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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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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왕국 튜더 왕조 제2대 국왕
헨리 8세
Henry VIII
파일:Workshop_of_Hans_Holbein_the_Younger_-_Portrait_of_Henry_VIII_-_Google_Art_Project.jpg
1540년대 한스 홀바인이 그린 초상화[1]
왕호 헨리 8세
(Henry VIII)
출생 1491년 6월 28일
잉글랜드 왕국 켄트 그리니치 그리니치 궁전[2]
사망 1547년 1월 28일 (향년 55세)
잉글랜드 왕국 런던 화이트홀 궁전[3]
묘소 윈저 성 세인트 조지 예배당
재위기간 잉글랜드, 아일랜드의 왕
1509년 4월 22일 ~ 1547년 1월 28일
서명 파일:헨리 8세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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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f091f><colcolor=#fff> 이름 헨리 튜더
(Henry Tudor)
신장 188cm, 180kg[4], O형(Rh-)
배우자 아라곤의 카탈리나 (1509년 결혼 / 1533년 무효화)
앤 불린 (1533년 결혼 / 1536년 무효화)
제인 시모어 (1536년 결혼 / 1537년 사망)
클레베의 앤 (1540년 결혼 / 1540년 무효화)
캐서린 하워드 (1540년 결혼 / 1542년 사망)
캐서린 파 (1543년 결혼)
자녀 메리 1세, 헨리 피츠로이(사생아), 엘리자베스 1세, 에드워드 6세
아버지 헨리 7세
어머니 요크의 엘리자베스
형제자매 아서, 마거릿, 엘리자베스, 메리, 에드먼드
장례식 1547년 2월 16일
윈저 성 세인트 조지 예배당
종교 가톨릭잉글랜드 국교회[5]
문장 파일:잉글랜드 국장(1509-1554).svg
Dieu et mon droit
하느님과 나의 권리[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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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평가4. 기타5. 가족
5.1. 조상5.2. 왕비들5.3. 자녀
6. 대중매체에서7. 둘러보기

1. 개요

16세기 잉글랜드 왕국 튜더 왕조 제2대 국왕이자 절대 군주이자 잉글랜드 해군의 아버지이다. 두 번의 대승으로 북쪽의 숙적 스코틀랜드 왕국을 제압하고 훗날 브리튼 섬 통일의 기초를 닦았으며, 수장령을 반포하여 잉글랜드 국교회를 성립시켜 이후 잉글랜드 역사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즉, 단순히 호색한이나 난봉꾼 정도로 기억해서는 절대 안 될 잉글랜드인의 정체성에 큰 영향을 미친 잉글랜드 역사상 중요한 인물이다.

귀족들을 거의 절멸시킨 장미 전쟁을 종식시키고 튜더 왕조를 개창한 헨리 7세요크의 엘리자베스의 차남으로 태어나 형 웨일스 공 아서의 죽음으로 왕좌에 올랐고, 6명의 아내들 중 적자녀 셋만 얻었고 그들이 모두 왕이 되었으며, 파란만장하고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며 수많은 이야기를 남기고 간 문제적 인물이다. 특히 장녀 메리 1세와 차녀 엘리자베스 1세는 정식으로 명실상부한 국왕의 적자로서 왕위에 오른 영국사 최초의 여왕들이라는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으며 아이러니하게도 본인이 가장 편애했던 막내아들 에드워드 6세보다 훨씬 큰 존재감과 족적을 남긴 군주이다.

장미 전쟁으로 완전히 도륙난 플랜태저넷랭커스터 왕조요크 왕조의 피를 모두 이어 받았다.[7] 스페인 트라스타마라 왕실 출신의 아라곤의 카탈리나와의 이혼으로 인해 로마 가톨릭과 결별하고 잉글랜드를 독립시켜, 잉글랜드 국교회[8]를 설립함으로써, 이후 잉글랜드는 물론 유럽 기독교권의 판도 자체에도 무시 못할 영향력을 미친 장본인이기도 하다.

충동적이고 괴팍하기 그지없는 변덕과 불같고 난폭한 다혈질 성격,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킨 잉글랜드 종교개혁, 그와 관련해 국내외에서 벌어진 격렬한 대립, 그리고 10년의 결혼 생활 내내 여섯 명의 왕비들을 마음껏 갈아치우고 두 명의 왕비[9]들을 참수시킨 막장 드라마 이상의 요란하기 그지없는 사생활 등, 재위 기간 (1509년 ~ 1547년) 동안 여러 모로 나라를 뒤흔들 만한 드라마틱한 이야깃거리와 대형 사건사고들을 남겨놓았기에 헨리 8세는 오늘날에도 곧잘 회자되고 여러 창작 매체 등에서 다뤄질 정도로 인지도가 매우 높다. 현재까지도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연구 대상이 되거나 입에 오르내리고 있을 정도로 영국사에서 가장 존재감이 크고 찬반 양론이 극단적으로 갈리고 있는 존재 자체만으로 흥미롭고 논쟁적인 군주이다.

