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런 한센의 역임 직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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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런 한센의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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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팀 | ||||
| 1981-82 · 1982-83 · 1983-84 · 1986-87 · 1987-88 · 1989-90 |
앨런 한센의 기타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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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의 前 축구선수 | ||||
이름 | 앨런 한센 Alan Hansen | |||
본명 | 앨런 데이비드 한센 Alan David Hansen | |||
출생 | 1955년 6월 13일 ([age(1955-06-13)]세) | |||
영국 스코틀랜드 클라크매넌셔 소키 | ||||
국적 | 스코틀랜드 | |||
신체 | 키 188cm | |||
직업 | 축구선수(센터백, 스위퍼 / 은퇴) | |||
등번호 | 스코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 5번 리버풀 FC - 6번 | |||
소속 | 선수 | 소키 주니어스 FC (?~1973 / 유스) 파틱 시슬 FC (1973~1977) 리버풀 FC (1977~1991) | ||
국가대표 | 26경기 (스코틀랜드 / 1979~1987) | |||
정보 더 보기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별명 | 조키(Jockey, 리버풀에서의 별명), 스트레치(Stretch, 파틱 시슬에서의 별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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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코틀랜드의 前 축구선수. 1970년대 중후반~1980년대 중반까지 유럽 축구계의 최강팀으로 군림한 '붉은 제국'시절의 리버풀을 지탱하던 '스코틀랜드 3인방'의 일원으로, 포지션은 중앙 수비수이다. 분류하면 리베로 유형의 선수이다. 잉글랜드 1부리그 역사상 최고의 센터백 중 하나이며, 리버풀 FC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인 헤이젤 참사와 힐스버러 참사를 모두 리버풀 선수로서 겪은 팀 역사의 산증인이기도 하다.2. 클럽 경력
어린 시절 레인저스 FC의 팬이었고, 어린 시절부터 소키 주니어스 FC에서 유소년팀 생활을 했다. 15세 때, 한센은 학교에서 배구를 하다가 유리 패널에 부딪히는 사고를 당했다. 이 사고로 한센은 27바늘을 꿰메는 대수술을 해야 했고, 결국 큰 흉터가 남았다. 이 일로 교육당국을 고소해서 승소하기도 했다. 이 사고의 영향 때문인지 개인적으로 격한 스포츠인 축구보다는 골프를 하고 싶어했으나, 체대에 들어가는 시험에서 불합격하여 최종적으로 축구선수가 되는 길을 선택했다.2.1. 파틱 시슬 FC
그래서 그는 5살 많은 형 존 한센[1]이 입단해 있었던 스코틀랜드의 파틱 시슬 FC에 입단했다. 1974-75 시즌부터 팀의 주전으로 올라선 한센은 원숙한 기량을 보여주며 크게 주목받았다. 한센의 활약에 힘입어, 파틱 시슬은 1975-76시즌에 스코틀랜드 2부 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해 승격되기도 했다. 파틱 시슬은 스코틀랜드 내에서도 중소 규모의 클럽이었으므로, 한센이 아무리 대선수라 해도 유럽대항전에서 활약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한센은 1977-78시즌을 앞두고 밥 페이즐리 감독의 지도 아래 잉글랜드 최강 축구팀으로 발돋움하던 리버풀 FC에 11만 파운드의 이적료로 이적한다.
2.2. 리버풀 FC
케니 달글리시와 같은 시기에 리버풀로 이적한 한센은 엠린 휴즈-필 톰슨으로 이루어진 주전 수비진에 밀려 첫시즌 많은 기회를 받지 못했지만, 해당시즌 유로피언컵 결승전에 선발 출전하며 데뷔시즌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다음시즌인 78-79시즌부터 한센이 주전경쟁에서 앞서나가기 시작했고, 휴즈가 79년 울버햄튼 원더러스로 떠나자 한센은 완전히 주전자리를 차지했다. 그는 마크 로렌슨, 톰슨과 센터백 듀오를 이루어 활약했다.
한센은 수비라인에서부터 드리블치며 앞으로 전진하는 플레이를 즐겨했고, 이를 두고 페이즐리 감독은 "그가 내가 아는 어떤 선수들보다 더 많은 심장마비를 일으킬 뻔 했다."고 평하기도 했다.
또한 한센은 굉장히 침착한 플레이로 상대 공격을 차단했고, 리버풀 시절 13시즌간 620경기나 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퇴장을 당한 적이 없으며 경고도 9번밖에 받지 않았다.
수비라인의 리더 역할을 한 것은 리베로 한센이었고, 한센이 지키는 리버풀은 공격진과 미드필더진, 수비진 모두가 유럽 최강 수준인 팀이었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팀의 주축이 된 한센은 유럽 최고의 수비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으며 전성기를 보낸다.
