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4-10 21:37:35

산업 혁명

산업시대에서 넘어옴
''''''
제1차 산업 혁명 제2차 산업 혁명 제3차 산업 혁명 제4차 산업 혁명 제5차 산업 혁명


[[영국|
파일:영국 국기.svg
영국
관련 문서
]]
{{{#!wiki style="margin:0 -10px -5px; word-break:keep-all"
{{{#!wiki style="display:inline-table; min-width:15%; min-height:2em"
{{{#!folding ⠀[ 정치 ]⠀
{{{#!wiki style="margin:-5px -1px -5px"
<colbgcolor=#C8102E><colcolor=#fff>상징유니언 잭 (성 조지의 십자가) · 국장 · 국호 · God Save the King · 존 불 · 브리타니아
왕실·귀족영국 국왕 · 영국 국왕의 배우자 · 윈저 왕조 · 영연방 왕국 · 웨일스 공 · 근위대 · 가터 기사단 · 영국 왕실 훈장 · 버킹엄 궁전 · 세인트 제임스 궁전 · 홀리루드 궁전 · 윈저 성 · 밸모럴 성 · 런던 탑 · 켄싱턴 궁전 · 클래런스 하우스 · 성 에드워드 왕관 · 영국 제국관 · 커타나 · 운명의 돌 · 영국 왕실과 정부의 전용기 · 벤틀리 스테이트 리무진 · 코이누르 · 왕실령 · 영국 왕실 인증 허가 브랜드 · 웨스트민스터 사원 · 귀족/영국 · 영국의 귀족 목록 · 요크 공작 · 콘월 공작 · 에든버러 공작 · 던세이니 남작 · 작위 요구자/유럽/영국
정치 전반정치 전반 · 연합왕국 · 의회(귀족원 · 서민원) · 총선 · 자치의회 · 총리 · 내각 · 행정조직 · 다우닝 가 10번지 · SIS · MI5 · MHRA · 웨스트민스터 · 웨스트민스터 궁전 · 마그나 카르타 · 권리청원 · 권리장전 · 의전서열
치안·사법영국의 법 집행 · 런던광역경찰청 · 영국 국립범죄청 · 영국 국경통제국 · 영국 이민단속국 · 사법 · 영미법 · 근로기준법 · 시민권 · 크라임 펌
정당정당 · 보수당(레드 토리 · 미들 잉글랜드 · 블루칼라 보수주의 · 일국 보수주의(코커스) · 자유시장 포럼) · 노동당(강성좌파 · 연성좌파) · 자유민주당
사상근력 자유주의 · 글래드스턴 자유주의 · 대처주의 · 블레어주의 · 왕당파 · 일국 보수주의 · 하이 토리
사건·의제영국의 자치권 이양 · 스코틀랜드 독립운동 · 잉글랜드 자치(웨스트 로디언 질의 · English votes for English laws) · 브렉시트 · 플러브 게이트
외교외교 전반(옛 식민지 국가들과의 관계) · 여권 · 거주 허가 · 영연방 · 영연방 왕국 · CANZUK · 파이브 아이즈 · 상임이사국 · G7 · G20 · 오커스 · 영미권 · 브렉시트(탈퇴 과정과 이슈들 · 영국 내 영향 · 브렉시트/세계 각국의 영향) · 친영 · 반영 · 영빠 · 냉전 · 신냉전 · 미영관계 · 영불관계 · 영독관계 · 영국-캐나다 관계 · 영국-호주 관계 · 영국-뉴질랜드 관계 · 영국-이탈리아 관계 · 영국-스페인 관계 · 영국-포르투갈 관계 · 영국-아일랜드 관계 · 영국-싱가포르 관계 · 영국-남아프리카 공화국 관계 · 영인관계 · 영국-홍콩 관계 · 한영관계 · 영러관계 · 미국-캐나다-영국 관계 · 미영불관계 · 영프독 · 영국-아일랜드-북아일랜드 관계 · 영국-스페인-지브롤터 관계}}}}}}}}}{{{#!wiki style="display:inline-table; min-width:15%; min-height:2em"
{{{#!folding ⠀[ 역사 ]⠀
{{{#!wiki style="margin:-5px -1px -5px"
<colbgcolor=#C8102E><colcolor=#fff>역사 전반역사 전반() · 이교도 대군세 · 북해 제국 · 노르만 정복 · 백년전쟁 · 장미 전쟁 · 칼레 해전 · 청교도 혁명 · 명예혁명 · 영국 통일 · 해가 지지 않는 나라 · 북아일랜드 분쟁
시대로만 브리튼 · 로만 브리튼 이후 · 무정부시대 · 대항해시대 · 엘리자베스 시대 · 찰스 시대 · 조지 시대 · 빅토리아 시대
국가칠왕국 · 노섬브리아 · 켄트 왕국 · 동앵글리아 · 에식스 · 웨식스 · 서식스 · 머시아 · 잉글랜드 왕국 · 스코틀랜드 왕국 · 웨일스 공국 · 아일랜드 왕국 · 잉글랜드 연방 ·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 그레이트브리튼 및 아일랜드 연합왕국 · 대영제국
왕조웨식스 왕조 · 노르만 왕조 · 플랜태저넷 왕조 · 요크 왕조 · 랭커스터 왕조 · 튜더 왕조 · 스튜어트 왕조 · 하노버 왕조 · 작센코부르크고타 왕조 · 윈저 왕조
세력젠트리 · 요먼 · 원두당 · 청교도 · 토리당 · 휘그당}}}}}}}}}{{{#!wiki style="display:inline-table; min-width:15%; min-height:2em"
{{{#!folding ⠀[ 사회 · 경제 ]⠀
{{{#!wiki style="margin:-5px -1px -5px"
<colbgcolor=#C8102E><colcolor=#fff>경제경제 전반 · 산업 혁명 · 무역 · 파운드 스털링 · 영란은행 · 런던증권거래소 · 역사 속의 경제위기 · 한영 FTA · 영국제 · 에어버스 · 롤스로이스 plc
지리브리튼 · 그레이트브리튼 섬 · 아일랜드섬 · 구성국 · 잉글랜드(하위지역) · 스코틀랜드(하위지역) · 웨일스(하위지역) · 북아일랜드 · 카운티(카운티 목록) · 지역 및 속령 목록 · 주요 도시 · 런던의 행정구역 · 하이랜드 · 미들섹스 · 왕실령 · 영국 해협(도버 해협) · 영국령 남극 지역
사회사회 전반 · OBE · 젠틀맨 · 신사 · 하이랜더 · 공휴일 · 인구 · NHS
민족영국인 · 잉글랜드인(앵글로색슨족) · 스코틀랜드인(게일인) · 웨일스인(브리튼인) · 콘월인 · 아일랜드계 · 영국 백인 · 프랑스계 · 폴란드계 · 인도계 · 재영 한인사회 · 러시아계 · 영국 흑인 · 파키스탄계 · 우크라이나계 · 일본계 · 네덜란드계 · 한국계 · 헝가리계 · 튀르키예계 · 독일계 · 아르메니아계 · 그리스계 · 리투아니아계
영국계영국계 미국인 · 영국계 호주인 · 영국계 뉴질랜드인 · 영국계 남아프리카 공화국인 · 잉글랜드계 캐나다인 · 스코틀랜드계 캐나다인 · 웨일스계 캐나다인 · 앵글로아일랜드인 · 영국계 아르헨티나인 · 영국계 칠레인 · 영국계 러시아인 · 영국계 멕시코인 · 재한 영국사회 ·
교육교육 전반 · 유학 · 장학금 · 급식 · 파운데이션 · 퍼블릭 스쿨 · 식스폼 · IELTS · PTE · A-Level · UCAS · 대학교 일람() · 대학 서열화(옥스브리지 · 러셀 그룹) · 기타 교육 관련 문서
교통교통 전반 · 공항 · 철도 환경(High Speed 1 · High Speed 2 · Eurostar · 내셔널 레일) · 런던 지하철 · 런던의 대중교통 · 좌측통행 · 채널 터널
기타그리니치 천문대(자오선) · 월드 와이드 웹(팀 버너스리) · 제국 단위계 · 생활비 절약 노하우 · 혐성국}}}}}}}}}{{{#!wiki style="display:inline-table; min-width:15%; min-height:2em"
{{{#!folding ⠀[ 문화 ]⠀
{{{#!wiki style="margin:-5px -1px -5px"
<colbgcolor=#C8102E><colcolor=#fff>문화 전반문화 전반 · 영국의 문화재 · 종교 · 성공회(잉글랜드 국교회) · 장로회(스코틀랜드 교회) · 영국/관광
예술브릿팝 · 브리티시 인베이전 · 영국 드라마 · 영국 영화 · 웨스트엔드 · 아서 왕 전설 · 로빈 후드 전설 · 마더 구스 · 캔터베리 이야기 · 베오울프 · 셜로키언 · 톨키니스트 · 후비안 · BAFTA · 백파이프
언어영어 · 영국식 영어 · 용인발음 · 스코트어 · 스코틀랜드 게일어 · 웨일스어 · 코크니 · 에스추어리 · 콘월어 · 영어영문학과(영어교육과)
음식요리(종류) · 로스트 디너 · 쇼트브레드 비스킷 · 티타임(애프터눈 티) · 홍차 · · 아침식사 · 피시 앤드 칩스 · 맥주 · 위스키 · 사과주
스포츠축구 · 프리미어 리그 · FA(대표팀) · FA컵 · 스코티시 프리미어십 · SFA(대표팀) · 컴리 프리미어 · FAW(대표팀) · NIFL · IFA(대표팀) · 럭비(RFU · SRU · WRU · IRFU) · 프리미어십 럭비 · British and Irish Lions · 식스 네이션스 챔피언십 · 크리켓 · 윔블던 · 영국 그랑프리 · F1
서브컬처모드족 · 하드 모드 · 로커스 · 카페 레이서 · 펑크 문화 · 차브족 · 영국인 캐릭터
기타왕립학회 · 대영박물관 · 대영도서관 · 영국 국립미술관 · BBC · 가이 포크스 데이 · 킬트}}}}}}}}}{{{#!wiki style="display:inline-table; min-width:15%; min-height:2em"
{{{#!folding ⠀[ 군사 ]⠀
{{{#!wiki style="margin:-5px -1px -10px"
<colbgcolor=#C8102E><colcolor=#fff>군사 전반영국군(스코틀랜드군) · 해외 주둔군 · 계급 · 전투식량/영국군 · 징병제(폐지) · 빅토리아 십자무공훈장 · NATO · 군기분열식
장비군복(레드 코트) · 군장/영국군 · 군함(1차대전 · 2차대전 · 현대전 · 항공모함 · 원자력 잠수함) · 항공기(2차대전) · 핵무기(튜브 앨로이스, AWE)
부대육군(연대 · 제3사단 · 왕립 독일인 군단 · 원정군 · 블랙와치 · 사관학교) · 통합해군(해군 · 해병대 · 대함대 · 본토함대 · 사관학교) · 공군(제617비행대대 · 사관학교) · 전략사령부 · 근위대 · 특수부대(E Squadron · SAS · SBS · SRR · SFSG) · 코만도 · 구르카 · 레인저연대 · 연합합동원정군}}}}}}}}}}}}

산업 혁명
Industrial Revolution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Hartmann_Maschinenhalle_1868_(01).jpg
1868년 리처드 하트먼(Richard Hartmann)의 기계 공장을 묘사한 삽화.

1. 개요2. 배경
2.1. 사회적 배경
2.1.1. 식민지 개척과 시장 확보2.1.2. 정치적 안정과 근대적 정부 수립2.1.3. 농업 혁명과 인클로저 운동
2.2. 자연적 배경
3. 전개
3.1. 기술 혁신
3.1.1. 면 방직업의 발전3.1.2. 증기기관과 교통의 발전3.1.3. 제철 공업의 발전
3.2. 산업의 성장3.3. 노동 계급 탄생
3.3.1. 노동자들의 고통3.3.2. 노동 조건 개선
4. 왜 영국인가
4.1. 경제적 동인4.2. 포용적이고 다원주의적인 정치 풍토4.3. 재산권의 발달
5. 결과 및 의의6. 관련 문서

1. 개요

산업 혁명(, Industrial Revolution)이란 18세기 그레이트브리튼 왕국(현재 영국)에서 시작된 사회경제적 변화와 기술의 혁신, 그리고 이에 영향을 받아 크게 변한 인류 문명의 총체를 가리킨다.

영국에서 일어난 방적기개량을 시작으로 한 기술 혁명은 18세기 중반에서 19세기 중반 사이에 유럽 여러 나라로 확산되었다. 이 시기 수공업에 기초한 작업장들이 기계설비를 갖춘 큰 공장(공장제 기계공업)으로 전환되었으며, 자본주의 경제가 확립되었다. 혁명은 19세기에 유럽을 넘어 북미, 그리고 아시아로까지 확산되었다. 독일의 사회주의 경제학자이자 역사학자였던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시대 구분으로서 1780~1840년대에 진행된 제조업, 공업의 기계화와 공장화를 처음 '산업 혁명'이라고 지칭했으며,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가 《Lectures on the Industrial Revolution of the Eighteenth Century in England》라는 책에서 이 표현을 사용하면서 대중화되었다. 1760~1840년대로 잡기도 한다.

