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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공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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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36대 국왕
혜공왕 | 惠恭王
출생
(양력)
758년 9월 4일[1]
신라 금성
사망
(음력)
780년 4월 (향년 21세)
신라 금성
능묘 미상
재위기간
(음력)
신라 왕태자
760년 7월 ~ 765년 6월 (4년 11개월)
신라 제36대 국왕
765년 6월 ~ 780년 4월 (14년 10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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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운(乾運) / 천운(天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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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후 만월부인 김씨
왕후 신보왕후 김씨, 창창부인 김씨
종교 불교
시호 혜공대왕(惠恭大王)
별호 소제(小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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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여담4. 《삼국사기》 기록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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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라의 제36대 군주이자 사실상 통일신라의 최대 전성기였던 무열왕계 왕가의 마지막 군주.

제35대 경덕왕만월부인 사이의 외아들. 왕비로는 신보왕후(新寶王后)[3]와 창창부인(昌昌夫人)[4]이 있다.

2. 생애

《삼국유사》의 <표훈대덕 설화>에 따르면 경덕왕이 당대 명망이 높던 승려 표훈대덕을 불러 "천제에게 왕자를 점지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요구했다. 표훈대덕은 "천제께서 말씀하시길 딸은 가능하지만 아들은 없답니다"라고 일러주었다. 이에 경덕왕은 "딸을 아들로 바꿔달라"고 천제에게 부탁했는데 이에 천제가 "딸을 아들로 바꿀 수 있으나 그렇게 하면 나라가 위태로울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경덕왕은 끝내 아들로 태어나게 해달라는 태도를 고수하였다. 그렇게 태어난 혜공왕은 본래 여자로 태어나야 할 아이가 남자로 태어나는 바람에 비단 주머니 차기를 좋아하고, 궁녀들과 어울리면서 여자같은 행동을 보였으며, 천제가 말한대로 혜공왕 즉위 시점으로 각종 반란과 기이한 기상 현상들이 목격되었다고 한다. 여자로 태어났어야 할 혜공왕이 남자로 태어났다는 전설은 재위 내내 외척들에게 끌려다니며 무기력했던 혜공왕을 은유한 전설이라는 추측도 있다.

《삼국사기》에는 '건운'이라는 만 기록되어 있는데 경상남도 사천군에서 발견된 비문에는 '천운'(天雲)이라는 또 다른 휘가 기록되어 있다. 대체로 '건'이나 '천'이나 똑같은 의미이며, '하늘의 운을 타고 났다'는 의미로 지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아마도 경덕왕이 직접 지었을 것으로 보이는 이 이름부터 범상치 않다.

경덕왕이 아들을 못 보아 재혼을 해[5] 새로 맞은 왕비 만월부인(滿月夫人)과의 사이에서 늦게 얻은 늦둥이다. 이후 경덕왕은 아들을 낳은 후 불과 8년만에 승하하고 말았는데 이로 인하여 혜공왕은 8세의 나이로 즉위했고, 어머니 경수태후(景垂太后)의 섭정을 받게 된다. 8세라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만큼 그 동안 강화되어온 신라 중대의 왕권도 급격히 약화되기 시작했다. 사실 이는 장기 집권했던 경덕왕 후기부터 조짐이 있었던 귀족들의 권력이 상대적으로 강해지던 현상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고, 혜공왕 대에 이르러서는 그런 현상이 더욱 심화되어 자연스럽게 귀족들의 반란을 불러온 것으로 추정된다.

혜공왕의 집권기 초기였던 768년 김대공과 김대렴 형제가 반란을 일으키자 연달아 신라 전역에서 각간 96명이 서로 군사를 일으켜 세력을 다투게 되는데 소위 96각간의 난이다. 《삼국사기》에는 짤막하게 언급되어 있으나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전국구 스케일의 반란으로 신라 전역이 극도로 혼란스러웠던 시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가을 7월, 일길찬 대공(大恭)이 그의 동생인 아찬 대렴(大廉)[6]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고 무리를 모아 33일간 왕궁을 포위하였다. 임금의 병사가 이들을 토벌하여 평정하고 9족을 모두 죽였다.
《삼국사기》 제9권 <신라본기> 제9 -혜공왕-

