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2. 프로 입단 전
2.1. 킨테츠 버팔로즈 시절2.2. 라쿠텐 골든이글스 시절
3. 연도별 성적2.2.1. 2005 ~ 2007: 약체팀의 에이스, 그러나 커리어의 위기2.2.2. 2008: 이와쿠마의 최전성기2.2.3. 2009 ~ 2010 : 리그 정상권 기량을 유지2.2.4. 실패로 끝난 포스팅 이적 시도2.2.5. 2011: NPB에서의 마지막 전성기
2.3. 메이저 리그 포스팅2.4. 시애틀 매리너스 시절2.5. 일본 복귀2.6. 은퇴2.7. 국가대표 경력1. 개요
이와쿠마 히사시의 선수 경력을 담은 문서.2. 프로 입단 전
도쿄도 히가시야마토시 출신으로 1981년 4월 12일에 태어난 이와쿠마는 어린 시절 TV에서 프로야구 중계를 보며 프로야구 선수에 대해 동경하게 되었다고 한다.[1] 이를 계기로,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야구를 시작하였고 중학교 때부터 본격적으로 투수로서의 길[2]을 걷고 호리코시 고등학교 [3] 에 진학한 후 3학년 때 하계 대회인 니시도쿄 대회에서 좋은 활약[4]을 보였다. 다만, 고시엔에 진출하지는 못해[5]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리지는 못했다. 그래도 상술한 하계 대회에서의 활약 덕에 전국구 선수가 아니었지만, 프로 스카우트들의 눈길을 끌 수 있었다고 한다.2.1. 킨테츠 버팔로즈 시절
특유의 이중키킹 투구폼을 볼 수 있는 2004년의 투구 영상. 후술하듯 규정 변화로 투구폼을 교정하면서 지금은 볼 수 없게 되었다. 이중 키킹도 그렇지만 더 특이한 것은 투구 시작과 동시에 오른팔을 몸에 바짝 붙여서 디셉션을 시도하는 것. 참고로, 영상속 경기는 2004년 3월 27일 개막전이었고, 교세라돔에서 펼쳐진 경기였다. 당일 경기에서 이와쿠마가 1회 1실점 포함 7이닝 2실점 호투를 펼쳤고 팀도 6-2 스코어로 승리를 한 덕에 개막전 승리투수가 되었다.
2.1.1. 2000 ~ 2001: 태동기
처음 프로야구를 시작한 구단은 지금은 합병되고 없는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6]. 1999년에 드래프트 5위로 지명되어 입단 이후인 2000년에는 2군 웨스턴 리그 경기와 교육리그를 오가며 착실히 기본기를 쌓으면서[7] 2001년부터 처음으로 1군 경기에 등판해 2002년에 본격적으로 개화하기 시작했다.이와쿠마의 프로 첫 데뷔 경기는 2001년 5월 29일 니혼햄 파이터스전이었고, 당시 경기 8회말에 1점차로 킨테츠가 리드하고 있는 상황에서 데뷔 첫 등판했다. 참고로, 이 구원 등판이 이와쿠마의 11년 간의 NPB 커리어에서 유일한 구원 등판이다. MLB까지 따진다면, MLB 데뷔 시즌 14번의 구원 등판이 있었기에 2001년의 이 경기 이후 11년 뒤인 2012년 전까지 11년 동안 구원 등판은 없었던 셈. 팀이 12-11로 앞선 8회말 1사 상황에 등판해 8회는 무실점으로 잘 마쳤다. 다시 등판한 9회말에는 오가사와라 미치히로에게 솔로 홈런을 허용하면서 12-12 스코어의 동점을 내주고 말았다. 그런데, 연장 10회초에 나카무라 노리히로가 그 날 3개째의 홈런이 되는 만루 홈런을 치는 등 킨테츠의 타선이 5점을 폭발시키며 킨테츠가 17-12로 승리한 덕에 이와쿠마는 데뷔 첫 승리를 거두었다. 당일 기록은 1.2이닝 동안 2피안타 3탈삼진 1실점.
그의 첫 선발 등판은 2001년 6월 10일 니혼햄전이었으며 3이닝 동안 6피안타 5실점으로 난타당해 첫 선발 등판에서 패전을 기록했다. 이후, 이 부진 때문에 1군에서 엔트리 말소되는 등 중용받지 못하다가 8월 19일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전에서 간만에 선발 등판 기회를 잡았다. 이 날은 6이닝 2피안타 4탈삼진 1실점으로 호투하며 시즌 2승 째를 올렸다. 더불어 이 선발 승은 그의 프로 커리어 첫 선발승이기도 했다. 8월 26일 니혼햄 전에도 선발 등판하여 7.1이닝 8피안타 4탈삼진 2실점 호투하며 선발승을 챙겨 6월 10일 니혼햄전에서 난타당해 패전 투수가 되었던 설욕을 갚았다. 9월 2일 니혼햄 전에 연이어 선발 등판 하였지만, 이날은 4이닝 8피안타 7실점(2자책)으로 난타 당해 조기 강판되는 설움을 겪었다.
2001년 정규 시즌 최종 성적은 완봉 1개를 포함한 9경기 8선발 등판 4승 2패 43과 3분의 2이닝 동안 25탈삼진 평균자책점 4.53을 기록하였다. 전반적으로, 좋은 성적은 아니었지만 신인이 1회 완봉승을 거두는 등 1군에서 통할만한 잠재력을 지녔다는 것을 증명한 시즌이기도 했다. 다만, 이때까지는 위기 상황에서 제구가 흔들리며 난타를 당해 급격히 무너지는 등 아직까지 프로 초년병 티가 물씬 풍기는 피칭을 선보였다.
팀이 시즌 1위로 마친 덕에, 그 해 2001년 일본시리즈 2차전에 선발 등판[13]하였지만 2.1이닝 3실점으로 초반에 무너지면서 패전 투수가 될 뻔했다. 그런데, 나카무라 노리히로가 다시 홈런을 터트리는 등
여담으로, 이와쿠마는 2017년 종료 시점에서 킨테츠의 마지막 리그 우승과 일본시리즈 진출인 2001년 시즌을 경험한 현역 유일의 선수이다. 물론, 이와쿠마까지 은퇴한 2022년 현재는 모든 선수가 일본 프로야구에서 은퇴.[14]
2.1.2. 2002 ~ 2003 : 개화
다음 해인 2002년 부터는 기량이 완전히 개화하였다. 이때 부터, 본격적으로 선발 로테이션에 꾸준히 합류하였다. 다만, 2002년에는 완전히 풀 시즌을 소화한 2005년, 2008년, 2010년과 한 번의 로테이션을 거르고 나머지 경기를 모두 출장한 2003년과는 달리, 부진과 부상 등의 이유로 풀 시즌을 소화하지는 못했다.2002 시즌 첫 등판은 4월 20일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전이었다. 3.1이닝 6피안타 5실점(4자책)으로 부진한 모습을 보이며 시즌 첫 등판부터 패전이 되었다. 곧이어 바로 다음 등판인, 4월 28일 롯데 전에서는 7이닝 6피안타 8탈삼진 1실점(무자책) 호투하며 시즌 첫 승을 따냈다. [15]
로테이션을 두번 거르고 다시 복귀한 7월 23일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전에 다시 등판해 5이닝 2실점으로 최고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무난한 피칭을 선보였고, 팀 타자들이 4회와 6회 각 2점씩 득점하여 4-2스코어로 팀이 이긴 덕에 승리 투수가 될 수 있었다. 이후, 7월 말부터 9월 초까지는 타자들의 호조 덕에 패전을 면해 ND을 기록하는 등[19] 패전도 없었지만, 잘 던지고도 ND이 되기도 하여 한 번[20]을 제외하고는 승리와 인연이 있지도 않았다.
그러다 9월 13일 부터 시즌 최종전이 열린 10월 13일 까지는 1승[21] 3패[22]의 성적으로 부진했다. 특히 9월 초부터 시즌 마지막 경기 직전 네 경기동안 (7이닝 1실점 - 8이닝 5실점 - 9이닝 1실점 - 5이닝 6실점)으로 퐁당퐁당의 전형을 보여주며 시즌 막판을 다이내믹하게 마무리 했다. 특히, 10월 8일 롯데 전에서 2회까지 홈런 2방을 맞고 총 5실점으로 1.2이닝만 소화한 채 조기 강판 했지만, 곧바로 다음 경기인 10월 13일 오릭스전[23]에서는 7이닝 2실점으로 언제그랬냐는듯이 또 잘던졌던 것이 전형적인 기복 많은 투수의 모습이었다.
전반적으로 이해에 어린 투수치고는 잘 던져줘 킨테츠의 희망이 되었으나 그렇다고 이 해부터 당장 리그 최고 선발투수 급 성적을 낸건 아니었다. 부상과 부진 및 기복 등 부침이 없던건 아니었지만, 로테이션에 본격적으로 합류해 꾸준히 등판하여 20경기 이상 선발 등판했다는 데에 의의가 있던 시즌이었다. 2002년 최종 성적은 23경기 8승 7패 141.1이닝 동안 131탈삼진 ERA 3.69라는 전년도보다 뛰어난 성적을 기록했다. 2002년 정규 시즌 후인 12월에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결혼을 했다.
2003년에는 본격적으로 팀내 에이스 투수로 발돋움한 원년[24]인데, 2004년 리그 개막 이후 12연승 때문에 살짝 묻힌 감이 있지만 이 해에도 초반에 엄청난 페이스를 보여주며 승을 쌓았다.
특히, 개막 이후 5연승[25]을 기록했으며 특히 그 5승 중 3승이 모두 9이닝 2실점 이하의 완투승들이었다. 이를 포함해 3월 개막부터 5월 말 시즌 첫 10경기 까지는 총 8승 1패[26]를 기록하였고 다승왕 페이스로 승을 쌓았다. 특히 이 8승 중 무려 6승이 완투승이었고, 초반기 모습만 보면 당시 리그 최고의 선발 투수였던 마쓰자카 다이스케, 우에하라 고지 이상 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특히, 4월 19일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전에서 당해년도 엄청난 모습을 보여주던 상대 선발 사이토 가즈미[27]를 9이닝 1실점 완투로 눌러 승리 투수가 된 것은 압권이었으며 분명 초반기까지는 양대리그를 통틀어 이와쿠마 이상가는 선발 투수를 꼽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6월부터는 다시 1-0스코어 10이닝 1실점 완투패[28], 2-1스코어 8이닝 2실점 완투패[29] 등 잘 던지고도 패전이 되기도 했고, 이 때문에 심리적으로 흔들렸던지 결국 다시 전년도 만큼 성적이 무너지고 만다.[30] 이후, 9이닝 1실점 완투승 2번[31] 등 번뜩이는 모습을 가끔 보여주었지만[32] 중후반기에는 초반기만큼 성적이 회복되지 못하고 결국 시즌을 초반만 못한 성적으로 마감하고 만다.
특히, 8월 중순부터 9월 초까지 퐁당퐁당같은 기복이 있는 모습[33]과 더불어 9월 5일 엄청난 부진[34] 때문에 다음 등판인 17일 까지 10여일 간은 한 차례 로테이션에서 제외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정작, 문책성 로테이션 제외 이후 다시 복귀한 9월 17일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전에서 2이닝 6실점(4자책)으로 조기강판 되며 패전이 되었고, 그 다음 경기인 9월 23일 롯데전에서 5.1이닝 5실점으로 패전이 되며 여전히 나아지지 않은듯한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그래도, 시즌 마지막 경기인 9월 30일 니혼햄전 8이닝 1실점 좋은 투구 내용으로 승리 투수가 되며 마지막만큼은 초반기 모습을 재현한채 좋게 끝냈다.
결론적으로, 이 해에는 로테이션을 한 번 빼고는 모두 돌았으며 그 한 번이 부진으로 인해 등판하지 못한 것이라는 점이 아쉽기는 했으나 전반적인 성적이나 등판 횟수, 소화한 이닝 수 면에서 전년도보다 약진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 시즌 초반만큼은 당시 리그 최상급 선발 투수들이었던 마쓰자카, 우에하라, 사이토 가즈미 저리 가라 수준의 성적을 보여주었지만, 그 모습이 시즌 끝까지 유지되지 못했다는 점과 후반 퐁당퐁당에 가까운 기복이 아직은 이와쿠마가 프로 초년병 티를 다 벗지 못했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 시켜주었다.
참고로, 이 2003년의 퍼시픽리그는 2004년의 퍼시픽리그와 더불어 NPB에서 전무후무할 정도의 기록적인 타고투저 해였다!
또한, 2003년 퍼시픽리그의 리그 평균 타율은 0.276으로 NPB 전체 역사 속 전체 2위인 시즌이었으며 OPS도 0.79로 NPB 전체 역사 속 전체 3위를 기록하기도 한 시즌이다. 그리고 이 해 퍼시픽리그에서 터진 리그 전체 홈런 갯수가 정확히 1000개로 홈런 갯수만으로도 전체 7위에 랭크된 시즌이다. 애초에 NPB의 80여년간의 긴 역사 동안 양대리그를 통틀어 한 시즌 홈런 갯수가 1000개를 넘긴 시즌이 7시즌 밖에 안된다. 참고로 2003년 타점 갯수는 리그 전체 4040 타점으로 NPB 전체 역사 속 전체 3위를 기록한 시즌이기도 했다.
이렇게 2003년과 2004년 리그가 기록적인 타신투병의 해가 된 것의 정확한 이유는 불분명하지만, 오랜 NPB 팬들 사이에서는 당시 '래빗 볼'을 사용한 것이 주된 이유로 꼽히며 현재까지도 정설로 알려져있다. '래빗 볼'은 2001년 퍼시픽리그에 도입된 공인구로 이 시기 갑작스런 NPB리그의 타고투저 도래에 가장 큰 원인으로 여겨진다. 사족으로, 터피 로즈의 55홈런에 자극 받았는지, 2002년 부터는 센트럴 리그도 래빗 볼을 공인구로 도입하며 결과적으로 래빗 볼은 2002년 부터 양대 리그 모두에 도입되었다. 2003년부터 2004년 까지 말도 안되는 타고투저가 도래해 투수들이 죽쓰는 현상이 지속되는 것을 우려했던지 2004년 시즌 후 요미우리, 야쿠르트, 히로시마, 지바 롯데의 4개 구단이 래빗볼 사용 중단을 선언. 2005년 시즌 초반에도 4개구단이 합세해 총 8개 구단이 합의하여 래빗볼 사용을 중단하였다. 즉, 총 12개 구단 중 4개 구단을 제외하고는 모두 래빗볼 사용을 중단한 시기가 2005년 시즌. 이 덕에 2005년 부터는 사정이 조금 나아져, 2점대 초반의 평자책을 기록한 퍼시픽리그 투수들이 다시 등장했다. (추가로, 2005년 부터는 교류전이 생겼고 당시 교류전은 36경기(상대 6팀과 홈/원정 3연전 각 1회씩)씩이나 되었기 때문에 교류전 일정이 상당히 길었다. 이 덕에 전 구단이 래빗볼을 사용하지 않던 센트럴 리그와 길게 만나게 되며 퍼시픽리그 투수들이 더 좋은 성적을 거두는데 일조했다.) [37] 보통 '래빗 볼 시대'를 이야기하면 2001년 부터 2005년까지를 지칭하며, 특히 2003년과 2004년의 퍼시픽리그는 래빗 볼 시대에서 타자들의 타격 지표가 정점이었던 해로 종종 거론된다. 상술된 기록들만 봐도 엄청나게 심각한 때였다는 것을 알 수 있듯, 지금도 일본내에서는 당시의 '래빗 볼 시대'는 인구에 회자된다.
그리고 투고타저로 접어든 2011년 다르빗슈 유나 다나카 마사히로로부터 2021년도의 야마모토 요시노부까지 1점대 평자책 기록한 선발 투수들을 지금은 심심치않게 볼 수 있지만, 당시 2003년 규정이닝을 채운 퍼시픽리그 선발 투수 중 평균 자책점 1위는 ERA 2.83의 사이토 가즈미와 마쓰자카 다이스케였다. 즉, 1점대는 커녕 2점대 후반 평자책을 기록한 선발 투수조차 손에 꼽을 정도였다는 소리다. 곧이어 3위가 ERA 3.13의 시미즈 나오유키였고, 이와쿠마의 ERA 3.45는 퍼시픽리그 전체 6위에 달하는 호성적이었다.[38] 이처럼 3점대에 가까운 자책점이 1위일 정도니 3점대까지는 호성적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의 타고투저의 시대였으며, 그런고로 당시 이와쿠마의 성적을 지금 관점으로 평가절하할 정도는 절대 아니다. 애초에 리그 평자책이 4점대 후반인데다가, 퍼시픽리그 한 경기 평균 득점이 5점 초반대인데 여기서 ERA 3점대 중반을 찍은 선발 투수를 지금 관점으로 '평균에 가까운 투수'라고 폄하한다면 야알못 소리 듣기 딱 좋다. 어쨌든, 리그 초반기에는 타고투저고 뭐고 개인 능력으로 다 뚫어내며 미친 성적을 기록했을 정도니 이와쿠마의 재능이 2008년부터 꽃 피웠다는 항간의 인식과는 달리 프로 초년병 시절부터 이와쿠마는 이미 최고의 재능을 지닌 투수였음을 당시 리그환경을 고려한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2003년 최종 성적은 27경기 등판 15승 10패 195.2 이닝 동안 149 탈삼진 ERA 3.45의 성적을 남겼으며 11완투로 리그 최다 완투를 기록하기도 했다. 팀 내 유일한 15승 투수가 되어 젊지만, 에이스 투수로 발돋움한 원년이 되었다. 이 덕에, 2004년에는 커리어 최초로 개막전 선발 투수가 되기도 했다.
2.1.3. 2004 : 1차 전성기 후 곧바로 닥친 위기
2004년부터는 완전히 궤도에 올라 전년도 보다 더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며 팀의 에이스로 완전히 자리매김했다. 특히, 2002년과 2003년에는 차지하지 못한 개막전 선발투수를 커리어 최초로 맡게 되었다. 개막전이었던 니혼햄전에서는 7이닝 2실점 승리하며 팀 시즌 첫 승과 동시에 본인의 커리어 첫 개막승을 따냈다.이후 4월 2일 오릭스전 7이닝 7실점(6자책) 승리[39]와 4월 10일 세이부전 8이닝 2실점 승리 투수가 되는 등 2003년 초반기 처럼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고, 완봉승을 한 4월 18일 경기[40]를 기점으로 그 동안 모아온 원기옥을 제대로 터트려 버렸다!
이후, 개막 12연승[41][42]을 포함해 엄청난 페이스로 승리를 쌓았고 덕분에 팀 당 2명이 차출된 아테네 올림픽 대표로 출전[43]해 동메달을 목에 걸고 돌아왔다.
특히, 개막 12연승을 하는 동안 9이닝 완투승 5번[44]에 한 번의 완봉[45]까지 곁들여 2003년 초반기 보다 더 한 페이스를 보여주었다. 심지어 12연승 기간 동안 있었던 ND을 기록한 세 번의 경기 모두 9이닝 3실점 ND 2번[46]에 9이닝 무실점 ND[47] 한 번으로 본인이 잘 던져놓고도 승운이 따라주지 않아 승리를 놓친 경기였다.
게다가, 4월 18일 부터 5월 22일까지는 한 번의 완봉 포함 6경기 연속 완투였고 범위를 넓혀 6월 5일까지는 8경기 연속으로 9이닝을 소화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 다음인 6월 12일 부터는 이전처럼 완투를 하지는 못했으나, 올스타 브레이크가 있던 7월 중순 이전 마지막 등판인 7월 6일 까지는 네 경기 3승 0패 1ND[48]으로 계속해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며 착실하게 승을 쌓았다.
올스타 브레이크 이후 7월 20일 롯데전 9이닝 6실점 완투패 [49]하며 비로소 7월 말에 다다라서야 시즌 첫 패를 기록하게 되었다. 이후 쉼없이 달려온 이와쿠마[50]에게 팀은 체력 안배 차원에서 휴식을 주고 이와쿠마는 한 차례 로테이션에서 제외되어 휴식을 취한다. 이후, 한 번의 로테이션을 거른 뒤 바로 돌아온 8월 3일 니혼햄전 8이닝 2실점 좋은 투구 내용으로 승리 투수가 되며 올림픽 출전 직전에 13승 1패 138.2이닝 동안 111탈삼진 ERA 2.34이라는 좋은 성적으로 올림픽에 나갈 수 있었다.
8월 한달 간 올림픽에 갔다오느라, 자리를 비운 이와쿠마는 9월 네 차례 등판하여 시즌을 마무리 짓는다. 올림픽에 있었던 한달 동안 고작 1.2 이닝을 소화해 체력이 넘쳤던 이와쿠마는 9월 1일 복귀전인 오릭스전에서 팔팔한 모습으로 호투하였고 9이닝 3실점 완투승을 하며 시즌 14승째를 올렸다.
그런데, 그 다음 경기 9월 8일 세이부전에서는 7이닝 5실점하며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7회초까지 5-5스코어로 ND이 될 뻔했으나, 7회말에 팀원들이 3득점을 해준 덕에 최종 스코어 8-7로 신승하였고 이와쿠마는 간신히 승리 투수가 되어 시즌 15승째를 수확했다. 2년 연속 선발 15승의 쾌거였다. 곧바로 다음 경기인 9월 14일 롯데전에 2.1이닝 7실점을 기록[51]하며 극도로 부진한 모습을 보여 조기 강판되었고 결국 패전 투수의 쓴잔을 마셨다. 이 부진 때문에 문책성으로 한 차례 로테이션에서 제외되기도 하였고, 2주간을 휴식하다 돌아온 9월 27일 시즌 최종전인 오릭스전 1.2이닝 2실점 하며 여전히 안좋은 모습을 보인데다, 어깨에 무리를 느껴 관리 차원에서 조기 강판되며 시즌을 아쉽게 끝마쳤다. 사족으로, 이날은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의 마지막 경기기도 했다. 즉, 최후의 킨테츠 선발 투수가 된 것도 이와쿠마. 한편, 상대편은 상술하였듯이 오릭스 블루웨이브로 긴테쓰와 오릭스의 합병 전 치러지는 마지막 경기를 서로 간의 경기를 통해 마무리 짓게 되었다. 상대편 선발은, 구대성으로 당일 경기 6이닝 2실점 호투하였고 팀도 7-2 스코어로 이긴 덕에 구대성은 오릭스 블루웨이브의 최후의 선발 투수이자 최후의 승리 투수가 되는 기록도 가지게 되었다.
그래도 당해년도 11월 열린 미일 프로야구 올스타전 시리즈 5차전에서 선발 등판해 7이닝 2피안타 1사사구 1실점으로 호투해 승리[52][53]를 챙기며 마지막 리그 경기에 일어났던 어깨 부상에 관한 불안감은 해소시켰다. 특히, 당일 경기에서 버논 웰스와 미겔 카브레라를 떨어지는 포크볼로 삼진을 잡는 등 7이닝 동안 단 2피안타 1볼넷으로 MLB 최고 타자들을 요리했다. 훗날 MLB에 진출하고나서, 포크볼이 MLB에서 드물어 그 희소성 덕에 이득을 봐 다르빗슈 유와 동급의 성적을 낼 수 있었던 이와쿠마의 MLB에서의 성공 요인을 미리 확인할 수 있던 경기기도 했다.
리그에서는 초반기처럼 완투를 밥먹듯이 하여 볼륨을 끌어올려 끝까지 좋은 성적을 거뒀다면 사와무라 상 수상까지 노려볼만 했지만, 마지막 세 경기에서 털려 당해년도 수상자였던 카와카미 켄신과의 차이가 현격하게 벌어지며 결국 아쉽게 시즌을 마쳐야 했다.[54][55]
시즌 초반은 엄청난 페이스로 승을 쌓았지만, 초반에 무리한 탓인지 끝 마무리는 좋지 않았다. 워낙 완투를 초반에 밥먹듯이 해서 9월에는 퍼지는 모습을 보였고 어깨도 안 좋은 듯 인상을 찌푸리고 피칭을 하는 모습을 마운드 위에서 보이기도 했다. 또한, 올림픽 차출과 휴식 차원 및 문책성 로테이션 제외 2회를 포함한 선발 로테이션 제외로 인해 2003년보다 페이스가 좋았음에도 본인의 커리어 시즌 최다승 기록을 경신하지 못했다는게 이와쿠마 개인으로서는 아쉽다면 아쉬울 수도 있는 결과였다.
그래도 투승타타가 아니라면 2003년 15승 기록을 2004년에 못 깼다고 아쉬워할만한 것은 아니었다. 2004년 기록한 15승 2패 중 1패도 완투패였고, 이뿐 아니라 평균 자책점으로 보나 세부 지표로 보나 2004년 성적이 명백히 2003년 성적보다 더 우위다. 단순히, WAR로만 보더라도 2003년보다 6경기나 덜뛴 2004년 WAR이 고작 0.1차이의 열세이기 때문에 WAR이 누적 스텟임을 감안하면
또한 상술되어있듯이, 이 2004년 퍼시픽리그는 2003년 퍼시픽리그와 더불어 앞으로는 두 번 다시 보기 힘들 타고투저의 해였다. 2004년 퍼시픽리그의 리그 평균자책점은 4.69로 1936년부터 NPB 80여년의 역사 동안 집계된 현재까지 각 시즌의 기록을 모조리 통틀어도 전체 2위에 해당할 정도의 미친 타고투저해였다. 참고로, 1위는 1985년도 퍼시픽리그의 4.71로 1위와 얼마 차이도 나지 않을 뿐더러, 이와쿠마가 리그 정상급 선발투수로 발돋움했던 해인 2003년은 4.65로 4위의 기록이다. 5위는 4.42의 2000년 퍼시픽리그로 5위부터는 4위와 꽤나 차이난다. 당시 퍼시픽리그의 경기 당 평균 득점도 5.20으로 2003년보다도 한 술 더떠 타고투저의 절정을 찍은해였다! 우리나라 KBO 리그의 타고 투저로 유명한 2014년부터 2018년까지 경기 당 평균 득점이 평균 5.4점대니 얼마나 당시 퍼시픽리그가 투수에게 쥐약이었는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리고 당시 퍼시픽리그의 타격 지표까지 살펴보면 더 가관인 타고투저 시즌이다. 2004년 퍼시픽리그의 리그 평균 타율은 0.278로 NPB 전체 역사 속 전체 1위인 시즌[56]이었으며 OPS도 0.791로 NPB 전체 역사 속 전체 2위를 기록하기도 한 시즌[57]이다. 장타율도 0.440으로 NPB 전체 역사 속 전체 5위를 기록 하였다. 타점도 리그 전체 3913개의 타점이 터지며 NPB 전체 역사 속 전체 4위를 기록한 시즌이기도 했다. 자세한 이해를 돕기위해, 투신타병으로 유명한 시즌인 2011년 시즌과 비교를 해보자면 2011년은 퍼시픽 리그 평균 타율 0.251 센트럴 리그는 0.242였다. OPS도 2011년 퍼시픽 리그는 0.652 센트럴 리그는 0.642로 왜 당시 리그가 투신타병 리그였는지 타격 지표만으로도 이해가 가능한 수준. 참고로, 최근 10년간 NPB의 타격지표를 봐도 타율은 평균적으로 2할 5푼대에서 놀고 있으며, OPS도 7할 0푼대가 평균 수준이다.[58] 이렇게 다른 시즌과 비교해 기록적인 타격 지표들이 쏟아진 해였으므로 당시 리그환경이 (투수 입장에서) 얼마나 개판이었는지 알 수 있다.
