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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3-22 22:46:48

김주열 최루탄 피격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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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시신 발견4. 여파5. 가해자6. 관련 문서7. 둘러보기

1. 개요

3.15 의거에 참가했던 마산상업고등학교(現 마산용마고등학교) 1학년[1] 김주열이 시위 중 경찰이 쏜 최루탄이 눈에 관통해 즉사한 사건.

2. 상세

1960년 3월 15일 마산에서 부정선거가 발생해 학생들과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시위를 벌였고 이를 목격한 열렬한 민주당 지지자 였던 김주열의 이모할머니는 김주열과 김광열[2]에게 시내에 나가 보라고 했다. 김주열 형제 역시 시위에 합류했고 경찰이 최루탄을 쏘자 김주열 형제는 서로 흩어지지 않으려 손을 잡고 있었으나 아수라장이 된 시위현장에서 손을 놓쳐 헤어지고 만다.[3]

김광열은 집으로 겨우 돌아왔지만 김주열은 돌아오지 못하고 실종되었다. 김주열의 어머니인 권찬주는 아들이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급하게 마산으로 달려왔지만 아들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고 김주열이 살해당해 경찰이 경상남도청 앞 저수지에 시신을 투기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이를 듣고 마산 시민들과 잠수부들이 저수지에서 물을 퍼냈지만 끝내 김주열의 시신조차 나오지 않았다. 마산에 거주하던 학생들과 시민들이 김주열 이라는 이름을 다 알고 있을 정도로 권찬주 여사는 포기하지 않고 실종된 아들을 수소문 했으나 결국엔 찾지 못했고 결국 아들의 행방을 찾지 못한 권찬주는 어쩔수 없이 마산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하필이면 권찬주 여사가 버스를 타고 어쩔수 없이 마산으로 돌아간지 3시간후 마산 중앙부두의 한 고등학생의 참혹한 시신이 떠올랐다.

3. 시신 발견

[ (시신 포함) 사진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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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열 열사 시신이 발견된 장소[4] 당시 시신의 모습

1960년 4월 11일 오전 11시 30분경. 김주열군이 실종 27일만에 마산 앞바다에서 눈에 최루탄이 박혀 있는 변사체로 떠올랐고 그걸 어부 김기돈이 발견했다. 김주열의 어머니 권찬주를 돕던 허종 기자가 간발의 차로 경찰보다 빨리 마산 중앙부두에 도착해 사진을 찍었고 단번에 저 처참한 시신이 김주열 이라는걸 알아보았다고 한다.

주열군의 시체가 시청 쓰레기차에 실려 마산도립병원으로 옮겨지자 수많은 시민들이 병원을 애워싸고 있는 경찰병력을 뚫고 시신을 확인한후 학생들과 시민들은 충격에 휩싸였고 마산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하고 만다.

박종표를 비롯한 경찰은 몰래 시신에 돌을 메달아 마산 앞바다에 버렸지만 실종 27일 만에 밧줄이 풀리면서 김주열의 시체가 발견되었고 이걸 본 마산 시민들이 분노하여 4.19 혁명으로 이여졌다. 김주열의 시신은 바다가 매우 차가웠던 탓인지 부패조차 되지 않았고 이 사건의 범인인 박종표는 체포되어 실형을 선고받았다.

시신이 발견된 후에도 경찰은 사건을 덮는 데 급급했다. 화가 난 어머니가 '주열이 시신을 이기붕 집 마당으로 가져가 묻겠다'고 하자 경찰이 시신을 어머니에게 알리지 않은 채 도립마산병원(현 마산의료원)에서 몰래 빼내 남원 선산으로 가져와 장례도 없이 매장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경찰이 에워싼 채 매장해 가족들이 보지도 못했다.

또한 해당 사진이 퍼지게 된 계기는, 당시 부산일보 마산 주재 기자였던 허종이 바다 위로 떠오른 시신을 촬영해 신문으로 보도해서 국민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4. 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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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시내를 가득 메운 학생 시위대[5] 고문경찰 처벌과 구속자 석방을 외치는 마산여고 학생들[6]

김주열의 시체가 마산도립병원으로 옮겨지고 김주열 군의 처참한 몰골을 보고만 학생들이 제일 먼저 대열을 이루어 "살인선거 물리치자" 며 시가행진을 시작했다. 먼저 마산상고 학생들이 교문을 박차고 나와 불종거리를 거쳐 시청 쪽으로 향하며 마산고 학생들과 합류했다. 마고는 이미 1차 마산의거에서 김용실 군(1-C반 급장)과 김영준 군 등 다수의 희생자를 냈고 이는 상고도 마찬가지였던 데다 시신의 주인공 김주열 군은 상고 신입생이었기 때문.

