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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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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30a17><colcolor=#ffffff>
튀르키예 공화국 초대 대통령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غازی مصطفى كمال[1] | Mustafa Kemal Atatürk
파일:무스타파 케말.jpg
출생 1881년[논란]
오스만 제국 셀라니크 빌라예트[3] 셀랴니크 산자크[4] 셀라니크
(現 그리스 중마케도니아주 테살로니키)
사망 1938년 11월 10일 (향년 57세)
튀르키예 이스탄불 광역시 베식타시구 돌마바흐체 궁전
묘소 튀르키예 앙카라도 앙카라 아느트카비르
재임기간 초대 대통령
1923년 10월 29일 ~ 1938년 11월 10일
서명 파일: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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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30a17><colcolor=#fff> 부모 <colcolor=#373a3c,#ddd>아버지 알리 르자 에펜디
어머니 쥐베이데 하늠
형제자매[5] 누나 파트마
형 외메르, 아흐메트
여동생 마크불레 아타단, 나지예
친척 3명
배우자 라티페 우샤키 (1923년 결혼, 1925년 이혼)
자녀 친자녀 없음, 양녀 7명, 양자 1명
학력 마나스트르 군사 고등학교 (졸업)
오스만 제국 육군사관학교 (학사)
오스만 제국 군사참모대학 (석사)[6]
종교 이슬람교 (수니파, 세속주의)[7]
신체 174cm, 74~76kg
최종 당적
[[공화인민당|]]
군사 경력
임관 오스만 제국 육군사관학교
복무 오스만 제국 육군
1902년 ~ 1922년
튀르키예 육군
1922년 ~ 1927년
최종 계급 소장 (오스만 제국 육군)
원수[8] (튀르키예 육군)
병과 보병
참전 3월 31일 사건
이탈리아-튀르크 전쟁
갈리폴리 전투
캅카스 전역
시나이-팔레스타인 전역
튀르키예 독립 전쟁
}}}}}}}}}
파일:Mustafa_Kemal_Atatürk.jpg
공식 초상화

1. 개요2. 약력3. 생애4. 튀르키예의 존경
4.1. 아타튀르크 모독죄
5. 비판
5.1. 소수민족 탄압, 반대파 숙청5.2. 탈아입구적 사상5.3. 급진적인 근대 민족국가 추진의 후유증5.4. 각 집단의 아타튀르크에 대한 평가
6. 이름에 관한 정보7. 서명8. 무덤9. 여담10. 매체에서11. 어록
11.1. 연설영상
12.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حاكميت بلا قيد أو شرط ميللتيندير
Hâkimiyet, bilâ kayd-ü şart Milletindir.
주권은 제한 없이 조건 없이 국민의 것이다.
[9]
튀르키예군인 출신 정치인이자 현재 튀르키예 공화국의 건국자 겸 초대 대통령.

갈리폴리 전투튀르키예 독립 전쟁전쟁 영웅으로 그의 성씨인 아타튀르크는 튀르크인의 아버지라는 의미를 가지는 이름으로, 그 이름에 걸맞게 현대 튀르키예의 국부로 칭송되고 있다.

특히 이슬람 문화의 영향을 짙게 받은 오스만 제국 출신임에도 정교분리, 세속주의를 추구했으며, 유럽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서구화를 단행하였다. 그 덕분에 오늘날의 튀르키예는 국민 대다수가 무슬림임에도 불구하고 세속주의 국가를 유지하고 있다. 법체계 면에서도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가 아닌 대륙법을 따르는 공화제를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과 이슬람 학자들이 철천지 원수로 인식하는 대상 중 하나이기도 하다.[10] 외교에 있어서도 국제정세를 잘 이해하고 잘 행동한 유능한 지도자였다.

그러나 독재자였다는 점과 아래 비판 문단의 내용처럼 부정적 평가도 있다. 튀르키예 현지에서는 그에 대한 비판이 금기시되고 있어서 드러내놓고 비판적 평가를 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2. 약력

3.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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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튀르키예의 존경

튀르키예에서 아타튀르크에 대한 국민들의 사랑은 그야말로 '종교'에 가까울만큼 열성적인데, 한국에 비유하자면 한국인이 최고로 존경하는 위인들인 세종대왕이순신을 합친 무언가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이다.[11] 길거리 노점부터 대부분의 튀르키예 회사들까지 아타튀르크 사진이나 어록을 벽에 걸어두고 있다.[12] 튀르키예의 모든 관공서 건물과 인터넷 홈페이지에서도 아타튀르크를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아타튀르크의 어록 중 하나인 "Hâkimiyet kayıtsız şartsız milletindir."('주권은 제한 없이 조건 없이 국민의 것이다.')라는 어록은 아타튀르크의 무덤에서부터 시작해 튀르키예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도시에서 가장 큰 대로에는 아타튀르크 대로(Atatürk Caddesi)라는 이름이 붙고[13], 도시의 중심가에는 아타튀르크의 동상이 서 있다. 심지어 동상을 뜻하는 튀르키예어인 헤이켈(heykel)은 몇몇 도시에서는 '시내 중심가'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또한 현재는 화물 취급만 하는 공항이지만 튀르키예에서는 튀르키예의 관문이었고, 이스탄불 제1공항이었던 공항의 이름을 아타튀르크의 이름을 따서 '이스탄불 아타튀르크 국제공항(Istanbul Atatürk International Airport)'으로 명명했다. 이곳은 한국으로 치면 인천국제공항과 같은 곳이었다. 이런 아타튀르크 사랑은 해외에도 유별나서 튀르키예인이 운영하는 케밥 식당에서 대부분 아타튀르크 사진이나 튀르키예 국기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진도 단순히 그냥 찍은 사진이나 초상화가 아닌 장소에 따라 다양한 사진들이 있다. 관공서나 군부대, 경찰서를 가면 군복 입은 아타튀르크 사진, 학교에 가면 책상에 앉아있거나 강의를 하는 아타튀르크 사진, 식당에 가면 식사하는 아타튀르크 사진, 카페에 가면 커피를 마시는 아타튀르크 사진, 놀이공원에 가면 그네를 타는 아타튀르크 사진 등 그만큼 아타튀르크는 생전에 사진을 많이 남겼다.
더불어 고향인 그리스 테살로니키에 남은 아타튀르크가 태어난 집은 1933년 그리스 테살로니키시에서 튀르키예 공화국 10주년을 기념해 그 집에다 '아타튀르크 생가'라는 팻말을 세운 것을 계기로 1937년에 테살로니키시가 집을 구입해 아타튀르크에게 선물했다. 하지만 아타튀르크는 일이 바빠서 살아 생전에 이 집을 찾지 못했고, 이후 튀르키예 정부가 박물관으로 만들어서 관리하고 있다. 튀르키예인들이 그리스에 오면 이곳을 반드시 들른다고 한다. 그리고 앙카라에 있는 아타튀르크 농장(Atatürk Çiftlik Ormanı)에 가면 테살로니키의 생가를 완벽하게 복제한 집이 있다. 아타튀르크가 말년에 농사를 지으면서 쉬던 곳으로 지금도 이곳에서는 경작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2014년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이 방이 1000개가 넘는 거대한 대통령 관저를 새로 지으면서 이곳 부지 일부를 침범했다.
파일:external/www.1resimler.com/yeni_Turk_Lirasi.jpg
튀르키예 국민들의 극진한 아타튀르크 사랑으로 인해 이 나라 돈은 모두 아타튀르크를 주 도안으로 삼고 있다. 1923년 튀르키예 공화국의 건국 초기부터 시작된 유구한 전통이다. 딱 1번, 2년 동안 '화폐의 도안은 그 당시 대통령으로 한다'는 법안에 따라 이스메트 이뇌뉘의 초상이 걸리긴 했지만 당시에는 아타튀르크가 사망한지 얼마 안 되어서 그리워하는 분위기가 매우 강했는데 화폐에서 아타튀르크의 초상을 떼어버리자 고인드립으로 받아들였는지 '어딜 감히 최고존엄을 놔두고 듣보잡이 걸리냐?'라는 매우 강력한 반발로 인해 무산되고 사문법화되어버렸다. 현재도 '이 곳은 건들면 안되는 성역이며 바꾸면 욕을 씨게 얻어먹고 지지율 나락간다'[14]는 암묵의 룰이 생겨서 화폐 도안은 모두 아타튀르크이다. 위의 사진의 화폐는 0자리 6개를 잘라내는 디노미네이션을 단행한 이후 탄생한 신 튀르키예 리라(Yeni türk lirası)로 2009년 발행된 신권도 앞면은 모두 아타튀르크를 도안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신 튀르키예 리라화의 아타튀르크가 지나치게 통통하게 혹은 뚱뚱하게 묘사되었다며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그리고 돈의 크기가 클수록 점점 웃고 있다.

