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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물교회 선교단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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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피랍자 명단4. 사건의 경위5. 논란과 비판6. 영향
6.1. 대한민국 여권법 개정6.2. 개신교의 평판 저하 가속화
6.2.1. 사이버상의 반개신교 정서 가속화
6.3. 태상호 기자의 증언6.4. 저널리즘의 저하6.5. 국외 반응
6.5.1. 아리프 아쉬츠, <이스탄불에서 온 장미도둑>6.5.2. 국외 인터넷에서의 반응6.5.3. 종교계 반응
6.6. 이 사건의 보도에 대한 논란
7. 잘못 알려진 사실8. 기타
8.1. 다시 아프가니스탄에 간다?8.2.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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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007년 7월 13일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에 소재한 분당샘물교회 교인들이 단기선교를 목적으로 이슬람을 믿는 무슬림들의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겠다는 이유로 여행금지국가아프가니스탄에 입국을 강행했다가 현지 이슬람 근본주의 과격단체 탈레반에게 인질로 붙잡힌 사건. 당시 정부는 이들을 생환시키기 위해 많은 인력과 세금을 투입했다.

2. 상세

사실 아프가니스탄에 가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행동이었다. 사건으로부터 5개월 전인 2007년 2월에는 탈레반이 자신들의 동료들을 석방해 달라는 조건을 걸기 위해서 한국인들을 납치하려 한다는 첩보가 입수되었다. 대한민국 정부선교사 등에게 육로 이동을 금지할 것을 권고하고 아프간을 여행제한국가로 분류한 상태였다.[1] 샘물교회에도 정부에서 협조 공문을 보낸 적이 있으며 사건으로부터 2개월 전인 같은 해 5월에도 각별한 신변주의 요청과 함께 특히 아프간 남부 지역의 방문은 자제해줄 것, 그리고 아프간 현지에 나가 있는 선교사 단체들도 철수를 적극 검토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로 인해 아프간에 가려던 대부분의 선교사 단체들은 계획을 포기했지만 샘물교회의 선택은 달랐다.
파일:attachment/insanity-1.jpg
이 일행이 출발 당일 찍은 사진
우측의 푸른색 셔츠를 입은 사람의 이름은 심성민으로, 사살 당한 인물 중 한 명이다.
파일:South_Korean_hostages_in_Afghanistan_2007.jpg
일행이 모두 모여 찍은 다른 사진
좌측 하단 푸른색 셔츠가 심성민, 맨 오른쪽 푸른색 반팔을 입고 있는 사람이 배형규, 피랍당한 인물들 중 피살된 인물들이다.

이 사람들이 아프가니스탄 현지의 위험성을 그저 우스갯소리 따위로 받아들였음을 보여준다. 참고로 저 사진과 관련하여 [age(2007-07-13)]년째 게시 중단/블라인드 처리가 진행되고 있다. 블라인드 당한 사람의 포스팅, 아카이브

납치 주체인 탈레반아프가니스탄을 1996년부터 2001년까지 실제로 통치한 엘리트 이슬람 근본주의 무장 세력으로서 협상 전술이나 언론 관계, 대중 심리전 등에 능숙했다. 이들이 납치된 2007년 7월 19일부터 풀려난 후 한국에 입국하는(사건이 완전히 종료되는) 9월 2일까지 기간이 44일이나 되었던 점, 인원이 23명이나 되었던 점, 한국의 개신교계가 엄청난 관심을 가졌던 점 등이 고려되어 언론에서는 대한민국의 단일 사건 사고로는 사상 최대로 추정되는 엄청난 물량의 보도들을 쏟아냈다.

3. 피랍자 명단

보면 알겠지만 대부분 20~30대로 젊은 편이었고 학생이거나 주부, 직장인이어도 사회 초년생들이다. 나이는 모두 당시 기준이며 특이사항이 있는 경우 별도 표기한다. 출처 기사에 들어가면 사진도 나온다.

4. 사건의 경위

파일:attachment/insanity-2.jpg
파일:attachment/insanity-3.gif
아프가니스탄 한국인 피랍 관련 그래픽

2007년 7월 13일, 분당샘물교회 배형규 목사 외 분당샘물교회 남녀 교인 19명이 열흘간의 단기선교 목적으로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출국, 베이징서우두 국제공항UAE 두바이를 거쳐 14일에 아프가니스탄 카불에 도착했다. 출국 인원은 (배 목사 포함) 20명이었지만, 현지에서 활동하던 한국인 선교사 3명이 통역 및 안내 목적으로 합류해서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동안 총 23명이 움직였다. 이들은 7월 22일에 일정을 끝내고, 출국하여 23일에 인천공항으로 귀국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7월 15~18일 마자르이샤리프 지역에서 선교를 겸해 의료봉사와 어린이 봉사활동을 했다.

그러나 7월 19일 오후, 카불에서 (정부에서 특히 위험하니 가지 말라고 했던) 남부 지역 칸다하르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타고 이동하던 중 카불에서 170여 km 거리에 있는 가즈니 주 카라바그 지역에서 탈레반납치당했다. 참고로 당시 월간 군사잡지 플래툰의 기사에서는 이들이 지나갔던 길을 촬영했는데, "해당 지역을 호위 차량들 없이 버스 한 대만으로 움직이는 것은 자살 행위"라고 평가했다.[3]

이 소식은 7월 20일 영국 로이터 통신을 통해 국내에 전해졌다. 탈레반 대변인 카리 유수프 아마디는 "아프가니스탄에 파견한 한국군을 21일 정오까지 전원 철군하지 않을 경우 인질들을 모두 살해하겠다"고 협박했다. 그 날로 외교통상부는 국외테러사건 대책본부를 설치했다. 7월 20일부터 22일까지 충남 계룡시 계룡대의 별장에서 군 관계자들과 골프 모임 등을 할 예정이었던 노무현 대통령은 21일 새벽 소식을 듣고, 모임을 일찍 마치고 급히 상경하여 대책 마련에 나섰다. 이후 탈레반은 협상 시간을 하루하루 연장했다.

