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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2 21:16:31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의 벨라루스 점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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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토벌 작전3. 초토화 정책4. 홀로코스트
4.1. 부역 행위4.2. 저항 운동
5. 증언6. 결과7. 기타

1. 개요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부터 1944년 바그라티온 작전까지 나치 독일소련의 구성국 중 하나였던 벨라루스 SSR을 점령, 통치했다.

점령 기간 동안 나치 독일은 유대인을 대상으로 홀로코스트를 저질렀으며 벨라루스인, 폴란드인, 러시아인 등 현지 주민을 상대로도 학살과 잔혹행위를 자행했을 뿐만 아니라 파르티잔 소탕을 빌미로 징벌적 학살도 빈번하게 저질렀다.

독일이 세운 대동부 계획(게네랄플란 오스트, Generalplan Ost)은 레벤스라움에서 유대인의 절멸과 슬라브인의 노예화 및 추방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 나치 독일은 벨라루스에 거주했던 유대인과 현지 지식인 계층을 절멸시키다시피 했다. 잔혹한 통치에 반발하여 벨라루스 전역에서 파르티잔이 봉기하자 독일 경과 SS는 1941년부터 1944년까지 140회 이상의 대규모 토벌 작전을 전개하여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했고 생존자는 절멸 수용소 또는 강제 노동 수용소 등으로 추방했다.

2. 토벌 작전

벨라루스에서 벌어진 토벌작전과 학살은 디를레방어 여단과 같은 특수한 목적을 가진 부대만 저지른 것이 아니었다. 국방군과 경찰도 학살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다음은 1941년 8월 25일과 29일에 작성된 독일 국방군 병장 요하네스 게르더(Johannes Gerder)의 일기다.[출처]
집에 수류탄을 던져 넣었다. 집은 빠르게 타오른다. 불은 다른 집으로 옮겨 붙었다. 참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사람들은 울었고, 우리는 눈물이 나도록 웃었다. 이런 방식으로 벌써 마을 10개를 태웠다.[원문1]
― 1941년 8월 25일 요하네스 게르더의 일기.
8월 29일. 우리는 한 마을에서 사람 수십명을 잡아다 묘지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무덤을 넓고 깊게 파도록 했다. 슬라브인들에게는 자비를 보일 수 없고 그것이 있을 수도 없다. 이 저주스런 족속들은 우리에게 외계생물같다.[원문2][4]
― 1941년 8월 29일 요하네스 게르더의 일기.

벨라루스를 점령한 독일군은 파르티잔이 저항하자 곧바로 민간인들을 학살했다. 1941년 7월 무장친위대의 경찰 연대가 수많은 마을을 파괴했고 8월에는 제221, 제286보안사단, 제162, 제252보병사단이 보그세브스키 인근 지역에서 벌어진 토벌 작전에 참여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작전 단 한 번에 무려 13,788명의 민간인들이 처형되었다. 4,396명이 학살된 1942년 3월 26일 밤베르크 작전, 12,897명이 학살된 1943년 2월 8일 호르눙 작전 등 이러한 학살은 붉은 군대가 벨라루스를 해방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벨라루스에서 학살 정책을 주도한 사람은 중부집단군 후방지역 사령관 막스 폰 솅켄도르프, 그리고 바르샤바 봉기를 잔인하게 진압한 SS 대장 에리히 폰 뎀 바흐-첼레프스키다. 또 악명 높은 오스카 디를레방어의 부대도 참여했다. 귄터 폰 클루게, 에른스트 부슈, 발터 모델 등 독일 중앙집단군 사령관을 역임한 자들은 이들의 상급부대장으로서 벨라루스 후방에서 벌어지는 초토화를 방조했다.