2009년에 새로 발행된 지폐 시리즈 중 최고액권인 200리라짜리 지폐의 모습. 이번 시리즈에는 뒷면 도안을 튀르키예의 위인들로 채택했는데, 200리라 지폐 뒷면의 인물은 13~14세기에 살았던 시인 유누스 엠레(Yunus Emre)로 그가 남긴 유명한 시구인 "사랑합시다. 사랑받읍시다.(Sevelim Sevilelim)"가 함께 인쇄되어있다.

다만 아타튀르크에 대하여 동성애자라는 소문이 오래전부터 있어왔고[15] 튀르키예에서도 2010년에 아타튀르크가 동성애자라고 주장한 사이트들을 폐쇄하면서 논란이 거세졌다. 그 사이트를 운영하는 이들은 아타튀르크를 욕한 것도 아니고 단지 성별적인 취향이라고 여기면 그만이라면서 이렇게 폐쇄하는 것은 옳지않다고 반발했다. 하지만 튀르키예에서 동성애자가 어떤 취급을 받는지 생각하면, 아타튀르크를 동성애자라고 주장하는 것은 욕 이상의 모욕으로 여겨지는 게 보통이다. 튀르키예에서 동성애자의 취급을 떠나서도 아타튀르크가 자손을 남기지 않은 것 때문에 동성애자 루머가 퍼지긴 했지만 그의 언행이나 인생으로 볼 때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게 학자들의 일치된 견해다. 아타튀르크에 대한 사랑이 지극한지라 한때 에르도안 대통령이 아타튀르크 사진을 대통령궁에서 치우자 시위가 일어났을 정도이다.

4.1. 아타튀르크 모독죄

튀르키예 형법에는 아타튀르크 모독에 대한 특별한 조항이 있다. 형법 5816조가 그것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ATATÜRK ALEYHİNE İŞLENEN SUÇLAR HAKKINDA KANUN
아타튀르크에 대해 저지른 범죄 법률에 대하여

Madde 1 – Atatürk'ün hatırasına alenen hakaret eden veya söven kimse bir yıldan üç yıla kadar hapis cezası ile cezalandırılır.
Atatürk'ü temsil eden heykel, büst ve abideleri veyahut Atatürk'ün kabrini tahrip eden, kıran, bozan veya kirleten kimseye bir yıldan beş yıla kadar ağır hapis cezası verilir.
Yukarki fıkralarda yazılı suçları işlemeye başkalarını teşvik eden kimse asıl fail gibi cezalandırılır.
제1조 – 아타튀르크의 기억을 공개적으로 모욕하거나 저주하는 자는 1년 이상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아타튀르크를 대표하는 동상, 흉상, 기념물 또는 아타튀르크의 무덤을 파괴, 훼손 또는 오염시키는 사람은 1년에서 5년까지의 중형에 처한다.
위 각 호의 범죄를 타인에게 조장한 자는 주범으로 처벌한다.

Madde 2 – Birinci maddede yazılı suçlar; iki veya daha fazla kimseler tarafından toplu olarak veya umumi veya umuma açık mahallerde yahut basın vasıtasiyle işlenirse hükmolunacak ceza yarı nispetinde artırılır.
Birinci maddenin ikinci fıkrasında yazılı suçlar zor kullanılarak işlenir veya bu suretle işlenmesine teşebbüs olunursa verilecek ceza bir misli artırılır.
제2조 – 첫 번째 조항에 명시된 범죄; 2인 이상이 공동으로, 공공장소에서, 언론을 통해 범한 경우에는 2분의 1의 형량을 가중한다.
첫 번째 조항의 두 번째 문단에 나열된 범죄가 무력을 사용하거나 시도한 경우 1배의 형량을 가중하여 부과한다.


이러한 튀르키예의 국가모독죄 조항은 초기 헌법에서부터 존재했지만, 아타튀르크 사후인 1951년 일단의 극단적 이슬람 복고주의자들이 아타튀르크 동상을 파괴하면서,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튀르키예 민주당의 주도로 튀르키예 법무부는 아타튀르크 모욕에 대한 특별법을 입건해 1951년 7월 25일에 형법 5816조라는 이름으로 승인했다. 이 법으로 아타튀르크를 게이로 묘사한 동영상이 있다는 이유로 2008년부터 2010년 사이에 튀르키예에서 유튜브를 접속하려 하면 이러한 경고문을 볼 수 있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Youtube_censored_TR2008.png
해당 사이트의 접속이 금지되었습니다.
앙카라 제5회 형집행 위원회2008년 4월 30일2008/599번 결정으로 이 사이트에 접속하는 것을 정보통신부령으로 금지합니다.

그리스의 극우파나 튀르키예 내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은 아타튀르크를 모욕하기 위해 아타튀르크의 출생신분이나 성적지향들을 왜곡해 인터넷 등에 가짜뉴스나 카더라 등의 선동 날조 영상 및 글들을 비일비재하게 올리고 있는 상황이다. 실제 학계에서 아타튀르크가 양성애자였을 것이라는 조심스러운 주장이 있지만, 일단 아타튀르크를 공격하는 극우주의자들이 이 부분을 핵심으로 모욕을 주고 있는 데다, 인터넷 검열 및 통제를 하기 위해 명분이 필요했던 에르도안의 목적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더군다나 튀르키예가 아무리 이슬람 다수인 국가들 중 가장 세속적인 국가라고 하더라도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은 유럽의 타 국가들과 비교해 밑바닥이라고 할 수 있다.

아타튀르크 모독죄에 대한 해당 조항은 다음과 같다.
(1) Atatürk'ün hatırasına alenen hakaret eden veya söven kimse bir yıldan üç yıla kadar hapis cezası ile cezalandırılır.
아타튀르크의 업적에 공공연히 모욕하는 자, 또는 저주하는 자는 누구든 1년에서 3년 사이의 징역으로 처벌한다.

Atatürk'ü temsil eden heykel, büst ve abideleri veyahut Atatürk'ün kabrini tahrip eden, kıran, bozan veya kirleten kimseye bir yıldan beş yıla kadar ağır hapis cezası verilir.
아타튀르크를 대표하는 동상, 흉상 그리고 기념물들을 혹은 아타튀르크의 무덤을 파괴하는 자, 부수는 자, 훼손하는 자, 또는 더럽히는 자는 누구든 징역 1년에서 5년 사이의 중형으로 처벌한다.

Yukarıdaki fıkralarda yazılı suçları işlemeye başkalarını teşvik eden kimse asıl fail gibi cezalandırılır.
상기 열거된 죄목들을 이행하도록 타인을 선동하는 자는 누구든 실제 범죄한 자와 마찬가지로 처벌한다.

