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버풀 FC 관련 문서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231f20,#ffffff | 개요 | <colbgcolor=#d00027> 산하 구단 | 리버풀 FC|리버풀 FC 아카데미 |리버풀 FC 위민 | |
선수단 | 스쿼드|스쿼드(간략)|아카데미 스쿼드 | |||
스태프 | 보드진 및 스태프 | 아카데미 스태프 | |||
소유주 | 펜웨이 스포츠 그룹 | |||
역사와 문화 | 역사 | 역사|기록과 통계|상대 전적|상징|유니폼 | ||
주요 인물 | 레전드|역대 회장 및 구단주 | 역대 감독 | 역대 주장|역대 올해의 선수|역대 리그 득점왕 | |||
역대 시즌 | 2004-05|2005-06|2006-07|2007-08|2008-09|2009-10|2010-11|2011-12|2012-13|2013-14|2014-15|2015-16 /리그|2016-17 /리그|2017-18 /리그|2018-19 /리그 /UCL|2019-20 /리그|2020-21 /리그|2021-22 /리그 /FA컵 /EFL컵|2022-23 /리그|2023-24 /리그 /EFL컵|2024-25 /리그 | |||
우승 기록 | 1부 | 1900-01, 1905-06, 1921-22, 1922-23, 1946-47, 1963-64, 1965-66, 1972-73, 1975-76, 1976-77, 1978-79, 1979-80, 1981-82, 1982-83, 1983-84, 1985-86, 1987-88, 1989-90, 2019-20 | ||
2부 | 1893-94, 1895-96, 1904-05, 1961-62 | |||
FA컵 | 1964-65, 1973-74, 1985-86, 1988-89, 1991-92, 2000-01, 2005-06, 2021-22 | |||
EFL 컵 | 1980-81, 1981-82, 1982-83, 1983-84, 1994-95, 2000-01, 2002-03, 2011-12, 2021-22, 2023-24 | |||
커뮤니티 실드 | 1964, 1965, 1966, 1974, 1976, 1977, 1979, 1980, 1982, 1986, 1988, 1989, 1990, 2001, 2006, 2022 | |||
UEFA 챔피언스 리그 | 1976-77, 1977-78, 1980-81, 1983-84, 2004-05, 2018-19 | |||
UEFA 유로파 리그 | 1972-73, 1975-76, 2000-01 | |||
UEFA 슈퍼컵 | 1977, 2001, 2005, 2019 | |||
FIFA 클럽 월드컵 | 2019 | |||
서포터즈 | The Kopite | |||
응원가 | 응원가 목록|You'll Never Walk Alone|Allez, Allez, Allez | |||
관련 정보 | 더비 매치 | |||
사건 사고 | 힐스버러 참사|헤이젤 참사 | |||
기타 | 이스탄불의 기적|안필드의 기적|붉은 제국|부트 룸|제토 라인|마누라 라인|여담 | |||
구단 시설 | 경기장 | 안필드(1892~현재) | ||
훈련 시설 | AXA 트레이닝 센터|AXA 멜우드 트레이닝 센터 | |||
기타 | 연고지 | 리버풀 | ||
스폰서 | 스탠다드차타드(메인 스폰서)|나이키(키트 스폰서)|익스피디아(슬리브 스폰서)|AXA(트레이닝 스폰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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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소속의 축구 클럽, 리버풀의 구단 역사상 최고 전성기와 당시의 리버풀 팀을 가리키는 별칭. 당시 잉글랜드 리그에서 뿐만이 아니라 유럽 대항전에서 절정의 전성기를 달리며 다년간 대륙을 호령하는 위업을 쌓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별명으로 불리곤 했다.[1] 정확하게는 유럽 대항전에서 두각을 나타낸 1960년대 빌 샹클리 감독 재임기부터 1980년대 조 페이건 감독 재임기까지를 의미한다.[2] 그러나 이후 케니 달글리시 감독 재임기까지 구단 전성기는 계속 이어졌기 때문에 20세기 마지막 리그 우승인 1989-90 시즌까지를 넓게 포함하기도 한다.붉은 제국 시절 리버풀은 총 41개의 트로피를 들어올렸으며, 이 중 친선 대회 성격이 강한 채리티 실드를 제외하면 메이저 트로피만 28개를 들어올렸다. 