1943년 무렵부터는 차량화보병, 전차, 항공기를 이용한 대규모 토벌 작전이 벌어졌다. 민간인 학살은 일상적으로 일어났으며 가축, 곡물, 재산을 모조리 약탈하고 나머지는 불태워 버렸다. 노동 적령기의 인구는 독일로 끌려가 강제 노동에 동원됐으며 수많은 민간인들이 의도된 기아로 굶어 죽거나 병에 걸려 죽었다. 무수히 많은 건물들이 타 버렸고 광대한 면적의 지역이 황폐화되었다. 1943년 5월 20일에 벌인 코트부스 작전의 결과에 따르면 수십 군데의 마을이 불탔고 1만명 가량을 죽였으며 6000명 가량이 독일로 수송되었다.

3. 초토화 정책

파일:attachment/벨라루스 초토화작전/벨라루스학살4.jpg 파일:attachment/벨라루스 초토화작전/벨라루스학살5.jpg 파일:attachment/벨라루스 초토화작전/벨라루스학살6.jpg 파일:attachment/벨라루스 초토화작전/벨라루스학살7.jpg

소련에 전세가 역전된 1943~1944년에는 점령 지역을 모두 파괴해 황폐화시키는 정책이 실행되었다. 정책의 목표는 퇴각하기 전 소련이 탈환할 땅을 완전히 파괴하는 것이었으며 그 일환으로 주민들과 그 거주지는 모조리 불태워 없어졌다. 사람들은 집이나 창고, 헛간 등에 갇혀 분살당했다. 비쳅스크 지역의 경우 마을 243곳이 두 차례 불탔고 83곳이 세 차례, 22곳이 무려 네 차례나 불태워졌다. 거주지와 주민들은 거듭 공격받으며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벨라루스가 해방됐을 때는 많은 지역이 사막처럼 변했다.

예를들어 1943년 3월 22일 벌어진 하틴(Khatyn) 학살[5][6]에서는 제118보안경찰대(Schutzmannschaft)와 무장친위대 제36무장척탄병사단 디를레방어 부대가 마을로 들어와 주민들을 집에서 헛간으로 몰아넣고 짚으로 덮은 다음 불을 ​​질렀다. 갇힌 사람들은 헛간 문을 무너뜨리고 탈출을 시도했지만 모두 기관총 사격으로 사망했다. 헛간에 갇힌 주민들은 모두 불에 타거나 총에 맞거나 질식해 사망했고 하틴 마을은 철저하게 파괴되었다.[7]

나치는 최소 5,295군데의 마을을 파괴하였는데 그 중 81%가 1943~44년 사이에 벌어진 초토화 정책으로 파괴되었다. 하루에 최소 5곳의 마을을 파괴한 꼴이다. 나치 독일 점령 3년 동안 최대 223만의 사망자가 나왔는데 이는 벨라루스 인구 4분의 1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수치였다.[8]

4. 홀로코스트

벨라루스에서 발생한 사망자 2~3명 중 1명은 유대인이었다. 유대인이 벨라루스 인구의 11명 중 1명을 차지했음을 감안하면 벨라루스의 모든 종족집단 중 가장 집중적이고 의도적인 학살의 대상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9] 1941년 7월 3일 민스크에서 유대인 지식인 2천여 명이 숲에 끌려가 학살되어 벨라루스 최초의 유대인 살육이 이루어졌다. 1941년 7월 15일 유대인들에게 다윗의 별을 볼 수 있게 패용하라는 명령이 내려졌고 동월 20일에는 민스크 게토가 세워져 10만 가량의 유대인들이 수용되었다. 민스크 게토는 소련 점령지에 세워진 유대인 게토 중 가장 거대한 수용인원을 자랑했다. 벨라루스의 다른 도시들도 상당수의 유대인을 수용했는데, 보브루이스크 게토는 2만 5천, 비쳅스크 게토는 2만, 모길레프 게토는 1만 2천, 고멜 게토는 1만 이상, 슬루츠크 게토는 1만, 보리소프와 폴로츠크 게토는 각각 8천을 수용했다. 이외에도 다른 중소도시와 마을에도 게토가 세워졌다. 고멜 주(Gomel Oblast)만 해도 20개 게토에 최소 2만 1천이 수용되었다. 오늘날 벨라루스 남부는 7월 17일 우크라이나 국가판무관부에 병합되었고 이 지역도 유대인들은 다른 주민들과 분리되어 임시 게토에 수용되었다.