이런 리그 환경에서 기록한 개막 후 12연승과 ERA 3.01은 오히려 지금 관점으로 분석되어 평가절하된 부분도 없지 않아 있다. 당시 퍼시픽리그에서 규정 이닝을 채운 투수 중 평균자책점 1위는 ERA 2.90의 마쓰자카 다이스케였고 2위가 ERA 3.01의 이와쿠마였다. 즉, 투고타저로 접어든 2011년[59] 다르빗슈 유나 다나카 마사히로부터 지금의 야마모토 요시노부까지
결과적으로, 2004 아테네 올림픽 대표로 거의 한 달을 비우고도 15승 2패, 158.2이닝 동안 123탈삼진 평균자책점 3.01의 최고의 활약을 보여줬다. 리그내 개인 호투와 좋은 성적뿐 아니라, 대표팀 일원으로서 동메달도 획득[60]하며 대표팀에서의 팀적인 성과[61] 까지 모두 달성하였다. 또한, 커리어 최초로 퍼시픽리그 베스트 나인에 이름을 올렸으며 다승왕, 승률왕도 차지했다. 상술하였듯이, 시즌 후에 열린 미일 프로야구 올스타전에서도 7이닝 1실점으로 승리 투수가 되는 등 여러모로 이해는 이와쿠마의 킨테츠 시절 최고의 황금기였다.
그러나 이 해 시즌이 끝난 뒤, 오릭스 블루웨이브와 킨테츠 버팔로즈의 합병에 격렬히 반대하면서 구계의 높으신 분들에게 살짝 찍혀버리게 된다. 결국 "이적지에 대해서는 선수의 의사를 존중하겠다"는 구단과 선수회의 협상에서 나온 합의를 이유로 합병 구단인 오릭스 버팔로즈의 계약갱신과 연봉협상에 불응하면서, 나는 오릭스 외에 어느 구단이라도 가겠다! 라고 선언하였고 사태는 악화일로였다. 그것도 네임밸류가 없는 선수도 아니고 팀 에이스 선발 투수이자 시즌 최다승 투수가 저러니 파문이 일파만파.
이 이후 거의 3개월 가깝게 오릭스와 이와쿠마의 신경전이 이어졌었다. 이와쿠마가 오릭스에 남기 싫어했던 것과는 반대로 오릭스는 처음에는 이와쿠마에 대한 보유 의지가 굉장히 강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라쿠텐에 보낼 생각이었으면 애초에 25인 우선 지명에 넣을 이유도 명분도 없었다. 처음에는 별로 심각성을 못 느꼈는지, 오릭스쪽은 연봉협상에서도 잘 쳐주겠다고 언플도 했으며, 합병 후 오릭스 홈페이지에는 당연히 등번호 21번란을 만들어둘 정도였다. 당연하지만 서류상으로는 오릭스보유선수이니... 하지만 연봉협상도 걷어차고 선수 등록용 사진찍기조차 거부하여, 오릭스 홈페이지의 이와쿠마 칸은 04년 해를 넘길때까지 Now Printing 상태로, 다른 선수들 사진이 다 채워질때까지 비어있었다(...).
결국 3개월 넘게 줄다리기를 한 끝에 오릭스 구단측은 합병 후에 숫자 채우기로 새로 창단된 구단인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에 현금 트레이드를 성사시킴으로 끝을 맺는다. 이와쿠마 본인도 매우 만족한 결과였다는 듯.
2.2. 라쿠텐 골든이글스 시절
2.2.1. 2005 ~ 2007: 약체팀의 에이스, 그러나 커리어의 위기
2005년 4월 1일 세이부전에 등판해 투구하는 모습.[62]
팀의 창단 첫 해인 2005년[63], 개막전 선발 투수로 등판해 지바 롯데 마린즈전에서 9이닝 1실점 완투승을 기록하여 시즌 첫 승리 투수가 됨과 동시에 구단 사상 최초의 경기를 승리로 장식한다.[64] 분명, 상술한 개막전에서의 모습은 나쁘지 않았지만 시즌 초반부터 갑작스런 어깨 통증을 호소하며 무리가 오게 된다. 그래서, 5월까지 평균 자책점은 6점대[65]였으며 5월 말까지 3승 6패 ERA 6.497이라는 성적으로 눈물겨운 시작을 하게 된다. 특히 이 기간 동안 완투 4번[66]으로, 마운드에서 어깨 통증을 호소하기도 했지만 되도록 끝까지 경기를 책임지려했다.
6월 다시 2점대의 평자책[67]을 찍으며 다시 반등하는 듯 했으나, 7월 부터 다시 부상이 완치되지 못한 모습을 보이며 주저 앉고 만다. 7월 한 달은 5.01의 평균자책점[68], 8월은 4.32의 평균자책점[69], 9월 한 달은 4.91의 평균자책점[70]을 기록했다.
결국 자책점이 7월부터 9월까지 세 달 모두 자책점이 5점에 가깝게 노는 바람에 시즌 최종 평균자책점은 4.99로 거의 5자리를 넘볼 뻔했다.[71] 최종 성적은 27경기 9승 15패[72] 182.1이닝 동안 평균자책점 4.99기록. 참고로, 피안타수 218개와 113개의 실점[73]으로 각각 리그 최다 피안타와 리그 최다 실점이라는 불명예스러운 타이틀까지도 얻었다.
상술한 것 처럼 어깨 통증을 안고 뛴 이와쿠마 본인은 물론 무리임을 알았지만, 팀 내 투수진 중 유일하게 제대로 된 투수라는 점 때문에[74] 몸에 무리가 오는 것을 알면서도 멸사봉공의 정신으로 선발 로테이션을 거르지 않고 풀 시즌을 뛰었다. 그 결과, 불명예스러운 타이틀을 얻었긴 했지만 그래도 라쿠텐의 첫 시즌인 2005년에 거둔 9승은 그 해 팀 승수의 약 1/4[75]에 해당하는 엄청난 비중으로, 그 해 라쿠텐 투수진 중에 최다승 투수였다. 그래서 이와쿠마가 등판해도 이기기 힘든 것을 알면서도 팀 사정상 무리하게 등판해서 얻은 부상이라는 점 때문에 센다이의 팬들로부터는 비난보다는 안타까움이 더해져서 오히려 동정의 대상이 되었다.
게다가 완투도 총 9회로 이와쿠마의 라쿠텐 시절 중 압도적으로 완투 횟수가 많은 시즌이었다. 단순히, 완투 횟수만 많은 것이 아니라 이 시즌 중에 117개[76], 124개[77], 134개[78] 그리고 많으면 139개[79]까지 많은 공을 한경기에 다 던지며 혹사의 불안감을 야기했다. 이 시즌의 다음시즌(2006년도)부터는 몸에 무리가 생겨 2005년 만큼 많은 이닝 혹은 많은 공을 던지는 경기가 시즌 중에도 많지 않았다.[80] 실제, 2003,2004,2005 시즌 이와쿠마의 각 완투 횟수는 11회, 7회, 9회로 같은 시기의 철인같은 완투 수를 선보였던 마쓰자카 다이스케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81] 이는 이와쿠마가 2005년 시즌까지 몸에 누적된 피로가 많았음을 방증하는 사실로, 부상과 혹사라는 복합적인 원인으로인해 프로 커리어에 있어 위기를 맞아 2006년 부터는 예전만큼 완투를 시도하기는 버거웠다는 것을 본인부터가 더 잘 알았을 것이다. 이와 더불어, 그 피로 때문인지 벌써부터 몸에 탈이 나기 시작해 마운드에서부터 어깨 통증을 호소했을 정도니 프로 커리어 초반기부터 이와쿠마는 눈에 띄게 무리가 오고 있음을 그라운드 밖의 팬들도 인지할 수 있을 정도 였다. 단순히 성적 측면에서 이와쿠마가 이기기 힘든 상황에 계속 등판해줬기 때문만이 아니라, 팀 사정을 생각해 이렇게 본인 몸을 바쳐가며 경기를 어떻게든 마무리 지으려하는 모습에서도 동정과 연민의 대상이 되었던 것.
또한, 기록을 보면 알겠지만, 이와쿠마가 3실점 이상을 하면 한 번의 예외[82]를 제외하고는 팀은 어떻게든 졌다.
여하튼, 상술한 것처럼 완투로 완벽하게 상대 타선을 틀어 막지 않는 한 에이스 투수인 이와쿠마가 선발로 나와도 이기기 쉽지 않을 정도[83]라, 이와쿠마의 완투에 기대야 했던 라쿠텐이었는데 이 때문에 어깨와 팔꿈치에 과부하가 걸리며 이와쿠마의 구속이 눈에 띄게 줄어들게 되었다. 2006년 이중 모션 금지 사건과 더불어 이 2005년 부상이 이와쿠마로 하여금 구속이 아닌 볼 무브먼트와 변화구 낙폭 및 제구에 집중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다음 시즌인 2006년부터 일본프로야구에 도입된 이중모션 금지로 투구폼까지 교정해야만 했다.[84] 게다가 그 전년도에 입었던 어깨 부상[85]으로 인한 통증이 가라앉지 않아 8월 중순까지는 2군에서만 모습을 드러냈다. 8월 29일 삿포로돔에 열린 니혼햄과의 경기에서 몇개월만에 다시 선발로 등판하여 6이닝 3실점을 기록해 나쁘지 않은 모습으로 복귀[86]했으나, 다음 경기인 9월 5일 오릭스전에는 5.1이닝 6실점(5자책)으로 부진한 모습[87]을 보여 부상에서 다 헤어나오지 못한건 아닌지 일말의 불안감을 야기했다. 그런데, 9월 12일 지바 롯데전 경기에서는 8이닝 3실점으로 호투해 그 불안감을 씻어내며 시즌 막판에 간신히 시즌 첫 승을 따내는데 성공했다. 그렇지만, 9월 18일 니혼햄과의 경기에서는 9이닝 2실점(1자책) 완투패[88]하며 개인 호투는 달성했으나 타자들의 지원이 저조해 패전이 되고 말았고, 9월 26일 오릭스와의 경기에서도 8이닝 4실점으로 또 다시 완투패하기도[89] 했다. 시즌 마지막 경기인 10월 1일 지바 롯데전에는 선발로 등판해 2.1이닝 무실점으로 호투했으나 피칭 중 손가락을 다쳐 3회초에 관리 차원에서 조기 강판되며 시즌을 마감했다. 어깨 부상으로 복귀한지 2개월도 채 되지 않아, 손가락 부상까지 입은 2006년은 전반적으로 부상의 악령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최종 성적은 2006년에 6경기에 등판하여 평균자책점 3.72와 1승 2패를 기록했다.
그 다음 시즌인 2007년에는 2년 만에 개막전 선발 투수로 발탁되었는데 개막전 3월 24일 세이부전 6이닝 8탈삼진 4실점을 기록하며 패전이 되었고, 1주 후인 홈구장의 개막전 경기[90]에서도 선발 투수로 등판 예정되었지만 경기 시작 직전(선발 명단 발표 후)[91]에 갑작스런 등 부상으로 인하여 한 달간 다시 자리를 비워야했다. 한달 가량 뒤인 4월 28일 니혼햄과의 경기에, 다시 복귀하여 5.1이닝 5실점(2자책)으로 매우 부진하였고 팀도 10-2로 지는 바람에 시즌 두번째 패배를 기록했다. 다행히, 5월 4일 지바 롯데 전에는 7.1이닝 2실점 호투하여 간신히 5월에서야 시즌 첫 승을 챙길 수 있었다. 이후 5월 12일 오릭스전에는 5이닝 4실점(2자책)으로 무난한 피칭을 보였지만, 승패와 연결되지는 않았다. 그러던 중, 5월 18일 지바 롯데 전에는 4회까지 무실점 60개의 공 만으로 잘 던지고 있다가 왼쪽 옆구리 근육 통증을 호소하며 강판되었고, 이 부상의 여파로 다시 두달간 1군에서 자취를 감췄다.
2군에서 재활을 거치고 다시 담금질 한 뒤, 7월 24일 부터는 다시 복귀해 첫 복귀전인 지바 롯데전에서는 5이닝 무실점 호투해 승리 투수 요건을 갖췄으나, 팀 불펜이 7회 대거 4실점하는 방화 탓에 노 디시전으로 마무리. 그 다음 7월 31일 지바 롯데전에서 이번에는 6이닝 3실점하며 전경기보다 부진했으나 이번엔 다행히 팀 타선이 폭발해주며 간신히 시즌 2승째를 기록했다. 이 날을 계기로, 8월 중순까지는 8이닝 2실점 승리 두 번[92]으로 좋은 모습을 보였다. 8월 14일 경기 이후 컨디션 관리 차원에서 한 번 로테이션을 거른 후, 다시 돌아온 8월 23일 지바 롯데전에서 이번에는 4이닝 3실점(무자책)으로 패전이 될 뻔 했으나, 9회 3-1 라쿠텐이 지고 있는 상황에서 가와구치 켄시의 극적인 동점 투런 홈런이 터지며 간신히 패전을 면했고 노디시전이 되었다. 경기는 10회말 유격수 와타나베 나오루의 끝내기 실책으로 인해 팀은 3-4 패.
한편, 이 날 이와쿠마는 64개의 공밖에 던지지 않았지만 4회에만 3실점하며 곧바로 문책성 교체[93]를 당했다. 이후 7회말, 당시 라쿠텐 감독 노무라 카츠야의 막내 아들이자 라쿠텐 배터리 코치인 노무라 카츠노리[94]와 이와쿠마는 덕아웃에서 논쟁이 붙었고 그 모습이 TV 화면 전파를 탔다. 선발 투수는 강판 후 아이싱 등 30분 정도 걸쳐 팔꿈치와 어깨 관리를 한다. 치료 시간에 개인차는 있지만 이와쿠마가 벤치로 돌아온 것은 교대 후 1시간 이상 지난 7회말이었다. 카츠노리는 이에 불만을 품어 이와쿠마에게 "벤치로 빨리 돌아와, 니 대신 중간계투가 던지면 경기를 지켜봐야지!"라며 한 소리 했고 이와쿠마는 경기도 지던 와중 문책성 교체를 당한 뒤라, 기분도 안 좋은데 왜 그러냐는 식으로 따졌다고 한다. 경기 후, 이와쿠마가 노무라 코치에게 사죄하며 해프닝으로 일단락되기는 했다.
해프닝이 있던 8월 23일을 시작으로 이후 9월 중순까지 세 번의 등판에서 이와쿠마는 부진한 모습을 연달아 보여주었다.[95]
그래도 9월 18일 경기부터는 두 경기 연속으로 호투[96]하며 시즌을 좋게 마무리 하는가 했으나... 10월 2일 열린 시즌 마지막 등판 경기 니혼햄전에서는 선발로서 1회 쓰리아웃도 다 못채운 0.2이닝 5실점의 성적으로 커리어 최악의 피칭을 선보이며 조기 강판되었고, 시즌을 최악의 모습으로 마무리[97]했다.
결과적으로, 2007년 성적은 16경기 5승 5패 90이닝 ERA 3.40이었고 2006년과 2007년 두 해동안 단 6승에 그치고 만다. 2007 시즌이 끝나고는 갑자기 팔꿈치 통증을 호소하며 시즌이 끝나자 마자 10월에 오른쪽 팔꿈치 관절경 수술[98]을 받았다. 본인 말로는, 마지막 경기도 팔꿈치 통증 탓에 제대로 된 밸런스로 피칭을 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특히, 마지막 경기 0.2이닝 5실점의 기록은 팬들에게 이제는 무너져버린 왕년의 에이스라는 인식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이러한 성적도 그렇지만, 투구폼 교정이라는 큼직한 이슈[99]와 더불어 어깨와 팔꿈치 등 숱한 부위를 부상당해 예전같은 모습이 나오기 어렵다고 생각한 팬들의 이와쿠마에 대한 기대치는 바닥을 찍었다. 특히, 팔꿈치, 등, 왼쪽 옆구리, 어깨, 손가락 등 피칭에 필요한 거의 모든 신체 부위에 각 한차례 이상 부상을 입은 유리의 에이스가 되어버린 그에게 더 이상 2004년 찬란했던 시기의 모습을 두번 다시 볼 수 없는 것인지 팬들이 절망하던 때...
2.2.2. 2008: 이와쿠마의 최전성기
9월 16일 닛폰햄전에서 시즌 19번째 승리를 거둔 뒤 환호하는 모습[100] |
결국 2008년에 대폭발한 이와쿠마는 201과 3분의 2이닝 동안 159탈삼진 21승 4패 평균자책점 1.87 WHIP 0.977 WAR 8.3이라는 후덜덜한 성적으로 시즌 종료. 투수 부문 3관왕(평균자책점, 다승왕, 최고 승률)에 올랐으며 사와무라 상까지 수상하는 영예를 누렸다. 여담으로 2008년 라쿠텐이 거둔 승수가 65승. 그러니까 혼자서 팀 승리의 1/3을 책임 진 셈이다(...). 선발 예고제가 시행된 요즘 21승을 기록한 것은 그야말로 괴물급 활약... 또한, 전체 3분의 1을 혼자 책임진 것만 봐도 이와쿠마가 타자들 지원을 많이 받아 운빨로 21승을 기록한게 아니란 걸 알 수 있지만, 더 자세히 기록을 살펴보면 더 대단한 기록임을 알 수 있다. 선발 28경기에서 QS가 23경기(그중 HQS19경기)[112]였다. 즉, 타선 지원덕에 운빨로 승을 많이 쌓은 것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가 팀 승리에 기여를 많이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 하드캐리라는 단어가 이보다 더 적절할 수가 없다. 또한, 2005시즌 이후 3년 만에 풀 로테이션을 소화한 시즌을 보냈다.
그리고 사와무라 상 뿐 아니라, 퍼시픽 리그 최우수 선수(MVP), 퍼시픽 리그 베스트 나인, 퍼시픽 리그 최우수 배터리상 등 투수 부문과 관련한 각종 상이란 상들은 모조리 휩쓸었다. 당해년도 라쿠텐의 최종 성적은 퍼시픽리그 5위로, 4위 ~ 6위의 하위권 팀[113]에서 MVP가 나온 것은 1988년 난카이 호크스의 타자 카도타 히로미츠이후 20년 만의 일이라고 한다. 그것도 투수가 팀 성적을 뒤엎고 MVP를 받았으니, 당해년도 이와쿠마의 피칭이 얼마나 충공깽 수준이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
또한, 이 시즌 이와쿠마의 피홈런은 단 3개로 규정 이닝을 채운 선수 중 최소 피홈런 1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다. 이 중 2개는 교류전에서 홈런을 허용한 것[114]으로, 퍼시픽 리그 상대팀에게 허용한 홈런은 9월 29일의 소프트뱅크[115]에서 마쓰다 노부히로에게 맞은 1개만 기록했다. 즉, 9월 말까지는 자주 만나던 퍼시픽 리그 타자들에게 홈런을 맞은 적이 없다는 것.
이 피홈런 3개의 기록이 얼마나 대단한 기록이냐면, 1967년 시즌 이후 일본의 양대리그를 통틀어 규정 이닝을 채운 선수 중 이와쿠마가 41년만에 처음으로 이 기록을 다시 달성했기 때문이다. 즉, 1967년 이후로 규정 이닝을 채운 선수들은 모조리 4개 이상의 홈런을 맞은 셈인데, 이와쿠마는 41년 만에 규정 이닝을 채운 단 3개의 피홈런으로 시즌을 마친 선수가 되었다. 또한, 한 시즌에 200이닝을 던진 투수 가운데 3피홈런 이하로만 시즌을 마친 기록은 1958년 이후 50년 만에 처음으로 이와쿠마가 기록했다. 즉, 반세기 만에 다시 나온 대기록[116]이기도 하다.
참고로, 1967년 3개의 피홈런으로 시즌을 마친 투수는 미야자키 쇼지(宮崎 昭二)로 당시 137과 3분의 1이닝 동안 3개의 피홈런을 기록했다. 이와쿠마는 2008년 그보다 훨씬 많은 200이닝 가량을 소화했으므로 비율로만 보면 오히려 41년 전의 기록보다 더 대단했다고도 볼 수 있는 기록. 이 기록은 시간이 흘러 2012년 니혼햄의 용병 투수 브라이언 울프가 149이닝 동안 피홈런 2개로 이와쿠마의 기록을 경신하기는 했지만, 2008년 이후 2022년 현재까지도 브라이언 울프를 제외하고 이와쿠마의 기록을 넘은 선수는 없다.[117] 여담으로 1967년 이후, HR% 1위는 0.003%의 2012 시즌 브라이언 울프가 1위, 2위가 바로 2008시즌 이와쿠마의 0.004%이다. 상술한 1967시즌 미야자키 쇼지의 HR%는 0.005%로 서로간의 아주 미세한 차이만 존재한다. 참고로 HR/9로 살펴보면, 1967년 이후 1위는 9이닝 당 0.12개로 브라이언 울프가 1위이며 2위는 9이닝 당 0.13개의 이와쿠마. 3위는 9이닝 당 0.19개인 2011년 다르빗슈 유. 4위가 9이닝 당 0.2개인 1967년 미야자키 쇼지이다. 또한, 1959년 이후로 이와쿠마 이외에 200이닝을 소화한 투수 중 3피홈런 이하로 시즌을 마친 투수는 2022년 현재까지도 아무도 없다.[118] 즉, [dday(1959-01-01)]일이 지난 현재까지도 이와쿠마 이외에는 누구도 달성 못한 대기록.
2.2.2.1. 2008 사와무라상 논쟁
2007년 사와무라상 수상자인 다르빗슈 유와의 2008년 사와무라상 쟁탈전이 초유의 관심사였는데, 다르빗슈 유가 2008 베이징 올림픽에 가 있던 사이에 승수를 추월한 사실[119] 등이 정상 참작되어 다르빗슈 유의 2년 연속 수상을 점친 사람들이 많았으나[120] 결론은 투수 3관왕을 한 이와쿠마에게 사와무라 상이 돌아가게 되었다.[121][122]막상, 사와무라 상 수상 쟁탈전 당시에는 사람들이 사와무라 상 수상 기준에 관심이 없었고 이와쿠마의 성적이 워낙 대단했던지라 사람들은 단순히 잘 던지는 두 투수 중 누가 상을 탈까에만 초점을 맞췄지만, 막상 수상자가 발표되고 나자 수상 기준에 관한 논란이 일어 비로소 이 논쟁이 시작되었다.
이 논쟁의 본격적인 촉발은 바로 이와쿠마는 사와무라상 수상 기준을 모두 만족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다르빗슈 유는 모든 기준을 달성했기 때문이다. 2008년 이와쿠마의 완투 횟수는 5회로 수상 기준인 '완투 10회 이상'에 한참 모자르다. 반면 다르빗슈 유는 수상 기준 전항목을 달성하고도, 이와쿠마가 단독 수상자가 되면서 수상하지 못하였다. 물론, 사와무라 상 수상 기준이 꼭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서, 위의 항목을 한 두개 만족하지 않더라도 수상자[123]로 뽑히기도 한다. 하지만, 문제는 다르빗슈 유는 1982년 이래 26년 만에 처음으로 전항목을 달성하고도 사와무라상을 받을 수 없었던 불운의 투수가 되었다는 것. 또한, 1982년에는 에가와 스구루가 전항목을 달성하고도 수상하지 못하였는데, 당해 수상자인 기타벳푸 마나부는 기준의 전항목을 달성하였다. 반면, 이와쿠마는 본인 외에 전 항목 달성자가 있음에도 막상 본인이 전항목을 달성하지 않고도 상을 차지할 수 있었다. 즉, 이런식으로 수상 기준을 만족하지 못한 투수가 수상자가 되고 오히려 만족한 투수는 수상자가 되지 못한 촌극이 벌어진건 처음인 셈. 이를 두고, 산케이 신문의 한 스포츠 전문 기자는 '정확한 잣대로 수상자가 선정되지 않고, 본인 입맛에 맞게 수상자가 정해지면 너무 기준이 모호한 상 아닌가?'라고 문제점을 지적하며 정확한 기준이 없다면 수상에 관한 권위가 떨어질 수 밖에 없다며 일갈했다.
특히, 다르빗슈 유의 아버지가 본인의 아들이 7가지 기준을 모두 만족했는데, 기준을 만족하지 못한 이와쿠마에게 대체 왜 수상의 영예를 뺏긴 것인지 의문을 품고 격노하며 언론에 심경을 토로하기도 하여 논란이 됐다. "대체 7가지 외에 무엇으로 더 평가가 된건지 앞으로라도 공개해 달라"는 말에 덧붙여, "앞으로 이와 같은 전례가 없게 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하는 지에 대해 수상 조건을 확실하게 정립했으면 좋겠다"는 말로 끝을 맺으며 불편한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객관적인 수상 기준 이외에 주관성도 함께 개입되었다는 원론적인 차원의 문제를 제기한 셈. 지금에야 2013년 다나카 마사히로나 가네코 치히로[124]같이 이 둘을 이은 추가적인 사례가 나왔지만, 당시 수상 기준을 만족하지 못한 투수가 수상자가 되고 오히려 만족한 투수는 수상자가 되지 못한 케이스는 사와무라 상 수상자를 기준을 제정해 발표하기 시작한 원년부터 통틀어도 일본 프로야구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이때문에, 당시에는 다르빗슈 유 아버지의 분노가 이해간다는 여론도 함께 조성되었다.
다르빗슈 유 본인도 수상에 자신이 있었는지, 수상자 발표 이전에 스포츠 호치와의 인터뷰에서 "이 기록으로 (사와무라상을) 받지 못하면 큰일 아닌가요?"라며 자신만만했으나, 결국에는 쓴잔만 맛봐야 했다. 또 다르빗슈 유 본인 뿐 아니라, 사와무라 수상 발표 며칠 전 퍼시픽 리그 투수 골든글러브는 다르빗슈 유가 받았다는 점에서 다르빗슈 유의 수상을 점친 사람도 많았지만 결국 사와무라 상은 이와쿠마가 차지했다.
