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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알 마드리드 CF/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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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창단3. 1900년대4. 1910년대5. 1920년대6. 1930년대7.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1943~1978)
7.1. 1940년대7.2. 저승사자 군단7.3. Yé-yé 마드리드7.4. 1970년대
8. 루이스 데 카를로스 (1978~1985)9. 라몬 멘도사 (1985~1995)
9.1. 독수리 오 형제9.2. 1990년대 초반
10. 로렌소 산스 (1995~2000)11. 플로렌티노 페레스 1기 (2000~2006)
11.1. 갈락티코스 1기11.2. 무너진 갈락티코스 1기
11.2.1. 문제점
12. 라몬 칼데론 (2006~2009)
12.1. 2006-07 시즌12.2. 2007-08 시즌12.3. 2008-09 시즌
13. 플로렌티노 페레스 2기 (2009~ )

[clearfix]

1. 개요

원년인 1902년부터 현재까지 이어져 오는 레알 마드리드 CF의 역사를 정리한 문서다.

레알 마드리드는 현재 이견이 없는 축구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클럽으로 자타공인 인정받고 있으며, 1950년대부터 현재까지 세계 최고의 클럽임을 리그와 챔스 우승을 비롯하여 꾸준히 증명하고 있다.[1] 이처럼 세계 최고의 축구 클럽 레알 마드리드는 세계 최고의 근본과 세계 최고의 커리어를 필두로 현재도 클럽의 위상을 계속해서 높이는 중이다.

레알 마드리드의 대표적인 황금기는 보통 1950년대 후반~1960년대 초반[2], 1960년대 중후반[3], 1980년대 후반[4],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5], 2010년대 중후반[6]으로 구분된다. 특히 Yé-yé 마드리드 시대의 도래 이후에는 레알 마드리드 소속의 자국 출신 선수가 대표 팀의 아이콘으로 군림하는 전통이 확립됐다.[7]

2. 창단

1897년, 케임브리지 대학교옥스퍼드 대학교의 졸업생들이 포함된 '인스티투시온 리브레 데 엔세냔사'의 학생들이 '스카이 풋볼'이라는 축구 클럽을 설립하면서 레알 마드리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다 1900년 구성원들 간의 갈등으로 인해 '뉴 풋볼 데 마드리드'와 '클루브 에스파뇰 데 마드리드'로 분리된다. 이 중 클루브 에스파뇰 데 마드리드는 1902년에 '소시에다드 마드리드 FC'로 개편되는데 3월 6일 초대 이사회가 선출되었다.[8] 그리고 회비는 한 달에 2 페세타로 정해졌고, 유니폼 색깔은 후안 파드로스가 여행 중 만난 영국 팀 '코린치안'을 따라 흰색으로 정해졌다.

3. 1900년대

개칭 후 초대 회장인 후안 파드로스와 2대 회장인 카를로스 파드로스 시기 레알은 알폰소 13세와 당시 마드리드 시장인 알베르토 아길레라에게 알폰소 13세에 경의를 표하는 대회를 만들 것을 제안했고,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1902년 코파 데 라 코로나시온[9]에 참가했다. 이때 4강에서 역사상 첫 엘 클라시코가 펼쳐졌는데, 우도 스테인베르그와 조안 감페르에게 실점하며 1-3으로 패했다.

그리고 첫 코파 델 레이[10]인 1903 시즌에는 RCD 에스파뇰을 꺾고 결승에 진출했고 아틀레틱 클루브를 만났는데, 전반에 2-0으로 앞서다가 후반에만 내리 3골을 헌납하며 2-3 역전패를 거뒀고, 초대 챔피언 자리를 빌바오에 내주며 이후 120년간 지속될 두 팀의 라이벌리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구단 두번째 시즌인 1903-04 시즌, 마드리드 FC의 주요 선수들이 아틀레틱 클루브 수쿠르살 데 마드리드로 이적하면서 구단이 생존의 기로에 서게 되었고, 모데르노 FC와 합병을 추진하게 되었다. 모데르노와 합병하면서 모데르노가 가지고 있던 1903년 캄페오나토 레히오날 센트로 우승이 레알의 우승 기록으로 편입되었다.

이후 1904-05 시즌에 코파 델 레이 결승에 진출해 빌바오를 1-0으로 꺾으며 첫 우승을 기록한 이후 1905-06 시즌에는 다시 빌바오를 4-1로 이기며 우승을 차지했다. 이어 1906-07 시즌에 클루브 비스카야, 1907-08 시즌에 스포르팅 데 비고를 꺾으며 코파 델 레이 4연패를 달성하며 스페인 최고의 클럽 중 하나로 부상했다.

4. 1910년대

그리고 1909-10 시즌이 되면서 레알 마드리드 역사상 첫 골의 주인공이자 첫 주장인 아서 존슨이 레알의 첫 번째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레히오날 센트로 4연패 이후 4년 동안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고, 1909-10 시즌에는 코파 델 레이 3위, 1912-13 시즌에는 4강에서 탈락하며 디펜딩 챔피언의 위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1911-12 시즌에는 레히오날 센트로가 미개최되면서 친선 경기만을 치르게 되었다.

그리고 1912년 10월 31일, 에스타디오 데 오도넬이 완공되면서 레알이 드디어 첫 홈구장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1915-16 시즌부터 3시즌 연속으로 코파 델 레이 결승에 진출했는데, 첫 시즌에는 아틀레틱 클루브에게 0-4로 대패하며 준우승을 거뒀고 두 번째인 1916-17 시즌에는 아레나스를 재경기 끝에 2-1로 승리하며 우승을 차지했다. 1917-18 시즌에는 레알 우니온에 0-2로 패배하며 3시즌 동안 1번의 우승에 그쳤다.

5. 1920년대

1920년부터 지금의 레알 마드리드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엠블럼에 왕실의 상징인 왕관을 달았다. 이는 스페인 국왕 알폰소 13세로부터 '레알'이라는 칭호를 수여받은 것이다.[12] 그리고 그 해 아서 존슨 감독이 물러나고 레알의 선수 출신인 후안 데 카르세르가 새 감독으로 취임했다.

1920년대에는 레알이 10년간 7회 우승을 차지할 정도로 레히오날 센트로에서 독주하면서 코파 델 레이에도 자주 출전했는데 성과는 좋지 않았다. 8강, 4강, 8강에서 번번히 무너지다가 1923-24 시즌에 6년 만에 결승에 진출했으나 레알 우니온에게 다시 패배하면서 준우승에 머물렀다. 이후 1925-26 시즌에 다시 8강에서 여정을 마무리했고, 결국 후안 데 카르세르 감독이 물러났다.

후안 데 카르세르 감독 이후 페드로 요렌테가 임시 감독을 맡다가, 산티아고 베르나베우가 감독을 맡았으나 1년 만에 다시 스페인 감독 출신 호세 베라온도로 감독이 교체되었다. 그리고 1929년, 전국 리그인 라리가가 출범하자 코파 델 레이 우승 경력이 있던 6팀[13]에 포함되어 첫 시즌부터 라리가에 참가했다. 그리고 이 시즌 최종전 직전까지 선두였지만 최종전에서 빌바오에 패배해 초대 우승팀 자리를 '숙명의 라이벌' FC 바르셀로나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코파 델 레이에서도 결승에서 RCD 에스파뇰에게 1-2로 패배하면서 2개 대회 준우승을 거뒀고 베라온도 감독은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했다.

6. 1930년대

그 다음 시즌인 1929-30 시즌에 5위에 그치자 바르셀로나와 빌바오를 견제하기 위해 1930년대 세계 최고급의 골키퍼였던 리카르도 사모라RCD 에스파뇰로부터 영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0-31 시즌에는 10개팀 중 최소 실점을 기록하고도 심각한 득점력 부족으로 지난해보다 1계단 더 낮은 6위에 그쳤다. 1931년 스페인 제2공화국의 성립으로 팀명에서 '레알'이라는 칭호가 빠져 '마드리드 FC'가 되었다.

1931-32 시즌, 데포르티보 알라베스로부터 하신토 킨코세스, 마누엘 올리바레스, 시리아코 에라스티를 영입했고, 레알 우니온으로부터 루이스 레게이로를,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로부터 에우게니오 일라리오를 대거 영입하여 전력을 대폭 강화했는데 결국 폭풍 투자의 효과를 보며 10승 8무 무패로 첫 번째 라리가 우승에 성공했다. 이는 2022년 현재까지 라리가의 마지막 무패 우승으로 남아 있다.[14] 그 다음 시즌인 1932-33 시즌에도 연속 우승에 성공했다. 이 시즌에 마누엘 올리바레스는 14경기 16골로 레알 마드리드의 첫 번째 트로페오 피치치 수상자가 되었다.

이후 1933-34 시즌, 라리가 6라운드 빌바오전에서 1-5 대패를 거두자 이사회는 레알의 라리가 우승을 이끈 로베르트 퍼스 감독을 경질했다. 퍼스 감독을 경질한 이후 프란시스코 브루 감독을 선임했으나 1934-35 시즌과 1935-36 시즌에도 리그 준우승에 머물며 3년 연속 준우승을 거뒀다. 아쉬운 리그 성적과는 달리 코파 델 레이에서는 1934년과 1936년에 각각 발렌시아와 바르셀로나를 꺾고 우승했다.

그리고, 스페인 내전이 발발했다.

7.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1943~1978)

파일:에스타디오차마르틴_내전직후.jpg
스페인 내전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은 에스타디오 데 차마르틴
1936년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1939년 초까지 스페인 국내의 모든 스포츠가 중단되었다.[15] 산티아고 베르베나우는 극우주의자로서 1936년 CEDA의 당원이었으나 이러한 행적으로 인해 체포 위기에 놓이자 마드리드를 벗어나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군대에 합류해 아구스틴 무뇨스 그란데스의 부하로 스페인 내전에 참전해 싸웠다. 이 당시 카탈루냐에 주둔하기도 했다.[16] 내전이 끝난 뒤인 1939년 4월 19일, 전 회장이던 페드로 파라헤스가 구단 총회를 소집되면서 무너졌던 레알은 다시 시작되었으나 내전 종식 이후 레알은 큰 위기를 겪었다. 홈구장이었던 에스타디오 데 차마르틴이 파괴되었고 내전 도중 선수들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내전 이후 남은 선수는 고작 4명이었다. 구단은 총회를 열고 잠정 위원회를 조직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이후 1941년 1월 1일부터 마드리드는 다시 레알이라는 칭호를 달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43년에 산티아고 베르나베우가 회장으로 부임했다. 석유, 철강석으로 돈을 벌기도 하며 레알 마드리드에서 유소년부터 선수까지 했던 그는 부임 이듬해인 1944년부터 새로운 스타디움인 '에스타디오 누에보 차마르틴'과 시우다드 데포르티바 훈련장을 건립해 스페인 내전으로 피해를 입었던 기반 시설을 복구했다. 이렇게 베르나베우 회장은 왕조를 건설하기 전 기나긴 기초 공사를 다져가고 있었다.

7.1. 1940년대

구단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성적이 따라오지 않았다. 1939-40 시즌에는 4위, 1940-41 시즌에는 6위로 추락했고, 1942-43 시즌과 1947-48 시즌에는 12팀 중 10위와 14팀 중 11위로 간신히 강등을 피하기도 했다. 이는 레알이 구단 역사에서 두 자릿수 순위를 기록했던 단 두 번의 시즌이다.

리그 성적이 부진하자 레알의 감독도 자주 바뀌었는데, 프란시스코 브루 감독 이후 후안 아르메트 감독이 부임했다. 그러나 아르메트 감독은 성적 부진 끝에 라리가 12라운드 이후 경질되었고 라몬 엔시나스 감독이 선임되었다. 1942-43 시즌에 팀은 강등 위기를 맞았으나 코파 델 레이에서는 준우승을 차지했다.

1944-45 시즌에 리그에서 다시 준우승에 머무르자, 라몬 엔시나스 감독이 물러나고 하신토 킨코세스가 새로운 감독으로 취임했다. 킨코세스가 부임한 효과는 바로 나타나 1945-46 시즌에 레알은 10년 만에 코파 델 레이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1946-47 시즌, 킨코세스 감독이 물러나고 RCD 에스파뇰 감독을 맡던 발타사르 알베니스가 새 감독으로 부임했고, 코파 델 레이 2연패를 달성했다. 그러나 다음 시즌인 1947-48 시즌, 알베니스 감독과 재부임한 킨코세스 감독이 모두 경질되었고 마이클 키핑 감독이 부임했으며 리그에서는 11위로 매우 부진했다.

최악의 부진을 맞았으나 트로페오 피치치를 차지하는 파이뇨와 이후 레알의 전설적인 선수와 감독이 되는 미겔 무뇨스를 영입해 재기를 노렸고 마이클 키핑 감독의 지휘 아래 팀은 다시 리그 순위를 끌어올려 3위에, 그 다음 시즌에는 4위에 올랐다. 그러나 이 키핑 감독도 1950-51 시즌에 레알 소시에다드, FC 바르셀로나,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에게 각각 2-6, 2-7, 0-5 대패를 당하며 경질되었다.

7.2. 저승사자 군단

'저승사자 군단'이라는 명칭에 대해 국내에서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를 중심으로 한 황금 세대가 유러피언컵 5연패를 이끌 당시 검은 유니폼을 착용해서 이런 별명이 생겼다고 알려졌지만 스페인어 혹은 영어로 된 저승사자 군단에 해당하는 원어 별명을 찾기 어려우며 역대 레알 마드리드 유니폼 변천사를 보면 유러피언 컵 5연패 당시에도 하얀색 유니폼을 착용했었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저승사자 군단'이라는 별명은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을 일컫는 '전차 군단'처럼 국내에서만 통용되는 별명으로 보인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1953년, 레알 마드리드는 당대 최고의 선수였던 '금빛 화살'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와 계약하며 전성기의 시작을 알린다. 이후 세계적인 스타들을 영입하며 다국적 군단을 만드는 데 성공한다. 저승사자 군단 시절 레알 마드리드를 거쳐간 선수들은 이외에도 '질주하는 소령' 페렌츠 푸스카스, '칸타브리아의 광풍' 프란시스코 헨토[18], 엑토르 리알, '나폴레옹' 레몽 코파, '벽' 호세 산타마리아[19], 미겔 무뇨스, '마법사' 아만시오 아마로, 지지[20] 등이 있다.

이 정도의 스쿼드로도 충분히 당시 유럽 최강이자 역대급 클럽 축구계의 강팀으로 명성을 떨쳤지만 레알은 여기에 성이 안 찼는지 추가로 세 선수를 더 영입하려고 했다. 하지만 결국 실행되지는 못했는데 그 세 선수는 바로 펠레바비 찰튼, 레프 야신이었다.
시즌 라리가 유러피언컵 코파 델 레이 인터컨티넨탈컵
1953-54 파일:laLiga_trophy.png
3
× 4강 ×
1954-55 파일:laLiga_trophy.png
4
× 4강 ×
1955-56 3위
( 2)
파일:original European Cup.png
1
4강 ×
1956-57 파일:laLiga_trophy.png
5
파일:original European Cup.png
2
8강 ×
1957-58 파일:laLiga_trophy.png
6
파일:original European Cup.png
3
준우승 ×
1958-59 2위
( 1)
파일:original European Cup.png
4
4강 ×
1959-60 2위
( = )
파일:original European Cup.png
5
준우승 ×
1960-61 파일:laLiga_trophy.png
7
16강 준우승 파일:Intercontinental_Cup_trophy.png
1
1961-62 파일:laLiga_trophy.png
8
준우승 파일:Copa_del_Rey_Trophy.png
10
×
1962-63 파일:laLiga_trophy.png
9
예비라운드 4강 ×
1963-64 파일:laLiga_trophy.png
10
준우승 8강 ×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를 필두로 1953-54 시즌 21년 만의 라리가 우승을 시작으로 전성기의 출발을 알린 레알 마드리드는 1955-56 시즌 새로 창설된 유러피언컵에 참가하여 결승에서 스타드 드 랭스를 4-3으로 이기고 초대 우승을 차지한다. 그리고 레알 마드리드는 유러피언컵 초대 우승을 시작으로 명성 높은 클럽들이 참가하는 이 수준 높은 대회에서 무려 5연패를 달성하는 위대한 업적을 이루게 된다.

1956-57 시즌 결승전에서 ACF 피오렌티나를 2-0으로 이겼고 1957-58 시즌에는 AC 밀란을 3-2로 이겼다. 1958-59 시즌에서는 초대 준우승팀 스타드 드 랭스를 다시 한번 2-0으로 무너트리며 우승을 차지했다. 1959-60 시즌에는 준결승전에서 라이벌 FC 바르셀로나와 붙어 1, 2차전 모두 3-1로 이기며 총합 6-2로 결승전에 진출,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를 7-3이라는 압도적인 점수 차로 승리하며 우승을 차지했다. 또한 세계 최고의 축구 클럽을 가리기 위해 창설된 인터컨티넨탈컵에 유러피언컵 우승팀 자격으로 참가,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팀인 CA 페냐롤을 1, 2차전 합계 5-1로 승리하며 초대 인터컨티넬탈컵 트로피를 들어올린다.

다만 이 시기 감독은 자주 교체되었는데, 2시즌 동안 리그 우승 1회, 유러피언 컵 우승 2회를 기록한 호세 비야롱아 감독이 베르나베우와 갈등이 깊어졌고[21] 결국 경질되었다. 이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맷 버스비 감독 영입에 실패한 베르나베우 회장은 OGC 니스루이스 카르닐리아 감독을 선임했고 1957-58 시즌에 더블, 1958-59 시즌에 유러피언 컵 우승을 차지했으나 카르니글리아 감독이 페렌츠 푸스카스를 1958-59 시즌 유러피언 컵 결승에서 제외하고[22], 라이벌 FC 바르셀로나가 리그 우승을 차지하면서 경질되었다. 이후 선임된 마누엘 플레이타스 감독도 바르셀로나의 리그 우승이 확정되자 경질되었다.
파일:Saeta Rubia.jpg
당대 최고의 선수였던 '금빛 화살'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파일:RM_1960.png
유러피언컵 5연패를 이룩한 저승사자 군단의 위용
마누엘 플레이타스 감독이 경질된 이후 미겔 무뇨스가 1959-60 시즌 도중 정식 감독으로 승격되었고, 팀을 이끌기 시작했으며 위에서 언급한대로 1959-60 시즌 유러피언 컵 결승에서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를 7-3으로 격파하며 우승을 차지하였고, 유러피언컵 5연패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미겔 무뇨스 감독 체제로 풀시즌을 맞이한 1960-61 시즌 레알은 라리가 우승을 차지했으나 유러피언 컵 1라운드에서는 바르셀로나에게 패해 6연패 도전에 실패했고,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에서는 결승에서 아틀레티코에게 패배해 다소 아쉬운 시즌을 보냈다. 이어 1961-62 시즌에는 라리가와 코파 델 레이를 우승하며 창단 첫 국내 대회 더블을 달성했지만 유러피언 컵 결승에서 페렌츠 푸스카스의 해트트릭에도 불구하고 에우제비우를 필두로 한 SL 벤피카에게 3-5로 패하며 아쉽게 트레블에 실패했다.