게토에 갇힌 수많은 유대인들이 극심한 인구 과밀과 그로 인한 영양실조, 위생 악화에 시달려 아사하거나 병사했다. 그러나 독일은 유대인들이 "자연적으로" 죽어가는 속도에 불만족했다. 11월 독일은 독일, 오스트리아,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에서 끌고 온 유대인 2만 5천을 수용하기 위해 민스크 게토에서 유대인 1만 2천을 끌어냈다. 그들 중 6,624명은 11월 7일에, 5,500명은 동월 20일에 인근 투친카 숲에 끌려가 아인자츠그루펜에게 총살되었다. 이듬해 1942년 3월 민스크 게토에서 유대인 5천명이 더 학살되었다. 동년 8월까지 민스크 게토에 남은 생존자는 9천도 되지 않았다. 1943년 10월 독일 당국은 민스크 게토를 청산하고 그때까지 살아남은 유대인들을 소비보르 절멸수용소로 이송하여 학살했다. 다른 수천여 명은 민스크에서 동쪽으로 수킬로미터 떨어진 마을 말리 트로스테네츠 절멸수용소에서 학살되었다.

독일 당국은 유대인을 게토에 수용할 뿐만 아니라 각 도시와 마을을 수색하여 유대인들을 적극적으로 살육했다. 최초의 학살 작전은 독일의 질서경찰[10]아인자츠그루펜이 수행했다. 7월 8일 RSHA 장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점령지 내 15세 이상 45세 이하 유대인 남성을 눈에 띄는 대로 모두 사살할 것을 명령했다. 8월까지 독일의 학살부대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유대인을 죽였다. 이 총알에 의한 홀로코스트(Holocaust by bullets)로 오늘날 벨라루스 영역에 거주하던 최소 80만의 유대인이 학살되었다. 그들 대부분은 아인자츠그루펜, 보안국[11], 질서경찰, 벨라루스인 보조경찰[12]에 학살되었다.[13] 1944년 7월 3일 소련군이 민스크를 탈환했을 때 남아 있던 유대인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독일군은 벨라루스에서 패퇴하기 전에 홀로코스트의 흔적을 지우려고 발악했다. 예를 들어 말리 트로스테네츠 절멸수용소에서 죽은 사람들은 샤시코브카에 설치된 소각로에서 불태워져 블라고브치나에 묻혔다. 말리 트로스테네츠는 바비야르 학살을 감춘 1005호 특임대[14]에 의해 흔적이 지워졌지만 이 정도의 대규모 학살이 드러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조사단은 블라고브치나에서 50미터 길이의 매장지 34군데를 찾아냈는데, 3미터 깊이에서 뼈가 타고 남은 재로 된 50cm~1m 가량의 지층이 발견되었다. 여기에 15만명 가량의 사람들이 묻혔다.

4.1. 부역 행위

독일이 벨라루스에서 벌인 일련의 홀로코스트 및 토벌 작전은 현지인의 협조가 필요했다. 특히 홀로코스트의 경우 비유대인과 유대인을 구별할 사람이 필요했으므로 현지인 부역자들이 더더욱 중요했다. 1941년에 이미 벨라루스인으로 구성된 경찰부대가 창설되었다. 백루테니아 총괄관구[15]의 현지인 경찰부대는 1941년 12월 3,682명에서 1943년 4월 6,850명으로 증가했다. 1942년에는 벨라루스인 철도수비대도 창설되었다. 1943년 8월까지 보조경찰로 복무한 벨라루스인의 수는 2만에 달했다. 소련군이 벨라루스를 탈환한 후 다수의 벨라루스인 보조경찰들이 소련 당국에 체포되어 기소되었다. 오늘날에도 벨라루스인 보조경찰의 존재는 민간과 정부를 막론하고 벨라루스 사회의 터부로 남아있다.

