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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 FC/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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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colbgcolor=#d00027> 산하 구단 리버풀 FC리버풀 FC 아카데미 리버풀 FC 위민
선수단 스쿼드스쿼드(간략)아카데미 스쿼드
스태프 보드진 및 스태프 | 아카데미 스태프
소유주 펜웨이 스포츠 그룹
역사와 문화 역사 역사기록과 통계상대 전적상징유니폼
주요 인물 레전드역대 회장 및 구단주 | 역대 감독 | 역대 주장역대 올해의 선수역대 리그 득점왕
역대 시즌 2004-052005-062006-072007-082008-092009-102010-112011-122012-132013-142014-152015-162016-172017-182018-192019-202020-212021-222022-232023-242024-25
우승 기록 1부
파일:프리미어 리그 트로피 new.png : 19회
1900-01, 1905-06, 1921-22, 1922-23, 1946-47, 1963-64, 1965-66, 1972-73, 1975-76, 1976-77, 1978-79, 1979-80, 1981-82, 1982-83, 1983-84, 1985-86, 1987-88, 1989-90, 2019-20
2부
파일:풋볼 리그 챔피언십 트로피.png : 4회
1893-94, 1895-96, 1904-05, 1961-62
FA컵
파일:FA컵 트로피.png : 8회
1964-65, 1973-74, 1985-86, 1988-89, 1991-92, 2000-01, 2005-06, 2021-22
EFL 컵
파일:carabaocup123.png : 10회
1980-81, 1981-82, 1982-83, 1983-84, 1994-95, 2000-01, 2002-03, 2011-12, 2021-22, 2023-24
커뮤니티 실드
파일:The_FA_Community_Shield_Trophy.png : 16회
1964, 1965, 1966, 1974, 1976, 1977, 1979, 1980, 1982, 1986, 1988, 1989, 1990, 2001, 2006, 2022
UEFA 챔피언스 리그
파일:빅이어.png : 6회
1976-77, 1977-78, 1980-81, 1983-84, 2004-05, 2018-19
UEFA 유로파 리그
파일:UEFA 유로파 리그 트로피.svg : 3회
1972-73, 1975-76, 2000-01
UEFA 슈퍼컵
파일:UEFA 슈퍼컵 트로피.svg : 4회
1977, 2001, 2005, 2019
FIFA 클럽 월드컵
파일:FIFA 클럽 월드컵 로고.svg : 1회
2019
서포터즈 The Kopite
응원가 응원가 목록You'll Never Walk AloneAllez, Allez, Allez
관련 정보 더비 매치 파일: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로고.svg 노스웨스트 더비파일:에버튼 FC 로고.svg 머지사이드 더비
사건 사고 힐스버러 참사헤이젤 참사
기타 이스탄불의 기적안필드의 기적붉은 제국부트 룸제토 라인마누라 라인여담
구단 시설 경기장 안필드(1892~현재)
훈련 시설 AXA 트레이닝 센터AXA 멜우드 트레이닝 센터
기타 연고지 리버풀
스폰서 스탠다드차타드(메인 스폰서)나이키(키트 스폰서)익스피디아(슬리브 스폰서)AXA(트레이닝 스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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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구단 관련3. 선수 관련
3.1. 스트라이커 잔혹사
4. 경기 관련5. 기타


1. 개요

잉글랜드의 프로축구 클럽 리버풀 FC의 여담을 정리해 놓은 문서.

2. 구단 관련

3. 선수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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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르텔과 메이렐레스, 스피어링의 골 세레머니 닥트리오

3.1. 스트라이커 잔혹사

원래 리버풀은 과거부터 걸출한 공격 라인업으로 유명한 구단이었다. 60년대의 로저 헌트-이안 세인트 존, 70년대의 존 토샥-케빈 키건, 80년대의 이안 러시-케니 달글리시, 90년대의 로비 파울러, 00년대 초반의 마이클 오언까지 리버풀의 공격진은 붉은 제국 시절부터 끊이지 않고 강한 화력을 자랑했다. 그러나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발롱도르 수상자였던 오언의 이적 이후 2000년대 중반부터 리버풀의 스트라이커 잔혹사가 시작되었다.

