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 쿠틉[1] Sayyid Qutb | ||
본명 | <colbgcolor=#fff,#1f2023>사이드 쿠틉 이브라힘 후사인 알샤들리 سيد قطب إبراهيم حسين الشاذلي | |
국적 | [[이집트 왕국| ]][[틀:국기| ]][[틀:국기| ]] (~1953) (1953~ ) | |
출생 | 1906년 10월 9일 | |
<colbgcolor=#fff,#1f2023>이집트 케디브국, 아슈트, 무사 | ||
사망 | 1966년 8월 29일 (향년 59세) | |
이집트 카이로 | ||
직업 | 시인, 평론가, 교사, 공무원 | |
학력 | 카이로 대학교 노던 콜로라도 대학교 | |
종교 | 수니 이슬람 | |
정당 | 와프트 당 (~1950) 무슬림 형제단 (1950~) | |
가족 | 5남매 중 첫째, 배우자 없음 |
[clearfix]
1. 개요
이집트 남부 출신 무슬림이자 사상가, 신학자[2], 평론가, 저술가.[3] 이슬람 극단주의자이자 현대 이슬람 테러 단체들인 알카에다,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 등에게 사상적 토대를 제공한 사람이며 이슬람권의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리즘과 지하드 알 니카의 정신적 아버지다. 사실상 현대 이슬람 근본주의의 사상적 뿌리라고 할 수 있다.2. 생애
2.1. 초기 이력
보수적인 성향이 강한 이집트 남부 태생이었다. 청년기에는 매우 독실한 무슬림이었지만 이와는 별개로 친서방적인 성향도 상당했다. 위의 젊은 시절의 프로필 사진에서 말쑥한 정장을 입은 것을 봐도 알 수 있다.유복한 지주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유년기에는 전통적인 이슬람 교육을 받았는데 10세에 쿠란을 모두 암송할 정도로 머리가 영특했다고 한다. 청소년기에 카이로에 가서 서방식 신식 교육을 받기 시작했는데 당시 이집트는 영국의 보호령이었으며 영국의 영향 하에서 설립된 근대 교육기관은 영어로 강의했고 그도 당연히 영어에 능했다. 어린 시절 그가 가장 좋아하던 작가 중 하나가 바로 이집트의 세속주의/민족주의 성향 작가 타하 후세인이었다. 당시 그는 수많은 영문학/불문학 작품도 탐독하고 미국 영화를 즐겨보며 클래식 음악의 애호가였을 정도로 친서방 성향을 띄었다.
당시 매우 드문 대졸자로 카이로 대학교[4]를 졸업하고 학사 자격을 취득했다. 20대에 시집을 낼 정도로 문필력을 가지고 있었고 교사로 일했으며 평론가로도 이름을 알리고 있었다. 본인이 직접 소설을 쓰기도 했으나 이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는데 평론가로는 꽤 이름을 떨쳐서 훗날인 1988년 노벨문학상을 타는 나기브 마푸즈의 재능을 발견하고 높이 평가해서 유명하게 만든 것도 당시의 그였다.[5]
1939년부터는 교육부 소속의 공무원으로 일했으며 당시에는 세속주의 이슬람을 추구하는 와프트당(Wafd Party)에 가입했다.
2.2. 미국 유학
42세가 되던 해인 1948년에 공무원 신분으로 장학금을 받아 미국으로 교육학 유학을 떠났다. 그는 당시 이집트를 지배하던 파루크 왕가[6]에 대한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일설에 의하면 파루크 왕가가 그를 회유하기 위해서 외유를 보내 준 것이라고 한다. 아마 선진국인 미국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면 왕가에 대한 반감도 좀 누그러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였을 것이지만 이는 오히려 그의 사상을 극단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3년간 미국에 체류하면서 콜로라도와 워싱턴 D.C.에서 공부했는데 이전에는 영국계 고등교육기관에서 공부하면서 서방의 문화에 그다지 반감이 없던 그가 미국에서 성향이 바뀌어 강력한 반서방, 근본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게 되었다.[7]본인은 미국 유학을 갔다 온 지 얼마 안 되어 펴낸 저서 《내가 본 미국 생활》에서 미국에서 듣고 본 황금만능주의와 쾌락주의를 열거하며 미국 사회를 풍요로울지언정 인간 문명의 가장 타락한 형태로 비난했다.[8] 예를 들어 그가 워싱턴 D.C에서 있을 때 엘리베이터 사고를 목격하게 되었는데 구경꾼들이 희생자를 불쌍히 여기기는 커녕 조롱을 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하며 한 복싱 경기에서 피투성이가 된 채로 싸우는 선수들을 보고 미국인들이 몸서리를 치기는 커녕 환호성을 지르는 것을 보고도 혐오감을 감추지 않았는데 그는 이것을 미국인들이 인간으로서 갖춰야 할 기본적인 도덕성이나 공감능력이 결여되었다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이런 예를 계속 들면서 미국은 물질적으로는 풍요롭지만 인간성에는 전혀 도움이 안되는 나라라고 비난했다.