모든 역사가들이 근, 현대의 많은 성취와 문제가 이 산업 혁명을 계기로 시작되었다는 점에 동의한다. 현대인들이 생각할 수 있는 사회 제도의 거의 모든 것이 산업 혁명 시기에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 양적인 면에서도 엄청난 변화를 가져다주었는데, 15세기와 21세기를 비교하자면 인구는 5억에서 80억으로 늘었고 전 세계 총생산은 2,500억 달러에서 103조 달러로 불어났다.

백여 년에 걸쳐 일어난 사건인 만큼 전개 과정과 시기에 따라 다시 나눌 수 있는데, 18세기 후반~19세기 전반에 소비재와 경공업을 중심으로 일어난 변화는 1차 산업 혁명으로 분류되고, 19세기 중후반에 전기화학 등 중화학 공업이 시작된 것은 2차 산업 혁명으로 분류된다. 역사가들 사이에서 그 기준을 쉽게 합의하지 못하는 부분이기도 한데, 뚜렷하게 변화의 계기나 시작점을 찾을 수 있는 정치적 사건에 비해서 오랜 세월이 걸린 산업·경제 분야의 혁명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기준인 '18세기 영국에서 시작되었다'는 것도 증기기관 등 쉽게 구분할 수 있는 사건이 있기 때문에 편의적으로 나눈 것이라고 여기는 역사가들도 있다. 또한 후술하듯 16~17세기에 걸쳐 일어난 다양한 진보를 '조기 산업 혁명'이라고 부르는 구분도 존재한다.[1]

2. 배경

2.1. 사회적 배경

2.1.1. 식민지 개척과 시장 확보

대항해시대 중반인 17세기 무렵부터 잉글랜드는 북아메리카 진출과 동인도 회사 설립을 통한 인도, 동남아, 청나라 등 아시아와의 동방무역 활성화를 통해 착실히 경제발전을 이루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18세기가 되고 북아메리카, 아시아, 오세아니아태평양의 식민지 개척과 제국 운영도 어느정도 안정권에 들어섰는데, 당시 영국이 밀고 있던 산업은 모직 산업이었다.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의 특성을 갖춘 직물 산업은 노동 집약적이었고, 무역에도 적합해 넓은 잠재 시장[2]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일이 시작되려니까 인도에서 수출하는 저렴한 캘리코(Calico) 면직물이 영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영국의 모직물 산업에 위협이 되었다. 이에 영국은 이 인도산 면직물 수입을 금지시켜 다시 기회를 가지게 된다. 하지만 영국 내에서 모직물에 비해 값이 싸고 쓰기 편한 면직물에 대한 수요는 높아져 갔으며,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밀수 등을 통해 들어온 캘리코의 인기는 높았다. 즉, 일단 면직물 시장이라는 시장이 생기니, 수요를 억제할 수는 없었던 것. 이에 영국에서는 자체적으로 면직물 산업을 일으키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우선 1757년 플라시 전투의 승리를 통해 동인도회사가 인도 벵골 지방을 장악함으로써 원면을 마구 거둬들였고, 가격이 저렴해진 인도산 원면을 수입하여 랭커셔 지방을 중심으로 면직산업이 발전했다. 증기기관을 비롯한 기계 발달도 이 사건을 기반으로 한다.

또, 영국은 당시 이미 산업화의 포텐이 터질 만한 큰 경제규모를 가지고 있었고, 곧 산업화라는 새로운 기조에 대해 흥미로워하던 사업가들이 안정적인 투자를 이어가면서 꾸준히 성장할 수 있었으며, 게다가 그 성장의 수요도 담당할 수 있을 만큼 경제가 커지게 되었다. [3]

2.1.2. 정치적 안정과 근대적 정부 수립

튜더 왕조스튜어트 왕조로 이어지던 시절의 잉글랜드에서는 여러 분야에서 독점권을 얻은 수도 없이 많은 집단이 자원의 고른 분배를 방해하고 있었다. 이러한 독점권을 부여할 수 있는 왕실의 권한은 정부의 중요한 수입원이었고 왕을 추종하는 이들에게 배타적인 권리를 주기 위해 사용되기 일수였다. 신규 참여자의 진입을 막고 시장 기능을 저해하는 이런 착취적인 독점 제도는 시장경제 발전에 큰 해를 끼쳤고 의회에 몸담은 귀족 계층에도 적지 않은 손해를 입혔다.

독점이 얼마나 심했던지 1601년 잉글랜드 의회에서 한 의원이 독점 품목을 낭독하자 다른 의원이 "거기에 빵은 없소?"라며 비꼬는 일이 있기도 했다. 영국 역사가 크리스토퍼 힐(Christopher Hill)은 당시 잉글랜드 인민의 삶을 다음처럼 서술하면서 당시의 상황을 풍자했다.
누구나 독점 벽돌로 지은 집에 산다. 창문 역시 독점 유리로 만든다. 난방은 독점 무쇠로 만든 난로에 독점 석탄(아일랜드에서는 독점 땔감)을 태워 해결한다. 독점 비누로 몸을 씻고 독점 전분으로 옷에 풀을 먹인다. 독점 레이스, 독점 섬유, 독점 가죽, 독점 금실로 지은 옷을 입는다. 독점 혁대와 독점 단추, 독점 옷핀으로 옷을 여민다. 옷감 염색도 독점 염료로 한다. 독점 버터와 독점 포도, 독점 청어, 독점 연어, 독점 가재로 배를 채운다. 양념도 독점 소금, 독점 후추, 독점 식초를 사용한다. 글을 쓸 때도 독점 종이 위에 독점 펜을 사용한다. 독서를 할 때도(독점 촛불 아래 독점 안경을 쓰고) 독점 책을 읽는다.

이러한 경제적 환경 하에서는 산업 혁명의 맹아가 되는 기술적 혁신이 도저히 일어날 수 없었다. 예를 들어, 16세기 후반 잉글랜드의 윌리엄 리(William Lee)라는 성직자가 양말 짜는 편직기를 발명했지만, 엘리자베스 1세는 양말 제조업자 길드와의 이해관계 때문에 그의 특허 신청을 파기하면서 이 발명품이 얼마나 많은 실업자와 거지를 낳을 것인지 생각해보라며 되려 윌리엄 리를 꾸지람했다.

제임스 1세찰스 1세는 잉글랜드 왕실이 에스파냐와 프랑스에서처럼 절대적인 제도를 확립해 더 확실하게 경제를 틀어쥘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잉글랜드의 귀족과 지방 엘리트들은 다른 나라와 달리 일찌감치 형성된 의회를 이용해 왕권 남용을 견제할 수 있었다. 의회는 1623년 '왕도 국내 무역을 통제할 수 없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독점법을 통과시키는 성과를 거뒀다.

의회의 힘이 날로 강해지자 찰스 1세는 무력으로 의회를 억누르려 했다. 왕실과 의회의 첨예한 갈등은 군사적 갈등으로 이어진 끝에 잉글랜드 내전 혹은 청교도 혁명(Puritan Revolution)이라 불리는 일련의 대사건으로 이어지고 명예 혁명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그 뒤, 잉글랜드의 정치는 매우 안정되었다. 의회활동과 투표권이 법적으로 보장됐고, 의회 동의 없이는 국왕도 세금을 물릴 수 없게 됐다. 즉, 명예혁명 이후엔 의회가 경제제도를 결정하는 새로운 장이 되었다. 의회 귀족 중에는 무역과 산업에 막대한 투자를 하는 이들이 많았기 때문에 의회는 확고한 사유재산권 집행과 더불어 경제제도 및 정부 정책을 잇따라 개혁해 궁극적으로 산업 혁명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 결과 모든 면에서 정부의 기능과 역량이 '근대적인' 수준까지 환골탈태하게 된다. 예를 들면 소비세의 징세같은 부분이 그렇다. 소비세 제도는 대단히 정교한 장부 기록이 필요하기에 현대에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나라가 있을 정도이니 명예혁명 이후 잉글랜드 정부의 역량 강화는 정말로 놀라운 수준이었다. 직전 정부인 스튜어트 왕조는 고작 징세청부업자에게 하청을 주거나 '아궁이세', '창문세' 등 손쉽게 평가 가능한 품목에나 세금을 매기는 등 중세스러운 행태를 보인 것과 비교되는 모습이었다.

명예혁명 이후의 잉글랜드 정부는 전국에 소비세 조사원을 배치했고, 이들을 관장하는 징수 감독관은 빵과 맥주 등 소비세 부과 품목의 양을 측정하고 확인하는 정기 시찰에 나섰다. 세수가 늘어나자 정부는 국민소득의 10%에 달하는 공공지출을 감당할 수 있는 예산을 손에 넣게 되는데, 이는 콜롬비아가 1980년대에나 도달할 수 있는 규모였다.

금융 개혁 역시 단계적으로 이루어졌다. 1694년 업계에 자금줄이 되어줄 잉글랜드 은행(Bank of England)이 발족하면서 금융시장과 은행업이 크게 확대되는 '‘금융혁명'을 일으켰다. 18세기 초에 이르자 담보를 댈 수 있다면 누구나 대출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1702년에서 1724년까지 건재했던 런던 소재 C. 호어스 앤 컴퍼니(C. Hoare’s & Co.)라는 비교적 작은 은행의 기록만 살펴보아도 이런 상황을 잘 알 수 있다. 귀족에게도 돈을 빌려주긴 했지만 존립 기간에 이 은행에서 가장 큰 규모로 대출을 받은 고객 셋 중 둘은 사회 엘리트층이 아니었다. 오히려 상인과 사업가가 많았다.

프랑스, 에스파냐, 포르투갈 등 다른 서유럽 국가에도 기존과 다른 경제제도를 요구하는 새로운 상인과 사업가 계층은 존재했지만. 이들 나라에서는 무역과 이윤을 통제하는 국왕의 권한이 한층 강했으며, 잉글랜드에 비해 대단히 수가 적었고 힘도 미약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유럽 본토는 당장 프랑스 혁명나폴레옹 전쟁이란 다른 의미의 혁명의 한복판에 있었다.

2.1.3. 농업 혁명과 인클로저 운동

16세기부터 벨기에플랑드르 지방에서 중세시대의 농경법인 삼포제를 대체하는 4윤작법이 개발된다. 밭을 3분해서 3년마다 한 번씩 밭을 묵히는 삼포제와 달리 밭을 4분해서 보리, 클로버, , 순무 순으로 심는 농법으로, 클로버와 순무가 지력을 회복시키는 작용을 하며 동시에 사료로 사용되어 밭 중 일부를 사용할 수 없는 삼포제에 비해 훨씬 효율적이었다. 이 농법은 17세기 말부터 18세기 초, 찰스 타운센드 자작[4]이 노퍽 지방에서 강력하게 권장하기 시작하여 영국에 보급되며, 이 농업은 노퍽 농업이라고 불리게 된다.

전근대 사회에서는 인구가 증가하면 식량의 가격도 증가하여 인구 증가가 억제되지만(맬서스 트랩), 당시의 영국은 이렇게 급격한 농업생산력의 증가에 힘입어 인구가 1700년~1800년 사이 550만~900만으로 증가했다. 1830년 기준 브리튼섬의 곡물 생산량은 당시 인구의 2배가 소비할 분량에 해당했으며, 급속한 도시화로 늘어나는 식량 수요를 감당할 수 있게 해 주었다. 18세기 중반에는 곡물 생산량이 너무 늘어서 곡물가가 떨어지자 지주들이 곡물을 을 생산하는데 투입하는 바람에 알코올 중독자가 급증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윤작을 통해 연속경작이 가능하자, 농민들은 밭을 묵혀둘 동안 생계를 위해서 영주의 땅에서 부역을 한다거나 하는 일이 전혀 필요 없게 되었으므로 자신의 경작지에서 독립적으로 농사짓는 것을 더 선호하게 되었으며, 이는 장원 제도의 최종적인 붕괴를 가져왔다. 한편 대경작지를 가진 지주는 그 넓은 땅을 지주 본인이 직접 경영할 수 없게 되어 경영 전문가인 차지농에게 임대해주는 소작제도를 더 선호하게 된다.

이래저래 자기 토지를 가지려고자 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으므로 토지의 소유권을 명확히 확립하려는 움직임이 발생했다. 장원제 시절에는 농민들이 공동으로 쓰는 들이나 숲을 모든 사람이 이용할 수 있는 공유토지로 두었는데, 이런 땅들에 대해서 냉정하게 소유권을 확립하여 사유재산화 하는 인클로저 운동이 시작되었다. 분할된 공유지는 모직을 만들기 위해 목축지로 전용되는 경우도 있었으나 농경지로 개간되는 경우가 더 많았고, 공유지의 개간으로 경작지가 늘어나자 식량생산량이 증가하여 늘어나는 인구를 효과적으로 부양할 수 있었다.

