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테판 코바치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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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의 前 축구감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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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슈테판 코바치[1] Ștefan Kovács | |
출생 | 1920년 10월 1일 루마니아 왕국 티미슈주 티미쇼아라 | |
사망 | 1995년 5월 12일 (향년 74세) 루마니아 클루지주 클루지나포카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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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 키 170cm | |
직업 | 축구선수(미드필더 / 은퇴) 축구 감독 | |
소속 | 선수 | CA 오라데아 (1937~1938) 루아얄 올랭피크 클뤼프 샤를루아 (1938~1941) FC 리펜시아 티미쇼아라 (1941) CFR 투르누 세베린 (1941~1942) 페라르 클루지 (1942~1947) CFR 1907 클루지 (1947~1950) FC 우니베르시타테아 클루지 (1950~1953) |
감독 | FC 우니베르시타테아 클루지 (1952) FC 우니베르시타테아 클루지 (1954~1955) FC 우니베르시타테아 클루지 (1956) FC 우니베르시타테아 클루지 (1957~1958) CFR 1907 클루지 (1960~1962) 루마니아 대표팀 (1962~1967 / 수석 코치) CSA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 (1967~1970) AFC 아약스 (1971~1973) 프랑스 대표팀 (1973~1975) 루마니아 대표팀 (1976~1979) 루마니아 대표팀 (1980) 파나티나이코스 FC (1981~1983) AS 모나코 FC (1986~1987) | |
국가대표 | 없음 |
1. 개요
루마니아의 축구 선수 출신 축구 감독.리누스 미헬스에 가려진 면이 있지만 AFC 아약스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명장이고 축구 역사상 두 번째 트레블을 이끌어내는 등 축구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감독 중 한 명이다. 여러 축구 매거진에서 그를 역대 최고의 감독으로 인정했는데, 2013년 월드 사커는 그를 36위, 2019년 프랑스 풋볼(France Football)은 43위, 2023년 포포투는 62위로 선정했다.
2. 선수 경력
슈테판 코바치(Ștefan Kovács, 헝가리어: Kovács István)는 1920년 10월 2일 루마니아 티미쇼아라에서 헝가리계 가정에서 태어났다. 누군가 자신의 민족적 기원에 대해 물었을 때 "어머니 쪽으로는 루마니아인, 아버지 쪽으로는 헝가리인, 조부모 쪽으로는 유대인, 증조부모 쪽으로는 약간의 세르비아인"이라고 말했다.그는 1931년 11세의 나이에 CA 티미쇼아라에서 축구를 시작했고, 3년 후 CA 오라데아로 이적하여 형인 니콜라에 코바치와 함께 뛰었다. 코바치의 형은 최초 3번의 FIFA 월드컵에 모두 참가한 선수 중 한 명이었다. 1938년부터 1941년까지는 슈테판 코바치의 선수 경력에서 유일하게 벨기에 구단인 올랭피크 샤를루아에서 해외 생활을 했다. 그 후 고향으로 돌아와 잠시 리펜시아 티미쇼아라에서 뛰었고, 이후 CFR 투르누 세베린으로 이적했다.
1942년에는 콜로주바르를 연고로 한 콜로주바르 AC로 이적해 한동안 헝가리 축구 리그에서 활약했다. 그러다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트란실바니아 북부가 루마니아로 귀속되면서 콜로주바르 AC는 페라르 클루지라는 이름으로 디비지아 A에서 활약했다.
1947-48 시즌에는 페라르 클루지가 CFR 클루지와 합병되어 슈테판 코바치는 새 구단에서 활약했고, 1948-49 시즌 말에는 팀이 2부 리그로 강등되었다. 1951년에는 스틴차 클루지로 이적해 루마니아 1부 리그로 복귀했고, 1953년 9월 27일 로코모티바 티미쇼아라와의 원정 경기[2]에서 마지막 1부 리그 경기를 치렀다. 그의 루마니아 1부 리그 통산 기록은 108경기 12골이다.
3. 감독 경력
3.1. 스틴차 클루지와 초기 경력
슈테판 코바치는 1952년 스틴차 클루지에서 현역으로 뛰면서 감독을 시작했고 팀은 해당 시즌을 5위로 마쳤다. 1954년 시즌에도 다시 팀을 맡아 5위를 기록했지만, 다음 시즌 중반에는 페트레 라둘레스쿠로 교체되었다. 코바치는 1956년 시즌 전반기에 세 번째로 팀에 복귀했지만, 후반기에는 니콜라에 문테아누로 교체되었고 팀은 결국 2부 리그로 강등되었다. 그의 네 번째이자 마지막 시기인 1957-58 시즌 디비지아 B에서 팀은 1위를 차지하며 1부 리그로 승격했다.1959년에는 1년 동안 데르마타 클루지를 맡았고, 이후 2시즌 동안 CFR 클루지를 지도했다. 1962년에는 실비우 플로에슈테아누 루마니아 감독의 코치가 되었고, 이후 일리에 오아너의 코치로 활동했다. 1967년 5월 스위스와의 유로 1968 예선 경기에서 1-7로 패한 후 함께 팀을 떠났다.