미국, 그 신세계는 거대하고 뻗어 있으며, 사람들의 마음에 차지하고 있는 크기는 이것의 실제보다 크다. 세계는 환상을 가지고 이 땅에 대한 꿈과 상상력을 발휘한다. 세계 곳곳에서 각 인종, 각각의 종파들이 이 땅에 선망을 가지고 있다. 미국은 대서양으로부터 태평양까지 걸쳐 있으며, 엄청난 자원을 가지고 있고, 수많은 제품을 생산하며, 어느곳에서나 교육기관, 연구소, 박물관이 있다. 미국인들의 재능은 경탄과 존경을 자아내게 한다. 미국의 부와 풍요로움은 약속된 땅이라는 믿음을 자아낸다. 그 경치, 사람들의 얼굴과 몸매에서 나타나는 미국의 아름다움은 거부할 수 없다. 미국은 제한이나 도덕적 제약이 없는 쾌락이나 시공간에서 육체적 형태를 갖는 꿈을 만들어 낸다. 미국은 이렇게 위대하다. 그런데 인간성의 견지에서 미국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미국은 인류의 도덕적인 의미에 무엇을 더 해줄 수 있는가?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 나라는 인류에 무슨 기여를 할 수 있겠는가? 유감스럽게도 내가 보기에는 미국인의 물적 위대함과 인간성의 질은 균형을 이루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서 이후로도 미국은 인간을 물건으로부터, 또는 인간을 동물로부터 구별되게 하는 도덕적 의미에 아무 기여를 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본 미국 생활》
일부 학자들은 이런 사상적 전향의 원인을 그가 미국에서 당한 개인적 수모 탓으로 돌리기도 한다. 그는 이집트의 지주계급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상류계급의 자존심을 가지고 있었고 당시 이집트에서 드물게 서양 근대교육을 받은 대학 졸업자이며 문학가적인 감수성도 풍부한 데다 이집트 왕국의 고위공무원이자 국비유학생으로 미국에 왔는데 당시 인종차별이 만연했던 미국에 건너가서 아프리카에서 온 유색인[9] 취급을 받으며 푸대접을 받은 것은 일생일대의 큰 충격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0]
마틴 루터 킹의 흑인 민권 운동이 벌어지기 전인 195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은 백인과 흑인의 분리 정책인 시그리게이션(segregation) 정책을 폈는데 이는 사실상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과 하등 다를 바 없었다. 당시 모든 식당, 학교, 미용실, 화장실, 교통기관 등등은 백인용과 유색인용이 분리될 정도로 차별이 심각했다. 미국 남부의 흑인들은 명목상 투표권이 인정되었지만 현지 정치조직의 노골적인 방해와 테러로 실질적으로 투표에 참여할 수 없거나 참여하기 힘들어 투표권조차 침해받는 상황이었고 북부의 흑인들은 그나마 투표에 정상적으로 참여하고 기본적인 권리는 누릴 수는 있었으나 남부 흑인보다는 나을 뿐이지 상당수는 차별과 가난에 찌들어야 했다.
이런 와중에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외모가 흑인과 비슷하다고 여겨지는 바람에 백인들로부터 흑인으로 간주되어 극장에 들어가지 못하는 등의 차별을 자주 받고 미국에 큰 분노와 증오를 품게 되었다.[11][12] 나름 이집트에서 드물게 대학까지 졸업한 엘리트이자 고위공무원이었던 그는 미국에 건너가서 단지 피부색 때문에 미국인들에게 하등인간 취급을 받았으니 당연히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13][14]
일부 학자들은 미국인들의 성적 방탕함에 대한 경멸감도 그의 전향 이유로 들기도 한다. 보수적인 이집트 남부에서 자란 그에게 섹스를 그저 하룻밤의 놀이 정도로 여기는 자유분방한 미국인들은 수치심이나 도덕심을 모르는 짐승같은 저급한 족속으로 비추어졌다. 그는 일생을 통틀어 결혼한 적이 없었으며 이렇게 무지에 가까운 성적 보수주의를 가진 그에게 원나잇 스탠드와 섹스파트너와의 프리 섹스를 금기시하지 않는 미국인들의 성적 자유주의 성애관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남자와 여자가 몸이 느끼는 욕구에 따라 만났다가 헤어진다. …… 오직 몸의 유혹으로 여자는 남자를 만나고, 남자는 힘과 근육으로 여자를 굴복시킨다. …… 미국 여자들은 자신의 몸이 매혹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얼굴, 촉촉한 눈, 앵두 같은 입술이 매력적이라는 것을 안다. 봉긋한 가슴, 탱탱한 엉덩이, 매끈한 허벅지와 다리가 매력적이라는 것도 잘 안다. 미국 여자들은 자신의 매력을 감추려하지 않는다. 원초적 감각을 자극하는 색깔의, 육감적 몸매를 드러낼 수 있는 옷을 입는 것이 매혹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은 참기 어려운 유혹이다. 게다가, 그들은 매 순간 뇌쇄적 미소를 지으며, 노골적 눈길을 보내고 대담하게 행동한다. 여자들이 다가오면 당신은 순결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강렬한 성적 유혹을 느낄 것이다. 그녀는 그 순간 매우 관능적인 살덩어리로 변한다.
게다가 그가 방문한 미국 개신교 교회에서도 남녀 신도들끼리 서로 끌어안고 음악을 틀어놓은 상태로 춤을 추는 광경이 벌어졌는데 보수적인 그가 보기에 경건한 곳에서 쾌락을 탐닉하는 불경한 것으로 비춰졌다. 사실 그가 말한 교회에서의 '불경한' 댄스라고 해 봐야 무슨 클럽 부비부비 댄스 같은 것이었을 리는 없고 왈츠 같은 서양의 전통 사교 댄스 스타일이었을 것이다. 그것도 그에게는 문란해 보였겠지만 말이다. 아마 자유주의적인 개신교 교회를 방문한 것 같은데 사실 남녀 신도들끼리의 접촉이나 성문제에 굉장히 엄격한 보수적인 교회들은 그가 목격했던 댄스 같은 일들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이집트의 친구한테 보내는 편지에서 "미국인 남녀들은 오로지 서로의 육감적이고 강한 육체와 육체를 유혹하고 탐하는 동물적인 색욕의 노예들로서 그들의 도덕과 윤리 수준은 짐승보다 못하다.", "모든 여성은 요부이고 엄격히 분리해 놓아야 할 대상.", "금발 여인의 유혹이 두려워 지하드를 실행하지 않는다면 진정 예언자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라고 혐오와 경멸이 담긴 어조로 말했다.
