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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헌 | 자란 | 춘신군 | 이원 | 여청 | }}}}}}}}} |
전국사군자(戰國四君子) 황헐 黃歇 | ||
봉호 | <colbgcolor=#FFFFFF,#1c1d1f>춘신군(春申君) | |
성 | 영(嬴) | |
씨 | 황(黃) | |
명 | 헐(歇) | |
최종직위 | 상방(相邦) | |
생몰 기간 | 음력 | 기원전 ?년 ~ 기원전 23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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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중국 전국시대의 인물이다. 전국사군자중 한 명으로 초나라 고열왕 시절 때의 상방이었다. 전국사군자의 나머지 셋은 모두 왕족인 게 확실하지만, 춘신군의 경우에는 '왕족은 아니고 귀족 출신'이라는 주장[1]과 '춘신군 역시 왕족'이라는 주장[2]이 모두 존재한다.2. 생애
춘신군의 본명은 황헐이며, 고열왕의 아버지 경양왕 밑에서 일하다 진나라가 초나라를 공격하려 할 때 사자로 보내져 소양왕을 설득해 초와 진의 동맹을 결성하는 것에 일조한 대신 후에 고열왕이 될 태자 웅완과 함께 진나라에 볼모로 보내지게 되었다.고열왕의 아버지 경양왕이 병에 걸리자, 소양왕에게 태자의 귀국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이에 황헐은 웅완을 마부로 위장시켜 초나라로 탈출시키고, 자신은 소양왕에게 사실을 고했다. 분노한 소양왕은 황헐을 죽이려고 했으나, 신하들의 만류로 용서했다. 태자는 이미 돌아갔고 이 사람은 태자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 충신으로 살아서 돌아가면 중용될테니 차라리 잘 대접해서 돌려 보내주자는 것.[3]
경양왕 사후 고열왕이 즉위하자, 영윤, 즉 재상에 임명되었다. 그 뒤로 진나라에 맞서 다른 나라와의 연합군을 이끌어 조나라를 구원하고, 노나라를 멸망시키기도 하는 등 여러 방면으로 활약했다. 이후 합종군의 총지휘권을 맡고 진나라를 쳤으나, 함곡관에서 진군에게 대패하였다.
참고로 함곡관 전투에서 춘신군이 진군의 야습에 겁을 먹고 멋대로 도주하여 합종군이 패배했다는 이야기를 믿고 춘신군을 무슨 찌질이 마냥 아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절대 정사의 내용이 아니며 단순히 소설인 《열국지》의 내용일 뿐이다. 게다가 여기에 덧붙여서 이목이 춘신군을 탓하는 이야기도 있는데 이 역시 단순한 소설의 내용일 뿐이며 정사에는 저런 내용이 전혀 없다.[4] 오히려 정사에서는 함곡관 전투에서 패배하긴 했지만 그래도 진 소양왕을 설득하여 진나라와 초나라의 전쟁을 멈추고 반대로 동맹을 성사시킨 데다가, 볼모로 잡힌 태자를 몰래 도망시켰으며, 노나라를 정복하고 초나라의 국력을 회복시키는 등 상당히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묘사된다. 그러니 착각하지 말자. 아쉽게도 실제 함곡관 전투의 기록이 워낙 부실하여 이 전투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한국 위키피디아에서는 《황성통사》를 참조해 그가 신라로 피난왔던 증조부 경수공 덕분에 어린 시절을 신라에서 보냈었다는 기록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중국측 기록인데, 중국에서는 경수공이 한국 황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전해내려오나 정작 한반도에서 황씨의 시조로 전해지는 황락은 기록에 없어 교차검증이 필요하다. 춘신군이 살던 시대에 신라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춘신군은 기원전 244년에 죽었는데 신라는 전신인 사로국이 《삼국사기》에 의하면 기원전 57년에 건국한 것으로 나온다. 따라서 춘신군이 어린 시절을 신라에서 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3. 이화접목
《사기》에 따르면 4군자 중 말년이 가장 비참하다. <초세가>에 따르면 춘신군은 고열왕이 죽은지 얼마뒤 궁궐에서 이원에게 암살당하고, 춘신군 황헐의 일족은 멸족을 당했다.이원이 춘신군을 살해한 이유를 두고 <춘신군 열전>의 기록에 따르면, 고열왕이 후사가 없자 여러 여자를 소개시켜 주었으나 고열왕은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었다. 이원이라는 자의 누이동생인 이언과 성관계를 해서 임신하게 한 뒤 왕에게 넘겼고, 당연히 그 아이는 태자로 책봉되었다. 이때 빈객 중 주영이라는 사람이 "이원은 권력을 노리고 있으니 제가 죽여버리겠습니다" 라고 간언했으나 춘신군은 "내가 걔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별일 있겠냐?" 라고 답했고, 주영은 춘신군의 안목에 실망하며, 이원의 보복이 두려워 춘신군 곁을 떠났다. 고열왕이 죽자 이원은 주영의 예언대로 미리 육성해둔 자객들로 춘신군을 죽이고 그의 가족들을 몰살시켰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원의 누이동생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은 유왕이 되었다. 이것이 이화접목의 고사다.
