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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인민지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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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ttachment/2015-02-25_02.39.07.png
중국6.25 전쟁 참전 포스터[1]
朝鮮人民軍中國人民志願軍勝利萬歲![2]
조선인민군과 중국인민지원군 승리 만세!
1. 개요2. 성격3. 배경4. 중국 지도부의 격론5. 무장 및 부대 편제6. 소련의 소극적 개입7. 주요 전투
7.1. 북진하는 유엔군에 대한 전초전 (1950.10.25~11.5)7.2.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중공군 (1950.11.25~12.24)7.3. 중공군의 대공세 및 서울 재점령 (1950.12.31~1951.1.8)7.4. 유엔군의 서울 재수복 (1951.1.30~4.21)7.5. 중공군의 춘계 대공세 (1951.4.22~6.10)7.6. 지리한 공방전 (1951.6.10~1953.7.27)7.7. 철군 (1958)
8. 공군
8.1. 제1기 (1950.12~1951.9)8.2. 제2기 (1951.9~1952.6)8.3. 제3기 (1952.7~정전 협정)8.4. 총평
9. 인물
9.1. 역대 사령관9.2. 기타 인물
10. 평가
10.1. 신사적인 중공군 신화에 대한 비판
11. 여담12.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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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3]

1950년 10월 압록강을 넘어 한반도에 들어와 조선인민군의 우군으로서 6.25 전쟁에 참전한 중국 인민해방군이다. 1950년 10월 19일 한반도에 처음 진입한 이래,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이 맺어질 때까지 총 병력 약 240만 명 이상 참전하였다. 이 가운데 전투 중 사상자는 전사자 18~20만 명을 포함해 약 36~40만 명, 질병이나 사고 등으로 인한 사상자를 의미하는 비()전투 사상자 38~ 4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이들은 대한민국 국군유엔군의 적군이었으므로, 유엔을 공격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중국은 이들을 국가 공식 차원이 아닌 개인 차원에서 스스로 원해서 참전한 의용군으로 포장하기 위해 '인민지원군'이라는 명칭을 붙이고 "자발적으로 넘어간 지원세력이자 역사상 최대의 민병대"[4]라는 선전을 하였지만, 이들은 약간의 소련 공군 파일럿과 북베트남몽골 인민공화국에서 파병온 일부를 제외하면 전원이 중국 공산당의 정규군중국 인민해방군이었다.

대한민국 국군유엔군조선인민군을 압록강까지 밀어붙이며 6.25 종전과 남북통일을 눈앞에 두는 듯 했으나, 중공군의 침공으로 인해 후퇴하였다. 그 후 양측은 정전협정까지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지루한 공방을 계속하게 되었으며, 이 기간 동안 중부지방을 중심으로 한반도 내 산업기반은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중국은 정전 협정 후 현재까지도 중국인민지원군의 6.25 전쟁 참전을 항미원조(: 미제에 맞서 조선을 도움) 보가위국(: 가정과 국가를 지킴)라고 교육하며 애국, 민족주의 및 사상 교육의 소재로 이용하고 있다.[5]

2. 성격

抗美援朝,保家衛國(항미원조, 보가위국)
"미국에 맞서 조선(북한)을 도와 가정과 조국을 지키자."
마오쩌둥[6]
한국에서는 한중수교 이전까지는 주로 중국공산당의 군대라는 뜻으로 '중공군'이라 표현되어 왔고, 수교 이후 현재는 중국 정규군을 중국군 또는 중국 인민해방군 이름으로 부르게 되면서 중공군이라는 단어는 6.25 전쟁 시기에 개입한 중국군에 한정해 부르는 역사적인 의미로 주로 사용되고 있다.

3. 배경

국공내전을 벌이던 중국국민당중국공산당일본 제국의 침략(중일전쟁)을 계기로 일단 손을 잡았으나(국공합작) 1945년 일제가 제2차 세계 대전 끝에 패망하면서 더 이상 공동의 적이 없어진 중국 내부에서는 다시 제2차 국공내전이 발발하였다. 1946년부터 본격화 되었던 국공내전은 처음에 국민당군이 압도적으로 유리했으나 1948년 가을, 린뱌오가 만주지역에서 국민당군을 포위 섬멸하면서 전세가 역전되었다. 이는 국민당의 실정 및 전략적 실책 때문이었다. 이를 기점으로 중국전역에서 국민당군을 분산시키면서 게릴라전을 수행하던 인민해방군은 공세로 돌아서서 1949년 1월에는 베이징에 입성했고 3개월 만에 국민당군 170여개 사단을 분쇄하면서 장강(양즈강) 이북지역을 모두 점령했다. 인민해방군은 4월에는 장강을 도하했고 4월 23일에는 당시 수도였던 난징을 함락시켰다. 이어 6월에는 상하이, 10월에는 광저우, 11월에는 충칭을 점령하면서 윈난성 등 서부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대륙 전역을 손에 넣었다. 대륙에서 대부분의 거점을 잃은 국민당 정부는 1949년 12월 7일 본거지를 대만으로 옮겼다.

이후 인민해방군은 1950년 5월 1일에 하이난을 점령했고, 1950년 10월에는 국민당이 쫓겨간 타이완 섬에 대한 침공 작전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북한이 6월 25일 남침하여 6.25 전쟁이 발발하자 국민당이 몰락할 때까지도 동북아시아에 무관심했던 미국은 갑자기 이 지역에 대한 군사 개입을 강화했다. 그리하여 미 해군 제7함대가 대만해협에 포진하면서, 압도적인 미국의 해군력 때문에 중공의 대만침공작전은 불가능해지게 되었다. 게다가 인천 상륙 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면서, 북한 문제를 주시하고 있던 중공 지도부는 미국의 의도에 위기감을 느끼게 된다.

마오쩌둥저우언라이는 6.25전쟁이 공산주의측의 선제 공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UN군의 군사개입이 결정되자 각각 "조선에서 일어난 전쟁은 내전이므로 외부세력이 개입하는 것을 반대하며, 국제연합이나 미국 그 누구도 여기 개입하지 말라"는 담화나 성명을 내었다.

4. 중국 지도부의 격론

1950년 10월 1일 한국군 제3보병사단강원도 양양군에서 처음으로 38선을 넘어 북진을 시작하자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미 공군이 북한을 폭격하다 북중국경의 영공을 자주 침범하면서, 만주연변 지역을 오폭하기도 했는데, 이로 인해 미군이 북한 정권 뿐만 아니라 중공 정권을 겨냥하는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증폭되었다. 김일성은 전황이 밀리기 시작한 9월부터 다급히 중국의 개입을 요청했으나, 일단 중국 측은 건국한지 1년도 안된 정권이라 현안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기 때문에 개입을 주저했고, 유엔군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이틀 후인 10월 3일 저우언라이는 "현재 조선반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은 조선인들 간의 내전이므로, 남조선군이 38선을 넘는 것은 무방하나, 유엔군이 38선을 넘을 경우 이는 중국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겠다"는 최후 통첩성 성명을 내었다.[7] 하지만 미국은 여세를 몰아 한반도의 통일을 시도하기로 결정하였고 미국의 주도 아래 아예 유엔군의 북진과 한국 통일을 결의하는 결의안이 10월 7일 유엔총회에서 통과된 후 서부전선의 유엔군도 10월 9일 본격적인 북진을 시작한다. 출병에 앞선 최종회의에서 마오쩌둥순망치한이라는 고사를 인용하면서, "본토에서 싸우느니 조선에서 싸우는게 낫다"며 주전론을 내세웠고, 저우언라이는 "유엔군이 북중국경에서 멈출지도 모르니 일단 개입은 자제하고 지켜보자"는 신중론을, 린뱌오는 "우리가 미국을 이기기는 힘들다."는 비관론을 각각 제시했다. 하지만 한반도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펑더화이는 "조선의 지형을 고려해서 신중히 작전을 세운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며 마오쩌둥을 지지했고, 주더가 여기에 찬성함으로서 10월 8일 한반도 출병이 결정되었다. 이 참전결정은 중공 정권에도 상당한 스트레스를 주었는지 당시 중국의 5대 권력자이자 차세대 주자[8]중 으뜸이었던 당정치국 상임위원 런비스는 참전에 관련된 업무을 맡아 격무에 시달리다가 1950년 10월 27일 46세의 나이로 과로사했다.

여기에는 또한 북한과 중국 사이의 의리도 작용했는데, 국공내전에서 중국공산당이 수세에 몰렸을 1946~48년 당시 북한 측은 공산당 고위인사의 가족들과 부상병들을 수용해주었고, 특히 만주 지역에서 국민당군에 쫓기던 중공군이 북한 지역을 피난처로 삼을 수 있게 해주었다. 1948년 가을의 만주 전역에서의 승전이 국공내전의 전환점이 되었으니, 중공 측은 북한측이 유엔군에 두들겨 맞고 패망하는 것을 불구경 할 수도 없었다. 아울러 북한 지도부에는 무정, 김두봉 등 옌안 시절 중국공산당과 함께 일본에 맞서 싸웠던 조선인들이 상당히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만약 북한이 중국령이자 조선족 밀집지역인 연변 지역에 망명정부라도 세운다면, 소련이 이 지역을 북한에 할양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중국 정부가 유엔군에 직접 맞선다는 모양새가 되면 유엔에서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는 중국 정부의 노력이 수포가 될 수 있으므로, 참전군인은 "제국주의에 시달리는 조선 인민들을 가엾이 여겨 스스로 지원한" 자원병이라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중국 정규군인 인민해방군과는 별도의 조직인 것처럼 "중국인민지원군"이라는 이름으로 출병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사령관 선임에도 난항이 있었다. 마오쩌둥이 당초 사령관으로 고려했던 인물은 쑤위(粟裕)였다. 쑤위는 1920년대 난창 폭동 때부터 중국 공산당의 크고 작은 전투를 치른 역전의 지휘관이었고, 국공내전에서도 화둥야전군 사령관, 제3야전군 부사령관 등을 역임했다. 1950년 1월부터는 장제스가 쫓겨간 대만 공격 준비의 총책임을 맡고 있었다. 그러다가 6.25 전쟁이 발발하고 이에 맞서 유엔군이 결성되자, 마오쩌둥은 쑤위를 둥베이변방군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한반도의 정세 변화에 대비하는 책임을 맡겼다. 하지만 사령관으로 내정됐던 쑤위는 1950년 7월에 고혈압으로 쓰러졌고, 추가로 메니에르병 진단을 받아 치료를 위해 소련으로 이송되면서 임명이 불가능해졌다.