이 기간 리버풀이 차지한 리그 우승 횟수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제외한 잉글랜드 각 클럽의 통산 리그 우승 횟수와 같거나 많으며[3], 이 기간 리버풀은 9시즌 연속[4]으로 한 개 이상의 우승을 차지하며 지금까지도 잉글랜드 역사상 최다 시즌 연속 우승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또한 리버풀은 붉은 제국이라 불리는 기간 동안 유러피언컵[5] 4회 우승을 포함해 무려 7개의 유럽 대항전 트로피를 들어올렸는데, 특히 1977년부터 1985년까지의 8년 동안에는 유러피언컵 결승전에 총 5회 진출하여 무려 4회를 우승하는[6] 유럽의 왕조에 가까운 성적을 보여줬다. 이 기간에 리버풀이 들어올린 유러피언컵 우승 트로피 빅 이어는 잉글랜드 각 클럽의 통산 빅 이어 갯수보다 많다.[7]
이렇게 유럽 최고의 위치에 장기간, 연속적으로 자리매김한 역사는 잉글랜드 구단 중 유일한 것이다. 잉글랜드를 포함한 영국 구단 중 유럽 무대에서 일찍이 두각을 나타낸 구단으로는 셀틱,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노팅엄 포레스트와 아스톤 빌라가 있고, 이와 더불어 21세기에 첼시와 맨체스터 시티도 유럽 대항전에서 우승을 차지했지만, 붉은 제국 시절의 리버풀만큼 유럽 대항전에서 연속적으로 우승을 차지하거나 장기간 최고 수준의 성적을 구가한 바는 없으며, 유럽 대항전과 동시에 리그에서도 압도적인 지배력을 보였던 클럽은 그 외 전무하다.[8] 특히 붉은 제국의 최전성기였던 1975년부터 1984년까지의 리버풀은 축구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팀 중 하나로 꼽히는데, 실제로 스포츠 몹이 발표한 '축구 역사상 최고의 팀 TOP 50'에서 당시의 리버풀이 역대 8위, 클럽 팀 중에서는 역대 6위로 랭크된 바 있다.#
2. 특징
길고 긴 잉글랜드 축구 역사 속에 수 많은 구단들의 전성기가 있었지만, 붉은 제국 시절의 리버풀은 유일무이하게 리그와 유럽 대항전을 동시에 장기간 호령한 역사를 구축했다. 전성기의 절정이었던 1976-77 시즌부터 1983-84 시즌까지의 8시즌 동안, 리버풀은 잉글랜드 최초의 유러피언컵 2연패를 포함해 빅 이어를 4차례나 들어올렸고, 이 기간 동안에만 6번의 리그 우승을 이뤄냈다. 리그만 따졌을 때 역사상 이정도의 지배력을 보여준 구단은 알렉스 퍼거슨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펩 과르디올라의 맨체스터 시티가 리버풀 외 유이한데, 이들은 단일 시즌에 트레블을 이루긴 했으나 유럽 대항전에서 왕좌를 유지하거나, 연속적으로 우승을 노리지는 못했다.[9] 유럽 대항전만 따지면 1978-79, 1979-80 시즌에 유러피언컵 2연패를 차지한 노팅엄 포레스트도 있으나 이들은 리그에서 1977-78 시즌 딱 한 차례 우승을 기록해 국내에서 연속적인 지배력을 보여준 구단은 아니었다.또한 전성기 자체도 매우 길게 이어졌는데, 최전성기는 1970년대 중후반과 1980년대 초중반이었지만, 실제로는 1960년대 초반 빌 샹클리 시절부터 1980년대 끝의 케니 달글리시 시절까지 약 30년에 가깝게 리그를 지배했다. 이정도의 유지 기간을 보여준 전성기는 알렉스 퍼거슨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힘께 잉글랜드 축구사를 통틀어 유이하다.[10] 그러나 퍼거슨의 맨유와는 성격이 또 다른 것이 리버풀은 빌 샹클리, 밥 페이즐리, 조 페이건, 케니 달글리시까지 여러 명의 감독들이 연이어 사령탑을 내부 승계하며 전성기를 이어갔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는 리버풀의 자랑이었던 부트 룸 문화에 의한 것인데, 부트 룸은 샹클리 시대에 만들어진 코칭 스태프들의 회의실로, 페이즐리, 페이건을 비롯해 로니 모란, 로이 에반스 등 후대까지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는 코치진들이 양성된 장소이자 실질적인 구단의 브레인이었다. 이에 샹클리같은 엄청난 존재감의 감독이 사임했음에도 내부에서 시대를 이어갈 수 있는 역량을 가진 후임 감독들이 연이어 배출될 수 있었으며, 사령탑 교체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구단의 전성기가 이어질 수 있었다. 이렇게 사령탑을 계속해서 내부 승계로 교체해가면서도 왕조를 이어간 것은 잉글랜드 내에서 유일한 것은 물론 유럽 축구를 통틀어서도 극히 드문 케이스이다.[11] 이러한 리버풀의 내부 승계 전통은 리버풀 웨이(Liverpool Way)로 불리기도 했다.[12]
