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한국의 대체역사소설 탐관오리가 상태창을 숨김의 등장인물을 정리한 문서.2. 주인공 일가
- 홍세화
본 작품의 히로인. 김운행과 더불어 원역사에는 없는 가공인물이다. 홍대용의 사촌 여동생으로 되바라지고 현명한 여인으로 사촌오빠 홍대용의 주선으로 김운행과 결혼했다. 김운행이 잘생기고 무엇보다 입신양명을 위해서는 칠정조차 초월하는 인물이라는 게 마음에 들어[1] 계략을 써서[2] 운행과 결혼한다. 때문에 부창부수라고 김운행의 영의정 라이프를 현명하게 잘 보조하며[3] 김운행과 죽이 척척 맞는 동지가 된 인물이다. 그에 걸맞게 잔머리나 양심불량도 김운행과 동급까진 아니더라도 비견될 정도라 삼강의 부위부강(남편은 아내의 본보기[綱]이다)을 몸소 실천하고 있다. 잘생긴 것으로 유명한 남편만큼이나 외모가 뛰어난 것으로 보인다. 나이가 40살이 넘은 1770년대에도 여전히 안 늙는다고 한다. 김운행도 처음 봤을 때부터 눈길이 갔을 정도. 여러 모로 부부는 일심동체라는 어구 그 자체가 현현한 듯한 커플이라 하겠다..
- 김이환
김운행과 홍세화의 첫째 아이이자 장남. 큰 비중은 없지만 아버지 심부름 중 은근슬쩍 수수료를 떼먹는다거나 집에 들어온 뇌물을 빼돌려 과자를 사먹는 등 부전자전의 조짐을 보이고 있어 김운행을 걱정시키고 있다. 물론 김운행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 김이환이 '아버지라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이렇게 행동했을 것'이라는 지레짐작으로 벌이는 일들이 의도치 않게 김운행의 설계가 비틀리게 하는 일이 잦고, 그럴 때마다 이놈의 불효자식을 뒤주에 넣어버리니 어쩌니 해도 이금과는 달리 어디까지나 한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매우 확고하며, 어릴 때부터 시시덕거리며 고구마를 같이 구워먹거나 하는 등 아버지와 함께한 추억도 많기에 부자 간에 정이 상당히 깊다.
은근히 똑똑한지 일곱살의 나이에 시로 예술황제 건륭제와 맞먹었고, 학문에서 장원급제자 아버지와 어깨를 나란히 하였으며, 지능으론 표트르 3세를 넘어섰다.[4] 물론 이건 해당 어른들을 놀려먹는 개드립들이지만, 아무튼 일곱살 나이에 어른 끄트머리 정도의 지적 능력을 갖춘 셈. 부모의 외모를 물려받아 꽤나 잘생겼다고 묘사된다. 김운행을 국구로 맞아들이려는 이훤의 의도에 따라 세자의 글벗이 되는데 김이환의 얼굴을 보고 그 동생의 외모를 판단하라는 의도도 들어있다고 나온다.
좀 자란 이후에는 과연 누구 아들 아니랄까봐 상태창 없이도 외국어를 배우고 정후겸의 음모를 단시간에 차단하는 등 재주를 드러낸다. 물론 아버지에게 올라오는 뇌물을 가로채거나 서얼인 박제가를 빵셔틀로 부려먹는 등 흉참한 곳에서도 부모를 닮았다. 김운행의 대행도 맡을 즈음엔 김운행의 위상이 너무 높아져서인지 김이환도 김운행에 대한 평가가 힘은 염파에 버금가고 지혜는 제갈량에 준한다는 등 좀 이상한 영역으로 간 모습을 보인다.[5]
북벌 시점에서는 부친 대신 한성에 남아 아무 지위도 없음에도 후방지원을 사실상 총괄하며 전횡하고, 역시 아무 권한도 없음에도 해방별대를 이끌고 동아시아를 종횡하고 있다. 그럼에도 최전방에 나가 있는 김운행과 북방에서 대기 중인 국왕 이훤, 그리고 한성의 조정을 연계하는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으므로 채제공도 아무거나 규탄해서 견제할까 하다가 그럴 여유가 없었으므로 넘어갔을 지경. 어린 나이에 부친 못지 않게 사람들을 지휘하며, 상태창이나 스킬이 없다는 점에서 김운행보다 더한 놈이 아닐까 하는 평가마저 보인다.[6]
현재 가장 불만인 점은 김운행이 그 신비한 장동 김문 가전비술을 전혀 전수해 주지 않는 것. 위에서 거론된, 폭주나 다름없는 김이환의 움직임 또한 작중에 의하면 너무나도 위대한 아버지의 업적에 비해 초라한 무품인 자신, 거기에 장동 김문의 후계자인데도 가문의 비전을 전혀 가르쳐주지 않는 아버지 눈 밖에 나는 건 아닌가 초조함이 섞인 결과라는 설명이 있다. 당연하지만, 그 장동 김문의 비전이 상태창 스킬인 이상 김운행이 죽었다 깨어나도 가르쳐줄 수 없다(...). 그러나 본인 나름대로 그런 '가문의 비전'을 재현하려고 노력한 결과 환각을 일으키는 독초를 통해 정후겸 일당을 손쉽게 제압하거나, 아버지의 후광과 본인의 언변을 활용하여 북벌에서도 해방별대를 이용한 공을 세운다. 덕분에 아버지에게서 장동 김문의 후계자라는, 본인만 초조해하고 있던 공인을 받고 깊이 감동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런 면모에서는 여러 모로 작가의 출세작인 죽왕의 열조 이진이 강하게 연상된다.[7]
북벌 이후 예조판서에 제수된 부친이 일본 통신사 파견 건으로 천문학적인 액수의 재물을 벌어들인 사실이 왕실에 흘러 들어가게 만든 장본인이라 노발대발한 김운행에 의해[8] 고봉환의 강남대성에 수감(...)되어 박박 구르다가 좌찬성으로 승진한 부친이 비변사를 혁파하려는 계획에 동기들과 함께 동원되어 열정페이 싱크탱크 노릇을 하게 되었다.
싱크탱크를 구성해 아버지에게 바친 대가로 장원급제 대신에 그냥 급제로 조건을 낮춰주었는데도 강남대성에서 탈출 못하고 빌빌대던 중, 아버지가 사도의 차남 이산이 짝사랑하는 성덕임을 꼬시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접촉한다고 김성응의 집안에 갔다가 미래 이산의 정실부인 예정이던 원 역사의 효의왕후 김설애[9]에게 반해서 뜻을 이루기 전에는 돌아가지 않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하고는 여장하고 그 집에 숨어들어가 그녀와 동침하여 임신까지 시켜 버렸다.[10]
넌지시 혼담을 건내러 찾아온 김설애의 아버지 김시묵에게 나중에야 그 모든 전말을 듣고 또다시 노발대발한 김운행은 한양의 치안인력과 가용 병력 전체를 동원하여 김이환 체포령을 내리고 이 자식을 뒤주에 가둬버리니 어쩌고 하며 소금맞은 미꾸라지마냥 생난리를 치지만, 세화와 대화를 나눈 후 이걸 성사시키는 쪽이 훨씬 더 이득이라는 걸 깨닫고 진정한 뒤에는 초스피드로 혼례를 올려 버리게 된다. 그 과정에서 김이환은 끝까지 체포되지 않았는데, 사실 김운행이 굳이 아들을 잡아다 뒤주에 처넣지 않아도 이미 셀프 뒤주체험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여장을 한 채로. 숨어있던 뒤주는 당연히(?) 김설애의 방에 있는 뒤주였다.[11][12]
어쨌든 그 과정에서 눈독들이던 둘째 며느리감을 사정 다 알만한 절친 아들내미한테 NTR당한 꼴이 되어서 삐져있던 이훤이 중전 홍씨의 설득으로 마음을 돌려서 김이환의 혼인에 어마어마한 축의와 함께 김이환에게 과거 프리패스권이나 다름없는 직부전시의 특혜를 내렸으니, 아버지가 준 퀘스트는 결과만 놓고 보면 완수한 것이 되었다. 그러나 혼례 직후 남해 해방별대 소속의 신설 정6품 무관직인 병마평사 직을 받아, 김설애와의 달콤한 신혼생활을 두고 필리핀 원정함대의 참모로 따라가야만 하는 처지가 되며 업보를 청산 당한다. 그래도 가문 비전의 흉참함을 능수능란하게 발휘하여 나가사키와 항주, 류큐 등지에서 여러 모사를 꾸미고 척화비를 세우는 등의 활약을 한다.
류큐에 기항했을 때는 유구국왕 쇼보쿠에게 미인접대를 받는데, 앙큼한 고양이같은 매력의 자기 마누라 김설애에 비하자면 류큐 여인들은 너무 '사람' 같았기에 모두 물리쳤다는 골때리는 묘사가 나온다. 정약용의 과거레이드 때는 독공을 써서 남인의 과거를 방해한다는 언급이 나오기도.
- 김숙영
김운행과 홍세화의 둘째 아이이자 첫째 딸. 오빠인 김이환과는 현실 남매 정도의 사이 좋은 관계이다. 김운행을 사돈이자 척신으로 만들려는 임금(사도세자)과 중전이 며느리감으로 점찍어 세자 이정의 세자빈이 된다. 입궁 후에는 세자의 행보를 부모에 보고하거나 왕실과의 비선 연락망 역할을 하는 등 부모의 피가 어디 안 갔음을 보여준다. 세자 본인마저 귀에 대고 달콤한 말들을 속살거려 오빠와 함께 손에 넣고 흔들고 있지만, 정작 세자는 '친구랑 마누라가 다 똑똑해서 편하다' 라고 생각하고 있다. 마냥 김운행의 랜섬웨어(...) 역할만 하는 게 아니고, 스스로의 판단 하에 용두대군 이산을 화완옹주 일당의 음모로부터 보호해 준다거나 하는 등, 오빠 김이환과 함께 삼강오륜의 부위자강(父爲子綱)을 체현하는 중이다.
다만 그런만큼 당대 규방여성으로서의 부덕은 높지 않은지, 아이를 낳을 때가 되자 모친인 홍세화가 의류와 침구에 수를 대신 놓아 보내는 장면이 나온다. 그 장면을 보던 김운행에게 세화가 말하길, 별말 없이 자기가 이렇게 만들어 보내기만 해도 숙영이는 알아서 자기가 했다고 말할 테니 아무 염려 없다고.....
- 김이찬
김운행과 홍세화의 셋째 아이이자 둘째 아들. 낙선당 화재사건 후 집에 돌아온 김운행이 세화와 목욕하던 도중 위생과 인구증가 운운한 것으로 미루어, 그때 김이찬을 갖게 된 듯하다. 형과 누나와 다섯~일곱살은 차이나는 늦둥이로 1760년대 후반에 10살이라고 언급된다. 형처럼 아버지가 보여준 무훈을 동경하는데, 막내인만큼 후계자나 가문 비전에 대한 관심보다는 순수하게 영웅을 동경하는 듯한 느낌. 아버지의 무공을 보고 싶다고 촉 없는 화살을 쐈다가 세화에게 엄청나게 얻어맞는다. 김운행이 그쯤 해서 봐주려고 자신의 좌찬성 승진 및 세화의 정경부인 승품을 발표하여 세화의 관심을 돌려놨어도 순진하게 도망도 안치고 가만히 기다렸다고 하는 걸 보면 형과 누나에 비하면 매우 순수한 성격인 모양. 그리고 무과에 응시해서 아버지같은 대장군(...)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부친 김운행의 허가 하에 앞으로는 무예를 수련하게 될 모양인데, 이걸 허락해 준 속마음에는 물론 셋째가 자기 원하는 삶을 살도록 해주기 위한 것도 있겠으나 자기 편으로 만들어 놓은 서명응 등 군의 고위무관들이 북벌 이후 은퇴하거나 그럴 때가 되어가니 군부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더 값싸고 강력하게)유지하기 위한 빨대 역할을 맡기기 위함이라는 의도가 깔려있다.
1774년에 무과 수석으로 2차 대청 전쟁에 무관으로 참전한다. 그런데 이 때 흔들리는 배 위에서 전력으로 도망치는 적장을 첫 실전에서 쏘아 맞춘다. 김운행은 자기 권력으로 아들을 무과 장원 만들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닐 수도 있다. 김이찬의 궁술을 본 주변 사람들은 장동김문 가전비법의 존재를 다시금 확신했을 정도. 무예 외에도 김운행이 장성을 해체하는 의도를 정확히 이해하고 설명하는 전략적 소양도 뛰어나서 형 김이환도 동생의 군사적 소양에 혹시 나보다 먼저 가전비법에 각성했나 하는 의심을 했다.
- 장복이
주인공의 몸종. 어린 시절부터 모셔온 최측근 수족으로, 김운행식 비유로 말하자면 가장 애용하는 스마트폰이다(...). 성격은 그야말로 조선시대 고전 문학에 나오는 종 캐릭터들을 빼다 박은 듯한 캐릭터로, 운행에게 진심으로 충성하면서도 운행 뒷배를 믿고 깝죽거리거나 자기가 수습 못할 일은 운행에게 떠넘기고, 몸싸움 같은 게 있을 땐 얻어맞고 한방에 화려하게 기절하는 등 충실한 개그 캐릭터. 주인공 피셜 삼황오제 때부터 뼈대있는 종놈가문일 녀석. 김운행도 장복이를 잘 대해 주다가도 장복이가 까불어 심기가 거슬리면 쥐어 박거나 자기 정도면 잘해주는 주인이라면서 부조리한 명령으로 괴롭히는 등 개그신을 연출한다. 장복이도 선을 넘을락 말락 하면서 김운행을 살살 긁어대는 것이 상당히 볼만하다.
운행식 비유로는 '어디서 보고 들은건 있는지 빅데이터 학습이 매우 충실히 된 녀석'으로, 김운행의 암행어사 활동 때에는 정말 꼭 한번 해보고 싶었다는 표정으로 운행을 따라다니며 암행어사 출도를 외치질 않나, 김운행이 본격적으로 음모를 꾸밀 때는 별말 없이 운행의 표정을 살피더니 명령을 그대로 시행하고, 정축하성 사건 때는 일이 잘못되면 삼족이 멸 당하는 거 아니냐고 투덜거리면서도 운행을 따르는 정말 김운행의 팔다리나 다름 없는 충신. 김운행 역시 장복이는 자신이 죽으면 같이 죽는, 일종의 일심동체적 존재로 생각한다. 가공인물로 이름은 열하일기에 등장하는 박지원의 몸종 장복이에게서 따왔다. 작가의 전작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에도 동명의 늙은 하인이 등장하나, 여기의 장복이와는 서로 다른 인물이다. 조선 사람들에게는 장동김문의 전설적인 노비라는 칭호로 불릴 정도로 주인을 잘 둔 덕을 보는 듯하다. 정축하성 이후부터는 장복이는 장동 김문의 문고리를 드나드는 이들이 댈 수 있는 이름 중 가장 최소치다.
- 어지
주인공 집 앞에 쓰러져 있던 거지. 조선인이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 근육질의 몸매의 거한이며, 교육을 제대로 못 받은 탓인지 말이 어눌하고 행동도 어리숙하다. 주인공이 그의 덩치를 보고서는 선접군[13]으로 써먹기 위해 거둬들이면서 이후 무력담당이 된다. 본명은 거어지(去於之) 라고 하는데, 조선왕조실록에도 실려 있던 실제로 있던 이름이다. 여담으로 실존인물 거어지의 경우 한 세대 전의 인물인데다, 역모에 얽힌 천민이기에 동일인일 가능성은 없다. 운행은 어지의 정체에 대해서 이것저것 더 생각은 했으나 확인하지 않았으며 이름 자체에 대해서는 '이런 이름은 당대 천민들의 일반적인 관습'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최악의 사태를 피하기 위해 어지로 개명시켰다.
어리숙하지만 마음 자체는 착한 편인지 초반에 텃세를 부리던 김운행의 다른 노비들과 딱히 마찰을 일으키지 않았으며, 자신을 거둬준 김운행을 은인이라고 확실히 인지하고 있는지 운행이 시키는 일은 전부 충실히 수행하며 운행을 지키기 위해 불에도 뛰어들어 구하는 등 장복이와 함께 김운행의 팔다리 같은 존재. 정축하성에서 구선행을 죽이며 면천되어 훈련도감에서 김운행의 수행 군관으로 복무하고 있다. 그 모습에 감격한 연이는 군복 입는 것을 도와주다가 눈시울을 붉혔다. 이훤이 호위무관으로 탐냈지만 김운행도 양보해주지 않았다가 북벌 시에 별무사로 종군하여 활약하며, 건륭제 추격전에서는 무려 국왕만이 내걸 수 있는 교룡기의 기수가 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하고 이훤과 동열에 서서 싸우며[14] 이훤을 저격하려 했던 적장을 참살하는 등의 대공을 세운다. 이게 어지에게 붙어있던 장군신이 죽어버린 이후인지라, 장군신 같은거 없이도 인간 자체가 강한 듯하다.
- 연이
운행이 부임한 목천현의 무당. 목천 내에서도 용하기로 소문나 토호나 다름없는 위세를 떨치는 대무당이었다. 사병 수십 명을 끌고 다녀서 처음 만났을 때 운행도 내심 위기감을 느꼈을 정도. 하지만 운행에게서 뿜어져나오는 강력한 신기를 느끼고 운행의 심복이 된다. 운행은 연이를 감시하기 위해 어지를 종종 보냈더니만 어지와 눈이 맞아서 그대로 결혼. 연이가 운행을 만났을 때 '자잘한 신은 그대로 깔려 죽어버리는' 운행을 가호하는 신기에 모시고 있던 신이 죽어버려 신기를 잃었다. 그러나 이대로 몰락하기는 싫었기에 새 신을 모시려 했는데, 운행의 신기에 버텨낼 정도로 강하면서도 연이가 감당 가능한 장군신이 가호하고 있는 어지와 가까워져서 새로이 장군신을 모시고 신기를 되찾는 것을 노린 것이다. 운행이 상경할 때도 자기 기반인 목천을 버리고 같이 상경하여 서울 인왕산에 자리잡는다. 이후 도성에서 용한 무당으로 이름을 날리며 규방 네트워크를 장악해 운행의 첩보기관 노릇을 하며, 한편으로는 세자빈의 비선이 되어 운행과 세자의 연락망으로 활약한다. 서울에 서린 강력한 왕기 덕분에 운행의 신기에도 그럭저럭 살 만하다 싶었는데, 운행이 본격적으로 영조와 척을 지자 서울의 왕기가 흔들리는 것을 느끼고 경악한다. 정축하성 중 세자를 인왕산 뒤주에 숨겼을 때 뒤주로 옮겨간 왕기를 이용해 무당 체계를 이어나간다.
김운행의 세를 업고 거의 전국구 무당이 되어 조선 팔도 모든 무속인들의 정점이 된 것이나 다름없으며, 김운행이 직접 이름을 내걸기 뭣했던 평양의 부동산 투기라든가 소문을 통한 민심 조장 등에 동원되어 활약하고 있다. 어지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는지, 어지의 장군신마저 상태창의 신기에 눌려 죽어버리자 김운행에게 어지를 버리지 말아달라고 간청하는 모습을 보인다.
- 카오루(薰)
왜관 측에서 김운행에게 뇌물로 보낸 미동. 당시 일본의 풍습대로 남자다. 남색가라는 소문이 퍼질 것을 두려워한 김운행은 카오루를 돌려보내지 않았고 그대로 김운행의 종[15]으로 편입된다. 왜관측에선 이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김운행이 통수를 친건 그럴 수 있는데 받아먹을 수 있는 건 다 받아먹고도 입을 싹 씻은 개새끼라고 치를 떤다. 김운행의 표현을 빌자면 유심칩 교체가 안됐는지 본인은 나름 머리를 쓴다고 하는 짓인데 조선 종놈의 사고방식이 아닌 일본 미동의 사고방식이라 이뭐병 취급을 받는 개그 캐릭터다. 높은 분에게 잘보이겠다는 일념으로 꿍쳐둔 좋은 차를 내왔는데, 하필 영조가 내린 금주령 때문에 대놓고 술상 차리라는 말만 못했을 뿐 술을 내야 할 상황이었다.
김운행이 한성에서 행동을 시작하기 전 그의 지령을 받고 화완옹주에게 세자가 평양에 있다는 거짓 증언을 하여 영조가 상황을 오판하고 남한산성으로 파천해 도성이 비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 보상으로 외거노비가 되어 독립해 이마카와야키(붕어빵의 기원이 된 화과자)를 만들어서 높으신 분들에게 장사를 하고 그 이익을 김운행에게 바치는 것으로 생업을 삼는다. 카오루의 과자는 궁중 여인들과 신분 높은 아이들에게 인기만점으로, 세자(의소세손)와 김이환, 김숙영도 아이들답게 카오루의 단 과자를 좋아한다. 외거노비가 된 후로는 카오루가 아닌 훈(일본어로 카오루라는 한자 薰의 조선어발음이다.)이라고도 불린다. 이렇게 과자장사로 번 돈으로 재조선 일본인 향우회 회장 비스무리하게 되어 그들을 장동 김문 전용 경호원으로 사용한다. 화완옹주에게는 영조의 양위 이후로도 계속 집착을 받는데 이를 역이용해 정후겸 일당의 음모를 처단하는데 기여한다.
이후 언급을 보면 유구의 설탕 수입 사업에도 발을 걸친 걸로 보인다.
- 김용겸
김운행의 부친으로 호는 효효재(嘐嘐齋). 원 역사에서는 김용겸 쪽이 이름을 남긴 유명인이고 공조판서직까지 오른 고관이다. 정통적인 성리학에도 이름이 났으나 실용적인 주장을 하거나 박지원, 홍대용과도 많은 교류가 있던 실학스러운 인물. 기본적으로는 특정한 경우를 제외하면 아들을 아끼고 자랑스러워하는 아버지지만 면신례 자리에서 선배들을 두드려패거나 상태창으로 얻은 재주를 장동 김문의 가문의 비전이라며 팔아먹거나 혼사를 부모도 모르게 진행하는 등 김운행의 기행에 질려하기도 한다. 작중에서는 아직 벼슬이 높지는 않았고, 아들이 출세하자 괜한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본인은 일찍 물러난다. 고관은 되지 못했으나 둘째 아들 김운행 덕에 장동에서 문화재 경매쇼(진품명품)의 명목상 주최자 노릇을 하며 사람들과 교류하기도 하고 하고 싶은 것들을 재미나게 하면서 여러 모로 편안하게 복락을 누린다. 사돈총각 홍대용과는 원 역사의 일화처럼 지음(知音) 그 자체인지라 매우 죽이 잘맞는다. 작중에 때때로 아들 김운행의 학식이 짧고 덕이 얕음을 직접 한탄하면서 부친공인 마크를 박아 버리는 장면이 매우 찰지며, 그 때문인지 김운행으로부터 속으로 이 나라에서 자신을 퇴직시킬 수 있는 단 두 사람 중 하나라는 취급을 받는다. 김운행을 모가지시킬 수 있는 다른 한 사람은 당연히 국왕인 이훤이다. 옛날부터 국가의 관료제나 시스템 등의 설정놀음[16]에 관심이 깊었고 그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해왔던 지라 아들이 추진하는 관제개혁에 두 팔 걷어붙이고 도움을 준다.
여담으로 김운행이 빙의자인 걸 감안해도 서로 대화하는 걸 보면 부전자전이 따로 없을 정도로 죽이 잘 맞는다. 아들이 공부를 안 했다고 대놓고 까거나 하면서 김운행에 대한 소문이 퍼지는 것에 일조했다.
- 김적행
김운행의 형. 자는 동생과 마찬가지로 육촌 형을 닮으라고 춘배이다. 음서로 사복시 벼슬을 하고는 있었지만, 별로 돈버는 재주는 없는지 동생에게 많은 빚을 졌다. 때문에 김운행이 중도에 얻은 소금가마 책임자로 차출당한다. 심지어 아내조차 맏며느리가 되어서는 동생 부부에게 늘상 신세만 지는 게 민망하다고 적극적으로 찬동했다. 이후 부산의 염전에서 박박 구르던 중, 김운행의 심부름 겸 소금가마에서 풀려나 한양에 올라와서 다시 무위도식 하다가 동생의 필요에 의해 의원 노릇을 하게 되었는데, 조선시대 특성상 의원이 벼슬아치에 비해 인식이 좋지는 않은 터라 불만을 품는다. 그래도 동생에 비하면 최소한의 양심은 있어서 근본 없이 장동 김문 가전 비법이라고 파는 환약[17]에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아무거나 대충 섞어 만들라는 동생의 말에 어떻게 그럴 수 있겠냐고 적당한 약재를 넣어 만들기는 한다.
김운행이 권력을 잡고 나서도 자기한테 관직 하나 주지 않는다고 여기저기 하소연을 하는데, 동시에 돈을 버는 족족 내기도박으로 탕진한다는 언급이 나오는 터라[18] 관직에 출사하기는 요원한 듯. 본작은 주인공 포함 모든 캐릭터와 상황을 희화화 하여 묘사하기에 잘 드러나지 않지만 대외적으로는 '설령 친형이라 해도 능력이 부족하면 명목상의 지위조차 주지 않는다' 라고 평가받지 않을까 하는 해석도 있다.
김운행이 형에게 돈을 빌려주는 모양을 보면 현대 기준으로 보면 살인적인 고리대금이지만, 조선시대에 횡행하던 다른 장리(고리대금)에 비하면 '정말 저 지독한 놈이 그래도 형제니까 그 낮은 이율로 빌려준다'고 여길 정도인지라 좀 야속하다고 불평할지언정 아예 동생을 손절해 버리거나 하지는 못하고 있다. 어쨌든 김운행의 가장 가까운 친족이기에 부친 김용겸이 관제개혁 싱크탱크에 끼워넣어 의학 분야를 책임지게 했다.
참고로 자식에 대해서는 정확히 묘사가 안 되었는데 김이환이 장손 취급을 받는 걸 보면 아들이 없는 걸로 보인다.
2.1. 주인공의 사업체 관련 인물
- 이재운
상인으로 목천현감에 김운행이 부임했을 때 홍대용의 소개를 받아 각종 이권사업에 개입하는 김운행의 심복이 된다. 본관은 한산 이씨이며 북인의 영수 이산해의 직계후손으로서 토정 이지함 이래 경제사상에 깊은 관심이 있던 집안답게 부자가 되어서 잘 사는 게 뭐가 문제냐는 <해동화식전>을 지은 것으로 알려진 실존 인물이다.(1721~1782)해동화식전 리뷰 사실 해동화식전이 발견된 지 얼마되지 않아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인물은 아니다.
실존인물 이재운은 나이가 들어야 겨우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참봉 벼슬 몇개월 만에 과거 답안지를 대신 냈다가 정조에게 걸려 파직되었으며 평생을 불우한 지식인으로 살며 소품문 취향의 글을 썼다고 한다. 작가가 밝혔듯이 이재운이 실제로 장사를 했다던가 남양 홍씨 가문과 관계가 있었다는 것 등은 본작의 창작이다.
- 표철주
이전 시대 유명한 검계. 연잉군 시절 이금의 뒷세계 직속수하였지만 팽당하고 목숨만 건져 부동산 중개인으로 살고 있었다. 소론의 보호를 받고 있었지만 춘식목장 설립과정에서 김운행의 휘하로 들어온다. 김운행 휘하에서 활약하다가 정축하성 이후로 세자 익위사로 임명받아 다시 양지로 나온다. 이후 정후겸 일당의 거병에서 한양에 남아 홍국영을 체포한다.
- 고봉환
박필균의 소개로 만난 전문 거벽(과거 답안지를 대신 작성해 주는 사람). 실존인물로 전국구 거벽으로 이름을 날리다가 정조 때 과거부정이 적발되었다. 김운행은 고봉환의 대리 시험과 쪽집게 과외 덕분에 장원까지 오르게 된다. 김운행이 관직에 오른 뒤로는 아예 강남 송파나루에 과거 입시 학원인 광주 강남대성학당[19]을 개설해 고봉환을 선생으로 모시고 김운행식 사고방식을 가르친다.
여담으로 본래 첫 등장부터 김운행에게 존칭했는데, 김운행이 북벌의 주역으로 역사에 이름을 새기며 천하를 좌지우지하게 된 이후로도 사적으론 존칭, 공적으론 반말을 하고 있다. 이건 다름 아니라 나름 권세 있는 집안의 자제들도 많은 강남대성에서 명문가라고 선생에게 까불지 마라라는 경고를 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1770년대에는 합격자만 천 명을 넘겼다고 한다.
- 채이성, 이조이
함경도 원산부에 살던 어민 부부. 공납의 폐단으로 상품 조기를 바치지 않는다고 찍혀서 고생이 심했고, 참다못한 채이성은 바다에 빠져죽을 생각으로 매일 바다에 나가 물고기를 잡고 있었다. 아내인 이조이만 노심초사하다가 근처에 온 암행어사의 소문을 듣고 길목에서 기다리다가 만나게 된다. 마침 원산 부사 이재해는 영조가 양성중인 친위대였고, 퀘스트 탓에 귀양보낼 표적이 필요했던 김운행은 계략을 펼쳐서 이재해를 귀양보내버린다. 그 후 부부는 한양으로 들어와 김운행의 수하가 된다. 시무균역삼조 이후 생긴 해상 배달업체의 배를 모는 모양. 청나라 조정에 사쓰마에 대해 밀고한 얼굴마담도 채이성이다. 참고로 기록에도 있는 실존인물들이다.
- 박상순
왜학 역관. 역시 실존인물. 애첩이 노론의 색마 김치량에게 강간당했으나 솜방망이 처벌만 받아 속만 끓이고 있었다. 나레이션의 표현을 빌자면 NTR 역관. 김운행이 김치량에게 대신 복수해주겠다며 접근하자 수하로 편입되어 동래와 울릉도에서 대일본 밀무역을 담당한다. 첫 등장에서는 늘 죽은 눈을 하고 있었지만 김치량이 사망해 복수를 이루자 맑은 눈으로 바뀐다. 김운행의 세력이 완전히 커지자 마츠우라 케이센과 짜고 울릉도 밀무역을 공식화해 울릉도에서 일어나는 사무역을 전담해서 맡는다.
- 달문
유명한 거지 왕초이자 광대. 원 역사에서는 순박하고 인정많은 사람으로 묘사되나 여기서는 사실 이는 위장용 겉모습이고 실제로는 사채나 유흥 사업 등 암흑가의 거두였다고 묘사된다. 본인이 숙이고 들어오면서 김운행의 수하로 편입된다. 비검술의 달인으로서 화완옹주의 난 당시 칼 한번 던질 때마다 한명씩 죽이며 활약했다.
