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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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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아르헨티나의 방송국 텔레페가 아르헨티나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아르헨티나인 100명'을 선정했다.
TOP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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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위~100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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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사르 루이스 메노티 세사르 밀스테인 다니엘 파사레야 도밍고 파우스티노 사르미엔토 엔리케 앙젤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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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케 산토스 디세폴로 에르네스토 사바토 에스테반 에체베리아 에스텔라 데 카를로토 파쿤도 키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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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렌티노 아메히노 프란시스코 모레노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가브리엘라 사바티니 기예르모 빌라스
<rowcolor=#ffffff> 51위 52위 53위 54위 55위
구스타보 산타올랄라 헤베 데 보나피니 이폴리토 이리고옌 우고 포르타 호르헤 뉴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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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 에르난데스 호세 마리아 가티카 후안 바우티스타 알베르디 후안 호세 카스텔리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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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괴된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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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공화국 초대 공업상[1]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
Ernesto "Che" Guevara
파일:체 게바라.png
본명 에르네스토 라파엘 게바라 데라세르나
Ernesto Rafael Guevara de la Serna
출생 1928년 6월 14일
아르헨티나 산타페 주 로사리오
사망 1967년 10월 9일 (향년 39세)
볼리비아 산타크루스 주 라 이게라[2]
국적
[[아르헨티나|
파일:아르헨티나 국기.svg
아르헨티나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
[[쿠바|
파일:쿠바 국기.svg
쿠바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복수국적)
재임
기간
쿠바 국립은행 총재
1959년 11월 26일 ~ 1961년 2월
초대 공업상
1961년 2월 11일 ~ 1965년 3월 24일
학력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교 (의학과 / 박사)
신체 175cm | O형
종교 무종교 (무신론)
정당
[[쿠바 공산당|]]
볼리비아 공산당
약력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교 겸임교수
쿠바 국립은행 총재
쿠바 초대 공업상
서명 파일:체 게바라 서명.svg

1. 개요2. 생애
2.1. 유년기2.2. 의사에서 혁명가로2.3. 혁명은 성공, 경제는 실패2.4. 쿠바를 떠나다2.5. 볼리비아에서의 죽음2.6. 죽음 이후
3. 평가
3.1. 긍정적 평가3.2. 부정적 평가
3.2.1. 반대파 학살과 정치범 수용소3.2.2. 볼리비아에서의 혁명 활동에 대한 비판
4. 대중매체에서5. 여담

[clearfix]

1. 개요

아르헨티나쿠바군의관 출신 정치인으로 체 게바라 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본명이 아닌 애칭으로, 훗날 그를 상징하는 이름이 되었다. 체(Che)의 원래 뜻은 바로 이탈리아어 케 코사 체(Che cosa c'è)[3]를 뜻하는 말이었는데, 아르헨티나로 대거 유입해 온 알프스산맥 지방 출신의 이탈리아 사람들이 언제부터 이 체(c'è)를 체(Che)로 바꿔 쓰고 발음하였다. 아르헨티나 북동부와 파라과이에서 통용되는 과라니어에서 체(Che)는 '나' 또는 '나로서는'이라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그의 동생이 낸 책에 따르면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체(Che)를 상습적으로 써서 별명이 붙여졌다고 한다.

가까운 혁명 동지들은 체(Che) 말고도 엘 찬초(El Chancho)라는 애칭으로도 불렀다 하니, 별명이 많은 사나이였다.[4]

그가 쿠바 혁명의 주도자라는 이유로 쿠바 출신이라고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체 게바라는 사실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르헨티나 사람이다.[5] 아르헨티나의 또 다른 유명인인 에바 페론의 일대기를 다룬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뮤지컬 『에비타』에 등장인물인 체가 그라는 설도 있다. 극 중간에 등장하는 해설 역으로, 극 중 내내 페론을 따라 다니며 그녀의 행동에 딴죽을 걸거나 비아냥거리는 역할을 맡았다.[6]

2. 생애

2.1. 유년기

본명은 '에르네스토 라파엘 게바라 데 라 세르나 (Ernesto Rafael Guevara de la Serna)'이다.

산타페 주 로사리오의 귀족가 혈통을 이어 받은 부르주아 집안 출신으로 아버지는 제법 큰 병원 원장이었으며, 경제적으로 부족함 없이 잘 자랐다.[7] 하지만 부모가 둘 다 중립적 자유주의자라 어릴적부터 스페인 내전 패배로 망명한 공화국 정부 인물들과 만나 진보적인 사고에 대한 지각을 넓혔다. 클수록 가정에 헌신적이지 않은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이 커졌다고 한다.
<bgcolor=#fff,#191919><colbgcolor=#af002a><colcolor=#fff> 파일:attachment/체 게바라/76.jpg
유년 시절의 체 게바라

체 게바라 평전에 의하면 어린 시절 에밀리오 살가리[8]의 소설들에 빠져 살았는데 이 소설들에서 반제국주의적 사고관을 배우게 되었다고 적혀 있다. 사색과 독서를 좋아했다고 한다.

체 게바라는 미숙아로 태어났다. 두 살이었을 때는 아버지의 팔에 안긴 채 차가운 여울을 건너다 천식에 걸려 평생 흡입기를 가지고 다녔다. 그럼에도 학창 시절 럭비를 즐겨 하는 만능 스포츠맨이었고, 시가를 즐겨 피웠다.[9]

2.2. 의사에서 혁명가로

원래 의사를 꿈꿔[10]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교 의대를 졸업했으나[11], 우연히 친구인 알베르토 그라나도모터사이클로 남미 대륙을 여행하면서 빈부격차로 인해 좌절하여 하루하루 살아가는 무수한 사탕수수, 커피, 바나나 농장의 노예들과 광산의 광부들, 빈민가의 빈민들을 보며 충격에 빠졌다.[12] 또한 과테말라에서 CIA 사주를 받은 군부가 토지개혁을 시도한 좌파 하코보 아르벤스 정권을 무너뜨리는 것을 보고 미국에 대한 적개심을 갖게 되었다. 체는 이 당시 현실에 좌절하여, 의사 가운을 던지고 혁명에 종사하게 된다. 이것을 소재로 만든 영화가《모터사이클 다이어리》이다. 2011년 88살에 세상을 떠난 그라나도는 이 영화를 매우 호평했다.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에 대한 비판적 평가 중에는 극적 재미를 위해 온건한 급진주의자로서 젊은 시절 체와 의견을 나누던 친구였던 알베르토 그라나도를 바보스럽고 경박한 인물로 묘사해 버렸다는 것이 있음을 생각하면 꽤 너그러운 인물인 듯 하다. 참고로 그라나도는 체와는 달리 혁명 운동에 참여하지 않고 계속 의사로 활동했다. 하지만 체와의 인연은 계속 이어나갔으며 쿠바 혁명이 성공한 뒤 체의 초청으로 쿠바로 와서 의과대학을 창립하고 생화학 교수로 일하며 쿠바에서 생활했다.
<bgcolor=#fff,#191919><colbgcolor=#af002a><colcolor=#fff> 파일:external/pds24.egloos.com/f0043889_4fc4bb457173a.jpg
체 게바라 (왼쪽) 및 피델 카스트로 (오른쪽)

과테말라 혁명에 참여했으나 실패로 끝나고[13] 쿠데타 정권의 블랙리스트에 오르게 되자 멕시코로 탈출해, 1955년 7월 10일 평생 동지인 변호사 출신 피델 카스트로와 만나 독재자 풀헨시오 바티스타가 집권하는 쿠바에 혁명의 불길을 일으키기로 결심하고, 혁명군에 투신하게 된다. 스페인 내전을 겪은 베테랑 군인 알베르트 바요 아래에서 혹독한 훈련을 거쳐[14] 강건한 병사로 단련되었다.

1956년 11월 25일, 멕시코툭스판에서 요트 그란마 호를 타고 쿠바로 향한 82명의 전사들은 12월 2일 쿠바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들은 상륙 직후 바티스타 정부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대부분이 사살되거나 체포되어 17명[15]으로 줄어들었다. 다음은 상륙에 성공한 혁명군의 명단이다.

이후 추가로 생존해서 합류한 6명의 대원은 다음과 같다.
<bgcolor=#fff,#191919><colbgcolor=#af002a><colcolor=#fff> 파일:external/pds22.egloos.com/f0043889_4fc4b9b88b8f4.jpg
동지들과 함께 행진하는 체 게바라

겨우 시에라 마에스트라로 탈출한 혁명군은 그 곳을 기점으로 바티스타 정권의 폭정에 오래 전부터 지쳐 있던 민중들의 지지를 받아 기세가 성장하였다. 그리고 크고 작은 정부군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해 나가며, 그들은 결국 2년 뒤인 1959년 1월 3일 수도 아바나에 입성하여 독재자 바티스타를 쿠바에서 몰아냄으로서 쿠바의 혁명이 마침표를 찍었다.[17] 이것이 바로 포코 이론의 성공이었다.