과거 힐스버러 참사 이후 리버풀은 영광의 시대에서 내려오며 그레이엄 수네스, 로이 에반스 감독 체제에서 리빌딩까지 실패했지만, 제라르 울리에 감독이 취임하며 부진이 어느 정도 수습이 되는 듯 했다. 특히 2000-01 시즌 FA컵, 리그컵, UEFA컵[33], 커뮤니티 실드, UEFA 슈퍼컵의 5관왕으로 리버풀의 중흥기가 시작됐다. 당시 호성적을 이끈 프랜차이즈 스트라이커가 마이클 오언이었다. 리버풀은 2000-01 시즌 리그에서 3위를 기록했지만, 오언과 에밀 헤스키 조합은 30골을 합작했고 리버풀은 스트라이커가 약하다는 평가를 받는 팀이 전혀 아니었다. 오언은 다음 시즌에도 19골을 터뜨리며 팀의 리그 준우승을 이끌었다. 그러나 헤스키가 부진하기 시작했고, 리그 준우승 팀임에도 팀 득점 67점으로 1위 아스날의 79득점, 3위 맨유의 87득점에 비하면 저조한 득점력을 보이기 시작하며, 본격적으로 공격진에 골머리를 앓게 되었다.

공격진 보강을 위해 리버풀은 2002-03 시즌을 앞두고 월드컵에서 맹활약을 펼친 세네갈의 연쇄살인마라는 별명을 가진 공격수 엘 하지 디우프를 1,000만 파운드에 영입을 했다. 전 소속팀인 리그앙의 RC 랑스에서도 두 시즌 동안 18골을 뽑아낸 검증된 공격수였고, 월드컵에서 세네갈을 8강으로 이끈 맹활약을 했기에, 기대를 모은 영입이었으나, 두 시즌 동안 리그 55경기에 나와서 3골, 리그컵 7경기 나와서 3골 총 79경기에 출전해서 6골을 넣는 최악의 부진을 선보이며,[34] 최악의 이적생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그동안은 로컬 유스 출신인 오언이 꾸준히 리그 두 자릿수 득점을 기록해주고 있었고, 2001-02 시즌에 320만 파운드로 영입했던 밀란 바로시가 2002-03 시즌 총 12골을 넣어주며 그나마 득점 수혈을 해주고 있었던 상황이었으나, 오언마저 2003-04 시즌 종료 후 레알 마드리드로 떠나고 퇴물 취급받던 에밀 헤스키마저 버밍엄 시티로 이적하게 되면서 리버풀의 공격진은 그야말로 멸망 수준에 처하게 되었다. 결국 디우프도 2004-05 시즌에 볼튼 원더러스로 임대를 떠났다.[35]

오언과 디우프가 사라진 2004-05 시즌, 리버풀은 초신성의 전술가 라파엘 베니테스를 감독으로 데려왔으나 이미 공격진은 초토화된 상황. 지브릴 시세를 당시 리버풀 클럽 레코드인 1,450만 파운드에 영입은 했지만, 영입한지 얼마 안 돼서 다리가 골절되는 부상을 입게 되었고, 두 시즌 동안 리그 13골의 그저 그런 활약을 보였다. 유로 2004에서 맹활약하며 득점왕에 오른 바로시가 간신히 9득점을 올리며 고군분투했다. 겨울 이적 시장에서는 페르난도 모리엔테스가 공격진에 가세했으나 별 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고 완전한 하향세를 보였다. 리버풀은 득점 부진으로 해당 시즌 리그 5위로 처졌으나, 이스탄불의 기적을 기적적으로 일궈내며 챔피언스 리그 진출권은 사수했다.[36] 그러나 바로시 조차 다음 시즌인 2005-06 시즌을 부상으로 통째로 날려버렸고, 2004-05 시즌 당시 닐 멜러라는 반짝 스타가 등장하긴 했지만, 그야말로 반짝 스타에 불과했다.

