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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인릉

인릉(서울 서초)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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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사적 제194호
서울 헌릉과 인릉
서울 獻陵과 仁陵
Heolleung and Illeung Royal Tombs, Seoul
<colbgcolor=#315288><colcolor=#fff> 소재지 서울특별시 서초구 헌인릉길 36-10 (내곡동)
분류 유적건조물 / 무덤 / 왕실무덤 / 조선시대
면적 1,057,646㎡
지정연도 1970년 5월 26일
건축시기 조선 시대, 1420년
관리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조선왕릉중부지구관리소
파일:서울 헌릉과 인릉 경내도.jpg
헌인릉 안내도

1. 개요2. 상세3. 역사4. 헌릉(獻陵)5. 인릉(仁陵)
5.1. 인릉의 역사
6. 과거 헌인릉 지역에 있었던 왕릉
6.1. 영릉(英陵)6.2. 희릉(禧陵)6.3. 영릉, 희릉 초장지 발굴
7. 교통8. 기타

1. 개요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에 있는 조선 시대 왕릉군(群)으로, 조선 제3대 왕 태종과 태종비 원경왕후가 함께 잠든 헌릉(獻陵)과 조선 제23대 왕 순조와 순조비 순원왕후가 함께 잠든 인릉(仁陵)을 합쳐 부르는 말이다.

현재 사적 제19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공인 국가유산이다. 조선왕릉은 대부분 능침 보존을 위해 능역 앞까지는 올라가지 못하게 막아 놓았고 정자각 쪽에서만 관람이 가능하지만, 태종의 헌릉은 능침 앞까지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따로 마련이 되어 있어서 능을 가까이서 감상할 수 있는 능이다. 이는 세종의 영릉도 마찬가지.

2. 상세

선정릉과 더불어 강남에 둘 뿐인 왕릉 부지이다. 그러나 진짜 도심 한복판 노른자위 땅에 자리잡고 있는 선정릉과 달리 헌인릉은 대중교통이 닿질 않고, 도심지와는 구룡산대모산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는, 사실상 이름만 강남인 최외곽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접근 자체는 쉽지 않은 편이다.

그래도 서초구라는 이름값이 있는 만큼 부동산 성공한 조선 국왕[1]이란 농담에 종종 언급되는 편이다. 사실 근처에 회사제52보병사단 예비군훈련장 등이 있어 앞으로도 개발되기는 힘들 곳이라 실제 부동산으로 크게 돈을 벌기 어려운 자리이긴 하다. 다만 소나무 숲이 조성되어 있는 등 자연에 가까운 분위기가 매력적인 곳이다. 특히 풍수지리에서 묏자리를 정할 때, 좋은 예로 많이 언급된다.

서쪽에 국가중요시설이 있어서 순조의 인릉(仁陵)에서 함부로 사진을 촬영하면 제지받는다. 그런데 같은 능역으로 묶은 태종의 헌릉(獻陵)에서는 인릉처럼 제지를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헌릉은 자유롭게 촬영해도 되고, 인릉에서만 보안상에 유념, 주의해서 사진을 촬영하면 된다.

3. 역사

헌인릉은 1420년부터 1900년까지 대략 아래와 같이 조성되었다.

4. 헌릉(獻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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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국왕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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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조선 태종과 원경왕후의 왕릉 | 헌인릉 내 1기
헌릉

獻陵
파일:img_visual03.jpg
매장지 서울특별시 서초구 헌인릉길 36-10
조성형태 쌍릉(雙陵)
매장자 봉분 좌 태종 (1422년 6월 8일 사망)
봉분 우 원경왕후 (1420년 8월 27일 사망)
조성시기 1420년 10월 2일
홈페이지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clearfix]
파일:헌릉1930.jpg
조선 초창기의 왕릉, 특히 쌍릉의 형식을 모범적으로 보여주는 왕릉이다. 위 사진은 1920년대에 촬영된 것으로 보이는 헌릉의 모습이다. (출처: 조선고적도보)
왼쪽 봉분이 태종, 오른쪽 봉분이 원경왕후의 능이다.

