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리버풀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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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0 -10px -5px" {{{#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231f20,#ffffff | 개요 | <colbgcolor=#d00027> 산하 구단 | 리버풀 FC|리버풀 FC 아카데미 |리버풀 FC 위민 | |
선수단 | 스쿼드|스쿼드(간략)|아카데미 스쿼드 | |||
스태프 | 보드진 및 스태프 | 아카데미 스태프 | |||
소유주 | 펜웨이 스포츠 그룹 | |||
역사와 문화 | 역사 | 역사|기록과 통계|상대 전적|상징|유니폼 | ||
주요 인물 | 레전드|역대 회장 및 구단주 | 역대 감독 | 역대 주장|역대 올해의 선수|역대 리그 득점왕 | |||
역대 시즌 | 2004-05|2005-06|2006-07|2007-08|2008-09|2009-10|2010-11|2011-12|2012-13|2013-14|2014-15|2015-16|2016-17|2017-18|2018-19|2019-20|2020-21|2021-22|2022-23|2023-24|2024-25 | |||
우승 기록 | 1부 : 19회 | 1900-01, 1905-06, 1921-22, 1922-23, 1946-47, 1963-64, 1965-66, 1972-73, 1975-76, 1976-77, 1978-79, 1979-80, 1981-82, 1982-83, 1983-84, 1985-86, 1987-88, 1989-90, 2019-20 | ||
2부 : 4회 | 1893-94, 1895-96, 1904-05, 1961-62 | |||
FA컵 : 8회 | 1964-65, 1973-74, 1985-86, 1988-89, 1991-92, 2000-01, 2005-06, 2021-22 | |||
EFL 컵 : 10회 | 1980-81, 1981-82, 1982-83, 1983-84, 1994-95, 2000-01, 2002-03, 2011-12, 2021-22, 2023-24 | |||
커뮤니티 실드 : 16회 | 1964, 1965, 1966, 1974, 1976, 1977, 1979, 1980, 1982, 1986, 1988, 1989, 1990, 2001, 2006, 2022 | |||
UEFA 챔피언스 리그 : 6회 | 1976-77, 1977-78, 1980-81, 1983-84, 2004-05, 2018-19 | |||
UEFA 유로파 리그 : 3회 | 1972-73, 1975-76, 2000-01 | |||
UEFA 슈퍼컵 : 4회 | 1977, 2001, 2005, 2019 | |||
FIFA 클럽 월드컵 : 1회 | 2019 | |||
서포터즈 | The Kopite | |||
응원가 | 응원가 목록|You'll Never Walk Alone|Allez, Allez, Allez | |||
관련 정보 | 더비 매치 | 노스웨스트 더비| 머지사이드 더비 | ||
사건 사고 | 힐스버러 참사|헤이젤 참사 | |||
기타 | 이스탄불의 기적|안필드의 기적|붉은 제국|부트 룸|제토 라인|마누라 라인|여담 | |||
구단 시설 | 경기장 | 안필드(1892~현재) | ||
훈련 시설 | AXA 트레이닝 센터|AXA 멜우드 트레이닝 센터 | |||
기타 | 연고지 | 리버풀 | ||
스폰서 | 스탠다드차타드(메인 스폰서)|나이키(키트 스폰서)|익스피디아(슬리브 스폰서)|AXA(트레이닝 스폰서) |
1. 개요
잉글랜드의 프로축구 클럽 리버풀 FC의 여담을 정리해 놓은 문서.2. 구단 관련
- 영국 정부에 등록된 정식 법인명은 The Liverpool Football Club And Athletic Grounds Limited이다.
- 잉글랜드 구단들 중 뛰어난 감독을 가장 많이 배출한 구단이다. 특히 빌 샹클리부터 밥 페이즐리, 조 페이건, 케니 달글리시로 이어지는 붉은 제국 시절의 감독 라인업은 잉글랜드 축구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세대교체로 평가받는다. 리버풀은 구단 창립 이후 지금까지 13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단 22명의 감독만을 거쳐왔으며[1], 오히려 부임 중 성공하지 못한 감독이 적었을만큼 좋은 감독들을 많이 보유해왔다. 실제로 역대 22명의 감독들 중, 우승없이 무관으로 팀을 떠난 정식 감독은 단 5명에 불과하며 이는 잉글랜드의 모든 구단 중 독보적인 기록이다.[2] 리그 우승을 이룩한 감독이 역대 9명으로 잉글랜드 구단 중 가장 많고, 유럽 대항전 우승을 이룩한 감독도 역대 6명[3]으로 잉글랜드 구단 중 가장 많으며, 심지어 챔피언스 리그를 우승한 감독의 숫자는 그 어떤 잉글랜드 구단의 빅 이어 갯수보다 많다.
- 1990년대 이후로 리그 우승을 30년 동안 못하는 긴 침체기를 보냈고, 2010년대 암흑기의 임팩트가 강해서 그렇지 실제로는 잉글랜드 구단들 중 역사상 가장 부침이 적었던 구단이다. 풋볼 리그 참가 이후 2부 리그에 있던 기간이 단 11시즌에 불과한데, 이는 소위 빅6 중 가장 적은 기록이며[4], 잉글랜드 축구사 전체를 다 따져봐도 2부 리그에 단 4시즌 있었던 이웃 라이벌 에버튼 FC을 제외하면 하부 리그 역사가 가장 짧다.[5] 또한 1901년 첫 리그 우승을 차지한 이후, 단 한 차례도 누적 리그 우승 순위 TOP5 밖으로 나간적이 없었고 1973년 8번째 우승 이후로는 2011년까지 38년 동안 리그 최다 우승의 왕좌를 최장 기간지켰다. 이에 현재까지도 잉글랜드 리그 누적 승리, 승점, 득점, 득실차 최다 기록 구단이다.
- 유럽 대항전에서 명실상부 최고의 명성을 가지고 있는 잉글랜드 구단이다. 잉글랜드 최다 유럽 대항전 우승 구단이자 잉글랜드 최초의 유럽 대항전 2연패 구단이며, 유럽 대항전 2연패는 지금까지도 잉글랜드 역사상 유이한 기록이다.[6]
- 2부 리그에서 승격 후 1부 리그를 곧바로 우승한 최초의 잉글랜드 구단이다. 1904-05 시즌에 세컨드 디비전에서 우승을 차지하여 승격한 리버풀은, 그 다음 1905-06 시즌 초반 퍼스트 디비전 3경기에서 3패 11실점으로 최악의 출발을 했고 8라운드까지 5패를 당해 16위에 머물렀으나 이후 엄청난 상승가도를 달렸고 시즌 중반부터 쭉 1위를 달려 사상 두 번째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 리그-유럽 대항전 더블을 달성한 최초의 잉글랜드 구단이다. 1972-73 시즌, 빌 샹클리 체제에서 리버풀은 통산 8번째 리그 우승을 차지한 후, UEFA컵에서 당대 분데스리가 최강팀이었던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를 상대로 구단 역사상 최초의 유럽 대항전 우승을 달성하며 더블을 기록했다.
- 세컨드 디비전에서 무패 우승을 차지한 역사가 있다. 1893-94 시즌 리버풀은 22승 6무로 무패 우승을 이루며 창단 2년 차에 처음으로 퍼스트 디비전에 진출하게 된다.[7]
- 유독 FA컵에서 고전하는 편이다. 트로피를 쓸어모으던 밥 페이즐리 시절에도 FA컵 우승만이 유일하게 없었으며 결정적인 순간에 FA컵에서 이상하게 탈락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1976-77 시즌에는 리그 우승을 확정지은 후 유러피언 컵도 우승했으나 정작 FA컵은 뜬금없이 패배하여 트레블 기회를 날렸고[8], 1983-84 시즌에는 EFL컵, 리그, 유러피언 컵을 휩쓸어놓고 FA컵에서는 조기 탈락해 또 다시 트레블에 한끗 못미치는 성적을 냈다. 이에 현재 국내 메이저 대회 우승 순위 중 유일하게 FA컵에서만 3위에 위치하고 있고[9], 유일하게 두 자릿수 우승을 달성하지 못했다.