2. 생애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헨리 8세/생애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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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3. 평가


이렇게 적고 보면 헨리 8세가 그냥 정신병자처럼 보이지만, 한때나마 잉글랜드 국민들로부터 해리 왕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나름대로의 인망을 얻어낸 왕이었다. 주변인들과 신하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까놓고 말해서 높으신 분들의 일은 알 바가 아닌 백성들에게는 호탕하고 강력한 왕으로 여겨지기도 했었다.

헨리 8세의 치세는 평가가 많이 갈리지만 잉글랜드가 최초로 열강의 위치에 오른 시기로 통치에선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는다. 그리고 시대의 흐름에 맞춰 귀족들보다는 학식으로 무장한 신규 계층을 등용하여 사회 발전에 이바지했다는 호평도 받고 있다. 토머스 울지 추기경은 푸주간 백정의 아들이었고, 토머스 크롬웰은 대장장이의 아들이었으나 고등교육 하나로 재상에 오른 입지적인 인물이었다.

또한 헨리 8세는 집안에서 놀기만 한 것이 아니라, 프랑스-카를 5세와의 연이은 충돌이나 아일랜드 원정을 비롯해, 당시 잉글랜드에서는 오랜만에 출현한 대외정책과 외교에 굉장히 적극적인 왕이었다.[10] 위에서는 삽질의 연속처럼 표현되어 있지만 헨리 7세가 리처드 3세를 물리치고 즉위하기까지 장미전쟁요크 가문 출신 왕들의 불안정한 치세를 거치며 플랜태저넷 왕가 내의 싸움으로 고통받던 기억이 남아있던 당시 잉글랜드 입장에서 보면, 헨리 8세의 저런 적극적인 대외정책에 대해 잉글랜드 또한 나름대로 국제 정세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열강 대열에 합류했다는 깊은 인상을 받을 만도 했을 것이다. 비록 헨리 8세가 대륙에선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지만 튜더-스튜어트 왕조 시절의 잉글랜드는 이후에도 유럽 정세에 군사적, 경제적으로 계속 관여하며 열강 행세를 하여 유럽에서의 영향력이 강해지게 되는데 그 시초가 어찌 보면 헨리 8세라고도 할 수 있다.

실제로 헨리 8세는 즉위 초부터 선왕 헨리 7세 시절부터 추진[11]되던 해군 증강 정책의 기조를 이어받아 조선 시설을 정비하는 등 해군력 강화에 심혈을 기울였는데 이것이 헨리 8세의 최대 치적으로 꼽힌다. 헨리 8세는 즉위 초 5년 만에 해군의 규모를 선왕 때보다 4배나 증강시켰고[12], 이를 발판으로 유럽에서 잉글랜드 왕국이 열강으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1546년에는 해군청을 신설하여 영국이 해양강국으로 뻗어나가는데 필요한 정책적 발판도 만들어냈다.

이런 의도에서 당시로서는 최첨단 기술을 총동원한 강력한 전함[13]메리 로즈 호를 만들었다. 이 전함을 건조한 목적은 헨리 8세가 프랑스를 침공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심혈을 기울여 만든 메리 로즈 호는 34년 간 전장에서 활약했지만 1545년 솔렌토 만 해전에서 제대로 공격 한 번 못 해보고, 헨리 8세가 보는 앞에서 홀라당 가라앉고 말았다.

훗날 수백 년이 지나서야 인양에 성공했는데 인양해놓고 보니 실로 공을 들인 흔적들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메리 로즈 호의 대포는 당시 유럽 대륙에서 제일가는 대포 장인에게 의뢰해 사정거리가 다른 대포보다 월등히 나은 것이었고, 배의 설계 구조도 과거의 어느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것을 시도해서 어느 배보다도 거대하고 초강력한 전함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었다. 특히 내부에서 온전하게 장궁들이 출수되면서 영국 장궁을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현재 메리 로즈 호의 선체와 유물들은 포츠머스 히스토릭 독야드에 전시되고 있다. 메리 로즈 호와 그 유물들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링크를 참고하자.

메리 로즈 호의 침몰은 솔렌토 만 해전 당시 대포 발사를 위해 열었던 포문을 닫지 않아 열린 포문으로 바닷물이 밀려들어오면서 선체가 중심을 잃고 침몰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대포 포문을 배 밑까지 설치하고, 이 대포가 너무 무거웠던 데다가 너무 많은 인원을 태운 탓도 침몰 원인으로 한 몫 했다. 전문가들은 메리 로즈 호가 위력을 발휘했다면 엄청났을 거라고 추정한다. 무게 중심 불량은 카락선의 구조적인 문제도 있었으며 이 문제를 개선시키기 위해 갤리온으로 발전했다.

