론 예이츠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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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 예이츠의 기타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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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e,#191919><colcolor=#000,#e5e5e5> 스코틀랜드의 前 축구선수 | ||
론 예이츠 Ron Yeats | ||
본명 | 로널드 예이츠 Ronald Yeats | |
출생 | 1937년 11월 15일 | |
스코틀랜드 애버딘 | ||
사망 | 2024년 9월 6일 (향년 86세) | |
국적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스코틀랜드| ]][[틀:국기| ]][[틀:국기| ]]) | |
신체 | 188cm, 79kg | |
직업 | 축구선수 (센터 하프 / 은퇴) 축구감독 | |
소속 | <colbgcolor=#eee,#191919><colcolor=#000,#e5e5e5> 유스 | 애버딘 라즈 클럽 (1955~1957) |
프로 | 던디 유나이티드 FC (1957~1961) 리버풀 FC (1961~1971) 트란메어 로버스 FC (1971~1974) 스탈리브릿지 셀틱 FC (1975) 배로 AFC (1975~1977) → LA 스카이호크스 (1976 / 임대) 산타바바라 콘도르스 (1977) 폼비 FC (1977) 릴 FC (1977~1978) | |
감독 | 트란메어 로버스 FC (1971~1974) 배로 AFC (1975~1977) 산타바바라 콘도르스 (1977) | |
기타 | 리버풀 FC (1986~2006 / 수석 스카우트) | |
국가대표 | 2경기 (스코틀랜드 / 1964~19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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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코틀랜드 국적의 前 축구선수. 빌 샹클리 시절의 리버풀 FC에서 활약했다.2. 클럽 경력
예이츠는 고향 애버딘의 유스 클럽 애버딘 라즈 클럽에서 축구를 시작했다. 1956년 그는 스코틀랜드 하이랜드 리그 소속의 앨긴 시티에 트라이얼을 봤으나 계약을 제안받지 못했고, 이후 1957년 당시 스코틀랜드 2부 리그 소속이었던 던디 유나이티드에 입단하게 되었다. 예이츠는 던디에서 뛰던 도중 징집명령을 받고 군대에서 복무를 하기도 했으나 제리 커 감독이 부임한 이후 팀의 핵심 선수로 여겨졌고, 구단의 적극적인 제대 요청에 의해 복귀되어 1959-60 시즌 리그 우승과 승격에 기여하게 되었다. 다음 시즌인 1960-61 시즌에도 예이츠는 훌륭한 경기력을 선보이며 팀을 1부 리그 중위권에 정착시켰다.1961-62 시즌, 본격적으로 잉글랜드 풋볼 리그 정복을 꿈꾸던 빌 샹클리 감독의 리버풀은 스코틀랜드의 신성이던 예이츠의 잠재력을 알아보고 그에게 계약을 제시하였고, 예이츠는 안필드에 입성하게 되었다. 당시 중앙 수비수로서 6.2피트의 건장한 체격을 갖추고 있던 예이츠는 2만 파운드의 이적료를 발생시켰고 팀의 리더를 찾고 있던 샹클리는 예이츠를 즉각 팀의 주장으로 임명했다. 샹클리의 리버풀은 당시 혁신적인 리빌딩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1961년의 이안 세인트 존과 예이츠의 영입은 클럽의 역사적인 '전환점'으로 묘사되었을 정도로 중요한 영입으로 간주되었다.[1] 예이츠는 1961년 8월 19일, 브리스톨 로버스와의 리그 경기에서 데뷔전을 치렀으며, 첫 시즌 동안 내내 견고한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팀을 8년만의 1부 리그 복귀로 이끌었다.