그 다음으로 고려된 인물은 린뱌오(林彪)였다. 린뱌오국공내전 당시에도 만주(둥베이) 전역의 지휘를 맡아 맹활약했고, 북-중 국경에 대기 중이던 병력들은 그가 수족처럼 지휘하던 제4야전군 예하 부대들이 대다수였다.[9] 그러나 린뱌오도 국공내전 시절 입은 부상의 후유증이 도져 국공내전 종식 후에는 공식 활동을 자제하고 칩거 중이었다. 마오쩌둥은 와병 중인 쑤위를 대신해 린뱌오를 임명하고자 1950년 9월에 그를 불러들여 의견을 구했다. 불려나온 린뱌오는 미군이 압록강을 넘어 중국을 침공한다면 그때는 자신이 직접 나서겠으나, 압도적인 미군에 맞서 승산이 없는 한반도 출병에는 나서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결국 마오쩌둥은 대안으로 시베이(西北)군구 사령관이던 펑더화이를 임명한다. 펑더화이는 지적인 면에서는 쑤위와 린뱌오보다 한 수 아래라는 평가였으나, 좀 더 상황을 긍정적으로 보는 뚝심이 있었다. 예방적인 한반도 출병에도 찬성하고 있었으며, 압도적인 미군을 상대하기가 어렵기는 하지만, 매복과 은폐에 능한 중공군의 특성을 최대한 살리고 미군의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들면 승산이 있다고 봤다. 그리고 이러한 예상은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다.

5. 무장 및 부대 편제

인민지원군 병사들은 인민해방군 병사와 거의 동일한 군복을 착용했다. 당시 중국군에는 계급이 없었기 때문에, 장교와 사병의 제복은 구분이 없었다. 다만 지휘관은 칼라에 자신의 직책을 나타내는 표시가 있었다.
파일:attachment/zhiyuanjun.jpg
인민지원군 병사들의 군복의 가슴에 붙이는 부대마크
인민지원군의 부대 단위는 소련군에서 이어져오는 제2세계 국가들의 교리대로 서방의 같은 단위보다 적은 정원을 가지고 있었다. 즉, 사단은 9,500명이 정원이었으며, 연대는 3,000명, 대대는 850명이었다.[10]
이들의 무장은 대부분 국공전쟁 말기의 무장과 동일했으며, 소련제 무기를 비롯하여 초반에는 일본군-만주군이 항복함으로서 입수한 일제 무기, 국민당군이 공여받았던 미제 무기, 체코슬로바키아제 무기, 심지어 독일제 무기까지 중구난방으로 운용하였다. 당연히 탄약수급은 개판일 수밖에 없었다.

다만 냄비 하나 들고 왔다거나 하는 건 거짓이다. 하다못해 중일전쟁기에도 항일대도쯤은 들고다녔다.

허나 수류탄만큼은 차고 넘칠 정도로 풍부해서, 전투시 한명당 여러개씩 소지하고 돌격 직전 한꺼번에 투척하는 전법을 썼다.[11]

전쟁이 계속될수록 소련이나 체코에서 수입하거나 이것을 중국에서 카피한 공산제 무기를 사용하게 되었고, IS-2SU-100같은 중전차, 구축전차, 카츄샤 다연장로켓까지 보유하게 되었다. 이들 강력한 신형 기갑 장비들은 이미 지리멸렬했던 구식 T-34-85, SU-76M따위와는 차원이 다른 위력을 보여주며 한국군과 유엔군에 포화를 쏟아붓게 된다. 다만 중공군이 전쟁 말기에는 2개 전차사단을 파병하는 등 기갑부대의 비중을 늘렸음에도 제공권을 장악한 UN군 공군의 폭격으로 대부분의 전차와 자주포는 전차호에 숨어 포격 지원을 하는 식으로 운용했다. 전차로 전선 돌파를 시도한 경우도 전혀 없진 않다.

6. 소련의 소극적 개입

소련은 6.25 전쟁 초까지만 해도 직접 참전은 극도로 꺼렸다. 당시까지도 제2차 세계 대전 피해 복구[12]가 끝나지 않은데다, 김일성의 불장난을 도우려다가 미국과 전면 전쟁에 돌입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13] 그러나 순조롭게 적화통일이 이뤄질 것이라는 기대가 인천 상륙 작전으로 산산히 깨지자 북한군에 대한 지원 강화를 강구한다. 1950년 9월 28일 유엔군이 서울을 수복하자 북한 조선노동당은 스탈린에게 소련군의 지원을 간청하고, 소련은 이에 북한 공군력 강화를 위해 북한 조종사들에게 최신 전투기인 MiG-15 훈련을 시켜주기로 결정한다. 이 임무를 맡은 부대는 소련군 제324항공사단으로, 북한 조종사 60명을 훈련시켜 이들이 항공전을 수행하게 할 예정이었다. 제324항공사단은 1951년에 MiG-15들이 도착하자 북한 조종사들과 함께 북한으로 전개하지만, 북한 영내 비행장에 대한 미 공군의 폭격이 심해지자 다시 중국 안둥으로 물러난다.

이와 별개로 마오쩌둥은 6.25 전쟁의 향방을 주시하며 저우언라이를 소련에 보내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원조를 요청했다. 1950년 7월부터 중국은 만주 지역에 동북변방군을 대기시키며, 소련측에게 이들이 한반도로 출병할 경우 공군 엄호를 제공해달라고 했던 것이다. 스탈린은 이에 동의하고 모스크바 부근에 있던 제303항공사단을 극동으로 파견, 1950년 9월에 랴오둥 반도에 전개한다.

소련군은 이렇게 속속 도착한 소련군 항공부대의 통제를 위해 1950년 11월에 제64전투비행단을 편성하고, 2개 항공사단 정도의 전력을 유지한다. 우선은 국공내전 지원을 위해 중국에 파견되어 있던 제106항공사단(이후 제50항공사단으로 변경)이 배치된다. 1951년 5월에는 제303항공사단이 안둥으로 전진배치되며, 안둥 지구의 제303, 324의 소련군 2개 항공사단이 주축이 된다. 소련 공군은 이렇게 제64전투비행단을 중심으로 중국 영내에서 최대한 정체를 숨기고 작전을 하고, 대신 소련군이 훈련시킨 중국 공군이 한반도로 들어가도록 한다.

이를 위해 1951년 5월 22일 스탈린은 중국측에 MiG-15 327대를 무상 공급할테니, 이를 이용해 구식 MiG-9를 보유한 항공사단들을 재편하여 한반도에 투입하라고 통보한다. 하지만 중국 공군도 북한 영내에 전개하기에는 어려움이 커서 계속 만주의 공군기지를 거점으로 활동한다. 결국 6.25 전쟁 후반기에는 소련 공군 2개 항공사단, 중국 공군 2개 항공사단, 북한 공군 1개 항공사단 등 도합 5개 항공사단이 MiG-15를 장비하고 미 공군과 대결하게 된다.

소련군은 자국의 개입 사실을 감추기 위해 자국 전투기들로 하여금 청천강 이북에서만 활동하도록 했다. 이렇게 MiG-15가 출몰하는 청천강 이북 압록강 연변 지역을 '미그 앨리(MiG Alley)'라고 했으며, 북한지역을 석기시대로 만들다가 뜻하지 않은 강적을 만난 B-29가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이러한 소극적인 공군 운용 때문에 1951년 7월 이후 한반도 중부에서 고지 참호전을 벌인 중공군은 압도적인 유엔군의 제공권에 수많은 인명손실을 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소련 공군의 참전 사실은 이내 미국측도 알아채게 되었다. 소련 항공사단들은 원래 참전 사실을 숨기기 위해 전투기 마크와 조종사 군복까지 다 중국군과 북한군의 것으로 바꾸고, 무선통신도 최소화하며 간단한 한국말 단어로 대신하게 했다. 하지만 당연히 전투 중에 이런 수준으로는 의사소통이 안 되니 소련군 조종사들은 답답해했고, 이내 교신을 러시아어로 공공연히 해댔다. 미군은 이러한 통신을 감청하여 소련 공군의 참전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도 소련과 공식적으로 싸워서 세계대전으로 확전되는 데 부담을 느꼈기 때문에 이를 그냥 덮어두었다. 소련의 개입 전모는 결국 냉전이 해소된 1990년대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밝혀졌다.

7. 주요 전투

7.1. 북진하는 유엔군에 대한 전초전 (1950.10.25~11.5)

미군의 정보부대들도 바보가 아니라서 감청과 공중정찰을 통해 중국군이 대규모로 개입하고 있다는 낌새를 알아 챘으나[14], 맥아더는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에게 "중국군? 그놈들은 일본군보다 약하다. 개입하기만 하면 희대의 대도살극이 벌어질 것.("There would be the greatest slaughter")"이라고 별대른 대비 없이 계속 압록강을 향한 진격을 계속했다. 이것은 굉장히 중공군을 무시한 발언이기도 했는데 그들 중에는 일본군, 국민당군과 싸우면서 전쟁을 수행한 베테랑들이 많았다. 게다가 대륙에서 내전 종식 기준으로 5개 야전군 550만명에 달하는 머릿수는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10월 16일에 선발부대가 압록강을 넘은 이후 10월 18일부터 본격적으로 본대가 신의주, 청수, 만포 세 방면에서 압록강을 도하했다. 이 당시 중공군의 규모는 서부전선에서 미8군과 대치한 제13병단 18만 + 동부전선에서 미10군단과 대치한 제9병단 12만으로 총 30만 명 내외로 알려져 있다.[15] 당초 중공군은 평양-원산 선 이북, 청천강-함흥 선 이남의 잘록한 지역에 방어선을 구축해 유엔군과 결전을 벌인다는 구상이었지만 유엔군이 예상 밖의 빠른 속도로 북상해 벌써 청천강을 넘어 평안북도 지역까지 진입하자 일단 유엔군의 북진부터 저지하기로 전략을 수정. 압록강을 건넌 지 일주일 만인 10월 25일 평안북도 운산군에서 처음으로 유엔군과 조우해 전투를 벌였다.

