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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3 19:12:25

알렉시오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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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 제109대 황제
알렉시오스 1세
Αλέξιος Α΄
파일:Alexios_I_Komnenos.jpg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알렉시오스 콤니노스
Ἀλέξιος Κομνηνός
출생 1057년
동로마 제국
사망 1118년 8월 15일 (향년 60~61세)
동로마 제국
재위 기간 로마 황제
1081년 4월 1일 ~ 1118년 8월 15일 (37년)
전임자 니키포로스 3세
후임자 요안니스 2세
부모 아버지 : 요안니스 콤니노스
어머니 : 안나 달라시니
배우자 이리니 두케나
자녀 요안니스 2세, 안드로니코스, 이사키오스, 안나 콤니니
종교 기독교(정교회)
1. 개요2. 제국의 쇠퇴기에 등장하다3. 배경, 출신 및 데뷔4. 제위 등극5. 외적의 침공에 맞서다6. 제국의 쇄신7. 서방에 원조를 요청하다8. 제1차 십자군 전쟁기
8.1. 보에몽과 알렉시오스
9. 말년과 죽음10. 평가11. 가족 관계

[clearfix]

1. 개요

로마 제국 제109대 황제, 동로마 제국 콤니노스 왕조 제2대 황제.

동로마 제국의 손꼽히는 명군으로, 그 아들인 요안니스 2세와 손자인 마누일 1세 또한 유능한 인물이었던 덕분에 콤니노스 왕조의 제국은 3대 1백 년에 걸쳐 다시 한 번 번영을 누리게 된다. 이를 콤니노스 중흥(Komnenian Restoration)[1]이라고 한다.

참고로, 콤니노스 왕조의 안정을 위해 실시했던 족벌주의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알렉시오스 1세 이후로 모든 황제는 단 두 명[2]만 빼고 전부 알렉시오스 1세의 후손들이다. 다만 중간에 쿠데타가 자주 일어나 결국 부계 후손은 단절되었지만[3] 모계 후손으로는 계속 유지되었다. 콤니노스 왕조의 뒤를 이은 앙겔로스 왕조를 개창한 이사키오스 2세와 알렉시오스 3세 형제는 알렉시오스 1세의 딸 테오도라 콤니니 공주의 친손자였고, 그 뒤를 이은 라스카리스 - 바타지스팔레올로고스 왕조는 그 앙겔로스 황실로부터 알렉시오스 1세의 피를 물려받았다.[4] 그야말로 후기 ~ 말기 동로마 황제들의 조상이었다. 자세한 것은 영어 위키백과 Family tree of the Byzantine emperors(동로마 황제 가계도)를 참조하면 된다. 복잡하다.

2. 제국의 쇠퇴기에 등장하다

동로마 황제였던 이사키오스 1세 콤니노스의 조카로 동로마의 명문가 출신이었다. 더불어 젊어서부터 군사적인 재능을 보인 뛰어난 젊은 장군이기도 했다. 다만, 알렉시오스 1세가 장군으로 활약하던 시기는 동로마 제국의 대표적인 몰락기였다.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로마노스 4세가 대패하여 셀주크 조에 포로로 잡힌 후에 폐위당하고, 이후 이 패배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안드로니코스 두카스의 가문인 명문 수도 귀족 두카스 가문이 제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이 두카스 왕조더럽게 무능했다. 한 예로 미하일 7세 두카스의 별명은 '파라피나키스'였는데, 이는 '마이너스 1/4'이라는 뜻이다. 화폐 가치가 1/4만큼 떨어져서라고.

3. 배경, 출신 및 데뷔

콤니노스 가문바실리오스 2세 당시에 처음으로 출현한 가문으로, 기존에 아나톨리아의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스클리로스 가문과 포카스 가문이 잇따라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한 이후 새로운 군사 귀족을 육성하기 위한 바실리오스 2세의 정책의 일환으로 등장하였다. 알렉시오스 1세의 조부 마누일 콤니노스는 트라키아에 기원을 둔 군인으로, 바실리오스 2세의 원정에 종군하던 중 출세하여 파플라고니아의 카스트라 콤니니 근처에 영지를 받음으로써 가문을 개창하였다. 이후 마누일의 아들인 이사키오스 1세가 쿠데타를 일으켜 제위를 차지함으로써 콤니노스 가문은 본격적으로 중앙 정계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으나, 이사키오스 1세가 즉위 이후 세계 총대주교와의 심한 마찰과 사냥에서 입은 부상으로 인해 퇴위하고 제위가 두카스 왕조콘스탄티노스 10세에게 돌아감으로써 핵심적인 세력으로 등극하지는 못하게 되었다.

알렉시오스 1세는 이사키오스 1세의 동생인 요안니스 콤니노스안나 달라시니의 아들로, 두 형인 마누일과 이사키오스처럼 어릴 때부터 군문에 들게 되었다. 알렉시오스가 본격적으로 명성을 떨치게 된 계기는 제국군 휘하 프랑크인 용병이었던 루셀 드 바이욀(Roussel de Bailleul)이 제국 정부의 혼란기를 틈타 아르메니아콘 일대를 장악한 후 일으킨 반란으로, 황제 미하일 7세의 숙부로 당시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요안니스 두카스 부제마저 출전했다가 포로로 잡혀 오히려 황제로 선언당하는 등 전황이 심각하게 불리해지자 20살도 채 되지 않은 알렉시오스가 제국군 사령관에 보임된 것이다. 알렉시오스는 황제의 정책에 따라 투르크 인들에게 뇌물과 영토 종주권을 승인하여 그들의 지원을 받아 루셀을 진압하여 요안니스 부제와 함께 귀환하게 되었으나, 황제 미하일 7세는 요안니스 부제를 황제를 참칭했다는 이유로 오히려 반란죄로 체포하여 실각시킨 뒤 수도원에 유폐시키고 스승 미하일 프실로스 등을 비롯한 측근 세력을 숙청하여 친위 세력을 육성하였다. 이는 기존 두카스 가문이 보유하고 있던 그나마의 권위와 정치 수완마저 날려먹는 결과만을 초래하여 오히려 중앙 정부의 급속한 붕괴와 이하의 병크들을 유발하는 역효과를 낳게 되었다.

사실상 점유와 공식적 점령은 판이한 것이었고, 결국 미하일 7세는 튀르크인들에게 아나톨리아에 정착할 명분을 주게 된다. 게다가 경제 분야에서도 무능해서 돈이 부족하면 더 찍으면 되지. 뭐? 금이 부족해서 금화를 못 찍어? 그러면 구리를 섞어!라는 간단한 해결 방책으로 당시 지중해의 기축 통화로 쓰이던 노미스마(이전 솔리두스) 화의 가치를 3/4로 떨어뜨리는 기염을 토하며 제국을 총체적으로 말아먹다가(그래서 미하일 7세의 별명은 무려 파라피나키스(1/4).) 결국 1078년 아나톨리콘 군관구장 니키포로스 보타니아티스에게 제위를 빼앗긴다. 하지만 동방의 니키포로스 보타니아티스와 동시에 출현한 서방의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가 여전히 건재하였고, 니키포로스 보타니아티스는 그를 진압하기 위해 그나마 동방에 남아있던 군사를 모두 철수시켜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기만 하였다.