- 대신 리그컵인 EFL컵에 상당히 강하다. 첫 우승은 1980-81 시즌으로 늦은 편이었지만, 해당 우승 이후 연이어 우승을 이룩하며 잉글랜드 역사상 최초이자 최다인 EFL컵 4연패를 달성했으며, 현재에도 EFL컵 10회 우승으로 리그 최다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FA컵에는 약하고 리그컵에 강하다보니 심지어 1983-84 시즌에는 리그, 유러피언 컵을 우승하고 FA컵에서는 탈락한 대신 리그컵은 우승하여 잉글랜드 최초의 비공식 트레블을 달성한 바 있다.[10]
- 트레블이 없고 국내 컵대회에 약하지만 국내 챔피언스 리그 최다 우승 기록과 더불어 자국에서 유일하게 빅이어를 영구 소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레알 마드리드 CF, AC 밀란과 상당히 유사한 역사를 가졌다. 레알 마드리드는 말이 필요없는 스페인과 유럽 무대의 패왕이지만 이상하게 코파 델 레이에서는 항상 고전하며 역대 우승 순위 3위에 처져있고, AC 밀란 또한 유럽 무대에서 이탈리아 구단 중 최고의 성적을 구가한 명문 중의 명문이지만 코파 이탈리아 우승 기록은 단 5회에 불과하다. 이 세 팀은 챔피언스 리그 통산 우승 순위에서 나란히 1, 2, 3위를 기록 중이기도 하다.
- 유니폼 상의 전면에 메인 스폰서를 부착하고 경기에 나선 잉글랜드 최초의 구단이다. 1979년 당시 존 스미스 회장의 주도로 일본의 전자 기기 제조사 히타치의 로고를 유니폼 전면에 달았다. 이후 여러 스폰서를 거쳐 1992년부터는 칼스버그와 메인 스폰서십 계약을 2011년까지 지속했는데, 이는 2023년까지 잉글랜드 프로축구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유지된 계약이기도 했다.[11]
- 연고지인 리버풀이 산업혁명의 영향을 크게 받은만큼 노동 계급 위주의 지역이고, 초기 잉글랜드 구단들이 노동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구단들이 많다보니 리버풀도 그렇게 탄생한 구단으로 알려진 경우가 많은데, 실제로는 시작부터 자본가에 의해 창립된 구단이다. 당대 지역 자본가인 존 하울딩에 의해 창설되었고, 선수들도 각지에서 스카우트되어 모아졌다.
- 구단 차원에서 LGBT를 확실하게 지지하는 구단이며 인종이나 인권 문제에도 진보적인 목소리를 강하게 내는 편이다. 구단 내에 LFC 재단이 설치되어있으며 꾸준하게 기부 및 자선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 구단 창립자인 존 하울딩은 영국 보수당 출신 정치가였지만, 연고지 자체는 현재 좌향세가 매우 강한 지역이기도 하고 실제로 역대 최고의 감독인 빌 샹클리는 유명한 사회주의자이기도 했다. 위르겐 클롭 또한 유명한 좌파 성향가다.
- 역사적으로 연고지가 영국 중앙 정부와 영국 왕실에 대한 불신과 비토 감정이 극심한데다가[12] 힐스보로 참사 당시 정부의 잘못된 수사와 성의없는 대처로 구단과 서포터들이 큰 피해를 입었기에 리버풀이 영국 정부 행사 혹은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과 엮일 경우 미묘한 상황이 자주 발생한다. 경기 전 영국의 국가 행사가 있는 경우 여지없이 콥 스탠드에는 "우리는 잉글랜드인이 아닌 스카우저다.[13]"라는 걸개가 걸리며, 리버풀이 국내 대회 결승에 진출하여 경기 전 국가가 나오는 경우 팬들은 제창을 거부하고 일제히 야유를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리버풀 로컬 선수들도 대표팀 경기 전 국가인 God Save the King 제창을 잘 하지 않는 편이다.[14] 엘리자베스 2세 서거 당시에는 경기 전 묵념 행사에서 안필드도 침묵을 지켰으나, 이후 찰스 3세 대관식 기념으로 경기 전 국가 연주가 있을 것이란 소식이 들리자 리버풀 팬들은 일제히 구단에 항의했으며 "달글리시가 우리의 왕이다"[15]라는 걸개를 여지없이 들고나왔다.
- 유독 아일랜드 출신 서포터들이 많은 구단이며, 아일랜드와 특별한 인연이 있는 구단이다. 일단 연고지인 리버풀 자체가 아일랜드 대기근 당시 많은 아일랜드 이주민들이 넘어와 정착한 지역이며[16], 그만큼 지리적으로도 굉장히 가까워서 지금까지도 아일랜드 내 최고의 인기를 자랑한다.[17] 초대 감독인 윌리엄 바클레이와 존 맥케나부터가 아일랜드에서 넘어온 이주민 출신이었으며, 로니 웰런, 존 올드리지, 스티브 하이웨이, 레이 호턴, 스티브 피넌 등의 굵직한 아일랜드 빅네임들이 리버풀에서 활약한 바 있다. 때문에 프리시즌 막바지 아일랜드에서 친선 경기도 많이 여는 편이다. 아일랜드 대기근 당시 아일랜드인들이 미국 보스턴으로도 많이 이주했기 때문에 보스턴에도 리버풀 팬들이 특히 많으며, 현재 리버풀의 구단주인 펜웨이 스포츠 그룹 또한 보스턴에 근거지를 둔 기업이다.
- 이름이 똑같은 축구 클럽이 우루과이에 있다. 우루과이의 수도인 몬테비데오를 연고로 하는 프로 축구팀 리버풀 FC(Liverpool Fútbol Club)가 그 주인공. 이 팀은 1915년에 창단되었으며 현재는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에 참가하고 있다. 클럽 이름은 몬테비데오와 당시 교역이 활발했던 리버풀시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하며, 사실상 리버풀 구단과는 큰 연관이 없다.
- 리버풀의 팬들이 창단한 AFC 리버풀과 시티 오브 리버풀이라는 구단이 존재한다. 사우스 리버풀 FC이라는 팀도 있는데, 이 팀은 리버풀의 라이버 버드 로고를 사용하기는 하나 리버풀과 연고지 외 큰 연관은 없는 구단이다. 그러나 리버풀에서 임팩트를 남긴 공격수 존 알드리지가 사우스 리버풀에서 유스 생활을 한 바 있다.
- 산하 여자 축구단 리버풀 FC 위민은 2013 시즌 이전에 모든 선수와 정규직 프로 계약을 체결한 최초의 영국 여자 축구단이다.
- 우승 후 시내 버스 퍼레이드에 상당한 숫자의 팬들이 모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2004-05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 당시에는 퍼레이드에 75만명의 팬들이 모이는 엄청난 진풍경이 펼쳐졌다.# 리버풀의 인구가 50만명, 머지사이드 광역권 인구가 200만명임을 감안하면 대단한 인파다.[18][19] 14년 뒤 리버풀이 여섯 번째 빅 이어를 가지고 돌아온 2018-19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 퍼레이드에서도 다시 한 번 75만명의 팬들이 운집했다.# 2019-20 시즌 프리미어 리그 우승 당시에는 더 어마어마한 인파가 몰릴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코로나-19 사태로 퍼레이드가 열리지 못했다. 2021-22 시즌 도메스틱 컵 더블 당시에는 50만명이 결집했다.