중공군은 운산-희천 축선에서 유엔군의 우익을 방어하던 국군 1사단과 6사단에게 큰 피해를 입힌 후 곧바로 유엔군의 후방을 공격, 유엔군의 북진을 저지하고 유엔군을 청천강 연변까지 밀어내었다. 그러나 유엔군의 강력한 저항과 보급 문제로 유엔군을 청천강 이남으로 완전히 몰아내는 데에는 실패하고 11월 6일 일단 공세를 중지하고 물러났다. 이후 중공군은 한동안 전면 공세는 하지 않고 소규모 충돌만 벌이면서 대치만 이어갔는데 유엔군은 이를 중공군의 전술적 취약성을 보여준 것으로 해석했고, 맥아더는 중공군의 기습을 물리쳤다고 생각하고 더욱 대담한 공세 작전을 펼친다.

한편 일종의 시험전으로 유엔군의 전력을 경험한 펑더화이는 휘하부대에게 미군의 약점과 강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미군은 매우 강력한 화력물량의 강점을 지니고 있지만, 도보 행군을 싫어하며, 야간전투에 약하고, 공군에 과도하게 의존한다."[16] 이런 평가는 후에 실행되는 중공군의 대공세의 작전계획에 기본 숙지사항이 되었다.

7.2.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중공군 (1950.11.25~12.24)

중공군은 1차 공세를 마친 후 다음 작전을 위해 청천강 북쪽 산악지역에 매복하고 있었는데, 맥아더는 아직까지도 중공군의 전력을 과소평가하며, 압록강까지 단숨에 쳐올라갈 대공세를 기획했고, "일이 빨리 풀리면, 우리 아그들 일부는 크리스마스까지 집에 돌아올 수 있음."마켓가든?[17]이라고 워싱턴에 호언장담을 했다. 미군의 각 부대에는 일본 도쿄 긴자의 쇼핑 전단지까지 배포될 정도였다. 이 대공세의 이름은 이런 호언장담에서 이름을 따서 크리스마스 귀향 공세(Home-by-Christmas Offensive)라고 이름이 붙었다.

11월 24일, 월튼 워커 중장이 지휘하는 미8군은 크리스마스 귀향 공세를 시작했으나, 이는 유엔군의 공세 시 대대적인 반격을 계획하던 중공군의 작전에 걸려든 것이었다. 펑더화이의 중공군 제13병단은 유엔군의 우익을 맡던 국군 2군단을 대상으로 집중공세를 가해 2군단을 와해시키고는 곧바로 산악지대에서의 우월한 기동력을 이용해 미8군의 후방을 공격했다. 중공군의 계략에 걸려들어 포위섬멸당할 위기에 처한 미8군은 남쪽으로 후퇴해야 했고 그 와중에 미 2사단은 개천에서 순천으로 후퇴하는 길에 매복해 있던 중공군 38군에 큰 피해를 입었다(군우리 전투). 충격적인 대패에 중공군과 전투를 벌일 의지를 잃은 미8군은 북한 지역 전체를 포기하고 무기력하게 38선까지 후퇴하였다.

한편 쑹스룬의 중공군 9병단은 함경도의 미10군단을 포위섬멸하기 위해 우선 장진호 일대에 매복하여 장진호 방면으로 진격 중이던 미 해병1사단의 포위섬멸을 시도하였으나 미 해병1사단은 여러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중공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며 흥남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하였고, 쑹스룬이 미 해병대를 잡기 위해 전력을 장진호에 쏟아부은 사이 나머지 10군단 병력은 거의 무사히 흥남으로 후퇴, 흥남에서 배를 타고 남쪽으로 철수하였다.

이때 전선에서 활약한 중공군은 대부분 경보병으로 이뤄져 있었으며, 화력이래야 75mm 산포박격포 정도가 고작이었다. 중공군은 비밀리에 소량의 트럭을 한반도로 반입하는데는 성공했지만 제공권이 없었기에 폭격에 취약했다. 따라서 대부분의 무기는 보병이 분해한 상태로 산을 넘어 이동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포병이나 공중지원은 거의 받지 못했지만, 자동차의 기동이 어려운 산악지형에서 보병의 기동력을 십분 활용한 포위전술에 매우 능한 모습을 보였다. 가장 즐겨 사용한 전법은 V자 전법으로 적이 V자의 한 가운데로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깊숙히 들어왔을 때 보병의 재빠른 기동으로 양 다리를 닫아 포위망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 매복과 위장을 철저히 실시하여, 유엔군은 공중정찰로도 이렇게 포진한 중공군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주간에 멋모르고 들어갔다가 야간에 숨어있던 이들이 뛰쳐나와 공세로 나오며 포위되기 일쑤였다. 일단 이들은 포위된 적을 대병력을 동원하여 어떻게든 섬멸했기 때문에, 엄연한 포위전술이며, 포위된 적을 섬멸하기 위해 적보다 압도적인 수의 병력을 투입하는 것은 전술교리상 당연하고 합리적인 것이다.

중공군은 이 대공세로 맥아더의 크리스마스 공세를 좌절시키고 미군을 후퇴시켰지만 미군의 강력한 화력 앞에서 희생을 감수하는 대담한 작전을 폈기 때문에 엄청난 손실을 보았다. 전투로 인한 병력의 손실 뿐만 아니라 영하 30~40도로 내려가는 북한의 산악지역에서 하루에 수십킬로미터를 도보로 행군시키는 초인간적인 작전을 펴면서 생긴 동상, 질병 등의 비전투손실도 극심하여 공세가 끝난 후에는 전 병력의 40%가 작전불능상태가 되었다고 한다. 백선엽 장군의 전후 회고록을 보면, 이 당시 중공군의 보급사정은 매우 열악하여, 중공군 사병의 식량은 그저 감자 몇 덩이, 실탄도 몇 발 휴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포로를 후송할 준비도 안 되어있었는지, 몇몇 중공군 부대는 잡은 유엔군 포로들을 무장해제 이후에 현장에서 즉시 석방할 정도였다.[18]

중공군과 인민군은 맥아더의 크리스마스 공세에 반격을 취한지 겨우 열흘 만인 12월 6일 평양을 탈환하고 더욱 남진하여, 12월 말에는 38선을 지나던 개성까지 이르렀다. 이로서 북진통일의 가능성이 높던 전쟁은 다시 원점으로 회귀했다.

여기에 12월 23일 워커 중장이 의정부 부근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악재도 터졌으며, 후임으로 매튜 리지웨이 중장이 8군 사령관에 부임했다.

7.3. 중공군의 대공세 및 서울 재점령 (1950.12.31~1951.1.8)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마오쩌둥은 의외로 전황이 잘 풀리자 맥아더와 마찬가지로 적을 과소평가하고 간이 커져 아예 한반도 전체를 "적화"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인민지원군에 38선을 넘어 진격하라는 무리한 명령을 내렸다. 중국이 6.25 전쟁에 개입한 명분은 미군이 38선을 넘은 것을 도발행위로 간주한 것에 따른 방어행위이기 때문에, 자신이 38선 넘어로 진격한 것은 빼도박도 못하는 내로남불인데다가 무모한 공격이나 마찬가지였다.

38선이 지나는 개성에서 일단 정지했던 중공군은 12월3 1일부터 대공세를 펴서 38선을 넘어왔다. 유엔군은 급격한 후퇴로 부대 정비가 안되어 있었기 때문에 취약했고, 중공군의 포위를 피해 서울을 내주고 일단 후퇴했다. 결국 1월 4일, 중공군과 인민군은 3개월만에 서울에 재입성했다.(1.4 후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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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1월 4일 중앙청을 점령한 후 기뻐하는 중공군
중공군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더 대담하게 공세종말점을 넘어 서울 이남으로 진격했으나, 재편성을 마친 미8군단과 10군단은 무지막지한 반격으로 나왔다. 인해전술에 얻어맞던 미군들도 익숙해져서 고화력 무기를 무차별로 투사해 섬멸하는 방식으로 대응해왔고 특히 미국과 UN군의 압도적인 제공권 아래에서 공중지원 없이 싸웠기 때문에 중공군은 미군의 화력에 큰 피해를 봤다. 애초에 숫자가 많다는건 그만큼 보급이 많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보급선이 길어지면 보급에 차질이 생길 수 밖에 없다. 후술하지만 미군을 상대로 승산이 있다고 생각해 총사령관에 앉은 펑더화이조차도 보급사정이 너무 열악하니 신경써달라고 몇번이고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와 싸워댔으니 말할 필요도 없는 셈. 그렇기에 장기전과 불필요한 진격은 어리석은 선택이나 마찬가지였고 그것이 현실이 되었다.