7월 3일 대공 각간이 반란을 일으키자, 수도와 5도의 주와 군 등 96각간[7]이 서로 싸워 크게 어지러워졌다. 대공 각간의 집이 망하자 그 집의 보물과 비단 등을 왕궁으로 옮겼다. 신성(新城) 장창(長倉)이 불에 탔다. 사량리(沙梁里)와 모량리(牟梁里)에 있던 역적들의 보물과 곡식도 왕궁으로 날랐다. 난리가 3개월이나 지속되었다. 상을 받은 사람도 제법 많았지만 죽임을 당한 사람도 셀 수 없이 많았다. 표훈(表訓)이 나라가 위태로워진다고 말한 것이 이것이다.
《삼국유사》 제2권 <기이> 제2 -혜공왕-

끝내 김대공을 포함한 반란군을 진압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남산 신성의 장창이 불타는 등 많은 물질적 피해를 입었으며 대아찬 김융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집권 초기인 소년군주 시절 반란이 연달아 일어났다는 점은 왕권이 탄탄하지 못해서 정국이 처음부터 매우 혼란스러웠다는 것을 방증하는 부분이다. 문제는 임금인 혜공왕이 성인이 된 후에도 섭정이었던 어머니 만월부인과 상대등이 된 고종사촌 김양상에게 의지해 그들에게 국정을 모두 맡겨버리고는 본인은 정치를 신경쓰지 않고 주색만 탐닉한 채 사치스럽게 지냈다는 것이다.

이 시기 신라의 중대한 정치적 변화가 있었다면 경덕왕의 관제 개혁 및 한화 정책이 실권자인 김양상에 의해 중단되고 원상복구되었다는 점이다. 이로 미루어보아 관제 개혁 및 한화 정책은 진골 귀족층 사이에서 여론이 안 좋고 반발을 불러일으켰던 것으로 추정된다. 애초에 귀족 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할 목적으로 관제 개혁과 한화 정책이 추진되었으니 귀족들이 좋아할 리가 없다.[8] 결국 혜공왕 때 관제 개혁과 한화 정책이 폐지된 것은 거꾸로 말하면 중앙 집권 및 왕권 강화 정책이 여기서 영원히 멈추게 되었다는 소리다. 물론 이건 경덕왕 대의 녹읍 부활로도 예견된 수순이었다.

일반적으로 신라의 국가 막장 테크시발점이라고 해서 무능한 암군으로 평가받는 혜공왕이지만 혜공왕이 이런 상황을 타개해 보려고 애쓴 흔적이 없지는 않다. 혜공왕 12년의 기록을 보면
"정월에 감은사로 행차해 동해를 바라보았다(행감은사망해)"
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망"은 "바라보다"라는 뜻도 있지만 "제사를 지낸다"는 의미도 담겨있어 학계에서는 보통 이 구절을 "감은사에 행차해 망제를 지냈다"라고 해석하고 있다. 감은사가 보통의 이 아니라는 걸 생각해 보면 의미심장한 내용이라 볼 수 있다.[9] 감은사 행차 다음 달에는 "국학에 나가 강의를 들었다"라는 기록이 이어진다. 국학은 유학의 중심지로 혜공왕이 국학에 나가 강의를 청강한 건 예사로운 일은 아니었던 걸로 보인다. 이는 유학자들과의 연계를 통해 혜공왕이 친정을 시도했을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동국통감》에 의하면 신라판 종묘
"5묘의 신위를 바꾸었다"
는 기록도 존재하는데 이 때 5묘는 미추왕, 진지왕, 문흥왕(김용춘), 태종 무열왕, 문무왕의 다섯 신위를 모셨다. 혜공왕은 진지왕과 문흥왕의 신위를 옮기고 그 자리에 자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인 성덕왕경덕왕의 신위를 모셨는데 이 또한 왕권을 강화시키려는 포석이라 볼 수 있다. 또한 태종 무열왕과 문무왕의 신위는 삼국통일의 공을 감안해 앞으로도 절대 옮길 수 없는 불천지위라고 천명했는데 불천지위의 규정은 혜공왕이 태종 무열왕과 문무왕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는 점을 분명히 하여 자신의 권위를 높이려는 행보였다고 풀이해 볼 수 있다. 실제로 나중에 신라 왕가가 태종 무열왕, 문무왕과 직접적 혈연 관계가 없게 된 신라 하대에도 두 왕의 신위는 계속 5묘에 남아서 우대받았다.[10]

이러한 일련의 행보를 보면 혜공왕은 어느 시점부터 나름대로 어머니와 고종사촌에게서 벗어나 직접 친정하기 위해 시도했을 가능성이 엿보이지만 혜공왕의 이런 마지막 친정 시도마저 실패로 돌아간 것으로 여겨진다. 혜공왕이 이런 행보를 보인 재위 12년의 겨울서라벌지진이 일어났고, 이듬해 3월에도 지진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지진이 일어난 다음 달에는 상대등 이찬 김양상이 혜공왕에게 정치를 극론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이를 두고 학자들은 김양상이 '혜공왕의 친정 시도 때문에 하늘이 노해서 지진을 일으켰다!'라는 주장을 했을 것이라 추정하나 반론도 만만치 않다. 한편으로는 김양상이 상대등이 된 이후 갑자기 당나라에 사신을 엄청 보내는데, 이 역시 당나라에 인정받아서 왕권을 강화시키려는 정책으로 보기도 한다.