- 길상이
함경도 밀무역상. 본래 화적떼에 가까운 소규모 밀무역상이었으나 쥐떼 토벌을 위해 온 김운행에게 강제로 협조한다. 그러나 김운행이 상태창의 스킬로 쥐떼를 창고로 유인해 태워죽이는 도술적인 면모를 보이자 그를 존경하게 된다. 그 후 김운행에게 삼을 뇌물로 바치며 연줄을 만들고 김운행도 이에 보답하며 홍삼 제조, 유통, 대청 밀무역 사업 등을 통해 북방 사업계에서 세력을 불린다.
김운행이 평안감사로 와서 밀무역을 단속하자 가장 먼저 협조하면서 북방 밀무역계의 사실상 넘버 투로 성장한다. 이후로도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직접 의병을 이끌며 유격전을 벌여 만주팔기에 큰 피해를 입혀 군공을 세웠다.
3. 주식회사 승경도
주인공을 김운행에 빙의시킨 초자연적인 집단. 주식회사 승경도라는 것은 주인공이 부르는 가칭이며 작중에서는 '회사'라고만 불린다. '구독자'나 '유튜브' 운운하는 것으로 보아, 주인공은 이들을 마치 성좌물처럼 어떤 초월자들을 위한 유흥거리를 제공하는 집단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상태창 씨
노량진에서 주인공과 만나 사기계약으로 조선인 김운행에 빙의시킨 인물. 초현실적인 미모의 여성이다. 상태창의 형태로만 김운행과 소통했으나 사실 직접 대화가 가능했으며, 다섯번째 필수목표를 앞둔 김운행의 국제적 깽판을 견디다 못해 교섭하기 위해 나섰다. 사기계약, 악의적인 빙의 시점, 불친절한 태도 등으로 김운행의 어그로를 잔뜩 끌게 되어 영조와 동급의 "좆같은 놈들" 중 하나로 찍혀 잔뜩 고생하고 있다. 김운행이 유도하는 역사적 흐름에 반대하는 입장이지만 상사들이 받아들여 어쩔 수 없이 승인하는 등 중간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역할. 사실 전작 혁내취의 관리자도 큰 실수로 주인공을 엿먹였음에도 사무적이고 친절한 태도 덕분에 중간 만족도 평가에서 만족스러운 점수를 받아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자업자득이다.
김운행에게 붙어있는 신기의 정체로, 어지간한 신들은 벌레처럼 눌러죽이는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했으나 김운행이 퀘스트를 완료하자 사라지고 그 자리를 김운행 본인의 이루 말할 수 없이 흉참한 기운이 차지하여 조선 전역을 뒤덮는다.
결국 최종화에서 승경도게임을 달성한 김운행에게 제발 현대로 돌아가달라, 현대로 가서 초능력쇼만 해도 이득이다, 아니면 여기서 새로운 컨텐츠 하나 더 시작하자, 우리 직원들 다 거리 나앉아서 너처럼 출연자가 될판이다라며 여러모로 회유를 시도 했지만, 오히려 그 말들에서 김운행이 그냥 잘해야 컨텐츠 찍는 회사이며 자신의 능력을 뺏지도 못하고 자신이 실패했을 때 죽고나서까지 털어먹었을 것을 캐치해내어 공무원강의 프로젝트 승경도의 완전 폐기를 요구한다. 이로써 김운행은 상태창을 완전히 숨기고 버리는 데에 성공한다.
4. 조선
주인공의 개혁으로 엄청난 변혁과 성장을 이룩했다. 해방별대와 평시선덕관 도입 시작으로 사방의 무역선을 습격하고 물자를 빨아들여 기술, 경제적인 발전을 시작했다. 장부상으로는 6만이 넘는 번진을 해체해 한양과 북방군 외에는 동원할 군사가 없어보이지만, 실제론 해역 수호를 의무삼은 해방별대가 각자 수만에 달하는 정병을 보유하게 되었다. 게다가 군대 운영을 예전처럼 주먹구구식 자력갱생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실장단이 행정을 맡고 평선관들이 물자를 공급하는 식으로 체계화하여, 권신 중의 권신인 김운행조차 반란이 불가능한 구조를 만들어냈다.즉 겉보기에는 약해진 것 같지만 질적으론 이전과 급이 다르게 강력해진 것. 1765년 마침내 북벌을 개시. 청군 80,000여명을 격파하고(건륭제의 친위군만 55,000명, 그 직전에 함경도를 공격한 팔기만 18,000명. 그 외에도 여기저기서 여러번 싸웠다.) 만주를 차지하고 청주 건륭제를 생포해 자결하게 만든다.
1773년. 회맹대전으로 청나라, 준가르, 촉진을 차례대로 격파하면서 조선이 가장 강력한 패자임을 천하에 확고히 알리고, 전쟁을 끝냈다. 최후의 판도는 서쪽으론 산해관까지 손에 넣어 요동+요서까지 손에 넣은 걸로 보인다.
4.1. 왕실
- 이훤
작중 시대의 왕세자로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도세자. 원 역사에선 부친의 정신 고문으로 결국 광증을 얻지만, 작중에서는 이제 막 대리청정을 시작한지라 아직 그 정도로는 진행되지 않았다. 징조는 보이고 있지만 김운행이 알게모르게 멘탈을 케어해주면서 상태가 양호해졌다. 그래서 주인공에게 호의를 보내고 있는데, 본래 역사에서 어떻게 되는지 아는 주인공은 최대한 떨어지려고 하지만 이런 저런 사건에 휘말리며 점차 세자와 관계가 깊어지게 된다. 비극의 왕자로서의 사도세자가 아니라 '중국소설회모본'의 저자로서의 소설 덕질이라던가, 문보다 무를 중시한다고 평가받았던 것처럼 활쏘기나 격구를 즐기는 인간적인 면모도 나오는 중이다. 이걸 노려서 주인공 김운행이 각종 야설을 만들어 세자가 그 책을 보느냐고 밤새운 걸 가지고 세자를 공부시켰다는 자기 평판용으로 써먹는 중이다.
본래는 뒤주엔딩일 것이라서 김운행은 '세자와 양자뒤주얽힘[20]이 되는 것은 사양이다' 라며 거리를 두려 했으나, 사실 내심 세자에게 연민을 가진건지 아니면 본인 독백대로 '차기 왕이 영조 뺨치게 똑똑한 둘째 세손이면 곤란하다'는 이유인지 상태창 아이템을 써가며 의소세손을 치료해줘 김운행이 세자의 총신이 되었고, 이후엔 궁녀 문씨 사건에서 김운행의 조언을 받아 영조를 멕이고 아버지에게 맞서는 한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떠오른다. 문씨 사건까지만 해도 운행은 세자와 영조 사이에서 줄타기를 시도하려고 했으나 문씨 사건 조사 중 영조의 명으로 곤장을 10대나 맞자 '민주 공화국 시민으로서의 분노'(?)가 각성하여 완전히 세자파로 돌변하여 사도세자를 살려 왕으로 만드는 개변을 목표로 하게 된다.
믿을 만한 측근이 없었던 본래 역사와는 달리 한 번의 승리를 쟁취해 낸 후로부터는 아버지의 끝모를 갈굼으로 악화되어 가던 인간성도 회복이 되어서, 둘째 손자 이산에게 군호를 내린 이금의 의도를 간파하고는 세자빈 홍씨와 자식들을 가엾게 여기고 이들이 자신과 같은 아픔을 겪도록 되풀이하지 않으리라 맹세하는 등 원역사의 정신병자가 아닌 인간미 있는 캐릭터로 변화하여 독자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다.
문씨 사건 이후로는 아버지가 자신을 정적으로 여긴다는 것을 확실히 자각하고 아버지와 서로 조정에 대한 장악을 위해 경쟁하며 세자를 그렇게 만든 김운행조차 놀랄 정도로 성장하여, 결국 영조를 거꾸러뜨리고 왕의 자리에 오른다.저는 사람 중의 군주가 되겠습니다. 사람을 벗어나지 않는 왕이 제가 뜻하는 바입니다.
바로 즉위하지는 못했지만, 이후 사실상 국정을 직접 운영하기 시작했다. 김운행의 추천대로 많은 관직을 정리하고 정책을 운영해 한동안은 정말로 김운행이 실세라는 말이 돌았지만 북학에 관해서만은 김운행과 반대로 적극적 수용이며 오히려 김운행을 역으로 설득하려는포르노 수입의 의지태도를 보여 허수아비라는 말은 금방 사라졌다. 김운행 또한 이훤이 진심으로 원하면 거부한 적도 실패한 적도 없는지라 이훤은 김운행이 반대파를 자신에게 집중시켜서 오명을 뒤집어쓰며 자신의 뜻을 이루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더욱 감동했는데, 반쯤은 우연들이었지만 잘 따져보면 거짓말은 아니다.
하도 잘 성장한 부작용으로 영조가 뒷방 늙은이가 될 즈음부턴 김운행이 사도세자에게 역으로 먹혀서 일 잘하는 소가 되어가는 조짐을 보이며, 본래 극혐하던 사도세자의 만물삼국지 드립에도 물들어간다. 이훤은 춘식이가 비단 주머니에 헌책을 담아 올린다거나, 출사표를 써 바친다거나 하는 등 자신의 삼국지 취향까지 맞춰주는지라 더 좋아하는 악(?)순환. 주종이 이 모양이니 신하들도 "왕의 취미생활은 인정해 주자..." 분위기가 되어 삼국지 드립은 확산되어만 간다.
원 역사에서 자식이 8명이었는데, 여기서는 장남도 살아있는 데다 정신건강도 좋아서 원 역사보다 더 빨리 세자빈과 후궁들과 7명의 자식을 생산했다. 김운행은 이에 직계가 이리 많으니 종친들이 좀 줄어도 되겠다면서 숙청할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드디어 각지의 반란에 애를 먹던 건륭제가 친청(?) 정권이 들어선 조선의 안정을 위해 사도세자의 왕위를 인정하여 정식으로 왕위에 오른다.
왕위에 오른지 3년이 흐른 시점에서 김운행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이하여 인척관계를 맺기위해 작업중이며 은근슬쩍 의중을 비추고 있는데 김운행은 이를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있으나 정작 국왕부부는 김운행의 장남 이환이 개인적인 증거인멸을 위해 아비 명의를 도용하여 보내온 부채에 적힌 시를 보며 김운행이 자신들의 뜻을 알아들었다고 기뻐한다.
실제 역사에서도 무예에 관심이 많았던지라 작중에서는 김운행의 행동으로 생겨난 동춘공[21]을 꾸준히 연마하고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던지 상급 단계까지 창시했으며, 북벌 시점에서는 기마자세를 하고 한시간 동안 버티는 신체능력을 단련했다. "내가 간다." 라고 단언하며 친정을 선언하는 모습은 독자들이 "얘가 그 중국제 야설 보내달라고 조르던 걔 맞냐?" 할 정도로 패기 넘치는 장면.
본인은 선봉에 서서 적진에 뛰어들고 싶어하지만 신하들 입장에서는 말도 안 되므로, 조선군의 사기를 증진시키는 데 기여한다. 다른 의미가 아니라 군사들이 조금이라도 망설이고 있으면 왕이 제일 먼저 뛰쳐나갈지도 모른다는 의미다. 총지휘를 맡은 김운행조차 더이상 욕구불만으로 놔둬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2차 구두룡섬에서는 제일 안전한 곳으로 한번 말 달리고 오라고 출진시켰을 정도. 왕과 돌격대장의 역할이 바뀐 것 같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마침내 직접 검을 휘두르는 장면에서는 팔의 굵기가 편곤보다 부러트리기 어려울 것 같다고 하고 쌍검을 자유자재로 휘둘러 그래도 무예의 달인일 건륭제의 몽고 호위병들이 추풍낙엽으로 죽어나가며, 이성계의 궁술로 지원하려던 김운행이 '잠깐 즐기게 놔두자.' 라고 생각할 정도로 신이 났다.
한편 신하들이 '조상 욕을 하는 것보다 김운행 욕하는 것에 더 화를 낼 것 같다' 라고 생각하고 '자기 친척이라도 김운행이 죽이라고 하면 죽일' 정도로 신뢰하며 '김운행이 아닌 자가 자신의 앞길을 방해한다면 용서할 생각이 없는' 등등의 묘사가 반복되었으면서도 김운행의 학식이 부족해서 성균관 대사성이나 사헌부 대사헌을 주지 못했다고 아쉬워하는 등 여전히 정상적인 상식을 유지하고 있다.
너무나도 거대한 성과를 안겨주는 김운행을 절대로 실무에서 은퇴시키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자기가 죽기 전엔 김운행이 영의정이 될 일은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즉 졸지에 탐태창의 최종보스로 등극했다.
회맹대전에서도 준가르와 촉진, 청나라까지 쓰러뜨리면서 최종적인 승자가 된다. 에필로그에 따르면 나이 60살이 넘어서도 전쟁 시절 못잖은 용력을 가지고 위엄을 떨친다고 한다.
- 이금삼강의 으뜸은 군위신강이다.군주는 신하의 본보기[綱]가 된다는 뜻이다.김운행의 독백
작중 시대의 왕이자게장파 두목조선의 21대 임금이자 소설의 중간보스. 성군 코스프레의 달인이자 게장의 게임, 뒤주실험의 과학 군주 영조가 되는 인물이다. 어떻게든 영의정이 되어야 하는 입장의 주인공에겐 자기 자식을 미쳐버리게 만든 성질머리와, 그런 자식마저 죽게 만든 냉혹함, 그리고 앞으로 수십 년은 더 군주로 있다는 무지막지한 위치까지 겹쳐서 주인공의 머리굴림의 9할이 이 양반의 대비일 정도로 작중 거진 최종보스의 포스를 자랑한다.
김운행 입장에서는 도저히 맘에 안 드는 진상 상사인지라, 미치광이처럼 국정을 운영한다며 쿨타임만 돌면 욕하는 김운행의 독백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막상 김운행이 각종 정책을 펼칠 때는 서로 죽이 잘 맞는 경우가 많아서 김운행 스스로도 '저런 사이코패스랑 나랑 통할 리가?'이라고 아찔하게 생각한 적도 있다(...). 근데 사실 김운행의 사적 이익 추구 덕분에 영조 역시 장용영과 해안경비대 만들어서 조선 국방력 정예화, 노론-소론-남인 대통합 탕평 성공, 지방군을 해체해 민생을 개선, 수도 한양의 물류와 폭력을 장악해 왕권 강화, 도성의 물류와 경제력 개선, 경기~황해에 날뛰는 해적 척결해 치안 개선, 이 모든 것을 하면서 예산까지 절감한다는 엄청난 이득을 얻었다. 그에 비해 이금이 한 거라곤 새파랗게 어린 놈이 올린 안건 몇 개 결재하여 조금 밀어주는 정도의 수고만 들인 셈이니 싫어할 리가 없는 것.
회차마다 그의 개막장스러운 인성이 일말의 여과 없이 드러나는 통에 댓글창을 보면 아연실색하는 반응들이 많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런 영조의 모습들이 작가가 마음대로 창작해 낸 면모가 아니라 시기를 조금 바꾸거나 했을 뿐, 실록에 기록된 사실에 근거하여 서술한 내용들이라는 것... 동시기에 탐태창과 같이 연재된 또 다른 영조시기 대역소설 '영조의 아들로 살아남기'에서도 정확히 같은 내용을 그리고 있어서 영조의 흉참한 인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바람에 한국 대역팬들에게 있어서 영조는 혐오 그 자체인 인물이 되었다.
첫 등장부터 김운행이 대적 불가능한 포스를 뿜었으나, 여러 번 책략에 실패하면서 점차 정치적으로 몰리고 있다. 특히 6차 양위 선언은 영조에게 시달리던 여러 신하들이 대대적으로 왕과 반목하는 결과가 나온다.[22] 양위 선언도 소론 준소가 네덜란드를 끌어들여 반란을 일으키는 등 국내외적으로 궁지에 몰린 탓에 더는 위험해서 못할 상황이라고. 본래는 현란한 정치질로 정권을 쥐었던 왕이지만 작중에서는 균역시무삼조를 올린 김운행 덕에 실질적으로 왕실이 비할 바가 없는 힘을 쥐었는데도 정작 영조 본인의 입지는 팍 쪼그라들었다는 것이 재밌는 점.
대비가 양위를 윤허한다는 폭탄을 떨구고 죽자, 어떻게든 세자를 제거하려하나 선수를 쳐 잠적해버린 세자의 소재를 파악하지 못하고 삼정승을 파직하는 등 히스테리를 부려 이미 대부분의 궁인들에게도 아들을 죽이려드는 치매노인 취급당하는 상태. 화완옹주에게서 세자가 평양에 있다는 김운행이 흘린 허위정보를 전해듣고, 마치 원 간섭기 시절처럼 '세자가 측근들을 이끌고 청나라의 병력 1만을 빌려 병자호란 당시의 침공 루트를 그대로 따라와 자신을 폐위할 것'이라는 착각을 일으키며 패닉에 빠져 수어청과 금위영 병력과 함께 남한산성으로 파천하는 등 완전히 폭주해 버린다. 그러나 그 사이 잠적했던 세자와 김운행이 복귀해 대비의 유조와 영조의 치매 증세를 명분삼아 궁을 차지하면서 세력도가 역전당한다.
처음에는 남한산성에서 북쪽의 청나라 팔기군을 막고, 삼남에서 근왕군을 일으켜 한양의 정병들과 힘을 합칠 계획이었던 듯... 하지만 김운행의 방해와 수십년 간의 업보로 믿을 만한 신하가 남지 않은 상황이라 무엇 하나 성공하지 못하고 수어청과 장용영도 등을 돌리게 된다. 결국 본인도 자신이 어림짐작하고 폭주하는 바람에 자신의 기반을 전부 말아먹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금위영 구선행은 영조의 뜻을 묻지도 않고 마지막 군사작전에 나섰다가 전사했고 딸과 며느리, 손자들도 도망치고 남한산성을 세자파의 병력에게 포위당한 순간에 스스로 자살해 이훤에게 오점이라도 남기려 했지만 그것조차 조재호에게 진압되고 세자를 마주하게 된다. 결국 패배를 받아들이고[23] 그 대신 마지막으로 세상은 이전투구의 도삼검림이자 범의 아가리이며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고 허점을 드러내지 말고 신하, 가족, 형제 할 것 없이 모두를 죽이고 먹어치워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자신의 왕도를 가르침이라는 이름으로 한번 더 이훤에게 주입하려 하지만, 무례하게도 끼어든 김운행의 말에 가로막히고, 이훤이 인간 사이의 우애는 분명히 존재한다며 영조의 왕도를 부정하고 '더 이상 아버님께서 그런 두려움과 근심에 괴로워하지 않도록 모시겠다'고 선언하는 것으로 왕위 교체가 완료된다. 이때 자신이 믿었던 모든 것이 부정되는 순간이라 느껴 좌절감에 빠진 것으로 보인다. 이는 김운행의 눈에 영조의 마지막 남은 왕기까지 모조리 이훤에게 흡수되는 모습이 보였다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후 그대로 남한산성의 행궁에서 살기로 한다. 감시하기도 쉽고, 한양으로 돌아가면 언제든 이훤에게 이금이 죽을 필요가 생길지 몰랐기 때문. 남한산성은 요새 역할을 할 수 없도록 해체되었고[24] 이금에게는 정기적으로 춘식갑 시술이 행해지고 있다.[25][26] 역사적으로 수명이 수십 년은 남아있다.
화완옹주, 정후겸, 홍국영 일당이 저지른 역모에도 협력을 요구받으나 김운행의 조치로 김이환에 의해 제압된 그들의 모습을 경멸을 감추지 않는다. 이 때 김이환과의 대화에서 자신은 설령 화완옹주의 세력이 훨씬 더 크고 계획이 철저했어도 정후겸 따위를 따라서 왕좌를 되찾이 않았을 것이라고 하는데 이미 용두대군(이산)에게 박아둔 자신의 쐐기가 빠졌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자신이 다시 조선의 주인이 되어도 자신의 조선으로 돌려놓을 수 없기 때문. 아들이 자신의 치세를 성공적으로 열어젖혀 나가고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다만 이런 회한은 게장의 게임에서 자신과 직접 생사를 다툰 김운행 본인 정도나 되어야 해줄 말이라면서 하교하지 않는다.
북벌 완수 이후 이훤이 찾아오면서 재회한다. 이금은 당연히 아들의 위업을 인정하지 않고 그 일의 9할 9푼은 옆의 김운행이 한 것이니, 이제 김운행을 죽여서 왕통을 보존해야 한다고 지적하지만, 아들 이훤은 물론 김운행조차도 별로 놀라지도 겁내지도 않으면서 이금의 사상이 틀렸음을 입증[27]하자 자신 스스로가 여태껏 걸어온 길이 사실은 어긋나 있었으며 단순히 그걸 정당화하기 위해 국가의 성장동력이나 본인의 가족관계, 군신관계를 파탄시켜 왔다는 사실을 무의식중에 인정해버리고 만다. 김운행은 이때 영조의 표정을 집게발이 부러진 표정 같다고 하였다...
이후 베풀어진 연회에서는 치료돼 가던 귓속의 염증이 도져버린 탓에 술 대신 오미자차를 대접받으며 금주령 때 송엽차, 오미자차 어쩌고 하며 부렸던 추태의 업보를 청산당한 것은 덤. 원래는 김운행이 인성질을 하기 위해 그 어떤 수를 써서라도 게장과 생감을 구해다 잔칫상에 진상하려 했으나, 여름이라 감을 도저히 구할 수가 없는 데다가 아무리 그래도 이금을 그 정도까지 까내리면 이훤의 정통성에도 흠이 가기에 오미자차 정도로 그친 것이다. 이금은 그게 진짜로 건강에 좋을 것 같은 맛이라 더더욱 속이 터져했다.
그렇게 1773년. 홍봉한이 퇴직하면서 마지막 인사를 올리러 오고, 결국 조선이 천하를 평정했으며, 그 과정에서 아들의 일가와 김운행은 어떤 도리도 거스르지 않고 자신들의 확언대로 서로를 믿으며 대업을 이뤘음을 알게 된다. 이에 더는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여겨 춘식갑을 맞지 않고 원역사보다 3년 먼저 숨을 거둔다. 마지막 유언은 "형님"[28][29]. 사후 묘호는 신종.
- 세자빈 홍씨
후대에 시아버지와 남편의 갈등 때문에 고통받은 것으로 유명한 비운의 왕세자빈. 세손이 아프자 전전긍긍하다가 홍세화와 접촉해 용하다고 소문난 무당 연이를 부르게 되는데, 김운행이 고민 끝에 만병통치약 아이템 장각의 부적을 써서 세손을 살리는 역사개변을 일으킨다. 이전까지 김운행은 가능한 원래 역사를 따라가는 편이 안전하다며 사도세자와 엮이는 것조차 질색했지만, 만약 세손이 죽고 훗날 정조가 보위에 오르면 할애비처럼 신하들을 장악할 왕이라서 싫다며 도박을 걸었다.
문제는 본래라면 잃었을 아들도 살리는 바람에 세자와 세자빈의 총애가 깊어졌고 자연스럽게 김운행은 자타공인 세자의 총신이 되었다. 또한 김운행의 수작으로 영조의 정치력에 차츰 흠이 가고 반대로 사도세자가 인간적으로 성장하면서 은근히 내비치던 광증도 잦아들면서 홍씨와 사이도 좋아졌다. 아녀자의 몸인지라 무당 연이를 통해 감시의 눈을 피해 김운행과 접촉하는 문고리 역할을 톡톡히 해주고 있어 세자에게도 큰 힘이 되고 있다.
영조가 어린 손자들의 사이를 갈라놓으려 하면서 형제간의 우애가 상할 뻔 했으나 가족을 소중히 하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생각하라며 어린 형제를 다독였다.
사도세자가 보위에 오르면서 중전이 되었고 남편과 함께 김운행의 딸을 며느리로 맞이하려 작업하였으며, 화완옹주의 역모가 들통나자 크게 격노해 시동생을 유폐시켜 버렸다.
- 이정
세자 부부의 장남이자 조선의 왕세손. 어려서 크게 앓았으나 세자 부부와 친분이 있던 김운행이치트 아이템중국에서 들여온 비약을 복용한 덕분에 살아남았다.[30] 무사히 네 살이 되어 의사소통과 사리분별이 가능한 수준으로 성장했으며 원래 역사에서 정조를 대신할 왕위계승자의 위치에 있다. 김운행이 세손을 살려낸 동기는 조금도 순수하지 않은데, 할애비마냥 꼬장꼬장하기 그지없고 신하들을 잡아 댔던 정조를 차차기 군주로 만나기 보다는 이정에게 은혜를 입히고 라포를 형성해 가는 쪽이 자기 뒷날에 더 좋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왕이 똑똑하면 자기 해쳐먹기가 곤란하니까. 확률분포상 할아버지와 둘째 손자가 똑똑하면 첫째 손자는 그럴리 없지 않겠냐는 자기정당화는 덤. 운행의 의도대로 부모인 사도세자와 빈궁 홍씨부터가 김운행을 깊이 믿고 의지하는 상황이며 아예 직접 목숨을 되살려 준 은혜를 절대 잊지 말라는 아버지의 당부까지 들었기에 김운행에게는 처음부터 호감작이 잘 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김운행의 예상이 맞았는지, 신숙주의 절개 특전으로 능력치를 보면 동생 이산보다도 작다고 한다. 신숙주의 절개 특전은 사회적 지위 등을 종합해서 보는 능력인만큼 세자와 대군이라는 위격의 차이 역시 포함되어 있을 텐데도 일개 대군 직위인 이산보다 못하다는 건 확실히 타고난 왕재가 동생만 못하다는 방증이다. 이 와중에 이금에게 주입당했던 건 나름 좋은 것도 전부 반대로 하고 싶은 이훤이 공부 쪽으로도 널널하게 풀어주는 편이라서 관심 있어하는 서학만 파고들고 있다. 이훤은 본인부터 서학파라서 그걸 또 좋게 보는 중.
8살에 영조의 남한산성 파천에 끌려가 "너희 생부는 불효하고 불충하여 나라를 팔았다. ...... 너희는 이제부터 효장세자의 아들이다"라는 양자 입적 명령을 동생 용두군과 함께 듣지만 이를 "천륜을 저버리는 짓"[31]이라며 거부한다.
아이다운 면도 있어서, 붕어빵에 반해 김운행에게 동생이 먹고싶어 한다며 붕어빵을 더 보내달라고 정중한 편지를 보내자 김운행이 본인이 먹고 싶으면서 동생을 판다며 귀엽게 보기도 한다. 이때 편지에 김운행을 집안 어른 대하듯 적는데, 김운행은 '붕어빵 달라고 아부도 하네 귀엽구만ㅋㅋ'정도로 생각하고 동시에 이런 편지가 유출되면 귀찮아지므로 얼른 파기했지만, 사실 이것은 이훤과 중전 홍씨가 김운행을 척신으로 끌어들이려 하고 있다는 암시였다. 아울러 이는 효명세자가 외숙부 김유근에게 카스테라를 더 보내달라고 편지를 보냈던 일화에서 모티브를 딴 것이다.
아버지가 왕위에 오르면서 세자가 되었으며 김운행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이한다. 이후에는 예쁘고 똑똑한 아내와 믿음직하고 똑똑한 친구에게 거의 먹혀버렸다. 정작 본인은 동생 용두대군과 놀 때 잘 못이기는 것을 빼면 삶에 별다른 불만이 없는 모양.
- 이산
이훤과 세자빈의 차남. 형인 세손이 요절하지 않고 살아남은 역사개변으로 인해 왕세손이 아닌 그냥 왕손겸 미래의 대군이 되었다. 태어난 지 1년도 안되어 김운행의 왜관 토벌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인근에 위치한 용두산에서 따온 '용두군' 이라는 군호를 받는다. 문제는 이 龍頭(용의 머리)라는 뜻 자체가 왕통과 연관성을 부정할 수 없는 글자라는 점, 그리고 아버지와 형을 배신하고 조카의 왕위를 찬탈한 패역자 수양대군의 군호 또한 해주의 수양산에서 유래했다는 점이다.
선대인 숙종 시절 단종과 사육신의 복권이 이루어졌다. 세조의 찬탈 또한 국권을 농단한 권신들을 제거하고 왕통을 바로잡고자 한 의도였다며 애써 윤색해 주던 조선 초기와는 달리 왕실과 양반들 사이에서도 전혀 옹호받지 못하는 처지인 셈이다. 백성들이야 애초부터 순도 100%의 완벽한 혈통에도 아무 죄없이 모든 것을 잃은 단종을 깊이 동정하고 왕위를 찬탈한 세조는 매우 깊게 증오했다.
굳이 필요도 없는 군호를, 전례까지 깨 가면서, 일부러 불길한 의미를 담아, 세자의 차남에게 봉작한 영조의 속내를 짐작한 신하들은 모두 치를 떤다. 세자 가족에게도 권력에 의해 빚어질 원수같은 부자관계 혹은 형제관계를 만들어 냄으로써 자기들끼리 단합하여 세자의 힘이 되지 못하고 이금 본인이 이용해 먹을 수 있도록 분란을 만들어 내려는 이금의 정치질 겸 혐성질인 것.
6세 때 영조의 파천에 끌려가 부친의 존재를 지우라는 영조의 명에 형이 거부하자 영조가 분노하는 걸 보고 당황해서 동의해버린다. 둘 사이에 갈등이 생길 찰나 모친 세자빈 홍씨가 아버지의 옛 가르침을 기억하라며 둘을 다독인다.
13세가 되자 원역사에선 정적이던 정후겸과 자신이 권세를 잃는 게 싫었던 화완옹주가 정후겸을 앞세워서 이산에게 접근해온다. 이를 눈치챈 김운행의 조언[32]을 듣고 그들과 거리를 둔다. 물론 이 과정에서 김운행에게 억지로 술을 먹이며 원 역사처럼 갑질군주(...)의 재목임을 보여주기도 했다. 덕분에 정후겸 일당이 영조를 구출해 복벽시킨다는 역모를 벌이려 했을 때 엮이지 않았다. 그 일 이후로 선을 그었을 뿐더러 정후겸과 홍국영이 거사를 일으킨 당일에는 아침나절부터 형 내외에게 호출받아 온종일 같이 놀며 시간을 보낸 지라 일말의 혐의조차 덮어 쓰지 않은 채 고모 일당을 손절해 버리는 데 성공했다.
이후에는 조선의 북벌 이후 등장. 효의왕후 김설애와 혼담이 계획중이었지만, 본인은 성덕임에 대한 첫사랑으로 애를 태웠는데 김이환의 도움으로 첫사랑을 성취한다.