2005-06 시즌에는 장신의 피터 크라우치가 영입되었으나 19경기 동안 무득점 행진을 이어가는 등 지겹도록 득점을 하지 못하는 공격수였다. 이에 보다 못한 제라드가 PK를 양보해줬음에도 불구하고 실축했을 정도였다.[37] 2006-07 시즌에는 팀의 득점력 강화를 위해 페예노르트 로테르담에서 한창 주가를 올리던 디르크 카윗을 900만 파운드라는, 당시 리버풀의 재정 상황을 고려하면 꽤 큰 금액으로 영입했다. 카윗의 활동량이나 팀 플레이는 수준급이었으나 정작 폭발적인 득점력을 보여주진 못했다.[38] 그래도 카윗은 이후 오랜 기간 동안 리버풀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주었으나 오른쪽 윙으로 포지션을 변경해서 뛰었기에 스트라이커 잔혹사를 끊어주진 못했다.[39] 같은 시즌 600만 파운드의 이적료로 뉴캐슬 유나이티드에서 크레이그 벨라미도 영입했지만 리그 7골로 빈곤한 득점력은 해결해주지 못했다. 대신, 바르셀로나와의 챔피언스 리그 경기에서 맹활약하며 바르셀로나를 탈락시키는 임팩트는 남겼다. 허나 벨라미는 활약과 별개로 좋지 않은 인성과 말썽으로 시끄러웠던 인물이었고 결국 다음 시즌 바로 팀을 떠났다.[40] 해당 시즌에는 로비 파울러 깜짝 복귀해서 쏠쏠한 활약을 펼쳐주기는 했으나 선수 생활 말년이었기에 백업으로 7득점에 그쳤다.

결국 리버풀은 2007-08 시즌 이적시장에서 2,000만 파운드라는 클럽 레코드를 기록하며 당대의 대형 스트라이커 유망주 아틀레티코 마드리드페르난도 토레스를 영입하기에 이르렀다.[41] 토레스는 이적하자마자 스트라이커 문제를 해결하며 프리미어 리그 최고의 공격수로 떠올랐고, 최고 수준의 지원을 해줄 수 있던 스티븐 제라드'제토라인'을 형성, 프리미어 리그와 챔피언스 리그에서 강력한 공격력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에 리버풀은 오언 이후 드디어 제대로된 스트라이커를 기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때 함께 영입된 안드리 보로닌은 골가뭄과 부상으로 최악의 활약을 선보였다.[42]

토레스를 필두로 리버풀의 공격진 잔혹사가 깨지는가 했으나 제토라인은 오래가지 못했다.[43] 보로닌이 실패하며 토레스의 백업 자원이 전무해 토레스의 의존도가 극심했고[44], 제라드와 토레스의 부상이 늘어나자 다시 스트라이커 문제는 리버풀의 발목을 잡았다. 당시 토트넘 홋스퍼에서 로비 킨을 데려왔으나 구단주와 감독 사이의 알력 다툼 등 클럽 내부적인 사정으로 인해 잘못 영입된 선수였던지라[45], 6개월 만에 변변찮은 활약 후 다시 이적하고 말았다. 다비드 은고그라는 백업 공격수도 구해왔으나 제대로 토레스를 지원해주지 못했다. 이후 부상으로 토레스의 폼이 확연하게 떨어졌고 2009-10 시즌을 끝으로 베니테스마저 떠나자 팀도 완전히 암흑기에 돌입했다. 결국 토레스는 첼시로 이적을 요청했고 공격진의 희망이던 토레스도 5,000만 파운드에 팀을 떠나게 되었다.

토레스를 판매한 리버풀은 무려 3,500만 파운드라는 패닉바이를 시전하며 겨울 이적시장에서 대형 유망주 앤디 캐롤을 뉴캐슬에서 영입했지만, 구시대적인 스타일과 잔부상으로 고생하던 캐롤은 또 완전히 실패한 영입생이 되었다.[46] 그러나 아약스에서 2,650만 파운드로 사온 루이스 수아레스가 월드 클래스의 기량을 선보이며 리버풀의 스트라이커 잔혹사는 여기서 사라지는 듯 했다. 수아레스는 연이어 미친 활약을 선보였고, 2012-13 시즌 겨울에 다니엘 스터리지까지 영입되며 일명 SAS[47]라인이 완성되자 리버풀은 리그 최강의 투톱라인을 보유하게 되었다.[48] 2013-14 시즌에 이아고 아스파스가 영입되어 피지컬의 한계를 이기지 못하고 실패작으로 남긴 했으나 라힘 스털링이 공격진에 가세하여 화력은 더 강해졌다.