메리 로즈 호는 홀라당 가라앉았지만 헨리 8세는 그 외에도 재위 기간 내내 전함 건조에 공을 들여서 헨리 8세가 승하할 때 50여 척에 달하는 신규 전함을 건조할 수 있었다고 한다. 물론 당장 그와 같이 해군을 증강했던 헨리 8세의 목표는 결국 실현되지 못한 대륙 공격이었을지 모르나 이런 해군력 증강과 조선시설의 기반 정비는 결과적으로 그의 딸인 엘리자베스 1세가 스페인의 아르마다를 상대하는데,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훗날 세계 최강으로 불리게 될 영국 해군의 전통 마련의 토대가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외에도 군사적인 면에서 헨리 8세의 공도 꽤나 큰데, 당시 스페인-신성 로마 제국의 군대가 우수한 화기의 운용으로 프랑스를 격파하면서 유럽 최강대국의 자리를 차지하자, 이에 대응하기 위한 화기의 도입과 화기에 대한 대처 방안의 마련에 적극적이기도 했다.[14] 이 일환으로 신개념의 방어 시설을 건축하기도 했는데 원형의 탑들을 두른 독특한 포대를 해안 방어용으로 만들기도 했다. 원형으로 탑을 만든 것은 적의 포격에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헨리 8세의 군사적 중흥이 비록 프랑스스페인 같은 대륙의 강적들을 상대할 때는 투자한 것에 비해 큰 재미를 보지 못했지만, 르네상스의 기술적 진보에서 낙후돼 있었던 스코틀랜드를 상대할 때는 큰 위력을 발휘했다. 1513년엔 잉글랜드가 프랑스와 전쟁 중인 틈을 타서 스코틀랜드에 뒷치기당했지만, 잉글랜드군은 (본인이 지휘한 건 아니었지만) 플로든 전투에서 귀족들을 포함한 스코틀랜드의 병사 1만 명과 제임스 4세를 전사시키고, 수도 에든버러를 약탈했다. 제임스 4세는 헨리 8세의 누나 마거릿 튜더의 남편이었는데 헨리 8세가 자기 누나는 과부에 섭정으로, 조카 제임스 5세는 생후 18개월에 즉위하게 만들어 줘서, 너무 어린 왕에다가 섭정 문제를 놓고 마거릿과 귀족들 간에 벌어진 격렬한 대립 등으로 인해 스코틀랜드는 알아서 내부 권력다툼에 빠져 한동안 잉글랜드에 큰 위협이 되지 않았다. 대신 헨리 8세가 조카 제임스 5세에게는 스코틀랜드를 때려잡고 부왕을 죽인 철천지 원수 그 자체인 외삼촌으로 찍힌 건 당연했지만.

제임스 5세와 스코틀랜드가 여전히 반() 잉글랜드 - 친() 프랑스 정책을 펴자 1542년에 왕비 제인 시모어의 오빠를 파견하여 솔웨이 전투에서 겨우 병력 3천으로 5~6배 많은 스코틀랜드군을 격파하고 제임스 5세는 병사했다. 매형, 조카 다 죽였다. 이로 인해 제임스 5세의 유일한 적자녀인 메리 스튜어트가 생후 9일 만에 스코틀랜드의 여왕으로 즉위하면서 스코틀랜드는 또 한번 정치적 혼란에 빠졌다. 스코틀랜드가 또 대패한 이유는 여전히 각 클랜들을 소집하여 냉병기, 단병전, 닥돌 중심으로 돌아가는 중세적 인프라를 버리지 못한 탓도 있었다.

헨리 8세는 승리의 여세를 몰아 에든버러를 또 한번 약탈하여 싹 다 털어먹고는 스코틀랜드와의 화약에서 자기 아들 에드워드 튜더와 메리 스튜어트의 결혼을 강요했다. 그래서 이 전쟁을 '거친 구혼'이라는 뜻인 Rough Wooing이라고 부른다.

이 무식한 청혼에 갓난 메리 스튜어트는 외가인 기즈 가문이 있는 프랑스로 도망가야 했는데, 기즈 가문은 프랑스 궁정에서 준왕족 급이라 프랑스에서 유년기를 보낸 메리는 왕세자인 프랑수아 2세와 결혼할 수 있었다. 거기다 기즈 가문은 골수 가톨릭이라 성공회 성향의 잉글랜드와는 견원지간이었다. 메리 스튜어트가 성인이 될 때까지 프랑스에서 자랐기에 조약은 지켜지지 않았지만, 2번에 걸쳐 스코틀랜드 병력을 싹싹 털어 먹었기 때문에 이때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의 완전 정복에 거의 성공할 뻔했다.

비록 프랑스의 개입으로 스코틀랜드를 복속시킨다는 전략적 목표 달성은 실패했지만, 이 전쟁을 계기로 스코틀랜드인들은 자국이 잉글랜드와 1대1로 대결하기에는 국력의 차이가 너무나 벌어졌다는 걸 통감하게 되었다. 이는 종교개혁을 통해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양쪽 모두 개신교로 이념적 동지가 되자 스코틀랜드 측에서 더이상 대립을 그만두고, 잉글랜드와 관계를 개선한 다음 결국 연합왕국으로 나아가는 초석을 마련하게 되었다.

