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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공예관 특별 전시: 19세기 평양의 장도 |
1. 개요
길 장(長) 자 장도(長刀)가 아니라 단장할 장(粧) 자를 써서 장도(粧刀)라고 한다. 칼집이 있는 작은 칼을 가리키는데, 허리춤에 차고 옷고름에 찬다 하여 패도(佩刀),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하여 낭도(囊刀)라고도 불렀다. 보통 '은'으로 세공된 장도가 많아서 흔히 '은장도'라고 불리지만, 재질에 따라 다른 이름도 붙는다. 한자어에서 화장용 거울을 장경(粧鏡)이라고 하므로, 장도(粧刀)란 명칭은 '장신구 칼'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TV 사극 때문에 사람들이 장도를 정절을 잃을 위기에 처한 여자가 자결하기 위해 쓰는 칼이라고 흔히들 생각하고 헛소문으로도 퍼져 있는데, 실제 쓰임새는 자결용이나 호신용 무기보다는 맥가이버칼 같은 다용도 도구에 가까웠다. 애초에 여자만 썼던 물건도 아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성별을 불문하고 패용하던 물건이었고, 남자가 장도를 패용한 옛날 사진도 볼 수 있다. #
물론 현대에도 식칼이나 커터칼을 무기로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듯이 호신용이나 자결용으로도 쓰이긴 했으나 그 본질은 무기가 아닌 '도구'이다. 단장할 장(粧) 자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장신구적인 의미도 강한 물품이었다.
2. 관련 기록
언제부터 패용했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신라시대 고분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황남대총 북분 금제 허리띠에서 장도 모양을 본뜬 장식칼이 순금 유물답게 그 형태가 현대까지 또렷하게 남았고, 황남대총 북분의 피장자는 여자라고 밝혀졌으므로 조선시대에 부녀자들이 호신용으로 소지했던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금령총에서 출토된 순금 작은고리칼뿐만 아니라, 고려시대에도 작은 칼을 제조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만큼, 장도처럼 작은 칼을 패용하는 문화는 몽골 이전부터 있었음이 사실로 확인되었다.고구려의 연개소문 관련 중국 사료에도 연개소문의 성격이 포악하여[1] 항상 칼 5자루를 차고 다니며 위엄을 과시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칼 하면 떠올리는 대도 5자루가 아니라 비수 5개를 찬 것이라는 설도 있다. 또한 연개소문 시절 고구려에서는 비수를 던지는 '비도술'이 유행했다고 한다.[2] 고려인들은 칼과 붓이 함께 달린 칼을 차고 다닌다는 기록[3]과, 백성들에게 비수 패용을 금했다는 기록[4]도 있으니, 장도와 유사한 칼을 소지하고 다니던 풍습이 있었던 듯하다. 단 명칭이 처음 확인되는 것은 조선 전기이다.[5] 참고로 한반도에서 휴대용 소형칼 유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삼한시대 사용된 철제 손칼이다.
친일반민족행위자인 최남선은 고려 시대 원나라에서 전파된 몽골의 풍속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뚜렷한 근거는 없다.[6] 다만 장도의 형태나 유행에 몽골의 영향이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7]
경국대전에는 도자장 6명과 환도장 12명이 상의원(尙衣院)에 소속되어 궁중의 장도를 제작하였음이 기록되었다.[8] 이는 칼을 만드는 장인이 중앙에 소속되었다는 뜻이다. 여기서 도자장은 작은 손칼을 만드는 사람, 환도장은 군용 도검을 만드는 사람이다.
조선시대에는 신분차별과 규제를 법제화했는데, 장도에도 신분상 차이가 있었다.
...제 6조. 갓끈은 예조에서 아뢴 대로 하고, 은장도자는 단지 서민에게만 금할 것이며....[9]
....마류, 호박, 산호, 청금석의 입영과 은장도자는 당상관 외에 사용하는 것을 일체 금하고....[10]
일반 서민들도 장도를 널리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17세기 현종 때, 유생, 잡직 및 서인남녀의 장도 패용을 금한 것[11]을 보면 나라에서 금지해도 사람들은 계속 갖고 다녔던 것 같다.영조 50년(1774)에는 전인 20여 명과 도자장 5~6명이 가게를 열었고[12] 도자전은 장도, 은비녀, 패물, 금은가락지, 담배통 등을 팔았다고 한다.[13]
장도가 보급되면서 자연히 장식이 화려해졌는데, 주로 부녀자들이 애용한 매화연화입사, 주로 선비들이 애용한 백동입사, 그 외에도 물소뿔, 대모갑, 침향목, 흑각, 화리, 오동 등이 있는데, 그중에서 특히 오동[14] 장식은 오동으로 칼집과 자루를 만들고 자루에 무늬를 새긴 것으로 왜제(倭制)라고 불렀으며, 매우 정교한 기술을 요구하는 장식이다.