3.2. CSA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
코바치가 첫 주요 성공을 거둔 것은 CSA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에서였다. 1967년부터 1970년까지 그는 1967-68 디비지아 A 우승과 연속 2회의 쿠파 로므니에이 우승을 이끌었다. 두 컵 결승전 모두 라이벌 FC 디나모 부쿠레슈티를 2-1로 이겼다. 코바치는 루마니아 최상위 리그인 디비지아 A에서 총 194경기[3]를 지도했다.이 시기에 그는 에메릭 제네이, 앙겔 요르더네스쿠를 지도했는데, 이후 제네이는 1980년대에 스테아우아 감독을 맡아 팀의 유러피언컵 우승으로 이끌었고, 루마니아 축구 국가대표팀을 지도하며 1990 FIFA 월드컵에서 역사상 최초로 16강 진출을 이끌었다. 요르더네스쿠는 스테아우아의 감독을 맡아 루마니아 리가 I에서 104경기 무패 기록을 세웠고, 1994 FIFA 월드컵에서 역사상 최초 8강 진출, 1998 FIFA 월드컵에서 역사상 최초 3연속 월드컵 16강 진출이라는 기록들을 조국 대표팀을 이끌며 세웠다.
3.3. AFC 아약스
1971년, 코바치는 리누스 미헬스의 후임으로 AFC 아약스의 감독이 되어 그의 "토탈 풋볼" 철학을 계승하고 확장했다. 아약스에 부임하자마자 "감독 후보군 중 몸값이 가장 싸서 온 감독이다"라는 말이 있었지만, 코바치는 곧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 보였다. 처음에는 팀의 스타 선수들이 그의 지도력에 회의적이었는데, 그중 요한 크루이프가 한번은 필드 가장자리에서 보조 코치와 대화 중이던 코바치를 향해 의도적으로 공을 차서 그를 맞추려고 했지만 코바치는 눈 끝으로 이 행동을 보고 재빨리 돌아서서 완벽하게 공을 멈춘 후 크루이프에게 공을 돌려주며 "슈팅할 때는 인사이드를 더 사용해라"라고 한 일화가 있었다.
첫 시즌에 그는 1971-72 에레디비시 우승[4], 1971-72 KNVB 베이커 우승[5], 그리고 1971-72 유러피언컵 우승[6]을 차지했다. 특히 1971-72 시즌에는 사상 두 번째 유로피언 트레블 포함, 모든 대회를 우승하는 기록을 세웠다. SG 디나모 드레스덴,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아스날 FC, SL 벤피카를 차례로 물리친 후 결승전에서 요한 크루이프의 두 골에 힘입어 인터 밀란을 2-0으로 꺾었다.
두 번째 시즌에는 1972 인터컨티넨탈컵에서 CA 인데펜디엔테를 4-1 종합 스코어로 이기고, 1972 유러피언 슈퍼컵에서 레인저스 FC를 6-3 종합 스코어로 물리쳐 우승했다. 그리고 또다시 1972-73 에레디비시 우승과 1972-73 유러피언컵 우승을 차지했다. 특히 아약스는 2라운드에서 CSKA 셉템브리스코 즈나메를 종합 6-1로 물리치고 FC 바이에른 뮌헨과의 8강전에서는 홈에서 4대0으로 격파하고 준결승에 진출, 준결승전에서는 레알 마드리드 CF를 꺾고 2연속 결승 진출, 이후 결승전에서는 요니 렙의 결승골로 유벤투스 FC를 1-0으로 꺾었다.
'신들의 아들들'의 감독으로서의 마지막 경기에서 선수들은 그에게 포드 타우누스 자동차를 선물로 주었는데, 그가 항상 자전거를 타고 훈련에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아약스에서의 기간 동안 그는 팀 내에 보다 편안한 환경을 조성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요한 크루이프는 이렇게 말했다: "슈테판 코바치는 매우 유쾌한 감독이었지만, 규율 면에서는 미헬스보다 훨씬 덜 엄격했다. 코바치는 우리가 자신을 표현할 수 있도록 했고, 그는 우리 중 하나였다."
코바치는 리누스 미헬스 감독과는 다르게 선수들에게 엄청난 자유를 부여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자신이 감독일 시기에는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지만, 그가 물러난 직후에는 아약스가 급속히 무너졌고 후임감독도 이 때문에 여럿 경질되었다.