농민층은 농업 혁명 초기에는 비슷한 경제규모를 가지고 균일화되었으나, 경작지의 생산성을 향상시켜 시장 경쟁에서 승리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부농과 빈농으로 나뉘었다. 그 사례 중 하나가 선택적 육종이다. 영국은 18세기에 이미 농업경진대회가 활성화되어 있어서 전국 각지의 농업인들이 경쟁적으로 우량 품종을 내놓았는데, 그 경쟁의 결과로 1700년에 평균 무게 170kg 이던 식육용 황소가 1786년에는 386kg으로 증가했다. 소뿐만 아니라 돼지, 닭, 양 등도 육종이 진행되었다. 우리가 지금까지도 아는 유명 품종 가축 중 상당수가 이때 나온 것. 영국이 가진 막대한 해외 시장 덕에 해외에서 다양한 품종의 가축을 수입해올 수 있었기 때문에 더욱 다양한 형질을 들여와 실험할 수 있었던 것에 힘입은 것이었다.

경쟁의 승자로서 자본주의적 차지농인 부농이 대두되고, 많은 수의 영세농민들이 이 부농과의 시장경쟁에서 밀려나 농작을 포기하고 농촌의 임금노동자가 되었다. 이 때문에 농촌에서는 많은 수의 노동자가 생겨났고, 이들은 부농에게 고용되거나 농촌의 상업이나 수공업에 종사하는 등 농촌 지역의 직업분화를 촉진했다. 종전에는 카를 마르크스 이래로 인클로저 운동으로 인해 농촌 지역의 인구가 도시로 쫓겨나는 이농 현상이 일어나 임노동자로 일하면서 도시에 풍부한 노동력을 공급했으며, 그 농민들은 도시의 발전을 이끌고 산업의 발전을 이끌었다.는 식의 도식과 설명이 주류였으나, 최근 연구에서는 그런 도식이 부정된다.[5][6]

농업생산성의 증가로 또 이득을 본 계층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농촌 지주 계층인 요먼젠트리 계층이다. 수완 좋은 몇몇 요먼들은 상품작물 재배 등으로 경영형 부농이 되어 젠트리로 승격하거나, 교육을 받아 군 장교, 고위성직자, 학자 등으로 출세하여 상류사회의 중심과 정계로 나아가며, 개중에는 올리버 크롬웰처럼 영국의 1인자 자리에까지 오르는 사람도 있었다. 젠트리 계층도 빈농으로 떨어진 농민들의 토지를 흡수하면서 의회에 진출했고, 마치 귀족같은 생활을 영위하며 사회의 지배층 세력으로 발돋움한다. 특히 1688년 명예혁명 이후 의회의 권한이 왕권보다 강력한 입헌군주정 시대에 이들의 영향력은 높아져만 갔다.

인클로저 운동은 또 다른 의미에서 영국의 산업 혁명에 기여한 것으로 현대에 재평가된다. 토지의 사유재산권이 법적, 제도적으로 보장되게 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아메리카 식민지 경영이 스페인과 전혀 다르게 진행되게 만들었다. 스페인령 식민지는 법적으로는 온 아메리카가 왕의 소유였고, 현지에서는 왕에게 권한을 부여받은 대지주 위주의 경제가 구성되었지만, 영국령 아메리카 13개 식민지는 토지를 소유한 자유민 위주의 경제가 형성되었다. 이것은 13주 식민지민들이 자신의 사유재산권에 대한 의식과 참정권에 대한 의식을 뚜렷히 가지게한 원인이기도 하다.

2.2. 자연적 배경

영국에는 풍부한 노천 탄광이 많았다. 상대적으로 적은 노력으로 쉽게 석탄 채굴이 가능한 환경은 산업 혁명에 있어 강력한 추진체가 되었다. 대부분의 공업도시는 풍부한 석탄 광산의 주변에 세워졌고, 1830년대에는 철도망이 발달하면서 이동 속도도 한층 가속화되었다.

다만 당시의 석탄이 목재보다 선호되는 연료였다는 것은 오해이다. 석탄은 발열량만큼은 우수하지만, 불완전연소 때문에 가스도 많이 생기고, 먼지가 묻고, 제련에 사용할 경우 황이 섞여 들어가 황화철이 포함된 질이 떨어지는 철이 만들어지는지라 가치가 떨어지는 자원이었다. 게다가 석탄은 나무와 달리 채굴을 해야 하므로 광업 기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옛날에는 벌목보다 고비용의 작업이었다. 한술 더 떠서 브리튼 섬의 지질적 특성상 갱도에 물이 고이는 경우가 많다보니 석탄을 계속 캐려면 그 물까지 퍼낼 방법이 필요했다.

한동안 석탄은 산지를 제외하면 런던에서나 쓰던 것인데, 영국이 해양제국 유지를 위해 수없이 배를 만들면서 국내의 목재를 싸그리 다 닦아 쓰고 노르웨이산 목재까지 수입해서 써야할 지경이 되자, 별 수 없이 석탄을 이용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갱도에 고인 물을 퍼낼 절박한 필요성이 생기자 비로소 증기기관이 발명되었고, 석탄의 불순물을 제거해야 할 문제가 생기자 코크스가 발명된 것으로 역사의 흐름을 이해하면 좋다.

영국이 섬나라인데다가 운하도 많이 건설되어 어디에서나 바다에 접근하기가 쉬웠다는 점도 다른 나라와 비교되는 장점이었다. 영국은 그다지 크지 않은 본토에서 강과 수로를 십분 활용하여 원자재를 도시까지 손쉽게 운송하고 완제품을 국내외 시장으로 훨씬 쉽게 내보낼 수 있었다. 반면에 프랑스와 스페인은 국토의 크기가 모두 브리튼 섬의 두 배나 되었으며, 모양도 정방형이라 영국에는 없는 깊은 내륙지방이 존재했다.

3. 전개

3.1. 기술 혁신

산업화 이전의 세계에서는 무엇을 하든 물리적인 노동력, 풍력, 또는 수력이 필요했다. 이러한 에너지원들은 마음대로 필요한 장소로 보낼 수 없기에, 접근이 가능한 지역에서만 자연이 뒷받침해주는 정도까지만 생산 작업이 가능했다. 이것은 인류 문명의 발전을 제약하는 큰 구속이었다.

원양 항해 기술은 원거리 운송 비용을 파격적으로 낮추었고 그 덕분에 유럽 제국들은 먼 곳까지 진출하는 '시늉'을 내기는 했지만, 여전히 손쉽게 운항 가능한 수로를 보유한 지역들 간의 경쟁이 중요했다. 세계의 변방 지역들 즉, 지구상의 대부분의 지역들은 여전히 개발되지 않은 미개척 지역으로 남아 있었다. 산업화 시대에 등장한 다음과 같은 기술들은 이런 상황을 완전히 뒤바꿀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기술적인 차원에서 산업 혁명은 강철이라는 새로운 소재의 활용, 석탄증기 기관 같은 새로운 동력원의 사용, 방적기방직기 같은 새로운 기계의 발명, 공장제라는 새로운 노동 분업 체계의 발전, 증기 기관차나 증기선과 같은 새로운 운송 및 통신수단의 발전 등 다양한 변화를 동반하며 진행되었다.

일반적으로 산업 혁명은 과학의 급속한 발전(과학혁명)을 원동력으로 이루어졌다고 알려져 있으나, 과학 기술은 산업 혁명의 도화선은 아니었다. 산업 혁명 초기부터 과학 이론이 산업 기술에 직접 응용된 사례는 다소 찾아보기 힘들다. 초기 산업 혁명에 기여한 기술. 예를 들면 플라잉 셔틀, 증기기관, 뮬 방적기, 코크스를 이용한 제철법, 압연법 등등은 전부 숙련된 기술공들의 작품이었다. 19세기 중후반 전기, 광학, 화학산업이 등장하기 전까지 대부분의 기술 진보는 과학자의 이론과 연구가 아닌 숙련공 발명가들의 경험과 시행 착오의 산물이었다.

또한 산업 혁명이 일어난 영국은 교육이나 과학에 있어 프랑스보다 다소 뒤쳐졌다. 프랑스는 파리 대학을 대표로 중세부터 이어진 학문의 전통이 존재했고, 프랑스 혁명 시대에도 나폴레옹이 파리 이공과 대학을 설립하고 아카데미를 운영하는 등 체계적인 학문의 발전과 절차가 있었으나, 잉글랜드의 대학이라곤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둘 뿐이었는데 둘 다 당시 유럽에서는 쳐주지도 않는 대학이어서, 좀 공부한다 하는 잉글랜드인들은 오히려 스코틀랜드로 가서 교육을 받았다. 일례로 증기기관을 설명하는 열역학이 프랑스인 카르노에 의해 시작됐다는 점, 근대 경제학의 시작인 애덤 스미스가 스코틀랜드 출신이라는 것이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근대 과학의 의의는 산업 혁명의 기술혁신 과정에서 나타난 발명품과 공학 기술을 이론적으로 설명하고 완성시킨 것에 있다. 그리고 산혁 과정에서 더 다양한 기계와 제품, 더 정교한 기술을 필요로 하는 물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이러한 과정에서 과학 기술은 학자들의 논문을 벗어나 산업・민간 분야에 널리 상용화되었다.

3.1.1. 면 방직업의 발전

영국의 산업을 변화시키는 첫걸음은 바로 면직물 공업에서 시작되었다.

1733년 존 케이가 직조기 '플라잉 셔틀(Flying shuttle, 나는 북)'을 발명하게 된다. 베틀의 북을 스프링을 이용해 자동화해서 한 번에 짤 수 있는 면포의 너비가 2배가량 늘어나고 속도 또한 훨씬 빨라지게 되었다.[7] 플라잉셔틀의 개발로 인한 생산성 혁신은 엄청났는데, 이전까지 양모, 실, 모직물 전부를 수출했던 영국은 이후로는 실과 양모를 수출하지 못하고 오히려 수입해서 모직물로 재가공한 다음 다시 수출하는 것으로 바뀌게 된다.

그러자 이번에는 천을 짜기 위한 실이 부족해진다. 그러자 제임스 하그리브스1767년, 한 번에 8개의 실을 자아낼 수 있는 제니 방적기[8][9]를 발명하게 된다. 그리고 리처드 아크라이트는 1768년에 동력으로 수차를 이용하는 수력 방적기를 발명하고 1769년에 특허를 받는다[10]. 또 새뮤얼 크롬프턴은 이 둘을 합친 뮬 방적기를 만들어낸다. 이 셋이 산업 혁명 출발기에 면직물 공업의 혁신을 일으킨 이들로 보통 회자되지만, 사실 토머스 하이즈, 폴, 와이아트 등 거의 알려지지 않은 발명가들도 같은 시대에 비슷한 물건을 발명했다. 특히 토머스 하이즈는 아크라이트가 자신의 발명품을 표절했다고 소송, 승소했다. 게다가 제니 방적기도 그가 만들었다는 설도 있으며 제니라는 이름도 그의 아내에게서 따온 이름이라고 여겨진다. 어쨌든 그 덕에 아크라이트의 특허가 무효가 되어 기계를 마음껏 공짜로 사용할 수 있게되어 전국 각지에 수많은 방직 공장이 설립된다. 참고로, 이 발명들이 있기 전 방적기는 한 번에 한 가닥의 실 밖에 잣지 못했고 수력이 아닌 인력 혹은 축력으로 가동되었다.

방적 산업이 급격히 성장하자 이번엔 또 직조 능력이 방적을 따라가지 못해 실이 남아 돌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1785년, 에드먼드 카트라이트가 동력으로 천을 짜는 방직기(직조기)인 역직기(力織機, power loom)를 발명, 이것을 수력 혹은 증기기관에 연결함으로서 직조 능력이 방적 능력을 따라잡는다. 여기에 1804년 프랑스의 자카드천공 카드를 연결해 패턴까지 넣어 천을 만들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방직 산업은 자동화의 길에 완전히 들어서서,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다. 이때 근대적인 공장이 처음 나오게 되며, 바로 이전까지만해도 공장은 주로 수차를 사용하여 강 주변에 많이 지어지는 경향이 있었으나 후에 제임스 와트가 개발한 증기기관의 보급으로 공장의 위치가 자유롭게 변하기 시작한다.

한편, 대량의 목화를 공급하던 미국 남부에서는 큰 골칫덩이로 목화와 씨를 분리하는 작업이 남아있었는데, 1793년 일라이 휘트니가 이를 빨리 분리시켜줄 수 있던 조면기(cotton gin)를 발명했으며 이 기계는 2마력의 수력으로 5,000파운드의 솜을 처리해 1,000명분의 일을 하게 만들어줬다. 그러나 정작 휘트니는 특허를 출원해놓고 소송에 휘말려 이익을 올리지 못하다가, 1798년 소총 제조업으로 업종을 전환하며, 소총 산업에서는 부품 호환식 생산법을 발명함으로써 또 다른 산업 혁명의 기초를 마련하게 되었다.