결국 중공군은 진격을 멈추고 방어에 나섰지만 준비된 미군의 지상, 공중화력은 너무나 막강해서 매복이 어려운 평지로 나온 중공군 부대들은 비전투시에도 폭격을 두들겨 맞으며 허구한 날 큰 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7.4. 유엔군의 서울 재수복 (1951.1.30~4.21)

1월 23일, 서부전선의 미8군은 공세로 나왔고(선더볼트 작전), 한강 이남의 중공군을 이북으로 철수시켰다. 동부전선에서도 미10군단이 라운드업 작전을 실시하고 공세로 나왔다. 2월 11일, 동부전선의 중공군은 역공을 펼쳤고(횡성 전투), 역시 중공군은 비교적 약체인 한국군에만 공세를 집중하여 한국군 8사단이 완전 궤멸되는 참사를 빚었다. 이 때문에 라운드업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19] 하지만 이렇게 물밀듯이 밀려오는 중공군의 공세는 역시 미군의 압도적인 공군력에 의해 많은 전력이 사그라들었고, 2월 15일 지평리 전투에서 미2사단과 프랑스 대대가 분투하여 간신히 막아냈다.

전년 11월부터 계속된 전투와 미군의 압도적인 공군력 때문에 중공군의 전력은 공세를 취할만한 상황이 아니었고, 미8군은 이렇게 약체화된 중공군에 대한 공세를 펴서 결국 3월 중공군을 서울에서 다시 몰아내고 재수복했다. 주인이 몇번째 바뀌었냐... 유엔군은 계속된 춘계공세를 펼쳐 결국 4월경에는 38선을 다시 넘었다. 이 시점까지의 전선상태를 "캔자스 라인"이라고 한다.

맥아더는 만주지역을 핵폭격하자는 제안을 하는 등, 여러가지로 조속한 정전을 원하는 행정부와 충돌했기 때문에, 4월 11일 유엔군 사령관직에서 해임되고, 그 후임은 중공군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리지웨이가 임명되었다.

7.5. 중공군의 춘계 대공세 (1951.4.22~6.10)

한편 유엔군의 반격에 의해서 38도선 이북까지 물러섰던 중공군은 1951년 4월 말 다시 한번 서울을 점령하기 위한 대공세를 실시했다. 이것은 3개 야전군 약 70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유엔군을 포착 섬멸하고 서울을 다시 탈취한다는 야심만만한 작전이었다. 중공군은 1951년 4월, 설마리/파평산 전투사창리 전투에서 역시 한국군을 공세의 대상으로 삼아 전선을 돌파하려고 했고 4월 30일 서울 북쪽 8km 지점인 의정부까지 도달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고질적인 약점이던 보급 문제와 미군과 영국군을 위시한 유엔군의 막강한 화력이 다시 발목을 잡았고 서울 코앞까지 도달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끝내 서울 재점령에는 실패했다. 전선돌파가 지지부진하자 일단 정지하여 전열을 정비한 중공군은 5월 15일 공세로 나왔으나 5일 후 다시 정지했다. 중공군이 공세종말점에 도달한 이 기회를 노려 유엔군은 대대적인 반격을 명령했고 급기야는 한 수 아래로 무시하던 한국군에게까지 대패를 당해 화천저수지의 이름을 파로호로 바꾸게 만드는 굴욕까지 당했다. 5월 1일 노동절에 서울에서 시가행진을 하겠다며 자신만만해 한 중공군 수뇌부의 예상과 다르게 춘계 대공세는 4월 말 공세를 시작할 당시의 전선 위치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10만이 넘는 사상자만 낸 채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귀중한 소련제 122mm 야포를 포함한 다수의 중화기와 장비도 중공군이 상실하는 등 공세 실패의 여파는 컸다.

7.6. 지리한 공방전 (1951.6.10~1953.7.27)

양측이 서로 죽을 각오로 크게 맞붙었던 마지막 시점인 춘계 대공세 이후 양측 모두 서로를 힘으로 완전히 꺾을 수 없다는 현실을 인정했고 그리하여 1951년 6월 10일부터 휴전협상이 개성에서 시작되었지만, 휴전협상이 열리는 개성, 나중에는 판문점 일대를 제외한 전 전선에서는 계속해서 전투가 벌어졌다.

휴전협상의 주 의제는 휴전 이후 군사분계선의 설정 문제와 포로의 처우 문제였다. 공산군은 전쟁 이전 38선으로의 복귀를 주장했으나, 유엔군은 현 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그대로 유지할 것을 주장하면서 서로 대립하였다. 1951년 10월 유엔군이 추계공세로 전선을 10km 정도 북상시키면서 유엔군에게는 아직 전선을 북상시킬 능력이 있음을 상기시키며 압박을 주자 공산군은 1952년 1월 27일 현 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설정한다는 데에 동의하면서 군사분계선 설정 문제는 마무리 되었다.

이후에는 포로의 처우 문제가 주된 화두가 되었는데, 유엔군이 생포한 반공포로는 큰 문제를 야기했다.

북한군의 경우는 이념에 상관없이 강제징집되었다가 포로가 된 사람이 많고, 중공군의 경우는 국민당군 소속으로 있다가 국민당군이 항복하면서 자의에 반하거나 분위기에 휩쓸려 공산군에 편입된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공산측으로 소환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엔은 포로의 자유의사를 존중하자고 했지만, 공산측은 송환거부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를 거부했고, 무조건 전원 송환을 요구했다. 여기에 한국 측이 1953년 6월 18일 유엔군과의 협의 없이 2만 7천 명의 반공포로를 임의로 석방하여 큰 문제를 야기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이런 반공포로들은 결국 중립국인 인도에 남겼다가 인도가 자유의사에 따라 처리하는 걸로 마무리 되었다. 이들의 상당수는 대한민국이나 대만행을 택했지만, 남과 북, 중국과 대만 모두를 거부하고 제3국행을 택한 이들도 소수 있었다.

중공군과 유엔군은 휴전협상 동안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고지전을 벌였고, 휴전협정이 조인될 무렵인 1953년 7월 10일경, 중공군 측은 24만의 병력을 동원하여 금성 돌출부(당시 강원도 금성군, 현재는 북한 강원도의 김화군)에 포진한 한국군(4개사단, 약 9만 명)에 대한 대공세(금성 전투)를 펼쳐 남한군과 미군을 4km 정도 밀어내는데 성공하였으나 철원 평야와 화천군 전체를 장악한다는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했다. 거기에다가 중공군의 사상자가 미군과 한국군의 2배가 넘는 3만에 달했기 때문에 어느 한쪽이 무조건적인 승리를 거두었다고 보기 어려운 면이 있다. 다만, 영토를 잃은 쪽이 대한민국이므로 중공군의 승리로 보는 견해가 강하기는 하다.

이에 한국군이 반격을 감행하여 금성천 남단 까지의 영토를 다시 회복하였고 양측은 지리한 공방전을 펼치다가 중공군의 추가 공세를 우려한 미군이 한국군의 반격을 금성천 남단에 한정시킴으로써 전투가 마무리 되었다.

중공군측은 이 전투에서 한국군의 최정예였던 수도사단을 패퇴시켰기 때문에, 이를 기념하여 문화대혁명시기에 이 전투를 다룬 "기습백호단(奇襲白虎團)"이라는 현대경극과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백호단은 수도사단의 백호연대의 부대마크가 백호인것에서 유래.

휴전협정 직전의 북한 주둔 중국 인민지원군 총 병력은 야전부대 17개 군과 각종 지원부대를 합해 무려 120만 명까지 증강되었다. 여기에는 일선 전투부대 외에도 후방 경비 및 보급을 담당하는 병력도 상당했다.[20] 당시 전후방 전 병력을 합해 40~45만 명에 불과했던 북한군보다 훨씬 많았다. 사실상 공산군 측 전력의 70% 이상을 책임졌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유엔군 총 병력 90만 중 한국군의 병력이 60만으로 다수였음을 보면, 6.25 전쟁 후반기의 대결은 점차 한국군 대 중국군으로 옮겨갔음을 알 수 있다.

7.7. 철군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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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9월, 철군하는 중국군을 환송하는 김일성. 왼쪽은 당시 인민지원군 사령관 양융(楊勇) 상장[21]
중국 인민지원군은 휴전협상이 마무리되자 1955년까지 80%의 병력을 철수하였으나 약 25만의 병력은 전후 북한 방위 및 재건을 위해 남겨두었다가 1958년 완전히 철수하였다.

자세한 것은 중국 인민지원군 철수 문서 참조.

8. 공군

파일:中國人民志願空軍.jpg
중공군 미그기에 적혀진 중공군 공군 식별표기
1951년 3월부터 정규 공군의 일부도 중국 인민지원군 공군이라고 이름을 바꾸고 6.25전쟁에 참전했다.

사령관은 류전(劉震)[22], 후임은 사령관 대리인 녜펑즈(聶鳳智).[23]

워낙 미 공군이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중국공군은 한반도 북부에서만 방어적으로 활동했다.

그리하여 38선 이남의 중국 지상군의 활동은 거의 지원하지 못했다.

8.1. 제1기 (1950.12~1951.9)

1951년 9월까지는 창립한지 1년도 안된 중국 공군의 역량이 너무나 부족했기 때문에 실전경험을 쌓는데 주력했고, 주로 미국 공군이 폭격을 감행하는 보급로와 교통로를 방어하면서 폭격기 요격의 임무를 수행했다. 이때 중국군 파일럿들이 너무나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에 중국파일럿이 모는 MiG-9MiG-15와 같은 제트기들이 2차대전 베테랑들이 널려있던 미국-영국 공군의 프로펠러기들에게도 격추당하는 굴욕을 겪기도 했다.

8.2. 제2기 (1951.9~1952.6)

미공군은 휴전협상이 시작된 1951년 8월부터 공산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 철도보급로의 요점을 집중포격하는 스트랭글 작전(Operation Strangle)을 실시했다.

중국 공군은 미국의 폭격기부대에 대해 별다른 전술 없이 대량으로 출격하여 이를 요격하려고 했으나, 이것이 효율적이지 않다고 판단하여, "4기로 이뤄진 편대가 서로 다른 거리와 고도로 한곳에 접근하여 합동 요격하는"[24] "일역다층사사제(一域多層四四制)" 전술을 개발해 실시했다.