그러나 1984-85시즌 헤이젤 참사의 영향으로 당사자인 리버풀 FC뿐만 아니라 유수의 잉글랜드 강팀들이 5시즌간 유럽대항전에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 그야말로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 그러나 그런 상황 속에서도 한센은 필 닐에 이은 팀의 주장이 되어 팀을 잘 이끌었으며, 리그와 FA컵에서 계속해서 타이틀을 따낸다.
계속 순조롭게 커리어를 쌓아가던 한센은 1988-89시즌 프리시즌에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의 경기에서 왼쪽 무릎이 빠지는 부상을 당했다. 해당 시즌에 한센은 리그 6경기, FA컵 2경기밖에 소화하지 못했다. 출전한 FA컵 두 경기는 모두 중요한 경기였는데, 하나는 결승전이었고, 하나는 준결승전이자 구단 역사상 최악의 참사였다. 한센은 준결승전 경기가 시작된 지 6분만에 동료 선수들과 함께 경기 포기를 선언했고, 이 사고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장례식에 12회 참석했다. 본인이 자서전을 통해 회고하길, 힐스버러 참사 후 몇 달 동안의 기간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암울한 시기였다고 한다.
한센은 1985년부터 리버풀의 주장이었지만, 1989년 참사 당시 주장 완장을 차고 있던 것은 공식적으로는 부주장이었던 로니 웰런이었으며 FA컵 결승전에서 3-2로 지역 라이벌 에버튼 FC를 꺾고 우승컵을 들어올렸던 선수 역시 한센이 아닌 로니 웰런이었다. 두 경기 모두 한센이 선발출전했으나 완장은 로니 웰런이 찼던 것이다. 이후 한센이 팀을 떠나지 않았음에도 불구, 계속해서 로니 웰런이 주장 완장을 차고 경기에 나오게 된다. 한센은 웰런이 주장 완장을 계속해서 차는 것에 대해 아무런 반대도 하지 않았다.
1989-90시즌에는 부상에서 돌아와 또다시 리그 우승을 이끈다. 하지만 부상은 계속해서 악화되었고 한센의 체력에 악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1990-91시즌에는 부상이 아주 심해져 어떤 공식 경기에도 출전할 수 없었다. 결국 케니 달글리시 감독이 떠난 지 1달만인 1991년 3월, 공식적으로 리버풀 FC에서 은퇴를 선언한다.
그의 뛰어난 업적과 활약덕에 한센은 달글리시 감독의 후임자로 여겨졌다. 그러나 한센은 리버풀의 주장으로서 받았던 압박감에 대해 이야기하며 축구 코치의 길로 들어서지는 않을 것이라고 답했다.[2]
{{{#ffffff 스코틀랜드 3인방}}} |
한센은 리버풀에서 1988-89시즌만 빼고 1977-78시즌부터 1989-90시즌까지 빠짐없이 주전으로 활약하며 리그 8회 우승, 유로피언컵 3회 우승, 2회의 FA컵 우승과 4회의 리그컵 우승을 달성했다. 한센은 리버풀에서의 14시즌동안 단 3시즌만 빼고 모든 시즌에 한 개 이상의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리버풀에서의 기록은 13시즌간 620경기 출전, 14골 19어시스트
3. 국가대표 경력
앨런 한센의 현역 시절 스코틀랜드 축구계는 그야말로 황금기였다. 1960년대에 데뷔한 빌리 브렘너를 시작으로 공격과 수비에 걸쳐 엄청난 수준의 선수들이 계속해서 쏟아져나왔으며, 당장 리버풀 FC의 최전성기를 이끈 선수들도 스코틀랜드 국적의 케니 달글리시, 그레이엄 수네스, 그리고 한센이었다.
23세 이하 대표팀에서도 주축이었던 한센은 1979년 5월 19일 카디프 니니언파크에서 열린 웨일스와의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경기에서 스코틀랜드 성인 대표팀 선수로 데뷔했다.
마라도나를 상대하는 한센[3] |
1979년 6월 2일 글래스고 햄든파크에서 월드컵 챔피언 아르헨티나와의 친선경기가 한센의 두 번째 스코틀랜드 경기였다. 이날은 30년만에 찾아오는 기록적인 무더위 속에서 경기가 진행되었고, 햇볕의 맹렬한 세례를 받던 6만여 명의 관중들은 만 18세의 디에고 마라도나가 갖가지 트릭을 선보이며 자신의 첫 국가대표 득점을 기록하고 스코틀랜드 팀 전체를 농락하는 것을 보았다. 한센 역시 별 수는 없었다. 2007년 인터뷰에서 한센은 마라도나에 대해 "내가 맞닥뜨린 최고의 선수였다. 그는 18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실상 상대할 수 없었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었다."라고 평했다.