1536년 웨일스를 완전히 잉글랜드 왕국에 흡수시켰고, 1541년에는 대대로 아일랜드 총독을 독점하며 반 독립상태였던 킬데어 가문을 소환, 숙청하고 아일랜드 반란을 평정하면서 더블린 의회에서 '아일랜드의 왕' 칭호를 수여받았다. 사실상 브리튼 섬과 아일랜드 섬을 평정하고 대영제국의 기초를 닦은 격이었다. 단, 스코틀랜드의 경우, 헨리 8세 본인 치세에 한해서는 반란에 반응했다는 모양새로 넘어갈 수는 있지만, 웨일즈와 아일랜드를 복속시키고 지배하는 과정에서는 그 악행 때문에 켈트계로부터 두고두고 잉글랜드에 대한 반감을 사게 만드는 업보의 단초를 제공했다. 특히 튜더 왕가의 시조가 웨일즈계인 이상, 웨일즈의 잉글랜드에 대한 불신에 단단히 한 몫했다.

하지만 백년전쟁부터 내려오는 프랑스 영토에 대한 야욕, 스코틀랜드나 아일랜드와의 전쟁 등은 물론이고, 즉위 초기부터 궁전 건축, 연회, 예술 등에 쓰인 막대한 지출 등 왕권 과시는 국제적인 과시나 투사를 감안하더라도 국고에 과도한 부담을 주었다. 특히 유럽 대륙을 상대로 한 군사 정책의 경우, 배를 띄우고 상륙이 강제되는 규모의 대규모 작전을 수행했으면서도 얻어낸 건 별로 없었다. 이러한 규모의 과도한 지출은 부왕 헨리 7세가 재건한 건전 재정조차 당해내지 못할 정도였다.

'면세 혜택이나 교황이 하사한 특권을 바탕으로 엄청난 부를 쌓아왔던 수도원을 잉글랜드에서 직접 관리하자'는 여론의 흐름을 타 국고를 채웠으면서도, 의도를 의심당해도 할 말 없는 행동을 한 것도 사실이다. <수장령> 이후로 지속된 군사 활동은 물론 1537년 '은총의 순례' 세력의 주동자들을 소탕할 때 로버트 애스크도 처형했기 때문이다. 만약 비고드 경과 당시 군사 활동을 지휘한 일부만 정확히 골라 처형했으면 오히려 '대화로 해결하자는 것을 무력으로 해결하려 들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 본보기를 보여준' 예시로 남았을 것이다. 게다가 유럽 대륙을 상대로 또 소득 없는 군사 활동을 벌여 지출을 키우고 특히 토마스 크롬웰이 처형당한 이후에는 근시안적으로 자산[15]을 매각하며 국고를 채우다가 왕권이 위협당하는 단초까지 제공했다.

젠트리 계층의 부상은 후대의 왕들의 국고 관리 난이도를 대폭 상승시켰다. 바로 젠트리를 섣불리 건드리면 안 된다는 중압감 때문에 엘리자베스 1세는 왕실 토지나 국유 재산을 매각하는, 장기적으로는 왕권을 더욱 하락시키는 고육지책을 동원해야 했다. 엘리자베스 1세의 후임인 스튜어트 왕조의 제임스 1세도 본인이 검소한 성품임에도 불구하고 국고와 관련해서 의회와 두고두고 마찰을 빚었으며, 급기야 찰스 1세는 무리수를 두다가 처형당하기까지 했다. 이후 헨리 8세 때 성장한 신흥 계층 젠트리들은 일정 재산과 학식을 갖추고 대륙의 개혁 신학이라는 이데올로기로 무장하여 왕실의 자의적인 과세에 반발했기 때문에 헨리 8세 시절부터 이미 스튜어트 왕가 시절의 청교도들과의 갈등의 씨를 뿌렸다고 보면 된다.

4. 기타


5. 가족

5.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헨리 8세
(Henry VIII)
<colbgcolor=#fff3e4,#331c00> 헨리 7세
(Henry VII)
<colbgcolor=#ffffe4,#323300> 제1대 리치먼드 백작 에드먼드 튜더
(Edmund Tudor, 1st Earl of Richmond)
오웬 튜더
(Owen Tudor)
발루아의 카트린
(Catherine of Valois)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
(Lady Margaret Beaufort)
제1대 서머셋 공작 존 보퍼트
(John Beaufort, 1st Duke of Somerset)
블렛소의 마거릿 보챔프
(Margaret Beauchamp of Bletso)
요크의 엘리자베스
(Elizabeth of York)
에드워드 4세
(Edward IV)
제3대 요크 공작 요크의 리처드
(Richard of York, 3rd Duke of York)
세실리 네빌[30]
(Cecily Neville)
엘리자베스 우드빌
(Elizabeth Woodville)
제1대 리버스 백작 리처드 우드빌
(Richard Woodville, 1st Earl Rivers)
룩셈부르크의 자퀘타[31]
(Jacquetta of Luxembourg)