2.3. 혁명은 성공, 경제는 실패

혁명 직후 쿠바의 일반 대사로 해외에 파견되어 이집트나세르, 인도자와할랄 네루, 유고슬라비아티토, 인도네시아수카르노비동맹 국가들의 지도자들과 만나 반(反) 제국주의 및 반(反) 식민주의 외교 활동으로 우호를 다지게 된다. 심지어 UN 총회에서도 쿠바 대표로 참여했으며 북한에서 김일성을 만나기도 했다. 이 때부터 검은 베레모와 구겨진 군복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사실 혁명 초기까지만 해도 피델 카스트로에 맞먹는 영향력이나 지위, 명성을 가진 이는 없었다. 그는 그린마 호에 처음 탈 때까지만 해도 간부 같은 게 아니라 그냥 게릴라의 유일한 군의관이였고, 후일 대민 의료지원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두며 영향력과 지위가 올라간 것이다.[18]

이후 쿠바 국립은행 총재[19], 공업상에 발탁되어 농업국 쿠바를 산업화하려는 계획의 책임자가 된다.[20]

하지만 산업화와 금융 정책 등 경제 성적은 전반적으로 나빴다. 체는 애초에 금융이나 경제 전문가도 아니었고, 이상가였지 실무자가 아니었다. 은행총재이었지만 돈을 혐오해 지폐에다가 대충 '체'라고 휘갈겨 쓰거나, 실무를 보기 위해서 책상에 앉거나, 직접 실무를 보기보다는 대외활동을 통해 항상 구멍난 양말을 신고 직접 사탕수수 농장, 벽돌 공장에서 근로 활동을 더 많이 했다. 연출이라는 의견이 있다. 실제로 사진 촬영을 좀 많이 했고, 언론 등을 통해 노동하는 사진들이 많이 퍼졌다.

게다가 너무 서투른 산업 국유화는 자본 이탈과 함께 미국의 경제 봉쇄라는 더블 펀치를 쿠바에 안겼다. 게다가 마침 불거진 중소 간의 충돌은 공산주의 진영에서 편 가르기를 촉발시켰고 그 와중에 귀중한 시간까지 낭비되었다. 결과적으로 쿠바의 경제성장률이 침체되면서 체 게바라는 자아비판까지 해야 했으며, 이 커다란 실책으로 인해 라울 카스트로의 친소파가 쿠바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후 쿠바는 1970년대부터 80년대 전반기까지 동구권에 많은 의존을 하면서 어느 정도의 경제 성장을 이룩하였다. 하지만 이 때 동유럽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커지는 바람에 동유럽 공산 정권과 소련이 붕괴되고, 미국이 피델 정부의 붕괴를 목적으로 동구권 국가들에게 쿠바와의 관계를 끊을 것을 종용하면서 쿠바 경제에 큰 타격이 가해지는 바람에 1990년부터 1995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쿠바는 공장 가동이 어려워지고 식량 수급도 줄어들어서 하루 2끼 정도나 겨우 먹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물론 미국의 경제 제재로 공산 정권이 붕괴될 것이라는 말이 나오는 와중에도 여러가지 영리한 방안을 통해 어찌어찌 극복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에 있어서는 높게 평가할 만 하나 그 여파가 현재까지도 남아 있기 때문에 쿠바가 가난하다는 것도 다 이런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부분적으로는 노조가 기업 경영에 동참하게 하고[21], 물질적 유인이 아닌 도덕적 동기를 통해 노동실적을 장려하는 등 긍정적인 성과도 있었다. 장 코르미에의 평전에 의하면 체는 물질적 욕망을 노동의 이유로 삼는 행위는 우리가 깨부순 자본주의자들과 별반 다를 것 없다 했다. 즉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는 행위 자체를 악으로 봤다는 이야기이다.[22]

그래도 본업에 걸맞게 의사 출신인 게바라는 무엇보다 의료 개혁만큼은 자신있게 주도했다. 옛 친구 알베르토 그라나도를 쿠바로 초청하여 임상학 연구소를 설립하게 하고, 산티아고아바나 대학 등의 의대에 전폭적인 지원을 했다. 쿠바가 미국과 단교된 상황에서 의학만큼은 상당히 발달할 수 있었던 것에는 체 게바라의 공로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2.4. 쿠바를 떠나다

카스트로는 결국 친소련 정책을 취하여 자국 내에 소련 핵미사일 기지 설치를 허용하고 군사 및 경제 원조를 얻어냈으나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를 계기로 게바라는 소련의 진의에 대해 회의감을 품게 되었고 이는 소련의 점수 따기에 몰두하던 카스트로와 갈등하며 그와의 사이에 균열을 만드는 계기가 된다. 특히 1965년 1월, 알제리에서 행한 연설을 통해 소련을 향해 “어떤 사회주의 국가(소련)는 제국주의 국가처럼 착취한다”라는 원색적 비난을 퍼부었고, 이에 격노한 새 집권자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소련 서기장이 그가 공직에서 사퇴하지 않으면 쿠바에 대한 모든 경제 원조를 중단하겠다는 엄포를 놓게 되자 카스트로의 지시로 모든 공직에서도 사임하게 된다. 경제 정책 실패에 이어 터진 이 사건으로 인해 그는 혁명 정권 내에서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었다. 결국 그 해 5월, 가족과 카스트로에게 보내는 편지를 남기고 소수의 지지자들과 함께 쿠바를 등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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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를 하고 있는 체 게바라
Hasta la victoria siempre
영원한 승리의 그날까지[23]

체 게바라와 소련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된 원인은 다음과 같이 분석할 수 있다.

1. 체 게바라는 마오쩌둥혁명전략에 큰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러시아 혁명 당시 제정 러시아가 농업 국가라 해도 그 안에는 공장과 노동자들이 다수 존재했다. 그러나 라틴아메리카 대부분 나라에서 공장의 노동자들을 통한 사회주의 혁명 전술을 적용하기엔 매우 어려웠다. 체 게바라가 활동할 당시 라틴아메리카의 공장 노동자들은 그 수가 정말 한 줌에 불과했다. 더욱이 극단적인 빈곤층과 빈농의 수가 너무 많아 공장 노동자들의 위치가 절대적으로는 빈곤층이나 상대적으로는 중류층~중하류층에 속한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소련식 사회주의 혁명 모델은 쿠바 상황에 적합하지 않았고, 더 나아가 대부분의 제3세계 국가들에게 있어 소련식 사회주의 혁명 모델은 맞지 않았다. 오히려 쿠바를 비롯한 제3세계 지역에서는 마오쩌둥식 혁명 모델이 적합했다.

2. 소련의 사회주의 국제분업 계획에서 쿠바는 당연히 농산물 생산, 특히 사탕수수 보급 기지에 불과했다. 그러나 사탕수수 생산에만 의존하는 경제는 결국 경제적 예속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었고, 단일작물 경작에 의존하는 경제가 가지는 문제점에 대해서는 쿠바 혁명정부의 지도부 모두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더욱이 사회주의 혁명 완수를 위해서는 반드시 산업화(공업화)를 달성해야만 했다.[24] 그러나 쿠바 혁명정부의 태도에 확신이 없었던 소련[25]은 쿠바 혁명정부가 만족할만한 지원을 해주지도 않았고, 지원 약속을 성실하게 이행하지도 않았다. 더욱이 빠른 산업화를 통한 공산주의 사회 건설을 꿈꾸던 쿠바에게 사탕수수 생산에 의존하는 경제의 유지를 강요하다시피 제안하는 소련은 새로운 경제적 종속 관계를 요구하는 것으로 비추어졌다.[26]

나중에 그가 향한 곳은 독립국 탄생이 한창이던 아프리카였고 그 곳에서 콩고 내전이 한창인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자기 자리를 찾으려 했다. 그러나 스페인어가톨릭으로 공통점이 많은 남미와는 달리 생소한 환경의 아프리카는[27] 그가 생각한 세상이 아니었다. 자칭 공산주의자들은 약탈밖에는 관심이 없는 오합지졸들뿐이었다. 콩고 반란군은 술집, 매춘굴에 드나들면서 성병에 걸리기 일쑤였고 '다와 (Dawa)'라는 미신을 믿어서 마법의 약을 마시면 총알을 맞아도 괜찮다고 여겼다. 무기에 대해 부주의해서 권총으로 장난치다가 자기 허벅지를 날려먹기도 했다. 게다가 중국과 소련 간의 갈등은 이곳에서도 그의 발목을 잡아 친소 국가인 쿠바 출신의 그를 중국의 지원을 받는 콩고 공산 세력은 다짜고짜 적대시했다. 변장을 하고 콩고에 들어갔던 체가 정치장교 고드프루아 샤말레조 (Godefroi Chamaleso)에게 정체를 밝히자 샤말레조는 '이 사실이 절대 알려져서는 안됩니다. 절대로요! 국제 사회에 물의를 일으킬 겁니다.'며 당황해했다. 그나마 체가 믿고 존경하던 콩고의 지도자, 로랑 미투디디 (Laurent Mitoudidi)가 체의 제안을 받아들였는데, 그는 바람이 심한 날 탕가니카 호를 건너다가 호수에 빠지고 말았다. 미투디디의 부하 둘이 그를 구하러 나섰는데 구출에 실패하자 마법의 힘이 자기들을 막고 있다면서 살려 달라고 소리치는 마투디디를 내버려두고 육지로 달아났다. 미투디디는 그대로 익사했다.

미투디디의 부하들은 외국인이라면서 체의 명령을 듣지 않으려 했고 자신들이 트럭이 아니라면서 무거운 군장을 메려하지 않았고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술을 마셨다. 어찌어찌 쿠바군 40명이 콩고인과 르완다 투치족 160명과 함께 6월 29일 반데라 요새를 공격했지만 반군들은 대부분 무기를 버리고 도망쳤다. 쿠바군 하나가 전투 중 일기를 잃어버리는 바람에 쿠바가 콩고 반군을 지원한다는 것을 CIA가 알게 되었다. 체는 '이런 병력으로 승리란 불가능하다'며 좌절했지만 계속 쿠바 게릴라 부대를 모았고 콩고 반군에게 '너희들 같은 남자와 싸우느니 여자들을 데리고 전쟁터에 나가겠다!'고 다그치며 수습하려 했다.[28] 그러나 10월, 정부군과 용병대장 마이크 호어의 연합군이 포함, 폭격기, 헬리콥터 등을 동원해 포위 공격하자 쿠바군과 반군들은 탕가니카 호로 패주했다.