김양상이 상소를 올린 6개월 뒤에 이찬 김주원을 시중으로 임명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왕권을 위협하던 김양상을 견제하기 위해 자신의 측근이 되어줄 인물을 요직에 배치해 귀족들과의 싸움에 나서려 했던 것으로 보이나 성과는 없었고, 끊임없이 혼란상이 지속되던 780년 이찬 김지정이 혜공왕의 실정을 비난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혜공왕과 비빈, 혜공왕의 어린 자식들 등 일가가 모조리 몰살당하는 참극이 일어나고, 김지정의 난을 진압한 내물왕계인 상대등 김양상이 스스로 왕위에 올랐는데 일련의 이러한 사건들은 석연치 않은 느낌을 준다. 학계 일각에서는 "김지정이 혜공왕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혜공왕과 대립한 김양상을 겨냥한 것"이라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 《삼국유사》에서는 《삼국사기》와 달리 직접적으로 "혜공왕을 시해한 사람이 김양상"이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김지정의 난을 틈타서 김양상이 혜공왕을 시해하고 왕위를 빼앗은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서 김지정의 난은 사실 혜공왕의 친위 쿠데타 시도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 그러나 김양상이 성덕왕의 외손으로 손자인 혜공왕과는 멀다고 할 수도 있지만 당시에 다른 사람들보다 비교적 가장 가까운 인척 관계이기에 오히려 범왕당파에 가까웠을 개연성이 상당히 높다는 점과 김양상이 자의로 혜공왕 사후 즉위했다면 계속된 양위의 의사 표현과 열조 원성왕이 되는 김경신에게 선덕왕의 왕비(구족부인)가 출궁하는 모습이 나타날 수 없다는 점에서 이러한 해석은 앞뒤가 맞지 않다고 볼 여지가 많다. 선덕왕은 내물왕의 10대손이고, 열조 원성왕은 12대손으로 나오는데 멀리서 나눠져서 내려왔다고 하더라도 선왕의 부인이자 족보상 할머니뻘인 사람을 재물만 주고 내보낸다는 것이 이상하다.

한때는 김지정이 혜공왕을 시해한 것이 더 자연스럽다는 견해가 우세한 적도 있었으나[근거] 여러 논문들을 보면 김지정이 친위 세력으로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살해당했다고 주장하거나 차라리 김경신이 살해했다고 하는 게 더 자연스럽다라고 보는 등 위의 추측은 이미 옛날 학설로 여겨지고 있다. 혜공왕을 끝으로 신라의 중대가 막을 내리는 한편 하대 왕조로 접어드는데 이 때를 시작으로 해서 신라의 하대 왕조는 본격적인 귀족들 간의 권력 쟁탈전의 시대로 들어가게 되어 중앙 귀족들은 리얼 왕좌의 게임을 찍게 된다. 중간중간에 신라는 옛 시절로 회복할 길이 조금이나마 있었으나 그마저도 끝끝내 살리지 못한 채 쇠락의 길로 빠지게 된다.

3. 여담

4.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三國史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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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31권까지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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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혜공왕 본기>