그러나 이 내용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초세가>에 춘신군이 이원에게 살해당한 기록은 있지만 고열왕 이후 즉위하는 유왕을 시작으로 애왕, 그리고 초나라의 마지막 왕 웅부추까지 모두 고열왕의 아들들이다. 초 유왕과 초 애왕은 어머니가 같아 둘 다 춘신군의 아들일 가능성이 없지는 않지만 부추는 어머니가 달라서 고열왕이 진짜 불임이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참고로 춘신군이 죽고도 그가 살았던 성과 궁궐은 남아있어 사마천이 여기를 방문하기도 했다는데 전국사군자의 일원답게 그 화려함이 대단했다고 기록했다.
4. 대중문화 속의 춘신군
4.1. 하라 야스히사의 만화 킹덤
공식능력치 | ||||
시기 | 무력 | 지휘력 | 지력 | 기타 |
가이드북 | 70 | 90 | 98 | 최후의 전국사군자 |
성우는 우치다 유야.
지력은 작중 이목과 백기 다음으로 높고 악의, 오봉명, 창평군[5]과 동급이다. 전국사군자 중에서는 유일하게 등장한다.[6]
왕기의 사망 소식이 중화전토에 전해질 때 초나라에서 얼굴을 처음 드러냈다. 그 후 이목과의 비밀회담에서 오랜만에 등장한다.[7]
이후 합종군의 맹주를 맡아 진나라를 공격한다. 물론 실질적인 수장은 중화 전토에서 가장 핫한 무장인 이목이고, 본인은 합종군 세력의 균형이나 명망을 감안해 명목상의 지휘를 맡은 것뿐이다.[8] 지휘력이 90으로 상당히 높긴 하지만 합종군에는 내로라하는 명장들이 있고 이목이 합종군 전체를 진두지휘하고 있기 때문에 본인이 하는 일은 얼굴마담 뿐. 춘신군 본인의 표현으로는 '걱정 마라, 실질적인 작전 입안과 지휘는 다 이목이 하고 난 니들 엉덩이나 걷어차는 역할이다.' 라고.(...)
하지만 결국 합종군이 정면공격으로 함곡관을 돌파하는 데 실패하고, 이목이 최를 돌파하는 데 실패하자 합종군을 진나라에서 철수시킨다. 물론 막판에 합종군에서 빠진 제나라에게 빡쳐서 제나라의 몇 개 성을 박살내 버리긴 하지만, 나라 하나를 갈아엎을 규모의 합종군으로 한 일치곤 정말 보잘것없는 실적이다.[10] 그 뒤 합종군 실패의 책임을 지고 정계의 중심에서 얼마간 밀려났다. 이후 고열왕의 첩이 실은 춘신군의 옛 연인이라 고열왕이 얻은 아들이 실은 춘신군 아들이라는 뒷 사정[11]이 있었으며, 그 첩의 오빠인 이원이 보낸 자객에게 암살당했다는 것이 밝혀진다.