쉽게 말해서 한편대인 4대가 1조를 이뤄 폭격기 한대에 접근해 요격하는 전술이다.

어쨌든 이들의 활동때문에 미국의 B-29는 큰 피해를 입었고, 이 때문에 B-29는 주간폭격을 취소하고 야간폭격에만 전념했다.

공산군은 중국 공군[25]의 활약으로 신의주-평양의 철도보급로를 어느정도 확보할 수 있었고 특히 철도요충지에 방공망을 대규모로 확충하여, 공산측은 보급을 지속할 수 있었다. 미국의 스트랭글 작전은 미국 자신도 실패#로 평가했고, 곧 이런 요충지 타격이 아니라 일본에서 효과를 보았던 전면적인 전략 폭격이 실시되었다.

8.3. 제3기 (1952.7~정전 협정)

미공군은 교통로를 집중 폭격하는 스트랭글 작전이 실패한 이후, 그나마 남아 있는 산업기반을 분쇄하기 위해 북한 전역을 대규모로 전략폭격하기 시작했다.

특히 북한의 여러 수력발전과 농업관개망 시설이 집중 공략대상이었다.

평양 시내는 석기시대가 되었고, 일본이 지어놓은 북한 북부의 산업시설은 잿더미가 되었으나, 북한은 원래부터 고도화된 산업국가가 아니어서 이렇다 할 군수공업이 없었던데다가, 전쟁물자를 공급하는 중국에 대한 월경폭격은 워싱턴에서 엄금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에 대한 전략폭격과는 달리 전황에는 별 효과를 주지 못했다.

이에 맞서 중국 공군도 대규모로 투입되기 시작했고, 경험이 쌓이면서 작전능력도 향상되어 야간요격 작전이나 방공망 운용 같은 소프트웨어 측면에서도 큰 성장을 보였다.

8.4. 총평

중국 공군 공식 역사서에서도 "창립 초기의 중국 공군은 열세였으나, 전투 중에 급속히 성장했다"며 6.25전쟁에서 큰 피해를 입었지만, 소중한 실전경험을 쌓았다고 총평하고 있다. 어쨌든 창설 1년도 안되어 대규모로 작전을 경험한 것은 성장에 큰 도움이 되었음은 명백하다.

3년 간의 전투 끝에 여러 명의 에이스가 나왔고 미군 측은 그 중 7명을 공인하고 있다. 그중 최고는 자오바오퉁(趙寶桐).[26] 미군기 9대를 격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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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오바오퉁과 그의 MiG-15기. 9대의 킬마크가 선명하다.

한국전쟁 후 서방 측 평가로는 공산측과 유엔측의 전투기 교환비는 1:10 정도로 알려졌으나, 구 소련 측 자료가 공개된 최근에는 1:5.8 정도라고 정정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소련 공군 정예 항공사단(제303, 제324 항공사단)의 전과를 포함한 통계로, 이들을 제외한 소련 방공군, 중국 공군, 북한 공군 MiG-15을 상대로 한 미 공군 F-86A/E/F의 교환비는 1:9.07에 달했다.

9. 인물

9.1. 역대 사령관

펑더화이는 전쟁이 끝날대까지 사령관직함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펑더화이가 귀국한 1952년 4월부터는 사령관 대리인 천겅과 덩화가 각각 지휘했다. 초기 제정러시아군 출신들이 지휘부를 이루었던 소련군과는 달리 중국군의 지휘부는 홍군시절부터 골수 공산당원들이 많았기 때문에 역대 사령관은 모두 정치장교와 겸직이었다.
황포군관학교 1기 출신으로, 교장 장제스가 매우 아끼던 인재였지만, 공산주의에 투신하여 스승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원래 야전지휘보다는 공산당의 공작이나 방첩 계통을 맡아보았으나 야전지휘에도 재능이 있었는지, 항일전과 국공내전에서 공훈을 세웠다. 펑더화이가 귀국하자 사령관 대리로 중공군을 지휘했다. 미군의 압도적인 공군-해군력에 대항하기 위해, 땅굴전술을 고안하고, 해안방어를 중시했다. 이후 공병학교장에 임명되어 귀국했고, 국방차관, 부참모장을 맡아보았다. 중국에서 상당히 인기 있는 장성이며 생애가 드라마와 만화책으로도 나올 정도.

문화대혁명 전에 사망한 천겅을 제외하고 펑더화이와 덩화는 모두 문화대혁명 시기 엄청난 박해를 당했다. 펑더화이는 홍위병에게 여러차례 두들겨맞았고, 덩화도 군에서 쫓겨나 뉴펑(牛棚)[31]에 갇혀 홍위병에게 두들겨 맞다가 1976년에야 풀려난다. 뿐만 아니라 펑더화이와 같이 참전했다는 이유로 다수의 사단장급 이상 지휘관들이 문혁때 감옥에 가거나 박해를 당하기도 했다. 당시 연대장급으로 참전한 조선족 조남기 상장도 마찬가지 신세였다가 후에 풀려났다. 그야말로 목숨걸고 싸운 후에 돌아온 것은[32] 가차없는 토사구팽.

9.2. 기타 인물

10. 평가

계속 밀고 가서 압록강 두만강 라인까지 우리가 올라갔습니다.
완전히 우리가 통일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중국이었습니다.
당시 중국은 중국공산당이라고, 그래서 중공군이라고 불렀는데,
중국 입장에서는 코앞까지 UN군이 밀고 들어왔으니까,
위기감을 느꼈을 것 아닙니까? 그래서 전투병력을 파견하는데,
원래 중국 하면 삼국지! '지략이 뛰어나다' 생각하기 쉽지만,
그런 것 다 필요없어요. 그냥 전술 하나, '인해전술'입니다.
얼마나 군인 숫자가 많았느냐면, 속설이지만 이런 말이 있습니다.
'무기 숫자보다 군인 숫자가 더 많았다' 그래서 3명 중 1명에게만 소총을 주고,
나머지 두 명에게는 피리와 꽹과리를 주었다는 게 아닙니까?
설민석의 [영화] 국제시장 1부. 6.25 전쟁과 흥남철수, 중국인민지원군이 '인해전술'을 펼쳤다는 잘못된 인식의 예시

냉전 시기 한국에서는 중공군(중국인민지원군)은 무기도 별볼일 없고 작전도 없이, 그저 병력 수만 믿고 밀어붙이는 무식한 이미지로 알려져 있다. 6.25 때 개입한 중국군을 표현하는데는 인해전술이라는 단 한마디로 이야기될 수 있다. 그래서 병력 수를 제외하면 모든 게 부족한 군대처럼 여겨졌다. 군기도 엉망이고, 작전능력도 개차반인 당나라 군대라는 인식이 2000년대 초반까지는 강했고, 위의 설민석 강의에서 드러나듯 현대에도 여전히 짙게 남아있다. 흔히 "중국군=약체 당나라군"이라는 인식이 퍼져있었다.

하지만 매튜 리지웨이는 물론이고, 채명신, 백선엽 등, 한국군 장성들의 회고록에서도 중공군의 군기나 사기에 대해서 매우 호평했고 반대로 한국군에 대해서는 영 좋지 않게 보았다.[33] 한국전쟁기의 실상에 관심을 갖는 밀덕후들이 많아짐에 따라 적어도 한국전쟁을 전문으로하는 밀덕 사이에서는 한국전 당시의 중공군에 대한 냉전적 저평가는 거의 사라진 상태. 특히 중국군 참전 초기에는 유엔군이 중국군의 규모를 최대 6~7만 명 규모로 오판한 데다가(...) 중국군이 싸움을 피한다고 보고 중국군의 유인에 말려든 탓에 우회포위에 걸려들어 각개격파되면서 중국군은 당초 예상보다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즉, 적을 유인하고 우회기동으로 포위섬멸하는 전략전술적 능력이 탁월했다는 것. 중공군이 최근 호의적으로 재평가받는 이유중 하나가 민간인에게 피해를 끼치는 그시대 군인들과는 정반대로 민간인에게 사적으로 접근만해도 엄벌할 정도로 엄한 군기를 유지하며 오히려 민간인들을 잘 대해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후술하였듯이 이타적 선의가 아니라 객관적인 전력의 열세를 민심 확보로 만회하기 위해 초인적인 군기를 유지시킨 것이다.
마오쩌둥의 군사이론은 무기가 아니라 병사 개개인의 희생정신과 자발성을 가장 중시했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이론이고, 현실은 적지 않은 병력을 징집했었고 중일전쟁때는 강제로 징집한 병력이 탈영하는 상황도 발생해서 부대에 따라서는 이러한 탈영률이 30%를 넘기기도 했다. 따라서 사기가 있을 리 없는 국민당군 투항병을 형벌부대로 운용하여 최전선에서 총알받이로 썼다는 것은 완전한 사실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실제로 지원군에는 국민당군 투항병 출신들이 많았으며 이 때 포로로 잡힌 이들은 석방된 후 대부분 대만으로 갔다.

중국군은 큰 인명손실을 보긴 했지만, 중국과 미국 사이에 완충지대를 유지한다[34]는 목적을 달성했고, 유엔군과의 3년간의 대결을 통해서 제2차 세계 대전 일본군 수준도 안 되었던 통신-보급-화력 등을 한단계 업그레이드할 수 있었다.

거기에 막강한 미군과 일진일퇴를 하면서 보여준 선전으로 중국측이 그토록 염원했던 국가의 위상은 한껏 드높였기 때문에 중국 입장에서 한국전쟁 참전은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완승은 아니지만, 5~6년전 중일전쟁 때만 해도 미군, 소련군에게 밀렸던 일본군에게 털리기만 한다던가 아편전쟁 이래 100여 년간 서양 세력에게 짓밟히기만 했던 중국이라 세계 초강대국 미군과 싸운 한국전쟁의 무승부는 충분히 중국의 자존심을 세운 셈. 즉, 중국의 입장에서 이 전쟁은 일본과 서양 세력에 의한 백년간의 굴욕을 끝낸 전쟁이라고도 볼 수 있다.