3.1.2. 증기기관과 교통의 발전

흔히 알고 있는 제임스 와트 이전에도 증기기관은 있었다. 1663년 에드워드 서머셋 우스터 후작이 개발한 인류 역사상 최초의 공업용 증기기관이 등장한다. 후작은 이걸로 광산채굴업을 하려고 했다. 영국은 지질 구조상 광산을 조금만 깊게 파도 물이 나와서 물을 지속적으로 퍼내야했기 때문. 하지만 그렇게 되기도 전에 사망한지라 무산되었고, 이후 1698년 토마스 세이버리라는 자가 우스터 후작의 증기기관을 개량한 광산채굴용 증기기관을 만들었다. 그리고 1712년경에 토마스 뉴커먼이 증기 기관을 더 개량한다.

하지만 이 초기의 증기기관들은 1마력시[11]의 힘을 내는 데에 석탄이 20kg가량 필요할 정도로 아주 효율이 낮았다. 수증기를 데워 실린더를 채운 다음 실린더에 찬 물을 끼얹어 실린더를 식히고, 다시 하염 없이 물이 끓기를 기다려 수증기를 데워 실린더를 채우는 원리였기 때문에 효율이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낮을 수 밖에 없다. 기관을 써서 채굴 효율이 개선된 만큼 석탄을 잡아먹은 것 아니냐는 말도 나오는 지경인데, 실제로 석탄이 비싸고 구하기 힘든 지역의 광산, 혹은 채굴되는 광물의 가치가 낮은 광산에서는 뉴커먼의 기관을 쓰면 오히려 적자가 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이런 뉴커먼 기관이 퍼진 것은 일단 영국이 사방에 석탄이 널려서 석탄값 걱정은 그닥 할 필요가 없는 나라였던 것이 제일 먼저이며, 둘째론 광산이 너무 깊게 파져서 사람 손으로 물을 도저히 빼낼 수 없는 상황이었으며, 셋째론 뉴커먼이 자신의 발명에 대해서 특허를 출원해야할 정도로 대단한 발명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특허를 내지 않은 덕이다. 뉴커먼은 자신의 발명을 토마스 세이버리를 베낀 것 정도로 간주했고, 세이버리의 특허가 1733년 만료되고 더 갱신되지 않아 증기기관의 특허는 사라진다.

뉴커먼 기관은 영국 광산 지역 곳곳에서 사용되기는 했으나 연료 비용이 너무 비싸다는 문제 때문에 광산주들에게 많은 고민거리를 안겨줬는데, 그러다가 마침내 1765년 스코틀랜드의 기계공학자 제임스 와트가 증기기관을 개량하는데, 와트의 기관은 1마력시의 힘을 내는데에 석탄이 600g 가량 필요할 정도로 효율을 크게 개선했고, 강가나 석탄 산지와 먼 곳에서도 가동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와트는 1774년 매튜 볼턴이라는 운명의 동반자를 만나게 된다. 사업가였던 그는 증기기관의 파워를 한눈에 알아봤고, 증기기관에 대해서 특허를 출원만하고 사업화하기에는 재정적으로 영 부족해서 슬슬 관심이 없어지던 와트에게 개량을 종용하고 볼턴앤와트라는 기업을 설립했다.

뉴커먼 기관까지는 석탄이 무지막지 싼 영국과 유럽 일부 지방 광산에서나 좀 쓰이는 정도였으나, 제임스 와트의 증기 기관은 사업화 궤도에 들자마자 전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인류의 역사를 바꿀 발명, 고통 받는 노예들을 해방시킬 위대한 발명이라는 칭송이 당대에 나왔을 정도. 산업 혁명기에는 위대한 발명을 하고서도 특허권 끝날 때까지 사람들이 사용을 안하거나 불법적으로 복제해가는 경우들 때문에 불우하게 산 발명가들이 부지기수였지만, 와트는 에딘버러 왕립 학회의 회원과 프랑스 국립 아카데미의 외국인 회원으로 초청받는 등 생전에 영광을 누렸다.

그 후 미국 발명가 로버트 풀턴은 이 회사에 증기기관을 주문했고, 이를 이용해 클레르몽(Clermont)[12]이란 증기선을 개발했고, 1807년 성공적으로 운행을 완료했다. 클레르몽은 후에 뉴욕 허드슨 강의 승객을 나르게 된다. 이 발전된 수상교통은 영국의 운하 체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운송비를 크게 절감시켰다.

한편 1769년에는 프랑스의 공병장교 니콜라스 조제프 퀴뇨가 개발한 세계 최초의 증기 자동차가 나오게 된다.

1804년 리처드 트레비식은 자신이 만든 증기 기관차 페니다렌호의 시운전에 성공했다. 그는 내기에도 이겨 몇천 파운드를 땄다. 그리고 이 일은 현존하는 4대 교통 수단 중 하나이자 육상 교통 수단의 양대 축 중 하나인 철도의 시발점이 되었다. 증기 기관차와 철도의 가능성을 예감한 영국의 기술자들은 트레비식의 것을 개량하기 시작했다. 조지 스티븐슨은 1825년 요크셔의 석탄광에서부터 스톡턴의 항구를 오가는 43 km짜리 세계 최초의 증기기관차가 달리는 화물철도를 깔았고 이 뉴스는 신속하게 영국 곳곳으로 전달되었다. 이것이 바로 스톡턴-달링턴 철도이다. 사업가들은 리버풀과 맨체스터를 레일로 연결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1830년에는 최초의 여객/화물 겸용 철도인 리버풀-맨체스터 간 철도가 개통되며 철도시대의 개막을 알렸다.[13]

철도는 국가기간시설이 될 뿐만 아니라 막대한 철의 수요를 창출해서 제철 사업 규모를 성장시키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정작 철도 사업 자체는 수익성이 높지 못했는데, 평균적으로 3.7% 정도의 수익률을 보였고, 중요 구간이라고 해도 너무 비싸면 차라리 다른 운송 수단을 택한 사람들 덕에 대부분의 구간은 적자만 겨우 면하거나 아예 적자가 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도 사업은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지 않았는데, 급증한 중산층이 수익성 있어보이는 투자처를 찾아서 적극적으로 투자를 했던 덕택이었다.

3.1.3. 제철 공업의 발전

영국은 15~17세기에 이미 해상 강국으로써 이름을 떨치고 있었고, 그 대가로 배를 만들기 위해 어마어마한 나무를 소모해서 16세기 즈음에는 전 브리튼 섬의 산림이 소실될 지경이었다. 덕분에 연료로 쓸 나무도 부족해져 다른 나라에서 나무를 수입해와야하는 수준에 이르렀다.[14]

17세기 말, 에이브러햄 다비 1세가 화학의 발전으로 영국에서 풍부했던 역청탄을 코크스로 정련하는 것이 가능해지자 이전까지 용광로에서 사용했던 연료인 숯을 대신해서 코크스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코크스는 심지어 숯에 비해 높은 온도로 오랫동안 연소했기에, 주철의 생산량을 급속도로 높일 수 있었다.

하지만 기존과 같은 고로(高爐)에서 생산되는 주철[15]탄소 함량이 지나치게 높아 유연성이 떨어져 쉽게 부서져, 강철 혹은 연철[16]의 생산을 위해서는 기존처럼 주철을 다시 망치로 두드리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러나 18세기 후반, 헨리 코트가 철과 연료가 분리된 용광로를 사용, 철을 완전히 녹임으로써 불순물을 분리하고 녹은 철을 산소에 노출시켜 탄소를 제거하는 기술인 교련법을 개발, 또 녹은 철을 판 형태로 가공하는 압연 기술을 개발해 연철 생산량이 급격하게 증가한다. 코크스와 새로운 제철기술은 영국의 철 생산량을 급격하게 증가시켜 이후 산업 혁명의 전개에 필요한 막대한 철을 공급할 수 있었으며 1788~1796년 사이에 영국의 철 생산량이 2배 증가했고, 이후 8년 동안 다시 2배 증가한다. 특히 1779년에는 영국 세번 강에 세계 최초의 철교가 건설됨으로써 영국의 제철 공업의 발전을 증명하는 이정표가 된다.

3.2. 산업의 성장

산업이 왕성히 성장했고, 이에 따라 공업과 상업의 중심지 도시도 성장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도시인구도 역시 성장하게 되는데, 도시거주민들은 스스로 식량을 생산하기보다는 구매하거나 공급받는 측이었고, 이들의 인구가 늘수록 농업부양인구가 늘어나면서 나폴레옹 전쟁 무렵 영국은 식량수출국에서 식량수입국이 되었고 식량 수입대금은 무역흑자로 축적된 무역수지로 지불하는 양상이었다. 그런데 점차 늘어나는 면화 수요량이나 수출대금으로 내야할 식량의 수입량에 비해서 면화 생산량이 지지부진하거나 감당못할 수준이 되자, 대서양 건너편의 미국에서는 1800년대에 대규모 면화 플랜테이션을 조성했다. 이곳의 노동자는 아프리카 노예였다.

거기에 때마침 아메리카에서 기존의 수작업 대비 50배의 효율을 지닌 조면기가 발명되어 퍼진터라 아메리카의 면화 플랜테이션에서는 대량의 면화를 값싸게 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아프리카의 노예 → 영국이 수입 → 아메리카 면화 플랜트에 노예 공급 → 아메리카 면화 플랜트들이 노예들이 생산한 값싼 면화를 영국으로 공급 → 생산된 면직물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에 수출하는 삼각무역이 완성되었다. [17]

특히, 영국에 의해 면직물 산업이 일찌감찌 붕괴하고 만 인도에 대한 수출이 엄청나게 활발해 20년 만에 수출 규모는 10배 증가했으며 면직 산업에 이어 철강 산업이 활기를 띄면서 워털루 전투 이후, 영국 주도의 철도 건설이 시작되어 영국의 호황은 절정에 이른다.

3.3. 노동 계급 탄생

인클로저 운동의 결과 농지들이 지주나 차지농들에 의해 통합되어 가기 시작했다. 애초에 여타 국가들은 상속시에 토지를 자손의 수에 맞게 분배해 주다 땅크기가 점점 줄어 들었으나 영국은 장자 상속제를 이어오고 있었으므로 대규모 농지를 가진 농장주들이 많이 남아 있었던 것도 대토지소유에 한몫했다. 대토지소유자들의 대두로 그들과의 시장경쟁에서 도태된 농민들이 등장하면서 농민층은 부농과 빈농으로 나뉘었고 빈농으로 전락한 농민들은 자기 땅의 경작을 포기하고 차지농인(Yeoman)밑에서 임금을 받고 일을 하게 되면서 노동자 계급(프롤레타리아)이 탄생했다.

도시에서는 일찍이 도제제도가 상공업을 기반으로 하여 근로계약이 정립되었다.

3.3.1. 노동자들의 고통

파일:DSrbZEQWsAAT-O_.jpg 파일:DSrbZD2X0AAs16I.jpg
산업 혁명 당시 런던의 노동자들을 위한 숙소. 왼쪽의 그나마 편한 관 모양의 숙소[18]는 4페니였고, 그조차 낼 수 없는 이들은 더욱 열악한 오른쪽의 1페니짜리 숙소에서 의자에 앉아 로프에 기댄 채 자야 했다.

이 초기 산업 혁명은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가장 문제시되었던 것은 가혹한 노동 환경이다. 위에서 서술되었듯 기계가 노동력을 대체하는 데 비해, 당시 영아 사망률이 조금씩 줄어감에 따라 인구는 매년 급속히 증가하기 시작했고 거기에 더해 인구가 늘고 도시화가 가속화되면서 노동 공급은 급속하게 증가했다. 이로써 부르주아들이 일방적으로 노동자들을 손쉽게 착취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면서 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환경에 시달려야 했다.

당시에는 노동자들의 참정권이 없었고 자유주의적 정책 기조로 정부와 의회는 부르주아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에만 바빠 관련 법 제정이 미비했기에, 제대로 된 근로시간도 정해지지 않아 많은 노동자들이 과로에 시달렸다. 특히 노약자 계층에서의 노동이 크게 늘어났는데, 어린이들도 만 7세부터 면직 산업에 동원되어 학대를 받으며 일하다 요절하는 경우도 많았다.