살해 당한 이유는 바로 말을 바꾸었기 때문인데 갑자기 고열왕이 사망한 이후로 정신나간 왕제에게 왕위를 물려준다고 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아들이 왕위를 이으면 결과적으로 초 왕실의 핏줄이 끊어지게 될 테고, 춘신군은 왕가의 핏줄을 끊는 것이 암군이 될 왕제가 왕위를 잇는 것보다 훨씬 더 죄가 크다고 여겼다. 왕실의 핏줄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고대의 사고 방식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12]
다만 그러한 이유에 대해 와린조차 그 분이 갑자기 그것이 두려워졌을리 없을것이라며 그 진의 자체를 의심하는 등, 이원에 의해 조작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 사실을 아는 것 자체가 이원과 와린의 대화로 나온게 전부라 춘신군이 정말 그러한 이유로 살해당한것인지, 아니면 이원의 목적에 의해 조작당한것인진 불명. 작품 흐름상 그 내용이 추가로 밝혀질리는 없어 보인다.[13]
임무군을 대머리라고 대놓고 부르지를 않나 오르도보고 멍청이라고 하고 한명이 전사했다는 보고를 듣자 화를 내며 식탁을 걷어차는 등 입이 상당히 거친 편. 비슷한 시기를 다룬 달인전에서는 언변의 달인으로 나온다는 것과는 정반대적인 모습이다. 이목에겐 화만 낸다고 얻어지는 건 없다고 디스당하지만,당시 합종군이 연패를 겪으니 그도 곤란한지 화낸 얼굴하면서도 입다문다.
킹덤 공식문제집에 따르면, 작가는 춘신군의 이름에서 미인의 이미지를 떠올렸기에[14] 약간 나이가 든 꽃미남의 비주얼로 그렸으며, 그의 말투가 험한 것은 이목과의 대비를 의식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래서인지 작중 등장할때 실제론 최소한 50대는 넘었을 것임에도 상당히 젊게 그려진다.[15] 이외에도 춘신군은 작가가 사마천의 사기 중에서도 매우 좋아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전개에 여유가 있었다면 좀 더 캐릭터를 키워보고 싶었다고 한다.
4.2. 만화 달인전
언변의 달인으로 등장하며, 백기의 초 침공을 혀로 막아내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본인은 맹상군 등과 함께 사군자로 불리는 것에 자신이 너무 고평가 된다며 상당히 꺼린다. 시기나 나이나 모두 사군자 중 제일 뒤인데다가 이전까지의 업적 등 모두 삼군자가 월등했기 때문. 그래도 그 백기에게 대단한 담력과 힘을 지닌 인물이라고 평가받기도 한다. 그리고 이후 수십년간 초의 재상으로 지내며 수많은 전선에도 참가하는 등, 결코 그들에 밀리기만 한 인물이 아니다.초와 진의 협상을 위해 초의 태자를 데리고 진에 볼모로 들어가는게 본격적인 등장. 이때 진의 기세를 막기 위해 진왕과 백기의 사이를 이간질하려 교묘한 말솜씨를 이용하지만 진왕은 생각보다 훨씬 담이 큰 인물이라 백기의 엄청난 성장에도 그대로 기용하며 계책이 실패한다. 이후 진으로 온 평원군과 만나는데, 이때까지도 자신을 사군자라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 한다.
이후 독단으로 초의 태자를 몰래 귀국시키고 자신은 죽음을 각오하나, 백기의 예상 못한 성과와 범저의 계략으로 목숨을 건져 초로 돌아간다. 직후 초의 재상이 되었다는 나레이션이 나온다.
한동안 이야기가 조나라 중심으로 돌아가서 잘 나오지 않다가, 장평 대전 이후 붉은 삼협이 초에 원군을 요청하러 갈때 다시 등장한다. 장단이 정신적인 면에 기댄듯한, 이론적인 주장을 펼치는 것에 논리적으로 반박하며 녹슬지 않은 솜씨를 보이고, 그러면서 동시에 항연을 통해 조를 돕게 하는 등 대단한 수완을 보인다.
후에 평원군이 다시 초에 도움을 청하러 오고 모수가 설전을 벌이자, 감탄하며 모수를 칭찬하고 하나의 예술로 까지 평가한다. 모수의 활약으로 조와 초는 명확히 동맹을 맺고 춘신군은 이후 8만의 군사와 함께 조를 구원하는데 성공한다.
신릉군이 군사를 이끌고 함곡관으로 진을 몰아냈을때에도 방난, 항연과 함께 등장해 초의 군사를 이끈다. 진에 오랜 기간 인질로 있었던 경험을 살려 어떻게 함양을 점령할지 작전을 짜는 등 군사적인 면모를 보인다. 먼저 초로 돌아가 군사를 다시 이끌고 오겠다며 전장을 이탈하나, 허무하게도 초왕은 현재 상황에 만족하고 국력을 기르겠다며 더이상의 증원을 취소하게 된다. 결국 신릉군의 공격을 더이상 지원하지 않게 된 여러 왕들의 결정으로 진을 공격할 절호의 기회를 놓치게 되고, 신릉군은 이후 귀환하여 칩거한 뒤 사망한다.