그는 이 저서에서 '놀랄만큼 아름다운 외모와 육감적이고 유혹적인 몸매를 가진 옷도 제대로 걸치지 않은 여자'들이 자신에게 프리 섹스를 제안하며 접근했으나 자신은 도덕적이고 신앙심이 깊어 거절했다고 주장했다.
사실 《내가 본 미국 생활》은 개인적 경험을 지나치게 일반화하는 경향이 있으며 과장이나 침소봉대도 서슴지 않는다. 이 책에 나온 대로 자신에게 어떤 여성이 섹스를 제안했다는 이야기도 사실 있을 법하지는 않다.[15] 어차피 학문적 서적이 아니라 "미국이 얼마나 나쁜 놈들인지" 아랍인들에게 알리기 위한 선동용이기 때문이다.[16] 그는 미국인들의 개방적인 성윤리를 비난했는데 실제로 그가 미국에 체재했던 1950년대는 히피 문화가 아직 출현하기 전으로 미국도 그다지 성개방도가 높던 상태가 아니었다. 다만 그의 눈에는 당시의 미국조차도 자신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수준이었을 것이다.
2.3. 귀국
그리하여 1950년 이집트로 돌아온 그는 자신이 미국 체류 중에 느낀 반미-반서방 감정을 여러 저서와 연설을 통해 대중에게 설파했는데 이를 통해 이슬람 사상가로서 상당한 명망을 얻게 되었다.1920년대 하산 알 반나에 의해 창시된 무슬림 형제단은 반나가 지도할 때만 해도 내면적 지하드를 지향하는 종교단체에 가까웠고 테러단체나 정치단체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되자 급격히 과격해지기 시작했는데 파루크 왕은 이 단체의 위험성을 깨닫고 탄압하기 시작했다.
1948년 무슬림 형제단 소속의 한 대학생이 당시 이집트의 총리였던 누크라시를 암살하자 파루크 왕은 1949년 자객을 보내 무슬림 형제단의 지도자 반나를 암살했다.[17] 그는 귀국하자마자 이렇게 지도자가 공석인 무슬림 형제단에 가입하고 나서 실질적인 지도자이자 사상가 노릇을 하게 되었다.
한편 이집트는 1952년 자유장교단에 의한 쿠데타가 발생하여 왕정이 폐지되고 군사정부가 들어섰다. 자유장교단은 원래 무슬림 형제단에 호의적이었다. 여러 명의 지도자를 거쳐 1954년 최종적으로 군사정부의 수장이 된 가말 압델 나세르는 명망이 높았던 그를 회유하기 위해 여러 번 만나 자신의 정부에 참여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자유장교단은 케말 아타튀르크식의 세속주의 및 근대화를 추구했고 그는 이슬람 근본주의자였기 때문에 전혀 맞지 않았다. 결국 둘은 타협점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처음에는 왕정을 전복한 나세르에 기대를 걸었지만 나세르가 오히려 왕정보다 더 한걸음 나아간 세속주의-근대화 노선을 추구하는 것을 알고 군부정권에 등을 돌렸다.
2.4. 처형
처형 직전의 쿠틉 |
그와 추종자들은 감방에서 고문 및 엄청난 학대를 당했는데 현재도 그렇지만 이집트나 아랍의 세속주의자들은 민족주의 부국강병의 입장에서 정교분리를 추구할 뿐이지 서방식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것은 아니므로 인권유린에 거침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학대에 시달리면서도 감방에서 집필생활을 계속했으며 10년 후인 1964년 건강악화로 일단 석방되었는데 이때 감옥에서 자신의 사상을 집대성하여 《진실의 이정표》 혹은 《진리를 향한 이정표》(영어 명칭: milestone)라는 이름의 책으로 정리해 출간했다.
《진리를 향한 이정표》는 세속주의 이슬람 정책을 펴던 이집트 정부로부터 바로 금서로 지정되었으나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들은 정부의 감시를 피해 몰래 인쇄하여 자기들끼리 돌려보면서 그들의 반미-반서방 사상의 기반을 다지는 데 이용했다.
이 책이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자 나세르는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위험성을 깨달았으며 그는 1965년에 다시 체포되었다. 이 두번째 투옥은 일사부재리 위배이며 억지라는 이야기가 많을 정도로 무리수였다. 2차도 1차와 같은 혐의였으나 새로 증거로 제출된 것은 그가 펴낸 《진리를 향한 이정표》의 내용 밖에 없었으며 구체적 음모를 벌인 증거는 없었지만 감옥에서 쓴 저서를 가지고 국가전복 음모를 꾸몄다고 기소된 것이었다. 이집트 법원은 1966년 그를 가말 압델 나세르를 암살하고 정부를 전복시키려고 한 혐의로 최종적으로 사형을 언도하고 교수형에 처했다. 나세르는 그에게 "지하드주의를 포기하면 사면해주겠다"고 제의했으나 거절했다고 한다.
2.5. 이후
사실 그의 처형은 상당히 무리수였기 때문에 중동 각지에서 그를 성자로 추앙하며 그가 외친 반미-반서방 감정에 입각한 테러를 벌이는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들만 급격히 증가하고 말았는데 10년 동안 감옥에 있었던 사람이 나온 지 얼마 안 되어 구체적인 정부 전복음모를 꾸몄다는 것은 누가 봐도 상식적이지 않았기 대문이다. 하지만 나세르 정부가 이런 무리수를 둬야 할 정도로 그의 사상은 위험했다.나세르는 상당히 정적들의 피를 보기 꺼린 사람이라서[18] 처음에는 그를 감방에 가둠으로서 침묵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 듯하지만 그의 인망이나 무슬림 형제단은 세속주의 군부정권에 너무나 위험했고 결국 석방했다가 다시 처형하는 무리수를 둘 수밖에 없었다.[19]
무슬림 형제단은 이후 탄압을 받다가 안와르 사다트 집권기에 합법적으로 야당으로 이집트의 정치에 복귀했다. 군부 출신 독재자 호스니 무바라크가 아랍의 봄 당시 몰락했는데 유력한 대안 세력으로 떠올랐다.[20] 그리하여 민주화 열풍 속에서 대중적 지지를 받고 2011년에 무함마드 무르시가 집권하여 정권을 잡았지만 무바라크의 몰락을 가져온 경제난을 해결하는 데 집중하기보다는 정교일치를 실행하는 헌법을 만들다가 세속주의자들의 반발에 부딪혀 이집트 정국에 큰 혼란을 불렀다. 결국 군부가 혼란을 수습한다는 명분으로 나설 빌미만을 주었고 이후 군부 수장 압델 파타 엘 시시가 유혈 쿠데타로 집권하고 나서 다시 불법조직이 되어 현재 이르고 있다.