이어 1962-63 시즌에 다시 라리가 우승에 성공했으나 코파 델 레이에서는 준결승에서 탈락, 유러피언 컵에서는 예선 라운드에서 탈락했다. 1963-64 시즌에는 라리가 4연패에 성공한 후 2년 만에 유러피언 컵 결승에 다시 올랐으나 산드로 마촐라가 이끄는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에게 1-3으로 패배하며 유럽 정상의 자리를 탈환하는데 실패했다. 그리고 1964년, 저승사자 군단의 상징적인 선수였던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RCD 에스파뇰로 이적하면서 유럽과 스페인을 휩쓴 저승사자 군단의 시대가 막이 내렸다.

이 시기에 레알 마드리드는 11시즌 동안 라리가 8회 우승[23], 유러피언컵 5회 우승 및 2회 준우승, 코파 델 레이 1회 우승, 인터컨티넨탈컵 1회 우승이라는 역사에 길이 남을 대업적을 이룩하고 저승사자 군단이라 일컬어지며 전 유럽를 공포에 떨게 만드는 강력한 헤게모니를 구축한다. 다만 세계 최초의 트레블이 이 시기에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유일한 아쉬움으로 남을 듯하다.[24]

저 당시 레알 마드리드에 대항할 수 있는 왕조를 구축한 클럽을 꼽으라면 전 유럽 축구사를 통틀어 봐도 몇 없는데, 미친 오프사이드 트랩과 정신 나간 포지션 교체, 경기 전체를 쥐고 상대를 가둬서 패는 것으로 유명했던 요한 크루이프의 팀인 1960년대 중반에서 1970년대 초중반까지의 <토탈 풋볼> 아약스 왕조[25], 라이벌이었던 아약스의 가패 축구를 비판적으로 계승, 발전시키며 왕좌를 이은 프란츠 베켄바워의 1970년대 초중반의 <데어 카이저의 팀> 바이에른 뮌헨 왕조[26], 이안 러쉬, 그레이엄 수네스, 앨런 한센, 필 닐, 케니 달글리시 등 리버풀 레전드들이 구축했던 1970년대 중반~1980년대 중후반까지의 <붉은 제국> 리버풀 왕조[27], 이전 시대의 아약스를 연상케 하는 엽기적인 오프사이드 트랩 시도와 숨 막히는 프레싱으로 이름을 날렸던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후반까지의 <사키 혁명> 밀란 왕조[28], 역대 최고을 넘보는 리오넬 메시와 유럽 최고의 미드필더로 자리매김한 사비 에르난데스, 그리고 크루이프의 철학이 레이카르트와 과르디올라를 거쳐 정착된 2000년대 중반부터 2010년도 초반까지 이르는 <티키 타카> 바르셀로나 왕조 , 역대 챔피언스리그 최다 득점왕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와 시간이 흐를수록 대단한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카림 벤제마, 사비 에르난데스와 안드레 이니에스타 이후 유럽 최고의 미드필더이자 축구 도사가 된 루카 모드리치로 이루어진 발롱도르 트리오가 이끌던 <갈락티코스 2기> 마드리드 왕조만이 이와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29]

7.3. Yé-yé 마드리드

시즌 라리가 유럽 대항전 코파 델 레이 인터컨티넨탈컵
1964-65 파일:laLiga_trophy.png
11
유러피언컵
8강
16강 ×
1965-66 2위
( 1)
파일:original European Cup.png
6
8강 ×
1966-67 파일:laLiga_trophy.png
12
유러피언컵
8강
8강 준우승
1967-68 파일:laLiga_trophy.png
13
유러피언컵
4강
준우승 ×
1968-69 파일:laLiga_trophy.png
14
유러피언컵
16강
16강 ×
비록 저승사자 군단의 시대는 막을 내렸지만 레알은 여전히 강력한 팀이었다. 1970년대 초반까지도 라리가 우승은 기본에, 유럽 클럽 대항전에서도 여전히 정상을 다투는 팀이었다.

Yé-yé 마드리드는 '제2의 디 스테파노, 제3의 디 스테파노를 스페인 자국 출신 선수로 키워 내자'라는 정책의 일환으로서 탄생한 1960년대 레알 마드리드를 일컫는 애칭이다. 레알 마드리드는 디 스테파노 시대가 저문 이후 스페인 각지에서 젊은 인재를 불러 모아 자국 출신 선수들로 팀을 구성했고, 이러한 세대 교체는 대표 팀 강화 정책의 일환으로써 이뤄졌다. 'Yé-yé'라는 별명은 당시 유럽에서 크게 유행했던 비틀즈의 히트곡 'She Loves You'의 "Yeah~ Yeah~ Yeah~"라는 구절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즉, 당시의 레알 마드리드가 스페인의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팀이란 의미가 담겨 있는 셈이다.
파일:78544361dk0.jpg
Yé-yé 마드리드의 유러피언컵 우승
파일:Gento_Sixchampions.jpg
'칸타브리아 해안의 강풍' 프란시스코 헨토와 6개의 유러피언컵
미겔 무뇨스 감독 시절의 Yé-yé 마드리드를 상징하는 라인업[30]
FW
프란시스코 헨토
FW
마누엘 벨라스케스
FW
라몬 그로소
FW
아만시오 아마로
FW
페르난도 세레나
{{{#!wiki style="margin: -16px -11px" MF
이그나시오 소코
MF
피리
}}}
{{{#!wiki style="margin: -16px -11px" DF
마누엘 산치스
DF
페드로 데펠리페
DF
파친
}}}
GK
호세 아라키스타인
Yé-yé 마드리드의 대표적인 결과물은 바로 스페인의 유러피언 네이션스컵 1964 우승이다. 당시 우승 주역으로 활약했던 '마법사' 아만시오 아마로는 디 스테파노의 뒤를 잇는 레알 마드리드의 아이콘으로 군림했다. 이 시기의 주요 선수들은 아만시오 아마로를 비롯하여 마누엘 벨라스케스, 레알에서 15시즌을 뛴 피리, 미드필더 뿐만 아니라 수비수로도 뛸 수 있는 멀티성을 보유한 이그나시오 소코, 마누엘 산치스 등이 있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가 팀을 떠난 이후 맞이한 첫 시즌인 1964-65 시즌, 팀은 다시 라리가 우승을 차지하며 라리가 5연패를 차지했다. 그러나 유러피언 컵에서는 8강에서 다시 SL 벤피카에게 패배하며 탈락했다.

1965-66 시즌에는 위에 있는 라인업의 선수들과 아직 팀에 남아있던 전설 페렌츠 푸스카스, 호세 산타마리아가 팀을 이끌며 유러피언컵에서 FK 파르티잔을 꺾고 6년 만에 우승을 차지했다. 유러피언컵 우승 이후 인터컨티넨탈컵에 진출했고 1966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챔피언인 CA 페냐롤과 맞붙었으나 6년 전과 달리 합계 0-4 완패를 당했다. 그리고 이 시즌이 끝나고 페렌츠 푸스카스까지 팀을 떠나며 레알은 완전한 새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1965-66 시즌 이후 30여 년간 레알 마드리드는 챔피언스 리그에서 우승하지 못하는 저주에 걸리게 된다. 1966-67 시즌에 8강에서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에게 합계 3-0으로 탈락했고, 그 다음 시즌인 1967-68 시즌에는 4강에 진출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를 만나 올드 트래포드 원정 0-1 패배 이후 홈에서 3-3 무승부를 거두며 결승 진출에 실패했으며 이후 2년은 연속으로 16강에서 탈락해 유럽의 정상에서 멀어져갔다.

그래도 리그에서는 승승장구했다. 1965-66 시즌 준우승을 거뒀지만 그 이후 리그 3연패를 달성했다. 다만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에서는 1967-68 시즌 결승 진출 외에는 성과를 내지 못했고, 1960년대에 단 1회 우승에 그치는 아쉬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7.4. 1970년대

시즌 라리가 유럽 대항전 코파 델 레이 인터컨티넨탈컵
1969-70 6위
( 5)
유러피언컵
16강
파일:Copa_del_Rey_Trophy.png
11
×
1970-71 4위
( 2)
UEFA 컵위너스컵
준우승
32강 ×
1971-72 파일:laLiga_trophy.png
15
UEFA컵
2라운드
4강 ×
1972-73 4위
( 3)
유러피언컵
4강
16강 ×
1973-74 8위
( 4)
UEFA컵
1라운드
파일:Copa_del_Rey_Trophy.png
12
×
1974-75 파일:laLiga_trophy.png
16
UEFA 컵위너스컵
8강
파일:Copa_del_Rey_Trophy.png
13
×
1975-76 파일:laLiga_trophy.png
17
유러피언컵
4강
16강 ×
1976-77 9위
( 8)
유러피언컵
2라운드
3라운드 ×
1977-78 파일:laLiga_trophy.png
18
× 16강 ×
1960년대 레알은 스페인을 휩쓸었으나 Yé-yé 마드리드의 시대가 막을 내리며 리그에서 부진하기 시작했다. 리그 3연패 이후 1969-70 시즌을 6위로 마무리했고, 유러피언 컵에서는 8강에서 탈락했다. 그나마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에서 8년 만에 우승을 차지하며 UEFA 컵위너스컵에 진출했다. 그 다음 1970-71 시즌에서도 리그에서 부진해 4위로 마감했고 코파에서도 32강에서 탈락했다. 그래도 컵위너스컵 결승에 진출해 5년 만에 유럽 대항전 결승에 진출했는데 첼시 FC에게 1-2로 패배해 준우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이 시즌을 끝으로 주장이자 팀의 레전드 프란시스코 헨토가 은퇴했고 팀은 1952-53 시즌 이후 18년 만에 무관이라는 씁쓸한 기록을 남겼다.

1971년 여름 이적시장에서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회장은 은퇴한 헨토에 이어 마누엘 산치스, 마누엘 부에노, 안토니오 베탄코르트, 안토니오 칼페, 루이스 데 라 푸엔테 등을 계약 만료로 내보냈고 어린 선수였던 가르시아 레몬과 19세의 어린 공격수 산티야나를 1군에 올리면서 팀의 예산을 절감시켰다. 그리고 이 시즌에 리그 우승에 차지하며 만회에 성공했으나 코파 델 레이에서는 4강 탈락, UEFA 컵에서는 16강에서 탈락했다.

그러나 다시 리그에서 부진해 1972-73 시즌에 리그 4위에 그쳤고, 유러피언 컵에서는 간만에 4강까지 진출했으나 이 시즌 우승팀인 AFC 아약스를 만나 홈, 원정에서 모두 패배해 탈락했다. 그리고 이 시즌 베르나베우 회장은 이스라엘을 방문해 모셰 다얀에게 훈장을 수여해 프란시스코 프랑코와의 관계를 끊어가기 시작했다. 또 유러피언 컵 챔피언 아약스의 핵심 선수 요한 크루이프에 접근했으나 실패했고, 크루이프는 라이벌 팀 FC 바르셀로나로 이적했다.

1973-74 시즌이 되자, RFEF는 지난 11시즌 동안 유지하던 외국인 선수 영입 금지를 해제했다. 그러자 레알은 오스카르 마스, 귄터 네처를 영입했고, 10대의 호세 안토니오 카마초비센테 델 보스케를 영입해 팀의 전력을 강화했다. 그러나 팀은 리그 8위로 내려앉았고, 엘 클라시코에서는 홈에서 크루이프의 맹활약 끝에 0-5로 대패했다. 그리고 1974년 1월 14일, CD 카스테욘에게 0-2로 패배하자 14년간 팀을 이끈 미겔 무뇨스 감독이 경질되었다.

새 시즌이 되자 루이스 몰로니 임시 감독이 물러나고 밀랸 밀랴니치가 새 감독으로 부임했고, 팀은 다시 좋은 성적을 거두며 라리가코파 델 헤네랄리시모 더블을 기록했다. 이어 1975-76 시즌에도 라리가 우승을 차지하며 리그 2연패에 성공했다. 그리고 다시 유러피언 컵 4강에 올랐으나 당해 우승팀 FC 바이에른 뮌헨을 만나 게르트 뮐러에게 2경기 3골을 헌납하며 합계 1-3으로 탈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다음 시즌 레알은 흔들렸다. 나이가 든 귄터 네처지쿠로 대체하는데 실패했고, 케빈 키건 영입도 실패하면서 9위로 리그를 마감했고, 코파도 조기 탈락했으며 유러피언 컵도 2라운드에서 탈락했다.

1976-77 시즌에 무관을 기록하고 리그 순위도 추락하면서 레알은 1955-56 시즌 이후 21년 만에 유럽 대항전 진출에 실패했다. 그리고 레알은 파울 브라이트너를 내보내고 울리 슈틸리케, 후아니토를 영입했다. 그런데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회장이 1977년 8월 29일 장 폐색으로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9월 3일 라이문도 사포르타가 회장 권한대행이 되어 구단의 업무를 맡았다. 그리고 9월 8일에 밀랴니치 감독이 베르나베우와의 합의 후 구단을 떠났다.

그 유명한 요한 크루이프의 바로셀로나 시절[31]이 이 시기에 포함된다. 화려한 명성과 달리 의외로 크루이프는 바로셀로나에서 지낸 5년 동안 라리가 우승은 1973-74 시즌 우승으로 1번밖에 차지하지 못했고, 유러피언 컵에서는 1974-75 시즌 4강에 올랐으나 리즈 유나이티드에게 1차전 원정에서 1-2 패배, 2차전 홈에서 1-1 무승부를 하며 총합 스코어 2-3으로 결승전 진출에 실패했다. 레알이 이 시절 우승을 못한 것은 성적을 보면 알겠지만 팀 자체 문제 때문이지 바르셀로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리고 1978년 6월 2일,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회장이 사망하면서 레알은 화려했던 시대를 마감하고 새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8. 루이스 데 카를로스 (1978~1985)

시즌 라리가 유럽 대항전 코파 델 레이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코파 데 라리가
1978-79 파일:laLiga_trophy.png
19
유러피언컵
2라운드
준우승 × ×
1979-80 파일:laLiga_trophy.png
20
유러피언 컵
4강
파일:Copa_del_Rey_Trophy.png
14
× ×
1980-81 2위
( 1)
유러피언컵
준우승
8강 × ×
1981-82 3위
( 1)
UEFA컵
8강
파일:Copa_del_Rey_Trophy.png
15
× ×
1982-83 2위
( 1)
UEFA 컵위너스컵
준우승
준우승 준우승 준우승
1983-84 2위
( = )
UEFA컵
1라운드
4강 × 2라운드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회장의 사망 19일 후인 1978년 6월 21일, 새 회장 선거가 진행되었고 루이스 데 카를로스가 당선되었다. 이후 9월 1일 새 이사회가 발표되었고 이사회는 부채 증가를 비롯한 재정 문제로 인해 유명 선수들의 영입으로 팀의 전력을 보강하지 않았다. 유러피언 컵에서는 일찍 탈락했으나 라리가 우승을 차지했고, 코파 델 레이에서는 결승까지 진출해 준우승을 거뒀다.

그리고 1979-80 시즌, 다시 팀에 복귀해 감독을 맡던 루이스 몰로니 감독이 물러나고 부야딘 보슈코브가 새로운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리고 구단 역사상 첫 잉글랜드 선수인 로리 커닝엄을 영입했다. 리그에서는 20번째 우승을 차지한 후 코파 델 레이에서는 카스티야를 결승에서 꺾고 더블을 기록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유러피언 컵은 4강에서 함부르크 SV를 만나 원정에서 1-5로 대패하면서 시즌을 아쉽게 마무리했다.
파일:REAL MADRID 1980-81.jpg
1980-81 시즌 레알 마드리드 선수단

1980-81 시즌, 레알은 다시 재정 위기가 발생해 라파엘 코르테스 단 1명을 영입하는데 그쳤고 나머지 부족한 자원은 카스티야에서 콜업했다. 그리고, 레전드 피리가 이 시즌을 끝으로 레알에서의 커리어를 마감하고 클루브 푸에블라로 이적했다. 리그에서 중반부에 크게 흔들리며 8위까지 추락하다 후반부 연승을 거두며 순위를 끌어올려 레알 소시에다드와 최종전까지 우승 경쟁이 계속되었는데 최종전에서 소시에다드가 스포르팅 히혼 원정에서 패배하고 레알 마드리드는 레알 바야돌리드 원정에서 반드시 승리해야 우승하는 상황이었다. 레알이 바야돌리드를 이기는 동안 소시에다드는 종료 직전까지 히혼에 1-2로 지고 있었으나 종료 직전에 소시에다드의 동점골이 터지면서 소시에다드는 창단 첫 라리가 우승을 거뒀고, 레알은 소시에다드에 승자승에서 뒤져진 2위가 되었다. 그리고 유러피언 컵에서는 1966년 이후 15년 만에 결승에 진출했으나 '붉은 제국' 리버풀 FC에게 0-1로 패배하며 유럽 정상의 자리를 탈환하지 못했다.

1981-82 시즌에도 레알의 재정적인 문제는 지속되어 이적시장을 활발히 보내지 못했다. 레알은 1월까지 1위로 순항하고 있었으나 이후 리그 6경기에서 4무 2패를 기록하며 무너졌고, UEFA 컵 8강에서 FC 카이저슬라우테른을 상대로 1차전을 3-1로 이겨놓고 2차전 원정에서 0-5 참패를 당하며 탈락했다. 결국 부야딘 보슈코브 감독이 물러나고 다시 루이스 몰로니가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리고 회장 선거가 진행되면서 구단이 시끄러워졌는데, 루이스 데 카를로스 회장이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전 회장의 미망인이었던 마리아 바렌시아노로부터 지원을 받았고 투표에서 10752표를 얻으며 7560표를 받은 라몬 멘도사를 꺾고 재임에 성공했다. 한편, 1982-83 시즌이 되면서 구단은 레전드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를 감독으로 선임했는데, 디 스테파노는 1970-71 시즌에 발렌시아 CF를 라리가 챔피언으로 이끈 경험이 있었기에 큰 기대를 모았으나 결과는 좋지 않았다.

