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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고[1] | 깃발 | ||
|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 | |||
| Організація українських націоналістів | |||
| 약칭 | ОУН OUN | ||
| 표어 | "무엇보다 우크라이나!" (Україна понад усе!) | ||
| 이념 | 과거 우크라이나 국수주의 에스닉 내셔널리즘 파시즘 반공주의 반러 반유대주의 반폴란드 현재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반러 반공주의 | ||
| 스펙트럼 | 극우 | ||
| 창립일 | 1929년 2월 3일 | ||
| 창립자 | 예우헨 코노발레츠 안드리 멜니크 | ||
| 단가 |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의 행진 | ||
| 군사조직 | 우크라이나 반란군 | ||
| 조직원 수 | 20,000명(1939) 300,000명(1944) 10,000명(현재) | ||
| 홈페이지 | |||
1. 개요
우크라이나어: Організація Украінських Націоналістів (ОУН)영어: Organization of Ukrainian Nationalists (OUN)
1920년대에서 1940년대까지 활발하게 활동한 우크라이나의 할리치나 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한 독립운동 겸 자생적 파시즘 운동 조직. 현재는 시민단체로 활동하고 있다.
2. 당가
3. 상세
(출처)구자정, 우크라이나 극우파의 역사적 기원(출처)김용덕, 폴란드-우크라이나의 과거사 문제 연구:보위인 학살 사건을 중심으로
1921년 소비에트-폴란드 전쟁과 리가 조약의 결과로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이 멸망하고 우크라이나는 폴란드 제2공화국과 소련에 의해 분할되며 우크라이나의 독립이 좌절되었다. 폴란드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를 탄압하며 폴란드로 동화하려 하였으며, 소련 역시 민족주의를 부정하는 공산주의 원칙 및 본래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의 일개 지방인 소러시아(Малая Русь)로 인식하였기에 마찬가지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를 탄압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1920년 갈리치아 지방에서 전직 우크라이나 인민군 군인들의 주도로 우크라이나 독립운동 조직 '우크라이나 군사조직(UVO)'이 결성되었다. 이 조직은 예우헨 코노발레츠, 드미트로 돈초우, 미콜라 스치보르스키 등 여러 민족주의자 조직들의 연합체였으며, OUN의 기원이 되는 조직이었다. 1938년 UVO의 창시자였던 예우헨 코노발레츠가 NKVD에 암살당하자 동지였던 안드리 멜니크가 그 뜻을 이어받아 계속 활동하였다.
독립투쟁을 위한 무장조직으로 출발한 UVO가 본격적으로 파시즘 운동 조직체인 OUN으로 전환된 것은 1920년대 할리치나 지역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운동의 급격한 우향우가 만들어 낸 결과였는데 이 과정에는 "우크라이나 파시즘의 아버지" 드미트로 돈초우의 결정적인 기여가 있었다. OUN은 스스로를 파시즘 세계혁명의 일원이자 우크라이나 민족혁명의 주역으로 자임하였다.[출처] 1929년 2월 3일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UVO 회원들과 급진주의자 학생들이 만나 연합하여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이 공식 창설되었다.
이 조직은 이탈리아의 국가 파시스트당과 독일의 나치당을 모델로 결성되어 할리치나 지방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OUN의 창시자인 안드리 멜니크는 상대적으로 온건파였는데 그의 성을 따서 OUN-M이라고 불렸다. 1929년 가입한 스테판 반데라나 미콜라 레베드 같은 급진주의자들은 OUN의 무장투쟁과 파시즘화에 동조했으며 반데라주의자라고 불렸는데 OUN-B라는 분파를 결성했다.
이들의 파시즘 이데올로기는 우크라이나 민족운동에 대한 나치 독일의 후견과 지원이 만든 결과물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전까지 폴란드 제2공화국의 영역이었던 갈리치아 지역에서 OUN이 주도한 반폴란드 무장 독립운동은 폴란드를 약화시키려던 독일 측의 지속적인 재정 지원과 공작 속에서 전개됐으며 나치 독일과의 협력은 2차대전 후 밀월관계의 정점에 도달했다.