(2)Birinci maddede yazılı suçlar; iki veya daha fazla kimseler tarafından toplu olarak veya umumî veya umuma açık mahallerde yahut basın vasıtasiyle işlenirse hükmolunulacak ceza yarı nispetinde artırılır.
1조에 기술된 죄들에 대해 2인 이상의 다수에 의한 집단으로써 혹은 공공으로써 혹은 모두에게 열려있는 공공장소에서 인쇄전단 등을 들고 선동할 경우, 판결될 형량에 절반을 추가해 적용된다.

Birinci maddenin ikinci fikrasında yazılı suçlar zor kullanılarak işlenir veya bu suretle işlenmesine teşebbüs olunursa verilecek ceza bir misli artırılır
1조 제2항에 기술된 죄목을 적용하기 어려운 사건, 혹은 이러한 형태의 일을 계획한 자의 경우, 판결될 형량에 다소 추가해 적용된다.

(3)Bu Kanunda yazılı suçlardan dolayı Cumhuriyet savcılıklarınca re'sen takibat yapılır.
이 법에서 글로 인한 혐의로 인한 공화국 검사에 의한 공무원 규정이행의무위반혐의에 따른 기소가 가능하다.

(4)Bu Kanun yayımı tarihinde yürürlüğe girer.
본 법은 제정일로부터 유효하다.

(5)Bu Kanunu Adalet Bakanı yürütür.
이 법은 법무부가 집행한다.

자세히 보면, 선동혐의가 실제 범죄보다 가중처벌되고 구두선동보다 글로써 선동하는 혐의가 더욱 더 가중처벌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당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글로써 유인물을 돌리거나 행동원을 모집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인데, 아이러니한 것은 이런 법은 공화인민당이 집권하던 시절에는 없었고, 나중에 1960년 군사쿠데타에서 이슬람주의자로 몰려서 처벌된 아드난 멘데레스가 이끄는 민주당 정부 시절에 만들어졌다. 후술할 아타튀르크의 영묘도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아타튀르크 모독죄에 대한 특이할 사항이 하나 더 있다. 1955년, 키프로스에서 그리스계와 튀르키예계가 충돌하던 가운데 튀르키예에서도 키프로스의 그리스계도 결국은 키프로스랑 그리스를 합병하자고 주장하니 똑같은 그리스놈이라고 생각해 반 그리스 여론이 일고 있었고 이 와중에 테살로니키에 위치한 튀르키예 영사관 근처에서 시한폭탄이 터졌다. 위력은 그리 대단치 않아서 창문 몇 개 깬 걸로 끝났지만 영사관과 같은 곳에 위치한 아타튀르크의 생가에도 피해가 갔고, 당시 튀르키예언론 및 심지어 일부 그리스 언론에서도 이 사건을 그리스의 극우민족주의자의 테러로 보도하는 바람에 이스탄불에서 현지 그리스계 소수민족들을 대상으로 한 보복폭동이 발생했다. 정작 사건의 진실은 1960년 쿠데타 이후에 밝혀지는데, 아드난 멘데레스 내각의 행적을 수사하던 도중에 이 폭탄테러가 사실 반 멘데레스 여론을 환기시키려는 당시 정부의 자작극으로 밝혀졌던 것이다. 멘데레스 본인도 이 사건이 밝혀지고나서 사죄했지만, 그가 사형선고를 받은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이 법은 아직 사문화되지 않았다. 2015년 11월 10일 아타튀르크 사망일에 한 이슬람 성향의 민영방송사가 아타튀르크에 대해 다루며 헤드라인으로 "폭정의 끝!"이라고 달았다가 검찰에게 이 법으로 고소를 당해 유죄가 확정되어 사장이 구속되었으며 방송사도 폐쇄되었다.

5. 비판

아타튀르크에 대한 비판은 튀르키예에서는 민감한 문제라, 종종 배낭여행자들이 이 항목의 비판점들을 근거로 튀르키예에서 아타튀르크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비췄다가 곤욕을 치르기도 한다니 주의하자. 당장 폭력을 당하거나 경찰이 출동해 체포해가는 것은 아니겠지만, 여러 사람에게 둘러싸여 욕을 먹거나 멱살 잡혀 쫓겨나는 봉변을 겪을 수는 있다. 재수없으면 위의 형벌 조항을 근거로 경찰서에 끌려 갈 수도 있다.

5.1. 소수민족 탄압, 반대파 숙청

튀르키예 민족이 아닌 자들은 오직 한가지 권리만을 가지고 있다. 노예로 복무할 권리이다. 적과 친구, 심지어 쿠르드족들이 살고있는 산조차 이를 알고있다.

대표적인 아타튀르크의 강경 진압으로 지목되는 사건은 1937년 데르심 반란의 수습과정이다. 데르심 반란은 크게 두 차례에 걸쳐서 이루어진 사건으로, 1차는 1937년 3월 20일부터 11월 말까지. 2차는 1938년 1월 2일부터 12월 말까지 지속되었다. 이 반란의 원인은 튀르키예 공화국의 중앙집권화에 반발한 데르심(Dersim, 현 지명은 툰젤리 Tunceli) 도의 토착 부족장들이 부족민들을 모아 저항한데에서 비롯되었다.

오스만 제국 시기까지 지방행정은 도시에는 행정관이 파견되었지만, 향촌은 대체로 현지 부족장 혹은 공동체들의 자치가 이루어졌다. 좋게 말하자면 지방자치이고 나쁘게 말하자면 정부가 지방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는 소리다. 오스만 제국이 18세기 이후 지방정권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상황도 바로 여기서 비롯되었다. 데르심 지역의 경우 알레비파 자자족과 수니파 쿠르드족, 1915년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때 생존한 아르메니아인들이 주로 거주하던 지역이었는데, 반란이 일어나자 튀르키예정부는 공개처형과 공중폭격까지 동원해가며 이를 진압했다.[16] 당시 튀르키예 공화국은 지방토착세력을 공화국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중대한 위협으로 보았고, 실제로 1925년 남동부 튀르키예에서 오스만 복고운동이 터져 곤란에 처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반발세력을 무력으로 누르려 했다. 이때 희생된 숫자는 반란군 6,000여 명을 포함해 민간인 13,806명(튀르키예국회 공식추산)에서 40,000여 명(데이비드 맥도웰 추산)에 달한다. 당시 반란을 일으킨 쿠르드 부족에 속한 민간인 11,818명은 이후 튀르키예 전국에 분산이주 조치되었고, 도 이름도 툰젤리(Tunceli)로 바꾸었다.

아르메니아에서는 근대 이후 5번째로 규모가 큰 학살인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에도 중요한 책임을 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아타튀르크는 튀르크 민족주의 운동의 지도자였으며, 이 운동은 아르메니아인 300만 중 100만 ~ 200만을 학살(아르메니아 주장)한 아르메니아 대학살의 주축이라는 내용의 주장이다.[17] 가령 1921년, 튀르키예 독립군은 마라시(Maraş)에 주둔해있던 프랑스군 5000명을 3만으로 공격한 다음 아르메니아인이 대부분이었던 마라시 시민 1만 명을 학살한다. 아르메니아인들은 돈과 프랑스에 협조한 병사 200명을 넘겨줬는데도 반란 위험이 있단 이유만으로 학살을 한 것이다. 하지만 1919년에 마라시가 프랑스군에 붙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이 무슬림 주민들을 학살했던 것도 있다.