그러나 이 SAS라인도 오래가지 못했다. 2013-14 시즌 리그 우승이 좌절되자 수아레스가 바르셀로나로 떠났고, 리버풀은 대체자로 마리오 발로텔리, 리키 램버트, 크리스티안 벤테케를 영입하였으나, 이들은 전설의 '램발보'로 불리며 끔찍한 득점 부진을 보였다. 스터리지는 나오기만 하면 날카로운 결정력을 보였으나 엄청난 잔부상에 시달려 제대로 활약하지 못했다.[49] 스터리지가 결장하고 램발보가 역대 최악의 공격력을 보여주던 이 시기가 리버풀 스트라이커 잔혹사의 정점으로 평가받는다.

그리고 2015-16 시즌, 위르겐 클롭이 부임하며 비로소 리버풀의 공격진이 해결되기 시작했다. 공격형 미드필더로 영입되었던 호베르투 피르미누폴스나인으로 기용되며 제 몫을 하기 시작했고, 이후 연이어 사디오 마네, 모하메드 살라가 영입되며 역대급 공격라인이 구축되었다. 일명 이 마누라라인은 2017-18 시즌부터 2021-22 시즌까지 무려 338골 137도움을 합작하며 완전히 리버풀의 공격수 잔혹사를 끊어냈다. 이후 디보크 오리기디오구 조타도 백업 및 준주전 자원으로 연이어 성공적인 활약을 보여주며 리버풀은 2010년대 후반부터 2020년대 초반까지 프리미어 리그는 당연하고 유럽 최고의 공격 라인으로 평가받기도 했다.[50]

그러나 2021-22 시즌에 마네가 떠나고 2022-23 시즌에 피르미누가 떠나면서 다르윈 누녜스코디 각포가 새롭게 수혈되었는데 영 신통치 못한 활약으로 다시금 스트라이커 잔혹사가 시작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사고 있다. 특히 9번 스트라이커는 누녜스는 1억 유로의 이적료에도 불구하고 최악의 활약을 보이고 있어 이전의 실패한 공격수 사례들과 매우 유사한 흐름이다.