《승정원일기》의 '명나라 사절이 요구한 물건 중 은장도의 수량을 채우지 못해 근심했다'는 기록이나, 《열하일기》에는 예단물목으로 석장도 37자루, 초도 284자루, 환도 7파, 은장도 7자루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이웃나라에서도 인기 있었던 듯하다.
조선시대의 부녀자들이 애용하던 3대 소지품으로 거울, 빗, 장도가 꼽혔으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여인의 정절을 지키는 상징적인 성격이 강화되었다. 무슨 임란 당시 자결이 아닌 공격용(?)으로 사용했으면 열녀로 선정되지 못했느니 하는데, 담양국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든 사실이 아니다. 다만 열녀 칭호는 '죽음으로 정절을 지켜야' 주는 것이었으므로 자결이 더 확실히 받을 수 있었던 것. 최명길은 환향녀[15]를 두둔하며 하던 말이 기록에 전해진다.
정절과의 관계에서 은장도는 어디까지나 상징적인 의미가 강했지, 은장도 자체는 생활 도구로서 남녀 가리지 않고 다용도로 쓰던 작은 칼일 뿐이다. 따라서 자결용보다는 최후의 방어수단으로서 사용된 예가 훨씬 더 많다.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현대의 맥가이버칼이나 커터칼, 가위(하다못해 눈썹칼이나 시침가위라도) 같은 걸로 생각하면 된다. 평소 가지고 다니는 물품이 누군가를 공격하기 위해서일 리 없고, 자살용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그러나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 수중에 그것밖에 없다면 그거라도 들고 자기방어를 시도함이 당연히 자연스럽다.
전문가들도 자결용이라는 말을 부정한다. #
젓가락을 달아서 실용성을 높인 첨자도가 있으며, 장신구적인 기능만 수행한 칼날이 없는 장도 벙어리 장도도 있다. 특히 벙어리 장도의 경우 장도가 자결용으로 소지하고 다닌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하지만 잘못 아는 사람들이 여성이 단도를 소지했다니 멋있다며 좋아하는 외국인들에게마저 은장도를 자살용으로 들고 다녔다는 오해를 퍼뜨리곤 한다(...).[16]
3. 종류
장도는 형태에 따라, 또한 재료와 조각의 문양에 따라 이름이 붙는다.- 형태에 따른 분류
칼집과 칼자루에 복잡한 장식이 붙은 것은 '갖은장식', 단순한 장식은 '맞배기'로 나뉜다. 여기서 맞배기에는 칼집과 칼자루가 일자형인 '평맞배기'와 을(乙)자형인 '을자맞배기'가 있다. 또한 단면이 사각형이면 '사모장도', 팔각형이면 '모잽이장도'라고 부른다. 그리고 장도 칼집과 칼자루에 젓가락이나 과일꽂이, 귀이개 등이 붙어있는 장도는 '첨자도'라고 한다. 주로 은으로 만들며, 음식에 비소가 포함된 독이 있을 경우 검게 변색되어 독을 검사하는데 쓰이기도 했다고 한다.