리그에서 최종전 전까지 2위 아틀레틱 클루브에 승점 1점이 앞선 1위였고 마지막 발렌시아 CF 원정에서 비기기만 해도 승자승에서 앞서 우승할 수 있었으나 최종전에서 0-1로 패배했다. 같은 시각 빌바오는 UD 라스팔마스에 4-2 승리를 거두며 최종전 업셋이 이루어졌고 빌바오는 극적인 우승에 성공했다. 한편 강등 위기에 있던 발렌시아는 이 승리로 라스팔마스를 끌어내리고 극적인 잔류에 성공했다. 또한 코파 델 레이에서는 라이벌 바르셀로나에게 1-2로 패배하며 준우승을, UEFA 컵위너스컵에서는 알렉스 퍼거슨애버딘 FC에게 1-2로 패배하며 준우승, 코파 데 라리가에서 다시 바르셀로나에게 패해 준우승, 심지어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에서도 레알 소시에다드에 대패하며 5개 대회 준우승을 기록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그리고 당시 부회장이자 훗날 회장을 역임한 라몬 멘도사는 KGB에 연계되어 부회장직을 사임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1983-84 시즌에는 승자승으로 다시 리그 준우승에 그쳤고, UEFA 컵에서도 이변을 당하며 1라운드에서 탈락했다. 결국 디 스테파노 감독은 성적 부진으로 경질되었다. 1984년 5월 21일, 디 스테파노가 경질된 이후 레알은 카스티야 감독 아만시오 아마로를 1군 감독으로 승격시켰다. 그러나 시즌은 순탄치 않았고 선수들의 파업이 발생했다. 결국 루이스 데 카를로스 회장은 이사회의 압력으로 인해 조기 회장 선거를 치르기로 결정하면서 클럽 내외적으로 매우 큰 혼란에 휩싸였다. 그리고 5월 24일, 라몬 멘도사가 당선되면서 루이스 데 카를로스 시대는 막을 내렸다.

9. 라몬 멘도사 (1985~1995)

9.1. 독수리 오 형제

시즌 라리가 유럽 대항전 코파 델 레이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코파 데 라리가
1984-85 5위
( 3)
파일:uefa-europa-league-trophy.png
1
16강 × 파일:코파데라리가.png
1
1985-86 파일:laLiga_trophy.png
21
파일:uefa-europa-league-trophy.png
2
4강 × 2라운드
1986-87 파일:laLiga_trophy.png
22
유러피언컵
4강
4강 × ×
1987-88 파일:laLiga_trophy.png
23
유러피언컵
4강
4강 × ×
1988-89 파일:laLiga_trophy.png
24
유러피언컵
4강
파일:Copa_del_Rey_Trophy.png
16
파일:supercopa_de_espana.png
1
×
1989-90 파일:laLiga_trophy.png
25
유러피언컵
2라운드
준우승 파일:supercopa_de_espana.png
2
×
루이스 데 카를로스 회장에 의해 조기 회장 선거가 치러지자 반 베르나베우 파이자 전 부회장인[32] 라몬 멘도사가 출마해 당선되었다.
파일:la-quinta-del-buitre.jpg
독수리 오 형제
1980년대에는 바르셀로나의 '라 마시아'에 강한 영향을 받아 스페인 각지에서 선수들을 불러 모으는 것이 아닌, 유스 클럽으로부터 팀의 주축 선수들을 키워낸다는 의식이 확립됐다. 그 결과물로서 탄생한 것이 바로 1980년대 후반을 강타한 독수리 오 형제(La Quinta del Buitre, 라 퀸타 델 부이트레)'로 불리는 레알 마드리드이다. 다섯 마리의 독수리, 혹은 소수 정예 군단을 의미하는 이 애칭은 유스 클럽에서 올라와 팀의 주축 선수로 자리매김한 '독수리' 에밀리오 부트라게뇨, 마놀로 산치스[33], 미첼[34], 마르틴 바스케스, 미겔 파르데사로 이어지는 5인방을 지칭한다. 그 외에도 프란시스코 부요, 울리 슈틸리케, 첸도, 우고 산체스, 호르헤 발다노, 호세 안토니오 카마초 등 세계 정상급 선수들을 보유하면서 다시 스페인을 제패해나갔다.

1984-85 시즌에 에밀리오 부트라게뇨가 1군에 승격한 이후 루이스 몰로니 감독의 지휘 아래 레알은 위력을 발휘했고, 이른바 '후아니토 정신'으로 첫 UEFA 컵 우승을 차지했다. 이어 1985-86 시즌에는 당대 최고의 골잡이 우고 산체스를 영입했고, 승점 11점 차라는 압도적인 기세로 6년 만에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이어 UEFA 컵에서도 1. FC 쾰른을 꺾으며 2연패를 달성했다.

이어 레오 베인하커르존 토샥이 각각 3시즌, 1시즌간 팀을 이끌었고 레알은 1990년까지 스페인을 제패하며 1960년대 이후 다시 리그 5연패에 성공했다. 그리고 1988-89 시즌에는 코파 델 레이 우승까지 차지하며 다시 한 번 Yé-yé 마드리드에 버금가는 황금기를 맞이했다.

다만 이같이 빛나는 업적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마드리드에 단 하나의 흠이 있다면 바로 유러피언컵 우승이 없었다는 점이다. 분명히 유럽 최고의 강호 중 하나였으며 그 누구도 두렵지 않은 강팀으로서 존재감을 과시했지만 유독 유러피언컵 우승과는 인연이 없었다. 1986-87 시즌부터 3시즌 연속으로 유러피언컵 4강에 올라 우승을 노릴 기회를 얻었다. 1986-87 시즌에는 BSC 영 보이즈, 유벤투스 FC, FK 츠르베나 즈베즈다를 꺾고 준결승까지 올라갔으나 FC 바이에른 뮌헨에게 1, 2차전 합계 2-4로 탈락했다.[35]

그리고 1987-88 시즌에는 디에고 마라도나SSC 나폴리를 1라운드에서 탈락시키고 기세를 몰아 디펜딩 챔피언 FC 포르투와 전시즌 준우승팀 바이에른 뮌헨을 꺾고 2연속으로 준결승에 진출하였으나, 거스 히딩크가 이끄는 PSV 에인트호번에게 1, 2차전 합계 1-1로 동률이었으나 홈에서 비기는 바람에 원정 다득점 우선 원칙으로 탈락했다. 1988-89 시즌, 자신들을 탈락시켰던 PSV와 다시 재회하여 연장전 승부끝에 탈락시키며 복수에 성공했지만 준결승전에서 AC 밀란에게 1, 2차전 합계 1-6으로 져 탈락했다. 1차전에서는 무승부를 거뒀으나 2차전 산 시로에서는 0-5 대패를 당했다.

그 후 헤이젤 참사로 인해 영국 축구는 한동안의 침체기를 거치게 되었지만 유럽 축구의 헤게모니는 독수리 오 형제의 레알 마드리드가 아니라 아리고 사키가 이끄는 AC 밀란을 필두로 세리에 A에게 넘어오게 되었다.[36]

이 시기의 레알은 1980년대 초반의 혼란을 이겨내고 1980년대 후반에 접어들며 UEFA컵 2번, 라리가 5연속 우승, 코파 델 레이 1번,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3번 우승을 달성해 세계 최고 클럽의 입지를 확고히 했다. 특히 이 시기는 프랑코 독재가 끝난 시점에 이룩한 부흥기이기 때문에 과거 독재 정권의 비호 속에 전성기를 구축했다는 오해를 불식시키는 주된 근거로 자리잡고 있다.

9.2. 1990년대 초반

시즌 라리가 유럽 대항전 코파 델 레이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1990-91 3위
( 2)
유러피언컵
8강
16강 파일:supercopa_de_espana.png
3
1991-92 2위
( 1)
UEFA컵
4강
준우승 ×
1992-93 2위
( = )
UEFA컵
8강
파일:Copa_del_Rey_Trophy.png
17
×
1993-94 4위
( 2)
UEFA 컵위너스컵
8강
8강 파일:supercopa_de_espana.png
4
영광의 시대 이후 1990년대에 들어서는 요한 크루이프가 이끄는 라이벌 바르셀로나의 드림팀 대약진이 시작되면서 라리가에서 한동안 바르셀로나에게 왕좌를 내줘야만 했다.

그리고 1990-91 시즌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에서 우승하며 무관은 면했으나 리그 3연무, 5경기 1승 4패, 6경기 무승 등 리그에서 부진이 끊임없이 이어지자 1990년 11월 존 토샥 감독이 경질되고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가 다시 감독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디 스테파노도 유러피언 컵 8강 탈락 이후 사임했고, 라몬 그로소 임시 체제 이후 라도미르 안티치가 새로 부임했다. 이 시즌 레알은 감독이 감독 교체가 무려 3번이나 발생하며 혼란을 겪었고, 결국 리그 순위를 3위로 마감하게 되었다. 그래도 안티치 감독이 우고 산체스의 부상 공백 속에서도 리그 마지막 2경기에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FC 바르셀로나를 잡아내서 UEFA 컵 진출에는 성공했다.

1991-92 시즌에는 초반 리그 13경기에서 12승 1무를 기록하며 다시 리그 우승을 차지할 가능성이 높아졌으나 12월과 1월로 넘어가면서 3경기 무승에 이어 패배가 늘어났고, 결국 라도미르 안티치 감독이 1위를 유지하고 있었음에도 경질되었다. 다시 레알로 부임한 레오 베인하커르 감독은 팀을 추스리며 3월 말부터 리그 12경기 7승 3무 2패로 여전히 1위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최종 라운드에서 CD 테네리페에게 2-3 역전패를 당하며 라이벌 바르셀로나에게 리그를 헌납하고 말았다.

베니토 플로로 감독이 새로 부임한 레알은 다시 리그 우승을 노리며 세비야 FC에서 이반 사모라노를 영입했고, 우고 산체스게오르게 하지, 라파엘 고르디요를 내보냈다. 초반에 바르셀로나와 우승 경쟁을 하며 2~3위를 지키고 있던 레알은 22경기 무패라는 엄청난 기록을 써가며 35라운드에 1위로 올라서고 37라운드까지 1위 자리를 지켰다. 그런데, 38라운드에서 다시 테네리페를 만났고 또다시 패배하면서 바르셀로나에게 리그를 헌납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 통한의 패배는 레알이 테네리페에서 페르난도 레돈도를 영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UEFA 컵에서는 8강에 진출했으나 파리 생제르맹 FC에 1, 2차전 합계 4-5로 밀려 탈락했다.

1993-94 시즌에는 지난 시즌과 달리 리그 초반 3연패를 기록하며 부진했고, 전반기에는 4위 안에 잘 들지 못했다. 그리고 1994년 3월 5일, UE 예이다에게 1-2로 패배하자 베니토 플로로 감독이 경질되었고, 비센테 델 보스케가 임시 감독으로 남은 시즌을 이끌게 되었다. 이후 레알은 31라운드부터 8경기 2승 1무 5패라는 최악의 성적을 거두며 4위로 시즌을 마감했고, UEFA 컵위너스컵은 다시 파리를 만나 8강에서 탈락, 코파 델 레이에서는 다시 테네리페에게 패배했다. 그나마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와 코파 이베로아메리카나에서는 우승을 차지했다.

1990년대 초반 바르셀로나의 리그 4연패를 저지하지 못하고 레알 마드리드가 우승 조급증에 걸린 나머지 감독 경질 횟수도 더욱 늘어만 갔다. 또한 라몬 멘도사 회장 재임 시절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공사로 인해 재정에 큰 타격을 입었고, 1994년 초 레알의 부채는 무려 73억 7500만 페세타에 달했다.

멘도사 회장은 이후 3선에 도전했는데, 플로렌티노 페레스를 근소한 차로 이기고 당선되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당시 부회장이었던 로렌소 산스와의 불화로 회장직에서 사임하게 되었다.

10. 로렌소 산스 (1995~2000)

파일:LorenzoSanz.jpg
당시 회장이던 로렌소 산스[37]와 트로피들의 모습
시즌 라리가 유럽 대항전 코파 델 레이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UEFA 슈퍼컵 인터컨티넨탈컵
1994-95 파일:laLiga_trophy.png
26
UEFA 컵
16강
16강 × × ×
1995-96 6위
( 5)
UCL
8강
16강 준우승 × ×
1996-97 파일:laLiga_trophy.png
27
× 16강 × × ×
1997-98 4위
( 3)
파일:UEFA_Champions_League_trophy.png
7
16강 파일:supercopa_de_espana.png
5
× 파일:Intercontinental_Cup_trophy.png
2
1998-99 2위
( 2)
UCL
8강
4강 × 준우승 ×
1999-00 5위
( 3)
파일:UEFA_Champions_League_trophy.png
8
4강 × × ×
한동안의 침체기를 겪은 뒤 마드리드는 1994-95 시즌 바르셀로나에게 라리가 우승을 탈환하면서 반격의 준비를 시작한다. 비록 이듬해 다시 바르셀로나에게 연이어 라리가 우승과 코파 델 레이 우승을 헌납했지만, 1996-97 시즌에는 파비오 카펠로 감독의 빗장 수비로 다시 라리가 우승을 차지하면서 전력을 정비한 레알 마드리드는 1997-98 시즌 유프 하인케스 감독 체제하에서 프레드라그 미야토비치, 페르난도 레돈도[38] 등 선수들의 활약에 힘입어 1965-66 시즌 이후 32년 만에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달성한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성과는 바로 에밀리오 부트라게뇨 이후 마드리드의 아이콘으로 급부상하게 된 '엘 니뇨' 라울 곤살레스라는 존재를 발굴해 낸 것에 있었다.
파일:RMA1998_UCL.jpg
1997-98 시즌 UCL 결승전 선발 라인업
파일:RM_1998.jpg
32년 만에 들어올린 빅 이어
다만 라리가 왕좌는 여전히 바르셀로나의 차지였고, 기존 선수들과 새로 유입된 선수들 간의 불화 등의 요인이 겹쳐지며[39] 라커룸 안팎으로 혼란의 정국이 거듭된다.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이끌어내는 데 공헌한 하인케스 감독도 시즌이 끝나고 해임되었다. 이러한 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고, 1998-99 시즌에는 팀의 레전드 호세 안토니오 카마초가 22일 만에 사임한 이후 거스 히딩크가 감독이 되었으나 성적 부진으로 1년도 못 채우고 경질되기도 했다.

이어지는 1999-00 시즌 중반에는 팀 순위가 10권 밑으로 내려가 16위까지 기록하며 약 60여 년만에 강등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존 토샥 감독이 중간에 경질되는 등 최악의 상황이 펼쳐지게 된다. 거기에 팀은 영입 실패와 해이한 경영으로 큰 적자에 처해 파산 직전에 이를 정도였고 1997-98 시즌 챔피언스리그 우승의 주역이었던 프레드라그 미야토비치다보르 슈케르를 판매해 빚을 탕감해야 했다.

이처럼 어수선한 와중에서 과거 레알 마드리드 선수로도 활약한 바 있었던 비센테 델 보스케 감독이 지휘봉을 잡았고, 리그 우승은 꿈도 못 꿀 정도로 처참한 성적을 거두는 가운데 챔피언스 리그 8강에서 하필 전년도에 트레블을 이룩한 팀이자 데이비드 베컴, 로이 킨, 라이언 긱스, 폴 스콜스 등 베스트 멤버가 건재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를 만나게 되었다.

레알 마드리드는 당장 챔피언스 리그 진출권 수성이 위태로운 상황이었고 맨유는 리그 선두에 트레블 시즌의 주축들이 건재해서 대부분의 유럽 축구 전문가들과 팬들은 맨유의 우세를 점치는 상황이었다.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 홈구장인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열린 1차전, 마드리드와 맨유는 0:0 무승부를 거뒀고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 자신들의 홈, 올드 트래포드에서 갖는 2차전을 앞두고 "레알 마드리드는 이제 더 이상 두렵지 않다"라고 발언하였고 이에 대해 라울은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못하게 해 주겠다"라고 화답하면서 두 팀의 신경전은 극도로 치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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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챔피언스 리그' 라울 곤살레스
운명의 8강 2차전, 두 팀의 치열한 공방 끝에 라울은 2차전 원정에서 홀로 2골을 넣으며 본인의 말을 증명했다. 라울의 2골과 맨유의 주장 로이 킨의 자책 골이 겹쳐 OT 원정에서 2-3 승리를 거두며 레알 마드리드는 준결승에 진출했다. 특히 세 번째 골에서 레돈도의 패스는 유명한 장면이다.
파일:jshhsbsv.jpg
라울과 모리엔테스를 필두로 2년 만에 다시 한번 들어올린 빅 이어
이후 라울은 챔피언스 리그 내내 최고의 활약을 보이면서 발렌시아와의 결승전에서까지 연달아 골을 작렬, 페르난도 모리엔테스스티브 맥마나만의 골까지 나오며 3-0 승리를 따내 1999-00 시즌을 챔피언스 리그 우승으로 드라마틱하게 마무리한다. 비록 라리가 최종 순위는 5위에 그치며 챔피언스 리그 진출권에 들지 못했지만 디펜딩 챔피언의 자격으로 차기 챔피언스 리그에 출전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시즌의 챔피언스 리그 우승은 21세기 레알 마드리드의 역사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완전한 언더독의 상황으로 치른 챔피언스 리그에서 우승을 거두며 극적으로 다음 시즌 챔피언스리그 티켓을 획득했다. 이 덕분에 플로렌티노 페레스 회장이 루이스 피구를 영입해 갈락티코스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고, 이후 재정 위기를 극복하고 레알이 최고의 자리를 더욱 굳건하게 할 수 있게 해주었다.

당시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에 이르는 시점에 이르기까지 유럽 축구는 이른바 3M의 시대였는데[40][41], 이 세 클럽이 서로 물고 물리는 각축전을 벌이며 유럽 축구의 패왕 자리를 놓고 자웅을 겨루던 시기였다. 셋 모두 서로가 상대가 아니고서는 여간해선 지지 않았고 유럽 무대에서 꾸준하게 강한 모습을 보이며 치열한 패권 다툼을 벌였던 시기로 기억된다.
시즌 레알 마드리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바이에른 뮌헨
1997-98 파일:UEFA_Champions_League_trophy.png
7
8강 8강
1998-99 8강 파일:UEFA_Champions_League_trophy.png
2
준우승
맨유에게 패배
1999-00 파일:UEFA_Champions_League_trophy.png
8
8강
마드리드에게 패배
4강
마드리드에게 패배
2000-01 4강
바이에른에게 패배
8강
바이에른에게 패배
파일:UEFA_Champions_League_trophy.png
4
2001-02 파일:UEFA_Champions_League_trophy.png
9
4강 8강
마드리드에게 패배
결과
우승 3 1 1
준우승 - - 1
4강 1 1 1
8강 1 3 2
그러한 3M의 시대 속에서도 가장 돋보인 클럽은 레알 마드리드였고 당시 레알 마드리드를 진두지휘하며 위기 때마다 구해냈던 존재가 바로 라울 곤살레스였다. 저 시기 동안 라울은 2차례의 챔피언스 리그 득점왕 기록을 세우며 챔피언스 리그의 사나이로 등극했고, 당시 라울의 존재는 마드리드 로컬 보이라는 상징성과 더불어 연고지역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으며 라커룸 안팎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과시했으며 전술적인 면에 있어서도 레알 마드리드에서 그 어떤 선수로도 대체할 수 없을 만큼 필수 불가결한 존재였다.