11월 20일 체는 데려가 달라고 애원하는 일부 부하들을 내버려두고 배를 타고 퇴각했다. 탄자니아로 도망친 체는 최측근 전우 셋에게 이렇게 물었다. "계속 갈 준비가 되어 있는가?" 측근들은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며 물었고 체는 "어디든지"라 답했다. 측근들과 부하들 모두 거부하고 소련 항공기 편으로 모스크바를 거쳐 쿠바로 돌아가고 체만 혼자 주 탄자니아 쿠바 대사관에 숨어 지냈다. 1965년 11월 25일 콩고군 참모총장이었던 모부투 세세 세코쿠데타조제프 카사부부 대통령을 몰아내고 철권통치 시대를 열며 콩고 혁명은 끝이 났다.

2.5. 볼리비아에서의 죽음

"...pero usted en Bolivia no va a sobrevivir. Suspenda ese plan. Busque otras variantes. [...] No se suicide."
"...당신은 볼리비아에서 살아남지 못할거요. 계획을 중지하고 대안을 찾으시오. (중략) 목숨을 버리려 들지 마시오."
1966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후안 페론이 체 게바라에게 한 말.[29][30]

연이은 좌절에 피폐해진 체 게바라는 일단 남미혁명이라도 완수하겠다고 생각하여 머리카락을 뿌리째 뽑으면서 대머리 사업가로 변장했다. 마지막으로 체의 아내 알레이다가 자식들을 데려오자 '아버지의 친구 라몬 삼촌'이라고 속였으며 카스트로는 '완벽 그 자체였다. 아무도 그를 몰라봤다. 절친한 동지들조차 그에게 말을 걸면서 손님 대하듯 했다.'고 회고했다. 체가 볼리비아로 떠나기 전 날, 카스트로와 체는 마지막으로 만난 자리에서 포옹하고 서로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고 한다. 1967년 11월 4일, 체는 볼리비아에 입국하여 7일 리오그란데강[31]의 지류인 냥카와수강(Río Ñancahuazú)에 게릴라 기지를 세웠다.[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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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들과 함께 있는 체 게바라 (맨 오른쪽)

포코 이론에 나온 대로 체 게바라는 볼리비아 공산당과 연계해 볼리비아 농촌에서 혁명을 일으키려 했으나 소련에게서 낙인찍힌 그를 볼리비아 공산당은 대놓고 내놓은 식구 취급했고 여기에 지휘권 문제까지 불거지자 거의 빈손이나 다름없이 정글로 향할 수 밖에 없었다. 1966년의 마지막 날, 볼리비아 공산당 서기장 마리오 몬헤(Mario Monje Molina)는 자신이 볼리비아 투쟁을 지휘하겠노라 우겼고 체도 지휘관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신 뿐이라고 싸웠다. 이튿날 몬헤는 볼리비아인 게릴라에게 남고 싶으면 남되 당의 지원을 기대하지 말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말을 듣고 남은 볼리비아인은 12명이었다. 몬헤는 공산당 간부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큰 문제가 곧 터질 것 같다. 그럴 경우 우리가 나서서 막든가, 매장당하든가 둘 중 하나이다.'

그러나 보수적인 볼리비아 농민들[33] 또한 이 외지인들을 반기기는커녕 적대시하여 신고를 하는 지경이었고, 스페인 식민제국의 거점이던 쿠바가 백인 비율이 높았던 것과 달리[34] 볼리비아는 아메리카 원주민과 그 혼혈 혈통인 메스티소가 대부분이었는데 이들 현지 원주민들은 백인인 체 게바라의 명령을 따르려고 하지 않았다. 애초에 스페인의 압제에서 해방하겠다고 스페인군을 상대로 식민지 독립전쟁을 일으켜 맞서 싸운 남미 국가의 독립 운동 지도자들(시몬 볼리바르, 베르나르도 오이긴스, 마누엘 데 벨그라노, 호세 아르티가스 등) 대다수가 자신들이 백인 문명인이라는 백인우월주의적 의식을 가지고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탄압/배척해 왔던 역사가 있었으니 이에 시달렸던 원주민들은 역시 백인인 체 게바라도 믿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사실 볼리비아에서 공산당 지지 세력은 농민들이 아니라 광부나 도시 노동자였으나 그 누구도 이 사실을 알려 주지 않았다. 심지어 오랜 동지인 카스트로조차 침묵했다.

거기에다 헬리콥터[35]를 이용한 미국의 추적이 더해졌다. 너무 유명해진 그는 미국에게도 카스트로 다음가는 눈엣가시로 여겨졌고, 그의 입국이 확인되자 CIA가 나서서 그린베레에 의해 양성된 볼리비아군 정예 레인저 부대를 인간 사냥에 투입했다. 그의 목에는 자동차와 오토바이를 비롯한 거액의 현상금이 걸렸다.

영양실조이질에 시달리며 11개월 동안 추격을 피해 게릴라전을 벌이며 도망다녔으나 끝내 확실한 거점을 만들지 못해 점점 한계에 몰렸다. 결국 1967년 10월 8일, 추로 협곡[36] 전투에서 본대와 떨어진 상태로 몇 안 되는 부하들과 함께 볼리비아 정부군 레인저 부대의 매복에 걸려 그 자신도 다리에 총상을 입고 생포된다.[37]

그 당시까지만 해도 체 게바라는 고국 쿠바와 세계의 좌파 지식인들이 자신을 살리기 위한 구명운동을 펼칠 거라고 믿었던 듯하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미국이 불법적으로 처형한 것에는 이유가 있다. 일단 체 게바라는 게릴라전이긴 했지만 군복을 입은 전쟁 포로이므로 교전단체로 인정받을 수 있고, 설령 그렇지 않고 전범으로 기소하더라도 범죄자를 정식 재판 없이 즉결처분을 하는 것은 법치 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체 게바라가 생포될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M2 카빈과 탄약이 없는 권총 한 자루, 단도, 롤렉스 GMT 마스터 시계, 파이프 담배 두 개를 소지하고 있었으며, 그의 가방에서는 1만 5천 달러도 발견됐다고 한다. 또한 그는 당시 이발과 면도를 오랫동안 하지 않아 매우 지저분한 모습이었고,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전통 신발인 모카신을 신고 있었다고 한다.

체 게바라는 근처에 있는 라 이게라[38] 마을의 한 학교에 감금됐고, 다음 날인 9일에 CIA의 지령을 받은 볼리비아 정부는 그를 살려두면 훗날 큰 화가 생길거라고 판단하여 체를 비밀리에 죽이기로 결단하였다. 그래서 체는 비밀리에 볼리비아 병사들에게 처형된다. 하지만 당시 볼리비아에는 사형 제도가 없었으므로 대외적으로는 게바라가 전투 중 부상으로 숨졌다고 발표하였다. 그를 사형시킬 때 몇몇 병사들이 거부하는 바람에 억지로 술을 먹여서 취하게 한 뒤 총으로 쏘았다는 설이 있다. 그는 처형 직전 빈사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사형 집행을 주저하는 병사에게 "당신이 날 죽이려고 온 것을 알고 있다. 떨지 말고 방아쇠를 당겨라! 당신은 단지 한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는 것 뿐이다! 나는 그저 라틴아메리카의 혁명을 완성하지 못하고 죽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라고 일갈했다고 전한다.

포코 이론의 실패와 몰락을 모조리 보여준 게 체 게바라의 볼리비아 활동이었다.

2.6. 죽음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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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 체 게바라의 시신을 부검하는 장면을 찍은 사진. 사진사 프레디 알보르타가 찍었다.

볼리비아 정부는 그의 죽음을 입증하기 위해 그의 손을 잘라 고향 아르헨티나에 또는 카스트로에게 보냈다.[39] 얼굴이 이미 훼손되었기에 그의 데스마스크는 정확하지 않았고, 그 대신으로 그의 손을 보냈는데, 이는 그를 식별할 증거가 그의 지문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시신은 비밀리에 매장되었다가 30년이 지난 1997년, 유족을 포함한 볼리비아-쿠바 합동 조사단에 의해 바예그란데[40]의 어느 폐쇄된 활주로에서 발굴되었다. 이후 쿠바 정부는 추모 주간을 선포하고 대규모 국장 행사를 진행했다. 심지어 산타클라라에 체 게바라를 추모하는 사원까지 생겼다. 2013년에 볼리비아 정부의 협조 아래 체 게바라의 일대기가 담긴 일기와 편지, 신문기사, 사진, 문서 등이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3. 평가

간단히 말해서 혁명가로서는 성공했지만 정치가로서는 실패한 인물이라는 평으로 압축할 수 있다. 묘하게도 이는 게바라가 롤모델로 삼은 마오쩌둥에게도 비슷하게 적용되는 평가이다.