이미 정해진 수상 조건으로 수상자가 선정되어야 하는 것이 타당하지만 갑자기 우선순위를 바꿔 약체팀의 3분의 1의 승리를 책임진 투수의 임팩트를 따져 손을 들어준 것은 조소와 비아냥을 사기에는 충분했다. 하지만, 이것은 명백히 사와무라 상 선정 위원회의 잘못이며 다르빗슈 유 입장에서는 하필 이라는 단어 밖에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억울한 상황에 놓였다. 참고로, 역대로 봐도 사와무라 상 수상 조건을 2번이상 전항목 모두 만족한 선수는 다르빗슈 유 말고는 없다. 심지어, 본인 빼고는 두 번 이상 모두 만족한 선수조차 없는데 본인(다르빗슈 유)는 무려 세 번이나 달성하는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정작 수상 횟수는 2007년에 받은 1회가 전부이다. 나머지 두 번은 이 2008년 이와쿠마에게 밀려 수상하지 못했던 해와 WAR 11.5를 찍을 정도의 미친 몬스터 시즌에도 불구하고 다나카 마사히로에게 수상의 영예를 내줬던 2011년이다.
그렇다면, 다르빗슈 유의 전항목 달성을 무시할 정도로 당해년도 두 투수간의 차이가 컸던 것일까?
우선, 다르빗슈 유가 더 적합한 수상자임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맞대결 결과로 보나 당해년도 기록으로 보나 다르빗슈 유가 승수외에는 더 앞서며, 팀 성적도 2위인 니혼햄이 5위인 라쿠텐에 밀릴게 없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수상 기준을 무시하고 누가 더 나은지만 고려해도 오히려 더 나은 투수도 다르빗슈 유라는게 그들의 주된 의견이다.
당해년도 두 투수간에는 딱 한 번의 맞대결이 있었다. 4월 10일 니혼햄과 라쿠텐의 경기에서 각각 선발 등판한 다르빗슈 유와 이와쿠마의 엄청난 투수전이 벌어졌다. 두 투수 모두 5회까지는 노히트, 6회까지 상대 타선을 무실점으로 틀어막다가 7회에 이와쿠마가 희생플라이로 1실점을 하게 된다. 다르빗슈 유는 9회까지 괴물같은 투구를 이어가 무실점 완봉으로 마무리 하고 이와쿠마는 8이닝 3피안타 5탈삼진 1실점 완투패하게 된다. 이와쿠마의 시즌 첫 패로, 당해년도 4패 중 1패를 다르빗슈 유와의 엄청난 투수전 끝에 패하게 되어 기록되었다.
이처럼, 그해 딱 한번 있었던 서로 간의 맞대결에서 다르빗슈 유가 이겼던 것을 이유로 들어 서로 간의 진검 승부에서 승리를 거둔 다르빗슈 유가 이와쿠마보다 더 뛰어난 투수다라는 의견도 있었다. 또 상술하였듯이, 야구는 팀 스포츠기에 팀 성적에 더 가산점을 준다 쳐도 당해년도 팀 성적은 2위 니혼햄이 5위였던 라쿠텐보다 세 단계나 더 위였다.
이와 더불어, 심각한 니혼햄의 타석을 등에 업고도 다르빗슈 유가 먼치킨 수준의 성적[125]을 냈다는데에 더 점수를 주고 대단하다고 봐야한다는 것이 당시 이와쿠마보다 다르빗슈 유가 더 뛰어난 투수라고 주장하던 사람들의 주된 근거였다. 실제, 당시 니혼햄은 양대리그 통틀어 팀 타율 0.255로 밑에서 2등[126] 그리고 팀 장타율 0.366으로 단독 꼴찌, 팀 OPS도 0.682로 꼴찌, 팀 WRC+도 83으로 무난하게 단독 꼴찌. 온통 꼴찌 천지인 타격 지표를 기록했다. 이런 팀 타격 지원을 등에 업고도 이와쿠마와 비견될만한 성적을 냈는게 오히려 다르빗슈 유의 투구 능력이 더 뛰어남을 보여준다는 측의 주된 논거이다.
또한, 더 적은 이닝에도 불구하고 탈삼진 수도 앞서는 데다가 이와쿠마보다 3경기 적은 경기 출장[127]에도 불구하고 이와쿠마와 비슷한 이닝을 소화한 다르빗슈 유가 더 이닝 이터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굳이 WHIP, 볼삼비, K/9 등의 세부지표를 따질 것도 없이 승률 및 승수를 제외하고는 다르빗슈 유가 볼륨에서도 딱히 밀리는 점도 없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 당해년도에 둘 중 더 뛰어난 투수는 다르빗슈 유라는 의견들이 일본내 여러 스포츠 전문 기자들을 비롯한 언론에서 개진되었다. 또한 상술했듯이, 누가 더 뛰어난 투수인지에 관한 논쟁을 우선 차치하고 단순히 사와무라상의 수상 조건대로 라면, 사와무라상에 더 적합한 수상자는 모든 항목을 만족한 다르빗슈 유이다. 승수와 승률 이외에는 이와쿠마에 비해 밀리는 항목이 없으며 1점대 평균자책점, 10완투 그리고 올림픽 차출로 인해 한 달간 자리를 비웠음에도 208개 탈삼진[128], 200이닝 이상의 볼륨을 기록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그의 능력을 엿볼 수 있는 압도적인 항목이 더 많았다.
반대로 이와쿠마의 라쿠텐 타자들의 당해년도 타격 지표를 살펴보면 팀 타율 0.272로 양대리그 통틀어 1등, 출루율 1등, 장타율과 ops는 중간 수준, WRC+는 98로 다르빗슈 유의 니혼햄과 비교 불가 수준으로 더 나은 타격을 보유한 팀이었다. 팀 순위 5위를 차지해 야수진의 타격 능력이 형편없었을 거라는 항간의 인식과 달리 당시 라쿠텐 타자들의 타격능력은 꽤나 준수했고 오히려 준수하다 못해 상위권을 기록했을 정도였다. 이에 덧붙여, 지금은 잘 쓰지 않는 데이터지만 2008년 퍼시픽리그 득점 지원률 1위는 5.66의 이와쿠마였다. 반대로 2008년 퍼시픽리그 득점 지원율 꼴찌는 니혼햄 파이터스의 라이언 글린이었고 그 기록은 2.57이었다. 같은 소속팀의 다르빗슈 유의 경우에는 3.51이었고, 단순한 계산으로도 득점 지원은 이와쿠마가 더 많이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득점 지원률[129]은 (등판 동안 본인 팀의 득점 x 9) / (강판까지의 투구이닝)으로 계산하는 단순 계산이기에 본인 팀 타자가 어떤 상대 투수를 만나 어떤 상황에서 득점을 올려준건지 고려되지 못해 지금에는 잘 쓰이지 않지만, 단순 계산으로 어느 투수가 유독 득점 지원을 많이 받고 혹은 적게 받았는지 정도는 알 수 있는 기록이다.
이렇기에 이와쿠마는 비교적 더 좋은 타격을 등에 업어 승운에 있어서는 더 운이 좋았다고 볼 수는 있지만, 다만 이 차이가 사와무라 상 수상을 뒤집을 만큼 큰 차이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있다. 또, 당해년도 WAR은 이와쿠마가 8.3 다르빗슈 유가 7.5를 기록했는데, WAR이 누적 스텟이기는 하지만 저 차이가 세 경기만에 뒤집힐 차이는 아니다. 이를 볼때, 단순히 팀 타격 지원을 많이 받아 승률빨로 이와쿠마가 사와무라 상을 수상한것도 아니므로 (승률 그리고 WAR이냐) (탈삼진 그리고 WHIP, 볼삼비 등의 세부지표냐) 이 둘 중에서 무엇을 중점적으로 보느냐에 따라 각자 2008년 최고 투수가 둘 중 누구였는지 견해가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여러가지 팀 타격 수준, 대표팀 차출 등 불리한 조건 속에서도 이와쿠마와 비슷한 성적을 낸 다르빗슈 유가 대단하기는 하나 그렇다고 해서 투수 부문 3관왕을 차지한 이와쿠마의 손을 들어주는 것에 큰 의문부호가 붙을 정도는 아니었고 강탈 수준은 더욱 아니었다는 의미다.
다만, 세 경기차이의 WAR에 관한 부분은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상술하였지만, 이와쿠마는 28경기를 모조리 선발로만 출장했고, 다르빗슈 유는 25경기 중 한경기는 구원 등판을하여 24경기만 선발로 출장했다. 그 구원 등판도 한이닝 소화에 그쳤으므로[130] 볼륨적인 측면에서는 말이 세 경기 차지 사실상 네 경기 정도의 격차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이를 네 경기차이라고 인식하게 되면 충분히 뒤집을 수 있을 정도의 격차다. 물론 WAR은 음수로 누적될 수도 있는 스텟이지만 단순한 계산으로 다르빗슈 유의 WAR 7.5를 25경기로 나누면 한 경기 당 평균 +0.3의 WAR을 쌓아올린 셈이다. 따라서, 세 경기를 더 등판했다면 기댓값으로 8.4 정도의 WAR로 시즌을 마쳤을 것이라는 계산을 할 수 있다. 다르빗슈 유가 올림픽 차출로 네 경기의 선발 로테이션을 걸렀기에 부상없이 네 경기의 선발 등판이 더 가능했다고 보면 기대되는 WAR은 더 커져 8.7가량이 되므로 저 차이를 '세 경기만에 뒤집힐 차이는 아니다'라고 보는 것도 어느 정도 비약이 있다. 물론 야만없이지만 반대로 다르빗슈 유가 네 경기를 더 출장해 못 뒤집었을거란 가정도 논리적으로 그 주장이 논거와 큰 호응을 이루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2008년에 누가 더 좋은 투수였냐는 이처럼 해석에 따라 의견이 갈릴 여지도 있지만, 단순화해서 빡빡하게 수상 기준을 모두 따진다면 2008년 사와무라 상 수상에 더 적합한 투수는 다르빗슈 유가 맞다. 사실, 수상기준을 무시할 정도로 두 투수가 당해년도 차이가 컸냐하면 그것은 또 아니기도 하고...
여담으로, 2013년에 2008년의 다르빗슈 유와 같이 전항목을 달성하고도 전항목을 달성하지 못한 투수에게 밀려 사와무라상을 수상하지 못한 비운의 투수가 다시 등장했다. 사와무라상의 수상 기준이 제정된 원년인 1982년 이후 전항목을 달성하고도 수상받지 못한 세번째 케이스[131][132]]이며 상술했듯이 전항목을 달성하고도 전항목을 달성하지 못한 투수에게 밀려 사와무라상을 수상하지 못한건 두번째 케이스. 그 주인공은 바로 가네코 치히로이다.
2013년의 경우, 6개 항목을 채운 다나카 마사히로(라쿠텐)가 7개 전 항목을 채운 가네코 치히로(오릭스 소속)를 누르고 수상하며 2008년과 같은 사례가 다시 등장하였다. 다만 다나카는 NPB 역사에서 전무후무할 24승 0패 투수였던데다가, 이 해 라쿠텐의 창단 첫 일본시리즈 우승에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 실제 다나카의 성적도 24승 0패 212이닝 ERA 1.27 WHIP 0.94로 당해년도 가네코 치히로와 상당히 큰 격차가 있어, 성적이 비슷했던 2008년 이와쿠마와 다르빗슈 유같은 케이스와는 상당히 다른 경우라고 볼 수 있다. 반면, 가네코는 당해년도 15승 8패 223.1이닝 ERA 2.01 WHIP 1.00으로 다나카의 성적과 확연히 차이가 났다. 또한, 이해의 다나카는 볼 넷 허용률 / 볼삼비 / ERA + / FIP + / WAR / WHIP / 피안타율 등의 비율 스텟과 세부 스텟, 세이버 스텟에서 모조리 가네코보다 우위였다. 특히 세이버 스텟은 ERA +가 무려 278에 WAR이 8.9로 가공할만한 성적을 내었다. 이처럼 클래식 스텟과 세부 스텟만 훌륭한게 아니라 세이버 스텟 어느 부분에서도 가네코가 우위를 점하는 부분은 거의 없었기에[133] 이견이 거의 없었던 것. 성적 측면에서 2008년과 다를 뿐 아니라 결정적으로, 2013년 가네코 치히로는 풀 로테이션을 돌아 29경기에 등판했기에 2008년 올림픽 차출로 한 달간 자리를 비워 세 경기 가량 볼륨 및 누적 스텟에서 손해 본 최종 25경기를 등판한 다르빗슈 유와는 상황이 다르다. 참고로, 다르빗슈 유의 경우에 비율 스텟은 이와쿠마와 거의 비슷하다. 세이버 스텟에서도 EAR+의 경우 이와쿠마와 동일한 213의 수치를 기록했으나 누적 세이버인 WAR에서 밀리는 정도기에 2008년의 다르빗슈 유와 2013의 가네코 치히로는 완전히 같은 케이스라고 볼 수 없다.
2.2.2.2. 2008년 다르빗슈 유 등판일지
그렇다면 정말 다르빗슈 유가 2008년 지독하게 승운이 없었을까? 실제 2008년 다르빗슈 유의 등판일지는 다음과 같다.3월 20일 : 9이닝 완봉승(팀은 1-0 승) / 3월 27일: 9이닝 무실점 ND (팀은 연장에서 1-0 승) / 4월 3일 : 7이닝 2실점 승 / 4월 10일 : 9이닝 완봉승(팀은 1-0 승) / 4월 18일: 9이닝 무자책 완투승(팀은 3-1 승) / 4월 24일 : 9이닝 2실점 ND(팀은 3-2 승) / 4월 30일: 7이닝 3실점 승 / 5월 7일: 8.2이닝 4실점(3자책) 패(팀은 3-4패) / 5월 14일: 8이닝 1실점 ND / 5월 21일: 7이닝 2실점 ND / 5월 28일: 8이닝 3실점 승 / 6월 4일: 9이닝 3실점 완투패(팀은 2-3패) / 6월 11일: 9이닝 1실점 완투패(팀은 0-1패) / 6월 17일: 7이닝 2실점 승 / 6월 27일: 7이닝 2실점 승 / 7월 3일: 8이닝 3실점 승 / 7월 11일: 9이닝 2실점 승(팀은 3-2승) / 7월 17일: 9이닝 1실점 승(팀은 3-1승) / 7월 24일: 8이닝 5실점 패(베이징 올림픽 출전 전 마지막 이닝이라 무리해서 165개 공을 던지며 완투하려다 만루홈런을 맞음) / 9월 2일: 8이닝 무실점 승(팀은 2-0승) / 9월 9일: 8이닝 1실점 승 / 9월 15일: 9이닝 4실점(3자책) 승(팀은 5-4승) / 9월 22일: 8이닝 무실점 승 / 9월 29일: 9이닝 1실점 승(팀은 2-1 승)
결과적으로, 16승 4패 4ND 기록. 당해 선발 등판은 24번이며 구원 등판 1회까지 합하면 총 25회 등판하였다. 자세한 피칭 내용은 다음과 같다.
- 9이닝 완봉: 2번
- 9이닝 소화 1점차 승: 4번
- 9이닝 소화 2점차 승: 2번
- 1점차 승 : 5번
- 2점차 승 : 3번
- 3점차 이상의 지원을 받은 경우 : 16승 중 8승
- 9이닝 완투패: 2번 (모두 한점차)
- 9이닝 무실점 ND
- 9이닝 2실점 ND
- 8이닝 1실점 ND
- 7이닝 2실점 ND
- 한점차 패배 : 2번
- 7이닝 이상 소화 기준 3자책점 이하 패배: 4패 중 3패
한점차 접전 승은 무려 5번이고, 완투패도 2번이나 있다. 9이닝 무실점 ND, 9이닝 2실점 ND, 8이닝 1실점 ND, 7이닝 2실점 ND처럼 본인은 잘 던지고도 팀 타자들의 득점 지원 저조로 인해 승을 못챙기는 경우도 있었고, 대체로 본인이 끝까지 잘던져야 가까스로 2점차 이내 승을 따낸 편이었으며 컨디션 난조로 본인이 4자책 이상으로 털린 날이면 여지없이 승리를 챙기지 못했다. 불펜 방화로 인해 승리를 날린 경기도 4번의 ND 중 3경기이다. 특히 완봉을 해도 9이닝 무실점 1:0 한점차 영봉승 같이 그나마 타자들이 점수를 쥐어 짜내야 이길 수 있는 경기도 2번이나 있었다. 윤석민상 수상 후보 1순위 급이며, 2008 퍼시픽 리그 선발 투수 중 어느 누구도 다르빗슈 유보다 승운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는 투수가 없었다.
이는, 이와쿠마의 등판일지와 비교하면 차이가 극명한 결과이다. 단적인 예로, 이와쿠마는 5월 23일 요코하마 전에도 8이닝 5실점을 해도 이겼다. [134] 심지어는 7월 6일 세이부 전에서, 5이닝 5실점으로 극심하게 부진했는데도 타선의 호조로 패전을 면했다. 이뿐 아니라, 당시 퍼시픽리그 5위인 라쿠텐 타자들이 유독 이와쿠마가 선발 등판하는날 호조를 보이며 큰 점수차로 이기는 경기도 많았다. [135] 당시 라쿠텐의 5위라는 팀 순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팀 전력 상 야수진과 투수진은 리그 최하위권이었지만, 이상하게 타격 지표[136]만은 상위권이었다. 이 덕에, 이와쿠마는 타격 지원 면에서는 풍족한 한 해를 보냈다.
단순히 득점지원률[137]만 봐도 그렇지만, 실제 등판일지만 봐도 유독 그 해 다르빗슈 유는 득점 지원이 부족했고 이와쿠마는 팀 전력에 비해 승운이 좋았다. 다르빗슈 유가 사와무라 상을 놓친 2008년 부터 2011년까지 모두 득점지원이 저조하다는 말이 나왔는데, 특히 그 원년인 2008년과 마지막년도인 2011년에 타자들의 지원이 극심하게 저조했다.
더군다나, 당해 이와쿠마가 본인 커리어 하이 기록인 퀄리티 스타트 기록을 살펴보면 QS가 23경기(그중 HQS19경기)로 QS%는 82.1%, HQS%는 67.9%였다. 반면, 다르빗슈 유의 경우 한술 더 떠 QS가 21경기(그중 HQS17경기)로 QS%는 87.5%, HQS%는 70.8%를 기록했다. 즉, 선발로 등판한 24경기 중 3경기를 제외하고는 모두 퀄리티 스타트를 기록했는데 위의 등판일지와 더불어 본다면, 이처럼 피칭 기록은 이와쿠마보다 다르빗슈 유의 근소 우위이지만 그 기록에 비해 승수 및 승률 면에서는 그 해 다르빗슈 유가 승운이 유독 없었다는 것을 방증하는 기록이다.
결론적으로, 다르빗슈 유가 2008년 타격 지원을 별로 못 받았다는 것은 득점지원률이라는 단순한 데이터에서 파생되어 나온 일차원적인 결론만은 아니며 실제 등판일지로 자세하게 찾아보면 등판 날 불펜 방화 및 타자들 지원 부족이 유독 극심한 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찌보면, 그것을 이겨내고 16승 4패를 기록했다는게 당시 다르빗슈 유의 위엄이라면 위엄이라고도 볼 수 있다. 물론, 이와쿠마의 21승 4패는 본인의 실력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나올 수가 없는 승수 및 승률이다. 그래서 그를 폄하해서도 안되지만, 그렇다고 다르빗슈 유의 능력 외(불펜 방화, 타격 지원 저조)인 일로 인해 발생한 결과가 저 승수 차이임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이처럼 그 능력 외의 일에 가깝다고 볼 수 있는 승수 및 승률 항목에서 우세한 이와쿠마이기는 하나, 이 이외의 피칭 기록 항목(탈삼진, 완투, QS%, HQS%)은 오히려 올림픽으로 한달간 자리를 비운 다르빗슈 유가 더 압도적인 기록을 남겼다는 점에서 이와쿠마의 사와무라 상 수상에는 여러모로 논란의 여지가 있다.
2.2.2.3. 이와쿠마 VS 다르빗슈 유
상술한 2008년 사와무라 상 수상 논란 외에도, 두 선수는 NPB 전성기 시절을 함께하여 자주 비교 대상이 되고는 했다. 일본에서 뛸 때는 이와쿠마가 다르빗슈 유보다 뛰어나다는 평가가 있기도 했지만 08년의 이와쿠마 성적을 5년간 연속으로 찍은 선수가 다르빗슈 유다. 일본 현지에서도 다르빗슈 유에 대한 평가가 더 높고 적어도 메이저리그 성적[138]을 제외한다면 두 투수는 비교 대상이 아니다. 결정적으로 이와쿠마는 2008년 급의 성적을 두번 다시 찍지 못했다.[139]이와쿠마는 MLB 시절 한 두시즌으로 한정하면 다르빗슈 유와 동급의 성적을 내기도 했는데, NPB 전성기 성적만을 보면 확연히 차이가 난다. 우선, 성적만 놓고 봐도 두 투수는 비교 대상이 아닌데다가 맞대결 결과까지 놓고 보면 더욱 이와쿠마가 밀린다.
2.2.2.3.1. 맞대결 역사
다르빗슈 유와 이와쿠마는 2007년 부터 2009년, 2011년에 연당 한번 그리고 2010년에 한 해에 두번 총 6번 맞대결을 펼쳤다. 결과적으로, 다르빗슈 유는 3승 2패 1ND을 기록하였고 이와쿠마는 2승 2패 2ND을 기록해 서로간의 맞대결에서는 다르빗슈 유가 근소 우위. 다르빗슈 유는 2005년에 데뷔하였으나, 각성 시작의 해인 2007년 이전 2005년과 2006년에는 이와쿠마와 맞대결이 없었다. 참고로, 만날 때마다 명품 투수전을 연출한 두 투수였는데 다르빗슈 유의 경우 3승 중 2승이 완봉승이고 이와쿠마는 2승 중 1승이 완봉승이다. 특히, 다르빗슈 유는 2패가 모두 완투패이며 이와쿠마는 2패 중 1패가 완투패다.첫 선발 맞대결은 2007년 8월 29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라쿠텐 타자들이 다르빗슈 유를 상대로 3회에만 석 점을 뽑아냈고 5회까지 1실점으로 잘 던지던 이와쿠마가 3-1 스코어로 팀이 앞서 승리 투수 요건을 챙겼다. 그러나, 이와쿠마는 6회에만 3실점으로 무너지고 강판되어 스코어는 3-4로 니혼햄이 다시 앞서 다르빗슈 유가 승리 투수 요건을 가져오게 된다. 그런데,
두 번째 맞대결은 2008년 4월 10일에 있었던 대결로 이 날은 엄청난 투수전이 펼쳐졌다. 두 투수는 5회까지 노히트로 최고의 피칭을 보여줬으며 이와쿠마는 7회에 상대 타자의 희생플라이로 인해 1실점 하기는 했으나, 8회까지 3피안타 5탈삼진으로 잘 던지고 있었다. 그런데, 다르빗슈 유는 이에 한술 더 떠 9이닝 6피안타 3탈삼진 무실점 완봉으로 승리를 거두게 되어 이와쿠마는 8이닝 1실점 완투패하게 된다.
세 번째 맞대결은 2009년 4월 3일 개막전에 벌어졌으며, 1회부터 페르난도 세기뇰의 투런을 포함 대거 3점을 뽑아준 타자들에게 이와쿠마는 6이닝 1실점으로 보답하여 승리 투수가 된다. 반대로, 다르빗슈 유는 121개의 공을 던지며 9이닝 8피안타 5탈삼진 3실점으로 졌잘싸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었지만 팀 타자들이 상대 라쿠텐 투수들에게 꽁꽁 막혀 3-1의 스코어로 패하는 바람에 패배를 돌이킬 수는 없었다. 결국 다르빗슈 유는 9이닝 완투패.
2010년에는 두 번의 맞대결이 있었다. 두 투수의 네 번째 맞대결은 2010년 4월 24일에 있었다. 이 날, 이와쿠마는 엄청난 피칭을 보여주었다. 라쿠텐 팀 타자들이 2회 한점에, 6회 두점 총 석 점을 다르빗슈 유로부터 득점해주었고 그에 이와쿠마는 마운드에서 9이닝 2피안타 6탈삼진 완봉승으로 보답한다. 다르빗슈 유는 8이닝 5피안타 6탈삼진 3실점(1자책)으로 호투했지만, 팀 타자들이 이와쿠마에 틀어막히는 바람에 또 다시 작년 맞대결에 연이어 완투패 한다.
다섯 번째 맞대결은 2010년 5월 8일에 일어났는데, 그야말로 두 천재 투수의 명승부였다. 9회까지 타자들은 두 투수를 공략하지 못했고 이와쿠마는 특유의 볼 무브먼트로, 다르빗슈 유는 강력한 구위의 직구를 앞세워 타자들을 압도했다. 결과적으로, 다르빗슈 유는 9이닝 6피안타 11탈삼진 무실점 ND, 이와쿠마는 9이닝 7피안타 7탈삼진 무실점 ND을 기록했다. 각각 156개, 127개의 많은 공을 던졌지만 정규 이닝 내로 승부를 가리지 못했고 두 투수가 모두 9회를 끝으로 내려간 뒤, 연장 10회말 이나바 아츠노리의 끝내기 안타 덕에 니혼햄이 1-0 스코어로 신승을 거둔다.
마지막 맞대결은 해를 넘겨 2011년 5월 10일 벌어졌다. 이번에도 보란듯이, 두 투수의 뛰어난 피칭이 돋보이는 명품 투수전이었다. 5회까지 팽팽한 0의 행진이 이어지던 중, 6회에 이와쿠마는 상대 좌익수 나카타 쇼에게 센터 직격 투런 홈런을 내준다. 이후 9회 2사까지 131개 공을 던지며 더 이상의 실점없이 마운드를 지켰지만, 이와쿠마는 단 원아웃만을 남겨두고 어깨 통증을 호소하여 강판되었다. 반면, 다르빗슈 유는 9회까지 무실점으로 마무리하여 2-0의 스코어로 완봉승을 챙겼다. 이와쿠마는 8과 3분의 2이닝 9피안타 7탈삼진 2실점 패전. 다르빗슈 유는 9이닝 6피안타 15탈삼진[140] 무실점 완봉승 기록.