이후 방난과 이목 등을 중심으로 모인 합종군의 일원으로 또다시 등장한다. 이때는 시간이 많이 흘러[16] 머리카락도 많이 새고 늙었지만, 마지막 전국사군자로서 먼저 떠난 삼군의 의지를 관철시키며 활약을 펼친다. 표공과의 전투에서도 죽음의 위기가 있었으나 잘 견뎌내고 공격을 진행한다. 그러나 얼마지나지 않아 황벽과 환의, 양단화에게 공격 당할 위기에 처한다.
아무래도 초기 등장때는 언변 위주로 활약했고, 이후에도 전문적인 무력 위주의 인물은 아니라서 지원 정도의 역할만 하고 있다. 장평 대전 이후 조를 구원할때도 신릉군이 주로 활동했고 이후 신릉군이 직접 함곡관을 공격할때도 지원군과 군사 정도의 역할을 했다. 방난이 다시금 합종군을 이끌때도 초의 일부로 활동할 뿐 그가 중심이 되지는 않았다. 직접 군사를 이끌고 함곡관을 뚫어냈던 맹상군이나 그에 준했던 신릉군에 비해서는 아쉽다면 아쉬운 부분. 하지만 그들과 달리 일국의 재상으로 수십년을 지내며 활약한 점은 분명한 강점이다.
4.3. 삼국지 시리즈
삼국지 12, 13 |
고대무장으로 등장한다.
삼국지 12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81/무력 68/지력 84/정치력 91로 약간 만능형 능력치. 전법은 창군견수
삼국지 13에서도 당연히 등장한다. 능력치는 전작과 같고 전법은 공수지휘, 중신특성은 병참관리. 특기는 상업6 / 문화3 / 순찰6 / 설파8 / 교섭8 / 언변8 / 인덕3 / 견수7 / 수영6 으로 여러 모로 쓸모가 많지만 실제 행적에서 유세나 언변에 뛰어났던 점을 살렸는지 외교 관련 능력이 돋보인다. 특히 부락탈취 특화라서 어중간한 지장 내보내면 마을 순식간에 털린다.
4.4. 중국 드라마 미월전에서
드라마 미월전의 등장인물. 황헌 役
미월의 첫사랑으로 어린 시절 스승 굴원을 따라 궁에 입궁했을 때 주방에서 떡을 훔치던 미월을 도와주면서 친해지게 된다. 미월이 궁에서 쫒겨난 것을 안쓰럽게 여겨 계속해서 찾아가는 등 내색은 안하지만 미월을 여자로서 좋아한다. 미월이 궁에 들어간 이후 젊은이들끼리 지식을 논하는 대회를 위해 입궁해 굴원의 제자답게 여러 명을 논파하며 두각을 나타낸다.
문제는 이 모습을 보고 미인 공주가 첫눈에 반해서 들이대기 시작한 것. 물론 오로지 미월만 바라보는 그는 철벽으로 일관하면서 나름의 예의를 차렸으나, 미인이 미월을 도둑으로 몰아 모함하고 자신을 좋아해서 그랬다는
이후 미월이 월화대에 감금되었을 때는 사방팔방 뛰어다니다가 소재를 알아내고는 그곳으로 단신으로 쳐들어가 병사들과 맞서다가 부상을 입고 죽을뻔하다가 미주 덕분에 살아났다. 쇠약해진 미월을 정성스럽게 돌보며, 왜 이 정도로 자신에게 호의를 보여주는지 묻는 미월에게 월아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여인이니까.라고 답하며 둘의 관계를 확인사살.
그리고 소사명제날 어쩌다 춤을 추게 된 미월과 짝을 맞춰 노래를 부르게 되자 표정관리가 안될 정도로 좋아한다. 그 직후 바로 초회왕에게 미월과 혼인하고 싶다고 청하나 위후에게 저지된다. 이후 위후가 혼사를 진행시켜주겠다고 했을 때는 미심쩍으면서도 두 사람의 관계가 인정받았다고 생각해 기뻐했으나 서로의 사주를 보려고 하니 신부측 생일이 미월과 다른 등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더니... 혼인 상대로 고려된 것은 미월이 아니라 그토록 싫어하는 미인이었다는 것을 알고 기함한다.[17] 그리고 미월이 미주를 따라 혜문왕의 잉첩으로 따라가게 되면서 그는 미주의 도움을 받아 도중에 같이 사랑의 도피를 하기로 계획한다.