중앙 수비 파트너 윌리 밀러와 함께[4] |
1982년 스페인 월드컵에서 한센은 스코틀랜드 대표팀으로 출전했다. 스코틀랜드는 역사상 최강의 스쿼드를 뽐내며 기세등등하게 경기에 나섰다. 브라질, 소련, 뉴질랜드와 같은 F조에 편성되었고, 황금 사중주를 뽐내던 브라질만 제외하면 스코틀랜드가 객관적인 전력이 F조에서 가장 좋았기 때문에 무난히 본선 토너먼트에 진출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첫 번째 경기인 뉴질랜드전에서는 예상대로 5-2로 대승을 거두었다. 브라질과의 경기에서도 예상대로 지쿠, 오스카, 에데르[5], 파우캉에게 한 골씩 얻어맞으며 패했다. 스코틀랜드는 다음 라운드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소련과의 경기에서 승리를 거두어야 했다. 승점은 2점[6]으로 같았지만 골득실에서 소련이 2점 앞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제골은 스코틀렌드의 조 조던이 넣었다. 후반전 들어서 소련의 주장 알렉산드레 치바제가 동점골을 넣었고, 경기는 계속해서 80분까지 진행되었다.
스코틀랜드 수비진의 뼈아픈 실수 |
그리고 경기 85분경, 한센이 중앙 수비 파트너 윌리 밀러와 수비 과정에서 충돌했고 소련의 빠른 공격수 라마즈 셴겔리아가 이를 놓치지 않고 찬스를 살려 골키퍼까지 제치고 역전골을 넣었다. 스코틀랜드의 캡틴이었던 그레이엄 수네스가 2분만에 동점골을 집어넣었지만 승부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 결국 스코틀랜드와 소련은 2-2로 무승부를 기록했다. 1승 1무 1패를 기록한 스코틀랜드와 소련의 승점은 같았지만 득실차에서 2점이 밀리며 결국 스코틀랜드가 본선 토너먼트 진출에 실패한다. 한센 역시 짐을 싸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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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거슨의 선택에 의해 한센보다 우선적으로 대표팀에 발탁된 에버딘 FC의 중앙 수비 듀오, 윌리 밀러와 알렉스 맥리시 |
1986년 월드컵을 앞두고 알렉스 퍼거슨이 이끄는 에버딘 FC에서 중앙 수비수 듀오 윌리 밀러와 알렉스 맥리시의 파트너십이 형성되었다. 두 선수의 국적은 모두 스코틀랜드였고,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 조크 스타인 감독의 갑작스러운 사망 이후 스코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을 맡게 되었다. 본인이 이끄는 클럽팀의 조합을 깨고 싶지 않았던 퍼거슨은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때 한센을 대표팀에서 떨어뜨렸다. 한센은 1985-86시즌[7] 자신의 폼이 최고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결정에 불만을 품었다. 한센은 퍼거슨의 결정 이후로 스코틀랜드 대표팀에서 자주 뛰지 않았고, 종종 선수단에서 탈퇴했다. 참고로 1986년 한센이 없는 스코틀랜드 대표팀은 0승 1무 2패라는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다. 한센은 1987년 아일랜드와의 경기를 마지막으로 더는 국가대표팀 경기에 나오지 않았다.
국가대표팀에서는 총 26경기를 뛰는 동안 퇴장은 물론이고 경고조차 단 한 차례도 받지 않는 깔끔한 수비를 펼쳤다. 골은 기록하지 못했다.
4. 플레이 스타일
역사상 최고의 리베로 중 한 명인 칠레의 엘리아스 피게로아와 플레이 스타일이 정말 비슷했던 선수로, 수비라인의 리더 역할을 도맡아 하는 리베로였다. 수비 조율 능력이 뛰어났고 빌드업에 아주 능했으며 롱패스 능력이 발군이었다. 경기 중 갑자기 오버래핑하여 어시스트를 기록하거나 득점하기도 했다. 수비적인 부분에서도 이렇다할 약점이 없었으며, 파울을 범하지 않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큰 덩치를 가져 느릴 것 같지만, 스피드가 상당히 빠르다. 뛰는 모습을 보면 자친토 파케티가 연상될 정도이다. 큰 키를 이용한 공중볼 다툼에도 능했다. 내로라하는 타겟맨들조차 188cm의 거구이면서 점프력까지 훌륭한 한센을 피해 다녔다.