2.2.2.3.2. 총평
맞대결 결과든, 단순한 성적이든 어떤 면에서든 NPB 시절에는 다르빗슈 유가 우위고 이와쿠마가 밀린다는 것이 중론이다.우선 통산 성적 부터 살펴보면, 이와쿠마가 11시즌 동안 NPB에서 쌓은 누적 WAR은 44.2로 NPB에서 7년만을 보낸 다르빗슈 유가 쌓은 WAR 45.3보다도 밑이다. 부상으로 인해 이와쿠마가 여러 시즌을 날린 것을 감안하기도 어려운 것이, 선수의 커리어에 있어 부상을 입지 않는 것도 실력이라는 것이 중론이며 그것 조차도 실력이라고 보는 것이 지배적인 관점이다.
상술한 NPB 통산 성적 뿐 아니라, 서로 간의 최고 시즌만 놓고봐도 다르빗슈 유의
이와쿠마의 최고시즌 WAR은 8.3으로 다르빗슈 유가 최고 전성기에 기록한 WAR 11.5와 매우 큰 차이가 있다. 자세하게 살펴봐도, 이와쿠마의 최고 시즌인 2008년 시즌은 다르빗슈 유의 최고 시즌인 2011 시즌에 승수를 제외하고는 어느것도 우위인점이 없다. 다르빗슈 유가 2011년 기록한 WAR 11.5의 기록은 1970년 이후 규정 이닝을 채운 선발 투수 중에는 그 누구도 기록한 적이 없으며, 그나마도 그보다 낮은 WAR 10.0 조차 범접한 선수가 없었다.[141] 그나마도 1960년대같이 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그나마 다르빗슈 유와 비빌만한 WAR 11대를 기록한 고대
또한, 2007년부터 2011년을 모조리 살펴봐도 1점대 평균자책점은 기본에, 탈삼진은 그 갯수나 비율면에서 2008 이와쿠마보다 매우 큰 차이로 위인 다르빗슈이다. WHIP나 k/9, 볼삼비, 피안타율, FIP, ERA+ 등 세부지표까지 따진다면 더욱 비교 대상조차도 못된다. 단순히 생각해봐도, 이와쿠마는 2008년 외에는 1점대 평자책을 두번다시 기록하지 못했으며 0점대 WHIP[143]도 두번다시 기록하지 못했다. 특히, 2011시즌의 다르빗슈 유는 3.01이라는 저조한 득점 지원율을 이겨내고 저 정도 승률을 기록했다는 점에서 더욱 대단하다고 볼 수 있다.
아이러니한 점은 2011년 다르빗슈 유의 동료 밥 켑펠은 퍼시픽 리그 1등 수준의 5.69의 득점 지원율을 등에 업고 3점대 평자책에도 불구, 1점대 평자책 다르빗슈 유와 얼마 차이 안나는 14승 7패를 기록했다는 점이다. 김혁민상 후보에 올라도 될만할 정도인데, 한 팀에서 두 명의 선발 투수에게 이렇게 타자들이 큰 차이의 득점 지원을 해줬다는게 아이러니하다. 그나마 2008년은 다르빗슈 유를 포함 모든 니혼햄 선발 투수들이 모조리 퍼시픽 리그 바닥권의 득점 지원율을 기록하기라도 했지, 2011년은 (다르빗슈 유 입장에서는) 불공평 할정도로 니혼햄 타자들이 유독 다르빗슈 유가 나오는 경기에만 득점 지원이 저조했다. 물론, 다르빗슈 유가 던지는 날 상대 팀도 에이스 선발 투수를 내보내기에 그런 점이 고려되지 못한 데이터인 것은 고려해야한다.
그리고 그 2008년 이와쿠마가 최고 몬스터 시즌을 보냈던 때의 스텟 조차도 같은 시즌의 최고 전성기 시즌이 아닌 2008년 다르빗슈 유가 세부 지표는 오히려 이와쿠마보다 나았고 소화한 이닝 수는 서로 간에 단 1이닝 차로 비슷한데다가 10완투 2완봉 208탈삼진으로 볼륨도 오히려 다르빗슈 유가 나았다. 심지어 다르빗슈 유는 그해 베이징 올림픽 대표팀 차출로 인해 한달간 자리를 비웠고 그 결과 이와쿠마보다 세 경기를 덜 뛰었다. 덜 뛴 성적에도 불구하고 다르빗슈 유가 남긴 누적 스텟이나 볼륨 스텟이 오히려 근소 우위라는 점을 고려 해야 한다. 더불어 다르빗슈 유의 2008년 성적은 그가 NPB에서 보낸 전성기 시즌 중 2011년, 2007년, 2009년보다도 못한 성적이라는 것까지 고려하면 이와쿠마 최고 시즌 기록이 다르빗슈 유가 비교적 못했던 시즌인 2008년의 기록과 비교해, 근소 우위 혹은 어떤 면에서는 열세 수준이므로 두 투수 간에 누가 더 뛰어난 투수인지 조차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것 부터 다소 무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어찌보면, 다르빗슈 유의 2011년 성적은 2021년 커리어 최고 시즌을 보낸 야마모토 요시노부나 다나카 마사히로의 한 시즌 승률 100% 무패의 전설 2013 시즌을 데리고 와서 비교해야할 정도인데 이와쿠마와의 비교는 이와쿠마 입장에서 가혹하다고 느낄 수도 있을 정도의 차이다.
그러나 당대 NPB 최고의 투수가 다르빗슈 유라는데에 이견을 찾아보기는 힘들지만 단순히 2008년 기록만을 놓고보면, 승률과 승수 그리고 WAR은 이와쿠마의 우위이므로 어떤 지표를 더 중시하고 어떤 것을 투수의 덕목 중 더 최우선 순위로 두느냐에 따라 누가 더 2008년에 좋은 투수였는지 각자 견해가 다를 수 있다. 특히, 이와쿠마는 20년 만에 하위권 팀에서 나온 MVP 수상자였고 2008년 투수 3관왕이기도 했던데다, 아무래도 시대가 시대이다 보니 승수[144]가 압도적이었던 이와쿠마가 평가에 있어 더 우위에 서기는 쉬웠다.
2.2.3. 2009 ~ 2010 : 리그 정상권 기량을 유지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도 대표로 선발되어 결승 직전까지 한국전에서의 1실점 외에는 실점이 없었으나 팀이 저 1실점 때문에 1-0의 스코어로 팀이 지는 바람에 평균자책점 0점대의 패전투수가 되었다. 결승전에도 선발로 등판하여 7⅓이닝 2실점으로 한국타선을 묶었고 팀이 3-2로 앞서 승리투수 요건을 갖췄지만 9회 마무리로 등판한 다르빗슈 유가 블론하는 바람에 승리를 건지지 못했다. 다만, 팀은 이치로의 결승 2타점 덕에 5-3 스코어로 한국을 결승에서 꺾고 WBC 2연패에 성공하였으며, 이와쿠마도 이 덕에 우승 반지를 끼게 된다. 최종 4경기 20이닝 12피안타 15탈삼진 6볼넷 3실점 ERA1.35 WHIP 0.90의 훌륭한 성적으로 베스트 팀에도 선정된다.[145]2009년에는 3년 연속 5번째의 개막전 선발 투수로 활약하면서 6이닝 1실점 호투해 상대 선발 다르빗슈 유와의 선발 싸움에서 승리함과 동시에 오랜만에 개막전 승리 투수가 됐다. [146] 4월까지[147]는 평균자책점 1.38을 기록해 전년도 모습을 다시금 보이나 싶더니, 5월부터[148]는 5월 한달 평균자책점 3.71로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6월 초[149]까지 부진한 모습이 거듭된데다가 설상 가상으로 6월 18일에는 오른쪽 팔꿈치 통증 때문에 짧은 치료를 받게 된다. 한달 여간 2군에서 재활을 거치고 다시 담금질 하여 7월 12일 소프트뱅크전에 복귀하였는데 5이닝 7실점으로 부진한 모습을 보이며 패전 투수가 되었다. 특히 4회에 마쓰나카 노부히코, 다무라 히토시, 다노우에 히데노리, 5회에 고쿠보 히로키 등 4명의 선수들로부터 개인 최다인 1경기 4개의 피홈런을 기록하였다. WBC 여파 때문인지 전년도는 시즌 내내 3피홈런 밖에 없던 그였지만 2009년에는 이처럼 단 한경기에서 4개 홈런을 내줄 정도로, 여름에 체력이 떨어지고 컨디션이 무너진듯한 모습을 보였다. 이를 비롯해, 앞서 기술하였듯 팔꿈치 통증 및 컨디션 난조때문에 7월[150]에 평균자책점 6점대로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부상에도 불구하고 실력은 어디 안가는지 8월 부터 재차 좋은 모습을 보여 반등하기는 했다.[151] 이 호조가 9월 초까지[152]는 이어졌으나, 9월 중순부터 시즌 막판인 10월 초까지[153]는 제대로 된 퐁당퐁당을 보여주며 기복이 심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몇몇 경기에서 작년만한 포스를 보여주기도 했고 리그 정상권 선발 투수다운 기록을 남기기는 했지만, 전반적으로 전년도만 못한 아쉬운 모습으로 시즌을 마감했다. 리그 최다 피안타수를 기록하는 등 전년도만 못한 모습을 보인채 시즌을 마감했지만, 15승의 다나카 마사히로와 13승을 기록한 나가이 사토시와 함께 13승을 기록한 이와쿠마는 팀의 정규시즌 2위[154]에 일정 부분 공헌하기는 했다.
최종 성적은 24경기 13승 6패 169이닝 동안 121탈삼진 ERA 3.25 WHIP 1.31 WAR 3.8기록. 부상 때문에 로테이션도 종종 걸러 풀출장한 전년도 성적이나 그의 명성에 비해서는 분명 아쉬운 성적이었지만 승률도 나쁘지 않았고 WAR을 보면 전반적으로 리그 정상권 선발 투수다운 성적을 남기기는 했다. 다만, 2008년이 워낙 몬스터 시즌이라 바로 다음해에 기록한 이러한 성적이 평범하다 못해 못던진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포스트 시즌인 소프트뱅크와의 클라이맥스 시리즈 제1 스테이지에서는 1차전에 등판하여 9이닝 4실점 완투승을 거뒀다. 상대 선발 스기우치 도시야는 1회부터 홈런을 맞는 등 라쿠텐 타자들의 호조 덕에 이와쿠마는 최고의 모습이 아니었지만 승리를 챙길 수 있었다. 2차전에서는 다나카 마사히로의 호투 덕에 4-1로 소프트뱅크를 누르고 다음 라운드 제2 스테이지로 진출했는데, 니혼햄을 만나게 되었다. 2차전에 등판한 이와쿠마는 8이닝 3실점으로 전 경기와 비슷한 활약을 보였으나 이번에는 전 경기와는 반대로 라쿠텐 타자들이 9이닝 동안 1득점으로 침묵해 정 반대의 결과로 완투패 당하고 말았다. 팀은 부상으로 인해 제외된 다르빗슈 유가 없는 니혼햄에 밀려 일본시리즈 진출에 실패한다.
그 다음 시즌인 2010년은 개막전부터 눈물겨운 시작을 했다. 3월 20일 오릭스와의 개막전에서는 가네코 치히로와의 투수전 끝에 8이닝 1실점 완투패하였다. 팀도 1-0 영봉패 당하는 바람에 1실점 패전투수가 되고 말았다. 곧바로 다음 경기인 3월 27일 세이부전에서도 난감한 상황에 놓였다. 7이닝 3실점 호투하며 마운드에서 내려왔고 팀도 앞서 승리투수 요건을 갖췄으나, 이와쿠마가 내려간 9회에만 불펜 방화로 3실점하며 역전을 당해 승리가 날라가 버리고 팀도 6-4 스코어로 패하고 만다.
4월 부터[155]는 다행히 승리를 챙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5월부터는 다시 불행한 상황에 놓이게 되는데 9이닝 무실점 ND, 8이닝 3실점 완투패, 7.1이닝 3실점 ND, 9이닝 2실점 ND 등 본인이 잘 던져 놓고도 5월 한달[156]은 승운이 지독리만치 없었다.
이러한 불운은 6월까지 이어져 7이닝 4실점 ND, 8이닝 2실점 ND, 8이닝 2자책 패전등 6월[157]까지 승운이 따라주지를 않았다. 심지어, 7월[158]에도 7이닝 2실점, 7이닝 3자책 등 본인이 잘 던져도 승운이 따라주지 않아 후반기 시작전 6승 5패로 피칭 퍼포먼스에 비해 저조한 승률을 기록했다. 8월[159]부터 시즌 막판 9월[160]까지는 그나마 사정이 나아져 초반기처럼 암울한 득점 지원은 조금 덜했고 초반기에 비해 비교적 좋은 모습으로 시즌을 마무리 지었다.
2010년에는 본인은 정상권 기량을 유지했으나 2008년과 달리 타자들의 지원이 뒷받침 되지 못했다. 대표적으로, 개막전 8이닝 1실점 패전을 비롯해 9이닝 무실점 ND, 8이닝 3실점 완투패, 7.1이닝 3실점 ND, 9이닝 2실점 ND 등 이 해 유독, 타석 지원이 미비한 경우가 많았는데 리그 최하위에 해당하는 기록인 득점 지원률 3.46으로 이와쿠마는 유독 난감한 상황에 많이 놓이기도 했다.
승운이 없기는 했지만, 승수 및 승률을 제외하고 비율 스텟, 세부 스텟을 보면 훌륭한 시즌이었다. 이닝 소화도 201이닝으로 본인 커리어에서 MLB 시즌 포함 세번째로 많은 이닝을 소화한 시즌[161]이기도 하다. WAR도 6.00으로 본인의 NPB 커리어 동안 두번째로 높은 기록을 남긴 시즌이기도 했다. 여러모로 2008년 다음가는 기록을 남긴 해가 2010년이다. 다만, 그의 NPB 커리어에서 최고의 해인 2008년을 제외하더라도, 임팩트 면에서는 리그 12연승을 기록하고 15승 2패라는 높은 승수 및 승률을 기록한 2004년 시즌에 밀려 이와쿠마의 커리어에서 잘 던진 해로 이해가 기억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2010년보다는 상술한 2004 시즌이나 개화의 원년인 2002년과 리그 상위권 투수로 도약한 2003년이 주로 회자된다. 특히, 라쿠텐 시절로만 국한하더라도 잘 던진 2008년과 못 던졌지만 비운의 에이스로 기억되는 2005년[162] 때문에 이와쿠마의 2010년 활약상이 묻히는 감이 있다.
2.2.4. 실패로 끝난 포스팅 이적 시도
2010년 시즌을 마친 후,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메이저리그 진출을 시도했었고 그 결과로 오클랜드 애슬레틱스가 낙찰됐으나 협상은 결렬되었다. 이와쿠마의 에이전트가 재협상은 없을것이라고 선언하여 2011년에도 라쿠텐 잔류확정.이적이 실패로 돌아간 이유는 오클랜드가 처음부터 이와쿠마에게 제시한 연봉을 조금도 양보하지 않아 협상이 결렬되었다는 얘기도 있고 이와쿠마 본인이 오클랜드 구단을 별로 탐탁치 않게 생각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미국 언론에서 이와쿠마가 배리 지토급의 연봉을 요구했다는 루머도 있었다. 정작 일본발 보도에선 이런 얘기가 없었고 오클랜드가 마지막까지 일본에 있었을 때의 연봉과 거의 차이가 없는 수준인 4년 $15M 정도의 오퍼를 고수했는데 이는 미국의 세율까지 감안하면 오히려 연봉이 삭감이 되는 셈이어서 1년에 최소 $8M 이상을 원한 이와쿠마가 강한 불만을 가졌다는 얘기가 있었다.
한편으로 오클랜드의 입장에서 보면, 머니볼의 마왕 빌리 빈이 포스팅 시스템의 구조를 교묘하게 악용하여 고춧가루 입찰에 성공했다는 음모론이 있다. 같은 시기 니시오카 츠요시에 대한 교섭권을 따낸 미네소타 트윈스 등을 포함하여 많은 팀들이 이와쿠마를 노리고 있었는데, 스몰마켓 팀인 오클랜드는 $16M이라는 굉장한 거금을 베팅한 것으로 알려졌다.[163]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일단 포스팅 시스템에서는 입찰가를 많이 적어내는 팀이 독점 교섭권을 얻는데 만약에 협상이 파토나면 입찰금은 전액 보전된다. 2010년에 일본에서 돌아와 대성공한 같은 서부지구의 텍사스 투수인 콜비 루이스의 사례를 보고 충격과 공포를 느낀 빌리 빈이 다른 팀을 [164]견제하기 위해 왕창 입찰금을 질러서 교섭권만 따놓고 정작 이와쿠마에게는 일본에서의 연봉과 비슷한 금액에 4년 노예계약을 제시하였다는 것. 당연히 이와쿠마는 거절할 수밖에.[165]
그리고 오클랜드는 이와쿠마가 당장 필요 없었다(!) 선발 로테이션에선 좌완 영건 브렛 앤더슨, 2010년 올스타 우완 트레버 케이힐[166], 깜짝 200이닝 + 평균자책점 3.23 + 15승을 찍은 좌완 유망주 지오 곤잘레스, 역사상 19번째 퍼펙트 게임을 이뤄내고 190이닝 이상을 소화하며 11승을 달성한 댈러스 브레이든이 버티고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선발투수가 급한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빌리 빈이 이런 똥배짱을 부릴거라 예상하지 않았던 사람들도 쓸만한 선발인 이와쿠마를 영입한다면 바로 타선보강 트레이드로 써버릴 것이라 예상했던 만큼 이와쿠마 입장에서는 자신에게 불리하기만 한 이런 계약을 체결할 필요는 없었다. 1년 후면 FA라서 자기 맘대로 골라서 갈 수 있기도 하고. 하지만 오클랜드도 선발진 상황이 굳이 이와쿠마가 급히 필요가 없었다지만 빡빡한 재정에 최대한 줄 수 있는 돈을 제시한 건 분명하다. 그리고 중요한 건 다른 AL 서부팀들은 오클랜드의 포스팅 입찰가 1600만 달러보다 적게 입찰했거나 아예 입찰을 안 했으니 오클랜드보다 더 좋은 조건을 제시했을 거라고 무조건 단정할 수도 없다. 그리고 빌리빈은 나카지마의 계약도 그렇고 세스페데스 계약도 그렇고 삘이 오는 순간 지르는데 전혀 거리낌이 없는 사람으로 이런 말도 안되는 음모론은 디시 커뮤니티에서나 나오는 헛소리이다. 당장 다음해 이와쿠마가 1년 1.5m의 계약, 그 다음해는 2년 14m으로 시애틀과 계약한 상황을 보면 딱히 오클랜드가 제시한 금액이 낮은 금액이 아니었고.
2.2.5. 2011: NPB에서의 마지막 전성기
오프시즌 소동이 지나가고, 2011년 개막전 8.1이닝 3실점으로 개막전 승리 투수가 되었으며 4월까지 월간 MVP를 차지하는 등 2008년과 2009년에 그랬던 것처럼 4월까지[167]는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5월에도 그 모습이 유지[168]되었는데 5월 3일 소프트뱅크전에서 7이닝 3실점 호투하였지만, 상대 선발 와다 츠요시가 9이닝 3피안타 11탈삼진으로 라쿠텐 타자들을 꽁꽁 묶어 완봉승을 거두는 바람에 이와쿠마는 패전을 면치 못했다.한편 5월 10일에는 니혼햄 전에서 상대 선발 다르빗슈 유와의 엄청난 투수전이 벌어졌다. 5회까지 팽팽한 0의 행진이 이어지던 중, 6회에 이와쿠마는 상대 좌익수 나카타 쇼에게 투런 홈런을 맞아 버렸고, 이후 끝까지 두 투수 모두 점수를 내주지 않다가 이와쿠마는 9회 단 원아웃만을 남겨두고 어깨 통증을 호소하여 8.2이닝 2실점의 기록으로 강판되었고 다르빗슈 유[169]는 9회말 끝까지 실점없이 마무리하여 완봉승을 챙겼다. 5월 17일 곧바로 일주일 뒤에 열린 경기에서 선발로 등판하였지만, 어깨 통증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듯 5이닝 무실점 공 39개 만으로 강판되었다. 이후 오른쪽 어깨 치료 때문에 2개월 간 엔트리에서 제외되었다. 아쉬운 점은 이때까지 평균자책점 1.72로 2008년에 버금가는 성적을 보여주었는데, 부상으로 많은 기간 동안 1군에서 모습을 감춰야 했던 것이었다.
결국 전반기까지는 복귀를 하지 못했고, 후반기 개막전인 7월 27일 소프트뱅크전에 다시 복귀해 7이닝 1실점 좋은 피칭으로 상대 선발 와다 츠요시와의 대결에서 승리함과 동시에 팀도 승리하여 복귀하자마자 선발승을 챙길 수 있었다. 또한, 이 복귀 경기부터는 유리의 에이스기 때문에 관리 차원에서 80~100개의 공으로만 한 경기를 마쳤다. 8월 한달[170]도 평균자책점 2.25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9월[171]부터는 부상의 여파가 다 사라지지 않은 듯 시즌 막판까지 9월 - 10월 두달 평균자책점 3.82로 부진하여 시즌 평균자책점도 대상승. 특히, 마지막 경기였던 10월 7일 롯데전에는 5이닝 6실점(5자책)으로 무너지는 등 어깨 통증이 완전히 다 낫지는 않은듯한 모습[172]을 보였고 결국 힘에 부치는 모습을 보이며 시즌을 아쉽게 마쳤다.
유리몸 기질이 있어 복귀 이후에는 예전처럼 완투를 하지는 못했지만, 어떻게 보면 이 시즌을 기점으로 이와쿠마가 페넌트 레이스 동안 전략적으로 무리 하지 않고 욕심을 내려놓는 듯한 모습을 보인 시즌이기도 했다. 그 전에는, 종종 무리해서라도 완투하려 했었지만 부상에서 복귀한 2011 NPB 시즌 후반기 부터 MLB 시즌까지 완투 횟수는 단 1회다. 그 1회도 노히트 노런을 기록한 유명한 경기이며 그 이외에는 무리해서 완투를 하려하지 않았다. 킨테츠 시절 및 라쿠텐 신생팀 시절 수많은 경기에서 많은 공을 뿌리며 밥먹듯이 완투하여 몸이 상할대로 상한 이와쿠마가 NPB 커리어 막판에 가서야 비로소 무리를 하지 않고 욕심을 내려 놓기 시작했다는 데에 의의가 있던 시즌이었다.
'던지면 던질수록 어깨는 단련된다'는 일본식 피칭이론을 신봉하였던 마쓰자카[173]처럼 만약 이와쿠마가 MLB에 건너가서까지 그의 NPB 커리어 초창기처럼 무리하였더라면, 2013년과 2014년 시애틀에서 제 2의 전성기를 구가한 그의 모습을 보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이 시기에 이와쿠마가 어떠한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이 시즌 후반기의 모습을 기준으로 그 이전과 이후의 모습이 사뭇 달라진 것은 사실이다. 그래도 작년 시즌인 2010년 아니 하다 못해 2011년 시즌 초반기[174] 까지는 많은 공을 던진 경기가 종종 있었다. 2011년 후반기 부터는 상술하였듯이 무리를 하지 않고 관리 차원에서 한계 피칭수를 그 전보다 많이 줄였다. 이 변화가 MLB에 건너가서 그나마라도 특유의 볼 무브먼트를 유지해 더 오래동안 좋은 피칭 퍼포먼스를 이어갈 수 있게 된 긍정적인 변화 요소라고 해석할 수 있다.
가정은 의미없지만, 마쓰자카가 변화를 꾀하고 이와쿠마가 변화를 꾀하지 않았다면 둘 사이의 MLB 커리어는 뒤바뀌었을 수도 있다. 마쓰자카의 경우 대표적인 일화로, 선발등판을 앞두고 롱토스와 불펜피칭을 같은 날에 하는 습관이 있었는데, 이것을 두고 어깨가 소모되고 부상우려가 있다며 레드삭스 구단이 금지시켰고 일본식 훈련을 고집하려는 마쓰자카가 반발하면서 소속팀과의 불화설이 돌기도 했다. 게다가, 마쓰자카는 본인의 부진에 대해 일본과 메이저리그의 트레이닝 시스템 차이 때문이라고 밝힐 정도로 미국식 훈련 및 관리법에 회의적이었다. 반면, 이와쿠마는 메이저리그식 피칭 관리 시스템을 적극적으로 수용해 몸관리 뿐 아니라, 경기 이전 불펜 피칭 투구수까지 관리하는 철저한 노력을 했다. 이러한 이와쿠마의 성향을 엿볼 수 있는 사례가 바로 완곡하게 일본의 야구 시스템과 훈련 방법에 대한 비판한 점.
물론, NPB 커리어나 성적 그리고 국가대표 커리어까지 고려해 MLB로 건너가기 전에는 단연코 마쓰자카가 이와쿠마보다도 위 클래스의 투수였다. 이와쿠마가 11시즌 동안 NPB에서 기록한 WAR은 44.2로 마쓰자카가 MLB로 건너가기 전 여덟 시즌 동안 NPB에서 기록한 WAR인 46.7보다도 낮은 기록이다. 즉, 세 시즌이나 덜 뛰었는데도 오히려 WAR은 마쓰자카가 앞서는 모습에서 서로간의 비교는 비교 자체가 큰 의미가 없을 정도로 NPB 시절 두 투수 간의 차이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 MLB로 건너가기 전 마쓰자카의 국가대표 커리어까지 합치면 이와쿠마와의 격차는 더 커진다.
하지만, 상술한 이와쿠마의 좋은 방향으로의 변화가 전체 커리어에서의 두 투수간의 평가가 완전히 뒤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둘 다 MLB로 건너가고 나서는 BWAR 기준으로 마쓰자카는 MLB 여덟 시즌 동안 9.3을 기록했고 이와쿠마는 그보다도 두 시즌 덜뛴 여섯 시즌동안 MLB에서 마쓰자카가 기록한 것 대비 거의 2배에 가까운 17.3의 BWAR을 기록했다. 이번에는 정반대로 비교가 의미 없을 정도로 MLB 커리어에서 큰 차이가 발생하며 두 투수간의 커리어에 대한 평가가 송두리째 바뀌었다.
여하튼, 최종 성적은 17경기 6승 7패 119이닝 동안 90탈삼진 ERA 2.42 WHIP 1.05 기록하며 훌륭한 비율 스텟 및 세부 스텟을 남겨 부족한 볼륨 및 누적스텟을 어느정도 상쇄하며 MLB를 건너가기 직전, 유종의 미를 거뒀다. 이 시즌은 이와쿠마가 NPB에서 보여준 사실상 마지막의 전성기 시즌[175]이자 NPB 1군에서의 마지막 모습이기도 했다.
