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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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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동양 각국의 춘화3. 현대의 춘화4. 의의

1. 개요

춘화()는 주로 동아시아 3국에서 성교를 묘사한 그림을 이르는 말이다. 서구권의 에로틱 아트와 비교할 때 비슷한 사례로 쓰인다. 요즘으로 이야기하면 에로 동인지를 한 쪽씩 그려서 내놓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꼭 의미가 춘화라고 동양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서양화에서 섹스를 묘사한 그림도 춘화라고 할 수 있다.

춘화는 옛 미술품 중에서도 성격이 확연히 드러나는 특별한 성격의 그림들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은 그 그림에서도 보이듯 주술용과 방중술(房中術)용, 최음(催淫)용등 특정 목적으로 그려진 일종의 포르노그래피들이며 생명을 소생시키는 생성의 계절이라는 '봄'의 의미를 성과 결부시켜 '춘화'라는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 카더라.

조선시대 궁궐에서는 이따금 내관들에게 보여주어 성기능이 부활하진 않았는지 확인하기도 하였다.[1]

2. 동양 각국의 춘화

2.1. 중국

동양에서 춘화의 기원은 기원전 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전한 시절의 한 황자는 자신의 접견실을 벌거벗은 남녀가 성행위를 하는 장면을 그려놓은 병풍으로 장식했다고 하는 내용이 전해지며, 의 시절에는 기방의 머리병풍으로 춘화가 많이 그려지고 사용되었다. 심지어 한의 재상을 지낸 진평은 향락용으로 춘화를 그리기까지 했다. 또한 중국의 춘화, 특히 청나라 때 만들어진 것의 특징으로는 다양한 체위와 인원들이 마치 기예를 하듯 펄쳐진다는 특징이 있다. 또한 특이하게도 그림 속 여성들은 전부 발가벗어도 대부분 신발은 제대로 신고 있는데 이는 당시 유행하던 전족 풍습에서 비롯되어 발은 함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2]

2.2. 한국

한국의 경우 고려 시대 자유연애가 활발했기에 춘화 또한 은밀하게 유통되었지 않을까 추정할 수 있으나, 그 사례는 현대에 알려진 바 없으며 단지 고려 왕조가 원왕조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원의 황실을 통해 중국 춘화가 고려 왕실에 전해졌으리라고 추측만 할 뿐이다. 다만 개성 인근에서 출토된 고려시대 구리거울 중에 춘화처럼 남녀 성행위 체위를 그대로 묘사한 청동거울이 출토된 바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부터 각종 성애소설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유입되면서부터 18세기부터 유행했으며, 이는 조선 후기 풍속화의 발달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그 예로 당대의 뛰어난 풍속화가인 김홍도신윤복의 작품으로 전하는 춘화도 존재한다.[3] 조선 시대의 춘화들은 주로 돈이 많은 양반들이 비밀리에 즐겨 보던 그림이라고 볼 수 있었다.

비교적 양반들보다 성적으로 자유로웠던 서민들은 굳이 그러한 그림을 보며 즐길 필요도 없었고 당시에도 그림이란 꽤 높은 가격에 거래되는 물건[4]이었기 때문에 춘화는 거의 양반들 사이에서만 유행하던 사치품이었던 것이다. 유명한 것으로 기생을 산 노인이 방에서 성관계하는 그림이 있다. 베테랑 기생을 만족 시켜주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는 노인의 모습과, 그 와중에 담배를 태우는 기생의 모습이....

사실, 유행이라고 하기에는, 대놓고 제작할 수 없는 분야였다. 현대 대한민국도 국가적으로는 성 관념이 다소 보수적인 편에 속하는데[5], 유교적 관념 때문에 훨씬 더 보수적이던 조선 시대는 말할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의 유교적 사회상 속에서는 춘화는 당연히 취급되어서는 안 되는 물품이었다. 이러한 보수적인 성문화 때문에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춘화가 많이 발달하지 못했으며, 전해지는 그림의 수도 월등하게 차이가 난다. 한국에서 춘화가 18세기 이후에나 유행한 것도 이전보다 유교적인 문화가 많이 묽어지고 완화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사회 통념적으로는 금지되었더라도 사람들의 욕망이 완전히 억압되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에 소수의 직업 화가들이나, 그림 재주가 있는 사람들이 제작하여 유통하였다. 꽤나 돈벌이로 쏠쏠했던 모양이다.