3. 선수 관련
- 스코틀랜드 출신의 레전드가 매우 많으며 스코틀랜드와 인연이 깊다. 실제로 존 하울딩이 구단을 창립한 이후 최초의 선수단을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꾸렸으며[20], 스코틀랜드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잉글랜드 북서부 지역에 위치하였기에 그 이후로도 많은 스코틀랜드 선수들을 데려왔다. 구단 역사상 최고의 선수인 케니 달글리시와 구단 역사상 최고의 감독인 빌 샹클리가 모두 스코틀랜드 출신이며, 역대 베스트 일레븐에 들어가는 그레이엄 수네스, 앨런 한센 또한 스코틀랜드인이다. 웨일스, 북아일랜드, 아일랜드와도 지리적으로 가깝기 때문에 과거 레전드들 중 이안 러시, 스티브 하이웨이, 로니 웰런, 존 토샥 등 잉글랜드 외 타 연합 왕국 출신들과 아일랜드 출신들도 많은 편이다.
- 붉은 제국이라 불리는 장대한 전성기를 보냈고 잉글랜드에서 가장 우승 경력이 많은 구단이지만, 이상하리만큼 전성기 시절에도 선수 개개인의 국제 개인상 수상이 적었고 선수들의 개별적 명성은 다른 유럽 대항전 명문들에 비해 약한 편이다. 실제로 발롱도르 수상자도 2000년대의 마이클 오언이 유일하다. 이는 전성기 시절의 리버풀 자체가 감독의 능력이 빛나는 팀[21]이었던 것과 더불어, 전성기를 이끌었던 레전드 선수들의 국적이 가장 큰 이유로 꼽힌다. 실제로 케니 달글리시를 포함해 이안 러시, 그레이엄 수네스, 앨런 한센 등 구단 역대 최고의 선수들이 모두 당대 국제대회에서 비교적 성과가 부족한 변방 대표팀 출신이었고[22], 잉글랜드 출신의 로컬 선수들 또한 국가대표와 인연이 많이 없었다.[23] 또한 상복 자체도 상당히 따라주지 못했는데, 70년대 리버풀의 에이스 케빈 키건은 1977년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를 격침시키고 리버풀을 유럽 최강자 위치에 올리며 엄청난 활약을 선보였음에도 알란 시몬센에 밀려 발롱도르 2위에 그쳤고 함부르크 SV로 이적한 후에서야 발롱도르를 2회 수상했다. 리버풀 역대 최고의 투톱인 달글리시와 러시의 경우 당대 국제대회까지 휩쓸던 미셸 플라티니의 발롱도르 3연패 시절과 전성기가 겹쳤다.[24] 2019년의 버질 반 다이크는 역대 최고의 선수인 리오넬 메시에 의해 발롱도르 2위에 그쳤다. 현 시점 리버풀의 에이스 모하메드 살라 또한 국적이 월드컵 진출도 험난한 이집트이기에 특히 발롱도르 순위와는 인연이 없어왔다.[25]
- 특이하게도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 선수가 역대 14명이나 있었다. 이는 과거 1920~30년대 남아공의 아마추어 대표팀을 초대하여 친선 경기를 펼치곤 했는데, 그 과정에서 많은 선수들이 스카우트되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남아공 출신 선수가 역대 리버풀 최고의 골잡이 중 하나로 불리는 고든 호지슨이며[26], 최초의 아프리칸이었던 골키퍼 아서 릴리, 퀵실버라는 이명이 붙었던 베리 니우엔후이스도 남아공 출신이었다.
- 맨유의 전설적인 명장 맷 버스비가 재밌게도 리버풀 선수 출신이다. 버스비는 주장까지 역임했을 정도로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시기에 리버풀에서 핵심적인 선수였다. 전후에 버스비는 리버풀의 감독직을 맡고 싶어했으나 리버풀은 그에게 수석코치직만을 제안했고, 그 사이 맨유가 감독직을 제안했다고 한다. 버스비가 맨유를 맡은 1960년대 리버풀과 맨유는 리그에서 상위권 경쟁을 하며 우승을 나눠 먹기도 했던 경쟁팀이었으나, 버스비는 선수 시절 리버풀 팬들의 사랑을 받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양 팀의 사이는 현재와는 다르게 상당히 우호적인 편이었다.
- 연고지 특성상 향수병을 호소하는 선수들이 종종 있다. 날씨가 매우 변덕이 심하며 비가 자주오고 바람이 많이 불기 때문에 특히나 햇빛이 쨍쨍하고 따듯한 기후에서 살던 남아메리카 혹은 지중해성 기후 출신들이 특히 힘들어하는 편이다. 심지어 음식도 가뜩이나 맛없기로 유명한 영국에서도 맛이 없는 편이기 때문에 고통을 호소하기도 한다. 이러한 점 때문에 리버풀은 선수 영입에 제약이 있기도 하다.
- 2010-11 시즌부터 2012-13 시즌까지 리버풀에 민머리 선수들이 유독 많아 이른바 빡빡풀이라고 불리기도 했었다. 특히 2010-11 시즌은 당시 '예능 골키퍼'였던 페페 레이나를 포함하여 글렌 존슨, 마르틴 스크르텔, 폴 콘체스키, 하울 메이렐레스, 제이 스피어링, 존조 셸비, 조 콜, 라이언 바벨, 다비드 은고그 등 18명의 출전 선수 명단 중 대부분이 민머리 선수들이었고 이들은 예능 축구팀의 이미지를 만드는 데에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 이후 2018년에 리버풀의 센터백 데얀 로브렌이 머리를 밀며 올드 팬들에게 이 시절을 회상시켜주기도 했다.
스크르텔과 메이렐레스, 스피어링의 골 세레머니 |
- 이탈리아 국적 선수들과는 이상하리만큼 합이 좋지 않다. 역대 리버풀에서 출전한 이탈리아 국적 선수로는 가브리엘 팔레타, 다니엘레 파델리, 안드레아 도세나, 알베르토 아퀼라니, 파비오 보리니, 마리오 발로텔리가 있는데 그동안 단 한 명도 성공한 선수가 없다.[27] 2024-25 시즌 여름 이적시장에서는 페데리코 키에사가 영입되었으나, 부상으로 인해 전반기를 통으로 날렸고 팬들은 계속해서 이어져온 이탈리아 선수 징크스가 이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며 걱정하는 중. 그러나 키에사는 프리시즌을 제대로 못 치른 상태로 리버풀로 이적한 터라 아직 매치 핏이 올라오지 않았을 것으로 예상되며 아르네 슬롯 감독의 특성상 매치 핏을 매우 강조하기 때문에 아직 큰 걱정을 하기엔 이르다.