2.3. 메이저 리그 포스팅
2011년 시즌 종료 이후 라쿠텐이 챙기는 포스팅비는 한푼도 없는 완전한 FA로서 MLB의 문을 다시 두드렸다. 전 해 오클랜드에 가로막혔던 시애틀 매리너스가 1년간 150만불[176]의 계약을 제시하였고, 이와쿠마도 이에 동의하여 입단계약을 체결하였다. 연봉 3억엔 정도를 받던 이와쿠마 입장에서는 오히려 연봉을 절반이나 깎게 된 셈이고 오클랜드가 앞서 제시했던 금액보다도 못한 계약 내용이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2011년에 어깨 부상이라는 민감한 이슈 때문에 등판경기수와 이닝이 확 줄었고, 나이도 2012시즌엔 만 31세라 시애틀이 몸값을 대폭 후려쳤지만 이제 이번 기회를 놓치면 더이상 미국 진출의 기회는 없기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로 계약한 것. 대신 단년계약으로 잘하면 연봉을 확 올려받을 수 있고, 못해도 일본으로 빠르게 돌아갈 수 있도록 FA재수 형태를 취한 계약.이 계약을 통해 일본프로야구 선수들의 몸값 거품이 많이 빠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다만 이중모션이 MLB에서 다시 태클을 받을 수도 있어서 성공에 있어 위험요소라 할 수 있다는 평도 있었지...만 이 몸값은 매리너스 입장에서는 어차피 로또 비용이다.[177]
2.4. 시애틀 매리너스 시절
시애틀 매리너스 시절 |
2.4.1. 2012년
그러나 입단 시의 예상과는 달리 매리너스 스프링캠프가 진행되면서 헤수스 몬테로 트레이드로 온 헥터 노에시나, 마이너 계약한 케빈 밀우드 등과의 선발 경쟁에서 밀려나 2012시즌을 일단 불펜 롱릴리프로 시작하게 되었다.2012년 시즌 초중반까진 빠른 볼 구속도 평속이 90마일을 겨우 넘기는 등 영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이며 패전조에서 벗어나질 못하여 결국 매리너스가 지른 로또는 역시 로또로 끝나는 모양새...로 보였다. 그러나 선발로 전환하기 시작한 7월부터 무섭게 반등하여 시즌 최종 성적은 125⅓이닝 투구, 9승5패2세이브, ERA 3.16, 탈삼진 101을 기록했다. 그 중 선발로 등판한 16경기의 평균자책점은 2.65였다. 시애틀이 일찌감치 하위권으로 쳐져 주목을 못 받아서 그렇지 시즌 중반부터 선발로 전환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매우 준수한 성적. 이로써 일단 메이저리그에 대한 적응을 순조롭게 끝내고 풀타임 선발을 맡게 될 것으로 예상되는 2013시즌이 기대되었다. 팀에서도 그 점을 높이 사서 시즌 종료 후 2년간 $14M[178]이라는 여전히 매우 싸지만 그래도 전 보다는 대우를 받는 재계약을 체결했다.[179]
2.4.2. 2013년
지난 대회에 이어 2013 WBC에 합류할 것을 요청받았지만 대표팀 합류를 고사했다. 일본 야구팬들은 지난 시즌 내내 부상으로 고생한 그를 이해한다는 반응이 주를 이루었다. 2013시즌엔 완전히 메이저리그에 적응했음을 과시하듯 전반기까지 20경기동안 ERA 3.02 131⅓이닝을 소화하며 펠릭스 에르난데스와 더불어 팀 선발진의 쌍두마차로 맹활약했다. 이 때문에 다시금 과거 일본에 있었을 때처럼 다르빗슈가 더 낫냐, 이와쿠마가 더 낫냐 논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또한 올스타에도 선발되었으나, 올스타전 직전에 선발등판을 했기 때문에 규정상 출전하지는 못했다.다만 전반기 활약에 대해 마냥 긍정적인 시선으로 보지 않는 이도 많았는데, 이는 전반기 동안 홈런을 21개를 맞으면서 제대로 된 홈런공장장의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BABIP도 .235에 불과하고 잔루율도 높아서 전반기 FIP는 ERA에 비해 높은 3.87. 시즌 초만 해도 ERA가 1점대 ~ 2점대 초반에서 놀았으나 전반기 막판에 털렸다. 아무래도 어깨부상 전력으로 한계 투구수가 많지 않다보니 홈런을 맞을지언정 볼넷을 주지 않으려고 존에 쑤셔박는 투구를 했던 것이 원인이라는 분석. 하지만 그러한 우려를 불식시키듯 후반기에 다시 반등하여 시즌이 끝났을 땐 14승 6패에 219.2 이닝 ERA 2.66 bWAR는 7을 찍으며 AL 투수 1위, 메이저리그 투수 전체 2위라는 흠좀무한 성적을 올렸다.[180] 아메리칸리그 평균자책점 3위로 시즌 최종 등판을 마치고 나서 경쟁자였던 바톨로 콜론과 아니발 산체스의 마지막 등판의 결과에 따라서는 사상 최초로 평균자책점 타이틀을 획득한 아시아 출신 투수의 가능성까지 있었다. 결국은 평균자책점 타이틀은 아니발 산체스가 가져가기는 했지만.
무엇보다 노모나 박찬호, 구로다도 하지 못한 2점대 평균자책점 + 200이닝 소화를[181] 아시아 투수 최초로 이루어 냈으며 무엇보다 이런 성적을 유지하면서 거의 220이닝을 소화에 냈다는 것도 놀랍다. 국내에서의 관심은 다르빗슈[182]에게 밀려 완전히 묻혀버렸다. 다만 FIP는 ERA보다 상당히 높게나와서 아이큐피쳐스러움을 과시했다. 시즌 종료 후 진행된 AL 사이영 상 득표에서 3위표 12개를 받는 등 선전하여, 사이영 상 최종 순위 3위를 기록했으며 MVP 투표에서도 20위내에 들었다. MLB 진출 당시의 회의적인 시선들을 생각해보면, 정말 괄목할 만한 성과를 냈다고 할 수 있다.
2.4.3. 2014년
2014년에는 손 인대에 갑작스러운 염좌 증상이 생겨 시즌 초반부터 결장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이는 일본에서도 겪었던 부상이라서 염려되는 부분이다. 그리고 한차례 마이너 등판을 거친 후 5월 3일 휴스턴전에서 복귀. 6과 2/3 이닝동안 4실점했지만 타선의 도움도 받으며 승리투수가 되었다. 5월 8일 로얄스와의 경기에서는 8이닝 무실점의 깔끔한 피칭으로 2승째를 수확했다. 5월14일 경기에선 8이닐 무실점을 했으나 내려가자마자 마무리가 2실점을 하는바람에 승리를 챙기지 못했다. 6월 5일 승을 거두면서 4승 2패 2.66을 기록.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있다. 특히 이닝당 평균 공 13개로 효율적인 피칭을 하고 있다.한편, 시애틀 마리너스의 시즌 티겟 CM에 이와쿠마가 나왔는데, 내용이 상당히 약을 빨았다...
2014년에도 소리없이 강한 피칭을 보여주며 8월까지 12승 6패, ERA 2.57 을 기록하고 있다.
2.4.4. 2015년
2015년에는 초반 3경기에 선발 등판해 16 1/3이닝을 던지며 0승 1패 평균자책점 6.61에 그쳤고, 허리부상을 당하며 전열에서 이탈했다. 7월 복귀예정.한국시간 2015년 8월 13일, 볼티모어전에서 9이닝 3BB 7K로 노히터를 달성하였다. 아시아 출신으로는 노모 히데오에 이어 두번째의 기록이며(노모가 노히터를 2번 기록해 횟수로는 세번째) 랜디 존슨이 2004년 만 41세의 나이로 달성한 퍼팩트게임 이후 만 34세에 달성한 최고령 노히트경기였다. 또한 노히트 게임을 달성한 공으로 메이저리그 이주의 선수로서 선정되기도 했다.
시즌 후 FA 자격을 얻어 시애틀과 우선 협상하지만 뜻이 틀어져 갈라섰다. 이와쿠마 본인은 메이저리그 처음이자 마지막 FA 기회고, 시애틀은 하락세가 뚜렷한 이와쿠마를 장기 고액을 주면서까지 잡는 건 위험하다고 봤기에 나온 결과.
2015년 12월 7일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는 FA로 떠난 잭 그레인키을 대신해 이와쿠마를 영입했다고 美언론에서 발표했다. 3년 4500만 달러 계약.# 이에 대해 시애틀의 신임 단장 제리 디포토는 우린 애초에 이와쿠마에게 3년 계약을 줄 생각이 없었다며 딱히 유감스러워하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나, 12월 17일 메디컬에서 탈락하면서 다저스와의 계약이 무효가 되자 다시 접근, 2017년과 2018년에 베스팅 옵션이 있는 단년 (1+2년) 재계약을 체결했다.[183]
2.4.5. 2016년
2016 시즌에는 평균자책이 예전에 비해 좀 올라갔지만 꾸준히 로테이션을 지키고 있다. 한국시간으로 7월 17일 휴스턴전에서 7이닝 무실점으로 2년만에 10승을 기록했다. 시즌 최종 성적은 33경기 199이닝 16승 12패 평균자책점 4.12으로 자책점은 상당히 상승했지만 많은 이닝을 소화해주며 시애틀의 마운드를 책임지는 에이스 노릇을 했다. 이 해 시애틀에서 유일하게 규정이닝을 달성한 투수였으며[184] 계약에 따라1400만 달러의 베스팅 옵션도 자동으로 실행되었다.2.4.6. 2017년
지난 대회에 이어 2017 WBC에서 조국의 부름을 받았지만 시즌준비를 이유로 합류를 고사했다.2017년에는 하지만 우려했던 부상이 다시 터지면서 5월 등판을 마지막으로 시즌 자체를 그대로 날리게 됐다. 시즌은 총 31이닝만 소화.
2.4.7. 2018년
결국 2017 시즌 후에 1M을 받고 바이아웃으로 풀리게 됐다. 대신 시애틀은 10M의 배스팅 옵션을 시행하지 않는것과 별개로 마이너 계약을 제시했고 이와쿠마는 무리하지 않겠단 생각인지 이를 수용했다. 메이저 로스터 등록 시 2.5M을 받게되고 선발 등판 횟수에 따라 최대 6M을 받게 되는 최고금액 8.5M짜리 단년 계약이다. 이후 제리 디포토 단장의 발언에 따르면 2017년 9월 오른쪽 어깨 수술을 받아 2018년 6월달까진 공을 던지지 못한다고 했는데 아무리 하락세라도 마이너 계약을 제시받을 급이 아니었는데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이후 재활을 했지만 통증 재발로 8월 말이 돼서야 마이너에서 2경기에 등판했다. 그러나 현지 시각 2018년 9월 11일 일본 복귀를 선언했다.
이에 시애틀 측은 그간 공로를 인정해 9월 26일 경기 전 시구자로 초청했고 시포자로 스즈키 이치로가 나섰다.
그동안 시애틀에서 이와쿠마는 총 63승, BWAR 17.2, 3점대 초반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으며 올스타는 물론이고 사이영 상 투표 TOP3에도 선정된것을 보듯이 적은 돈을 받고도 매우 가성비 좋은 활약해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로써 사사키 가즈히로-스즈키 이치로를 잇는 시애틀 일본인 혜자 계약 사례 중 하나가 되었다. 또한 팀 역대 우완 선발 투수 순위에서 3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2.5. 일본 복귀
시애틀에서 풀린 이후 일본 복귀를 알렸고 오프시즌동안 팀을 알아본 끝에 12월 6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연봉 5000만엔에 계약하며 일본 무대로 복귀했다.#본인의 블로그에서 고향인 도쿄에서 야구를 하는 날이 오게될 줄은 몰랐다고 하며, 자신의 마음을 존중하고 결정을 기다려준 요미우리 구단에 감사를 표시했다. # ##
2.5.1.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안정적인것 같아 보이면서도 스가노 도모유키 빼고는 의외로 실속 없던 요미우리의 선발진을 채워 줄 것으로 기대 됐었다. 하라 감독이 인터뷰에서 밝힌바로는 포지션은 1선발 스가노 도모유키, 2선발 야마구치 슌에 이어 3선발 정도를 생각했다던 듯.그러나 수술 이후 거의 1년 반동안 실전을 치르지 못한 여파로 아직 몸이 덜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 때문에 전지훈련은 1군에 포함되었으나 결국 개막 1군에는 포함되지 못했다. 코지친은 5~6월의 교류전정도에 올라와 주는게 베스트라고 하면서 기대감을 보여주고는 있지만, 몸상태를 보면 쉽지 않을 전망이다. 실제로 전지훈련중에 불펜 투구도 거의 하지 않았고 일정 후반에 들어서야 30 - 40구정도로 가볍게 던지는정도밖에 하지 못했다고 한다.
2019년 5월 인터뷰를 보면 2군에서 몸을 만들고 있으며 시즌 중후반 복귀를 목표로 하는 것으로 보인다. 시즌 복귀후 대략 10번 정도의 선발등판이 있을 것으로 추측되었다. 그러나 무성한 추측과 달리, 8월 중순까지는 별 소식이 없었다가 드디어 8월 21일 2군 경기에서 일본 무대 복귀 등판[185]하였다. 이후 8월 말에 한 경기에 더 나와 2019년 2군 리그 최종 성적 2경기 2이닝 퍼펙트(무피안타 무사구) 2탈삼진의 기록으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하지만, 그 외에는 시즌 끝날때까지 별다른 소식 없이 흘려 보냈고, 결국 1군에는 한 번도 올라오지 못한 채 시즌을 마감했다. 1군 데뷔 이후 처음으로 1군 등판이 없는 시즌[186]을 맞이했는데 시즌이 끝난 후 오른쪽 사타구니 탈장 수술을 받는 등 몸 상태가 말이 아니라고 한다. 어깨도 예전같지 않다고.
이 영향으로 무려 지난해에 비해 60%가 깎인 2천만엔으로 2020년 재계약을 완료했다. 2020년에는 꼭 1군에서 뛰고 싶다고는 하는데, 이미 불혹의 나이인데다가 아직도 수술 이후 재활 중이라는 것을 보면 쉽지 않아 보인다.
2020년에는 염원하던 1군 등판은 커녕 2군 리그에서 조차 아예 등판하지도 못했으며, 좋지 않은 몸상태에 예전 같은 구속도 안나오고 무엇보다 투구 밸런스가 예전 같지 않다고. 몸이 야구를 더 이상 하지 말고 이대로 멈추라고 하는 것만 같아 프로 야구 선수로서의 인생을 끝맺어야겠다고 결심했다한다.
2.6. 은퇴
결국, 2020년 10월 19일 일본 스포츠호치 언론을 통해 이번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발표했다. 10월 23일에는 기자회견을 열어 공식 은퇴 발표식을 가졌다. 이 기념식에서는 요미우리의 하라 감독도 자리를 함께 해주었는데 2009 WBC에서의 그의 피칭을 회상하며 "자신이 본 최고의 피칭 중 하나였다"고 그 때를 술회하였다. 이 날, 이와쿠마는 "마지막까지 1군을 목표로 했습니다. 그런데, 오른팔이 더 이상 따라주지 않습니다."라고 은퇴 이유를 씁쓸한 심정으로 밝혔다. [187]또한, 그 동안 언론에 밝혀지지 않았던 비하인드 스토리도 밝혔다. 사실은 2020년 내내 실전 피칭 없이 2군에서 담금질 하다 여름쯤 2020년 첫 실전 대비 투구를 하러 도쿄돔 마운드에 오랜만에 올라갔는데, 첫 공을 던지자 마자 이와쿠마는 어깨를 부여잡고 마운드에서 무릎을 꿇고 주저 앉았다고 한다. 어깨 탈구였다고.[188] 더 이상 수술이나 재활을 거치는 것이 의미가 없을 정도로 어깨 뿐 아니라 온 몸이 성치 않아[189] 선수 생활 연장에 무리가 있다고 판단하여 은퇴를 결심했다 한다.
사실 이 사건이 있기 이전부터도 2군 연습장에서 혼자 피칭할 때마다 상태가 계속 안좋자 '은퇴하기 전 마지막 등판만을 위해, 정말 단 한 경기만을 위해 준비를 잘해보자'는 마음가짐으로 준비했을 때, 그조차도 무리임을 직감했다고 한다. 즉, 저 사건이 없었더라도 이미 피칭이 가능한 몸 상태가 아니었다는 것. 상술한 도쿄돔 사건에서의 피칭이 본인이 최대한 할 수 있는 전력의 한 구였는데, 그 한 구에서 체력적, 신체적인 한계를 느껴 은퇴 결정을 굳혔다고 한다. 마침 도쿄돔 스탠드에서 어깨 부상을 입은 이와쿠마를 지켜보던 하라 감독도 그 피칭이 이와쿠마의 마지막 피칭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고.[190]
그리고 시즌 최종 도쿄돔 시리즈 중 첫 경기가 열린 2020년 11월 7일에 도쿄돔에서 이와쿠마의 은퇴식이 경기 후에 열렸다. 상술한 것처럼, 더 이상 피칭을 할 수 없는 상태라 마쓰자카[191]의 은퇴식과는 달리 마지막으로 피칭 하는 모습을 마운드 위에서 보여주지는 못했고 인사말로 마지막을 대신했다.
21년간 프로 선수로서 자긍심을 가지며 생활했고, 그것은 주위에 훌륭한 동료들이 있었던 덕분이라고 공을 돌렸다. 마지막으로, 자이언츠 유니폼을 입고 은퇴를 하게 되어 감사하게 생각하며 앞으로도 야구를 통해 누군가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존재이고 싶다고 말을 줄이며 길었던 21년 간의 프로 생활의 마침표를 찍었다.[192]
2.7. 국가대표 경력
이와쿠마는 메이저리그에 건너가서 선발로 훌륭한 시즌을 보낸 일본 내에서도 몇 안되는 투수지만, 비슷한 시대에 활약한 마쓰자카 다이스케만큼 사실 국가대표 경력이 화려하지는 않다. 비슷한 시대의 다르빗슈 유도 국가대표 경력이 적은 편이지만, 다르빗슈 유는 애초에 커리어 중 NPB에서 보낸 시즌 자체가 마쓰자카와 이와쿠마에 비해 적은 편이다. 반면, 이와쿠마는 99년도 드래프트에 지명 받아 2012년에 메이저리그에 건너가기 전까지 NPB에서 보낸 기간이 꽤 길지만서도 프로 커리어에서 국가대표를 출전한 대회가 많지 않다. 그 이유로는, 이와쿠마가 2002년에 지명 받은지 3년만에 기량이 개화한 투수라는 점과 2005년부터 2007년 까지는 어깨, 등, 팔꿈치 부상과 이중 투구 동작 교정 등의 큼직한 이슈들이 발생하여 리그내에서 부진한 성적을 기록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불행 중 다행으로 2004년에는 본격적인 슬럼프 직전에 잘했던 시즌으로 아테네 올림픽에 출전[193]하여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는 것이다. 다만, 일본 팀의 동메달 획득에 이와쿠마가 기여한 바는 거의 없다. 또한, 이 대회를 마지막으로 이와쿠마는 상술한 부상과 부진 등의 이유로 인해 2005년 부터 2008년까지 일본의 프로 1군이 참여한 국제대회[194]에는 출전하지 못했다.
다만, 2008년에는 성적으로는 무조건 뽑혀야 했지만 당시 감독이던 호시노가 예비 엔트리에만 승선시키고 최종 엔트리에서는 탈락시켰다. 그래서 2005년과 2007년에 발탁되지 못한 것과 2008년에 발탁되지 못한 것은 다소 구별될 필요가 있다. 2008년[195]에 상술한 슬럼프를 이겨내고 예전 기량을 되찾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최전성기를 맞이하여 리그를 휩쓸어 버리는데, 의외로 2008 베이징 올림픽 대표팀 발탁에서 제외되며 아쉬움을 샀다. 그래서 부상과 부진 등의 이유로 국가대표에 발탁될 실력 자체가 아니었던 때는 정확히 2005년 부터 2007년 까지이며 2008 베이징 올림픽 같은 경우에는 실력 문제라기 보다는, 감독의 취향 차이로 발탁이 결렬된 케이스라고 보면 된다.
이는 우리나라 베이징 올림픽 야구 국가 대표팀의 윤석민과 비슷한 이유이다.[196] 당시 KBO 리그에서 가장 뛰어난 성적을 내고 있던 윤석민도 이와쿠마처럼 처음에는 엔트리에서 탈락하며 한국 야구 팬의 아쉬움을 샀지만, 이와쿠마와는 달리 임태훈의 부진 덕에 반사 이익을 얻어 결국 임태훈이 탈락되며 그 대체로 최종 엔트리에 선발 되었다. 그리고 윤석민은 베이징에서 구원으로서 알토란같은 활약을 펼치며 대한민국의 금메달 획득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 반면, 일본은 성적대로 선수를 뽑지 않고 이와쿠마를 탈락시켜 결과적으로는 데리고 간 선수들[197]이 참사를 일으키며 노메달 수모를 겪었기에 야구팬들과 언론들이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일본 내에서도 베이징 참사의 원인을 짚어가며 그 중 하나로 선수 선발에서의 문제를 꼽았는데, 그 방송에서 대표팀에 뽑히지 않아 의아했던 선수로 이와쿠마가 거론되었다. 이처럼 한일 양국의 상황을 대조해보면 묘하게 재미있는 부분.
사실 당시 컨디션이 안좋던 무라타 대신 발탁될 뻔 했으나, 감독 호시노가 무라타를 데리고 가기로 선언하였고, 결국 엔트리 교체는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이와쿠마는 선망하던 국가대표에 발탁되지 못하고 고배를 마셨고 국가대표의 영광을 다음 번으로 미뤄야했다.
그리고 결국, 2008 시즌 사와무라 상을 수상해 최고 투수임을 입증한 뒤 하라감독에 의해 대표팀 부름을 받았다. 2009 제 2회 WBC에 참가하여 상대 타자들에게 악몽을 선사하며 일본의 제 2회 WBC 우승에 혁혁한 공을 세운다.
이후에는 MLB에 진출하여 시즌 준비 등의 이유로 2013 WBC나 2017 WBC는 불참하였다. 프리미어 12 같은 경우는 메이저리거가 차출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와쿠마가 출전할 수 있는 국가대표 대회는 없어졌고 자연스레 이와쿠마는 MLB로 건너가고 나서부터는 국가대표 커리어가 멈췄다. 그리고 2019년에 NPB에 다시 돌아왔으나, 이 때는 이미 몸상태가 무너진 왕년의 에이스 취급을 받기도 했었고 한 해동안 2군에서 2이닝만 던졌을 정도니 2019년에 열린 2019 프리미어 12에 출전할 리 만무했다.
즉, 이와쿠마가 프로 선수로서 참가한 국제 대회는 아테네 올림픽과 2009 WBC가 전부인 셈이며 그마저도 아테네 올림픽은 대회 내내 중용받지 못하며 고작 1.1이닝을 던졌으니 이와쿠마는 사실상 2009 WBC가 그의 국제대회 커리어에서 출전한 유일한 대회라고 봐도 무방하다.
2.7.1. 아테네 올림픽
이와쿠마는 2004년 구단 신기록에 해당하는 개막 12연승을 기록하며 드디어 그 재능을 꽃피우기 시작한다. 이 덕에, 이와쿠마는 아테네 올림픽 일본 야구 국가 대표팀 투수로 발탁되었다.
* 이와쿠마는 팀의 두 번째 경기인 네덜란드와의 경기에서 선발로 낙점되어 등판하였다. 하지만, 컨디션 난조를 보이며 1.2이닝 3탈삼진 3피안타 3볼넷 1사구 3실점(2자책점) ERA 10.8 이라는 리그에서 보이던 모습과 영판 다른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 조기 강판되고 말았다. 당일 경기는 구로다 히로키가 구원 등판하여 더 이상 실점하지 않았고 8-3의 스코어로 일본이 이겨 패전은 면했다.
* 이와쿠마는 팀의 두 번째 경기인 네덜란드와의 경기에서 선발로 낙점되어 등판하였다. 하지만, 컨디션 난조를 보이며 1.2이닝 3탈삼진 3피안타 3볼넷 1사구 3실점(2자책점) ERA 10.8 이라는 리그에서 보이던 모습과 영판 다른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 조기 강판되고 말았다. 당일 경기는 구로다 히로키가 구원 등판하여 더 이상 실점하지 않았고 8-3의 스코어로 일본이 이겨 패전은 면했다.
이 부진의 여파 때문인지 당시 대표팀 감독 대행이던 나카하타 키요시에게 신임을 얻지 못해 나머지 조별 예선 경기와 준결승전, 동메달 결정전모두 출전하지 못하며 그대로 올림픽을 마감한다. 하지만, 다른 타자들의 쾌조와 투수들의 호투 덕에 동메달을 따게 되어 이와쿠마는 프로 커리어에 올림픽 동메달을 추가하였다.
2.7.2. 2009 WBC
2009 WBC ALL-WORLD TEAM AWARD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OF | OF | OF | ||||||
SS | 2B | ||||||||
3B | SP | 1B | |||||||
DH | C | SP | CP |
}}} ||
2009 WBC |
- 2004년 이후로는 부상과 부진 등의 이유로 대표팀과 딱히 인연이 없다가, 2008년 각성한 덕에 2009 제 2회 WBC에 일본 대표팀으로 출전하게 된다. 이와쿠마는 중요한 경기들에 선발로 나와 엄청난 무브먼트의 변화구와 좋은 커맨드를 토대로 타자들을 요리하며 악몽을 선사하였다. 바로 그 첫 번째 경기는 한국과의 일전이었다. 1라운드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1라운드 순위결정전 경기 한일전에서 선발로 낙점되어 등판하였다. 당시 3회까지 퍼펙트로 한국 타선을 틀어막았지만, 4회에 선두타자 이종욱에게 볼넷, 후속타자인 정근우에게 안타를 맞은 이후 김태균의 1타점 적시타로 인해 선취점을 내주고 만다. 하지만, 이후에 여자저차 잘 막아가며 6회 1아웃까지 막아내고 승계주자 없이 마운드를 내려왔다. 그러나, 해당 경기에서 우리나라의 선발 봉의사의 호투와 정현욱과 임창용의 쾌투로 일본 타자들이 꽁꽁 묶이며 1:0의 스코어로 팀 영봉패를 당하고 만다. 즉, 이와쿠마는 1실점 패전투수(...)[198]가 되어 버린다. 이날 기록은 5.1이닝 2피안타 5탈삼진 3볼넷 1실점.
