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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페이건

조 페이건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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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클럽
파일:리버풀 FC 라이버 버드 로고(레드).svg

1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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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의 前 축구감독
파일:조페이건리버풀.png
조 페이건
Joe Fagan
<colbgcolor=#eeeeee,#191919> 본명 조지프 페이건
Joseph Fagan
출생 1921년 3월 12일
잉글랜드 머지사이드 주 리버풀 월튼
사망 2001년 6월 30일 (향년 80세)
잉글랜드 머지사이드 주 리버풀
국적
[[영국|]][[틀:국기|]][[틀:국기|]] (
[[잉글랜드|]][[틀:국기|]][[틀:국기|]])
신체 182cm[1]
직업 축구선수 (라이트 하프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얼스타운 보헤미안 (1937~1938)
맨체스터 시티 FC (1938~1951)
하이드 유나이티드 (1939~1940[2])
넬슨 FC (1951~1953)
브래드포드 파크 에비뉴 AFC (1953~1954)
알트링엄 (1954~1955)
지도자 넬슨 FC (1951~1953 / 선수 겸 감독)
로치데일 AFC (1956~1958 / 코치)
리버풀 FC (1958~1983 / 코치)
리버풀 FC (1983~1985 / 감독)

1. 개요2. 생애
2.1. 유년 시절2.2. 선수 경력2.3. 코치 경력2.4. 감독 경력2.5. 은퇴 후 말년
3. 평가4. 여담5. 기록
5.1. 선수
5.1.1. 대회 기록
5.2. 감독
5.2.1. 대회 기록5.2.2. 개인 수상
6.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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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잉글랜드)축구선수 출신 감독. 1983년부터 1985년까지 리버풀 FC의 감독을 맡았다.

빌 샹클리, 밥 페이즐리 감독에 이어서 리버풀의 지휘봉을 잡아, 풋볼 리그 디비전 1 우승과 유러피언 컵 우승 등을 달성한 리버풀의 손꼽히는 명장 중 한 명이다. 그는 1958년에 리버풀 코치로 합류하여 샹클리와 페이즐리 사단에서 꾸준하게 핵심 코치진으로 활약하다 감독직까지 수행한 대표적인 '부트 룸(Boot Room)'[3] 레전드 멤버이기도 하다. 그는 코치에서 감독으로 내부 승격되어 부임 이후 단 두 시즌만에 감독직을 내려놓았으나, 붉은 제국이라 불린 구단의 전성기를 계승하여 잉글랜드 리그 최초의 리그 3연패와 더불어 리버풀 클럽 역사상 최초로 한 시즌 동안 3개의 메이저 트로피[4]를 들어올리는 쾌거를 이루어냈다. 그는 또한 2020년대 기준, 감독으로서 유러피언 컵을 우승한 네 명의 잉글랜드인 감독 중 한 명이자[5], 마지막 잉글랜드인이기도 하다.[6]

리버풀 팬들에겐 빌 샹클리, 밥 페이즐리와 함께 유럽을 지배했던 구단의 최전성기 붉은 제국 시절을 상징하는 레전드 감독이자 코치 중 한 명으로 꼽힌다.[7] 하지만 고령의 나이로 감독직에 부임하여 애초에 커리어 자체가 짧기도 했고 엄청난 시즌을 보냈지만 이어진 시즌의 커리어 마지막 경기가 헤이젤 참사로 얼룩졌기 때문에 앞선 두 감독들에 비해 존재감이 가려지는 경향이 있다.

2. 생애

2.1. 유년 시절

페이건은 1921년 3월 12일 리버풀 월튼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 대부분 머지사이드주 리더랜드와 스코틀랜드 로드 지역에서 거주했다. 그의 아버지 패트릭 페이건과 어머니 메리 페이건은 아일랜드 혈통이었는데, 그는 오랫동안 가정을 떠나있던 아버지 대신 어머니에게 대부분의 어린 시절을 빚졌다. 페이건은 어린 시절을 안필드구디슨 파크에 인접한 지역에서 보냈기 때문에 축구를 자연스럽게 접했고, 축구는 사실상 그의 삶에 항상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그는 축구에 재능이 있었기에 그가 14살이었을 때는 랭커셔 학교 축구 협회가 운영하는 대회인 데일리 디스패치 트로피에서 그의 학교인 세인트 엘리자베스 센트럴의 주장을 맡기도 했다. 그렇게 점차 능력을 키워간 페이건은 1937년 학교를 졸업한 후 곧장 축구 선수로 활약하게 된다.