거한으로 이름을 날렸던 론 예이츠 |
이후 예이츠는 풋볼 리그 최고의 수비수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1963년 11월 23일 올드 트래포드에서 열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리그 경기에서 데뷔골을 터트렸고, 이후 거인이라는 별칭을 얻으며 리버풀의 수비를 주장으로서 단단하게 메꾸었다. 리버풀은 예이츠의 리더십에 힘입어 1963-64 시즌 고대하던 리그 우승 트로피를 다시 들어올렸고, 그 다음 시즌인 1964-65 시즌에는 리즈 유나이티드를 꺾고 사상 최초의 FA컵 우승을 달성했다. 해당 시즌 예이츠와 리버풀은 유러피언컵 준결승에서 인터 밀란을 상대로 석패하긴 했으나 최초로 최상위 유럽 대항전에 나서서 클럽의 존재감을 유럽 무대에도 유감없이 선보였다. 1965-66 시즌에도 예이츠는 탄탄한 수비를 이어가 리그 우승을 이끌었으며, 컵위너스컵 결승행도 만들어 냈다. 그 다음 시즌인 1966-67 시즌에는 요한 크루이프의 아약스를 만나 석패하긴 했으나 예이츠는 당시 크루이프를 상대로 터프한 수비를 선보이며 많은 관중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1970년대로 들어서며 샹클리는 60년대 중흥을 이끌었던 선수단을 완전히 개편하기를 원하고 있었고, 커리어 말기로 진입하기 시작한 예이츠도 예외는 아니었다. 1969-70 시즌으로 들어서면서 예이츠는 지속적인 허리 통증을 겪었고 경기에 출장하는 빈도 수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에 예이츠는 1971년을 마지막으로 주장직을 내려 놓고 454경기를 끝으로 정들었던 리버풀을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거인으로 불리며 리버풀 최초의 전성기를 쌓았던 예이츠의 위업은 많은 안필드 관중들에게 기념비적인 기억으로 남게 되었고, 당대까지 리버풀 역사상 최고의 센터백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이후 예이츠는 트란메어 로버스에 선수 겸 감독으로 부임하여 약 100경기 가까이를 뛰었고, 스탈리브릿지 셀틱에 입단하여 잠깐의 시간을 보냈다. 이후 배로에 선수 겸 감독으로 있었고, LA 스카이호크스 임대를 거쳐 산타바바라 콘도르스에서도 섬수 겸 감독을 지냈다. 이후 폼비와 릴에서 잠깐의 시간을 보내다가 선수 생활을 은퇴했다.
3. 국가대표 경력
리버풀에서의 성공적인 커리어에도 불구하고 스코틀랜드 국가대표로 단 2번의 국가대표 경기를 치렀다. 당시 예이츠의 실력을 따졌을 때 놀라울 정도로 적은 출장 수인데, 당시에는 스코틀랜드 리그에서 뛰던 수비수들이 국가대표 팀에 합류하고 타 리그 수비수들은 배제되는 경향이 짙었던 것이 이유였다.4. 은퇴 후 말년
2003년 리그 컵 우승 후 선수단과 함께[2] |
선수 커리어를 완전히 종료한 뒤에는 약 10여년간 축구계를 떠나있다가 케니 달글리시 당시 리버풀 감독의 제안으로 1986년에 리버풀로 다시 복귀하여 스태프진에 합류, 스카우터로 활약을 펼쳤다. 그는 2006년 5월까지 20년간 구단에 필요한 인재들을 발굴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다수의 선수들을 배출시켰다. 예이츠는 리버풀에 대한 다년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2002년에는 구단에서 주최하는 빌 샹클리 기념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빌 샹클리 기념상 수상식에서[3] |
2005-06 시즌 리버풀의 FA컵 우승 이후 축구계에서의 커리어를 완전히 종료한 뒤에는 종종 스코틀랜드와 리버풀 관련 행사에서 얼굴을 비추었다.
2024년 1월 알츠하이머로 투병하고 있음이 알려졌고, 9월 6일 향년 86세로 사망했다.
5. 플레이 스타일
당대에는 상당한 신장이었던 188cm의 거한으로, 거대한 체구를 자랑하는 전투적인 왼발잡이 센터백이었다. 스코틀랜드 태생에 당대 풋볼 리그를 대표하던 센터백이었던 만큼 터프하고 강인한 수비를 펼치는 것으로 명성이 자자했으며, 샹클리 호의 초창기 주장직을 오래 동안 역임했을 만큼 수비진에서 상당한 리더십을 발휘하는 유형의 선수였다. 위협적인 체구에서 나오는 압도적인 제공권과 거친 대인수비로 인해 거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으며, 오른쪽 센터백을 맡았던 토미 스미스와 함께 상대 공격수를 묻어버리는 수비로 잉글랜드를 평정했다. 스미스에 비해 발밑은 비교적 좋지 못했지만 큰 체구에도 발이 상당히 빨라 종종 레프트백을 소화하기도 했다.6. 대회 기록
- 리버풀 FC (1961~1971)
- 풋볼 리그 퍼스트 디비전: 1963-64, 1965-66
- 풋볼 리그 세컨드 디비전: 1961-62
- FA컵: 1964-65
- FA 채리티 실드: 1964, 1965, 1966
- LA 스카이호크스 (1976)
- 미국 축구 리그: 1975-76
7. 여담
- 프로 축구 구단에 입단하기 이전에는 도축장에서 일하며 축구의 꿈을 키웠다. 이후 도축업자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거대한 체구에 터프한 플레이 스타일에 겹쳐져 오히려 더 공포스러운 이미지로 각인되었다고 한다.