그리고 독가스를 이용한 학살을 승인하기도 했고 장티푸스나 스페인 독감으로 죽어가는 것을 방치했다는 주장도 있다. 아타튀르크의 치세 중에 활성중지되지 않은 티푸스 백신을 아르메니아인들에게 뿌렸다고 고백한 의사도 있다. 생물학을 좀 배웠으면 알겠지만, 이건 그냥 티푸스를 뿌린 학살이다. 그 밖에도 발칸과 아나톨리아 내의 아르메니아인 및 그리스인 명사들을 암살사주한 의혹도 받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변호로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에 관한 것 중 상당수가 아르메니아 측의 일방적인 주장이라는 것과 마라시 학살 역시 그 당시로서는 불가피한 상황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아르메니아 인들은 1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과 프랑스측에 붙어 자신들의 옛날에 영토였던 역사적 영토를 되찾고 그곳의 튀르크인을 몰아내려고 했으며 아르메니아인들이 러시아에 붙을 경우 당장 국가 존재 자체가 위협이 올 수 있는 상황이었다. 당시 상황이 얼마나 시궁창이었는지는 튀르키예 독립 전쟁 문서를 볼 것. 당연히 그렇다고 해서 한 종족을 대상으로 한 제노사이드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정확히는 아르메니아인 학살 자체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아타튀르크가 그 사건에 얼마나 책임이 있느냐의 문제인데, 튀르키예 측에서 반론으로 나오는 의견에는 1910년대에 아타튀르크는 튀르크 민족주의 운동 세력에 있어서도 끗발조차도 날리지 못하는 실정이라는 점이다. 그 당시에는 청년 튀르크당과 엔베르 파샤가 집권하고 있었고, 아타튀르크가 본격적으로 민족주의 운동을 시작한 것은 1920년 4월 23일 삼순에서 캬즘 카라베키르 등을 만나고 술탄 정부에 반란을 선언한 이후의 일이다. 아타튀르크가 반란을 시작하기 전에, 오스만 제국의 감독관 자격으로 1919년 11월 9일에 카이세리를 방문하고 한 연설을 참고해보면, 당시까지만 해도 아타튀르크의 성향은 민족주의보다는 이슬람을 바탕으로 외세를 배격하려는 생각이 강하게 묻어나온다. 이러한 생각들을 완전히 부순 것은 1920년 초 이스탄불을 방문한 이후부터라는 반론도 있기에 아르메니아에서 책임을 아타튀르크에게 더 크게 강조하려고 죄다 덮어씌웠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결정적으로 아타튀르크는 아르메니아 학살 당시, 시리아-이라크에서 종군하고 있었으며 그가 아르메니아 학살에 대해 알게 된 것은 1920년 이후의 일이다.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항목에 아타튀르크의 일기를 볼 수 있는데, 당시에 아타튀르크는 '관찰자'일 뿐이었다. 즉, 아르메니아 학살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는 사항이다. 때문에 국제적으로 아타튀르크가 아르메니아 학살에 관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분석하고 있으며 튀르키예에서도 아르메니아의 왜곡으로 증거도 없이 그렇다고 비아냥거리고 있다.

하지만 아르메니아의 주장이 전적으로 비합리적인 것은 아니다. 세브르 조약에는 아르메니아 대학살의 가해자들을 전범 재판에 회부해 처벌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었지만 아타튀르크는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의 가해자들을 단 한 명도 처벌하지 않았으며 엔베르같이 해외로 망명한 극소수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학살자들을 중용했다. 즉, 총론적으로 따져보자면 아타튀르크는 아르메니아 학살 자체에 대한 본인의 개인적인 책임은 없다. 그러나 아르메니아 대학살의 가해자를 아무런 처벌이나 책임을 묻지 않고 넘어간 것뿐 아니라, 아르메니아 학살 자체를 덮으려 한 책임이 있다.

쿠르드족[18]에게는 증오를 받고 있는 게 당연하다. 쿠르드인들이 세운 아라라트 공화국을 뭉개버린 것도 아타튀르크 정권 때 벌어졌던 일이다.

데르심 학살에 대해서는 2011년 11월 23일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당시 튀르키예 총리[19]가 데르심에서 사망한 13,806명의 민간인에게 "만약 국가의 이름으로 사과를 해서 해결될 수 있는 사건이라면 나는 죄송하다고 말하고 싶다."(Eğer devlet adına özür dilenecekse, böyle bir literatür varsa ben özür dilerim, diliyorum)라고 사과를 언급한 적이 있다. 하지만 2011년 튀르키예 대법원에서는 데르심 학살을 인종을 구별하여 학살하지 않았기 때문에 강경 진압의 기소에 대한 판결은 무죄라고 판결했다. 아르메니아 대학살에 대해서는 아르메니아 측 주장이 과장된 면이 있고 튀르크인이 아닌 다른 세력이 한 것도 포함하고 있으며 또는 반대되는 사료나 아르메니아 측에서 한 학살에 대한 증거를 들며 반론하고 있다. 더 나아가 정당방어로 볼 명분마저 있으니 대격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인정할 생각이 추호도 없는 것으로 보인다.

5.2. 탈아입구적 사상

약간 애매하지만 탈아입구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정확히 말하면 서구를 굉장히 동경했다. 이는 공화국 성립전에 아타튀르크가 이야기할 때 "튀르키예인들은 항상 서쪽으로 이주해왔다.", "모든 문명국가를 친구로 여기며 독립을 부러워할 뿐"이라고 말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덧붙이자면 아타튀르크의 이러한 사상은 당대 오스만 제국 지식인층, 특히 개혁주의자와 공화주의자들의 보편적인 의견이기도 했다. 오스만 제국16세기부터 유럽 외교의 한 축을 담당하였으며, 영토의 중심부 역시 동유럽으로 치우쳐 있었다.[20] 19세기 오스만 제국이 본격적인 근대화 개혁에 착수하던 시기에는 오스만 제국 내 유럽 영토가 점차 줄어들고 있기는 했으나 1870년대까지만 해도 오스만 제국은 발칸 반도의 상당부분을 영유하고 있었고 당시에만 해도 중동권은 오스만 제국의 직간접적인 통치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의 외교, 교역상대가 유럽과 미국밖에 없었다. 그리고 서구화 자체는 튀르키예 공화국 이전에도 진행되고 있었는데 아타튀르크가 극단적인 서구화 운동과 세속화를 하지 않았더라도 튀르키예는 서구화와 전통 보존을 모두 이루면서 서서히 발전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게 비판자들의 견해이다.

5.3. 급진적인 근대 민족국가 추진의 후유증

위 이야기의 연장선상인데 케말은 튀르키예인의 통합이란 명목하에 튀르키예 내에 아르메니아인들이나 쿠르드족들 같은 소수민족들의 문화탄압 및 그들의 언어와 생활양식을 파괴시키는 데 열과 성의를 다 기울였다. 심지어 쿠르드족의 경우 아타튀르크는 쿠르드족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앞서 아타튀르크의 민족주의에 관한 시각에 대해 서술했지만, 아타튀르크가 도입한 튀르크 민족주의의 대상은 인종, 민족, 종교를 구분하지 않는다. 그냥 튀르키예 땅에 살면 튀르키예인인 것이고, 튀르키예어로 하면 튀르크(Türk)이다. 때문에 소수민족에 대한 법령을 만들자고 공화국 초대 총리 이스메트 이뇌뉘가 제안했을 때, 아타튀르크는 이를 거절하면서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튀르키예인이고 우리 민족이고 우리 국민인데 왜 민족으로 구분해서 법을 집행하느냐?"고 되물었다. 튀르키예 공화국 초대 총리이자, 훗날 아타튀르크의 뒤를 이어 2대 대통령이 되는 이뇌뉘는 쿠르드계 출신이다. 즉, 아타튀르크를 무슨 근대적 인종차별주의자로 몰아 비난하는 것은 사실 역사왜곡에 가까우며, 아타튀르크는 오히려 붕괴한 '오스만인'으로서 정체성과 여전히 형성 작업 중인 '튀르키예인' 정체성이란 아직 다가오지 않았던 미래 사이 수천년간 엄청나게 많은 문화들이 왔다간 아나톨리아 같은 환경에선 도저히 일반적으로 언어, 풍습, 공유하는 역사 등으로 규정되는 민족적 정체성을 적용할수 없다는 걸 인식했다.