한국 정부가 한국군 철군에 대해 "연말에 철수할 계획"이라고 발표하자, 탈레반은 새 요구사항을 제시했다. 7월 22일 19시까지 한국인 인질과 같은 수의 탈레반 수감자(포로)를 석방하라는 것이었다.

7월 21일, 노무현 대통령은 카르자이 아프간 대통령에게 전화해 협조를 요청하는 한편, CNN을 통해 인질 석방을 촉구하는 긴급 성명을 발표했다. 정부는 아프간에서 철군하겠다는 계획을 재확인시킨 뒤 카불 현지에 협상단을 급파했다.

7월 22일, 정부 대책반이 카불에 도착해 아프간 정부, 부족 원로, 종교 지도자들에게 직·간접적 접촉과 중재를 요청했다.

7월 23일, 탈레반은 한국 정부와 직접 협상을 요구했다. 그러면서 석방을 요구하는 수감자 수를 23명에서 가즈니주에 수감된 탈레반 수감자 55명 전원으로 늘렸다.

한국 정부는 피랍자 23명 중 18명을 우선 석방시키자고 제안했다. 탈레반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7월 25일 끝내 희생자가 나왔다. 탈레반은 협상이 결렬되었음을 선언하고, 인질 중 남자 1명을 살해했음을 밝혔던 것이다. 또한 26일까지 하루 안에 수감자 8명이 석방되지 않으면, 다른 인질도 모두 살해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26일 정부는 피살자가 배형규 목사(42, 남, 1965년 7월 25일생)임을 확인했다.

7월 26일, 한국 정부는 백종천 청와대 안보정책실장을 대통령 특사로 아프간에 파견했다. 7월 29일, 백종천 특사는 카르자이 아프간 대통령을 만나, 인질·수감자 맞교환 협상에 적극적으로 임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아프간 정부는 불가 입장을 밝혔다.

탈레반이 협상시한을 수시로 변경하고, 인질·탈레반 수감자 맞교환 협상이 난항을 거듭하는 가운데, 7월 31일, 첫 번째 희생자가 나온지 5일 만에 두 번째 희생자가 나왔다. 심성민(29, 남, 1978년 6월 29일생)이 살해 당한 것이다. 탈레반은 수감자 석방에 대한 긍정적인 답이 없을 경우, 나머지 인질을 살해하기 시작할 것이라 위협했다. 또 한국과 미국의 군사 작전이 시작되면, 인질을 살해할 것이라고 밝혔다.

탈레반과의 대면 접촉이 이뤄진 후에야, 해결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8월 3일 아프간 주재 대한민국 대사와 탈레반 측은 직접협상 장소를 정하기 위해 통화했다.

8월 1일과 3일 사망자들의 시신이 각각 인도되었다. 정확한 사인을 확인하기 위해 국과수부검을 실시한 결과, 두 사람은 모두 총으로 사살 당해 참혹하게 죽었다. 배 목사는 머리에 1발, 몸통에 6발, 모두 7발이나 되는 총상을 입었고, 심씨는 머리에 2발, 몸통에 2발을 맞은 것으로 확인됐다.

8월 6일, 미국 부시 대통령과 아프간 카르자이 대통령은 정상회담에서 탈레반에 대한 양보 불가 입장을 재확인했다. 아프간 정부가 인질과 탈레반 수감자 맞교환을 거부하고, 미국도 이를 동조하자, 한국 정부는 딜레마에 직면했다. 탈레반을 설득할 묘안이 없는 상황에서 미국이 비협조적으로 나오자, 협상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8월 7일, 외교통상부는 아프가니스탄을 여행금지국으로 지정했다. 10일에 처음으로 한국 정부와 탈레반이 대면 협상을 시작했으며, 이는 가즈니주 적신월사(ICRC) 사무실에서 이루어졌다. 탈레반 대표는 한국인 인질 8명과 같은 수의 탈레반 수감자 맞교환 조건이라는 기존 입장을 반복했고, 한국 정부 대표는 탈레반 수감자 석방은 권한 밖의 일이라며, 탈레반에 인도주의적 차원의 석방을 요청했다.

8월 11~12일, 2차 대면협상 과정에서 탈레반은 선의의 표시로 건강이 악화되던 여성 인질 2명 석방을 발표했고, 이들은 13일에 석방됐다.

8월 16일, 한국·탈레반 대표는 가즈니에서 3차 대면협상을 재개했다. 탈레반이 8월 중순부터 인질·수감자 맞교환 조건을 철회할 의사를 내비쳤다.

8월 27일, 한국 정부가 아프간에 파병된 다산·동의부대를 3개월 연장 주둔 후, 철수시키겠다는 계획을 발표하면서 인질 협상은 본격적으로 진척됐다. 마침내 8월 28일, 한국·탈레반 대표는 4차 대면협상을 갖고, 인질 19명 전원 석방에 합의했다. 한국·탈레반 협상팀은 ▲아프간 내 한국군 연내 철수 ▲아프가니스탄 내 비정부기구 활동 한국인 8월 내 철수 ▲한국의 기독교 선교사 활동 금지 ▲한국인 철수과정의 안전 보장 ▲탈레반 수감자 석방 요구 철회 등 5개 조항에 합의했다. #

이후 8월 29일 인질 12명이 석방되었고, 30일에는 나머지 7명이 모두 석방되었다. 피랍된 지 42일 만이었다. 먼저 석방된 2명을 제외한 나머지 생존 인원 19명은 9월 2일에 한국에 도착했다. #