특히 이 시기 라울은 페르난도 모리엔테스와 함께 환상적인 궁합을 보이며 소위 '영혼의 투 톱'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또한 모리엔테스와는 스페인 국가대표 팀에서도 한솥밥을 먹으며 이 시기 스페인 국가대표 팀을 상징하는 공격수로 확고히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유스 선수 시절부터 이후 레알 마드리드를 떠날 때까지 쭉 함께 했던 죽마고우인 구티도 이 힘든 시기를 같이 버텼던 든든한 동료 중 하나였다. 이처럼 라울이라는, 아만시오 아마로 이래 내려온 스페니시 프랜차이즈 스타 계보가 다시금 확고히 자리 잡게 되었고 이에 따라 과거 독수리 오 형제나 Yé-yé 마드리드 시대와 같은 스페니시 혹은 마드리드 유스 출신 선수들을 주로 기용하는 정책이 시행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11. 플로렌티노 페레스 1기 (2000~2006)

하지만 그런 전망은 플로렌티노 페레스가 회장에 당선되자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페레스의 주도 아래 레알은 '축구는 곧 레알 마드리드로 통한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세계를 대표하는 스타 플레이어들을 영입, 과거 30여 년 전 유럽을 손아귀에 넣고 호령하며 공포의 헤게모니를 구축했던 그 시절을 다시금 반복하기 위하여 약 30년간 마드리드가 취해 왔던 방식과는 정반대의 정책이 시작된다. Los Galácticos(은하계 군단), 즉 갈락티코스 정책이 시작된 것이다.

11.1. 갈락티코스 1기

시즌 라리가 유럽 대항전 코파 델 레이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UEFA 슈퍼컵 인터컨티넨탈컵
2000-01 파일:laLiga_trophy.png
28
UCL
4강
64강 × 준우승 준우승
2001-02 3위
( 2)
파일:UEFA_Champions_League_trophy.png
9
준우승 파일:supercopa_de_espana.png
6
× ×
2002-03 파일:laLiga_trophy.png
29
UCL
4강
8강 × 파일:UEFA_Supercup_trophy.png
1
파일:Intercontinental_Cup_trophy.png
3
2003-04 4위
( 3)
UCL
8강
준우승 파일:supercopa_de_espana.png
7
× ×
2004-05 2위
( 2)
UCL
16강
16강 × × ×
2005-06 2위
( = )
UCL
16강
4강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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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팀 창단 100주년
국내 팬들과 대중들에게 레알 마드리드의 이름이 알려진 결정적인 계기라면 2000년도 초반 플로렌티노 페레스 회장이 이끌었던 정책인 바로 이 갈락티코스 정책이다. 이 정책의 요점을 말하자면 '세계 유수의 공격수들을 모아 드림 팀을 만들겠다!'라는 것인데 실제로 거의 모든 선수들이 각 나라 역대 최고의 선수들이라고 봐도 무방할 선수들을 끌어 모아서 선수진을 구성했다.
파일:zidane goal2002.jpg
'지주' 지네딘 지단의 2001-02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발리 결승골
파일:RM_100th anniversary.jpg
창단 100주년에 들어올린 빅 이어
초대형 영입의 시작이었던 루이스 피구[42]는 레알 마드리드의 원수와도 같은 FC 바르셀로나의 중심 선수이자 부주장이었기에 당시의 파장은 엄청났다.[43] 그 이후 유벤투스로부터 지네딘 지단을 사 오면서[44] 2001-02 시즌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하게 되는데 이때가 갈락티코스의 성적이 절정인 시기였다. 다만 당대 최고의 플레이메이커들로 불리던 지단과 피구의 공존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2001-02 시즌 초반 비센테 델 보스케 감독은 두 명의 플레이메이커를 사용하는 데 골머리를 앓았고 시즌 중반 피구가 부상을 당하자 이전부터 수비력 측면에서 문제를 드러내던 지단 밑에 두 명의 수비형 미드필더를 두면서 경기력이 안정되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 시즌 마드리드는 라리가에서 3위를 차지하는 데 그친다. 그리고 정확히 구단 창단 100주년이던 2002년 3월 6일,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열린 코파 델 레이 결승전에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에게 1-2로 패배하는 망신을 사기도 했다.

지단과 피구의 공존이 비로소 성공적으로 자리잡은 것은 2002-03 시즌부터인데, 이 시즌에 마드리드는 라리가 타이틀은 되찾지만, 수비가 노쇠해서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전성기에 들어선 파벨 네드베드가 이끄는 유벤투스에 석패하며 4강에서 탈락했다. 당시 지단, 피구, 라울이 2선에서 보여주던 플레이는 정말로 아름다웠지만 결과가 아쉬웠다. 반면 리그 내용은 혼란이 많았던 편이었는데, 챔스에 전력을 너무 짜내서 그런지 주전들이 줄부상을 거듭하는 바람에 한때 2위로 주저앉았으나, 막판 페이스로 역전 우승을 이뤄내 레알 소시에다드의 우승 시도를 겨우 저지해냈다. 이 시즌에서 팀은 득점 86점으로 1위였으나, 전술한 수비진 노쇠로 실점은 리그 4위인 42점이었다. 챔스에서는 33득점, 22실점을 기록했다.

그 와중에도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으로 화려하게 부활한 브라질의 호나우두를 영입하였다. 호나우두-라울 투 톱에 지단-피구 공격형 미드필더진이라는 유례 없던 최강의 공격진이 편성됨으로써 이때만 하더라도 네임 밸류와 공격력 모두에서 만점 활약을 펼쳤다.[45] 다만 이 시기의 호나우두는 장기 부상 이전의 그는 아니었다. 성향상 포스트 플레이가 불가능했기에 공격 방식에 한계가 있었고, 마드리드 이적 후 초기엔 그나마 괜찮았던 활동량도 체중이 증가하기 시작하자 급락하면서 파트너였던 라울만 죽어났다. 뒤이어 2003년에 잉글랜드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상징과도 같은 데이비드 베컴을 영입하는데...

11.2. 무너진 갈락티코스 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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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베컴, 루이스 피구, 호나우두, 지네딘 지단, 라울 곤살레스
이전 시즌 악조건 속에서도 팀을 우승시킨 비센테 델 보스케 감독과 주장 페르난도 이에로를 내치면서까지 강행한 베컴의 영입은 두 가지 문제점을 낳았다. 첫째는 베컴의 포지션이 피구와 겹쳤다는 것이다. 두 선수 모두 당대 최고의 오른쪽 날개로 평가받았기에 둘 중 하나는 포지션을 양보할 수밖에 없었고, 그렇다고 막대한 돈을 들여 사온 선수를 벤치에 둘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수비력이 그나마 나은 베컴을 중앙 미드필더로 두고 두 선수의 공존을 꾀한 포메이션인데, 이는 당연히 실패한다. 영입 과정에서 베컴과 피구의 포지션 충돌을 막기 위해 전 맨유 수석 코치 카를로스 케이로스를 감독으로 모셔와 지략을 빌리고자 했고, 수비형 미드필더 플라비우 콘세이상보루시아 도르트문트로 임대했으나 마찬가지였다.

두 번째 문제는 팀 내에서 위화감이 생긴 것이다. 호나우두까지만 하더라도 그러려니 했는데, 베컴이 들어오면서 팀 내에서 '갈락티코스가 아닌' 선수들 사이에서 위화감이 생겼다. 대표적인 예가 수비형 미드필더였던 클로드 마켈렐레였는데, 플로렌티노 페레스 회장은 팀의 화려함과 마케팅을 기준으로 그를 "4m짜리 패스밖에 못하는 애"라고 저평가했다. 이로 인해 전 주장 이에로가 페레스의 방침을 비판했고, 결국 마켈렐레는 당시 갑부 구단주 로만 아브라모비치를 맞아 신흥 강호로 부상하던 첼시 FC로 이적하게 된다. 하지만 마켈렐레의 이적은 어쩔 수 없었던 것이, 당시 갈락티코들에 준하는 주급을 재계약 협상 시에 요구했고 당시 주급 체계상 마드리드는 도저히 마켈렐레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었다. 만약 이때 마켈렐레의 요구를 수용했다면 오늘날의 레알 마드리드의 주급 체계와 프랜차이즈를 구축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 외에 호나우두와 궁합이 맞지 않는다든가 하는 자잘한 문제들도 있었다. 호나우두는 다른 재능에 비해 머리를 극도로 못 쓰는 공격수였는데, 크로스 능력이 역대 최고 수준인 베컴을 데려왔으니 당연히 비효율이 발생했다.

레알 마드리드의 강력한 공격진을 뒷받침하던 마켈렐레가 이적한 뒤 마드리드는 슬럼프에 빠지게 된다. 이후로 마드리드는 마켈렐레의 후계자를 찾는 데 전념하게 된다. 거론된 후계자만 해도 상당한 숫자인데, 파블로 가르시아, 에스테반 캄비아소, 토마스 그라베센, 에메르송, 마하마두 디아라, 라사나 디아라 등이 있다. 하지만 누구도 마켈렐레만큼의 포스를 보여주지는 못했다. 그리고 자그마치 6년 후, 그를 완벽하게 대체할 만한 수비형 미드필더가 나타났다. 이후 2006-07 시즌 라리가 우승을 차지하기까지 단 하나의 우승 트로피도 가져오지 못하게 된다. 게다가 그 동안 라이벌 바르셀로나는 무너진 팀을 재건하며 2005-06 시즌 2번째 빅 이어를 들었고, 앞으로 다가올 영광의 순간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는 레알 마드리드에게 큰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허나, 이런 성적상의 실패와는 별개로 베컴의 영입으로 갈락티코스의 마케팅은 완성되어, 선수에게 투자한 것보다 훨씬 많은 금전적 이익을 보게 되었고 1990년대 이후 팀에 쌓여왔던 부채를 탕감해 재정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단, 당시 마드리드의 부진을 마켈렐레의 이적 탓이라고 단정짓는 것은 어폐가 있을 수도 있다. 마켈렐레 이적 후인 2003-04 시즌 레알 마드리드는 강력한 모습을 보이면서 리그 1위를 달리고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었으나, 로테이션 부족으로 주전 멤버들의 혹사가 시작됐고 후반기에 그 영향이 크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마켈렐레의 이적으로 바로 팀 경기력에 문제가 생겼던 건 아니다. 분명 스타 선수들의 영입으로 불균형적인 스쿼드가 된 것은 사실이나 수비수나 수비형 미드필더도 꾸준히 영입하면서 그 간격을 메꾸려고 했다. 다만 그 영입들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면서 팀의 붕괴를 막을 수 없었을 뿐이다. 이 내용은 레알 마드리드 CF/오해 문서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그렇게 망한 갈락티코스였지만 선수의 기본적인 능력치 탓인지 FIFA 시리즈 게임에서 2003-04 레알 마드리드는 무시무시한 강팀이다.

11.2.1. 문제점

이 정책이 결과적으로 성적 면에서 실패한 것은 팀의 균형을 짜는 데 있어서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는 정책이었기 때문이다. 일단 이 정책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공격진은 지단 같은 슈퍼 스타를 영입해서 채우고, 수비진은 프란시스코 파본 같은 카스티야 출신으로 메꾸겠다!'라는 정책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을 지다네스 & 파보네스라고 불렀는데 이게 왜 문제가 되냐면 공격에 비해 수비 포지션은 자체 스펙보다 경험에 의존해야 하는 경우가 크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수비수들이 공격수들에 비해 다소 나이가 많다 하더라도 더 오래 뛰는 것이 이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더군다나 마드리드는 이전부터 수비진이 빈약하다는 소리를 들어왔다. 마누엘 산치스페르난도 이에로가 1990년대 레알 마드리드의 센터백을 맡았지만 백업으로 있던 이반 캄포아이토르 카랑카는 안정성이 부족했고, 이후 이반 엘게라가 노쇠해 가는 이에로의 파트너가 되었다. 이런 가운데 레알 마드리드는 갈락티코스를 진행하면서 팀에 오랫동안 충성했던 베테랑 선수들[46]을 방출하고 그 자리를 공격수로 채우다 보니 팀의 균형은 점차 무너져만 갔다. 물론 포지션 중복으로 인한 비효율성 또한 큰 문제로 불거졌다.

결국 수비진을 카스티야 출신으로 메꾸기는 벅찼는지 AS 로마에서 이름을 날리던 센터백인 왈테르 사무엘을 들여 왔으나 별 볼 일 없는 활약으로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로 헐값에 방출된다.[47] 그리고 뉴캐슬 유나이티드에서 뛰어난 유망주로 평가받던 조너선 우드게이트도 영입했는데 이 선수가 워낙 유리몸이라 2년 동안 9경기라는 최악의 기록을 보여 주었고 데뷔 경기에서 자책 골을 넣는 등 전설과도 같은 활약으로 미들즈브러 FC로 방출된다. 지금도 레알 마드리드 팬들 사이에서 우드게이트라는 이름을 말하는 것은 금기시되고 있다. 참고로 이 시기 마드리드와 뉴캐슬의 거래 관계가 재미있는데, 서로에게 맞사기를 먹였다. 뉴캐슬에선 우드게이트라는 대박 사기를 쳤던 반면 마드리드 역시 마이클 오언이라는 만만찮은 사기를 먹였다. 이후 수비수 최초로 발롱도르를 수상한 파비오 칸나바로와 맨유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주었던 가브리엘 에인세를 영입하며 수비를 안정시키려고 했으나 녹록치 않았고, 이후 세르히오 라모스, 마르셀루 등이 성장하고 나서야 수비에서도 숨을 돌리게 된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이케르 카시야스를 제대로 성장시켰고 2004-05 시즌에는 아래와 같은 경악스러운 슛 허용 대비 실점률을 보여줬다.
▲ 2004-05 시즌 라리가 상위권 3팀의 슛 허용 숫자 비교
1위 FC 바르셀로나 : 총 331회 슛 허용, 173회 유효 슛 허용, 29실점
2위 레알 마드리드 : 총 583회 슛 허용, 348회 유효 슛 허용, 31실점
3위 비야레알: 총 421회 슛 허용, 229회 유효 슛 허용, 37실점

▲ 2004-05 시즌 사모라 상 순위(출전 횟수-실점으로 집계)
1위 빅토르 발데스[48] : 35경기 출전, 25실점, -10
2위 이케르 카시야스[49] : 37경기 출전, 30실점, -7
3위 레오 프랑코[50] : 37경기 출전, 32실점, -5
당시 레알 마드리드의 슛 허용 수는 라리가 2로 강등된 19위 CD 누만시아와 20위 알바세테 발롬피에의 기록을 넘어서는 놀라운 수치였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 정책으로 인해 제일 큰 피해를 본 케이스는 마드리드의 유스들이라고 단언할 만큼, 우수한 꿈나무들이 다른 팀으로 옮겨 가거나 재능을 꽃피우지 못하게 되는 현상이 심했다. 사무엘 에투의 경우 바르셀로나로 이적하여 친정 팀을 상대로 수많은 골들을 기록하며 레알 마드리드에게 제대로 직격탄을 때렸다. 감독들 역시 플로렌티노 페레스의 우승 조급증과 과도한 현장 간섭 때문에 1년도 못 가서 경질되는 사태를 맞았는데, 2003년 비센테 델 보스케 경질 후 목이 잘린 감독들만 5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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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하비 가르시아, 알바로 아르벨로아, 로베르토 솔다도, 알바로 네그레도, 후안프란으로, 국가대표 소집 중에 찍은 사진이다.

사무엘 에투뿐 아니라 하비 가르시아, 로베르토 솔다도, 보르하 발레로, 디에고 로페스[51], 알바로 네그레도, 후안프란, 후안 마타 등 라리가나 유럽 주요 리그에서 카스티야 출신으로서 타 팀 주전 자리를 꿰차고 국가 대표까지 뽑히는 선수들이 꽤 많다. 그리하여 마드리드는 유스 선수들을 방출할 시 일정 금액에 선수를 재영입할 수 있는 바이백 조항을 자주 걸어 둔다.

또한 카스티야 출신 선수들이 다른 팀으로 이적하여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골을 넣는, 이른바 '부메랑'이 가끔씩 날아오기도 한다. 사무엘 에투는 최악의 라이벌 바르셀로나로 이적하여 주전 스트라이커가 되어 리그 엘 클라시코에서 호나우지뉴와 함께 최고의 활약을 보이며 레알 마드리드를 탈탈 털었고, 급기야 2005-06 시즌 바르셀로나에 2번째 빅 이어를 선사하며 제대로 빅 엿을 먹였다. 최근 사례로는 유벤투스로 이적한 알바로 모라타에게 2014-15 UCL 4강 2차전에서 골을 먹고 결승전 진출에 실패했다.[52]

한편 앞서 언급한 바이백 조항으로 2008-09 시즌에 헤타페에서 재영입된 카스티야 출신 루벤 데 라 레드는 유로 2008 당시 국가 대표에도 소집되는 등 뛰어난 잠재력을 가진 선수로 평가되었으나 정확한 진단이 나오지 못한 심장병에 의해 24세의 젊은 나이로 은퇴를 하게 되었다. 측면 수비수 알바로 아르벨로아는 리버풀이 마드리드에 역수출했다. 하지만 계속 잔류시켰다면 괜한 돈 안 써도 되지 않았느냐는 지적에는 뭐라 답할 수 없다. 이에 레알 마드리드의 전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페르난도 가고의 입단식에서 "우리는 암탉이 있으나 다른 곳에서 계란을 산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12. 라몬 칼데론 (2006~2009)

시즌 라리가 UEFA 챔피언스 리그 코파 델 레이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2006-07 파일:laLiga_trophy.png
30
16강 16강 ×
2007-08 파일:laLiga_trophy.png
31
16강 16강 준우승
2008-09 2위
( 1)
16강 32강 파일:supercopa_de_espana.png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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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알 마드리드의 갈락티코스 정책을 이끌었던 플로렌티노 페레스 회장이 성적 부진 등의 책임을 지고 2006년 7월 비시즌 기간 회장 선거를 거쳐 그 뒤를 라몬 칼데론 회장이 이어받게 되었다. 칼데론은 이전의 갈락티코스가 아닌 다소간 실용주의 노선을 표방하며 파비오 카펠로 감독을 다시금 불러들였고 카펠로 감독 체제하에 마드리드는 2002-03 시즌 이후 4시즌 만에 라리가 우승 트로피를 탈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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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 시즌 우승 후 카펠로 감독[53]에 이어 2007-08 시즌 베른트 슈스터 감독이 들어온 이후 잠깐 동안의 네덜란드 커넥션 시기가 있었다. 이는 공격수 뤼트 판니스텔로이, 클라스 얀 훈텔라르, 윙 포워드 아르연 로번, 공격형 미드필더 웨슬리 스네이더라파엘 판데르파르트, 수비수 로이스톤 드렌테까지 네덜란드 국가 대표 선수만 6명이 뛰던 시절이었다. 이들 중 몇 명의 활약은 썩 괜찮아서 2번의 라리가 우승을 이끌어 내기도 했고 우승을 하지 못했던 시즌에도 바르셀로나와의 화끈한 리가 1위 탈환 경쟁에 큰 힘이 되었다.