2.2. 선수 경력

페이건은 졸업 후 1937년에 얼스타운 보헤미안에 입단하여 리버풀의 지역 리그에서 활약했다. 그는 페이건은 선수 생활 내내 오른쪽 미드필더로 활약했는데, 중앙 미드필더로 뛸 수도 있었다. 그가 뛰었던 첫 리그는 리버풀에버튼의 유소년 A팀이 출전하는 리그였고, 그는 경기들에서 활약을 선보이며 당시 리버풀의 스카웃 제의를 받기도 했다. 그는 안필드로 초청받아 트라이얼을 받았고, 당시 감독이던 조지 케이 감독에게 계약도 제안받았지만 당시 17세였던 그는 리버풀에서 1군 기회를 제대로 얻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입단을 거절했다. 대신 그는 비교적 경쟁이 수월할 것으로 예상된 맨체스터 시티에 입단했다. 1938-39 시즌, 페이건은 유스 A팀과 B팀을 오가면서 뛰었고, 그 이후 본격적으로 정식 리저브팀으로 합류하였다. 하지만 이후 1939-40 시즌,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하여 리그가 중단되었고 당시 18세로 입대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던 그에게 맨시티는 전시 제한을 받지 않는 체셔 카운티 리그의 하이드 유나이티드에서 뛸 수 있도록 허가를 내주었다. 그는 하이드에서 1939년 10월 13일 데뷔하여 총 26경기를 객원 선수로 뛰었는데, 나름 성공적인 시즌을 보냈으나 19세가 되며 군 복무를 앞두게 되었다. 페이건은 소집을 기다리지 않고 즉각 자원하여 영국 해군으로 입대했다. 그는 이집트 지뢰 제거 함대에서 전신기사로 일했고, 1946년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그는 당시 인기스포츠였던 복싱에 매우 관심이 있었고 해군 경력 동안 의무원으로서 일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이집트에서도 계속해서 축구를 멈추지 않으며 다양한 팀에서 뛰었고, 잉글랜드로 복귀한 휴가기간 동안에도 맨유와의 지역 더비 매치를 포함해 여러 경기에서 맨시티를 대표하여 뛰었다. 심지어 전쟁 시기 포츠머스에서도 객원 선수로 뛰기도 했다.
파일:joefaganasaplayer.jpg
선수 시절의 조 페이건

전쟁이 끝난 후 페이건은 맨시티에서 정식으로 자리매김하기를 원했다. 맨시티는 당시 2부 리그에서 속해있었지만 1부 리그로의 승격이 유력한 상황이었고, 페이건은 결국 입단 8년 만에 25세의 나이로 맨시티 1군에 공식적으로 데뷔하였고 훌륭한 활약으로 2부 리그 우승에 공헌했다. 그는 1949년 11월까지 121경기 연속으로 리그에 출전했으며, 1947-48 시즌 맨시티가 1부 리그로 승격했을 때 1군에서 확고한 주전 선수였는데, 그는 좋은 위치선정과 판단력으로 팀의 신뢰를 얻었고 팀에 대한 충성심과 정식한 모습, 항상 웃는 얼굴로 유명하여 팬들에게도 인기가 있었다. 1947년 11월 그는 미래의 조력자이자 동료가 될 밥 페이즐리를 리버풀과의 경기에서 상대로 처음 만나기도 했다. 시티는 페이건의 활약 아래 1947-48 시즌 리버풀보다 한 단계 높은 10위를 차지했고 그 다음 시즌에는 7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하지만 1949-50 시즌에 맨시티는 굉장한 부진을 거듭하다가 시즌 말미 강등이 확정되었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페이건은 1951년 다리가 부러지는 중부상을 입어 선수로서의 미래가 불투명해졌다. 그는 앞으로의 커리어를 고민하기 시작했고 결국 1951년 맨시티를 떠나 코치에 도전하게 된다. 이후 페이건은 랭커셔 지역 리그의 넬슨 FC에서 플레잉 코치로 감독을 맡았으며 1951-52 시즌 팀의 우승을 이끌었다. 그러나 넬슨은 당시 아마추어 팀이었기 때문에 그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공장에서 가스 계량기의 누출 여부를 점검하는 일을 동시에 해야했다. 페이건은 이후 다시 선수로 복귀하여 1953년 브래드포드 파크 애비뉴를 거쳤다가 로치데일의 수석코치직과 겸하여 알트링엄에서 조금 더 뛰었고, 결국 1955년 선수 생활을 완전히 은퇴한다.

