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전반적으로 고증이 종전의 관련 드라마들이 받았던 지적들을 피드백해서 크게 많이 발전했고 상당히 충실하다. 다만 이 드라마에서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대한 묘사에서 크게 시비가 갈린다. 즉 해석과 학설에서 첨예한 의견대립이 있다. 또한 제작비 부족에 허덕인 관계로 전투에서 다른 다수의 사극에서도 지적을 받았던 일명 포졸복이 나온다.2. 스토리
2.1. 조선 사회에 대한 묘사
극중에서의 조선 사회의 묘사는 16~17세기의 조선에 작가가 바라보는 현대 한국이 투영되어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백성이 왕을 버릴 수 있다느니 하는 백성들의 임금에 대한 불신인데 사실 조선 민중의 의식수준은 철종기 임술민란때 나라님이 보낸 사람은 도저히 답이 없어서 쫓아내거나 감금은 하겠지만 해칠 수는 없다면서 수령은 죽이지 않았고, 그래서 조정도 반란이 아니라 소요사태로 분석했을 정도였다. 소위 나라님이 보낸 사람을 죽이자는 언급이 대놓고 나온게 19세기 말 동학농민운동 때였고 이때조차 부패한 중앙권력의 구성원들 일부만을 증오했지 고종을 위시한 근왕논리에서 자유롭진 못했다.[1] 양란 후 조정에 대한 불신이 생겨나긴 하지만 백성이 지배질서 자체를 부정하는 일은 없었고 실제 조정 내에서의 움직임도 백성들이 이전보다 조정을 불신하니 개혁 좀 해서 신뢰를 다시 찾자였다. 그러니까 임진왜란 이전에 백성들이 왕을 버린다느니 조정을 못믿겠다느니 말을 그것도 양반 앞에서 하는건 왕조시대에는 나오기가 어렵다는 논거가 있다.재정이나 역 문제도 실제 당시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비록 양반들이 군역, 공납에서 벗어나 있긴 했지만, 본디 조선의 양반계층의 수는 적었고 무엇보다 조선의 세율 자체가 백성의 담세능력을 무너뜨릴 정도로 무겁지가 않았다. 물론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국가에서 정한 세금은 명확히 그랬으나, 명종 때부터 관리들의 수탈이 심각해서 문제가 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조때 부정부패가 어느정도 개선되며 심각한 사회혼란에서는 벗어났다. 특히 선조는 임진왜란때 보여준 몇몇 부정적인 모습을 제외한곤 전쟁전이나 후나 뛰어난 왕이었다. 조선의 재정이 진짜 문제가 된 건 임진왜란 당시 족보의 상실, 공명첩의 남발로 역을 피하려는 사이비 양반층이 급격히 늘어나고 농토의 파괴로 실 토지결수와 장부상 숫자의 괴리가 엄청나게 늘어난 때문이었다. 한동안 양전사업은 엄두도 못냈으니 세금이 제대로 걷힐리도 없다. 즉 지금 보여주는 조선의 문제점도 사실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이 맞닥트린 문제들이고 그 문제를 극복하고 민간의 담세능력을 유지시키고자 하는 과정에서 (제작진의 주장에 의하면 권리만 무한인)지배층이 100년 가까이 토론하고 고민해서 나온게 대동법이다.
2.1.1. 16세기 조선의 사회상
민란이 일어난다면 그건 왜변에 대한 방비 때문이 아니라 공평치 못한 군역과 조세제도 때문입니다. 양민들은 군포 몇 필을 내지 못해 해마다 반 년 남짓한 군역과 사역을 지면서 공납과 전세까지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에 비해 양반과 지주들은 어떻습니까. 면포 몇 장 내기가 아까워 향교에 거짓으로 등록해 군역을 빼고, 해마다 농작의 풍년과 논밭의 비옥함에서 그 등급을 속여 전세를 거의 내지 않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것만 바로잡으면 됩니다. 그리되면 축성 때문에 국고가 빌 일이 없고, 민심이 화낼 일도 없습니다.
- <징비록> 10회, 류성룡의 대사
여기서 나온 조선의 모순은 18세기 이후라면 사실 다 맞는 말이다. 적어도 19세기에는 왕조가 교체되었어야 맞다. 문제는 16세기에 이런 소리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징비록> 10회, 류성룡의 대사
이 드라마에서 지적되는 조선의 근본적인 문제는 바로 양반이라는 지배층이다. 부유한 양반들이 조세와 군역을 각종 편법으로 회피하니 그 부담이 가난한 양인들에게 전가되고, 그 결과 민심이 등을 돌리고 국고는 국고대로 바닥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작가는 주인공의 입을 빌어 왜곡된 조세와 군역 징발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하지만,[2] 이런 주장은 결과적으로 민심의 반발을 우려한 정부 내 다수파에 의해 좌절되는 것으로 그려진다. 이러한 학설에 따르면 16세기 조선의 양반들은 권리는 있으되 책임은 지지 않고, 조정에서는 이를 사실상 방치 혹은 조장한 것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정말로 16세기의 조선 사회가 이러했다면 조선은 19세기에 진짜 이런 작자들이 권력을 잡을 때가 되기도 전에 임진왜란 때 이미 망해버렸을 것이고, 새로운 왕조가 곧바로 들어섰을 것이다. 극중에서도 이산해가 지적하는 것처럼 애당초 조선의 '양반'들도 양인의 일원이었다. 그들도 역시 백성으로서 국가에 조세를 납부할 책임과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는 대상이었다는 말이다. 더욱이 이 시기에는 오히려 이황, 조식, 이이 등 사족들의 사회적 책임을 제고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3]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들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만 봐도 이러한 점은 명확해진다.
구체적으로 이 드라마에서는 양반들이 향교에 이름을 등록해 군역을 피한다고 하는데, 정작 16세기에는 이렇게 군역을 피하는 것이 꿈에 가까운 일이었다. 조선의 국시가 성리학인 이상 학생들에게 군역이 면제되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름만 올린다고 끝이 아니라 향교에서 낙제하면 가차없이 영장이 나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향교는 지방 수령의 관할을 받는 공기관이다. 실제로 김수는 임진왜란 대비 과정에서 향교의 시험 난이도를 확 끌어올린 다음, 양산된 낙방 유생들을 축성에 동원한 적이 있다.[4] 따라서 이런 방식의 군역 회피는 사족층이 군역에서 합법적으로 면제되고, 서원이 향교의 역할을 대치하는 17세기 전반부터 본격화되는 현상이다.[5]
다만 전세에 대해 농작의 풍작과 토지의 비옥도를 속인다고 한 지적은 일정부분 타당한 면이 있다. 조선에서는 세종 대 공법이 제정된 이래 전세의 부과가 수령에게 일임되었는데, 수령 한 사람이 고을의 온 농지를 돌아다니며 파악한다는 것도 불가능한 만큼 실질적인 전세 책정은 현지의 향리들에게 위임되었고, 다시 향리들이 지주층에 유리하도록 전세를 책정하는 경우가 잦았던 것이다. 여기에 수령 자체가 중앙의 외척 권세가들과 결탁하는 일도 큰 사회적 문제로 떠올랐다. 이에 16세기에는 20년 단위로 이루어지던 토지조사가 중단되었고, 수령들이 부역을 불공정하게 적용하고 있다는 지적도 빈번하게 나타난다.[6]
허나 그와 같은 전세 조작의 주체가 재지사족이 아니라 수령과 향리였다.[7] 오히려 정부에서는 전세의 책정을 맡는 감고[8]에 사족들을 임명하는 것을 권장하였지만 사족들이 이 직책을 기피하였던 것이다. 결국 정부는 관찰사 등을 통해 중앙집권력을 높이는 방향으로 정책을 운영하였으나 이는 풍흉에 대한 지방의 대응력을 약화시키고, 지방의 안정적 운영을 어렵게 하는 요소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에 조선 정부가 택한 대응책이란 중앙에서 지방에 가하는 부담 자체를 줄여버리는 것이었다. 때문에 전반적인 전세는 점차 하등전으로 경감되어 나갔고, 결국 토지에 차등적으로 매겨지던 비옥도가 인조 대에는 영정법을 통해 하등전으로 고정되기에 이른다. 이에 그 반대급부로 공납의 규모가 불어나게 되었던 것. 그리고 이에 대해 드라마에서 권리무한 책임전무라고 까는 그 양반들이 100년간 머리 싸매서 내놓은 대안이 대동법이다. 16세기의 세제 혼란은 바로 이러한 배경 위에서 전개되었던 것이지, 그 책임이 단순히 재지사족들의 전횡으로 파악되어도 좋은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9]
2.1.2. 조선 조정의 전쟁 준비
당시 외방의 군사는 모이지 않고 도성에는 전후하여 대부분의 장정들이 거의 징발되었으므로 도원수 역시 군사가 없었다. 상번해 있던 병사들도 비록 병조에 소속은 되어 있었지만, 아전들이 결탁하여 농간하며 뇌물을 받아 사사로이 달아나게 한 자들이 매우 많았다. 관원들은 그들이 갔는지 남았는지를 따지지 않았으므로 급한 상황을 맞아 전혀 쓸모가 없었으니, 군정의 해이함이 이에 이르러 있었다.