일각에서는 가혹한 노동조건은 전근대 농촌 사회로부터 이어졌고, 그 근거로는 전통 사회에서는 막 걸음걸이를 뗄 만한 어린 나이부터 일에 동원되는 것이 다반사였고, 16시간에 달하는 가혹한 노동 시간도, 전근대 사회에서 해 뜰 때 일어나서 해 질 때까지 일하는게 당연했던 점이 이어졌다는 것을 든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봤을때 산업 혁명기의 노동환경은 그 이전 농경시대 노동환경에 비교해봐도, 엄청나게 퇴보했다고 보는게 맞다. 퇴보의 정도가 "전근대 농촌사회로부터 이어졌다." 라는 한 문장으로 퉁 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물론 그 이전 농경시대에도 아동노동이 있었고, 노동 시간에 대한 것도 명확히 정해진 바 없이 해 뜨면 일하고 해 지면 쉬는 수준이었다는건 맞다. 그러나 이걸 빌미로 마치 그 이전 시대에도 산업 혁명기의 열악한 수준의 노동환경이 당연했고 그게 산업 혁명기까지 이어졌다는 뉘앙스로 읽히게끔 서술하는건 그냥 교묘한 왜곡성 서술이다. 그 이전 농경시대에는 각 지역사회마다 관습법이 존재해서 산업 혁명 초기 수준으로 아동을 미친듯이 굴리고, 성인이 하루 16시간씩 일하는 미친 짓이 당연하게 성행하진 않았다. 아동은커녕 청소년조차도 통계적으로 어른에 비해 더 적은 노동을 했을 정도였다. 긴 말 할 것 없이 그 이전시대와 비교해보았을 때 노동 시간이 30% 증가해서 연평균 노동시간이 1,100시간 늘어난 시대다. 자세한건 "노동조건 개선" 문단에서 후술.

임금은 후대에 보면야 최소한의 생활 수준만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은 낮은 수준으로 보이지만, 바로 이전의 농촌 사회와 비교했을 때는 매우 높은 수준이었다. 초기 직물 공장은 여성 성인 노동자가 대다수였는데, 남성 직물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일하길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초기 공장들은 남성 수준의 임금을 제시해서 여성 노동자들을 끌어들였는데, 이 시대 런던의 남성 노동자들의 임금은 북프랑스에 비해서 2배, 밀라노와 비교해서 4배에 달했다. 산업화가 시작되지 못한 유럽 타 지역에 비해서 거의 4배에 달하는 임금을 받은 것. 식량 유통을 기준으로 가늠해도 비슷한 결과가 나오는데, 이 시대 영국은 타 지역에서 일방적으로 식량을 빨아들였고 런던은 그 영국에서도 식량을 빨아들이는 위치였기 때문이다. 즉, 당시 기준으론 그 공장 노동자들의 구매력과 임금이 영국 및 유럽의 타 지역 사람들보다는 확실하게 높았다는 것이다. 당대 런던 노동자들의 임금이 먹고 살 여력이 없을 정도로 낮은 수준이었다면 런던의 인구성장이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급여가 그렇다는 것이지, 사회변화상을 살펴보면 그리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또한 산업 혁명 시기에는 기존의 관습법이 사라진 시기여서 더욱 큰 문제가 일어났다. 기존에는 관습법으로 인해 노동자들에게 최소한의 하한선이 존재했지만, 관습법이 무시되면서 평균적인 노동자들의 삶은 관습법이 정해주었던 하한선보다 더욱 낮은 삶을 살게 된 것이다. 또한 어린이 노동 같은 경우에도, 농촌과 같은 시간을 일했다고는 하지만 농촌의 경우 모든 사람이 오랜시간동안 면식이 있던 사이다 보니 위아래간 서로 간의 편의를 봐주는등의 여유가 있었지만, 공장에서는 사방에서 온 사람들이 모인 만큼 이런 편의가 거의 없었고, 공장의 노동 강도는 당시 농촌의 노동 강도보다 훨씬 심했다.

1810년대에 러다이트 운동으로 열악한 노동조건에 대한 항의가 전국적으로 번져나가기 시작했고, 당시 영국 정부에서 이를 탄압했지만 더이상 늘어나는 노동자들의 요구를 아예 안 받아들일 수는 없었기 때문에 이를 무마하는 차원에서 규제하는 법률은 1833년에 제정되었으나,[19][20] 이후 30~40년에 걸쳐 지속되었다.[21]

파일:external/www.socialstudieshelp.com/child_in_mines.gif

미성년 노동자들은 탄광이나 공장에서 하루에 1시간도 쉬지 못하고, 매일 10시간씩 건강을 해쳐 가면서 일을 해야 했다. 일을 하다 다치거나 쓰러지면 과정은 상관없이 무조건 본인 과실 취급이었고 급여 또한 제대로 받지 못하는 사실상 노예노동이었다. 심하면 탄광에서 주 6일 동안 하루 12시간을 일하는 경우도 있었다. 다른 산업 혁명을 겪은 유럽 국가들도 마찬가지여서 19세기 후반 유럽 노동자들이 저 힘든 중노동을 주당 평균 50~60시간 했어야 했다.

1760~1830년대 1인당 GDP의 성장률은 상당히 느렸기에[22] 실제 경제성장은 상당히 미진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 경제학에 따르면 임금은 대체로 노동의 한계생산만큼[23] 증가하기 마련인데, 이 노동의 한계생산은 노동에 들어가는 자본이 많을수록 올라간다. 1760~1830년대 영국의 자본투자는 나폴레옹 전쟁이나 주식투자 규제 등으로 상당히 미진한 상태였고 따라서 근로자들의 임금이 별로 높지는 않았다고 한다. 즉 임금이 적기 때문에 저런 중노동을 통해서만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돈을 벌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유럽권의 산업 혁명뿐 아니라 사실 각국의 산업화/근대화에선 독재정권, 권위주의 체제하에서 이런 노동자의 고통이 거의 예외 없이 동반되었다. 소련의 스탈린 개발독재는 워낙 유명하며, 아시아에서도 일본의 메이지 유신, 한국의 제3공화국, 중국의 덩샤오핑 집권기 등으로 근대화가 진행될 때는 국민들은 항상 힘들었다. 유럽의 근대화에서도 사람들이 고통받고 죽어나갔고, 일본은 근대화와 경제발전 시기에 환경오염과 산업재해가 빈번히 일어나서 미나마타병, 이타이이타이병 같은 질병이 만연했고 한국의 경우에도 한강과 낙동강 등 주요 하천이 오염되면서 그냥 먹을 수 없는 수준이 되었고 정부와 기업이 수출 제일주의라는 구호 아래에서 노동 착취를 방조하면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연간 3,000시간 이상의 중노동에 시달려야 했다.[24] 이는 현재 중국, 인도, 동남아에서도 반복되고 있는 문제점으로 스모그 현상 등 환경 문제도 이런 성장제일주의의 결과물이라는 지적이 많다. 그나마 한국/일본/대만은 이러한 산업 혁명의 피를 바탕으로 선진국으로 도약했고, 단순노동 대신 수출주도산업 체제로 성공적으로 올라가서 이제 이런 극악한 산업노동 문제에서 벗어났으나 그 외의 아시아 국가들은 여전히 이러한 시기를 기약없이 계속 겪고 있다. 올리버 트위스트플랜더스의 개가 산업 혁명 당시의 유럽의 사회상을 반영한 소설이었고, 카를 마르크스가 왜 떴는지 알 만한 시대였다는 것이다. 동시대 인물인 허버트 조지 웰즈가 SF 소설인 타임머신(소설)에서 '엘로이'와 '몰록'의 설정을 각각 지배층과 하층 노동 계급의 후손으로 설정한 것도 여기에서 기인한다. 그 처참한 격차 수준을 볼 때, 이 상태가 계속 지속된다면 언젠가는 같은 인류라고 보기도 힘들 지경이 될 수 있다는 우려는 전혀 무리가 아니었을 정도였다.

다행히도 19세기 중반에 들자 사회주의 이념이 형성되어 일부 지식인과 정치인, 그리고 소수의 공상적 사회주의 성향의 자본가들[25]이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복지제도와 사회보험제도들을 도입하고 규제를 시작하면서 최소한 사람이 생존할 수 있는 꼬락서니는 갖추기 시작했다. 이 상태로 계속 놔둔다면 건강이 나빠져서 조기사망은 물론이고 극단적 양극화로 인해 노동자들의 구매력이 없어져 생산물을 구매할 수요자층도 줄어 공멸할 것이기 때문이며, 심지어는 공멸 그 이상도 할 수 있다는 것이 러시아 혁명으로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표적으로 12세 이하의 아이는 몇 시간 이상 노동 금지 같은 규제를 시작했는데, 당시 시장경제 자유주의자들은 "아이들의 일할 권리와 자유를 빼앗지 말라!"는 논리로 이에 반대했다. [26][27]

3.3.2. 노동 조건 개선

일단 1차 산업 혁명기는 임금은 유지 혹은 약간 상승이지만 노동시간은 30% 이상 증가해서 뜨악한 시대가 맞다. 대략 노동시간이 연 2,400시간 평균에서 3,500시간 평균으로 산업 혁명 기간에 노동 시간이 늘어났다는 게 통설이다. 얼마나 늘었는지에 관해 그 레퍼런스는 당시 재판기록을 이용한 추정으로서 최근에 이루어졌는데 범죄는 아무 때나 일어나므로 범죄 발생일과 그 전날 용의자와 증인의 기상 출근 식사 퇴근 취침 등의 행적으로 노동시간을 유추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성인 남성의 노동시간은 대폭 증가했다. 1750년 런던에서 연간 2,631시간, 1800년 3,538시간, 1760년 잉글랜드에서 2,576시간, 1800년 3,328시간, 1830년 3,356시간. 그렇다면 노동생산성 증가 추계는 하향 조정돼야 할 것이다. 여가를 고려할 때 생활수준은 그만큼 낮아졌다. 산업노동 공급은 양적이라기보다는 질적인 문제,즉 노동의 본질적 변화라는 면을 봐야 한다. 주 6일제 50주 근로라고 대충 땡치면 11.5시간 정도가 나온다.

허나 이런 상황은 19세기의 2차 산업 혁명기를 거치며 대부분 나라에서 자연스럽게 완화된다. 이유는 크게 3가지를 꼽을 수 있다.
또한 같은 시기에 도시의 인프라가 개선되며 인구를 수용할 여력을 갖춘 것 또한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전례없는 인구 증가 및 이촌향도로 인해 도시가 노동자 인구를 감당을 못한 것이 노동자들에게 자본가들의 착취 못지 않은 고통 요소였는데[28] 주택 공급과 상하수도, 교통망, 교육 시설 등이 뒤늦게나마 정비되며 생활수준 향상에 크게 기여한 것이다. 또한 같은 시기 축구, 야구 등의 스포츠 인프라와 휴가, 위락 시설이 정비되며 영국을 비롯한 각국에서 노동계급의 특색을 이루는 특유의 문화가 크게 꽃피었다.

4. 왜 영국인가

파일:영국 산업 혁명.png
영국의 산업 혁명 전파
파일:유럽의 산업 혁명 전파.jpg
유럽의 산업 혁명 전파
파일:세계의 산업 혁명 전파.png
전 세계적인 산업 혁명 전파
산업 혁명이 자생적으로 일어난 나라는 영국 뿐이다. 유럽이나 아메리카는 영국의 산업 혁명의 영향을 받아 그것을 국가주도로 벤치마킹하면서 퍼지게 된 것이며, 자생적인 산업 혁명의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영국과 가장 유사한 인적/제도적/자본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평가받는 네덜란드 저지대도 자생적으로 산업화에 도달하지 못하고 영국에서 산업화를 들여와야 했으며, 이 때문에 산업화는 서유럽 문명의 요소들을 기반으로 영국만의 특수성이 겹쳐져서 일어났던 아주 우연했던 사건이라는 견해가 우세하다.[29]

산업화를 적극적으로 모방하고 금방 성공해냈던 서유럽, 미국과 달리, 머나먼 동아시아나 남아시아, 서아시아, 아프리카 등은 산업 혁명을 모방할 의지를 보이지도 않거나, 아니면 모방하기도 전에 식민지로 전락해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터키, 태국, 중국처럼 가까스로 산업화를 시도한 국가조차도 내/외부적인 요인으로 실패했다. 비서구 국가 중에서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 성공적으로 산업화에 진입한 나라는 일본 제국(현재 일본)이 유일하며, 서유럽 국가들과는 달리 모방에 아주 긴 시간이 걸렸다.