4. 제위 등극

파일:알렉시오스 1세 -3.jpg

결국 위기의식을 느낀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이 무능한 니키포로스 3세보다는 여러 전공을 세우면서 이름을 날리고 있던 알렉시오스와 그의 형 이사키오스를 더 신임하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황제를 배출하고 있던 두카스 가문도 일족의 제위를 보장해 줄[5] 사위인 알렉시오스[6]가 더 낫다고 판단하고 있던 차에, 콤니노스 형제의 쿠데타로 결국 니키포로스 3세는 제위를 포기하고 수도원으로 추방당했고, 콤니노스 형제들 중 동생 알렉시오스가 황제에 올랐다.(그 사정은 아래 두카스 가문에 대한 각주를 참조)

하지만 형 이사키오스도 그에 못지 않은 대접을 받았다. 알렉시오스는 형 이사키오스를 위해 부제(Καισαρας, Caesar)보다도 더 높은 '세바스토크라토라스'(σεβαστοκράτορας, Sebastokrator)라는 작위[7]를 신설하여 항상 가까이 두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081년 4월 알렉시오스 콤니노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코스마스가 집전하는 대관식에서 황제의 관을 썼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약간의 분란이 있었는데, 황후로 즉위해야 할 알렉시오스의 부인 이리니 두케나가 대관식을 치르지 못한 것이다.[8]

이는 미하일 7세의 황후이자 니키포로스 3세의 황후였던 알라니아의 마리아와 알렉시오스의 염문설이 생기며 알렉시오스가 부인을 버리고 황후와 결혼해 황제가 되려 한다는 소문도 쫙 퍼지게 되는데 당연히 이리니 두케나의 가문이자 콤니노스 형제의 반란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두카스 가문은 격렬히 분노했다. 그래서 이 염문설은 알렉시오스의 모후 안나가 두카스 가문의 정치적 영향력을 배제하려고 벌인 술수라는 설이 있다.[9]

하지만 워낙 두카스 가문이 드셌고 또 세계 총대주교 코스마스도 퇴진 압력을 받으면서까지도 이리니의 대관식을 주장했기 때문에 결국 이는 성사되었다. 시작부터 황제 가문과 황후 가문의 갈등으로 얼룩지기는 했지만, 어찌되었든 알렉시오스는 동로마의 선임 공동 황제로서 지급한 위기에 당면한 동로마 제국의 옥좌에 앉게 되었다.

콘스탄티노스 두카스는 마리아와의 약속대로 공동 황제로 봉해졌다. 1083년 알렉시오스 1세의 장녀인 안나 콤니니가 태어나자 곧장 약혼을 시켰는데, 1087년 아들 요안니스가 태어나자 제위에서 밀려나 곧 죽었다. 아마 알렉시오스 즉위 이후 수녀원으로 들어가 정치적 영향력이 감소한 알라니아의 마리아 황후를 배제하려는 의도와, 아들 요안니스가 태어나자[10] 콤니노스 왕조를 유지하려는 의도가 작용한 알렉시오스 1세의 고의로도 해석될 수 있다.

5. 외적의 침공에 맞서다

알렉시오스 1세는 즉위하자마자 외적의 침입에 맞서야만 했다. 우선 즉위한 해 이탈리아 남부에서 활동하던 노르만 세력이 이피로스(에페이로스) 지역을 침공하였다.(로베르 기스카르 전쟁) 바실리오스 2세가 죽고 난 뒤부터 동로마령 남이탈리아는 점차적으로 쇠퇴하기 시작했었고 그 결과 1071년 마지막 동로마의 이탈리아 거점인 바리가 노르만의 로베르 기스카르에게 함락당하여 동로마는 이탈리아에서 완전히 세력을 잃은 상황이었다. 그 로베르 기스카르가 이제는 그리스 지역에까지 손을 뻗으려하자 알렉시오스 1세는 더이상 묵과할 수 없어서 디라히온에서 로베르와 접전을 벌였으나 패배했고, 이후에도 수 차례 패배를 당하며 제국의 서부 영토를 전부 상실할 위기에 처한다. 이때 노르만 군에서 로베르의 부인인 시켈가이타가 맹활약을 했다. 장난이 아니라 그녀가 없었다면 로베르는 이 전쟁에서 패했을 수 있다. 디라히온에서의 패배가 얼마나 처참했냐면, 이 당시 궤멸된 부대가 너무 많아서 사실상 로마군의 역사성이 끊어질 정도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고대 로마, 즉 로마 제국의 동서 분열 이전부터 역사가 이어져 오던 로마군 부대들이 대부분 사라졌기 때문이다.

디라히온 공방전으로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타그마가 싸그리 날아간 당시 제국의 자체적인 능력으론 이들을 맞서는 것이 어려웠기에 알렉시오스 1세는 베네치아 공화국에 각종 무역 특권을 떡밥으로 제공하여 해군을 지원받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에게 보내는 사절에게 막대한 뇌물을 들려주어 이탈리아 지역의 노르만 본진을 공격할 것을 요청하였다. 게다가 1085년 노르만 진영에 역병이 돌아 로베르 기스카르가 죽자 그를 따르던 귀족들은 상당수 남이탈리아로 돌아가 장남 보에몽이 물려받은 제국의 영토는 이제 기량면에서나 군사력 면에서나 우위를 점한 알렉시오스 1세에 의해 급속히 탈환되었다. 그 덕분에 첫 번째 침입은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노르만이 물러가니 이번에는 페체네그족이 1087년부터 1091년까지 대대적으로 발칸 반도를 침공하였다. 페체네그 족은 무서운 속도로 진격하면서 룸 술탄국과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려고 하였으나, 알렉시오스 1세가 페체네그 족에 적대적인 쿠만 족과 동맹을 맺고 레부니온 전투에서 이들을 격퇴시켰다. 이로써 페체네그 족의 위협은 종식되었다.

그러나 이번엔 키프로스 섬과 크레타 섬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비티니아에선 튀르크인 토후들이 제국령을 침범하고 스미르니의 튀르크인 에미르인 차카가 전쟁을 선포했다. 키프로스(랍소마티스)와 크레타(카리키스)의 반란자와 비티니아의 튀르크 세력은 손 쉽게 진압할 수 있었으나 차카와의 전쟁에는 꽤 큰 노력을 들여야 했다. 아나톨리아의 주요 항구 도시인 스미르니와 에페소스를 장악한 차카는 두 도시를 정복한 이후부터 대함대를 건설하고 동로마 제국의 황위를 찬탈하려는 야심을 품게 된다. 차카는 제국에 선전포고한 뒤 에게 해의 제국령 섬들을 침탈하고 페체네그 족과 연합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위협하며 무역을 방해하는 등 큰 피해를 끼쳤으나 재건된 제국 해군의 반격과 제국의 사주를 받아 차카가 암살당해 이 전쟁도 일단은 제국의 승리로 종결될 수 있었다.