- 궁녀 문씨
원 역사의 숙의 문씨. 영조가 맏며느리 효순빈 조씨의 장례식에서 눈이 맞아 곧바로 승은을 내린 궁녀이다. 왕의 씨앗을 품은 이후로는 벌써 아들이라도 낳은 듯이 세자의 친모인 영빈 이씨에게 대들기도 하고 그 때문에 인원왕후에게 회초리질을 당하는 등 원래 역사와 같은 행보를 보인다. 그러나 본작에서는 후궁 첩지를 받기도 전에 이른바 뻐꾸기 계획, 이훤을 폐세자하고 자기 아들이나 아들을 못 낳는다면 궁 밖에서 들여온 남자아이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려는 대역 모의를 한다.
원래 역사에서는 영의정 이종성의 계략으로 수문장을 통해 아이가 든 바구니를 베어버렸다는 야사가 있고, 나중에 정조가 문씨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문씨가 이런 짓을 저질렀다고 주장하기는 했으나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 아니면 문씨를 증오했던 정조가 씌운 누명인지는 알 수 없다. 일단 본작에서는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가정하고 성공 직전에 이르렀다는 설정이다.
문씨는 아들을 낳지 못할 때를 대비해 자기와 해산 시기가 비슷한 임산부들을 미리 수배해 두었고, 그들에게 아들을 빼앗고 살인멸구한 뒤에 측천무후마냥 제 딸을 손수 죽일 각오까지 했었다. 그러나 이를 간파한 김운행은 문씨를 돕는 척 하다가 박문수 등 고관들의 손을 빌려 음모를 저지한다. 이금이 워낙 문씨를 아꼈던 덕분에 목숨은 부지하지만 그 과정에서 오라비인 문성국이 대신 목숨을 잃고 출산한 아이도 딸이어서 결국 폐출당한다. 그러나 이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김운행이 곤장을 맞고 의금부에서 친국을 당하게 되자 이금을 도저히 손발을 맞출 정치적 파트너로 신뢰할 수 없다고 분노하여 역사를 본격적으로 뒤틀어 버리기로 다짐한다.
- 대비 김씨
작중에서는 거의 등장하지 않지만, 원래 역사에서도 세자의 처우를 두고 영조와 갈등을 빚었던 묘사들이 그대로 등장한다. 특히 궁녀 문씨까지 얽힌 6차 양위파동에서는 영조가 대비와도 기싸움을 걸어 망신을 줄 작정이었으나 김운행의 획책으로 영조 측이 판정패하며 권위가 약해진다. 서로 감정의 골이 깊어지면서 대비가 양위 소리만 나오면 미친 척하고 바로 가납할 작정으로 벼르고 있어서 영조는 양위파동을 일으키지 못하게 된다.
대놓고 자신이 빨리 죽었으면 하고 수작을 부리는[33] 영조에게 열이 받아 "여섯번이나 양위선언을 했는데 받아주지 못해 미안하니, 이제는 허가한다"는 유언으로 영조의 왕위 정당성을 내핵까지 처박는 인생 최대의 죽창을 날리고 숨을 거둔다. 이 일로 인해 영조는 사도세자가 살아있는 한 절대로 조선의 유일한 왕권 소유자로 남을 수 없게 되었기에, 앞뒤 가리지 않고 아들을 죽이려 한다. 또한 조신들도 여태껏 영조가 사도세자를 과하게 핍박한다고만 여겼지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는 패륜을 저지른다고는 상상조차 못하고 있었는데, 영조의 행각과 대비의 유언 그리고 사도세자가 갑자기 종적을 감추자 노망난 왕이 세자를 죽이려드니 내가 세자를 지켜주겠다는 메시지로 해석해버린다.
이후 죽기 전에 자기 유언을 확고히 굳히는 유언장을 숨긴 장소를 박문수에게만 전했음이 밝혀진다. 노론에게 전했다가는 다음 국왕은 완전히 노론에게 휘둘릴 판이고, 약소 세력인 소론인데다 파직당해 궁으로 들어올 수 없는 박문수 입장에서는 유언장의 존재를 알더라도 단독으로 움직일 수 없는 것을 알기에 박문수에게 넘긴 것. 결국 사도세자가 노론과 소론 모두의 지지를 받는[34] 최후의 포석이 되었다.
- 화완옹주
사도세자의 동생. 원 역사에서는 사도세자와 달리 영조에게 사랑받았다. 화완옹주의 남편인 정치달과 정성왕후가 거의 동시에 죽었는데 영조는 아내 장례는 내팽겨치고 화완옹주 집으로 행차해 사위 문상을 간다. 그러나 영조는 초상집에서 연행사의 보고를 듣고 청나라가 자신을 폐위시키려 한다고 믿게 되고 화완옹주를 시켜 세자의 독살을 지시한다. 그러나 이는 성공하지 못하고 대비가 죽고, 사도세자가 잠적한다. 화완옹주가 영조의 신임을 잃은 상황에서 김운행이 미리 잠입시킨 카오루를 이용해 옹주에게 세자가 평양에 있다고 거짓으로 고하게 하고 영조는 완전히 폭주한다.
이훤이 즉위하며 혜경궁 홍씨가 왕비가 되고, 김운행의 딸이 세자빈 물망에 오르는 등 궁내에서 화완옹주의 위상과 영향력이 계속 낮아지자 이산을 이용해 장차 정국을 흔들 계획을 짠다. 다만게장대왕을 닮아권력을 노리고 흉참한 정치질을 하는 것은 아니고 중증의 관심병 환자라 하루라도 떠받들어 주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몸이라서 그렇다(...) 화완옹주 모자의 어설픈 이산 가스라이팅 계획은 초장부터 김운행에게 간파당해 버렸고, 김운행은 이들의 숙청을 결심한다.
4.2. 노론
- 김재로, 김상로
청풍 김씨 '로의 일족'. 노론 중에서도 강경파이며 가장 고위직에 속한 남당의 최고위 인사들. 고령에 너무 고관이라 김운행과 직접 부딪히지는 않지만 탕평에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는 춘당과는 다소 껄끄러운 관계에 있다. 이들도 다른 신하들과 마찬가지로 영조의 폭급한 행보에 질리기는 했지만 전적으로 사도의 편을 들지는 못하던 상황이었는데, 사도의 왕권 차지 이후 김상로가 대비 김씨의 유조를 의심하며 사도세자의 선양을 부정하자 종손자인 김종수가 그 옆에서 바로 김상로를 붙잡아가면서 할아버지가 치매에 걸리셨다 면서 끌고 가면서 가문 후기지수들에 의해 권력에서 밀려난다.[35]
- 홍봉한
사도세자의 장인이자 혜경궁 홍씨의 부친. 노론 척당, 혹은 북당의 영수. 처음에는 경기감사로 재직중인 것으로 등장하는데, 자기 지인을 춘당대 별시에서 두들겨 팼다는 이유로 김운행에게 악감정을 가지고 있었으나 차후 김운행과 이권으로 얽히게 되며 그의 밝은 이재(利材)를 접한 후로는 관계가 매우 개선된다. 이후엔 정치적 궁지에 몰린 영조가 이복동생 홍인한을 밀어주는데, 홍봉한의 경우엔 워낙 김운행에게 이득으로 받아먹은 게 많아서 김운행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그와 일체가 되어 사실상 같은 세자당에 합류하게 된다.
정축하성 당시 영조를 따라갔으나, 수어청 대장 신민과 함께 영조를 배신하고 세자에게 붙는다.
사도 치세에는 영의정이 되어 자리를 지키며 김운행과 사위의 정책을 도왔다. 다만 조선의 북벌 이후에는 슬슬 치사를 생각하고 있다고 하면서 간접적인 지지나 응원은 해도 직접 뭘 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 홍인한
홍봉한의 이복동생, 원 역사와 마찬가지로 애먼 기생들을 때려잡는 흉참한 성품으로 나온다. 정치적 궁지에 몰린 영조가 새로 키우는 친위세력으로 김운행과 대적하게 된다. 세자의 즉위 이후에는 당연히 처형당한다.
- 원경하
강남대성 타짜 원인손의 부친.
- 홍계희
원 역사에서는 영조의 명을 받아 사도세자를 뒤주로 보내는 역할을 수행했던 인물로, 원 역사에선 김운행의 아버지로 설정된 김용겸의 친우였기에 이 작품에서도 김운행을 조카처럼 대우하고 있다. 주인공 김운행의 든든한 뒷배인 동시에 김운행의 계책에 이런저런 수혜를 받는다. 김운행이 벌이는 각종 정치질의 수혜를 받는 인물이다 보니 김운행을 본인 가문과 혼맥으로 엮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 하는 중이다. 병조판서로 재직하다가 남한산성으로 도주한 영조에게 끌려가나 왕이 있지도 않은 반란군과 청나라의 침공에 집착하는 등 드디어 완전히 정신이 나갔다고 판단해 신민을 설득하여 수어청 병력을 이끌고 김운행에게 귀순한다. 세자의 친정 이후로도 김운행과 친하다는 점 때문에 이조판서, 좌의정 등 잘나간다.
- 박필균
원 역사에서 박지원의 조부로 유명한 인물. 노론 인맥 덕분에 작품 초반부 김운행의 과거급제 플랜에 도움을 주었으며 여러모로 도움이 되는 정보를 잘 가져와주는 인물이다. 이렇게 고마운 사람을 김운행은 떠벌이 박이라거나 사는 동네의 이름을 붙여 야동 어른이라는 콜네임으로 칭한다.
- 이익보
노론 내 친세자 파벌인 동당 소속의 중신. 도승지로 있다가 말실수를 하는 바람에 전의현으로 배도압송[36]된다. 소론 준당의 반란에서 의병을 일으켜 금강 부근에서 싸웠으나 패배했다. 그러나 영조가 양 당의 밸런스를 맞춘답시고 이익보를 반군과 내통자로 몰아세우고 가혹한 고신을 가해 사망한다. 노론 동당은 이 일로 영조를 증오하게 된다.
- 김치량
대낮에 관청에서 양인들을 겁탈하고 형조의 명령을 사칭해 역관의 첩을 납치해 강간하기까지 한 악질 색마. 하지만 청풍 김씨 노론 남당인 덕분에 솜방망이 처벌만 받았다. 이 일로 춘당의 공격을 받자 홍인한이 보호해준 덕분에 또 죄를 감형받았다. 이후 김운행에게 내심 원한을 품고 홍인한과 협력해 낙선당에 불을 지르고 본인이 세자를 구해 세자의 평판을 나락에 빠트리면서 방화 용의자 명단에서 빠져나갈 음모를 꾸민다. 김운행은 방화까지는 몰랐지만 처음부터 홍문연이라 짐작했기 때문에 불이 나자 세자를 구해냈고 김치량 자신만 불에 타죽었다. 김운행은 낙선당에 불이 난 김에 세자의 2차원 첩, 홍진사의 그림 등도 함께 불살라 버리고 일부를 김치량의 품에 쑤셔넣어서 온갖 오명을 안고간 것은 덤.
- 김치인
김재로의 아들로 청풍 김씨 '치의 일족'. 원 역사에서는 로의 일족의 뒤를 이어 노론 남당의 지도자로 영조 말과 정조 초에 영의정을 역임하나 역사가 바뀌며 세자가 즉위해 위세가 그보다는 못하다. 왕의 의도에 따라 서양과 자꾸 접촉하는 김운행을 탄핵하나 춘당의 맹렬한 역공이 들어오고 김치량 건으로 청풍 김씨에 원한이 있던 왕이기에 오히려 김치인이 삼배도압송[37]된다.
4.2.1. 춘당
春黨. 젊은이들의 당, 혹은 김춘식의 당. 김운행의 장동 김씨 인맥과 김운행이 골라 뽑은 강남대성 수강생으로 구성되어 있다. 김운행 본인이 노론인데다 주요 인물들도 노론계가 많은 지라 일단은 노론으로 분류되나, 소론, 남인 심지어 무관까지 포진된 빅 텐트 진영으로 작중 공인 어떠한 사상적 공감대도 없이 모인 잡탕이다. 영조도 탕평이라는 대의에 따라주는지라 이쪽에 딱히 트집은 잡지 않느라 이들의 성장을 방관했고, 이훤의 즉위 이후에는 사실상의 여당으로 기능한다.- 김선행
김운행의 친척이자 홍문관 맞선임. 조선시대 기준으로도 별로 가까운 촌수[38]도 아니었지만 같은 가문 같은 항렬이라는 점을 이용해 열심히 친한 척을 했고 덕분에 김운행은 2회차 면신례는 면제받는다. 김운행의 정보제공 요청을 대외비라는 이유로 거부하려 할 때 그가 준비한 뇌물로 후드려 맞는 묘사가 일품이다. 김운행이 이훤을 즉위시킨 후로는 작중에 등장이 없다.
- 김원행, 김문행
김운행과 6촌. 이렇게 기존에 관직에 있던 안동 김씨 행자 항렬이 삼사에 포진해 여론과 인사를 주무른다. 백춘 김원행은 홍대용의 스승으로 원래 역사에서는 여러차례 벼슬을 제수받지만 모두 고사하고 서울에는 발도 들이지 않으며 학문에만 힘썼던 사람이지만 여기서는 출사한 것으로 나온다. 6촌이면 조선시대 기준으로는 꽤 가까운 일가붙이이지만 김선행과 마찬가지로 이후 작중에 언급되는 일은 없다시피 하다. 아무래도 선행, 원행, 문행 등의 동렬 친지들보다는 박지원과 홍대용 쪽이 훨씬 인지도가 높고 개성을 부여하기 쉬운 데다가 동네 친한 동생, 처남이라는 설정까지 붙어 있으므로 김운행의 조정 내 파트너라는 입지는 박지원과 홍대용이 가져갔기 때문일 것이다.
김원행의 자는 백춘인데, 6촌인 김운행과 김적행의 자가 각각 춘식, 춘배인 이유가 바로 이 양반 닮으라고 지어 준 것이기 때문이다. 2차 북벌이 시작될 무렵에 김운행이 우의정으로 승진하며 각종 실장단 사업의 총지휘자인 좌찬성 자리가 비게 되자 사업의 연속성 유지를 위해 김원행이 좌찬성에 임명되며 다시 등장하였다.
- 박지원
열하일기로 유명한 실학자. 작중 김운행의 동네 친한 동생으로, 운행에게 서울 바닥의 소문을 이것저것 알려주며 깐죽거리는 역할로 나온다. 원래 역사에서는 친구 이회천의 죽음(1771년) 이후 과거를 포기했지만, 김운행이 홍대용과 같은 이유로 강남대성학당에 집어넣고 특별 교육을 시켜 인해 조선식 나이 15세에 과거에 합격한다. 거의 최연소 과거 합격일 거라고.[39]
청나라의 선진문물에 대한 동경이 있어서 김운행이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자 자신도 슬쩍 넣어달라 부탁한다. 하지만 김운행은 건륭제에게 영조를 후려치리고 사도를 올려칠 언론 플레이를 펼칠 속셈을 품었기 때문에 자칫 박지원이 사고를 쳐서 청나라 비위를 거슬릴까 두려워 거절한다. 그러자 할아버지 연줄을 동원해 기어코 동지사 일행에 끼어 청나라로 간다. 반청의식이 깊은 인물과 의견이 갈릴 때는 총대를 매고 청나라에게 협조적인 제스처를 취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며, 눈에 띄는 선진문물을 닥치는대로 갈취하는 등[40] 조선의 변화를 이끄는 한 축으로 활약중이다.
김운행의 계략과 해병대의 해적질로 청-일 무역이 박살나고 제주가 중개무역항으로 기능하게 되자 김운행의 구슬림에 신규 관직인 관세 첨정으로 임명된다. 김운행이 강탈해온 러시아 견종을 기반으로 거대하고 사나운 '제주견'(濟州犬)을 만들고 홍대용이 맘대로 심은 감자를 옮겨심어 제주의 고질적인 흉년을 해소한다.
이후 북벌 파트에서는 주피터의 후명으로 파견되어 비공식 주명 조선대사 비슷한 위치를 차지하여 거의 구한 말 통감 노릇을 하며 본인의 사상을 실현하는 한편 건륭제의 군대를 대파한 이후의 대계의 얼개를 만들어 김운행과 이훤을 지원한다. 문제는 당시 김운행의 계획은 최대한 빨리 건륭제에게 항복 조약에 도장 찍게 만드는 것이었던 터라 김운행은 박지원을 남중국보다 더 멀리 귀양 보낼 거라고 이를 갈았다.
- 심환지
강남대성 1기생. 다른 춘당 멤버들과 함께 세자가 등극하길 조장하는 바람잡이 역할을 한다. 춘당의 대변인 혹은 나팔수 포지션이라 보면 될 듯. 원역사의 명성과 춘식이가 신숙주의 절개로 확인한 능력치가 절륜한 까닭에 가파른 출세코스를 밟아 일찍부터 고관 반열에 올랐다.
- 유언호
강남대성 1기생.
- 홍대용
홍세화의 사촌오빠. 어째서인지 홍대용을 위시로 해서 실학자 캐릭터들은 다들 인싸스러운 한량 캐릭터로 나온다. 홍대용도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거문고나 타서 과거엔 약하다. 목천 현감으로 온 운행에게 주목하여 인맥을 만들기 위해 사촌 동생인 세화를 중매한다. 운행은 원역사에서 한량 백수였던 실학자들 따위 자기 커리어에 도움이 안된다면서 내치려고 했으나, 세화의 계략으로 결국 결혼하게 되는 바람에, 역사를 바꿔서 원역사에서 백수였던 놈들을 등과 시켜서 세력으로 만들기로 작정한다. 결국 운행이 세운 강남대성학당에서 특별 교육을 받고 원 역사와 달리 과거에 합격한다. 이후에는 김운행의 암행어사행에 동행하기도 하고 김운행이 세자에게 바칠 조선 최초의 퍼리 상업지(...)[41] 발주자로 명의도용을 당하기도 한다.
매제 덕분에 관직도 등용되고 권력 맛을 봐서인지 원역에서 그가 원했을 개혁이나 변화들을 매제 이름을 팔아대서 권력을 남용하여 일으키는 중. 특히 압권은 청나라에서 서양 선교사들과 만나 감자를 보고서는 모든 외교 비용을 꼴아박아서 사오는 장면과, 그걸 김운행 이름을 팔아서 궁궐의 왕의 친경지[42]에서 시험 경작하는 장면. 또 해방별대가 잡아오는 서양인들 중 천문학자들은 죄다 홍대용에게 잡혀가서 국상감의 천문지식이 쑥쑥 상승하는 중이다.
사교성이 엄청나게 좋아서 외지인 상대로는 경계심이 심한 어촌 어부들도 선동해서 폭동을 일으키고, 청나라에서는 외국인 신부들과 환담을 나누며 기물들을 절도한다.[43]
작중에서 주인공이 비록 컨닝과 협잡질을 통했다고는 하지만 장원급제자인데다가 유교경전을 안 읽어본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삼국지 외에 고사를 전혀 모른다는 듯한 평가를 받고 있는데, 그러한 평판을 만든 것이 홍대용일지도 모른다는 묘사가 있다. 주인공이 고사에 무식하다는 식의 말을 듣는 것이 상술한 상업지 발주자 명의도용 사건 이후에 자주 등장한 것을 보면 더욱 묘해지는 부분.
북벌에서는 종사관으로 동행하여 김운행이 하는 일을 기록하는 북정기(北征記)를 저술하며 김운행이 상태창으로부터 부여받은 한니발의 전술(아군위치를 감은 한쪽 눈에 표시해주는 맵핵)을 이용하여 부리는 신기에 가까운 군사운용을 바로 옆에서 직접 보고부터는 감화되어 예전과는 달리 진정한 의미의 완전한 하수인이 되어버렸다.[44]
예조참의로서 통신사행을 가게 됐을 때는 그 유명한 홍진사 본인이 왔다며 왜인들로부터 굉장한 흠모와 선망의 시선을 받는다. 사신단 수행원들이 장사를 할 때 퍼리 상업지를 있는 그대로 팔아먹기는 뭣하니 홍대용이 저술한 북정기를 판매한다는 식으로 표지갈이를 시전한 듯한데, 홍대용 본인은 그런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자기 필생의 명저가 왜인들에게도 열렬한 호응을 얻어 널리 퍼진다 착각하고는 매우 흡족해 한다.
심지어 다누마 오키쓰구와 대담을 가질 때, 정사 홍대용의 도덕적 약점을 찔러서 기선을 제압해 보려는 의도로 '너가 쓴 그 퍼리 동인지 우리나라에도 엄청 퍼져있더라?' 하는 말을 꺼내는데, 홍대용은 자기 북정기에 대한 찬양인 줄 알아듣고는 희색이 만연하여 '내 필력이 모자란 탓에 책으로 담지 못했던 더 대단한 일도 많았다.'는 겸양의 대답을 하는 바람에 오히려 그를 아연실색하여 식은땀이나 뻘뻘 흘리게 만들어 버리기도 했다..
- 김종수
강남대성 2기생. 종조부인 우의정 김상로가 대비의 유조를 의심하며 김운행의 행보에 반하는 언행을 보이기 직전 그도 왕처럼 노망이 들었다며 옷고름을 잡아끌고 훈련도감과 장용영 군사들에게 넘기는 패륜적인 행보를 보인다. 하지만 도성에서 세자, 척당, 김운행과 춘당 세력이 반대파인 국왕파를 숙청하는 살벌한 정국이었기에 가문을 살리기 위한 어쩔수 없는 방책으로 묘사된다.
- 원인손
강남대성 2기생. 노론 탕평파 중신인 원경하의 아들. 도박마 기질이 있어서 춘당에서 도박수에 가까운 계책이 나올 때마다 찬동하며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그의 뛰어난 도박실력은 문서 참조 바람. 종종 김운행의 형 김적행이 약방 영업으로 벌어들인 돈을 '환수'해오는 데 동원되기도 한다. 박지원도 여러 번 당한 적이 있는 모양이다. 작중에서 아버지 원경하가 유언에서 이를 염려하였을 정도... 나중에는 동궁에도 드나들며 이훤의 세자 이정에게 도박의 묘미와 더불어 서양투전(포커)도 선보인 적이 있는 모양이다.
- 안정복
경기도에서 사는 남인 선비. 학문이 뛰어나고 실학에 관심이 많다지만 대과에 못 붙어 가난히 살고 있었다. 이를 찾아온 김운행은 그를 설득해[45] 강남대성에 처넣고 시무3조 개혁의 실무안을 수정하게 만든다. 김운행의 북벌 준비에 인삼스라움과 쌀슐루스 를 넣는다. 북벌 이후에는 공밀레 노릇을 하던 쿡 선장과 함께 백두산 정계비의 내용을 조작한다.[46]
백두산 정계비를 "서쪽 국경은 산해관, 동쪽 국경은 흑룡강으로 조작한 이후로 발해 상경 용천부의 유적을 탐사한 듯 하다.
평양으로의 천도 및 칭제건원 제안을 꺼냈다가 서울 각지에 집중적으로 투자해놓은 자산과 묶여있는 이권을 생각한 김춘식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건 덤.[47] 이 일로 김운행에 의해 옥에 며칠 갇혔다가 풀려났는데, 이쯤이야 선비에게는 길가다 붙잡혀 싫은 소리 들은 정도 밖에 안 되는지라 별 원한이라 할 것도 없었고 오히려 김운행이 초대형 관제개혁을 준비하는 걸 알게 되자 자신은 썩은 기반을 다시 세우기도 전에 금지붕을 올리려는 어리석은 짓을 했다면서 관제개혁 연구에 매진한다.
이후 의정부 및 육조 산하에 대강 뭉뚱그려져 있었던 조선의 관제 체계가 업무별로 세분화 된 실장 체계로 대개변하면서 본인의 관심사와 특기를 십분 활용할 수 있는 만주척식실장 자리를 받아 1차 북벌 이후 만주 지역의 개척에 힘쓰고 있다.
4.3. 소론
작중 노론에게 밀리고는 있지만 조정을 양분하는 당. 주인공 김운행은 노론인지라 그닥 사이가 좋지 못하다. 그러면서도 이권을 나눠먹기 위해 합심해야 할 때는 다 같은 서인이 될 때도 있다.- 박문수
암행어사의 대명사와도 같은 그 인물. 작중 그 능력을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현자의 돌 보유자[48]라고 할 정도로 유능한 관료다. 한성판윤 재직 중 김운행이 이금에게 설파한 시무 3조 가운데 평시선덕관 도입으로 인해 도성의 물가가 폭등하자, 모든 물가 안정 같은 계획은 포기하고 쌀과 소금의 가격만이라도 안정시켰다. 그 와중에 김운행이 쌀을 수매하여 이익을 보려하자, 김운행의 부정부패를 뒷조사한 다음 윽박지르나[49], 탕평의 대의를 위한 것이라는 필사적인 설득에 넘어가 김운행과 손을 잡는다.
김운행이 조정에 전방위로 뇌물을 뿌려대서 대체로 평이 좋지만, 박문수 만큼은 뇌물이 통하지 않아서 대놓고 김운행을 탐관오리라고 꼽줄 수 있는 몇 안되는 인물이다. 하지만 박문수도 김운행의 능력은 인정하고 있고 탕평론에 동의하는 정치적 동지인지라 적당히 좀 해먹으라며 다그치는 정도로 그친다. 한편으로는 김운행을 비난하는 소론 인사에게 '김운행보다 나이는 두배인데 지능은 절반이니 네배 못한 놈'이라는 인신공격으로 입을 다물게 만들기도 한다. 웹소설 판에 유례를 찾기 어려운 적대적 협력자 포지션으로 작품의 재미를 더해주고 탐태창의 평가가 올라가는 데에 큰 몫을 하는 캐릭터이다.
영조가 나름 총애하는 명신이기는 하나 애당초 당색이 약하고, 가뜩이나 꼬장꼬장한 성격인데 왕명으로 당한 일도 많아서 이건 아니다 싶을 때면 대놓고 대든다. 작중 현자의 돌 보유자니 국가 연금술사니 개그 밈처럼 쓰이지만, 관료가 무에서 유를 만들었다는 것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라는 어명을 받았다는 소리다. 그리고 어떻게든 결과를 내놓다 보니 계속해서 무리한 요구를 받고, 결과적으로 영조의 어거지에 가장 많이 휘둘리는 사람이 박문수다.
소론 준소의 반란이 일어나자 칩거하지만 김운행의 기획상소로 조정에 복귀한다. 김운행과 함께 반란군과 연합하여 강화도로 들어오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군을 막으러 가게 되는데 이때 김운행을 보고 나라를 위해선 저 홍모적(네덜란드군)이 더 위협적인지 아니면 자네가 더 위험한 적인지 어느 적을 막아야 할지 모르겠다며 김운행이 위험한 인물이 되었다고 투덜거린다. 그도 그럴것이 김운행의 경우 불과 24세 나이에 정3품 당상관, 세자의 최측근, 춘당의 지도자, 해동 맹상군이라 불릴 정도의 부와 인맥, 무엇보다 김운행 본인의 기책이 뛰어나다. 세자의 집권 초기까지는 개인의 친분으로 유능한 공신으로 써먹을 수 있겠지만, 세월이 지나고 세자의 후손들 대에는 높은 권위를 바탕으로 제어 불가능한 권신이 될 가능성이 있으니 박문수 입장에선 김운행의 윗세대인 본인들이 퇴장하면 동세대에 막을 자가 없어지니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김운행이 본인의 재주로 신치운을 생포하고 홍모적을 토벌하는 것을 보면서 그의 재주를 인정하고 결국엔 춘식이의 홍삼 뇌물을 받아들이며 사실상 김운행과 같은 배를 탔음을 암시한다.
원래 역사에서는 소론 준소의 난 이후 칩거하다가 그대로 세상을 떠났지만, 작중 소론 준소의 반란이 진압된 이후에는 노론 동당, 춘당과 원수지면서 파트너가 없어진 영조가 소론을 동맹으로 교체하면서 반란 진압의 공로를 명목으로 삼아 영의정 직위에까지 오른다. 그러나 본래부터 뛰어난 능력과 별개로 당론이나 관직에는 관심이 없었기에 확고한 영조의 편으로 돌아서지는 않는다.
대비의 죽음 이후 폭주하는 영조에게 상식적인 직언을 올렸다가 무시당하자 이미 파직당한 걸 빌미로 영조를 버리고 태업한다. 그러다 사도와 김운행이 복귀해 전권을 쥐게 되자 김운행을 찾아가 대비 김씨의 유조를 전해준다. 대비 김씨는 자신의 유서를 박문수에게만 알려줬던 것.[50] 이것으로 영조를 버린 것이 확실해졌으며 소론의 영수로서 노론 춘당의 영수 김운행에게 소론을 살려달라는 딜을 하게 된 셈이 되었다. 그와는 별개로 평소에 우려했던 것처럼 정변 성공 이후 김운행이 본격적인 권신으로 자리잡는 것을 보고 나라가 어찌될지를 한탄하고 있다.
김운행의 본격적인 국정농단에 한탄하면서도 박문수도 이미 김운행이 갖다바치는 홍삼에 중독된지 오래[51]였기 때문에, 1만 팔기군을 치우겠다고 청나라 황제에게 아첨하기 위해 길가다 칼맞을 짓을 꾸미는 김운행에게 너무 서두른다며 굵직한 조언을 하기도 하고, 도원수가 되어 남해로 출전한 김운행을 감독하는 도체찰사가 되어 활동하는 등 계속해서 적대적인 조력자 지위를 유지한다.
1763년, 결국 원 역사보다 7년을 더 살고 사망한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는 김운행을 불러 진심을 듣고자 하고 승경도 놀이에 빗대어 김운행 본인이 처음으로 밝힌, 자신도 몰랐던 본심을 듣고 끝내 나름대로 그를 인정하는 대답을 돌려주면서 표표히 세상을 떠난다.[52]
본작의 에필로그를 장식한다. 남인의 비상을 꿈꾸던 정약용이 남인의 미래를 망치자 차밭에 불을 지르는 사실상의 정치적 자결을 시도하기 직전 나타나서 정약용에게 조선의 미래를 보여준다.
- 이종성
소론 출신의 영의정. 이금의 탕평책으로 수상의 자리에 오르긴 했으나, 자신을 비토하는 노론의 공격을 받으면 다 때려치우고 도성 밖으로 뛰쳐 나가는 게 일이다. 실제 역사에서는 미수로 그쳐 그런 일이 있었다카더라 야사로 남았으나 본작에서는 실제로 이루어진 궁녀 문씨의 가짜 왕손 음모를, 김문행과 박문수의 협력요청을 받아들여 함께 막아낸다.