2.3. 코치 경력

페이건은 넬슨 FC에서 플레잉 코치로 감독직을 맡았다가 1954년 로치데일의 수석코치직에 부임하였고 1년 뒤, 선수생활을 완전히 정리하며 본격적으로 코치 커리어를 시작했다. 그는 미래 에버튼의 감독이 되는 해리 캐터릭 밑에서 1958년까지 로치데일 코치로 일했으며, 코치 외에도 그는 구장 관리와 장비 관리 등 구단에서 다양한 업무를 맡았다. 캐터릭은 1958년, 페이건을 리버풀의 당시 필 테일러 감독에게 추천하였고 그는 리버풀의 코치직을 제안받았다.

파일:external/assets.lfcimages.com/6277__5656__04_lfc_shanks.jpg
리버풀의 위대한 '부트 룸' 코치진들
,좌측부터 빌 샹클리, 밥 페이즐리, 조 페이건, 로니 머랜, 루벤 베넷, 톰 손더스,
파일:gettyimages-78969544-612x612.jpg
레이 클레멘스를 처치히고 있는 코치 시절의 조 페이건

페이건은 결국 리버풀의 코치직을 수락하였고, 선수 시절 한 차례 고사했던 구단에 입단하여 그의 평생을 바칠 커리어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페이건이 리버풀에 합류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59년 12월, 빌 샹클리가 리버풀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1950년대 초 그림즈비 타운의 감독이었던 샹클리는 당시 페이건을 선수로 영입하려 했기 때문에, 코치진에 페이건이 있는 것을 보고 매우 기뻐했다. 샹클리는 안필드에서 페이건을 만나 첫 마디로 "내가 너와 계약하려고 했었으니 조, 넌 좋은 선수였음에 틀림없어"라고 말하기도 했다. 취임 첫 날, 샹클리는 페이건과 밥 페이즐리, 루벤 베넷[8]을 모아놓고 자신의 코치진을 데려오지 않을 것이며, 기존 코치들과 일하고 싶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샹클리는 코치진들에게 서로와 구단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심을 가지고 협력할 것을 강조했고, 필 테일러 감독 시절의 단순한 체력 훈련에서 벗어나 "공의 흐름과 속도"를 가지고 하는 기능적이고 전문적인 훈련 시스템을 구단에 도입했는데, 페이건은 넬슨 FC에서 지도자 경력을 시작했을 당시부터 이러한 기능적 훈련에 대한 철학을 가지고 있었기에 샹클리의 플랜에 기쁜 마음으로 헌신하게 된다. 페이건은 샹클리가 구단에 도입한 새로운 훈련방식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선수들에게 다양한 훈련을 소화시키고 육성했다. 페이건은 샹클리 부임 초기 구단의 리저브팀 감독을 맡았었는데, 이 때 그는 로저 헌트, 이안 캘러한, 토미 스미스와 같은, 후에 팀의 핵심이 되는 젊은 유망주들을 다수 육성해냈다. 샹클리의 리버풀은 초기에 스쿼드 리빌딩에 전력을 다하고 있었고 베테랑들을 대체할 어린 자원들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유스 시스템의 혁신과 리저브팀에서의 선수 배출은 여러모로 구단에 엄청나게 중요한 과제였는데, 페이건은 당시 이 중책을 맡아 훌륭히 역할을 해냈다. 샹클리의 전략은 페이건을 통해 리저브팀을 "미래 스타들을 위한 유치원"으로 탈바꿈시키는 것이었다.[9] 페이건은 1969년부터 1971년까지 리저브팀을 이끌고 2군 대회 3연패를 달성했고, 126경기 중 단 14패만 기록했다. 리저브팀에서 성과를 충분히 올린 페이건은 1971년 1군 코치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샹클리는 1974년 은퇴하였고 밥 페이즐리가 후임으로 감독직을 맡았다. 페이건은 사령탑이 바뀐 시기 팀이 연속성을 유지하며 상승세를 이어갈 수 있도록 1군 코치진에서 지속적으로 역할을 하게 되었다. 페이건은 다른 부트 룸 코치들이 그랬듯이 조용하고 겸손한 성격이었으나, 리버풀 커리어 내내 코치로서의 뛰어난 능력으로 유명해졌고 계속된 팀 내 활약에 힘입어 1979년, 그는 페이즐리의 수석 코치로 승진하여 팀에 중추적인 역할을 맡기 시작했다. 전설적인 감독 바비 롭슨이 80년대 초반 인터뷰에서 페이건을 두고 경기장 내 최고의 코치라고 치켜세운 바 있을 정도였다. 페이건은 그렇게 25년간 빌 샹클리와 밥 페이즐리를 훌륭하게 보좌했고, 2부 리그를 전전하던 리버풀을 잉글랜드 최고의 클럽을 넘어 유럽을 지배하는 클럽으로 올려놓는 데에 헌신했다. 코치로서 그는 리버풀의 1부 리그 9회, 2부 리그 1회, FA컵 2회, EFL컵 3회, 채리티 실드 9회, 유러피언 컵 3회, UEFA컵 2회, UEFA 슈퍼컵 1회 우승에 기여했다.