- 2010년대 후반까지 좌측 풀백 잔혹사에도 시달렸다.[28]먼저 악마의 왼발로 불리며 나름 쏠쏠한 활약을 보여줬던 욘 아르네 리세[29] 이후로 수위급 기량의 파비우 아우렐리우가 영입되었으나 엄청난 유리몸[30]이어서 팀에 골머리를 앓게 만들었다. 아우렐리우를 대체하기 위해 2008-09 시즌 영입된 안드레아 도세나는 완전히 수준 이하였고 유망주 에밀리아노 인수아는 기대만큼 터지지 못했다.[31] 이후 역대 최악의 감독 로이 호지슨이 데려온 폴 콘체스키라는 역대 최악의 레프트백이 잔혹사의 방점을 찍었고, 후에 호세 엔리케가 그나마 한 시즌 정도 괜찮은 활약을 했지만, 부상과 폼 저하로 오래 활약하지 못했다. 이후 알리 시소코를 임대로 데려왔지만 또 처참히 실패했고, 글렌 존슨이 좌측으로 자리를 옮겨 왼쪽 풀백의 공백이 메워져야 했다.[32] 2014-15 시즌에는 알베르토 모레노가 영입되어 토트넘 홋스퍼를 상대로 엄청난 데뷔골을 집어넣으며 기대를 모았으나 이후 수비력과 축구 지능에서 더 엄청난 하자를 드러내며 실패했다. 계속되는 왼쪽 풀백 대실패로 리버풀은 존슨 이후 2010년대 중후반에 이르기까지 유망주 조 고메즈를 좌측으로 기용하는 등 계속해서 적임자를 찾지 못한채 잔혹사에 시달렸다. 그러나 2017-18 시즌, 아무도 기대하지 않던 스코틀랜드의 무명 선수가 이 잔혹사를 완벽하게 종결짓게 된다.
3.1. 스트라이커 잔혹사
원래 리버풀은 과거부터 걸출한 공격 라인업으로 유명한 구단이었다. 60년대의 로저 헌트-이안 세인트 존, 70년대의 존 토샥-케빈 키건, 80년대의 이안 러시-케니 달글리시, 90년대의 로비 파울러, 00년대 초반의 마이클 오언까지 리버풀의 공격진은 붉은 제국 시절부터 끊이지 않고 강한 화력을 자랑했다. 그러나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발롱도르 수상자였던 오언의 이적 이후 2000년대 중반부터 리버풀의 스트라이커 잔혹사가 시작되었다.과거 힐스버러 참사 이후 리버풀은 영광의 시대에서 내려오며 그레이엄 수네스, 로이 에반스 감독 체제에서 리빌딩까지 실패했지만, 제라르 울리에 감독이 취임하며 부진이 어느 정도 수습이 되는 듯 했다. 특히 2000-01 시즌 FA컵, 리그컵, UEFA컵[33], 커뮤니티 실드, UEFA 슈퍼컵의 5관왕으로 리버풀의 중흥기가 시작됐다. 당시 호성적을 이끈 프랜차이즈 스트라이커가 마이클 오언이었다. 리버풀은 2000-01 시즌 리그에서 3위를 기록했지만, 오언과 에밀 헤스키 조합은 30골을 합작했고 리버풀은 스트라이커가 약하다는 평가를 받는 팀이 전혀 아니었다. 오언은 다음 시즌에도 19골을 터뜨리며 팀의 리그 준우승을 이끌었다. 그러나 헤스키가 부진하기 시작했고, 리그 준우승 팀임에도 팀 득점 67점으로 1위 아스날의 79득점, 3위 맨유의 87득점에 비하면 저조한 득점력을 보이기 시작하며, 본격적으로 공격진에 골머리를 앓게 되었다.
공격진 보강을 위해 리버풀은 2002-03 시즌을 앞두고 월드컵에서 맹활약을 펼친 세네갈의 연쇄살인마라는 별명을 가진 공격수 엘 하지 디우프를 1,000만 파운드에 영입을 했다. 전 소속팀인 리그앙의 RC 랑스에서도 두 시즌 동안 18골을 뽑아낸 검증된 공격수였고, 월드컵에서 세네갈을 8강으로 이끈 맹활약을 했기에, 기대를 모은 영입이었으나, 두 시즌 동안 리그 55경기에 나와서 3골, 리그컵 7경기 나와서 3골 총 79경기에 출전해서 6골을 넣는 최악의 부진을 선보이며,[34] 최악의 이적생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그동안은 로컬 유스 출신인 오언이 꾸준히 리그 두 자릿수 득점을 기록해주고 있었고, 2001-02 시즌에 320만 파운드로 영입했던 밀란 바로시가 2002-03 시즌 총 12골을 넣어주며 그나마 득점 수혈을 해주고 있었던 상황이었으나, 오언마저 2003-04 시즌 종료 후 레알 마드리드로 떠나고 퇴물 취급받던 에밀 헤스키마저 버밍엄 시티로 이적하게 되면서 리버풀의 공격진은 그야말로 멸망 수준에 처하게 되었다. 결국 디우프도 2004-05 시즌에 볼튼 원더러스로 임대를 떠났다.[35]
오언과 디우프가 사라진 2004-05 시즌, 리버풀은 초신성의 전술가 라파엘 베니테스를 감독으로 데려왔으나 이미 공격진은 초토화된 상황. 지브릴 시세를 당시 리버풀 클럽 레코드인 1,450만 파운드에 영입은 했지만, 영입한지 얼마 안 돼서 다리가 골절되는 부상을 입게 되었고, 두 시즌 동안 리그 13골의 그저 그런 활약을 보였다. 유로 2004에서 맹활약하며 득점왕에 오른 바로시가 간신히 9득점을 올리며 고군분투했다. 겨울 이적 시장에서는 페르난도 모리엔테스가 공격진에 가세했으나 별 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고 완전한 하향세를 보였다. 리버풀은 득점 부진으로 해당 시즌 리그 5위로 처졌으나, 이스탄불의 기적을 기적적으로 일궈내며 챔피언스 리그 진출권은 사수했다.[36] 그러나 바로시 조차 다음 시즌인 2005-06 시즌을 부상으로 통째로 날려버렸고, 2004-05 시즌 당시 닐 멜러라는 반짝 스타가 등장하긴 했지만, 그야말로 반짝 스타에 불과했다.
2005-06 시즌에는 장신의 피터 크라우치가 영입되었으나 19경기 동안 무득점 행진을 이어가는 등 지겹도록 득점을 하지 못하는 공격수였다. 이에 보다 못한 제라드가 PK를 양보해줬음에도 불구하고 실축했을 정도였다.[37] 2006-07 시즌에는 팀의 득점력 강화를 위해 페예노르트 로테르담에서 한창 주가를 올리던 디르크 카윗을 900만 파운드라는, 당시 리버풀의 재정 상황을 고려하면 꽤 큰 금액으로 영입했다. 카윗의 활동량이나 팀 플레이는 수준급이었으나 정작 폭발적인 득점력을 보여주진 못했다.[38] 그래도 카윗은 이후 오랜 기간 동안 리버풀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주었으나 오른쪽 윙으로 포지션을 변경해서 뛰었기에 스트라이커 잔혹사를 끊어주진 못했다.[39] 같은 시즌 600만 파운드의 이적료로 뉴캐슬 유나이티드에서 크레이그 벨라미도 영입했지만 리그 7골로 빈곤한 득점력은 해결해주지 못했다. 대신, 바르셀로나와의 챔피언스 리그 경기에서 맹활약하며 바르셀로나를 탈락시키는 임팩트는 남겼다. 허나 벨라미는 활약과 별개로 좋지 않은 인성과 말썽으로 시끄러웠던 인물이었고 결국 다음 시즌 바로 팀을 떠났다.[40] 해당 시즌에는 로비 파울러 깜짝 복귀해서 쏠쏠한 활약을 펼쳐주기는 했으나 선수 생활 말년이었기에 백업으로 7득점에 그쳤다.