중국군이 밀렸던 상대로 일본군이 들어가 있어서 의아할 수 있는데, 1944년의 일본은 전체 전황에선 패색이 짙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전선에서는 중국군을 묵사발로 만들면서 활개치고 있었다. 물론 농업국가에 불과한데도 압도적인 물량과 잠재력, 끈기를 보여준 중국군을 꺾지 못해 결국 일본은 중국에게 항복했지만, 중국 입장에선 명쾌한 승전으로 보이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중일전쟁은 사실상 일제와 장제스의 국민당 간의 싸움이지 세력 확장에만 힘을 쏟은 공산당이 큰소리칠 입장도 아니다. 실제로 마오는 나중에 일본에게 중국을 침략해줘서 감사하다는 망언을 했다.

중국은 아직 한국전 개입(항미원조)을 "정의의 전쟁"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현재는 정부에서 검열하는 바이두 백과에서도 북한이 먼저 침공했다고 명시하고 있다.[35] 대신 북한이 먼저 공격한 건 맞는데 어쨌건 미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한 시점에는 미국이 침략자가 되었으니까 지원한다는 주장을 내세운다. 이 문서 처음에도 나오지만, 이것이 중국이 개입한 명분이기도 하고.

일부 한국인들은 중국에 사과를 받아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1992년 한중수교 당시 중국이 6.25 전쟁 참전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수교를 반대하는 여론도 있었다. 하지만 상임이사국인 중국을 상대로는 현실적이지 않은 요구였기 때문에 한중수교 당시 이에 대해 공식적으로 논의되지는 않았다.

각설하고, 중국과 북한의 관계가 2010년대 들어 소원해지고, 북한의 여러 막장행각이 중국에도 알려지면서, 중국의 웹사이트에서는 "지원군 전사들이 지하에서 통곡할 지경"이라는 식으로 북한체제를 도왔다는 사실을 비판하는 사람도 많다. 물론 완충지대 혹은 동맹으로서 북한의 가치는 인정한다. 이중에는 2차 한국전쟁이 터지면 참전하자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 이유는 북한주민들과 조중우호조약을 체결했기 때문이고 실제론 완충지인 북한에 영향을 뻗치기 위함이다.

이 전쟁에서 전사한 중국군이 매우 많았다. 또한 많은 중국인들은 항미원조 전쟁에서 중국군은 미국과 싸웠을 뿐, 한국과 싸웠다는 걸 모르는 사람도 많다. 한국 전쟁에서 중국군 투입 이전에는 '조선전쟁'이라고 불리고, 그러다 유엔군이 삼팔선을 넘어 진격하면서 중국군을 투입했고 이때부터 '항미원조 전쟁'으로 불리게 된다.

한편으로 긍정적인 재평가가 지나친 나머지 되려 그들을 과대평가하는 경향들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중공군도 한국전쟁 후반기로 들어설수록 엄청난 물량을 쏟아부으면서도 미군과 한국군에 참패하는 경우도 많았었고(백마고지 전투, 퀸-박 고지전투, 금성 전투, 도솔산 전투) 무엇보다도 기술적으로도 보급력으로도 낙후된 군대여서 다 이긴 전투를 물자의 보급부족이나 기술력 차이(특히 공군력)로 도로 패배를 맛보는 전투도 상당했다. 초반에 UN군이 일패도지한 것은 어디까지나 대대급 전술훈련 경험이 고작이었던 한국군이 경험부족으로 중공군에게 뚫려 발생한 일이었지, 한국군이 사단급 이상 전술훈련을 완료한 1951년 하반기 이후로는 많이 달라졌다.암! 아암!

그리고 "국공내전으로 단련된 중공군"이라고 하는데, 우선 국공내전에 동원된 국민당/공산당의 부대 모두 관동군에 밀리는 수준이었다. 전쟁 말기 관동군의 수준은 2선부대를 넘어, 최후에는 소총 보급도 제대로 못받아 냉병기로 무장하기까지 한 부대였다.오합지졸 관동군에게 밀리던 놈 둘이 싸운다고 단련이 되겠냐 대신 게릴라전 위주로 싸웠던 덕분에 산지 도보주파 능력 같은 부분에서는 단련이 되어있던 게 사실이고 이 때문에 도보에 의존한 기동전이 가능했던 것이다. 당시 한국군은 그 국공내전 수준의 경험도 없었고, 미군에게 지원받은 국민당 중앙군의 무장수준은 우습게 볼 것이 아니었다.[36]

이처럼 군사적 역량에 대해서는 조직력과 군기는 괜찮았지만 전문지식, 무기/장비 등 제반 전투력은 역시 많이 부족했던 군대 정도로 평가되나, 민간인에 대한 배려와 각종 대민지원만큼은 6.25 전쟁 참전 당사자 대부분에게 호평을 받았다는 주장과 그렇지 않다는 주장이 존재한다.
국공내전 당시부터 모든 점에서 열세였던 중국공농홍군팔로군이 혹독한 토벌전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원인 중 하나가 삼대기율 팔항주의로 일반 대중의 민심을 얻은 점이었다. 6.25 전쟁 당시에도 이러한 규율은 대체로 잘 지켜져서, 보급이 극도로 열악한 상황에서도 대한민국 국군미군 포로, 남북한 민간인 모두를 대체로 잘 배려하였다는 주장인데, 중공군 내부의 증언이라 걸러들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홍군(軍) 시절부터 포로를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급식도 지원군보다 좋은 것을 제공한다.[37]
펑더화이 중국 인민지원군 초대 사령관
10여년 전만 해도, 휴전선 인근 마을에 가면 이런 말 하는 촌로들을 만날 수 있었다. “전쟁 때 중공군들이 제일 친절했다. 민심 얻는 법을 잘 아는 군대였다. 중공 오랑캐가 어쩌고저쩌고 폄하하는 노래가 한동안 유행했다. 전쟁 시절이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는 느낌이 든다. 차마 말을 못해서 그렇지, 양민과 부녀자들에게 정말 못되게 군 놈들은 따로 있었다.”[38]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02>, 《중앙SUNDAY》

10.1. 신사적인 중공군 신화에 대한 비판

모든 목격자들의 증언을 경청하고 증거서류들을 조사한 후, 분과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통지한다:
(1) 북한과 중국의 공산당 부대는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한국에서의 전쟁 동안 미국인들에 대하여 저지른 다음의 전쟁범죄와 인권침해에 대한 범죄에 대해 유죄이다.
(a) 살인;
(b) 의도된 살인;
(c) 악의 있는 가중 폭행;
(d) 여러가지 고문행위, 즉 달궈진 대나무창으로 포로의 살갗을 찌르고 불붙인 담배로 포로를 불에 데게 하고, 캔따개를 포로의 상처에 삽입하였음;
(e) 굶어죽게 함;
(f) 굶주림을 조장하는 계획된 정책;
(g) 실험적인 의료 수술;
(h) 공산주의 사상의 강제 세뇌;
(i) 창검으로 찌름;
(2) 중국의 공산주의 정부는 미국인들에게 저지른 전시 잔학행위에 대해 한국내 공산정부로서 동등하게 책임을 져야 하며 유죄이다.
(3) 사실상 전쟁포로의 대우에 대하여 적용되는 제네바협정의 모든 조항이 북한과 중국의 무력에 의해 고의로 위반되었거나 무시되었다.
(4) 5,000명이 넘는 미국인 전쟁포로들이 공산당의 전쟁 잔학행위로 사망했으며, 생존한 천여명은 전쟁범죄의 희생자들이다.
(5) 송환되지 않은 수 천 명의 미국의 병사들은 전쟁범죄의 희생자들이거나, 전사하거나 지금도 철의 장막 뒤에 감금되어 있다.
(6) 공산당 군대는 판문점 휴전협정에 따라 환자와 부상병들을 송환하지 않음으로써 ‘LittleSwitch’협정을 위반했다.
(7) 한국내 공산당들은 허위선전으로 미국인 전쟁포로들에게 행해진 그들의 대우를 부정확하게 설명하려고 의도했다.

권고:미국의 상원은 이러한 공산당의 잔학행위들에 대해 중대한 관심을 표명하고 유엔의 미국 대표단에게 공명정대한 조사위원회 설립을 유엔에 권고할 것을 제안하는 상원의 결의문을 발의할 것을 권고한다. 앞서 말한 위원회의 목적은 1950년 6월 24일 이후에 한국에서 또는 한국 근처에서 북한과 중국의 공산당 군대에 의해 행해진 모든 전쟁범죄에 대한 사실에 대해 조사하고 보고하며, 범죄자들이 공정하고 합법적인 처벌로써 책임을 지도록 하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 한국전 잔학행위 특별소위원회, 1954년 1월 11일
마오쩌둥은 어차피 6.25 전쟁으로 미국을 완전히 굴복시킬 수도 없으므로, 이 기회에 공산주의 중국에 우호적인 인사들을 많이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나름 투철한 저널리스트였던 에드거 스노우가 결과적으로는 친중 프로파간다에 크게 일조하게 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는 "포로는 전쟁 끝나면 돌려보내야 한다. 훗날 우리 선전원이 될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대우해라. 중국의 전통문화를 제대로 습득한 사람을 물색해서 관리를 맡겨라."라고 지시한다.

포로관리 총책임을 맡은 중조연합총부 정치부 주임(중국 인민지원군 내 서열 3위) 두핑(杜平)은 다양한 선무공작을 펼친다. 미군이나 영국군 등 서방측 포로에 대해서는 미인계까지 써가면서 각종 이념적 세뇌를 하고 중국에 눌러 앉히려는 시도도 했다. 대한민국 국군 포로는 조선인민군에게 넘겨 결과적으로 많은 핍박을 받게 만들었다. 또한 거대한 조직에서 규율이 항상 제대로 지켜질 리는 만무해서, 전장에서의 포로 학대 및 학살 사례도 여럿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특히 생김새가 확연히 차이 나는 터키군 포로들에게는 훨씬 더 가혹하게 대했다는 증언들도 있다.