一年夏六月 혜공왕이 왕위에 오르다
一年 죄수를 사면하다
一年夏六月 왕이 태학 박사들에게 상서를 강의하다
二年春一月 해가 2개 나타나다
二年春二月 신궁에 제사 지내다
二年春二月 암소가 다리가 5개인 송아지를 낳다
二年春二月 강주에서 땅이 꺼져 연못이 되다
二年冬十月 하늘에서 북소리가 나다
三年夏六月 지진이 일어나다
三年秋七月 에 사신 김은거를 보내 책봉을 청하다
三年秋九月 김포현의 이삭이 모두 이 되다
四年 혜성이 나타나다
四年 에서 왕과 왕의 어머니를 책봉하다
三年夏五月 죄수를 사면하다
三年夏六月 서울에 천둥이 치고 우박이 내리다
三年夏六月 큰 별이 황룡사 남쪽에 떨어지다
三年夏六月 우물과 샘이 모두 마르고 호랑이가 궁궐에 들어오다
三年秋七月 대공과 대렴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다
三年秋九月 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三年冬十月 신유를 상대등으로 삼고, 김은거를 시중으로 삼다
五年春三月 임해전에서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다
五年夏五月 누리의 재해가 있고 가뭄이 들다
五年夏五月 백관에게 인물을 천거하도록 명하다
五年冬十一月 치악현의 쥐가 평양을 향해 가다
五年冬十一月 눈이 내리지 않다[16]
六年春一月 서원경에 행차하며 죄수들을 사면하다
六年春三月 흙비가 내리다
六年夏四月 왕이 서원경에서 돌아오다
六年夏五月十一日 혜성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다
六年夏六月二十九日 호랑이가 집사성에 들어오다
六年秋八月 김융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죽임을 당하다[17]
六年冬十一月 서울에 지진이 일어나다
六年冬十二月 정문을 시중으로 삼다
八年春一月 당에 사신을 보내니 당대종이 관직을 주다
九年夏四月 당에 사신을 보내다
九年夏四月 당에 사신을 보내다
十年夏四月 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十年秋九月 김양상을 상대등으로 삼다
十年冬十月 당에 사신을 보내다
十一年春一月 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十一年春三月 김순을 시중으로 삼다
十一年夏六月 당에 사신을 보내 조회하다
十一年夏六月 김은거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죽임을 당하다
十一年秋八月 염상이 정문과 반역을 꾀했다가 죽임을 당하다
十二年春一月 관직의 이름을 모두 옛 것으로 회복시키다
十二年春一月 감은사에 행차하여 망제를 지내다
十二年春二月 국학에 행차하여 강의를 듣다[18]
十二年春三月 창부에 사 8인을 더 두다
十二年秋七月 당에 사신을 보내다
十二年冬十月 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十三年春三月 서울에 지진이 일어나다
十三年夏四月 서울에 지진이 일어나다
十三年夏四月 상대등 김양상이 왕에게 정치를 극론하는 글을 올리다
十三年冬十月 김주원을 시중으로 삼다
十五年春三月 서울에 지진이 일어나다.[19]
十五年春三月 금성이 달에 들어가다.
十五年春三月 백좌법회를 열다.
十六年春一月 누런 안개가 끼다.
十六年春二月 흙비가 내리다.
十六年春二月 김지정이 반란을 일으켜 궁궐을 침범하다
'一年夏四月 왕과 왕비가 반란군에게 살해되다