- 이후, 2라운드에서는 컨디션 점검차 쿠바와의 1경기에 불펜 투수로 등판하여 1이닝 1피안타 2탈삼진 무사사구 무실점으로 좋은 피칭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하라 타츠노리는 당시 일본 투수들 가운데 가장 볼이 좋던 이와쿠마를 가장 중요한 경기이자 패자조 2경기인 쿠바와의 경기에 다시 선발로 출장시킨다. 이 경기는 일본의 4강 진출과 대회 탈락의 당락이 결정되는 중요한 경기[199]였기에 이와쿠마의 부담이 굉장히 컸다. 하지만, 이와쿠마는 그러한 탈락 우려를 깔끔하게 날려버리며 쿠바 타자들을 6이닝 5피안타 2탈삼진 1볼넷 무실점으로 틀어막았다. 특히 당시 경기에서, 쿠바 타자들은 이와쿠마의 스플리터에 연신 헛방망이질을 했는데 이와쿠마의 전성기 때 변화구 무브먼트가 얼마나 뛰어났는지 여실히 느낄 수 있는 경기이다.[200][201] 당시 경기에서 쿠바 타자들에게 이와쿠마가 잡아낸 18개의 아웃 카운트 중 무려 15개를 땅볼 아웃 시켰다. 얼만큼 쿠바 타자들이 그의 공에 고전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 이후, 스기우치 도시야가 마운드를 이어받아 3이닝동안 연속 삼자범퇴로 쿠바 타자들을 돌려세우며 일본은 4강 진출을 확정짓는다. 이후에 순위 결정전과 준결승전에서 휴식을 취하고 이와쿠마는 결승전에 한국을 상대로 선발로 출전하게 되는데...
- 1라운드 순위결정전 경기에서 한국 타자들 중에 김태균말고는 이와쿠마의 공을 제대로 공략한 타자는 없었다. 1라운드 순위결정전 경기에서 이와쿠마를 상대로 한국 타자들이 기록한 2안타 중 1안타는 김태균의 안타였고, 나머지는 정근우의 안타였는데 정근우의 안타도 사실 빗맞은 타구였다. 그만큼 정타로 받아치기 어려울 정도로 이와쿠마가 던지는 공의 무브먼트가 좋다는 것이고 결승전에서도 이와쿠마 공의 무브먼트와 그의 커맨드 능력이 한국 타자들을 꽁꽁 묶었다. 결승전에서 다시 만난 이와쿠마는 한국 타자들을 3회까지 퍼펙트로 틀어막았고, 4회까지도 김현수에게 안타 단 한 개만을 내주며 단 한타자만 출루를 내줬을 정도로 엄청난 피칭을 보여줬다. 결승전 당시, 그의 커맨드 능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는 이진영이 스톡킹에 나와 했었던 발언에서도 엿볼 수 있다. 실제 이진영은 당시 이와쿠마를 묘사하며, 공 반개에서 한개 정도만 스트라이크 존을 왔다 갔다 하는데 이걸 쳐야할지 말아야할지 고민만 하다가 경기가 끝났다고 회상했다. 전성기 이와쿠마의 커맨드가 얼마나 뛰어났는지 이진영의 묘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부분. 그러나, 이와쿠마는 추신수에게 5회에 동점 홈런[202]을 헌납했다. 그래도, 이후에는 8회 1실점만 추가로 허용하고 나머지는 잘 막아내어 7회 2아웃 까지 단 4안타로 한국을 틀어막으며 3:2 상황에서 승리투수 조건을 갖춘 채 마운드를 내려왔다. 하지만, 9회 마무리로 올라온 다르빗슈 유가 블론을 기록하며 이와쿠마는 승리를 날렸고, 그렇게 잘 던져 놓고도 결승전에서 조차 한국전의 승리를 기록하지 못한다.[203] 그래도 10회초 스즈키 이치로가 임창용을 상대로 결승 2타점을 올리며 팀은 5:3으로 승리한다. 이 날 경기에서 이와쿠마는 7.2이닝 4피안타 6탈삼진 2볼넷 2실점을 기록했으며 비록 승리 투수가 되지는 못하였으나 결승전 명품 피칭으로 한국 타자들을 잠재우며 일본의 대회 2연패에 혁혁한 공을 세운다. 그리고 이와쿠마는 이러한 맹활약 덕에 ALL-WBC Team에 이름을 올린다. 2009년 WBC 전체 최종 성적은 4경기 20이닝 12피안타 15탈삼진 6볼넷 3실점 ERA1.35 [204] WHIP 0.90
3. 연도별 성적
3.1. NPB
이와쿠마 히사시의 역대 NPB 투수 기록 | ||||||||||||||||
<rowcolor=#fff> 연도 | 소속 | 경기 | 승 | 패 | 세 | 홀 | 이닝 | ERA | 피안타 | 피홈런 | 볼넷 | 사구 | 탈삼진 | WHIP | ERA+ | WAR |
2001 | 긴테쓰 | 9 | 4 | 2 | 0 | 0 | 43.2 | 4.53 | 46 | 3 | 13 | 3 | 25 | 1.35 | 92 | 1.1 |
2002 | 23 | 8 | 7 | 0 | 0 | 141.1 | 3.69 | 132 | 10 | 42 | 8 | 131 | 1.23 | 97 | 4.0 | |
2003 | 27 | 15 | 10 | 0 | 0 | 195.2 | 3.45 | 201 | 19 | 48 | 3 | 149 | 1.28 | 133 | 5.5 | |
2004 | 21 | 15 | 2 | 0 | 0 | 158.2 | 3.01 | 149 | 13 | 30 | 8 | 123 | 1.13 | 161 | 5.4 | |
<rowcolor=#fff> 연도 | 소속 | 경기 | 승 | 패 | 세 | 홀 | 이닝 | ERA | 피안타 | 피홈런 | 볼넷 | 사구 | 탈삼진 | WHIP | ERA+ | WAR |
2005 | 라쿠텐 | 27 | 9 | 15 | 0 | 0 | 182.1 | 4.99 | 218 | 19 | 40 | 6 | 124 | 1.41 | 85 | 4.3 |
2006 | 6 | 1 | 2 | 0 | 0 | 38.2 | 3.72 | 43 | 4 | 12 | 1 | 16 | 1.42 | 101 | 0.3 | |
2007 | 16 | 5 | 5 | 0 | 0 | 90 | 3.40 | 95 | 6 | 23 | 2 | 84 | 1.31 | 105 | 2.6 | |
2008 | 28 | 21 | 4 | 0 | 0 | 201.2 | 1.87 | 161 | 3 | 36 | 4 | 159 | 0.98 | 213 | 8.3 | |
2009 | 24 | 13 | 6 | 0 | 0 | 169 | 3.25 | 184 | 11 | 36 | 12 | 121 | 1.31 | 127 | 3.8 | |
2010 | 28 | 10 | 9 | 0 | 0 | 201 | 2.82 | 179 | 15 | 43 | 6 | 153 | 1.10 | 145 | 6.0 | |
2011 | 17 | 6 | 7 | 0 | 0 | 119 | 2.42 | 106 | 6 | 19 | 5 | 90 | 1.05 | 127 | 2.9 | |
NPB 통산 (11시즌) | 226 | 107 | 69 | 0 | 0 | 1541 | 3.25 | 1514 | 109 | 342 | 58 | 1175 | 1.20 | 123 | 44.2 |
3.2. MLB
이와쿠마 히사시의 역대 MLB 투수 기록 | |||||||||||||||||
<rowcolor=#c4ced4> 연도 | 팀 | G | W | L | S | HLD | IP | ERA | H | HR | BB | HBP | SO | WHIP | ERA+ | fWAR | bWAR |
2012 | SEA | 30 | 9 | 5 | 2 | 0 | 125.1 | 3.16 | 117 | 17 | 43 | 3 | 101 | 1.28 | 121 | 0.9 | 2.3 |
2013 | 33 | 14 | 6 | 0 | 0 | 219.2 | 2.66 | 179 | 25 | 42 | 2 | 185 | 1.01 | 138 | 4.1 | 7.0 | |
2014 | 28 | 15 | 9 | 0 | 0 | 179 | 3.52 | 167 | 20 | 21 | 2 | 154 | 1.05 | 103 | 2.8 | 2.4 | |
2015 | 20 | 9 | 5 | 0 | 0 | 129.2 | 3.54 | 117 | 18 | 21 | 1 | 111 | 1.06 | 108 | 1.7 | 2.6 | |
2016 | 33 | 16 | 12 | 0 | 0 | 199 | 4.12 | 218 | 28 | 46 | 5 | 147 | 1.33 | 98 | 2.7 | 2.4 | |
2017 | 6 | 0 | 2 | 0 | 0 | 31 | 4.35 | 27 | 7 | 12 | 2 | 16 | 1.26 | 99 | -0.2 | 0.3 | |
MLB 통산 (6시즌) | 150 | 63 | 39 | 0 | 0 | 883.2 | 3.42 | 825 | 115 | 185 | 15 | 714 | 1.14 | 112 | 12.0 | 17.0 |
[1] 당시, 이와쿠마는 세이부 라이온즈 구장 근처에 살고 있어, 세이부 라이온즈 팬 클럽에 가입할 정도로 좋아했다고 한다. 좋아하는 선수는 일본시리즈 7회 우승한 아키야마 코지.[2] 실제 이와쿠마는 빅게임 피쳐로 유명한 와타나베 히사노부 전 세이부 라이온즈 투수의 피칭을 본 뒤 투수가 되고자 했다한다.[3] 일본 아이돌 연예인이 많이 다니는 학교로 유명한 그 호리코시 맞다[4] 당시 피칭 모습. 팀은 4강까지 진출하였다.[5] 신입생 때는 팀이 고시엔에 진출했지만, 이와쿠마는 주축이 아니었기에 벤치가 아닌 응원석에 앉아 응원만 했고 플레이 하지는 못했으며, 이후 2학년과 3학년까지는 팀이 고시엔에 나가지 못했다. 즉, 고시엔에서 이와쿠마는 뛰어본 적이 없었다.[6] 정작 이와쿠마 본인이 어릴 때 부터 좋아했던 팀은 세이부 라이온즈라고 한다.[7] 때때로 최고 구속 149km/h의 강속구를 뿌리기도 했다고 한다.[8] 참고로, 이날 마쓰자카는 5회말 일본 프로야구 한 시즌 최다 홈런 기록 타이가 되는 55호 홈런을 터피 로즈에게 맞고 말았다. 당시 홈런 장면.[9] 마쓰자카는 이 끝내기 홈런을 내줌과 동시에 8.2이닝 7실점 완투패 하고 말았고 시즌 14패째를 기록하게 되었다. 그래도 패가 많은 것에 비해, 당해년도 사와무라상은 챙길 수 있었다...[10] 여담으로, 상대편 오릭스의 구대성은 중간계투로 올라와 3이닝 2피안타 1실점으로 꽤 호투하며 팀의 7-1 스코어 승리에 보탬이 되었다. 이 최종전을 마지막으로 구대성은 2001 시즌 51경기 7승 9패 10세이브 126과 3분의 1이닝 동안 143탈삼진 ERA 4.06의 기록으로 2001 시즌을 끝마쳤다.[11] 이때 둘이 각 3번과 4번타자를 도맡아서 합작한 총 101개의 홈런은 2022년 아직도 깨지지 않은 합작 기록이다.[12] 당시, 일본 프로야구는 MLB 초창기 단일 지구 때처럼 리그 1위팀만 일본시리즈에 진출할 수 있었다. 즉, 킨테츠가 리그 1위를 차지했다는 것은 곧 일본시리즈 직행까지 의미하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 이와쿠마가 몸 담고 있었던 퍼시픽 리그가 2004년부터 플레이오프제를 도입하여 3위 팀까지 일본시리즈 진출 자격을 놓고 자웅을 겨룰 수 있게 되었다. 퍼시픽 리그가 플레이오프제로 막판 관중몰이에 성공하는 것을 보고 2007년 부터는 센트럴 리그도 그를 따라서 시행. 결국 지금의 플레이오프제가 2007년부터 비로소 갖춰지게 되었다.[13] 그리고 이 2차전이 킨테츠가 마지막으로 승리한 일본시리즈 경기이자 킨테츠의 홈구장에서 열린 마지막 일본시리즈 경기였다.[14] 콘도와 사카구치는 각각 2001, 2002년에 드래프트되어 2001년 시즌을 경험하지 못했다. 킨테츠의 마지막 리그 우승을 자기 손으로 완성시켰던 키타가와 히로토시는 2012 시즌을 끝으로 은퇴했다. 2015~16년에는 또다른 01년 경험자인 터피 로즈가 베이스볼 챌린지 리그의 토야마 GRN 선더버즈에서 현역 복귀했으나 현재는 다시 선수 생활을 그만둔 상태.[15] 당시 경기에서 7회초까지 이와쿠마가 잘 막았지만 스코어는 1-1 동점이었고, ND으로 경기가 끝나는가 싶더니 7회말과 8회말에 킨테츠 타자들이 각 2점씩 득점해 팀이 5-1 스코어로 승리하여 승리투수가 될 수 있었다.[16] 5월 8일 롯데전 7.2이닝 7피안타 10탈삼진 4실점 패전 (팀은 4-1 스코어 패), 5월 14일 세이부전 6.2이닝 5피안타 6탈삼진 4실점 패전 (팀은 5-2 스코어 패)[17] 5월 28일 롯데전 7이닝 5피안타 5탈삼진 2실점 ND, 6월 10일 롯데전 7.1이닝 4피안타 12탈삼진 무실점 승, 6월 20일 오릭스전 6이닝 8피안타 8탈삼진 2실점(1자책) 승[18] 이 때를 기점으로 어깨 염증이 이와쿠마 커리어 내내 그를 괴롭혔다.[19] 7월 29일 롯데전 5.2이닝 9피안타 6탈삼진 2사사구 4실점 ND, 8월 12일 오릭스전 8이닝 4피안타 6탈삼진 3실점 ND(1회에만 3실점하였고 8회말까지 3-1 스코어로 팀은 지고 있었으나 9회초 터피 로즈의 동점 투런 덕에 패전을 면했다. 더불어, 11회 두 개의 홈런 포함 한 이닝에만 팀 타자들이 5득점을 폭발시키며 팀은 승리.), 8월 18일 세이부전 6.2이닝 8피안타 6탈삼진 1실점 승리, 8월 24일 니혼햄전 6.2이닝 5피안타 8탈삼진 4실점 ND (2회에만 4실점하여 패전이 될 뻔했으나 이와쿠마가 마운드에서 완전히 내려간 뒤 킨테츠 타자들이 5-4로 역전에 성공해주며 ND 기록), 8월 31일 세이부전 5.1이닝 6피안타 5탈삼진 4실점 ND (이와쿠마는 패전이 될 뻔 했으나, 팀 타자들이 이와쿠마가 마운드에서 내려간 후인 7회와 8회 각 2점씩 획득해줘 7-4 스코어로 역전해 패전을 면했다.), 9월 7일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전 7이닝 4피안타 6탈삼진 1실점 ND (조지마 겐지에게 2회 솔로홈런을 맞지만 7회 킨테츠 타자들이 1점 추가해 2-1 스코어 앞선 채로 마운드에서 내려와 이와쿠마는 승리 투수 요건을 갖췄으나, 8회 불펜 난조로 2-2 동점이 되어 ND이 된다. 9회초에는 다시 킨테츠가 한 점 득점해 결국 3-2로 킨테츠가 승리)[20] 8월 4일 니혼햄전에서 7.1이닝 4피안타 8탈삼진 1실점 호투하여 단 한번 승리투수가 되기는 했다.(팀은 2-1 스코어로 승.)[21] 9월 20일 오릭스전 9이닝 5피안타 1실점 완투승[22] 9월 13일 세이부전 8이닝 8피안타 3탈삼진 4사사구 5실점(4자책) 패전, 9월 27일 니혼햄전 5이닝 6실점 패전, 10월 8일 롯데전 1.2이닝 5실점 패전[23] 당일 경기에서, 8회초까지 2-1스코어로 팀이 앞선 덕에 이와쿠마는 승리 투수 요건을 갖췄지만, 8회말에 불펜이 점수를 내주고 2-2로 동점이 되는 바람에 결국 이와쿠마는 ND을 기록. 9회초에는 팀 타자들이 2점을 획득해 4-2 스코어로 팀은 승리.[24] 이해에는, 감독 추천으로 커리어 최초 올스타전에 출전하기도 했다.[25] 3월 29일 오릭스전 7.2이닝 3실점 승, 4월 5일 세이부전 9이닝 2실점 완투승, 4월 13일 니혼햄전 8이닝 3실점(2자책) 승, 4월 19일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전 9이닝 1실점 완투승, 4월 26일 니혼햄전 9이닝 4피안타 1실점 완투승[26] 5월 2일 니혼햄전 5이닝 7실점(2자책) ND (다행히 팀은 연장 접전 끝에 11-10 스코어로 이겨 패전을 면했다), 5월 10일 오릭스전 9이닝 1실점 완투승, 5월 16일 롯데전 6.2이닝 4실점 시즌 첫 패 (팀은 4-0 영봉패), 5월 23일 오릭스전 9이닝 1실점 완투승, 5월 31일 세이부전 9이닝 3실점 완투승[27] 당해년도에 선발 16연승을 포함 시즌 최종 성적 20승을 달성하며, 당해년도 사와무라 상을 수상한다. 사이토 가즈미를 마지막으로 2008년 전까지는 퍼시픽 리그에서 더 이상 20승 투수가 나오지 않다가, 이와쿠마가 5년 뒤인 2008년에 21승을 기록해 20승 투수 타이틀을 달성하며 마찬가지로 사와무라 상을 수상했다.[28] 6월 6일 세이부전 10이닝 1실점 완투패 (팀은 1-0 패)[29] 7월 5일 세이부전 8이닝 2실점 완투패 (팀은 2-1패)[30] 6월 15일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전 3.2이닝 7실점(5자책) 패, 6월 21일 니혼햄전 5이닝 5실점 패, 7월 27일 세이부전 9이닝 4실점 완투패 (팀은 4-1 패), 8월 11일 세이부전 2회에만 5실점 총 6.1이닝 7실점 패 (상대 투수 마쓰자카는 7이닝 3실점 승)[31] 6월 29일 니혼햄전 9이닝 1실점 완투승 (팀은 2-1 승), 7월 20일 오릭스전 9이닝 1실점 완투승[32] 이외에도, 7월 12일 니혼햄전 6이닝 5실점 승, 8월 4일 니혼햄전 7이닝 1실점 승 등 부진한 와중에도 승리를 꾸준히 챙기기는 했다.[33] 8월 17일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전 7이닝 3실점 ND (8회까지 스코어 4-0으로 넉넉하게 이기고 있던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이와쿠마의 상대 선발 투수 와다 츠요시는 8회 솔로 홈런 2개를 맞긴했지만, 8이닝 2실점 호투하였고 승리 투수 요건을 갖춘채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이대로 경기가 끝난다면 이와쿠마는 패전투수. 하지만, 9회 올라온 후쿠오카의 마무리 투수 타카유키 시노하루의 방화로 인해 4-4 스코어 동점이 되어 와다의 승리 투수 자격이 날라갔다. 이와쿠마는 운 좋게도 ND 기록. 경기는 연장 12회 접전에도 불구하고 양팀 모두 더 이상 점수를 내지 못하며 4-4 점수 그대로 무승부로 승패를 가리지 못한 채 게임 종료), 8월 23일 오릭스전 7이닝 4실점 승리, 8월 29일 니혼햄전 7이닝 1실점 승[34] 9월 5일 오릭스전 5이닝 6실점 패[35] 참고로, 2004년의 퍼시픽리그의 경우 4.69의 리그 평균자책점으로 NPB 역사 상 전체 2위라는 기염을 토했다![36] 참고로 2014년 KBO의 경기 당 평균 득점은 5.62, 2016년 KBO의 경기 당 평균 득점이 5.61이었으니 2003, 2004 퍼시픽 리그보다도 더 심한 타신투병의 리그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술한 2014년과 2016년은 평균자책점이 5점대를 기록한 해로, NPB 역사를 모조리 통틀어도 이보다 더한 타고투저 시즌이 없었으니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물론, 두 리그의 수준차를 고려하긴 해야하지만 액면 그대로는 KBO 리그의 타신투병은 NPB를 압도하는 수준이었다.[37] 참고로, 그 주인공들은 2004년 부상과 부진의 늪에서 헤어나온 스기우치 도시야와 전성기를 맞이한 와타나베 슌스케, 그리고 커리어 하이 시즌을 보낸 마쓰자카 다이스케. 각각의 평균자책점은 ERA 2.11, ERA 2.17, ERA 2.30이었다. 추가적으로, 2006년 시즌부터는 12개 구단 모두 레빗볼 사용을 전면 금지하였고 몇년만에 다시 1점대의 평자책을 기록한 퍼시픽리그 선발투수가 나왔다.그 주인공은 사이토 가즈미. ERA 1.75의 기록이었다. 참고로 2위는 마쓰자카 다이스케로 ERA 2.13을 기록하였다. 그 후 2007년 부터는 나루세 요시히사, 2008년에는 이와쿠마 히사시, 그리고 2007년 부터 2011년까지 5년 연속 1점대 평자책을 기록한 다르빗슈 유로 부터 비롯돼서 2011년부터는 다나카 마사히로가 그 바톤을 이어받아 지금의 야마모토 요시노부까지 이어지며 1점대 평자책의 퍼시픽리그 선발투수는 흔하게 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38] 참고로 4위는 공동 4위었으며 스기우치 도시야와 와다 츠요시가 ERA 3.38을 기록했다.[39] 여담으로, 이날 구대성과 첫 선발 맞대결이 있었다. 구대성은 4.2이닝 6실점으로 부진했지만 승패로 연결되지는 않았고 구대성은 ND기록. 경기는 7회말이 끝날 때 스코어가 6-7로 킨테츠가 한 점차 밀리고 있어 이와쿠마가 패전이 될 뻔했으나 8회초 킨테츠 타자들이 3점을 득점하는 데 성공. 스코어 9-7로 역전에 성공한다. 이후 9회초에 한점을 추가한 킨테츠가 9회말 2점을 내줘 불안했지만 어찌됐든 승리를 지켜내며 스코어 10-9로 신승을 거뒀고, 이와쿠마는 우여곡절 끝에 승리를 챙겼다.[40] 4월 18일 오릭스전 9이닝 4피안타 완봉승[41] 12연승을 올리는 동안, 4월 5월에는 월간 MVP를 차지하였다.[42] 참고로, 개막 이후 연속 선발승 일본 기록은 개막 15연승으로 2005년에 사이토 가즈미가 기록했다.[43] 그러나 정작, 한 달을 비울 정도로 길게 있다 온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는 네덜란드전에만 나와 1.2이닝 3실점이라는 초라한 성적으로 조기 강판 되었으며, 이후 대회 내내 두번 다시 나오지 못했다.[44] 4월 27일 니혼햄전 9이닝 2실점(1자책) 완투승, 5월 3일 세이부전 9이닝 2실점 완투승, 5월 9일 롯데전 9이닝 5피안타 1실점 완투승(여담으로, 이승엽은 NPB로 건너간 후 처음으로 이날 이와쿠마와 상대하게 되었다. 2회말 2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 첫타석부터 안타를 쳤지만 후속타자인 하시모토 다스쿠가 외야 플라이에 그치는 바람에 홈을 밟지는 못했다. 5회와 8회에는 각각 좌익수 플라이와 1루 땅볼로 물러나 득점과 타점을 기록하지 못했다. 이날 이승엽은 이와쿠마를 상대로 3타수 1안타를 기록했다.), 5월 16일 세이부전 9이닝 2피안타 1실점 완투승 (여담으로, 1실점은 솔로 홈런인데 상대 타자 와다 카즈히로가 9회에 쳐냈다. 9회 이전까지는 8이닝 1피안타 무실점으로 거의 완봉 페이스였지만 아쉽게 완봉을 놓쳤다.), 5월 22일 니혼햄전 9이닝 5피안타 1실점 완투승[45] 4월 18일 오릭스전 9이닝 4피안타 완봉승[46] 5월 29일 롯데전 9이닝 3실점 ND (팀은 연장 11회까지 가는 연장 혈투 끝에 4-3으로 승리), 6월 5일 롯데전 9이닝 3실점 ND (이날도, 팀은 연장 11회까지 가는 연장 혈투 끝에 4-3으로 승리. 여담으로, 전날인 6월 4일에 24일만에 1군에 다시 복귀한 이승엽과 마주했는데 이승엽을 상대로 4타석 3타수 무안타 1볼넷을 내주었다. 2회 첫 타석에서 2루수 땅볼로 이승엽을 처리했고 4회에는 1사 2루에서 헛스윙 삼진을 잡아냈다. 6회에는 이승엽에게 볼넷을 내주었지만 후속 타자를 잘 잡아내어 이승엽이 득점하는 일은 없었다. 특히, 8회말 3-3으로 맞선 8회말 2사 3루에서 이승엽을 만나 위기 상황에서 1루수 땅볼 처리하며 이와쿠마는 경기를 연장까지 이끌 수 있었다. 이날도 이승엽은 이와쿠마를 상대로 타점과 득점을 기록하지 못했다.)[47] 6월 29일 세이부전 9이닝 무실점 ND 기록. 상대 투수 마쓰자카 다이스케와의 엄청난 투수전이 벌어졌다. 두 투수 모두 9이닝 까지 무실점으로 상대 타선을 억제했으며, 마쓰자카는 이에 한 술 더 떠 10회초까지 무실점으로 막아버린다. 이와쿠마가 내려간 10회말 올라온 계투 요시카와 카즈노리가 세이부 타자 카이즈카 마사히데에게 끝내기 안타를 내주며 1-0의 스코어로 세이부가 이겨 승리투수는 마쓰자카가 되었다.