6. 제국의 쇄신

대내적으로 알렉시오스는 미하일 7세가 벌여놓고 니키포로스 3세가 악화시켜 놓은 모든 것을 쇄신해야만 했다. 우선 미하일 7세가 떨어뜨려놓은 화폐 가치를 회복해야 하였으나, 이는 이미 제국의 국고가 바닥난 상황에서 불가능하였으므로 오히려 더 질이 낮은 금화를 마구 찍어내서 유통하고는 금 함량이 높은 화폐를 세금으로 거둬들였다.(흥선 대원군 시절 지방관들이 상평통보로 세금을 걷고 당백전으로 돈을 풀었던 것과 비슷하다.)

그렇게 하여 충당된 돈은 모조리 군비로 쏟아부어지기는 하였지만 이로 인하여 일단 막장에 이르른 군대는 어느 정도 수습되었다. 또 10년 간 4번에 걸친 제위 찬탈로 인하여 급격히 불안해진 제국의 중앙 정부를 수습하기 위해 모후 안나 달라시니와 형 이사키오스를 비롯한 일가붙이는 물론 처가인 두카스[11] 가문을 비롯한 여러 친인척들을 중앙에 배치하여 안정적인 황제권을 확보하려고 하였다. 이후 어느 정도 혼란이 수습되자, 알렉시오스는 저질 금화의 주조를 금지하고 기존 노미스마의 금 함량의 7/8을 함유한 금화, 히피르피론(ὑπέρπυρον)을 주조하여 다시금 제국의 경제를 안정적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다.

7. 서방에 원조를 요청하다

파일:알렉시오스 1세 - 5.png

하지만 외적의 침입은 1090년에 들어서도 계속되고 있었다. 페체네그 족의 침입으로 제국과 동맹을 맺었던 쿠만 족이 스스로를 로마노스 4세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앞세워 트라키아를 침공하였다. 그리고 룸 술탄국도 계속 동로마 제국을 계속 공격하였는데, 황제는 신임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قِلِج اَرسلان)과 스미르나 지역의 토후인 차카의 반목을 유도해 클르츠 아르슬란과의 협정을 통해 외교적으로 룸 술탄국의 술탄과 이슬람계 군주들과 협정을 맺으면서 전쟁을 피하려 하였다. 하지만 즉위 초기 서방에서 벌어진 군사 활동들로 인하여 동방의 영토는 점차적으로 제국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 무정부 사태에 이르거나 튀르크 침략자들에게 점령당하였다. 1096년 경 동방에 남아 제국의 행정권이 미치는 영토는 시노피부터 트라페준타에 이르는 폰토스 지방과 이라클리아 폰티키, 다말리스, 니코메디아, 아비도스를 잇는 마르마라 해안가의 비티니아와 미시아 지방 뿐이었다.[12]

알렉시오스 1세는 동방으로 눈을 돌려 아나톨리아 해안의 일부를 되찾을 수 있었지만, 튀르크의 침공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제국의 힘만으로는 사방에서 쳐들어오는 침략자들과 맞서 싸울 수 없다고 판단한 알렉시오스 1세는 서유럽의 힘을 빌리기로 하였다. 과거에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가 알렉시오스 1세에게 파문을 선고하면서[13]로마 황제와 로마 교회의 관계는 악화되어 있었으나, 이즈음 새로이 교황으로 등극한 우르바노 2세가 알렉시오스 1세의 파문을 취소하는 등 제국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하고, 이에 알렉시오스 1세는 서방 교회와의 화해를 모색하면서 교황의 초청을 받아 1095년 3월 피아젠차 공의회에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사절단은 제국의 어려움과 성지 회복의 정당성을 역설하면서 종교적인 명분을 내세워 교황 우르바노 2세에게 투르크 인들에게 대적하기 위한 군사 원조를 요청하였다.[14]

우르바노 2세 역시 전임자 그레고리오 7세가 교황권의 신장을 꾀하면서 이를 공고히 할 필요성이 생겨나고, 신성 로마 제국하인리히 4세와 노르만의 로베르 기스카르 사이에서 교황 자체의 무력적인 기반이 약화되자 동로마 제국과의 화합을 꾀하는 동시에 무력 원조를 통한 입지 강화 및 동방 교회에 대한 영향력 확보를 의도하였기 때문에, 이는 쉽게 수락되었고 나아가 알렉시오스 1세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발전하게 된다.

8. 제1차 십자군 전쟁기

1095년 11월, 교황 우르바노 2세가 프랑스 남부 클레르몽에서 교회 회의를 개최하여 십자군 원정을 선포하면서 제1차 십자군이 조직되었다. 당초 알렉시오스 1세는 서방 교회와의 화해를 통해 적당한 규모의 지원 병력[15]을 받을 수 있는 형태로 생각하고 있었으나, 교황의 호소에 따라 조직된 제1차 십자군은 서유럽 국가들의 영주, 기사들이 대거 참여한 대규모 병력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성지 탈환이라는 목표가 제시되면서 너도나도 십자군에 참여하여 병력의 규모는 지나친 수준을 초월한 규모로 커져버렸으며, 특히 민중 십자군은 도움이 되기는커녕 행패만 부렸기에 오히려 골칫거리가 되어버렸다.

결국 이들이 와서 싸지른 것들을 뒷처리한다고 상당히 골머리를 썩었지만, 1095년 은자 피에르가 이끄는 민중 십자군이라는 예방 주사(...)를 맞은 알렉시오스 1세는 식량을 비축하고 십자군에게 호송대를 붙이는 등 현명하게 대처한 덕분에 보급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큰 마찰없이 십자군을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데려오는 데 성공하였다. 알렉시오스 1세는 프랑크인들을 신뢰하지 않았으므로[16] 십자군 군주들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고 앞으로 점령할 영토의 종주권을 동로마 황제, 즉 자신에게 넘길 것을 맹세받으려고 하였다.

이에 군주들은 격렬하게 항의하였으나[17], 선물과 회유를 비롯한 여러가지 방법으로 알렉시오스는 이들의 마음을 돌리는 데 성공하였다. 다만 저지 로렌(Niederlothringen)의 공작 고드프루아 드 부용이 문제였는데, 백작 가문의 둘째 아들로[18] 노퓨처 인생을 살다가 신성 로마 황제에게 충성하여 공작 작위까지 받은 그로서는 신성 로마 황제 이외의 군주에게 충성 서약을 할 수 없노라고 강변하였다.