- 류성룡, <징비록>
임진왜란 당시에 조선군은 질적인 수준이 저하되어 있었고, 개전 초기부터 일본군을 상대로 연패를 거듭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드라마에서 묘사하는 것처럼 단순히 조선이 전쟁 준비를 하지 않았던 탓이 아니라, 관료제 군주국가가 두 세기에 달하는 안정기를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나타난 구조적인 폐단 때문이었다. 당시 조선은 지방의 토지가 소수에 집중되면서 그에 상응하여 소작농과 천민층이 확대되었다. 이는 곧 군역을 부담하거나 군인을 부양해야 할 양인층의 축소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생계기반이 사라진 직업군인은 저질화되어 사실상 와해되기에 이르렀고, 그 외 양인층의 군역 부담은 가중되었다.- 류성룡, <징비록>
사실 이 문제는 빈약한 재정과 군대 규모의 확장에 따른 부작용이 중첩된 결과이기도 했다. 조선 전기에 걸쳐 직업군인의 숫자는 2천에서 2만으로 10배 가까이 증가했으나, 정작 조선은 이들을 부양할 능력이 부족하며 한계에 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문에 조정에서는 직업군인들에게 제대로 된 급여와 장비를 주지 못해서 직업군인들의 생계와 무장은 열악해졌고, 군기점검이나 인사고과에 있어서 부정과 비리가 만연하게 되었다. 가장 큰 문제는 군마와 갑주의 부족이었다. 특히 군마의 부족이 심각했는데 조선 초기에는 7만 필에 달하던 국내의 말이 중기인 명종 대에 가면 1만 필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러다보니 갑사들은 자신의 말을 보유하기보다는 상번하여 군기를 점검받을 때에만 업자에게 말을 빌리게 될 지경이었고, 이조차 수요가 폭증하면서 가격이 비싸져 말의 하루 대여료가 목면 40필에 달할 지경이었다. 게다가 갑옷도 부족해서 철갑은 고사하고 값싼 지갑이나 피갑이 보급되었고 문제는 그마저도 준비하지 못하는 사람이 태반이었던것이다. 동시에 세조 대부터 보법으로 군역의 부담 범위가 확대되었는데, 이는 도리어 요역에 징발되어야 할 여분의 인력이 사라지게 만들어서 군역의 요역화 현상을 일으켰다. 결국 돈으로 사람을 사서 대신 군역을 부담시키는 대립제가 성행하고, 16세기에 이르러서는 아예 모병제를 전제로 한 방군수포제가 양지화되었다.[10]
이와 같은 구조적 실태는 곧 전술적 차원으로 파급되었다. 직업군인의 증대는 이들에 대한 세세한 인사고과를 불가능하게 만들었고, 익히기 어려운 창검술 대신 궁술만으로 이들을 평가하기 시작하면서 급기야는 궁기병 위주의 불균형한 병과 편성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궁기병 위주의 개인전술은 여진족을 상대로 한 일반적인 접전과 소탕에서는 충분한 파괴력을 보여주었지만,[11] 이미 니탕개의 난에서 대규모로 조직화된 적을 상대로는 한계가 있음을 드러내고 있었다.[12]
게다가 이를 보완하고자 집단전술을 도입하려 해도, 부사관 내지 위관급 장교로서 각 부대를 조직하고 장악해야 할 직업군인들 자체가 이미 열악하고 개선하려 해도 그럴만한 예산이 부족하다보니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승자총통과 같은 개인용 소화기 이상의 대구경 화기를 야전에서 운용하기에는 무리가 많았기에[13] 임진왜란 개전 당시 조선군은 수전이나 유격전이 아닌 회전 능력은 그야말로 개판 오분전 상황이었다. 결국 탄금대 전투에서 신립은 이미 장창대와 철포대의 유기적 연결을 통해 대기병 집단전술을 완성한 상태였던 일본군을 상대로 용감하게도 궁기병 어택땅을 찍었고, 그 결과는 병력의 궤멸과 선조의 몽진으로 이어진다.
주상께서 즉위하신 이후로부터 성심으로 매양 군비를 갖추는 데에 정성을 다하여 해마다 어사를 여러 도에 파견해서 군기를 점검하지 않는 해가 거의 없었다. 그런데 봉행하는 자가 그 요체를 잃고 지극히 엄혹하게만 다루어 위엄을 세우니, 군읍이 어수선해져 다투어 창검과 궁시를 다스려서 앞에 벌여두고는 능하다는 평을 얻어서 왕왕 은혜를 입고 발탁되었으나 군민의 이로움과 해로움, 훈련의 잘함과 못함, 장수의 유능함과 무능함, 지형의 험고함과 용이함에 대해서는 하나도 묻지 않았다.
- 류성룡, <서애집> 16권 군기를 간열함
- 류성룡, <서애집> 16권 군기를 간열함
다만 그렇다고 조선 조정이 이런 문제를 방치하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의외로 군사력 개선 문제에는 선조가 가장 적극적이었는데, 선조는 즉위한 이래 해마다 각 도에 어사를 보내서 지방의 군사력을 끊임없이 점검했고, 이를 통해 군적과 실제 동원력의 괴리를 해소해나갔다.[14] 이러한 상황 속에서 1589년 류성룡이 작성한 군안에는 무려 35만 명이 등록되어 있었다.[15] 실제로도 개전 초기 전라도와 충청도에서만 최소 6만, 최대 10만의 병력이 집결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당시 조선군이 결코 양적으로 빈약한 군대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16]
여기에 조선군을 질적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무기의 개량과 보급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그 중에서도 가장 역점을 두었던 사업이 바로 승자총통의 개량과 보급이었고, 드라마에서 다루어진 비격진천뢰도 이 즈음이면 이미 개발이 완료되어 있었다.[17] 함선에 관해서도 처음 개발되었을 때에는 50명 정도가 탑승하던 판옥선의 규모가 노꾼만 100명이 넘는 거대 함선으로 엄청나게 커져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커진 판옥선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임진왜란에서 '해상의 성'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수행했다.
이후로도 일본의 침공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조선 조정은 임진왜란 직전까지 인사를 배치하고, 군비를 점검하고, 방어선 조정 및 성곽을 수축하는 등 나름대로 열심히 전쟁에 대비했으며 그 배경에는 분명한 선조의 의지가 반영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쟁 대비의 결과 영남에서는 경상감사 김수가 사족들과 대판 충돌했고[18], 호남에서는 징집에 불만을 품은 병사들과 백성들이 남원, 구례, 순천, 전주 등지에서 민란을 일으켜 전라감사 이광은 근왕도 바쁜 판에 반군 진압부터 해야했다. 농담이 아니라 선조가 거기서 더 전쟁 준비를 열심히 했으면 왜란 이전에 민란이 일어났을 확률이 높다.[19] 해당 문서 참조.
2.2. 이순신 등장 관련
난중일기를 제외하고 이순신 개인에 대한 기록이 가장 풍부한 사료가 징비록[20]임을 감안할 때 이를 제목으로 내세운 드라마에서 이순신이 안 나올 수가 없는 노릇임에도 방영 개시 직전까지도 배역이 공개되지 않았다. 워낙 중요한 배역이라 공개를 최대한 미루거나 캐스팅을 하지 못한 것으로 관측되었으며, 한편으로는 이순신이란 인물이 한국사에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큰데다가 불멸의 이순신의 김명민과 명량의 최민식으로 인해 확립된 사극속 위상도 높아 이에만 관심이 쏠리는 걸 막으려고 일부러 발표를 늦추는 게 아니냐는 설도 제기되었다.심지어는 이순신이 등장할 경우 불멸의 이순신이나 명량과 비교되어 논란이 일어날 것을 피하려고 실제로 등장하지 않고 다른 등장인물의 대화나 장계 등을 통해서만 언급되는 것이 아니냐는 비관적인 이야기도 나왔을 지경.[21] 특히 2월 5일에 열린 제작 발표회에서는 김상휘 PD와 김상중이
이럴만도 한 것이 전작 정도전도 주인공 정도전보다 이인임이나 이성계가 더 주목받은 바 있는데다 이순신의 위상은 방영 전부터 이미 주인공 유성룡을 압도하는 수준이라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그 주목도를 낮출 필요는 꾸준히 제기되었기도 하다. 징비록이라는 드라마의 취지는 뼈아픈 역사를 고찰하고 반성하자는 것으로, 이순신이 임진왜란에서 큰 업적을 남긴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다루기보다 좀 더 거시적인 측면에서 왜 전쟁이 발발했고 조정에서는 무엇을 했는지 다루는 것이 제작 방향이라면 이순신의 비중은 자연히, 인위적으로라도 줄일 수 밖에 없다. 다만 징비록 방영 특집으로 다룬 역사저널 그날에서 류성룡과 이순신에 대한 이야기를 매우 자세히 다루어 잘하면 비중 높은 주연으로 나올 가능성 정도는 대두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종국에는 절충안(?)으로 KBS에서 2004년에 불멸의 이순신을 방영한 것을 이용해서 이를 다시 써먹는 게 아니냐는 추측까지 돌았을 지경. 물론 불멸의 이순신의 완성도가 나름 괜찮고 시대적으로 겹치는 부분을 다시 만드는 것보다 제작이 더 쉬운 잇점도 있는데다 다시 전투 장면을 만들려면 제작비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으로 들어가는 탓에 이미 KBS에서는 임진왜란을 다루는 다큐멘터리 등에서 불멸의 이순신 해전장면을 수차례 써먹은 전적도 있기에 가능했던 추측이다.
이 설왕설래는 결국 징비록 본방 6화에서부터 이순신이 언급되기 시작하면서, 제작진 역시 캐스팅 중임을 확인해 주어 어떤 식으로든 등장하는 것만은 확정된 모양새로 마무리되었다. 애초에 임진왜란을 논한다면 도저히 빠질 수가 없는 인물이 본작의 주인공인 류성룡과 이순신이다.[22] 징비록에 가장 많이 서술되는 인물 중 하나가 이순신이고, 이순신이 치른 해전들이 하나같이 전쟁의 판도를 바꿔 놓은 것들이라는 점[23]을 감안하면...