3.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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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3.1. 빌 샹클리의 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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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1950년대 2부 리그로 강등되어 오랜 기간 암흑기를 겪고 있던 리버풀의 운명은 1959년 빌 샹클리 감독의 부임 이후 역사적인 전환기를 맞게 된다. 샹클리는 강력한 카리스마로 구단에 부임하자마자 구단의 모든 부문에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결국 1961-62 시즌에 1부 리그 승격을 이뤄내더니 1963-64 시즌 17년만에 잉글랜드 왕좌를 탈환하면서 구단의 화려한 부활을 알렸다. 이후 샹클리 체제의 리버풀은 구단 역사상 최초의 FA컵과 구단 역사상 최초의 유럽 대항전 우승을 이룩했고, 잉글랜드 최고의 구단으로 발돋움하며 붉은 제국의 시작을 알렸다. 리버풀이 샹클리 아래에서 첫 리그 우승을 차지한 1963-64 시즌이 실질적인 리버풀 전성기의 시작이며, 붉은 제국의 첫 번째 시즌이라고 할 수 있다.
- 빌 샹클리 (1959~1974)
- 풋볼 리그 퍼스트 디비전: 1963-64, 1965-66, 1972-73
- 풋볼 리그 세컨드 디비전: 1961-62
- FA컵: 1964-65, 1973-74
- FA 채리티 실드: 1964, 1965, 1966
- UEFA컵: 1972-73
3.2. 밥 페이즐리가 이끈 전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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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1974년을 끝으로 샹클리가 은퇴하자 그의 수석코치였던 밥 페이즐리가 제국의 바통을 이었다. 페이즐리는 1975-76 시즌 리그-UEFA컵 더블을 시작으로 1983년까지 9년간 무려 20개의 트로피를 들어올리며 붉은 제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특히 페이즐리 체제에서 리버풀은 무려 세 개의 빅이어를 수집하며 잉글랜드를 넘어 유럽 최고의 구단으로 성장하여 대륙을 호령하는 명성을 떨쳤다. 페이즐리 아래에서 리버풀은 9년 연속으로 최소 1개 이상의 우승을 이뤄냈고 시즌당 평균 2.2개의 트로피를 들어올리는 가공할 만한 업적을 세웠다. 이 시기에 리버풀은 안필드 63경기 무패 행진, 리그 42경기 16실점, 유러피언컵 2연패를 이뤄냈다.[13]
- 밥 페이즐리 (1974~1983)
3.3. 조 페이건의 트레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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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1983년 페이즐리가 은퇴하자 샹클리에서 페이즐리로 지휘봉이 이어졌던 것 처럼, 팀의 수석코치이자 부트 룸의 핵심이던 조 페이건이 감독직에 올랐다. 그리고 페이건은 1983-84 시즌에 구단 역사상 최초로 3개의 메이저 대회를 재패하며 붉은 제국의 최고점을 이끌었다. '조 페이건 트레블'이라고 불렸던 당시 리그, 리그컵, 유러피언컵 3관왕은 당대까지 잉글랜드 축구 역사상 유래없는 일이었다.[15] 페이건은 비록 고령의 나이였기에 단 두 시즌을 지도하고 물러났지만, 페이건이 은퇴한 1985년까지 리버풀은 당대 유럽 최강의 구단으로 이름을 날렸다.[16] 그러나 1985년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 헤이젤 참사가 일어나며 유럽을 지배하던 붉은 제국은 서서히 마지막을 향하게 된다.