- 상대 공격수를 터프하게 몰아 붙여 아무 것도 못하게 만드는 특유의 플레이 스타일에 의해 상대 팀의 서포터들에게는 악명이 높았다. 최대 라이벌 에버튼 팬들의 당시 응원가 'Royal Blue Mersey'의 '우리는 빌 샹클리를 싫어하고, 우리는 세인트 존을 싫어해. 하지만 우리는 무엇보다도 빅 론을 제일 싫어해.'라는 가사가 이를 반증한다.
- 빌 샹클리가 예이츠와 이안 세인트 존을 데려오며 '완벽한 계약'이라고 자평했고, 후에 '리버풀의 시작'이라는 평가를 내린 것으로 유명했다. 심지어 샹클리는 예이츠를 영입했을 당시 기자들을 초대해 예이츠를 직접 기자들 사이로 걷게 하며 '6피트2짜리 거구로 힘이 센 황소 같은 선수다. 산과 같은 남자.'라며 소개했다.
- 영입 당시 빌 샹클리와 나눈 대화가 유명하다. 샹클리가 예이츠를 보고 "맙소사, 키가 7피트(210cm)는 되나본데."이라고 하자 예이츠가 "아뇨, 저는 한 6피트 정도 됩니다."라고 답했고, 샹클리가 "글쎄다, 나한테는 7피트 가까이 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예이츠가 리버풀이 지도에서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샹클리에게 리버풀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자 샹클리는 "리버풀은 1부 리그에 있다."라고 답했는데, 당시 리버풀은 2부 리그에 있었기에 예이츠가 리버풀은 아직 2부 리그 아니냐고 반문하자 샹클리는 "너와 함께면 이제 곧 1부 리그에 간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 빌 샹클리 감독이 팀의 유니폼을 올-레드 색상으로 바꾸는 것을 고려했을 때, 예이츠에게 유니폼을 입혀본 뒤에 결정했다고 한다.
"그(샹클리)는 온몸을 붉은색으로 물들이는 게 상대에게 위압감을 가져다줄 것이라 생각했다. 어느 날 그는 드레싱 룸으로 들어와서 론 예이츠에게 빨간색 하의 한 벌을 건네더니, "이거 한 번 입어봐라. 어떤지 좀 보자." 라고 했다. 로니가 빨간 바지를 건네 받고 챙겨 입자 그는 "오, 로니, 장난 아니게 멋진데? 놀라워. 키가 2미터는 돼 보이네."라고 했다. 그 모습을 본 내가 제안하길, "아예 양말도 빨간색으로 해 버리죠? 모두 빨간색으로 하고 나가요." 샹클리는 찬성했고, 그것이 리버풀의 새로운 상징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 이안 세인트 존.[4] 그의 자서전에서.
- 이안 세인트 존.[4] 그의 자서전에서.
- 맨체스터 시티의 당대 공격수이자 나중에 감독이 된 조 로일은 예이츠가 가장 어려운 상대였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론 예이츠는 직선으로 달렸을 뿐인데, 공격수들은 튕겨져 나가야했고, 공이 없을 때도 그를 피하려고 계속 움직여야 했다."라고 말했다. 이에 예이츠는 "나는 6피트 2인치짜리 바위였으니, 내가 누군가에게 태클을 걸었을 때 상대는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태클에 관한 한 더럽진 않았다."라고 후에 말한 바 있다.
- 리버풀의 전설적인 공격수 로저 헌트는 예이츠를 두고, "빅 로니는 내가 본 선수 중 최고의 센터백이며, 그가 팀에 있고 그가 최고일 때, 우리는 우리가 무적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공중에서 그는 대단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그라운드 볼에 약하다고 생각하곤 했지만, 나는 그를 쫓아가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는 주장으로 가장 적합한 사람이었다."라는 말을 남겼다.
- 당대 "우리에게는 최고의 주장이 있지! 모든 감독들이 원하는! 6개의 술 상자를 빅 론 예이츠를 위해 마시자! 빌 샹클리의 자랑과 기쁨!" 이라는 응원가로 유명했다.
- 2009년 4월, 명예 리버풀 시민으로 선정되었다.
[1] 당시 빌 샹클리가 세인트 존과 예이츠를 기자들 앞에서 치켜 세우며 성공적인 선수들이 될 것을 자신있게 공언한 것으로 유명하다.[2] 오른쪽 두 번째 인물[3] 오른쪽 인물[4] 리버풀의 전설적인 스트라이커이자 1980~90년대에 지미 그리브스와 방송에서 호흡을 맞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