "내가 대통령이 된다면 일본 지도자와의 회담할 용의가 있다"며 '(조봉암과 마찬가지로) 일본과의 국교를 정상화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초대 농림장관 조봉암은 좌익 전력이 있다가 우익으로 전향해 농지개혁을 주도한 사람이었다.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 서중석은 프레시안과의 대담에서 이승만의 이 대답을 "국민을 위협하고 편가르기를 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21] 3.15 부정선거 4년 전인 1956년에 민주당 후보로써 부통령으로 당선되었던 장면의 회고록에 따르면, 이승만 대통령이나 자유당 인사들은 민주당 출신의 부통령을 철저하게 무시했다.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그해 8월 15일에 취임식이 있었는데, 취임식장에서 자기 의자가 어디 있는지도 가르쳐 주지 않고 방치해서 자리를 모를 정도였고, 또 장면이 부통령 취임사를 써서 가지고 간 것도 이승만 쪽에서 대통령 취임사만 하고 부통령 취임사는 못하게 했을 뿐 아니라, 식장에 모인 사람들한테 '이 사람이 누구다', 이렇게 소개하는 게 자리에서 정부 3부 요인이며 외국 대사들도 다 소개하면서 신임 부통령이었던 장면은 소개하지 않았고, 결국 식이 끝난 후 성명을 발표하는 걸로 취임사를 대신했다. 장면은 이를 두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며 회고록에서 분노를 드러냈다. #[22] 홍진기에 따르면 조병옥이 이승만과 대결할 수 없다고 하면서 후보 사퇴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이와 비슷한 증언은 당시 정치부 기자들한테서도 나왔다. <출: 홍진기, '나의 혹중회고', 신세계 1962년 2월호. p208~p209.[23] 출처 - 학민사편집부 편, '혁명재판', 학민사, p39.[24] 1990년대 이후 고등학교 학생운동의 맥이 끊겼고 고등학교 학생운동단체 자체는 존재하지만 그리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하기 때문에 고등학생들의 시위라고 하면 낯선 느낌이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생업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던 데다가 중학교 입학하는 데도 시험을 치르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던지라 고등학생쯤 되면 이미 다 배운 성인 취급했고 사회 참여 역시 빈번했다. 물론 명문고가 존재하는 등 고등학교가 서열화되어 있는 것도 한 이유여서 상위권 고등학교가 그 주체가 되었다. 반면 의외로 대학생들의 사회 참여는 저조했는데 어려운 가정 형편에 역시 어렵게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여 신분 상승의 길을 걷기 위해 대학에 입학하다 보니 체제순응적(출세지향적)인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대학생들의 미적지근한 사회 참여에 열 받은 고등학생(!)들이 대학 앞에서 시위하는 일도 있었을 정도다. 사실 4.19 혁명이 이후 대학생들의 적극적인 사회 참여의 신호탄이 된 사건이다.[25]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대구는 조선의 모스크바라고 불릴 정도로 좌익 성향이 강한 지역이었다. 대구는 제1공화국 당시에도 야당 지지 성향이 매우 짙었으며 반 자유당 성향이 아주 강한 지역이었다. 또 민족주의적 성격도 강했는데 1907년에 있었던 국채보상운동의 시발점이 바로 대구였다.[26] 원래는 명덕로터리(오늘날 명덕네거리)에 기념탑이 있었지만 훗날 두류공원으로 이전했다.[27] 이 시위는 대전에서 발생한 최초의 학생운동 시위였는데 시위를 한 학생들은 나중에 이를 3.8 민주의거라고 불렀다. 3.8 민주의거는 2013년 사건 발생 53년 만에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되었다. 3.8 민주의거에 참여한 대전 지역 고등학교는 대전고, 대전상고, 대전공고, 보문고, 대전여고이다.[28] 현 환일고등학교.[29] 현 용문고등학교[30] 4.19 혁명 이후 폐교되었다고 한다. 참고[31] 현 동국사대부고[32]개성고등학교[33]가야고등학교[34]부산정보고등학교[35] 1980년 폐교[36] 이런 사전투표로 인해 어떤 지역에서는 이승만, 이기붕을 찍은 표가 실제 그 지역 선거인 숫자보다 많아 표를 태우는 일도 일어났다.