독일은 벨라루스인 보조경찰을 채용할 뿐만 아니라 독일에 부역하는 괴뢰국을 설치하려 했다. 그 이유는 1943년부터 독소전쟁의 전황이 크게 악화되어 현지인의 협조가 절실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해 라다슬라우 아스트로우스키(Радаслаў Астроўскі, Radasłaŭ Astroŭski)를 대통령으로 한 동방 국가판무관부내의 자치 정부인 벨라루스 중앙 라다가 수립되었다. 하지만 소련군이 벨라루스를 수복하자 중앙 라다는 나치 독일로 망명했다.

4.2. 저항 운동

벨라루스는 독일의 소련 점령지 중 가장 활발한 저항 운동이 일어난 지역 중 하나다. 독일이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벨라루스 SSR 전역을 석권할 당시부터 벨라루스의 모든 민족들은 저항 운동을 일으켰다. 파르티잔은 붉은 군대의 패잔병, 현지 주민들로 구성되었고, 붉은 군대 장교, NKVD, 공산당 관료들이 파르티잔 부대를 이끌었다. 1941년 말 파르티잔 부대는 이미 2천개가 넘었고(병력 9만 이상) 점령 기간 전체를 통틀어 파르티잔에서 복무한 벨라루스 주민은 37만 4천 명에 달했다. 소련이 독일군 후방에 침투시킨 병력도 많았지만 파르티잔을 구성한 주요 집단은 현지 주민들(65%)이었다. 벨라루스 파르티잔은 소련이 바그라티온 작전을 발동하기 직전 독일 중앙집단군의 후방을 들쑤시며 소련의 대승에 크게 공헌했다.

심지어 게토에 갇혀 그 활동 반경이 극히 제한된 유대인들마저 소련 파르티잔과 긴밀히 협력하여 저항 운동의 한 축을 담당했다. 민스크 게토에서 인근 숲으로 탈출하여 파르티잔에 가담한 유대인만 1만명에 달했다. 물론 독일 점령지에서 파르티잔 집단은 끔찍한 인명피해를 강요당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생존률은 벨라루스 유대인 공동체의 생존률을 상회했다. 바르바라 엡스타인(Barbara Epstein)에 따르면 민스크 게토를 탈출을 시도한 3만 명 중 전술한 1만 명만이 파르티잔에 가담할 수 있었고, 또 그들 중에서 절반만이 생존했다. 벨라루스 서부에서 활약한 비엘스키 파르티잔과 공개 처형 직전 '죄목'을 적은 팻말이 목에 걸린 채 사진이 찍힌 마리야 브루스키나(Марыя Брускіна)[16]도 유명하다.

단, 프랑스와 폴란드의 예처럼 벨라루스도 각 파르티잔의 이념과 성격이 서로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소련 당국에 충성하거나 협력하던 파르티잔이 있었고(이들이 벨라루스 파르티잔의 다수를 차지함), 소련 당국에 반대하던 파르티잔도 있었다. 후자는 벨라루스인의 독립국가 수립을 주장하는 벨라루스 민족주의 진영[17], 그리고 폴란드 국가의 재건을 부르짖는 폴란드 민족주의 진영[18]이 있었다. 벨라루스 영역 내에서 활동하던 이 파르티잔 집단들은 독일군을 상대하듯이 서로 반목했다.

이스라엘의 홀로코스트 국립 기념관 야드바솀이 2021년 1월 1일까지 선정한 열방의 의인(Righteous Among the Nations) 2만 7,921명 중 벨라루스인은 676명에 달했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로마 가톨릭 운동가 반다 스쿠라토비치(Ванда Скуратовіч)다. 그녀는 표트르 마셰라우(Пётр Машэраў)가 영도하는 파르티잔 부대에 가담하여 반독 저항운동을 벌였고, 수용소로 끌려가던 유대인 가정을 구출했다.