5.2. 왕비들

헨리 8세와 왕비들의 생애를 한눈에 이해할 수 있게 다음 표를 삽입한다. 마지막 왕비 캐서린 파의 생존에서 알 수 있듯이, 그녀만이 유일하게 왕비로서 국왕의 죽음을 볼 수 있었다.[32] 1537년부터 1540년까지와 1541년부터 1543년까지 약 5년은 헨리 8세가 독신이었던 기간이다.
<rowcolor=#fff> 이름 키워드 생몰년도 (최종 연령) 재위 기간 (년) 재위 전
헨리 8세 국왕 1491 ~ 1547 (55) 1509 ~ 1547 (38) 왕위 계승자(웨일스 공)
<colcolor=#fff> 아라곤의 카탈리나 이혼 1485 ~ 1536 (50) 1509 ~ 1533 (24) 아서 튜더[33]의 부인
웨일스 공비
앤 불린 참수 1501[34] ~ 1536 (35)[35] 1533 ~ 1536 (3) 아라곤의 카탈리나의 시녀
제인 시모어 죽음 1508 ~ 1537 (29) 1536 ~ 1537 (1) 앤 불린의 시녀
클레베의 앤 이혼 1515 ~ 1557 (42) 1540 ~ 1540 (0) 클레베 공국 공녀
캐서린 하워드 참수 1523 ~ 1542 (19) 1540 ~ 1541 (1) 클레베의 앤의 시녀
캐서린 파 생존[36] 1512 ~ 1548 (36) 1543 ~ 1547 (4) 래티머 남작부인

5.3.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아라곤의 카탈리나 (1번째 부인)
(Catherine of Aragon)
1녀 메리 1세
(Mary I)
1516년 2월 18일 1558년 11월 17일 펠리페 2세
앤 불린 (2번째 부인)
(Anne Boleyn)
2녀 엘리자베스 1세
(Elizabeth I)
1533년 9월 7일 1603년 3월 24일
제인 시모어 (3번째 부인)
(Jane Seymour)
1남 에드워드 6세
(Edward VI)
1537년 10월 12일 1553년 7월 6일
위의 적자녀 셋은 모두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지만 비교적 천수를 누린 사람은 차녀 엘리자베스 1세밖에 없다. 게다가 에드워드 6세와 엘리자베스 1세 모두 결혼하지 않은 채 죽었고, 적자녀 중 유일하게 결혼한 장녀 메리 1세도 자녀를 낳지 못하면서 헨리 8세의 직계는 끊어졌다.

이외에도, 그의 사생아로 추정되는 이들이 여럿 있으나, 헨리 8세는 헨리 피츠로이를 제외하면 자신의 자식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사생아 헨리 피츠로이
(Henry FitzRoy)
1519년 6월 15일 1536년 7월 23일 메리 하워드

다음은 그의 사생아일 가능성이 있지만, 헨리 8세가 인정하지 않은 이들이다.