따라서 오히려 저런 민족지학적(ethnographic)한 요소를 아예 배제하고 "그냥 현행 튀르키예 땅 안에 살면 무조건 튀르키예 민족임"이란 아나톨리아의 역사적 환경을 상당히 직접으로 의식한 듯한 국가주의적 민족 관념을 추구한 것이다. 이를 아타튀르크를 호의적으로 보는, 말 그대로 이런 일련의 민족의식 형성 작업의 성공적인 결과물들인 현대 튀르키예인들은 이런 저런 민족주의적 광풍에 사방으로 찢겨저 나갈 뻔한 조국을 근대적인 방법으로 묶어놓은 말 그대로 '튀르키예인의 아버지'소리 들을 법한 신의 한 수로 보며 칭송할 법 하지만, 반대로 그만큼 일방적인 국가주의적 민족 형성 과정에 분리주의 사상을 가지지 않고 자신의 민족 정체성을 가진 소수민족에게는 아예 본인들의 독자적인 민족 의식을 가질 자유마저도 박살내려고 했던 억압으로 느낄 수밖에 없다. 총론적으로 보면 이런 아타튀르크가 추구한 민족국가 형성 작업에 대한 극적으로 상반되는 평가는 아타튀르크 본인의 근대적 튀르키예 민족국가 만들기 프로젝트가 큰 부분은 성공했어도, 결국 타우루스와 캅카스 산맥이란 험준한 자연환경이 이 작업을 더디게 한 현대 쿠르드인 다수 지방에선 미완의 작업으로 남아 생기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케말은 근대 튀르크족의 국가를 세우는 과정에서 그전까지 오스만 제국의 정체성을 부정했다. 오스만어를 완전히 뜯어고치는 이른바 '언어정화 운동'을 통해 현대 튀르키예어에서 아랍어, 페르시아어, 그리스어 같은 외래 언어의 잔재를 없애버린 것도 이 시절의 일. 위에서 나온 유사역사학에 경도된 것도 '이슬람교를 믿는 튀르크를 중심으로 한 다민족 제국' 오스만 제국이 외세, 서구한테 밀렸으니 이슬람에 경도된 오스만 제국의 역사는 청산되어야 할 과거의 부정적인 요소이며 새로운 튀르키예 공화국에선 배제되어야 할 적폐로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 대신 케말이 대안으로 내세운 것이 과거 중앙아시아를 지배하던 흉노, 돌궐 같은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의 역사를 모조리 튀르키예의 것으로 치는 태양어론 같은 유사역사학이었던 것이고 아타튀르크는 튀르키예 민족주의를 과도하게 추구하여 태양어론 같은 유사역사학에 어느 정도 경도되었다.

케말 정신의 반대자라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이 괜히 '튀르키예는 오스만 제국이라는 영광된 역사를 지니고 있다!'라고 선전하고 케말이 저지른 인종청소를 사과하고 다니는 게 아니다. 케말의 후예들인 튀르키예의 군부 세력은 이런 케말의 입장을 계승하고 과거를 떠올리게 만드는 이슬람적인 것을 배격하고 세속주의를 명분으로 튀르키예에 들어선 정부가 조금이라도 이슬람적인 모습을 보일 때마다 정부를 박살내 왔고 한국의 군사독재는 저리가라 할 정도로 수많은 희생자를 냈다. 지금 에르도안의 인기는 튀르키예 경제의 회생과 더불어 이런 군부체제에 대한 튀르키예 시민들의 염증도 일정 정도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튀르키예 시민들 자체가 원체 과격한 이슬람을 배제하는 입장인데도. 2016년 튀르키예 쿠데타가 왜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이를 통해 알 수 있다. 일반 튀르키예 시민들의 아타튀르크에 대한 존경은 여전하지만, 그가 남긴 유산인 케말주의, 군부의 요소 등에 대해서는 이것이 튀르키예 현대사에 무조건 긍정적인 영향만을 미치지는 않았다고 보는 게 튀르키예 시민들의 일반적인 인식이다.

5.4. 각 집단의 아타튀르크에 대한 평가

튀르키예 내에서 이슬람주의자나 비민족주의적 좌익, 쿠르드족은 군부 일당체제를 확립한 세속주의자 아타튀르크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슬람주의자들은 세속주의에, 쿠르드족과 좌파들은 강압적 민족주의와 군부 일당제에 반감을 가지는 것.

튀르키예 민족주의자들은 같은 튀르크인(튀르키예인 및 투르크멘인)들이 분포하고 있는 북키프로스, 트라키아, 모술 및 이라크·시리아 쿠르디스탄을 탈환치 않아 포기하고 내버렸다고 비판한다. 사실 이는 튀르키예 독립 전쟁 당시 튀르키예의 국력의 한계 때문도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면이 크다.[21] 북키프로스의 튀르크인들 역시 아타튀르크를 영웅으로는 인정하지만 튀르키예 독립전쟁에서 버려졌다는 인식을 지니고 있다.

자국에서 우대받는 윈스턴 처칠이나 샤를 드골이 과거 식민지 나라들에서 저지른 짓을 보면 학살자, 억압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듯이 아르메니아인이나 튀르키예 쿠르드족은 아타튀르크를 그냥 학살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본다.

6. 이름에 관한 정보

아타튀르크는 당시 오스만 제국령이었던, 오늘날에는 그리스 영토가 된 도시 테살로니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인 알리 르자 에펜디(Ali Rıza Efendi)는 세무공무원이었고 어머니는 쥐베이데 하늠(Zübeyde Hanım)이었다.[22] 조상에 대하여 여러 말이 많은데 뉴스위크지는 아타튀르크의 아버지가 알바니아계로 추정된다고 보도한 적도 있다. 아타튀르크의 어머니는 조상이 튀르크계 출신이다. 또한 그리스 일부에서는 그리스계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별다른 근거는 없다. 어쨌든 아타튀르크의 부모 모두 튀르크어를 쓰는 튀르크계 무슬림이었다.

따라서 아타튀르크의 이름은 아랍어·오스만어식 이름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어린 시절의 이름은 아랍어 '무스타파(مصطفى / muṣṭafā)'가 어원인 무스타파(Mustafa)이다. 케말(Kemal)은 본래 별명으로 '완전무결'을 뜻하는 아랍어 '카말(كمال / kamāl)'에서 유래한다. 학생 시절 수학 선생님이 아타튀르크의 뛰어난 수학실력에 감탄하여 이런 별명을 붙여줬다는 일화가 전한다. 튀르키예 공화국 수립 후 모든 사람에게 성을 쓰게 하면서 '아타튀르크'라는 성을 쓰게 되었다. 튀르키예에서 고위 관료에게 쓰는 경칭인 파샤를 붙여서 케말 파샤(Kemal Paşa, '케말 경')라고도 부른다. 1990년대 이전의 한국 세계사 교과서나 언론 매체에서 이 이름으로 표기되곤 했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케말 파샤라는 이름으로 알고 있는 사람도 많다. 가지라는 호칭을 쓰기도 하는데, 튀르키예 독립전쟁 당시 대국민의회가 준 칭호로 이는 아랍어 '가지(غازي‎ / ḡāzī)'가 어원이며 '신앙의 수호자'를 의미한다.[23] 때문에 아타튀르크라는 성을 쓰기 전에는 '가지 무스타파 케말 파샤(Gazi Mustafa Kemal Paşa)'라고 불렀었다.