- 재료에 따른 분류
재료에 따라 목장도와 골장도, 은장도, 금장도 등으로 나뉘는데, 먹감나무로 만든 것은 '흑시도' 또는 '대모갑', 즉 거북이의 등껍질로 만든 것은 '대모장도', 은으로 만들었으면 '은장도', 순금을 도금하여 만드는 장도는 '금장도', 옥으로 된 것은 '옥장도'라고 부르는 식이다. 그 외에 비취, 호랑이 뼈로 만들기도 한다.[17] 또한 칼집과 자루는 나무지만 장식과 고리 등이 은이면 '은장장도', 금이면 '금장장도', 칼날이 없으면 '벙어리장도', 노리개에 달기 위해 금은보석으로 만든 순수한 장식용은 '패물장도' 혹은 '노리개장도'라고 불렀다. 특히 대나무에 낙죽(대나무 표면에 불에 달군 인두로 그림이나 글자를 새긴 것)으로 장식한 것은 낙죽장도라고 한다. 낙죽장도는 삼국시대부터 전해져 왔으며, 조선시대에는 학문을 업으로 살았던 선비들이 애용하였다. 선비들이 인두로 수백에서 수천자의 한문 및 한시를 새겨 장도임과 동시에 서책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 화려한 다른장도와 달리 낙죽장도는 매우 소박하고, 오직 기록 및 사군자와 세한삼우를 형상화한 장도이다.
- 장식에 따른 분류
장도에는 부귀문, 수복문, 다남문, 안녕문, 절개문 등을 많이 새겼는데, 부귀문은 부(富), 수복문은 수(壽), 복(福), 십장생 그림이 대표적이고, 다남문은 박쥐문, 안녕문은 용문, 나비문, 강(康)자, 영(寧)자, 절개문은 사군자 및 소나무가 대표적이다. 목장도의 조각이 장생문이면 '장생문장도', 박쥐면 '박쥐문장도'라고 부르는 식이다. 그 외에도 조각, 상감, 칠보, 화각, 낙죽 등으로 장식하며, 화각장도, 칠보장도, 낙죽장도 등으로 부른다.
위 3가지 분류에 따라 은장오동포도문자도, 대추나무백동을자도, 칠보은장맞배기도, 대추나무금은장팔모도, 화류은장첨자도, 금은장십장생문갖은을자도, 배부른은장원통형은장도, 나전칠기박쥐문갖은맞배기도, 흑시은장맞배기도, 은장십장생문첨자도 같이 이름이 길게 붙는다. 하지만 특징을 전부 보고 만든 사람이 이름을 지어도 부르는 사람 마음이다.
4. 무형문화재 장도장
현재까지 다양한 종류의 장도 중에서 '은장도'가 대대로 전해지는 유이한 곳은 울산광역시와 광양시이고, 대나무로 제작된 '낙죽장도'는 곡성군이 유일하다. 광양시 은장도, 곡성군 낙죽장도가 국가무형유산 제60호로 등재되어 있으며, 울산광역시 병영 은장도는 울산광역시 지방무형문화재 제1호로 등재되어 있다.광양장도의 박용기 옹은 광양에 장도박물관 및 장도전수회관을 세웠으며, 그가 작고한 뒤에는 아들인 박종군 장도장이 2대째 이어받았다. 현재 손자 박남중 장도장 이수자로 3대째 이어지고 있다. 박종군 장인의 경우 동북공정으로 빼앗길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으며, 드라마에서 칼도 아닌 걸 들고 나와서 장도라고 하는 모습을 보고 협찬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돈이 궁하다 팔아먹으면 역적이고 매국노가 된다"는 말을 했다. 여러 영화나 드라마 등에서 눈에만 안 띄고 언급만 안 되었을 뿐이지 꾸준히 협찬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3대째인 박남중 장도장 이수자는 이어가는 의무감 뿐만이 아니라 이후 세대에게 더 재미있게 받아들이고 이어질 수 있을 지를 고민하는 마인드로 장도장의 길을 걷고 있다.
곡성의 낙죽장도는 일제강점기에도 맥이 이어진 광양장도와 병영장도와 달리 찾는 이가 적어[18] 사라져갔지만 그 가치를 깨달은 한병문 선생이 다시 일으켰다. 한병문 선생은 종조부 한기동 옹에게 어린 시절 9년 동안 배웠다고 하며, 농삿일을 하며 근근히 생계를 이어오다 1993년 국가무형문화재 장도장으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곡성에 낙죽장도 전수교육관을 건립하였다. 그가 작고한 뒤에는 아들 한상봉 장도장이 뒤를 이어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손자 한준혁이 이수자로서 3대째 이어가고 있다.