5. 증언

(소규모 저항 단체가 숲에 숨어 독일군을 괴롭히기도 했습니다. 그 보복으로 마을 전체가 체계적으로 파괴되고 주민들은 살해됐죠. 죽은 부대 대신에 리투아니아인, 라트비아인, 우크라이나인 살수 부대가 벨라루스에 파견되었습니다.)
"아무도 우리 임무가 뭔지 말해주지 않았어요.갑자기 아침에 우리를 트럭에 싣고 이동했죠. 도착해서야 어디로 왔는지 알 수 있었어요. 군사기밀이었죠. 독일 군인과 리투아니아인 지원자들은 민스크(벨라루스)로 보내졌어요. 거기서부터 시작됐거든요. 유대인들의 학살이요.
(질문: 처음 유대인을 쏜 곳이 어디입니까?)
작은 마을이었어요. 이름은 기억나지 않아요. 그곳에서 나치가 힘없는 사람들을 죽였죠. 유대인 남자들은 전쟁에 나갔어요. 노인과 여자 아이들만 남아 있었죠. 그런 사람들을 대상으로 명령이 내려졌어요. 죽이라고요.
(질문:아이도 죽였습니까?)
네, 구덩이 안에 있는 아이들을 죽였어요. 아이들을 죽여야만 했죠. 고통을 겪으며 죽게 하지 않으려면요. 어차피 죽을 운명이었으니 그 편이 훨씬 자비로웠죠. 빨리 죽이는 편이요.
...소이탄으로 쐈어요. 그게 옷가지를 태우거든요. 온통 타는 냄새가 났죠.
(질문: 어머니가 아이를 지키려고 했을 때는 누구를 먼저 노렸나요?)
먼저 부모를 죽이고 그 뒤에 아이를 죽였어요. 그래서 부모는 아이가 죽는 걸 볼 필요가 (말을 잇지 못하고 멈춤) 끔찍한 짓이었죠! 큰 애들은 운명을 알았어요. 그래서 구덩이에 엎드려 있었어요. 하지만 작은 아이들은 죽은 부모 쪽으로 기어갔죠. 팔다리를 움직여가면서요. "
유오자스 알렉시나스(Juozas Aleksynas, 리투아니아인 소총병)
TV 다큐멘터리 아인자츠그루펜: 나치의 학살부대, 2009, 3화 중
여기에 프랑스 역사학자 크리스티앙 앵그라오(Christian Ingrao)는 다음과 같이 해설했다.
"사람들은 주로 헌신적인 애국자예요.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런 민병대에 참가하는 것이 전쟁 포로에서 벗어나거나 죽음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는거죠. 아니면 비참함을 면하고 당국에서 시민에게 할당한 식량을 좀 더 얻는 한 방법으로도 볼 수 있어요.
크리스티앙 앵그라오
TV 다큐멘터리 아인자츠그루펜: 나치의 학살부대, 2009, 3화 중

6. 결과

독일측 연구에 의하면 1941년 6월 당시 벨라루스 SSR 주민은 총 1,060만 명이었다.[19] 그 중 788만 명은 벨라루스인, 93만 5천명은 유대인, 92만 5천명은 폴란드인, 59만 명은 러시아인, 16만 2,500명은 우크라이나인이었다. 3년 간 나치 치하에서 희생된 벨라루스 SSR 주민은 소련 당국의 발표에 따르면 223만에 달했고, 20세기 말 벨라루스인 역사가들도 최소 195만의 사망자를 인정했다. 사망자 중 유대인은 80만에서 100만 명에 달했다. 2차대전 중 파괴된 마을 9,200개 중 5,295개가 독일군에 의해 파괴되었고, 그 중 628개는 주민이 절멸되었다. 또한 120만채의 건물이 전소되었다. 특히 민스크비텝스크 등 대도시는 건물과 인프라의 80%가 파괴되었다. 민스크는 전후 영웅 도시의 칭호를 수여받는다. 나치 독일은 슬라브인을 게르만족의 노예 노동력으로 사용하려 했으므로 벨라루스 지식인들을 거의 대부분 학살했고 38만명을 자국으로 이송하여 강제노동에 써먹었다.