하지만 훈텔라르의 적응 실패 및 주전 경쟁 탈락, 판니스텔로이의 부상[54], 로번의 부상, 반 더 바르트의 적응 실패, 스네이더의 부상, 드렌테의 기량 미숙으로 결과적으로 처참한 실패로 끝났고, 로번은 FC 바이에른 뮌헨, 스네이더르는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55], 훈텔라르는 AC 밀란, 그리고 판니스텔로이는 함부르크 SV로 이적하게 되었다.

반 더 바르트의 경우 카카에게 밀려 벤치를 지키게 되자 끝까지 나가고 싶어했으나, 이적 협상을 번번이 실패하였고 암에 걸린 부인이 스페인의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두고 이적할 수는 없어 남아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 네덜란드 커넥션을 주도했던 칼데론 회장이 구단 총회에서 투표 조작 파문을 일으키며 임기를 마저 채우지 못하고 자진 사퇴 형식으로 2009년 1월에 사임했으며, 팬들은 페레스 시절의 화려했던 추억을 그리워했다. 이에 따라 그 자리를 플로렌티노 페레스가 다시 차지하게 되면서 과거 칼데론의 유산을 지우겠다는 미명하에 네덜란드 커넥션은 급격히 와해되었다.

결국 2010-11 시즌이 시작하기 바로 전 반 더 바르트도 토트넘 홋스퍼 FC로 이적, 로이스톤 드렌테도 당시 승격 팀인 에르쿨레스 CF로 임대 보내면서 네덜란드 커넥션은 완전히 끝났다.

12.1. 2006-07 시즌

플로렌티노 페레스가 성적 부진을 책임지고 회장직에서 물러나고, 2006년 7월 선거를 통해 변호사 출신의 라몬 칼데론이 새로운 레알 마드리드의 회장으로 부임했다. 칼데론은 이전의 갈락티코스가 아닌 실용주의 노선을 표방하며 이전에 레알 마드리드를 맡은 경험이 있는 파비오 카펠로 감독을 불러들였고, 카펠로는 자신의 스타일에 맞게 팀을 빠르게 재정비했고 인터뷰에서 공격적인 것보다 결과가 더 중요하다고 말하며 기존의 레알 마드리드 스타일을 버릴 것임을 공언했다.

여름 이적 시장 때 활발한 영입을 통해 스쿼드를 보강했다.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맹활약을 펼치며 이탈리아의 우승을 이끈 파비오 칸나바로라는 센터백 자원을 영입했으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주전 스트라이커로 활약하던 뤼트 판니스텔로이를 영입했다. 이외에도 수비형 미드필더 마하마두 디아라에메르송을 각각 리옹과 유벤투스로부터 영입했다. 그리고 아스날에서 향수병으로 고생하던 호세 안토니오 레예스를 한 시즌간 임대로 영입했다. 반면에 레알 마드리드에서 이탈한 선수로는 은퇴를 선언한 지네딘 지단, 알바로 아르벨로아, 줄리우 밥티스타, 조나단 우드게이트 등이 있다.

리그 개막전부터 0-0으로 비기고 챔피언스 리그 조별 리그 1차전부터 0-2로 깨지면서 출발이 좋지 않았지만, 리그 2~4R 경기와 챔스 조별 리그 2차전에서 승리를 따내며 4연승을 달렸다. 그러나 이후 리그 5~6R 경기에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 비기고 헤타페 CF에 0-1로 패배하며 다시 상승세에 제동이 걸리고 말았다. 챔스 조별 리그 3차전에서 승리를 기점으로 7R 엘 클라시코 2-0 승리, 8R 짐나스틱 데 타라고나전 3-1 역전승으로 다시 3연승을 달렸다. 이후 11월까지 리그에서는 RC 셀타 데 비고전 패배를 제외하면 모두 승리를 따내며 2위로 올라섰고, 코파 델 레이에서는 16강 진출에 성공했다. 그러나 12월에는 다시 페이스가 꺾이게 되는데, 리그 4경기에서 2승 2패로 부진하며 다시 순위가 3위로 떨어지고 말았으며[56], 챔스에서는 조별 리그 마지막 2경기에서 모두 비기며 조 2위로 16강에 진출하게 된다. 여기에 경기 외적으로도 전반기 레알 마드리드의 분위기는 개판이었는데, 카펠로 감독이 분위기 쇄신을 이유로 호나우두, 데이비드 베컴 같은 톱 스타들을 배제하면서 마찰을 빚게 되었고, 카펠로의 애제자였던 안토니오 카사노가 카펠로를 디스하다가 기자들에게 녹화되는 바람에 방송에 타는 등 말이 아니었다. 여기에 베컴은 시즌이 끝나는 대로 LA 갤럭시로 이적료 없이 이적할 것임이 확정된 상황.

그렇게 전반기를 아쉽게 마무리한 상황에서 겨울 이적 시장 때 호나우두AC 밀란에 매각한 반면, 아르헨티나 출신의 페르난도 가고곤살로 이과인을 영입하고 브라질 출신의 마르셀루를 영입하는 등 잉여자원을 처분하고 미래를 위한 자원들을 영입하게 된다.

그러나 1월의 레알 마드리드는 12월에 못지 않게 좋지 않은 행보를 보였다. 2007년 첫 경기였던 리그 17R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 원정에서 0-2로 거하게 깨지더니, 코파 델 레이에서는 16강에서 레알 베티스에 원정 다득점 원칙에 밀려 탈락하고 만 것이다. 여기에 1월 마지막 경기이던 20R 비야레알전과 2월 첫 경기이던 21R 레반테 UD전에서 모두 패배하며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그러다 챔스 16강 1차전 바이에른 뮌헨을 상대로 홈에서 3-2 승리를 따내며 분위기 반전에 성공한 것도 잠시 리그에서 23R 베티스전부터 26R 바르셀로나전까지 4경기 모두 비기며 리그 순위는 4위까지 하락했고[57], 챔스 16강 2차전에서는 역대 최단시간 골을 내주는 등의 굴욕을 당하며 1-2로 패배해 원정 다득점 원칙으로 인해 탈락하고 만다.

그렇게 3월 초까지 리그 4위, 챔스 16강 탈락, 코파 델 레이 16강 탈락이라는 암담한 상황에서 반전이 시작된다. 카펠로가 베컴을 다시 중용하고, 판니스텔로이가 라울 곤살레스와의 호흡이 계속해서 발전하며 셋의 캐리가 시작된 것이다. 27R 힘나스틱전 2-0 승리, 28R 셀타 비고전 2-1 승리, 29R CA 오사수나전 1-0 승리로 3연승을 달리며 다시 순위를 3위로 끌어올렸다. 비록 30R 라싱 산탄데르전에서 2-1로 패배했지만, 31R 발렌시아 CF전 2-1 승리, 32R 아틀레틱 클루브 원정 4-1 승리, 33R 세비야 FC전 3-2 승리를 따내며 만만치 않은 3연전을 모두 승리해 리그 순위를 2위까지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34R RCD 에스파뇰전에서는 왈테르 판디아니에 해트트릭을 내줘 3-1로 뒤지고 있었으나, 후반전에 라울과 레예스의 골로 금방 따라잡았고, 89분에 이과인의 극장 골이 나오며 4-3 대역전승을 따내게 된다. 그리고 같은 날에 바르셀로나가 무승부를 기록하며, 레알 마드리드가 리그 선두로 올라서게 된다. 35R RC 레크레아티보 데 우엘바전에서 3-2 승, 36R 데포르티보전에서 3-1 승리를 따내며 레알 마드리드의 리그 우승 가능성이 더욱 높아지게 된다. 그러던 37R 레알 사라고사 원정에서는 졸전 끝에 판니스텔로이의 멀티 골에 힘입어 겨우 무승부를 따냈는데, 같은 날 바르셀로나도 무승부를 기록하며 순위에 변동이 없었다. 대망의 리그 마지막 경기인 RCD 마요르카전에서는 선제골을 내주고 후반 20분 넘어서도 뒤지고 있었으나, 레예스의 멀티골과 디아라의 득점으로 3-1 역전승을 따내며 4년 만에 라리가 왕좌를 되찾게 된다. 2위 바르셀로나와의 승점은 같으나, 상대 전적에서 레알이 1승 1무로 우위에 점했기에 우승을 거머쥐을 수 있었다.

앞서 언급한대로 레알 마드리드가 3월 중순부터 급격하게 살아날 수 있었던 데에는 판니스텔로이와 라울 투 톱과 이를 보조한 베컴의 활약이 매우 컸다. 판니스텔로이는 리그 31R부터 최종전까지 8경기에서 무려 10골을 때려박았으며, 최종전까지 승점이 동일했던 FC 바르셀로나와의 승부에 결정타를 꽂은 것이 바로 판니스텔로이였다. 특히 엘 클라시코에서 1차전 1골, 2차전 2골을 꽂아넣으며 팀에게 우승컵을 견인했다. 베컴은 카펠로와 불화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질 좋은 크로스로 판니스텔로이의 골을 계속해서 도우며 클래스는 영원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라울은 득점 면에서는 이전 두 시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58], 경기력 측면에서는 확실히 이전과 달랐으며, 판니스텔로이와 라울 투 톱은 처음 손발을 맞추는 선수들답지 않게 뛰어난 호흡을 보였다. 이외에도 디아라와 에메르송이 첫 시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전으로 자리잡아 중원을 구축했으며, 최후방은 이케르 카시야스가 잘 지켜주었다. 또한 레예스나 이과인 등의 공격 자원도 후반기 막바지에 중요한 상황에서 득점을 기록해주며 리가 우승에 큰 공헌을 했다.

한편, 파비오 카펠로 감독은 어수선한 팀 내 분위기와 레알 마드리드와 어울리지 않는 전술 스타일로 인해 10년 전처럼 우승시키고도 해고되었다. 이외에 "당신이 필요없다던 데이비드 베컴의 활약으로 우승해놓고 그게 어떻게 당신 능력임?"이라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12.2. 2007-08 시즌

직전 시즌에 헤타페에서 돌풍을 일으켰던 베른트 슈스터가 새로운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리고 네덜란드 커넥션이 시작되며 아르연 로번, 웨슬리 스네이더, 로이스톤 드렌테를 영입했고, 페페까지 영입해 수비를 강화했다.

시즌 초에 열린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에서는 세비야 FC를 만났는데, 원정에서 1-0으로 패배한 후 홈에서 프레데리크 카누테에게 해트트릭을 허용하며 3-5로 패배해 합계 3-6으로 준우승을 차지했다.

시즌을 안 좋게 시작했지만 리그 개막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전에서 2-1 승리를 따냈고, 2R 비야레알 CF 원정에서는 5-0 승리, 3R UD 알메리아전에서는 3-1 승리를 따내면서 리그 3연승으로 출발했다. 그렇게 레알 마드리드는 8R RCD 에스파뇰 원정에서 2-1로 패배하기 전까지 리그에서 무패를 이어갔다. 이후에도 레알 마드리드는 리그에서 승승장구하며 21R까지 17승 2무 2패를 기록했다. 이 기간 중 14R 라싱 산탄데르전부터 21R 비야레알 CF전까지 8경기 연속 승리를 기록했으며, 그 사이 FC 바르셀로나 원정과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원정에서 각각 1-0과 2-0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한편 이 기간 동안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SV 베르더 브레멘, SS 라치오, 올림피아코스 FC와 같은 조에 배정되었다. 원정에서는 2무 1패로 아쉬운 모습을 남겼지만, 홈에서 펼쳐진 3경기에서는 9득점 4실점으로 모두 승리했다. 그렇게 조별리그에서 3승 2무 1패를 거두며 조 1위로 16강에 진출하는 데 성공했다. 16강 상대는 AS 로마. 코파 델 레이는 16강에서 RCD 마요르카에게 원정 2-1 패, 홈 0-1 패로 합계 1-3으로 패배하며 무기력하게 탈락했다.

거기에 2월에 접어들며 팀은 아쉬운 모습들을 보여주었는데, 2월에 펼쳐진 리그 4경기에서 UD 알메리아, 레알 베티스, 헤타페에게 3패를 당했고 챔피언스 리그 16강 1차전 AS 로마 원정에서는 다비드 피사로알레산드로 만시니에게 실점하며 1-2로 패배했다. 그리고 2차전 홈에서는 페페가 퇴장당하면서 라울 곤살레스의 득점에도 불구하고 다시 1-2로 패배, 16강에서 탈락했다.

12.3. 2008-09 시즌

2연속 리그 우승을 따낸 상황에서 직전 시즌에 감독을 맡았던 베른트 슈스터를 연임했다. 프리시즌에는 맨유에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영입이 거의 확실시될 것처럼 보였으며, 다비드 비야다니 알베스 영입 가능성 소식까지 전해지며 팀의 분위기는 더욱 좋아졌다. 그리고 레알 유스 출신인 루벤 데 라 레드하비 가르시아도 임대에서 복귀해 다시 합류하며 스쿼드의 뎁스도 두꺼워지게 되었다. 그러나 막상 빅네임 영입은 지지부진했고, 호날두 이적설로 인해 호비뉴의 첼시 이적설이 나게 된다. 게다가 웨슬리 스네이더가 프리시즌 경기 도중에 아부 디아비의 깊은 태클을 맞고 왼쪽 무릎인대 부상으로 장기간 아웃되는 것이 확정되면서, 함부르크의 라파엘 판데르파르트를 급하게 영입한다. 그리고 호날두는 끝내 맨유와 재계약을 체결하면서, 영입 시도는 다음 기회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레알 마드리드는 리그 개막을 앞두고 진행된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에서 발렌시아를 꺾고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게 된다.

문제는 여전히 재계약을 하고 있지 않던 호비뉴였다. 첼시와의 이적설에 대해 레알 마드리드는 호비뉴의 의사를 존중한다는 입장을 발표했고, 그렇게 이적 시장 막판에 이적료 32m 파운드로 첼시로의 이적이 유력했다. 그러나 최종 발표 전에 첼시 공식 스토어에 호비뉴의 유니폼 판매가 시작된 것에 분노한 칼데론 회장이 급하게 호비뉴 이적을 무효시키고 만다. 그렇게 호비뉴와 동행하는 듯했으나, 뜬금없이 9월 1일에 맨체스터 시티가 호비뉴를 40m 파운드에 영입하게 된다. 그렇게 레알 마드리드는 스네이더르와 호비뉴의 공백 속에서 시즌을 맞게 되었다.

​라리가 개막전에서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에게 1-2 충격패를 당하며 이적 시장 때의 뭐 같은 행보가 팀 성적에 그대로 영향을 주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그래도 이후로 8R까지는 무패를 달리며 6승 1무 1패로 3위를 유지했다. 뤼트 판니스텔로이, 곤살로 이과인, 라울 곤살레스 등의 공격진이 팀을 이끌었고, 신예 루벤 데 라 레드가 중원에서 마하마두 디아라와 함께 맹활약을 펼치는 흐름이었다. 그러나 10월 중순에 마하마두 디아라가 오른쪽 무릎 부상이 발생했고, 10월 말에는 루벤 데 라 레드가 경기 중에 저혈압으로 쓰러진 후 시즌 아웃이 확정되더니, 11월 중순에는 판니스텔로이가 오른쪽 무릎 반월판 부상으로 인해 수술 후 시즌 아웃되는 악재가 연이어 발생하며 급격하게 팀의 분위기가 저하되고 만다. 또한 여러 포지션의 여러 선수들이 부상에 시달리며 제대로 팀 운영을 할 수가 없게 된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 레알 마드리드는 코파 델 레이 32강에서 탈락하고, 리그 11R부터 15R까지 5경기에서 4패를 기록하며 완전히 성적이 곤두박질쳤다. 그렇게 레알 마드리드는 리가 순위는 5~6위를 오가게 되는 상황까지 와버렸고, 이에 다급해진 수뇌부는 감독을 후안데 라모스로 교체한다. 그 와중에 유소년 디렉터였던 미첼이 물러나는 동시에 언론을 통해 칼데론 회장이 팀보다 자신을 더 생각하고 있으며 유스 팀에 대한 지원이 줄어들고 있다며 폭로하면서 팀 분위기는 최악으로 치닫게 된다.

겨울 이적 시장에서는 AFC 아약스클라스얀 훈텔라르포츠머스 FC라사나 디아라를 영입했고, 또한 QPR로 임대되었던 다니 파레호를 급하게 임대 복귀시켰다. 그런데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에서 주전급 윙어로 활약함에도 득점 하나 없던 줄리앙 포베르를 임대로 영입하는 어이없는 행보를 보이고 만다.

그리고 2008년 12월 말에 예산 회계 결산 총회가 있었는데, 라몬 칼데론 회장이 예산 결산 총회 통과를 위해 투표권이 없는 인원들을 참가시켜 부정 투표를 했다는 소식을 아스가 긴급 보도하며 상황은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칼데론 회장은 당연히 부인했지만 이사회에 의해 강제로 해임될 위기가 찾아오자 직접 사임한다. 이후 조사를 통해 금전적으로도 범죄를 저질렀음이 밝혀지면서 법적으로 처벌을 받기까지한다. 이후 1월 중순에 '비센테 볼루다'라는 사업가 겸 변호사가 제 17대 회장으로 취임했다.

​2009년 들어서 레알 마드리드후안데 라모스 체제에서 계속해서 승리를 챙기며 어느덧 리그 순위를 2위까지 끌어올리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후반기 챔피언스 리그 명단 등록을 새로 해야 했는데, 당시 UEFA 규정상 다른 팀에서 UEFA 대회에 참가한 선수를 중간에 등록할 수 있는 경우는 팀당 1명으로 제한되어 있는데 새로 영입한 훈텔라르, 디아라 모두 전 소속 팀에서 UEFA 주관 대회에 참가한 이력이 있어서 둘 중 한 명만 데리고 챔스를 가야 하는 역대급 병크가 터지고 만다. 결국 레알은 디아라를 명단에 포함시키게 된다. 그러나 챔스 16강에서 리버풀 FC를 상대로 홈에서 100으로 지더니, 2차전 원정에서는 4-0으로 영혼까지 털리며 5년 연속 16강 탈락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성적을 받게 된다.