결국 리버풀은 2007-08 시즌 이적시장에서 2,000만 파운드라는 클럽 레코드를 기록하며 당대의 대형 스트라이커 유망주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페르난도 토레스를 영입하기에 이르렀다.[41] 토레스는 이적하자마자 스트라이커 문제를 해결하며 프리미어 리그 최고의 공격수로 떠올랐고, 최고 수준의 지원을 해줄 수 있던 스티븐 제라드와 '제토라인'을 형성, 프리미어 리그와 챔피언스 리그에서 강력한 공격력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에 리버풀은 오언 이후 드디어 제대로된 스트라이커를 기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때 함께 영입된 안드리 보로닌은 골가뭄과 부상으로 최악의 활약을 선보였다.[42]
토레스를 필두로 리버풀의 공격진 잔혹사가 깨지는가 했으나 제토라인은 오래가지 못했다.[43] 보로닌이 실패하며 토레스의 백업 자원이 전무해 토레스의 의존도가 극심했고[44], 제라드와 토레스의 부상이 늘어나자 다시 스트라이커 문제는 리버풀의 발목을 잡았다. 당시 토트넘 홋스퍼에서 로비 킨을 데려왔으나 구단주와 감독 사이의 알력 다툼 등 클럽 내부적인 사정으로 인해 잘못 영입된 선수였던지라[45], 6개월 만에 변변찮은 활약 후 다시 이적하고 말았다. 다비드 은고그라는 백업 공격수도 구해왔으나 제대로 토레스를 지원해주지 못했다. 이후 부상으로 토레스의 폼이 확연하게 떨어졌고 2009-10 시즌을 끝으로 베니테스마저 떠나자 팀도 완전히 암흑기에 돌입했다. 결국 토레스는 첼시로 이적을 요청했고 공격진의 희망이던 토레스도 5,000만 파운드에 팀을 떠나게 되었다.
토레스를 판매한 리버풀은 무려 3,500만 파운드라는 패닉바이를 시전하며 겨울 이적시장에서 대형 유망주 앤디 캐롤을 뉴캐슬에서 영입했지만, 구시대적인 스타일과 잔부상으로 고생하던 캐롤은 또 완전히 실패한 영입생이 되었다.[46] 그러나 아약스에서 2,650만 파운드로 사온 루이스 수아레스가 월드 클래스의 기량을 선보이며 리버풀의 스트라이커 잔혹사는 여기서 사라지는 듯 했다. 수아레스는 연이어 미친 활약을 선보였고, 2012-13 시즌 겨울에 다니엘 스터리지까지 영입되며 일명 SAS[47]라인이 완성되자 리버풀은 리그 최강의 투톱라인을 보유하게 되었다.[48] 2013-14 시즌에 이아고 아스파스가 영입되어 피지컬의 한계를 이기지 못하고 실패작으로 남긴 했으나 라힘 스털링이 공격진에 가세하여 화력은 더 강해졌다.
그러나 이 SAS라인도 오래가지 못했다. 2013-14 시즌 리그 우승이 좌절되자 수아레스가 바르셀로나로 떠났고, 리버풀은 대체자로 마리오 발로텔리, 리키 램버트, 크리스티안 벤테케를 영입하였으나, 이들은 전설의 '램발보'로 불리며 끔찍한 득점 부진을 보였다. 스터리지는 나오기만 하면 날카로운 결정력을 보였으나 엄청난 잔부상에 시달려 제대로 활약하지 못했다.[49] 스터리지가 결장하고 램발보가 역대 최악의 공격력을 보여주던 이 시기가 리버풀 스트라이커 잔혹사의 정점으로 평가받는다.
그리고 2015-16 시즌, 위르겐 클롭이 부임하며 비로소 리버풀의 공격진이 해결되기 시작했다. 공격형 미드필더로 영입되었던 호베르투 피르미누가 폴스나인으로 기용되며 제 몫을 하기 시작했고, 이후 연이어 사디오 마네, 모하메드 살라가 영입되며 역대급 공격라인이 구축되었다. 일명 이 마누라라인은 2017-18 시즌부터 2021-22 시즌까지 무려 338골 137도움을 합작하며 완전히 리버풀의 공격수 잔혹사를 끊어냈다. 이후 디보크 오리기와 디오구 조타도 백업 및 준주전 자원으로 연이어 성공적인 활약을 보여주며 리버풀은 2010년대 후반부터 2020년대 초반까지 프리미어 리그는 당연하고 유럽 최고의 공격 라인으로 평가받기도 했다.[50]
그러나 2021-22 시즌에 마네가 떠나고 2022-23 시즌에 피르미누가 떠나면서 다르윈 누녜스와 코디 각포가 새롭게 수혈되었는데 영 신통치 못한 활약으로 다시금 스트라이커 잔혹사가 시작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사고 있다. 특히 9번 스트라이커는 누녜스는 1억 유로의 이적료에도 불구하고 최악의 활약을 보이고 있어 이전의 실패한 공격수 사례들과 매우 유사한 흐름이다.
4. 경기 관련
- 2009년 10월 16일, 뜻밖의 일이 일어나 축구계를 달궜다. 리버풀의 2009-10 시즌 리그 9라운드 선덜랜드 원정 리그 경기에서 한 어린 리버풀 팬이 비치볼을 경기장 쪽으로 던졌는데, 선덜랜드의 공격수인 대런 벤트의 슈팅이 이 비치볼에 맞고 굴절되어 축구공이 골문으로 들어갔다. 사실 FIFA 경기 규칙에 따르면 경기장 내에 이물질이 들어온 순간에 경기가 일시 중단되었어야 하지만, 주심이었던 마이크 존스가 이를 보지 못해 오심으로 득점이 인정되었다. 이 경기는 결국 1-0 리버풀의 패배로 끝나게 되는데 이 사건 이후 리버풀은 총 7경기에서 1승 3무 3패로 부진을 이어갔으며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올림피크 리옹에 패하여 22년만에 4연패를 기록하게 되었다. 참고로 당시 비치볼을 던진 소년의 이름이 공교롭게도 칼럼 퍼거슨이었다고 하며 같은 리버풀 팬으로부터 살해 협박을 받기도 했다. # 이 사건을 한국에서는 보통 풍선골이라고 칭하며, 소위 예능풀 시절을 추억할 때 늘 손꼽힌다.