당나라에 사신을 보냈다는 기록이 많으며 반란도 수 차례 일어났다. 끝내 군주와 왕후[20]는 반란군에게 잡혀 처형당했다.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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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력 7월 23일, 율리우스력 8월 31일[2] 어린 임금이란 뜻에 더해 군주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뉘앙스를 내포한다. 《삼국유사》에선 혜공왕을 정말 비판적으로 바라봤다. "어린 임금이 군주가 된 이후론(표훈대덕 이후론) 성인이 없었다고 한다"며 엄청 깐 것은 덤이다.[3] 기록에 문제가 있는데 《삼국사기》에서 혜공왕의 첫 왕비는 신보왕후이며, 이찬 유성(維誠)의 딸로 나온다. 《삼국유사》에서 혜공왕의 첫 왕비는 신파부인(神巴夫人)이며, 각간 위정(魏正)의 딸이라고 나온다. 역사학계에서는 신보왕후와 신파부인, 유성과 위정이 동일 인물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여기에 추가적으로 경덕왕 3년 시중에 임명되는 유정(惟正)까지 전부 동일 인물이라고도 한다.[4] 각간 김장(金璋, 金將)의 딸. '장'(璋)과 '창'(昌)은 당시 통용이 가능했던 한자이기에 적어도 창창부인의 이름은 김장과 완전히 같다.[5] 다만 사량부인을 폐한 건 단순히 아들을 못 본 것뿐 아니라 일본 기록에도 등장할 정도로 위세를 떨치던 대귀족이던 김순정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는 설도 존재한다.[6] 형인 대공이 동생 대렴보다 관등이 낮다. 그래도 형은 형인지 형이 더 주모자인가 보다.[7] 앞의 일길찬 대공이 각간으로 표시된 것으로 봐서 여기에 나오는 96각간은 이벌찬의 별칭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고, '干'의 관등을 가진 인물 96명이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8] 경덕왕의 한화 정책은 여기서 일단 브레이크가 걸렸지만 신라 하대~고려 시대~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경덕왕 대에 만들었던 한화 지명을 다시 사용하면서 지금 대한민국의 지명 대부분은 경덕왕 대에 만든 한화 지명이 그대로거나 중간에 약간 바꿔서 이어지는 것이 많다. 단순하게 한자가 유입될 시에 발음나는 대로 기술한 지명들을 통일한 것에서 벗어나 호구와 토지 조사 등을 시행하는 대규모 개혁이었을 것이다.[9] 감은사는 문무왕신문왕이 지은 절이며 감은사 - 대왕암 - 이견대로 이어지는 어찌 보면 태종 무열왕계 왕통의 호국 성지라 할 수 있는 곳이다. 혜공왕이 감은사에 행차해서 제사를 지낸 대상은 동해의 용왕이 되었다는 문무왕일 가능성이 높고, 이는 '문무왕의 정치를 하겠다'라는 의지의 표명이었다고 해석해 볼 수 있다.[10] 5묘에 자기들 직계 조상을 넣을 자리가 없다 보니, 애장왕 때 꼼수를 써서 별묘를 따로 만들어서 태종 무열왕과 문무왕의 신위를 별묘로 옮겨버리는데 신위를 묻은 것(매안)은 아니므로 불천위를 어긴 것은 아니기는 하다. 사실 종묘의 영녕전도 이러한 용도로 만든 것이다. 제사는 5대까지 지낸다는 예법에 따라 종묘 정전을 5칸으로 만들었는데 태조의 4대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와 태조 본인이 들어가 있어 이미 가득 차 있었고, 이 상황에서 정종이 승하한 것이다. 원칙으로는 목조의 신위를 매안해야 하나 조정에서는 송나라 황실의 별묘를 전례로 영녕전을 세우고, 그곳에 태조의 4대조와 정종을 모셨다. 태조, 태종, 세종은 불천위로 영구히 정전에 안치했다.[근거] <신라 선덕왕 즉위에 대한 재검토>, <신라의 왕권과 귀족사회>, <신라 혜공왕의 시해와 역사적 평가에 대한 고찰> 등.[12] 당시로서는 남자만 궁중의 관원이 됐고, 도류가 여자라면 기록될 이유도 없다.[13] 어차피 당시에는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던 데다 성소수자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고, 8세기 사람들이 동성애자와 트랜스젠더를 구분해서 기록했을 리도 만무하다. 현대에 들어와서조차 두 개념을 혼동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한데 고대 시대 사람들은 오죽할까?[14] 민애왕의 왕릉이라 전해지는 무덤.[15] 헌덕왕 7년(815)[16] 겨울에 눈이 안 오면 다음해 농사가 타격을 받는다.[17] 앞서 대공과 대렴의 반란 실패 1개월 전에 호랑이가 궁궐에 난입하고, 이번에도 김융의 반란 약 2개월전에 호랑이가 집사성에 들어왔다는 것에서 의미심장한데, 이는 백제 온조왕 13년 春2월 기사에서 王母가 죽을 때에 늙은 할미가 남자로 둔갑하고, 호랑이 5마리가 성 안에 들어왔다.라는 기사와 비슷하다. 이에 일부에서는 온조왕 기록에서 王母<보통 소서노라고 하는데, 《삼국사기》에서는 졸본 부여왕의 차녀라고 한다.>가 실질적인 백제 건국의 主體者였는데, 아들 온조에게 밀리자 갑옷을 입고, 5명의 고위급인사들과 반란을 일으켰다가 아들에게 지고 죽은 기록을 미화시켰다라고도 하는데, 이와 동일하게 보면 대공과 대렴 및 김융은 모두 혜공왕의 측근들로 친위 쿠데타로서 兵變을 일으켜서 1~2개월 정도 집권을 하다가 이후 귀족들의 사병에게 제압되었다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만약에 이것이 사실이라면 《삼국유사》에서 혜공왕 때 대력(大曆) 14년(779)에 미추왕릉으로 찾아온 김유신이 경술년(가장 가까운 때가 770년)에 내 후손이 죄 없이 형벌을 받았다라는 내용과 연결이 가능하다.[18] 태학이었는데, 혜공왕이 국학이라 변경함.[19] 이 지진이 한국 전 근대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지진으로 자주 언급되는 편이다. 당시 기록으로 파악해보면 규모 6.7의 대형 지진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리고 1,200여 년이 지나 거의 동일한 위치에서 지진이 되풀이된다.[20] 혜공왕은 제1비 신보왕후(신파부인)와 제2비 창창부인이 있었는데 여기서 말하는 왕후는 일반적으로 창창부인으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