- 조 페이건 (1983~1985)
- 풋볼 리그 퍼스트 디비전: 1983-84
- 풋볼 리그 컵: 1983-84
- 유러피언컵: 1983-84
3.4. 케니 달글리시의 마지막 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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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리버풀 FC/달글리시 체제(1기)#s-|]]번 문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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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리버풀 FC/달글리시 체제(1기)#|]][[리버풀 FC/달글리시 체제(1기)#|]] 부분을
참고하십시오.페이건의 은퇴와 헤이젤 참사의 여파로 리버풀은 위기에 처했지만, 붉은 제국의 절대적 에이스 케니 달글리시가 감독직을 승계하여 제국의 명맥을 끝까지 이어갔다. 유럽 대항전 징계로 국내 대회에만 나서야했지만, 달글리시 체제의 리버풀은 1990년대가 시작되기까지 전성기가 끝나려면 멀었다는 듯이 압도적인 지배력을 보이며 잉글랜드를 재패했다. 1985-86 시즌부터 1990-91 시즌[17]까지의 6시즌 중 달글리시의 리버풀은 세차례나 리그 우승을 차지했으며, FA컵도 두차례나 들어올렸다. 그러나 달글리시가 지키던 제국의 마지막 불꽃은 1989년 힐스보로 참사가 터지며 서서히 꺼지게 된다.
- 케니 달글리시 (1985~1991)
- 풋볼 리그 퍼스트 디비전: 1985-86, 1987-88, 1989-90
- FA컵: 1985-86, 1988-89
- 풋볼 리그 슈퍼컵: 1985-86
- FA 채리티 실드: 1986, 1988, 1989, 1990
3.5. 그 이후
달글리시가 힐스보로 참사의 여파로 결국 감독직에서 물러나자 리버풀은 베테랑 코치였던 로니 모란 임시 감독 체제를 거쳐, 붉은 제국의 사령관으로 불리던 레전드 출신의 그레이엄 수네스를 감독으로 선임했다. 그러나 수네스는 졸속한 전술과 부족한 경기 운영 능력을 보였고, 너무 강압적인 선수단 통제로 팀 개혁에 실패하며 결국 붉은 제국의 명맥을 끊고, 길고 긴 1990년대의 침체기를 열어버리고 만다. 수네스 체제에서 리버풀은 붉은 제국의 브레인이라고 할 수 있었던 부트 룸을 해체시키고 말았으며, 프리미어 리그 시대에 빠르게 발맞추지 못하는 결정적인 실책을 저지르고 말았다. 이에 잉글랜드 축구를 대표하던 리버풀의 붉은 제국 시대는 완전히 종결되었다. 이후엔 레전드 코치 출신의 로이 에반스가 감독직을 이어갔으나 다시 이전과 같은 수준의 성적에 근접하지는 못했고, 결국 프랑스 출신의 제라르 울리에 감독 체제로 넘어가며 내부 출신 인사들로 이어지던 붉은 제국의 전통 또한 완전히 끊기고 만다.4. 기록
4.1. 우승 기록
- 국내 대회
- 풋볼 리그 퍼스트 디비전 (13회): 1963-64, 1965-66, 1972-73, 1975-76, 1976-77, 1978-79, 1979-80, 1981-82, 1982-83, 1983-84, 1985-86, 1987-88, 1989-90