허나 사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이 드라마에 있어 이순신의 등장은 독이 든 성배나 다름없다. 왜냐하면 임진왜란에서 이순신의 전공은 분명 엄청난 것이지만 문제는 스토리상 류성룡과 이순신을 연계시킬려면 작가가 상당한 골머리를 썩어야 한다. 이순신 함대의 공적에 류성룡이 관련된 적은 커녕 류성룡과 이순신은 전란 중에 대면한 적도 없으니까.[24] 이순신이 조정에 지원을 한 적은 있어도 조정이 이순신에게 지원을 해준 적은 없다시피 하다. 본디 류성룡의 주역할이 관군, 의병, 명군 지원인데 이순신이 조정의 지원을 받은 적이 없다시피 하니 류성룡은 이순신의 활약에 끼어 들 수가 없다. 대면을 한 적도 없으니 류성룡이 이순신과 작전을 논의했다는 연출도 무리다. 즉 두 사람의 전란 중 활약한 영역 자체가 다르므로 이순신의 공적을 묘사하다보면 드라마의 초점이 자연스럽게 류성룡이 아닌 이순신에게로 옮겨가 버린다. 게다가 류성룡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적을 물리치는 장수가 아니라 이순신의 활약이 상대적으로 더 눈에 띌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만약 이를 무시하고 그냥 징비록의 기록대로 드라마를 진행하면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 류성룡인지 이순신인지 알 수 없는 지경에 갈 수도 있다.(...) 내용은 문제가 심각했다지만, 드라마가 초장기 백 작가의 기획안인 선조, 류성룡, 이순신 쓰리 탑 체제로 나아갔다면 조금 상황이 나았을지도 모르지만, 이미 드라마는 류성룡과 선조, 조정 대신들이 중심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방향성이 결정되어 버렸기에 이조차도 무리다. 결국 류성룡의 이야기와 이순신의 활약의 매끄러운 조화는 작가의 필력과 제작진의 연출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여러모로 작가와 제작진이 빠진 진퇴양난이다. 이순신에 대한 묘사를 안 하자니 완성도가 떨어질 것 같고, 하자니 장르가 바뀔 거 같고(...) 게다가 갈수록 류성룡의 캐릭터가 시청자들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것도 문제다. 이런 상태에서 이순신을 내보냈다간 진짜 대참사가 벌어진다. 불멸의 이순신이나 명량 경우 고증에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이순신의 캐릭터 묘사를 잘 해서 시청자들도 어느정도 문제점을 눈감아주었다. 그런데 징비록의 주인공인 류성룡의 캐릭터가 외면받는 현 상황에서 드라마에서 이순신을 잘 묘사하면 류성룡은 당연히 페이크 주인공화 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25]....나라의 성웅이 엉망으로 묘사되는 꼴을 과연 시청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말이 필요한가. 뭐 그땐 조기종결 각오도 해야 할 것이다.(...)
한산도 해전 이후로도 휘하 장수들이 이순신을 영감으로 호칭하지만, 이순신은 한산도의 승첩으로 정2품 정헌대부까지 올라갔으므로, 대감으로 호칭하는 것이 맞다. 통제사로 임명된 이후인 37회에서도 장수들이 이순신을 통제사 영감이라 호칭하지만, 정확히는 통상 대감이라 불러야 고증에 맞는다. 다행히 40회가 넘어서부터는 고증대로 대감으로 호칭하고 있다.
3. 복식
3.1. 조선
3.1.1. 내시
파일:상선김새신.jpg김새신(1555-1633)의 영정. 임진왜란 당시 의주로 피신하던 선조를 지켜낸 공로를 인정받아 1604년에 3등 공신에 책봉되고 낙성군(樂城君}에 봉해진 인물이다. 보다시피 내시라서 수염이 없고, 복식은 3품 당상 문관의 관복제도로, 사모와 흉배 달린 관복을 입고 있다. 아청색 계열의 시복 흑단령을 입고 있다.
예전 조선시대 사극에서 내시들이 쓰는 관모에 사모뿔이 안 달려 있게 나온 것과 달리 여기서는 제대로 달려 나온다. 그러나 여전히 문무백관과의 구분을 위해서인지 아무런 흉배 없는 단령을 입은 모습으로 나오는데, 실제로는 문무백관과 똑같이 흉배 단령을 입었다.
3.1.2. 조선 저고리와 가체
조선 시대 여인들의 저고리가 가슴 아래까지 올 정도로만 긴데 실제로 임진왜란 당시까지도 여인들의 저고리는 허리까지 내려올 정도로 상당히 길었다. 징비록에서 보이는 여인들의 저고리는 18세기 중엽의 저고리에 가깝다.[26]16세기 저고리들
왕비의 당의도 어깨와 가슴에 용보를 붙인 채로 나오는데 당의에 용보를 붙이기 시작한 것은 조선 후기 18세기에 당의를 소례복으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징비록의 배경이 되는 시기에는 왕비는 평상복으로서 저고리, 장저고리, 배자를 입었으며 소례복, 관복으로서는 단령삼을 입었다.[27]조선 중기를 배경으로 한 사극들 대부분 왕실과 대궐에서 당의를 입고 나오는 것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징비록에서도 아마 왕실과 다른 양반 및 민간여성과의 차이를 강조하기 위해 당의를 착용한 것으로 보인다.
왕의 여자의 의인왕후 | 징비록의 의인왕후 |
<징비록>과 <왕의 여자>는 거의 같은 시대를 다룬 작품인데도 불구하고 가체의 크기와 모양이 다르다!! 징비록에서는 의인왕후와 인빈 김씨의 가체 크기가 무진장 크고 예쁘지가 않다.
두 작품 모두 당의에 용보를 붙이고 있다. 즉 둘 다 고증 오류 라는것. 당의 문서를 보면 알수 있듯이 용보를 사용한건 1895년 의복개혁 이후 달고 다닌걸로 보고있다.
3.2. 명나라
3.2.1. 명나라 황제와 관료 복식
드라마 <징비록>에 나오는 명나라 관료(좌측)과 태감(우측)의 복식 | 실제 명나라 관료의 복식 |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cc70948f38408f04d8d039858079f647.jpg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한국 사극에서는 고려 시대나 중국 왕조의 관료들의 머리 모양을 장발 상투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는데 실제로는 안 그랬다.[29] 명나라 관료들 초상화를 보면 관모를 썼을 때 머리카락이 모두 감춰지는 것을 알 수 있다.[30]
헌데 정도전에서도 이 문제는 고쳐지지 않더니, 징비록에서도 공개된 명나라 배역들의 사진을 보아 역시 고쳐지지 않은 듯하다. 아무래도 조선과 명나라의 차이를 시각적으로 확실히 하기 위해 연출한 듯 하다. 물론 중국 사극 중에서도 명나라 시절 관료들의 머리 모양을 장발 상투로 묘사한 경우도 상당수 있다. 또는 동일한 드라마 내에서 뒷머리를 기른 사람과 적당히 짧게 자른 사람이 혼재되어 있기도 하다. 사실 이건 비단 한국 사극만의 문제는 아니라 많은 중국 사극들도 중국 상투를 실제와는 다르게 장발 상투처럼 묘사하고 있는 것도 영향을 주었으리라 생각된다. 일부로 사극에서는 장발상투로 표현하는 듯 하다. 차기작은 정통적인 일반 상투로 등장했다. 또한 관료들의 사모에 달린 날개 모양의 뿔도 아래쪽으로 쳐져 있는데 실제 당시의 명나라 사모뿔은 조선과 같이 옆으로 평평하게 펴져 있었다. 역시 조선과 차이점을 보이기 위하여 일부러 그런 듯하다.
중국 무협영화 <용문비갑>에 나오는 명나라 환관들의 복식 |
또한 드라마와 달리 실제 명나라 태감(환관들의 우두머리)은 머리에 강차모를 쓰고, 옷은 3겹으로 입었다. 또한 태감들은 하얀 모시나 누런 비단으로 만든 행주같은 수건을 가지고 다녔는데, 길이 5자 너비 3치에 의복 안감의 오른쪽에 반 정도가 바깥으로 드러나도록 했다. 때문에 한눈으로 봐도 환관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드라마 <징비록>의 만력제 | 중국 사극 여의명비전에 나오는 명나라 황제의 곤룡포 |
만력제의 어진 | 만력제의 능에서 출토된 곤룡포 |
명나라 황제의 익선관
만력제의 복식 고증
황제의 복장은 그래도 정도전 때보다는 낫다. 이전에 당나라 황제 복장을 재활용한 정도전과는 다르게 적어도 익선관은 흑색에 금실 장식이 되어있는 형태로 등장했으며 곤룡포 또한 명나라 후기에 면복의 12가지[32] 문양이 들어간 형태로 잘 고증되었다. 명나라 후기 황룡표의 색감이 주황색에 가깝다고 이의를 제기하는 이도 있는데, 명나라 후기 황제들의 초상화를 보면 황색, 주황색 황룡포가 혼재되어 있기 때문에 황룡포 고증이 틀렸다고 볼 수는 없다.
다만 징비록에서 만력제가 여러 번 사복의 겉에 걸치고 나오는 겉포는 이의가 있다.
저기서 만력제가 겉에 걸치고 있는 겉포는 KBS의 삼국시대배경 사극인 대왕의 꿈에서 백제의 무왕과 의자왕이 입었던 겉포다. 잘 살펴보면 허리띠까지도 같다. 그래서 사극 의상은 돌려서 쓰는 경우가 흔하다는 얘기다.
3.2.2. 명나라 후궁 복식
징비록에서는 만력제의 후궁들이 당나라스러운 옷을 입고 나오며 머리에는 여러가지 장신구들을 꽂고 나온다. 하지만 실제 당시의 명나라 황후와 후궁들은 평상시에 머리카락이나 실을 짜내어 고깔처럼 만든 적계(狄髻).특계(鬏髻)라는 모자를 머리를 올려 묶은 다음에 착용하였으며 징비록과는 달리 직령, 단령, 배자 같은 옷을 걸쳐 입었다. 아무래도 제작비 때문인지 징비록에서는 화려하게 보임으로서 중국인들이라는 느낌만 내주는 선에서 만족한 듯하다.