영국은 어떻게 자생적인 산업 혁명을 이루어낼 수 있었을까? 영국의 성공은 대항해시대에 세웠던 해양 제국과 연관되어 있었다.
  1. 첫째로 산업화의 사업성을 맞추기 위해서는 막대하게 생산될 직물을 구매해 줄 수 있는 규모의 내수 시장 경제가 돌아가야 했다. 아무도 사줄 사람이 없는데 방직 공장을 세우고 돌릴 사업가는 없다. 이를 가능케 하려면 충분한 크기의 도시와 도시민의 수가 필요했다. 왜냐면 당시의 농민들은 식량이 먹다가 남으면 팔고, 공업품은 가내수공업으로 만들어서 충족하는 삶을 수천년 동안 영위해왔기 때문에 산업화의 전제 조건인 시장 경제에서는 소외되어 있었기 때문이다.[30][31] 산업화 이전에 이러한 도시민의 수를 늘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어디선가 도시민을 위한 식량을 공급해오는 것 뿐이었는데, 영국은 이를 해외 식민지와 국제 무역을 통해 증대시킨 상업 자본을 통해 이루어냈다. 영국은 이러한 밑작업을 통해 프랑스 북부의 2배, 서유럽 평균의 6배가 넘는 1인당 소득 수준을 이루어냈다. 영국을 제외한 다른 유럽 국가들은 산업 혁명을 맞이하기 위한 소득의 임계점을 돌파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2. 그러나 영국과 비슷한 수준의 소득을 이미 달성했던 네덜란드에서는 정작 산업 혁명이 일어나지 못했다. 상술한 막대한 석탄 매장량과 증기기관의 발명이라는 영국만의 '우연적' 요인이 공장의 운영 비용을 낮추어 산업 혁명을 촉발한 것이다.[32]
  3. 최소한의 채산성을 맞추어 산업 혁명이 발생하는데 성공하면 그 뒤로는 자유시장적 경쟁으로 인해 생산지 주민들이 다 소비하지 못할 만큼 폭발적으로 상품 생산량이 증가하는 공급 오버슈팅이 발생한다. 만약 이 타이밍에 생산량을 모두 받아내 줄 추가적인 시장을 구하지 못하게 되면 수요가 공급을 따라 잡지 못하는 제품 가격이 폭락하고 시장이 와해될지도 모른다.[33] 그러나 당시 영국은 해양 강국이었고 세계 전역에 펼쳐져 있는 방대한 군사적, 상업적 제국을 통치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영국은 남아도는 생산품을 대영제국의 식민지들을 포함해서 물길로 닿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대량으로 팔아 치울 수 있었다. 따라서 영국의 해외 식민지들은 산업 혁명 이전에는 식량과 상품을 해외에서 수탈하는 원료 공급처였다가, 나중에는 영국에서 만든 상품을 강매하는 판매 시장으로 성격이 변하게 된다.
대영제국의 태양은 절대로 저물지 않는다는 말은 일견 위대해 보이지만, 사실 대항해시대의 기술 수준으로 지구 전역에 펼쳐져 있는 물류와 공급 체계를 제국 전체의 15퍼센트에 불과한 인구로 관리하는 것은 영국 정부에겐 위태로운 일이었다. 그런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쌓아 올릴 수 없는 소득 수준이 있어야만 비로소 산업 혁명이 일어났다는 것은 산업 혁명이라는 사건이 얼마나 우연적인 일인지를 다시 한번 상기시켜 준다.

영국은 산업 혁명으로 제국을 관리하는데 필요한 행정적 비용을 손쉽게 회수했고, 그러고도 남아도는 재정으로 해군력을 더욱 증강하고 산업 발전에 더욱 박차를 가하는 선순환 구조를 돌릴 수 있었다. 19세기의 산업 혁명 덕분에 영국의 우월적 지위는 한층 더 신장되어 명실상부한 최강국으로 등극했다. 이는 스페인이 16세기에 원양 항해 기술로 한동안 유럽의 패권 경쟁에서 월등한 우위를 누렸던 것과 같다.

그리고 원양 항해 기술이 스페인에서 시작되어 최종적으로 그 기술을 보다 잘 활용할 수 있는 영국에서 꽃을 피운 것 처럼, 산업화도 같은 길을 걸었다. 19세기 후반이 되자 독일의 산업화가 부상하여 경쟁력 측면에서 영국을 넘어서게 되며, 영국은 적기조례 등의 삽질을 하면서 스스로의 발등에 도끼질을 하게 된다.

4.1. 경제적 동인

일단 중국을 보면 14세기 왕정농서에 이미 축력,수력으로 돌아가는 방적기가 있다. 또 북송 때 이미 35,000톤의 원광과 42,000톤의 석탄이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18세기 산업 혁명기의 영국과 비등한 수준이다.[34][35] 심지어 아편 전쟁 이후 중국에 많은 영국산 기계제 면포가 들어왔으나 중국에서 손수 생산된 토포에 밀렸다. 당시 청나라 시대 농촌은 과잉인구 때문에 농업뿐 아니라 가내수공업도 겸했는데, 여기서 나오는 면직물의 양이 어마어마해서 오히려 영국산 기계제 면포를 압도한 것이다. 당시 청나라의 연간 면포 생산량이 6억 필 정도. 그리고 영국이 이 물량을 따라잡는 데 약 20년이 걸렸다. 이렇게 중국의 경우와 비교했을 때 일반적인 설명은 중국은 인력 공급이 너무 많아서 기술적 혁신이 일어날 동인이 없었다는 것이 보통. 막말로 사람을 쓰는 게 비용이 더 싸서 기계를 안 만들었다는 것이다. 반면 유럽 지역은 전반적으로 동아시아에 비해서 임금이 높았는데, 특히 영국은 서유럽 지방에서 두 번째로 도시 임노동자 임금이 비쌌던 프랑스 북부에 비해서도 2배 가까이나 임금이 높았다. 이탈리아 밀라노와 비교하면 런던의 임노동자 임금은 4배에 달했다. 영국이 전세계 곳곳에 만든 식민지를 유지하기 위해 해군과 육군으로 수많은 인구를 징집해갔기 때문에 인구 유출이 심했기 때문. 그래서 위에 서술했듯 광산의 물을 퍼내는 펌프가 적자가 날 지경으로 비싸도 임노동비보다 싸다는 이유로 증기기관을 사용했고, 그것은 제임스 와트에 의해 개량된다.

도시 생산물과 농업 생산물의 상대 가치를 통한 설명도 존재한다. 마르크스가 영국의 산업 혁명을 설명한 도식 이래로, 일반적인 통념으로는 <농업 생산물이 증가하고 인구가 증가한다 → 잉여 인구는 도시로 몰려 도시의 공업 생산물이 증가한다 → 반복>의 과정을 거쳐 국가의 경제력이 증가하고 산업 혁명에 도달한다. 하지만 명/청대 중국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그게 마르크스 말처럼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관찰됐다. 증가한 농촌 인구가 도시로 몰려 도시 노동자가 되는 과정은 존재했으나, 도시 노동자 수가 많아지면 임금이 내려가고 공업 생산물이 많아져 공업 생산물 가치는 내려가는 반면, 농업 생산물의 가치는 상대적으로 올라가 도시민들의 삶의 질이 하락한다. 그렇게 되면 도시가 다시 해체되고 경제가 침체된다. 중국사에서 정권이 붕괴될 때 반란을 주도하는 민중들은 저런 과정에서 생긴 잉여인력이라는 점도 확인됐다. 덤으로, 마르크스가 위 도식을 설명할 때 예로 든 인클로저 운동도 실제론 농촌 인구가 도시로 몰려들게 하진 못했다는 것도 최근의 중론이다. 즉 멜서스 트랩은 생각 이상으로 빠져나오기 힘든 함정인 것이다. 이 역시 인구론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설명이 된다.

이 인구론적 문제는 서구가 천연자원 및 식량 자원을 수입해올 막대한 해외 시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극복할 수 있었다. 영국은 당시 아메리카와 유럽과 아시아를 아우르는 막대한 시장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업 생산물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하락하는 과정이나, 식량가가 상대적으로 폭등하는 함정에 빠지지 않고 안정적으로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단순히 도식화하면, 중국과 달리 영국은 면포를 비싸게 쳐주는 먼 곳 아메리카나 아프리카에 팔 수 있었고, 식량 역시 싸게 사올 수 있었는데 중국은 자국 내에서만 유통되다 보니 경제 순환의 함정에 빠졌다는 것이다.

4.2. 포용적이고 다원주의적인 정치 풍토

산업 혁명이 유독 잉글랜드에서 싹이 틀 수 있었던 것은 독보적이라 할 만큼 포용적인 경제제도 덕분이었다. 포용적 경제 제도는 창조적 파괴가 소득과 부 그리고 정치권력을 재분배하는 것을 허용하면서 기술 혁신을 촉진시킨다.

창조적 파괴를 허용하지 않는 비포용적 경제 제도가 어떻게 기술 발전을 저해하는지는 독일의 일례를 보면 알 수 있다. 독일 마르부르크대학의 수학교수였던 디오니시우스 파팽(Dionysius Papin)은 1705년 세계 최초의 증기선을 만들었고 풀다 강에서 베저 강까지 배를 운행하려 했다. 당시 풀다와 베저 강의 운항은 뱃사공 길드의 독점사업이었기에, 그는 말썽을 예방하기 위해서 친구이자 스승인 독일의 유명한 물리학자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를 통해 카셀 선제후에게 파팽이 "방해받지 않고 통과할 수 있어야"한다고 청원서를 먼저 제출했지만 기각당했다.

파팽은 이에 굴하지 않고 운항을 감행하기로 했다. 그의 증기선이 뮌덴에 도착하자 뱃사공 길드는 먼저 현지 판사에게 배를 압류해달라고 성화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뱃사공들은 파팽의 배에 올라가 난동을 부렸고 증기기관을 산산조각 냈다. 파팽은 빈털터리로 생을 마감했으며 이름 없는 묘지에 묻혔다. 만약 파팽이 명예혁명 이후의 잉글랜드에 살았다면 사정이 사뭇 달랐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파팽은 배가 부서지지 않았다면 자신의 증기선을 타고 런던으로 항해하려던 참이었다.

반면 잉글랜드의 신흥 공장주와 중산층은 파뱅처럼 높으신 분들의 선처만을 기다리지 않고 정부 정책에 반기를 드는 것이 가능했다. 정부는 1819년에 '곡물법 폐지', '보통선거권', '투표용지 사용' 등의 현수막을 든 6만명의 노동자를 탄압해 사상자를 내는 일도 벌였지만(피털루 학살), 이미 정치와 경제 제도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난 터라 잉글랜드에서 장기적인 탄압은 해법이 될 수 없었다. 이후 잉글랜드의 정치제도는 압력에 굴복하여 1차 선거법 개정안을 받아들이게 되며, 집중적인 증오를 사던 곡물법도 결국 1846년 폐지하면서 창조적 파괴가 단순히 소득만이 아닌 정치권력마저 재분배한다는 사실을 여실히 증명했다.

반면에 거의 동시대인 1830년, 프랑스의 샤를 10세프랑스 대혁명으로 무너진 절대왕정을 복고하려다 또다시 나라를 7월 혁명 혁명에 휘말리게 하는 등 정치적 상황이 안정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다.

이렇든 타국과 다른 잉글랜드의 포용적인 경제제도는 명예혁명이 가져다준 다원주의적 정치제도의 기반 위에 마련된 것이다. 명예혁명은 사유재산권을 합리적으로 강화하고, 금융시장을 개선했으며, 해외무역에서 정부가 허용한 독점을 와해시키고 산업 확장을 가로막는 진입 장벽을 제거해주었다. 경제적 필요성과 사회의 열망에 한층 더 민감한 개방적인 정치체제를 만들어준 것도 명예혁명이었다.

명예혁명 이후 잉글랜드의 국민들은 이제 의회는 물론 의회가 만든 정책과 경제제도에도 접근할 수 있었다. 가장 효과적으로 입김을 행사하는 방법은 '청원'을 통하는 것이었는데, 당시의 영국 의회와 정치제도는 투표권의 제한과 부패 선거구의 존재 등으로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었기에 투표보다는 청원이 더욱 효과적이었다. 투표와 달리 청원은 누구든지 의회에 제기할 수 있었기에 실제로 청원자가 밀려들었다. 인민이 청원하면 의회가 귀를 기울였다는 사실은 1688년 이후 잉글랜드에서 절대왕정이 무너지고, 대단히 폭넓은 사회계층까지 권한이 확대되었으며, 다원주의가 확산되었다는 사실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증거일 것이다. 이처럼 대단히 치열했던 청원 활동만 봐도 단순히 의원들이나 그들이 대변하는 이들에 국한되지 않고 훨씬 폭넓은 사회집단이 정부의 운영 방식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절대왕정이 무너졌다고 해서 어디서나 무조건 다원적인 정치 체계가 들어서는 것이 아니며, 세계적으로는 다른 형태의 착취적 제도가 재수립되는 것이 일반적이다.[36] 다원적인 정치 체계가 태동하는데 필요한 여러 차례의 고비를 영국만이 넘길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산업 혁명의 요인들와 마찬가지로) 영국만의 특수성과 우연이라 할 수 있다.