이에 알렉시오스 1세가 식량 공급을 차단하자, 분노한 고드프루아는 보복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주변의 촌락을 약탈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가 지휘하는 수비대와, 성벽에 배치된 제국군 궁병대의 반격으로 물러났다가 황제가 정규군을 파견하여 이들을 제압할 생각을 하자 어쩔 수 없이 충성 서약을 하였다.[19] 노르만 침략 때 주요한 역할을 했던 보에몽도 있었는데, 그는 동생 루지에로에게 모든 유산을 빼앗기고[20] 허송세월을 보내다 십자군 모집 공고를 보고 아녀자들까지 급하게 끌어모은 군대를 가지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군한 것이었다. 보에몽은 모범적으로 서유럽 군주들 사이에서 앞장 서 알렉시오스에게 충성 서약을 하였으나[21], 뒤에서 은밀하게 황제에게 동방의 제국군 총사령관 직위를 달라고 요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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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시오스 1세는 이제 슬슬 중견에 접어든 황제 경력으로 말미암아 적당한 때가 되면 반드시 신중하게 고려해보겠다는 외교적인 답변을 해주고는 스리슬쩍 넘어갔다. 툴루즈 백작 레몽은 곧 죽어도 충성을 안 하겠다고 버텼는데, 고드프루아처럼 성급히 군사적 대응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완고하게 버텼으므로 알렉시오스 1세도 GG치고 황제의 명예와 안전을 최대한 존중하고 보호하겠다는 약속만 받기로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알렉시오스 1세와 맺은 서약을 레몽은 가장 충실히 지켰고, 보에몽은 가장 빨리 어겼다.

이런 소란에도 불구하고, 여차저차 1차 십자군은 보스포루스 해협 너머로 진군하였다. 알렉시오스 1세는 유능한 장군인 타티키오스에게 2000 병력을 딸려주고 처남 요안니스 두카스 대공에게 대규모 함대를 맡겨 십자군을 지원했다. 최우선 탈환 대상은 셀주크 제국의 아나톨리아 분점인 룸 술탄국이 수도로 쓰고 있던 니케아였다. 당시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은 이전의 민중 십자군이 니케아를 공격할 때 계략을 써서 제리고르돈 요새에서 완전히 파괴한 뒤로는 십자군을 과소 평가하여 아예 원정을 떠나있던 상황이었다.

그런 니케아를 전투민족 프랑크인들과 현지에 밝고 기술력이 뛰어난 동로마 군대가 두들겨대니 쉽게 함락...하였는데, 니케아같은 유서깊은 대도시가 프랑크인들에게 점령당하면 관례에 따라 사흘 동안 벌어질 약탈이 엄청날 것임을 우려한 알렉시오스 1세는 도시가 점령당하기 전날 밤 밀사를 파견하여 항복하면 약탈은 면하게 해주겠노라고 제안한다. 니케아 측에서는 구원을 위해 달려온 술탄의 군대가 격퇴되는 것을 목도한 상황이었고, '알아서 생존을 도모해라'라는 사실상 항복을 허가하는 전언이 있었기에 거리낄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다음 날 총공격을 준비하던 프랑크인들의 눈에는 니케아 성에 펄럭이는 황제의 군기가 보였다. 이미 마누일 부투미티스가 니케아의 공작(Doux)으로 임명되어 상황을 정리해버렸던 것이다. 게다가 황제는 클르츠 아르슬란의 아내와 자식들을 정중하게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모셔갔고, 이후 그녀의 친정인 스미르니를 통해 술탄에게 반환하였다. 이는 십자군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고, 이것이 동로마와 프랑크인들의 이해 관계가 상충하여 벌어진 첫 번째 사고였다.

하지만, 동로마는 자신의 땅을 되찾으려고 하는 것이었고, 십자군은 새로운 영토를 차지하고 부를 원했으므로 이해 관계의 상충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이후 십자군을 격퇴하기 위해 클르츠 아르슬란이 군사를 이끌고 도릴레온 협곡에서 십자군을 요격하지만, 처참하게 발리고 퇴각한다.

룸 술탄국이라는 강력한 구심점을 잃은 아나톨리아 인근의 고만고만한 도시들은 십자군에게 무난하게 탈환될 수 있었다. 게다가 애초에 기대하지도 않았던 팔레스타인까지의 진격이 성공하여 예루살렘까지 탈환하였으며, 예루살렘 왕국이 건국되었다.

그렇게 십자군들이 라틴 계열 공국들을 세우는 동안 알렉시오스 황제도 자신의 숙원이었던 아나톨리아의 회복을 위해 전력을 다했다. 처남 요안니스 두카스의 대군은 수륙 병용으로 이오니아와 리디아의 튀르크 토호들을 축출했으며, 스미르니, 에페소스, 호마, 트랄리스 등의 대도시와 요충지들이 다시 제국의 지배와 통제 하로 들어왔다.

하지만 십자군의 영주와 기사들은 이러저러한 불미스러운 갈등들로 인하여 사이가 틀어진 동로마 제국의 황제에 충성할 생각이 없었으며, 안티오키아 공국, 에데사 백국, 트리폴리 백작국과 같은 국가들이 난립하였다. 결국 알렉시오스 1세가 힘으로 찍어눌러 아나톨리아 서부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회복하였고, 아나톨리아의 곡창 지대와 시리아 지역 일부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십자군 국가에 대한 확고한 통제권은 확보하지 못하였으며, 이로 인해 십자군 국가와 대립할 수밖에 없게 된다. 특히 원래 동로마 제국과 사이가 안 좋던 노르만족, 즉 보에몽이 세운 안티오키아 공국은 그리스 지역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8.1. 보에몽과 알렉시오스

가장 먼저 충성 서약을 했던 보에몽의 이야기는 알렉시오스에게 있어 특별한 것이기에 따로 문단을 할애하여 설명코자 한다. 보에몽은 충성 서약을 하였지만 안티오히아를 함락하자마자 안티오키아 공국을 자신의 영지로 선포하고 이에 항의하는 레몽을 까버렸으며(롱기누스의 창 항목 참고) 고드프루아 드 부용이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성묘의 수호자(사실상 국왕)로 등극하자 교황청 특사 다임베르트 주교와 야합하여 예루살렘의 왕위를 얻어내려고 하였는데, 그의 동생인 에데사 백작 보두앵의 발빠른 대처로 이가 무산되자 별 수 없이 주변 무슬림 촌락을 약탈하기만 하였다.