일제강점기 시절부터는 사진이 춘화를 대신했기 때문에 사실상 사라지고 일본으로 전래된 문화쯤으로 취급되었다. 이중섭의 그림의 경우는 '벌거벗은 어린이'를 주로 그렸을 뿐이었는데 벌거벗었다는 이유 때문에 그 그림이 춘화로 인식되어 정부에 의해 철거당하기도 했다.

2.3. 일본

일본은 고대 시대인 헤이안 시대에 이미 중국의 춘화가 소개되고 있었으나 실제로 제대로 된 일본식 춘화의 등장은 에도 시대우키요에 화파가 등장하면서부터라고 한다. 소위 우리가 인터넷에서 자주 보게 되는 일본식 춘화가 바로 이 시기에 등장한 춘화들. 특히 배경이 무성의한데 비해서 성기 부위가 과장되거나 채색이 화려하다는 점 등이 일본 춘화의 특징이다. 여성의 음모가 한올한올 살아있어(...) 실제 여성이 보면 오히려 징그러울 정도로 성기를 세밀하게 그리는 화풍이 유행했다.

또한 조선의 춘화가 남성은 다양한데 비해 여성이 주로 기생 위주로 그려지던 반면, 일본 춘화에서는 유부녀, 마을 처녀, 창녀, 중산층 규수들은 물론, 교토 귀족 및 황실의 궁녀들과 오오쿠시녀들도 다루는 등 모델이 되는 여성층이 매우 다채로운 것을 볼 때 조선과 달리 춘화를 즐기는 부류가 매우 다양했으리라 생각된다. 무사의 칼집에 춘화를 넣기도 했다. 일단 명목상으로는 부적의 용도였는데, 사무라이가 화가 치솟아 우발적으로 칼을 뽑아 상대방을 베려는 찰나 이렇고 저렇고한 그림이 보이면 화가 누그러들어 살생을 막는다는 의도였을 거라고 믿어주자. 특히나 우키요에는 기본적으로 판화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여러번 인쇄가 가능하다는 장점 또한 계속 새로 그려야 했던 한국이나 중국과는 달리 서민들에게도 쉽게 보급이 가능했다. 우키요에에서 가장 많이 만들어지고 가장 잘 팔린 장르가 바로 춘화였다. 그러다보니 일본 우키요에 다색 판화 기술이 가장 발휘된 분야 역시 춘화였다. 춘화를 보면 일본 에도 시대의 판화 인쇄기술의 발달을 알 수 있다.

장르도 대단히 다양. 촉수동성애단면도, 오나홀, 수간까지 별것들이 다 있다. 요즘 에로 동인지로 나오는 소재 대부분이 이미 200~300년 전에 그려지던 것들.

일본의 춘화는 근대 초기 서양에 일본 문물을 소개시키는 통로가 되기도 했다. 당시 춘화는 일본 내에서는 그 예술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쓰고 버리는 정도의 용도였고, 그래서 당대의 이름난 화가들이 일부러 가명을 사용해 춘화를 그리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서양에 도자기를 수출할 때, 배송 중 파손을 막기 위해 완충재 용도로 춘화를 구겨넣은 것. 사실 택배 보낼 때 신문지 구겨넣는 정도의 행동이었겠지만, 받아본 서양에서는 도자기보다도 오히려 생전 처음 접한 우키요에의 색감과 스타일에 매혹되었던 것이다. 우키요에의 영향을 많이 받은 화가들 중엔 그 유명한 인상파 화가인 고흐모네도 끼어 있다. 특히 모네는 우키요에 화풍에 대단한 인상을 받았는지, 그의 연작 중엔 일본식 정원을 소재로 한 것들도 존재한다.

참고로 서양의 예술가들이 우키요에의 스타일도 스타일이지만 특유의 색감에 매료된 데에는 일본의 목판화 인쇄 기술이 있었다. 목판화는 여러번 찍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데, 문제는 춘화시장이 커지면서 돈이 되고, 색이 별로인 작품은 인기가 떨어졌기 때문에 좀 더 화려하고 다채로운 색상을 자랑하게 된 것이다. 덕분에 일본 에도 시대 판화 기술의 정수는 춘화에 있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

니코니코 정화에서는, R-15이다.(...)딸감으로 시작하였으나 너무 오래되어 문화재가 된것도 현역으로 분류되는 성진국의 위엄

2.4. 인도

카마수트라라는 힌두교 경전은 내용 자체가 성에 대한 찬미이므로, 거기 들어가는 그림, 그 내용을 형상화한 조각 모두 춘화에 해당된다.(구글 이미지 검색에서 Kama Sutra를 치면 매우 많은 그림이 나온다) 인도 카주라호에 있는 사원(Khajuraho Temple)은 전체가 곡예에 가까운 자세를 포함한 각종 다양한 체위 조각상으로 가득 차 있다.(당당히 세계 문화 유산이다) 카마수트라는 기원 전부터 만들어졌다니 동양 춘화의 원조라고 봐도 될 듯.