6. 대중매체에서

6.1. 소설

6.2. 게임

6.3. 만화

파일:external/i3.ruliweb.com/155c2f8fff446c91a.jpg

6.4. 노래

6.5. 영화


파일:에릭 바나-헨리 8세.jpg

6.6. 드라마

파일:/pds/200707/08/05/c0014405_09074281.jpg
파일:Wolf Hall_Henry Viii.jpg

6.7. 기타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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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 요크의 에드워드 미들햄의 에드워드 아서 튜더
헨리 7세 헨리 8세 제임스 1세
헨리 튜더 에드워드 튜더 헨리 프레더릭 스튜어트 찰스 스튜어트
찰스 1세 제임스 2세 조지 1세 조지 2세
찰스 스튜어트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 조지 오거스터스 프레더릭 루이
조지 2세 조지 3세 빅토리아 에드워드 7세
조지 윌리엄 프레더릭 조지 오거스터스 프레더릭 앨버트 에드워드 조지 프레더릭 어니스트 앨버트
조지 5세 엘리자베스 2세 찰스 3세
에드워드 앨버트 크리스티안 조지 앤드루 패트릭 데이비드 찰스 필립 아서 조지 윌리엄 아서 필립 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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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랜태저넷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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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랜태저넷 왕조 랭커스터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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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더 왕조
엔리 8세 아이드워르드 6세 시반 모이라 1세
필리브
튜더 왕조 스튜어트 왕조
아이예리쉬 1세 셰이머스 1세 카를루스 1세 카를루스 2세
스튜어트 왕조
셰이머스 2세 모이라 2세 윌리엄 3세 아녀
하노버 왕조
쇼르셔 1세 쇼르셔 2세 쇼르셔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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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Greatest Britons
※ 2002년 영국 BBC 방송이 영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영국인 100명'을 선정
TOP 10
<rowcolor=#ffe> 1위 2위 3위 4위 5위
윈스턴 처칠 이점바드 킹덤 브루넬 다이애나 스펜서 찰스 다윈 윌리엄 셰익스피어
<rowcolor=#ffe> 6위 7위 8위 9위 10위
아이작 뉴턴 엘리자베스 1세 존 레논 호레이쇼 넬슨 올리버 크롬웰
11위~100위
<rowcolor=#ffe>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어니스트 섀클턴 제임스 쿡 로버트 베이든 파월 알프레드 대왕 아서 웰즐리
<rowcolor=#ffe>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마거릿 대처 마이클 크로포드 빅토리아 여왕 폴 매카트니 알렉산더 플레밍
<rowcolor=#ffe>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앨런 튜링 마이클 패러데이 오와인 글린두르 엘리자베스 2세 스티븐 호킹
<rowcolor=#ffe> 26위 27위 28위 29위 30위
윌리엄 틴들 에멀린 팽크허스트 윌리엄 윌버포스 데이비드 보위 가이 포크스
<rowcolor=#ffe> 31위 32위 33위 34위 35위
레오나르드 체셔 에릭 모어캠브 데이비드 베컴 토머스 페인 부디카
<rowcolor=#ffe> 36위 37위 38위 39위 40위
스티브 레드그레이브 토머스 모어 윌리엄 블레이크 존 해리슨 헨리 8세
<rowcolor=#ffe> 41위 42위 43위 44위 45위
찰스 디킨스 프랭크 휘틀 존 필 존 로지 베어드 어나이린 베번
<rowcolor=#ffe> 46위 47위 48위 49위 50위
보이 조지 더글러스 베이더 윌리엄 월레스 프랜시스 드레이크 존 웨슬리
<rowcolor=#ffe> 51위 52위 53위 54위 55위
아서 왕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 로버트 스콧 이넉 파월
<rowcolor=#ffe> 56위 57위 58위 59위 60위
클리프 리처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프레디 머큐리 줄리 앤드류스 에드워드 엘가
<rowcolor=#ffe> 61위 62위 63위 64위 65위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조지 해리슨 데이비드 애튼버러 제임스 코널리 조지 스티븐슨
<rowcolor=#ffe> 66위 67위 68위 69위 70위
찰리 채플린 토니 블레어 윌리엄 캑스턴 바비 무어 제인 오스틴
<rowcolor=#ffe> 71위 72위 73위 74위 75위
윌리엄 부스 헨리 5세 알레이스터 크로울리 로버트 1세 밥 겔도프 (아일랜드인)
<rowcolor=#ffe> 76위 77위 78위 79위 80위
무명용사 로비 윌리엄스 에드워드 제너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찰스 배비지