- FA컵 (4회): 1964-65, 1973-74, 1985-86, 1988-89
- EFL컵 (4회): 1980-81, 1981-82, 1982-83, 1983-84
- FA 채리티 실드 (13회): 1964, 1965, 1966, 1974, 1976, 1977, 1979, 1980, 1982, 1986, 1988, 1989, 1990
4.2. 기타 기록
- UEFA 클럽 랭킹 1위 : 1984년, 1985년
- 잉글랜드 최다 연속 시즌 메이저 대회 우승: 9시즌 (1975-76~1983-84)
- 잉글랜드 최초 단일 시즌 메이저 대회 3관왕: 1983-84 시즌 (풋볼 리그 퍼스트 디비전, EFL컵, 유러피언 컵)[18]
- 잉글랜드 최초 리그-유럽 대항전 더블: 1972-73 시즌
- 잉글랜드 최초 리그-유러피언컵 더블 : 1976-77 시즌
- 잉글랜드 최초 유럽 대항전 2연패: 1976-77~1977-78 시즌[19]
- 잉글랜드 최초 유러피언컵 결승전 4연승: 1976-77, 1977-78, 1980-81, 1983-84
- 잉글랜드 최다 유러피언컵 연속 진출: 9시즌 (1972-73~1984-85)[20]
- 잉글랜드 리그 42경기 체제 최다 승점: 68점 (1978-79)[21]
- 잉글랜드 리그 42경기 체제 최소 실점: 16실점 (1978-79)[22]
- 잉글랜드 리그 42경기 체제 최다 득실 차: +69골 (1978-79)
- 잉글랜드 최초 리그컵 4연패: 1980-81~1983-84 시즌
- 리버풀 최다 리그 연패: 3연패 (1981-82~1983-84)
- 리버풀 최다 연속 무패: 25경기 (1989년 2월 18일~4월 11일)
- 리버풀 홈 최다 연속 무패: 85경기 (1978년 2월 7일~1981년 1월 31일)
[1] 리버풀의 대표색이 붉은색이다.[2] 페이건의 마지막 시즌 헤이젤 참사로 이후 유럽 대항전 진출을 못했기 때문이다.[3] 아스날이 통산 13회 우승으로 이 기간 리버풀의 우승 횟수와 같다.[4] 1975-76 시즌 ~1983-84 시즌[5] 현재의 UEFA 챔피언스 리그[6] 마지막 결승전에서 준우승에 머물렀는데, 이 당시 헤이젤 참사가 일어났다.[7]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통산 3회 우승이다.[8] 유이하게 노팅엄 포레스트가 잉글랜드 내 리버풀과 더불어 유러피언컵 2연패의 기록이 있다. 그러나 노팅엄 또한 2연패 전후로 성적을 리버풀처럼 지속하지는 못했고, 리그에서도 리버풀과 같은 수준의 성적을 내는 팀은 아니었다.[9] 맨유의 경우 1999년에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한 뒤, 9년이 지난 2008년에야 2번째 우승을 차지했고, 맨시티의 경우 2023년 단 한차례 우승했다.[10] 퍼거슨 또한 맨유에서 1990년대 초반부터 201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약 30년에 가까운 전성기를 이룩했다. 붉은 제국의 리버풀이 해당 기간 13회의 리그 우승을 이뤘는데, 퍼거슨의 맨유 또한 프리미어 리그 시대 이후 딱 13회의 우승을 만들었다.