게바라는 녹색 의료, 니켈 생산, 원유 탐사, 설탕 부산물, 화학산업 등 9개의 연구·개발 기구를 설립했다. 또 회계 처리를 전산화하는 실험을 했고, 새로운 임금체계를 고안했고, 노동자의 발명 및 혁신을 장려했고, 농업 기계화를 진두지휘했고, 사회적 노동에 대한 심리학적 분석을 시도했고, 사회적 임무로서의 노동 개념을 발전시켰으며, 노동자 경영 참여를 위한 기구를 설립했다. 하지만 비록 이것들이 오늘날 쿠바의 사회·경제 구조 전반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이를 고안하고 도입한 게바라의 기여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체 게바라란 인물 자체가 이런 저런 사회주의적 사상에 입각한 새로운 사회 운영 구조, 정책에 대해 생각할 만큼 지성은 (일단 의사니) 당연히 있었지만, 어딜 가던 화려한 혁명 투쟁이 아닌 한 곳에 쭉 눌러 붙어 지루하고 관료제적인 입씨름이 태반인 실제 국정 운영과 정치를 할 만할 성격 자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곳에 오래 붙어있지 못하고 새로운 혁명, 싸움터가 있으면 부평초처럼 떠돌아다닌 체 게바라의 성격은 긍정적인 면에선 특히 동시대 서구 좌파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청춘 혁명가란 신화적인 인물로 떠오르는게 크게 기여했지만, 부정적으로 보면 막상 정치가로선 이룬 업적이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 혁명가란 사람이 훗날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얄팍한 상업주의 아이콘으로 소비되는 본인으로서도 결코 달갑지 않았을 법한 아이러니까지 초래했다.

결과론적으로만 보자면 그는 실패하고 단명한 비운의 혁명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기는 사후에도 식을 줄 모르고 계속되어, 이는 그를 불멸의 영웅으로 만들었다. 공산권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할리우드에서 세 번씩이나 영화화되었으며[41] 다방면에서 상품화가 된 유일한 인물이었다. 논란은 있겠지만 프랑스의 철학자인 장폴 사르트르는 그를 '금세기의 가장 완벽한 인간'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그는 아직도 제국주의와 싸우는 제3세계 민족해방 투쟁의 상징이 되어 21세기를 살아가는 불멸의 투쟁가로 기억되고 있다.

최소한 엘리트 지식인(의사)이었던 사람이 모든 것을 버리고 총을 잡고 혁명에 나선 일이나, 혁명이 성공한 뒤에는 권력다툼이나 하고 부정부패로 재산 모아서 잘먹고 잘 살 궁리나 했던 과거 혁명지도자들의 전례에 비해, 쿠바 혁명 성공 뒤에도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서 마지막까지 혁명의 최일선에서 싸우다 죽어간 고결함 만으로도 인기의 비결은 충분히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정확히는 잘생기고 스토리가 있어서기도 하고, 쿠바에서 떠난 것을 권력다툼에서 밀려서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이었다면 권력을 포기하고 쿠바 내 상류층으로 살거나 재산을 잔뜩 챙긴 뒤에 중립국으로 튀어서 평생 편하게 호의호식하며 살았을 게 분명하다.

그가 이렇게 상품화된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첫 번째는 그가 젊어서 죽은 데다 대단한 미남이었다는 것이다. 항상 군복에 수염도 깎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눈에 뜨일 정도였다. 청년 시절 사진을 보면 어지간한 배우는 저리 가라 할 정도의 꽃미남이다.[42]

또 다른 이유는 위의 별 붙은 베레모를 쓴 유명한 사진을 찍은 코르다가 그 사진에 한해 저작권료를 받지 않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아무나 그 사진을 써도 상관 없게 되었으니, 저항의 상징이자 젊은 순교자 이미지를 팔아먹으려는 전 세계 회사들이 앞다투어 그의 얼굴을 광고에 사용한 것이다. 체와 전혀 상관 없는 오스트리아스키 회사 Fischer에서는 "스키의 혁명"이란 문구로 체의 얼굴을 써먹었고, 은 입에 대지 않았던 체의 이름이 붙은 술도 나와 있다.[43] 스노보드 바닥에도 있고, 국내에서도 게바라를 검색 엔진에서 치면 티셔츠 등 꽤 많은 상품이 올라온다. 심지어 축구공이나 속옷에까지 쓰이는 등 상업적으로 마구 쓰이고 있다.

그러다 보니 2011년에 저작권자가 저작권 등록을 했다고 한다. "그가 죽은 뒤에, 그를 상업적인 아이콘으로써 이용한 서구 기업가들에 의해 그의 이미지가 과대포장되었다"며 인물에 대해 근본적인 부분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주장마저도 나오는 실정. 후일 체와 함께한 최후의 게릴라였던 부스토스가 체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젊은이에게 "그걸 왜 입나"라고 물어보자 대답을 못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체는 이미지가 되어 버렸다"는 게 전 게릴라의 씁쓸한 회상이다.

결국 반자본주의를 주창하던 그였으나 훗날 자본주의자들에게 의해 상품화가 되어 자본주의자들이 만든 공산주의 슈퍼스타가 되어버렸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다.

그가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쿠바에서는 당연히 국가적인 영웅으로 우상화되고 있다. 쿠바에서는 카스트로 형제의 우상화가 공식적으로 금지되어 있어서 대신 체 게바라에 대한 쿠바 시민들의 자발적인 우상화가 이뤄지고 있다.

3.1. 긍정적 평가

천식과 같은 신체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격렬한 운동과 고강도 노동, 게릴라전까지 감내하는 극기력은 체 게바라의 삶에 바탕이 되었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그의 성품은 안락한 의사의 길 대신 혁명가의 길을, 승리한 혁명사회의 각료로서 누리는 삶 대신 혁명가의 삶을 살게 하였다. 혁명가로서 종속된 라틴아메리카 대륙에서 빈곤과 억압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해방시키고자 한 체의 이상은 라틴아메리카인들 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에게 감명을 주었다.

소련이 국제 공산당의 중심으로서 서구 좌파 학생들에게 이상향으로 여겨지던 시절에는 스탈린이 존경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의 폭로와 더불어 소련군이 무력으로 헝가리 봉기프라하의 봄을 진압하면서 스탈린에 대한 환상은 깨져버렸고 소련에 대한 동경도 많이 퇴색되어 버렸다. 이 때 68혁명으로 대표되는 신좌파의 발흥과 함께 그 공백을 채우고 부상한 것이 호치민, 마오쩌둥, 체 게바라, 그리고 피델 카스트로였다. 호치민은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반전 운동까지 결부되어 일종의 철인과 같은 존재로 여겨졌고, 마오쩌둥은 문화대혁명의 실상이 알려지면서 스탈린과 같은 신세로 추락하였다. 체 게바라는 여전히 혁명의 아이콘으로 기능하고 있다. 피델은 끝까지 권력을 놓지 않았던 독재자로서 이제는 그 대우가 조금 미묘한 듯. 체 게바라가 혁명의 아이콘이라면 피델은 혁명의 화석이라나.

근래에 남미에서는 체 게바라가 신성시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특히 볼리비아에서 이런 현상이 강하며 남미 신문들은 아예 대놓고 게바라의 사진에 성(聖) 체 게바라라는 설명을 달아놓기까지 한다고 한다. 남미 국가들중에서 체 게바라의 혁명에 제일 적대적인 볼리비아가 훗날 그를 성인으로 추앙한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일각에서는 이런 추세면 수백 년 뒤에 게바라가 가톨릭의 성인의 반열에 오를 것이라는 예측을 하기도 하는데 과연? 하지만 정작 체 게바라의 측근들은 게바라가 성인 대접을 받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좋지 않게 보고 있다고 한다. 거기다가 게바라는 자신의 어머니가 자신에게 가톨릭을 믿으라 하자 거절할 정도였다.[44] 사실 엘살바도르오스카 로메로 대주교도 성인 시성을 추진하고 있지만 정치 참여 때문에 논란이 많다. 하물며 가톨릭 교회와 별 관련도 없었던 게바라가 성인으로 시성될지는 아무래도 성인에 오르는 일은 여러 모로 없을 듯 싶다. 다만 알포다에 따르면 체의 시체를 본 사람들은 모두 그가 예수를 닮았다고 하니 종교적 추앙은 지속 가능성이 있다.

3.2. 부정적 평가

미국의 입장에서 바라본 카스트로 평전을 썼던 로버트 E. 쿼크는 게바라가 의사면허를 턱걸이로 취득하였고, 의사로서 고정적인 수입을 받고 안정적으로 생활할만한 실력이 아니었으므로 외래진료활동을 많이 다닌 것이며, 애초에 안정적인 직장을 잡을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모험이나 유흥을 즐기고, 그러한 행동의 연장으로 혁명에 가담한 것이라고 추정했다.