이렇게 팀 안팎에서 평가가 좋았던 터라, 페이즐리가 은퇴한 후 페이건은 팀의 다음 감독으로 추천되었다. 그는 페이즐리가 처음에 그러했듯이 수석 코치에서 승격하여 감독직을 맡기 꺼렸지만, 당시 리버풀의 전통적인 정책은 '내부 승진을 통한 연속성의 확보'였다.[10] 페이즐리는 구단 보드진 이사회에 페이건이 선수들과 경기를 매우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적임자라는 의견을 피력했고, 결국 '부트 룸'의 계승을 위해 1983년 7월 1일 페이건이 리버풀의 감독으로 부임한다.

2.4. 감독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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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은퇴 후 말년

페이건은 감독직을 내려놨지만 헤이젤 참사의 기억으로 인해 오랜기간 고통받는 후년을 보냈다. 그의 후임 케니 달글리시가 본인의 자서전에서 참사 이후에 감독직을 내려놓은 페이건이 여생동안 유령같이 지냈다며 그의 말년을 언급했을 정도.
파일:external/www.lfchistory.net/fagan_mrsshankly_mrspaisley.jpg
1994년 구 콥 엔드 폐장식에서 네시 샹클리[11], 제시 페이즐리[12]와 함께.

페이건은 클럽에 남긴 위대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아픈 기억 때문에 레전드로서 구단 안팎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끌지 못했지만, 그래도 정기적으로 안필드와 멜우드를 방문했고 항상 후임자들을 위한 조언으로 클럽과 묵묵히 함께했다. 그는 안필드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위치한 42 린홈 로드의 소박한 주택에서 말년을 쭉 보내다가 2001년 6월 30일, 암으로 인해 80세의 나이로 타계하였다. 그는 안필드 근처의 묘지에 안장되었다.