[11] 맨유의 경우 맷 버스비와 퍼거슨이 전성기를 구축했지만, 두 감독 사임 이후 후임자 선임에 실패해 모두 암흑기를 겪게 되었으며, 과거 리즈 유나이티드나 노팅엄 포레스트 또한 각각 돈 레비, 브라이언 클러프 체제에서만 우승의 영광을 누렸다. 아스날의 경우도 조지 그레이엄, 아르센 벵거 체제 이후 후임자를 못찾아 꽤나 고생하는 시기를 보냈다. 첼시의 경우 2000년대 이후 감독을 바꿔가면서도 좋은 성적을 내긴 했지만, 이들은 내부 승계와는 거리가 전혀 멀었다. 그나마 아스톤 빌라가 1980-81 시즌 론 손더스 감독의 리그 우승 이후, 그의 수석코치이던 토니 바튼이 이듬해 유러피언컵 우승을 이룩하는 비슷한 역사를 쓴 바 있지만 이 또한 성공적인 체제 연속보다는 일회성의 연속 우승에 가까웠다.[12] 그러나 이 리버풀 웨이는 달글리시 이후에 잘못 적용되며 종결되고 만다. 달글리시의 후임 감독은 붉은 제국의 사령관이라고 불리던 전설적인 미드필더 그레이엄 수네스였는데, 수네스의 경우 사실 붉은 제국 선수 출신이기만 했지 부트 룸에서 실력을 키운 코치가 아니었다. 리버풀 감독에 부임하기 전까지 수네스는 심지어 레인저스 FC에서 선수 겸 감독직을 수행하고 있었기에 리버풀의 상태를 정확하게 알지도 못했고 과거의 감독들과 일해보지도 못했다. 이에 수네스는 엉망의 운영을 보이며 리버풀의 전성기를 완전히 끝내고 만다. 물론 달글리시도 부트 룸 출신의 코치였던 것은 아니고 선수에서 바로 감독이 된 케이스지만, 그래도 그는 리버풀의 리더 중 하나로서 전임 감독 및 코치들과 오래 일해왔고 구단 사정을 매우 잘 알고 있었기에 충분히 리버풀 웨이의 자격이 있는 인물이었다.[13] 모두 당대로선 최초의 기록이었고, 이 중 리그 42경기 16실점은 현재까지도 잉글랜드 리그 역대 경기당 최소실점 기록이다.[14] 당시 유러피언 컵을 3회 우승한 감독은 전무했고 2014년에 카를로 안첼로티가 이 기록에 타이를 이루기 전까지 페이즐리는 33년간 단독으로 최다 빅이어 보유 감독이었다. 이후 해당 기록은 2022년 안첼로티가 4번째 빅이어를 들어올리며 41년만에 추월되었다.[15] FA컵 대신 리그컵을 우승했기에 정식 유러피언 트레블은 아니었지만, 메이저 트로피 3관왕이었기에 트레블이라고 불렸다.[16] 리버풀과 함께 유럽 최고로 손꼽히던 구단이 유벤투스 FC였다. 그리고 유벤투스와의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 헤이젤 참사가 일어났다.[17] 1990-91 시즌은 리그 1위를 달리던 도중 힐스보로 참사로 발생한 후유증에 의해 중도 사임했다.[18] FA컵 대신 EFL컵을 우승했기 때문에 정식 유러피언 트레블은 아니다.[19] 유러피언컵[20] 개편 이전 유러피언컵 시절에는 리그 1위 및 직전 시즌 대회 우승 팀만이 유러피언컵 참가 자격을 얻었기에 9시즌 내내 리그 우승 혹은 유러피언컵 우승을 최소 하나는 했다는 의미다.[21] 30승 8무 4패. 승리 승점 2점 당시의 기록으로, 승리 승점 3점으로 환산하면 98점이다.[22] 38경기 체제 최소 실점인 2003-04 시즌 첼시 FC의 15실점과 비교해도 경기당 실점수가 더 적은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