4. 경기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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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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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부 리그에서 족적을 남긴 구단들 중에서는 역대 감독 수가 가장 적다. 그만큼 성공적으로 장기 부임한 감독들이 많았다. 현재 아르네 슬롯까지 정식 감독 21명, 대행 감독 1명으로 로니 모란만이 대행 감독직을 맡았다. 단, 케니 달글리시는 1980년대와 2010년대에 한 번씩 총 두 차례 팀을 맡았다.[2] 조지 패터슨, 돈 웰시, 필 테일러, 로이 호지슨, 브랜던 로저스가 전부다. 이 중 웰시, 테일러는 샹클리 이전 1차 암흑기 시절의 감독들인데, 그 중에서도 강등을 만든 웰시를 제외하면 테일러는 구단에 대한 헌신을 인정받는 레전드 선수 출신으로, 절대적으로 나쁜 평가를 받는 인물도 아니다. 페터슨 또한 레전드급 장기 근속 코치 출신이다.[3] 빌 샹클리, 밥 페이즐리, 조 페이건, 제라르 울리에, 라파 베니테스, 위르겐 클롭. 이 중 페이즐리, 페이건, 베니테스, 클롭은 챔피언스 리그를 우승했다.[4] 아스날이 13시즌, 토트넘이 16시즌, 첼시가 19시즌, 맨유와 맨시티는 20시즌 넘게 2부 리그에 있었고 맨시티는 심지어 3부 리그로도 떨어진 역사가 있다.[5] 1부 리그 누적 참가 기간은 팀 역사가 더 오래된 아스톤 빌라에 1시즌 뒤진 3위이며, 1부 리그 연속 참가 기간 또한 아스날, 에버튼에 이어 3위다.[6] 재밌게도 리버풀의 1977년, 1978년 유러피언 컵 재패 이후, 1979년과 1980년에 노팅엄 포레스트가 2연패 기록을 이어 작성했다.[7] 당시 세컨드 디비전 우승 후 퍼스트 디비전 최하위였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의 전신 뉴튼 히스(Newton Heath)와 승강 플레이오프 격인 테스트 매치를 치르게 되었고 여기에서 2-0 승리를 거두며 승격했다.[8] 당시 상대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였다.[9] 1위는 아스날 FC, 2위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다.[10] 공식 트레블은 1부 리그, 챔피언스 리그(유러피언 컵), FA컵을 우승해야한다.[11] 아스날 FC에미레이트 항공의 계약이 이 기록을 깼다.[12] 아일랜드 대기근 당시 탈출한 많은 아일랜드 이주민들이 리버풀에 정착했기에 왕실에 대한 반감이 엄청나다. 또한 마가렛 대처 시절 '대처주의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인해 잉글랜드 북부 지역은 엄청난 경제 불황을 겪었기에 대처의 사망 당시 잉글랜드 북부는 '마녀가 죽었다'라며 기뻐하는 분위기였을 정도다.[13] 리버풀 지역을 스카우즈(Scouse) 지역이라고 부른다.[14] 애초에 영국 국가 내용 자체가 이름부터 영국 왕실 찬가다. 이에 최근 리버풀 로컬 출신의 트렌트 알렉산더아놀드는 아예 국가가 나오자 입을 닫았고, 이에 대해 많은 갑론을박이 있기도 했다.[15] 달글리시의 이명이 킹 케니다.[16] 리버풀 인구의 50% 가량이 아일랜드 혈통이다. 리버풀 출신의 레전드 밴드 비틀즈폴 매카트니 또한 증조부가 아일랜드 출신 이민자이다.[17] 로넌 키팅, 마이클 패스밴더, 셰이머스, JD 맥도나, 코너 맥그리거 등의 아일랜드 출신 유명인들이 리버풀의 서포터이다.[18] 영국 전역은 물론 해외 팬들까지 대거 참석했다.[19] 2010년대 첼시 FC맨체스터 시티의 퍼레이드는 약 10만명 이하의 규모로 펼쳐졌고, 아스날의 우승 퍼레이드가 25만명 규모로 펼쳐진 바 있었다.[20] 2대 감독이자 구단 초창기부터 팀 운영을 맡았던 존 맥케나가 초창기 리버풀의 선수단 구성을 위하여 글래스고에서 선수들을 많이 데려왔는데 이 때 이름이 맥케나와 같이 'Mc'으로 시작되는 선수들이 많아서 맥케나의 리버풀은 'Team of Macs'라는 이명도 가지고 있었다.[21] 한준희 위원은 명문 클럽들의 정체성을 선수로 대표되는 명문, 감독으로 대표되는 명문, 회장으로 대표되는 명문으로 구별한 바 있는데, 리버풀은 전형적인 감독으로 대표되는 명문 구단이다.[22] 기본적으로 상술하였듯이 스코틀랜드 출신 레전드들이 매우 많고, 존 토샥, 스티브 하이웨이, 로니 웰런, 스티브 니콜, 마크 로렌슨 등 연합 왕국이나 아일랜드 출신들이 상당수였다. 