3. 평가

'부트 룸(Boot Room)'의 모든 것. (what the boot room was all about.)
조 페이건에 대하여 - 前 리버풀 FC 선수, 코치, 그리고 임시 감독이었던 로니 모란
그의 생각은 항상 축구를 향해있었지만, 무엇보다도 그는 진정한 사람들의 사람(people’s person)이었다.
리버풀 FC 선수 브라이언 홀
조 페이건의 고함 소리는 클럽의 그 누구보다도 큰 영향을 끼쳤다. 심지어 밥 페이즐리케니 달글리시보다도.
리버풀 FC 선수 마크 로렌슨
아버지는 항상 나의 아버지이시겠지만, 나는 항상 조 페이건을 제 2의 아버지로 생각해왔다. 그만큼 그를 존경했다.
리버풀 FC 선수, 코치, 그리고 감독이었던 로이 에반스
난 그의 주장이었고 그의 지도 방식을 따랐다. 그는 사랑스럽고, 사랑스러운 사람이었지만 축구에 있어서는 진지했다.
리버풀 FC 선수 그리고 감독이었던 그레이엄 수네스
그에게 3개의 를 선물한 것은 멋진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럴 자격이 있기 때문아다.
리버풀 FC 선수 필 닐

조 페이건은 리버풀의 붉은 제국 시대를 견인한 '부트 룸'의 핵심 코치 중 한 명이자, 빌 샹클리, 밥 페이즐리를 이어 리버풀의 지휘봉을 잡아 유러피언 컵 우승을 포함한 구단 최초 단일 시즌 3관왕을 달성한 업적을 남긴 레전드 감독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앞선 두 전임 감독에 비해 팀 안팎에서 언급되는 경우가 적고 심지어 후임 감독인 케니 달글리시에 비해서도 존재감이 약해, 동시에 리버풀 역사상 가장 저평가된 감독 혹은 가장 불운한 감독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그의 리버풀 커리어 마지막이 헤이젤 참사라는 충격적인 사건으로 얼룩졌기 때문이다. 물론 고령의 나이로 팀에 부임하여 단 두 시즌만 팀을 지휘했기 때문에 절대적인 커리어의 기간이 짧기도 했다.[13] 하지만 그럼에도 리버풀의 역사를 대표하는 위대한 감독들 사이에서 페이건이 빠지지 않고 꼽히는 이유는 그가 지휘한 1983-84 시즌이 구단 역사상 가장 성공적이었던, 붉은 제국의 최절정을 보여준 시즌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단순히 운과 훌륭한 스쿼드 때문에 우승 트로피들을 들어올린 것이 아니라 페이건의 지도자로서의 능력은 당대 축구계에서 손꼽히는 수준이었다고 평가받는다. 그는 빌 샹클리 체제에서는 리저브팀 감독으로 어린 선수들의 육성을 담당했고, 밥 페이즐리 체제에서는 수석 코치로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해왔는데, 그는 선수단을 가장 가까이에서 이해해온 코치로서 팀 스쿼드의 성장과 개발에 중추적인 인물이었다.[14] 그는 코치 시절 내내 선수들의 말을 경청하고 굉장히 적절한 조언을 해주는 능력으로 찬사를 받아왔으며, 선수들에게 언제 당근과 채찍을 활용하고 어떻게 실질적인 교정을 제공하는 것이 적절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 실질적으로 고령의 나이임에도 페이즐리의 후계자로 지목되었던 것도 그가 팀을 가장 잘 이해하는 코치였을 뿐더러 그가 불세출의 맨 매니지먼트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페이건은 선수단 관리의 연장선상에서 성공적인 축구 방식을 너무나도 잘 이해하는 지도자이기도 했다. 그는 축구 지식의 향상을 위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상대 감독과 토론하는 것을 즐겼으며, 최대한 선수들을 활용하는 방법에 대한 연구, 기술적이고 전문적인 훈련을 추구하는 철학을 중요시 여겼다. 그는 샹클리 시절 만들어진 '부트 룸'을 편안한 논의의 장소로 만드는데에 크게 기여했고 클럽의 많은 경기들을 분석하며 클럽의 대소사를 모두 기록하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기록물들은 후에 클럽 내 코칭 스태프들을 위한 참고서가 되었으며 리버풀의 성공 비결을 담은 '안필드 바이블' 로 불리기도 했다.[15] 그는 코치 시절부터 꾸준하게 정립해온 노하우를 통해 1984년 유러피언 컵 AS 로마의 결승전을 승리로 이끌어 우승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그는 팀이 상대팀의 홈 구장[16]으로 원정을 떠나 지나친 생각에 잠기고 분위기에 잠식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로마에 일부러 늦게 도착했으며, 선수단에게 어차피 우리가 골을 넣을테니 골 넣고 원정 관중들과 충돌하지 않는 일에만 집중하라고 전하며 선수들의 압박감을 덜어주었다.[17] 뛰어난 선수단 관리를 통해 위닝 멘탈리티를 팀에 불어넣을 수 있는 유연함 뒤에 확실한 전술적인 판단과 경험적인 근거를 더했던 감독이기도 했던 것.