- 조재호
이종성, 박문수와 함께 소론의 영수격으로 자주 등장. 소론답게 친세자파지만[53] 김운행과는 기싸움하려다 역으로 창피를 당하거나 꿀빨러 외직으로 갔는데 김운행의 개혁 때문에 일에 치이는 등 악연으로 엮인다. 궁녀 문씨의 뻐꾸기 작전 저지 때도 일익을 담당하나, 문씨를 총애하던 영조의 농간으로 오히려 귀양 간다. 김운행은 여기서도 본인이 탄핵하긴 했어도 영조의 의향에 따랐을 뿐이라는 티를 내고 노론 강경파 김진상의 이름을 앞세우며 귀양길 여비까지 챙겨주는 등 최대한 호감작을 한다. 이후 좌의정으로서 남한산성으로 도망간 왕을 수종하나, 청나라가 세자와 손을 잡고 조선을 공격한다는 망상에 빠진 영조에게 도성으로 돌아올 것을 간언하다가 하옥된다. 세자빈과 세손 형제마저 남한산성을 벗어나자 어명 없이 옥에서 나와 영조를 제압하고 성문을 연다.
- 이일제
김운행의 목천 현감 부임 당시 충청 감사. 당색 문제도 있고 김운행이 날려버린 목천 아전들과 연이 있어서 김운행과 대립각을 세웠지만 김운행의 음모와 본인의 횡령 경력 덕분에 파직된다. 후임 충청 감사는 노론에 김운행과 친한 홍계희가 온지라 김운행만 살판났다. 성을 한 채 해먹는 수준[54]의 횡령을 저질렀지만 조선답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이후 복귀한다. 남한산성까지 영조를 수종하나 희망이 없음을 알고 몰래 성을 빠져나와 세자의 군대에 항복한다.
- 서명응
춘당 서명선의 형. 탕평이라는 영조의 정책 계승 + 북학파를 좋아하는 왕의 취향 덕분에 박문수 사후 우의정에 제수되어 소론의 지도자 격이 된다. 평양 천도를 막아내는 과정에서 부동산 투기를 위해 김운행과 합심하면서 그를 일세의 준재라는 호칭으로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4.4. 남인
작중 거의 사멸한 상태로 제대로 관로에 올라 있는 인물은 체재공 뿐이다. 안정복, 이익 등은 시골에서 살고 있다. 다만 영조의 탕평책 지침 탓에 조정에서 언제든 약간의 발언권은 확보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고 한다. 안정복이나 이익도 적당히 괜찮은 성적만 내면 과거에 붙었을 것이라고. 김운행의 춘당 결성에 큰 영향을 준 세력이기도 하다.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 건 아니지만, 이 시기 붕당은 이미 학풍과는 상관없이 피를 피로 씻는 원한으로 복잡하게 엮인 터라, 김운행이 남인과 타협할 수 있는 신진 정치세력의 포지션을 잡는 걸 목표로 만들었기 때문이다.노소론이 힘을 합쳐서 저지른 평양 부동산 시세 조작에 거하게 휘말려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이후 어떻게든 활로를 찾기 위해 적잖은 남인 준재들이 평양, 혹은 그보다 더 위 만주 쪽으로 이주한다. 김운행의 관제 개혁이 통과되면서 새로이 중하관 자리가 엄청나게 생겼고, 벼슬길이 아예 막힌 과거보단 낫기 때문에 김운행과 손을 잡게 된다.
이훤이 왕위에 오르고 1차 북벌까지 성공하며 조선의 경제와 기술, 문화가 빠르게 성장하는 와중에 사회를 움직이는 중요한 부품으로 기능하면서 남인들의 입지가 전반적으로 원 역사보다 훨씬 튼튼하다. 때문에 의외로 김운행이 주도하는 정국에서 각 당파별로 협치가 잘 이루어지는 편이다. 조선인이라면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삼종혈맥의 수호와 북벌이라는 공동 목표가 있는 데다, 중화는 죽었고 예약은 오직 조선에 있다는 사대부의 자부심, 노론이 다 해먹지 않고 모두에게 이득이 돌아가도록[55] 김운행이 판을 짠 이유도 있다.
- 채제공
작중 등장하는 남인 중 거의 유일하게 조정에서 관직 생활을 하는 인물. 김운행과 함께 주목받는 신진으로, 영조가 김운행과 채제공 두 사람을 함경도 암행어사로 함께 파견해 서로 경쟁하도록 만들면서 연이 생긴다. 원래 역사에서는 정조 시대 남인을 조정의 번듯한 당으로 끌어올리는 미래의 거두지만, 아직은 젊은지라 미숙한 면이 있다. 그럼에도 무척 유능한 인물이기는 하다. 김운행의 돈지랄과 정치질에 당해서 제대로 된 어사행은 해보지도 못하고 거지꼴로 전락한다. 우연히 홍대용을 만나서 어떻게든 어사행을 이어가지만, 홍대용은 매부 김운행을 위해 그의 어사행을 은근슬쩍 방해했다. 그럼에도 뛰어난 능력으로 실적을 쌓자 홍대용은 전략을 바꿔서 사실 김운행의 조언으로 당신을 도왔다고 말을 바꾼다.
이후 김운행 파벌까지는 아니지만 나쁘지 않은 사이가 되었으며, 영조의 폭압적인 면모를 보고 '인조같다'면서 친왕파로서 회의적인 의견을 내비친다. 그렇지만 남인이 처한 상황 자체가 나쁜만큼 영조를 거스를 입장이 아니기에 김운행의 사업에 쓰이던 군기시(軍器寺)[56] 제조가 되자 군기시를 제대로 굴리는 나쁜[57] 짓을 하기도 한다. 세자가 집권한 이후엔 승정원의 병조(국방)담당인 좌부승지로 승진한다.
나라를 성장시키는 목적 자체가 다른 김운행 때문에 애를 먹을 때도 있지만 도움을 주고받는 경우가 단연 더 많다. 김운행의 출세가도가 워낙 가팔라 잘 체감되지 않지만 채제공도 그에 못지않은 고속승진을 거치는데, 이훤과 김운행의 북벌군의 뒷바라지를 한 것은 다 호조참판으로 구르던 이 사람 공이다. 영혼이 빠지도록 고생을 했는지 김운행으로부터 한성의 좀비킹 소리를 듣는다.
외전에서 정약용을 도와서 김운행을 밀어내고 남인의 권세를 높이려 했으나 오히려 김운행의 계략에 걸려 남인과 천주교도가 외세와 결탁했다는 누명을 쓰게 된다. 김운행이 이를 구실로 피를 보진 않겠지만 남인은 평생 고관은 못 되고 실장단에서만 구를 거라는 이야기를 듣고 차라리 자신에게 사약을 내려달라고 부탁한다.
- 이익
성호사설로 유명한 남인 계열 실학자. 안정복보다야 낫지만 가세가 좋지 않았는데 김운행과 짠 안정복이 보낸 선물공세에 끼운 교묘한 질문공세에 넘어가 평시선덕관 제도를 완성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다.[58] 이후 이때 세운 이론을 더욱 발전시켜 조선 최초의 박물학 서적을 낸다. 김운행은 물주라는 명목으로 자기 이름을 공저자에 넣고 제목도 바꾸어 팔아먹는다. 조선에 표류한 서양 학자들과 교류하며 몇 차례 개정증보판까지 냈으며, 그의 학문적 고찰에 따라 시장의 평선관들이 다루는 물목의 해석 자체가 달라져 조선의 시장경제에 워낙 어마어마한 영향을 갖는지라 경제적 풍요까지 누리게 된다. 1763년 졸하는데, 종손인 이가환에게 서양의 학자들과의 교류를 이어갈 것을 당부하고 세상을 떠났다.
- 이가환
완전기억능력을 지닌 천재. 실 역사에선 학문적 능력보다 천주교도로서 유명하나 여기선 종조부 이익에게 박물학 서적을 가업으로 이어받으면서 학자, 관료로서 발전한다. 굉장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어서, 평생 돼지만 친 도축업자들도 구분 못하는 국산 중국산 돼지를 바로 구분한다던가, 조선 내 모든 서양인들의 서적에 대한 기록을 외워두고 누가 부탁하면 그 기준대로만 뽑아준다.
- 정약전
정약용의 형. 자산어보를 저술한 명학자. 실장단 낭청 벼슬을 지내고 있다. 영화가 나온 덕인지 김운행은 정약전을 알긴 했는데, 외딴섬과 낚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해산물 관리부서에 꽂았다가 이가환이 사정사정해서 겨우 한성에 복귀했다고 한다. 동생의 김운행에 대한 적대감을 무모하다고 말렸으나, 결국 체제공을 통해 동생을 도와준다.
- 정약용
외전의 주인공. 15세의 나이에 가문과 자신의 당파를 일으켜 세우고 권신 김운행을 몰아내겠다는 야심을 품고 과거에 응시한다. 작품 초반부에서도 상세히 묘사되지만 과거가 여러가지 의미로 WWE나 다름없는 것인데다, 김운행은 강남대성학원의 설립자이자 대성 출신들을 인재풀로 써먹기 때문에 합격률을 높이려고 온갖 꼼수를 동원해서 박지원은 합격까지 엄청 구르게 된다. 물론 합격자라 해도 권력으로 뭉개버릴 수도 있었지만 대한민국 사람으로 다산 정약용을 모를 이는 없기 때문에 채제공의 우려와는 달리 선뜻 합격시켜준다.
그런데 김운행은 다산 정약용 이름 석자만 알았지 세부사항은 무지해서 하필 정약용이 18년동안 유배생활을 했던 강진 현감으로 발령을 낸다. 그리고 정약용과 면대한 자리에서 '다산아 너 강진 가서 차를 키워야 쓰겠다 때가 되면 다 알게 된다' 식으로 요사한 혓바닥을 놀렸는데, 다산은 정약용이 유배당한 뒤 지은 호여서 정약용 입장에선 '싯팔 다산은 또 누군데' 대놓고 티배깅을 한 꼴이라 한층 악에 받친다.
정약용은 김운행이 겉으로는 위정척사를 내세우지만 뒤로는 해외 밀무역으로 축재를 한다는 혐의를 품고 이를 파헤치다가, 역으로 정약전 정약용 형제가 히드라공화국과 홍차 밀무역을 하면서 김운행을 무고하려 했다는 누명을 뒤집어쓴다.[59] 결국 남인은 김운행에게 약점이 잡혀 영원히 정계에서 고위직에는 못 오르고 실무직인 실장단만 하는 처지에 빠지자 절망하여 김운행이 가꾸라고 명령을 내린 차밭을 밤에 싹다 불태우려고 한다. 그런데 하필 폭우가 내리는 바람에 그마저도 실패하고 좌절한 나머지 기절한 상태로 트랜스 상태에 빠지고 박문수와 만난다. 박문수는 단편적인 미래를 보여주면서 김운행의 성세가 최소한 20년 후까지는 여전히 쇠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는데, 정약용은 낙담하면서도 어쨋든 이 미래를 바꾸어 김운행을 거꾸러뜨리라는 의도라고 생각했지만 박문수는 조선이나 김운행이 아닌 남인의 미래를 묻는다. 생전에 이미 김운행을 인정했고, 죽고 나서는 원래 역사까지 엿본 박문수는 더이상 김운행을 비난할 마음이 없었다. 단지 젊은 인재가 한번 실패했다고 제 손으로 미래를 끝내려는 게 불쌍해서 와준 것이었다. 오히려 어떤 일이 있더라고 끝까지 윤목을 굴리며 승경도를 달렸던 김운행을 본받길 바란다고. 무려 사흘동안 혼절했다 깨어난 정약용은 박문수와 만남을 기억하진 못했지만, 김운행이 지어줬다고 기꺼워하지 않았던 다산이라는 호를 쓰면서 언젠가 김운행과 같은 자리에 설 것이라 다짐하며 외전이 끝난다. 독자들은 박문수-김운행-정약용으로 이어지는 관계를 악우 스승과 제자, 국가 연금술사 라인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4.5. 무관
- 김성응
훈련도감 대장. 능력있는 군인이지만 영조가 정치질로 죄를 주고 파직했다가 죄를 면하고 복직시키기를 반복해 역대 최다 훈련도감 대장이라는 웃지 못할 타이틀을 갖고 있다. 영조는 신들린 정치질로 김성응이 자신에게 감읍해 마지 않을 것이라 여겼지만 정작 김성응은 '근데 어쩔건데? 니가 나 짜르는 거 말고 뭘 할 수 있는데?' 속된 말로 삔또가 상해버렸다. 그러다 김운행의 기지로 파직의 위기를 넘기는 등 수혜를 입으며 춘당에 들어온다. 이후 홍봉한이 훈련대장이 되면서 장용영 대장으로 좌천되지만, 홍봉한도 이미 김운행이 찔러준 뒷돈을 받아먹고 세자파로 기울었던지라 도리어 훈련도감과 장용영이라는 양대 군영에 세자파가 영향력을 투사할 수 있게 되었다.[60] 춘당의 쿠데타가 벌어졌을 때 이미 세자파에 붙어서 대외적으론 국왕파일 수 밖에 없는 이금을 안심시키는 척 하며 병력을 지휘하는 역할을 한다.
조선의 북벌에서도 장용영 대장이 되어 주요 지휘관으로 활약. 1만 보군의 지휘를 담당해 청나라 보군 4만을 붙잡아두면서 이훤이 청군 본영을 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 때 지휘를 보면 그야말로 명장이라는 데 이견이 없을 정도로[61] 활약한다. 또한 요양 전투가 1766년이니, 원 역사상의 수명은 이미 넘긴 셈.
이후 관제 개혁 시작할 즈음 죽었다고 한다. 그 김운행이 북벌의 영웅이라고 불러줄 정도니까 최소 1등 공신 이상으로 대우받은 듯.[62] 김운행의 장남 김이환이 손녀 김설애와 혼인해 사돈 관계가 되었다.
- 윤필덕
함경도 고원군의 군수로 재직 중에 함경도 동부로 암행을 나간 김운행에게 첫 케이스로 걸리며 작품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무관 출신인지라 아전들에게 농락당하다 그들이 저지른 온갖 비리를 대신 뒤집어쓸 상황에 처했으나 목천현과 직산현 시절에 이런 일을 많이 다뤄봤던 김운행의 도움으로 관아를 '정상화'하게 된 후부터는 김운행의 지지자가 된다. 정축하성 당시 훈련도감 파총으로 이훤과 김운행이 중앙군을 장악하는 데 큰 역할을 했고 조선의 북벌 시점에서는 훈련도감 대장으로 공을 세웠다. 김성응 못잖은 베테랑 군인이고 일신의 무력도 한가닥 하지만, 정축하성 당시 인성에 반비례해 무력은 뛰어난 구선복에게 당한 흑역사가 있다. 조선의 북벌 시점에선 훈련도감 대장으로 승진해, 철기를 이끌고 이훤과 같이 팔기에 맞선다.
- 한중량
월송 만호. 아주 눈치가 빠른 인물로 월송의 관할인 울릉도의 밀수 기지를 털어먹고 그곳을 해방별대 사략기지 겸 대 일본 밀수기지로 개조한다. 왜관 폐쇄, 네덜란드 소탕, 흉참당 반란 등 김운행과 자주 같이 활동하면서 말까지 놓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된다. 비단 김운행이 자신에게 이득이 되기 때문만은 아니고, 그가 단순한 탐관오리가 아니라 어떤 미래를 위해 큰 그림을 그리고 있음을 짐작하고는, 그를 통해 일어날 변화를 적극적으로 지지할 뿐만 아니라 역모를 일으켜도 돕겠다는 암시까지 던진다. 이후 경상좌수사를 거쳐 삼도수군통제사까지 승진하며, 삼도수군통제영이 남해해병통제영으로 개편되면서 조선 최초의 남해해병통제사(약칭: 남해사)가 된다.
조선의 북벌에서도 가장 수가 많은 남해해병을 지휘하며 유럽연합군과의 접촉, 기습, 기동 작전 상당수를 현장에서 지휘하며 중역을 맡았다. 전쟁 승리 이후 대선거포실 실장을 맡게 된다.
조선 무관 중 가장 김운행에 가까운 사고방식을 가진 인물로, 한반도 주변에 위대한 항로를 열어버린 주범이다. 다만 김운행보다는 인물이 훨씬 진중해서 종종 웃기는 장면을 연출하기는 해도 그다지 개그캐 속성은 아니다. 김운행의 행보를 따라가면 조선이 새로이 태어날 수 있다고 믿고 따르는 타입이다. - 홍약수
홍세화가 추천한 담양 홍씨 족벌. 본래 부정을 저지르다 들켜서 파직당한 상태였으나 홍세화의 추천으로 복귀한다. 서해 해방별대를 지휘하며, 천진에서 몽골군과 영국군의 난전을 들이쳐서 양군을 모두 괴멸시켰다.
- 박재하
전라좌수영 좌수사. 본래부터 막강한 수군을 거느리던 전라좌수영의 지휘관인만큼 팔도에서 최대규모의 해방별대를 거느리고 남해의 밀무역을 마구 털며 기세를 떨쳤다. 그러나 지나친 부정부패로 탄핵 저격을 맞고 비틀대던 상황에 마침 밀무역업계에 선이 필요했던 김운행이 춘당을 움직여 구제해준다. 본래 당론에 상관없는 인물이었으나, 이 일로 인해 영조를 경계하게 되어 춘당에 가입한다. 흉참당 반란 이후 삼도수군통제사 겸 경상우수사로 승진한다.
- 장지항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로보캅[63] 장붕익의 손자이자 로보캅 주니어 장태소의 아들이다. 본 역사에서는 능성 구씨와 친하게 지내며 축재하다가 정조에게 날아간 인물이나, 여기선 정축하성으로 영조가 축출되자 능성 구씨를 손절한 덕에 살아남았다. 드물게도 탐욕스러우면서도 유능한 인물.
함경도를 침공한 길림, 흑룡강 팔기를 사전의 작전대로 포위한 후 남해해영과 연합해 괴멸시키는 것에 성공한다. 여기에 더해 서쪽 요동에서 벌어질 결전에 공을 세우기 위해서 김이환을 설득해 의병들에게 함경도 뒤를 맡기고 관군인 기병 2천을 동원해 동만주를 휩쓸어 버린다.
- 신흡
김운행이 훈련대장 하다가 북부대공[64]으로 전임한 시절 거느린 휘하 장수로 처음 등장한다. 김성응, 윤필덕 등의 노장들 은퇴 이후 새로이 조선 육군의 핵을 맡을 것으로 기대되는 장수다. 2차 북벌에서도 요동군을 지휘해 친정군과 호흡을 맞춰 동시에 산해관을 친다. 뭔가 미심쩍어하는 기성세대 장수들과 달리 마치 이훤마냥 김운행을 100% 신뢰하고 있다.
- 이언섭
경기 수사. 후일 전라 좌수사로 옮긴다. 배에 홀딱 빠진 사람이라서 네덜란드 선원들과 배가 손에 들어오자 서양식 배를 더 만들자고 김운행을 매우 졸랐다. 김운행은 쇄국주의자라 이언섭을 막았지만, 이훤의 즉위 이후 조선이 해양국가로의 발걸음을 시작하면서 전라좌수사로 임명되어 꿈에 그리던 네덜란드 배의 대량 복제(와 해적 행위)를 시작한다.
- 조지명
세자익위사. 소론. 동궁 인맥으로 엮인 김운행과 공동출자하여 춘식목장을 설립하나뇌물 마련하느라본인 지분은 다 털어먹고 목장은 완전히 김운행의 손에 들어간다. 이후로는 파락호가 됐는지 등장이 없다.
- 구선행
금위대장. 조선시대 무인 명가인 능성 구씨. 영조의 어가를 호위하며 남한산성에 입성한다. 그러나 수어청, 장용영이 영조를 떠나고 친척인 구선복이 이끌던 어영청도 패전하면서 남한산성의 영조 정권은 몰락했음이 확실해진다. 구선행은 사세가 기울었음에도 군주나 사직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吾事畢矣) 충성을 관철한 채 죽을 것을 결의하고 옹주와 세자빈, 세손과 왕손이 탄 가마를 인질로 잡는 초강수를 두어가며 세자의 군대와 대치한다. [65] 그러나 가족들을 위해 직접 움직인 세자의 용기와 김운행의 계책, 그리고 상태창의 스킬 덕분에 세자빈의 가마는 세자의 진영으로 무사히 들어가고 구선행 본인은 어지에게 맨손으로 목이 꺾여 사망한다.
- 구선복
조신들의 지지를 거의 잃은 영조가 새로이 발탁한 무관. 구선행과는 인척으로 어영대장에 임명된다. 원래 역사에서 사도세자가 죽어가는데 앞에서 떡을 먹으며 비웃는(...) 미친 행보를 보여서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내몬 영조조차 탐탁잖게 여겼고, 정조의 증오를 사서 후일 완전히 망한 인물이다.
인성은 최악이지만 전투력은 매우 출중해 초인에 준하는 어지 정도는 아니더라도 보통 전투에서는 무쌍을 찍을 정도다. 영조가 남한산성으로 파천하자 김운행을 막기 위해 한양에 남아 어영청을 지휘한다. 김운행이 세자와 김성응, 홍봉한을 대동하고 한성부의 혼란을 틈타 대비의 유조를 확보하러 비변사로 직행하자 어영청 군사 이백을 거느리고 막으러 간다. 그러나 표철주, 달문의 사보타주와 훈련도감 군사들, 네덜란드인들과 교전으로 시간을 허비하여 춘당 수뇌부를 확보하는데 실패하고 수많은 훈련도감과 장용영 군사들에게 포위당하고 만다. 그 상황에서도 단신으로 편곤을 휘두르며 무쌍을 벌이고 세자의 바로 앞까지 내달려 일기토를 벌이기 직전까지 갔지만 김운행의 애완견인 삼복이들[66] 난입으로 피를 뿜으며 사망.
- 신민
왕의 친위대 장용영의 대장으로 큰 체구, 맑은 눈망울, 풍성한 수염을 가진 대머리라고 묘사된다. 영조가 훈련도감을 노골적으로 푸대접하면서까지 키운 장용영은 정작 흉참당 반란에서 뻘짓에 팀킬까지 저지르며 제대로된 성과를 내지 못한다. 결국 훈련도감이 다시 친위대가 되고 반대로 장용영은 찬밥신세가 되며 신민 역시 오합지졸 그 자체인 수어청으로 좌천당한다. 수어청이 남한산성을 지키는 부대이니만큼 영조의 파천 이후 다시 등장하나 영조의 갑질에 지쳐 홍계희와 함께 세자에게 투항한다.
- 이한응
충무공 이순신의 후예이자 한중량의 뒤를 이은 남해 해영 통제사. 원 역사에서 김성응을 체포하라는 영조의 명에 태업을 일삼다 영덕으로 귀양까지 갔던 행적을 고려하여 김성응 계파의 무인으로 등장한다. 오명의 대만 정벌로 인해 영국의 거의 마지막 동방 근거지라 할 수 있는 필리핀을 정벌하는 원정함대의 총사령관이다. 혼례 후 직부전시를 통해 남해 해영의 병마평사[67]로 부임한 김이환을 참모 삼아 원정을 떠난다. 영조 때문에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야만 했던 국가 연금술사 박문수도 미치지 못할, 진정한 물질 창조자 충무공 이순신[68]의 후예답게 원정에 소요되는 치중의 추가분을 나가사키와 항주, 류큐에서 셀프로 마련하는데, 나가사키 근해에서는 오카야마 번의 무역선을 상대로 충무공이 첩자를 막고 어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발급했던 '해로통행첩'을 가진 화물 대부분만 받고 절찬리에 판매하였으며, 항주에서는 오명 예부시랑 육비를 협박해 배와 군량을 뜯어내고 겸사겸사 무역과 대민봉사도 한다. 해로통행첩이 뭐냐고 묻는 일본 해상한테 '통제사 영감, 해로통행첩이 없다는데요? 이새끼 왜구인데요?' 하는 부하에게 '그럼 어쩔 수 없지. 어떻게 죽을 지나 선택하라 그래라.' 하는 모습이 백미이다.
4.6. 기타
- 홍억
홍세화의 부친. 김운행의 장인. 조카 홍대용처럼 대과에 붙지 못했지만, 일단 장인이라는 이유로 강남대성에도 안 끌려갔다. 딸이 김운행에게 물들어 악독해지는 모습을 보고 탄식한다. 사위를 잘 둔 덕에 벼슬길에 들고 평탄한 승진가도를 걸어 의주부윤이 되어 북벌을 마친 이훤과 김운행을 맞아들이는 것으로 다시 등장한다. 국경의 책문을 해체하여 그 목재로 북벌군이 압록강을 건널 다리를 놓는 비범한 결정을 하기도 했다.
- 정선
조선 후기의 유명한 화가 겸재 정선. 본래 무과에 시도했으나 잘 안되고 화가가 된 인물이다. 그림을 팔아 가계를 지탱하고 있는데, 씀씀이가 큰지라 후배인 변상벽에게 손님 좀 소개해달라고 갔다가 김운행이 주문한 작품을 보고 신문물을 접하게 된다. 그 이후 김운행의 지원으로 부산에 가서 왜관에서 압수한 자료들을 토대로 새로운 춘화 화풍을 완성시켰고 일본에서도 정선이 확립한 신개념 춘화물이 일본산을 압도할 정도로 널리 퍼지게 되었다.
- 변상벽
역시 조선 후기의 유명화가이자 고양이를 잘 그리기로 유명했던 화가이다. 본작에서는 인물과 동물 묘사에 능했던 점을 반영했는지 조선 최초의 2차원 퍼리 상업지(...)에서 퍼리 담당(?)을 맡고 있다.
- 인절미 평선관 박씨
김운행이 일으킨 나비효과를 묘사하며 등장한 엑스트라로, 노량진에서 인절미에 매겨지는 소비세를 담당하는 평시선덕관이자 독자들의 웃음벨. 작중 평선관들이 수익 파이를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분주하게 활동하는 장면에서 유황의 유통에 발을 걸치기 위해 '누런 덩어리는 역시 인절미 평선관이 담당해야 하지 않겠냐'는 되도 않는 개드립을 치는 것으로 처음 등장한다. 해당 장면에서 수 많은 독자들이 터져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고 작가가 그걸 인지했는지 가끔씩 나레이션으로 언급된다. 이후 똑같이 노란색이라는 이유로 금으로도 담당을 넓힌듯 하며, 성호 이익의 박물고에 대해 해박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있다던가아무거나 노란색이니 지 담당이라고 우기는 게 아니고?, 김운행의 독백에 의하면 적어도 노량진에 한해서 김운행보다 박씨의 발언관이 조금 더 크고, 고관들과도 관계가 여럿 생겼다는 언급이 있는 것을 보면 꽤나 수완이 뛰어난 인물인 듯.
210화에서 드디어 직접 등장한다. 오리지널 인물이나 나름 명문가인 반남 박씨 출신[69]의 서자로 칭제를 주장한 것으로 유명한 김약행의 문인이었다. 북벌을 준비하는 (것처럼 보이는) 김운행에게 조선 예산의 최소치의 3년 분량에 해당하는 뇌물 30만냥을 바치며 평선관들 역시 북벌에 참여하게 해달라며 요청한다. 평시선덕관 제도를 통해 발달한 상업, 과학, 예술, 통역 등에 참여해 돈을 벌며 새롭게 대두하는 부르주아 계층의 상징으로 묘사된다. 심지어는 '황색의 왕'이라는 수식어까지 붙을 정도. 여담으로 백색 평선관의 경우 혼자 먹으려 들었다간 죽는 사이즈[70]라서 수십명이 나눠먹었기에 박씨 정도로 품목을 독점하지는 못한다고. - 천렵 평선관 조씨
천렵(강에서 하는 고기잡이)에서 나오는 물목을 중개하는 평시선덕관. 성호 이익이 영국인들과 지식교류로 수달을 어류에서 빼버리는 바람에 만물고 개정판이 나오고 벌이가 줄게 되자 장복이에게 잉어를 뇌물로 주고 김운행에게 청탁을 넣는다.
후일 조선의 북벌에서 만주로 갈 의병을 모집하고 있는데, 인절미 평선관 박씨와 다른 파벌이라고 하며 그 황색의 왕만은 못해도 나름 큰 세력을 이루었다고 한다.
- 박제가
원 역사의 그 유명한 실학자. 아버지 박평이 생전 김운행에게 정치적으로 도움을 준 일이 있어서 아버지 사후에도 원 역사보다는 나은 생애를 보낸다. 비슷한 연배인 김이환의 심부름을 하는 신세로 김이환에게 속아 김적행의 약방에 일손으로 끌려갔다가 이덕무, 유득공 등과 만난다.
5. 일본
임진왜란 직전의 조선과 마찬가지로 내부 정쟁 외에는 150년에 달하는 장기간 대규모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시기의 일본. 덕분에 군사적 사정도 과거의 조선과 다르지 않아서, 몽골군 수천에게 막부군 수만명이 격파당하거나, 소집령을 내려도 장부상 병력의 반의 반도 모이지 않는 등 병림픽을 벌이다가 규슈의 태반이 초토화당하고서야 영국군을 끌어들이게 된다.영국군의 지원과 청의 혼란으로 몽골군은 격퇴하나, 이후엔 비어버린 규슈의 이권을 두고 다누마 일파와 다른 세력간의 경쟁이 붙는다. 마침 북벌을 시작한 조선은 다누마에게 이를 빌미로 식량을 수입한다. 북벌 전쟁 이후 조선을 동아시아권 패자로 인정하는 대신에 후명과의 무역로 복구에 도움을 달라고 제안한다. 그러나 이는 대조선 무역으로 엄청난 부를 독점하던 대마도 후추 번의 반발을 불러와 다시 분열의 조짐이 인다.
- 마츠우라 케이센
유학자이자 외교관으로 유명한 조선과 일본의 외교를 담당하던 인물 아메노모리 호슈의 손자로, 원 역사에서는 본인도 양국간의 외교를 담당하던 관리로 일한 사람이다. 여기서는 봉쇄된 왜관에 파견을 나왔다가 입항과 동시에 해병대에게 사로잡혔는데, 이후 김운행이 주도하는 일본과의 밀무역 파트너가 된다.
그 후에는 조선의 인삼, 책 등에 더해 명화가 정선, 변상벽의 네코미미 춘화를 일본을 통해 외국에 유통하고 있다. 300년 후 미래를 보고 온 김춘식의 센스가 가미된 작품이라서 찾는 사람이 매우 많으며, 시세의 배를 불러도 팔리며 아예 선금을 받는 것까지 가능하다고 한다.
이후 김운행과 짜고 울릉도 왜관을 개설하게 된다. 마츠우라 가문은 조선과의 울릉도 중개무역으로 10여년간 크게 번성했으나, 다누마 오키쓰구가 대청 전쟁 종결 이후 조선과 외교를 통해 대륙 무역을 부활시키고, 조선에게는 그 대가로 나가사키 상관이라는 특혜를 주려 하자 대마도가 몰락한다는 사실을 알고 격하게 반발한다.