'아타튀르크(Atatürk)'는 '튀르크인의 아버지'라는 뜻으로 원래는 튀르키예 국민 의회에서 받은 성씨이지만 끝내 이 성씨를 물려받을 사람을 남기지 않고 죽었기 때문에 결국 이 사람을 뜻하는 고유어로 정착된 것.[24] 자칭이 아니다. 뒤에 투르크메니스탄 독재자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도 '튀르크멘바시(Türkmenbaşy, 투르크멘인의 지도자)'라는 명칭을 스스로 붙였는데 바로 아타튀르크와 비슷한 의미이기에 이를 두고 튀르키예에서는 엄청 비웃었다. 소문으로는 원래는 아타튀르크멘이라고 붙이려다가 튀르키예에서 협박하니까 튀르크멘바시로 붙였다는 말도 있다. 현재는 이 성씨를 쓰지 못하게 법으로 제한되어 있다고 한다. 참고.

7.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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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타튀르크 서명의 변천사. 초기에는 직함과 그의 이름인 '무스타파'의 m(밈)과 '케말'의 k(카프)를 따온 아랍문자를 서명으로 쓰다가 문자개혁 이후 변형되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최종적으로 정착한 서명은 K. Atatürk라고 쓰여있다.

아타튀르크의 모든 것이 그렇듯 그의 서명도 튀르키예인들이 매우 사랑하는데, 자동차부터 상점까지 곳곳에 그의 서명이 스티커로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공군에서조차 항공기에 즐겨 붙이는 데칼로 정착하였다.

8. 무덤

아타튀르크의 무덤은 앙카라 한복판에 세워진 거대한 영묘이다. 튀르키예어로 아느트카비르(Anıtkabir)라고 부르는데 히타이트와 고대 아나톨리아 양식을 바탕으로 건립된 건물로, 사자의 길이라고 부르는 대로를 지나면 남자 셋과 여자 셋이 있는 동상이 나오고 그곳을 지나면 무덤이 위치한 중앙의 거대한 구조물과 회랑이 있다. 회랑에는 아타튀르크가 생전에 사용하던 물건들과 업적, 독립전쟁 이후의 튀르키예 공화국 역사를 다룬 굉장히 스케일이 큰 박물관이 있으니 한 번쯤 가볼만 하다. 앙카라 지하철로는 아나돌루역(Anadolu)[25]에서 내리는 게 가장 가까운데 걸어서 5분쯤 걸리며, 길을 잘 모르거나 귀찮으면 울루스(Ulus)나 스히예(Sıhhiye)에서 바흐첼리에블레르(Bahçelievler) 방향으로 가는 돌무쉬를 타면 된다. 웬만해선 다 간다. 아니면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된다. 이 동네에서는 아느트카비르 모르면 간첩이나 마찬가지라는 취급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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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느트카비르 입구에 세워진 남자 셋, 여자 셋 석상의 모습. 남자들은 튀르키예 공화국의 기반인 교육자, 농민, 군인들이며 아나톨리아의 전통복장을 하고 풍요를 상징하는 밀이삭과 그릇을 들고 있는 여자들은 아타튀르크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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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타튀르크의 기일인 11월 10일이 되면 대통령부터 시작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아느트카비르를 찾는다. 평소엔 집안이든 식당이든 담배를 피우는 튀르키예 사람들도 이곳에서만큼은 담배를 피우는 게 금기시되어 있으며, 시끄럽게 떠들지도 않는다. 헌데 아타튀르크는 생전에 자신이 우상시되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인물이었고 자신이 죽을 때에도 무덤은 평범한 시민들처럼 공동묘지에 쓰길 바랐다고 한다. 하지만 아타튀르크의 전우이자 후임자인 이뇌뉘가 이를 무시했고 1953년에 현재의 아느트카비르로 옮겨지게 되었다고. 안에 들어가면 튀르키예 사람이 아타튀르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확실하게 느낄 수 있다.

사실 현대 국가들의 국부들은 소박한 장례를 원하는 본인 의사와는 반대로 신성시 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 않고 그냥 공동묘지 같은 데에 묻혔거나 화장 후 납골당에 들어갔더라도 후대의 누군가, 혹은 일반 시민들에 의해 신성시되거나 하다못해 명소로 올라가는 수도 있다. 후임주자가 이들을 신성화 해서 자신의 정권의 입지를 강하게 할 때 주로 쓰는 방법인데 대표적으로 베트남의 국부 호치민도 자기 생가는 그냥 대중에게 공개된 쉼터로 만들고 유해는 화장해서 강에 뿌려달라 했지만 사후 생가는 박물관이 되고 유해는 보존중이다. 북한김일성도 빨치산 활동 당시 동료들이 매장된 대성산혁명렬사릉에 함께 묻히기를 원했지만 김정일이 아버지의 유언을 무시하고 그의 집무실은 금수산기념궁전(현 금수산태양궁전)이란 이름으로 박물관화 하고 시체는 박제해서 보존중이다. 가장 기구한 사례가 블라디미르 레닌인데 자신은 어머니 묘 근처에 조촐하게 장례를 치러달라고 했으나 후임인 스탈린이 레닌 영묘를 만들어 시체를 박제하고 공산주의 성지로 만들어 버린다. 1956년 니키타 흐루쇼프가 탈스탈린 운동을 펼치면서 스탈린의 시체는 무덤으로 갔으나 레닌의 시체는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는 이유로 소련이 해체된 지 3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보존되고 있다.(좀더 정치적으로 보자면 아직까지 남아 있는 러시아 연방 공산당이 레닌을 신성시 하고 있어서 이장을 반대하는면도 크다. 현재 집권당인 통합 러시아당은 공산주의와 척을 지고 있어서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으며, 국민 여론도 이장에 찬성하는 의견이 더 많다.) 흥미롭게도 이렇게 레닌의 시신을 보존하다보니 소련-러시아의 엠버밍 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이라 위의 북한의 사례처럼 독재자들의 시신이 보존될 때 거액을 받고 완벽하게 관리해준다고 한다. 대한민국의 정치인 박주선국회부의장 시절 이곳에 헌화를 한 적이 있다.

9. 여담

의외로 소탈한 구석이 있어서, 이런저런 일화들이 있다. 특히 아타튀르크가 생전에 애용하던 식당이나 단골가게에는 반드시 "아타튀르크가 좋아하던 가게" 식으로 간판을 꾸미고 아타튀르크가 주로 시켰던 메뉴를 특별메뉴로 구성해서 팔고 있다.

아타튀르크가 이스탄불에 머물 때는 주로 돌마바흐체 궁전의 집무실에 머물렀지만 때때로 근처의 어부들이 입는 옷으로 변장을 하고 가까운 선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고등어 구이를 뜯으며 주변의 민심을 살폈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통신기술이 발전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아타튀르크를 알아보는 사람도 없었고 그들이 하는 이야기들을 듣고 아타튀르크가 국정운영에 참고했다고 한다.

또한 페네르바흐체 SK팬이자 서포터였다. 페네르바흐체 홈페이지에 아주 자랑스러운 문체로 쓰여있는데, 이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10 Ağustos 1928 günü, 3-3 berabere biten Gazi Kupası maçından sonra üçü Galatasaraylı ve ikisi Fenerbahçeli olan beş kişinin önünde aynen şunları söyledi: "Burada üçe üçüz... Çünkü ben de Fenerbahçeliyim!"
1928년 8월 10일, 3:3 동점으로 끝난 가지컵 경기후 3명의 갈라타사라이 팬과 2명의 페네르바흐체 팬이 포함된 다섯 명 앞에서 아타튀르크가 말했다. "여기도 3대 3이군. 나도 페네르바흐체 팬이니까!"