명나라 궁중 여인 복식(후궁)
3.3. 일본
3.3.1. 촌마게
우리가 알고 있는 정형화된 촌마게는 임진왜란으로부터 약 70년 뒤인 에도 시대 중기에서야 나타난다. 임진왜란 시대, 즉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는 촌마게가 퍼져나가고 있었던 과도기적인 시기였고 그 모양 역시 드라마에서 나오는 것과 비슷한 어설퍼 보이는 형태였다. 또 고니시 유키나가처럼 그냥 머리를 묶은 챠센마게를 한 사람들도 많았다. 이러한 초기 형태의 촌마게는 10년 전 같은 KBS 대하드라마인 불멸의 이순신에서도 잘 재현되었고 그보다도 더 전에 방영된 SBS의 왕의 여자에서도 잘 재현되었다. MBC의 조선왕조 오백년 임진왜란에 나온 완벽한 형태의 촌마게는 훗날 에도 시대 중기에 나타난 촌마게이므로 오히려 틀린 고증이다.
촌마게는 처음에 고위 장수들에게 시작된 헤어스타일로 신분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자주 머리를 밀어야 하는 촌마게는 부과 권력의 상징이었고 고위층이나 가능한 것이어서 초기에 부와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고위층일수록 촌마게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상류층을 흉내내기 위해 점차 촌마게를 따라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에도 시대에는 일본 사회에 완전히 정착하게 된다.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일본은 전체적으로 챠센마게가 흔했지만, 임진왜란에 등장하는 고위 장수들의 경우에는 촌마게를 한 경우도 많았다. 당시 초상화를 보면 일본 고위층에서도 촌마게와 챠센마게가 혼재되어 있다.
3.3.2. 당대 기모노와 머리모양
드라마 <징비록>에 나오는 기모노 | 영화 <차차 - 천애의 귀비>에 나오는 기모노 |
또한 9화에서 히데요시의 직속 시녀 미츠키의 틀어올린 머리는 에도 시대 중기의 양식으로,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올림 머리는 유녀들이 상투처럼 틀어올린 카라와마게(唐輪髷)라는 머리가 있었다.
3.4. 류큐
히데요시에게 군량 2만 석을 상납하라고 협박당하고, 명의 황제에게 히데요시의 협박을 일러바치는 류큐 왕자의 복식이 실제와 근접하게 재현되었다. 오른쪽이 오키나와 박물관에 전시된 류큐 전통 의상. 다만 쇼네이 왕 문서에서 볼 수 있듯이 당시 류큐 또한 중국식 복제를 착용하고 있었기에 왕자라는 위치라면 좀 더 화려한 복식으로 표현하는 것도 좋았을 것이다.
류큐국 왕족들을 그린 그림 |
4. 무기류
4.1. 함선
7화에 통신사 서장관 허성이 일본에 체류 중에 살펴본 남만(포르투갈)에 대한 묘사에서 당시에 사용된 카락선이 CG로 구현되었다. 당시 판옥선의 크기는 약 200톤 내외인데, 동시기 유럽에는 1500톤짜리 대형 카락도 있었고 500톤 규모의 카락은 비교적 흔한 편이었다. 드라마에서처럼 카락선이 좀 크게 묘사된 것 자체는 고증 오류가 아니지만, 화면에서 볼 때 CG의 거리 설정에 문제가 있어 보인다. 참고로 콜럼버스가 활동하던 시기는 15~16세기인데 그 때로부터 왜란은 약 백년 뒤의 일이고, 그 사이의 기술 발전을 감안해본다면 크기 증가는 용납이 되는 수준. 비슷한 시기를 다루는 토탈 워: 쇼군2에 나오는 서양함선은 안택선보다 거대하게 나온다.
여담으로 해당 CG의 카락은 일본에서 관광용으로 만든 모형 카락이다.
여담으로 CG 티가 난다. 참고로 불멸의 이순신 시절 쓰이던 판옥선은 이꼴났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안택선과 세키부네에 한선에 보이는 뱃꼬리가 붙어있는 모습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해당 선박들에 대한 그림이나 모형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일본배에는 저런 뱃꼬리가 없다. 그런데 CG로 묘사한 장면에서는 없는 모습도 보이고 있다. 위 블로그 링크 글에 기초해 추정상 배의 크기 등 판옥선과 안택선을 하나의 선채에서 모듈화로 바꿔 촬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담으로 제작비 때문인지 몰라도 거북선이 10화에서만 언급되고 임진왜란 시작 이후에는 등장하지 않았다가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서 뜬금없이 모습을 보이는데... 불멸의 이순신에서 나온 칠천량 해전 장면이 나왔다!''' 사실상 징비록에선 안 나온 거나 다름 없는 셈이다(...). 참고로 불멸의 이순신 시절 쓰던 거북선과 왜선들도 다 망가졌다.http://blog.daum.net/roo1235/5662250.
4.2. 무기
조총의 발사 장면 역시 도화선이나 반자동 소총으로 변해버린 예전 사극들과 달리 제대로 되어 있다. 사소한 문제이지만 조총 발사시 효과음도 불멸의 이순신 시절에는 근현대에 제작된 권총 같은 발사음이 났으나 이점도 개선되었다.[37] 거기에다 조총을 사용하는 방식도 정확히 재현했다. 이는 관련 회마다 자세히 나온다. 조준과 함께 발사장치인 방아쇠를 당기면 화승에 불이 붙어 탄환이 발사되는 과정이 나온다. 하지만 흑색화약 사용 총기 특유의 뭉게뭉게한 연기는 재현되지 못했다. 더불어 뛰어다니며 쏘질 않나, 아무런 호위 부대도 없이 조총 부대만으로 교전을 벌이고, 근접전도 조총 하나로 해결하고, 조총으로 총검술을 쓰는 등 반자동소총 마냥 연사만 안할 뿐 사용방법에선 현대소총처럼 운용하는듯한 흔적이 강하게 남아 있다.[38] 이 무렵까지의 화승총은 너무 무거워서 근접 교전 목적으로 사용하기에는 부적절하다. 그래도 더 이전 시대보다는 약간 경량화가 진행돼서 거치대 없이 들고 쏴도 되는 수준까진 됐지만[39], 경량화가 더 이뤄져서 총검만 꽂으면 단창처럼 근접무기로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되는건 유럽에서도 1700년대의 일로 임진왜란으로부터는 최소 100년 이상 지난 후이다. 그 전까지는 화승총 부대는 반드시 창병 등의 냉병기 부대와 혼합 편성되어 호위를 받았고, 만약 화승총이 주무장인 병사가 근접전 상황에 불가피하게 노출된다면 부무장인 검을 뽑아들고 싸웠다.
그리고 탄금대 전투가 묘사된 15화에서 새로운 오류가 터졌는데, 방아쇠를 당기지도 않았는데 화승이 앞으로 나아가 타오르고 있고 몇 초가 지난 뒤에 방아쇠를 당겨 발사하는 장면이 나왔다.
화포가 사용될 때의 묘사도 이전 사극과 차이가 있다. 화포를 쏠 때의 효과음으로는 불멸의 이순신 등 이전 사극들과 달리 현대식 대포소리가 나오지 않고 진짜 임진왜란 당시의 화포소리가 제대로 고증되었다. 일본 수군의 군함이 조선 수군의 포탄을 맞고 부서질 때의 효과음 또한 불멸의 이순신 등 이전 사극들과 달리 폭발음이 아니라 나무가 부서지는 소리다. 물론 임진왜란 당시에도 폭발하는 포탄이 쓰인 건 맞지만(대표적으로 비격진천뢰) 어디까지나 포탄들 중에서는 일부일 뿐이었으며, 주로 쓰인 포탄은 폭발하지 않는 평범한 쇠공 형태였다. 따라서 이 점에서는 징비록 쪽이 맞게 고증한 것이다. 다만 자신이 탄 군함이 포탄을 맞았을 때 일본군 병사들의 모습은 쇠공 같이 단단한 물건이 날아왔을 때의 모습보다는 포탄이 폭발할 때의 모습에 가깝다. 포탄을 직접 맞지도 않고 포탄으로 부서진 군함 파편을 맞지도 않은 일본군 병사들이 마치 폭발로 인해 튕겨져나가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등...
또한 조선군이 쓰는 칼이 일본도 마냥 길고 허리에 칼 손잡이가 앞으로 가도록 차고 있는데 이는 실제와 차이가 있다. 당시 조선시대에선 활을 쏘기 쉽게 칼 손잡이가 뒤로 가도록 착용하였으며 칼도 일본도가 아닌 일본도에 비해 짧은 환도를 사용하였다. 품계가 높았던 무관은 장도를 사용하였을지도 모르나 일반 병사들이 장도를 썼을지는 의문이다. 그리고 조선의 칼집에는 고리가 달려 있다. 칼집의 앞쪽에 보면 두 개의 고리가 있는데 그것을 벨트에 달린 띠돈에 걸어 평소에는 뒤로 돌려 두거나 하여 활이나 장거리 무기를 사용함에 불편함이 없도록 하였다. 그러다가 적이 가까이 오거나 하여 칼을 쓸 필요가 있을 때 다시 앞으로 돌려 칼을 뽑았다. 한마디로 손에 들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극중에서 기마 장수 및 병사들이 일본 장병처럼 허리춤에 칼을 찔러넣고 다니는 모습이 보인다. 조선검은 칼집에 쿠리카타가 없으므로 이런 식으로 차고 다니면 방패[40]가 허리에 걸려 계속 쿡쿡 찌르게 된다. 여기에 더해 방패에 칼날 양쪽으로 궤계혈이 나 있는 등, 임란 이후에나 일본도를 모방하여 만들어진 장식이 붙어있고, 조선식 잠금장치도 없다. 계속 손으로 들고 다니고, 허리춤에 패용할 때도 칼날 방향이 위, 아래 등 통일성이 없다.