결국 다누마의 정치 실력에 밀려서 막을 수 없었으나, 조선과의 연줄만 제대로 유지한다면 마츠우라 가문의 성세는 유지할 수 있다는 계산 하에 금수령을 어기고 금은을 거래하는 등 조선의 충실한 주구가 되었다.
에필로그 이후 일본 제일의 해양 세력이 되어서 유구의 공격을 막아냈다고 한다. 피해는 컸으나 이걸 빌미로 다누마의 중앙 정부와 더욱 험악히 맞섰다.
- 요시다 시치사에몬
쓰시마 번의 왜관 관수. 부산포 사건의 책임을 쓰고 할복했다. 죽으면서 김운행이 꾸몄다고 우기지만 무시당한다.
- 히라가 겐나이
김운행이 21세기 지식을 동원하여 새로 그러낸 조선풍 춘화가 마츠우라 케이센을 통해 일본에 들어와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데, 이때문에 자기가 그린 춘화가 잘 팔리지 않자 마츠우라의 밀무역상단을 통해 조선에 들어가 이 화풍을 배우고 자기도 빚쟁이들을 피하고 한 몫 잡을 생각으로 울릉도에 도착하나, 배를 타기 전 인삼 무역에 대해 날렸던 공수표가 거짓으로 들통나 뱃전에 묶여있는 신세였다. 이후 김운행에게 신병이 넘어가서 태엽으로 움직이는 자동딜도[71]를 만드는 노예로 전락한다.
화완옹주의 난 당시에도 조선 최고의 검사라면서 나섰다가 불알을 걷어차이고 기절했다.[72] 다만 이후 묘사를 보면 실제로 적을 여럿 무찌른 모양이다. 심지어 일본 본국에도 소문이 나서 사무라이들이 일본에 오면 한번 붙어보고 싶다고 했을 정도.
시마즈 시게히데
시마즈 가문 가주. 막대한 빚을 모르쇠와 류큐 착취로 버티는 사쓰마번 다이묘. 쏠쏠한 벌이가 되던 착취는 하루아침에 건륭제의 분노를 사서 몽골팔기의 침공을 불러온다. 급한대로 영지에서 1만 병력을 준비했지만, 큰 전쟁이 없는 오랜 평화 탓에 군사의 정예가 크게 떨어져서 실전경험이 풍부한 몽골팔기 5천 병력에 크게 패한다.
결국 가문이 망해 자결하기 직전까지 몰리고서야 막부의 지원병을 받게 된다. 그러나 다누마의 말에 의하면 시마즈의 가신들은 이미 대부분 죽어 나자빠져서 규슈는 무주공산이 되었다고 한다. 시게히데 역시 공성전 끝에 몽골팔기에게 전사하면서 시마즈 가문은 멸망했다.
- 다누마 오키쓰구
멍청한 쇼군 대신 실질적으로 일본을 통치하는 권신.....이나 청나라의 대군이 규슈를 침공하고 비협조적인 다이묘들과 정청가도 따위의 무쓸모한 의견만 내는 부하들 탓에 대전쟁을 온전히 감당해야 하는지라 스트레스를 잔뜩 받는 불쌍한 역할. 다행이 영국이 동아시아에 개입하면서 지지부진했던 전쟁에 활로가 보이자 환호하면서도 전쟁 와중에 막부에 반항적인 번[73]들을 제압하는 한편, 전쟁을 막은 것을 치적으로 삼아 도쿠가와를 몰아내고 본인이 새로운 쇼군이 될 야욕을 품는다.
교전비 십대일에도 머릿수로 밀어부치는 일본군, 세포이 기병대를 위시한 영국군의 활약과 조선의 방해로 끝내 몽골팔기가 전멸하자 이를 자신의 공훈으로 삼는다. 그러나 규슈 일대는 말 그대로 초토화가 되고 인접한 혼슈 영지들도 완전히 말라붙어버린다. 다만 영국군도 청나라와의 해전에서 엄청난 피해를 입는다.
그 후 자신의 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조선 통신사를 유치할 필요가 있었기에 조선에 쌀을 할인해서 수출하는 등 조선의 전쟁을 간접적으로 지원했다. 덕분에 종전 이후 통신사가 유치되어 홍대용과 협상을 한다. 중상주의자인 다누마는 강남과의 무역선을 부활시키는 대신에 조선의 동아시아 패권 인정과 나가사키의 고려관을 설치해 무역에서의 특혜를 약속한다. 그러나 이는 대조선 무역의 대부분을 독점한 대마도의 추락을 의미했기에 대마도와의 갈등은 심해졌으며, 이후 대마도는 다누마의 정책에 반발하며 조선과 밀수를 하고 있다.
- 테라다 무네아리
북경 회맹에 참석한 일본 측 사신단의 일원. 전쟁에 별 지분이 없는 일본의 사신단은 딱히 회맹에 할 말은 없었고 사실 쇼군이 대를 잇게 해준 비약(커피)을 얻는 게 목적이었는데, 무네아리는 거기에는 관심없고 순수 무예에만 집중하는 호전적 별종이라고 한다. 검, 창, 총술까지 다채롭게 익혔다고. 춘식조의 명성높은 검객 히라가 겐가이와 싸워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북경에 안 온 탓에 불발했다. 다만 본인의 의견이야 어떠든 간에 사신단이 비약을 얻기 위해 밤중에 김운행과 만날 약속을 잡자 호위를 위해 갔었는데, 거기서 김운행을 암살하려는 몽골 병사들과 맞부딪친다.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사신단을 지휘하며 맞서다가 이훤과 조선군이 지원을 온 덕에 살아남았다. 다른 일본 사신단은 시간벌이밖에 못할 때 혼자서 몽골병사를 셋이나 상대하는 기염을 토했다. 물론 나중에 온 이훤은 테라다도 암살자인 줄 알고 청룡언월도를 휘둘렀고, 칼로 막다가 박살나는 참사를 겪었다.
에필로그 이후 그대로 조선에 정착한 게 밝혀졌다. 조선 주상 전하의 무예를 흠모해 익히기 위해 남았다고 하며, 정약용과 엮였으나 애당초 무네아리의 목적은 조선 국왕의 무예를 견식하는 것이라서, 중간에 김운행 측으로 갈아타서 정약용을 엿먹인다. 다만 김운행이 남인 신진사대부 한줌 밟는 걸 도와줬다고 왜인을 조정에 발탁할 리도 없어서 다시 정약용의 손을 잡는다.
6. 유구
사쓰마에게 착취당하던 상황이었으나, 근래 해방별대가 점차 노출되는 것을 숨겨야 했던 김운행이 청나라 조정에 유구-사쓰마에 대한 정보를 제공. 자신이 십수년간 농락당했다는 생각에 열받은 건륭제가 양광총독 이시요에게 명령해 항주의 모든 전선이 남하해 유구를 해방시키고, 곧이어 몽골팔기가 사쓰마 본진인 규슈마저 무너뜨리면서 자유를 찾는다.이후 청나라조차 분열하자 조선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대부분의 설탕을 조선에 수출한다. 그 과정에서 조선이 생포한 수만 단위의 영국군 포로들올 노비로 사들여 각지 호족들에게 분배하고, 군선을 사는 등 해양 요새국가화를 진행한다.
의외로 이 노비제가 유구에 잘 맞았는지 곧 엄청난 부를 쌓아올려 유구 국내의 민심도 매우 좋아졌다고 한다.
- 쇼보쿠 왕
유구 국왕. 당시 사쓰마의 설탕 착취에 시달리면서, 청나라에 만주어 표문을 올리는 등 다방면으로 연줄을 꾀하던 정치가다. 원하던 외국의 구원은 조금 늦긴 했지만, 김운행의 수작 덕에 청나라 대함대가 몰려와 사쓰마, 영국군을 격퇴하고 유구를 독립시킨다.
그 후에는 조선과 설탕 무역을 하면서 기아 상태인 나라를 먹여살린다. 청-유럽 전쟁 이후 김이환이 데려온 유럽인 노비들 대부분을 사들이고, 일부를 되파는 과정에서 조선산 유럽식 군선도 받으며 해상 강국으로 유구를 승천시킬 꿈을 갖는다.
종전 이후. 강력한 함대를 몰아서 자신들을 착취한 사쓰마 번을 공격한다. 물론 폐허라지만 규슈를 침략당하게 둘 수 없었던 막부가 반격했고, 쇼보쿠 왕은 치열한 공방 끝에 후퇴해야 했다고 한다.[74]
7. 중국
7.1. 청
지금 청이 전쟁 중이라고 뒷통수를 치자는 소리는 말도 안 된다. 싸우다 지친 맹수를 잡는다는 비유는 그럴듯하지만, 그것도 맹수 나름이다. 지금의 청은 상처 입고 절뚝거리는 표범이 아니다. 물 먹다가 코를 살짝 물리는 바람에 악어를 짓밟아 핏물로 만들고 있는 아프리카 코끼리에 가깝다.
김운행(3화)
중원을 차지한 대제국. 작중 시점에서 최전성기[75]를 달리고 있는 대제국으로, 주인공 김운행은 아예 이쪽에는 최대한 연관되고 싶지 않아한다. 심지어 현 황제가 주변의 적성국을 죄다 학살한 건륭제인만큼 더더욱. 김운행이 청나라에 가기 전까지는 간접적인 영향 정도밖에 안 받았지만,[76] 나비효과로 인해 받게 된 영향력은 일본이나 유럽보다 더하다.김운행(3화)
둘러싼 모든 세력들 중 조선을 제외하고, 러시아, 일본, 준가르, 위구르, 몽골(일부)와 수년간의 전쟁 끝에 우세를 점하고 소강 상태로 접어들었고, 일본 원정도 초기 목적이던 사츠마 토벌은 성공했으며, 네덜란드와 영국의 연이은 해상전도 판정승이나마 거두는 어마무시한 위업을 달성하고 있다.[77] 그러나 준가르-티베트는 막대한 사상자를 본 끝에 하나로 뭉쳐 반청 세력으로 다져졌고, 영국은 청에 수십년 빨리 아편을 팔아치우기 시작했으며, 남중국의 한족 상인들은 반란을 일으킨다.
결국 4만에 달하는 유럽 연합군, 10만에 달하는 러시아-준가르 연합, 마찬가지로 수만에 달하는 강남 반란군과 백련교 반란으로 소모를 견디지 못하고 만주로 복귀를 천명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이 모든 사태를 조장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운 조선과 마지막 일전을 벌인다. 그러나 성공적으로 만주를 탈환하고 제국을 재건해야 할 건륭제가 여기서 패배하고 자결하면서 오히려 근본인 만주를 상실한다.1777년 판도
이 시점까지만 해도 강남의 해안 인접 성들만 차지한 후명, 아직 천산산맥에서 내려오지도 못한 준가르, 만주를 차지한 조선, 산둥을 차지한 백련교국에게 포위당하긴 했어도, 이웃국 대부분이 대규모 전쟁 여력이 없어서 여전히 중원 최강국이었으나[78] 부찰부항이 사천, 운남, 한중을 차지하고 진을 건국하면서 멸망 위기에 처한다. 진나라가 오명과 전쟁에 들어간 사이 후계자 경쟁을 끝내려 했으나 준가르-내몽골 연합이라는 비상사태로 그쪽에 전력을 기울인다.
조청전쟁이 끝나고 1770년대. 진, 준가르-몽골, 조선이라는 최소 3면 전선이 형성되어 망국의 위기를 맞고 있다. 건륭제의 아들 중 가장 연장자로서 사실상의 황태자인 영성은 동생들을 별다른 지원 없이 전선으로 내몰아 연달아 죽임으로 자신의 권력을 확고히 하나 이 탓에 동서북 모든 전선이 구멍이 나버리고 말았다. 결국 동북 방어선을 박살내고 들어온 조선에 의해 방어군이 괴멸당하고 북경이 점령당하면서 천자국 청나라는 사실상 멸망한다. 이후에는 조선의 괴뢰국이자 완충지대로 남게 되었다. 그나마 몽골제국 판도의 준가르와 삼진을 먹은 진나라 수준의 촉진은 조선에게 굴종하고 내몽골과 장안을 내놓았기에 최소한의 방어선은 확보되었다.
- 건륭제
청나라 6대 황제. 네팔, 준가르, 대만, 베트남까지 공격한 십전무공(十全武功)으로 청나라 강역을 최대한으로 확장한 군주. 작중에서는 준가르를 멸절시킬 작정으로 군사를 준비하고 있다고 언급된다. 실제로 준가르를 학살해 아예 지구에서 종족을 지워버린 전과가 있어 히틀러는 건륭제에 비하면 그냥 애송이 수준이며[79] 현대 중국 정부도 신강에 새로 들어온 입주민 위구르 상대로 똑같은 짓을 한다고 언급된다.
얼굴도 제대로 등장하지 않은 시점에서 김운행이 신숙주의 절개로 자금성 방향을 바라보자 서쪽 하늘을 가득 채워서 노을로 착각한 가히 자연현상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기운을 보여줬다. 아예 원 역사에서도 시인이랍시고 쓸데없이 거창하게 건륭제 본인이 칭했던 인류의 주인[80]이라고 김운행이 평했을 정도.
이후 김운행을 친히 접견하는데, 김운행이상태창 스탯 덕분에만주어를 비롯한 어학에 능통한지라 만주어로 접견하는 김운행에게 호감을 가졌는지 여러가지 호의를 베풀어 준다.[81] 한편 김운행이 퍼뜨린 조선에 대한 불온한 소문들 때문에 건륭제는 준가르 원정에 투입할 병력의 일부인 1만명을 동생 애신각라 홍염에게 주고 심양으로 파견하게 한다.
본래라면 자신의 십전무공을 달성하기 위해 원정을 '일부러' 쪼개서 보내는 어이없는 짓까지 벌였겠지만, 준가르의 아무르사나가 김운행의 나비효과로 매우 국제적으로 놀면서, 대 준가르 원정은 청의 온 국력을 들여도 될까말까 한 승부로 변하고 말았다... 요약하면 본래 십전무공에 나뉘어서 격파당해야 했을 중원 북쪽 세력들이 죄다 합심해서 청나라와 대적하는 수준. 이 와중에 조선만은 이전과는 달리 어느정도 고분고분한 태도를 보이자 자신의 정치적 실적을 위해 조선의 중계무역을 지원해주기로 한다.
이후 만주족 미청년인 '니오후루 허션(화신)'을 측근으로 기용. 전권을 내려주고 온갖 지방 착취로 재정을 짜내서 30만 대군을 재출병시키는 등 착실하게 망국화 트리를 밟는다. 그러나 부찰부항에게 맡긴 이 적로군은 남쪽으로 내려가서 싸우다가 남명 이시요의 반란으로 귀로가 막히고, 천진의 영국군과 북방의 러시아-준가르군을 막지 못하게 되자 만주 복귀를 천명한다. 그렇게 만주로 귀로를 정하고 마지막으로 조선군과 결전을 치른다. 그러나 이미 압도적으로 높은 위치에서 내려온 그는 철저히 준비한 조선군과의 결전 끝에 패배, 뒤주 속에 숨어 도망치다 조선군에게 붙잡힌다. 그리고 병자호란 때 인조가 당한 굴욕을 당하지 않기 위해 가장 강한 이가 황제 자리에 오르라는 유언을 화신을 통해 남긴 후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82]
여담으로 본래 역사의 십전무공에 비해 이 역사의 십전무공은 정말로 스케일이 무지막지해진지라 진짜 십전노인이라 자칭해도 농담거리가 아니라는 감상이 있다. 등장할 때마다 어마어마한 포스를 보여주면 작중 최종보스 급의 위상을 드러냈던 것에 비해 몰락은 심히 비참했지만 최후에는 결국 자존심을 지키고 죽었고, 그래서인지 적어도 북경에서부터 건륭제를 따른 부하들 중 배신자는 없다고 한다.[83]
- 애신각라 홍염
청나라 황족으로 다라과공군왕. 엄청난 부정부패를 저지르는 권신으로, 김운행은 귀여울 정도로 많은 부를 축적했다. 자식 중 한명이 정선에게 얻어온 조선산 춘화를 보고 돈벌이가 되겠다는 계산에 조선과 연을 이어두려고 한다. 이를 위해 일부러 심양으로 관작을 옮겼으며 김운행에게 우호적인 신호를 보내면서 밀수업을 대대적으로 벌이기 시작한다.
정축하성이 끝난 시점에서 김운행은 조선의 물량을 싹 쓸어모은 홍삼을 뇌물로 보내려 했지만, 박문수의 조언을 들어 잠시 정세를 관망하는 사이에 건륭제가 준가르와 전쟁을 벌이기 위해 팔기 1만을 거둬가고, 조선의 답신을 강요하는데다가, 밀수로 벌어들이는 돈이 너무 쏠쏠했던 홍염이 오히려 김운행에게 업무적 협조를 구하기 위해 뇌물을 보내게 된다.[84] 김운행 왈, 자신이 지금껏 받은 뇌물은 기브 앤 테이크에 가까웠고 진정한 의미의 뇌물은 홍염이 보낸 것이 처음이라고.
- 뉴호록 화신(니오후루 허션)
건륭제가 대전쟁을 위해 새로이 꼽은 총신. 청나라판 김운행, 오키쓰구 이상가는 권신으로, 건륭제의 총애를 업고 무지막지한 지방 착위로 만든 적로군 30만을 징병한다. 이 적로군 30만은 백련교와 러시아-준가르 군을 거의 패퇴시키는데 성공했으나, 이후 남방 전선이 계속 꼬이면서 결국 유럽군을 제압하는 데는 실패, 천진까지 넘어가면서 그간 전황을 숨겨온 화신은 목숨도 위험해진다.
결국 건륭제에 의해 대권을 상당히 빼앗기고 일개 신하로 돌아가 만주 복귀를 준비하나, 자신이 준비한 작전이 또 실패하자 절망해 자살하려다 건륭제에게 용서받고 만주 귀로에 합류한다. 그러나 요양 전투에서 패배하고 요양성에 갇히자 건륭제의 대타로 변장하고 나가나 알아본 김운행에 의해 코끼리에게 얻어맞고 포로가 된다.
건륭제에게 굴욕적인 조약을 시키기 위해 화신에게 아편을 들려서 보냈으나, 상황을 짐작한 건륭제가 평온하게 대하자 그간의 은혜가 생각나서 좌절하던 차에 건륭제의 유조를 받는다. 이 유조는 김운행에게 들키기는 했으나 내용이 가장 강한 자라는 추상적이고 분열하기 딱 좋았던지라 이훤은 그냥 화신을 돌려보냈다.
- 오륵등
금려팔기 양황 도통. 부찰부항이 떠나고 화신이 좌천된 이후 청 군부의 주요인물 중 하나. 둘에게 눌려 힘을 쓰지 못했으나 천명 이전 프로토콜 개시 이후 화신의 제안으로 성명부의 지원을 팔기 금려팔기 3천을 이끌고 흥경성을 치던 조선군을 공격했다. 그러나 지휘관 신흡은 딱 하루만 격렬하게 반격해 오륵등을 밀어낸 이후 도주해버렸고, 분노해 그들을 쫓던 오륵등은 상태창의 힘으로 군을 지휘한 조선에 의해 흥경성은 성대로 빼앗기고, 쫓던 조선은 자신의 다섯배인 1만 5천으로 모여버린 상태라 오히려 쫓겨서 도망쳐야 했다.
결국 건륭제가 만주 파천을 위해 몰고온 청나라 본군에 합류해 다시 전쟁을 치르나, 조선군의 전술과 발전된 무기에 고전하다가 이훤의 편곤에 맞아 사망한다.
- 청군자부
일본 원정군 중 몽골팔기를 이끄는 장군. 몽골제국과 청나라의 잔혹한 면모대로 사쓰마의 인구 대부분을 학살하고 경관을 곳곳에 만들어 일본에서 제노사이드를 일으켰다. 영국에서 보낸 중국원정군 일부가 나가사키를 점령하자 일군을 이끌고 데지마 시가지에서 영국군과 시가전을 벌인다. 몽골팔기의 파괴력을 이용해 영국군을 몰아붙였으나 근복적인 화력 차이와 세포이기병대의 활약으로 큰 피해를 입고 이를 갈며 후방으로 퇴각한다.
그 후 결국 본국의 지원을 못 받고 괴멸했다고 나온다.
- 아리곤
청나라 병부상서. 요양 전투 당시 요하를 건너지 말고 성과 협공해 양동할 것을 건의했으나 거부되었다. 전투가 청의 패배로 끝난 후 15황자 영염을 데리고 도망쳤으나[85], 함경도에서 우회해 동만주를 거쳐 들어온 조선군에게 붙잡힌다.
- 색극신
청군자부 사망 후 내몽골을 통솔하는 군부 중역. 화신의 중재로 3만 기마를 소집해 영국군과 싸웠다. 그러나 천진 인근에서 짜고치는 공격과 후퇴 와중에 조선의 기습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는다.
없는 인구에 짜낸 군대가 또 큰 피해를 입기는 했으나, 어쨌든 요양 전투 이후 청나라에서 가장 유력한 군부 인사가 되었다. 그러나 색극신 본인부터가 내몽골 입장상[86] 청나라를 무시할 수가 없을 뿐, 건륭제의 정치적 수명이 얼마 안 남았다고 여기는 등 반청 기질을 드러냈기에 건륭제의 다섯 아들들은 색극신을 쉽사리 믿지 못한다.
결국 건륭제의 6남 영용이 몽골의 칸 직함을 가져가자, 아무르사나의 준가르 산하로 이반해 청나라에 칼을 들이댄다. 이후 행적은 준가르 항목 참고.
- 북경방위대 오랑캐맨
건륭제 슬하 17명의 황자들 중 작중 시점에 생존해 있으며 당시 기준으로 나이 열다섯이 넘어 성인이 된 이들로, 건륭제의 만주행에 차출되지 않고 북경에 남아있다가 화신을 통해 건륭제의 일명 '가장 강한 자' 유조를 전달받은 5명의 황자들이다. 구성원은 건륭제의 4남 '''영성(永珹)''', 6남 '''영용(永瑢)''', 8남 '''영선(永璇)''', 11남 '''영성(永瑆)''', 12남 '''영기(永璂)'''이다.[87] 김운행은 이들을 묶어 '북경방위대 오랑캐맨'이라 칭한다. 현대 한국인 입장에서는 혼동하기 십상인 인물들을 전대물에 빗댄 골때리는 명칭을 부여하여 한군데에 묶음으로써 웃음과 개성부여를 한큐에 처리해 버린 작가의 미친 센스가 발휘된 지점이다. 266화에 누가 누구인지 한 번 짚어준 후로는 아예 레드, 블루, 그린, 옐로우, 핑크라고만 칭해진다.. 외숙부 부찰부항과 그가 끌고 나간 병력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 제위계승 경쟁에서 승리하고자 하였으나 모두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까닭에 실패하고 오히려 더 큰 혼란을 부추기게 된다.
숙부 부찰부항이 진을 건국하고 사천, 운남, 한중을 모조리 차지하는 바람에 국토가 또다시 절반으로 쪼그라들면서 이제는 중원의 과반도 차지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제서야 오형제는 황제의 직함을 나눠가지면서 과두정을 설립한다. 레드 영성이 만주의 한, 블루 영용이 몽골 대칸, 그린 영선은 한족 천자, 옐로 영성이 티베트 전륜성왕, 핑크 영기가 위구르의 수호자라는 직함을 나눠 가졌다고 한다. 당연히 1~3까지는 명분도 강력하고 그에 따른 실권을 주장할 수 있지만, 이미 청에서 이탈해버린 티베트와 위구르의 그것도 종교적 의미가 더 큰 직함을 받은 둘은 불만이 많다.
진나라와 몽골이 청나라를 대대적으로 침공하면서 기반인 몽골이 날아간 블루는 레드에게 떠밀려 오합지졸을 이끌고 몽골군을 상대하다 색극신에게 패배한 뒤 자결, 옐로와 핑크는 장안을 지키다 유의미한 저항도 못해보고 진나라군에게 도륙당했으며, 그린은 한족 천자가 직함이라는 이유로 역시 억지로 청 수군을 이끌고 황해에서 해방별대를 막다 조선이 그동안 개발한 신무기를 얻어맞고 전사하는 등 주도권을 쥐고 동생들을 사지로 내몬 레드를 제외한 모두가 2차 대전쟁 초반부터 전멸해버렸다. - 애신각라 영성
건륭제의 사남. 생존해 있는 건륭제의 자식들 중 가장 연장자. 본래 역사에선 먼 동생인 영염에게 밀릴 운명이나 여기서는 부친과 동생의 패배 이후 동생들과 경쟁 끝에 거국적 합의로 '만주의 한' 자리를 차지해 사실상 청의 통치자가 된다.
그러나 치열한 전쟁과 회맹대전 끝에 결국 조선에 항복하면서 준가르와 진을 끌어들여 자신의 목숨을 보존하려 했고, 패륵으로 스스로의 직위를 낮추었지만 조선에 의해 회맹에서도 철저히 배재되며 동생인 영염이 옹립되는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사실상 시한부 인생이 된다. 최후의 발악으로 아무르사나가 시킨 김운행 암살작전을 시도했다. 김운행이 암살 시도를 미리 예상하고 새로운 스킬을 활용해 모든 상황을 조종하는 바람에 처참히 실패하자 은근슬쩍 그냥 여진족 시종이라고 신분을 세탁해 살아남았다. 그러나 회맹이 마무리된 뒤 처형된다.[88]
- 애신각라 영염(실제 역사의 가경제)
건륭제의 15남으로 나이가 어린데다(1766년 당시 9세) 생존해 있는 아들 중 일곱 째인지라 입지가 넓지 않아서 정말 만사가 잘못됐을 때를 대비한 최후의 저위후보 겸 부황의 수발을 드는 구실로 건륭제의 만주행에 따라가게 되었다. 조선군에게 깨강정이 되는 바람에 졸지에 부황의 도주를 위한 디코이 역할을 맡게 된다. 김운행이 부리는 카자크 병사들과 홍대용 등의 추격을 받으며 사르후까지 쫓겨 도망치다가 사로잡히는 신세가 된다.
그 후 조선이 만주 원주민들에게 조선인이 되라고 선전하는 홍보 마스코트가 되어서 만주를 돌아다니고 있다. 회맹대전에서도 끌려와 형을 제거한 후 허울뿐인 옥좌에 앉게 된다. 물론 실권은 하나도 없다.
7.2. 촉진(蜀秦)
부찰 부항이 청-영길리 전쟁 후반기에 모집한 30만 대군 중 10만 가량을 데리고 운남성으로 들어가 세운 국가. 본래는 운남을 공격해온 버마 군을 제압하고 직례로 귀환할 예정이었으나... 버마군과 운남성 남방에서 전쟁을 벌이는 사이 요양 전투에서 청군이 괴멸하고 만주를 실함해 건륭제가 사망하자, 그대로 운귀총독 창보와 같이 거병해 제국을 세웠다.목표는 제국의 부활로 건륭제의 유언인 '가장 강한 자'가 되기 위해서 대륙을 다시 통일할 것을 목표로 정복활동을 벌인다. 건국 직후 북상해 사천을 차지하고 아무르사나와 협상해 천산산맥을 내주는 대가로 관중을 별 저항없이 차지하면 옛 진나라의 구도를 만들었다. 이후 중원의 중간다리인 호북, 호남성까지 얻기 위해 오명과 전쟁을 벌인다. 이시요가 괜한 분산 행군을 한 덕에 대승을 거두나 오명과의 근본적인 병력 수 차이와, 전략 목표인 호남의 주도권 차지와 안정화는 실패해 물러난다.
직례에 남은 최후의 팔기 다음으로 많은 만주족 병력을 가지고 있으며 초기에는 이들이 주력이던 탓에 오명을 완전히 밀어내지 못했으나,[89] 일반병의 수라면 가장 많은 오명과 팔기의 본진인 청을 상대해야 하는 입장상 이후에는 강족, 한족, 회족 등의 다민족을 끌어들였다. 물론 전공에 따라 계층을 나누기에 몽골군과 맞먹는 피의 학살을 벌이는 중이라고 한다.
오명과의 전쟁 이후 몽골군과 같이 3만 병력을 이끌고 청을 쳤으며 밀고 밀리는 회전 끝에 조선군이 북경을 차지하는 바람에 급하게 몽골군과 같이 북경에 입성했다. 그러나 구두룡섬에 제압당하고 다시 장안 서쪽으로 물러난다.
- 부찰 부항
버마 전쟁에서 공을 세운 장군. 건륭제의 처남이기도 하다. 적로군 30만을 이끌고 백련교의 난을 거의 진압, 조선군에게 뒤를 맡기고 25만에 달하는 군을 이끌고 유럽군을 잡으러 갔다. 계속되는 상황 오판과 보급의 난항으로 병력 10만 이상을 분할시키고 가벼워진 10만의 기동으로 먼저 유럽군을 상대하려 했지만 천주는 이미 조선군에 의해 비게 된 상황. 군사력을 거의 잃은 민절총독 이시요에게 보급을 요구한다. 그러자 이시요는 오히려 반란을 일으켜 후명에 붙고, 때문에 돌아갈 길도 막히자, 사천 지역으로 가서 버마군을 제압하고 관중을 지나서 북경으로 돌아가겠다는 연락을 화신에게 보낸다. 이건 가능할지도 모를 뿐더러 대체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릴지 모르는 일이었기에 부찰부항의 이 연락 이후로 북경에서는 적로군 복귀는 포기하고 만주 천명 이전 프로토콜을 시행한다.
그리고 1년여가 지났을 때는 어떻게든 버마 군을 물러나게 하고 군대의 안정도 찾았으나, 그 사이에 직례-만주에서 조선과의 전쟁으로 건륭제가 죽고 만주를 상실했다고 듣자 경악한다. 이에 운귀[90]총독 창보에게 설득되어 '가장 강한 자'는 자신이라면서 거병, 버마군과 협상해 운남성 남쪽에 영토를 일부 내주고 종전하고, 준가르와도 타협해 천산산맥에서 퇴각시킨다. 그렇게 사천, 운남, 한중을 차지하고 진나라를 건국한다.[91]
그 후에는 호북-호남성을 두고 후명과 충돌한다. 정예한 직례팔기의 힘으로 병력을 지나치게 나눈 이시요 휘하의 명군을 연파하고 이시요의 본군까지 공격하려 했지만, 후방에서 이시요가 나눠둔 군세가 나타나자 자신들이 너무 지친데다가 적진 한가운데 들어왔음을 자각하고[92] 물러난다. 그러나 강남을 먼저 차지해야겠단 생각을 바꾼 거는 아니라 여전히 오명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
- 부찰 복강안
부찰부항의 아들로 진국 세자. 전선에 있는 부찰부항 대신에 진왕의 권한을 행사하고 있다고 한다. 영국인들의 동맹 제안을 현실로서 거부하고[93], 산서성을 정복해 청을 멸할 길을 열려고 한다.[94] 그 후 직접 전선까지 가서 장안을 정복하고 동생과 함께 청나라를 공격해 한단까지 점령지를 넓히는데 성공한다.