그 외에 튀르키예 독립 전쟁 시절의 일기에서도 페네르바흐체에 대한 빠심을 여지없이 보여주기도 했으며, 금전적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튀르키예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인만큼 이스탄불 아타튀르크 국제공항튀르키예 축구 국가대표팀의 홈 구장 아타튀르크 올림픽 스타디움이 이 인물의 이름에서 따왔다. 흔히 이스탄불의 기적이 열린 경기장으로도 유명하며 챔스 결승전을 개최할 수 있는 만큼 튀르키예 최대 규모의 축구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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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 사진만 잘 알려져 있어서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 점이 하나 있는데 아타튀르크는 튀르크인 하면 떠오르는 전형적인 까무잡잡한 황색 피부에 검은 머리와 눈이 아닌 전형적인 백인의 외모인 금색 머리카락과 푸른 눈을 지니고 있었다. 컬러 사진, 마담 투소에서 생전 모습을 재현해 만든 밀랍 인형. 이 때문에 조상이 알바니아계라는둥 그리스계라는 둥[26], 심지어 테살로니키에 아슈케나짐 유대인이 많았던 점을 들어 유대계라는 둥 여러 주장이 나오는 편. 본인은 일단 셋 다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확신하지는 못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 "튀르키예 땅에 살고, 튀르키예어를 사용하고, 튀르키예를 자신의 조국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이는 곧 튀르키예인이다."[27]라는 말을 남겼다. 본인부터가 보편적으로 알려진 튀르크인과는 다른 외모적 특성을 지니고 있었지만 스스로의 정체성을 튀르크인으로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사상이였던 셈.

골초 국가로 유명한 튀르키예인 아니랄까봐 담배를 엄청나게 많이 피웠다. 아타튀르크가 일찍 사망한 원인도 지나친 격무로 인한 과로 외에 지나친 흡연도 원인 제공을 한 걸로 알려져 있다. 아타튀르크의 주치의가 지금 피우는 양에서 절반만 줄이라고 했는데 거기서 100개비를 피운다고 해서 50개비로 줄이도록 조치했지만 원래 아타튀르크는 50개비를 피우고 있었고 담배 양을 말하면 주치의가 줄이라고 할 것이 뻔했기 때문에 일부러 두 배 부풀려서 얘기한 것이다. 결국 줄이는 것 없이 평소 피우던 대로 피웠다고 한다.

도수가 40~50으로 높은 라크(rakı)라는 튀르키예 전통주를 매일같이 마셨다. 이로 인해 간경변증에 걸렸지만 아프다며 진통제 차원에서도 술을 마셨다. 이정도면 알콜중독자 수준으로, 말년(1937~1938년)의 아타튀르크는 그답지 않게 병마와 숙취 속에 이전처럼 명민한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고 한다. 그의 이런 애주가 속성은 오스만 제국 시기의 금주법[28]을 폐기한 것과 잘 맞아떨어지기도 한다.[29] 라크는 당시 국가전매로 지정되었으며 그가 죽은 후 6년만인 1944년 국영공장에서 생산되기 시작했는데, 유명한 ‘예니 라크(Yeni Rakı)’이다.[30]

아타튀르크는 생전에 히틀러를 위험한 미치광이라고 판단해 매우 경계했고, 튀르키예 정부 관료들에게 늘 히틀러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였다. 또한, (만약 제1차 세계 대전마냥 전세계적 전쟁이 다시 일어난다는 전제하에서) 앞으로의 전쟁에서는 미국이 주도권을 잡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는 쿠르스크 전투 직전에 벌어졌던 독일 국방군의 엄청난 기갑군 훈련을 관전한 튀르키예군 장성들이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며 제2차 세계 대전튀르키예가 휘말리는 것을 막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히틀러의 집권 시기가 1930년대 초반에 시작된 것과 아타튀르크가 1938년, 즉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바로 1년 전에 사망한 것이 얼추 맞아 떨어지므로 아타튀르크는 주변 정세를 분석하여 잘 예측해낸 것이다. 베니토 무솔리니에 대해선 “제나라 국민들 손에 죽을 놈”이라는 예언에 가까운 평도 남겼다. 아무래도 파시즘 자체가 내포한 주변국에 대한 야만스러운 공격성과 그에 따르는 리스크를 내다본 듯하다.[31]

상당한 세속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튀르키예를 기독교 국가들로부터 자주성을 지켜낸 것 때문에 이슬람 세계에서도 꽤 존경받는다.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게는 비난당하며 동상이 훼손된 적도 있다.[32]

아타튀르크의 일상생활을 지켜본 아타튀르크의 지인들이나 경호원들의 회고에 따르면 아타튀르크의 일상은 방탕하면서도 굉장히 절제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아타튀르크의 실제 육성에서도 들어볼 수 있지만, 이후 출세하고 나서도 테살로니키 사투리와 억양이 남아있음을 알 수 있다.
Gece sofraları nedeniyle geç kalkan Atatürk, uyanır uyanmaz odasındaki divanın üzerine geçer, orada bağdaş kurarak kahve-sigara içerdi. Sonra traşını, masajını yaptırır, ardından çalışma odasına geçerdi. Hem kahvaltı hem öyle yemeği olarak bir dilim ekmek ve bir kase ayran ya da yoğurt yerdi. İkindi vaktinde de bir bardak ayran içerdi. Akşam sofrasında 10 kişiden aşağı düşmeyen bir davetli topluluğu her zaman hazır bulunurdu. Sofrada imtihan etmek istediği kişileri karşısına, iltifat etmek istediği kişileri yanına oturturdu. Etrafındakilere ve mahiyetinde bulunanlara genellikle “Çucuk” diye hitap ederdi. “Beri bak çucuk”, söze başlarken maiyetine kullandığı hitap şekliydi. En ağır kelimesi ise “ebleh” anlamında kullandığı “hebenneka” idi. Atatürk’le ilgili hiç bilinmeyen özellikleri dile getiren bu sözler, “Cumhurbaşkanlığı Makamı Olarak Dolmabahçe Sarayı ve Atatürk” adlı kitapta yer alıyor.
밤늦은 식사 때문에 늦게 일어난 아타튀르크는 일어나자마자 그의 방에 있는 소파에 앉고, 다리를 꼰 채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웠다. 그 후 면도와 마사지를 받았다. 그 후 곧장 집무실로 향했다. 아침 겸 점심 식사로는 한 조각의 빵과 한 잔의 아이란(물에 타고 소금을 넣은 튀르키예 전통 요구르트 음료) 혹은 요구르트를 먹곤 했다.[33] 오후에는 아이란 한 잔을 마셨다. 저녁식사 때는 늘 10명 이상의 손님을 불러 식사를 했다. 식탁에서 빵을 달라고 하는 손님이 있으면 그 빵을 달라고 하는 손님 옆에 가 앉곤 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그리고 평상시에 사람들에게 보통, "을라야"[34]라고 부르곤 했다. "을라야, 그 있냐"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할 때 했다. 그가 한 가장 심한 욕은 "얼간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빙씨"였다. 아타튀르크에 대한 알려지지 않은 이 사실들은 "공화국 대통령 집무실로서의 돌마바흐체 궁전, 그리고 아타튀르크"라는 책에 실려있다.