[37] 후술하듯 이는 경찰 당국의 은폐와 사체 유기에 의한 것이었다.[38] 이승만에게 가장 충격을 주었다. 이는 군대가 이승만에게 등을 돌렸다는 것이기 때문이다.[39] 김정렬은 정확히 20년 후인 1980년, 친구인 최규하에게도 하야를 진언해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도록 하는 데 기여했다.[40] 출처- 김정렬, '김정열회고록', 을유문화사, 1993년, p268~269.[41] 재미있는 것은 당시 서울시내 치안 유지를 계엄군 외에도 각급 학교에 맡겼다는 사실이다. 4월 27일 허정 권한대행과 송요찬 계엄사령관은 시민들의 안녕과 질서 유지를 위해 이 같은 조치를 요청했고 예컨대 시경과 종로경찰서는 동국대학교가 담당했다.[42] 하지만 일가족 자살에 의문을 제기하는 시각도 존재한다. 타살일 가능성도 있다는 음모론이 있다지만 확실한 것은 불명이다. 야인시대에서는 일단 영상으로는 이승만에 양자로 들어갔던 큰아들 이강석이 가족을 죽이고 자신도 자살하는 걸로 묘사했으며 나레이션을 통해서 타살이라는 설도 있음을 밝혔다.[43]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1960년 5월 29일 하와이로 망명했던 이승만은 한국을 떠날 때 영구 망명을 생각하진 않았다. 그는 한 달 정도 잠시 피하는 걸로만 생각했다. 하와이에서 이승만은 향수병에 걸린 나머지 한국에 돌아오고 싶어 1962년 3월 17일자 비행기표까지 끊어놓고 1962년 3월 16일 사과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박정희 군사정권은 그의 귀국을 막았다. 1962년 3월 17일 박정희는 "AP보도에 의하면 이승만 박사가 귀국에 앞서 사과문을 발표하였다 하는데 사과문을 발표하였건 아니하였건 정부의 허가가 없는 한 귀국하여서는 안 된다고 총영사에 지시하라. 사과문을 발표하더라도 거기에 대하여 국민의 감정이 풀릴 시간적 여유가 필요하다."고 특별지시를 내렸다. 1962년 3월 18일자 신문들도 사설을 통해 이승만의 귀국을 반대했다. 한국일보는 "혁명재판이 진행 중이며 혁명정부에서 제정 공포한 정치활동정화법에 의해서 구 정치인들의 다수가 정치 활동을 금지당하게 될 심사업무가 개시되려는" 때라고 하는 시점을 문제 삼았으며, 경향신문은 "전비(前非)를 완전히 뉘우치지 못한" 걸 반대 이유로 제시했다. 출처: 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3권/ 47쪽[44] 박정희 정권은 정권이 안정된 시점에 이승만 귀국을 허가했지만 너무 고령으로 비행기를 탈 수 없는 상황이라 결국 죽은 뒤에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45] 이승만은 1954년 아이젠하워(아이크)의 초청으로 미국에 국빈방문했던 적이 있고 아이젠하워는 1960년 6월 방한하였다.[46] 우선 이승만 정부 시절 경찰들 중 상당수가 일제에 충성하면서 독립운동을 탄압했던 친일파 출신이어서 민중들로부터 미움을 받았고 당시 경찰들의 민중을 상대로 한 인권 유린 행각이 매우 심해서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경찰서로 끌려가 고춧가루 물고문 같은 고문에 시달리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더구나 경찰들의 월급이 매우 낮아서 대다수 경찰들이 시민들을 상대로 협박과 폭력으로 금품을 갈취하는 일이 많아서 그만큼 원망의 대상이었다. 게다가 그 당시 경찰을 살해하는 행위는 100% 사형 선고 및 처형되었다.[47] 마침 국제정치계에서 일던 제3세계의 비동맹주의 중립화론이 국내 지식인과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유입되기도 했고 이 영향으로 민족통일연맹(학생)과 민족자주통일협의회(혁신계 정치인) 등 남북통일을 주장하는 모임이 결성되어 활동하기도 했다.[48] 박정희는 4.19 1주년이 되면 1주년 기념 시위로 사회가 혼란스러울 것이라 생각하고 쿠데타를 준비하였지만 그 날이 생각보다 조용해서 수틀려 버려 무산되었다는 말이 있다. 한편, 박정희는 자신이 쓴 '우리 민족의 나갈 길'이란 책에서 이승만 정권에 대해 '독재정권 12년동안 전기 인프라도 깔지 못한 채 빈부격차가 악화되었다. 세계에서 우리나라는 병들고 외로운 섬이었다.', '토지개혁은 빈농을 만들고 농민의 현물 부담을 과중하게 만들었으며, 지주계급의 토지증권을 산업자본으로 전환시키지 못했다.'라며 비난했다.[49] 장면 총리는 가르멜 봉쇄수녀원으로 도망친 다음 날 수녀원에서 나올 때 이미 늦은 거 같아 막으라고 지시하지 않았다고 한다. 