종합하자면, 헤이젤 참사로 인해 업적과 명성이 다소 가려졌으나, 빌 샹클리와 밥 페이즐리에 이어 구단 역사상 최고점의 시즌을 보낸 전설적인 감독. 그는 선수단과 늘 가깝게 지냈고 선수 관리에 특히 능하여 수 많은 스타들을 발굴해낸 코치였으며, 축구에 대한 집요한 분석으로 단 기간이지만 엄청난 성적을 거둔 명장이자 함께 일한 이들에게 무수한 존경을 받는 덕장이기도 했다.[18] 그는 차분하고 겸손한 성격으로 주목받고자 하는 욕심이 없었고 누구보다도 선수들과 함께하는 현장을 사랑했던 인물이었기에, 선수단과 일부 거리를 둘 수 밖에 없는 감독직에 대한 부담을 가졌고 또 많은 나이로 인해 감독직을 일찍 내려놓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실상부 당대 영국 축구계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자 중 한 명으로 평가된다.[19][20] 짧은 감독 경력이었지만 30년에 가까운 긴 코치 경력을 통해 구단에 대한 헌신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페이건은 아픈 참사의 오명에도 불구하고 현대에도 리버풀 구단 역사상 최고의 감독들 중 하나이자 붉은 제국을 이끈 '부트 룸'의 상징으로 손꼽힌다.

4. 여담

5. 기록

5.1. 선수

5.1.1. 대회 기록

5.2. 감독

5.2.1. 대회 기록

5.2.2. 개인 수상

6.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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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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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년 ~ 현재
초대
바클레이
파일:아일랜드 국기.svg
2대
맥케나
파일:아일랜드 국기.svg
3대
왓슨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
4대
애시워스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5대
맥퀸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6대
패터슨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7대
케이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8대
웰시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9대
테일러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10대
샹클리
(샹클리 체제)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
★★
11대
페이즐리
(페이즐리 체제)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
★★★★★★
12대
페이건
(페이건 체제)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13대
달글리시
(달글리시 체제(1기))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
★★
13대(대행)
모란
(모란 체제)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14대
수네스
(수네스 체제)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15대
에반스
(에반스 체제)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15·16대
에반스·울리에
(에반스·울리에 체제)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파일:프랑스 국기.svg
16대
울리에
(울리에 체제)
파일:프랑스 국기.svg
★★
17대
베니테스
(베니테스 체제)
파일:스페인 국기.svg
18대
호지슨
(호지슨 체제)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19대
달글리시
(달글리시 체제(2기))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20대
로저스
(로저스 체제)
파일:북아일랜드 국기.svg
21대
클롭
(클롭 체제)
파일:독일 국기.svg