OUN은 설립 이후부터 할리치나 내에서 사보타주 및 암살 작전을 전개하였다.[3] OUN 활동을 단속하기 위해 폴란드는 베레자-카르투즈카 강제수용소와 동부 갈리치아의 우크라이나 평정 등 더욱 가혹한 탄압을 펼치게 되었고, 이로 인해 OUN은 점점 더 급진화되었다.
1939년 9월 1일의 제2차 세계 대전 발발과 함께 폴란드는 독일, 소련 양쪽으로부터 침공을 당했다. 그러자 마침내 때가 왔다고 판단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이 동남부 국경 지대에서 후퇴하는 폴란드 군인, 경찰, 공무원 그리고 피난민들을 공격하면서 약탈과 학살을 일삼았다. 이 첫 번째 학살 물결은 소련이 진주하고 행정을 장악하면서 멈추었다.
1941년 6월 독소전쟁이 일어나고 독일군이 우크라이나에 진주하자 OUN은 우크라이나 서부를 중심으로 일제히 봉기하여 여러 민족주의자 단체와 함께 우크라이나 국가정부를 선포했다.[4] 나치 독일의 점령하에 있던 우크라이나에서 OUN의 주도하에 조직된 우크라이나 인민 민병대(Українська Народна Міліція)는 나치가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자행한 홀로코스트의 또 다른 주역이었는데 우크라이나 서부 지역의 볼히니야에서 무려 전체 유대인 중 98%가 몰살당한 비극은 나치 점령군과 토착 파시즘 세력 간에 수행된 협력의 결과였다. 홀로코스트에 참여한 우크라이나 보조경찰 부대(Ukrainische Hilfspolizei, Ukrainian Auxiliary Police)는 1942년 OUN-B 분파의 주도하에 결성된 무장조직 “우크라이나 반란군(UPA, УПА, Українська повстанська армія)”으로 재편성된 후 서부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폴란드인을 대상으로 한 대대적인 인종 청소 작전을 시행했다.[5]
1939-1946년 사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단체인 OUN과 UPA, 그리고 이들과 공조하던 우크라이나 농민 부대가 보위인과 소폴란드 지역에서 최소 2-3만 명의 폴란드인을 살해했다.[6] 희생자 중에는 갓난아이부터 노인까지 모든 연령대가 포함됐으며 수천 개에 달하는 폴란드 농촌과 수십만에 이르는 가정도 함께 파괴됐다. 보위인과 소폴란드 지역에서 OUN-UPA가 자행한 학살은 그 잔인함과 규모로 인해 폴란드에서 인종 학살로 규정되고 있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이 내세운 이데올로기, 진행 과정, 범위와 규모 등은 모두 보위인 학살이 폴란드 민족을 말살시킨다는 목적 하에 사전에 조직된 것임을 증명하고 있다.[7]
OUN의 주임무는 무엇보다 우크라이나 독립을 위한 투쟁에 있었지만 이런 우크라이나는 민족적으로 단일민족국가여야만 했다. 때문에 장차 우크라이나 국토가 되는 지역으로부터 비-우크라이나인들, 특히 폴란드인들을 제거하는 과정을 통해 건국이 진행될 것으로 예정됐으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진행될 과정 중에는 대량학살도 포함돼 있었다. 1939년 8월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제2차 총회에서 발표된 결의문 속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포함돼 있었다. "우크라이나인들만을 위한 우크라이나! 단 한줌의 땅일지라도 적이나 외부인의 수중에 우리의 영토를 넘길 수 없다!"