용병들 또한 브루스 그로벨라같은 변방 출신이 다수였다.[23] 애초에 잉글랜드 대표팀의 성과 자체도 늘 별볼일 없었지만, 리버풀 역대 최다 출장 기록의 이안 캘러한은 당시 알프 램지 대표팀 감독과 아예 스타일이 달라 승선 자체를 거의 못했으며, 필 닐, 엠린 휴즈같은 선수들은 수비수라 비교적 주목도가 덜했다. 레이 클레멘스는 하필 대표팀에 피터 쉴튼이라는 역대급 선수가 있어 출장을 많이 못했다.[24] 러시의 경우에는 전성기가 헤이젤 참사로 다 빛나지도 못했다.[25] 이에 리버풀은 발롱도르 포디움에 선수를 7명이나 배출하고도 단 1회 수상에 그쳤다. 사디오 마네가 2022년 2위, 스티븐 제라드가 2005년 3위, 페르난도 토레스가 2008년 3위에 오른 바 있다.[26] 리버풀 최다 해트트릭 기록 보유자로 남아 있으며, 총 377경기에서 241골을 기록한 레전드다.[27] 물론 프리미어 리그 무대 자체가 이탈리아 선수들의 활약이 그렇게 두드러지는 무대가 아니기는 하다.[28] 같은 기간 동안 오른쪽 풀백도 고민이 없던 것은 아니었으나, 스티브 피넌알바로 아르벨로아 이후 경기에는 못나오고 요리 자격증만 따고 나간 필리프 데겐을 제외하면 글렌 존슨, 마틴 켈리, 존 플래너건, 나다니엘 클라인 등이 트렌트 알렉산더아놀드 이전까지 나름 헌신적으로 자리를 채워주었다.[29] 리세도 공격력에 비해 수비력에 문제가 있는 선수여서 팬들에게 다소 호불호가 갈리던 선수였다.[30] 심지어 본인 집 앞마당에서 딸과 함께 놀다가 부상을 당할 정도였다.[31] 이에 당시 센터백 다니엘 아게르가 왼쪽 풀백 땜빵을 뛰는 일이 잦았다.[32] 우측에 유망주 마틴 켈리가 등장하여 존슨이 좌측으로 이동할 수 있었고, 그나마 좌우 풀백이 돌아갈 수 있었다.[33] 지금의 유로파 리그[34] 선수 항목에도 작성되어 있지만, 경기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매우 문제가 많은 선수였다.[35] 볼튼에서는 리그 9골을 터뜨리며 완전이적을 해버린다. 단돈 400만 파운드에 이적했다.[36] 2004-05 시즌 챔피언스 리그도 결정적인 순간에 스티븐 제라드루이스 가르시아같은 미드필더 자원들의 활약으로 신승을 챙기며 결승까지 올랐다. 결승전에서도 3득점 모두 미드필더들이 해결했다.[37] 그래도 연계력이 좋았고 후에 몇 경기에서 임팩트를 보여주긴 했기에 리버풀 팬들이 아주 싫어한 선수는 아니었다.[38] 리그 12골로 득점랭킹 9위에 그쳤다.[39] 오른쪽 윙으로 자리잡은 이후에는 마치 박지성처럼 팀을 위해 헌신적으로 뛰어주는 스타일으로 활약하며 리버풀을 떠난 지 오래된 지금도 팬들이 진심으로 좋아하는 선수로 칭송받고 있다.[40] 술에 취해 욘 아르네 리세에게 골프채를 휘두른 사건이 유명하다. 그리곤 앞서 언급한 바르셀로나와의 챔피언스 리그 경기 캄프 누 원정을 떠나 득점을 기록하며 골프채 셀러브레이션을 시전하는 기행까지 선보였다.[41] 하지만 토레스의 이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크레이그 벨라미, 지브릴 시세, 마크 곤살레스, 루이스 가르시아 등 준주전급 자원 여러 명을 이적시켜야 했고, 이는 당시 선두권 경쟁을 벌이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첼시, 아스날에 비해 가뜩이나 부족하던 스쿼드 두께 문제를 더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42] 너무 부진해서 2008-09 시즌에는 헤르타 BSC로 임대를 떠났는데, 분데스리가에서 활약이 준수해 2009-10 시즌에 다시 불러들였더니 또 다시 부진했다.[43] 2007-08 시즌부터 2008-09 시즌까지가 그나마 제토라인이 제대로 가동되었고, 2009-10 시즌부터는 부상에 의해 화력이 떨어졌다.[44] 이는 오언이 있을 당시에도 마찬가지 문제였다. 오언의 백업이 없어 오언의 혹사와 의존도가 심각했다.[45] 당시 리버풀은 최악의 구단주 톰 힉스, 조지 질레트 주니어의 난동으로 베니테스 감독을 전혀 지원해주지 못했다. 당시 베니테스는 가레스 배리를 영입하길 원했으나 당시 단장이었던 릭 페리가 뜬금없이 로비 킨을 데려왔고 완전히 시즌 계획이 망가졌다.[46] 당시 역대 최악의 영입생으로 꼽혔다.[47] Suarez And Sturridge. 영국 특수작전부대의 약어와 동일해 널리 사용되었다. 이후 2013-14 시즌에는 라힘 스털링까지 합세하여 SSS라인으로 불리기도 했다.[48] 2013-14 시즌 수아레스와 스터리즈는 도합 56골을 넣으며 실로 무서운 화력을 선보였다. 