십자군 내부 뿐만 아니라 서쪽에서 다가오는 위협도 보에몽을 걱정스럽게 했다. 기량을 되찾은 동로마군이 대병력을 끌고 아다나,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인 토호들을 복속시키고 안티오히아의 접경까지 다다른 것이다. 황제가 겨우 14년 전까지만 해도 동로마의 땅이었던 안티오히아의 주권을 요구하리라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다가 다니슈멘드 왕조[22]의 한 아미르에게 생포되어, 그 이름도 높은 보에몽 경매를 하게 되었다. 주요 입찰자는 총 세명. 즉위하자마자 그에게 털리고 충성 서약에 대해 배반까지 당했던 동로마 황제 알렉시오스 1세, 니케아를 눈뜨고 빼앗기고 도릴레온에서 보에몽의 침착한 지휘에 대패하고 물러났던 룸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 그리고 사로잡힌 보에몽 본인(...)이었다. 각 군주들의 입찰가는 다음과 같다.

다니슈멘드 술탄은 보에몽의 제안을 채택하였고, 보에몽은 석방되자마자 즉시 안티오키아로 돌아가 자신이 없는 사이 안티오키아의 공작 노릇을 하며 자신의 석방을 방해하던 조카 탕크레드를 축출하고 10만 디나르를 신민들에게 짜내어 납부하여 다시 레반트의 주요 영주로 복귀하였다. 그러나 어느 정도 세력 판도가 잡힌 레반트에서 더이상 자신이 얻을 것은 없다고 판단하고는 아버지의 숙원이자 자신의 유산인 동로마 제국을 되찾기 위해 프랑스의 공주와 결혼하고는 딸려온 재물과 자신의 명성으로 소집한 병력을 바탕으로 아버지 기스카르 로베르가 그러하였던 것처럼 1108년 28년 만에 남이탈리아에서 출병하여 디라히온을 공격한다.

하지만 30년 만에 제국은 이미 유럽 최강대국의 타이틀을 수복한 후였다. 보에몽은 아버지같은 기량도 갖추지 못했을 뿐더러 원숙했던 알렉시오스의 상대가 더 이상 되지 못하였다. 보에몽은 디라히온을 공격하지만 재건된 제국군에 의해 대패하고, 포위당한 상황에서 전염병까지 창궐하자 안티오키아가 제국의 봉신임을 맹세하는 등의 굴욕적인 조항이 담긴 항복조약인 데볼 조약(1108년)을 체결하고는 실의에 빠져 남이탈리아에서 죽었다.

9. 말년과 죽음

제국의 동서방이 모두 안정되고, 히피르피온 경제정책이 성공을 거두며 알렉시오스 황제 말년에는 제국이 안정세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제국을 안정기로 만든 것과는 별개로 강경한 과세정책과 족벌주의는 시민들과 귀족들에게 좋게 보이지 않았다. 제위 초중반부에 긴급자금을 수혈하기 위해 시도한 교회 재산의 징발 또한 교회의 눈총을 사기 딱 좋은 정책이었다. 알렉시오스는 교회, 구빈원, 병원을 건설하고 빈자들을 구휼하는 한편, 불가리아에서 성행하던 보고밀파 이단을 정리하며 지지를 얻어보고자 했으나 민심은 싸늘한 상황이었다.

황궁 내에서도 문제는 산적해있었다. 알렉시오스의 장녀이자 포르피로옌니타안나 콤니니는 공공연하게 둘째아들인 요안니스 왕자를 모함하고 있었고, 후계갈등에 알렉시오스의 아내인 이리니 두케나까지 안나를 지지하면서 혼란이 가중되고 있었다. 황제의 통풍은 심각한 수준까지 악화되고 있었고, 노쇠한 황제는 딸을 완전히 컨트롤하지 못했다.

1111년, 룸 술탄국의 술탄 말리크 샤가 다시금 전쟁의 포문을 열었다. 이들은 수군까지 보유하여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넘었고, 제국 서부인 트라키아까지 약탈을 감행했다가 격퇴되었다. 2년 뒤인 1113년, 이들은 또다시 침공을 감행해 수만 병력으로 니케아를 공성하고, 수복한지 30년도 채 되지 않은 서부 아나톨리아의 제국영토를 유린하기 시작했다. 투르코만 유목민들은 니케아의 두터운 성벽을 넘지는 못했지만 주변 영토를 초토화시켰다. 다행이도 알렉시오스는 아틸레이아부터 아드라미티온까지의 서부 아나톨리아의 대도시와 주요거점을 요새화시켜놓았기 때문에, 룸 술탄이 영토를 빼앗는 일은 없었지만, 계속 도시근교를 약탈당한다면 수복지를 강탈당하는것은 시간문제였다.

1115년부터 황제는 병력을 준비했지만 친정은 힘들었다. 통풍과 노환이 심해진 데다가, 아내 이리니와 딸 안나의 세력이 언제 반란을 일으킬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북부 지역에서 쿠만족까지 침공해온다.

1117년, 쿠만족의 공격은 격퇴되었고, 황제의 병세도 나아졌다. 그는 룸 술탄국에 대한 대규모 응징원정을 통해 주요 로마인, 기독교인 인구를 룸 술탄국 영토에서 구출해내고, 약탈을 멈추기 위해 필로밀리온으로 진격했다. 여기에 본인 부재 시에 있을 쿠데타를 저지하기 위해 아내 이리니까지 전장에 함께 데려갔다.

필로밀리온 전투에서 알렉시오스의 로마군은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는 황제의 마지막 치적이었다. 그는 전투 후 다시 앓아누웠다. 1118년이 되자 그는 목이 부어 물조차 삼키기 힘들고, 앉은 자세가 아니면 숨쉬기조차 어려운 상황에 이르렀다. 아내 이레네는 그를 헌신적으로 간호했지만, 이는 그의 사후 안나에게 제위를 물려주려는 의도였다.

1118년 8월 15일, 죽음을 직감한 황제는 아내와 딸 몰래 황제의 증표를 아들 요안니스 2세에게 보냈다. 그리곤 거친 수도복으로 갈아입고 병상에서 고백성사를 받은 후 죽음을 맞이했다. 그의 나이 62세였다.
그는 죽기전 제위를 후계자가 아닌 다른이에게 주려는 이레네에게 웃으며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내가 미치지 않았다면, 아무리 내가 적법하지 않은 찬탈로, 그리스도교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제위에 올랐다고 해도 어찌 내 아들이 아닌 이방인에게 제위를 물려주겠소? (니키타스 호니아티스, '요안니스 콤니노스' 1장, 알렉시오스의 유언)

10. 평가

열성적으로 정치를 펼치고 각종 개혁에 힘을 쏟으면서 제국을 안정화시켰으나, 제위에 오르는 동안 소수 가문의 지원을 등에 업었던 까닭에 족벌의 힘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족벌 위주의 정책을 펼쳤다. 동로마의 특성상 정치 안정도가 굉장히 낮았으므로 가장 믿을만한 일가붙이를 친위 세력으로 배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결국 이러한 족벌주의 성향은 후대부터는 부정부패로 물들어 계속해서 악영향을 끼쳤다.

또한 알렉시오스는 동로마가 계속 혼란스러운 이유가 안정된 세습 왕조가 아닌 유력자 세습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장녀 안나 콤니니의 부군인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가 아닌 아들 요안니스 2세에게 제위를 물려주었다.