중공군은 공산주의자답게 서방 유엔군 포로들이 절대 종교행사를 치르지 못하게 감시병을 동원하였다. 부활절이나 크리스마스는 물론 몇몇이 모이지도 못하게 했으며 이는 제네바 협정 위반이다. 터키군 포로들이 가혹행위를 당한 이유도 다름이 아니라 이들이 무슬림이라 하루에 5번 씩 기도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중공군이 좋게 볼 리가 없었고, 포로들은 여느 출신국이든 무신론과 공산주의 이념을 받아들이도록 강요받았다. 이 또한 위반 사항이다.
[미 제8군, 중국군이 유엔군 포로를 학살했다고 주장]

연월일: 1951년 11월 14일
출전: 조선일보 1951년 11월 16일

미 제8군, 중국군이 유엔군 포로를 학살했다고 주장

미군 제8군당국에서는 14일 공산군은 한국동란 개시 이래 현재까지 5,790명의 유엔군 장병포로를 학살하였다고 발표하였다. 그런데 이중에는 한국군은 포함되어 있지 않으며, 그 4분의 3이 미국군이고 4분의 1은 미국군 이외의 유엔군 장병이라고 한다.

한편 UP통신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제8군의 제임스 싼리대령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중공의 포로학살 사실은 포로대우에 관한 제네바협정을 중공이 행하였다는 주장과 날카로운 대조가 되고 있다.

미 제8군 기록에 의하면 중공군은 253명, 미군 포로 40명 외, 터키군 포로 10명 외, 영군 포로 5명 외, 벨기에 포로 등 다수의 다른 유엔군 포로를 살육하였다.

작년 11월 이래 북한괴뢰군 또는 중공군이 근 6,000명의 남한인을 살육하였다. 중공군이 살육하였다는 중 최대수의 미군은 1951년 신정 근방에서 1950년 12월 10일 살육된 미해병대의 200명이다. 살육은 중공군의 제81사단 또 소속 제23연대 장병에 의하여 행하여진 것이다. 17명의 터키군 포로가 지난 9월 15일 양구 근방에서 지난 4월 10일 중공군에 의하여 각각 살육된 것이다. 현재까지 살육된 남한인 양민들의 총수는 판명되지 않았으나 2만 5,000명 이상으로 추산되고 있다.”

조선일보 1951년 11월 16일
- 출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자료대한민국사 제23권
사실상, 일찍이 1956년 말에 중공 중앙은 지원군과 조선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신화사 기자의 내부 보도에 따르면 지원군과 조선 당국 및 인민들과의 관계는 날로 악화되었다. 1954년부터 1956년 8월까지 지원군이 조선 정부 관원과 인민을 구금 혹은 모욕한 사건은 총 355건에 달했고, 그중 가장 심각한 것은 사냥을 위해 지원군 관할구역에 들어온 조선의 고위 당정 지도자, 남일, 방학세, 박정애 등을 구금한 사건이었다.

제멋대로 조선인들을 수색, 체포하고 불법적 심문을 진행하는 것 또한 허다하였다. 이 밖에도 교통사고, 표적 및 사격 훈련, 총기 오발, 강간 폭행 등으로 인한 조선인 사망은 417명에 달했으며, 그중 교통사고로 인한 조선인의 사망과 부상이 그 주를 이루었다. 1954~1955년 총 68건의 강간 사건이 발생하였고 간통 수치는 강간 사건의 10배에 달하였다. 1956년 상반기에만 208건의 강간, 강간미수 및 간통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로 인한 사생아 출산이 적지 않았고, 다른 지역으로 부대가 이동한 후 아이를 업은 조선 부녀자들이 부대를 찾아다니는 등 영향이 매우 나빴다.

지원군이 건설공사, 병영 및 군사훈련 등의 군사적 필요로 인해 조선에 끼친 손실 또한 비교적 심각하였다. 1955~1956년, 지원군은 병영 건설을 위해 농경지 약 800만 평방미터를 점유하고 사용하였다. 1954~1955년 조선 정부의 허가 없이 벌목한 목재가 54,000여 그루에 달했다. 1956년 1년 동안 총 11만평 550무에 이르는 농작물이 지원군의 군사훈련으로 피해를 입었다.

일상생활 중에서 인민지원군 관병이 조선인민을 존중하지 않는 상황 역시 매우 보편적이었으며, 말하는 태도가 불손하고 욕설을 퍼붓고, 조선과 조선인민을 무시하는 행위가 빈번하였다. 심지어 비행장을 건설하고 공사할 때 조선인들의 조상무덤을 파내는 상황까지 발생해 당 지역 조선인민들의 반감을 샀다.

이런 위법 및 군기를 어기는 행위는 모두 인민지원군 군법의 법률적 제재를 받았으나, "치외법권"적 성격을 가지는 처리 방식은 조선인민의 굴욕감을 자아냈다. 상술한 지원군의 조선의 법률과 풍속 위반, 조선인민에 대한 오만한 태도 및 조선 내정에 대한 각종 간섭은 조선인민 심지어 정부 지도자들까지 지원군을 점령군으로 여기게 하였다. 그들은 지원군이 조선의 주권을 침범했기 때문에 지원군이 조선에 계속 주둔하는 것을 환영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은 주변 국가들에게 중국의 이미지를 크게 훼손하였고 이로 인한 부정적 영향이 모택동이 철군 결정을 내리도록 한 원인 중의 하나가 되었다.

출처: 최후의 천조: 모택동 김일성 시대의 중국과 북한, 션즈화 저, 김동길 외 2명 옮김, 선인, 2017년, 575~577쪽

또한 중공군의 규율 신화는 역사수정주의의 일환으로 중공군 담론의 본질을 흐리려는 움직임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기사도 정신과 무사도 정신을 들먹여 독일군일본군이 수행한 절멸전쟁의 성격과 전쟁범죄 행각을 망각시키려는 것과 같은 것으로 이는 삼대기율 팔항주의를 내세워 자신들을 현지인의 환영을 받는 이상적인 구원군이라고 포장하고 자유진영 국가에 대한 파괴라는 중공군이 저지른 행위에 대한 인식을 호도하는 것이다.

비록 중공군이 열악한 상황임에도 삼대기율 팔항주의를 내세워 나름 기율을 확립하고자 했던 시도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할지 모르나, 실제로 그것이 일선 장병들에 의해 지켜졌으며 제대로 관리되었는지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중공군의 높은 기율이라는 평가는 군사적 신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태도는 지양해야 마땅하다. 특히 민사작전에 있어서는 대부분의 군대들이 정치적 위신을 위해 자신들을 신사적인 전사로 포장하는 경향이 있기에 더욱 주의하여야 한다.