3. 이슬람 극단주의 사상
3.1. 근본주의 및 반세속주의
그가 현대 이슬람 극단주의자로 분류되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는대 샤리아다 시행되지 않고 현대식 서구 법이 시행되는 모든 정권은 불신자 정권으로 모든 무슬림들은 세속 정권에 대항해야 한다는 극단적인 타크피르주의를 담고 있으며 동시에 강경한 반서방 이데올로기를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그는 전 세계는 두 가지로 나뉜다고 했는데 하나는 이슬람, 또 하나는 자힐리야(Jahiliya)[21]라는 것이다. 이런 이분법적 세계관에서 그는 이슬람만이 옳은 것이고 자힐리야는 인간을 타락시킬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학자로는 무슬림 형제단의 창립자 하산 알 반나와 아불 알라 마우두디가 있다. 하산 알 반나는 레닌주의를 바탕으로 이슬람을 재해석했다고 이야기되는 학자[* 물론 반나 자신이나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이런 주장을 스스로 인정한 바 없다. 사실 반나 같은 무슬림 근본주의자들이 무신론{{에 기반한 레닌의 저술을 읽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지만 반나는 레닌의 [[반제국주의 사상 및 제국주의에 희생되는 식민지 주민들을 혁명의 주체로 상정한 이론에 큰 호감을 느꼈다.]이고 마우두디도 헤겔과 마르크스로부터 상당히 많은 영향을 받은 학자이다. 당시 무슬림 학자들 중 레닌주의에 영향을 받은 학자들이 한두명이 아니었지만 하산 알 반나는 좀 더 이를 공격적으로 해석하는 편이었다. 한 번은 하산이 "지하드가 내면의 극기 투쟁이라고 설명하는 하디스는 다 가짜 하디스이다."라는 극단적인 주장을 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는 아직 무슬림 형제단이 자정 능력이 있던 시점이라 주변의 지인들이 너무 극단적인 생각을 하지 말라며 뜯어 말린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하산 알 반나의 극단적인 해석을 부활시킴과 동시에 더 극단화시켰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 《진실의 이정표》의 본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현대 이슬람 또는 비이슬람국가의 사회, 정치체계를 지배하고 있는 기본적 통치개념은 비이슬람적인 것이다. 이슬람이 아닌 것은 죄악, 불의, 고토이고, 이슬람의 신성한 가르침에 대한 무지의 세계이다. 비이슬람과 이슬람 사이에 절충과 화해는 있을 수 없고, 오직 한 가지 개념을 제거하는 것만이 있을 뿐이다. 그때 진정한 이슬람은 전세계에 널리 전파될 것이다.
진정한 무슬림의 의무는 이슬람으로의 교화와 전향을 위한 선교와 지하드를 통해 비무슬림 사회를 일소하고 이슬람사회를 부활시키는 것이다.
변화는 행동과 근본주의 혁명으로 발생한다.
지하드는 오직 이슬람만이 전파되도록 전세계를 지속적으로 해방시키는 것이다. 여기에 반대되는 해석은 전부 다 왜곡이며 배격되어야 한다.
그가 추구한 세계에서는 정치와 종교가 한몸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아불 알라 마우두디가 제안한 신정 민주주의(Theo Democracy) 이론에 큰 감명을 받고 이를 재해석하였다. 그에게 서구식 민주주의와 그에 따른 정교분리란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과도 같았는데 인민이 민주정이나 공화정을 통해 스스로를 지배하고자 한다면 이들은 하나님의 역할을 빼앗는 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22] 따라서 "하나님 이외의 신이 없다"는 샤하다를 행동을 통해 증명하고자 한다면 현존하는 세속 정치권력들에 반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개인적 경험으로 인한 미국에 대한 혐오, 음모론에 기반한 반서방주의까지 겹치면서 그의 사상은 극단의 극단으로 치닫게 되었다.
그의 극단적인 사상은 바로 알카에다, 그리고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의 형성의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3.2. 반외세-반유대-반기독주의
그는 특히 자신이 미국에 체제하기 직전 벌어진 제1차 중동전쟁에서 미국인들과 미국 언론이 이스라엘 측을 일방적으로 두둔하는 것을 보았다. 미국 정부는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친이스라엘 정책을 펴기 시작했지만 그와는 별개로 유대인들이 여론 주도층에 상당히 포진한 미국 국민 일반의 정서는 이스라엘 건국 당시부터 친이스라엘 일색이었다. 그나 아랍인들은 이스라엘을 침략자로 간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미국인들의 친이스라엘 정서를 보고 미국의 주류인 기독교도와 유대교들을 강하게 증오하게 되었다.그는 《진실의 이정표》 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유대인과 기독교인은 거짓된 불신자들로 지옥의 백성들이다. 이슬람에 대한 그들의 해석과 연구는 전부 배제되어야 하며 그저 잡다한 순수학문 분야에서만 참고할 수 있다.
그가 활동하던 당시는 이스라엘의 건국과 중동전쟁에서의 대패[23], 동시에 이집트 서민 경제가 인플레이션으로 타격을 받는 상황에서 주변 걸프 아랍 국가들이 산유국이 되어 중세 이래 전통적인 아랍 지적 문화의 중심지였던 이집트와 시리아보다 훨씬 부유해지는 상황 등등이 겹치면서 이집트인/시리아인들 사이에서 정신적 공황이 발생하였던 상황이었다.