가장 큰 걸림돌은 역시 제작비일 것이다. 옛날 소품들은 고증따위 씹어먹어서 일본도 식으로 만들었을테고, 이제와서 제대로 만들려고 해도 띠돈이나 잠금장치를 칼집에 달려면 그냥 칼만 만드는 것보다 당연히 훨씬 비싸진다. 지금당장 시중에서 구할수 있는 진짜 조선식 환도 가검은 기성품이 40만원 선이 기본[41]이며, 띠돈은 그 조그마한 금속덩어리가 5~7만원 선이다. 수십명씩 무장시키는 비용자체가 만만치 않고, 개선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에 비하면 시각적으로 달라지는 게 크게 없으니... 그러나 굳이 띠돈을 묘사하지 않더라도 칼날이 아래로 가게 하여 끈으로 연결해 고정시키는 고리매기나 허리띠를 칼집 고리에 꿰어 매는 둘러매기만 해도 별다른 지출 없이 고증도 맞추면서 더 편하게 촬영할 텐데, 이렇게까지 불편하게 들고 다니거나 허리를 쿡쿡 찌르면서 촬영하는 게 이해가 어렵다.
그래도 동래성 장면에서, 잠깐이지만 송상현이 제대로 환도를 패용하였다.
그리고 이순신은 꼬박 꼬박 환도를 제대로 패용한다.그리고 38회에서는 조선식 환도 보관법까지 고증했다!
중국 명나라 때 방패의 모습. 둥근 것은 손에 들고 싸우는 수패, 지지대가 달린 큰 것은 주로 땅에 고정시켜 놓고 쓰는 방패다.
조선시대 시복 복원품. 화살을 꽉 잡아줘서 화살 흘릴 걱정없이 쏘는 게 가능하다.
부산진성의 무기창고에서 원방패가 보관되어 있는 모습이 나온다.[43] 방패+환도 조합의 팽배수 조선군도 나오고 방패로 비를 피하는 장면까지 나오는 등 다양한 방패 운용법을 고증에 정확하게 보여준다. 조총에 시원하게 관통되는 모습도 나온다.
징비록에서는 그동안 조선을 배경으로 한 한국 사극 중에서 장창의 비중이 높아졌다.
게다가 창을 들고 있어봤자 교전 장면에선 안쓴다. 전투에 돌입하면 무조건 초반 사격전 이후 칼들고 전투한다. 한국사극 고질병인 날아차기는 여전히 무척 자주 나온다.[46]
임진왜란 관련 사극 중 처음으로 비격진천뢰의 제작원리와 제작과정이 다 나왔다. 이는 26회 경주 전투에서 그 원리에 따라 사용하는 방법을 사극최초로 정확하고도 자세하게 재현해냈다.신기전 사용방법을 정확히 고증해서 재현했다. 26회에서는 신기전 중에서도 대(大)신기전을 사용한다. 대신기전을 사용할 때 '발사대'위에 주화를 연결했다. 대신기전을 발사대에 고정시켜 사용한 것 하며 신기전이 날아가며 사방으로 불꽃이 튀는 모습도 고증에 부합한다.
4.3. 갑옷
드라마 징비록에 나오는 류성룡의 갑옷(찰갑) | 류성룡이 임진왜란 당시 입었던 갑옷(찰갑). 류성룡의 종가에 전해져오는 것이다. 돼지 가죽에 옻칠한 갑찰을 사슴 가죽끈으로 연결한 형태로, 투구는 앞면에 반월형 가림이 있고 네 쪽의 철판을 연결하여 만들었으며 비교적 보존 상태가 좋다. |
류성룡이 임진왜란 때 입었던 찰갑도 풍산류씨 종가의 유물을 바탕으로 최초로 정확히 복원해냈다. 복원한 찰갑은 드라마 상에서 류성룡이 삼도도체찰사및 총책임자로 전국을 누비며 활약할 때 입고 나온다.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한 사극들 중에서는 최초로 고급 무관, 지휘관, 장교들이 착용했던 갑옷이 모두 두정갑과 찰갑으로 제대로 고증되어 나왔다. 종전의 조선왕조 500년,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이순신이 두석린갑을 입고 나왔었다. 하지만 두석린갑은 조선 후기에 등장했고 그나마도 실용성이 없어 전투에서는 착용하지 않았으며 간혹 의장용으로만 쓰인 갑옷이다. 그리고 두정갑 외에도 고급무관들이 입던 찰갑도 맞게 고증해서 작품속에 처음 등장했다. 두정갑과 찰갑에 두르던 허리띠와 투구도 실제와 맞게 재현했다. 불멸의 이순신에서 일부 두정갑이 나오긴 했으나 고증에는 전혀 맞지 않았다. 불멸에서는 두정갑의 허리띠 패용방식과 갑주의 형태가 맞지 않았다. 불멸에서는 마치 두정갑이 장군이나 지휘관이 아닌, 장교들이나 하급군인들만 입는 것으로 잘못되게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개의 종전 조선 관련 사극에서는 드라마 속에서 의장용인 두석린갑만 등장해서, 사람들한테 조선무관이 두석린갑을 착용한다는 고정관념이 오랫동안 잘못 사로잡혀 있었다.[47] 게다가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에 나오는 갑옷들은 고증하고는 아주 거리가 멀다. 중국풍과 허구성이 혼재된 그야말로 국적불명의 갑옷을 입고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존 작품들의 고증오류를 징비록이 최초로 바로잡아 고증한 작품이 되었다.
조선군의 갑주 고증 상태는 아직 미지수. 미리 공개된 몇몇 사진들을 통해서 신립이나 류성룡 등이 입은 찰갑의 모습을 확인해 볼 수 있었으나, 정작 이 부분이 작성된 시점까지는 흔히들 말하는 포졸복을 입은 조선군이 주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더불어 水자가 씌여진 포졸복을 입고 있던 불멸의 이순신의 수군 묘사도 다시 모습을 보이고 있다.[48] 이 포졸복은 방송 초반 예고편에서 뿐만 아니라 드라마 곳곳에 등장하며 아쉬움을 주고 있다. 뭔가 불안하다는 소리도 심심찮게 나오는 편. 하지만 바로 전작인 정도전에서 여말선초 군대의 갑주로 찰갑과 두정갑, 경번갑을 사용하기도 했었고, 미리 공개된 스틸컷에서 포졸복이 아닌 제대로 된 갑주를 어느 정도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회차를 거듭하면서 본격적인 임진왜란이 시작한 13화 부산진 전투나 동래성 전투 장면을 보더라도 성벽 위의 관군의 복장이 장수들을 제외하고 병졸들은 죄다 파란 포졸복에 水를 새긴 복장이나 검은색 포졸복장을 입고 있다. 아마도 제작비 대폭삭감 문제와 명확히 제시된 사료와 유물이 드문관계로 불멸의 이순신에서 사용했던 복장을 재활용하는 듯 하다.
두정갑 | 동래성에서 출토된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의 첨주형 투구와 찰갑의 복원품. |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의 갑옷 착용 비율 등은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 사실 상식적으로 전투시에 갑옷을 착용하지 않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이므로 어떠한 형태로든 갑옷을 착용했을 것이라는 것이 의견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선교사로 온 포르투갈 왕국의 사제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에서도 "(조선의) 병사들은 단단한 가죽 갑옷을 착용하였고, 유럽인의 모자와 같은 철모를 쓰고 있었다. 그것들 중 어떤 것은 강철로 되어 있었고 그 밖에는 무쇠로 되어 있었다. 그들은 터키인의 활과 같은 작은 활을 매우 잘 다루고, 독을 바른 화살을 사용한다고 한다."라고 나와 있다. 또한, 임진왜란 5년 전인 1587년 3월 2일 정해왜변 직후에 경상도 암행어사 이정립이 "병력은 출동 준비를 갖췄고 궁시, 총통도 확보했고 철갑과 철환이 부족하나 현재 만들고 있다"고 보고하는 실록 기사도 있고, 조선 전후기를 통틀어 두정갑 등 갑옷을 대량으로 제작한 기록이 종종 나오니 임진왜란 당시 장수나 군관이 아닌 일반 병사들도 상당수가 갑옷을 입었다고 볼 수 있다. 난중일기 임진년 3월 6일자에서도 "맑았다. 아침을 먹은 뒤 출근해 군 기물을 점검했다. 활, 갑옷, 투구, 통아, 환도가 깨지고 헐은 것이 많고 기준에 미달하는 것들이 매우 많았다. 색리, 궁장, 감고 등을 논죄했다."라는 일기를 볼 때, 각 진영에서 갑옷을 보유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조선군이 전투 중에 갑옷을 입었다는 소리지 그저 창고에 보관만 했겠는가? 다만 그것이 조선군 전원이 갑옷을 입었다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동시대 유럽 군대, 특히 쉴새없이 유럽에서 전투를 치러온 스페인군도 전원이 갑옷으로 중무장하지는 못했다. 또한 프로이스는 조선원정에 직접 참여한 이도 아니다. 갑옷을 보유했다는 기록만으로는 조선군의 갑옷 착용 비율이 어느정도인지 증명해주지는 못한다는 뜻이다. 게다가 수군이 갑옷을 모두 착용했는가에 대해서는 유물과 사료가 명확하거나 상세히 남아았지 않다. 프로이스의 기록은 육군에 관련된 기록이라 무조건 수군에 다 적용하기는 무리다. 육군과 수군은 전투환경과 전투수행방식이 근본적으로 같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정한 수는 갑옷을 입고 있었음은 분명하다.[49] 그러므로 앞으로 더 많은 자료의 발굴과 면밀한 연구가 더 필요하다.