폴란드인뿐만 아니라 유대인들도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의 학살 대상이 됐다.출처 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을 때 우크라이나의 동조자들과 함께 리비피시와 교외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을 모두 학살했으며 이들을 게토로 몰아넣고 베우제츠 절멸수용소와 야노프스카 강제수용소에서 인종 청소를 단행해 1943년에는 모든 유대인의 학살을 완료했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유대인 인구 15만명 가운데 1%만 생존했다.(출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의 러시아인에 대한 태도는 복잡했는데, 러시아인들을 주요 적대자로 인식하는 것부터, 러시아인들을 소련 체제하에 "노예화된 민족"으로 보아 반소련 투쟁에 참여시키려고 하는 열망 등 다양한 양상을 보였다. 그래서인지 러시아인이라는 인종을 이유로 학살하는 사례는 없었다. OUN-B는 제3차 대회 이전에는 러시아인들을 우크라이나의 직접적인 노예화자로 선포했으나, 그 이후 주요적은 러시아인이 아닌 이오시프 스탈린이라고 선포하였다. 이런 행동은 본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은 서부인 갈리치아에서 주로 활동하는 조직이었으나 동부와 남부까지 활동 변경을 넓히면서 반러 감정이 상대적으로 적은 지역 주민들을 회유하기 위한 취지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종결 이후 OUN, UPA가 소련에 대항한 외로운 무장투쟁을 계속해나가자 이러한 시각은 사라졌고 러시아 제국주의와 러시아인을 동일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OUN의 짝사랑에도 불구하고, 나치 독일에게 이들은 적당히 쓰고 버릴 카드에 불과했다. 레벤스라움 강역에 독립 우크라이나 국가는 그저 걸림돌에 불과했으며, 우크라이나는 이탈리아, 헝가리, 루마니아, 스페인, 그리고 일본처럼 원래부터 동맹을 맺고 있던 대등한 국가도 아니었고, 나치 밑에서 대들지 않고 적당히 알아서 행동하던 크비슬링 정권이나 크로아티아 독립국, 네덜란드 국가사회주의 운동, 렉스당, 그리스국 등과 달리 독립 국가 우크라이나 국가정부를 상의도 없이 마음대로 선포하고 계속해서 자신들만의 목소리를 내니 나치는 이를 굉장히 거슬려했다. 독일의 동맹인 루마니아 왕국의 이온 안토네스쿠도 베사라비아, 부코비나에서 소요 사태를 일으키는 이들을 거슬려했고, 활동을 금지시켰다.[8] 나치 독일은 OUN-B의 간부들을 전부 부헨발트 강제수용소에 투옥시켜 버리고 국가정부는 강제 해체해 버렸다. 우크라이나의 관할권은 우크라이나 국가판무관부만이 독립적으로 행사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나치 독일이 스테판 반데라를 비롯한 OUN의 간부들을 투옥시키자 OUN 주도하에 설립된 군사 조직 우크라이나 반란군(UPA)은 1943년부터 독일군과 소련군 모두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루마니아도 적으로 돌렸다.[9] 소련이 우크라이나로 돌아오는 1944년부터는 관계가 개선되어 노획 무기를 제공받는 등 대소련 투쟁에 도움을 받았다. 우크라이나 봉기군은 대대급 작전과 일부 지역에서는 여단급 작전도 소화할 능력이 있었다.
결국, 전후 이들의 행보는 대가를 받았는데, 쿠르스크 전투 이후 소련군과 폴란드 인민군이 다시 우크라이나를 해방해 이들 상당수를 체포하기 시작했으며, 이들을 포함한 우크라이나 서부 지역 3만명의 사람들도 학살당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주변국에 할양된 지역에서는 우크라이나인 강제 이주 역시 이뤄졌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집단농장 제도를 소련이 서부 우크라이나에 도입하면서 소련에 감정이 험악한 우크라이나인들이 많았던지라 최소한 1954년까지는 우크라이나 반란군의 활동이 이어졌다. 이들은 서구 국가들의 지원을 받았으며 소련에게 할양된 갈리치아 등 우크라이나 전역과 서독을 포함한 서유럽에서 활동했다.[10] 1950년대까지 소련 장성 니콜라이 바투틴과 소련군 출신 위성국 폴란드 인민공화국 국방차관 카롤 시비에르체프스키를 전사시키는 등 OUN과 UPA는 소련과 폴란드에 대항하여 강성한 무장투쟁을 전개했다.[11][12] 이들은 소련에서 끝까지 대항하다가 결국 소련군한테 모두 붙잡히거나 즉각 사살당하는 등 대부분 비참한 말로를 겪었으며 폴란드에서의 운명도 비슷했다. 스테판 반데라 역시 서독에 계속 거주하다가 1955년 뮌헨에서 소련이 보낸 KGB 요원 보그단 니콜라예비치 스타신스키(Богдáн Николáевич Сташи́нский)[13]에게 살해당했다.