- 2011-12 시즌 안필드에서 열린 토트넘과의 리그 경기 도중에 갑자기 고양이가 난입했다. 이에 약 1분 동안 경기가 진행되지 못하다가 안전요원들이 바깥으로 내보냈는데, 이후 안필드에서 고양이를 보살피기로 하면서 빌 샹클리 감독의 이름을 연상시키는 이름인 샹크스란 이름까지 지어졌다. 당시 이 고양이는 전세계적으로 이목을 끌게 되어 트위터 계정까지 만들어졌다. 리버풀 서포터들에 의하면 이 경기 말고도 이전부터 안필드 스타디움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고 한다.# 사람들이 고양이를 구단의 공식 마스코트로까지 사용하길 원했지만 구단 측에서는 돌봐주다가 동물 보호소로 보냈고, 결국 입양되었다고 한다.#
- 프리미어 리그 출범 이후 크리스마스 징크스에 시달렸다. 보통 프리미어 리그 전반기와 후반기의 반환점으로 여겨지는 매해 크리스마스 쯤에 리그 선두 자리에 위치해 있으면 다수의 팀들이 결국 우승까지 차지하는 사례가 통계적으로 많았다. 그러나 리버풀은 프리미어 리그 출범 후 한동안 크리스마스에 1위를 기록하고도 끝내 우승을 하지 못했던 경우가 다른 팀들에 비해 잦았는데, 이를 소위 크리스마스 징크스라고 부르곤 한다. 1996-97 시즌 리버풀은 크리스마스에 1위를 달렸으나 최종 4위를 기록하고 말았고, 2008-09 시즌에도 리버풀은 크리스마스 1위를 달렸으나 최종 2위를 기록했다. 2013-14 시즌 역시 크리스마스에 1위였으나 최종 2위를 기록하였다. 이후 2018-19 시즌에도 리버풀은 크리스마스에 1위에 있다가 최종 2위를 기록하면서 계속해서 한 끗 차로 리그 우승을 놓쳐왔다. 한편 리버풀이 크리스마스 1위를 차지하고도 우승하지 못할 때마다, 우승을 가로막았던 팀들이 공교롭게도 모두 맨체스터 연고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맨체스터 시티였다. 하지만 2019-20 시즌, 위르겐 클롭 감독이 이끌던 리버풀은 크리스마스 1위는 물론 이후로도 압도적인 페이스로 리그 선두를 달렸고, 결국 클럽 역사상 최다 승점인 99점을 쌓으면서 펩 과르디올라 감독의 맨체스터 시티를 승점 18점 차로 크게 따돌리며 마침내 최종 1위를 기록하였다.[51] 이렇게 프리미어 리그 출범 후 최초이자, 30년 만에 리그 우승을 달성한 리버풀은 드디어 지긋지긋한 크리스마스 징크스를 깨뜨리는데 성공하였다.[52]
- 역사상 첫 승강 플레이오프를 노스웨스트 더비로 치렀다. 1893-94 시즌 디비전 2에서 무패로 우승을 달성하면서 디비전 1 최하위였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전신 뉴튼 히스(Newton Heath)와 승강 플레이오프 격인 테스트 매치를 치르게 되었고 여기에서 2-0 승리를 거두며 창단 2년 차에 처음으로 1부 리그에 진출한 바 있다.
- 1980년대 힐스보로 참사 당시 아스날 FC이 참사 직후 리그 경기였던 윔블던과의 경기를 자진해서 연기하며 추모의 뜻을 밝힌 바 있다. 아스날은 1989년 리그 마지막 경기로 미뤄진 안필드 원정에서 리버풀에게 헌화를 하고 3만 파운드를 힐스보로 재난 기금에 기부하기도 했다. 그러나 후에 이 사실이 국내 축구 커뮤니티를 통해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한국에선 아스날이 FA의 징계 위협에도 불구하고 '리버풀과의 경기'를 강경하게 연기했으며 이후 양 팀이 '철의 동맹' 혹은 '형제의 구단'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널리 알려졌으나, 실제로 아스날은 윔블던과의 리그 경기를 연기한 것이며, 이후 리버풀과 아스날의 리그 경기는 FA와 풋볼리그에 의해 공식적으로 연기되어 마지막 경기로 미뤄진 것이다.[53]
- 칼스버그와 메인 스폰서 계약이 되어있던 시절, 유럽 대항전 원정 국가에 따라 칼스버그 로고를 부착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경우에 따라 유니폼에 주류 회사 광고를 금지하는 국가가 있었기 때문. 대표적으로 프랑스 원정이 그러했다.
5. 기타
- 연고지 리버풀의 로컬 밴드이자 전세계적인 인기를 구가했던 비틀즈는 리버풀 구단과 큰 인연은 없다. 그러나 1965년, 리버풀의 감독 빌 샹클리에게 비틀즈가 FA컵 결승전에서의 승리를 기원하는 전보를 보낸 적이 있다.[54][55] 해당 전보의 원본은 리버풀의 Shankley Hotel에 전시되어 있으며 샹클리의 가족에 의해 발견되었다. 또한 비틀즈의 아이코닉한 명반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의 표지에 리버풀의 전설적인 공격수 알버트 스터빈스가 그려진 바 있다.[56] 당시 스터빈스를 표지에 넣은 사람이 존 레논인지 폴 매카트니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었는데, 후에 맥카트니는 "영광스러운 축구 커리어를 보낸 알버트씨, 정말 좋았습니다. 앞으로도 축구계에서 영원히 분투하시길"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또한 비틀즈의 Yellow Submarine 애니메이션 중 'Eleanor Rigby' 장면에서는 두 축구 팀이 등장하는데, 머지사이드 더비를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 비틀즈 멤버 중에서는 존 레논이 리버풀의 팬이었을 것이라고 추정되나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어 정확하지는 않다.[57] 확실한 것은 레논의 아버지[58]가 리버풀의 팬이었으며, 레논도 어린 시절 축구를 상당히 좋아했다는 것이다.[59] 반면 폴 매카트니는 집안이 모두 에버튼 FC 팬이었고 에버튼을 응원한 것으로 알려졌다.[60] 그러나 매카트니는 "저의 아버지는 에버튼에서 태어났고, 우리 가족은 에버토니언스에요. 그래서 더비 매치나 혹은 FA컵 결승이 더비가 된다면, 저는 에버튼을 지지해야만 하죠. 하지만 웸블리에서의 공연이 끝난 후 저는 케니 달글리시랑 친해졌어요. 사실 두 팀 다 리버풀의 팀이기 때문에 둘 다 좋아하고 에버튼에 대한 엄청난 신실함은 없어요. 두 팀 다 훌륭하고 좋은 팀이지만, 어쨌든, 전 에버토니언입니다."라고 말한 바 있고, 1968년 리버풀을 상징하는 빨간 장미와 흰 장미를 착용한 채 'Mad Day Out' 촬영을 했으며, 1977년 리버풀과 맨유의 FA컵 결승전을 캐리비언에 있던 개인 요트에서 라디오로 들었다는 일화도 있기에 라이트한 팬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지 해리슨은 "리버풀에는 세 팀[61]이 있지만 저는 다른 팀을 좋아합니다."라고 말했다.[62][63] 링고스타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아스날 FC를 응원했었지만 현재에는 리버풀 응원하며 리버풀이 우승하면 축하 메세지를 보내곤 한다.
- 리버풀과 이스탄불의 기적을 소재로 한 영화가 있다. 영화 제목은 <WILL>이라고 하며 주인공인 어린 아이 '윌'은 부모님이 없어 시설에서 지내지만 누구보다도 리버풀에 대한 열정은 남다른 꼬마이다. 어느날 그동안 모르고 지냈던 친아빠가 시설로 찾아오고 그에게 마음을 열지 않는 주인공을 위해 친아빠는 이스탄불로 가는 챔스 결승 티켓을 구해 온다. 친아빠와 주인공은 You'll Never Walk Alone을 같이 부르고 주인공은 조금씩 아빠에게 마음을 열게 된다. 그러던 얼마 후 친아빠가 갑자기 뇌출혈로 세상을 떠나게 되는 사고를 당하고 주인공은 홀로 시설을 뛰쳐나와 아버지와 약속했던 챔스 결승을 직관하기 위한 여행을 떠난다. 인상적인 부분은 어린 아이임에도 불구하고 나이 먹은 리버풀 콥들보다 리버풀 역사에 대해 빠삭하다는 점. 성인인 콥들에게 리버풀 역사를 되려 가르쳐 주는 수준이다. 진정한 성콥. 이 영화 후반부에 케니 달글리시, 제이미 캐러거, 스티븐 제라드가 직접 출연하며 결국 리버풀이 AC밀란을 승부차기 끝에 꺾고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영상을 마지막으로 영화는 끝난다.