<rowcolor=#ffe> 81위 82위 83위 84위 85위
제프리 초서 리처드 3세 J. K. 롤링 제임스 와트 리처드 브랜슨
<rowcolor=#ffe> 86위 87위 88위 89위 90위
보노
(아일랜드인)
존 라이든 버나드 로 몽고메리 도날드 캠벨 헨리 2세
<rowcolor=#ffe> 91위 92위 93위 94위 95위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J. R. R. 톨킨 월터 롤리 에드워드 1세 반스 월리스
<rowcolor=#ffe> 96위 97위 98위 99위 100위
리처드 버튼 토니 벤 데이비드 리빙스턴 팀 버너스리 마리 스톱스
출처
같이 보기: BBC 선정 최악의 영국인, 위대한 인물 시리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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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atest Britain Monarch
※ 2012년 영국 데일리 텔레그래프가 여론조사업체 ICM에 의뢰해 영국인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TOP 5
<rowcolor=#ffe> 1위 2위 3위 4위 5위
엘리자베스 2세 빅토리아 여왕 엘리자베스 1세 헨리 8세 헨리 5세
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1] 르네상스와 절대왕정이 확립된 이 시대부터 군주의 전신 초상화가 정식으로 제작되기 시작했다.[2]영국 잉글랜드 그레이터 런던 그리니치[3]영국 잉글랜드 그레이터 런던 시티 오브 웨스트민스터[4] 체중 출처. 다리 부상 전에는 약 80~90kg대였으나 다리 부상으로 운동을 못하게 되면서 180kg(397파운드) 안팎으로 쪘다. BMI로 치면 50이 넘는 초고도비만.[5] 성공회 체계의 모체가 되는 잉글랜드 국교회가 바로 이 사람 치세에 출범했다.[6] 처음으로 문장에 튜더 왕관과 표어가 등장했다.[7] 친할머니 마거릿 보퍼트 쪽으로 랭커스터 왕조, 아버지 헨리 7세 쪽으로는 프랑스의 발루아 왕조, 어머니 엘리자베스 쪽으로 요크 왕조의 피를 이어받았다.[8] 성공회의 전신[9] 계비 앤 불린과 다섯 번째 왕비 캐서린 하워드.[10] 비단 잉글랜드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체계적이고 법치에 기반한 관료제중앙 정부 체제는 떠오른 지 얼마 안 됐고, 여전히 정치는 나라를 가족이나 사람 신체에 비유하며, 국왕을 나라의 아버지이자 우두머리로 생각하고 국왕 개인의 카리스마와 능력과 상징성이 더 중요하던 시대였다. 이 시대 국왕들의 사치와 과시는 단순한 개인적 허영이 아니라 저런 권위와 통솔력을 발휘하는 통치 이데올로기 강화의 중요한 과정이었고, 이런 면에서는 아직 기사도적 가치관이 강렬하던 시기이니 헨리 8세처럼 대중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는데 거리낌이 없고 놀기 좋아하며 호탕하고 호방한 인물상이 크게 유리했다. 반면에 부왕인 헨리 7세는 수전노에다가 뒷공작을 좋아하며 내성적이고, 과시욕이 없는 사람이라 이런 면에서 좀생이 같다는 혹평을 많이 들었다.[11] 다만 헨리 7세는 짠돌이였기 때문에 상설적으로 유지되는 해군 자체를 증강하기보다는, 유사시에 해군으로 징집할 수 있는 민간 선박의 건조 및 임대를 통한 수익 확보에 더 치중했다. 전투용 시설을 평시에는 철거하고 상선이나 수송선으로 쓰다가 전시에는 전투용 시설을 급히 설치해서 해군으로 징집하는 형식이었다.[12] 사실 그의 치세 초창기에 이룬 것들은 토머스 울지의 공이 크기도 했다.[13] 카락선의 끝판왕 격이다.[14] 당시 잉글랜드는 아직까지도 화승총보다는 장궁을 무기로 쓰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정책과는 별개로 헨리 8세 본인은 장궁을 가장 잉글랜드적이고, 나라의 상무정신을 상징하는 물건이라고 크게 평가하며 본인도 사냥과 활쏘기 시합을 통해 장궁술을 계속 연마했고, 병과에서 도태시키지 않았다. 기술적으로도 16세기 초중반이라면 우천이나 화승총으로 대응할 수 없는 돌발적인 상황 등에서 여전히 활이 의미 있는 보충 전력이 될 수 있는 시기이기도 했다.[15] 즉, <수장령>으로 확보한 교회의 자산도 포함[16] 실제로 말년에 비만이 심해지기 이전에는 건장한 체격이었다.[17] 대표적으로 찰스 2세, 윌리엄 4세 등등이 있다.[18] 현대인에겐 무슨 비아냥처럼 들리지만, 전근대에 왕과 같은 권력자의 배설물을 치우는 것은 정말 농담이 아니라 아주 높으신 분들이나 맡을 수 있는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어의처럼 국왕의 몸에 손을 댈 수 있었는데, 이럴 수 있는 보직은 상당히 드물다! 또한 국왕의 가장 사적인 공간을 공유하는고로 국왕과 왕실의 개인사와 비밀, 정치·행정 업무를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아무에게나 맡기지 않았으며(헨리 8세의 담당관도 무려 후작이다.), 거기에 국왕의 건강 상태를 가장 가까이에서 확인하는 자리이므로 왕이 그 사람을 전폭적으로 신뢰할 수 있다는 뜻이 되기에 누릴 수 있는 권세도 대단했다. 지도자의 건강 상태가 주요한 국가 기밀인 것은 현대에도 마찬가지이므로, 결코 아무에게나 줄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엘리자베스 1세 역시 부왕 헨리 8세처럼 귀족에게 용변을 맡겼고, 헨리 8세의 이후 시대 인물인 루이 14세에도 그의 요강을 담당하는 일은 고위 귀족이 맡았다. 조선에서도 왕의 변을 내의원에서 맛보고 연구했을 정도.[19] 그것도 기름지며 단 음식을 매일 먹으니 비만이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20] 제인 시모어는 노산은 아니었지만 그 시절 기준으로 초산을 하기엔 상당히 늦은 나이였고 캐서린 파는 아예 노산이었다.