그렇게 레알 마드리드는 또다시 3월부터 리그 일정만을 남겨두게 되었고, 12월 16R 발렌시아 CF전부터 4월 말 33R 세비야 FC전까지 18경기에서 17승 1무로 무패행진을 달리며 리그 역전 우승까지도 노려볼 수 있는 상황까지 오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맞이한 34R 경기가 엘 클라시코였다. 이 경기 전까지 1위 FC 바르셀로나의 승점은 82점이고 레알 마드리드의 승점은 78점이었기에 사실상 우승 결정전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그렇게 홈에서 펼쳐진 엘 클라시코에서 이과인이 선제골을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비 라인을 바짝 끌어올려서 경기하다가 뒷공간을 탈탈 털리며 2-6으로 대참사를 맞고 만다. 그러면서 승점 차는 7점까지 벌어지고 만다. 그런데 더욱 가관인 것은 남은 리그 4경기에서 모두 패배하며 자멸하고 말았다. 같은 기간에 바르셀로나도 리그에서 2무 2패로 못했기 때문에 레알 마드리드가 마음만 먹으면 역전 우승도 가능했었다. 그렇게 레알 마드리드는 3년 만에 무관으로 시즌을 마치게 되었고, 라이벌 바르셀로나는 스페인 클럽 최초로 트레블을 달성하면서 더욱 비교되었다.

13. 플로렌티노 페레스 2기 (2009~ )

13.1. 갈락티코스 2기

시즌 라리가 UCL 코파 델 레이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UEFA 슈퍼컵 FIFA 클럽 월드컵
2009-10 2위
( = )
UCL
16강
32강 - - -
2010-11 2위
( = )
UCL
4강
파일:Copa_del_Rey_Trophy.png
18
- - -
2011-12 파일:laLiga_trophy.png
32
UCL
4강
8강 수페르코파
준우승
- -
2012-13 2위
( 1)
UCL
4강
준우승 파일:supercopa_de_espana.png
9
- -
2013-14 3위
( 1)
파일:UEFA_Champions_League_trophy.png
10
파일:Copa_del_Rey_Trophy.png
19
- - -
2014-15 2위
( 1)
UCL
4강
16강 수페르코파
준우승
파일:UEFA_Supercup_trophy.png
2
파일:FIFA 클럽 월드컵 로고.svg
1
2015-16 2위
( = )
파일:UEFA_Champions_League_trophy.png
11
32강 - - -
2016-17 파일:laLiga_trophy.png
33
파일:UEFA_Champions_League_trophy.png
12
8강 - 파일:UEFA_Supercup_trophy.png
3
파일:FIFA 클럽 월드컵 로고.svg
2
2017-18 3위
( 2)
파일:UEFA_Champions_League_trophy.png
13
8강 파일:supercopa_de_espana.png
10
파일:UEFA_Supercup_trophy.png
4
파일:FIFA 클럽 월드컵 로고.svg
3
과거 갈락티코스를 이끌었던 플로렌티노 페레스가 2009년 6월 1일에 회장으로 재취임한 후 2009-10 시즌 갈락티코스 정책의 부활을 천명했고, 그 첫 타자로 AC 밀란카카를 6450만 유로[59]에 데려왔다. 그리고 나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역대 최고 이적료인 9300만 유로로 데려오기에 이른다. 2000년대 후반 최고 선수 논쟁의 중심에 있는 메시, 호날두, 카카 중 두 명을 보유하게 된 것이었다. 마치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최고 선수 논쟁의 중심이었던 피구와 지단, 호나우두를 동시에 보유한 것과 유사하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올림피크 리옹으로부터 프랑스의 떠오르는 신성 공격수 카림 벤제마를 3500만 유로에 영입한다. 그러고 나선 또 리버풀 FC의 샤비 알론소를 3000만 유로에 영입했다. 이외에도 라울 알비올, 알바로 아르벨로아, 에스테반 그라네로 등을 영입하며 알차게 선수단을 보강했다.

13.1.1. 마누엘 펠레그리니 (2009~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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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분노의 영입을 시전한 효과를 보는 것인지 리그 첫 5경기 연승을 기록하며 좋은 출발을 했으며, 바르셀로나와 치열한 리그 선두 싸움을 했다. 그런데 코파 델 레이 32강 1차전에서 단 한 번도 라리가를 밟아보지 못했던 3부 리그 팀인 AD 알코르콘 원정에서 레알 마드리드의 흑역사로 남을 무려 0-4 패배를 당하는 대이변을 허용하며 전 세계 축구 팬들에게 충격을 선사하며 대망신을 당한다. 결국 4골 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2차전 홈 경기에서 1-0 승리에 그치며 종합 1-4로 충격의 첫 라운드 광탈을 당하게 된다. 여기에 같은 달에 리그 12라운드 엘 클라시코에서 1-0으로 패배하며 리그 선두 자리마저 내주고 만다. 그래도 12월부터는 다시 승리를 많이 따내며 바르셀로나와의 격차가 그리 멀어지지 않았고, 챔피언스 리그도 토너먼트 진출에 성공했다. 그러나...

엄청난 선수들의 영입에도 불구하고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올랭피크 리옹을 상대로 1, 2차전 합산 점수 1-2로 지면서 또 16강에서 탈락했다.[60] 이로써 6시즌 연속 챔스 16강 탈락이라는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썼다.[61] 그래서 일부 팬들은 갈락티코스탈락티코라고 조롱했고, 레알 마드리드는 순식간에 직전 시즌에 이어 무관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런데 그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의 결승전이 펼쳐진 곳은 바로 레알 마드리드의 홈,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였다.[62] 그런데 결승전에 올라온 팀은 하필 4강에서 바르셀로나를 꺾고 올라온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FC 바이에른 뮌헨이었는데, 네덜란드 커넥션이 실패하여 내보낸 베슬리 스네이더르아르연 로번이 각 소속 팀의 중심이 되어 양 팀을 결승으로 이끌어 왔다. 그렇게 나간 지 1년 만에 다시 마드리드의 홈구장으로 돌아오게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2차 갈락티코스로 되려 바이에른과 인테르만 흥하게 되었다.

그나마 레알 마드리드는 리그 25라운드 세비야전 3-2 승리를 따내며 바르셀로나를 제치고 리그 선두 자리를 탈환하여 전반기 엘 클라시코 직전 이후에 처음으로 리그 선두로 올라섰고, 3월 마지막 경기였던 29라운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전까지 승점 1점 차로 리그 선두 자리를 유지하며 어느 정도 체면치레는 하는 듯했다. 실제로 레알 마드리드는 코파 델 레이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힘도 제대로 쓰지 못한 채 탈락했지만, 리그에서만큼은 바르셀로나 못지않은 경기력을 보여주었는데, 19라운드 말라가 CF전 이후 30라운드 라싱 산탄데르전까지 리그 전승을 따내는 무서운 페이스를 보여줬다. 그러나 31라운드 엘 클라시코에서 메시와 페드로의 골로 2-0 완패를 당하며 연승 행진이 끊긴 동시에 리그 선두 자리를 내주고 말게 된다. 이로 인해 레알은 승점 2점 차를 뒤지게 됐는데, 바르셀로나가 33라운드 경기에 비기면서 승점이 1점 차로 좁혀지게 된다. 그러나 만약에 승점 동률로 시즌이 끝나더라도 리그에서 바르셀로나 상대로 2경기 모두 졌기 때문에 승자승 원칙에 따라 바르셀로나의 우승으로 결정되기 때문에 레알 입장에서는 반드시 바르셀로나의 승점을 넘어서야 했다. 그러나 바르셀로나가 미끄러지는 일은 없었고, 오히려 레알 마드리드가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말라가 상대로 비기면서 결국 바르셀로나와 승점 3점 차로 준우승에 머물렀다.

당시 새로운 이적생들에 대한 평가를 내리자면, 가장 기대를 모았던 카카는 부상으로 고전했으며 활약상 또한 밀란 시절에 비해 아쉬운 모습을 보였다. 제2의 호나우두라 불린 카림 벤제마는 리옹 시절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고, 곤살로 이과인과의 주전 경쟁에서 완전히 밀리며 계륵이 되고 만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는 좋은 활약상을 보여주었으나, 라이벌이라 불린 리오넬 메시와 비교했을 때는 부족했고, 또한 잔부상으로 인해 48경기 중 35경기 출전에 그쳤다. 그래도 샤비 알론소라울 알비올, 알바로 아르벨로아는 부상이나 부진 없이 준수한 경기력을 보이며 제 몸값을 해주었다.

갈락티코 2기 첫 시즌의 실패의 이유로는 여러 가지가 지목되고 많은 키배가 이루어지는데, 레알 마드리드 팬들은 마누엘 페예그리니를 까는 입장이 많고, 타 팀 팬들은 페예그리니를 옹호하는 입장이 많다. 하지만 갈락티코의 실패는 1기와 같이 감독에게 선수 영입 자유도를 제대로 부여하지 않았고, 선수 기용에 관해선 알아서 하던 비센테 델 보스케와 달리[63] 선수 기용에 대한 자유도도 부여하지 않았다. 페예그리니가 기용하길 원하던 베슬리 스네이더르아르연 로번을 페레스는 상품성이 적다고 팔아버렸고, 페예그리니가 원하지 않고, 비싼 선수를 굳이 데려왔다.[64] 거기에 페레스가 선수 선발에 간섭했다는 것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는데, 카카와 알비올 등의 폼이 좋지 않았음에도 기용을 강권했다는 말이 굉장히 많다. 페예그리니는 이후 기자 회견에서 갈락티코 2기를 상징하는 말로 회자되는 "마드리드에서 나는 아무런 목소리도 낼 수 없었다. 최고의 기타리스트만 10명이 있다고 해서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내게는 피아니스트나 드러머가 없었다"라는 말을 남긴다. 심지어는 언론도 호의적이지 않았다. 이후 세계 최고의 감독이라 할 수 있는 주제 무리뉴도 더 다듬어진 레알에서 수페르코파를 제외할 시 3년간 코파 델 레이 1개, 리그 1개의 트로피를 드는 데에 그친 것을 생각하면 확실히 단순히 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어쨌든 막대한 자금을 바탕으로 선수들을 영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즌은 완전 무관으로 끝났다. 이에, 빡친 운영진이 마누엘 페예그리니 감독을 한 시즌 만에 내치고, 인테르에서 트레블을 달성한 주제 무리뉴를 데려온다는 소문이 언론 등에서 흘러나왔다.

13.1.2. 주제 무리뉴 (2010~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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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대 마드리드의 전성기의 시작을 알린 감독
갈락티코 2기의 시작이었던 2009-10 시즌에 레알 마드리드가 무관에 그치자 플로렌티노 페레스 회장은 이 시즌에 인테르에서 트레블을 달성한 주제 무리뉴를 감독으로 선임하고, 다시 여러 선수들을 영입하게 된다. 그리고 2010년 여름 이적 시장에서 메수트 외질, 앙헬 디 마리아, 사미 케디라 등을 영입하며 무관을 탈출하기 위해 힘을 쓰는 모습을 보였다. 무리뉴와 자금의 시너지가 발휘한 것인지 그동안 16강에서 고배를 마시던 챔피언스 리그에서 4강 진출에 성공했고, 코파 델 레이에서 18년 만에 우승을 차지하는 등 2000년대 중반 이후 가장 성과있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이 시즌 라이벌 바르셀로나는 더욱 미친 팀이었다. 코파 델 레이에서는 결승에서 바르셀로나를 꺾고 우승하며 바르셀로나의 트레블을 저지했으나 UEFA 챔피언스 리그와 라리가에서는 바르셀로나에 막히며 4강 탈락, 승점 4점 차 2위라는 매우 아쉬운 성적을 거두고 말았다. 게다가 바르셀로나 원정 0-5 완패 경기도 이 시즌에 나온 것이었다. 정리하자면 2010-11 시즌은 라이벌 바르셀로나에 의해 라리가와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의 문턱에서 무너졌지만, 20년 가까이 계속 실패하던 코파 델 레이에서 우승을 거머쥐고 라이벌 바르셀로나의 트레블을 저지했으며, 챔피언스 리그에서 다시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한 시즌인 데다, 2010년대 중후반 레알 마드리드 왕조의 발판이 된 시즌이었기에 충분히 의미 있는 시즌이었다.

2011년 여름 이적 시장에는 라파엘 바란, 파비우 코엔트랑, 호세 카예혼 등을 영입한다. 그리고 2011-12 시즌도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진출에 실패했지만 준결승까지 진출하는 등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었으며, 라리가에서 32승 4무 2패라는 압도적인 성적을 거두면서 라리가 역대 최다 승점안 100점 달성과 함께 4년 만에 왕좌에 오르게 된다. 무리뉴기 레알 마드리드를 맡은 3시즌 중 가장 완벽했던 시즌이며, 2016-17 시즌과 함께 2010년대 레알 마드리드의 최고의 시즌 중 하나로 꼽히게 된다.

2012-13 시즌의 빅네임 영입은 루카 모드리치가 전부였다. 그래도 직전 시즌에 성공적으로 보냈으며 개막 직전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에서 라이벌 바르셀로나를 꺾고 우승했기 때문에 시즌 전망은 밝은 편이었다. 그러나 무리뉴와 선수단의 불화, 선수들 간의 파벌 형성, 주전 자원들의 부상과 부진 등 여러 악재들이 겹치면서 기존의 전망대로 시즌을 보내지 못하게 된다. 리그에서는 전반기에 이미 라이벌 바르셀로나와 격차가 크게 벌려지면서 따라잡지 못해 최종적으로 승점 15점 차로 2위에 머물렀고,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독일 원정 울렁증을 극복하지 못하면서 준결승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전에서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에게 1경기 4골을 내주는 수모를 당했고 결국 1, 2차전 합산 점수 4-3으로 다시 결승의 문턱에서 넘어지고 만다. 한편 라이벌 바르셀로나도 준결승 바이에른 뮌헨전에서 1, 2차전 합산 점수 7-0으로 박살나며 결승전 진출에 실패했다. 코파 델 레이에서는 준결승에서 라이벌 바르셀로나를 꺾으면서 결승전 진출에 성공했으나,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펼쳐진 결승전에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를 상대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퇴장 등의 악재가 겹쳐 2-1 패배를 당하면서[65] 준우승에 머물렀다. 그렇게 직전 시즌의 기운을 이어가지 못하고 다시 무관에 머무르고 만다. 또한 레알 마드리드 입장에서는 어느 대회보다도 챔피언스 리그의 우승이 우선이었는데 3시즌 연속으로 준결승에서 탈락하게 되자, 16강 마드리드를 끊어낸 무리뉴와 이별하게 된다. 물론 선수단과의 불화 등 다른 복합적인 이유들도 있었다.

우승 청부사 무리뉴의 부임 기간 동안 리그와 코파 델 레이 우승컵은 들어올렸지만 결국 챔피언스 리그 우승컵은 들어올리지 못하며 다소 저평가를 받고 있었으나, 2.5기 출범과 동시에 고스란히 남아 있던 2기 멤버들을 주축으로 라 데시마를 달성하면서 결국 실패라는 오명을 뒤집어쓰지는 않게 되었다. 다만 위 선수중 메수트 외질카카는 라 데시마 직전에 떠났고, 2.5기 멤버인 가레스 베일이 라 데시마에 기여했다.
13.1.2.1. 2010-11 시즌

지난 2시즌 간의 무관과 2004-05 시즌부터 이어오던 챔피언스 리그 16강 탈락 행진을 깬 의미 있는 시즌[66]으로 FIFA 월드컵 기간 중에 벤피카에서 앙헬 디 마리아를 영입했고 측면 공격수 페드로 레온과 라리가 최고 유망주로 꼽히는 공격형 미드필더 세르히오 카날레스를 영입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남아공 월드컵에서 스타로 떠오른 슈투트가르트의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 사미 케디라와의 계약을 성사시켰고 리버풀의 스티븐 제라드에게 지속적으로 구애를 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인테르의 마이콘디에고 밀리토 영입을 꾸준히 타진했으나 역시 무위로 돌아갔다. 이에 급한 대로 허술해진 센터백 자리를 메우기 위해 첼시에서 히카르두 카르발류를 2년 계약으로 데려왔다. 그런데 카카가 월드컵에서 장기 부상을 당하자 이적 시장 종료 전에 독일의 신성 메수트 외질을 데려왔다.

한편 오랫동안 레알 원 클럽맨이었던 라울 곤살레스구티는 각각 FC 샬케 04, 베식타스 JK로 떠나며 오랫동안 헌신해왔던 팀과 작별을 고했다. 라울의 7번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계승했다. 이에로와는 달리 라울과 구티 등은 선수 본인들의 이적 의지가 있었고, 나름 예우를 해서 보냈다. 아무리 레전드고 클럽의 상징이라도 뛰고 싶은 선수를 벤치에 앉히는 것보단 차라리 다른 팀에 보내는 게 나으니까. 더구나 이후 라울을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로 초청하여 기념 경기를 치러 주었고, 구티도 유스 팀 코치로 영입했기 때문에 대우에 대한 비판을 들을 일은 없을 듯하다.

그리고 오렌지 커넥션의 두 축이었던 로이스톤 드렌테라파엘 반 더 바르트 역시 각각 에르쿨레스 CF(임대)와 토트넘 홋스퍼 FC로 이적하며 팀을 떠나며 오렌지 커넥션의 종말을 고했다. 유리몸이었던 크리스토프 메첼더는 자유 계약으로 샬케 04로 팀을 옮겼다.

무리뉴 취임 이후 3개월 동안 라리가와 챔스, 코파 델 레이에 걸쳐 19경기 무패 행진을 기록했다. 개막전 마요르카 원정에서 0-0 무승부에 그치며 체면을 구겼지만, 라리가 12경기에서 33득점 6실점이라는 경이적인 성적을 올렸고, 챔스에서도 AC 밀란, AFC 아약스, AJ 오세르와 같은 조가 되어 4승 1무를 거두며 일찌감치 조 1위를 확정지었다.

하지만 11월 29일, 불구대천의 라이벌 바르셀로나와의 엘 클라시코에서 0-5로 대참패. 외질, 케디라, 알론소의 중원이 붕괴되면서 그야말로 압살당했다. 거기에 부주장 세르히오 라모스는 경기 종료 30초를 남기고 메시에게 백 태클, 푸욜에게 싸대기, 사비에게 밀치기 콤보를 시전하고 퇴장당하는 사건까지 터졌고 레알 마드리드의 역사에 남을 악몽의 날이었다. 이날 패배로 선두였던 레알 마드리드는 바르샤에 승점 2점 차이로 역전당하며 2위로 내려갔다.