한국 정부대한민국 육군 특전사를 투입하여 구출해 오는 방법과 협상 중에서 고민을 많이 한 모양이고, 미군 역시 구출을 위해 특수부대를 준비시켰다. 하지만 현지의 미군과 신생 아프간군도 함부로 못 들어가는 첩첩산중의 땅굴 속으로 병력을 투입하면, 말 그대로 대규모 대 게릴라전이 되어, 인질은 인질대로 죽고, 특수부대는 특수부대대로 피해를 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성공한다고 해도 상당한 피해를 각오해야 했으므로, 결국 협상을 통해 인질들을 빼오는 길을 택했다. 그나마 이라크에서 날뛰면서 터무니 없는 요구를 하고는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 인질의 목을 자르는 이라크 무장단체 유일신과 성전과는 다르게, 당시의 탈레반은 최소한의 협상의 여지는 있었던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실제로 특전사 제707특수임무대 요원들이 아프가니스탄 현지에 급파되어서 인질 구출 작전 준비를 했었다는 것이 훗날 밝혀졌다. # 아카이브. 결국 협상 타결로 인질들이 석방되어서 실제작전에 투입은 되지 않았지만, 구출 계획 구상을 위한 억류 지역의 지형 정보 조사, 탈레반 무장 세력의 이동 경로 및 은거지, 동향 등의 첩보 수집과 무기 분석 등의 임무를 수행했던 것이 인질이 무사히 풀려나는 데 일정 부분 기여한 공로로 인정 받아, 그 특전사 대원들 중 일부가 훈장 및 표창을 받았다. # 정부의 인질 석방 노력을 적극 지원하도록 카불로 파견된 군사협조단 또한, 공로를 인정 받아, 카불 군사협조단장을 맡은 육군 준장 전인범 장군 등은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그리고 아예 특전사 1~2개 여단을 투입해서 현지에 있는 미군, 아프가니스탄 정부군, 국제안보지원군의 협력을 받으며, 가즈니 주의 탈레반을 소탕하려는 작전도 합참이 구상했었고, 청와대에서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까지 이런 방안이 보고되었다는 것이 밝혀지기도 했다.# 아카이브.

이 사건과 관련하여 수많은 각종 의혹 및 해명이 있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2007년 9월 당시 포스팅 및 기사 모음을 참고하면 된다.

5. 논란과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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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의 근원지였던 분당 샘물교회
이 교회가 있는 건물인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 한솔프라자는 두 동으로 지어졌다. 1998년 서울 영동교회에서 분리개척한 샘물교회는 버거킹 건물(성심빌딩) 지하에 입주했다가, 점점 증가하는 신도 수를 교회가 감당 할 수 없어서, 2006년 현재 한솔프라 B동을 매입하여 현재에 이른다.

대한민국 정부가 '중동 외교를 실패'해서 이런 결과가 나왔다는 의견도 있는데, 이 사건 피해자들은 자국 정부가 경고했건만, 무법천지에 기어이 제 발로 들어갔다가 극성 테러 단체에 납치됐으니, 정부로서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정부가 이들을 구하려고 군 병력을 몇 만이나 배치해서 선전포고할 수도 없는 일이고, 군대를 보내서 구출하는 것이 확실하면 모를까 그렇게 해서 살아 돌아온다는 보장도 없다. 그러다가 애꿎은 군인이 수십 명씩 죽는다면 본말전도가 따로 없다.

그렇다고 '너희들이 스스로 순교하겠다며 갔잖아. 그냥 거기서 죽어라' 하고 방치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잡혀간 사람들의 정신 나간 행동 때문에 분개한 많은 사람들이 '순교한다고 한 말 그대로 죽게 놔두라'고 주장하긴 했지만, 그런다고 진짜 그렇게 한다면, 국가는 '국민의 보호'라는 주요 임무 중 하나를 저버리는 셈이 된다. 국민이 국방의 의무, 납세의 의무 등을 다해서 국가를 지원하듯이, 국가는 기본적으로 멍청하고 개념 없는 행위를 한 사람이더라도 자국민을 보호할 임무가 있는 양방향의 관계다. 그리고 당시 야당과 언론들도 국가의 자국민 보호 필요성을 강조하는 바람에 노무현 정부는 결국 그들을 구하는 데 나서야 했다.

애초에 탈레반(넓은 범위의)이 그리 쉽게 소탕할 수 있는 거였다면, 소련군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물러났을 리 없고, 천조국 군대라고 불리는 미군이 장장 20년동안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치뤄야 할 일이 없었을 것이다. 훗날의 일이지만, 결국 2021년 미군이 철수하자마자, 겨우 몇 주만에 탈레반은 다시 총공세를 펴더니 수도를 함락, 정부를 전복시켰다. 그 정도로 끈질기고 강성한 무장단체다. 그리고 그 당시 한국 정부의 대처에서 실수가 있었는데, 아프가니스탄아랍어가 모어가 아니라 파슈토어, 다리어가 모어임에도 중동=아랍=이슬람이라는 고정관념 때문에 아랍어 구사자를 아프가니스탄에 파견하다가 의사소통에 실패한 적이 있었다. 정부 테러 대응전략 있기는 있나, 원칙·요령·지식없는 3無협상 혼선, 탈레반 말도 몰라 아랍어교수 파견(매일경제).

이 일이 있기 전에 이라크에서 일하다 한국군의 이라크 철수를 요구한 무장 세력에 의해 납치되어, 결국 참수 살해당한 김선일의 경우와 비교해 볼 만하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결국 '근처를 돌아다니고 있던 한국인'이라는 사실은 다르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여론도, 정부의 대응도 크게 달랐다. 김씨는 어디까지나 무역상사의 직원으로서, 합법적으로 일하러 갔다가 변을 당했다. 김선일도 내심 선교할 생각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위험하긴 하지만) 떳떳하게 직장 업무를 하러 갔다가 납치 당한 무고한 피해자다. 게다가 김선일 사건은 2004년, 이 샘물교회 사건은 2007년의 일이다. 즉, 김선일이 갈 때만 해도 중동은 '치안이 조금 위험한 곳' 정도였다. 이는 해외 파병 장병들도 비슷해서, 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어도 해외 체험과 각종 수당으로 돈을 벌 수 있다며 반기는 병사들도 있었다. 그런 김선일씨의 죽음을 계기로 국내에서도 경각심이 높아진 상태였다.
파일:샘물교회 심각.jpg
기자회견장에서 심각한 표정을 짓는 피랍자
파일:샘물교회 비웃음.jpg
그러나 버스에서 환하게 웃는 피랍자
파일:샘물교회 1등석.jpg
잘한것 하나 없는 이들에게 항공기 1등석이 제공되었다.
이글루스의 정치, 역사 관련 파워 블로거였던 Sonnet은 이 사건과 아프가니스탄 침공 당시 CIA의 요원 중 1명이 남긴 회고록을 비교하며 다음과 같은 분석을 내놓았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재미있는 물가를 하나 발견할 수 있다. 다년간의 전투 경험을 가진 무자헤딘 15,000명을 거느린 아프가니스탄 최대 계파 보스를 동원해 탈레반을 치게 만들고 그 정권을 붕괴시켰을 때, 작전 대가로 치른 금액이 현찰박치기 500만 달러라는 것이다.