[21] 후술하지만 헨리 8세는 190cm에 가까운 거구로 유명했고 마리 드 기즈도 180cm가 넘는 엄청난 장신이었다. 그래서 딸인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도 키가 180cm 가량 되었다.[22] 이는 도끼로 참수형을 당한 앤 불린이 처형 전 사형집행관에게 "내 목은 가늘어서 도끼로 조준하기 쉬울 것"이란 유언을 남긴 걸 인용한 비아냥이었다. 이후 마리 드 기즈는 헨리 8세의 외조카인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5세와 결혼해서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을 낳았다.[23] 덴마크-노르웨이-스웨덴 국왕 크리스티안 2세오스트리아의 이사벨의 차녀.[24] 특히 덴마크의 크리스티네는 헨리 8세가 잔인하게 버린 첫번째 왕비 아라곤의 카탈리나의 종손녀(어머니 이사벨이 카탈리나의 조카)였기 때문에 그 반감이 더 심했다.[25] 심지어 헨리 8세는 먹는 과일조차 당도가 매우 높은 달콤한 과일만 먹었다. 당도가 높은 과일을 지나칠 정도로 많이 먹으면 당연히 몸에 좋지 않다.[26] 다만 당시 기준으로 50대는 평균수명 상 충분히 사망할 만한 나이이기는 했다. 부모님, 형제들, 부인들, 엘리자베스 1세를 제외한 자식들보다도 오래 살았다. 가문 자체에 딸 엘리자베스 1세, 할머니 마거릿 보퍼트를 제외하면 60세 이상 장수한 사람이 없다.[27] 사실 이는 중세 유럽에서 흔한 일이었다. 왕을 이기면 왕에게 미운 털이 박혀 불이익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시합이 격렬해지다가 실수로 왕이 죽는 일이라도 일어나면 그래도 시합 중에 일어난 일이니 살인죄나 반역죄로 처벌되지는 않겠지만 불이익의 정도는 더욱 강할 것이다. 실제로도 그런 사례가 있기도 하고.[28] 사실 현대는 몰라도 근대까지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군주들이 음악과 친해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궁중음악"이 널리 알려진 만큼 음악과 친하지 않은 군주가 오히려 이상할 정도. 군주이면서 동시에 작곡가인 경우는 신성 로마 제국 페르디난트 3세, 브라질 제국 페드루 1세 등이 있다.[29] 물론 이 괴물은 한국어에서 종종 쓰듯 대단하다는 경탄의 의미가 아니라 거의 순수하게 비판적인 의미에 가깝다.[30]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의 외손녀다.[31] 생폴 백작 피에르 1세의 장녀.[32] 클레베의 앤 역시 헨리 8세의 사망 시점까지 살아있었지만, 폐위된 지 오래였다.[33] 헨리의 친형.[34] 앤 불린의 출생 연도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1507년생이라는 설도 있다.[35] 1507년생설 기준으로는 28~29세.[36] 헨리 8세 사망 시점에서 생존. 이후 토머스 시모어의 아이를 낳고 사망.[37] 헨리 8세의 세번째 아내 제인 시모어의 오라버니이자 서머싯 공작.[38] 가령 앤 불린 처형은 원 역사 그대로인데 헨리(호머)의 막장성을 코믹하게 부각하기 위해 산욕열로 사망한 제인 시모어와 이혼으로 끝난 클레베의 앤도 처형시켰다. 심지어 클레베의 앤은 아예 남자로 나온다! 캐서린 하워드 역은 스키너 교장의 어머니 아그네스 스키너다. 무려 95살이나 먹었다며 처형인에게 내가 해도 그거보단 잘 하겠다며 도발하는 막장스런 모습을 보인다. 이외에도 에드워드 6세 역은 바트 심슨, 메리 1세 혹은 엘리자베스 1세는 리사 심슨으로 나온다.[39] 동명의 연극으로도 유명하다. 영화는 연극의 명성에 기초하여 만들어진 작품. 시대극의 측면에서도 볼만하며 주인공의 연기가 일품. 1967년 아카데미 작품상 및 남우주연상 포함 6개 부문 수상.[40] 사실 실제 헨리 8세도 이와 비슷한 모습을 많이 보였기에 이러한 점이 고증을 잘해낸 것이다.[41] 이때 신하들은 머리가 진흙 속에 박혀 다리를 버둥거리는 헨리 8세를 보고 재미있다고 깔깔 웃다가 뒤늦게야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알고 사색이 되어 뛰어간다.[42] 프랜시스 브라이언을 보내 자신의 권위를 인정하고 캐서린과 자신의 결혼이 무효라는 것을 인정하라는 서류에 겨우겨우 서명했기 때문에 누그러진 점도 있었다.[43] 실제로 메리에게는 전혀 좋은 아버지가 아니었다. 아라곤의 카탈리나와 이혼한 후에는 메리를 딸 대우도 안 해줬으며 결정적으로 혼사도 나 몰라라 해서 혼기도 놓치게 만들어 버렸다.[44] 실제로도 헨리 8세는 엘리자베스에게도 메리에게 하는 것처럼 공주 작위와 계승권을 박탈하고 궁전에서 쫓아내며 죽을 때까지 엘리자베스를 보지 않을 정도로 박대했다.[45] 이 과보호가 도리어 에드워드 6세의 면역력을 떨어뜨렸다는 주장도 있다.[46] 얼굴은 배우 조너선 마이어스의 얼굴이므로 원본보다는 훨씬 슬림하게 그려졌다. 이보다 앞서 그렸던 초상화가 있는데 자신을 단순히 쇠약해진 노인의 모습으로만 묘사한 것에 못마땅해 하면서 다시 그리도록 명했던 것이다. 실제 역사대로 초상화를 그린 화가는 한스 홀바인으로 설정되었다.[47] 1536년 1월 24일 열린 마상시합에 참가했다가 낙마한 후 2시간이나 의식을 잃었다. 원체 대식가인지라, 운동으로 몸매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이 사고로 다리를 심하게 다쳐서 운동을 하지 못하게 된 후, 살이 찌기 시작했다. 한편으로 2시간이나 무의식 상태였다는 것은 뇌손상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의 성격이 이 사고로 인한 뇌손상으로 인해서 잔학무도해졌지 않을까 하는 설도 있다. 이 당시 왕비는 앤 불린이었는데 남편의 사고 소식을 들은 충격으로 유산했다.[48] 앤을 생각하면 욕망에 몸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