제토라인도 단일 시즌에 50골 이상을 합작하긴 했으나, 스트라이커 두 명이 30골 이상을 합작한 것은 오언-헤스키 이후 처음이었다.[49] 그래도 부상으로 고생하던 다니엘 스터리지가 램발보를 다 합친 것 보다 훨씬 나은 수준이었다. 그나마 2010년대 중반의 암흑기때 한 줄기의 빛이 되어줬던 공격수가 다니엘 스터리지였다. 나오기만 한다면 항상 밥 값 이상은 해주었기 때문.[50] 특히 2017-18 시즌에는 마네-피르미누-살라가 모두 챔피언스 리그 두 자릿수 득점을 올리는 엄청난 기록을 달성했고, 2018-19 시즌에는 마네와 살라가 22골로 프리미어 리그 공동 득점왕에 올랐다.[51] 다만 이때 당시 리그 우승 과정 역시 결코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압도적인 1위를 달리고 있었기에 무난하게 우승을 차지하는가 싶었으나, 우승 조기 확정까지 단 2승을 앞두고 2020년 3월 경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팬데믹이 발생, 갑자기 리그가 중단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고 말았다. 다행히도 이후 6월 경에 리그가 재개됨에 따라 리버풀은 우승을 확정지을 수 있었다.[52] 이후 2020-21 시즌에 리버풀은 크리스마스 1위에서 최종 3위를 기록하면서 다시금 이 징크스를 겪기도 했다. 다만 2020-21 시즌은 리그 초반 장기 부상으로 주전 센터백들이 전멸하는 등 수많은 악재들이 겹쳐 정상적인 스쿼드를 제대로 가용할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시즌 중반 리그 순위가 8위까지 떨어지는 큰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오히려 시즌 후반 반등에 성공하면서 최종 3위로 시즌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53] 물론 윔블던전 연기 결정과 구단 차원의 힐스보로 추모 또한 상당히 우호적인 조치이기 때문에 아스날과의 관계성은 비교적 존중을 받기는 하나, 기본적으로 리버풀은 아스날과도 경쟁적인 관계다. 때문에 철의 동맹 혹은 형제의 팀과 같은 단어는 현지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54] "행운을 빌어요. 텔레비전으로 지켜볼게요. , , 조지 그리고 링고."라는 내용이었다.[55] 그리고 리버풀은 해당 결승전에서 리즈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2-1로 승리한다. 이는 리버풀의 첫 번째 FA컵 우승이다.[56] 스터빈스는 당대 머지사이드를 상징하는 선수이자 리버풀 팬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캐릭터였기 때문인데, 이에 축구선수로서는 유일하게 수 많은 유명인들과 함께 해당 앨범 표지에 등장했다.[57] 비틀즈의 매니저였던 브라이언 엡스타인은 비틀즈가 자신이 좋아하는 축구 팀을 비밀로 유지해야만 안티 없이 팬들을 모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멤버들의 응원 팀이 당시 잘 알려지지 않았다. 특히나 레논은 단명했기에 더욱이 알 길이 없다.[58] 존 레논의 아버지는 어릴 적 존 레논을 버리고 떠났다가 6살 즈음 돌아와 시간을 같이 보냈다고 한다.[59] 실제로 레논은 축구와 밴드를 놓고 갈팡질팡 한 시기가 좀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발재간이 매우 좋았고, 학창시절에는 발밑에 항상 공을 두고 지냈다고.[60] 1966년 레논과 함께 에버튼이 셰필드 웬즈데이를 3-2로 이기는 경기를 관람했으며, 2년 후 웨스트 브롬위치에게 패배한 경기도 직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61] 리버풀, 에버튼 그리고 트란메어 로버스 FC가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트란메어 로버스는 머지사이드주에 속해있을 뿐 리버풀시에 있지는 않다.[62] 물론, 그 팀이 어디였는지는 해리슨이 작고한 지금은 확인하기 힘들다. 다만 축구팀 응원에 대한 질문을 회피하기 위한 대답으로 추정하기도 한다.[63] 하지만 조지 해리슨의 아들인 다니 해리슨은 현재 리버풀의 광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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