체 게바라는 시간이 지날수록 미화된 혁명 우상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비판적 평가들도 알려지고 있다. 가령 체 게바라는 기본적인 인격부터 잔인하고 사디스틱했는데, 어렸을 때부터 동물을 고문하고 살육하는 것을 즐겼고, 혁명 활동을 하는 도중에도 동물을 잡아다 고문하고 살육하는 것을 즐겼다는 주장이 있다.[45]

이러한 시각에 따르면, 체의 가학적인 면모는 당연히 인간에게도 나타났다고 한다. 농민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주겠다면서 가난한 농부들을 지주로 몰아 처형하는 걸 즐겼고, 정부군에게 밀고할지도 모른다며 일가족을 학살하기도 하였다는 것. 심지어 어린 아들이 반혁명 분자라며 체포된걸 구명하러 간 어머니 앞에서 그 아들을 처형하며 즐긴 적도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 비판측에서는 체를 가리켜 '막상 전투에는 무능했으며, 사치스러웠고, 겁쟁이에 기회주의자였다'고 비난한다.[46]

또한 혁명에 성공하여 쿠바 중앙은행장으로 재직할 당시에는 무리한 국유화와 국고의 낭비로 쿠바 페소는 휴지조각이 되었으며, 산업장관 시절에도 인프라 부족을 지적하는 학자들의 충고를 듣지 않고 공업화 정책을 강행하다 참담한 실패를 맛보았다. 견해에 따라서는, 노동자의 기업경영 참여와 도덕적 인센티브 장려 등 체 게바라의 경제 정책을 고평가하는 시각도 있다.[47]

3.2.1. 반대파 학살과 정치범 수용소

체 게바라가 혁명 직후 반대파 숙청과 처형을 지휘했으며, 또한 쿠바와 볼리비아, 콩고에서 혁명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처형하기도 하였다는 주장이 있다. 대표적인 예가 라 카바나 노동수용소의 경우. 그는 카스트로의 지시로 쿠바의 라 카바나에 공직자들의 태업을 처벌하기 위한 노동 수용소를 세우고 소장으로 재직하였다. 라 카바나 수용소는 알려지기로는 자진해서 공직자에서 물러날 경우 형이 면제되는 방식이었고, 실제로 공직자 교화용으로 운영한 상세한 자료가 남아 있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보니 실제로는 정치범 수용소의 형태로 운용된 것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를 받는다. 상식적으로 공직을 포기하는 것과 수용소에 갇혀 죽을지도 모르는 강제 노동을 하는 것 중에 선택하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자를 선택할 것이니까. 아니면 선택권이 자유롭지 않았다거나.[48]

실제로, 피델이나 체 게바라, 쿠바에 대한 부정적 평가의 상당수는 미국마이애미로 망명한 반체제 인사들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는 감안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바티스타 정권 경찰 출신으로 피델 카스트로 치하에서 반체제활동을 벌이다 테러 혐의로 체포된 아르만도 비야다레스는 옥중에서 이루어진 고문으로 하반신이 마비되었다고 주장하여 국제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고 국제 캠페인으로까지 번졌던 적이 있다. 그러나 쿠바에서 석방 조건으로 '걸어서 비행기를 타고 걸어서 비행기에서 내릴 것'을 주문하자 하체 마비환자 행세를 즉각 집어치웠고, 이를 반쿠바 선전에 활용하려던 미국은 도리어 한 방 먹은 셈이 되었다. 피델 카스트로의 일관된 입장은 쿠바에서는 고문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인데, 쿠바에서 고문당한 여성의 사례를 기록한 인권변호사의 기고가 있는가 하면 노벨상 수상자들이 쿠바에는 고문이 없다며 피델의 입장에 동조하는 성명문을 내기도 했다. 정권에 아부할 이유가 없는 사람들에게서도 유의미한 수준의 호의적인 발언들이 나온다는 점에서 미국을 위시한 반쿠바 진영이 주장하는 쿠바의 인권 실태는 다소 부풀려졌다고 추측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라 카바냐 형무소는 지금도 쿠바에서 제일 유명한 형무소로 공포의 상징이다. 라 카바냐 형무소는 애초부터 식민지 시대부터 사용되던 해안 요새를 그대로 이어받아 사용한 것이다. 독립 혁명 이후에도 군사기지로 쓰였으며, 사회주의 혁명 이후에도 이러한 방식으로 쓰였다. 위치상으로도 어디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올드 하바나의 내해 바로 건너편에 있다. 현재는 형무소나 군부대로 쓰이고 있지 않으며, 박물관이자 사적지로서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형무소에서의 처형이 정식 재판을 통해 진행된 게 아니라 인민재판을 통하여서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인민재판이라는 것은 법적인 절차나 법리에 따르지 않고 재판에 참여한 좌중들이 죽이라고 하면 그대로 사형을 집행하는 방식이었다. 무엇보다 수감인 중에서는 중죄인만 있던 것이 아니라, 단순히 정치적인 견해가 달라서 수감된 자나, 아주 경미한 범죄를 저질렀거나, 아무 죄를 저지르지 않았는데 혐의가 있다는 이유로 투옥된 사람도 적잖게 있었다. 인민재판을 거치면서, 좌중들의 군중심리에 이끌려 죄가 없음에도 사형수로 몰려 처형되는 일이 빈번하게 있었다. 특히 정치범 처형은 체의 경력에서 크게 문제가 되는데, 이들 정치범들이 주로 카스트로와 정치적인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로 투옥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피델은 혁명 초기 재판과정에서 나타난 군중심리 요소에 대해서 반박하는 인터뷰를 하였다. 인터뷰에 따르면 당시 재판은 미국 우익들의 선전과 같이 마구잡이식 학살이 아니라 체계적인 기소에 따라 바티스타 정권에 기생하던 흉악 정치범들을 상대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 이들 주장에 따르면 단순히 견해가 다른 정치범을 처형한 것이 아닌 바티스타 집권 기간 중 횡포를 일삼거나 백색테러를 저지른 혐의가 확인된 이들을 처형시킨 것.

3.2.2. 볼리비아에서의 혁명 활동에 대한 비판

체 게바라를 생포한 볼리비아의 가리 프라도 장군은 그의 실패 원인을 크게 3가지로 꼽았다.

첫째로, 볼리비아에 반정부 활동을 하러 온 것이다. 애초에 그가 게릴라전으로 큰 성과를 거뒀던 쿠바의 경우 바티스타가 독재를 일삼고 그에 대한 민중의 반발이 컸기 때문에 반정부활동을 하기에 좋은 환경이었다. 그러나 볼리비아의 경우 새롭게 들어선 군사독재정부가 도시 노동자층의 파업과 시위를 강제로 진압하고 민주화 세력들에 대해 대대적인 탄압에 나섰지만, 1952년부터 1964년까지 이어진 민주 정부의 혼란스럽고 성과 없는 개혁에 지친 상당수 농민들에게 있어서 나라를 안정시킬 세력으로 보였기에[49] 농촌에서의 민심 이반이 적었다. 이는 혁명재판으로 정치깡패들을 소탕한 한국의 박정희 군사독재정부 초창기와 똑같다.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은 바로 게바라가 대체 왜 하필이면 게릴라전을 통해 혁명을 수출할 나라로 볼리비아를 선택했는가이다. 특히 게바라가 볼리비아 사정에 정통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에게 볼리비아란 여행하다가 거쳐간 곳에 불과했다. 게릴라전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현지화 전략이다. 정부군보다 현지를 더 잘 알아야만 정부군보다 열등한 장비와 보급 속에서 주민들의 지지를 획득하여 효과적인 게릴라전을 수행할 수 있다.

그런데 당시 볼리비아는 1950년대에 토지 개혁을 실시하여 농민에게 어느 정도 토지 분배를 이미 이룩한 상태였고[50] 1964년에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서 반발이 거세기는 했지만 새로이 들어서 군사독재정권도 토지 개혁만은 뒤엎지 않아서 농촌 지역에서의 민심 이반이 적었다. 그렇기 때문에 게바라의 게릴라전은 실패할 수 밖에 없었고 게바라의 볼리비아 혁명 활동을 두고 '자살 여행'이라고 비하하는 사람들까지 생겨났다. 볼리비아행을 옹호하는 지지자들의 논리 역시 여기에 대해서는 뚜렷한 답변을 하지 못한 채 '남아메리카 한가운데에 위치한 볼리비아를 혁명기지로 만들어 남아메리카 각국에 혁명을 수출하려는 계획이었다'는 말만 거듭하는 상황이다. 그렇지만 성공을 해야 각국을 혁명을 수출하든지 말든지 할 것이 아닌가?

게다가 그 '한가운데'라는 지리적 특징은 되려 볼리비아가 아닌 파라과이가 갖고 있기 때문에 이 역시 앞뒤가 안 맞는다. 그리고 험난한 안데스산맥의 지형 때문에 숨어서 게릴라를 벌이기 쉬워서 볼리비아를 골랐다 하여도 이것도 말이 되지 않는 게, 지형 때문이라면 파라과이나 우루과이를 제외한 중남미 모든 나라를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남미에서 비교적 평지 위주로 구성된 나라가 저 둘이기 때문이다.[51] 심지어 체 게바라의 원래 조국인 아르헨티나 역시 평지 저지대인 동부 지역에서는 상당히 불리할지언정 서쪽 칠레와의 국경지대나 파타고니아를 위시로 한 남부지역은 해발고도가 상당히 높고 무주지도 상당히 많아 게릴라전을 벌이기엔 안성맞춤인 곳이다. 게다가 우루과이는 사투리를 비롯한 지역 방언도 똑같은 라플라타 스페인어에 기본 문화적 성향이나 사회경제적 구조도 아르헨티나랑 판박이고, 애초에 아르헨티나가 브라질에서부터 독립시켜 준 나라인지라 민간에서 친아르헨티나 감정도 높다. 차라리 고향 옆나라인 우루과이에서 혁명 활동을 했다면 그나마 대놓고 이방인 취급은 덜 받았을 것이다.