알렉시오스 1세 때부터 반복된 실책으로는, 잠재적인 동맹자가 될 수 있었던 십자군들을 그저 다른 "야만인"들과 다름없이 대해서 적으로 돌린 데 있다. 이게 지나치게 서방 중심적인 생각이란 비판이 있으나, 십자군이 당시 동로마에 비하면 군사력만 발전한 정말로 야만적인 군대였고 지나는 곳마다 약탈을 자행하였으며 약속이란 약속은 죄다 깨버려서 그렇다는 것 또한 지나치게 동로마 측의 견해만 강조한 주장이 될 것이다.

알렉시오스는 일시적인 용병으로만 십자군을 대했는 데 이것은 십자군 측으로써는 당연하게도 어느 정도는 모욕이자 기대하던 바와는 달랐으며, 주겠다는 영지에 대한 보장에 대해서도 일관적인 때는 없었다. 이러니 십자군 측이 동로마는 믿을 수가 없다고 본 것이 당연하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십자군에 대한 알렉시오스 1세의 인식과 십자군 군후들 자신의 인식이 달랐음을 통해 설명 가능한 부분도 있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알렉시오스 1세의 본래 의도는 기독교도로서의 동질성을 '매개체'로 삼아 교황의 알선(소개)를 통해 서유럽 세력을 용병으로 끌어들이는 것에 가까웠다. 즉, 알렉시오스와 동로마가 고용주(갑)의 입장에서 서유럽 병력을 고용하는 형태의 관계를 원했다는 것. 만약 상황이 이 복안대로 진행되었다면 알렉시오스와 동로마 제국측이 명백히 우위인 입장에서 '제국과 황제를 위해 싸워주면 정당한 보수를 지불하겠고, 그 중 큰 공을 세운 자에게는 상을 주겠고, 충성을 맹세하는 자에게는 영지도 수여해 주겠다'는 태도를 보인다고 해도 별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십자군의 세력은 알렉시오스가 예상한(기대한) 것보다 훨씬 거대하여 규모면에서든 구성원의 면면에서든 나름대로 독자세력화하기에 충분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십자군 군후들의 관점에서는 '우리는 대등한 동맹자로 인정받을 자격이 있다' 고 주장할 수 입장이었던 것이다. 현대식으로 비유하자면 대기업(동로마 제국)이 이번 사업에만 써먹을 하도급 업체(십자군)를 구하면서 직접 지휘 감독하는 것을 원했는데, 정작 하도급 업체라고 나타난 기업은 대기업으로서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중견기업이었던 셈이다. 더불어 그 중견기업은 사업의 지분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따라서 상대의 규모가 예상보다 훨씬 거대해져서 제국측이 통제 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났는데도 그저 다른 "야만인", 즉 제국의 영향력 아래에서 용병으로 활동한 다른 외부 세력과 똑같이 대하려 한 것이 알렉시오스의 오판이자 실책이었다는 주장에는 분명 상당한 합리성이 있다. 물론 반대로 알렉시오스와 동로마의 입장에서 보면 이들 십자군에게 '동맹 세력으로는 신뢰할 수 없는 야만적인 면모'가 있었던 것 역시 사실이고, 특히 이전까지 수백년의 역사동안 '야만화된' 서유럽(구 서로마의 영역)에 대비한 '문명국'의 지위를 누려왔던 동로마의 역사적 관성 역시 참작할만한 부분이며, 최근까지 동로마를 위협했던 세력(예컨데 남이탈리아의 노르만 세력) 역시 포함된 이들 십자군을 동등한 동맹자로 인정하고 이들의 세력 구축까지 받아들이는 것 역시 동로마의 입장에서는 장기적으로 자국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는 실책이 될 가능성은 상당하지 않았겠느냐는 점도 감안해야겠지만.

당장 제1차 십자군의 주요 제후 중 한 명인 보에몽은 동로마와 전쟁까지 치렀던 인물이다. 십자군에 참여하고 난 뒤에도 다른 제후들을 꼬드겨 동로마를 치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반면 플랑드르 백작 로베르는 전혀 다른 입장이었는데, 알렉시오스가 선대 플랑드르 백작과 계약하여 기사들이 파병되기도 했다[23]. 선대 플랑드르 백작과 알렉시오스는 친분을 맺었다고도 하고. 알렉시오스가 십자군을 유치하기로 생각한 것도 이 경험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실제로 그가 원한 것도 딱 여기서 숫자만 좀 늘어난 정도 수준이었을 것이다. 그가 예상치 못했던 것은 이 일을 전 서유럽적 사업으로 키워버린 교황의 움직임이었다.

분명 뛰어난 외교관이긴 했으나, 그의 외교 정책은 '외교적'이라기 보다는 '권모술수적'이었다. 알렉시오스 1세의 대외 정책은 이이제이를 통해 주변 세력들을 이간질시키는 것이 기조였다. 이는 단기적으로 제국에 큰 이익을 가져다 주었으나 나중에는 주변국들로부터 믿을 수 없다는 평판을 받아 외교적으로 고립되었다. 1차 십자군 전쟁 당시에는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큰 전투에는 최대한 참여하지 않고 실리를 챙기려는 그의 태도가 십자군 기사들의 분노를 촉발시키는 원인이 되었으며, 십자군 기사들은 자신들이 점령한 영토를 동로마 제국에 양도하겠다는 서약을 찢어버렸다.[24]

문제는, 로마 제국 때부터 내려오는 반독립적인 무장 세력을 정치적 안정을 이유로 허용하지 않겠다는 알렉시오스 1세의 정책이 영지 확보를 기대하고 있는 십자군 측의 이해와 정면 충돌한 데 있다. 4차 십자군의 비극은 이때부터 시작된 서로의 불신과 오해가 쌓인 결과다.

언제든 적으로 돌아설 지 모르는 위험한 반독립적인 군대를 왜 그 전까지의 고대 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 시절에는 방관했을까? 몇 차례의 쿠데타와 황가가 교체되는 비극에서도 제국은 꽤 오랫동안 반독립적인 둔전병 제도를 포기하지 않았다.[25]

이유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요소요소 쳐들어와서 전략 거점을 고립시킨 후, 그곳을 아사시킨 뒤 차례차례 무너뜨리는 유목 민족 특유의 전술에는 그 방법 외에는 대응이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물론 알렉시오스 1세의 후계자들은 방어가 어려운 지역을 과감히 포기하여 내실을 튼튼히 했었고 이것도 유효한 전략이지만, 이 경우는 통치자에게 변수가 있었다. 즉 체제를 다루는 통치자가 일시적으로 이 고삐를 놓칠 경우, 방어 체제 자체의 결점이 두드러져서 최악의 결과가 빚어질 수 있었다.