주요 학설은 아니지만 다른 추계는 벨라루스 SSR 주민을 900만 명으로 잡고 그 중 피살자를 160만-170만으로 잡기도 한다. 그 중에는 포로 70만, 유대인 50만-55만, 소위 빨치산 토벌로 인한 사망자 34만 5천, 기타 10만. 이것은 소련군에서 복무하다 전사한 벨라루스인 수십만 명을 제외한 숫자다.[20] 그리고 파르티잔 토벌 과정에서 숨진 34만 5천 명 중 90%는 민간인이었다.

벨라루스에서 자행된 홀로코스트는 유럽의 유대인 중심지 중 하나였던 벨라루스 유대인 공동체와 문화를 완전히 파괴했다. 전쟁 전 거의 100만에 달했던 유대인들 중 90%가 학살당했고 남은 생존자들도 하나둘씩 외국으로 이주하여 홀로코스트로 인한 피해를 도저히 복구할 수 없었다. 결정적으로 소련 붕괴의 여파로 인해 그나마 남아 있던 유대인들도 거의 대부분 외국으로 이주했다. 2019년 기준으로 벨라루스에 남은 유대인은 1만 3,705명에 불과하다.[21]

7. 기타

소련의 역사서술은 소련의 붕괴와 함께 역사서술의 장에서 퇴장하게 되었지만 역사서술에서 유대인의 희생이 망각되거나 동유럽 현지인의 홀로코스트 가담이 부정되는 현상은 동구권 및 구소련 국가들에서 민족주의가 득세하고 그에 따른 민족주의 사관이 강화되면서 더욱 고착화되었다.[23] 이것은 발트 3국, 벨라루스, 폴란드, 우크라이나 등 오늘날 동유럽권 국가들이 홀로코스트 역사서술을 놓고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이주한 이스라엘유대인 공동체와 갈등을 빚는 요인이 되었다.[24]