2007년 여름 벌어졌던 한국 단기선교단 납치 사건 당시 인질의 몸값으로 치렀을 것으로 추정되는 비용이 100만에서 4,000만 달러까지 다양한데, 어느 것이 진실에 가까운 것으로 밝혀지든 간에, 이 500만 달러와 비교해서 감을 잡으면 좋을 거라고 본다.
원문, 아카이브
다시 말해서, 만약 이들을 빼내오려고 돈을 준 것이 사실이라면, 당시 이들의 몸값으로 탈레반에게 건넨 돈은 미군이 15,000명 규모인 아프가니스탄 최대 군벌 하나를 통째로 매수하는 데 든 돈에 거의 근접하거나 그 이상이 될 수도 있는 엄청난 액수라는 말이 된다. 그런데 액수만으로 단순 비교하기 어렵다. 미군과 연합한 군벌인 북부동맹은 남쪽을 장악한 다른 군벌인 탈레반과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미국은 탈레반을 견제하기 위해 북부동맹을 필요로했고, 북부동맹은 탈레반을 몰아내고 아프간의 정권을 장악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 애초에 500만 달러가 없다 하더라도 서로 협력해야 할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미군은 특수전 병력 파견 등을 통해 북부동맹을 지원하여 탈레반을 몰아냈기 때문에 단순시 북부동맹을 매수하기 위해 500만 달러를 지원한 것이 아니다. 자세한 사항은 북부동맹 문서와 아흐마드 샤 마수드 문서 참조.

실제로 2007년 9월 1일, 로이터 통신은 “몸값으로 2,000만 달러(당시 환율 기준 약 187억 원) 이상을 받았으며, 그 돈으로 무기를 구입하고 통신망을 재정비해 더 많은 자살 공격을 위한 차량을 사들일 예정”이라는 탈레반 고위 인사의 발언을 인용해 보도했으며, 알자지라 방송은 당시 한국 정부가 탈레반에 2,000만 파운드(약 378억 원)을 지불했다고 보도하기까지 했다. 정부는 당시 이 같은 사실을 부인했지만, 이후에도 외신에서는 "탈레반이 한국 정부로부터 몸값을 받은 뒤 무기를 사들였다"는 보도까지 내며 정부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

탈레반을 토벌하는 게 어렵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소련과 미국도 털려서 나온 곳이고, 토벌을 시도했다면 그 과정에서 인질의 목숨도 위험해진다. 당시 협상에서 외교안보 당국은 여러 실책을 범했다. 당국은 철군 계획을 너무 일찍 밝혀 협상에 활용할 지렛대를 일찌감치 소진했다. 또 직접 협상석방금 지급 의혹이라는 선례를 남김으로써, 향후 한국인이 테러 집단에 인질로 잡힐 수 있는 위험도를 높인 측면이 있다.

윤태영 경남대 경호보안학과 교수의 논문 '한국의 국외인질테러 대응 체계와 활동 평가: 아프가니스탄 피랍사건을 중심으로'를 인용하자면, 사건 직후 탈레반의 철군 요구가 있자마자 기존의 철군 계획이지만, 7월 21일, 이를 조급하게 발표함으로써, 인질 석방에 활용할 수 있는 협상 카드를 소진했다. 또 테러 집단과의 직접 협상 불가라는 국제 사회의 원칙을 파기하고, 직접 대면 협상에 나서 인질을 석방시켰다. 이는 향후 국외 테러 발생 시 한국 정부의 운신의 폭이 제한될 수밖에 없는 결과를 초래했고, 한국인에 대한 인질 테러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미국과의 불협화음도 큰 문제였다.

게다가 김만복 국정원장의 지나치게 잦은 언론 등장, '썬글라스 맨'으로 통칭된 국가정보원 협상 전담자의 귀중한 인력 정보 노출 등 국가정보원 자체도 대단한 손실과 비판을 면치 못했다. 김만복 국정원장은 그 외에 여러 것으로도 까였다.

또한, 기본적으로 해외 선교 활동에 긍정적인 열성적 개신교 신자들의 경우도 이 사건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인 경우가 많다. 해외 선교 활동을 지지하는 사람들이라도 아프가니스탄처럼 너무나도 위험한 지역에 어리고 미숙한 학생들 중심으로 이루어져 신학적 지식과 전문 지식을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선교단을 1~2주일 정도 단기로 보내는 것은, 선교 활동이 아니라 그냥 쇼미친 짓으로 여긴다. 이 사건 피랍자들도 대부분 본업이 종교 관련자나 선교사가 아닌 비전문가 젊은이들이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시니까 모든 위험들이 우리를 피해갈거야"라고 믿으며, 선교 활동을 '놀이동산 공포체험' 정도로 여겼나본데, 그 믿음이 옳다면, 로마제국 아래에서 순교한 수많은 초대교회의 신도들은 신에게 버림을 받아서 죽은 것이 된다.

아프가니스탄은 언제라고 할 것도 없이 극단적으로 위험한 곳이다. 할레드 호세이니의 <연을 쫓는 아이>와 <천 개의 찬란한 태양>만 봐도, 탈레반들이 어떻게 아프가니스탄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온갖 반인륜적인 짓거리를 저질렀는지 견적이 나온다. 이 때문에 개신교 신자들 가운데에서도 선교단 파송을 아예 포기하거나, 파견할 것이라면, 장기간에 걸쳐 철저한 교육과 준비를 거친, 전문적인 선교사 중심으로 정예 팀을 꾸려서 보내야 한다는 사람이 많다.