콤니노스 몰락의 원인은 집안 싸움과 후계자의 무능이라지만, 제국의 과거에는 그런 문제가 없었는가? 그때에도 집안 싸움과 무능한 후계자 그리고 내분은 다반사였지만 제국 체제 자체가 흔들리는 적은 없었다.

1071년, 제국 영토가 1/2 토막이 나고 제국군이 해체되고 재정까지 급격히 악화된 상황에서는 이를 해소할 만한 개혁 정책이 필요할 수 밖에 없어서 그럴 수 밖에 없었다는 얘기가 있으나, 다른 때에는 그런 위기가 없었는가? 8세기에 이슬람 제국이 저돌적인 힘으로 맹진할 때에는 더 큰 초유의 위기 상황이었고, 그전의 7세기 때의 사산조 때는 더욱 더 최악이었다. 오히려 이 당시 제국 체제가 11세기의 위기에 있었던 제국보다도 더욱 심각한 상태였다.

이미 흔들린 제국 체제 자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하는 와중에서, 반독립적인 무장 세력들을 모조리 해체해서 정국 안정만을 우선시한 정책 밖의 길은 없었는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알렉시오스 1세는 제국 중흥의 기틀을 마련한 명군이지만, 그가 행한 모든 정책에 장기적인 배려가 충분했다고는 볼 수 없다. 그리고 서구 십자군이 그에 대해 품었던 분노와 의구심은 그들 잘못만이 아니다.[26]

그의 딸 안나 콤니니가 아버지에 대해 집필한 역사서 알렉시아스가 있는데[27] 보통 서구권의 시선과는 다른 시각을 제공해 가치가 높기도 하며 딸이 여간 파더콘 아버지 모에가 아니었는지 알렉시아스 내에서의 알렉시오스 1세는 웬만한 액션 히어로 저리가랄 정도의 무력을 보여주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현실의 테두리 안에서 쓰여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 같은 느낌이 난다.[28]

사족이지만 알렉시오스 1세는 사후 대제 칭호를 받지 못했고, 대제 칭호는 손자였던 마누일 1세가 받았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이후 유일하면서 마지막 로마 제국의 대제.[29] 그러나 알려진 것과는 달리, 마누일 1세의 제국이 알렉시오스 1세의 제국보다는 건실했고, 외교적 방향도 상당 부분 올바른 방향으로 수정되어 있었다. 또한 마누일이 외교에서나 군사에서나 주목할만한 성과를 올린 건 사실이기에 그의 대제 칭호가 적어도 당대 기준으로 그렇게까지 어색한 건 아니었다. 알렉시오스 1세의 성과는 후임 황제들이 노선을 수정해가며 잘 보존하면서 발전시킨 반면 마누일 1세의 성과는 변변찮은 후계들 탓에 엉망진창이 되어 결과만 놓고 볼 때는 알렉시오스 1세가 마누일보다 좋은 황제로 보일 수는 있겠지만, 이는 역사를 제대로 보는 자세가 아니다.

11. 가족 관계

백부 : 이사키오스 1세

부친: 요안니스 콤니노스
모친 : 안나 달라시니

형제 : 마누일, 이사키오스, 아드리아노스, 니키포로스, 마리아, 에브도키아, 세오도라

장인 : 안드로니코스 두카스(요안니스 두카스의 장남, 미하일 7세의 사촌)
아내 : 이리니 두케나

자 : 요안니스 2세, 안드로니코스, 이사키오스 콤니노스(알렉시오스 1세의 아들)