그러나 미주의 행렬이 의거왕의 습격을 받고 미월이 붙들리자 구출하려고 의거왕과 일전을 벌이게 된다. 이때 의거왕의 부하가 휘두른 칼을 피하다가 절벽 아래로 떨어져 공식적으로 생사불명 상태에 놓인다. 그리고 어떤 부부에게 발견되어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는 게 확인되었지만...
기억상실증에 걸려서 여긴 어디? 난 누구? 상태에 놓였다(...)
그리고 차라리 그렇게 끝나면 좋았겠지만 미월이 진의 태후로 등극하면서 둘의 관계는 이제 옛 연인이 아니라 정적이 된다.
물론 위에 있는 역사상의 춘신군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훨씬 후대의 인물이라 이 드라마에서는 모두 가상의 설정이다. 미월(선태후)와 춘신군의 활약 시기는 대략 50여년 정도 차이가 난다.[18][19]
4.5. 대진부
작중 초나라 승상으로 등장한다. 초나라는 자기들 이권 보호에만 몰두하는 굴성, 경성, 소성 가문 등 대귀족 기득권층들 때문에 단합이 안되는데, 춘신군은 본인 영지인 수춘으로 천도할 것을 건의하는 동시에 수춘을 국왕 직할지로 헌납하는 등 그나마 초나라에서는 가장 깨어 있는 모습으로 나온다. 그리고 역사대로 상술한 이화접목 내용이 언급되며 초나라의 국상 중 괴한 여러명에서 청동검으로 여러차례 복부를 찔려 매우 비참하게 살해당한다.[1] 명나라 시기 진직(陳直) 등의 견해. 춘신군이 황(黄)씨이고 사기 춘신군열전에 딱히 왕족 출신이라는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귀족 출신이라는 것. 춘추시대인 기원전 648년 무렵 소국인 황(黄)나라가 초나라에 흡수당했는데, 이 때 같이 초나라 귀족사회에 편입된 황나라 공족의 먼 후손이 춘신군 황헐이라는 추측이다.[2] 사기 춘신군열전에는 명확하게 언급되지 않지만, 사기 유협열전을 보면 '근세의 연릉(延陵 = 오왕 수몽의 아들이자 오왕 합려의 숙부 계찰), 맹상(孟嘗), 춘신(春申), 평원(平原), 신릉(信陵) 같은 사람들은 모두 왕의 친족들'이라는 언급이 존재한다. 또한『한비자』의 간겁시신(姦劫弑臣) 편을 보면 '초장왕의 동생 춘신군(楚莊王之弟春申君)'이라고 언급하는 대목이 있다. 물론 초장왕(楚莊王)은 춘추시대 인물로 춘신군과는 수백년 차이가 나므로 그대로는 도저히 말이 안 되지만, 춘신군 왕족설을 지지하는 쪽에서는 이게 '초양왕(楚襄王)의 동생 춘신군'의 오타라고 본다.[3] 황헐이 이렇게까지 한데에는 사실 이유가 충분히 있었다. 초회왕은 경민왕의 조부로 재위 말년에 진나라의 제안으로 맹약을 맺으러 갔다가 억류당해 땅을 내놓을 것을 협박당했고 이를 거절하다가 3년 뒤 사망했다. 이미 한번 전례가 있으니 진나라를 못 믿는게 정상이다.[4] 《사기》 <이목 열전>에는 이 함곡관 전투에 대한 기록이 나오지도 않는다.[5] 이 중 오봉명과 창평군은 가이드북 2 기준.[6] 맹상군과 평원군은 작중 시점 이전에 사망했고 신릉군은 작품 초기 즈음에 생존했을수 있지만, 이미 247년 이후로 두문불출하던 시점이라 등장하지 않는다.[7] 이때 춘신군 휘하의 '흑사'라는 군인이 활을 들고 신에게 독화살을 겨누자 춘신군이 그만두라고 했다. 흑사의 생김새도 그렇고 독을 사용한다는 것이 이후에 등장하는 한나라 장수 성회와 그 부하들과 비슷해 보인다. 아쉽게도 흑사는 함곡관 전투에서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고 춘신군이 사망할 때까지 다시 등장하지 않았다. 