[48] 6월 12일 니혼햄전 7이닝 2실점(무자책) 승리, 6월 20일 오릭스전 6이닝 2실점 승리, 6월 29일 세이부전 9이닝 무실점 ND, 7월 6일 니혼햄전 7.2이닝 4실점 승리[49] 여담으로, 이날 이승엽과 만나 3타수 1안타를 내주었다. 1회 1사 2루의 위기 상황에서 풀카운트 승부 끝에 내야플라이로 이승엽을 잘 처리했고, 4회엔 선두타자로 나온 이승엽을 2루수 땅볼로 아웃시켰다. 하지만, 6회 2사에서 다시 마주한 이승엽에게 중전 안타를 내주었다. 그래도 후속 타자를 삼진 처리하며 이승엽은 홈을 밟지 못했다. 이것이 이날 이와쿠마와 이승엽의 마지막 승부였고, 이날도 이승엽은 이와쿠마를 상대로 타점과 득점을 기록하지 못했다.[50] 상술하였듯이 9이닝 완투 8경기 연속 포함 엄청나게 많은 이닝을 소화했고, 그 해 전반기 리그 이닝 소화 1위는 이와쿠마였다.[51] 여담으로, 이날도 이승엽을 만났는데 1회에는 1사 만루 상황에서 중견수방향 희생플라이로 1타점을 내줬고, 3회 1사 3루상황 에서는 볼 넷으로 출루 시켰다. 이후, 이승엽은 후속타자 사브로의 좌중간 3루타로 홈을 밟아 득점을 올렸다. 그리고 이와쿠마가 3회에 강판되며 이후 대결은 없었고 결국 이승엽은 이와쿠마를 상대로 2타석 0타수 1볼넷 1타점 1득점 기록.[52] 당시 경기는, 일본 팀이 상대 선발 로저 클레멘스를 2회말에만 3득점으로 두들겨 3-1 스코어로 승리를 거뒀다.[53] 참고로, 1실점은 상대 타자의 타점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이와쿠마의 와일드 피치로 인한 실점이었다.[54] 다만, 마지막 세 경기에서 덜 털렸더라도 2004년은 카와카미 켄신이 탔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 이와쿠마는 올림픽을 한달간 다녀왔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탈삼진 및 소화 이닝 수 같은 볼륨 면에서 카와카미 켄신에게 밀릴 수 밖에 없었고 무엇보다 카와카미 켄신은 당해년도 리그 우승을 이끌며 임팩트도 더 엄청났다. 카와카미 켄신도 사와무라 상 수상 조건을 다 만족하지 못해 어느정도 성적만 받쳐준다면 개막 12연승의 이와쿠마가 임팩트빨로 수상할 수도 있었으나, 그렇기에는 볼륨이 너무나도 부족했다. 아무리 사와무라 상이 수상조건보다 임팩트를 더 따지는 해가 있다고 쳐도 당해년도는 볼륨 스텟이 너무나 차이가 컸다. 때문에, 비율 및 세부 스텟에서 카와카미 켄신보다 앞섰고 개막 12연승의 임팩트까지 보유한 이와쿠마였지만 명함조차 내밀기 어려웠던 것. 특히, 이와쿠마가 후반에 매우 부진했던 것도 안 좋게 작용했다. 애시당초 사와무라 상 수상 조건을 모두 만족하지 못했기도 했고.[55] 사실, 올림픽 차출 때문에 사와무라 상 수상 경쟁에서 손해 본 이는 이와쿠마 말고도 마쓰자카 다이스케와 우에하라 고지도 있었다. 이 둘은 비율 스텟과 세부 스텟 모두 2004년 카와카미 켄신보다도 뛰어났지만, 볼륨이 부족해 이와쿠마와 마찬가지로 일찌감치 수상 후보에서는 제외됐다. 실제, 마쓰자카는 부족한 볼륨 스텟에도 불구하고 2004년 퍼시픽리그 골든 글러브를 수상했다. 당해년도 마쓰자카는, 10완투 5완봉 ERA 2.90이라는 철인같은 모습을 보여준데다가 비율 스텟 및 세부 스텟까지 훌륭했다.[56] 전체 2위 시즌은 2003년 퍼시픽리그의 타율 0.276[57] 전체 1위 시즌은 1980년 퍼시픽 리그의 OPS 0.797.[58] 그나마도 제일 높은 OPS가 2018년 센트럴리그의 0.730으로 2004년의 OPS 0.791과 꽤나 차이난다...[59] 여담으로, 이 해의 퍼시픽리그는 리그 전체 평자책이 ERA 2.87로 1980년대 이후 NPB 리그 기록 중 최저 평균자책점 1위인 해이다. 즉, 액면 그대로 2004년 퍼시픽 리그 ERA 2.90으로 1위를 차지한 마쓰자카는 2011년에는 평범한 기록을 남긴 평범한 투수가 되는 정도. 이뿐 아니라, 최근 10년간 NPB 기록을 통틀어봐도 보통 리그 평자책이 3점대 중반이므로 당시 마쓰자카의 ERA 2.90의 기록은 지금 리그에서 1위는 커녕 상위권도 요원하다. 평균보다 약간 나은 수준. 그렇기에, 지금 관점과 당시 리그 환경이 크나큰 차이가 있음을 인식하고 달리 평가해야한다.[60] 정작 일본 팀의 동메달 획득에 이와쿠마 본인이 기여한 바는 거의 없다.[61] 하지만, 당시 2004년 일본 대표팀 입장에서 동메달에 그친 것은 사실상 실패였다고 봐야한다. 이 대회는 미국과 한국 모두 출전을 안한 올림픽이었고 사실상 쿠바를 빼면 일본은 금메달 1순위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쿠바까지도 조별 예선에서 꺾는 모습을 보였으니 금메달을 기대할 법도 했다. 하지만, 전력이 일본에 비해 약체인 호주에게 일격을 당하며 3,4위전으로 밀려나 동메달 결정전에서 간신히 동메달을 땄다. 추가로, 프로 선수들의 참가가 허용된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이후의 일본 야구팀의 성적이 2000 시드니 노메달 - 2004 아테네 동메달 - 2008 베이징 노메달로 수난이 이어져 일본은 올림픽에서 입은 상처가 지속된다. 2000년 시드니 대회는 한국에 패하고 4위를 기록했으며 2004년 아테네 대회에서는 3위로 동메달, 그리고 2008 베이징 대회에서는 또 다시 한국에 패퇴하고 4위에 머물렀다. 즉, 한국이 참가하지 못한 2004년 대회를 제외한 다른 대회에서는 아예 메달을 받지 못한 셈. 더욱이 2004 아테네 올림픽 때는 미국도 참가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사실상 은메달을 확보하고 나서는 대회나 다름없었음에도 동메달에 머물렀다는 것이 충격이라면 충격. 오히려 이런 판국에 동메달을 딴 것은 사실상 실패였다고 봐야 한다.[62] 이날은 라쿠텐 창단 첫 홈경기 개막전이었다. 경기 결과는 16-5로 라쿠텐이 홈개막전 승리를 거두었다.[63] 여담으로, 일본프로야구 최초로 센트럴리그와 퍼시픽리그 간의 정규 시즌 교류전이 생겼던 시즌이다.[64] 완전히 새로 창단된 구단이 기존에 있던 구단을 상대로 공식 시합 첫 승을 거둔 최초의 사례가 되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 날, 0-26으로 대 참패를 하며 암울한 시즌을 예고했고 그 결과는 아래에 나오는 대로 시즌 통틀어 단 38승만을 거두는 최악의 시즌을 보냈다.[65] 4월 1일 세이부전 7이닝 5실점 승리투수, 4월 9일 오릭스전 8이닝 6실점 완투패, 4월 16일 니혼햄전 8이닝 5실점 완투패, 4월 23일 롯데전 1.1이닝 9실점 패전(참고로 이날 이승엽이 1회 1,3루 상황에 타석에 들어서 이와쿠마에게 우전 안타를 쳐내 3루에 있던 니시오카를 불러들이며 적시타를 얻어냈고 이와쿠마를 1회부터 무너트리는데 앞장섰다. 이후, 후속 베니의 중전 적시타 때 3루까지 진루한 뒤 오오쓰카의 중견수 희생플라이 때 홈을 밟았다. 2회에는 3루수 팝플라이로 물러났고 이와쿠마가 2회를 다채우지 못하고 강판되는 바람에 이날 이와쿠마를 상대로는 2타수 1안타 1타점 1득점 기록.), 4월 30일 세이부전 5이닝 1실점 ND (팀은 4-1로 패), 5월 8일 요미우리전 9이닝 1실점 완투승, 5월 15일 한신전 5.2이닝 7실점(5자책) 패전, 5월 22일 히로시마전 5.1이닝 7실점 패전, 5월 29일 한신전 4이닝 5실점 패전[66] 완투승 2번에 완투패 2번[67] 6월 4일 야쿠르트전 8.2이닝 1실점 승리투수, 6월 10일 히로시마전 6.2이닝 5실점(3자책) 패전, 6월 16일 요미우리전 7이닝 2실점 패전(팀은 4-0 팀 영봉패.), 6월 25일 세이부전 6.1이닝 4실점(2자책) ND. 당시 교류전은 36경기(상대 6팀과 홈/원정 3연전 각 1회씩)씩이나 되었기 때문에 교류전 일정이 상당히 길었다.[68] 7월 3일 니혼햄전 8이닝 5실점(4자책) 승리, 7월 9일 롯데전 9이닝 2실점 완투승(참고로 이날 이승엽은 이날 이와쿠마를 상대로 2회 우익수 뜬공, 5회 1루 땅볼로 물러났다. 하지만 이승엽은 팀이 1-4로 뒤지던 8회 1사에 이와쿠마의 바깥쪽 직구를 밀어쳐 좌전안타를 뽑아냈다. 이승엽은 후속 사부로의 중전 안타 때 3루까지 뛰는 적극적인 베이스 러닝으로 1사 2,3루의 기회를 만들었다. 이승엽은 그러나 후속 이마에의 3루 땅볼 때 홈에 뛰어들다 아웃되었고 득점을 기록하지 못했다. 결국, 이날 득점과 타점을 기록하지 못한 이승엽은 이와쿠마를 상대로 3타수 1안타 기록.), 7월 15일 니혼햄전 9이닝 4실점 완투승, 7월 28일 니혼햄전 6.1이닝 8실점 패전[69] 8월 3일 롯데전 3.1이닝 8실점(3자책) 패전(참고로 이날 이승엽은 이와쿠마를 만나 1회에는 1루수 플라이로 아웃됐다. 3-4로 뒤진 상황에서 4회 두 번째 타석에 들어선 그는 이와쿠마의 바깥쪽 싱커를 그대로 밀어쳐 좌익선상을 흐르는 2루타로 무사 2,3루를 만들었다. 후속 이마에의 안타때 홈을 밟아 이승엽은 득점에 성공. 타점은 없었지만 이승엽은 이날 이와쿠마를 상대로 2타수 1안타 1득점 기록. 참고로 이날 기록한 2루타가 이승엽의 일본 시절 이와쿠마를 상대로한 유일한 장타다.), 8월 10일 오릭스전 6이닝 5실점 패전, 8월 17일 니혼햄전 8이닝 4실점 완투패, 8월 24일 오릭스전 9이닝 1실점 완투승, 8월 30일 니혼햄전 7이닝 3실점 패전[70] 9월 6일 롯데전 7.2이닝 무실점 승리투수(참고로 이날 이승엽은 이와쿠마를 상대로 3회 첫 타석에서 유격수 땅볼, 5회에는 좌익수 뜬공, 7회에는 중견수 플라이로 물러났다. 타점과 득점을 기록하지 못한 이승엽은 이날 이와쿠마를 상대로 3타수 무안타 기록), 9월 13일 세이부전 3.1이닝 6실점 패전(상대투수 마쓰자카는 7이닝 무실점 승리투수), 9월 19일 오릭스전 8.2이닝 5실점 완투패(9회말 4-3 스코어로 앞서있었지만, 9회까지 혼자 책임지려 다시 마운드에 올라온 이와쿠마가 상대 타자 무라마츠 아리히토에게 역전 끝내기 2타점 적시타를 맞고 졌다.), 9월 25일 롯데전 6이닝 3실점 ND (6이닝 3실점을 한 후, 팀이 5-3 스코어로 앞선 채로 마운드에서 내려왔지만 불펜이 7회부터 9회까지 3이닝 동안 8점을 내주며 총 스코어 8-11로 패하고 만다. 참고로 이날 이승엽은 이와쿠마를 상대로 1회 첫 타석은 좌익수플라이로 아웃되었지만, 3회에는 고의 4구로 출루했다. 하지만, 후속타 불발로 득점을 하지는 못했고 5회에는 1루수 땅볼로 물러났다. 이날도 이승엽은 이와쿠마를 상대로 타점과 득점을 기록하지 못했다. 결국, 이와쿠마를 상대로 3타석 2타수 무안타 1볼넷 기록.) 그리고 라쿠텐은 이미 이 시점에 리그 최하위가 확정돼 있었다...[71] 이 평균자책점은 당해년도 규정 투구 이닝을 채운 투수 중에서 가장 낮은 기록이었다.[72] 당해 선발 투수 중 리그 최다패였다.[73] 자책은 101점[74] 그나마 1군 경력이 꽤 있었던 세키카와 코이치, 야마사키 타케시 등이 있던 야수진은 조금이나마 나았으나, 그 야수진이라고 투수보다 아주 약간만 나은 정도지 별반 차이는 없었다(...). 그나마 야마사키 타케시가 25홈런을 기록하며 회춘한게 작은 위안이었다.[75] 저 해 라쿠텐의 승수가 38승이었다! 승률은 당연히 2할대 중후반. 백인천 시절 롯데와 승률이 비슷했을 지경.[76] 5월 8일 요미우리전[77] 7월 3일 니혼햄전[78] 8월 17일 니혼햄전[79] 9월 19일 오릭스전[80] 물론 횟수가 이 시즌에 비해 적어진 것이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와쿠마가 한계 피칭 수를 100개 이하로 설정해 완투에 긴 집착을 하지 않게 된건 시기적으로 2011년도 후반기 부터다.[81] 참고로 마쓰자카는 같은 시기동안 총 33회의 완투를 기록했다.[82] 7월 15일 니혼햄전 9이닝 4실점 완투승[83] 쉽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이와쿠마는 9승 15패를 기록해, 이와쿠마가 나가는 날도 승률이 0.375에 불과했다.[84] 같은 이유로 투구폼을 수정했던 투수가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의 미우라 다이스케. 다만 이쪽은 그 해 커리어 하이를 기록했다.[85] 본인은 이중모션 금지로 인해 투구폼을 교정해서 어깨 통증이 도졌다고는 하는데, 사실은 이미 원래 폼으로 던질 때부터도 어깨가 안 좋았다. 상술하였듯이, 2005년 초부터 마운드에서 어깨 통증을 호소했을 정도.[86] 이와쿠마는 팀이 지고있는 상황에 마운드에서 내려와 패전이 될뻔 했지만 라쿠텐 타자들이 간신히 8회와 9회 각 한 점씩 만회하여 동점이 되었고 간신히 ND을 기록했다. 팀은 연장 접전 끝에 12회초에 2점을 획득해 스코어 6-4로 승리를 거뒀다.[87] 다행히, 팀은 연장 접전 끝에 7-7로 비겨 이와쿠마가 패전 투수가 되는 일은 없었다.[88] 팀 타자들은 상대 투수 야기 도모야를 공략하지 못해 야기 도모야는 9이닝 완봉승을 거뒀고 2-0 스코어로 팀 영봉패.[89] 팀은 4-1 스코어로 졌다.[90] 3월 31일 오릭스전[91] 선발 명단 및 라인업까지 발표되었지만, 시작 직전에 가와기시 쓰요시로 급히 교체되었다.[92] 8월 7일 니혼햄전 8이닝 2실점 승리, 8월 14일 오릭스전 8이닝 2실점 승리.[93] 포스트게임 인터뷰에서 노무라 감독이 4회 이와쿠마 리듬이 흐트러져 교체를 단행했다고 밝혔다.[94] 2022년 한신 타이거스 2군 배터리 코치[95] 8월 29일 니혼햄전 5.2이닝 4실점(3자책) ND, 9월5일 소프트뱅크전 4.2이닝 4실점 패전, 9월 12일 오릭스전 4.2이닝 5실점(1자책) (5회에만 5실점하며 팀이 지고 있는 상황에서 조기 강판되어 패전투수가 될 뻔 했으나, 팀 타자들이 7회부터 차근히 점수를 만회해줘 ND을 기록했고, 9회말 4번 타자 야마사키 타케시의 끝내기 타점이 터지며 6-5 스코어로 간신히 팀은 승리한다).[96] 9월 18일 니혼햄전 7이닝 2실점 패전(모리모토 히초리에게 7회 솔로 홈런을 맞긴 했지만, 7회까지 잘 던지다 내려온 이와쿠마였다. 하지만, 팀 타자들이 상대 투수진에 꽁꽁 막히며 2-0 스코어로 팀 영봉패 당했다.), 9월 24일 세이부전 8.2이닝 2실점 승리(8회까지 무실점으로 잘 막고 팀 타자들도 간만에 힘을 내줘 4-0스코어로 앞선채 9회를 맞이했다. 그러나, 9회 2아웃까지 두타자 연속 범퇴로 잘 잡다가 마지막 아웃 카운트를 남기고 와다 카즈히로에게 솔로 홈런을 맞는 등 2실점하며 단 원아웃만을 남겨둔 채 승계 주자를 남기고 강판되었다. 하지만, 다행히 이와쿠마에 뒤이어 올라온 구원 투수가 승계 주자 득점 허용 없이 경기를 잘 마무리해 팀은 4-2 승리하며 이와쿠마도 승리를 챙겼다). 여담으로, 이날의 포스트 게임 히어로 인터뷰가 2005년 8월 24일 오릭스전 이후 1개월 반만의 히어로 인터뷰였다고 한다.[97] 팀도 11-3의 스코어로 대패해 시즌 끝 마무리를 최악의 모습으로 마무리함과 동시에 이와쿠마는 패전투수가 되었다.[98] 출처[99] 당연하지만, 프로 투수에게 어린 시절부터 십수년간을 다듬어온 투구폼을 이미 프로 적응기가 끝난 후, 하루 아침만에 바꾸는 것은 매우 힘든일이다. 투구 폼이 바뀌면 밸런스도 달라지기에 좋은 기대보다는 걱정이 앞서는게 당연하다.[100] 9이닝 1실점 완투승, 상대 투수는 타케다 마사루.[101] 소프트뱅크 외야수 시바하라 히로시가 끝내기 홈런을 쳤다.[102] 심지어 9이닝동안 2피안타 무사사구의 완벽투였다.[103] 3월 20일 소프트뱅크전 7이닝 1실점 ND, 3월 27일 오릭스전 9이닝 2피안타 완봉승[104] 4월 3일 지바 롯데전 7이닝 무실점 승리, 4월 10일 니혼햄전 8이닝 1실점 완투패, 4월 17일 지바 롯데전 8이닝 2실점(무자책) 승리, 4월 25일 니혼햄전 8이닝 1실점 승리.[105] 물론, 한 달의 2개의 피홈런이 많이 맞은 것은 아니다. 이와쿠마는 당해 3개의 홈런밖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그 세개 중 두개를 무려 한달에 몰아서 맞은데다가 평자책도 많이 올라가 5월 한달은 부진이라면 부진이라고 볼 수도 있다.[106] 5월 2일 니혼햄전 4.2이닝 5실점 패전, 5월 9일 지바 롯데전 8이닝 3실점 승리, 5월 16일 세이부전 7이닝 2실점 승리, 5월 23일 요코하마전 8이닝 5실점(4자책) 승리, 5월 31일 히로시마전 7이닝 2실점 승리.[107] 6월 7일 히로시마전 9이닝 3실점(2자책)승리, 6월 15일 요미우리전 9이닝 무사사구 무실점 완봉승(상대 에이스 선발 투수 세스 그레이싱어는 일찌감치 무너지며 이와쿠마와의 선발싸움에서 패했다.), 6월 22일 히로시마전 6이닝 1실점 승, 6월 29일 소프트뱅크전 7이닝 무실점 승리[108] 7월 6일 세이부전 5이닝 5실점 ND, 7월 13일 지바 롯데전 6이닝 4실점 패전, 7월 20일 소프트뱅크전 7이닝 무실점 승리(상대 선발 와다 츠요시는 7이닝 3실점 패전), 7월 27일 오릭스전 8이닝 2실점 승리[109] 8월 10일 소프트뱅크전 8이닝 무실점 승리, 8월 16일 지바 롯데전 8이닝 무실점 승리, 8월 26일 세이부전 7이닝 2실점 승리.[110] 이를 포함, 9월에도 엄청난 페이스로 승리를 쌓았다. 9월 2일 오릭스전 6이닝 1실점 ND, 9월 9일 소프트뱅크전 8이닝 1실점 승리, 9월 16일 니혼햄전 9이닝 1실점 완투승, 9월 22일 세이부전 7이닝 1실점 승리, 9월 29일 소프트뱅크전 5이닝 4실점(3자책) 패전.[111] 1985년 한큐 브레이브스의 사토 요시노리가 21승을 찍은 바 있다.[112] 참고로, 그 해 이와쿠마의 QS%는 82.1%, HQS%는 67.9%였다. 반면, 사와무라 상을 두고 이와쿠마와 자웅을 겨뤘던 다르빗슈 유는 QS% 87.5%에 HQS 70.8% 기록.[113] 일본에서는 속칭 B클래스 팀이라고 명명한다. 반대로 A클래스는 상위 1 ~ 3위의 팀.[114] 여담으로, 이와쿠마에게 홈런을 친 선수들은 요코하마의 무라타 슈이치와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요시카즈 쿠라, 소프트뱅크의 마쓰다 노부히로이다. 모두 솔로 홈런이었으며, 참고로 당해년도 무라타는 46홈런을 기록하며 2년 연속 센트럴리그 홈런왕에 오르는 등 몬스터 시즌을 보내는 중이었고 마쓰다도 17홈런을 기록하였고 장타율도 4할 7푼으로 5할에 육박해 소위 말하는 한방을 보유한 선수들이었다. 즉, 맞을만한 선수들한테 맞은 것인데 특이한 점으로는 당해년도 2개의 홈런밖에 기록하지 못한 히로시마의 백업 포수 요시카즈 쿠라에게 일격을 당했다는 것이다. 16시즌 동안을 프로에서 보낸 요시카즈는 장타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고 무려 16시즌동안 커리어 내내 홈런도 25개 밖에 치지 못했다. 백업이라 단순히 경기 출장 기회가 적어 볼륨이 적어 보여 그런것이냐 하면 또 그것만은 아닌 것이 실제 비율 스텟을 보면, 커리어 통산 장타율이 3할조차 안되고 커리어 통산 타율도 2할 1푼대의 선수다. 심지어 2008년 당해년도 타율은 2할 7리에 장타율은 3할 6리(...)를 기록했다. 즉, 타격 능력은 볼품 없는 수준의 선수. 게다가 무라타와 마쓰다에게는 각각 커브와 투심이 실투로인해 가운데로 몰려 홈런을 맞았는데, 쿠라는 이와쿠마의 최고 무기인 포크볼을 잡아당겨 홈런을 기록했다. 물론, 가운데로 몰린 포크볼이기는 했지만 이와쿠마의 최전성기 그것도 유일하게 포크볼을 홈런으로 만든 선수라는 점에서, 쿠라 본인에게는 잊지 못할 커리어 모멘트였던 셈. 참고로 이 홈런이 쿠라의 2008시즌 2개의 홈런 중 마지막을 장식한 홈런으로 쿠라에게 2008시즌 1호 홈런을 내준 투수는 세스 그레이싱어 이쯤 되면 쿠라가 진정한 에이스 킬러다.[115] 당일 경기에서 마쓰다에게 1회부터 솔로 홈런 한개를 맞는 등, 이와쿠마는 이 날 5이닝 4실점(3자책)으로 부진한 모습을 보이며 시즌 4패째를 떠안았다.[116] 1958년에는 한큐 브레이브스의 아키모토 유사쿠(秋本 祐作)가 기록.[117] 기록 경신은 커녕 타이 기록도 없다. 그나마 제일 가까웠던 선수가 2012년의 다나카 마사히로와 마키타 가즈히사였는데, 당해년도 4개의 피홈런만 내주었다.[118] 여담으로 다르빗슈 유의 경우 2011년 232이닝 가량을 소화하며 맞은 5피홈런이 최고 기록이다.[119] 이와쿠마는 좋은 성적에도 불구, 베이징 올림픽 일본 대표팀으로 발탁되지 못했다. 이때문에, 결과적으로 다르빗슈 유보다 3경기를 더 뛸 수 있었고 이 덕에 볼륨이나 누적 스텟에서 유리하게 시즌을 마칠 수 있었다. 그런데 소화 이닝이 단 1이닝 차이인건 함정.. 심지어 탈삼진 수는 오히려 다르빗슈가 앞선다.[120] 후술되어있지만, 다르빗슈 유 본인 조차도 본인이 상을 받을것 같다고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언플 본인의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121] 2008년 다르빗슈 유는 200과 3분의 2이닝 동안 208탈삼진 16승 4패 ERA 1.88 WHIP 0.897 기록. 다르빗슈 유는 베이징 올림픽 차출로 인해 이와쿠마보다 세 경기 덜 뛰었지만, 이닝 소화는 비슷하고 탈삼진은 오히려 더 많이 잡았다. K/9나 볼삼비, WHIP같은 세부 지표는 오히려 다르빗슈 유가 이와쿠마보다 더 나았지만, 이와쿠마의 21승이 워낙 대기록인지라 사와무라상 수상의 영예를 이와쿠마에게 내주고 말았다.[122] 참고로, 당해년도 WAR은 이와쿠마가 8.3, 다르빗슈 유는 7.5를 기록했으며 당해년도 규정 이닝을 채운 선수 중 각각 1위와 2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123] 대표적으로, 2001년의 마쓰자카 다이스케가 그런 예시에 적합한 케이스. 하지만, 마쓰자카가 수상한 2001년에는 마쓰자카를 포함해 모든 투수가 수상 기준을 달성하지 못했다. 즉, 이와쿠마와 마쓰자카는 미묘하게 다른 케이스이기도 하다.[124] 다만, 이 둘은 후술한대로 2008년 사와무라 상 쟁탈전 개념과는 미묘하게 다른 케이스인데 해당 내용이 궁금하다면 본 문단의 끝 부분을 참고하면 된다.[125] 2008년 다르빗슈 유는 200과 3분의 2이닝 동안 208탈삼진 16승 4패 ERA 1.88 WHIP 0.897 기록.[126] 꼴찌는 라뱅이 몸담고 입던 주니치의 0.253[127] 사실, 이와쿠마는 28경기를 모조리 선발로만 출장했고, 다르빗슈 유는 25경기 중 한경기는 구원 등판을하여 24경기만 선발로 출장했다. 볼륨적인 측면에서는 말이 세 경기 차지 사실상 네 경기 정도의 격차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128] 이 기록은 당해년도 2위의 기록이다. 참고로, 당해년도 최다 탈삼진 1위는 213개의 스기우치 도시야.