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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표시가 붙은 건물은 현재 창덕궁 영역이다. | |||||||||||||
경복궁 · 창덕궁 · 창경궁 · 덕수궁 · 경희궁 |
대한민국 사적 제123호 창경궁 | ||
<colbgcolor=#bf1400> 창경궁 양화당 昌慶宮 養和堂 |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와룡동) | |
건축시기 | 1484년 (창건) 1730년 (중수) 1833년 (중건) |
<colbgcolor=#bf1400> 양화당[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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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창경궁의 침소이다. 통명전의 동쪽에 있다.창경궁은 대비들과 왕실 가족들의 거주 공간 확보를 목적으로 지은 궁이다. 그래서 왕실 구성원들은 다른 궁궐에 있을 때와는 다르게 비교적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건물을 사용했다. 때문에 창경궁 내전 건물의 경우, 어느 전각을 어느 지위 사람이 썼는지를 뚜렷하게 구분하기 모호하며 양화당 역시 마찬가지이다. 전반적으로는 왕실 내 최고위급 인물들이 많이 머문 곳인 듯 하다.
2. 이름
이름은 창건 당시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이던 서거정(徐居正)이 지었다.# '양화(養和)' 뜻은 '조화로움(和)을 기른다(養)'이다.현판의 글씨는 순조가 직접 썼다.
3. 역사
1484년(성종 15년) 창경궁 창건 때 처음 지었다. 1565년(명종 20년) 때는 명종이 양화당 뒷뜰로 유생들을 불러 시와 글을 짓는 일종의 논술 시험인 제술(製述)을 보게 하고, 현장에 있던 신하들에게 술을 내렸다.--#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의 다른 건물들이 전부 불탔으나 양화당만은 무사했다.##
1609년(광해군 1년)에는 소성대비(인목왕후)가 세자궁인 저승전에 머무는 것이 죄스러워 양화당의 사정합(思政閤)[2] 으로 대비를 옮겨 모시려다가 무산되었다.#
병자호란 이후 남한산성에서 돌아온 인조는 주로 이 곳에서 머물렀고#, 신하들과 사신들을 접견했다.##
1672년(현종 13년)에는 건물이 기울어지고 무너진 곳이 있어 보수했다.# 1730년(영조 6년)에는 창경궁의 경극당과 집복헌 온돌 밑에서 뼛가루와 해골 등 흉물이 나오자 창경궁 내전 일곽을 전부 수리했는데# 이 때 양화당도 철거하고 고쳐 지었다.##
1790년(정조 14년) 통명전 화재 때 정조와 신하들이 양화당이 타지 않은 것을 신기하게 여겼다.#
1830년(순조 30년) 3월 창경궁 내전 주요부에 발생한 화재로 불탔다. 그동안 창경궁의 여러 화재를 전부 비껴갔으나 이번엔 안타깝게도 그러지 못한 것. 3년 뒤인 1833년(순조 33년)에 복구했다. 1878년(고종 15년)에는 철종의 왕비 명순대비(철인왕후)가 여기서 승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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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 《조선고적도보》 양화당 |
일제강점기에 창경궁이 창경원이 되면서 많은 창경궁의 전각들이 사라졌지만 양화당은 살아남았다. 외부는 크게 바뀌지 않았으나 합각[3]에 서양식 창문이 생겼고, 측면의 외벽은 중방 위의 벽 빼고는 전부 창문만 있는 모습으로 변했다. 그리고 내부는 이왕직박물관 전시실로 바뀌면서 온돌을 제거하고 전부 마루를 깔았으며, 내부의 벽을 허물고 모든 칸을 한 공간으로 터버렸다.
1990년대에서 2000년대에 사이에 내부를 복원했고 이후 오늘에 이른다.