당장 볼리비아를 잘 모르는 외국인이, 볼리비아인이 싫다는 데도 총질을 해대며 혁명을 선동하는데 이걸 누가 좋아하겠는가? 자기가 좋은 일 한다는 확신에 차서 강요한다는 점에서 (그게 좋든 나쁘든) 강제 선교나 다름없는 행위였다. 근본적으로 자신이 해방시켜준다는 그 주체인 볼리비아 내부 인민들 본인들의 시각보다 사상적 동기가 어쨌든 간에 외부인인 본인의 시각을 우선시하는 태도이고, 체 게바라가 딱히 강력한 외세를 뒷배경으로 삼거나 애초에 쿠바가 이렇게 강력한 뒷배경이 될만한 국력도 없어서 그렇지, 여기서 한발짝만 더 나가면 바로 본인이 그리 욕하는 제국주의자들하고 딱히 차이가 없는 태도이다. 그리고 어쨌든 순수한 혁명가답게 흔히 오만한 제국주의자들이나 저지를법한 해당 나라, 사회의 내부적 자세한 사정은 고려하지 않은채 자신의 아젠다, 시각만 들이미는 짓을 막상 제국주의자들이 달고 다니는 빽도 없이 한 결과 결국 볼리비아에서 비참하게 죽었다. 이 때문에 좌익의 입장에서도 게바라의 노선은 극좌모험주의라고 비판받고 있다.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서두른 무장봉기 때문에 자신의 목숨도 잃었을 뿐만 아니라 그 지역의 혁명 조직도 깡그리 씨가 말랐다는 것이다. 1930년대 중국 공산당의 리리싼이 벌인 모험주의적 봉기와 비슷한 사례로 비판 받는다.

사회주의 같은 본인이 상징한 세계 사상적 조류에 대한 포용성도 쿠바나 볼리비아는 확연히 달랐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사실이지만 그 많고 넒은 중남미 국가들이 전부 스페인어, 옛 스페인 식민지, 가톨릭 신앙이란 큰 문화역사적 틀은 공유해도 세부적으로 보면 사회적 문맥, 문화적 성향이 전부 다른게 당연한데 체 게바라의 볼리비아 인식은 본인도 라틴아메리카인이면서도 오히려 라틴아메리카의 사회적, 역사적 다양성을 간과한듯한 모습을 보인다. 기본적으로 쿠바는 옛날 스페인 식민지 시절부터 최초의 식민지 중 하나이자 이베리아 반도 본국과 나머지 아메리카를 이어주는 최대 최고의 무역항으로서 외부 사상의 유입도 활발했고, 중남미치곤 각종 항만과 무역업도 일찍 발달해 이에 따른 노동운동이나 좌파 지식인들도 많았다. 특히 체 게바라가 쿠바 활동을 시작한 50년대는 카스트로 형제 본인들도 당장 스페인 갈리시아와 겨우 한두세대 떨어진 이민자들이고, 바로 한세대 이전 스페인 내전을 피해 스페인 본토 출신 좌파, 공화주의자, 민주주의자들도 많이 난민으로 와서 중남미 좌파 운동사에 새로운 활력을 한창 불어넣던 시기였다. 이렇게 기본적으로 사회문화적 성향 자체가 도시중심적이고 유럽 스페인 본토발 좌파 사상 조류의 영향이 지대했던건 체 게바라 본인의 고향인 아르헨티나의 로사리오, 부에노스아이레스 같은 도시들과 쿠바나 차라리 서로 닮은 바가 있었다.

반면 같은 라틴아메리카라 하더라도 볼리비아는 사회문화적 성향, 경제 구조, 역사적 배경이란 면에서 모든 게 완전 반대라 할 만큼 심하게 달랐다. 상술한대로 쿠바는 식민지 시절부터 쌓아온 아바나 중심으로, 본인 고향인 로사리오-부에노스아이레스 일대는 19세기-20세기 아르헨티나 고도성장기 유입된 이민자들과 자본을 중심으로 이미 어느 정도 자본주의적 사회 변화와 이에 수반한 사회주의적 담론이 상당히 발전한 곳들이었지만, 볼리비아는 옛 스페인 식민지 기준으로도 산업화나 도시 발전이 전혀 안 된 곳이었다. 지금도 종종 '중남미 유일의 백인 국가'라 자뻑하는 아르헨티나와, 차라리 삼각 무역시절 끌고온 아프리카 노예 출신 흑인들은 많아도 타이노인 같은 원주민들은 초기 유럽 식민주의의 잔혹함과 질병에 첫빠따로 두들겨 맞고 비교적 일찍 전멸/흔적도 찾기 힘들만큼 동화된 쿠바와는 정 반대로 볼리비아는 옛날 스페인 식민지 시절에도 콩키스타도르와 스페인 식민 세력이 험준한 안데스 산맥 넘어 깊게 침투를 할 능력도, 의지도 없어서 원주민들이 다수로 남은 나라이다.

차라리 식민지 시절에도 이 일대 범안데스 산맥 권역에서 그나마 다른 스페인 식민지, 스페인 본토, 그리고 나머지 세계와 접촉 창구 역할을 하며 그나마 대외무역이 발달하며 외부하고 활발하게 교류했던 지방은 옆나라 페루리마[52] 에콰도르의 과야킬 정도이지, 볼리비아는 진짜 중남미 내에서도 체 게바라 본인이 대표하는 서구발 근대주의적 사상이나 사회경제적 변화하곤 영 동떨어진 오지였다는 것이다.

이러니 기본적으로 일단 민족부터 바스크&칸타브리아 북방 스페인계+아일랜드계 후손으로[53][54] 전형적인 중남미 백인이었던 체 게바라가 여전히 근근한 소규모 산자락 자영농 중심 안데스 산맥 원주민 대다수였던 볼리비아 농민들이겐 무슨 혁명 동지고 나발이고가 아니라 옛날 스페인 정복자들이나 당대 라파스의 권력자들과 비교해도 더 이질적인 외부인으로 보일 수 밖에 없었다. 사회경제적으로도 나름 성공적인 토지 개혁을 이룩한 상태라 막상 볼리비아 현지 농민들은 경제적으로는 가진 건 많이 없지만 당장 생계는 보장되고, 크게 불안정하지 않은 자영농들이 태반인 상태였는데 이런 상황에서 체 게바라는 딱 언어 통하지[55] 나머지 다른 모든 면은 이질적이고, 공감하지도 못할 혁명이나 설파하는 이방인으로 보였던 것이다. 게릴라 투쟁 와중 저지른 군사적 실수 같은 건 사실 볼리비아가 당시 중남미 나라 중에선 최악의 혁명 후보지였는데 이런 자세한 판단도 없이 불나방마냥 뛰어들었다는 근본적인 판단 오류에 비하면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하다.

둘째로, 보급이나 연락이 원활하지 않은 상태에서 병력만 분산하여 볼리비아 정부군에게 격파당할 빌미를 제공하였다. 이로부터 30년이 지나 나온 스타크래프트도 어설프게 병력 분산하다 각개격파당해서 전세가 뒤집어진 경기가 적지 않은데, 체 게바라는 더 적은 병력과 더 적은 자원 그리고 더 적은 정보로 어설프게 분산을 시도했다. 그 결과 정부군이 병력을 집중하여 흩어진 다른 게릴라 부대를 공격할 때에는 서로 연락이 닿질 않아 도와주지 못하다 궤멸되었다.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지 않았다. 교전에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더 이상 승산이 없다면 민가에 숨어들거나, 국외로 탈출하거나 다음 기회를 노릴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고, 성과도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도 교전만 하던 끝에 붙잡혀 죽임을 당했다. 이에 대해서는, 도망가봤자 다음 기회는 오지 못할 것이라 본 것이 아닌가 싶긴 하다. 콩고와 볼리비아에서 죽을 쑤면서 그는 측근을 포함한 모든 인맥을 잃었고, 그 와중에 소련의 낙인은 지겹게도 그를 쫒아오며 현지에서의 적응을 방해하고 불화를 조장했다. 여기에 전술한 모든 문제가 합해져서, 볼리비아 혁명이 실패하고 있다는 징후가 날이 갈수록 유력해지니, 더 이상의 희망을 잃고 포기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역사적으로 라틴아메리카에서 좌익 게릴라가 성공한 곳은 쿠바니카라과 뿐이며, 이 외에 엘살바도르, 콜롬비아, 페루에서 승리 직전까지 갔었던 바가 있다. 앞서 언급한 인종 문제 등을 고려하면, 체 게바라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의 선택은 콜롬비아로 가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4.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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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디아 게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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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탈기어 솔리드 피스 워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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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트라 리버스

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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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를 상징하는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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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3페소 화폐 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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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넥 산체스 게바라