11. 여담

12.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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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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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전쟁 발발 책임 · 승패 인식
백두혈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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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우 (제너럴 셔먼호 사건) · 김형직 · 강반석 · 김정숙 · 김정일 출생지 왜곡
관련 서적 미제와 일제의 조선침략 죄행 · 백두혈통 우상화 교과서 · 세기와 더불어 · 조선력사
* 괄호 안의 연도는 북한의 주장에 근거한 연도이며, 실제 역사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단체 및 사건이거나 실제와는 다른 연도일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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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한민국을 돕기 위해 파병된 미군을 마치 도깨비와 같은 푸른 피부와 원숭이 같은 얼굴로 희화화 하였다.[2] 간화자가 채택되기 전이라 정체자로 작성되었다. 간화자 총표의 정리는 1964년이다. 만약 이 문장을 간화자로 쓴다면 朝鲜人民军中国人民志愿军胜利万岁이 된다. 발음은 cháoxiǎn rénmínjūn zhōngguó rénmín zhìyuànjūn shènglì wànsuì.[3] 한자의 뜻에 유의. support의 지원(支援)이 아니라 volunteer의 지원(志願)이다. 자원했다(自願했다)는 말과 동의어다. 들이 해서 간 대라고 외워보면 편하다. 북한의 인민군을 돕기 위해 중국 정부가 파병한 것이 아니라는 중국공산당의 책임 회피를 의도하고 있는 단어이므로, 의미를 혼동하면 안된다.[4] 그래서 명칭에서의 '지원'도 support, 支援(지탱할 지, 도울 원)이 아닌, volunteer, 志愿(뜻 지, 원할 원)이다. 즉 "이 군대는 우리 중화인민공화국 인민들이 미 제국주의자들에게 핍박받는 조선 인민들을 가엾게 여겨 스스로 참전한 것임. 그러므로 우리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와는 아무런 관계 없음"이라면서 전쟁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이었다. 참고로 순수하게 지원병으로 이루어진 역사상 최대의 민병대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인도 제국군으로 약 250만 명의 인도인이 지원병으로 입대했다.[5] 항미원조라는 문장은 임진왜란 당시 개입한 명나라군이 전쟁을 지칭할때 사용한 항왜원조라는 문장을 중국 공산당이 변형해 사용한 것이다. 당시 중국이 전쟁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봤는지 알 수 있는 단편적인 사실.[6] 중국의 6.25 전쟁 개입의 주된 모토로 중국에서는 한국전쟁을 한동안 항미원조전쟁이라고 썼다. 하지만 현재는 관계가 조금 나아진 대한민국을 의식해서 항미원조전쟁이라는 표현은 중국정부에서 자제하는 편. 중국의 공식매체에서 표현도 대체로 조선전쟁이라고 쓰고 있다. 그러나 사드 배치 및 동중국해, 미중무역전쟁을 위시한 제1세계와의 대립으로 중국 언론에서는 다시금 항미원조전쟁이라는 용어와 자극적인 반미-반한-반일-반대만 정서를 드러내고 있다.[7] 말이 최후통첩이지 사실상 내정 개입을 시사하는 발언이었다. 한국군만 38선을 넘었어도 중국은 이미 개입 준비를 거의 다 마친 상황이었기에 저우언라이의 성명은 단순 블러핑에 불과했다.[8] 당시 런비스와 비슷하게 차세대 주자로 꼽혔고, 결국 대권을 쥐는 덩샤오핑은 당시 충칭시장에 불과했다.[9] 이 때문에 제4야전군 예하였던 제13병단이 1진으로 한반도에 출동하자, 유엔군 측에서는 중국 인민지원군 총사령관이 린뱌오일 것이라고 오인했다.[10] 이 때문에 미군은 중공 군개입 초기에 상당히 병력 규모를 과대평가하기도 했다.[11] 다양한 국가의 무장 체계를 갖춰서 탄약수급이 개판인 이유는 총과 그에 맞는 탄을 사용해야 하기 때문인데, 수류탄은 2차대전 말에 이르르면 모든 수류탄이 파인애플 수류탄으로 통일되면서 사용법이 거의 일원화된데다 사용법만 익히면 어떤 수류탄을 써도 투발수단은 동일하므로 보급에 문제가 없다. 중공군과 싸운 유엔군 참전용사들의 수기에서도 '수류탄이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많이 날아왔다'는 대목이 공통적으로 등장한다. 척탄병의 전쟁이란 말이 등장할 정도였으며, 전장이 구릉이나 산림 등 험지였던 탓에 기관총과 대포로 이뤄진 방어선이 수류탄에게 제압당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이는 응급축성 수준을 넘어 제대로 된 방어진지를 만들 때까지 이어졌다. 해피 밸리 전투에서도 이 전법 때문에 영국군의 크롬웰 전차 4대가 격파당한다.[12] 2차대전 이후 다시 기근이 닥쳐 90만명 이상이 아사하는 등 소련 내부 상황도 좋지 않았다.# 게다가 소련은 동유럽과 중앙유럽 점령지에서 위성 정권 설립을 추진하면서 막대한 자원을 그 와중에 소모하고 있었다.[13] 냉전 초기 6.25 전쟁은 스탈린의 지시라는 설이 대세였으나, 흐루쇼프 회고록과 냉전붕괴 이후 문서를 보면 김일성 및 박헌영이 계속 모스크바에 와서 소극적인 스탈린에게 남침 허가를 요청한 사실이 밝혀졌다.[14] 중국 본토에서 활동 중인 미군 스파이들도 일본의 미군 사령부에 계속 중공군의 이동 상황에 대해 보고했지만, 맥아더는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무시했다.[15] 참고로 이 당시 유엔군의 총 병력은 약 43만 명으로 그중 육군은 약 30만 명, 그리고 이 중에서 실제로 북한 지역으로 진격한 병력은 약 13만 명이다. 실질적인 참전 병력은 중국에서 제대로 밝히고 있지 않지만, 실질적으로 유엔군보다 많았다는 점은 맞는 부분이다.[16] 다만, 중공군의 사기 진작을 위해서 한 평가였으며, 맞는 평가는 아니었다.[17] 원문 Well, if they go fast enough, maybe some of them can be home by Christmas.[18] 북한 인민군 같은 경우는 후송이 어려워졌을 때 포로를 처형한 경우가 여럿 있었지만, 중공군의 경우는 1920년대 초창기부터 마오쩌둥의 군율상으로는 포로 학대를 금지시켰었다. 물론 현실은 식량을 아예 배급하지 않거나, 낄낄거리면서 포로를 쏴 죽이거나, 부상당한 포로를 산채로 태워죽이는 등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삼대기율 팔항주의를 참조바람.[19] 리지웨이는 나중에 회고록에서 이 전투를 들어 한국군을 혹평했고, 맥아더가 자신의 회고록에서 한국군을 어느 정도 띄워준 것과는 대조적이다. 참고로 펑더화이는 리지웨이와 마찬가지로 한국군 수준을 "국민당군" 정도로 평가했다고 한다.[20] 여기에는 주요 거점을 방어하는 대공포부대, 끊임없이 폭격에 시달리던 철도를 복구하는 철도부대 등이 포함된다.[21] 이 당시 중국군은 계급이 부활되었고, 소련군 군복을 모방한 55식 군장을 착용하고 있었다.[22] 1955년 계급은 상장[23] 1955년 중장계급을 달았다.[24] 四機編隊,多批多路,多層配置,集中一域,協同作戰[25] 중국 공군 뿐만 아니라 소련 공군의 2차대전 참전 베테랑 파일럿들이 중국 공군 혹은 북한 공군 도장의 미그기를 몰고 다수 참전했기 때문에, 순수한 중국 공군의 공적은 아니다.[26] 1928~1983. 1945년에 입대했고, 1949년에 창설멤버로 인민해방군 공군에 참가. 파일럿 교육을 받았다. 조종 교육을 받은지 1년 만에 6.25전쟁에 참전해서 미군기 9대를 격추했으니 대단한 재능인 셈. 베이징 군구 공군부참모장으로 퇴역했다. 전쟁영웅인데다가 매우 미남이었기 때문에, 여자관계가 문란, 조강지처를 버리고 여인과 동거하기도 하는 난봉꾼 기질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 여자관계 때문에 문혁 기간에 엄청나게 비판받았고, 군 내의 평판도 안좋았는지 한국전 최고 에이스치고는 출세하지 못했다. 중국 공군 2위의 에이스(7대)인 왕하이(王海)는 공군 최고계급인 상장까지 올라 공군사령관을 역임한 반면, 이 양반은 기껏 군구공군의 부참모장에 그친데다가 군 계급 부활 이전 퇴직 후 사망해서 장성 계급을 못 달았다. 하지만, 전기인 "공중전의 왕(空战之王)" 때문에 중국에서는 사카이 사부로와 같은 유명인사다.[27] 한국전쟁 참전 당시 중국군은 직책만 있고 계급은 없었다.[28] 이 계급은 한국의 대장보다 높은 계급으로 간주한다. 상급대장에 해당.[29] 한국군의 대장에 상당[30] 1952.10월 중국군이 유엔군의 추계공세을 막아낸 전투. 중국측에서는 크게 선전되었고, 영화로도 제작되었지만, 한국에서는 비슷한 시기에 한국군이 대승을 거둔 백마고지 전투와는 달리, 상감령 전투는 참전한 한국군의 흑역사이기 때문인지 잘 알려져있지 않다.[31] 원래는 외양간이라는 뜻이지만, 문화대혁명 시기 홍위병이 만든 '사설 감옥'을 지칭한다.[32] 제공권 없이 싸우던 중공군은 장성급도 매우 큰 피해를 입어서, 군장(군단장)급이 세명, 사단장급에서 7명의 전사자가 나왔다. 비교적 후방에 위치했던 사령부에서 근무했던 마오쩌둥의 아들인 마오안잉조차도 전사했을 정도이니.[33] 미군 장성들은 한국군에 대해서는 아예 전력으로 넣지도 말라고 혹평했다. 이러한 점은 이승만 대통령도 마찬가지여서 전쟁이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서 한국군의 전작권을 미군한테 넘겼고, 전쟁이 끝나고 나서 미군이 전작권을 돌려주겠다고 해도 거부했다. 그만큼 대통령조차 한국군의 능력에 대해 믿지 못해서 차라리 외국군인 미군에게 전작권을 계속 맡기겠다고 한 것이었다.[34] 지금까지도 중국 정부가 한반도 정책에서 가장 중시하는 목표이다. 이에 따라 중국과 군사동맹을 맺고 있는 북한 정권을 유지시켜 주기 위해서 지원을 아끼지 않는 것이다. 주한미군이 존재하고, 한미군사동맹이 유지되는 한 이것은 바뀌지 않는다.[35] "1950年6月25日,朝鲜人民军开始进攻韩国(人民军主力为四野三个师),朝鲜战争爆发"[36] 여담이지만 한국전쟁 터지기 직전 미국도 한국 정부의 전차 등 무기 공여 요청에 대해 "최신 개런드 소총 쥐여줬고 우리가 미국식 사단편제 완편해서 훈련시켜주잖아. 그 정도면 아시아에선 충분히 강군이지 뭘" 하는 식으로 반응했다고 한다. 물론 이승만의 북진드립 때문에 우려했던 부분도 있다.[37] 원래 우직한 성격인 펑더화이 입장에서는 문자 그대로 좋은 의미에서 한 말인데, 이 말이 나중에 루산회의 이후 실각 과정에서 친미주의자로 비판받는 빌미가 된다. 게다가 펑더화이는 이것 때문에 문혁 당시에도 홍위병들에게 조리돌림당하고 만다.[38] 대체로 조선인민군대한민국 국군 모두 골육상쟁의 이념적 증오 때문에 더더욱 가혹한 짓을 많이 저질렀다.[39] 시진핑 국가주석의 배우자이자 가수 펑리위안이 이 노래를 잘 부르기로도 유명했다.[40] 상감령 전투 당시에 육탄으로 미군 토치카를 격파했다는 황치광(黄继光, 황계광)이 대표적이다. 이런 전쟁 '영웅'은 한국도 보유하고 있다. 철원전투의 심일이 대표적이다.[41] 하지만 위의 영화 국제시장에서 설민석이 해설한대로 3명 중 1명에게만 소총을 주고 나머진 꽹가리나 피리를 불었다는 등의 주장과 아무런 대책도 없이 국군과 UN군의 몇 배나 되는 어마어마한 병력으로 온 것 또한 완전히 잘못된 주장이며, 상술했다시피 적측 부대의 후방까지 깊숙히 침투한 후 포위 섬멸전을 보여준 것이 중공군이다. 이들은 하다 못해 최소한으로 항일대도 쯤은 들고 다녔다.[42] "현재 조선반도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조선인 간의 내전이므로 남조선군이 올라오는건 무방하나 미군과 유엔군이 38선 넘으면 위협으로 간주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