- 힐스버러 참사를 배경으로 한 단편 영화도 있다. # 힐스버러 축구장의 참사를 배경으로 머지사이드에 살고 있건 한 가족에게 찾아온 일화를 가상으로 재구성한 영화이다. 영화의 배경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꼬마 리암이 친구들과 축구를 하러 나가는데, 리암의 친구들, 장벽을 넘어온 아이들의 장난으로 리암은 코피를 쏟으며 느끼는 위협감을 시청자에게 전달하며 시작되는데, 당시의 비극적인 순간을 영화의 입장에서 각색하여 묘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 2024년 11월 12일, 현역 PL 심판인 데이비드 쿠트가 리버풀과 리버풀의 전 감독인 위르겐 클롭에 대해 과거 부적절한 발언을 했다는 혐의로 PGMOL(프로경기심판기구)의 조사를 받았고, 결국 12월 9일자로, 심판직에서 공식적으로 해고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간 편파판정에 대한 심증만 많았는데 물증이 실제로 드러난 셈이며 지역 및 인종 차별적 발언으로 현지에서 굉장한 물의를 빚었다.
[1] 1부 리그에서 족적을 남긴 구단들 중에서는 역대 감독 수가 가장 적다. 그만큼 성공적으로 장기 부임한 감독들이 많았다. 현재 아르네 슬롯까지 정식 감독 21명, 대행 감독 1명으로 로니 모란만이 대행 감독직을 맡았다. 단, 케니 달글리시는 1980년대와 2010년대에 한 번씩 총 두 차례 팀을 맡았다.[2] 조지 패터슨, 돈 웰시, 필 테일러, 로이 호지슨, 브랜던 로저스가 전부다. 이 중 웰시, 테일러는 샹클리 이전 1차 암흑기 시절의 감독들인데, 그 중에서도 강등을 만든 웰시를 제외하면 테일러는 구단에 대한 헌신을 인정받는 레전드 선수 출신으로, 절대적으로 나쁜 평가를 받는 인물도 아니다. 페터슨 또한 레전드급 장기 근속 코치 출신이다.[3] 빌 샹클리, 밥 페이즐리, 조 페이건, 제라르 울리에, 라파 베니테스, 위르겐 클롭. 이 중 페이즐리, 페이건, 베니테스, 클롭은 챔피언스 리그를 우승했다.[4] 아스날이 13시즌, 토트넘이 16시즌, 첼시가 19시즌, 맨유와 맨시티는 20시즌 넘게 2부 리그에 있었고 맨시티는 심지어 3부 리그로도 떨어진 역사가 있다.[5] 1부 리그 누적 참가 기간은 팀 역사가 더 오래된 아스톤 빌라에 1시즌 뒤진 3위이며, 1부 리그 연속 참가 기간 또한 아스날, 에버튼에 이어 3위다.[6] 재밌게도 리버풀의 1977년, 1978년 유러피언 컵 재패 이후, 1979년과 1980년에 노팅엄 포레스트가 2연패 기록을 이어 작성했다.[7] 당시 세컨드 디비전 우승 후 퍼스트 디비전 최하위였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의 전신 뉴튼 히스(Newton Heath)와 승강 플레이오프 격인 테스트 매치를 치르게 되었고 여기에서 2-0 승리를 거두며 승격했다.[8] 당시 상대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였다.[9] 1위는 아스날 FC, 2위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다.[10] 공식 트레블은 1부 리그, 챔피언스 리그(유러피언 컵), FA컵을 우승해야한다.[11] 아스날 FC과 에미레이트 항공의 계약이 이 기록을 깼다.[12] 아일랜드 대기근 당시 탈출한 많은 아일랜드 이주민들이 리버풀에 정착했기에 왕실에 대한 반감이 엄청나다. 또한 마가렛 대처 시절 '대처주의 및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인해 잉글랜드 북부 지역은 엄청난 경제 불황을 겪었기에 대처의 사망 당시 잉글랜드 북부는 '마녀가 죽었다'라며 기뻐하는 분위기였을 정도다.[13] 리버풀 지역을 스카우즈(Scouse) 지역이라고 부른다.[14] 애초에 영국 국가 내용 자체가 이름부터 영국 왕실 찬가다. 이에 최근 리버풀 로컬 출신의 트렌트 알렉산더아놀드는 아예 국가가 나오자 입을 닫았고, 이에 대해 많은 갑론을박이 있기도 했다.[15] 달글리시의 이명이 킹 케니다.[16] 리버풀 인구의 50% 가량이 아일랜드 혈통이다. 리버풀 출신의 레전드 밴드 비틀즈의 폴 매카트니 또한 증조부가 아일랜드 출신 이민자이다.[17] 로넌 키팅, 마이클 패스밴더, 셰이머스, JD 맥도나, 코너 맥그리거 등의 아일랜드 출신 유명인들이 리버풀의 서포터이다.[18] 영국 전역은 물론 해외 팬들까지 대거 참석했다.[19] 2010년대 첼시 FC와 맨체스터 시티의 퍼레이드는 약 10만명 이하의 규모로 펼쳐졌고, 아스날의 우승 퍼레이드가 25만명 규모로 펼쳐진 바 있었다.[20] 2대 감독이자 구단 초창기부터 팀 운영을 맡았던 존 맥케나가 초창기 리버풀의 선수단 구성을 위하여 글래스고에서 선수들을 많이 데려왔는데 이 때 이름이 맥케나와 같이 'Mc'으로 시작되는 선수들이 많아서 맥케나의 리버풀은 'Team of Macs'라는 이명도 가지고 있었다.[21] 한준희 위원은 명문 클럽들의 정체성을 선수로 대표되는 명문, 감독으로 대표되는 명문, 회장으로 대표되는 명문으로 구별한 바 있는데, 리버풀은 전형적인 감독으로 대표되는 명문 구단이다.[22] 기본적으로 상술하였듯이 스코틀랜드 출신 레전드들이 매우 많고, 존 토샥, 스티브 하이웨이, 로니 웰런, 스티브 니콜, 마크 로렌슨 등 연합 왕국이나 아일랜드 출신들이 상당수였다. 용병들 또한 브루스 그로벨라같은 변방 출신이 다수였다.[23] 애초에 잉글랜드 대표팀의 성과 자체도 늘 별볼일 없었지만, 리버풀 역대 최다 출장 기록의 이안 캘러한은 당시 알프 램지 대표팀 감독과 아예 스타일이 달라 승선 자체를 거의 못했으며, 필 닐, 엠린 휴즈같은 선수들은 수비수라 비교적 주목도가 덜했다. 레이 클레멘스는 하필 대표팀에 피터 쉴튼이라는 역대급 선수가 있어 출장을 많이 못했다.[24] 러시의 경우에는 전성기가 헤이젤 참사로 다 빛나지도 못했다.[25] 이에 리버풀은 발롱도르 포디움에 선수를 7명이나 배출하고도 단 1회 수상에 그쳤다. 사디오 마네가 2022년 2위, 스티븐 제라드가 2005년 3위, 페르난도 토레스가 2008년 3위에 오른 바 있다.[26] 리버풀 최다 해트트릭 기록 보유자로 남아 있으며, 총 377경기에서 241골을 기록한 레전드다.[27] 물론 프리미어 리그 무대 자체가 이탈리아 선수들의 활약이 그렇게 두드러지는 무대가 아니기는 하다.[28] 같은 기간 동안 오른쪽 풀백도 고민이 없던 것은 아니었으나, 스티브 피넌과 알바로 아르벨로아 이후 경기에는 못나오고 요리 자격증만 따고 나간 필리프 데겐을 제외하면 글렌 존슨, 마틴 켈리, 존 플래너건, 나다니엘 클라인 등이 트렌트 알렉산더아놀드 이전까지 나름 헌신적으로 자리를 채워주었다.[29] 리세도 공격력에 비해 수비력에 문제가 있는 선수여서 팬들에게 다소 호불호가 갈리던 선수였다.[30] 심지어 본인 집 앞마당에서 딸과 함께 놀다가 부상을 당할 정도였다.[31] 이에 당시 센터백 다니엘 아게르가 왼쪽 풀백 땜빵을 뛰는 일이 잦았다.[32] 우측에 유망주 마틴 켈리가 등장하여 존슨이 좌측으로 이동할 수 있었고, 그나마 좌우 풀백이 돌아갈 수 있었다.[33] 지금의 유로파 리그[34] 선수 항목에도 작성되어 있지만, 경기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매우 문제가 많은 선수였다.