조선의 3대 왕 태종과 왕비 원경왕후를 모신 쌍릉이다.

1420년 태종의 비(妃)이자 4대 왕 세종 그리고 양녕대군효령대군의 모후였던 원경왕후가 먼저 승하하게 되면서 지금의 자리에 왕릉이 지어져서 안장되었고 이후 상왕(上王)이 되어서 3남 충녕대군(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물러난 태종도 승하하여 같은 자리에 안장되면서 헌릉이 지어지게 되었다. 태종의 가혹한 외척 숙청으로 인해 말년 심신이 고생하다가 세상을 떠난 원경왕후의 릉에 태종까지 안장한 이유는 세종대왕이 두 부부가 저승에서라도 화해하여 잘 지내기를 바란 의도가 있었다.

원경왕후가 세상을 떠나 원경왕후의 상을 치를 때 태종은 역월단상제(삼년상 항목 참조)를 적용해서 굳이 3년상을 다 치를 필요 없고 12일만 입으라고 했지만 세종은 "3년복을 다 입지는 못해도 어머님 산소에 모실 때까지는 입겠다"고 반대했으며, 세종은 또한 태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원경왕후의 무덤 옆에 작은 절을 지으려고 했는데, 태종이 "내가 불교를 싫어하는데 왜 내가 나중에 들어갈 무덤 옆에 절을 짓냐"고 버럭하자 "어머니 계시는 곳이 너무 적적해서 절에서 염불하는 소리라도 들으시면 좋지 않을까 해서 그럽니다."라고 대답했다. 물론 절을 짓는 것은 없던 일로 끝났지만, 세종이 태종의 말에 정면으로 반발한 몇 안 되는 사례로 남아 있다.[2]

5. 인릉(仁陵)

<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조선 순조와 순원왕후의 왕릉 | 헌인릉 내 2기
인릉

仁陵
파일:DSC_0046.jpg
매장지 서울특별시 서초구 헌인릉길 36-10
조성형태 합장릉(合葬陵)
매장자 순조 숙황제 (1834년 12월 13일 사망)
순원숙황후 (1857년 9월 21일 사망)
조성시기 1834년 12월 19일
홈페이지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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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DSC_0046.jpg
파일:DSC_1152a.jpg
인릉 후면에서 정면을 바라본 모습 인릉의 정자각
파일:인릉 1930.jpg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1920년대 인릉(仁陵)의 모습

조선 제23대 왕 순조와 왕비 순원왕후를 모신 합장릉이다.

인릉은 조선왕릉 중 전형적인 합장릉의 형식을 띄고 있다. 한 가지 특이할만한 점은 조선왕릉의 형식으로 만들어진 왕릉 중에서는 마지막 합장릉이라는 점인데, 이는 24대 왕 헌종과 왕비들을 모신 경릉은 삼연릉이라는 독특한 형식이고, 25대 왕 철종철인왕후를 모신 예릉은 쌍릉의 형식이며, 26대 왕 고종명성황후를 모신 홍릉과 27대 왕 순종, 순명효황후, 순정효황후를 모신 능은 황제릉의 형식으로 지어져 있기 때문이다.

봉분은 병풍석이 없이 난간석만 둘러쳐져 있으며, 혼유석 1기[3], 장명등 1기와 망주석 1쌍, 문인석 1쌍, 무인석 1쌍, 석마 2쌍, 석호 2쌍, 석양 2쌍 등이 표준에 맞춰져서 설치되어 있다. 다만, 봉분과 봉분을 둘러싼 곡장(담) 사이의 공간이 꽤나 넓어서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점이 특징이다.