3.4.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
1973년 아약스를 떠난 후, 그는 프랑스 축구 연맹의 요청으로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이 되었다. 이 자리에서 그는 프랑스의 젊은 세대의 인재들을 육성했으며, 도미니크 로셰토, 베르나르 라콩브, 알랭 지레스 등 33명의 선수들에게 데뷔 기회를 주었다. 그의 첫 경기는 홈에서 3-1 승리를 거둔 그리스와의 친선 경기였다.그는 팀을 UEFA 유로 1976 예선으로 이끌었지만, 벨기에와 동독이 1, 2위를 차지하면서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코바치는 총 15경기[7]동안 '레 블뢰'를 지휘했다. 그의 보조 감독이자 후임인 미셸 이달고는 이 작업의 이점을 살려 프랑스 팀을 이끌어 UEFA 유로 1984에서 우승하게 된다.
3.5. 루마니아 축구 국가대표팀
1976년, 코바치는 루마니아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이 되었다. 데뷔전은 5월 12일 1973-76 발칸컵 결승에서 불가리아와의 경기로 0-1로 패했다.그는 팀을 1978 FIFA 월드컵 유럽 예선에 이끌었고, 처음 두 경기에서 스페인과 유고슬라비아를 이겼지만, 두 팀과의 원정 경기에서 모두 패하면서 스페인에 이어 그룹 2위를 차지해 1978 FIFA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이후 유로 1980 예선에서 세 경기를 지휘한 후 1979년 말 보조 감독인 콘스탄틴 체르나이아누로 교체되었지만, 팀의 기술 이사로 남았다. 1980년에 국가대표팀으로 복귀했고, 8월 27일 1977-80 발칸컵 결승에서 유고슬라비아를 4-1로 이긴 경기가 "트리콜로리"를 위한 그의 마지막 경기였다. 두 번의 기간 동안 루마니아 대표팀에서 그는 총 32경기[8]를 지휘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루마니아 축구 연맹의 부회장으로도 활동했다.
3.6. 파나티나이코스와 AS 모나코
1981년에는 그리스의 파나티나이코스 FC에서 2시즌 동안 일했으며, 같은 루마니아 출신의 도루 니콜라에를 팀에 영입했다. 1981-82 그리스컵에서는 결승에서 라리사 FC를 1-0으로 꺾고 우승했다. 그의 마지막 코칭 경험은 1986-87 프랑스 디비지옹 1 시즌에 AS 모나코 FC에서 이루어졌으며, 5위를 기록했다. 이렇듯 코바치는 아약스 감독직 이후에는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며 그대로 축구계에서 은퇴했고 1995년 5월 12일 클루지나포카에서 74세의 나이로 사망했는데, 이는 아약스가 1994-95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네 번째 유러피언컵을 차지하기 12일 전이었다.4. 지도 스타일
코바치는 경직된 전술보다 선수 개개인의 재능을 신뢰하는 접근법을 취했다. 또한 다국어 능력자[9]로서도 큰 강점이 되었다.5. 여담
6. 기록
6.1. 대회 기록
- FC 우니베르시타테아 클루지 (1952, 1954~1955, 1956, 1957~1958)
- 디비지아 B: 1957-58
- CSA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 (1967~1970)
- 디비지아 A: 1967-68
- 쿠파 로므니에이: 1968-69, 1969-70
- AFC 아약스 (1971~1973)
- 파나티나이코스 FC (1981~1983)
- 그리스컵: 1981-82
6.2. 개인 수상
- 월드 사커 역대 최고의 감독 36위: 2013
- 프랑스 풋볼 역대 최고의 감독 43위: 2019
7. 둘러보기
[1] 헝가리어 이름은 코바치 이슈트반(Kovács István).[2] 0-2 패[3] 83승 50무 61패[4] 30승 3무 1패의 성적으로 우승했으며 27라운드 고 어헤드 이글스와의 경기에서 뤼트 헤일스에게 멀티골을 얻어 맞으면서 2:3 역전패했다. 그리고 이것이 1971-72 시즌 통틀어 아약스가 허용한 유일한 패배이다. 만약 이 경기마저도 지지 않았더라면 아약스는 무패 우승으로만 트레블을 달성할 수 있었다.[5] 결승에서 FC 덴하흐를 3-2로 이기며 5연승으로 우승.[6] 7승 2무로 우승[7] 6승 4무 5패[8] 11승 8무 13패[9] 루마니아어, 헝가리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10] UEFA가 유러피언 슈퍼컵을 공인한건 1973년부터이므로 1972년에 열린 슈퍼컵은 비공식 대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