쇼쿠호 일본군의 경우, 과거 한국의 사극에서 묘사되던 일본군과 달리 고증이 충실하게 잘 되어 있다. 이전까지의 사극에서 심심찮게 가마쿠라, 무로마치 막부 시절의 갑옷이 나오던 것과 달리, 나름대로 전국시대 양식의 도세이구소쿠(당세구족)를 표현하려 애 쓴 모습이 보이고, 아시가루들도 과거에는 진가사[50]만 우르르 쓰고 나오던 것이 이제는 가부토(일본식 투구를 지칭하는 말)를 쓰고[51] 중무장한 아시가루들도 종종 등장한다. 종전의 임진왜란 사극은 일본군이 진가사만 쓰는 고증오류가 있었다. 하지만 징비록에서 최초로 일본군이 가부토를 쓰고 나오는 고증을 정확하게 하고 있다. 다만 오히려 일본군은 졸병까지 중갑을 입고 있는 것으로 묘사한 것은 과도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화제가 되는 부분이 바로 가토 기요마사의 갑옷인데 실제 가토 기요마사가 착용했었던 갑옷과 거의 완벽하게 일치한다! 위 사진에서 좌측이 징비록의 가토, 우측이 실제 가토 기요마사의 갑옷이다.[52] 무려 46화가 돼서야 제대로 고증된 투구를 사용한다.
극중 일본의 최고 지휘관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갑옷은 태양광선을 형상화한 투구와 갑옷이 아닌 그의 라이벌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청년 시절에 착용했던 투구와 갑옷이 대신 사용되었다.
16화에서는 포스터에 나온 것과는 다르게 실제 유물로 남아있는 류성룡 찰갑을 기반으로 복원된 가죽 찰갑이 등장했으며 이후에도 계속 류성룡이 이 갑옷을 입는다.
4.4. 일본군의 군기
일본군의 군기에 그려진 가몬의 고증은 불멸의 이순신보다 나아진 모습을 보여준다. 이치전투에서 고바야카와군의 경우 불멸의 이순신에선 모리가의 카몬을 쓰고 있지만, 징비록에선 고바야카와가의 카몬을 사용한다. 또한 경주성 전투에선 후쿠시마가의 카몬이 등장.47화에 등장한 도도 다카토라의 가몬이 담쟁이 잎이 아니라 검은 바탕에 하얀원과 십자가 있는 시마즈 요시히로의 가몬이다.[54]
5. 문화 및 제도
5.1. 외국어 대사
5.1.1. 일본어
극 초반부에는 간단한 대사를 제외하면 일본 측 인물들도 우리말 대사를 연기했다. 영화 명량이나 이전 대하사극 정도전 같은 최근 사극에서 외국어 대사를 최대한 원어로 구사한 것을 생각하면 다소 올드해 보일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원어를 구사하려면 해당 배우들이 단순히 대본에 적혀 있는 독음에만 의지하여 구사할 경우 오히려 어색함이 높아질 수 있으므로 충분한 외국어 지식을 갖추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우리말 대사가 의미 전달과 감정 전달에 적합하다.[55] 1~3화까지는 일본어 등장이 별로 없었으나 4화에서 조선통신사가 도요토미를 접견하는 장면에서 모든 일본 측 배우들이 일본어로 대사를 구사했다. 고니시의 계략으로 통역을 매수하여 조선의 국서 내용을 도요토미에게 통역하는 과정에서 내용을 조작하여 전달하는 과정을 묘사하려는 의도와 국제적인 외교 장면에서 고증을 살리기 위해 해당 장면에서만 일본어 대사를 진행한 것. 만약 종전처럼 한국어를 사용한 상태에서 통역하는 장면을 찍었다면 모양이 더 웃기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 침략 이후 일본 장수들이 죄다 현지화했는지 한국어로 조선인들과 잘만 대화하는 모습들이 나오고 있다.외국어 대사는 아니지만 일본인 간의 호칭 체계에서 공사 간의 정리가 필요하다.. 조선에서도 이름 외에 공적인 자리에서는 관직명, 비교적 사적인 자리에서는 자, 호 등으로 다양하게 사람을 부르는 것처럼 일본에서도 성과 이름 외에도 공적인 자리에서는 관직명으로 부르고 좀 더 사적인 자리에서는 통칭을 부르는 등 호칭이 다양했는데 호칭이 거의 성으로 통일되어 있다. 예컨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자신의 수양아들인 우키타 히데이에를 성인 우키타로만 부르는 것은 어색하다. 그리고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키요마사간에 서로 반말을 하는 장면이 있는데, 일본 사극을 좀 본 사람은 알겠지만 서로 도노를 붙이면서 존대하는 관계여야 한다. 울산성 전투 이전까지는 고니시와 가토는 출신의 차이, 영지를 맞대고 있는것 때문에 껄끄럽기는 해도 무슨 원수관계까진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같은 다이묘 급이면 사적으로 아주 친한 사이가 아니고서는 공적이던 사적이던 상호존대를 했다. 히데요시의 경우도 칠본창이나 오봉행 등 자신의 직계부하까지만 반말을 쓰고, 그외 다이묘들은 모두 존대를 했다.[56]
5.1.2. 중국어
조선통신사와 도요토미의 접견장면을 생각해본다면, 차후 명나라의 원군으로 등장할 이여송 등 명나라 인물과 조선 인물들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명측 인물들도 중국어로 대사를 진행할 가능성이 있었지만 10화에서 나온 것을 보았을 때 한국어로 진행되는 듯. 다만, 이는 사신이 중국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전제로 한국어로 진행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전쟁 발발 후 선조가 조승훈을 만나는 장면에서도 그냥 한국어로 진행된다.5.1.3. 외국 이름 표기
내레이션에서 일본측 인명과 지명의 한글 표기가 90년대 이전 사극처럼 한국 한자음 그대로 읽은 것으로 나온다. 자막에서는 괄호 안에 일본어식 독음 표기가 병기된다. 이는 한국어와 일본어 두 언어권을 다루어야 하는 드라마의 특성을 살리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선 인물들은 한국 한자음으로 일본 인물(풍신수길) 및 지명(대마도)을 지칭하고, 일본 인물끼리는 일본식 독음으로 인물(도요토미 히데요시)과 지명(쓰시마)을 지칭하는 점은 고증에 맞는다고 볼 수 있는 점이다.[57]한국에서 일본의 고유명사를 일본어 발음에 가깝게 표기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니 이렇게 하는 게 맞는 듯 하다. 다만 해설에서 한국어 한자음대로 읽고 자막에 한국 한자음을 우선시해서 표기하는 게 적절한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릴 수 있겠다. 물론 한국어도 일본어도 시대에 따라 계속 변했기 때문에 당대의 발음을 반영한 게 아니라 현대음대로 한 것이다. 하지만 사극에서 고어를 복원하는 경우는 관례상 거의 없으니 문제될 건 없다. 그리고 공영방송 KBS가 외래어 표기법을 제대로 준수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아들의 이름을 츠루마츠라고 부르고 있는데, 외래어 표기법대로라면 쓰루마쓰라고 적어야 한다. 물론 외래어 표기법에 문제가 있다는 의견이 있기는 하지만 어차피 원음을 한국어 발음 체계에서 정확히 재현할 수는 없는데다 표기법의 목적 자체가 발음에 맞게 표기하는 게 아니라 표기를 통일하는 것이므로 외래어 표기법을 준수하는 게 좋았을 것이다.
5.2. 형벌
형벌의 일종인 압슬이 기록에 가깝게 재현되어 있다. 압슬은 죄인을 눕히고 밑에 기와 파편 등의 사금파리를 깐 뒤 다리에 나무토막을 올려놓고 두 사람이 밟는 식으로 이루어지는데, 스쳐지나가는 장면이지만 그 과정을 묘사해놓았다.
5.3. 바둑
11회에 선조와 이산해가 바둑을 두는 장면이 나오는데, 조선시대의 바둑에 대해 알려진 바가 그리 많지는 않지만, 여기서는 완전히 현대의 바둑처럼 묘사했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 기본적으로 한반도에서 바둑은 가로 19줄 세로 19줄로만 국한되어 있지 않았고, 여타의 룰도 광복 후 고립을 피하기 위해 일본의 룰을 수용하면서 현대바둑의 규칙이 확정된 것이다. 조선 시대 바둑형태의 가능성으로 순장바둑을 들 수 있는데 기본적으로 16개의 화점이 있고(현대는 9개) 각 화점마다 대칭적으로 미리 돌을 배치하고 시작하며, 첫 수는 천원에 두는것이 일반적이다. 첫 수를 사방귀에 두는 기보법은 20세기에 보편화된 것이다. 징비록 11화에서는 완전히 빈 바둑판에서 시작하며, 선조와 이산해 모두 양하귀에 각자의 돌을 두었기 때문에 완전히 현대바둑을 기준으로 재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18회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마에다 토시이에가 바둑을 두는 장면이 나오는데 가공되지 않은 자연석을 바둑판 없이 상위에 두고 있다.
종영직전에 류성룡과 이산해와의 독대장면에서 위와 동일한 바둑판이 등장한다.
5.4. 지도
10화에서 조선 침략에 대한 작전회의를 하는 장면과 12화에서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하는 것을 상상하며 조선의 지도를 밟는 장면에서 조선의 지도가 현대 제작된 지도와 비슷하다.
동아시아권에서는 성리학적 세계관에 근거하여 지리적 지식들이 구축되어 왔으며, 보통 중국을 중심에 놓고 주변국들을 배치하되 중국과 가까운 나라일수록 크다고 믿었다. 일본도 이러한 세계관에서 자유롭지 못했으며 조선을 침공하고 나서야 일본 열도가 조선보다 크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설도 있다. 전쟁 이전 일본에서 조선에 대한 지리 정보가 소문으로 퍼졌는데 조선에 사막이 있다는 이야기가 도는 등 조선이 실제 이상으로 크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16화에 히데요시가 마에다와 함께 보던 세계 지도도 말이 많다. 해당 글 요약하자면 대략 200년쯤 후대의 지도를 적절히 편집해서 쓴 것 같다고. 그나마 불멸에서 호주가 그려진 지구본이 나온 것에 비해 호주가 나오지 않은 것은 다행이다. [58]
5.5. 건축
히데요시는 관백에 재임할 시에는 주라쿠다이에 머물고 있었다. 하지만 히데쓰구에게 관백자리를 물려주고 태합이 되자 신축된 후시미 성에 가서 거주하였다. 히데쓰구가 할복한 후 그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주라쿠다이는 해체되었고 카라몬(唐門) 등은 여러 사찰에 증여되었다.