그 후론 괜히 북경을 공격해 청나라의 마지막 본군과 싸우는 위험을 감수하기보다는 조선을 압박해 나서게 할 계획이었으나, 조선 측에서 먼저 진과 준가르의 구조 요청을 돕는다고 선포해버리자 가만 있으면 자기들 힘으로 싸울 자신이 없어서 조선을 끌어들인 것이라고 천하에 퍼지게 되었다.
결국 준가르와 동맹해 청군과 싸우다가 북경이 함락당해 허망히 회맹에 갔고, 아무르사나와 짠 최후의 반격인 김춘식 암살도 실패해 다시 장안까지 퇴각한다. 이후 자신을 불신한 아버지 부찰 부항이 내세운 동생 복장안과 경쟁하면서 사태 타개를 위해 서쪽으로 진출했다.
- 부찰 복장안
부찰복강안의 동생. 아직 나이가 어린지라 관중을 점령하자 한고조의 대업이 눈앞에 있다며 들떠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나름 영리한 면모가 있어서 형인 복강안이 김운행의 의도에 끌려가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을 보고도 지금의 난세라는 반상 자체가 김운행이 만들어 놓은 것인데 거기서 내려갈 생각도 없이 올라와서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한 게 의미가 있느냐고 생각하지만 말하지 못한다.
- 창보
청나라 운귀총독. 청나라가 역량을 상실했음을 직감하고 건륭제의 유언인 '가장 강한 자'를 상기시키며 부찰부항을 설득해 그가 운남과 사천을 기반으로 거병하도록 부추긴다.
7.3. 오명(吳明)
강남에서 일어난 제2 대명제국. 수도는 천주→남경. 기본적으로 명의 후계국을 자청하나 대외적으론 제2 대명이라는 호칭보다는 오명, 남명, 후명 등으로 불린다. 조선에서는 '오명'이라고 불렀기에 항목은 그렇게 작성한다.[95]장강 이남에서 거병했으나 당시 부찰부항의 10만 대군이 주둔하던 호북과 호남 등의 내륙은 차지하지 못한 탓에 영토가 해안가로 치우쳐 있다. 운남과 대만 등도 각자 진나라와 영국군에 의해 차지하지 못했다. 시작은 강남에서 반란을 준비하던 천지회+기존 신사 계층+유럽 군이 연합해 건국했다. 사실 유럽 연합군이 강남 신사계층을 포섭할 계획으로 만든 누더기 국가라서 그 어떤 명분적 정당성도 없었다.[96] 그러나 조선이 재조지은을 외치며 천주를 공격하고 후명 1대 황제 주피터를 탈환하면서 순식간에 명분에 불이 붙었으며, 양광총독이자 청나라 측 주요 지휘관이던 이시요가 청나라의 책임추궁을 피하기 위해 후명에 붙으면서 어떻게든 그럴 듯 한 국가로 만들어진다.
본래는 어느정도 내부 정비 후에는 산둥성으로 북진하려 했으나, 박지원의 간언으로 남쪽의 대만을 공격해, 교환비 1대100이라는 엄청난 피해에도 기어이 탈환했다. 상처뿐인 승리를 만회하기 위해 호북~호남성을 두고 진나라와 전쟁을 벌인다. 명장 이시요의 지휘 아래 질적으론 좀 불리해도 정면 승부를 벌인다면 괜찮은 싸움을 할 수 있었겠으나, 한창 거만해진 이시요가 상태창이 있어서 가능했던 구두룡섬 작전을 따라했다가 수만명이 분산 격파당하는 참패를 당하고 한동안의 전쟁 동력을 상실한다. 그나마 진나라의 전략목표(호남-호북의 주도권 획득)을 막은 것이 위안.
이에 이시요는 반대파에게 숙청당할 거라는 두려움을 못 이기고, 조선의 지원을 업어서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고 사실상 후명의 실권자로 군림하게 된다. 그 후에도 계속되는 반조선파의 준동으로 조선과의 관계가 난항이었으나, 김운행의 주도로 조선 해방별대와 연합해 마닐라(필리핀 일대)를 공격하면서 관계를 회복하고 반 유럽 기조를 확실히 한다.[물론]
그러나 큰 문제가 있었는데, 조선의 회맹이 점차 다가오면서 오명은 천자가 아닌 주나라 포지션에 놓일 것이 강제되어가자 이를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지게 된다. 당연히 명나라의 후계국을 자치하는 이들로선 대륙을 정복하고 오명이 아닌 대명으로서 천자국이 되는 걸 당연하게 여겼기 때문. 그러나 건국 후 여러 번 전쟁에서 쓴 맛을 본 지라 아차하다간 전방위적 포위를 당하는 게 두려웠기에 자신들의 원수인 영국의 함대를 다시 끌어들이려 한다. 그러나 영국의 상황이 엉망진창이라 끝내 실패하고, 아들이 죽고 강남 사람들의 원수인 영국을 끌어들이려는 것이 밝혀져서 이시요는 몰락하고 회맹 대전이 끝나고 중원의 정세도 굳어버리고 만다.
- 주피터([ruby(朱, ruby=Zhū)] Peter)
유럽 군세와 강남 지역의 여러 어중이떠중이 세력들이 모여 만든 괴뢰국가 후명의 초대 황제. 서양인과 매춘부의 혼혈아로, 낯빛이 희고 머리털이 붉은 기가 도는 것이 손권을 연상케 한다는 묘사가 있다. 명 제2제국이 오명으로 불리는 것은 옛 오나라 땅에 터를 잡기도 했지만 이런 주피터의 외견상 특징 때문이기도 하다. 프랑스인 사제들로부터 길러져 천주교 세례를 받아 세례명이 베드로(Peter)인지라 부활한 명나라의 황제로 선택되어 황성인 주([ruby(朱, ruby=Zhū)])씨 성을 쓰게 되는 바람에 그리스로마신화의 주신이자 그 희대의 강간마 주피터와 불리는 이름이 같게 되었다. 당시에는 흑인 노예들에게 그리스 신들의 이름을 붙이곤 하는 일이 있었는데, 이름부터가 사실상 유럽 세력들의 필요에 의해 내세워 진 허수아비 그 자체임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조선 해병들에 의해 구출(?)되고 양광총독 이시요와 친조선파 한족 선비들이 따라붙은 후로는 여전히 꼭두각시지만 조선의 강력한 보증(...)에 의해 형식상으로나마 대명천자로서 존숭받고 있다.
진-명 전쟁 이후 조선에서 명나라의 제사용품을 반환받으면서 일년에 수십번씩이나 제사를 지내는 처지가 되어버린다. 이건 이시요의 정권 안보를 위한 노림수인데, 황실의 제사라는 게 아무리 가볍게 치러도 준비에만 수일, 실행에도 하루를 잡아먹는 일이라서 설령 주씨 황족이 정치에 관심을 갖더라도 그럴 시간을 빼앗으려고 한 것. 주변에 믿을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는 상황에 그나마 자신을 동정이라도 해주던 선교사들이 알려준 성경에 의존하고 있다.
- 고산휘
강남 상인. 청나라의 구리 공무역에 편승해 설탕을 팔러 관선의 선장이 되어 항해를 시작했다. 당시 해방별대가 남해를 완전히 장악하고 날뛰고 있었고, 본인도 해적을 경계해 십수척의 무장관선도 모자라 본인들도 충실히 무장했지만 홍모적 해적들이 나타나자마자 관선들이 도주하는 바람에 본인들만 표적이 된다.
그렇게 제주도 인근까지 도망치다가 조선 수군의 도움을 받아서 겨우 목숨을 건진다. 하지만 돈은 돈대로 잃고, 구리 무역 실패도 자신이 독박쓸걸 생각하면 청나라로 돌아가도 미래가 없었다. 그런데 제주 목민관 조위진이 '우연히' 표류한 일본인들이 내놓은 구리를 설탕과 바꿔준다고 하자 감격하며 거래를 받아들인다. 사실 이는 제주도에 중계무역 기지를 만들기 위해 김운행과 해방별대, 제주 관아가 합심해 벌인 사기극이다. 홍모적은 네덜란드 배를 흉내내 함대를 만든 조선 해방별대고, 제주도에 쌓인 구리는 울릉도 왜관에서 매매해 준비했다. 하지만 진상이야 어떻든 고산휘는 제주가 일본보다 가깝고, 뇌물도 한쪽(조선)에만 바치니 싸게 먹히고, 홍모적 해적의 마수에서 안전한 땅이었던 지라 앞으로도 계속 오기로 한다.
강남 반란 이후로 천지회 반군의 간부가 되었으며 조선에게 쪽배와 군수물자를 수입한다. 정확한 직함을 불명이나 오명 건국 후에도 나라의 중신이자 상인이 된 듯. 해방별대에게 은근히 강남-일본 직통 항로를 다시 열면 안되겠냐고 찔러보지만 해적이 많아서 위험하다라는 말에 이해하고 물러난다.
- 이시요
청나라 양광총독. 건륭 치세의 신하. 양광 총독으로서 건륭제의 반서양 기조로 제임스 플린트나 다른 상인들에게 주의할 것을 경고한다. 그러나 역시나 상인들은 말을 안 들었고, 김운행이 채이성을 시켜 전한 류큐-사쓰마의 침탈 관계를 건륭제에게 보고한다. 덕분에 건륭제의 십전무공 가운데 하나가 일본 공략이 된다.
항주의 해적-수군 함선 이백여척을 이끌고 영국 전열함 세척을 공격한다.[98] 전투가 끝나 영국 배들이 걸레짝이 되어 도망칠 때야 상황이 좀 이상하단 걸 깨달았지만, 자기 공을 위해 김운행 의견대로 영-사쓰마 동맹을 자신이 쫓아냈다고 보고한다.
후에 쳐들어온 유럽의 군세 4만을 상대로도 진압군을 지휘한다. 유럽 연합이 아편 중독자 3만을 우라돌격시키는 무식한 전법을 쓰는 바람에 휘말리나, 본인도 군을 뒤섞어서 대혼란을 유도하는 걸로 12만 대군의 절반이 죽어나갈 동안 4만 유럽군의 1만을 전사시킨다. 그러나 이후 부찰부항이 자신의 부족한 보급을 이시요에게 보충하라 요구하자 고민끝에 반란을 일으켜 주피터에게 붙는다.[99] 이후 내각대학사 겸 도독대명제군사 겸 민절양광남직례총독 등의 온갖 작위를 죄다 가지면서 남명의 사실상 실권자가 된다. 일단 허울만이라도 산둥반도로 군을 진군시키려 했으나, 박지원이 남쪽의 양인들을 먼저 처리하라 제안하자 울며 겨자먹기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다.
대만 정복전은 교환비적으로 큰 손해를 보고 끝나지마는 이후 진나라와 호남성을 두고 다시 승부를 벌인다. 문제는 병력의 질적으로 우세를 점하기 어렵다는 생각인지, 괜히 춘식의 구두룡섬을 따라하려다가 부대의 6~7할이 패망해 수만명이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죽는 우주구급 관광을 당하고 만다.
그러나 운이 좋게도 그렇게 갈라놓은 부대 수천명이 우연히 부찰부항 직속군의 측후방을 공격하자 부찰부항이 물러나긴 했으나, 이 때문에 반대세력들에게 탄핵당해 후명에서 순식간에 정치적인 위기를 맞는다. 이에 김운행의 도움을 받아 해방별대를 남경에 끌어들여 친위쿠데타를 일으켜서 사실상의 이씨막부를 세워버린다. 그 과정에서 숭정제라는 색채를 지우려는 조선과 충신 코스프레를 하려는 본인의 이해관계가 일치하여 조선에서 명나라에 대한 각종 제사용품을 반환받는다. 이시요를 등에 업은 조선 상인들은 강남의 부를 엄청난 속도로 빨아들이면서 민심을 잃는다.
물론 이시요도 그렇게 중원의 질서에서 외면당하고 있을 생각은 없었기에 고민하다가 마닐라에 아들과 군대를 보내서 영국을 다시 끌어들일 계획을 세운다.[100][101] 결국 에필로그 이후 영국군을 끌어들이려 한 사실이 밝혀져서 조선파 신하들의 거병에 무너져 사망한다.
- 육비
친조파 오명 대신. 회맹 대전 이후 수년 만에 영국을 끌어들이려 한 이시요에게 저항해 해방별대의 힘을 업고 거병해서 끝내 이시요를 무너뜨리고 정권을 차지했다고 한다.
7.4. 태평천국
산둥의 백련교 반란군이 우여곡절 끝에 산둥성을 점거, 인근 성까지 영향력을 확대해 건국한 국가. 수도는 옛 제나라의 수도이자 산동의 도시인 임치.본래의 백련교 군세는 부찰부항이 이끄는 25만 청군의 진압에 사정없이 밀려 붕괴했으나, 청군을 돕는 척 교도들의 대피를 지원한 조선 덕에 명맥을 유지했고, 후에는 돌아와서 천진 지역에서 몽골-영국군을 격파하는 데 가세했다. 그 후 그대로 산둥성으로 복귀해, 세력을 재건한다.
연이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터라 조선의 지원으로 식량이라도 받는 백련교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102] 급격히 세력을 확대한 백련교는 사실상 하나의 나라로 성립된다. 마찬가지로 피폐하나 체급의 차이로 아직 군사적 여력이 있는 남쪽 오명이 백련교를 흡수하려 했으나, 조선의 반대로 대만 전쟁, 대진 전쟁 등을 치르느라 시간을 더욱 벌 수 있었다.
그렇게 1차 전쟁이 끝나고 소강 상태에 접어들자 백련교는 태평천국을 건국한다.[103] 그 후 대조선 동맹을 확고히 하고 조선이 온다면 '정연가도'를 위해 길을 열어줄 것도 약속하나, 이를 눈치챈 청나라 전군의 대공세를 맞는다. 나름 빠르게 국가의 체계를 갖춰가던 태평천국이지만 청나라의 마지막 팔기와 정예군의 공세에 위기에 몰린다.
다행이 조선이 청나라로 진군하면서 산동에 공세를 하던 청군이 빠져나가고, 조선군과 조선에서 복귀한 백련교 연대와 힘을 합쳐 청군을 격파한다. 회맹에서 하남성과 산서성 일부, 오명과의 국경을 청나라로부터 할양받으면서 영토를 크게 넓히고 회맹대전의 또다른 승자가 된다.
- 맹찬
백련교 18대 호법. 초대 태평천왕. 화북 산둥에서 거병을 준비하는 백련교주 왕륜의 부하. 동춘공으로 철저히 단련하여 단 일격으로 사람을 때려눕힐 정도로 뛰어난 무공을 지녔다.[104]. 하지만 머리 굴리는 일에는 약해서 왕륜에게 놀아나고 있다. 교주의 양녀인 오삼랑을 짝사랑해 큰 공을 세우고 고백하는 꿈을 꾼다. 무기 밀무역을 하던 평안도 병마사 김성우가 김운행 암살을 의뢰하자 공을 세우고픈 욕심에 받아들인다. 그러나 김운행의 상태창 스킬들과 어지의 개입으로 암살은 실패했고 붙잡힌다. 전후사정을 파악한 김운행은 을지문덕의 불꽃 스킬을 써서 불에 면역인 모습을 과시하며 자신이 동춘공의 시조이자 정통이고 왕륜은 짝퉁 사기꾼에 불과하다고 사기를 친다. 결국 맹찬은 김운행의 말빨에 넘어가 왕륜은 사이비교주이고 오삼랑 역시 딸이 아닌 애첩이라는 진실을 받아들이고 김운행의 화웨이 휴대폰이 된다(...) 귀국해 왕륜을 제거하고 오삼랑과 함께 교를 장악하고, 조선에서 군수품 밀수를 확장한다.
백련교 반란은 기세를 올리며 산둥을 완전 점거하는 듯 했으나, 청의 권신인 화신이 지방 재정을 파탄시켜가며 모은 30만 진압군에 의해 패망한다. 맹찬은 간신히 몸을 빼서 조선으로 돌아와 김운행에게 자신의 밑에 들어올 것을 권유받자 동료 오삼랑을 구해주는 대가로 합류한다. 그 후 김운행의 조선군에 섞여들어와 산둥에서 자신을 따르는 백련교도들 수천 명과 오삼랑을 구해낸다.
그렇게 수천명 정도나마 구해서 조선에 대피했다가 천진 전투 막바지에 내려와 엉망진창이 된 영국과 몽골군을 격파한다. 그 후 건륭제의 만주 이어, 남명의 대만 공격으로 어떤 여파도 받지 않는 틈에 조선과 무역하며[105] 그 후 산동성의 민생이 어느정도 펴고 체계가 잡히자 호법들과 중신들과 함께 태평천국을 건국한 후 초대 천왕이 되었다. 조선에서 '정연가도'[106] 서신을 받자 자신의 춘식 진인을 향한 믿음은 흔들리지 않는다면서 감격한다.
그러나 청나라도 이를 읽고 있었기에, 잠시 진군을 늦춘 촉진과 준가르 대신에 조선을 막기 위해 백련교국을 향해 공세를 가한다. 수적 열세로 수도 임치가 포위당했으나, 두려움이나 춘식에 대한 원망은 하나도 하지 않았으며[107] 자신들은 끝까지 싸우리라고 맹세한다. 다행히도 조선이 늦지 않게 천진을 통해 산해관을 포위했기에 산동성의 청군은 후퇴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조선군과 함께 청군에게 승리하고 회맹에 태평천국 왕의 자격으로 참석해 조선의 편을 들어 많은 영토를 받아냈다. 조선에서도
엄청난 외곬수에 로맨티스트이기도 하다. 조선에 파견됐다가 김운행에게 세뇌되어 백련교로 돌아와서 조직을 탈취할 때 자기가 늘 애달프게 사랑해왔던 오삼랑이 칼을 겨누며 막아서자 '찌르시오. 그대가 긍정해주지 않는 삶은 내게는 아무 의미도 없으니까.'라는 간지폭풍 대사를 치기도 하고, 이런 면모는 맹찬이 깊이 감복하여 추종하는 김운행에게도 마찬가지인지라, 꼭 이훤이 김운행의 모든 말과 행동을 어떻게든 비틀어 좋게 보고 해석하는 것처럼 춘식 진인의 말이라면 정말 털끝만한 의심도 없이 금과옥조로 삼아 수행한다. 장복이가 국산, 카오루가 일본제 폰이라면 맹찬이야말로 김운행의 훌륭한 중국제 폰이라 칭할 만하다. 꼭 사랑이나 신뢰만이 아니라 스스로의 신념에 대한 믿음도 굳건해서 왕이 된 시점에도 스스로 전장에 나서며 부하들 모두 충성스레 맹찬을 따르며 항전하고 있다.
- 오삼랑
백련교 18대호법 중 하나. 초대 태평천왕비. 남편이 죽고 백련교에 투신한 여인으로 쌍검의 달인이다. 본래 교주 왕륜의 애인 겸 양녀였으나, 내심 그가 맘에 들지 않았던 데다가 왕륜을 죽인 맹찬이 목숨을 걸고 자신에게 선택권을 주자 그와 합류한다. 그러나 맹찬이 조선의 도움을 받기 위해 바다 건너로 떠나고 자신은 조선과 청의 진압군에 쫓겨서 산속에 숨어있다가 다른 호법에 능욕당할 위기에 조선군을 데리고 나타난 맹찬에게 구출된다. 그 후 조선에서 교도들을 모아 다시 수백명의 전투부대를 확보하고 천주를 쳐서 황제를 구출하고, 서해해영과 같이 천진에서 싸우던 몽골, 영국군을 괴멸시키는 등 활약한다. 이후 맹찬과 함께 산동성을 재건하다가 조선의 연락을 받자 기나긴 백련교 역사상 처음으로 교가 직접 나라를 세울 수 있다면서 협조한다. 다만 이때 맹찬이 국명을 춘식도인의 봉지 이름을 따서 아오지국으로 짓자는 것에 대해 나홀로 반대하는 소소한 개그씬을 보여주기도 했다. 당시에 나머지 호법들은 이 땅을 봉래 아오지마냥 옥토로 만들자....는 맹찬의 광신도스러운 말에 동의하고 있었다.
- 왕륜
백련교주. 산둥성에 숨어서 백련교를 키우고 군사를 조련하며 청나라에 반란을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평안도와의 무기 밀수 등도 왕륜이 주도해 시작한 일. 그러나 실제로는 다 늙었음에도 탐욕과 여색에 미쳐서 양녀로 들인 오삼랑을 애인으로 만들고, 교도들은 쌀 한톨 아껴서 무기를 사고, 호법들은 죽을 각오로 무예를 연마하고 싸우는데 본인은 돼지같이 살쪄서 혼자서는 거동도 못할 판.
결국 조선에서 김운행을 만나서 눈을 뜬 맹찬에게 살해당했고,[108] 주변에는 맹찬과 오삼랑에게 대업을 맡기고 승천했다고 나온다. 물론 맹찬도 오삼랑도 명분이 필요했을 뿐 실제로는 김운행과 백련교를 중시 여겼기에 언젠가는 백련교의 성인 자리에서 내려올 것으로 보인다.
8. 준가르
대청 전쟁의 시작을 알린 국가. 원 역사에서 멸족 수준의 비참한 최후를 당한 것에 비해 본 역사에서는 매우 희망찬 전개로 시작했다. 본래 인망이 없는 아무르사나가 조선이 반청 기조를 들며 거병을 준비한다는 허세로 부족을 단합시키고, 이 경험을 토대로 러시아의 후원까지 얻어내며, 티베트 토착민들도 반란에 합세하고, 규슈 대학살에 조바심을 느낀 청군 장수들이 괜한 학살을 더하면서 계속해서 밀리고 밀려도 어떻게든 저항을 이어갔다.요양 전투에서 청군이 괴멸당하면서 청나라의 붕괴가 확실시되자 마침내 대청 전쟁의 승자가 되어 천산에 복귀한다. 이 후 몽골과 협력해 화북을 향해 진군한다. 고전 끝에 촉진과 손을 잡고 북경에 입성하나, 김운행을 죽이고 후일 중원 제국을 재건할 야망을 품고 일을 터뜨렸다가 오히려 북경 시가전에서 수천 명의 군세를 잃는 대패를 당하고 만다. 결국 내몽골 일부를 완충지대로 토해낸다는 조약에 승인하고 준가르로 돌아가야 했다.
- 아무르사나[109]
청에 저항하고 있는 준가르족의 지도자. 사실 거병 이전까지만 해도 청에 붙어서 준가르의 가한 자리를 차지하려 했던 선두주자라서 그다지 인망이 없었다. 본 역사에서도 이 때문에 분투하다가도 결국 죽었지만... 본작에서는 조선이 반청 거병을 준비중이라고 허세를 부려서 준가르의 단합에 성공. 준가르는 끈질긴 항전 끝에 러시아의 협조로 안전지대를 확보하게 된다.[110]
이후 티베트, 위구르와도 합세해 수년간 지난한 전쟁을 벌였고, 티베트와 위구르가 지친 판국에 마음이 급해진 청군 장수들이[111] 친청파 지역에 무용한 학살을 벌이면서 이들마저 이를 갈며 재차 준가르와 합세한다. 예카테리나 여제가 강남을 공격할 유럽 연합군의 정보를 접하고 숟가락을 얻기 위해 준가르와 유목민 연합을 지원하면서 아무르사나는 수년간이나 지리한 전쟁을 이어간다.
그러기를 10여년. 준가르 연합군이 서북에서 힘들게 버티는 동안 조선이 청군을 대파하고 만주를 점령하면서 아무르사나는 선지자가 된다.[112] 이후 부찰 부항과 협상해 고향인 천산 산맥을 되찾고, 그대로 청 제국 붕괴 후엔 공적 취급을 피할 수 없는 내몽골까지 흡수해 몽골 제국을 재건하려 한다.
러시아와 내몽골이 협조한다면 북경을 치는 것 역시 산해관을 넘어야 하기에 고전할 조선보다는 빠르다고 생각하고 색극신이 접선해오자 동맹을 맺고 준가르-몽골-러시아 총 7만의 군세를 이끌고 북경을 향해 진군한다. 참고로 천산의 예언자가 된 자신에 대한 심취, 김춘식의 지모에 대한 동경과 도전정신인지[113] 색극신과의 회의 중 춘식을 사마중달, 자신을 제갈공명에 비유한다. 그것도 연의 기반...
청의 진압군 4만을 대파한 이후 군을 재정비하면서 조선의 반응을 보려고 한다. 본인 생각으로는 조선 하기에 따라선 적대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그러나 그렇게 간을 보는 사이에 청나라 레드는 대부분의 잔존 병력을 준가르와 촉진 상대로 돌려버렸고, 고전하게 되자 이를 갈았다. 심지어 김운행이 발표한 준가르의 구조 요청 공문을 거짓이라 증명할 수단도 마땅찮자 어쩔 수 없이 청의 잔적이라 여기던 촉진과 손을 잡는다. 김운행과 이훤의 관계를 일반적인 군신관계로 오해하고 한고조가 권신들을 숙청했듯 김운행을 내심 제거하길 원하는 듯 하니 본인들이 선수를 쳐서 김운행을 처리하고 이훤과는 협상을 해 조선과 중원을 갈라먹겠다는 계획을 세우며, 이미 목숨줄이 경각에 달린 아이신기오로 레드를 앞세워 김운행 암살을 시도한다. 그러다 김운행의 숙소에 있던 왜인들과 새로운 스킬[114]을 사용한 김운행에 의해 암살시도가 실패하며, 이후 명분을 쥔 조선군에 의해 데리고 온 병력들이 공격당해 죽어나가자 다급하게 불리한 조건도 받아드리며 겨우 강화를 맺는다.
결국 염원하던 몽골 제국 재건이나 현인신으로 남는 건 실패하나, 내몽골을 잃었을 뿐 준가르는 물론 몽골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는 대륙의 왕이라는 사실은 다르지 않다. 본인에게 도전하던 몽골 부족장들을 겨우 때려잡은 뒤 불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인도 방면으로 진출을 시도한다.
- 색극신
청 항목 참고. 수만의 동포들을 잃어가며 청나라를 위해 싸운 댓가가 만주족 황자(영용) 따위가 나눠받은 직함 중 하나에 복종하라는 것으로 돌아오자 분노해 준가르에 합류했다. 준가르-몽골 연합 7만 대군을 직접 지휘해 허수아비로나마 몽골의 칸 직함을 받은 영용의 4만 군을 대파해 결국 그를 자결시킨다.
그러나 회맹에 의한 정치적인 상황 탓에 북경으로의 빠른 진군을 멈춘 사이 팔기들이 증원되어 아직 여력이 남은 청과의 전투는 교착상태가 되고, 이로 인해 아무르사나의 질책이 이어지자 상관인 아무르사나에게 황금씨족도 아닌게 대칸행세에 전쟁도 모르면서 설친다며 현피를 뜨자고 분노를 터트리고, 내몽골을 잃을까 우려하던 아무르사나는 그를 함부로 숙청하지 못한다. 이후 김운행 암살작전에 아무르사나의 협박에 맨몸으로 투입되나 분노한 이훤의 청룡도에 목이 떨어져 사망한다.
9. 네덜란드
네덜란드에 대한 설명은 복잡할 필요가 없다. 한마디면 충분하다.
영국의 선배.
에스파냐에서 싹을 틔운 검은색 악의는 네덜란드가 기른 다음 영국이 꽃피웠다.
황금의 17세기[Dutch Golden Age]는 지났다 하여도 '동인도 제도' 만 따진다면 아직 네덜란드는 전성기다.
특히 인도네시아에서 벌일 수많은 만행은 오히려 서문조차 끝나지 않았다.
미래 프랑스 혁명으로 쓴맛을 볼 팔자라는 사실은 네덜란드의 기를 꺾지 못한다. 네덜란드인들은 나폴레옹이 몰락하자마자 부활해 악행을 재개했다.
조직적 학살과 폭력, 한때 네덜란드 국부의 3할을 감당한 계획적 농업 수탈, 독립 협상으로 위장하여 민족 대표를 암살하는 비열한 행태 등등은 끝이 없었다.
벨기에가 어디서 갑자기 툭 튀어나와서 콩고인의 손목을 썰어댄 게 아니다. 둘은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한 나라였다. 김운행이 항상 주장하듯 근본은 속일 수 없다.
그 역사의 선봉이 바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다.
인적 자원부터가 화려하다. 본국의 이사진이나 선장, 상관장 정도의 고위 간부를 제외한다면 구성원 대부분이 세상 어디에서도 받아주지 않는 막장 인생들의 집합이다.
멀쩡한 인간이 왜 고향과 가족 버리고 외계 행성 같은 바다 너머로 떠나겠는가. 부랑자, 범죄자, 빚쟁이, 노름꾼, 폭력배는 VOC가 세계에 자랑하는 인재들이었다.
그러므로 남의 불행에서 기회를 찾아내는 능력 하나는 아주 탁월했다.
103화
포르투갈과 함께 일찍부터 동아시아에 진출하고 기반을 닦은 유럽계 해상세력답게, 작중에서도 처음으로 본격 등장한 유럽인들이다.[115] 원래는 유럽인 전체를 일컫는 말인 홍모적(紅毛賊)[116]이 좁게는 네덜란드인을 일컬을 정도로[117] 유럽인의 대표 이미지를 선점 중이며, 청나라에 아편 유통시킨 범인도 아직은 영국인들이 아니라 네덜란드인들이다.영국의 선배.
에스파냐에서 싹을 틔운 검은색 악의는 네덜란드가 기른 다음 영국이 꽃피웠다.
황금의 17세기[Dutch Golden Age]는 지났다 하여도 '동인도 제도' 만 따진다면 아직 네덜란드는 전성기다.
특히 인도네시아에서 벌일 수많은 만행은 오히려 서문조차 끝나지 않았다.
미래 프랑스 혁명으로 쓴맛을 볼 팔자라는 사실은 네덜란드의 기를 꺾지 못한다. 네덜란드인들은 나폴레옹이 몰락하자마자 부활해 악행을 재개했다.
조직적 학살과 폭력, 한때 네덜란드 국부의 3할을 감당한 계획적 농업 수탈, 독립 협상으로 위장하여 민족 대표를 암살하는 비열한 행태 등등은 끝이 없었다.