스튜어드 왕조의 군주제를 지지하는 세력과 절대왕정에 반대하는 세력 간의 갈등에서 힘의 균형을 흔들어놓은 요인을 꼽자면 농업을 주 수입원으로 하는 하급 귀족 계층인 젠트리의 등장, 아메리카 대륙 발견에 따른 무역 기회의 확대, 해외무역 및 식민지 경제 발달 과정에서 잉글랜드 신흥 상인 세력의 대규모 참여, 그에 따른 막대한 부의 축적 등으로 요약될 수 있는데 이는 하나같이 영국만이 가진 특수한 상황이다. 이러한 연합세력의 범위가 넓고 성격이 다양했기에 다원주의적 정치제도가 태동할 수 있었다. 어떤 식으로든 다원주의가 뿌리내리지 않으면 다양한 이해관계를 가진 집단 중 하나가 나머지를 물리치고 권력을 찬탈할 위험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4.3. 재산권의 발달

개인의 권리 인정과 보호, 주식채권금융업의 발달, 자연과학의 학문으로서의 독립(과학혁명)과 체계화, 특허권 같은 지적 재산권 인정 등 사상의 발전 등도 중요한 요인으로 꼽히는데, 아시아는 이 점이 매우 미비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유럽은 중세부터 도시 및 농촌이 자치적으로 재판관을 뽑아 판결을 내릴 수 있는 권리[37]가 마련되었다. 중세 유럽의 도시 규모는 잘해야 10만을 좀 넘어서 동시대 중국, 아랍의 대도시보다 작아보이지만, 군사적/정치적 목적을 위해 도시의 규모가 거대해진 타 문명과 달리 유럽의 도시는 상업의 발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서 규모는 작아도 그 수가 매우 많았다. 이런 자치도시들은 상업적 이유로 설립되었다보니 상업적 권리의 충돌에 관한 판결이 매우 중요했다. 때문에 공증회사, 길드 등 경제적 권익 보호를 위한 제도와 조직이 특히 발전했다.

동아시아의 중국 관료제와 비교하면, 동아시아는 개인과 개인간의 충돌을 다루는 민법의 발전 자체가 매우 미약했다. 더 정확히는 죄를 지은 사람을 처벌하는 형법만 극히 발전해있고, 관료들이 주된 관심을 가지는 재판도 거의 형사 재판이었다. 유럽에서는 10세기부터 발달한 공증제도 조차 중국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것은 상업거래에 있어 매우 중요한 신용 자체가 공적으로 보증되지 못했다는 뜻이다. 뿐만 아니라 지방 행정에 하위 관료가 따로 존재하지 않고, 중앙에서 달랑 하나 파견한 관료가 혼자서 사법,행정,군사를 전부 도맡아하다보니[38] 만성적으로 업무가 지체되어 있었다. 더군다나 청조에는 앙쯔강 하류에 상업 발전으로 자체적으로 발달한 중소도시가 무수히 들어섰으나, 행정구역으로 새로 개편하지 않아 현실을 반영하지 못해 관료 파견조차 안 되는 경우[39]가 허다했다. 또한 유교 특유의 상업 멸시 때문에, 중국 명청 시대에 상인들의 기록을 보면 큰 재산을 가져 관료와 결탁한게 아닌 이상 제도적으로 보호받을 수 없다는 것을 당연시 하고 있다. 일례로 대운하에서 부두 노동자들이 물건을 빼돌리거나 사기를 치거나 태업하는 등 잦은 문제를 일으켜도 관료들은 아무 대응조차 해주지 못했다고 한다.

또한 영국네덜란드의 권력의 견제 역시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멀리 갈 것 없이 유럽에서조차, 왕에게 권력이 집중된 절대왕정 때문에 경제적으로 파토가 나거나 상인들의 재산권이 침해되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 프랑스, 스페인, 독일 등에서는 징세청부업자에게 온 나라의 수조권을 맡겼다가 왕이 파산을 겪는 것은 흔한 일이었고, 왕이 돈을 떼먹어서 은행이 망하는 건 흔한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상업 자본 발전에 핵심적인 신용이 발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영국은 의회의 견제로 인해 왕이 징세권을 남발할 수 없었고, 네덜란드 공화국에서는 오라녜 공작이 간섭할 수 없는 은행이 설립되었다. 영국 의회는 조세 법정 주의의 뿌리가 되었고, 네덜란드 은행은 네덜란드를 유럽 금융의 중심으로 올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특히 특허 제도는 산업 혁명 뿐 아니라 군사 분야에서 일찍이 유럽과 다른 지역과의 격차를 벌리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다. 전근대에는 혁신이나 발명이 사회 전체의 노력으로 여겨졌지 개인의 성과로 여겨지지 않아, 혁신과 발명에 대해서 개인의 이윤이 거의 남지 않았기 때문에, 무언가 혁신을 일으킨 개인이 나타났다면 타인보다 앞서기 위해 그 혁신을 비밀로 하는 것이 중요했다. 아니면 도제식으로 소수의 제자들에게만 자신의 비법을 전수하던가. 레벤후크의 현미경, 갈릴레이의 망원경, 티코 브라헤의 천문 관측 자료 등도 그들이 죽을 때까지 타인에게 공개하지 않아 유실될뻔했다. 이렇게 기술 중 많은 것이 기술의 개발자가 비결을 죽을때까지 숨기는 바람에 유실되었는데, 영국은 특허 제도 덕분에 발명가들이 자신의 이득을 보전할 수 있다고 여겨서 그 비법을 국가를 통해 공개했고 많은 기술이 보전될 수 있었다. 특히 국가를 통해 공개한 것은 국가가 망하지 않는 한 원본이 보전될 수 있단 점에서 자연적인 전파 이상으로 혁신에 기여했다.

다만, 실제로는 특허 제도는 '발명가의 이윤과 권리를 보장한다'는 이상을 별로 잘 실현하지는 못했다. 상기했듯 사람들이 특허를 어떻게든 우회하거나 표절하고, 심지어 새 발명품 때문에 자기들이 망했다고 발명가를 습격해서 발명가가 쫄딱 망하는 일이 부지기수였으나,[40] 어쨌건 발명가들에겐 보호 받는다는 느낌을 줬고 그 덕에 기술이 유실되지 않고 공개된 것은 사회 전체의 혁신에 크게 기여했다. 그 외에도 초기 산혁 시대는 전화기 같이 역사적인 발명을 하고도 그 권리를 제대로 보장받지 못한 사례가 여럿 발생했다. 반대로 토머스 에디슨은 남의 발명 특허를 온갖 꼼수를 써서 뺏는데에 이골이 난 사업가였다.

그러나 발명가의 권리가 보호받는 느낌이 전부는 절대 아니였다. 맥심 기관총을 만든 맥심은 돈방석에 앉았고,[41] 심지어 미국이 스프링필드 M1903.30-06 스프링필드 탄을 적국인 독일의 게베어 18987.92×57mm 마우저 탄의 스핏저형 총알[42]을 만들면서 배꼈다고 전후 특허료를 보상하기도 했다. 또한 수많은 특허자료를 통해 현대시대까지 발명가의 이름이 정확히 남아있는 등 특허법은 분명히 작동하고 있었다. 위에서 말한 전화기의 케이스도 발명가가 권리를 제대로 보장받지 못했을지언정 누가 언제 어떻게 발명을 했는지 정확히 재구할 수 있는 것은 특허 제도의 공로며, 1차 산업 혁명을 이끈 것은 과학자 보다 발명가들이라는 것이 현재의 평가이다.
"특허 성문법" 제정 년도를 보면 왕권 몰락 및 개인 인권(소유권) 보장의 변화를 볼 수 있다.[43]
* 1624 영국 전매조례
* 1790 미국 특허법 제정 (83미국독립, 87헌법제정)
* 1791 프랑스 왕국 특허법 (프랑스 혁명 91헌법,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 1877 독일 제국 특허법 (제국 초기, 오토 폰 비스마르크 입헌군주제)
* 1883 파리조약 체결 (국가간 특허 우선권 인정)
* 1756 영국산업박람회
* 1798 프랑스 국영 산업박람회 (엑스포)
* 1851 런던엑스포 (수정궁)
* 1937 파리 엑스포 (에펠탑)

5. 결과 및 의의

계속적인 발명과 기술혁신은 종전의 농업적인 사회와는 전혀 다른 산업사회를 출현시키고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가능하게 했다. 이전의 어느 시대보다 비약적으로 발전한 생산력이 인류에게 풍요를 가져다주고, 빈곤을 극복할 수 있는 수단과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산업 혁명 이전에는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 식량과 재화의 생산량은 산술급수적으로 늘어났으므로 인구가 늘어날수록 재화의 가격이 상승하여 인구증가를 억제했다. 이것에 대한 이론이 바로 맬서스 트랩이다. 그러나 산업 혁명 후 인구와 함께 물자의 생산력도 기하급수적으로 늘게 되면서 인구가 같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며, 최종적으로는 2차 산업 혁명의 초입에 독일의 프리츠 하버질소 정제 방법을 발견하여 공기로 비료를 만들 수 있게 됨으로써 인구 증가를 억제하는 마지막 고삐가 풀리게 되었다.

산업 혁명 이전에는 아무리 발전된 사회라도 무제한적인 풍요를 누리지는 못했지만 이후에는 빼곡한 상점마다 물건이 가득 쌓여 소비자를 기다리며, 과잉생산으로 인해 가격이 폭락하여 생산비용보다 아래로 떨어지고 가격조정을 위해 일부러 물건을 폐기하는 사건이 시시때때로 일어나는, 인류 역사상 겪은바 없는 풍요를 누리고 있다. 산업 혁명 이전 풍년은 역사적으로 식량이 풍부해지는 행운이었으나, 산업 혁명 이후로는 공급량 조절을 위해 식량을 폐기처분해야하는 모순까지 나타나고 있다. 기업이나 국가는 과잉 생산된 물건을 판매하기 위해 마케팅 활동을 하거나 새로운 시장 수요를 개척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이러한 시장 수요 창출의 노력이 국가적 규모로, 그것도 부정적인 면모로 나타난 것이 바로 해외 식민지 설립이다. 바로 아래에서 설명하는 산업 혁명으로 인한 제국주의의 대두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도 나타나는 것이었다.

전 세계에 자본주의의 열풍을 불러 일으킨 이 사건은 귀족과 평민, 지주와 농민이 아닌 산업자본가와 노동자 계급으로의 계급 전환을 불러 일으켰다. 공장의 출현으로 수공업자들이 밥그릇을 잃게 되었고 굶어죽지 않기 위해 공장노동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인구의 도시 집중현상과, 노동 계급의 대두는 노동 계급의 권리 신장을 위한 투쟁 및 사회주의 운동을 일으켰고, 카를 마르크스를 필두로 해 공산주의가 생겨나는 등 정치체제에도 변화를 일으키게 되었다.

앞서도 얘기했듯 산업 혁명은 본격적인 제국주의 시대를 불러왔다. 18세기 산업 혁명으로 인해 서양이 비서양을 압도하는 경제력을 가지게 됐다는 것은 거의 모든 역사가들이 동의하는 사안이다. 산업 혁명을 거쳐 기계화된 문물을 갖춘 서양의 군대는 산업화되지 않은 군대에 비해, 그야말로 밸런스 붕괴 수준의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이전까지 유럽의 여러 열강은 대항해시대부터 성장한 우수한 군사력을 이용해 다수의 식민지를 갖추고 이미 최강의 국력을 자랑하고 있었지만, 멀리 떨어진 다른 문명권에 대해 주도권을 갖고 우위에 설 수는 있어도[44][45][46] 일방적으로 정복할 정도는 아니었다. 특히 분열된 유럽에 비해 비서구 제국들은 통일된 시스템을 유지하여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질적인 열세를 양적 우위로 보상할 수 있었지만[47], 나중엔 인구빨로도 극복이 안 될 정도로 질적 격차가 벌어지자 결국 유럽 국가들의 각축장으로 전락했다. 유럽은 다른 모든 문명권을 제압했음은 물론이고 아프리카 밀림부터 시베리아의 원시림에 남태평양의 작은 섬들까지 정복하고 심지어 북극과 남극까지 깃발을 꽂아 말 그대로 지구 전체를 정복했다.

기존의 비유럽 제국들은 유럽 열강들에게 야만족으로 멸시되었으며, 유럽에게 정복된 수많은 문명들은 생존과 독립을 위해 자신들의 체계를 서유럽 기준으로 근대화했다. 20세기 중반 이후 제국주의가 해체되어 식민지들은 독립했으나, 여전히 '어느 정도 서구의 기준(민주주의, 자본주의, 인권 수준)에 맞춘 나라가 되느냐' 가 곧 국가의 선진성으로 판단된다. 산업 혁명은 그 탄생으로부터 불과 200여 년만에 서구문명을 바탕으로 세계 인류의 보편문명을 만드는데 성공한 것이다.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세계 여러 나라에서도 영국을 본떠 농업 → 산업 중심의 경제라는 테크 트리를 타게 되는데, 근대화의 차례가 늦을수록 상인계급의 주체적 위치는 줄어들고 국가의 선제적 역할이 강해지는 현상이 발생했다. 예컨대 프로이센과 일본에서는 국가권력이 직접 육성할 산업의 업종을 지정해서 신속하고 계획적으로 산업화를 추진해야 했다. 한국도 자생적인 상인 계급의 성장이 없었기에 개발독재를 통해 정부가 재벌마다 사업 부문을 나눠주는 방식으로 근대화가 이루어지게 된다.