윤보선 대통령은 당시 본인이 대통령임에도 불구하고 의원내각제인 당시에는 대통령의 권한이 약하여 힘을 쓰지 못했다. 그런데 쿠데타가 자신에게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해 쿠데타 진입지휘를 거부했다. / 출처:대한민국의 대통령들-강준식[50] 헌법 전문에 나와 있는 '4.19 정신 계승' 문구는 시민의 저항권에 대한 근거 내용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또한, 방어적 민주주의를 내세우자면 이승만 정권과 그가 가진 이념은 명목상 민주주의라고 하지만 현 체제의 적으로 판단할 여지가 있는 문구기도 하다.[51] 해당 내용은 제3공화국 헌법부터 처음 들어갔으며, 제5공화국 헌법에서는 이 부분이 삭제되었다가 현 체제부터 다시 추가되었다.[52] 이들은 2023년 기준으로 70대 후반, 80대 초반인 할아버지, 할머니뻘 세대다.[53] 이러한 주장들은 주로 조선일보뉴라이트, 뉴데일리가 주도하고 있다. 조선일보 같은 경우는 오래 전부터 이승만 재평가에 앞장섰는데 이미 90년대에 솔빛조선 미디어라는 사업부로 '이승만 - 초대 대통령의 나라 세우기'이라는 CD를 내서 팔기도 했다. 더불어 이승만이 독실한 개신교인이었다고 한기총까지 동상 건립을 시도하고 있으나 개신교계에서도 찬반 여론 대립이 워낙 엄청나서 갈등이 크다고 한다.[54] 다만 조선일보는 1965년 7월 24일자 사설 <지금이 자유당 천하인가>를 통해 "집권 시에 무슨 악독한 짓을 해도 해가 가고 세월이 흐르면 잊어진다는 나쁜 전통으로 국가와 사회기강을 흐리게 하여 만일의 경우 그에 기대고 싶은 저의라도 없는 한, 국무회의는 문학소년 같은 감상을 단호히 버려야 한다."고 이승만 추모 분위기를 강하게 비판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30년 후 조선일보는 이승만 찬양 움직임을 주도하게 되었다. 출처: 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3권/ 47~48쪽[55] 자식이 없던 이승만은 양아들이던 이강석(이기붕의 큰 아들)이 자살했기에 하와이에서 당시 30대인 이인수를 양아들로 받아들였다.[56] 그리고 이러한 '이벤트성' 의혹은 곧바로 사실로 밝혀졌다. 4.19 혁명을 맞아 유족에 대한 사과성명을 발표하면서도 한편에서는 서울행정법원에 '제주 4.3 사건 희생자 결정 무효확인' 항소장을 원고 대리인을 통해 제출한 것으로 확인됐다. #[57] 집단폭행과 린치가 포함되었는데 쓰러진 학술회 교수를 수차례 발로 밟거나 얼굴을 때리고 도망가는 교수에 물건을 던지고 따라가며 욕설을 했다.[58] 뉴라이트 대부분이 그렇듯이 안병직은 4.19 이후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해 자본론을 연구하고 한국이 미국의 경제식민지라고 주장했던 흑역사가 있다...[59] 중앙일보 사장 홍진기가 4.19 발포 혐의로 감옥에 갔다.[60] 해당 역에서 덕성여자대학교가 4.19 묘지보다 가깝지만 4.19 혁명 그 자체의 가치가 일개 대학과는 비교가 불가능한 위치이며 4.19라는 것이 강북구에서도 밀어주는 주요 랜드마크이다 보니 그렇게 정해진 듯 하다.[61] 꽃동네를 설립한 그 오웅진 신부 맞다. 김주열 열사와 오웅진 신부는 펜팔 친구였다고 한다.[62] 초대 민선 용산구청장, 16대 국회의원(용산).[63] 마산시, 진해시와 통합됐고 애초에 통합 전 창원시는 구 창원군이 승격한 것이 아니라 마산시 창원출장소의 동쪽 구역이 통째로 분리된 것이기 때문에 구 마산시와 계통상으로 유래가 같으며 통합 후에는 마산시의 역사도 당연히 승계한다.[64] 3.15 회관은 희생자들의 숫자를 상징하는 12개의 꺾어진 너울모양 현관이 있었으며 그 시절 마산시민의 문화공간(주로 공연이나 극장 상영)으로 활용되었고 1970년대 이후에는 마산MBC의 공개홀 용도로도 활용되었다. 2000년대 초에 건물이 너무 노후화되어 철거되었다. MBC경남 항목 참조.[65] 자세한 내용은 참조.[66] 참고로 동학농민운동 기록물과 같이 등재되었다.[67] 토머스 제퍼슨의 명언에서 따옴.[68] 이 예언(?)으로 이후 4월 30일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폐간 명령을 받았고 필자인 주요한과 사장 한창우는 사법처리됐다.[69] 부모형제들에게 총부리를 대지말라 라는 구호를 내세워 4.19 혁명에 참여한 국민학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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