[1] 사후 재정상으로 직명 변경.[2] 산타크루스 주, 발레그란데 시 근처의 마을.[3] '무슨 일이야?'라는 뜻이다.[4] 찬초(Chancho)는 '돼지'라는 뜻인데, 체(Che)가 뚱뚱하다는 뜻은 물론 아니고 목욕을 통 안 해서 그리 불렀다 한다.[5] 다만 쿠바인이라는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카스트로에 의해 특별히 법적으로 쿠바 국적을 얻은 쿠바 국민이 되었고 체 게바라 본인도 스스로를 쿠바인으로 여겼다고 한다.[6] 다만 이런 것만 본다면 현 쿠바 정권과 페로니즘 정당과의 관계가 나쁠 거 같지만 그런 것은 아니고, 사실 체 생전에도 그렇게 관계가 나쁜 것은 아니라서 야인이 되어 스페인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는 후안 페론과 만남을 가지면서 후안 페론에게 조언을 구했을 정도였다. 다만 체는 볼리비아로 가겠다는 체의 말에 그건 너무 위험할 거 같다는 후안 페론의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로 볼리비아로 갔다가 명을 재촉했다.[7] 그런데 동생은 가난하진 않았지만 부자도 아니었다고 묘사한다. 특히 학창 시절이 아주 가난하게 표현된다.[8] 우리나라를 비롯해 세계 대다수 지역에서는 그다지 유명하지 않으나 이탈리아 및 스페인어권, 포르투갈어권 지역에서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이탈리아의 쥘 베른이라는 호칭까지 듣고 있는 이탈리아 출신의 모험 소설가. 여러 작품을 남겼지만 말레이시아를 배경으로 한 산도칸 시리즈와 앤틸러스제도 해적 시리즈가 가장 유명하다. 19세기 제국주의 시대답지 않게 앤틸러스제도 해적 시리즈를 제외한 대다수 소설의 주인공은 비백인종이고 백인은 악당이거나 취급이 좋아도 주인공의 조력자 정도였다. 비단 체 게바라 뿐만 아니라 아옌데, 푸치니, 움베르토 에코 등이 그의 애독자였고 특히 움베르토 에코는 그의 소설에서 여러 번 살가리를 언급했다. 살가리의 소설은 그의 생전에 이미 엄청난 인기를 끌었으나 비평가들에게는 혹평받았고, 거기에 가난까지 겹치면서 살가리는 1911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9] 천식 환자이면서도 시가를 피우는 것이 가능한 이유는, 시가는 궐련과 달리 기본적으로 연기를 목(기관지)으로 삼키지 않고 입에 머금어 향을 즐기고 내뱉기 때문이다. 특히 정글에서 야영할 때 모기를 쫒는데 시가 연기가 좋다는 이유로 더욱 즐겨 피우게 되었다고 한다.[10] 동생은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한다.[11] 알레르기 연구로 의사 면허를 취득했다.[12] 20세기에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노예들은 실존했으며, 그들은 쇠사슬에 묶인 채 채찍을 맞으며 일을 해야 했다.[13] 당시 과테말라는 총선에서 당선된 진보적 성향의 대통령 아르벤스가 정치를 이끌었다. 물론 진보적인 정치인을 용납하지 않았던 미국은 1951년 아르벤스가 정권을 잡아 개혁을 시작하기도 전에 언론을 통해 그를 공산독재자 폭군으로 왜곡하고, 아르벤스가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 소유의 토지를 국유화하려고 하자, 경제적으로 고립시키려고 했던 것은 물론, 1954년 그를 자진사퇴하게 만들었다. 물론 여기서 아르벤스를 자진사퇴하게 만들었던 미국의 방식은 우익 쿠데타였고, 쿠데타 이후 과테말라에서는 피바다가 벌어졌다.[14]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거나 불손한 움직임을 보이면 바로 총을 들어 사살했다고 한다.[15] 12명이 남았다는 설도 있다.[16] 대장 피델의 친동생이다.[17] 아바나에서의 혁명이 성공한 이유 중 하나는 바티스타는 이미 외국으로 도피해 있었고, 민중들과의 협공으로 수많은 정부군들의 항복을 받아낸 덕분이었다.[18] 포코 이론에 따라 쿠바 혁명 전쟁 당시 혁명군의 주요 임무는 전투가 아니라 주민에 대한 봉사와 이를 통한 지지였다. 쿠바 혁명 전쟁 중 게바라가 매우 뛰어나고 중요한 존재였던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쿠바 빈농들에게 절실히 필요하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의료 봉사'를 제공할 수 있는 '의사'였다는 점이었다.[19] 이 시절 새로운 은행 건물을 건설하고자 직원들이 새 건물의 청사진을 들고 왔을 때, 체 게바라는 건물에 엘리베이터가 있다며 매우 화를 냈다는 일화가 있다. 자신은 천식 환자임에도 불구하고 안데스산맥을 돌아다녔다고 한다. 참고로, 당시 쿠바 국립은행 건물의 층수는 20층.[20] 카스트로가 회의 중 "여기서 경제 전문가(economista)가 있나?"라고 묻자 게바라가 바로 자신이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카스트로는 "그럼 자네가 국립은행 총재일세."라고 말했는데, 사실 게바라는 공산주의자(comunista)를 찾는 줄 알았다고 한 일화가 있다. 이 일화는 사실이 아니고 당시 파격적이었던 경제 인사를 두고 나온 얘기이다.[21] 유고슬라비아의 자주관리기업에서 영감을 얻었다.[22] 헬렌 야페의 <체 게바라, 혁명의 경제학> 참고.[23] 체가 쿠바에서의 삶을 내려놓고 또다른 혁명을 위해 볼리비아로 떠나며 남긴 말. 쿠바의 수도인 아바나의 혁명광장에 체의 모습을 형상화한 조형물과 함께 새겨져 있다.[24] 카를 마르크스는 '산업화와 자본주의의 발달 후 공산사회가 등장할 것이다'라고만 말했고, 블라디미르 레닌은 '자본주의 발달 후 노동자들이 폭력적인 방법을 통해 사회주의 혁명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을 뿐이고, 이오시프 스탈린은 '있는 것 다 쥐어짜서 공업에 투입해 공산주의 사회를 만들면 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심지어는 마오쩌둥조차 공산주의 사회 건설을 위해 '대약진운동'이라는 대참사를 일으켰다. 이렇게 공산주의 국가들이 공업화에 목숨을 거는 이유는 이론상 공산사회는 산업자본주의 사회 이후에 등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25] 라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는 혁명 전쟁이 시작될 때부터 사회주의자였으나, 피델 카스트로의 정치 성향은 애매했다. 그래서 쿠바 혁명군은 공산주의 혁명군보다 반 바티스타 연합군에 가까웠다. 실제로 피델 카스트로의 혁명 지지자 중에는 극우부터 극좌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었고, 이로 인해 초기 혁명 정부 주요 인사가 타국으로 망명하는 사태가 심심찮게 발생했다. 미국은 바티스타 정권에 반대하고 사탕수수 농장 및 각종 산업시설의 국유화를 주장하는 카스트로에 대해 섣불리 공산주의자라고 규정 내렸지만, 쿠바의 상황에서 누가 혁명을 일으키든 - 심지어 우파가 혁명을 일으켰더라도 국유화는 피할 수 없었던 것이었던 것이다.[26] 사실 쿠바 미사일 위기를 통해 체 게바라가 보는 시선대로 이뤄졌다. 미사일 위기가 끝나고 소련은 쿠바로부터 사탕수수, 시가, 노동자 등을 수입했기 때문이었다. 저걸로 쿠바는 그나마 소련 붕괴 직전까지 먹고 살 수 있었으나 소련 붕괴 이후 미국과의 수교 재개까지 쿠바는 경제 위기를 겪어야 했다.[27] 아프리카에서 공식으로 스페인어 쓰는 나라는 적도기니 단 한 국가이다. 스페인에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모로코에서도 어느정도는 쓰이긴 하지만 스페인어 사용국으로 쳐주지는 않는다.[28] 정작 이 말을 들은 콩고 반군들은 화를 내기는커녕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야말로 리얼 당나라 군대다.[29] O'Donnell, Pacho (8 October 2012). "Opiniones de Perón sobre el Che". Pagina 12 (in Spanish). Retrieved 28 September 2015.[30] 생전 체 게바라는 1959년에 2번, 1966년에 1번 마드리드를 방문했고, 페론은 1958년부터 귀국 이전까지 스페인에서 망명생활을 보냈다. 당시 스페인은 이른바 유럽 최후의 파시스트로 불리는 프란시스코 프랑코 치하의 우익 군사독재국가였다. 프랑코는 본국에서 쿠데타로 쫓겨난 자기 친구 페론을 흔쾌히 받아주었는데, 페론은 같은 반자본주의자로서 체 게바라에게 동정적이었지만 프랑코에 밉보이지 않기 위해 비밀리에 그와 접선했다.[31] 미국-멕시코 국경을 흐르는 리오그란데강과 이름이 같으나 다르다. 볼리비아의 리오그란데강은 마모레강의 지류이며, 마모레강은 마데이라강의 지류, 마데이라강은 아마존강의 지류이다. 즉 볼리비아의 리오그란데강은 크게 보면 아마존강의 일부이다.[32] 국내에서는 냥카와수를 잘못 읽은 낭카우아수로 잘못 알려졌다. 심지어 그냥 낭카우아수라고 하는 바람에 강 이름이 아니라 어디 마을 이름인 줄 아는 사람들이 많다.[33] 볼리비아는 당시 남미국가로는 이례적으로 자작농 비율이 높았다. 그 이유는 체가 오기 14년 전인 1952년에 혁명이 일어나서 토지 개혁이 이미 진작에 실시된 데다가 1964년 쿠데타로 민주 정권을 뒤엎고 들어선 독재 정권에서도 토지 정책만큼은 뒤집지 않았기 때문에 농민들의 반발이 적어서였다. 애초에 게릴라 전쟁에서 농민들이 게릴라를 지지한다는 요상한 신화가 국공내전베트남 전쟁에 대한 구사관 때문에 전가의 보도처럼 돌아다니지만 국공내전 시기에 자작농과 소작농 할 것 없이 농사 짓고 살던 사람들은 부농들과 힘을 합쳐서 식량을 징발하려는 공산당에 저항했다고 국민정부 보고서는 말할 것도 없고 마오쩌둥이 상하이 임시 당중앙에 보낸 보고서에도 나온다. 베트남 전쟁에서도 민심을 얻은 베트콩이라는 혁명신화를 북베트남이 이겼으니까 대충 그러려니 하고 묻고 지나가서 그렇지 남베트남 농민들은 부패하고 미국에 얹혀사는 사이공의 정권이 마음에 들지 않을지언정 공포정치를 강요하는 베트콩은 더 싫어했다. 당장 90년대까지 대책도 없이 미화되던 지리산 빨치산들을 정작 빨치산 치하를 겪은 지역 주민들이 호의적으로 기억하고 있던가? 