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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74년 12월 경부터 1975년 1월 초에 걸쳐 일어난 박정희 정부 초유의 언론탄압 사건. 흔히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라고도 불리는데 미리 계약된 광고들이 모조리 해약되어 광고면이 텅 빈 상태로 나갔기 때문에[1] 이렇게 칭한다.
2. 전개
1974년 겨울부터 동아일보의 광고면이 하나 둘씩 비워지기 시작했다. 당시 광고는 예약제였기에 미리 동판을 만들고 강판하는 과정을 거쳤는데 예약한 광고주[2]들이 돌연 광고를 철회했기 때문이었다.[3] 당시 유력 일간지였던 동아일보는 일주일 치 분량의 광고를 예약받는 환경이었는데 순식간에 일주일 치 광고가 빠지면서 그 자리를 급히 채울 여건이 안 된 것이다. 채우려면 동판을 다시 제작하고 광고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광고거부 이전인 10월 24일에는 동아일보가 아예 나가지조차 못했으며[4] 이에 동아일보 기자들은 그날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하고 투쟁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곧 군사정권의 압력으로 이어졌고 대기업들이 하나둘 광고계약을 취소하기 시작했다.
광고 중단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정확히 말할 수 없으나 대략 1974년 12월 16일부터 큰 광고들이 하나둘씩 사라져 쪼개진 작은 광고들로 대체되기 시작해 사건의 본격적인 시발점이 된 12월 26일자 신문에는 이 사건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백지광고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12월 27일에는 PR팀 명의의 호소문이 신문 3면에 3단통으로 실렸으며 12월 28일부터는 후술될 독자들의 개인광고 행렬이 시작되었다. 12월 30일자에는 독자들의 성원에 감사하는 의미에서 광고 신청자들의 명단을 제일 큰 광고규격인 5단통으로 6면에 실었다. 1975년 1월 1일부터는 신민당, 정의구현사제단 등의 언론탄압 규탄 성명서가 실렸으며 같은 날 실린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익명 격려광고 "언론의 자유를 지키려는 한 시민"을 물꼬로 시민들의 응원 광고가 늘어나기 시작해 1월 3주차경에는 백지광고면이 사라졌다.
유신정권의 사주에 의한 중앙정보부의 탄압이 원인이다. 2008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당시 중앙정보부가 공권력을 발동해 정부에 비판적인 언론을 조직적으로 탄압한 것으로 확인했다고 밝혀졌는데 중앙정보부는 1974년 동아일보와 계약한 광고주들을 불러 광고를 게재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게 한 것으로 드러났다. #
당시 자유언론의 기치를 성실히 수행했던 동아일보는 유신정권에게는 눈엣가시인 존재였던 모양이었는데 광고주였던 기업들에게 은근슬쩍 압력을 넣어 광고를 해약하라고 한 후 모조리 광고가 빠져나갔다. 광고수입으로 벌어먹고 사는 신문사에게는 타격도 그냥 타격이 아닌 셈.
얼마간은 백지로 광고면을 보냈다.[5] 하지만 동아일보 독자들이 자신의 사비를 털어 빈 광고면에 작은 개인광고를 넣기 시작했다. 보통 신문 한 면을 세로로 3.4cm X 15단, 가로로는 3cm X 12단으로 쪼개는데 전면광고가 없던 당시에는 아랫단의 5단 광고, 업계에서는 흔히 5단통이라고 하는 크기의 광고가 가장 큰 광고였다. 통째로 빈 이 공간을 쪼개고 쪼개 한줄이 간신히 들어갈 만한 크기로 독자들이 광고를 낸 것. 다수 공모자들로부터 투자를 받는 크라우드펀딩과 비슷한 방식이다.
1975년 새해가 밝고 빈 지면들은 대다수 시민들의 자비광고로 채워졌다. 정권의 의도와는 다르게 다시 광고면이 채워진 셈. 당시엔 고등학생부터 노인까지 많은 시민들이 광고를 접수했다. 성원에 힘입어 상반기 말에 들어서는 광고 예약이 원궤도에 오르며 회복되었다.