6.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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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대한민국 여권법 개정

대한민국은 2004년 김선일 피랍 사건 이후 여행경보제도를 도입하였다.

다만 본 사건 이전까지는 여행경보제도에 여행금지로 묶여도 법적 구속력은 없었는데, 이는 "안전하지 않은 지역으로의 국민의 여행의 자유라는 법익"이 "국민의 신체와 안전의 보호 및 국가적 차원의 공익이라는 법익" 보다 컸기 때문이다. 쉽게말해서 국가가 위험국가를 알려는 줄테니 가서 어떤일이 일어나도 국가가 책임지기 어려우니 개인의 선택에 맡기겠다에 가까웠다.

하지만 샘물교회 피랍사건에서 일개 개인이 아닌 단체가 피랍되는 문제가 생기고, 이 과정에서 국가적 체면 손실과 많은 세금 낭비로 인하여, 결국 여권법이 또 한번 제정되어 여행금지 국가에 입국시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 원 이하의 벌금을 묻도록 여권법이 개정되었다. 이제는 살아서 돌아와도 최소 벌금형에 벌금을 내지 못하거나 여행금지 국가에서 한 행동에 따라 징역살이까지 가능하게 된 것이다.[4]

이로인해 김선일씨 피랍사건은 한국 여행 경보제도의 기틀이 마련되었다면, 샘물교회 사건은 여행금지국가의 법적구속력이 생기게 된 명분을 제공한 상징적인 사건이다.

6.2. 개신교의 평판 저하 가속화

개신교단과 해당 교회측은 사안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말로 일관하였으며, 이 사건 이후로도 국민들을 향한 사과나 향후 대책 없이, 지속적으로 다른 대형 사건들을 일으켜 반감을 더욱 심하게 키우고만 있다.

단순히 선교로 벌어진 해프닝이 아닌, 국가에서 법으로 금지하는 일을 저질러 국가에 수백억 원 대의 막대한 피해를 일으킨 (금전적인 의미에서는) 테러 사건에 가까운 엄청난 일이었다. 2008년 벌어진 서울 숭례문 방화 사건의 피해액이 200억대로 추산된다. 샘물교회는 국가 최중요 문화재를 파괴하는 것 이상의 피해를 대한민국에 입힌 것이다. 샘물교회 사건은 개신교 선교에는 악영향만 미쳤으며, 건전한 종교 활동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사실 대한민국에서 개신교의 평판은 2000년 서울 지하철 4호선 이수역 역명과 관련한 총신대학교의 억지 주장과 이에 항복한 서울시 지명위원회로 인해 급격하게 악화되고 있었다. 자세한 사연은 이수역/역명 논란 문서 참조. 아직 인터넷이 활성화되기 전인 1990년대에 발생했던 다미선교회 휴거 소동과 만민중앙교회 MBC 습격 사건과는 달리, 이수역 역명과 관련한 총신대의 억지 주장은 개신교 정통 교단인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산하의 신학대학교에서 일으킨 논란이었던 데다, 인터넷이 각 가정으로까지 널리 확산된 시기에 발생한 파문이었기 때문에 사회적 파장이 매우 컸다.

2007년 당시 개신교는 대내외적인 불신과 이미지 추락 가운데, 한국의 개신교 초기의 부흥운동을 본받은 의욕적인 부흥운동을 펼쳤다. 1907년 평양 대부흥을 벌인 지 100주년이라며 기념했다. 하지만 이 사태가 찬물을 제대로 끼얹어 버렸다. 이 사건을 계기로 개신교 내부에서도 '일방주의적인 선교를 반성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지만, 늘 그렇듯 개혁적 목소리는 비주류인 탓에 묵살 당했다.

사실 이들을 보낸 특정 교회만의 문제가 아닌 것이, 한국 선교사들 상당수가 국외 극빈 지역으로 가서는 현지 사정이나 반감을 눈곱만큼도 배려 않고, 막무가내로 개신교 선교를 시도하여 도리어 개신교에 반감을 키운 경우가 많았다. 2007년 피랍 사건 당시에도 샘물교회 봉사단이 들어오기 몇 년 전부터 이미 아프가니스탄은 아프가니스탄 평화 축제 사건을 비롯한 온갖 실책 때문에 한국이라면 치를 떠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더욱이 이슬람교 중에서 극단적인 분파는 비신자를 멸시하고, 배교자라면 죽여도 된다고 본다. 이 때문에 배교자는 사람으로 안 여기고, 망명 뒤에도 온갖 테러를 가할 정도다. 국가적으로도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물론 이렇게 개종자를 잔혹하게 대하는 행태는 (개신교를 비판하는 것과는 별도로) 이슬람 근본주의 문서에 나와있듯이 무슬림들을 경멸의 대상으로 분류하게 하는 데 아주 큰 몫을 한다. 상황이 이런데, 이슬람을 대상으로 한 선교를 쉽게 보면 아주 큰일나는 것이다.

6.2.1. 사이버상의 반개신교 정서 가속화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이 이 사건이 일어나기 바로 얼마 전에 출판되었는데, 이 사건으로 반기독교무신론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면서 덩달아 <만들어진 신>도 꽤 잘 팔리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1980년대 초에 시작해서 2000년대에 단군상 절단인증 사건에 의한 반발 여론 이후, PC통신을 시작으로 서서히 관심을 모으고 있던 반기독교 운동은 이 사건을 계기로 2007년 전후에 급격히 팽창하였다. 2000년대 후반에서 2010년대 초반까지 인터넷에서 반기독교, 정확히는 반개신교 세력들이 여론을 주름 잡게 된 계기가 이 사건이라 봐도 무방하다. 당시 한국에서 천주교는 그나마 대외적으로 긍정적인 이미지를 많이 쌓아둬서 기독교 전체에 포괄적으로 해당되는 문제점을 지적하는 부류에게나 비판 받았다. 천주교가 전통적 가치관을 대변하는 프랑스남미 같은 지역에서 세속적 진보주의자들에게 비판 받는 것과 정반대의 상황인 셈이었다. 개신교가 한국 사회에서 그 전에도 여러 가지 사건사고들로 이미지가 결코 좋진 않았지만, 결정타를 날린 것이 이 사건이라는 점만은 부정하기 어렵다.