무장투쟁이 실패한 이후에는 서구 정보 기관과 협력해 소련 내 정보 수집에 참여하고, 해외의 우크라이나인 디아스포라의 지지를 받으며 명맥을 이어나갔다. 우크라이나가 독립하자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은 우크라이나로 복귀했다. OUN-M 분파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유지했고, OUN-B 분파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회의로 개편되었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은 정기적으로 자체적인 신문인 "Українське Слово"을 발행하거나 학술 대회, 경연 대회를 개최하고 우크라이나어 사용 운동을 펼치는 등 일종의 시민단체로서 활동하고 있다. 돈바스 전쟁 당시에는 자체적으로 의용대대를 모집하였고, 이들은 우크라이나군에 편입되었다.
유로마이단 이후 우크라이나에서는 우크라이나 반란군 생존자들도 우크라이나에서 정식 참전군인 예우와 대우를 받고 있다.#
4. 기타
- 스테판 반데라: 1929년에 가입하였다. 상대적으로 온건파였던 안드리 멜니크의 OUN-M에 반발해 급진 무장운동인 OUN-B를 이끌었다.
- 증오(2016):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이 저지른 폴란드인 대량 학살에 대해 다룬 폴란드 영화.
- 안드리 멜니크: 독일 주재 우크라이나 대사,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 지도자로 활동한 반데라가 나치와 함께 반공주의 운동을 펼치면서 다른 민족 사람들을 무참히 살해했던 사실을 부정하며 옹호했다.# 폴란드와 이스라엘 정부는 그의 이런 발언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홀로코스트(나치 독일의 유대인 대학살)를 하찮게 여기는 것이자 반데라에게 학살당한 사람들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강도 높게 비난했다. 우크라이나는 멜니크를 수도로 불러들이고 독일 베를린에 머무는 대사직을 당분간 비워두기로 했다.
-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은 1943년 볼히니아에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에 의한 폴란드인 학살이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고 있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은 해당 사건에 대해 이러한 입장을 밝혔다.
1. Бойові дії української сторони, зокрема ОУН і УПА мали тільки одну мету – звільнити територію Волині від окупаційних сил, серед яких поляки, зокрема Армія Крайова, вважали Волинь частиною Польщі.
2. Слід згадати, що, поляки тісно співпрацювали з комуністами і червоними партизанами, які вважалися для ОУН і УПА найголовнішим ворогом, і це тільки посилювало українсько-польське збройне протистояння.
3. Відплатні акції ОУН і УПА не поширювалися на традиційні польські території.
1. 우크라이나 측, 특히 OUN과 UPA는 볼히니아 지역을 점령군으로부터 해방한다는 단 하나의 목표를 위해 싸웠다. 폴란드, 특히 폴란드 국내군은 볼히니아를 폴란드 영토로 간주했다.
2. 폴란드가 OUN과 UPA의 주요 적대 세력으로 여겨졌던 공산주의자들과 공산주의 파르티잔과 긴밀히 협력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하며, 이는 우크라이나-폴란드의 무력 충돌을 더욱 심화시킬 뿐이었다.
3. OUN과 UPA의 보복 조치는 전통적인 폴란드 영토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볼린의 비극: 화해인가 대결인가?
2. Слід згадати, що, поляки тісно співпрацювали з комуністами і червоними партизанами, які вважалися для ОУН і УПА найголовнішим ворогом, і це тільки посилювало українсько-польське збройне протистояння.
3. Відплатні акції ОУН і УПА не поширювалися на традиційні польські території.
1. 우크라이나 측, 특히 OUN과 UPA는 볼히니아 지역을 점령군으로부터 해방한다는 단 하나의 목표를 위해 싸웠다. 폴란드, 특히 폴란드 국내군은 볼히니아를 폴란드 영토로 간주했다.
2. 폴란드가 OUN과 UPA의 주요 적대 세력으로 여겨졌던 공산주의자들과 공산주의 파르티잔과 긴밀히 협력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하며, 이는 우크라이나-폴란드의 무력 충돌을 더욱 심화시킬 뿐이었다.
3. OUN과 UPA의 보복 조치는 전통적인 폴란드 영토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볼린의 비극: 화해인가 대결인가?
- OUN-B 분파와 우크라이나 반란군의 깃발인 적흑기는 자포로지예 코자크의 적흑색 상징에서 유래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소속 우크라이나 시치 소총병들이 적흑색을 상징으로 사용한 바가 있고, 1940년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의 분열로 인해 OUN-M 분파와의 구별을 위해 OUN-B 분파가 적흑기를 상징으로 채택한 이후로 본격적으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적흑기의 흑색은 조국을, 붉은 색은 조국의 자유를 위해 흘린 피를 상징한다. 적흑기는 현재도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의 상징으로 사용되곤 하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우크라이나군 내에서 일부 군인들이 사용하고 있다. 당연하지만 러시아와 폴란드에서는 이 깃발을 극도로 부정적으로 인식한다. 러시아에서는 하켄크로이츠와 같이 아예 이 깃발의 사용을 법적으로 막아놨다.