22대
슬롯
(슬롯 체제)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프리미어 리그 / FA컵 / EFL컵 / EFL 챔피언십
UEFA 챔피언스 리그 / UEFA 유로파 리그 / UEFA 슈퍼컵 / FIFA 클럽 월드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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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키가 크다, 샹클리를 비롯한 코치진들과 찍은 단체 사진에서 페이건 혼자 머리 하나 더 클 정도.[2] 전쟁으로 인해 객원 선수로 투입됨.[3] 리버풀 홈 구장인 안필드 내에 있었던 축구화 보관을 위한 장비실이다. 본래는 장비실이었지만 빌 샹클리를 비롯하여 그의 수석 코치였던 밥 페이즐리루벤 베넷, 톰 손더스, 조 페이건, 로니 모란 등의 코치들이 차를 마시며 전술 회의를 진행했던 비공식적인 코치 회의실로서, 리버풀의 전성기를 이끈 상징적인 장소로 유명하다.[4] 1983-84 시즌, 풋볼 리그 디비전 1, 유러피언 컵, EFL컵[5] 리버풀의 밥 페이즐리, 노팅엄 포레스트브라이언 클러프, 아스톤 빌라토니 바튼이 나머지.[6] 현재 잉글랜드 감독 중 높은 능력을 가진 사람이 없기에 당분간 기록을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7] 리그에서의 전성기를 이어갔던 후임자 케니 달글리시까지 포함하여 구단의 전성기 시절 감독을 맡은 인물들 중 유일한 리버풀 태생이기도 하다. 샹클리와 달글리시는 스코틀랜드 출신이고 페이즐리는 더럼주 출신. 달글리시 이후 13대 감독을 잠시 맡았던 로니 모란도 리버풀 태생이긴 하나, 사실상 달글리시를 끝으로 구단의 전성기는 종료되었고 모란은 전성기 시절 코칭 스태프였을 뿐, 실제로 임시감독이었다.[8] 당시 리버풀의 기존 1군 코치진들이었다.[9] 이후 샹클리가 "이 도시에는 위대한 두 팀이 있다. 리버풀 FC와 리버풀 FC 리저브다."라고 말한 것도 지속적으로 리저브팀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었다. 물론 지역 라이벌 에버튼을 겨냥한 발언이기도 했다.[10] 당시 팀의 주축 선수였던 이안 러시가 밝히기를 당시 리버풀은 내부 승진을 통해 연속성을 지키는 것을 정책으로 삼긴 했으나, 그 일에 적임자가 있어야만 임명하는 방식이었다고 한다. 즉, 페이즐리와 페이건은 그냥 수석 코치여서 감독으로 추대된 것이 아니라 보드진 이사회에 의해 확실한 적임자로 판단되었기 때문에 감독으로 임명된 것.[11] 빌 샹클리의 아내. 2002년 작고.[12] 밥 페이즐리의 아내. 2012년 작고.[13] 실제로 그의 마지막 시즌은 무관에 그쳤기 때문에 팀에 우승을 안겨준 영광의 커리어는 사실상 단 한시즌에 불과하다.[14] 그는 리저브팀 시절 수많은 구단의 레전드급 선수들을 발굴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특히 커리어 초반 슬럼프에 빠져있던 로저 헌트를 성을 다해 지도하여 뛰어난 공격수로 탈바꿈 시켰다거나 프로 계약을 제의받아 들떠있던 토미 스미스를 꾸짖어 멘탈을 다잡게 했던 일화들은 그가 당시 팀 선수들에게 어떤 존재였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15] 특히 그는 1965년 아약스전, 1973년 레드 스타 베오그라드전 등 유럽 대항전에서의 패배 사례들을 분석해 유럽 대항전에서 승리할 수 있는 팀의 교훈을 실질적으로 정리한 것으로도 알려졌다.[16] 당시 결승전은 AS 로마의 홈 구장인 스타디오 올림피코에서 열렸다.[17] 페이건은 경기 직전 선수들에게 그냥 자연스럽게 순간을 즐기라는 짧은 지시를 했고, 긴장이 풀린 리버풀 선수들은 경기장 터널에서 크리스 레아의 노래 'I Don't Know What It Is (But I Love It)'를 흥얼거리는 지경이었다고 한다. 이에 로마 선수들과 당시 닐스 리드홀름 로마 감독은 리버풀 선수단의 노래를 들으면서 얼어 붙었다고.[18] 그와 함께한 선수들과 코치들의 헌사가 이를 증명한다.[19] 영국 축구사의 전설적인 명장 바비 롭슨이 80년대 초, 페이건을 두고 최고의 코치라고 언급한 바 있다.[20] 2023년 기준, 최상위 유럽 대항전을 우승한 단 4명의 잉글랜드인 감독 중 한명이며, 그 중 마지막으로 빅이어를 들어올린 감독이다. 유러피언 컵과 당시 1부 리그 우승을 모두 경험한 3명의 감독 중 하나이며, 두 대회를 단일 시즌에 우승한 2명의 감독 중 한 명이기도 하다.[21] Manager of the Year Awa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