그날 이후 마드리드는 큰 슬럼프에 빠지게 될 것이라는 의견도 제기되었으나 바로 다음 라운드에서 호날두의 두 골로 발렌시아에게 승리하며 좋은 분위기를 다시 조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사라고사와 세비야에 3-1, 1-0 승리를 거두며 다시 3연승 행진을 기록하며 바르샤와 승점 2점 차이로 2010년을 마감했다.

2010년 12월 17일, UEFA 챔피언스 리그 16강 대진에서 지난 시즌 레알을 떨어뜨렸던 올림피크 리옹과 또 만났다.

윈터브레이크 후 라리가에서 헤타페와 비야레알을 잡으며 5연승을 달리던 중, 2011년 1월 16일 벌어진 19라운드 경기에선 20위 꼴찌인 UD 알메리아와 1-1로 비기고 말았다. 그리하여 바르셀로나와 승점 차가 4점으로 벌어지면서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설욕전을 벌여 이긴다고 해도 리가 선두를 되찾긴 어렵게 되었다.

1월 26일 맨체스터 시티에서 엠마누엘 아데바요르를 임대 영입했다.

그리고 21라운드. 바르셀로나는 원정 경기에서 에르쿨레스를 3-0으로 격파하고 홈 패배를 설욕하는 사이, 마드리드는 반드시 이겨야 하는 17위 CA 오사수나와의 원정 경기에서 충격적이게도 0-1로 패배했다. 후반에 골을 먹자 무리뉴는 아데바요르, 카카, 알론소를 동시에 투입하는 강수를 뒀지만 오사수나의 끈끈한 수비를 뚫어 낼 수 없었던 데다, 2경기 연속 결승골로 잠시 각성했었던 카림 벤제마는 온갖 쩌리질을 거듭하며 패배의 주역이 되었다. 이 결과로 바르셀로나와의 승점 차는 7점이 되었다.

2월 3일 코파 델 레이 4강 세비야 FC와의 2번째 경기에서는 벤제마가 실망스러운 활약을 펼치며 레알 마드리드의 공격진을 무력화시켰음에도 메수트 외질엠마누엘 아데바요르의 연속 골로 2-0 승리, 합계 3-0으로 결승 진출에 성공했다. 결승 상대는 바르셀로나이다.

2011년 2월 23일 챔피언스 리그에서 만난 리옹과의 원정 경기에서 1-1로 무승부를 거뒀다. 그리고 2차전에서 3-0으로 승리를 거두고 6년 간의 16강 탈락 징크스를 떨쳐 내었다.

25라운드 경기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전에서 0-0으로 비기면서 한때 5점 차로 좁힌 바르셀로나와 승점 차가 다시 7점 차로 늘어났다. 그 뒤로 말라가 CF[67], 라싱 산탄데르, 에르쿨레스 CF,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 4연승을 기록하며 세비야에 비긴 바르셀로나에 5점 차로 따라붙었으나 2011년 4월 3일 30라운드 경기 스포르팅 히혼과의 안방 경기에서 0-1로 패해[68] 8점 차로 벌어졌다. 무리뉴의 연승도 날아가면서 리그 우승이 힘겨워졌다.

사실상 리그 우승이 날아가며 팀 분위기가 침체되었다고 생각했는데, 4월 5일 챔피언스 리그 8강 1차전에선 토트넘 홋스퍼를 4-0으로 말 그대로 담궈 버렸다. 피터 크라우치가 경기 초반 연이어 높은 태클을 가하다가 퇴장 당해버린 후 30개가 넘는 슈팅을 기록하며 사실상의 반코트 게임을 만들었다. 2차전에서도 무난하게 1-0 승리를 거두며 9년 만에 4강에 진출했다. 이로써 유례가 없던 챔스 2경기, 리가 1경기, 코파 1경기의 엘 클라시코 4연전이 성사됐다.

4월 16일 리가 32라운드 4연전 1차전 경기에서는 페페를 수미로 기용한 4-3-3을 들고나왔다. 무리뉴의 전술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졌고 바르셀로나는 중원에서 미친 개처럼 날뛰는 페페를 전혀 제어하지 못했다. 경기 결과는 1-1로 양 팀 에이스인 호날두, 메시가 각각 페널티킥으로 한 골씩 주고받았는데 이 골들은 두 선수에서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골들이었다. 호날두에겐 바르셀로나전 첫 골, 메시에겐 무리뉴 상대 첫 골이다.

4월 20일 2차전 코파 델 레이 결승전에서도 역시 1차전처럼 4-3-3을 들고나와 연장전까지 가는 혈투를 벌인 끝에 카시야스의 인생 선방 퍼레이드와 호날두의 헤더로 1-0 승리를 거두며 3년 동안의 무관에서 벗어났다. 코파 델 레이 우승은 18년 만이다. 그런데 결승전이 끝나고 우승 기념으로 마드리드 시내에서 카 퍼레이드를 하던 도중, 부주장인 세르히오 라모스가 버스 위에서 우승 트로피를 치켜들었다가 실수로 떨어뜨렸고, 결국 트로피가 바퀴에 깔려서 박살이 났다. 일단 우승 컵 복원 작업이 끝날 때까지 복제품을 홈구장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 전시할 계획이라고 한다. http://sports.news.nate.com/view/20110422n21852?mid=s1004&isq=3499

4월 23일 바르셀로나와의 챔피언스 리그 4강전을 앞두고 메스타야에서 발렌시아 CF를 상대로 전반전에만 4골을 기록, 무려 6-3으로 압승을 거두며 기세를 높였다.

그러나 4월 28일에 벌어진 UEFA 챔피언스 리그 4강 1차전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안방에서 바르셀로나에게 0-2로 패했다. 리오넬 메시에게 2골을 얻어 맞으면서 코파 델 레이 결승전을 설욕당했고 더불어 페페, 무리뉴, 라모스가 퇴장당하거나 경고 누적으로 다음 2차전 캄 노우 원정에 나가지 못하게 되면서[69] 9년 만의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진출은 한층 힘들어졌다.

UEFA 챔피언스 리그 4강 2차전 캄 노우 원정에서, 바르셀로나 전술의 핵심인 무리뉴와 페페가 없었던 레알 마드리드는 기존의 4-2-3-1 포메이션을 들고 나왔고 전반전부터 신나게 두들겨 맞기 시작했다. 다만 이케르 카시야스의 신들린 선방으로 전반을 무실점으로 마쳤다. 후반이 시작되면서 결정적인 장면이 나왔다. 바르셀로나의 골문으로 쇄도하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제라르 피케가 반칙으로 쓰려뜨렸고 호날두가 넘어지면서 하비에르 마스체라노가 같이 엉켜 넘어졌는데, 흘러나온 공을 곤살로 이과인이 잡아 득점을 성공시켰다. 하지만 심판은 호날두의 반칙을 선언했다. 그 후 페드로 로드리게스가 선제골을 기록했고 마르셀루의 동점 골로 승부를 원점으로 돌렸지만 합산 점수 1-3으로 결승 진출이 좌절되었다.

35라운드까지 리가에서도 라이벌 바르셀로나에게 승점 8점으로 뒤처지면서 사실상 라리가 우승도 좌절되었다.

결국 36라운드 바르셀로나가 레반테 UD 원정에서 1-1로 비기며 레알 마드리드는 준우승을 확정지었다. 레알은 마지막 4경기에서 세비야, 헤타페, 비야레알, 알메리아에 4연승을 거두며 유종의 미를 거뒀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는 리가에서 40골을 득점하며 텔모 사라우고 산체스의 라리가 최다 득점 기록인 38골을 갈아치웠다.

결국 라이벌 바르셀로나가 다시 한번 지구 최강의 팀 포스를 뿜어내며 UEFA 챔피언스 리그라리가 우승을 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리그에서 0-5 참패, UEFA 챔피언스 리그 4강에서 바르샤에게 패배하는 등 막아설 기회가 있었음에도 수준 차를 메우지 못하고 번번이 지며 불만족스러운 시즌으로 남게 되었다. 그래도 코파 델 레이 결승전에서 승리하며 라이벌 바르셀로나의 트레블을 저지했고, 3년 연속 무관은 면했다. UEFA 챔피언스 리그도 16강 탈락의 고리를 끊고 4강에 진출했으니 나름 의미가 있는 시즌이기는 했다.
13.1.2.2. 2011-12 시즌
파일:RMA_1112LIGA.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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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2.3. 2012-13 시즌

주제 무리뉴 감독과의 마지막 시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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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3. 카를로 안첼로티 1기 (2013~2015)

파일:jfjfjru.jpg
그토록 염원하던 라 데시마를 이끈 감독
13.1.3.1. 2013-14 시즌
파일:CDL_2014.jpg
파일:UCL_2014.jpg

3년 만에 코파 델 레이 우승을 달성했으며, 12년 동안 갈망했던 UEFA 챔피언스 리그 10번째 우승인 라 데시마를 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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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3.2. 2014-15 시즌
파일:RMA_USC2014.jpg
파일:RMA_CW2014.jpg

전반기 22연승으로 폭주했으나 후반기에 페이스가 떨어지며 결국 주요 대회 무관에 그치고 말았다. 결국 시즌이 종료된 후 카를로 안첼로티는 경질되었다.

그리고 새로 부임한 감독은 리버풀 FC,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첼시 FC, SSC 나폴리 등의 클럽을 맡았던 라파엘 베니테스였다. 앞서 맡은 팀인 나폴리에서 결과 좋지 않았고 매니징 스타일상 레알이랑 상극일 가능성이 높기에 탐탁치 않아하는 레알 마드리드 팬들이 많다. 결국 라이벌 FC 바르셀로나가 지난 2013-14 시즌 무관이라는 아픔에서 벗어나 트레블로 화려하게 부활한 것과 대비되어 더욱 뼈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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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4. 라파엘 베니테스 (2015~2016)

파일:20210102_010322.jpg
베니테스 본인과 레알 마드리드의 흑역사

라파엘 베니테스가 새로 부임하면서 많은 기대를 받았지만 시즌이 시작되고 만족스럽지 않은 경기력을 시즌 내내 보이고, 특히 강팀과의 경기 성적이 좋지 않았기에 당연히 레알 팬들의 불만을 받고 베니테스는 경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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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5. 지네딘 지단 1기 (2016~2018)

파일:지단/트로피.jpg
레알 마드리드 역사상 최고의 감독 중 하나
13.1.5.1. 2015-16 시즌
리그 18라운드 발렌시아 CF와의 경기에서 2-2 무승부를 거두자 수뇌부가 긴급 회의를 소집, 결국 라파엘 베니테스를 경질하고 비장의 카드라 볼 수 있었던 지네딘 지단 감독 부임을 시즌 중 꺼내들게 된다. 그리고 부임 후 초짜 감독이 맞나 싶을 정도로 팀을 잘 이끌어나가면서 사실상 우승 가능성이 아예 없었던 리그도 승점 1점 차로 아쉽게 준우승을 거두었으며, 팀을 챔피언스 리그 결승으로 이끌었다.

결국 지단 감독은 부임 후 145일이 지난 2016년 5월 29일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를 상대로 승부차기 끝에 우승을 차지하면서 라 운데시마를 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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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5.2. 2016-17 시즌
파일:RMA_2016USC.jpg
파일:RMA_2016CWC.jpg
파일:RMA_2017LALIGA.jpg
파일:RMA_2017UCL.jpg

지난 시즌 도중에 부임한 지네딘 지단이 레알에서 보내는 첫 풀 타임 시즌이다. 지단 감독은 로테이션 & 플랜 B, 주전 스쿼드를 적절히 활용해가면서 여러 위기를 넘겼다. 결국 코파 델 레이를 제외한 라리가, UEFA 챔피언스 리그 트로피를 들어 올려 더블을 달성했으며, 그 외에도 FIFA 클럽 월드컵UEFA 슈퍼컵 트로피도 들어 올렸다. 레알 마드리드 역사상 최고의 시즌이라 해도 무방한 시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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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5.3. 2017-18 시즌
파일:21007.jpg
파일:RMA_2017SE.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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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RealMadrid_C.F._Winner_Of_The_Champions_League_2018.jpg

저번 시즌의 기세를 이어가지 못하고 리그와 코파 델 레이 우승이 조기에 무산되었으나, 챔피언스 리그에서 힘겨운 대진을 뚫고 개편 후 최초 3연속 우승을 달성했다.

시즌 종료 5일 후 지네딘 지단 감독이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감독직 사임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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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암흑기

시즌 라리가 UCL 코파 델 레이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UEFA 슈퍼컵 FIFA 클럽 월드컵
2018-19 3위
( = )
UCL
16강
4강 - 준우승 파일:FIFA 클럽 월드컵 로고.svg
4
레알 마드리드는 2018년 챔피언스 리그 결승 리버풀 FC를 상대로 3-1로 승리하며 라 데시모테르세라를 이뤘고, 리버풀과의 경기 이후 2009년 영입 이후 쭉 팀의 에이스이자 갈락티코 2기 및 2.5기의 상징이었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결승전 직후 인터뷰에서 사실상 이적을 공언, 거기에 챔피언스 리그 우승 이후 부임 후 3연패를 이끈 지네딘 지단 감독이 4일 만에 사임하며 큰 변화를 예고했다.

13.2.1. 줄렌 로페테기 (2018)

파일:로페테기 레알.jpg
부임한 지 고작 4개월 만에 경질된 레알 마드리드 역사상 최악의 감독 중 하나
이후 러시아 월드컵을 치르기 이틀 전에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줄렌 로페테기 감독을 선임했다는 것을 공식 발표해 논란이 되었고, 이 일로 인해 여러 전문가들이 스페인 대표팀을 러시아 월드컵 우승 후보로 거론할 정도로 대표팀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던 로페테기 감독은 스페인 대표팀에서 월드컵도 치르지 못하고 경질되었다. 여러모로 어수선한 이적 시장을 보냈는데, 호날두는 예고대로 유벤투스 FC로 적을 옮겼지만 정작 레알 마드리드는 호날두의 역할을 가레스 베일카림 벤제마에게 맡긴다는 안일한 생각으로 딱히 대체 공격수 자원을 영입하지 않고 시즌에 돌입했다.

줄렌 로페테기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직에서 경질되면서까지 레알 감독직을 맡았으나 시즌 개막 전, UEFA 슈퍼컵에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 패배해 출발이 좋지 않더니 10월부터 최악의 결과를 내면서 리그 10R 엘 클라시코 1-5 완패를 거뒀고 이후 바로 경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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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2. 산티아고 솔라리 (2018~2019)

파일:djshdhhdb.jpg
전임의 똥을 치우기는 했지만, 끝내 빛을 발하지 못한 감독
파일:dudhh.jpg
산티아고 솔라리지네딘 지단처럼 레알에서 선수생활을 하였으며, 레알 마드리드 카스티야 감독직을 맡았다. 그리고 줄렌 로페테기가 경질되면서 임시 감독직을 담당했는데, 3연승을 거두면서 2018년 11월 중순에 레알 마드리드의 정식 감독으로 부임했다. 지단이 2015-16 시즌 도중에 부임했음에도 라 운데시마를 달성했던 것처럼, 솔라리 감독도 레알에게 트로피를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인지가 관건이다. 결국 리그 우승은 물 건너갔고 챔스권 사수에 만족하게 되었으며 코파 델 레이 4강 탈락, UEFA 챔피언스 리그 16강 탈락, 87년 만에 엘 클라시코 상대 전적 열세 등의 행보를 이어가며 2010년대 최악의 시즌이 확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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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 2020년대

시즌 라리가 UCL 코파 델 레이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UEFA 슈퍼컵 FIFA 클럽 월드컵
2019-20 파일:laLiga_trophy.png
34
UCL
16강
8강 파일:supercopa_de_espana.png
11
- -
2020-21 2위
( 1)
UCL
4강
32강 수페르코파
4강
- -
2021-22 파일:laLiga_trophy.png
35
파일:UEFA_Champions_League_trophy.png
14
8강 파일:supercopa_de_espana.png
12
- -
2022-23 2위
( 1)
UCL
4강
파일:Copa_del_Rey_Trophy.png
20
수페르코파
준우승
파일:UEFA_Supercup_trophy.png
5
파일:FIFA 클럽 월드컵 로고.svg
5
2023-24 파일:laLiga_trophy.png
36
파일:UEFA_Champions_League_trophy.png
15
16강 파일:supercopa_de_espana.png
13
- -
2018-19 시즌에 최악의 순간을 겪은 이후 휴식을 취하고 있던 지네딘 지단을 빠르게 재선임해[70] 리빌딩 및 재기를 노리고 있다.