벨기에가 어디서 갑자기 툭 튀어나와서 콩고인의 손목을 썰어댄 게 아니다. 둘은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한 나라였다. 김운행이 항상 주장하듯 근본은 속일 수 없다.
그 역사의 선봉이 바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다.
인적 자원부터가 화려하다. 본국의 이사진이나 선장, 상관장 정도의 고위 간부를 제외한다면 구성원 대부분이 세상 어디에서도 받아주지 않는 막장 인생들의 집합이다.
멀쩡한 인간이 왜 고향과 가족 버리고 외계 행성 같은 바다 너머로 떠나겠는가. 부랑자, 범죄자, 빚쟁이, 노름꾼, 폭력배는 VOC가 세계에 자랑하는 인재들이었다.
그러므로 남의 불행에서 기회를 찾아내는 능력 하나는 아주 탁월했다.
103화
그러나 실상은 조선에 가장 많이 호구잡힌 유럽국가로, 빨대 꽂으려다 역으로 VOC 함선들을 나포당하고 선원들이 피랍된다거나, 조선 때문에 데지마 상관이 폐쇄되며 대일 무역이 붕괴된다거나, 지나가는 네덜란드 상인들이 모조리 해방별대(조선군)에 해적질을 당한다거나, 해방별대의 대중국/대일본 해적질에 명의도용을 당하는 등 정말 가지각색의 방법으로 당한다(...). 게다가 7년전쟁 때문에 본토의 국운부터 걱정해야 할 판이라 조선에 보복도 못하고 있다. 반면 조선은 나포한 네덜란드 함선들을 복제하고 피랍 선원들을 화이정신주입봉(華夷精神注入棒)[118]으로 쥐어짜서 열심히 테크를 올리는 중이다.
- 다비드 볼런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서 파견한 데지마의 상관장. 부산포 왜관이 폐쇄되며 대마도의 무역에 차질이 생기자 조선에 관심을 가지고 개항을 위해 울릉도에 듀니스벨트호를 보내나 김운행과 한중량에게 속아 배와 선원들을 먹튀당해버린다. 본전만이라도 찾기 위해 다시 구스타프 빌렘호를 다시 보내나 마침 발발한 흉참당의 난에 엮여 이마저도 김운행에게 탈취당한다. 이것으로 일본과 조선의 외교 마찰이 발발하고 볼런에게 책임이 들어오자[119] 볼런은 네덜란드로 권토중래를 다짐하며 야반도주한다. 막부는 이를 계기로 난벽 다이묘들 배나 불려주는 데지마를 완전히 폐쇄하고 일본의 개국은 더 늦어지게 된다.
이후 중국에 재등장하는데, 네덜란드의 대함대를 이끌고 보복하겠다는 야망은커녕 7년 전쟁 여파로 본국 수비도 급한 네덜란드는 다비드를 그냥 범죄자 취급해서 감옥에 가둬버렸다고 한다. 어찌어찌 출옥해 재기를 노리지만 항해 중 영국 동인도 회사에 납치되어 중국으로 온다.
- 별기군
조선에 피랍된 VOC 선원들로, 처음엔 김운행의 사노비 비슷한 포지션으로 착취 당하다가 '별기군'이란 이름으로 정규군에 편입된다. 자기들의 인생을 꼬아놓은 김운행을 당연히 싫어하지만, 한편으론 사도세자와 김운행이 차세대 권력자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세자파 라인에 줄을 서서 서양 기술을 제공 중이다. 다행히 사도세자가 외국문물을 좋아하여 감싸주는 중이다. 김운행은 오랑캐는 뿌리부터 글러먹었다며 막아서지만, 세자는 "편협함을 버려야 한다", "오랑캐 땅에서 태어난 것만 가지고 무슨 죄라고 하겠느냐"(160화)며 모조리 반박하여 현대인 김운행의 흉참한 위정척사를 막는다.
조선의 북벌에도 참전해 적극적으로 약탈하며 싸웠고, 덕분에 전후에도 이훤이 직접 비호하며 김운행이 내리는 각종 외국인 차별 문제에서도 김충선처럼 내국인 급 대우를 받았다.
- 유스트 날
동인도회사의 무장상선 듀니스벨트의 무장관. 선장, 항해사 등 주요 간부들이 김운행에게 뒤통수를 맞고 살해당한 뒤 조선에 포로가 되어 노예 신세가 된 네덜란드인 중에는 최선임이 되었다. 별기군의 최선임이고 나름 기술자인지라 무기 개발도 맡고 있다. 그러나 당시 서양의 기술력이 뛰어나기는 해도, 유스트 날이 가진 기술력은 당시 조선의 기술자들 입장에서는 아주 대단한 것도 아니었던 지라 조선인들, 특히 채제공에게 화이정신주입봉으로 닦달 당하는 중이다.
잡혀온 영국인들과 접촉해 네덜란드 상황을 알게되자 인생 2막을 조선에 걸기로 결심하고 귀화해 조선인 아내를 얻고 유사눌(柳思訥)이라는 조선이름까지 왕에게 하사받았으며 동료들도 차츰 조선으로 귀화 중이다.
10. 러시아
청과 국경을 접한 유일한 유럽국가로, 다른 유럽국가와 달리 네르친스크 조약-캬흐타 조약으로 정식 외교관계를 맺고 있다. 참고로 청은 러시아 차르를 몽골 놈, 러시아는 청 황제를 타타르 놈으로 취급 중이다(...).그래도 준가르를 보호하면서 중앙 아시아 유목민들을 포섭했고 예카테리나 2세 시대에 다시 남하를 개시한다. 그러나 아무르사나가 청의 붕괴와 승전의 기세로 러시아에게 벗어나려 하고, 폴란드 문제 탓에 아시아에선 전력을 내지 못한다.
-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
러시아의 여제로, 서로는 프리드리히 2세과 전쟁 중이고 동으로는 청나라를 경계 중이다. 김운행으로 인한 중국 서부의 반란이 더 거대해지고 장기화되자 크로토포프에게 지시해 아무르사나를 지원한다. 크로토포프가 받아온 홍삼을 먹고 건강을 회복해 프리드리히 3세를 죽이며 7년전쟁을 승리로 마무리한다.
그리고 후계자 문제도 일단락 시키고 나자, 김운행의 분탕질의 결과로 청나라를 공격해서 인도처럼 만들고자 하는 영국의 움직임에 합세하여 이제 건륭제의 청나라를 본격적으로 누르기로 다짐한다. 또한 조선과의 교역을 추진하고자 하는 크로토포프의 안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청나라가 제법 신경쓰는 듯한 후방의 번국을 NTR하는 것이 적절한 공격이 될 것이라는 부분도 있고, 개인적으로 가장 중요한 건 홍삼이 다 떨어져서…. 홍삼의 효과로 몇개월을 더 살았지만 결국 1762년 말, 극동 파견대의 소식을 듣지도 못하고 사망한다.
사실 홍삼의 효과를 극적으로 봤다기보다는, 작중에서도 암시하는 것처럼 당시 말 그대로 사람을 잡던 유럽식 치료를 홍삼 먹는 중에는 그만두었기 때문에 더 오래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 이반 크로토포프
러시아 근위대 중위 겸 국경수비대 요새 사령관. 러시아의 대 중국 외교를 전담하는 군인으로 옐리자베타의 명령으로 준가르 대표 아무르사나와 회동, 간접적으로 그를 지원한다. 아무르사나가 조선도 반청연합에 붙었다고 허세를 부리자 북경에 찾아가 이를 확인하고, 필요하면 협박해서 강제로 끌어들이려 했으나 홍대용에게 홍삼 한 뿌리만 받았을 뿐 이루지 못한다. 그래도 조선의 극동 정세상 요긴한 위치를 확인하고 강제로라도 끌어들이려고 했으나, 하필 표문 문제로 노한 건륭제가 서양인들을 전부 연금시키는 바람에[120] 결국은 실패한다.
그러나 1772년에 재등장한다. 옐리자베타의 사망으로 하루아침에 버려져서 시베리아에 유배당한 것. 포템킨이 시베리아 죄수들을 병사로 모집할 때 군인 출신인 그가 지휘관이 된다. 그러나 이반은 자신을 여기 처박은 예카테리나와 그 애인인 포템킨에게 충성할 생각도 없었고, 10년이라는 세월간 한이 잔뜩 쌓인 상황. 심지어 조선이 보낸 흑룡강첨사가 자신이 북경에서 본 홍대용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바로 배반한다.
- 표트르 3세
통설대로 얼간이이자 찌질이 그 자체로 등장. 프리드리히 사후에도 빠돌이 기질을 버리지 못하고 이적행위를 반복하자 1762년 결국 옐리자베타에 의해 (뒤주보다는 넓은) 방에 유폐된다. 옐리자베타 사후 잠깐 황위에 오르나 유폐의 영향으로 완전히 미쳐버렸는지 본인이 프리드리히라고 주장하는 등 갑자기 빙의물을 찍더니 며칠 만에 급사했다.
- 예카테리나 2세
표트르가 급사하자 파벨의 모후 자격으로 즉위한다. 옐리자베타와 달리 홍삼이 절실하지도 않았기에 기대하지 않던 차에 공동전선을 편 영국 함대의 전과가 시원찮음을 눈치채고 대청 반란 지원이나 조선과의 접촉 시도 등 기존의 극동 노선을 백지화하고 유럽 방면에 더 집중한다. 마침 극동에 파견한 러시아 탐험대는 옐리자베타의 측근들이었는데다 조선에 납치당하며 연락이 끊겼기 때문에 전임자 지우기를 겸해서 없던 존재로 처리.
- 미하일 로모노소프
러시아의 학자로 옐리자베타의 측근이자 정부 이반 슈발로프의 추천으로 극동 탐험대에 포함된다. 그러나 탐험대는 조선에 들어가자마자 전부 구금되고 옐리자베타 또한 사망하면서 구출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 레바쇼프 중령
코사크 기병대를 이끌던 러시아 군인. 미하일의 극동 탐험대가 조선에 구금될 때 같이 항복했다. 코사크 기병대는 강하고 흉폭하지만 조선군의 수가 몇배는 많아서 싸워보지도 못했다.
그 이후 흉노족 취급을 당하면 온갖 장소서 굴려지는데 1차 북벌에서 영염을 사로잡는 등 큰 공을 세운다. 그러나 김운행은 알아서 가라는 마인드여서 귀국하지 못한다.
결국 코사크 병사들이 춤을 추면서 돈을 벌어 먹고 살았는데, 회맹 대전에서 이반에게 이미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자신들은 버려졌다고 듣게 된다. 이에 속시원하게 흉노족이란 정체성을 받아들여 조선에 귀화한다.
에필로그의 언급을 보면 만주에 땅을 받아서 새로운 마을을 만들고 정착하기로 한 모양이다. 일단 좌현왕-선우로 책봉된 모양
11. 영국
작가 특성상 틈만 나면 블랙코미디로 까인다. 그러나 아직은 동아시아에 별다른 기반이 없는 애기 마족(...)이며, 본토 국운상 슬슬 쇠퇴하는 VOC의 동아시아 무역을 잠식하려고 지켜보는 중이다.원 역사와는 달리 7년 전쟁의 후반기에 프로이센이 러시아, 오스트리아의 공세를 이겨내지 못하자 그들과 거래한 후에 손을 뺐다. 때문에 종전 이후에도 어느정도 여력과 자부심이 있었으나, 이와는 별개로 경제적으로는 상당히 위험했는데, 그 때 김운행 나비효과로 대중무역이 봉쇄되자 4만에 달하는 대군을 동원해[121] 대청 전쟁을 일으킨다.
그러나 이 전쟁은 조선의 암약과 중국의 전력에 의해 공멸했고, 영국은 4만의 병력, 10척의 전열함, 20척의 프리깃이 전부 실종되었다는 악몽 같은 청구서를 돌려받아야 했다. 심지어 대만에서 이 보고서를 올린 동인도 회사도 오명과의 전쟁으로 대만에서 철수하는 바람에 아시아에 남은 거점이 전부 사라졌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러시아와 협조해 다시 중국 원정을 계획하는 미친 따갚되를 계획하지만, 아메리카에서 워싱턴이 독립거병하면서 일이 복잡해진다. 현재는 오명에서 조선을 견제할 수단으로 다시 불러드리려 하나 상황은 어렵다.
심지어 아메리카 전선이 고착화된 상황에 네팔과 접촉한 몽골, 촉진을 통해서 대 아시아 전쟁의 비참한 패배가 인도에 퍼지게 된다. 이에 뱅골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나면서 인도까지 잃을 위기에 처한다. 에필로그에 따르면 다시는 프랑스, 오스트리아를 누르고[122] 유럽의 강국이 되지 못했다고 한다. 그나마 넬슨 제독의 활약으로 나폴레옹의 공세를 간신히 막았으나 거지국가가 된 상태라 해상봉쇄나 반 프랑스 전선에는 별 영향을 못 준 모양.
- 제임스 플린트
중국-유럽의 밀무역 업계 큰손인 대상인. 최초이자 가장 유명한 통역관이기도 하며 어지간한 고관들 이상의 위세를 부리는 영국인이다. 양광 총독 이시요를 통해 홍모적의 해적질 탓에 분노한 건륭제가 서양인과의 무역에 예민하게 반응하니 주의하라는 경고를 받고는 오히려 거기에 엮인 조선(제주)에 관심을 가지고 사람들을 보낸다. 물론 홍모적 없는 클린제주 표어를 잃을 수 없던 김운행과 조선 사황들은 모르면 절반은 당하는 제주 항로에서 기진맥진한 영국 선원들을 그대로 나포해서 실종시켜 버렸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동인도 회사에 연줄로 영국의 연구함 엔데버와[123] 그 호위인 전열함 두 척(팬서, 아르고)을 동원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유구 인근에 정박했다가 김운행의 낚시로 인해 공격해온 이시요의 중국함대와 해전을 벌이다가 패배, 엔데버는 조선에 나포되고 건륭제가 모든 유럽인을 추방하자 전재산을 들고 간신히 도망친다.
그러나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유럽 연합군의 통역관 겸 민간 협력자로 다시 종군해 아시아에 돌아온다. 주피터 황제 옹립과 천지회 이용안에 중국 전문가로 조언했으나, 내실은 엉망진창이라 결국 강남 사람들의 민심을 얻지 못했다. 후반부에 존재감이 사라지는데 천진에서 죽었거나, 유구에 노예로 팔렸을 것으로 보인다.
- 로버트 클라이브
플라시 전투에서 승리해 영국의 인도 정복에 공을 세운 장교. 중국 원정에 참전해 대학살을 벌였으나, 대패 이후 어떻게든 아시아에 영향력을 남기기 위해 촉진, 오명 등을 왔다갔다 하다가 그 사이 마닐라가 공격당하면서 귀로가 끊기고 오명 이육대에게 잠깐만 기회를 달라고 했다가 기습해온 히드라 공화국에게 붙잡혀 유구에 노비로 팔린다.
- 헨리 포터
유럽 연합군 영국 해군 함대 제독. 유럽 연합군에서 가장 많은 군사를 거느린 준사령관 격의 인물이다. 4만에 달하는 대군과 20척의 군함을 동원해 강남부터 시작해 청나라와 전쟁을 벌였으나, 중국에 대한 몰이해와 수십만 대군을 연달아 몰고 온 이시요, 부찰부항 등의 숙장들에 의해 승전이 여의치 않던 차에[124] 안탕산 전투 이후 중국을 지배할 주력인 함대 수병들을 동원하라는 프랑스, 네덜란드의 압박을 받자 전쟁을 포기하고 대만으로 퇴각하려 했으나, 김운행의 낚시에 속아서 모든 함대를 몰고서 강남을 떠나 북경 인근의 해안 도시 천진을 들이쳤다가 몽골군에게 발목을 잡혔다. 그렇게 수천에 달하는 사상자만 내면서 시간이 끌리다가 마침내 행동을 개시한 조선 해방별대의 역습에 의해 후방을 공격당하면서 전사한다. 이름이 모 소년 마법사와 비슷하기 때문인지 관련 드립이 많다.
- 제임스 암허스트
유럽 연합군 영국 해군 함대 함장. 형제인 제프리 암허스트처럼 극단적인 인종 차별주의자이다. 유럽군 주력이 천진을 치러 떠난 사이 남은 예비 해군을 총괄하며 조선 수군과 합을 맞춰 강남 점령지를 부찰 부항에게 지키기로 했으나, 조선이 이미 뒤를 칠 각오를 했듯이 제임스도 조선군을 철저히 깔봤고, 이에 그 분노까지 더해서 한번에 터뜨린 조선의 공세에 제압당한다.
- 제임스 쿡
엔데버호의 선장. 원 역사에서는 괴혈병의 예방법을 실험하고 뉴질랜드와 하와이를 탐사하며 대항해시대를 종결시켰다는 평을 듣는 인물. 플린트에게 항해를 후원받는 대가로 엔데버호의 탐사 경로에 조선을 포함한다. 그러나 김운행의 계략으로 중간 기착지인 류큐에서 청나라와 전투에 들어갔고 포탄을 전부 소진한채 표류해 조선에 나포된다. 그렇게 세계 최초의 연구용 함선 엔데버호와 거기 탑승한 유수의 학자들[125](+ 호위함 두척과 군인들)은 조선의 손에 들어간다. 북벌 성공이후 백두산정계비의 세초작업에 동원되었다.
- 송파의 조지
작중 창작인물로 본래 서섹스 사람인듯 하다. 1766년에는 우체 배달부 겸 송파나루 주막 바운서로 등장한다. 조선에 완벽히 적응해서 곰방대를 피우면서 광고지를 내놓고, 송파나루 제일 가는 미색이라는 주막 주모의 기둥서방 노릇까지 한다. 조지 워싱턴을 따라갈 수병들을 모집하면서 대령나리가 아메리카에서 왕노릇을 하던말던 난 송파의 왕인게 마음에 든다고 이죽거리는 것을 보면 조선에 정말 잘 적응한 듯하다.
12. 프랑스
7년 전쟁에서 오스트리아, 러시아와 함께 프로이센과 싸우던 유럽나라. 물론 영국, 프로이센군한테 제대로 당한지라 전선에서 힘이 빠졌다. 그러나 러시아의 역사 개변으로 끝내 승전국으로 남았고, 아메리카 식민지를 비롯해 이득을 얻는다.이후 영국의 대중 원정에 숟가락을 얹어서 참전했다. 약 1개 대대 정도의 육군을 파병했으나, 천주에서 조선군과 백련교도들의 기습으로 패배하고 황제를 빼앗겨 오명을 건국시킨다. 그렇게 대중 전쟁에서는 발을 빼고 아메리카 독립전쟁에서도 히드라의 편을 들었지만, 생각보다 큰 도움이 안되었다.
미래에는 결국 프랑스 혁명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 나폴레옹이 러시아와 건곤일척의 대결을 벌이려 한다.
- 볼테르
제 1차 아시아 원정의 참패 이후의 유럽에서 등장. 당시 프랑스에서 쫓겨나 여러 나라를 오가던 중에 이 모든 사태의 근원인 '스프링필드 공작'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서 미국으로 간다.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에필로그 이후 외전에서 언급된 프랑스의 보나파르트 황가 시조. 원 역사처럼 천재적인 군사적 재능을 가졌으며 고속 분할 기동, 통칭 '히드라 전술'을 자신의 것으로 익혀서 유럽을 제패했다. 프로이센을 차지한 오스트리아 위시 다른 육군 강국들은 원 역사마냥 개박살이 났다고. 영국은 넬슨 제독의 분투로 끝내 본토를 지켰으나, 대륙에 투사할 힘은 완전히 고갈나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후 유럽대륙의 패권을 두고 마지막으로 러시아의 쿠투조프 원수와 전쟁을 준비한다.
13. 미국
아직 독립하지 못한 아메리카. 여기서는 미국이 아니라 히드라 공화국이다. 역사 개변으로 독립 시기가 앞당겨졌으며, 워싱턴과 미국인들도 반영 감정이 심해져서 치열한 전쟁 끝에 독립한다.다만 만주에서 구두룡섬을 본 워싱턴과 미국인들이 자신들의 후원자이자 동맹이 조선이라고 우겼기에 그 영향에 의해 나라 이름은 히드라 공화국이 된다. 훨씬더 강경한 대영 전쟁으로 인해 인디언들도 상당수 끌어들였고, 심지어 흑인 노예들까지 해방시켜 동참시키려다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블랙팬서 연대를 창설해서 히드라의 숙적이 되어버렸다...
- 조지 워싱턴
프렌치-인디언 전쟁으로 두각을 드러낸 영국군 소속 아메리카 민병대의 장교. 7년 전쟁이 삼부인 동맹의 승리로 끝난 결과, 프랑스의 북미 식민지가 유지되었고 북미의 영국계 지주들의 불만을 꺼트리기 위해 중국 원정대에 포함된다. 자신의 대 인디언 전쟁 경험을 바탕으로 작전을 제안하나 청나라는 부족집단인 인디언이 아니라 정규군이었기 때문에 면박을 당하거나 작전이 실패하는 등 미성숙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대규모의 인명피해가 발생한 작전실패에서도 소규모 부대를 이끌며 적의 포위를 뚫고 살아나오는 모습을 보이고, 사기진작 목적으로 영웅으로 홍보되는 등 경험치를 쌓고 있는 묘사가 들어간다.
훗날 인디언들과의 교류로 정신적 성장을 이루기 전인지라 인디언들에게 '마을 파괴자' 라고 불리던 시절의 학살자이자 악덕 노예지주 그 자체. 중국의 거대한 도시들 등을 눈으로 보면서도 중국도 조선도 우가우가 야만족 취급하고, 원정군에서 자신의 비중을 높이기 위해 작전회의마다 학살과 전면전으로 이야기를 끌고가려 한다. 그러나 퇴각 전에 항구를 공격받아 포위당하자 그나마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은 조선군에게 항복하며 흑인 노예를 때리는 상쾌한 채찍 소리가 울려퍼지고 인디언 여자와 어린아이를 죽이고 가죽을 벗기는 평화로운 버지니아의 목가적인 농장으로 돌아가기만을 바라게 되었다.
그 후 포로가 된 영국인들과 함께 노예 수송하듯 배 밑창에 차곡차곡 쌓여 보관된다. 당시 연합군에서 김운행이 이름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어서 다른 버지니아 의용병들이 류큐에 노비로 팔려갈 때도 남겨졌고, 김운행의 가스라이팅에 당해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바라게 되었다. 동인도회사의 보급물자를 횡령하는 등의 작전에 참여당한 뒤 류큐에 팔려간 원래의 7할 남짓의 버지니아 의용병들의 생존자들을 다시 데려와 만주팔기의 조선 침공을 방어하는 방패막이로 던져진다.
만주팔기의 공격을 막고 궤멸시키는 데 성공한 후 다른 장지항의 함경군과 같이 만주를 내달린 끝에 15황자 영염과 아리곤의 일행까지 포로로 잡는다. 그 후 약속대로 프리깃 한척을 받지만, 말 그대로 배만 줬지 식량도 물자도 없던지라 차력쇼를 하면서 인디언의 명약이라면서 쇼를 하면서 돈을 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조선 내 유럽인들에게 이번 전쟁에서 영국이 어떻게 패배했고, 자신이 조선군에 붙어서 영국 해군을 공격했다고 과장스런 소문까지 퍼진 걸 알게 된다. 이제 워싱턴 입장에선 아메리카로 귀향한 순간 영국 정부가 진실의 끄트머리라도 아는 순간 그를 죽이러 올 것이기에 반란을 할 수밖에 없게 된 것.
온갖 고생 끝에 조선에서 프리깃 한 척을 불하받아 아메리카로 돌아간[126] 그는, 유럽 연합군은 중국에서 학살과 약탈로 민심도 잃고, 중국의 강력한 저항에 의해 전멸했으며 오히려 조선군이 중국 황제가 친정한 정예군을 분쇄했다고 홍보하면서 영국을 비난한다. 그렇지 않아도 차뿐만 아니라 온갖 품목에 붙은 아메리카 세금에 분노한 국민들은 워싱턴의 대의에 공감한다. 사실상 폭도에 가까운 사방의 아메리카 민병대를 자신의 히드라 특수부대로 위장했고, 순식간에 아메리카의 독립군 사령관이 되었다. 원주민들에게도 대우 개선과 국민으로 받아들이겠노라 약속하고 수를 불려 승세를 높여갔지만, 영국에서 흑인 노예 해방을 약속하면서 악에 받친 혈전이 길어지게 된다.
프랑스, 오스트리아까지 히드라를 지지하면서 독립엔 성공하고 히드라 수령 동지 자리에 오른다(...)[127] 언급을 보면 이후 최소 20년 정도는 수령 자리를 차지하면서 나라를 다스린 모양.[128] - 벤자민 프랭클린
미국의 독립에 기여한 건국의 아버지이자 뛰어난 외교관, 정치가, 발명가라는 팔방미인. 워싱턴과 버지니아 민병대가 귀국해 전쟁의 실상을 폭로하고 독립을 결의하자 거기에 동참한다.
그렇게 수년을 영국군과 싸운 끝에 워싱턴이 조선에 사절을 보낸다고 하자 학술적 호기심이 더해져 자청해서 참가한다. 가던 중에 마닐라에서 오명 수군을 대파하고 마닐라를 회복, 유구를 거쳐 조선으로 가서 대량의 오명산 홍차잎을 가져오면서 홍차 무역을 영국에게 빼았았다는 정치적 성과를 얻는다.
조선에서 배운 것이 구두룡섬이나, 정치제도뿐이 아니라 노비제에도 관심을 가졌다. 귀국한 후에는 노비제를 이용해서 노예를 대체할 계획을 세운다.
- 존 스타크
워싱턴의 부관. 항복한 후 민병대 부하들과 함께 유구에 노비로 팔렸다. 유구 사람들에게 영국인이 좋게 보일리가 없어서 온갖 학대는 다 받았다고 한다. 복귀 후 조선군에 의해 함경도로 끌려와 청군과 싸우게 되자 그냥 도망치거나 항복하자고 했으나, 어차피 도망칠 길도 없고 항복해봤자 똑같이 부려질 것이며, 그나마 김운행이 전후에 아메리카 독립 지원을 약속했다고 듣자 어쩔 수 없이 싸워서 청군을 막아낸다.
- 블랙팬서
아메리카의 독립전쟁에서 쪽수가 밀리는 영국이 식민지 농장주 및 백인들에게 대항하게 할 목적으로 법률개정을 통해 흑인노예를 일제히 해방시킴으로써 생겨난, 작중 창작된 흑인들의 무장투쟁 단체. 작가의 전작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에 등장했던 런던의 조지당과 비슷한 구석이 있다. 이름부터가 저런 데다가 와칸다 대신 국왕 폐하 포에버를 외치는지라 존 스타크와 엮는 마블 드립이 댓글창에 난무하기도 했다.
에필로그 외전에서 언급되는데 프랑스가 아메리카의 영토를 블랙팬서에게 매각했다고 한다. 물론 대금은 김춘식이 가로챘지만, 어쨌든 블랙팬서국이 나라를 세우고 히드라 공화국처럼 번듯하게 하나의 나라가 된 모양.
14. 합스부르크 제국
- 페르디난트 할러슈타인, 안톤 고가이슬
예수회 출신 선교사. 천문학 지식 덕에 청에 파견되어 달력을 만드는 흠천감 소속으로 몰래몰래 선교를 하고 있었다. 서양이나 천문학이라면 환장하는 홍대용과 원 역사대로 만나 친분을 쌓았고 건륭제가 러시아, 영국과 교전에 들어가자 조선으로 탈출한다. 서양을 좋아하는 홍대용이나 이익 등과 친분을 쌓아 천주당까지 건설하며 최초의 조선 선교사가 된다.
조선의 북벌에도 종군하는데 수학지식을 활용해서 포격 등에 활약한다. 이후 자신들의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기적을 선보이는 김운행과, 과거 아력산(알렉산드로스)의 정복처럼 시대의 변화를 가져올 이훤의 전쟁에 따라다니면서 기록을 남긴다. 종전 이후에도 유럽의 역사를 참조해 새로운 질서를 세우려는 이훤의 의도를 딱 맞춰서 왕실 조언자로 중용된다.
할러슈타인은 김운행의 초인적 능력에 경악하며 그를 중점으로 자신의 일지를 작성해 유럽에 출간했는데 여기엔 히드라 공화국의 증언까지 더해져서 유럽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5. 프로이센
중부유럽의 떠오르는 유망주. 원 역사에서는 합스부르크 제국-프랑스 왕국-러시아 제국의 3부인 동맹과 7년 전쟁 끝에 승리하는 것으로 이후의 초강대국 독일 제국까지 이어지지만 김운행의 존재라는 나비 효과의 결과로 패망한다.작중 서술에 따르면 브란덴부르크 선거인단은 영업 종료라고.- 프리드리히 2세.
일명 감자 대왕으로 불리는 프로이센의 계몽군주. 직접적인 등장은 없으나, 아버지가 미처 아들을 패죽이지 못하고 지병으로 일찍 죽는 바람에 살아남은 러키 사도세자로 언급된다. 그러나 김운행이 일으킨 나비효과 때문에 홍삼파워를 흡입한 옐리자베타 여제가 원 역사보다 장수하면서 참패. 본인도 임오년에 전사한다. 어쩌면 이 유니버스에선 사도세자와 행운이 뒤바뀐 것일지도(...).