3. 현대의 춘화

지금도 춘화는 현대화되어서 남아있다. 바로 에로게, 야짤, 야겜, 성인 상업지 등이다. '사람을 꼴리게 하는 그림'이라는 것이 춘화의 정의이기 때문에 의미 역시 같다. 그래서 완곡어법으로, 야짤을 춘화라고 돌려 말하기도 한다.

4. 의의

예술적 가치가 없다고 무시받곤 하지만, 춘화에도 엄연히 예술적·역사적 가치가 있다. 춘화 안에는 그 당시의 여러 가지 풍속과 정서, 사상 등이 배여나오고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사진이나 영상같은 매체가 없었으며 성적으로 현대보다 훨씬 보수적이었던 과거에서도 기괴한 성적 취향을 담았거나 너무 노골적이지 않은 수준의 평범한 춘화는 성관념이 빡빡했던 조선도 성교육을 위해서도 충실히 사용되기도 했다. 일례로 일본에서는 시집을 가야 하는 처녀의 혼수품으로도 이용되었다. 요컨대 성교육 교재로 볼 소지도 충분하다는 것.

촉수물같이 기괴한 성적 취향을 담고 있거나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만 하는 그림이라도 상술한 성욕 해소 목적은 충분히 충족하므로 나쁘다 볼 수 없다. 되려 사회 통념상 꺼려지거나, 반인륜적이거나, 지나치게 가학적인 취향을 해소하여, 혹여나 쌓인 이상성욕이 폭발해 범죄를 일으키는 것을 방지하는, 매우 건설적이며 공동 이익에 보탬이 되는 유익한 가치가 있다.

무엇보다, 춘화를 만드는 데는 안정적으로 종이를 공급할 제지 기술의 발전은 물론 그 당시 최고의 인쇄 기술과 채색 기술 등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더욱더 예술적·기술적·사회적 가치가 있다.[6] 심지어 중국 명나라 중기 시절 발행된 춘화는 목판을 색상에 따라 그림 1장당 3~4장을 만들어서 흑색, 적색, 녹색, 청색을 구별해서 한번에 찍어내는 4색 동시 인쇄기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참고로 당시는 고급서적도 고작 검은색 단일로만 인쇄했다.


[1] 흔히 오해하는데 조선시대의 내시들은 고환을 적출하거나 다친 것이지 어릴때부터 사고로 다친 경우가 아닌 이상에야 음경은 없지 않았고 자르지도 않았다. 소변을 봐야 하니깐 그러니 이렇게 확인해 볼 필요성이 있었다.[2] 옛 중국 여성들에게 있어서 남편이 아닌 사람에게 전족이 된 발을 보여준다는 것은 알몸을 보여준 것만큼 수치스러운 것이었다. 심지어 낯선 남자에게 여자가 전족이 된 발을 보여주는 일은 그 남자와 성관계를 가지고 싶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래서 청말에 전족이 폐지될 무렵 강제로 전족을 보이게 된 여성들이 자살하는 일이 빈번하게 있었다고 한다.[3] 링크(열람 시 후방주의!)[4] 그리는 종이, 비단 자체가 고가품이어서, 책을 읽거나 쓰고 종이를 물에 빨아 먹물을 제거하고 다시 쓰곤 하였다. 비단은 말할 것도 없었고.[5] 물론 현 10~30대 젊은 사람들은 과거에 비하면 패션 같은 일부 분야에 한정하여 유럽권만큼이나 매우 상당한 성적 개방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연애나 결혼 문화 같은 것을 비교하면 지금도 웬만한 유럽보다 보수적이고 그나마 동유럽 정도나 비교가 가능하다. 한국인들은 서양인을 사귀면 너무 바람을 쉽게 피운다는 식의 불만이 나오고, 혼외출산은 젊은 세대도 찬성하지 않는 부류가 많으며, 어장 관리를 너무 당연시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 경우도 있다. 프랑스 같은 곳은 웬만한 서양인도 놀랄 정도다.[6] 인류 역사상 신식 정보 매체의 대량 확산단계에서 유통되는 최초의 컨텐츠는 대다수가 성에 관한 것이다. 플로피 디스크, 레이저디스크, CD, 비디오테이프, 비트토렌트, 위키백과, VR 등이 대표적 사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