3.15 의거 기념사업회의 기록에 의하면 이때 학생들 중 일부가 마산여고와 성지여고로 올라가서 시위에 참여하라고 교문 밖에서 독려시위를 진행했다. 처음에는 여고생들이 시위에 합류할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교사들이 학생들이 교문 밖으로 나갈 수 없게 하려고 신발을 전부 감춰 버렸기 때문이었다. 결국 안전을 이유로 마산여고 교장이 직접 학생들을 인솔하고 나오는 풍경이 벌어졌다. 그런데 이런 장면이 사진 기자의 카메라에 포착되었고 이 사진은 전국판 신문에 실리며 타 지역의 시위 열기에 다시 불을 붙였다.

4월 11일 시위는 학생들만 참여한 것이 아니었다. 이날 시위에는 중년 여성들도 많이 있었다. 이들은 "죽은 자식 살려내라!", "김주열을 살려내라!", "차라리 우리도 죽여달라!" 고 절규하며 시위대의 행진에 함께하였다. 또 특이한 점은 해인대학교(現 경남대학교)학생 5,000~6,000명[7], 그리고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도 시위에 참여했다는 점이다. 이 정도면 시민들의 분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시민들은 학생들을 향해 박수를 보냈고 시위 대열에도 합류했다. 이윽고 오후 6시경 성난 3만여 명의 시민들이 대대적인 봉기에 나섰다. 이날 마산시청와 마산경찰서가 시위대에 의해 습격당했다. 또 남성동, 북마산, 오동동, 중앙동, 신마산파출소가 파괴되었으며 자유당 소속 허윤수 의원의 집과 그가 경영하던 공장들도 시민들에 의해 부서졌고 시민들은 마산경찰서 습격 당시 탈취한 수류탄 13개를 탈취하여 경찰서 건물에 던지기까지 했다. 이외에도 경찰서 앞 서장 지프차가 전소되기도 했다. 당시 파괴된 남성동파출소

그날 밤 9시 30분경 경찰은 또 발포했고 한 명[8]의 시민이 사망했다. 하지만 이는 마산 시민들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고 마산 시민들은 경찰들과 공방전을 벌이며 대치했다. 시위대는 자유당 마산시당, 서울신문[9] 마산지사, 국민회 사무실, 마산경찰서장 관서, 마산소방서, 마산시장 박영두의 집 등을 파괴하며 기세를 올리다 밤 12시경 해산했다.

시위는 11일부터 13일까지 3일간 이어졌고 마산의 행정은 온통 마비되었다. 12일에는 시민들의 시위가 재차 일어나 학생 수백여 명을 포함한 수천여 명의 시위대가 마산 시내를 온통 휩쓸었고 노인들까지 시위에 동참하였다. 13일에는 비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해인대생[10] 수천 명이 시위를 했다. 매번 시위 때마다 고등학생, 대학생을 비롯하여 학생과 시민 수천여 명이 모여 김주열의 죽음에 대한 정부의 책임을 묻고 3.15 부정선거를 규탄했다.

이 때도 정부는 공산당의 사주가 있다면서 사건의 본질을 호도하려고만 했다. 정부에서는 2차 마산 시위를 공산당이 사주한 것이라고 몰아붙였고 이승만 대통령은 같은 날 난동 뒤에 공산당이 있다는 특별담화를 발표했으며 15일에도 공산당 선전 때문에 마산 "폭동" 이 일어났다는 담화를 발표했다.[11] 정부는 국무회의에서 소위 "대공 3부 합동수사위원회"를 구성해 "적색분자들의 준동 혐의에 대해 과학적으로 수사하겠다" 고 하는 한편 "이번 사건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고무되고 조종된 것" 이라고도 하였다.

이 즈음 시위에 참여한 학생들의 수는 다음과 같다.

