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인민군 Армія Української Народної Республіки Ukrainian People's Army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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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속 기간 | 1917년 ~ 1921년 | |||||
사령관 | 시몬 페틀류라 올렉산드르 오세츠키 | |||||
병력 | 약 100,000명 | |||||
참전 | 우크라이나 독립전쟁 러시아 내전 소비에트-우크라이나 전쟁 폴란드-우크라이나 전쟁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
1. 개요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의 군대이다.2. 역사
1917년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이 건국되는 동시에 창설되었다. 11월 혁명 직후 고토 수복을 목표로 침공해온 붉은 군대를 브레스트 리토프스크 조약으로 끌어들인 동맹국의 군사력으로 격퇴하는데 성공했으나 과정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 1918년 1차 세계대전의 종전 이후에는 안톤 데니킨의 백군이 키예프를 함락시키는 등 심각한 부침이 있었고 서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은 폴란드 제2공화국과의 분쟁으로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과의 통일 직후 서부 영토 다수를 상실한다. 동부에서 볼셰비키와의 전쟁이 격화되면서 폴란드 제2공화국에게 서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령 다수를 양도하는 조건으로 동맹이 성사되어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말기까지 유지됐다.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이 리가 조약으로 마무리되면서 조약에 따라 폴란드 측 우크라이나,벨라루스 국가의 존속이 불허되면서 우크라이나 인민군은 공식적으로 해산되고 잔당들은 20년대 중반까지 게릴라 침투 등의 활동으로 저항을 이어나갔다.볼셰비키와의 1919년부터 본격화된 전쟁에서 10만명의 군대가 불과 1년만에 1만 5천명 선으로 급감하는 등 낮은 사기와 조직력,구심점 때문에 늘 문제가 많았다. 시몬 페틀류라를 제외하면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의 각료들은 군대의 필요성 자체도 못 느끼다가 파울로 스코로파즈키의 쿠데타에 권력을 찬탈당하는 등 국방에서는 무능에 가까웠다. 시몬 페틀류라가 권력을 회복하면서 군의 사기와 조직력을 개선하고 정치장교와 유사한 특별 감찰관이 도입되나 우크라이나 인민군은 여전히 무질서한 의용군들의 집합에 가까운 조직이었다. 서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예하 서우크라이나 인민군은 그래도 조직력과 전투력을 신뢰할 수 있었고 우크라이나 통일로 이들이 합류하면서 우크라이나 독립전쟁을 이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