아랍권의 반서방 감정의 기원은 십자군으로 올라가지만 직접적으로는 20세기 들어 제1차 세계 대전 때 영국과 프랑스가 오스만 제국을 분열시키기 위해 아랍 민족을 이용해 놓고 정작 오스만 제국이 해체되자 아랍 민족을 독립시켜주기는 커녕 자신들의 식민지나 보호령으로 삼은 것에서 유래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미국과 영국이 시오니스트의 이스라엘의 건국을 방조했고 이스라엘이 이전에 살던 아랍인(팔레스타인인)들을 추방하면서 더욱 불붙었다.
나세르, 바트당과 같은 아랍 민족주의자들이나 세속주의자들은 이런 위기 앞에서 이슬람권의 지체를 가져온 정교일치-신정체제를 혁파해 종교와 정치를 분리하고 아랍의 전통을 계승하되 서방을 모방한 근대화 및 산업화, 부국강병으로 서방에 대항하려고 했으나 그와 같은 근본주의자들은 반외세의 입장은 같았지만 반외세를 실행하기 위한 근대화는 서방화라며 죄악시하고 무함마드 사후의 정교일치 체제를 복원하려고 했다.
말하자면 아랍 민족주의자나 세속주의자들은 성차별, 종교 차별[24], 부족주의 등의 전통적인 이슬람의 전근대성도 철폐하려고 했으나 그를 비롯한 원리주의자들은 이런 개혁마저도 서방화라며 극렬히 반발했다는 점에서 위정척사파와 같은 수구파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하여 그나 그 일파는 타교파나 타종교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하고 이를 옹호했다.
그를 추종하는 무슬림 형제단은 그 공격성을 손쉬운 자국의 콥트 정교회에 돌렸다. 영국이나 프랑스, 미국이나 이스라엘, 그리고 군부가 아니라 아니라 바로 이집트에 2천여 년 가까이 거주해 온 현지 콥트 정교회 신도들이 이들의 가장 큰 희생자가 되었다. 분명 그는 반서방, 반세속주의를 기치로 했지만 서방이나 세속주의자들(군부)은 이들이 대항하기에는 너무나 강력한 집단이기 때문에 무슬림 형제단은 자국의 약자를 공격함으로서 자신들의 기치를 증명하려고 했다.
사실 콥트 기독교도들은 영국 식민 당국과의 협조를 거부하고 무슬림들과 힘을 합쳐서 영국의 이집트 예속화에 적극적으로 저항했지만 무슬림 형제단의 눈에는 이들 역시 그저 불신자에 불과했다. 그에게 있어서 지하드는 곧 "무지한 비이슬람 세계에 이슬람화시키는" 신앙 생활의 기본이었고 여기에는 무력과 강제를 동반하는 것이 필수였다. 그는 지하드를 "무슬림들이 외부에 침략을 받아서" 하는 것이 아니며 무슬림이라면 언제나 항상 비무슬림과 일체의 타협 없이 맞서 싸워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였으며 콥트 기독교인들이 과거 이집트 독립 운동에 참여하고 안 하고는 중요하지 않았고 그들이 무슬림이 아니라는 점 한 가지만 중요했다. 그의 지지자들은 콥트 기독교 교회를 조직적으로 방화하고 동시에 집단 구타와 같은 사적제재를 적극 동원하여 이들을 빈민가로 몰아넣었다.
3.3. 지하드주의: 폭력의 정당화
그는 자신의 이념을 실현할 수 있는 수단으로 폭력을 정당화하였다. 사실 그의 반세속주의와 반외세주의는 특기할 만한 것은 없었지만 지하드주의가 결합하면서 목적을 위해 수단을 정당화하는 위험한 사상이 되어 버렸다.그의 극단주의 사상은 그가 독단적으로 창안한 사상은 아니었다. 그가 극단주의로 전향한 후 가장 두터운 친분 관계를 맺은 동료 학자로는 인도 출신 근본주의 신학자 아불 알라 마우두디가 있는데[25] 기실 진실의 이정표에 나오는 내용 상당수는 그의 주장을 벤치마킹한 것이기도 하다.
1. 오늘날 모든 인간 사회는 비이슬람 사회이다. 오늘날의 무슬림 국가들 역시 진정한 신정 정치 체제가 아니다.
2. 이슬람의 통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비이슬람 사회는 지하드로 타도되어야 한다.
3. 처음 이슬람사회가 힘이 없는 약한 사회라면 이슬람국가의 수립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모든 힘을 모아야 한다. 이슬람사회가 일단 힘을 모으고 나면 지하드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 아불 알라 마우두디
2. 이슬람의 통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비이슬람 사회는 지하드로 타도되어야 한다.
3. 처음 이슬람사회가 힘이 없는 약한 사회라면 이슬람국가의 수립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모든 힘을 모아야 한다. 이슬람사회가 일단 힘을 모으고 나면 지하드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 아불 알라 마우두디
아불 알라 마우두디의 저서들이 아랍어로 번역되면서 쿠틉도 그의 사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는데[26] 쿠틉의 《진실의 이정표》나 《쿠란의 그늘》은 마우두디의 글을 상당히 많이 인용하고 있다. 마우두디와 쿠틉의 성장 배경은 겹치는 점이 없지 않은데 마우두디는 반서방 성향이 강한 보수적이고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자라면서 몰래 마르크스와 헤겔, 니체 이론을 공부했던 사람이었고 서구의 모든 사상을 다 반대한다고 주장했으나 저서 타프히물 쿠란 등등에서 서구 철학의 방법론을 인용하여 이슬람 근본주의를 옹호하고 정당화한 근본주의 이론가이기도 했다. 문제는 쿠틉이 주장한 내용과 마우두디가 주장한 내용을 문체나 어투만 비교해 봐도 알 수 있듯이 쿠틉의 이론이 더 극단적이었다는데 있었다.