[출처] Stätten des Gedenkens in Belarus. CHATYN UND MALY TROSTINEC – TEIL 1: CHATYN(Jochen Fuchs, Janine Lüdke, Maria Schastnaya)[원문1] Wir werfen Granaten in die Wohnhäuser. Die Häuser brennen sehr schnell. Das Feuer geht auf andere Häuser. Ein schöner Anblick! Die Menschen weinen und wir lachen über ihre Tränen. Wir haben auf solche Weise schon etwa zehn Dörfer niedergebrannt.[원문2] Der 29. August. In einem Dorf haben wir Dutzende uns begegnete Menschen gepackt und haben sie zum Friedhof geführt. Wir ließen sie für sich ein geräumiges und tiefes Grab ausgraben. Für die Slaven gibt es keine Schonung und es kann sie nicht geben. Der verdammte Humanismus ist uns fremd.[4] 원문 그대로 옮김.[5] 1940년 벌어진 카틴(Katyn) 학살과 발음이 비슷하지만 1940년 학살은 러시아 스몰렌스크 근교를 비롯한 소련 서부 지역에서 일어났고 이 학살은 벨라루스 민스크 근교 마을에서 일어난 학살극이다.[6] 전후 소련은 하틴 학살을 특별히 벨라루스에서 벌어진 대학살의 상징으로 삼았다. 영국의 폴란드 사학자 노먼 데이비스에 따르면 소련 당국이 특히 하틴 학살을 강조한 이유는 외국인으로 하여금 영어 표기가 비슷한 카틴 학살과 혼동하게 하고 카틴 학살이 국제적으로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고 한다.[7] 생존자는 어린아이 5명을 포함한 6명에 불과했으며(Anton Iosifovich Baranovsky, Yuzif Kaminsky, Alexander Petrovich Zhelobkovich, Vladimir Antonovich Yaskevich, Antonovna Yaskevich, Viktor Andreevich Zhelobkovich) 이들은 학살 전 마을을 떠나거나 부모의 시신, 혹은 감자구덩이에 숨어서 목숨을 기적적으로 건졌다.[8] 다만 사망자 숫자에 대한 이견도 있긴 하다.[9] 유대인 학살은 슬라브인 노예화 작업과 궤를 같이 한다. 왜냐하면 현지 엘리트의 상당수가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10] 약칭 오르포(Orpo).[11] Sicherheitsdienst des Reichsführers-SS. 약칭 에스데(SD).[12] 백루테니아인 보조경찰(Weißruthenische Hilfspolizei)[13] 단 백러시아인 보조경찰 중 벨라루스인은 상대적으로 소수였다. 그들 대부분은 인근의 리투아니아인, 우크라이나인, 라트비아인 부역자로 구성되었다.[14] 명칭은 무슨 특수부대 같지만 실상은 홀로코스트를 포함해 동유럽 점령지에서 자행한 모든 대랑학살의 증거를 제거하는 작전인 1005호 특수행동(Sonderaktion 1005)에 투입된 모든 부대에 일괄 부여된 부대명이다.[15] Generalbezirk Weißruthenien. 오스트란트 국가판무관부를 구성한 4개 총괄관구 중 하나.[16] 마샤 브루스키나로도 알려져 있음.[17] 원래는 대개 독일에 협력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독일의 전황이 악화되고 탄압이 격화되면서 독일 당국과 반목하게 되었다.[18] 1939년 이전 벨라루스 SSR 서부는 폴란드 제2공화국령이었고 폴란드인과 폴란드에 동조적인 벨라루스인들이 많았다. 가장 대표적인 폴란드계 무장조직은 폴란드 국내군, 민족연맹(Konfederacja Narodu)이 있다.[19] 1939년 소련 인구조사에 따르면 벨라루스 SSR 주민은 총 556만 8,994명이었다. 폴란드 침공 후 폴란드 북동부가 벨라루스 SSR에 병합되어 인구가 대폭 늘었다.[20] Gerlach, Christian (1999). Kalkulierte Morde. Die deutsche Wirtschafts- und Vernichtungspolitik in Weißrußland 1941 bis 1944. Hamburg: Hamburger Edition. p. 1158.[21] 단 이것은 스스로 유대인으로 정의한 사람의 숫자로, 유대인 혈통을 가진 사람의 수는 그 몇 배는 될 것이다.[22] 예를 들어 라트비아는 소련 존속기 내내(즉 라트비아 SSR 시절) 홀로코스트에 대한 어떤 연구도 이루어질 수 없었다.[23] 이와 비슷하게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도 아파르트헤이트 시기 경찰, 군인 등의 흑인 부역자들에 대한 언급은 터부시되고 있다. 오히려 한국에서 민족주의 사관 때문에 일본 식민지 시절 부역자 연구가 활발한 것이 매우 특이한 사례라고 할 수 있을 정도.[24] 예를 들어 폴란드는 폴란드인이 홀로코스트에 가담한 사실을 주장할 시 처벌하는 법(이른바 홀로코스트법)을 제정했고, 아우슈비츠에 폴란드인 희생자를 기리는 십자가를 세웠다.(아우슈비츠 절멸수용소 사망자의 90%가 유대인이니 유대인 피해자들을 우롱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우크라이나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OUN, UPA 등)를 모욕할 경우 처벌하는 법(이른바 탈공산화법)을 제정하여 홀로코스트에 가담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을 비판할 길을 막아버렸다. 이들 중 대놓고 독재국가인 유일한 국가 벨라루스는 오늘날까지도 나치 독일에 부역한 벨라루스인의 정보에 대한 접근을 차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