[129] 원호율(援護率)이라고도 하며, 선발 등판했을 때 본인 팀 타자들이 얼마나 점수를 내줬는지 계산한다.[130] 올림픽 차출로 한달간 자리를 비워 누적 성적에서 손해를 본 다르빗슈 유의 사와무라 상 수상을 위해 소속팀 니혼햄이 배려 차원에서 한 경기 구원 등판을 시켜줬다. 사와무라 상의 수상 기준 중 '25경기 이상 출전'이라는 항목이 있기 때문.[131] 첫번째는 에가와 스구루이고 두번째가 상술된 다르빗슈 유이다. 다만, 에가와는 본인 이외의 전항목 달성자에게 수상의 영예를 내준 케이스이지만, 다르빗슈 유는 본인이 전항목을 달성하고도 전항목을 달성하지 못한 투수(이와쿠마)에게 수상의 영예를 내준 최초의 케이스[132] 다만 횟수로만 보면 네 번째. 바로 두 번째 주인공인 다르빗슈 유가 2008년과 2011년에 전항목을 달성하고도 받지 못했기 때문. 2011년은 그래도 마찬가지로 전항목을 달성한 다나카 마사히로에게 밀려 2008년처럼 전항목을 달성 못한 투수에게 수상 기회를 내주는 상황을 두번 째 맞이하지는 않게되었다.[133] 그나마 이닝 소화와 탈삼진 수는 가네코가 다나카를 앞섰다.[134] 반면 다르빗슈 유는 비슷한 8이닝 소화에도 불구하고 5월 7일: 8.2이닝 4실점 패(팀은 3-4패).[135] 4월 3일 지바 롯데전 (팀이 9-1 승), 4월 17일 지바 롯데전 (팀이 11-2로 승), 4월 25일 니혼햄전 (팀이 6-1 승), 5월 9일 지바 롯데전(팀은 11-4로 승), 5월 16일 세이부 전(팀은 8-2로 승), 5월 31일 히로시마전(팀은 8-3으로 승), 6월 29일 소프트뱅크전 (팀은 15-2로 승), 9월 16일 니혼햄전 (팀은 6-1 승), 9월 22일 세이부 전 (팀은 6-1 승), 10월 5일 소프트뱅크전 (팀은 8-0 승). 상술한 경기들에서 이와쿠마는 팀의 대승과 함께 모조리 본인의 선발승을 챙겼다.[136] 라쿠텐의 주요 타격 지표는 팀 타율 0.272로 양대리그 통틀어 1등, 출루율 1등, 장타율과 ops는 중간 수준, WRC+는 98을 기록했다. 반면, 니혼햄은 팀 타율 0.255로 밑에서 2등 그리고 팀 장타율 0.366으로 단독 꼴찌, 팀 OPS도 0.682로 꼴찌, 팀 WRC+도 83을 기록하여 서로 유의미한 차이를 보였다.[137] 다르빗슈 유의 득점 지원률(원호율)은 당해년도 3.51이었고, 이와쿠마의 득점 지원률은 5.66으로 퍼시픽 리그 1위의 득점 지원이었다.[138] 사실, 메이저리그 성적도 단일시즌 최전성기 성적만 놓고보는게 아니라 누적으로 보면 이와쿠마는 다르빗슈 유에게 상대가 되지 않는다.[139] 단, 커맨드에 관해선 이와쿠마를 더 높이 쳐주는 경우가 많다. 이진영의 경우도 비슷한 평가를 내린 적이 있다. 2009 WBC에서 상대했을 때, 다르빗슈 유는 힘으로 밀어붙이는 스타일 같았으며 생각보다 그렇게까진 위압감이 느껴지진 않았다고 한다. 한국 타자들은 빠른 공에는 적응을 하기 때문에 오히려 괜찮았다고. 하지만 너무 빠른 투수에게는 털렸었지... 주무기인 슬라이더도 본인이 좌타자이기 때문에 많이 던지지 않아 그렇게 위력적이었는지 못 느꼈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이와쿠마에 관해서는 좋은 얘기를 해주었는데, 이와쿠마는 제구가 엄청나 분명 스트라이크를 던지는데도 방망이에 안 닿을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특히, 스트라이크 존을 왔다 갔다 하는 제구력이 일품이었다고. 스트라이크 존 외곽에서만 공이 논다는 묘사이므로 정확히는 커맨드라기 보다는 로케이션 능력에 대해서 칭찬을 한 것으로 보인다.[140] 이 날, 다르빗슈 유는 개인 최다 한경기 최다 탈삼진 기록을 15개로 경신했다.[141] 2011 시즌 다나카 마사히로와 2021 시즌 야마모토 요시노부 둘이 기록한 WAR 9.8 정도가 그나마 WAR 10.0에 근접했던 투수들이다.[142] 두 선수 모두 2011년을 마지막으로 NPB 무대를 떠나 2012년 MLB 무대에 나란히 입성했다.[143] 반면, 다르빗슈 유는 2010을 제외하고 2007년부터 2011년까지 매번 0점대 WHIP를 기록했으며, 심지어 MLB 건너가기 직전 시즌인 2011년과 각성의 원년인 2007년에는 0.828의 WHIP라는 먼치킨 성적을 내어버렸다![144] 물론, 아무리 투승타타라 해도, 한 시즌 20승은 본인의 실력 없이는 절대 달성할 수 없는 기록이기에 21승 투수라는 점에 높은 점수를 주고 평가에 있어 큰 주안점을 둔다고해서 투승타타라고 놀림 받을 정도는 아니다.[145] 다만, 상술한 것처럼 승운이 없었던 관계로 2009 WBC MVP는 3경기 3승 0패를 기록한 마쓰자카 다이스케가 차지했다.[146] 이 경기에서는 WBC 여파를 고려해 관리 차원에서, 59개 공만을 던지고 내려왔다. 즉 6이닝 동안 59개, 이닝 당 10개도 채 안되는 공 갯수로 상대팀을 눌러막았다는 소리다.[147] 4월 3일 니혼햄전 6이닝 1실점 승리, 4월 10일 세이부전 5이닝 3실점 패전, 4월 18일 오릭스전 8이닝 3피안타 무실점 승리, 4월 25일 소프트뱅크전 7이닝 무실점 ND[148] 5월 2일 오릭스전 7이닝 3실점 승리, 5월 9일 롯데전 7이닝 1실점 승리, 5월 16일 소프트뱅크전 9이닝 1실점 완투승, 5월 23일 요미우리전 7이닝 5실점 패전(여담으로, 이날 이승엽은 요미우리로 이적한 후 처음으로 이와쿠마를 만나 그를 상대로 2타수 무안타로 물러났다. 2회초 선두 타자로 나와 헛스윙 삼진을 당했고 3회초에도 주자 1,2루 찬스에서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났다. 그래도, 팀이 4-0으로 앞서던 6회 초 선두타자로 나와 이와쿠마를 상대로 볼 넷을 얻어냈다. 최종적으로, 이날 이와쿠마를 상대로 이승엽은 3타석 2타수 무안타 1볼넷 기록.), 5월 31일 히로시마전 4이닝 5실점(4자책) 패전[149] 6월 6일 야쿠르트전 7이닝 5실점 패전, 6월 14일 요코하마전 6이닝 무실점 승리[150] 7월 12일 소프트뱅크전 5이닝 7실점 패전, 7월 19일 오릭스전 4이닝 4실점 ND, 7월 28일 세이부전 9이닝 1실점 완투승[151] 8월 4일 오릭스전 9이닝 2실점 완투승, 8월 11일 소프트뱅크전 7이닝 무실점 승리, 8월 18일 니혼햄전 9이닝 3실점 완투승, 8월 25일 세이부전 10이닝 2실점 ND (팀은 연장 접전 끝에 이와쿠마가 내려간 11회말 끝내기 홈런을 맞고 패배한다.)[152] 9월 1일 세이부전 9이닝 2실점 완투승 (9회초까지 1-2 스코어로 팀이 뒤져 그대로 끝나면 패전이 될 뻔했으나, 9회말 토드 린든의 끝내기 안타로 3-2 스코어로 재역전 하여 완투승을 거둘 수 있었다.), 9월 8일 오릭스전 8이닝 3실점 승리[153] 9월 15일 니혼햄전 6이닝 5실점 패전, 9월 21일 오릭스전 8이닝 2실점 승리, 9월 29일 소프트뱅크전 6이닝 5실점 ND, 10월 6일 롯데전 6이닝 2실점 ND[154] 참고로, 이 시즌이 라쿠텐의 창단 이후 최고 성적이며 동시에 A클래스(1위 ~ 3위의 상위권)에 이름을 올린 첫 해이다.[155] 4월 3일 소프트뱅크전 6.1이닝 8실점 패전, 4월 10일 오릭스전 7이닝 1실점 승리, 4월 17일 소프트뱅크전 9이닝 3실점 승리, 4월 24일 니혼햄전 9이닝 완봉승(팀은 3-0승 상대 투수 다르빗슈 유는 9이닝 3실점(1자책))[156] 5월 1일 오릭스전 8이닝 1실점 승, 5월 8일 니혼햄전 9이닝 무실점 ND, 5월 15일 한신전 8이닝 3실점 완투패, 5월 22일 요미우리전 7.1이닝 3실점 ND, 5월 29일 히로시마전 9이닝 2실점 ND[157] 6월 5일 요코하마전 7이닝 4실점 ND, 6월 12일 야쿠르트전 8이닝 4실점(2자책) 패전, 6월 19일 롯데전 7이닝 무실점 승리(참고로 이날 김태균은 일본 무대 데뷔 후 처음으로 이와쿠마를 만났다. 첫타석에서는 2루타 기록. 두 번째 타석에서는 중전 안타를 기록하여 강한 모습을 보여주며 멀티 히트를 기록했다. 7회에는 좌익수쪽 잘맞은 타구가 호수비로 인해 잡혀버려 이와쿠마를 상대로 최종 3타수 2안타 기록. 하지만 후속타가 터지지 않아 홈은 밟지 못했다. 이날 김태균은 이와쿠마를 상대로 타점도 득점도 기록하지 못하였다.), 6월 25일 소프트뱅크전 8이닝 2실점 ND[158] 7월 2일 니혼햄전 7이닝 2실점 ND, 7월 10일 세이부전 7이닝 1실점(무자책) 승리, 7월 16일 니혼햄전 6이닝 5실점(4자책) 패전, 7월 27일 소프트뱅크전 7이닝 4실점(3자책) 패전[159] 8월 3일 롯데전 6이닝 3실점 승리(참고로 이날 김태균은 이와쿠마와의 세 번의 대결에서 모두 범타 처리되며 3타수 무안타 기록. 2회초 첫 타석에서 루킹 삼진을 당했고 4회 초에는 2루 땅볼로 물러났다. 팀이 2-4로 뒤진 6회 초에는 헛스윙으로 삼구 삼진을 당했고 이날도 이와쿠마를 상대로 타점과 득점을 기록하지 못했다.), 8월 10일 세이부전 4이닝 4실점 패전, 8월 17일 오릭스전 6.1이닝 3실점 패전, 8월 24일 니혼햄전 8이닝 1실점 승리, 8월 31일 롯데전 6이닝 무실점 승리(참고로 이날 김태균은 이와쿠마와의 세 번의 대결에서 첫 타석부터 삼진을 비롯해 모두 범타 처리되며 3타수 무안타 기록. 1회말 2사 1루에서 포크볼에 속아 헛스윙 삼진당했다. 김태균은 4회 선두타자로 2루수 앞 땅볼로 아웃되었고 6회에는 유격수 땅볼로 아웃되며 타점도 득점도 기록하지 못했다.)[160] 9월 5일 세이부전 4이닝 4실점 ND, 9월 11일 오릭스전 8이닝 무실점 승리, 9월 18일 롯데전 8이닝 2실점 ND(참고로 이날 김태균은 이와쿠마와의 네 차례 타석에서 만났다. 첫 타석은 범타로 물러났지만, 두 번째 타석에서 스트레이트 볼 넷을 얻어낸다. 하지만, 후속타 불발로 득점을 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세 번째 타석인 6회 팀이 0-1로 뒤지고 있던 상황에 동점 솔로홈런을 쳐낸다. 네 번째 타석인 8회에는 삼진으로 물러났고 결국 이날은 이와쿠마를 상대로 4타석 3타수 1안타(홈런) 1볼넷 1타점 1득점 기록.), 9월 24일 니혼햄전 6이닝 4실점 패전[161] 다만, 이와쿠마는 커리어동안 200이닝을 넘긴 시즌이 그 명성에 비해서는 부족한 단 세번 밖에 기록하지 못했다.[162] 오히려 이 해 개인 성적은 2010년만 못했는데, 팀의 총 승리 중 4분의 1이나 책임지는 비운의 에이스로 기억되어 2010년 활약은 라쿠텐 창단 원년(2005년)에 그대로 묻혔다.[163] 참고로 브렛 앤더슨이 오클랜드와 4년간 $12.5M에 사인했다.[164] 특히 시애틀을 비롯한 AL 서부지구 팀들.[165] 생활비, 통역비, 일본과 비교도 안되는 이동거리와 빡빡한 일정 등 메이저리그로 간 일본 투수들에겐 여러 제약이 따르는데, 이런 것을 견뎌내려면 일단 페이가 빵빵해야 하는 법이거늘 빌리 빈은 일본에서 받는 연간 3억엔의 금액과 비슷하고 오히려 기간만 왕창 긴 4년 $15.5M의 노예계약을 제시하시었다(...)[166] 데이빗 데헤수스 트레이드에서 로열스로 간 빈 마자로와 함께 2000년대 중반 빌리 빈의''' 고딩 드래프트의 성공작이다.[167] 4월 12일 롯데전 8.1이닝 4실점(3자책) 승리(참고로 이 날은 김태균의 도망 KBO 리그 국내 복귀 이전 마지막으로 이와쿠마와의 대결이 있던 날인데 4타수 무안타로 무력하게 물러났다. 자세하게는 1회 삼진, 4회 삼루수 땅볼, 5회 1루수 플라이, 8회 유격수 땅볼로 물러났다. 4회말엔 1사 3루의 찬스에서 김태균의 3루수 앞 땅볼 때 3루주자가 홈을 파고들었고 3루수가 홈으로 던졌으나 포수가 공을 잡지 못해 세이프가 됐다. 아쉽게 포수의 포구실책으로 기록되며 김태균의 타점으로는 인정되지 않았다. 이 덕에 출루는 했지만, 후속타 불발로 득점도 얻지 못했다.), 4월 19일 소프트뱅크전 (상대 투수 와다 츠요시와의 투수전이 있었다. 4회 이와쿠마가 첫 실점을 한 뒤, 6회에 와다도 1실점 하여 1-1 동점이 되었다. 이후, 9회까지 1-1 스코어 그대로 승부를 가리지 못해 이어진 연장 10회초 라쿠텐 타자들이 1점을 득점해 2-1 스코어로 이겨 이와쿠마는 승리를 챙겼다.) 9이닝 1실점 완투승, 4월 26일 세이부전 9이닝 무실점 완봉승[168] 5월 3일 소프트뱅크전 7이닝 3실점 패전, 5월 10일 니혼햄전 8.2이닝 2실점 패전, 5월 17일 요미우리전 5이닝 2피안타 무실점 ND.[169] 이 날, 다르빗슈 유는 개인 최다 한경기 최다 탈삼진 기록인 15개를 기록했다.출처[170] 8월 3일 세이부전 6이닝 3실점 패전, 8월 9일 오릭스전 6이닝 무실점 ND, 8월 16일 세이부전 6이닝 3실점 ND, 8월 23일 니혼햄전 6이닝 1실점 승리, 8월 30일 세이부전 8이닝 1실점 승리[171] 9월 6일 오릭스전 6이닝 4실점 패전(참고로 이날 이승엽은 2년만에 이와쿠마를 다시 만나 그를 상대로 3타수 2안타를 기록했다. 2회 1사 2루 상황 첫타석에 초구를 받아쳐 안타를 기록했지만, 2루 주자였던 T-오카다가 홈에서 아웃돼 타점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후속타 불발로 득점에도 실패. 4회는 2루수 정면으로 아웃되었고, 6회는 포크볼을 잘 쳐내 우익수 안타를 만들었다. 하지만 후속타 불발로 이승엽이 홈을 밟지는 못했다. 결과적으로 이날 이승엽은 이와쿠마를 상대로 3타수 2안타 기록. 타점과 득점은 올리지 못했다.), 9월 13일 오릭스전 7이닝 무실점 ND(참고로 이날 이승엽은 이와쿠마를 상대로 3타수 무안타로 물러났다. 2회 첫 타석에서는 중견수 플라이 아웃 5회에는 헛스윙 삼진 7회에는 루킹 삼진으로 물러났다. 결국 이날도 타점과 득점은 올리지 못했다.), 9월 23일 소프트뱅크전 7이닝 3실점 패전, 9월 30일 오릭스전 8이닝 2실점 완투패(참고로 이날 이승엽의 NPB에서 마지막 이와쿠마와의 맞대결이 있었다. 이승엽은 이날 이와쿠마를 상대로 3타수 1안타를 기록했다. 2회 첫 타석에서 우익수 쪽 안타를 쳐냈지만 다음 타자 아카다 쇼고가 3루수 앞 병살타를 치는 바람에 2루에서 잡혀 득점하지는 못했다. 5회에는 우익수 플라이로 아웃되었고, 6회에 헛스윙 삼진을 당하여 이와쿠마와의 마지막 대결을 아쉽게 마무리했다. 결국 이날도 타점과 득점은 올리지 못했다.)[172] 이 통증은 2012년 까지 영향을 주게 되고 트레이너로부터 오른쪽 어깨 주변의 근육이 다른 쪽보다 약하다는 판단과 함께 시범 경기 선발 로테이션을 거르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이때문에, 헥터 노에시, 헤수스 몬테로 등과의 선발 자리 쟁탈전에서 밀려 구원(패전조)으로 2012 시즌을 시작했다. 그런데 헥터가 6월까지 2승 10패로 매우 부진했던 탓에 이와쿠마는 7월 7일 경기부터 선발로 전환되었고 그렇게 그의 MLB에서의 화려한 선발 커리어가 시작되었다.[173] 정작 마쓰자카도 MLB 완투 횟수가 MLB 커리어 내내 1회 밖에 되지는 않는다. 다만, 마쓰자카와 이와쿠마의 MLB 커리어에서 가장 큰 차이는 MLB에서 부상을 입은 마쓰자카는 기존의 방식을 고수했다는 것.[174] 4월 19일 소프트뱅크전 126개의 공 피칭. 4월 26일 세이부전 147개의 공 피칭.[175] 2019년 8년만에 NPB 무대에 복귀하나, 더 이상 이 때의 모습은 두번 다시 찾아볼 수 없었다.[176] 성적에 따라 $3.4M으로 인센티브가 추가될 수 있다.[177] 준수한 3~4선발급 선수들의 몸값이 못해도 연간 $5M을 호가하는 것을 생각하면...[178] 2013년 $6.5M, 2014년 $6.5M, 2015년 클럽 옵션 $7M, 바이아웃 $1M[179] 보통 5선발급 투수가 이정도 계약을 받는다. 이와쿠마 입장에서도 일본에서 받던 금액의 2배이니 만족할 만한 금액이긴 했다.[180] 당연히 역대 아시아 투수 중 단일 시즌 bWAR 1위. 13시즌 메이저리그 투수 전체 bWAR 1위는 8.1을 기록한 클레이튼 커쇼였다.[181] 아쉽게 200 탈삼진은 달성하지 못했다.(다만 같은해에 다르빗슈가 이를 전부 달성해 냈다)[182] 같은해에 다르빗슈도 13승 ERA 2.83, 209.2이닝, 277탈삼진으로 양대리그에서 압도적 최다 탈삼진을 기록했다.[183] 결과적으로 이 당시 다저스는 포기 당시에는 욕을 좀 먹었지만 현 시점에선 1라운드 픽의 손실을 막고 그 픽으로 지명한 유망주를 쏠쏠하게 잘 키웠다. 이 픽으로 지명한 선수가 개빈 럭스.[184] 그 펠릭스 에르난데스 규정이닝을 소화하지 못했다.[185] 당일, 최고 구속 141km/h의 공을 뿌렸고 전성기만한 패스트볼 무브먼트나 볼의 위력이 나오지는 않았으나 특유의 변화구 무브먼트는 여전해 변화구로 땅볼 타구를 만들어냈고 헛스윙 삼진까지 잡아냈다.[186] 프로가 되고 나서는 두 번째 시즌. 프로 첫 해인 2000년에는 2군리그와 교육리그만을 오갔고 1군에서는 단 한차례도 등판하지 못했다.[187] 21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는, 어렸을 때부터 부상없이 던졌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심정을 토로했다. 어린 시절부터 그를 괴롭혔던 부상 탓에 선수 생활 전반에 관한 아쉬움이 많이 남은 듯 하다. 마찬가지로 부상에 많이 힘들어했지만, 질릴만큼 공을 많이 던져 후회는 없다고 은퇴 시기에 심경을 밝힌 마쓰자카 다이스케와는 대조적인 모습.[188] 이와쿠마가 전력으로 던진 일구는 타자 어깨를 맞췄다고 한다.[189] 이와쿠마는 20대 시절에도 어깨 뿐 아니라 등, 팔꿈치 등 숱한 부위들을 수술했다.[190] 공식적인 은퇴 요청은 10월이 지나서였다고 한다. 하라 감독 뿐 아니라 이치로, 친한 동료인 다르빗슈 유와 다나카 마사히로에게도 그 뜻을 전했다고.[191] 물론, 마쓰자카도 던지면 손이 저려 공을 제대로 던질 수도 없는 상태에서 한 타자만 상대한 것이다.[192] 특히, 라쿠텐 때 이와쿠마의 전성기 시절 함께 배터리를 이루었던 포수 시마 모토히로가 꽃다발을 전해 보는 이로 하여금 감동을 주었다.[193] 사실 이 역시도 100% 이와쿠마의 실력 때문에 뽑혔다기 보다는 운이 따라줬다고 볼 수 있는 것이, 아테네 올림픽 일본 야구 국가 대표팀은 당시 팀 당 2명씩을 차출하여 나간 것이고 NPB 최정예 1군 팀은 아니었다. 2004년 개막 12연승 등 좋은 활약을 보이기는 했으나, 국제대회 경험이 없는 어린 투수였기에 최정예로 선발하였다면 발탁되지 못하였을 수도 있었던 셈.[194] 대표적으로 2006년에는 2006 WBC, 2007년에는 2007 아시아 선수권 대회, 2008년에는 2008 베이징 올림픽이 있다.[195] 21승 4패 평균자책점 1.87기록 및 사와무라상 수상.[196] 실제 당시 김경문 올림픽 야구대표팀 감독이 '윤석민이 자신의 스타일에 맞지 않는다'는 인터뷰를 하여 한국 야구팬들의 공분을 샀다.[197] 성적상 이와쿠마는 당시 대표팀에 승선한 와쿠이 히데아키나 다나카 마사히로, 우에하라 고지, 나루세 요시히사에 비해 매우 뛰어난 성적을 기록 중이었기에 더욱 아쉬움이 컸다. 이와쿠마가 대한민국 대표팀의 윤석민같이 알토란같은 활약을 해줬을 지도 모를 일이기에. 정작 저들이 아닌 잘 던질 것으로 예상되었던 이와세가 대참사를 일으킨 것은 함정. 추가적으로 와다 츠요시와 카와카미 켄신도 동메달 결정전에서 의외로 참사의 원인이 되며 일본 야구팬 및 언론에게 강도 높은 질타를 받았다. 그리고 다르빗슈 유도 올림픽에서는 그저 그랬고, 당시 일본 국가 대표팀 중 성적 상 올림픽에서 최하위권 기록을 남겼다. 당시 일본 국가 대표팀 성적이 궁금하다면 이 쪽으로.[198] 반대 편의 그 분이 떠오른다[199] 소위 말하는 엘리미네이션 게임.[200] 스플리터는 NPB에서는 비교적 흔한 구질이지만, 북미 중남미 팀에게는 굉장히 생소한 구질이라 그 선수들이 대다수 포진되어있는 MLB에서 이와쿠마의 스플리터는 엄청난 위력을 보였으며 그 덕에 전성기를 맞이한다.[201] 실제, 당시 WBC 대회에서의 이와쿠마를 상대했던 우리나라의 이범호도 그의 반포크성 계열의 스플리터의 위력이 엄청났다고 회상하며 자신이 상대했던 최고의 투수 3인방 중 한명으로 이와쿠마를 뽑았다. 나머지 두 명은 스기우치 도시야와 류현진.[202] 이 홈런이 정말 대단한 이유는 전년도(2008년)에 이와쿠마는 시즌 내내 3홈런 밖에 허용하지 않은 투수라는 점이며, 게다가 대회 당시 2009년 3월 에도 한국과 쿠바 타자들 중 이와쿠마 공을 제대로 정타로 받아친 타자들 조차 거의 없었다. 한국과 쿠바 상대로도 홈런은 커녕 안타도 정타로 잘 안내주던 이와쿠마에게 추신수가 굉장한 임팩트로 센터로 날려버리는 홈런을 기록했다.[203] 여러모로 불운하다. 1실점으로 잘막고도 패전투수가 되지 않나, 결승전은 3:2로 7회 2아웃 까지 단 4개의 아웃 카운트만 남기고 승리투수 조건을 갖춘 채 마운드에서 내려왔는데, 이번에는 마무리 투수가 승리를 날려버렸으니. 이와쿠마는 3경기 모두 엄청난 피칭을 보여줬지만, 1승 1패를 기록하며 대회를 마무리한다. 같은 팀의 마쓰자카 다이스케는 3승을 기록하여 대회 MVP가 되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피칭 내용은 이와쿠마가 더 좋았고 기록도 이와쿠마가 더 좋았으므로 운만 따라줬더라면 MVP는 결승전에서 호투한 이와쿠마의 것이었을 테다.[204] 당시 대회에서 15이닝 이상을 던진 투수 중 가장 낮은 평균자책점 기록[205] 안타는 꽤 내주었으나, 상술하였듯 잘 맞은 타구가 없었다. 전성기 이와쿠마 공이 상당히 지저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 또한, 엘리미네이션 경기에서 쿠바타자들에게 뺐은 18개의 아웃 카운트 중 무려 15개가 땅볼 아웃이었다.[206] 그의 NPB 전성기는 각성하여 절정을 보여주던 2008년 부터 2011년까지라고 볼 수 있는데, 2009년 WBC 이후에 2011년까지 일본이 나선 대회 중 프로가 나서는 메이저 대회 자체가 없었다. 그나마있던 아시안게임은 일본에서는 아마추어를 내보내기에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도 출전할 기회 조차 없었다.[207] 만일, 이와쿠마의 기량이 그 이전부터 만개했더라면 2006 WBC나 2008 베이징 올림픽부터 우리나라 타자들과 마주했을 가능성이 크다.[208] 2013 WBC, 2015 WBSC 프리미어 12, 2017 WBC에 메이저리그 선수 차출 거부나 시즌 준비 등의 사유로 불참했다.[209] 2004 아테네 올림픽 직전 쿠바와의 평가전 1이닝 1실점과 2009 WBC 직전 호주와의 평가전 3.1이닝 무실점을 합하면 국제대회 통산 26이닝 7실점(6자책) ERA 2.08을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