주라쿠다이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는데, 노부나가가 거주했던 아즈치성과 마찬가지로 성내에 천수각과 본청이 있으며 목탑 역시 존재하였다.
히데요시의 거처였던 주라쿠다이
[1] 독립협회가 왜 무너졌는가를 생각해보면 더욱 그렇다.[2] 재미있게도 극중에서 류성룡이 말하는 이러한 주장은 실제 역사에서는 다름아닌 이이의 '경장론'이었고, 이러한 제도개혁 논의는 서인으로 계승되었다. 그 정점에 있는 것이 바로 효종 대 대동법(한당) vs 공안개정(산당) 논의. 오히려 실제 역사에서의 류성룡은 이에 반대하여 상대적으로 심성론과 교화론에 의거한 온건한 개선을 주장하는 쪽이었다. 괜히 류성룡과 이산해가 동인으로 편먹었던 게 아니다.[3] 퇴계집에는 김성일과 우성전의 회고를 인용해 이황이 "나라의 세금이나 부역이 있으면 반드시 남들보다 먼저 바치니, 이에 온 마을 사람들이 앞다투어 세금을 바쳤다"고 되어 있고, 이이가 제정한 해주향약에는 "세금이나 부역에 성실히 응하지 않는 것"을 처벌 대상으로 박아버렸다. 과격할 정도로 자기수양을 강조해 "티끌이 오장에 생긴다면 곧바로 배를 갈라 흐르는 물에 보내리라"고까지 한 조식의 경우에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한지?[4] 유명한 의병장 곽재우는 명문 재지사족인데다 경제적으로도 농업경영에 힘써 막대한 재산을 모은 부호임에도 소과(진사과)에서 낙방하는 바람에 임진왜란 발발 당시 군 복무 20년이 넘는 베테랑이었다. 그나마 곽재우는 재산이 많아서 여비, 식량, 숙소, 말을 전부 자가마련해야 했던 그 시대에 군역을 나가도 별 부담이 없었으나, 그냥저냥 사는 사족들에겐 엄청난 경제적 부담이었다. 이밖에도 미암일기에서 사족이 군역에 차출되는 모습이 보이거나, 이지함이 아산현감 시절에 올린 상소에서 사족이 군역 때문에 생계가 막연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으로 미루어도 선조 당시까지만 해도 사족들이 군역에 정상적으로 동원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 과거에 합격했더라도 아직 직임을 받지 못한 산직자나, 직임에서 물러나게 된 퇴직자는 군역을 지는 것이 원칙이었다![5] 김성우, 『조선중기 국가와 사족』, 역사비평사, 2001, 28~31쪽 참조; 한국역사연구회 조선시기 사회사 연구반, 『조선은 지방을 어떻게 지배했는가』, 아카넷, 2000, 111~112쪽 참조.[6] 『성종실록』 성종 5년 7월 정묘일, 성종 6년 8월 을미일; 『연산군일기』 연산군 4년 2월 갑인일; 『중종실록』 중종 12년 8월 갑자일, 중종 38년 9월 갑자일, 10월 기축일; 『명종실록』 명종 1년 4월 정미일; 『선조실록』 선조 12년 3월 신미일; 『선조수정실록』 선조 11년 11월 무신일.[7] 조선의 세제가 본격적으로 문란해진 조선 후기에도 부패를 주도한 세력은 재지사족이 아니었다. 물론 이들 역시 농민들을 뜯어가기는 마찬가지였으나 최소한 자신들의 지배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농민들의 숨통을 열어줘야 한다는 사실 역시 잘 알고 있었기에 정말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지 않도록 수령을 압박하는 입장이었고, 오히려 수탈에 적극적이었던 건 견제수단이 사라진 수령이었다.[8] 이들은 본래 재지적 기반을 지닌 향리가 아닌 일반 주민 가운데 임명되어 수령의 업무를 위임받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수령에게 위임받는 권한이 커지고 사족의 지방 정착에 따라 향리의 재지적 기반이 약화되면서 점차 수령권에 기생하는 새로운 향리의 개념으로 전화되어 갔다. 그리고 이들의 권한이 증대됨에 따라서 자연 이들의 중간 부정도 증가하게 되었다.[9]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24: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탐구당, 2003; 이경식, 『한국 중세 토지제도사: 조선전기』, 서울대학교출판부, 2006; 임용한,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 혜안, 2002; 손병규, 『조선왕조 재정시스템의 재발견』, 역사비평사, 2008 참조.[10] 김종수, 『조선후기 중앙군제연구』, 혜안, 2003 참조.[11] 임진년 6월 해정창 전투에서 함경도 기병들이 개인전술로 가토군 선봉대를 압도한 데서 보이듯 여진족과 부대끼며 성장한 조선 기병의 전투력은 일본군 상대로도 충분히 유효했다. 문제는 이들을 지휘한 지휘관들이었다. 전술한 해정창 전투만해도 조선 기병에 밀려 곡물창고에 농성하는 일본군을 본 북병사 한극함이 궁기병을 건물에 그대로 돌격시키는 돌아이짓을 해서 말아먹었다.[12] 이에 대한 대책으로 조선 정부가 세운 대책은 승자총통의 보급이었다. 그러나 주지하듯 임진왜란에서 승자총통은 조총의 상대가 안 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래서 임진왜란 이후 조선군은 조총병 위주의 개인전술로 전환되지만, 사르후 전투, 병자호란에서 청군에게 참패하여 불균형한 병과 편성의 허점이 여실히 드러나고 만다. 따라서 인조 대에는 이를 보완하기 위해 조총 위주의 보병대, 장창과 당파 위주의 보병대, 편곤 위주의 기병대가 결합된 집단전술을 구상한다. 노영구, 「인조 초~병자호란 시기 조선의 전술 전개」, 『한국사학보』 제41집, 2010 참조.[13] 당시 조선은 서양에서 사용한 근대식 포가가 없다보니 야전에서 화포를 대규모로 운용하기가 힘들었다. 야전에서 화포 사용기록이라면 기껏해야 대완구로 비격진천뢰를 사용한 정도. 그 외에는 거점 방어전과 해전에서만 운용되었다.[14] 당장 1580년에 발포 만호로 재직하던 이순신은 전라감사 손식에게 진법을 시험받고, 전라좌수사 이용에게는 결원 3명 나온 걸 빌미로 처벌당할 뻔했다. 행록에는 이 사건이 두 사람의 개인적인 악의 때문이었다고 되어 있지만, 이때 전라좌수영 휘하의 5포(사도·여도·녹도·방답·발포)가 죄다 결원으로 징계처분을 먹었던 것으로 보아 전라좌수영 전체에 걸쳐 대대적인 군기 검열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15] "내가 평일에 관직을 역임하면서 문관으로 오래 있었고 무관을 지낸 일은 극히 짧았다. 후에 판서가 되어서는 겨우 1개월 있다가 전임되었다. 그때에 팔도의 군안을 작성하였는데, 중앙 및 지방의 각종 군액이 모두 35만여 명이었다. 난리 뒤에 모든 서적이 산실되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으나, 이 군안이 우연히 남아 있었다. 거기에 이른바 현재 있다는 것은 바로 난리 후의 액수다. 지금 6~7년 동안 소모하여 이렇게 되었다. 그러나 진실로 그 요령을 얻으면 적은 것은 걱정할 일이 아니나, 그것을 도모하지 않으니 그 또한 어찌할 수 없을 뿐이다." - <서애집> 제18권 팔도군안(八道軍案) 뒤에 씀[16] 참고로 <지봉유설> 3권 병정부 병제에서는 "우리나라는 평상시 안팎의 군액이 18만이고, 호보(戶保)를 통산하면 무려 50만이다. 그런데 왜란을 겪은 뒤로는 현존 병력이 겨우 6만이다"라고 전하고 있다. 실제로 임진왜란 개전 1년 후 조선의 정규군 숫자가 17만으로 조사되는데, <지봉유설>의 기사는 이에 기초하였을 가능성이 있으나 정확한 관계는 불명확하다.[17] 드라마에서 이것도 류성룡의 업적으로 몰아주는데, 당시 신무기의 개발을 고작 한 달 정도만 병조판서를 맡았던 류성룡의 업적이라는 것도 말이 안 된다.[18] 전쟁 준비를 하려고 사족들까지 징집해서 사족들의 반발이 컷다.[19] 사실 이는 재정이 좋지 못한데 무리수를 두면서 전쟁 준비를 했기에 이로 한 민중들의 고통이 커서 반발하고 불만이 폭발해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20] 특히 이순신의 유년 시절, 젊은 날에 대한 서술은 양과 질 모두 독보적이다. 이전 대하드라마 정도전에서 비중있게 다룬 정도전과 정몽주의 우정은 실제론 없으며 작가의 창작이 대폭 가미된 것이지만 이쪽은 실제로 죽마고우다.[21] 드라마에서 다루는 기간이 기축옥사에서 유성룡의 죽음까지이고 주된 장소를 궁이나 조정 주변으로만 제한할 경우 이순신이 실제로 등장하지 않아도 극의 진행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 그 기간동안 이순신이 조정에 들어온 것은 원균의 모함으로 인해 국문을 받은 짧은 기간 뿐이다. 문제는 이렇게 하면 극의 완성도를 담보하기 힘들다. 징비록에서 개인으로 가장 비중이 큰 인물이 이순신이고 임진-정유재란 진행과정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어마어마하다. 