인릉의 정자각 우측에는 비각이 세워져 있는데, 그 안에는 2개의 표석이 세워져 있다. 하나는 숭정 기원후 230년(1857년, 철종 8년)에 세워졌으며, "조선국 순조대왕 인릉 순원왕후 부좌(朝鮮國 純祖大王 仁陵 純元王后 附左)"라고 새겨져 있다. 또다른 하나는 광무 4년(1900년)에 세워졌으며, "대한 순조숙황제 인릉 순원숙황후 부좌(大韓 純祖肅皇帝 仁陵 純元肅皇后 附左)"라고 새겨져 있다.

5.1. 인릉의 역사

순종 연덕 현도 경인 순희 체성 응명 흠광 석경 계천 배극 융원 돈휴 문안 무정 헌경 성효 대왕(純宗淵德顯道景仁純禧體聖凝命欽光錫慶繼天配極隆元敦休文安武靖憲敬成孝大王)은 숭정(崇禎) 기원후(紀元後) 1백 63년 경술년 6월 18일 탄생하였다. 경신년 2월 왕세자(王世子)에 책봉되고 이해 7월에 즉위하였다. 갑오년 11월 13일에 승하(昇遐)하였고 을미년 4월 19일에 교하(交河)의 구치(舊治) 뒷산 을좌(乙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는데, 재위(在位)는 34년이고 수(壽)는 45세이다. 헌종(憲宗) 14년 무신년에 존호(尊號)를 체성 응명 흠광 석경(體聖凝命欽光錫慶)이라고 추상(追上)하였고, 금상(今上) 4년 계축년에 존호를 계천 배극 융원 돈휴(繼天配極隆元敦休)라고 추상(追上)하였다. 병진년 10월 11일 광주(廣州)의 헌릉(獻陵) 오른쪽 등성이 자좌(子坐)의 언덕에 천봉(遷奉)하였다." 【영중추부사 정원용(鄭元容)이 지었다.】

조선왕조실록 순조실록 부록에 있는 순조대왕 천릉 비문에는 순조가 승하한 후 어느 곳에 장사를 지냈는지, 그리고 언제 이 곳으로 천릉(遷陵, 능을 옮김)하였는지에 대해서 자세히 밝히고 있는데, 그 내용은 위와 같으며, 조선왕조실록 기사 조금 더 상세하게 인릉의 조성 역사를 일자별로 정리하자면 아래와 같다.

그 후, 순조의 왕비인 순원왕후가 1857년(철종 8년) 음력 8월 4일에 승하하자, 능호를 문릉(文陵)으로 하였으나, 조선왕조실록 기사, 이후 인릉에 합치는 것으로 결정하였으며, 조선왕조실록 기사 음력 12월 17일에 인릉에 합장하였다. 조선왕조실록 기사

6. 과거 헌인릉 지역에 있었던 왕릉

6.1. 영릉(英陵)

조선 4대 왕 세종이 1450년 음력 2월 17일에 승하하고, 왕비인 소헌왕후는 그보다 앞선 1446년 음력 3월 24일에 승하하였는데, 이 둘을 같이 모신 영릉(英陵)은 원래 태종원경왕후를 모신 헌릉의 서쪽 언덕에 있었다. 조선왕조실록 1446년 음력 6월 6일 기사의 영릉 지문, "영릉(英陵)을 헌릉(獻陵) 서강(西崗)에 다스리어" 이 위치는 정확히 알기는 어렵지만, 현재 순조순원왕후를 모신 인릉의 자리라고 추정하고 있다. 그러다가 7대 왕 세조 대에 영릉의 자리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천장을 하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실현되지 못하다가, 1469년(예종 1년) 지금의 경기도 여주시 영릉의 위치로 천장을 하였다.[5] 자세한 내용은 영릉(세종) 문서 참조.

6.2. 희릉(禧陵)

조선 11대 왕 중종의 두 번째 왕비인 장경왕후가 안장된 희릉의 초장지(初葬地)가 헌인릉 근처에 있었다. 정확히는 지금의 헌인릉 능역 안은 아니고, 바로 근처에 있는 국가정보원 부지 안에 있었다. 1515년(중종 10년) 장경왕후가 승하하자 헌릉 서쪽 언덕에 왕릉을 조성하였으나, 1537년(중종 32년)에 희릉 조성 당시에 문제가 있었다는 김안로의 주장에 따라, 현재의 서삼릉지역으로 천장하였다.