[35] 볼튼에서는 리그 9골을 터뜨리며 완전이적을 해버린다. 단돈 400만 파운드에 이적했다.[36] 2004-05 시즌 챔피언스 리그도 결정적인 순간에 스티븐 제라드나 루이스 가르시아같은 미드필더 자원들의 활약으로 신승을 챙기며 결승까지 올랐다. 결승전에서도 3득점 모두 미드필더들이 해결했다.[37] 그래도 연계력이 좋았고 후에 몇 경기에서 임팩트를 보여주긴 했기에 리버풀 팬들이 아주 싫어한 선수는 아니었다.[38] 리그 12골로 득점랭킹 9위에 그쳤다.[39] 오른쪽 윙으로 자리잡은 이후에는 마치 박지성처럼 팀을 위해 헌신적으로 뛰어주는 스타일으로 활약하며 리버풀을 떠난 지 오래된 지금도 팬들이 진심으로 좋아하는 선수로 칭송받고 있다.[40] 술에 취해 욘 아르네 리세에게 골프채를 휘두른 사건이 유명하다. 그리곤 앞서 언급한 바르셀로나와의 챔피언스 리그 경기 캄프 누 원정을 떠나 득점을 기록하며 골프채 셀러브레이션을 시전하는 기행까지 선보였다.[41] 하지만 토레스의 이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크레이그 벨라미, 지브릴 시세, 마크 곤살레스, 루이스 가르시아 등 준주전급 자원 여러 명을 이적시켜야 했고, 이는 당시 선두권 경쟁을 벌이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첼시, 아스날에 비해 가뜩이나 부족하던 스쿼드 두께 문제를 더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42] 너무 부진해서 2008-09 시즌에는 헤르타 BSC로 임대를 떠났는데, 분데스리가에서 활약이 준수해 2009-10 시즌에 다시 불러들였더니 또 다시 부진했다.[43] 2007-08 시즌부터 2008-09 시즌까지가 그나마 제토라인이 제대로 가동되었고, 2009-10 시즌부터는 부상에 의해 화력이 떨어졌다.[44] 이는 오언이 있을 당시에도 마찬가지 문제였다. 오언의 백업이 없어 오언의 혹사와 의존도가 심각했다.[45] 당시 리버풀은 최악의 구단주 톰 힉스, 조지 질레트 주니어의 난동으로 베니테스 감독을 전혀 지원해주지 못했다. 당시 베니테스는 가레스 배리를 영입하길 원했으나 당시 단장이었던 릭 페리가 뜬금없이 로비 킨을 데려왔고 완전히 시즌 계획이 망가졌다.[46] 당시 역대 최악의 영입생으로 꼽혔다.[47] Suarez And Sturridge. 영국 특수작전부대의 약어와 동일해 널리 사용되었다. 이후 2013-14 시즌에는 라힘 스털링까지 합세하여 SSS라인으로 불리기도 했다.[48] 2013-14 시즌 수아레스와 스터리즈는 도합 56골을 넣으며 실로 무서운 화력을 선보였다. 제토라인도 단일 시즌에 50골 이상을 합작하긴 했으나, 스트라이커 두 명이 30골 이상을 합작한 것은 오언-헤스키 이후 처음이었다.[49] 그래도 부상으로 고생하던 다니엘 스터리지가 램발보를 다 합친 것 보다 훨씬 나은 수준이었다. 그나마 2010년대 중반의 암흑기때 한 줄기의 빛이 되어줬던 공격수가 다니엘 스터리지였다. 나오기만 한다면 항상 밥 값 이상은 해주었기 때문.[50] 특히 2017-18 시즌에는 마네-피르미누-살라가 모두 챔피언스 리그 두 자릿수 득점을 올리는 엄청난 기록을 달성했고, 2018-19 시즌에는 마네와 살라가 22골로 프리미어 리그 공동 득점왕에 올랐다.[51] 다만 이때 당시 리그 우승 과정 역시 결코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압도적인 1위를 달리고 있었기에 무난하게 우승을 차지하는가 싶었으나, 우승 조기 확정까지 단 2승을 앞두고 2020년 3월 경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팬데믹이 발생, 갑자기 리그가 중단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고 말았다. 다행히도 이후 6월 경에 리그가 재개됨에 따라 리버풀은 우승을 확정지을 수 있었다.[52] 이후 2020-21 시즌에 리버풀은 크리스마스 1위에서 최종 3위를 기록하면서 다시금 이 징크스를 겪기도 했다. 다만 2020-21 시즌은 리그 초반 장기 부상으로 주전 센터백들이 전멸하는 등 수많은 악재들이 겹쳐 정상적인 스쿼드를 제대로 가용할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시즌 중반 리그 순위가 8위까지 떨어지는 큰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오히려 시즌 후반 반등에 성공하면서 최종 3위로 시즌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53] 물론 윔블던전 연기 결정과 구단 차원의 힐스보로 추모 또한 상당히 우호적인 조치이기 때문에 아스날과의 관계성은 비교적 존중을 받기는 하나, 기본적으로 리버풀은 아스날과도 경쟁적인 관계다. 때문에 철의 동맹 혹은 형제의 팀과 같은 단어는 현지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54] "행운을 빌어요. 텔레비전으로 지켜볼게요. 존, 폴, 조지 그리고 링고."라는 내용이었다.[55] 그리고 리버풀은 해당 결승전에서 리즈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2-1로 승리한다. 이는 리버풀의 첫 번째 FA컵 우승이다.[56] 스터빈스는 당대 머지사이드를 상징하는 선수이자 리버풀 팬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캐릭터였기 때문인데, 이에 축구선수로서는 유일하게 수 많은 유명인들과 함께 해당 앨범 표지에 등장했다.[57] 비틀즈의 매니저였던 브라이언 엡스타인은 비틀즈가 자신이 좋아하는 축구 팀을 비밀로 유지해야만 안티 없이 팬들을 모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멤버들의 응원 팀이 당시 잘 알려지지 않았다. 특히나 레논은 단명했기에 더욱이 알 길이 없다.[58] 존 레논의 아버지는 어릴 적 존 레논을 버리고 떠났다가 6살 즈음 돌아와 시간을 같이 보냈다고 한다.[59] 실제로 레논은 축구와 밴드를 놓고 갈팡질팡 한 시기가 좀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발재간이 매우 좋았고, 학창시절에는 발밑에 항상 공을 두고 지냈다고.[60] 1966년 레논과 함께 에버튼이 셰필드 웬즈데이를 3-2로 이기는 경기를 관람했으며, 2년 후 웨스트 브롬위치에게 패배한 경기도 직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61] 리버풀, 에버튼 그리고 트란메어 로버스 FC가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트란메어 로버스는 머지사이드주에 속해있을 뿐 리버풀시에 있지는 않다.[62] 물론, 그 팀이 어디였는지는 해리슨이 작고한 지금은 확인하기 힘들다. 다만 축구팀 응원에 대한 질문을 회피하기 위한 대답으로 추정하기도 한다.[63] 하지만 조지 해리슨의 아들인 다니 해리슨은 현재 리버풀의 광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