지하드라는 개념을 방어적 전쟁이라는 개념으로 해석하는 이들은 이슬람의 본질과 그 주된 목적, 즉 전 세계에 이슬람의 메시지를 전파한다는 목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지하드는 모든 방해물들을 제거하기 위해 반드시 무력을 동원해야만 한다.
사실 무슬림 형제단의 창시자 하산 알 반나는 폭력적인 성향은 없었으며 이슬람 근본주의에 대중주의를 도입했고 성직자가 주도권을 쥐는 (이란식) 신정체제가 아니라 근본주의로 각성된 대중이 주도하는 정교일치를 주장했다.[27] 그리하여 신도 개개인의 내면적 지하드[28]를 강조하였다.[29] 하지만 반나 사후 무슬림 형제단을 지도한 쿠틉은 여기에 한걸음 더 나아가 "물리적 폭력을 통한 세속권력의 타도"를 추가하면서 현대 이슬람 극단주의를 완성한 지도자로는 반나가 아니라 폭력적 지하드주의를 정당화한 쿠틉이 꼽힌다.
4. 여담
- 당대에 저명한 하디스 학자로 유명했던 셰이크 알 알바니는 사이드 쿠틉의 살아 생전에는 그에 대해 별다른 코멘트를 하진 않았으나 사이드 쿠틉 사후 이슬람주의자들이 그를 순교자인 양 미화하는 것에 대해 직접적으로 비판했다. 사이드 쿠틉의 영향을 받아 21세기 초 등장한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가 종교 극단주의 테러단체로 전락한 것을 생각하면 당시 《하디스》 전문가였던 알바니의 우려가 다 이유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 현대 이슬람주의(Islamism)를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다. 사이드 쿠틉과 그 제자들은 영어로 -ism이 붙은 사상은 모두 사탄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주장했는데[30] 다른 무슬림 지식인들은 "그럼 이슬람 신앙의 기본인 '유일신 신앙(타우히드)'을 영어로 번역하면 Monotheism인데, 너희는 그럼 우상숭배자겠네. 생각 좀 하고 살아라"라는 뜻에서 조롱조로 접미사 -ism을 붙여 부른 게 이슬라미즘의 어원이다.
- 쿠틉의 형제인 무함마드 쿠틉은 쿠틉 처형 직후 사우디아라비아로 망명했고 킹 압둘 아지즈 대학에서 후학을 키우는데 그의 제자들 중 한 명이 오사마 빈 라덴이다.
- 일부 반이슬람주의자는 이집트의 루저가 미국에서 인종차별을 받고 백인 여자에게 차여 유학에서 실패해 분풀이로 근본주의자가 되었다는 식으로 쿠틉의 사상전향을 설명하는데 이는 상당히 희화화해서 단순화한 주장이다. 쿠틉은 이집트에서 루저가 아니었으며 유학을 떠나기 전부터 상당한 영향력을 갖춘 문장가였다. 사실 쿠틉은 당대 이집트에서 지성적으로는 최상위 계급이었고 청년기에는 안정적인 직장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먹기만 했으면 얼마든지 결혼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쿠틉은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는데 본인의 이야기에 따르면 자신의 독신주의를 포기할 만큼 신앙심 있는 여성을 만나지 못해서라고 한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나 빌헬름 라이히의 방법론을 가져온 일부 서방의 논객들은 이슬람 원리주의자(특히 탈레반)들의 극단주의를 성적 억압의 결과라는 식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으나 쿠틉은 결혼이나 성관계를 '안' 한 것이지 못 한게 아니다.[31]
물론 미국에서 받은 푸대접이 그를 극단화시킨 것은 설득력이 있지만 그런 위험한 사상을 이슬람권에서 그럴듯하게 펼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지성이나 문필력이 대단했기 때문이다. 현재도 아랍권에서는 쿠틉의 여러 글들이 교과서에 실릴 정도이며 그렇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아랍권과 이슬람권에서 영향력을 가지고 추종자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5. 참고 문헌
- 악마와의 동침/ 로버트 베어[32] 저/ 곽인찬 역/ 중심/ 2004년 4월 19일
- 문명전쟁: 알 카에다에서 9·11까지/ 로렌스 라이트 저/ 하정임 역/ 다른/ 2009년 9월 11일
- 라이벌 국가들의 세계사/ 도현신 저/ 시대의창/ 2019년 8월 1일
- 이슬람/ 손주영 저/ 일조각/ 2005년 2월 28일
-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 타밈 안사리 저/ 뿌리와이파리 / 2011년 8월 25일
- 이슬람 테러리즘 속 이슬람/ 이븐 와라크 저/ 시그마북수 / 2018년 10월 1일
- 지하디스트의 여정 - 나는 왜 이슬람 전사가 되었는가/ 파와즈 게르게스 저/ 아산정책연구원/ 2011년 11월 31일