6.3. 영릉, 희릉 초장지 발굴

영릉, 희릉의 초장지 관련해서 최근에 정식으로 발굴한 바가 있는데 이는 조선왕릉을 정식으로 발굴한 유일한 사례다. 국가정보원 경내 서쪽 능선에는 왕릉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 자리가 하나 있는데 1973년, 세종대왕기념사업회가 이곳이 영릉(英陵) 초장지인줄 알고 발굴하다가 여러가지 석물을 발견했고 이것이 구 영릉 석물이다.

그런데 이후 2008년에 문화재청에서 이 무덤 자리를 대대적으로 발굴했는데, 실제로는 영릉이 아니라 희릉의 초장지임이 확인됐다.# 이 무덤이 영릉 초장지였다면 석실로 조성한 소헌왕후까지 묻힌 합장릉이어야 했지만 실제로는 회격묘에 단실이었기 때문이다.[6]# 구 영릉의 원래 위치는 현재 인릉 자리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렇게 되면서 희릉 초장지 인근에서 발굴했던 구 영릉 석물이 사실은 영릉이 아니라 희릉의 것이었을 가능성도 제기됐지만 아직까지 이러한 추정은 공식적으로 반영되지 않고 있다. 진짜 구 영릉 석물들은 그 자리에 인릉이 조성되면서 인릉의 석물로 쓰이고 있다는 얘기도 있다.

7. 교통

8. 기타


[1] 왕족까지 포함하면 방배동에 능이 있는 효령대군도 많이 언급된다.[2] 사실 태종과 원경왕후는 정말 사이가 늘 나쁜 것이 아닌 부부 애증관계의 아주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다투기도 살벌하게 다퉜지만 자식양육에 있어서는 죽이 잘 맞기도 했으며 자녀도 일찍 잃은 자식을 포함해서 굉장히 많이 낳아왔다. 영아기에 사망한 것으로 보이는 마지막 아들은 둘의 나이가 무려 45세, 47세에 태어났다. 그리고 무덤 관련 일화에서도 나와있지만 태종 본인이 원경왕후와 함께 묻히기를 소망하였다. 이에 대해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의 작가 박시백은 세종 실록 편에서 "외척 단속과 왕권 강화라는 명분이 있기는 했지만 어머니와 외가에, 나아가 자신의 처가에까지 너무 가혹했던 아버지에 대한 반발이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3] 혼유석은 조선왕조 초창기에는 봉분이 하나더라도 합장릉인 경우에는 2기가 설치되어 있으나, 중기를 넘어서게 되면 합장릉인 경우에도 1기만 설치하게 된다[4] 옛 장릉은 인조인열왕후가 안장된 장릉(파주)의 초장지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며, 오늘날 파주 운천리를 의미함. 장릉(長陵)은 원래 파주 운천리에 위치하였다가, 나중에 현재의 위치인 파주 갈현리로 천장하였음[5] 다른 의미로는 지금의 인릉이 있는 자리는 흉당이라는 것. 그리고 원래 파묘자리는 다시 안 쓴다. 특이하게 영조의 원릉은 파묘자리를 썼다.[6] 세종의 영릉이 있었다고 하면 그 아래에 석실(돌방)이 있어야 하는데, 발굴 당시 회격묘의 흔적이 나왔다고 한다. 또한 바닥이 단단하면서 움푹 파인 흔적이 있었는데, 기록에 따르면 김안로가 희릉을 이장할 때 구실로 '현재 조성한 자리에 문제가 있다.'고 하여 현재의 서삼릉 쪽으로 이장했다고 한다.[7] 같인 묻힌 아들 중종정릉과 함께 선정릉이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