6.3. 태상호 기자의 증언

호비스트 출판사의 플래툰의 태상호 기자가 아프가니스탄에 종군 취재 목적으로 갔을 때였다. 이 때는 아프가니스탄 피랍이 일어나기 몇 년 전이다. 태상호 기자가 50km 거리를 이동하는데, 미군이 장갑 험비 5대로 에스코트해줘야 했다. 본인도 "만약 죽더라도 아무런 보상과 보호를 받을 수 없다" 는 각서를 ISAF의 감시하에 쓰고, 자비로 구매한 방탄복과 방탄모를 착용한 후 인적이 드문 새벽을 이용해 이동했다. 왜냐하면, 미군이 방탄복이나 방탄모를 빌려줬는데, 해당 장비가 적절한 방호력을 제공해 주지 못할 경우 문제가 커지기 때문이다. 종군기자들 역시 방탄 장비는 스스로 갖춘다.

태상호 기자가 카불 시내에 도착했는데, 아프가니스탄 호텔에서 한국인이라고 말하자, 주변 분위기가 싸해지면서 호텔에서 빨리 나가라며 내쫓았다고 했다. 결국 독일 기자단 숙소에 얹혀 살아야 했는데, 독일인 기자가 그 이유를 설명하길, "한국에서 온 개신교 단체들의 선교를 목적으로 한 행사로 인해, 한국에 대한 현지인들의 반감이 극히 심해졌다."고 했다고 한다. 현지 공무원에게는 '운동축제'로 신고했다고 한다. 더군다나 그 설명을 하며 보여준 아프가니스탄 국내 신문에 그 이야기가 1면으로 나와있었다.

당시 아프가니스탄에는 태상호 기자를 포함한 한국 국적의 일반인이나 자원봉사자, 그리고 왕진 가방이나 이를 실은 차량으로 봉사 겸 선교 활동을 하던 선교사들이 있었다. 의료 선교사들의 경우, 의료 기술이 열약하거나 오지라서 병원조차도 없는 곳에서 한 줄기 빛과도 같은 사람들이다. 물론 처음엔 별 관심이 없거나 경계하기도 하지만, 진료를 잘 본다면 선교라도 기꺼이 들어줄 의향이라도 생긴다. 일례로 자신도 병자이면서 필리핀에서 자차를 이끌고 달동네나 오지까지 가서 무료 봉사를 하다, 2018년 8월 위암으로 별세한 박누가 선교사[5](외과의사) 대표적. # 이런 한국인들은 아프가니스탄 현지인들에게 스스로를 그나마 상대적으로 평판이 나았던 중국인이라고 해야 했다.

그런데 사실 중국인들도 현지에서 매춘이나 금지품 밀수에 돼지고기 판매, 재건사업 관련 일자리 독점으로 큰 미움을 받고 있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아 그렇지, 종교 선교가 아니라 철저하게 돈벌이가 목적임에도 중화사상이 원인이 되어, 중국인들도 미움을 많이 받고, 아프가니스탄에서 꽤 많이 죽었다. 2004년 유엔 평화유지군 소속으로 간 채수문 중령의 글을 보면, 중국인 노동자 숙소에 폭탄이 터져 25명이 그 자리에서 살해 당했던 일이 거론된 바가 있다.

이런 위험한 곳에 선교를 가겠다고 하니, 여행 계획을 알게 된 한국 정부에서는 당연히 못하게 말렸다. 공식 공문을 보내 경고까지 했는데, 이들은 위에 나와 있듯이, 베이징두바이를 거쳐, 기어이 아프가니스탄으로 들어갔다. 심지어 위험 지역임을 알리는 간판 앞에서 웃으면서 기념 사진까지 찍었다. 그래놓고선 납치되자, 뒤늦게 "엄마 보고 싶어요, 밥이 먹고 싶어요." 이러면서 후회하면서 애걸복걸한 것은 안전불감증이 빚어낸 웃기는 상황이다. 결국 이들을 구하려고 고생한 건 한국 정부였고, 인질들 몸값은 국민 세금이었다.

여담으로, 이 사태를 해결하는 데 활약한 강성주 아프가니스탄 특명전권대사는 얼마 뒤, 도미니카 공화국 특명 전권대사로 갔는데, 거기서 옆나라인 (관할지역) 아이티에 벌어진 2010년 아이티 지진을 맞게 된다. 한 술 더 떠서 아이티 지진 구조대 보도 논란까지 겪어야 했으니, 그야말로 멘붕이다.

6.4. 저널리즘의 저하

이후 여권법이 개정되어 여행금지제도가 도입되었지만, 이로 인해 저널리즘, 특히 종군기자가 크게 퇴색되어 언론탄압의 우려를 보이고 있다. 특히 예외적여권사용허가서를 위해서 작성하는 서류는 제한사항이 너무 많은데다가 발급도 늦어서 사실상 종군기자를 하지 말라는 것과 다름없고, 특히 소속 없이 일하는 기자들은 취재가 더더욱 불가능하다. 때문에 한국의 언론은 국제적 이슈를 외신에서 받아쓰는 것에 의존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6.5. 국외 반응

6.5.1. 아리프 아쉬츠, <이스탄불에서 온 장미도둑>

튀르키예인 사진 작가인 아리프 아쉬츠가 한국을 1년 동안 여행하고 지내면서 쓴 책인 <이스탄불에서 온 장미도둑>을 보면, 이 사건이 튀르키예에서도 화제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튀르키예에서의 반응도 역시나 '쟤들 왜 저러냐?' 비웃기 일쑤였다고 한다. 튀르키예는 철저한 정교분리 정책을 실시하는 나라다. 종교적 광신 자체를 국가에 해악이 된다고 치를 떨던 아타튀르크의 영향이 크다. 아타튀르크는 정교분리 원칙을 확고히 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지은이 아리프 아쉬츠도 한국에서 1년 동안 살면서 삼겹살, 제육볶음, 탕수육, 족발 등등 돼지고기는 물론, 소주복분자와 온갖 한국 술을 질리도록 즐겼다고 서술하며, 한국 식당에서 먹는 소주와 삼겹살 사진도 찍어 책에 올렸다.