6. 관련 문서



[1] 경제사는 상대적으로 잘 정리된 사료가 적고 서술 단위도 거시적인 점도 통설 성립이 어렵게 하는 한 원인이다. 원래 정치외교사나 법제사는 다른 분야보다 사료가 풍부한데, 이는 국가 등 권위있는 주체가 공식기록을 남기고, 하나하나 굵직한 사건들이어서 분석하기 용이하다. 근대 역사학이 탄생했을 때도 연구분야는 정치사에 집중되어 있었다. 반면 경제는 수많은 개인의 빠르고 역동적인 물질생활과 경제활동이 쌓여서 이루어지는데, 그 과정에서 나오는 사료들도 어디까지나 상거래 증빙 등 일상적 용도에서 만들어지는 것이지 후대에 전하려고 만든 것이 아니어서 담긴 정보도 한정적이다. 따라서 경제사를 연구할 때는 1차 사료에 대한 창의적 분석으로 개별자에서 드러나지 않는 총체적 구조까지 파악해야 한다. 이는 문화사 등 여타 분야도 마찬가지며, 여기서 파생한 다양한 접근법은 다시 정치외교사에도 영향을 주어서, 현대 사학자들은 외교관 한 개인이 남긴 사소한 쪽지까지도 샅샅이 찾아 분석하고 있다.[2] 라틴 아메리카 및 인도 등의 영국 식민지.[3] 이 당시에 영국명예혁명 이래 정치사회가 안정되었고, 상공업이 발달했으며, 넓은 해외시장을 확보했고, 천연자원도 풍부했으며 인클로저 운동으로 풍부한 노동력이 확보되었었다.[4] 순무 재배를 너무 열심히 권장한 나머지 '순무 타운센드'라는 별명이 생길 지경이었다고 한다.[5] 이런 이농 현상은 정작 영국이 아닌 한국과 일본 등 후발 산업국가에서 두드러졌다[6] 인구자료를 살펴보니 실제로 인구이동이 거의 벌어지지 않았고, 도시의 노동자들은 주로 도시출신이나 도시에 인접한 지역출신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관한 연구는 송병건, <영국 근대화의 재구성>, 해남, 2008 에서 소개하고 있다.[7] 참고로 이걸 발명한 존 케이는 방직공들이 자기들 일자리를 없애버렸다고 습격해 이리저리 도망다니는 신세가 돼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후대에 재평가되어 지금은 그의 고향에 그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물이 있다.[8] 딸 혹은 아내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어 이름은 Spinning Jenny[9] 그런데 하그리브스의 아내의 이름도 제니가 아니었고 여러 명의 딸들 중 제니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제니는 엔진(engine)의 줄임말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10] 이 사람도 방적공들에게 자신들의 일자리가 없어졌다고 공장이 습격을 당했다.[11] 1시간 동안 1마력[12] 로버트 풀턴이 해당 증기선을 최초로 시험한 프랑스 북부의 강의 이름이다. 정식 명칭은 북부 강 증기선(North River Steamboat)이었으나 해당 강을 끼고 있는 도시의 이름인 클레르몽이라는 이름이 더 유명해져 그렇게 불린다.[13] 기묘한 우연으로, 두 도시는 100년보다 조금 더 지난 20세기 후반에 거의 동시에 몰락했지만 아직도 영국에서 손꼽히는 대도시다.[14] 당시부터 수입하던 질 좋은 노르웨이산 목재와 그걸로 만든 가구인 Norwegian Wood가 유명하여 비틀즈 노래에도 있다.[15] = 선철. 탄소 함량이 2.5~4% 인 철.[16] 탄소 함량이 0.01% 이하인 철. 유연성이 높아 무르고 잘 부서지 않는다.[17] 우연인지 증기기관을 개량한 제임스 와트 역시 노예무역에서 나온 자본의 지원을 받았다.[18] 구세군이 운영한 곳인데, 가격과 모양 그대로 '4 penny coffin(4페니짜리 관짝)'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19] 그나마도 최저 연령이 9세로 늘어나고 노동시간을 제한한 정도지만 점점 나아지기는 했다.[20] 영국의 뒤를 이어 유럽 각국에서 아동노동을 규제하는 법률들이 성립되었는데 개중에서 독일의 프로이센은 그 입안 과정이 특이했다. 프로이센의 아동노동금지법은 프로이센 육군 참모총장이 국왕에게 건의해서 제정된 것이다. 참모총장 왈, "폐하, 제발 아동노동을 금지해 주십시오. 애들이 어렸을 때부터 하도 부려먹히다 보니 자라지를 못해 징집을 해도 애들 몸에 맞는 군복도 없고 총도 못 가눠서 픽픽 쓰러집니다!"[21] 이와 같은 현상은 과거 우리나라에서도 있었고 180년이 지난 현재에조차 개발도상국에서 흔하게 벌어지고 있다.[22] 1830년 이전에는 1인당 성장률은 고작 0.3%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반면 1830년 이후 1차대전까지는 1%씩 성장했고, 2차대전 후에는 2%씩 성장했다.[23] 물론 자본가의 지대추구나 효율임금, 노동시장구조 등에 따른 여러 변수가 있다.[24] 실제로 일본과 한국에서 미대륙으로 이민을 간 사람이 많았던 시기가 산업화 시기와 겹치기도 하다.[25] 사실 노동자 권리 보장에 적극적이던 자본가 중에는 공상적 사회주의자 말고 보수주의 성향이 강한 이들도 있었다. 특히 기독교 민주주의 성향과 같이 산업화 이전의 공동체 윤리와 관습법을 이상적으로 여긴 이들은 기업가는 장원의 영주나 집안의 가장처럼 행동하며 노동자들을 보살펴야 한다고 여기며 노동자 복지를 보수적인 관점에서 도입했다. 경제적 자유주의는 보수, 문화적 자유주의와 사회자유주의는 진보라는 세계대전 이후의 통념 하에서는 이상해 보일 수 있으나 자유주의 진영 내에서 사회자유주의 발달이 미진했고 보수주의 역시 자유보수주의, 경제적 자유주의보다는 기민주의나 반동주의, 왕정복고 등에 가까운 스펙트럼을 가졌던 19세기 당시에는 사회주의와 보수주의가 비록 사고관이 달라 서로 갈등할 지더라도 자유주의자들의 개인화와 친부르주아 스탠스에 맞서 공동체를 중시한다는 목표는 의외로 공유하는 경우도 많았다.[26] 진지하게 분석하자면 일종의 문화 지체로 볼 수 있는데, 아동 및 청소년 보호 및 노동 금지를 당연시하는 도덕관 자체가 산업 혁명으로 이루어진 사회 변화의 영향이기 때문이다. 산업 혁명 이전 시대에는 앞 문단에 전술되었듯 아동 노동이 당연시되었고 그랬기에 사회 혼란 등의 폐혜를 직접 겪기 전까지는 특히 고통을 직접 겪기 힘든 엘리트층을 중심으로 기업 활동의 자유 영역으로 보는 관점도 강력했던 것이다. 물론 자신들의 이득을 위한 부르주아들의 입김 역시 있었고. 아이들이 행복한 유년기를 보낼 권리와 자유라는 개념 자체가 일종의 산업 혁명 시대 유산이다.[27] 산업이 고도화 되고 아래 숙련공 문단에서도 나왔듯이 자본가 입장에서도 아이들에게 일을 시키느니 그들이 교육을 받게 해서 나중에 숙련공으로 고용하는게 더 효율이 좋아졌기 때문이다.[28] 이는 산업화 후발주자들과 현대 개발도상국 대도시에서도 흔히 드러나는 현상이다.[29] 단 '산업 혁명은 우연한 사건이다'를 "서구는 운빨로 산업 혁명을 일으켰을 뿐이고 다른 데서 일어났을 수도 있다!" 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오히려 정반대로, 영국의 직물산업의 발전과 동시에 증기기관이 발명되는 '우연'이 없었으면 인류는 기술이 발전해도 그 이상의 인구 증가로 인해 절대적 가난이 반복되는 비참한 생활 수준이 영원히 지속되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는 뜻이다. 또 다르게 말하면, '전인류사적으로 보편적이고 필연적으로 산업 혁명으로 수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는 의미, 즉 필연의 반대 의미로써 우연인 것이다. 일단 어디가 됐든 그런 우연한 일이 벌어졌다면 실제 역사가 그랬듯 전세계로 퍼지기는 했을 것이다.[30] 그나마 선대제수공업 등의 제도 때문에 영국의 농민들은 다른 나라의 농민보다는 시장경제와 깊은 연관을 가진 편이었다.[31] 안 좋게 말하면 초기 산업화의 성과로 혜택을 본 것은 도시민들 뿐이라는 비판도 있을 수 있다.[32] 역사학에서의 우연이란 (우리 일상언어에 비추어 본다면) 엄밀하게는 개연에 가깝다. 즉, 구조적 원인 속에서 언제든 일어날만한 상황이었다는 정도로 이해해야 한다. 자세한 것은 마르크 블로크의 『역사를 위한 변명』에서 언급되는 "알프스에서의 실족사" 예시를 참고하는 것을 권장.[33] 참고로 20세기 대공황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는 현상이다.[34] 하지만 단순히 양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데, 그 양을 어떻게 썼느냐가 다르기 때문이다. 산업 혁명기 영국은 증기기관이라는 혁신적인 동력원의 연료로 사용한 반면, 북송의 석탄은 땔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참고로 한반도도 신라 시대에 석탄을 연료로 썼다는 기록이 있다.[35] 게다가 양적으로 봐도 사실 영국이 앞선다. 상술했지만 영국의 제철산업이 산업화의 궤도에 든 것은 18세기 말로, 영국이 중국과 비슷한 제철 기술(도가니법, 반사로법)을 개발하여 산업화 궤도에 들기 시작한 1810년 영국의 연간 철강 생산량은 25만톤으로 추정된다. 즉 35,000톤 가지고 영국이랑 비교한건 제대로 산업화 되기 이전 영국의 생산량에 비교한 것이다.[36] 이는 잉글랜드 스스로도 예외가 아니라서 마그나 카르타와 같은 확약을 얻어내고도 그 후로도 몇백년간 절대왕정을 겪어야만 했다.[37] 흔히 도시들만 그런 특권이 부여된 것처럼 말해지지만,이런 '자유도시' 즉 Burgo Franco 에서 Burgo 는 원래 고대 게르만어로는 읍락이라는 뜻이며, 성벽을 두르지 않고 수백 명 정도가 사는 규모의 작은 마을들도 아우르는 말이었으며, 14세기까지도 90% 이상의 자유도시가 인구 1천조차 넘지 못했다.[38] 정말 혼자 한 건 아니고, 보통 수백~수천의 아전들이 있었으나 아전은 공식적인 지방행정조직이 아니었다. 관료들은 중앙에서 내리는 박봉과 자체적으로 거둔 세금으로 아전들의 급료를 어떻게든 줘야했기 때문에 부패의 원인이 됐다.[39] 이런 상업 중소도시를 '진'이라고 하는데, 지방관료들은 진의 행정을 지방 유력 지식층인 신사에게 대강 일임했고 중앙에서 파견한 환관이 상세를 거두는 식의 느슨한 행정만 이뤄졌다. 치안의 공백이 커 일종의 마피아인 무뢰들이 장악한 경우가 허다해 사회 문제가 되었다.[40] 항목 내에서 언급된 발명가들 외에도, 퍼커션 캡과 같은 사례를 보면, 특허를 보장해야 할 국가에서 특허료 아끼겠다고 만료될 때까지 존버를 시전하는 모습을 보였다.[41] 맥심 기관총의 탄띠 특허를 우회하기 위해 보탄판이 발명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사실과 다르다. 자세한 것은 문서 참고.[42] 스핏저형 총알 자체는 프랑스에서 8×50mmR 르벨 탄에 적용한 것이 최초다.[43] 재미있는 것은 지적저작권의 시초가 왕권에 의한 미술작품 표절금지 였다는 점이다.[44] 상대주의 사관에 따른 동양 재평가 과정에서 나온 학설들 때문에 산업 혁명 이전 유럽이 동양보다 뒤떨어졌다는 오해가 많지만, 이미 산업 혁명 이전에 유럽의 육군과 해군은 타 문명권의 군대를 압도적인 교환비로 제압할 수 있었다. 15세기에 이미 서구 문명이 중동, 인도, 중국 등보다 군사적, 기술적, 제도적, 자본적으로 질적 우위에 섰다는 것이 보수적 서양 역사가들의 주장이다.[45] 관련 출처 Civilization: The West and the Rest, Niall Ferguson. 참고로 니얼 퍼거슨은 제국주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학자다.[46] 관련 출처 2 Why the West Rules—For Now, Ian Morris[47] 산업 혁명 이전에 유럽이 지구 반대편에 투사할 수 있는 군사력은 수백 남짓이었다. 예를 들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단 몇 척의 함선만으로 인도네시아의 함대를 전멸시킬 수 있었고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몇십 명의 용병대로 동남아를 휩쓸고 다닐 수 있었으나 가용 인력 문제로 정복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18세기 영국 동인도회사는 인도에 수천의 병력을 투입하여 수만의 현지 병력을 쓸어버릴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