녀 : 안나, 마리아, 에브도키아, 조이, 테오도라

사위 :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소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 안나의 부군), 콘스탄티노스 앙겔로스(테오도라의 부군, 요안니스 두카스(세바스토크라토르)안드로니코스 두카스 앙겔로스의 아버지)
[1] 영어 위키백과 링크[2] 알렉시오스 5세 두카스, 테오도로스 1세 라스카리스는 알렉시오스 1세 콤니노스의 후손이 아니었다. 하지만 알렉시오스 5세는 알렉시오스 1세의 처가인 두카스 가문으로 알렉시오스 1세의 외증손자(딸의 아들의 아들) 알렉시오스 3세 앙겔로스의 사위였고, 특히 테오도로스 1세 역시 알렉시오스 3세의 사위로서 모계 계승을 통해 대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외증손자 요안니스 4세(딸의 아들의 아들)가 미하일 8세에게 폐위당하면서 대가 단절되었다.[3] 알렉시오스 1세 콤니노스의 사망 후 증손자 알렉시오스 2세 콤니노스까지 순조롭게 부자 승계를 이어 나갔지만 어린 알렉시오스 2세가 1세의 또 다른 손자인 당숙 안드로니코스 1세 콤니노스에게 살해되고, 또 그가 폭정을 펼치다 끔살당함으로써 동로마 본국에서의 부계 계승은 리타이어되었지만, 이 안드로니코스 1세의 손자 알렉시오스 1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십자군에게 함락되기 얼마 전에 트라페준타 제국을 세웠다.[4] 팔레올로고스 왕조를 세운 미하일 8세는 이사키오스 2세 앙겔로스의 형 알렉시오스 3세 앙겔로스의 증손자였다.(딸의 딸의 아들)[5] 니키포로스 3세는 미하일 7세를 몰아내고 제위를 차지할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미하일 7세의 황후인 알라니아의 마리아와 결혼하였다. 알라니아의 마리아는 미하일 7세와의 결혼 생활에서 이미 콘스탄티노스 두카스라는 아들을 낳은 상황이었지만, 니키포로스 3세는 황후를 존중하던 동로마의 관습과는 달리 콘스탄티노스 두카스를 제위 후보에서 제외했고, 때문에 황후와 콘스탄티노스 두카스의 부계 친척인 두카스 가문은 분노하였다. 그래서 황후인 알라니아의 마리아는 콤니노스 형제를 돕는 대가로 콘스탄티노스 두카스를 공동 황제에 앉히기로 합의하였다.[6] 사실 알렉시오스는 원래 아나톨리아의 유서 깊은 명문 군벌인 아르이로스 가문의 딸과 약혼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아르이로스의 여식이 요절하면서 이리니 두케나와 약혼하게 됐고 이것이 제위 찬탈에 큰 도움이 되었다.[7] 황제의 칭호이던 Sebastos와 Autokrator을 합쳐 만든 작위로, 사실상의 2인자 자리였다.[8] 동로마의 황후는 서유럽의 왕비들과는 궤가 다른 독자적인 권한을 지니고 있었다. 황후도 황제와 마찬가지로 대관식을 치렀으며 독자적인 세금 징수권과 정치에 참여할 권리를 가졌다. 심지어는 황제가 죽거나 폐위당하면 다른 남자와 결혼하여 황후의 직위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새 남편을 황제로 올릴 수도 있었다. 심지어는 황제인 아들과 대립할 때면 아들을 몰아내고 여제(女帝)로서 단독 재위하기도 하였다. 동로마의 경우 서유럽보다 여성 군주가 많았으며 재위기간도 비교적 길었다.[9] 안나 달라시니는 콤니노스 가문과 마찬가지로 바실리오스 2세에 의해 육성된 카파도키아 군벌인 달라시노스 가문 출신으로, 딸 테오도라를 두카스 가문에 의해 폐위당한 로마노스 4세의 아들과 결혼시키고 두카스 가문과 잦은 반목을 겪었던 인물이었다.[10] 그 전까지는 장녀 안나와 콘스탄티노스 두카스를 약혼시켜 놓아 안정적인 제위를 확보하려 하였다.[11] 당시 이사키오스가 안티오히아의 공작으로(7세기 후반 무함마드에게 빼앗긴 예루살렘과는 달리 안티오키아는 지속적으로 제국이 재점령하였고, 십자군 전쟁 전 마지막으로 이슬람 세력에게 빼앗긴 것은 1084년의 일이다.) 재임하며 큰 명성을 쌓았지만, 당시 알렉시오스의 부인인 이리니 두케나가 두카스 가문의 일원이었기에 알렉시오스가 황제가 될 수 있었다. 특히 이리니 두케나의 조부 요안니스 두카스 부제는 콘스탄티노스 10세의 동생이자 미하일 7세의 숙부로서 막강한 권력과 높은 지위를 향유하고 있던 차에 콤니노스 형제의 반란을 지원하기로 결정하였고, 따라서 알렉시오스와 이사키오스 중 누구를 황제에 올려야 할 지에 대한 갑론을박이 벌어지자 요안니스 부제가 나서서 두카스 가문과 더 가까운 사위 알렉시오스가 황제가 되었다.[12] 이 외에도 아나톨리아 내륙 곳곳에 여전히 제국의 기치를 휘날리고 있는 곳들이 있었으나 제국 중앙 정부의 통치를 받고 있지는 않았다. 당장 룸 술탄국의 차기 수도인 이코니온만 해도 1085년 경에 함락되었고 피시디아의 호마는 아예 튀르크의 손에 넘어가지 않았을 정도.[13] 1078년 전 황제 니키포로스 3세가 미하일 7세를 폐위하고 제위를 찬탈했을 때에도 교황은 니키포로스 3세를 파문한 바 있었다. 한편으로는 제국을 침략할 구실을 만들고자 했던 로베르 기스카르에게 협력한 것이기도 하다.[14] 기존에 친교를 튼 신성 로마 제국이 아닌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한 까닭으로 교황이 성지 탈환이라는 명분을 내세우기 좋은 대상이었으며, 교황의 무력 기반이자 제국의 적인 남이탈리아의 노르만족의 힘을 소모시키기 위해서라는 추측이 있다.[15] 당시 동로마에서 보기에는 서유럽의 프랑크족들은 야만적이고 무례하지만 전투민족으로서의 기량만은 출중하다고 생각하였다. 이 생각대로 서유럽 측의 군대는 이슬람과의 전쟁 때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16] 그도 그럴 것이, 주로 용병으로 동로마에 흘러들어온 프랑크인들은 신의 없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알렉시오스 1세도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와의 전투에서 프랑크 인들이 배반하자 튀르크인 용병대가 지원군으로 도착할 때까지 고전하였다.[17] 당연한 게 십자군 군주들은 외국인으로 동로마의 신하가 아니라서 충성 서약을 할 의무가 없다.[18] 11세기 후반부터 봉건 제도가 확립되자 장자가 거의 모든 상속권을 독점하게 되었다.[19] 일설에 의하면 고드프루아 드 부용은 이때 알렉시오스 1세의 양아들이 되었다고 전해진다.[20] 당시 새로 점령한 제국 서부가 그의 유산으로 할당되어 있었으나, 전술했다시피 순식간에 털리고 남 이탈리아로 쫓겨나 남 이탈리아를 물려받은 이복 동생 루지에로에게 공작위를 받았다. 그러나 핏줄은 못속였는지 숙부와 연합하여 동생을 공격하다가 실패하여 명목상의 공작 작위만 유지한 채 근근히 살아갔다.[21] 또한 보에몽은 알렉시오스 1세를 비롯한 동로마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자기가 데리온 병사들한테 동로마 백성들을 해치거나 약탈하면 즉시 사형시키겠다고 엄포를 놓는 식으로 군사들의 군기를 엄격하게 유지했다.[22] 룸 술탄국과는 형제지간이지만, 원수보다 더욱 격렬하게 싸워대었다. 모든 자식에게 땅을 배분하였던 튀르크 족의 특성상 빈번한 일이었다.[23] 플랑드르 백작이 성지순례를 다녀오던 길에 알렉시오스가 도움을 줬다.[24] 십자군 기사들의 황제에 대한 불신으로 인해 안티오히아와 서부 아나톨리아를 제외한 다른 십자군 영토의 통제권을 주장할 명분이 사라졌고, 이후에 이슬람 세력의 반격에 있어 십자군 왕국들은 동로마 제국의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물론 당시 동로마 제국 또한 알렉시오스 1세부터 시작된 콤니노스 왕조가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고 있어서 십자군 왕국들에 대한 지원이 어려워진 상황이긴 했다.[25] 테마라는 단어로 통칭되는 둔전병들이 반독립적인 군대가 아니었다는 말이 있으나, 편제에 있고 영토 안에서 농사를 짓는다고 오늘날 근대 국가의 상비군 그리고 원수정 로마의 레기온 체제 같은 일원화된 지휘 체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테마를 지휘하는 장수들은 물론 황제가 임명하지만 대부분은 해당 지역 토호 가문의 일원들이었으며 이들이 바로 일명 "군사 귀족" 가문으로 불린다. 니키포로스 포카스와 요안니스 치미스키스 같은 황제들도 이런 연줄로 중앙의 힘에 도전해서 제위를 빼앗았던 케이스다. 둔전병 제도 자체가 군대가 스스로 자신의 먹을 것을 생산하는 대신 어느 정도 독자적인 작전 권한과 공격권을 부여받으면서 민정 권한까지 일부 이양받는 것인데, 이것이 반독립적인 군대가 아니라는 얘기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26] 물론 서구 십자군은 그 문화적 안목이나 금도에서 볼 때는 동로마 측 시각에서는 최악의 야만인이고 약속을 어긴 적도 많았다. 하지만 그 반대편이 완전 무결한 피해자였다고만 본다면 그 또한 무리한 해석이 될 것이다.[27] 이 덕분에 안나 콤니니는 서구 최초의 여성 역사가라는 타이틀을 얻게 된다.[28] 죽어라 도망치면서 앞에 오던 기사를 창으로 한 방에 쓰러트리고 그가 타고 있던 말이 삼국지의 적로인양 절벽인데도 뛰어 오른다든가.[29] 마누일 1세는 ο μέγας '메가스' 칭호를 받았는데, 이것을 영어의 the Great로 번역하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대제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