때문에 튀르키예에서는 무슬림도 길거리에서 저 모양으로 이슬람교를 선교한답시고 한국인 개신교 선교사들처럼 굴면, 졸지에 이슬람 과격파로 몰려 정치범수용소에 갇힌다고 글로 쓰면서 비아냥거렸다. 튀르키예는 이슬람이 절대다수인 나라이고, 최근 들어서 에르도안 같은 종교 꼴통이 집권하지만, 여전히 인식은 세속적이다. 그 예로 튀르키예 몰래카메라에는 아랍인처럼 입고, "알라 후 아크바르"라고 하는 외치는 건데 튀르키예인들 반응은 "폭탄 테러다!"라고 난리법석을 부리며 대피할 정도로 저런 이슬람 극단주의 사상에 치를 떨고 같이 생각하지 말라고 여긴다. 아쉬츠 역시 "나도 무슬림이지만, 평생 외국 나가서 비무슬림에게 이슬람교 강요와 선교는 한 적이 없다. 한국에서 이런 종교 권유하는 말 들으면 나조차 어이없고 무섭다."고 소감을 쓸 정도였다.

아랍, 그 가운데에서도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천하의 근본주의 이슬람 국가조차도 길거리에서 대놓고 이슬람만 천국, 다른 종교 죄다 지옥 이따위 짓 하면 사이드 쿠틉 같은 류의 극단주의 사상 지지자로 생각되어 순식간에 잡혀들어간다. 그것도 그냥 정치범수용소가 아니라 테러리스트와 진배 없게 여겨진다는 것이다. '믿으려면 조용히 믿자.'는 어디서나 진리다. 사우디아라비아나 쿠웨이트조차도 가끔 극단주의자들에 의한 테러가 벌어진다. 현재도 이미 근본주의 나라임에도 이들에게는 이조차 부족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나라들도 이런 사상엔 가차없고 아주 치를 떤다.

더불어 튀르키예 곳곳에서 성지순례를 온 한국인들이 허구한 날 튀르키예인들에게 "자기들 교회 믿어라" 그런다는 소리도 첨가했다. 그리고 이 책자에서 이걸 다룬 부분에 마지막으로 한 말이 '이 샘물교회가 듣자 하니 네팔 쪽으로 갔다는데, 거기라고 그런 광신적 선교를 좋아하겠느냐?'... 국제망신 인증이다.

6.5.2. 국외 인터넷에서의 반응

피랍 소식은 국외 인터넷에서도 화제가 되었는데, 대부분은 조롱조였다. 미국인들은 "우리네 일부 목사들보다도 더한 자들이 있어서 한 시름 놓았다."는 의견이 꽤 있었고, 나머지 나라들에서도 너무 미개한 종교관이라며 비웃음 일색이었다.

어떤 교회들은 예수의 고난에 빗대어 전도, 선교 과정에서 듣는 비난을 자랑스러워하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이 사건은 우리가 흔히 겪는 민폐와는 스케일의 차원이 다르다.

6.5.3. 종교계 반응

한편 이번 사건과 관련하여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피랍자들의 신변 안전 및 무사 귀환을 바란다"는 내용의 메시지를 발표했고, 세계 각국의 이슬람 지도자들 역시 탈레반 측에 피랍자들의 안전 보장 및 조속한 석방을 촉구하고 나서기도 했다.

6.6. 이 사건의 보도에 대한 논란

2009년 3월과 6월, 예멘에서 역시 무개념 개신교 선교 활동에 대한 현지의 격앙된 감정이 원인이 되어, 한국인을 노린 자살 폭탄 테러 사건이 발생했다. 예멘 문서에도 나오듯이, 이건 무턱대고 "우리 종교 믿으라"던 선교사들이 자초했다. 또한 간호사로 일하던 독일인한국인이 납치 당해 피살된 사건이 벌어졌다. 해당 사망자인 엄영선이 생전에 남긴 블로그 글이나 몇몇 교회 반응을 보면, 그녀는 준선교사라며 간호봉사도 하며 선교 목적도 있었기에, 순수 간호사로서 간 것은 아니다. 같이 사살된 독일인도 마찬가지였다. 예멘에서도 테러범이 아니라 현지인들에게 종교 강요한 탓이라며, 흐지부지 넘어가버려 범인들은 일절 처벌 당하지 않았다. 물론 이 샘물교회 사건 범인들도 마찬가지지만, 적어도 탈레반이 저질렀던 거랑 달리, 예멘 사건은 이슬람 극단 세력 어디도 끼어들지 않았다는 결론이 났다. 그런데 이런 사건들은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와 다르게 여론의 주목을 받지 못해 묻혔다.

때문에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 아프가니스탄 일을 더 깊게 파고들어 확대했다는 비난섞인 분석도 있었다. 2007년 당시 조선일보를 비롯한 많은 신문사에서 이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를 '노무현 정부 외교 실패'라는 식으로 결론 지어 정부를 비판했는데, 정작 정권 교체가 되고,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뒤 2009년 예멘 테러가 일어나 한국 여성 엄영선이 죽자, 이에 대하여는 몇 번 보도하고 철저하게 파묻었으며, 이 예멘 사태가 터지자, 2년간 줄기차게 이 사건을 소환하던 월간조선 등이 이후 아프가니스탄 사건 이야기에 대해서도 입을 다물었다는 것. 오죽하면, 엄영선의 유족조차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 때는 언론이 그리도 많이 보도하고 관심을 가져다주더니만, 한국의 개신교 단체나 교회들도 엄영선에 대해선 언급을 피하더라." 하면서 당시 울분을 토했을 정도였다.