4. 구조
양화당의 모습은 크게 1484년에서 1730년, 1730년에서 1830년, 그리고 1833년부터 현재까지, 이렇게 세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제일 앞 시기(1484 ~ 1730)의 모습은 남아있는 자료가 별로 없어 자세하게는 확인이 불가능하나, 1730년(영조 6년) 개수 당시의 《승정원일기》 기사를 보면, 몸체는 3칸이고 4면에 툇마루를 두른 모습이었다 한다.# 두 번째 시기(1730 ~ 1830)의 모습은 《동궐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4.1. 《동궐도》의 모습(1730년 ~ 1830년)
<colbgcolor=#bf1400> 《동궐도》 양화당. 1830년(순조 30년) 화재 이전의 모습이다. |
- 기단은 장대석으로 쌓았고 계단은 정면에 하나 있다. 동측면의 기단은 계단처럼 쌓아 그 자체로 계단 역할을 하게 했으며 그 위에는 나무판 문을 달았다. 특이한 것은 정면 기단과 이어지게 담장을 쌓고 그 담장을 기단 측면의 나무판 문과 연결시켰다.
4.2. 1833년 ~ 현재
- 현재의 양화당 모습은 《동궐도》에서 묘사한 것과는 꽤 다르다. 기단은 장대석 3벌로 깔고 정면에는 4단의 계단을 2개 놓았으며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고 사각형의 기둥을 세워 건물을 올렸다. 지붕은 예전과 같은 팔작지붕이고 처마는 겹처마에 공포는 초익공 양식이다. 공포와 기둥 사이에는 소로를 놓았다.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는 양성바름을 하고 용두와 취두, 잡상을 올렸다.
- 정면 6칸, 측면 4칸의 총 24칸으로, 앞면과 뒷면의 대청과 이어지는 가장자리 칸은 툇간으로 구성했다. 가운데 2칸은 대청이고, 툇간과 대청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온돌방으로 되어 있다. 대청과 온돌방 사이엔 분합문을 달았다.
- 대청 2칸의 정면과 뒷면은 툇마루가 밖으로 드러나 있고 문을 두어 출입할 수 있게 했다. 대청을 제외한 앞면 칸 주위에는 쪽마루를 두고 가장자리엔 난간을 두었다. 이 난간은 중간 부분을 '아(亞)'자 형태로 장식하고 돌림띠대에 하엽동자[5]를 세워 돌난대를 받치는 모습이다. 서쪽에 정면 15개, 측면 3개, 동쪽에 정면 14개, 측면 3개가 설치되어 있다.
- 건물 바깥 면의 창호는 창문과 문을 포함하여 전부 띠살이다. 양 측면의 경우, 온돌방이 있는 2칸은 문선을 두고 가운데에 창을 놓은 뒤 나머지는 벽으로 마감했으며 북쪽(건물 뒤쪽) 툇간의 외면은 전부 벽으로 두었다. 남쪽(건물 앞쪽) 툇간의 외면은 벽 없이 창만 달려있다.
5. 여담
- 창경궁을 창건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지나가던 스님이 궁에 몰래 들어왔다가 양화당 근처에서 잡혔다. 이유를 물으니 도첩, 즉 스님 전용 신분 증명서를 신청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6] 성종은 벌로 이 중을 입대시켰다.(...)[7]#
6. 대중 매체에서
<colbgcolor=#bf1400> 양화당 뜰의 인조(이덕화 분) | <colbgcolor=#bf1400> 양화당 앞에서 포즈를 취한 소용 조씨(김현주 분)와 효종(김주영 분)# |
[1]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창경궁관리소.[2] 조선 초엔 양화당의 서쪽 온돌방을 사정합이라 따로 이름지었다. 그러나 후기로 가면서 유명무실해졌다.#[3] 팔작지붕 측면에 삼각형 꼴로 되어있는 부분.[4] 보통 한옥의 경우 단층(單層)이라 표현한다.[5] 荷葉童子. 연꽃 잎 모양의 짧은 기둥.[6] 거기다 이미 그 전 날 들어와 하룻밤 자기까지 했다고. 간도 크시네[7] 이처럼 죄인을 입대시키는 것을 충군(充軍)이라 하는데 일반 군직보다는 수군이나 국경수비대 등 힘든 곳으로 보냈다.[8] 摹寫圖. 베껴 그린 그림.[9] 사실 저 사진들이 다 멜랑꼴리(...)한데, 왼쪽 사진은 인조가 병자호란 당시 자신을 구하러 오지 않고 숨어있었던 김자점이 나중에 변명을 늘어놓자 이에 딥빡분노하여 싸커킥을 날리는 장면이고, 오른쪽 사진 속 효종과 소용 조씨의 모습은 화기애애 해보이지만, 실제 역사와 극 중에서는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철천지 원수 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