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c00d45,#94153e><colcolor=#f0ad73> 조선 판의금부사 효정공(孝靖公) 김성응 金聖應 | |
출생 | 1699년(숙종 25) |
사망 | 1764년(영조 40) |
본관 | 청풍 김씨 |
자 | 군서(君瑞) |
시호 | 효정(孝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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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후기의 관료. 청풍부원군 김우명(金佑明)의 증손, 형조판서 김석연(金錫衍)의 손자, 김도영(金道泳)의 아들. 고모가 현종의 왕비 명성왕후이다. 본관은 청풍.2. 생애
1699년(숙종 25) 출생하였다.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 이후 사복시 내승(司僕寺內乘)으로 기용, 고부 군수가 되었다. 1733년(영조 9) 7월 영조가 내시사(內試射)에 친림(親臨)하여 특별히 권무(勸武) 별군직(別軍職) 김성응을 전시(殿試)에 직부(直赴)시킬 것을 명하였고, 등과(登科)하였다. 이는 김성응이 청풍부원군 김우명(金佑明)의 증손이고 판서 김석연(金奭衍)의 손자인 연고였다.
1734년(영조10) 2월 훈련원 정(訓鍊院正)[1], 정주 목사[2]로 거듭 승진하였고, 동년(영조 10) 3월에는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3]에 올랐다. 영조의 척리(戚里)[4]라는 이유로 초고속 승진을 거듭한 것에 대해 사람들이 비루하게 여겼다.
1735년(영조11) 3월 총융사(摠戎使), 동년 9월 어영대장(御營大將)이 되었다. 1736년(영조 12) 12월 훈련대장(訓錬大將)에 임명된 후부터 20여 년에 걸쳐 14번이나 역임했다.[5]
1737년(영조 13) 8월 병조판서, 동년 11월 형조판서에 올랐다. 1739년(영조 15) 3월 한성판윤이 되었고, 동년 6월 형조판서, 동년 8월 병조판서가 되었다. 1740년(영조 16) 5월 어영대장이 되었다. 1741년(영조 17) 2월 형조판서, 동년 4월 어영대장, 동년 6월 형조판서, 동년 8월 병조판서가 되었다. 1742년(영조 18) 6월 어영대장, 동년 10월 포도대장이 되었다. 1743년(영조 19) 윤4월 한성판윤, 1748년(영조 24) 3월 좌포도대장, 1749년(영조 25) 9월 한성판윤이 되었다.
1750년(영조 26) 5월 판의금부사[6]에 올랐고, 1752년(영조 28) 12월, 1753년(영조 29) 9월 거듭해서 판의금부사가 되었다. 1753년(영조 29) 12월 판돈녕부사[7]가 되었다. 1754년(영조 30) 윤4월 다시 판의금부사가 되었고, 동년 5월, 동년 7월, 1755년(영조 31) 10월 거듭해서 판의금부사가 되었다. 1756년(영조 32) 2월 형조판서, 1760년(영조 36) 8월 병조판서, 1762년(영조 38) 4월 금위대장(禁衛大將), 동년 윤5월 병조판서가 되었다. 1764년(영조 40) 8월 사망하였다.
실록은, "별천(別薦)으로 진출하여 무과에 급제하였고 얼마 안되어 훈련대장으로 뛰어올라 거의 20년 동안이나 군(軍)을 맡고 있었다. 비록 재능은 없었으나 성품이 본디 너그러웠으므로 군졸들이 편하게 여기었다."라고 하였다.
영조는 말하길, "그는 너그럽고 공평하며 웅장하고 위엄이 있어 궂은 일을 같이 한 신하였는데, 매우 슬프도다."라고 하였다.
[1] 훈련원의 종3품 당하관 정.[2] 정주목을 관할하던 정3품 지방관.[3] 경상우도병마절도사의 약칭. 병마절도사는 각 도의 육군을 지휘하는 종2품 외관직 무관이다.[4] 임금의 내외척.[5] 총 14회 역임으로 역대 최다 재임 기록이다. 1736년(영조 12) 12월 7일부터 1762년(영조 38) 3월까지 약 25년 3개월에 걸쳐 파직과 서용 등을 반복했다. 통산 재임기간은 약 20년 7개월 ~ 21년 1개월로 역대 1위이고, 연속 재임기간은 약 12년 7개월로 이완(李浣)(약 15년 7개월)에 이은 역대 2위이다.[6] 의금부의 종1품 판사.[7] 돈녕부의 종1품 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