5. 기록
5.1. 대회 기록
- 파틱 시슬 FC (1973~1977)
- 스코티시 프리미어리그 디비전 1[8]: 1975-76
- 리버풀 FC (1977~1991)
5.2. 개인 수상
- PFA 올해의 팀: 1981-82, 1982-83, 1983-84, 1985-86, 1987-88, 1989-90
- PFA 세기의 팀: 2007
-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 2006
- 스코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 2007
- 풋볼 리그 레전드 100인: 1998
6. 여담
- 현역 시절 유럽 최고의 수비수로 이름을 날렸을 만큼 엄청난 선수였는데, 정작 본인은 어린 시절 이마를 다치고 2차례의 참사를 겪으며 축구라는 운동 자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하 내용은 그가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이다."골프선수가 되고 싶었으나 체육대학교에 들어가는 데에 실패하여 축구선수가 되기로 했다.""14년동안 플레이하면서 정신적인 충격을 많이 받았다. 나는 리버풀에서의 마지막 시즌을 진행하면서 다시는 축구계에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고 결심했고, 그 결정을 후회한 적이 없다.""나는 단 한 번도 축구 감독이 되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나는 내 머리를 검게 유지하고 싶었다.[9]"
- 1995년에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이끄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에 대해 개인적인 예측을 한 적이 있는데, 이 예측이 들어맞기는커녕 제대로 틀려서 이 발언으로 잠시 유명세를 얻었다. 어떤 예측이었냐면, "You'll never win anything with kids.", 즉, '어린 선수들만 데리고는 아무것도 이뤄낼 수 없을 것'이라는 예측이었다. 그 어린 선수들은 바로 그 시즌 뉴캐슬 유나이티드를 제치고 리그에서 역전 우승을 이루었고, 4년 후 트레블을 이뤄냈다. 나중에 한센 자신이 이에 대해 다시 언급했는데, 그 내용인즉슨, "틀리는 사람들아, 틀릴 거면 이렇게 제대로 틀려라(...)"
- 2024년 6월, 심각한 병이 생겨 병원에 입원하였고, 위독하여 리버풀과 많은 관계자들의 응원이 이어졌다. 다행스럽게도 2주 뒤, 병을 회복하여 퇴원하였고, 퇴원 3주 뒤에는 골프장에서 골프를 치는 건강해진 모습을 비추었다.
7. 한센에 대한 언사
프리미어리그 출범 이전 최고의 수비수는 아마 바비 무어일 것이다. 그리고 내가 본 수비수 중 최고는 앨런 한센이다. 그러나 프리미어리그의 시대에서는 리오 퍼디난드가 최고다. 그는 '우아함을 가지면서 강한 수비력을 보여주는 선수'에 가장 근접했다.
롭 드레이퍼
롭 드레이퍼
앨런 한센은 리버풀에서 전성기를 맞았던 시절에 팀의 수많은 영광을 함께했고, 잉글랜드 리그의 역사를 빛낸 모든 스코틀랜드 선수들 중에서 가장 많은 개인상을 받았다. 그는 축구 역사상 가장 세련된 센터백 중 한 명이다.
제프 파월[10]
제프 파월[10]
[1] 스코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A매치 두 경기를 치른 선수로, 현역시절 포지션은 라이트백이었다. 파틱 시슬의 주전 멤버였으며, 1970-71시즌에 2부 리그에서 우승해 1부 리그로 승격하는 데에 기여했다. 같은 시즌에 명선수 지미 존스톤이 버티고 있던 셀틱 FC와의 스코틀랜드 리그컵 결승전에서 4-1로 승리해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동생 앨런이 입단한 후, 날이 갈수록 세계적인 선수가 되어가는 동생과 자신을 비교하며 심적으로 힘들어했다.[2] 특히 주장으로서의 마지막 시즌때는 리버풀 어디서든 승점 3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어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으며, 토요일 경기 직전에 화장실을 45번이나 가곤했다며 리버풀의 주장으로서 받았던 정신적인 피로에 대해 이야기했다.[3] 등번호 6번의 선수가 앨런 한센이다.[4] 오른쪽이 한센이다.[5] 에데르는 이 대회에서 그야말로 원더골 제조기였는데, 소련과의 경기에서 나온 엄청난 파워의 원조 독수리 슛과 스코틀랜드전에서 골키퍼 앨런 러프를 얼어붙게 만든 대각선 칩슛이 그것이다.[6] 당시에는 승점 제도가 지금과 달랐다. 승리시 2점, 무승부시 1점, 패배시 0점이었다.[7] 이 시즌 리버풀은 리그와 컵을 우승하며 더블을 기록했다.[8] 2부 리그[9] 계속 고민하느라 빨리 늙어가는 것이 싫다는 의미.[10] 스코틀랜드와 영국 국적의 모든 선수들을 포함하는 역대 베스트 XI의 일원으로 한센을 선정하며 덧붙인 코멘트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