물론, 일부 보수 측에선 피랍과 테러는 성격이 다른데, 일부 친노 진영에서 정치적인 의도로 더 이런 논란을 만들었다는 주장도 한다. 예를 들어, 이라크에서 노동자 1명이 테러 공격으로 사망했다면 기사에 단신으로 보도되고 묻혔을 만한 사안이나, 김선일을 납치하여 인질극을 벌이며 협상을 제시하자, 모든 지상파 방송에서 대서특필한 바 있다.김선일 1명으로도 그 정도였을 정도인데, 하물며 수십 명이 단체로 납치당해서 인질극 협상을 벌이는 상황이니 전혀 비교할 수 없는 사안이며, 어느 정도였냐 하면 당시 이렇게 많은 인질이 한꺼번에 잡힌 건 워낙 드물어서 다른 나라에서도 관심을 가졌다는 주장이다. 인질극 협상, 그것도 유례없는 수십 명 인질이 붙잡혀있다 보니 정부의 외교 사안도 시험대에 올랐던 것이라는 것이다.

다만, 애초에 이 사건의 본질은 당시 정부가 잘못했다기 보단 정부의 경고조차 무시하고 아프간에 무리한 선교 활동을 벌이러 간 샘물교회 측과 이들을 납치한 테러 단체가 가장 큰 잘못의 주체였기에, 사실 지금이나 그때나 정부 잘못이 크다는 주장은 네티즌들에게 큰 공감은 얻지 못했다.

7. 잘못 알려진 사실

파일:샘물교회 쇼핑.jpg

애초에 이들을 한국행 비행편 탑승구까지 인도했다는 정부 관계자가 "(피랍자들은) 한국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탑승 시간에 빠듯하게 공항에 갔다"며 "여유롭게 공항 내 면세점에서 쇼핑을 할 시간은 물론 돈도 없었다"고 말하면서 사실이 아님이 확인되었다. #

8. 기타

8.1. 다시 아프가니스탄에 간다?

2010년 8월, 샘물교회에서 또 정부 몰래 선교사를 파견할 예정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2011년 2월에도 또 아프가니스탄에 간다고 한다. 게다가 선교를 위하여 아프가니스탄을 여행금지국가에서 해제해달라는 요청까지 해버렸다. 당연하지만, 이 요청은 기각되었다.

사실 교회 입장에서는 참 구미가 당기는 아이템일 것이다. 교회도 일종의 장사라고 보면 목숨의 위험을 무릅쓰고 이교도들의 본진에 가서 포교를 하는 것은 가장 돈이 되는 고객(=광신도)들에게 가장 어필할 수 있는 황금 콘텐츠이기 때문에, 보내는 윗대가리들 입장에서는 무사히 다녀오면 그걸로도 '위험한 곳에 선교하러 다녀왔다.'는 일종의 업적이 되고, 이 피랍 사태처럼 일이 터지면, 죽은 사람은 순교자라고 치켜 세워주고, 무사히 돌아온 사람은 "하나님의 가호(?)를 받아서 그런 것"이라고 하면 그만, 즉 잃을 게 없는 장사다. 실제로 샘물교회는 이 피랍 사태 이후로 언론과 국민의 폭풍 같은 비난에도 불구하고 세를 크게 불렸다.

사실 아프가니스탄 피랍 당시에도 "자기들 멋대로 간 걸 왜 우리가 돈을 주고 빼와야 하나? 협상 불가!"라는 의견과 "간 건 충분히 괘씸하지만 그래도 우리 국민인데 어떻게 내버려 두나. 미워도 자식 새끼인데, 살려놓고 두들겨 패든지 해야 할 것 아닌가" 측으로 여론이 갈렸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이들을 괘씸하게 생각한 것은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또 이런 일이 났다가는 구출은 해준다고 해도 이후 대가는 철저하게 치르게 할 것이 분명하다. 덕분에 2014년 2월, 시나이 반도 버스 폭탄테러 사건이 터지자, 여론의 반응은 '또냐?'라며 아주 싸늘했다.

한편, 피해자들의 잘못과 별도로 가해자 측에 대한 감정도 엄청나게 나빠졌다. 아무리 피해자측에서 안전불감증으로 위험을 자초했다 해도, 그들은 엄연히 사람을 납치하고 감금하고 죽이기까지 한 가해자였기 때문. 안 그래도 이미 9.11 테러김선일 피살 사건으로 이슬람권에 대한 감정이 이전보다 훨씬 나빠진 상태였는데,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를 계기로 피랍자들도 비난을 받았지만 동시에 이슬람교에 대한 평판이 매우 나빠졌다. '과격한 종교', '테러를 옹호하고 인질을 잡아 살해하는 게 당연한 종교'라는 극단적인 혐오 발언까지 당연하게 여기며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정도로 혐오가 뿌리 박으며, 아예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결국 개신교뿐만 아니라 이슬람교의 평판도 이 사건으로 땅에 떨어져 버렸으며, 이런 상황은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8.2.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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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형규 목사 순교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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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에는 여행금지국가 제도가 없었다.[2] 후일 인요한과 결혼하게 된다.[3] 해당 기자는 당연히 호위 인원을 동반하여 촬영였다.[4] 현재 대한민국의 여행금지 국가는 전쟁국가, 중동의 테러단체가 활동하는 국가, 사실상 국가 기능이 정지된 국가인데, 상술한 두 이유인 국가에 취재 이외의 내용으로 입국한다면 전쟁에 참여, 또는 테러단체에 참여 등 한국의 대외 외교에 큰 문제를 유발할 가능성이 있는 행위이며,그 행위 따라 살인,전쟁범죄 가담 등 한국의 헌법 위반에 저촉 될것이다.[5] 본명 : 박병출[6] 정확히는 자기가 가서 때려잡고 온다는 식의 발언에 가깝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