병영장도는 울산 중구 병영에서 현재까지 전수되어 내려오고 있다. 다만 무형문화재 기능 보유자들의 여러 사정으로 인해 맥이 끊길 위기에 처했다. # #
5. 기타
- 매체에서는 사극 등에서 반가의 여인이 자결하거나 자결을 시도할 때에나 종종 등장하고, 기타 서브컬쳐 매체에서는 거의 묘사되지 않는다. 그나마 퇴마록의 주인공 이현암이 가진 월향이 어느정도 유명하다. 가장 최근 매체에서 등장한 경우로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서 황정학이 사용한 낙죽장도가 있다.
- 장신구 용도로 세공만 한 장도의 경우 칼날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무형문화재가 만드는 광양장도의 경우 탄소강을 쓴데다가 수작업으로 벼려놨기 때문에 어지간한 칼보다 날카롭다. 그만큼 어느정도 관리가 필요하다.
[1] 중국 사료에서는 연개소문을 당연하게도 악인으로 묘사한다. 적국의 장수이니...[2] 추원교, <한국 도자공예의 발달과정 고찰-장도의 조형성을 중심으로>, 논문집 제11집, 1988. 박종군, <한국도검에 관한 연구-장도를 중심으로>, 동국대 교육대학원 석사논문, 1989.[3] <고려도경>, 권32, 기명.[4] <고려사절요>, 권3, 현종 5년(1014). <고려사절요>, 군4, 정종 11년(1045).[5] <세종실록> 세종 1년(1419) 12월 19일.[6] 최남선, <고사통>, 삼중당, 1943. 실제로는 1930년 동아일보에 연재된 '조선역사강화'를 대본으로 하고 증보해 단행본으로 만든 책이다. 정치 및 국제관계는 대부분 내용을 그대로 옮겨 놓았고 일본의 침략을 은폐하거나 미화하는 쪽으로 수정했다. 증보된 부분은 대부분 문화에 관련된 내용이다.[7] '신라의 유물이나 고려 시대 작은 칼을 만들었다는 기록을 통하여, 장도는 아니지만 유사한 칼이 있었을 것으로 보면서도, 장도는 몽고의 영향을 받아 고려 후기부터 본격적으로 유행했다고 보았다.' 황호근, <한국장신구미술연구>, 일지사, 1976. '신라시대에 존재하던 비수가 고려시대 몽고의 침입으로 몽고식 칼이 한국에 이미 있던 비수와 결합하여 장도가 형성되었다고 보았다.' 김종태, 무형문화재조사보고서 제194호, <중요무형문화재조사보고서> 제21집, 문화재관리국.[8] 권6, 공전[9] <연산군일기> 연산군 4년(1498) 6월 15일(경진)[10] <중종실록> 중종 17년(1522) 8월 12일(을유)[11] <비변사등록> 29책, 현종 11년(1670) 12월 29일[12] 비변사등록 178책, 정조 15년(1791) 1월 8일.[13]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 비고편, 한성부[14] 오동나무가 아니라 구리에 금, 은을 합금한 것으로, 비율은 구리가 9할 정도. 유황, 옻 혹은 요소(삭힌 오줌) 등으로 검게 착색시킨다고 하여 까마귀 오(烏)자를 썼다.※[15] 흔히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에 끌려가 돌아온 아녀자들을 가리킨다고 잘못 알려진 단어. 화냥년의 어원이 아니다. 환향녀 항목 참조.[16] KBS에서 방송되었던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이용식과 이다도시가 함께 MC로 나와 거리에서 외국인들 앞에서 한국의 민속품에 대해 소개하는 코너가 있었는데, 장도를 보고 신기한 듯 다가와서 이게 뭘까 궁금해하던 외국인들이 이용식과 이다도시 두 사람이서 마임으로 보여주는 (여성들이 남편 아닌 남자들 앞에서 자신들의 정조를 지키기 위해 그 남자가 아닌 자신을 찌르는 용도로 사용했다는) 소개를 보고 나서 "Oh, NO!"라고 기겁하는 반응을 보였다. 개중에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방법이 있다고 여성용 호신술을 선보여주는 사람도 있었다.[17] 2015년 10월 4일 KBS TV쇼 진품명품 방송 참조. 의뢰인이 가지고 나온 건 아니고, 심사위원이 호랑이 뼈로 겉을 만든 호골장도 유물을 가지고 나왔다.[18] 낙죽장도는 뜻이 있는 유학자들이 소장해서 이전부터 그 수요가 매우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