5. 가해자

가해자 박종표일제강점기부터 헌병보로서[12][13] 독립운동가들을 모지게 고문했던 악질 친일반민족행위자인데 8.15 광복 이후 철도청 부산공작소에서 일하다가 1949년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지만 검찰은 공민권 3년 정지라는 가벼운 형을 구형했다. 근데 그마저도 재판부는 아예 무죄를 선고하면서 풀어줬다. 당시 박종표는 재판정에선 과거를 반성하고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말했지만 이는 거짓말이었다.

1960년 3.15 부정선거가 터지자 마산에서 1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시위했는데 시위대에게 무차별 발포를 하도록 명령을 내린 인물이 바로 이 사람이었다. 더 나아가 김주열이 죽었다는 소식을 확인하자 시신을 지프차에 싣고 마산시 월남동 마산세관 앞 해변가에서 큰 돌을 여러 개 매달아 바다에 빠뜨렸다.

4.19 혁명 이후 혁명재판소에서 시신 유기와 최루탄 발사 혐의를 모두 인정하고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나중에 무기징역으로 감형됐으며 박정희 정권의 사면으로 최종적으로 7년으로 감형됐다. 3.15 의거사 편찬 위원장이자 지역 신문 언론인 홍중조의 증언에 따르면 출소 후 일선에서 물러난 다음 1994년까지 부산의 서면에서 식당을 운영했으며 그와 동료 지간인 마산 경찰들도 자주 왕래했다고 한다. 이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6. 관련 문서

7. 둘러보기

대한민국의 경찰 관련 사건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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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43년생. 1년 유예해서 당시 고1이었다.[2] 김주열의 형[3] 이때 김주열은 경찰이 무차별 난사한 최루탄이 눈에 관통당해 피살당했고 김주열의 시신이 돌아오면 국민들이 들고일어나 대규모 항쟁을 벌일거라 판단한 박종표가 시위 도중 소방차가 전신주를 들이받아 정전이 되어 캄캄하고 아무도 없는 마산 중앙부두에 눈에 최루탄이 박힌 김주열의 시신을 돌과 함께 매달아 유기해버렸다.[4] 현재는 창원시 및 김주열 기념 재단측에서 인양장소 안내비, 추모공원, 동상까지 건립하여 번듯한 추모공간이 되었다.[5] 바로 위 문단의 상고-마고 연합 스크럼이다. 사진을 확대해 보면 모자의 교표에서 앞줄은 마고, 그 뒷줄은 상고. 그 다음줄은 마고..인 것을 알 수 있다. 촬영지는 현재의 오동동으로 추정된다.[6] 당시 마산여고는 현 경기여고 교복과 비슷한 흰 양장 칼라에 검은색 바지 교복이 특징이었다. 성지여고의 경우 세일러 칼라였기 때문에 이 시기를 살던 마산 시민들에게는 한눈에 구분이 가능한 부분이다.[7] 이때까지만 해도 대학생들의 참여는 상대적으로 미진한 편이었다. 앞 주석 참고.[8] 당시 신문자료는 물론이고 역사책에서도 '2명'이 사망했다고 기록하였다. 하지만 정작 의거 당시 사망자 12명의 신원과 사망 경위를 보면 2차 항쟁 당시 사망자는 1명으로 나타났다.상황일지에도 4월 11일 경찰 발포로 1명이 죽었다고 나와 있다. 참고로 당시 사망자 12명 중 9명은 제1차 마산의거로, 1명은 제2차 마산의거로, 2명은 4월 26일의 시위 당시 각각 사망하였다.[9] 서울신문대한매일신보 시절에는 강한 야당 성향을 보였지만 조선총독부에 인수되어 매일신보가 된 이후 철저하게 집권여당 성향의 어용신문이 되었다. 21세기 들어서도 서울신문은 정권이 바뀌자마자 논조가 바뀐다.[10]경남대학교[11] 그러나 이때는 부산일보와 동아일보가 이미 11일 당시에 취재하고 전국에 특종을 터뜨린 상태였다. 이때 기자가 훗날 할 말은 하는 정치인으로 국회의장까지 오른 이만섭.[12] 헌병보가 된 이유는 2대 독자로서 징병, 징용을 피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13] 당시 상관은 신상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