이 신문사 황규인 기자가 쓴 기사에 따르면 자비광고 1호 독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다.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도 1974년에 성금을 모아서 동아일보에 줬다고 한다.#
3. 이후
광고해약사태는 정상궤도로 오르는 듯 했으나 내분은 끊이지 않았다. 1975년 1월에는 자사의 라디오 방송국 동아방송(DBS)[6]의 광고가 철회되는 사건이 발생했다.[7] 결국 그 해 3월 동아일보 경영진은 일부 부서 폐지와 함께 기자를 해고했는데 경비를 절감한다는 목적이었다. 일부 기자들은 동아일보 편집방침과 다르다는 이유로 해직되었고 광고해약사태로 충격을 받은 경영진이 정권 편을 든다고 항의하며 제 발로 나간 기자들도 있었다.[8] 해직 기자들은 동아자유언론투쟁위원회(동아투위)를 결성하였고 이들을 주축으로 13년 뒤인 1988년에 한겨레신문이 창간되었다.다른 한편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도 같이 진행됐는데 1975년에는 해직 기자들이 동아일보를 상대로 '해고처분 무효 확인소송'을 냈지만 1979년 1월 대법원은 '경영상 문제'라며 회사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2001년에 국무총리실 직속 '민주화운동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가 동아투위 사건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했고 2006년에 동아투위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진상규명을 신청하자 위원회는 2년간의 조사 끝에 2008년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에 동아일보 측은 불복하여 2009년 3월 서울행정법원에 진실규명 결정 취소 소송을 내자 2010년까지 1~2심 전부 동아 측이 패소했다가(2009구합11515 및 2010누1370) 2013년에 대법원이 파기환송(2010두22856)을 내려 서울고법으로 돌려졌고 동년 6월 서울행법으로 또 돌려지다가(2013누3896) 2014년 1~2심, 2015년 대법원 모두 동아일보의 손을 들어줬다.(2013구합20974, 2014누4261, 2014두13713)[9]
반면 2009년에 생존한 해직자 및 유가족 등 134명도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걸었다가 2011년 1심 및 이듬해 2심에서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패소당했으나 2014년 대법원이 이들 중 권근술 외 14명은 시효가 아직 유지 중이라고 판단 후 파기환송시켜 2015년 서울고법에서 해직자 14명의 손을 들어줬고 2016년 대법원도 같은 취지로 판결을 내렸다. 이마저도 2018년에 양승태 대법원 사법농단 의혹 사건이 터지면서 재조명됐다.
4. 대중매체에서
- EBS 지식채널 e 2008년 6월 30일 방영분에서 해당 사건을 다룬 적이 있다. 제목은 동아일보 '해직' 기자. 보러 가기
- 7차 교육과정 시절의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도 관련 내용이 짤막하게 실려 있었다.
5. 참고/관련 자료
- 동아일보 광고탄압 사건 조사보고서 -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2008.
-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38회: 자유언론실천선언 (2001.07.13. MBC)
- 인물현대사 제4회: 꺾일지언정 굽히지 않는다 - 동아투위 안종필 (2003.07.18. KBS1)
[1] 당시 동아일보에서는 광고 신청을 촉구하는 문구를 인쇄했다.[2] 대한생명보험, 럭키, 일동제약, 미도파백화점, 오리엔트시계, 삼성전자, 금성사, 태평양화학 등 12~13개사.[3] 이때 미리 제작해 둔 광고동판을 깨부숴 버렸다. 동아일보로서는 피눈물 날 지경.[4] 그 다음날 하루 지난 신문을 배달하게 되었다는 사과문과 함께 배포되긴 했다.[5] 단순히 백지로만 보낸 것이 아니고 광고 신청을 촉구하는 형식의 광고로 당시 전화번호 기준 73-6107~8국으로 연락하라는 내용이었다.[6] 1980년 언론통폐합으로 폐국. KBS에 통합되어 KBS 라디오서울로 개국하여 1991년에 SBS개국 후 폐국되어 SBS 러브FM으로 계승되었다. 또 동아방송이 폐국되면서 동아일보는 2011년 채널A 개국 이전까지 방송 사업에서 철수했다.[7] 이 때문에 일부 프로그램들이 공개녹화를 할 수 없게 되었고 아예 무광고로 프로그램을 진행하거나 완전 폐지를 했으며 더 나아가서는 전체 방송시간마저 단축되는 등 거의 마비 상태였다.[8] 당시 나갔던 사람이 송건호 편집국장이었다.[9] 2010년 진실위 1기가 해산되자 피고인 지위는 안전행정부로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