어쩌면 나중에 초나라와 진나라의 전쟁에서 등장할지도?[8] 사실 이것은 역사왜곡이다. 사기에서는 초 고열왕이 합종군의 맹주를 맡고, 실질적인 총지휘는 어디까지나 춘신군이 한 것으로 나온다. 게다가 상술했듯이 이목열전에는 이 전투에 대한 기록 자체가 없다.[9] 작중에서도 이름난 장군들이 '이 정도 명성이면 총대장 할만하다'라고 바로 인정해 준다. 전국시대를 수놓은 전국사군자의 마지막 일각이자, 초나라의 재상으로 수십년 활약한 능력을 인정받아 누구도 토를 달지 않는다. 과거 진을 상대로 연합군을 일으켰던 맹상군, 장평 이후 진을 막는데 온 힘을 쏟은 평원군, 마지막으로 함곡관까지 진을 쫓아냈던 신릉군까지 모두가 진에 적대적이며 동시에 활약을 펼쳤기에 춘신군 역시 자연스레 그 연장선상에서 엄청난 명성을 지닌 것으로 그려진다.[10] 사실 작중에서 압도적으로 묘사되는 것과 달리 합종군은 진을 갈아마실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한 군세도 아니었다고 한다. 진나라는 이미 당시에 전국시대 최강이었으며 합종군에 대항해 20만 이상의 대군을 일으켜 방어에 나섰을 정도다.[11] 본래라면 고열왕의 동생이 왕위를 이어받아야 하지만 동생인 왕제군이 나라를 이끌기에는 자질이 없었다. 이원과 와린의 대화에서 잠깐 그 모습이 나오는데... 초점이 없는 눈을 하고 알몸으로 큰 칼을 든 채 사람 시체를 갈고리에 꿰어놓고 알몸인 여자들 머리를 자르고 대신 돼지 머리를 올려놓는 등 제대로 정신이 나간 모습이었다. 이원과 춘신군이 그런 계획을 꾸민 게 이해가 간다.[12] 사실 이건 고대가 아니라 현대에서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는 문제이다. 계급 사회가 타파되었어도 누군가의 핏줄이라는 것에 의해 사회적 지위나 막대한 재산의 소유권이 오가기 때문에 누군가의 자식임을 속이는 행위는 현대에서도 심각한 범죄 행위에 해당한다.[13] 비가 새차게 내리는 날 호위도 없이 홀로 문을 나선 것을 보면 사실상 자살할 의도가 있었던 것처럼 보이지만, 자객의 칼에 맞았을 때 놀라는 모습이나 현장에 있는 이원을 알아보는 모습 등 어느 한 쪽이 죽을 것을 알고있는 사람 치고는 살해당했을 때의 모습이 다소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14] "봄(春)에 얘기하는(申) 너(君)"[15] 춘신군이 역사에 처음 등장한 시기가 아무리 늦게봐도 기원전 273년인데, 이때를 기준으로 잡아도 첫등장하는 241년은 32년이 넘게 차이난다. 심지어 저 첫 기록도 태자와 함께 볼모로 간 것이라 아무리 낮게 잡아도 20대 이상으로 봐야하니 본작에서는 경우에 따라 60대 이상이었을수도 있다.[16] 춘신군이 첫 등장한 시점으로부터 아무리 짧게 잡아도 30년 이상 흐른 시점. 첫 등장을 젊게 잡아도 60대에 가까울 나이다.[17] 위후가 네 혼사를 허락해준다느니 입을 털었으나 그 상대가 미월이라고 말하진 않았다. 계속 이름을 언급안하며 교묘하게 그를 속인 것.[18] 춘신군은 거의 소양왕 영직의 아들뻘이다. 사실상 이 드라마는 춘신군과 그의 할머니뻘 정도 되는 여인과 애정관계를 놓은 것이다.[19] 춘신군은 진 시황제가 즉위하고 10여 년을 더 산 사람이다. 그것도 암살로 인해 죽었는데, 안 그랬다면 더 오래 살았으며, 더구나 시황제의 고조할머니가 드라마 주인공 미월인 선태후인데 비록 드라마이지만 너무 왜곡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