[1] 현대 표준 아랍어 발음에 기반한 표기로, ق/q/를 성문 파열음 ء(함자)로 발음하는 이집트 아랍어의 발음 특성상 이집트 아랍어로는 '우틉'에 가깝게 발음된다. ق를 ㄲ으로 옮기는 관습에 기인한 '꾸틉'이라는 표기도 종종 쓰인다.[2] 쿠란의 주석서(타프시르)로 <꾸란의 그늘>을 저술했는데 전체가 30권짜리인 방대한 양이며 영문판은 15권짜리다. 이를 축약한 것이 바로 그 논란의 작품 <길가의 이정표>다.[3] 그는 근본주의자가 되기 전부터 저술하기 시작했으며 10년간 옥살이를 하면서 많은 글을 남겼으나 상당수는 그를 가둔 이집트 군사정부가 파기했다.[4] 현재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아랍권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다. 정확히는 카이로 대학에 합병되기 전의 다르 알룸 대학을 졸업했다.[5] 아이러니하게도 마푸즈는 훗날 신을 모독했다는 혐의로 쿠틉의 추종자들인 무슬림 형제단으로부터 테러를 당했다.[6] 이 왕가의 창시자인 메흐메드 알리는 이집트 토박이가 아니라 알바니아계 오스만인이었지만 서방의 힘을 인정하고 이집트를 근대화시키려고 노력했다. 이를 위해 여러 산업화를 추진하고 이집트의 전략적 중요성을 증폭시키기 위해 수에즈 운하를 건설했는데 이것이 도리어 화가 되어 영국의 침략을 받아 보호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후 이집트 왕가는 영국의 꼭두각시 왕조로 전락했고 이집트인들은 세속주의자, 원리주의자 할 것 없이 이런 허수아비 왕정을 반대했다.[7] 일단 유학지로 미국을 선택했다는 점으로 봐도 그가 적어도 유학 전에는 미국에 상당히 호의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알 수 있다.[8] 후술할 미국인들의 성애관들도 그 책이 출전이다.[9]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쿠틉은 흑인과 비슷한 외모를 가지고 있다. 이집트는 나일강 상류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흑백혼혈이 많아진다.[10] 이런 인종 차별 때문에 극단적인 반서방주의자가 된 경우가 한국에도 있는데 윤치호를 들 수 있겠는데 미국 유학 시절 백인에게 폭행을 당하거나 특정 시설에서 쫓겨나는 등의 인종 차별을 겪고 분노해 "동아시아 민족 중심"의 대동아공영권을 내세운 일제에 협력하는 반민족행위를 저지르게 된다. 제2차 세계 대전 직전 일본의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 밑에서 외상을 지낸 마쓰오카 요스케도 이런 부류라고 할 수 있는데 미국에 건너가 고학을 하면서 중학교부터 대학 과정까지 교육받았으나 외교장관에 오르자 미국에 대해 개인적인 증오심을 표출하면서 강경한 대미 정책을 펼쳤다. 이런 마쓰오카의 대미강경책 때문에 고노에는 마쓰오카를 해임하기 위해 내각을 해산했을 정도였다.[11] 다만 사이드 쿠틉은 결코 인종이나 종교 간의 평등을 주장한 사람은 아니었으며 어디까지나 독실한 무슬림이자 "'이슬람이야말로 모든 종교들 중에서 가장 우수하다"'는 우월의식을 강하게 품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책인 《진리를 향한 이정표》에서 과거 이슬람 아랍 제국이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노예로 부린 일을 두고 "이슬람교는 미개한 흑인들에게 문명을 전해주었다."라고 미화했다.[12] 적어도 이집트에는 미국식의 인종 차별은 존재하지 않았다. 수단과 접경하고 있는 이집트 남부 인구의 상당수는 흑백혼혈이며 이후 대통령에 오른 흑백혼혈인인 안와르 사다트에서 보듯이 흑백차별은 당시의 미국보다는 적었다.[13] 미국 흑인 민권 운동에도 큰 영향을 끼친 미국의 흑인 시인 랭스턴 휴즈가 이 문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일화를 남긴 바 있다. 백인 학생들 사이에서 지내던 대학 시절 친구라고 할 만한 사람은 랭스턴과 함께 학교의 단 둘뿐인 유색인종 학생이던 중국인 유학생 뿐이었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 미국의 유색인종 차별에 이미 익숙해진 랭스턴은 아예 백인들로 구성된 주류 학생 사회에 끼어들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지만 중국인 친구는 포기하지 못하고 계속 주류에 들어가려고 시도하다가 거부당하고 실망하기를 반복했다고 한다. 이 중국인 학생도 1920년대에 미국 유학을 올 정도였으면 당연히 중국에서는 상류계층 출신 엘리트였을 것이고 그런 만큼 자신이 주류 사회에서 배척받는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다. 사이드 쿠틉이 미국에서 유학한 시기는 랭스턴이 대학을 다니던 시기보다 20년 이상 늦은 시기였지만 50~60년대 민권운동 이전이었기 때문에 비슷한 상황에 처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더구나 20대 청년이던 랭스턴 휴즈 및 그의 중국인 친구에 비해 중년의 나이에 이른 고위공무원이던 쿠틉에게는 이러한 차별이 더욱 고통스럽고 불쾌하게 여겨졌을 수도 있다.[14] 랭스턴 휴즈의 기록을 보면 당대 미국의 인종 차별이 다른 나라에 비해 더욱 심한 편이었음도 확인 가능하다. 당장 랭스턴의 아버지부터 랭스턴에게 멕시코에서 살라고 강권하며 미국으로 돌아가겠다는 랭스턴에게 '사람 대접도 못 받는 곳에 왜 돌아가겠다고 하느냐'고 화를 냈다고 할 정도였다.[15] 실제로 미국 대학생들의 파티나 젊은이들이 자주 오는 바에서 음주로 흥이 오르면 hookup이라는 형태로 즉석 섹스가 이뤄지긴 하지만 쿠틉은 술을 금기시하는 무슬림이라 그런 파티나 술집에 갔을 것 같지는 않다. 아마도 "그런 것이 있다더라"고 들은 것을 자신이 겪은 것처럼 과장했을 것이다.[16] 비슷한 책으로 전여옥의 일본은 없다를 들 수 있다.[17] 아이러니하게도 반나는 사실 이런 식의 테러를 반대해 왔으며 누크라시의 암살도 규탄했다.[18] 본인이 쿠데타를 벌일 때도 반대파에서 불필요한 희생자가 나오지 않도록 특별히 명령을 내릴 정도로 살상을 극히 싫어했다. 