[1] 위쪽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M 분파의 로고이고 아래쪽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B 분파의 로고이다. 깃발도 마찬가지다.[출처] 구자정, "악마와의 계약? 우크라이나의 파시즘 운동, 1929~1945" 발행기관 : 한국외국어대학교(글로벌캠퍼스) 러시아연구소 #[3] 대표적으로 브로니스와프 피에라츠키 폴란드 내무장관 암살(1934)이 있다.[4] 후술하겠지만 나치 독일에 의해 강제해산당한다.[5] 많은 서부 우크라이나 거주 폴란드인이 학살당했는데 피해자의 다수는 노약자와 부녀자로 구성된 민간인들이었다. 나치에 대한 일부 우크라이나인들의 짝사랑은 나치의 패배가 확실시되던 전쟁 후반부에도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OUN과 현지 우니아트 교회의 후원 하에 출범한 제14무장척탄병사단 “갈리치아”는 전원이 우크라이나인 자원병으로 구성되어 전쟁 최후반까지 열정적으로 싸웠다.[6] 심지어 이 수치도 보수적으로 잡은 편인데 볼히니아와 동부 갈리시아에서 폴란드인 학살에서 1943년~ 1945년동안 최대 10만명의 폴란드인들이 극우 민족주의 성향의 우크라이나인들에게 살해당했다고 보기도 한다.[7] 출처: 김용덕, 폴란드-우크라이나의 과거사 문제 연구:보위인 학살 사건을 중심으로 - 아태연구 제17권 제1호 2010년 4월 30일 pp.19~37[8] 베사라비아와 부코비나는 원래 루마니아의 영토였다가 1940년 소련이 강탈하여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할양되었다. 1941년 뮌헨 작전 이후 루마니아 왕국에 다시 합병될 예정이었는데, 부코비나와 베사라비아를 우크라이나의 일부로 간주하던 OUN-B는 이에 반발하여 루마니아에서도 무장활동을 준비하며 민병대를 조직했다. 이온 안토네스쿠는 처음에는 이들을 루마니아 헌병대(Jandarmeria Română) 휘하로 두는 것을 허용했지만 이들이 지하 활동에 들어가자 OUN-B의 활동을 전면금지했다.[9] 스테판 반데라가 개입한 것은 아니다. 반데라는 이미 나치에 체포된 상태였기 때문에 관여할수 없었고 덕분에 소련군이 밀려오자 손이 급한 독일군에 의해 일단 독일을 적대시 한건 아니므로 석방되었다. 반란군은 반데라가 부재중일 당시 지도자를 맡고 있던 미콜라 레베드가 이끌었다.[10] 물론 서구 국가들은 어디까지나 반공주의에 따른 견제 차원에서 이들을 지원한 것이지 이들의 극우적인 성향을 포용한 것은 아니었다. 미콜라 레베드도 어디까지나 강성 반공, 반소련 인사로써 스스로를 포장하여 미국에게 스카웃될 수 있었다.[11]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 학자들이 비견하는 냉전 전체로 봐도 거대하고 처절한 투쟁이었던 것이, 최소 2만명에서 최대 20만명의 우크라이나 봉기군이 참전했으며 대게릴라전의 사상자는 상호 수만명 이상을 돌파할 정도로 격렬했다.[12] 출처 논문: John Armstrong, Ukrainian Nationalism, 3rd edition. Englewood, Colorado: Ukrainian Academic Press, 1990. ISBN 0-87287-755-8 (2nd ed.: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63) pp. 223–224[13] 우크라이나어 이름은 보흐단 미콜라요비치 스타신스키(Богда́н Микола́йович Сташи́нський)로 리비우 출신 우크라이나인이었다. 부모가 반데라주의자였으나 정보원이 되는 것을 조건으로 둘 다 사면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