[1] 작중 김운행의 본성을 처음으로 간파한 인물이 홍세화다. 정작 김운행과 혼사를 꾀하려던 홍대용은 그저 김운행을 전도유망한 인재로만 여겼다.[2] 인맥을 총동원해서 자기가 운행을 먼 발치에서 봤다가 반해서 상사병에 걸렸다고 소문을 냈다. 조선시대의 성관념상 김운행이 사대부 집안 규수를 꼬셨으니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고,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나머지 결국 김운행의 아버지조차 어딜 감히 가장을 젖혀 두고 아들놈이 혼자 나서서 색시감을 찾냐고 노발대발할 정도로 기정사실이 되었다.[3] 남편이 정승이 되면 아내인 자신도 왕실 여인을 제외하고 여성으로서 가장 높은 정경부인이 되기 때문.[4] 김운행을 비롯한 주변인, 내레이션의 평가. 건륭제의 시는 탐태창 본편에서도 몇 번이나 언급되듯 물량만 많을 뿐인 악성재고 취급이고, 김운행의 문재(...) 또한 무관조차 삼국지연의 비유를 사용해서 맞춰줄 만큼 악명높다. 적국 군주에 대한 호감만으로 거의 패전에 가까운 굴욕적인 조건을 제시해 다 이긴 전쟁을 말아먹은 표트르 3세는 두말할 필요도 없고.[5] 사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게, 책상물림이다가 첫 출전에 저런 위업을 성공시킨 문인이 있으면 누구라도 이렇게 숭배하는 쪽이 정상이기 때문. 북벌 계획을 현실화시켰다는 점에서도 이미 그렇지만, 그 계획을 지휘하며 보여주는 퍼포먼스가 심하게 터무니없어서 별 인연이 없었던 군부에서부터 열렬히 숭배하는 중이고 조정 문신들도 학식을 걸고 넘어지는 듯 하다가도 김운행이 작정하고 짠 계획은 절대로 틀리지 않는다고 덮어놓고 믿는 상황이다. 오히려 김운행 쪽이 탐태창 특유의 분위기 때문에 '무관들의 반박'을 듣고 있는 게 현실적으로 말이 안 되는 수준.[6] 단, 김이환의 이런 면이 다소 불안하다 여기는 독자들 또한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아무리 권신의 자식이라고 한들 과거 급제도 못한 청년이 독극물 들고 상왕 앞에서 전횡하는 게 정상적인 모습은 아니기 때문. 현재 영조가 바지사장이나 다름없다고 한들 상왕 앞에서 저런 짓을 하는 게 현명한 행동은 아니다. 일이라는 건 직위가 아니라 사람에 따라 달렸다는 전근대성(...)을 한껏 과시하고 있는 탐태창이지만, 반대로 그렇기 때문에 과거 급제도 못한 총신의 아들이 왕세자와 친구라는 이유로 저런 짓을 하고 있으면 언젠가 책잡힐 수밖에 없는 탓. 심지어 김운행 또한 그런 점을 알고 있어 아들에게 딱히 별도의 명령이나 직책을 내리지 않은 상황이기에 더더욱 문제가 되는 점이기도 하다.[7] 문제는 덕분에 폭주의 위험성이 가라앉은 건 좋은데, 이제는 아예 과거 급제를 맡아두기라도 한 듯 아버지에게 자신을 밀어달라 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 쪽은 진지한 문제라기보다 아버지도 장원급제 한 거 보면 그거 다 돈으로 사는 거 아니냐(...) 라는, 합리적인 판단 끝에 나온 결론이긴 하다. 거기에 이후 묘사되는 바에 의하면 상기한 청탁은 단순히 공부머리가 없는 탓도 있는 모양이다. 김운행에 의해 괘씸죄로 강남대성에 처박힌 이후 장원급제가 아닌 단순 급제로 조건을 바꿔줬는데도 여전히 탈출하지 못하고 있다는 묘사가 있기 때문.반대로 말하면 정공법으로는 과거 급제도 못할 권신 아들이 독초 들고 전횡했다는 뜻이다[8] 이때 김운행이 아메리카노 맛이나 볼까 하여 꿍쳐둔 커피가루를 아편인 줄 알고 멋대로 가져다 실험하다가 외삼촌 홍대용에게 걸려 뺏기는 바람에 이게 홍대용에 의해 쇼군에 정실부인에게 바쳐져 정력제로 쓰이는 나비효과를 불러와 의도치 않게 에도막부의 후계구도에 영향을 주게 된 것은 덤이다.[9] 설애라는 이름은 작가의 창작으로, 원역사의 효의왕후는 자나 휘가 알려지지 않았다. 코락스는 그 시대 여자들에게 많이 쓰이던 이름이라 골랐다고 하는데, 독자들은 아무리 봐도 북한의 리설주와 김주애에서 한 글자씩 따와서 만든 게 아닌가 하고 합리적 의심 가득한 눈초리를 보내는 중.[10] 물론 강간은 아니고 둘 다 서로에게 첫눈에 반해서 저지른 일이다. 김이환은 부모가 모두 미남미녀들이라 매우 수려한 외모를 가졌다.[11] 김설애의 아버지 김시묵은 함부로 외간사내와 정을 통한 딸에게 방에서 계속 근신하라 했는데, 이 틈을 타 계속 밤마다 눈치보지 않고 운우지정을 나눈 것으로 보인다. 아들을 다시 만난 김운행이 '너(그짓 하느라) 무릎 다 까졌다.'고 슥 찔러보자 바로 화들짝 놀라며 자기를 붙들어 온 어지 탓을 하는 꼴이 꽤 볼만하다.[12] 사실 김운행과 사도세자 사이의 유대가 조금이라도 부족했거나 김시묵 쪽에서 이게 말이 되냐고 딴죽을 걸었다면 정말로 크게 문제삼을 수도 있었다. 지금 당장이야 세력도 있고 업적도 세워서 버틸 수 있었겠지만, 만약 좋게좋게 넘어가지 못했더라면 당장 김운행 사후부터 발목이 잡혔을 테니 당연한 일. 실제로 김시묵이 적당히 간만 보려 했을 때부터 세화가 김시묵의 본의를 짚어주고 왕실 쪽에 양념을 쳐 사태가 마무리되고 난 뒤로도 김운행은 아예 벼르고 있었으며, 별 조력도 없이 자칫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는 최전선에 가문의 결합으로 인한 이득이고 뭐고 다 뒷전으로 내던진 다음 김이환을 보내버릴 정도였다. 이 쪽에서도 어떻게 일이 잘 풀려서 그렇지 독자들조차 주인공이 저렇게 빡친 건 처음 본다고 할 정도였고, 실제로 김이환은 앞의 나름 감동적인 후계자 인정이 무색하게도 에필로그 시점까지 안동 김문 주인 자리를 확언받지 못했다(...)고 묘사된다.사실 후계자 교체까지 안 가더라도 저 버릇 안 고쳐두면 가문 말아먹을 놈이 가주 되는 꼴이기야 하다[13] 사실상 선착순인 과거시험 오픈런을 하기 위해 길을 뚫는 탱커[14] 교룡기가 매우 큰 깃발인지라 이걸 혼자서 들 사람도 거의 없는데 어지는 그 괴력으로 이걸 혼자 들고 다니는 것도 모자라 무기로 써서 싸웠다.[15] 본인의 표현으로는 대포폰(...)[16] 김운행의 표현이다. 흉참한 녀석...[17] 일명 김가대환단. 주재료는 김운행이 내의원이나 대전내관들을 통해 빼돌린 약재 찌꺼기이며, 여기다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흔한 약재나 재료를 추가해 대충 빚어 만든다.[18] 물론 이 내기도박을 사주하는 것 또한 김운행이다. 아예 돈 필요할 때마다 타짜 원인손을 불러내서 울궈먹는 수준.[19] 실제 강남대성과 달리 성인을 기른다고 '大聖'이다. 실제 강남대성학원은 송파구가 아니라 강남구와 서초구에 있다.[20] 2개의 양자가 얽히면 한 쪽의 상태에 다른 쪽이 거리 따위의 요소를 무시하고 즉시 영향을 받는다. 즉 사도세자 따라서 뒤주에 들어가기 싫다는 말(...)[21] 사실은 스쿼트를 비롯한 현대식의 기초적인 신체단련이다.[22] 무려 그 박문수가 대놓고 면박을 주는 어조였다.[23] 이 와중에 김운행은 이것도 안 믿어서 영조가 철퇴질을 하려는 줄 알고 몸수색을 했다.[24] 어차피 한성을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 버틴다는 게 의미가 없을 만큼 한성이 발전했다.[25] 당연히 치료행위라기 보다는 이금을 곯리기 위한 목적이 더 큰 처방이지만 정작 이금 본인은 춘식갑을 맞아서 본인이 아직 정정한 줄로 생각한다.[26] 이금에게 허구한 날 귀머거리라고 욕을 듣는 어의 김수규의 경우에는 춘식갑을 놓아줄 때 이금이 전기 오르는 느낌이 싫어서 몸서리치면 쌤통이라고 좋아하지만 원해서 맞을 때에는 떨떠름해 하는 묘사가 있다.[27] 이훤은 북벌 과정에서 일어났다는 기적에 가까운 일들의 소문이 모두 자기가 직접 목격한 사실이며, 아버지에게 좌우를 모시는 신하들이 진실됨을 경하드린다고 하였다. 다만 이금이 김운행이 너의 적이 되리라고 계속 고집하자, 김운행 보기엔 전쟁에서 팔기병 모가지를 치던 날과 똑같은 분위기였다고 한다. 그 직후 마지막 예의마저 집어던지고 술먹고 집에서 행패부리는 막장에 비유하는 걸 보면 상당히 열 받은 모양.[28] 지금까지 누구도 믿지 않고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던 이금에게도 진심어린 애정을 품은 사람이 있었음을 마지막의 마지막에 와서야 드러내는 유언이다. 세상을 오직 도산검림으로만 본 스스로의 신념이 실은 그저 뒤틀린 아집에 불과했고, 결국 자신을 사랑해줬고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고통과 슬픔만을 주었음을 인정한 것.[29] 이금이 유언을 남긴 사람은 세 명이다. 홍봉한에게는 '내가 졌군.', 귀머거리 어의 김수규에게는 '예전 일은 미안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경종에게 '형님.'. 끝끝내 자신의 길이 틀렸음을 인정하는 패배의 선언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셋 다 똑바로 듣지 못하였거나 들을 사람이 없는 말이었다.[30] 당시 홍역 증상에 쓰이던 승마갈근탕 약재에 장각의 부적을 태운 재를 표 안나게 섞어 연이를 통해 빈궁 홍씨에게 전달했다.[31] 자세히 곱씹어보면, 임금이자 조부에게 천륜도 모르냐고 면전에서 비판한 셈이다.[32] 화완옹주가 시도한 가스라이팅이 이산에게 효력이 있었던 이유는 본인이 형과 달리 영조의 강압에 굴복해 아버지 이훤을 저버렸다는 죄책감 때문이다. 김운행 본인도 이산처럼 형이 있으므로 이를 활용해 빗댄 김운행의 말에 자신의 죄책감을 지우고 깊이 설복되었다.[33] 대비가 몸져눕자 주위에서 용하다는 춘식갑을 바치려 했는데 영조가 허황된 물건이라고 막았다. 실제로는 아무런 효과 없는 전기충격기에 불과하지만 사기를 친 김춘식 빼고는 아무도 모르는 사실인지라, 대비 입장에선 아주 죽으라고 고사를 지내는 것과 다름 없었다.[34] 엄밀하게 말하자면 왕좌의 게임에서 중립을 지키는 것이다. 하지만 영조는 30년동안 탕평을 구실로 철권을 휘두르며 군림한 덕분에 자기 사람이라 할 인물이 없었고, 반대로 사도세자는 소수지만 생사를 같이 할 홍봉한과 김춘식 패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균형이 크게 깨졌다.[35] 사실 말이 치매지 저 상황에서 왕에 대한 충심이랍시고 저 유조를 부정하는 건 유교국가 조선에서 왕이 세자를 살해하고 대를 끊어버리는 걸 인정하는 일이라 사실상 나라 망하자는 소리나 다름없으니 당연한 일. 치매라고 덮어씌운 게 문제가 아니라, 치매가 아닌데 저런 발언을 하는 게 더 문제다. 실제로 상황이 저기까지 치닫게 된 상황에서 여전히 영조에게 충성을 바친 건 어영부영 따라갔거나 어영부영 왕이니 관성적으로 충성하는 쪽, 나아가서는 미쳐버려 정신에 좀 문제가 생긴 쪽이 전부였다.[36] 2배속 귀양[37] 3배속 귀양[38] 14촌으로 명종 때부터 갈라져 내려온다.[39] 실제 조선역사상 최연소 과거 급제는 고종시기에 급제한 이건창으로 만 14세의 나이로 합격했다. 박지원은 그보다 백여 년은 더 전 사람이니 이 소설 기준으로는 최연소가 맞을 것이다.[40] 사절의 신분인데다 뼛속까지 양반이라 박지원 본인은 내가 가져가고 싶으니까 가져가는 건데 문제 있음?이란 식이지 갈취한다는 의식은 전혀 없다(...)[41] 그림 작가가 자그마치 변상벽, 정선이라는 화려한 진용에다 풀컬러다![42] 적전(藉田)이라고 하는데, 사실 기우제 지내며 퍼포먼스 하는 용도 빼고는 평소엔 신경작법 테스트용으로 자주 쓰여서 홍대용이 관습을 넘어서는 엄청난 기행을 한 것까진 아니다. 자기 관할도 아닌걸 매제 이름 팔아서 한 게 문제지...[43] 그나마 홍대용이 나은 게 김운행이 기함할 정도로 홍삼을 뿌려서 값을 치렀다.[44] 첫 실전인 무관들조차 구두룡섬을 시행한 김운행에게 토를 다는 상황에서 장수도 아닌 홍대용이 이런 반응을 보인 이유는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구두룡섬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서양 신부들에게 왜 나한테는 저런 기술을 안 가르쳐줬느냐, 나도 이거 쓰면 이름 날릴 것이다 운운했던 게 허세가 아니었던 셈. 실제로 홍대용은 귀국 직후 북정기를 통해 치트 스킬 구두룡섬의 원리를 수학적으로 분석 및 해명했다고 한다. 말 그대로 미친 능력자라 오히려 김운행의 위업을 정확하게 인식한 듯.[45] "실학자 주제에 실질이 없다.""쉬운 일만(안빈낙도) 하면서 폼 잡는다." 등으로 안정복을 저격했다.[46] 이때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에드워드 카의 명언을 멋대로 비틀어 해석하는 서술이 일품이다.[47] 칭제건원이 이루어지면 김운행의 영혼이 걸린 최종목표인 '영의정'이 승상이나 상국으로 바뀌기 때문에 정말로 심대한 위협을 느꼈을 것이다.[48] 정직한 연금술(?)뿐이 아니라 긴빠이에도 도가 텄다(...)[49] 이 때 주인공이 한 방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에게는 소위 사이다라 불리는 통쾌함을 선사한다[50] 노론에게 전해주면 다음 임금은 노론에게 휘둘리게 된다. 남인이나 소론한테 준다 한들 유의미한 영향력을 갖기 어렵다.[51] 하지만 이것도 하루라도 더 살아서 김운행을 견제하려는 필사적인 의도이다. 이미 원 역사의 수명보다 훨씬 더 살고 있지만 이를 알리 없는 박문수는 오로지 김운행의 독주를 견제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는 상태이다.[52] 본인의 임종을 김운행이 지키게 한 것이다. 박문수가 김운행을 자신의 단순한 적대자나 후기지수 정도가 아니라 조선이라는 국가를 떠받들고 지탱해 왔던 본인의 후계자라 여기고 인정한 것이라 볼 여지가 있는 셈이다.[53] 원 역사에서는 임오화변 때 세자 보호를 천명하다가 사사된다.[54] 이를 김운행은 초시공요새라 드립을 치는데, 훈련도감에 대한 서술과 투톱을 이루는 매우 찰진 명문이다.[55] 엄밀하게 말하자면 김운행이 배려를 해준 것이 아니라 본인이 해먹으려고 붕당을 가리지 않고 기름칠을 하고 딜을 했기 때문이다[56] 병기나 갑옷 깃발 등 군수품을 제조하는 곳[57] 긴빠이를 못하게 된 것도 있지만, 원래 역사를 아는 김운행이 조선 군대가 제대로 된 무장을 갖추는 상황을 꺼렸다. 영조는 총뿌리를 외적이 아닌 사도세자에게 돌릴 인간이고, 조신들은 효종뽕이 도질 텐데 이 시기 황제는 건륭제 즉 청나라의 최전성기였다.[58] 평시선덕관은 상품작물과 갖가지 특산품에 따라 수수료를 받는만큼 이런 구분 문제로 인한 싸움이 거셌다. 호박이 과일인가 야채인가, 수달은 생선인가 짐승인가 등.[59] 엄밀히 말하면 서로 같은 혐의로 상대를 날려버리려고 했는데 김운행이 한 수 위였던 탓에 일방적으로 당한 것이다.[60] 마침 어영청과 분쟁이 일어나 장용영이 왕의 친위대에서 밀려나며 장용영은 영조에 대한 불만을 품은 차였다.[61] 초반에는 한니발의 시야 빨을 본 이훤과 김운행이 기세를 잡긴 했지만, 둘이 돌격해버린 이후 김성응이 홀로 지휘해 4만이 넘는 청군을 격파한 것이 맞다.[62] 시호 또한 원 역사의 효정(孝靖)에서 충정(忠靖)으로 한단계 업그레이드 되었다.[63] 환갑이 넘은 나이에 검계의 습격을 받았는데 역으로 칼솜씨로 다 내쫓았다는 일화에서 '저 인간은 로보캅이라도 되나. 늙지도 않네.' 라는 의미에서 주인공이 붙여준 별명(...)[64] 평안감사로 발령받았다가 자신의 계략으로 공석이 된 평안병마절도사를 겸직하였다.[65] 초도왕의 시체를 쏜 귀족들의 화살이 오기를 죽이려다 잘못 맞은 것임은 누구나 알겠지만 처벌할 수밖에 없던 것처럼 왕족들을 겁박한 죄목은 의도가 좋더라도 용서할 수 없기에 구선행은 승전해도 중형을 피할 수 없었다.[66] 원래 집에서 키우던 개인 '초복이'와, 북경에서 정교회 사제한테서 강탈해와 각각 '중복', '말복'이라고 이름지어준 맹견 두 마리. 중복이와 말복이는 말이 좋아 맹견이지 발바닥이 사람 손바닥만 하다는 묘사나 원래 역사의 '열하일기'에서 박지원이 "당나귀만한 아라사 개"라고 서술한 부분을 인용한 걸 보면 오브차카 같은 초대형견인 듯.[67] 정6품 무관 벼슬로, 원래는 육군에 있는 보직인데, 국왕 이훤이 직접 나서서 경국대전을 패스하고 해방별대에 꽂아버렸다. 당연히 이렇게 만든 것은 김춘식이다..[68] 왜란 당시 조선수군은 조정의 지원을 받지 않고 7년 동안 전쟁을 치러냈다...[69] 수빈 박씨의 조부 박사석의 서조카. 촌수가 멀긴 하나 박지원과 동 항렬이라 알음알음 커넥션이 이어져 김운행에게까지 직접 닿을 수 있었다.[70] 삐끗하면 가문 전체의 모가지가 위험한 쌀과 소금이 백색 담당이다[71] 김운행은 이걸 '양(陽)의 현현'이라고 부르면서, 이걸 만들면서 음양의 이치를 깨달아야 겐나이가 가지고 있던 수동발전기를 고치는 원리를 배울 수 있다고 사기쳐서 근로의욕을 불어넣는다.[72] 조선엔 검도장 문화가 없기 때문에 거짓말은 아니라고 한다.[73] 사쓰마 번은 시마즈 가문과 함께 존재 자체가 소멸된 수준에 조슈 번 또한 일본군의 병참을 담당하느라 재정과 내정이 파탄나버렸다.[74] 그러나 하필 유구 함대를 격퇴한 주인공이 대마도 마쓰마에 번이었기 때문에 막부는 크나큰 약점을 쥐게 되었다.[75] 흔히 청의 최전성기를 강희제-옹정제 시대로 칭하는데, 명군 강희제와 옹정제 시기에 축적된 잠재력을 본격적으로 폭발시킨 것이 바로 건륭제 시기이다. 이후로는 건륭제 말기부터 쌓인 적폐들이 곪아 터지면서 서서히 쇠퇴하게 된다.[76] 조선의 춘화가 일본을 거쳐서 청나라에 퍼진다던가.[77] 물론 이 대부분의 승전은 피로스의 승리라고도 하기 애매한 상처뿐인 영광이다.[78] 후명은 대만원정 실패로 회복할 시간이 필요하고, 조선 역시 요동과 만주에서 1년이나 전쟁을 한 만큼 바로 산해관을 공격하는 건 무리였다.[79] 준가르 문서에서도 나오지만, 준가르도 악랄한 유목 제국의 성격을 유지했기 때문에 주변의 원한을 많이 사기도 했고, 규모는 유목민답게 수십만명 밖에 되지 않아 멸절이 쉬운 편이었다. 이들 중 일부는 살아남아 다른 종족에 동화되기도 했고 같은 오이라트의 후예이자 친족 종족인 칼미크인들도 남아 있어 히틀러의 악랄함에 비하기엔 무리가 있긴 하다. 하지만 청나라가 명군이고 암군이고 할 거 없이 적에 대해서 가차없이 학살을 일삼아서 코락스의 이런 과장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면도 있다.[80] 실제 역사의 건륭제는 거의 비슷한 표현인 중외공주(中外共主, 만국의 군주), 천하대군(天下大君, 세계의 제왕)라는 중2병 돋는 표현을 실제로 쓰긴 썼다.[81] 실제로 건륭제는 만주 문화를 진흥시키기 위해 많은 애를 썼던 사람인데, 이 가운데 만주어 진흥책도 있었을 정도로 많은 관심을 두었으며 조선 사대부들이 어느 정도 청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나 시험해 볼 작정으로 조선 사신들이 올 때마다 만주어를 할 줄 아느냐고 물어봤다고 한다. 하지만 당대 조선 사대부들은 반청 사상 때문에 공공연히 만주어를 할 줄 알면 손가락질을 받을 가능성이 높았고, 역관들조차 만주어 실력이 형편 없었기에 건륭제의 이런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고.[82] 황자 중 가장 강한 사람이 천자에 올라 조선과 맞서라는 의미였으나, 정작 북경의 아들들은 조선보다는 서북의 준가르를 더 경계하며 버마군과 싸우던 부찰부항을 부르는 등 내분을 일으킨다. 또한 어느 황자를 택하든 토사구팽이 예정되어 있는 부찰부항으로 하여금 '가장 강한 자'라는 유조를 비틀어 해석하도록 하여 그가 진나라를 세워 갈라져 나가는 결과를 야기하기도 하였다.[83] 만주족이 아닌 이시요 등의 한족관리 등은 제외.[84] 홍염이 겨우 상황을 파악했을 때는 김운행은 이미 조선의 권신이 되어 있었다. 이훤은 세자시절부터 청나라의 야설선진문물 수용에 적극적이었는데, 이를 모르는 건륭제 입장에선 홍염이 제 역할을 잘 해 조선이 친청으로 돌아선 것처럼 보였다. 때문에 홍염은 현상황을 최대한 유지할 필요가 있었고 겸사겸사 밀수업으로 계속 돈을 쓸어담으려면 김운행의 협조가 필수적이었다.[85] 그 와중에 이대로 자신이 요동 내의 청군을 결집해 복귀한다면 군공과 황제의 유조를 조작해 영염을 황제로 올리고 실세가 될 수 있다고 야망을 꿈꾼다.[86] 몽골족은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만주족에게 서열 2위라는 호대우를 받으며 여러 전쟁과 국책사업에 참가했다. 때문에 조선, 강남, 서북 유목민들처럼 단번에 청을 손절할 수가 없었다.[87] 4, 8, 11황자는 같은 모친(금가씨) 소생이다.[88] 김운행은 신숙주의 절개를 이용해 확인했지만 갈수록 추한 행보를 보이면서 그 기세가 범부 수준으로 추락해버렸던지라 이런 놈이 청의 지도자일리 없다며 그냥 죽여버렸다.[89] 주력군이 팔기를 이끌고 너무 깊이 적진에 들어가는 바람에 부찰 부항은 연승을 거두고도 피해가 커질까봐 후퇴해야 했다.[90] 운남성과 귀주성[91] 북경의 다섯 황자를 제압하고 중원을 일통해야 가장 강한 자를 입증할 수 있는지라 대외적으로는 황제가 아닌 왕을 칭하고 있다.[92] 게다가 사천-운남에서는 인구수로 강남보다 크게 밀린다.[93] 조선은 영길리에 지지않는 강군만 최소 수만에 아시아 제일의 수군을 거느리고 대놓고 열병식을 하는 반면 영국인들은 말만 그럴 듯 하지 보여준 것은 이미 날아가 사라진 군대밖에 없다.[94] 원 역사에서도 유럽인들과 격하게 마찰했던 반서양파였다.[95] 또한 유럽인들이 기존에 강남에 있던 오나라를 계승한다는 삼알못스러운 명분을 내세웠다.[96] 오히려 유럽군의 대대적 약탈 때문에 부청멸양이라는 구호가 떠돌았을 정도.[물론] 오명은 물자만 댔다.[98] 본래는 상황 파악이 먼저였겠지만 김운행이 세치 혀를 놀려 공격하게 만들었다.[99] 사실 이시요는 이 시점에서 부찰부항에게 제대로 보급을 대주지 못한 호북, 호남성의 관리와 장수들을 보호해주고 있어서 설령 군량을 마련하더라도 선택지가 없기도 했다.[100] 이건 엄청난 모험수인데, 당장 오명에서 영국군에게 친지를 잃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대학살은 심했다. 당장 조선을 친다 해도 촉진, 준가르, 태평천국 등이 반감을 가지면 가지지 알아서 고개를 조아릴 리도 없다. 그렇지 않아도 아시아에 버려진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벌인 학살 때문에 중국을 돌아다니기도 힘든 판인다. 천자의 자리를 잃지 않기 위해서 아차하면 천하의 대적이 되는 일을 자처한 것.[101] 더 큰 문제는 히드라 공화국의 독립 전쟁 때문에 함대를 보낸다 한들 전번보다 훨씬 더 못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102] 조선도 오랜 전쟁 탓에 만성적인 기아 상태였고 백련교에게 받는 건 목재 정도 밖에 없었으나 이미 산동 백련교를 번국으로 받아들이고 전략적인 중요성도 깨달은 조선에서는 어떻게든 식량을 수급해줬다.[103] 왜 하필 태평천국이냐면, 도교에 기반한 백련교의 교리로 인해 국명도 그에 맞게 지어야 하는데 '태평국'은 지나치게 황건적 냄새가 나니 맹찬이 서양인들에게 줏어들은 이상세계인 천국을 국명에 덧붙였다.[104] 무려 어지에게 선공을 당하고도 반격할 정도의 실력[105] 딱히 팔 것이 없어서 선박건조용의 목재만 열심히 베었다고 한다.[106] 연경을 치겠으니 길을 빌려달라. 연경은 북경의 다른 이름 중 하나다.[107] 오히려 미리 알려준 덕에 전선에서 져서 밀렸음에도 인명 피해는 최소한이었다고 고마워했다.[108] 맹찬 입장에서도 할 말이 있는 것이 짝사랑하는 오삼랑과의 밀월을 알면서도 질투심으로 죽이기보다는, 사치를 줄이고 교단의 대의에 충실해달라고 부탁했으나 전부 무시하고 입단속만 시키려고 했다고 한다.[109] 실제 역사에서 준가르 칸국의 마지막 칸.[110] 또한 본래 아무르사나의 죽음은 청군이 몰아온 천연두 등의 전염병 탓이라고 한다. 여기서는 건강을 지킨 것.[111] 규슈에 막 파견된 몽골팔기가 엄청난 학살극을 벌이고 있어서 서류상 실적은 이들을 초월했다.[112] 본래 역사에서도 죽은 이후 민간신앙에 이름이 퍼졌는데, 여기서는 멀쩡히 살아서 승리하기까지 했으니 당연하다.[113] 물론 준가르가 10년 이상 저항운동을 하면서 세워온 전공은 어마무시하지만 산둥, 천진, 만주, 요동에서 세워온 조선의 대승보다는 색이 바랬다.[114] 이훤의 뒤주. 가까운 거리의 뒤주 안으로 공간이동한다. 8일동안은 외부에서 가해지는 모든 충격이 차단되며 식음을 전폐하고도 생존이 가능하지만. 반대로 8일이 넘도록 들어가있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115] 김운행 역시도 다른 서양말 능력은 숨기고 있어도 네덜란드어 실력은 숨기지 않고 있다. 박연의 자손을 엮어서 어떻게든 개연성을 만들 수 있기 때문.[116] 빨간머리도적. 홍모인(紅毛人)이라고도 한다.[117] 가령 175화에서 김운행은 '영길리국'을 '홍모적'과 다른 무리들이라며 구별해서 말한다.[118] 일본군이 빠따를 미화하던 용어인 군인정신주입봉(軍人精神注入棒)의 패러디. 즉 문명국과 오랑캐의 분별을 물리적으로 세뇌시켜주겠다는 의미다(...).[119] 당시 네덜란드와 일본은 상호간에 사기를 치고 있었기 때문. 네덜란드는 자신들을 유럽의 군사강국으로, 일본은 네덜란드를 자기들 산하 속국이라고 공표하고 다녔다. 때문에 조선이 네덜란드 건으로 대놓고 일본에 책임을 씌우고 대접을 박하게 할 수 있었다.[120] 아라사의 국서에 자신들의 군주를 황제 폐하로 칭한 것을 보고 자존심이 상했다. 사실 크로토포프의 문제라기보다는 지금까지도 러시아는 '황제'라는 표현을 썼지만 중간에서 국서를 받는 중국 관리들이 표현을 고쳤기에 몰랐던 것이다.[121] 영국군이 대부분이긴 하나 프랑스군, 아메리카 민병대 등도 포함한다.[122] 독일은 프로이센의 7년 전쟁 패배로 사라졌다.[123] 본래대로라면 남태평양으로 갈 역사였으나 엔데버에 자금을 후원해 조선 탐사를 요청했다.[124] 단순한 중국군 격파가 아니라, 격파 후의 유럽 동맹군을 배신하고 중국 독점 지배가 어려워졌다.[125] 그리니치 천문대 대장 네빌 매스컬린, 그의 조수찰스 그린, 칼 폰 린네의 제자 다니엘 솔랜더, 박물학자이자 지질학자 토마스 페넌트, 박물학자 조셉 뱅크스 등등[126] 그 안엔 밀항한 조선인들도 다수 껴 있었는데, 이들이 조선의 외교관으로 둔갑되면서 머나먼 동방에서 전 세계의 혼란을 조종하는 김운행과 조선의 명성(?)이 더욱 높아진다.[127] 성균관 유생을 가장한 김석태의 아무말 주워담기가 원흉.[128] 원역사의 조지 워싱턴은 대지주였고, 독립전쟁에서 손속이 독하지도 않았으나 여기서는 영국의 진압군 상대로 대학살을 벌이고 블랙 팬서 연대 탓에 고향의 농장도 크게 손해를 봤을 터라서 정치를 놓지 않은 모양이다. 물론 본래 역사처럼 성장을 이뤘다 하더라도 한층 격해진 영국과의 갈등, 조선과의 연결성을 생각하면 당대 미국 최고의 지휘관이자 조선 라인을 거머쥔 초대 대통령이 은퇴하기란 퍽 요원했을 것이다. 참고로 본래 워싱턴은 원주민들과의 만남을 통해 저 마을 파괴자라는 별명이 '인디언들의 마을로 직접 다가온 자'라는 뜻으로 인용되거나, 원주민들의 후기 신앙에서 '원주민들을 위한 천국에 유일하게 입성 가능한 백인' 등 다소 낯뜨거워질 정도의 찬사를 받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