지네딘 지단이 세대 교체기이자 과도기를 나름 잘 버텨낸 이후 맞이한 카를로 안첼로티 2기 시대에서는 여러 악재와 우려를 모두 떨쳐내고 완전히 부활해 다시 레알이 유럽의 왕에 등극했다. 그리고 발롱도르 컨텐더로 성장한 비니시우스 주니오르, 새로운 슈퍼스타 킬리안 음바페주드 벨링엄의 합류로 갈락티코스 3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13.3.1. 지네딘 지단 2기 (2019~2021)

3월 11일 챔피언스 리그 3연패를 이끈 이후 사임했던 지네딘 지단이 2022년 6월까지 계약을 맺는 조건으로 감독직으로 복귀했다. 레알 마드리드는 무관이 확정되었으므로 사실상 남은 시즌 지단이 할 일은 다음 시즌 챔피언스 리그 진출 수성 및 이적 시장 플랜 구상뿐이다. 현지 언론들은 지단 감독이 이적 시장 지휘 및 선수 기용에서 전권을 부여받았을 가능성을 높게 점치고 있으며, 해당 가능성이 사실일 경우 갈락티코 2기 및 2.5기 주역이었던 선수들이 척추 역할을 하면서 갈락티코 3기를 이룰 슈퍼 스타 멤버들이 영입될 것이 유력하다.
13.3.1.1. 2019-20 시즌
파일:RMA_2020SE.jpg
파일:RMA_1617LIGA.jpg

지단 1기 시절에 비해 아쉬운 공격력에도 불구하고 수비에서는 오히려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준 것을 바탕으로 3년 만에 라리가 우승을 거머쥐며 나름대로 성공적인 성적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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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1.2. 2020-21 시즌

지네딘 지단 감독 2기의 마지막 시즌이다. 연이은 부상 악재가 발생했음에도 실리 축구를 통해 라리가 2위와 챔피언스 리그 4강이라는 준수한 성적을 거뒀으나, 결과적으로 무관에 그친 아쉬운 시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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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2. 카를로 안첼로티 2기 (2021~ )

13.3.2.1. 2021-22 시즌
파일:56456.jpg
파일:레알35.jpg
파일:_AV27447Thumb,9.jpg

주전 선수들의 노쇠화로 인해 리빌딩 시즌으로 여겨졌으나 리그에서는 라이벌들의 부진으로 승승장구해 우승을 차지했고,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16강, 8강, 4강에서 연달아 기적을 써가며 극적인 우승을 차지했다. 결국 2016-17 시즌과 마찬가지로 레알 마드리드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시즌 중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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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2.2. 2022-23 시즌
파일:2022USC.jpg
파일:2022CWC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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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초반에 보여준 파죽지세의 흐름을 이어가지 못하며 후반기에 상당히 기복이 있는 모습을 보여 일찌감치 리가 우승 경쟁에서 뒤쳐졌지만, 토너먼트에서는 9년 만에 코파 델 레이 우승을 거머쥐고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3년 연속 4강 진출에 성공하는 등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시즌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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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2.3. 2023-24 시즌

주포 카림 벤제마가 이탈하고 시즌이 시작하자마자 주전 골키퍼, 수비수인 티보 쿠르투아에데르 밀리탕이 장기 부상을 당했으며 시즌이 진행되는 중에도 비니시우스 주니오르를 비롯한 핵심 선수와 수비수 전체가 부상을 당하는 여러 악재가 끊임없이 터졌으나 이를 완전히 극복해내고 역대급 페이스를 이어갔다. 시즌 패배는 고작 2번이고, 거의 전성기에 버금가는 리그 페이스와 챔스 무패 우승을 기록해 구단 역사상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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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2.4. 2024-25 시즌

[1] 1962-63 시즌 이래 60년 동안 단 한번도 라리가 단독 최다우승팀의 자리에서 내려온적이 없으며, 챔피언스리그는 초대 대회인 1955-56 시즌 부터 단 한번도 단독 최다우승팀에서 내려온적이 없다.[2] 저승사자 군단[3] Yé-yé 마드리드[4] 독수리 5형제[5] 라울 곤살레스 & 갈락티코스 1기[6]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 갈락티코스 2기[7] 이러한 아이콘의 계보는 1960년대의 아만시오 아마로, 1970~1980년대의 산티야나, 1980~1990년대의 에밀리오 부트라게뇨, 1990~2000년대의 라울 곤살레스로 이어진다. 라울 곤살레스 이후의 2010년대에는 이케르 카시야스세르히오 라모스가 세대를 이었다.[8] 레알 마드리드에서는 클루브 에스파뇰 데 마드리드의 회장이었던 훌리안 팔라시오스를 초대 회장으로 인정하고 있다.[9] 이후 코파 델 레이로 개편되었으나, 1902년의 이 대회는 코파 델 레이의 정규 시즌으로 인정되지 않는다.[10] 당시엔 라리가가 출범하기 전이라 지역 대회만 존재했다. 그리고 각 지역의 챔피언들이 진출 자격을 얻고 참가하여 해당 시즌 스페인의 진정한 최고를 가리는 대회가 코파 델 레이였다. 물론 라리가가 출범하고부터는 위상이 크게 추락했다.[11] 라리가 창설 이전 마드리드의 비공식 지역 리그로, 우승팀은 코파 델 레이에 진출했다.[12] 현재 클럽명 앞에 '레알'이 붙은 클럽들은 모두 알폰소 13세 시기 때 칭호를 하사받은 것이다.[13] 나머지는 FC 바르셀로나, 아틀레틱 빌바오, 레알 소시에다드, 아레나스, 레알 우니온[14] 2017-18 시즌 FC 바르셀로나가 달성할 뻔했지만 37라운드에서 레반테 UD에게 뜬금없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실패했다.[15] 1939년 5월, 코파 델 레이가 개막되면서 스페인의 스포츠가 재개되었으나 이 시즌 레알은 팀 복구를 위해 불참했다.[16] 출처: 영문 위키백과, http://hemeroteca.abc.es/nav/Navigate.exe/hemeroteca/madrid/abc/1978/06/03/060.html[17]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의 전신이다.[18] 역대 최고의 클래식 윙어이자 드리블러로 손꼽히는 선수 중 하나로 당시 백 넘버는 11번이다. 특히 '레프트 윙어'로 한정하면 축구사 최고의 윙어라는 평이 지배적일 정도로 전설적인 선수였으며 저승사자들 중 가장 오래, 가장 마지막까지 남았던 선수라 우승을 지겹도록 경험했다. 파올로 말디니 정도가 그에 근접했지만 아직까지 클럽 커리어로 헨토를 능가하는 선수는 전무하다. 그리고 마르셀루가 2021-22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헨토를 제치고 레알 소속 최다 우승 1위의 자리에 올랐으나 헨토의 현역 시절에는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UEFA 슈퍼컵, FIFA 클럽 월드컵 같은 컵 대회가 없었기에 질적으로 따지면 여전히 헨토가 우위라고 할 수 있다.[19] 정말 별명이 그냥 '벽'이었다. 원조 격이라 할 수 있는 셈이다.[20] 다만 지지는 팀의 중심인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페렌츠 푸스카스와 사이가 좋지 않아 레알에 오래 머무르진 않았다.[21] 1956-57 시즌 SK 라피트 빈과의 유러피언 컵 16강 2차전에서 0-3으로 밀리고 있던 와중 경기력에 화가 난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회장이 난입해 연설을 했다. 이후 비야롱아가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에게 더 높은 위치에서 머무르라고 지시했으나 회장의 연설로 감독의 권위가 떨어진 상황에서 지시를 불이행했다. 이 사건으로 베르나베우와 비야롱아의 갈등이 심해졌다.[22] 당시 푸스카스는 UEFA의 징계로 2년간 경기에 뛰지 못하며 체중이 크게 늘어난 상황이라 카르니글리아 감독이 푸스카스의 경기력에 의문을 표했다.[23] 1958-59, 1959-60 시즌 라리가 우승팀은 라이벌 FC 바르셀로나였다. 바르셀로나만 아니었다면 저 시기에 라리가 우승만 10번이라는 또 다른 업적을 세울 수 있었다.[24] 세계 최초 트레블에 근접했던 시기는 1957-58 시즌과 1961-62 시즌이다. 1957-58 시즌엔 리그와 유러피언 컵을 우승했지만 코파 델 레이 결승에서 아틀레틱 클루브에게 패배하며 트레블에 실패했다. 1961-62 시즌에는 오랜 코파 델 레이 준우승 징크스를 끊어내고 우승했지만 그 전에 유러피언 컵 결승전에서 벤피카에 먼저 2골을 넣어놓고 페렌츠 푸스카스가 해트트릭까지 기록했으나 에우제비우에게 2골을 연이어 실점, 5-3으로 역전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 유럽 최초의 트레블은 1966-67 시즌 스코틀랜드의 셀틱 FC가 달성했다. 그리고 라이벌 바르셀로나가 2008-09 시즌 트레블을 달성하였고 2014-15 시즌도 트레블을 달성하며 세계 최초로 트레블 2회를 달성한 클럽이 되었다. 스페인 클럽 중 트레블을 달성한 팀은 현재까지도 바르셀로나가 유일하다.[25] 리누스 미헬스슈테판 코바치의 지휘 아래 요한 크루이프를 중심으로 전성기를 유지하였으나 코바치의 사임 이후 새롭게 감독이 된 게오르게 크노벨 감독이 신임 주장 투표를 거쳐 크루이프의 주장직을 빼앗자 이에 앙심을 품은 크루이프가 빅 엿을 시전하고 바르셀로나로 이적했고 그 이후로 전성기가 끝이나며 몰락했다. 이후 미헬스와 크루이프의 철학은 바르셀로나에서 이어지게 된다.[26] 당시 바이에른 왕조의 주역들은 1970년대의 서독 대표팀[71]의 주역이기도 했다. 클럽 활약 못지않게 국가 대표팀에서도 두루 두각을 나타냈던 왕조였다. 다만, 유러피언컵 3연패를 기록할 당시 분데스리가에서는 리그 10위까지 떨어지는 등 부진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27] 이 기간 동안 리버풀은 유러피언컵을 무려 9년이나 개근했는데 당시의 유러피언 컵은 현재의 챔피언스 리그와는 다르게 말 그대로 오로지 유럽 각 국가별 자국 리그의 우승팀 혹은 전년도 유러피언 컵 챔피언만이 출전할 수 있는 구조였다. 즉 9년 연속으로 유러피언 컵에 출전했다는 것은 저 기간 내내 최소한 1년에 한 번은 리그나 챔피언스 리그를 우승했다는 이야기이다. 다만 붉은 제국은 헤이젤 참사로 이 전성기는 비극적인 막을 고한다.[28] 아리고 사키 감독 사퇴 이후 파비오 카펠로 체제부터는 안정 노선으로 전향했다. 오렌지 삼총사로 잘 알려져 있긴 하지만 사실 프랑크 레이카르트, 루드 굴리트, 마르코 반 바스텐 이 셋 모두가 뭉친 시기는 길지 않다. 셋 중 가장 꾸준했던 레이카르트는 아약스로 넘어가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친정 팀에게 비수를 꽂기도 했다.[29] 레알 마드리드는 다시 한번 갈락티코스 2기를 통해서 유럽 축구에 왕조를 건설하며 타 팀과는 비교할수 없는 압도적인 챔스 우승 트로피를 수집했다. 당장 저승사자 군단이 유러피언컵 5연패를 갈락티코스 2~2.5기가 챔피언스리그 3연패를 포함해 4번의 우승을 가져오며 9번의 우승을 차지했다. 특히 저승사자 군단의 주축인 푸스카스, 헨토 등이 남아서 유럽의 강호를 유지하며 Yé-yé 시대 유러피언컵 우승 1회를 추가했고, 갈락티코스 2~2.5기 역시 모드리치와 벤제마가 남아서 갈락티코스 3기에 챔스 우승을 추가한걸 생각하면 마드리드는 이 시대에 주축인 선수들로 무려 11번의 챔스 우승을 성공했다.[30] 이그나시오 소코가 스위퍼로도 뛸 수 있다는 점을 이용해 소코가 좌측 센터백으로 뛰고, 벨라스케스를 미드필더로 내린 4-2-4 전술의 라인업도 유명했으며 1965-66 시즌에 4-2-4 전술을 사용하여 유러피언컵 우승을 했다.[31] 1973~1978[32] 구단 임원으로 재직 중이던 1978년에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회장의 장기 집권에 반대하며 '레알 마드리드는 특정 사람들의 재산이 아닌 6만명의 소시오의 것이며 '왕'의 재산이 아니다'라고 하며 돌연 사임을 발표했다. 이러한 그의 발언에 베르나베우 회장은 '누군가 나에게 왕이라고 한다면 1910년부터 지불한 나의 소시오 회비를 내놓아라'라고 하며 응수하여 멘도사는 그와 대립했다.[33] Yé-yé 마드리드의 멤버 마누엘 산치스의 아들이다. '마놀로'는 이름이 아닌 애칭이고 본명은 아버지와 같은 마누엘 산치스이다. 팀에서 담당했던 역할은 스위퍼이며, 아버지의 영향으로 레알 마드리드 유스 클럽에 입단하여 임대 한 번 가지 않고 레알 마드리드에서만 뛰다 은퇴했다. 밀란의 말디니 부자와 비슷한 케이스이다. 우연의 일치인지 양쪽 다 수비수 집안에 시기도 아버지 1960년대, 아들 1980~2000년대로 동일했다.[34] 1990 월드컵 스페인전에서 우리나라를 상대로 해트트릭을 했던 선수이다. 레알 마드리드에서 통산 559경기 출장을 기록했다.[35] 1차전 원정에서 후아니토와 미노가 39분에 동시에 퇴장당하고 페널티킥 2개를 헌납하는 불운 끝에 1-4로 대패했다. 2차전 홈에서는 산티야나의 골에 힘입어 승리했으나 1-0에 그치고 말았다.[36] 1988-89 시즌 대패에 이어 1989-90 시즌도 16강에서 AC 밀란에게 1, 2차전 합계 1-2로 패배하며 탈락했다. 그중에서 레알 마드리드에 강했던 선수가 바로 마르코 반 바스텐이었다. 또한 AC 밀란은 1993-94 시즌 UCL 결승전에서 당시 최고의 전력을 자랑하던 요한 크루이프의 드림팀 FC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4-0 대승을 거두며 드림팀을 와해시켰다.[37] 1995년부터 2000년까지 레알 마드리드 회장을 역임했다. 2020년 3월 21일에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인해 77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38] 이 둘은 이후 클럽의 단장을 맡기도 한다.[39] 스페인 출신과 비스페인 출신으로 갈렸고 당시 라울 곤살레스가 현재 팀의 라커룸이 기만과 불신으로 가득하며, 당시 영입된 스티브 맥마나만에게 미안하다라는 인터뷰까지 할 정도였다.[40] 레알 마드리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바이에른 뮌헨[41] 또 하나의 M자 돌림 클럽인 AC 밀란파비오 카펠로 사임 이후 한동안 암흑기를 보내고 있었고 카를로 안첼로티가 부임하고 나서야 비로소 유럽 대항전에서 다시금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42] 당시 역대 최고 이적료를 기록했다.[43] 이 당시 피구를 영입하면서, 피구에게 줄 주급이 모자라다고 쫓아내듯 AC 밀란으로 이적시킨 선수가 '황태자'란 별명으로 불리던 페르난도 레돈도였다. 그는 1990년대 중후반 레알 마드리드 미드필더진의 핵심으로 1994-95, 1996-97 라리가 우승과 1997-98, 1999-00 시즌 챔피언스 리그 우승에 공헌한 바 있다. 밀란 이적 후에는 끊임없는 부상으로 별 활약 없이 은퇴했는데, 부상 중 지급받았던 주급을 반환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44] 이때 피구의 역대 최고 이적료 기록을 깼으며, 이 기록은 마드리드가 제2의 갈락티코스를 천명하며 2009년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부터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사 오기 전까지 깨지지 않았다.[45] 단, 수비가 약해서 공격진의 위력에 걸맞은 성적을 내지는 못했다. 이것에 대해서는 뒤에 서술한다.[46] 대표적으로 페르난도 이에로를 들 수 있다.[47] 마드리드에서는 매우 부진한 모습을 보이며 루이스 피구와 함께 인테르로 갔으나 1년 전에 먼저 넘어간 캄비아소와 함께 아이러니하게도 인테르의 핵심 선수가 된다.[48] FC 바르셀로나[49] 레알 마드리드[50] 아틀레티코 마드리드[51] 디에고 로페스는 2007년 레알 마드리드를 떠난 후 비야레알, 세비야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이며 6년 만인 2013년 다시 마드리드로 돌아와서 그 동안 부동의 주전이었던 이케르 카시야스를 밀어내는 데 성공한다.[52] UCL 결승전에 올라간 유벤투스는 MSN을 필두로 최강의 공격력을 자랑하던 바르셀로나를 만나 3:1로 깨지며 구단 6번째 준우승을 하였고, 최다 준우승 팀이 되었다. 그리고 바르셀로나는 세계 최초이자 스페인 클럽 최초로 2번째 트레블을 달성하였다.[53] 라리가 우승에 성공했으나 마드리드 고유의 색을 잃게 했다는 이유로 경질된다.[54] 2006-07 시즌과 2007-08 시즌은 잘했지만, 이후 부상으로 망했다.[55] 아이러니하게도 2009년 여름 이적 시장 때 이적한 이 두 선수는 해당 시즌 마드리드에서 열린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각 팀의 주전으로서 만나게 된다.[56] 승격팀이었던 레크레아티보 우엘바에 홈에서 0-3으로 대패하기도 했다.[57] 바르셀로나 원정 3-3 무승부 경기 때 리오넬 메시에게 해트트릭을 내줬다.[58] 2004-05 시즌부터 득점력이 급격하게 하락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59] 약 1130억 원[60] 이 이후로 올랭피크 리옹은 9년 동안 챔피언스 리그 8강 진출을 못하고 있다가, 2020년에 유벤투스 FC를 이기고 10년 만에 8강 진출이라는 대업을 이뤄내게 되는데, 공교롭게도 호날두가 있는 팀을 두 번 씩이나 16강에서 탈락시켜버린지라 축구 팬들 사이에선 호날두의 담당 일진이 리옹이라는 우스갯소리도 나오는 중이다.[61] 이 기록은 7년 뒤에 아스날 FC가 7시즌 연속 챔스 16강 탈락으로 갱신하게 된다.[62] 2008-09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과 함께 라리가, 코파 델 레이 우승도 성공하면서 트레블을 이룩한 바르셀로나를 두고 인터뷰하던 스페인 국왕 후안 카를로스 1세가 다음 시즌은 결승전이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열린다는 말로 은근히 바르셀로나를 도발했다. 즉 이번에는 자신이 서포팅하는 레알 마드리드가 안방에서 우승한다는 뜻으로 한 말이지만 결과는 참혹했다.[63] 갈락티코가 막장티코가 된 것은 비센테 델 보스케가 나가고 클로드 마켈렐레가 나간 시점이다. 델 보스케가 나가면서 무게 있는 감독이 없어졌고, 페레스의 기용 아래에서 갈락티코는 성과를 내지 못한다.[64] 후에 밝혀진 바로는 페예그리니는 로번과 스네이더르 판매를 강력하게 반대했었다고 한다. 이후 이 두 선수가 떠나고 기용해보지도 못한 게 너무 아쉽다고 밝혔다.[65] 이 경기 이전까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14년간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열린 데르비 마드릴레뇨에서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66] 이 시즌부터 레알 마드리드는 2017-18 시즌까지 단 한 차례도 4강에 오지 못한 시즌이 없다. 2018-19 시즌 16강에서 AFC 아약스에게 패하며 그 행진을 마감한다.[67] 공교롭게도 상대 감독이 전임 레알 감독이던 마누엘 페예그리니였다.[68] 주제 무리뉴는 2002년 2월 23일 FC 포르투 감독 시절 베이라 마르에 홈에서 진 후 9년 만의 홈 경기에서 패배를 기록했다.[69] 경기 후 페페의 다이렉트 퇴장을 두고 오심 논란이 크게 일었다.[70] 사실 지네딘 지단 감독의 차기 행선지로는 유벤투스 FC가 유력했다. 우선 선수 시절 유벤투스에서 에이스로 뛴 경력이 있는 데다가 마시밀리아노 알레그리 감독이 경기력 문제 및 챔피언스 리그 부진으로 자리가 위태로웠고 지단 체제에서 에이스였던 호날두가 이미 유베에서 에이스로 존재하며 2019-20 시즌 이적 시장에서 지단 체제의 또 다른 에이스였던 마르셀루를 영입하는 것이 유력했기 때문이다.


[71] 1970 월드컵 3위, 1972 유로 우승, 1974 월드컵 우승, 1976 유로 준우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