다만 나중에 볼리비아가 원자재값이 폭락하고, 이후로 구조조정 작업을 겪는 과정에서 코카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미국에서는 코카농사를 중단하려는 압력을 가한 주제에 기본 인프라까지 민영화하려는 만행까지 저질러 결국 에보 모랄레스를 비롯한 좌파 세력의 지지 기반이 되기는 했다.[34] 현대 쿠바 인구의 60% 이상이 혼혈이 거의 되지 않은 스페인계 백인이다. 아르헨티나우루과이, 코스타리카 정도를 제외하면 상당히 백인 비율이 높고, 순혈 백인 혈통 외모인 체 게바라를 낯설어할 환경이 아니었다.[35] 이게 정말 컸는데, 아무리 게릴라들이 산에 숨어 있더라도 헬리콥터 시점에서는 어디에 있다고 대략적이나마 추측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디쯤에 게릴라가 있다 싶으면 (적중률은 신경쓰지 않고) 헬기에 달린 기관총을 난사하면 될 일이었다. 지상의 게릴라들 시점에서는 헬리콥터의 기관총 사격만 가지고도 운신의 폭이 좁아질 수밖에 없게 된다.[36] 스페인어로 La quebrada del Churo이지만 Churo 대신 Yuro라고 구글에 써도 검색된다.[37] 생포 당시 체 게바라가 "쏘지 마라! 나는 체 게바라다. 죽이는 것보다 살려두는 것이 더 가치 있다."라고 말했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다른 증언에 의하면 생포 직전에 옆에 있던 동료가 "그는 체 게바라 사령관이다. 예의를 갖춰라."라고 말했다고도 한다. 이 최후의 말은 정확하게 파악하기 힘든데 생포 세력이 워낙에 적대적인 CIA였기 때문이다. 비굴해보이는 말투 자체가 조작의 여지가 있다.[38] 라틴 문자로는 La Higuera. 구글에서 검색해 보면 체 게바라의 벽화도 나온다.[39] 체의 시체 사진을 찍은 사진사 알보르타의 증언에 따르면 손은 미국 CIA로 보내졌다고 한다.[40] Vallegrande de Bolivia. 동부권 저지대 산타크루스에서 체 게바라가 죽었던 라 이게라 마을로 가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다. 체 게바라 박물관도 들어서 있다.[41] 처음엔 오마 샤리프가 게바라 역을 맡았으며, 스티븐 소더버그가 감독한 두 번째 영화(2부로 나눠져 있다.)에서는 베니치오 델 토로가 맡았다. 델 토로는 이 역으로 2008년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42] 이에 관한 일화로, 대학시절 호의를 가졌던 여학생에게 '진지한 사람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잘생겼다'는 이유로 차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급진주의 정치운동에 관심이 많던 그 여학생이 보기에 '저렇게 엄청 잘생긴 미남이 혁명이나 빈민들의 삶 같은 데 무슨 관심이나 있겠어?'라고 여겨져서 차였다는 것. 이외 비슷한 다른 일화로 68 혁명 당시 시위 대열에 참여한 대학생(여성)이 옆에서 전해주는 피켓을 받았는데 겁에 질린 노파의 얼굴이 그려진 그 피켓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옆 사람이 들고 있던 잘생긴 청년이 그려진 피켓과 바꿔 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다.[43] 코르다는 다른 상품에 그의 사진이 붙는 것은 반대하지 않았지만 이 술에 붙은 것만큼은 술을 절대 마시지 않은 게바라를 모욕하는 것이라면서 소송을 걸었다고 한다.[44] 기본적으로 게바라는 무신론자였다. 적들에게 십자가에 처박히는 것보다는 십자가에 박으려고 하는 적을 처단하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45] Maria C. Werlau, <Che Guevara's Forgotten Victim>[46] Humberto Fontova, <Exposing The Real Che Guevara>[47] 헬렌 야페, <혁명의 경제학>[48] 라 카바냐 수용소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헬렌 야페가 쓴 <체 게바라 혁명의 경제학>을 참고할 것.[49] 물론 실제로는 전혀 달랐다. 군사 정부가 이어졌음에도 쿠데타가 여러 차례 반복되어서 정치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그래도 원자재 값 상승으로 경제는 안정화되는듯 했지만 하필이면 민주화가 될 시기에 원재재 값이 추락하고 외채는 폭증하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경제적으로 혼란기에 접어들었고 볼리비아가 그나마 경제 성장 단계에 들어설 때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50] 52년 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다음 멕시코의 제도혁명당이랑 조합주의, 반공 사회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중도좌파적 정책을 핀 빅토르 에스텐소로 정권의 업적이었다. 볼리비아의 50년대 토지 개혁 정책도 근본적인 사회적 불평등 해결 문제에선 소원하지만 어쨌든 토지 개혁 이전엔 인구의 5%도 안 되는 옛 식민지 스페인 콩키스타도르 출신 엔코멘데로 백인 지주들이 80% 독점하던 아시엔다 장원들을 10년에 두고 대부분 해체, 자영농들에게 분배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례에 꼽힌다.[51] 실제로 저 두 나라에서 산 구경하러 아르헨티나나 칠레로 관광가는 사람도 많다.[52] 페루는 남미에서는 제일 늦게까지 스페인 지배를 받았다. 덕분에 페루 스페인어도 비교적 스페인 본토에 가깝다. 페루도 안데스 산맥 첩첩산중으로 들어가면 원주민 문화가 상당히 강하게 남아 있긴 하지만 적어도 볼리비아 수준으로 외부에 배타적인 수준까지는 아니다. 참고로, 체가 죽은 이후로는 리마에 아시아 문화도 많이 유입되었다. 덕분에 중남미에서 아시아 문화를 접하기 제일 쉬운 동네 중 한 곳이 리마이다. 반면 페루 내부에서도 두번째 도시인 쿠스코는 당장 도시 건축 문화유적부터 잉카 문명 시절의 문화유산이 방문객을 환영하며 역사도 식민도시가 아니라 원주민 잉카 시절부터 내려오던 것이라 리마와 반대되는 페루의 잉카적 정체성을 상징하며, 이런 인식에 기반한 지역감정도 강한 편이다.[53] 게바라 일가의 풀 성씨는 사실 Guevara y Lynch, 아버지 친가 외할머니쪽이 아일랜드계의 후손이며, 훗날 동명이인인 아버지 에르네스토 게바라도 "내 아들의 피에는 아일랜드 혁명가들의 피가 흘렀다"라고 증언할 만큼 아일랜드계의 후손이란 정체성도 어느 정도 간직하고 살았다.[54] 지금까지 살아있는 체 게바라 동생 증언에 따르면 게바라 가문의 아일랜드 혈통은 그냥 지나가는 집안 혈통 수준이 아니라 체 게바라 유년기 집안 분위기와 의식 형성에 상당히 큰 역할을 했다. 친가 린치 가문은 그냥 정체성 자체를 아일랜드계에 두었고 따라서 체 게바라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 할아버지가 아일랜드 혁명가들의 반영 투쟁 얘기 듣고 자랐었다.[55] 이것도 사실 희망적인 소리다. 지금도 볼리비아는 스페인어랑 공용으로 케추아어, 아이마라어, 과라니어 비롯한 원주민 언어 여럿이 공용국어로 지정되어 있을 만큼 스페인 식민화로 인한 문화 변경을 덜 겪었다. 멕시코도 그렇고, 애초에 공공 인프라 자체가 약한 나라들이 많은 중남미권이라 사실 지금도 오지에 가면 스페인어에 미숙하거나 전혀 할 줄 모르고 모어만 할 줄 아는 원주민들이 많은데 1960년대에는 사실 체 게바라랑 기본적인 언어도 안 통했을 원주민어 화자들이 훨씬 더 많았다고 봐야 한다. 볼리비아 내에서 그나마 스페인어를 잘하는 편인 원주민들 및 메스티소들(카스티소에 비해 원주민 혈통이 강함)조차도 자신들과 말이 통하는 쿠바인들 및 아르헨티나인들과는 살아온 환경 자체가 달라서 스페인어의 유창함과 별개로 체 게바라의 사회주의 수출을 긍정적으로 볼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볼리비아 내에서 스페인어가 가장 유창한 사람들(카스티소 및 순혈 백인)은 지배층 포지션이었기 때문에 피지배층의 혁명을 강조하는 사회주의와는 너무나도 상극이었다.[56] 다만, 현실적으로 트로츠키와 게바라의 사상에 무슨 공통점이 있다 보긴 힘들고, 스탈린이나 코민테른 등 권력지향적인 '나쁜' 공산주의자의 이미지에 상대되는 이상주의적인 '좋은' 공산주의의 상징으로 트로츠키와 체 게바라의 이미지를 차용한 것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57] 2012년에 서울대학교로 강연을 온 체 게바라의 딸 알레이다 게바라에 따르면, 체의 가족들이 이탈리아를 방문하였을 때 체의 얼굴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은 일단의 청년들이 싸인을 부탁했는데 알고보니 그들은 파시스트였다고 한다. 체의 이미지가 얼마나 상품화되어 버렸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 그래도 알레이다는 체의 이미지가 사람들에게 혁명적인 영감을 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좋다고 평가했다.[58] 이후 에우세비오와 칭골로라는 게릴라 대원이 체를 배신하고 체의 은신처로 CIA를 인도했으며, 이것이 직접적인 사망 원인이 되었다.[59] https://libcom.org/history/che%E2%80%99s-grandson-anarchist[60] 관련 없는 정도를 떠나서 사회주의 운동 안에서 극적으로 대립하는 양 극단에 있는 이념이다. 쿠바의 아나키스트 신문 Solidaridad Gastronómica는 폐간되기 전 마지막 호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불가능한 개념이며, 절대로 노동계급을 대변하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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