애초에 이 드라마가 노량해전까지 다룬다고 했으니...[22] 유성룡이 조선군의 판을 짜는 쪽으로 기여했다면, 이순신은 왜군의 판을 엎는(...) 쪽으로 기여한 바가 크다.[23] 본격적으로 육상에서 나오지 않는 일본군에게 빡치기 시작한 웅포 해전이나 윤두수가 숟가락을 얹은 장문포 해전 등만 제외하면 정말 하나하나가 전설이며 전략적으로도 판을 바꾼 것들이다. 옥포 해전은 첫 해전 승전. 당포 해전은 첫 거북선 실전 배치. 부산포 해전은 유유히 적의 제해권을 통과하여 빈집털이. 순천-왜교성 전투는 최초의 조명 연합 수군 작전... 한산도 대첩, 명량 해전, 노량 해전은 설명이 더 필요한지?[24] 두 사람이 친분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전쟁 중 군을 총괄해야 하는 도제찰사와 야전 사령관인 삼도수군통제사가 그 먼길을 왕래해 만날 만큼 전황이 여유로운 게 아니니까(...)[25] 예를 들어 류성룡 띄우기에 희생양이 된다거나(...)[26] 여담으로 묘하게 징비록에서 묘사하는 조선의 모습은 제도의 폐단으로 고생하는 18세기 중엽의 조선의 모습과 유사하다.(...) 그리고 10년 전 불멸의 이순신에서도 조선 여인들이 18세기 중엽의 짧은 저고리를 입고 나오는 장면이 많았지만 징비록과 달리 긴 저고리를 입는 장면도 나오긴 했다.[27] 잘모르겠다면 대왕세종에서 원경왕후를 포함한 궁중 여인들의 복식을 생각하면된다.[28] 첩지는 영조, 정조때 시행된 가체 금지령 이후 순조 때부터 돈 드럽게 많이 드는 가체를 대신한 쪽머리와 함께 장려된 것이다.[29] 그나마 삼국시대에 인도를 방문한 신라 사신 그림 중 장발 모습을 한 그림이 있긴 하다.[30] 명나라 황제들의 어진이나 장거정, 이여송 등의 문서 내 초상화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조선의 용포와 관복이 명나라를 따른 것이므로 조선과 크게 다를 것도 없다.[31] 용포에 붙어있는 보의 모양이 다른데 여의명비전 시기를 살았던 정통제와 경태제의 어진을 보면 정통제는 보의 용이 옆을 보고 있고 경태제는 앞을 보고 있다. 이후 홍치제까지 용이 정면을 보다가 정덕제 시기 용의 머리방향이 점점 옆으로 향하고 만력제쯤 되면 용머리 크기도 작아진다. 두 드라마에 나온 보의 모양이 다르다고 한쪽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시기상에 따른 디자인 차이다.[32] 황제는 12개 왕은 9개의 상징문양을 가지고 있다.[33] 기년법상 서기 1501년부터 서기 1600년까지가 16세기, 서기 1600년부터 서기 1700년까지가 17세기인데, 임진왜란이 서기 1592년부터 서기 1598년까지 일어났으니 16세기의 끝 겸 17세기의 시작때라고 할 수 있다.[34] MBC의 주몽에 나온 금와왕도 비슷한 겉포를 입고 있다. 한국의 사극 중에 기원전부터 서기 7세기(서기700년)까지의 고대 시대를 다룬 사극들에서 복식이나 갑옷들을 보면 거의 고대 중국풍의 용포와 관복들을 모방한 패션으로 창작해낸 옷들이다.[35] 우리가 알고 있는 오비의 큰 리본형 매듭은 에도 중기 가부키의 온나가타(여자역)들이 배역의 여성성을 어필하기 위해 아이디어를 낸 것을 서민들을 포함한 막부 내의 시녀들까지 모방한 것이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다. 참고로 작중의 배경인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는 가부키라는 것이 아직 없었다.[36] 한선수요가 없어 마늘행상이 된 한국 전통선박 기술자를 몇 번이고 직접 찾아가 증언을 수집하고 현장에 극소수 남은 자료들을 다 모으는 일을 직접 발로 뛰어가며 한 한선 연구의 대표적 인물이다. 우리가 인터넷에서 쉽게 찾는 한선 관련 자료들도 이분이 안 계셨다면 지금의 반도 안 남았을 것.[37] 불멸에서 난 조총 소리가 핑야핑야(...)하는 소리라면, 징비록에서는 땅따따땅하는 소리가 난다.[38] 불멸의 이순신 때 엑스트라 배우로 참여한 혹자의 증언에 따르면 소품과 배우의 문제가 크다. 옛날 리볼버 화약총 식으로 만들어졌는지 방아쇠를 당기는대로 화약이 터진다고 한다. 제작진 측에서는 가급적이면 그런 식으로 쓰지 말라고 하지만 막상 전투씬을 찍다보면 배우들이 군대에서 K-2들고 각개전투 하던 시절 가락이 떠올려 빵빵 쏴대는데 통제가 힘들다고.전근대 시절 전쟁터에서도 사격 통제가 제일 힘들었다는 고증을 재현했나보다[39] 거치대를 안 써도 된다는거지 쓸 수 있으면 쓸 정도의 무게 부담이 있었다.[40] 일본도에서 코등이역할을 하는 부속품을 조선식 환도에선 방패라고 부른다.[41] 반면 일본도 가검은 10만원 선부터 시작한다.[42] 당시 일본군의 조총 무장비율은 16%, 명나라군은 21%라고 한다. 오히려 명나라 군대의 조총 무장 비율이 더욱 높다.[43] 수정 전에는 등패라고 되어 있었으나, 등패는 나중에 들어온 것이라 시대에 맞지 않고 생김새도 일반 원방패와는 다르다.[44] 실제 일본 무사의 부무장인 와키자시(脇差し)를 구글에 검색해보면 이와 비슷한 모습의 사진들이 많이 보인다.[45] 가장 눈에 띄는 점이라면, 날이 슴베식이 아니라 투겁식으로 끼워져 있다는 점. 투겁식으로 날이 장착된 창은 '호코'라 불리는, 상술된 나가에야리보다 더 짧고 더 이전 시대에 주로 사용되었던 무기이다. 당대 일본에서 사용되었던 야리는 창날의 장착이 슴베식으로 되어있는 경우가 대다수였다.[46] 아예 안 쓰는 것은 아니다. 이치 전투에서 고경명이 전사하는 장면과 16화에서 이천리가 왜군을 따돌리는 장면 등에서 왜군이 장창을 사용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다만 대규모 전투 씬에서는 상대적으로 긴 창을 휘두르면서 연출하기에는 안전상 촬영장소가 좁은 이유로 자주 쓰이지 않는 것 같다.[47] 과거의 일본 사극에서 전국시대 사무라이들이 이전 시대인 헤이안 시대 후기의 갑옷인 오오요로이를 입는 고증오류가 자주 나왔던 것과는 정반대다. 오오요로이가 다시 일본의 주류 갑옷이 된 건 에도 시대 중기 이후의 일이었으며 그나마도 의장용이 된 채 실전용 갑옷 역할은 사실상 못하게 된 상태였다.[48] 심지어 실제 포졸복은 저고리 위에 포 종류(보통 철릭)를 입고 전복을 입는 형태였는데 드라마에서는 저고리 바로 위에 전복만 걸치니 이상하게 보인다.[49] 근대 이전 국가의 군대는 입대할 때 무장을 사비로 마련했다. 이는 서양의 민주주의가 무장 가능한 유산시민위주로 흘러가게 한 원인이며 기사계급도 땅을 주고 갑옷과 말을 마련하게 한 데서 유래되었다. 조선 또한 마찬가지라서 입대할때 갑옷과 무기를 사비로 마련했으며 형편이 어려우면 갑옷을 못 입은 병사 또한 많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세조대의 여진 정벌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조선에서 갑옷은 무조건 자비 충당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국가에서 상당량을 제작해서 병사들에게 지급한 사례들이 발견되기 때문이다.[50] 불멸의 이순신 등에서 자주 보이던, 임진왜란 당시 왜군 잡졸 하면 딱 떠오르는 그 검은색 삿갓모양의 투구를 지칭하는 말이다.[51] 다만, 전국시대에 크게 유행했던 즈나리카부토(頭形兜)라기보다는 그 이전 시대의 스지카부토(筋兜)에 더 가까운 모습의 가부토가 등장한다.[52] 그러나 지금까지 공개된 촬영장 사진에 따르면 저 갑옷은 나중에 사용될 것으로 추정된다. 가토가 새로 착용하고 나온 갑옷은 저 고깔투구 갑옷과는 상당히 판이한 뿔투구 갑옷. 사진 링크[53] MBC의 화정 또한 명나라 일반병사의 복장이 불멸의 이순신 및 징비록과 동일하다.[54] 근데 50회에서 시마즈가 언급된 것으로 보아 시마즈 요시히로 휘하 수군이 도도 다카토라, 와키자카 야스하루와 함께 조선으로 오는 것을 표현했다고도 볼 수 있다. 나오지는 않았지만...[55] 그리고 정도전은 명나라나 일본인 배역은 소수에다가 잠시만 등장하였고, 명량은 영화라 제작기간의 여유로 일본어를 사용할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일본어 가능자에게는 어색하다는 지적을 받았다는 걸 감안해야 한다.[56] 마에다 도시이에처럼 이전부터 친구인 사람은 공적인 자리에서는 존대, 사적인 자리에서는 반말을 썼을것이다. 물론 도시이에 쪽에서는 존대.[57] 다만 7회 결말부에서 실수가 있었는데, 선조는 "왜변이 일어나면 세종대왕 때 쓰시마를 친 것처럼...."라고 말한다. 방송 후 실수를 깨닫고 급히 재촬영했는지 8회 시작부에 이 장면이 반복될 때는 대마도로 정정되었다.[58] 참고로 극중 지도에서 보이는 남극처럼 보이는 대륙은 남극이 아닌 옛 서양인들이 상상한 미지의 남방대륙을 묘사한 것이다. 남극은 호주 다음으로 발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