이집트 파루크 왕실 인사들이나 군부의 여러 파벌들의 수장 등 나세르에 맞선 여러 정적들은 체포되었어도 나세르의 배려로 위해를 받지 않고 곧 석방되어 해외로 망명할 수 있었다.사실 나세르가 다른 독재자들과 달리 그나마 정적들을 무차별적으로 숙청하거나 제거하는 스타일은 아니다.[19] 사실 쿠틉을 놔두었으면 쿠틉 처형 직후 터진 6일 전쟁(1967)의 패전 책임과 겹쳐 나세르는 진짜로 하야의 위기에 몰릴 뻔 했다. 쿠틉을 처형한 것은 나세르도 상당히 주저했고 결과적으로 쿠틉을 순교자로 만들어 줬지만 나세르에게는 정치적으로 신의 한 수가 되었다.[20] 무바라크 정권의 부패도 문제였지만 실제로는 흉작으로 인한 경제난도 큰 원인이었다.[21] 무지의 세계라는 뜻으로 원래는 이슬람화 이전 고대 아랍인들의 문화를 의미하던 어휘다.[22] 공교롭게도 극단적인 기독교 광신도들 중에도 프랑스 혁명으로 등장한 현대 민주주의에 대해서 신의 주권을 빼앗는 불순한 신성모독이며 선거나 투표도 신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부정적으로 보는 경우가 있다.[23] 공교롭게도 쿠틉 사후 얼마 되지 않아 제4차 중동전쟁에서 이집트가 드디어 승리하는가 싶더니 전열을 정비한 이스라엘군의 반격에 또다시 패배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이스라엘에 군사적 지원을 제공하는 한편 이를 지렛대로 이스라엘의 역습이 일선을 넘지 않도록 제어했는데(일례로 수에즈 운하 동안에 고립된 이집트 제3군을 격멸하려는 이스라엘을 제지했다) 패전의 분노를 돌릴 대상이 필요하던 아랍권에서 후자는 쏙 빼먹고 앞부분만 강조해서 미국을 패전의 원흉으로 지목했다. 그 결과 이집트에서 반미 감정이 폭발하고 쿠틉의 반미 사상이 재발굴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24] 무슬림/비무슬람, 수니/시아파 사이의 차별을 말하며 아랍 민족주의자들 중에는 알라위파와 같은 소수종파 신자나 기독교도들도 많다. 바트당의 창시자인 자키 알아르수지는 수니파와 시아파 할 것 없이 아예 비무슬림으로 간주되던 알라위파 출신 무신론자였다. 세속주의자였던 사담 후세인은 수니파 무슬림이었지만 그의 정부에는 기독교도, 시아파도 참여하고 있었다.[25] 탈레반의 사상적 시조에 해당한다.[26] 물론 아불 알라 마우두디 본인도 푸스하(고전 문어체 아랍어)가 유창하였다.[27] 이집트 무슬림 형제단이나 그 팔레스타인 지부격인 하마스가 선거로 집권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반나의 대중주의 때문이다.[28] 개별 신자의 이슬람 신앙의 체화 및 서방식 생활양식의 배제[29] 이런 경향은 사실 소수의 전위당이 혁명의 구심점이 되는 레닌주의보다는 대중이 혁명적 각성을 통해 자발적으로 혁명에 나서는 마오주의의 혁명전략에 더 가깝다. 물론 반나가 자신의 사후 집권하는 마오의 저작을 읽었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30] 정확히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인간주권이라는 개념에 근거를 둔 모든 종류와 모든 형태의 체제들, 영어로 -ism 혹은 -cracy라고 끝나는 이 모든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속성을 탈취하려 시도하는 것이다. 최종 결정권이 신이 아닌 인간에게 있다고 주장하는 이러한 체제들은 하나님 대신 다른 인간을 숭배하는 우상숭배에 해당한다."[31] 이는 조금 과장 보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을 "억압된 성욕을 근본주의 신앙으로 풀어버리는 변태성욕자" 혹은 "성욕에 굶주린 추남 루저" 정도로 보는 것인데 이와 유사한 관점이 한국에도 반이슬람 정서를 타고 은근히 퍼져 있지만 이런 식으로 아무 데나 걸기 나름인 인상비평을 적용하기로 하자면 오히려 근본주의자들도 "그렇게 해석하는 서방세계 사람들은 얼마나 정신이 빈곤하고 성욕에 굶주렸기에 모든 현상이 성욕의 억압 문제로 보이는지 궁금하다"고 역으로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해석법은 이슬람 근본주의의 대두를 사회-역사적 원인이 아닌 개인적 문제로 단순화-희화화하는 것으로, 그 저변에 깔린 통속 심리학적 접근법 자체가 전혀 실증에 근거한 분석틀이 아니기 때문에 실질적인 문제의 이해와 해결에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외부의 비아냥과는 반대로 근본주의의 지도자나 창시자들은 개인적 면모에 있어서는 사람들을 끌어모을 정도의 카리스마, 인망, 또는 인간적 매력을 갖춘 사람들이었다. 지도자가 볼품없다면 십중 팔구는 제명에 못 살 테러조직에 누가 가담해 충성을 바치겠는가. 근본주의 테러리스트의 대표자격인 오사마 빈 라덴은 부잣집 도련님답지 않게 소탈하고 겸손한 성격으로 명망이 높았고 탈레반의 창시자 모하마드 오마르도 사이비 교주로 타락하기 전까지는 솔선수범해서 강간범 무리들을 소탕하던 호걸이었는데 이들은 소위 "루저"가 아니며 모두 2m가까이 되는 신장(오마르 2m, 라덴 195cm)을 가진 카리스마적 인물들이었다. 이런 식의 희화화는 이른바 외로운 늑대 타입 테러리스트를 묘사할 때는 적절할지 몰라도 유명한 극단주의자 관련 설명에는 부적합하다.[32] 미국 CIA 요원으로 사우디와 요르단 등 중동 지역에 20년 동안 파견된 경험을 바탕으로 사우디 왕가의 부패와 타락 및 이슬람 원리주의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한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