아타튀르크는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대식은 건강에 해롭다는 생각에 간단한 식습관을 고수했다. 국가행사 중에 의례적으로 행해지는 만찬에서도 본인은 간단하게 먹고 귀빈들에게는 푸짐하게 대접할 정도였고 평소에도 음식에 있어 절약하는 것이 거나하게 차려먹는 것보다 여러면에서 더 낫다고 주장하곤 했다. 대신 튀르키예 커피를 엄청 좋아해서 하루에도 10-15잔씩 꼬박꼬박 챙겨마셨다. 그가 좋아하던 음식들도 소박한 음식들이라 현재도 트럭기사들의 음식정도로 치부되는 쿠루 파술예(Kuru fasulye, 고기가 들어가지 않은 콩조림)를 가장 좋아했으며 고향 테살로니키 스타일의 시금치파이[35]도 어린시절부터 좋아했다고 전한다. 간식으로도 멜론, 레블레비(구운 병아리콩), 땅콩, 삶은 계란 같이 소박하게 먹었다. 전해지는 일화에 의하면 그가 죽기 며칠 전에 경호원에게 "얘야, 나는 단 한번도 아티초크를 먹어본 적이 없단다. 알고 있느냐?" (Çocuk, ben hiç enginar yemedim biliyor musun?)라고 말했고, 경호원은 "튀르키예에서 가장 유명한 요리사를 각하를 위해 불렀습니다. 카흐라만마라쉬에서 기차를 타고 오고 있습니다. 각하."(Türkiye'nin en ünlü aşçısı sizin için hazırladı. Kahramanmaraş'tan trenle yola çıktı. Geliyor Paşam)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기차는 1938년 11월 10일까지 도착하지 못했고, 결국 아타튀르크는 아티초크를 먹어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출처:아타튀르크가 가장 좋아했던 음식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베르튀르크 신문 기사)

아타튀르크의 양녀 7명 중 사비하 괵첸(Sabiha Gökçen)은 세계 최초의 여성 파일럿이 되었다. 2001년 3월 22일, 자신의 생일에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이름은 이스탄불의 3개 공항[36] 중 하나인 사비하 괵첸 국제공항에 붙어 지금까지도 기려지고 있다.

10. 매체에서

11. 어록

보면 알 수 있다시피, 과학문화, 교육을 중시하는 발언이 많이 있다. 종교에 대한 어록들에서도 합리적인 성향이 묻어나오며, 초창기의 이슬람적인 발언들 중에서도 합리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후반기에 이르면 불가지론 혹은 무신론에 가까운 성향들도 보이고 있다.
Memleketin efendisi hakiki müstahsil olan köylüdür.
나라의 진정한 주인은 바로 농민들이다.
Doğruyu söylemekten korkmayınız.
진실을 말하는 것을 두려워 말라.
Beni görmek demek mutlaka yüzümü görmek demek değildir Benim fikirlerimi, benim duygularımı anlıyorsanız ve hissediyorsanız bu yeterlidir.
나를 본다는 것은 진실로 나의 얼굴을 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마음을, 나의 생각을 여러분들이 이해한다면, 그리고 느낀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Türkiye Cumhuriyeti mutlu, zengin ve muzaffer olacaktır.
튀르키예 공화국은 행복, 풍요, 그리고 승리를 얻을 것이다.
Sağlam kafa sağlam vücutta bulunur.
건강한 생각은 건강한 신체에 깃든다.[43]
Ordular, ilk hedefiniz Akdenizdir. İleri!
군대여, 제군의 첫 번째 목표는 지중해다. 앞으로! (튀르키예 독립 전쟁 당시 사령관에 취임하면서 내린 첫 번째 명령)
Türkiye Cumhuriyetinin temeli kültürdür.
튀르키예 공화국의 기초는 문화다.
Büyük hedefimiz, milletimizi en yüksek medeniyet seviyesine ve refaha ulaştırmaktır.
우리의 위대한 목표는, 우리들의 조국을 가장 높은 수준의 문명과 번영을 이룩하는데에 있다.
Öğretmenler: Yeni nesiller sizlerin eseri olacaktır.
선생님들이여, 새로운 세대는 여러분들의 헌신으로 이루어집니다.
Ne mutlu "Türküm" diyene.
얼마나 행복한가, "나는 튀르키예인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Yurtta barış, cihanda barış.
가정에서 평화, 세계에서 평화.
Geldikleri gibi giderler.
그들이 왔던 것처럼, 그들은 떠날 것이다.[44]
Benim naciz vücudum elbet bir gün toprak olacaktır, ancak Türkiye Cumhuriyeti ilelebet payidar kalacaktır.
나의 미천한 몸은 언젠가는 먼지가 될 것이나, 튀르키예 공화국은 영원히 우뚝 서 있을 것이다.[45]
Bu millete çok şey öğretebildim ama onlara uşak olmayı bir türlü öğretemedim.
이 나라에서 정말 많은 것을 가르쳐왔다, 하지만 그들에게 머슴이 되는 법을 가르치지는 않았다.
Süngülerle, silahlarla ve kanla kazandığımız askeri zaferlerden sonra, kültür, bilim, fen ve ekonomi alanlarında da zaferler kazanmaya devam edeceğiz.
총검으로, 무기로, 그리고 로써 승리한 우리 군대는 승전 이후에는, 문화, 과학, 철학 그리고 경제의 전장에서도 또한 승리는 계속 이어질 것이다.
Zafer, "Zafer benimdir" diyebilenindir Başarı ise, "Başaracağım" diye başlayarak sonunda "Başardım" diyebilenindir.
승리는, "승리는 내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자의 것이며 성공의 경우, "나는 성공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끝에는 "나는 성공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자의 것이다.
Egemenlik verilmez, alınır.
권력은 주어진 것이 아니며, 획득하는 것이다.
Milleti kurtaranlar yalnız ve ancak öğretmenlerdir.
민족을 구원할 수 있는 이는 홀로, 그리고 오로지 선생님들이다.
Hayatta en hakiki mürşit ilimdir.
인생의 가장 진실된 조언자는 과학이다.
Türk Milleti bağımsız yaşamış ve bağımsızlığı varolmalarının yegane koşulu olarak kabul etmiş cesur insanların torunlarıdır. Bu millet hiçbir zaman hür olmadan yaşamamıştır, yaşayamaz ve yaşamayacaktır.
튀르키예 민족은 자유롭게 살아왔으며, 그리고 자유로운 상태의 고유한 존재를 인식하며 지켜온 용감한 이들의 손자들이다. 이 민족은 결코 자유 없이 살아가지 않았으며, 살아갈 수 없으며, 또 살아가지 않을것이다.
Biz Türkler tarih boyunca hürriyet ve istiklale timsal olmuş bir milletiz.
우리 튀르키예인들은 역사를 통틀어 자유와 독립을 실천해온 민족이다.
Milletimiz davranışlarında ve gayretlerinde sarsılmaz bir bütünlük gösterdiği için başarılı olmuştur.
우리 민족은 행동과 노력에서 흔들리지 않는 하나의 연대로 인하여 성공할 수 있었다.
İki Mustafa Kemal vardır: Biri ben, et ve kemik, geçici Mustafa Kemal İkinci Mustafa Kemal, onu "ben" kelimesiyle ifade edemem; o, ben değil, bizdir! O, memleketin her köşesinde yeni fikir, yeni hayat ve büyük ülkü için uğraşan aydın ve savaşçı bir topluluktur. Ben, onların rüyasını temsil ediyorum Benim teşebbüslerim, onların özlemini çektikleri şeyleri tatmin içindir. O Mustafa Kemal sizsiniz, hepinizsiniz. Geçici olmayan, yaşaması ve başarılı olması gereken Mustafa Kemal odur!
두 명의 무스타파 케말이 있다. 하나는 나이다. 살과 뼈로 이루어진 평범한 무스타파 케말 말이다. 두 번째 무스타파 케말은 '나'라는 단어로 말할 수 없다. 그는 내가 아니라 우리들이다! 그는, 나라의 온 구석구석까지 새로운 신념을, 새로운 인생을, 그리고 위대한 이상을 위하여 노력하는 개화된 그리고 투쟁하는 하나의 군단이다. 나는 그들의 꿈을 대표하고 있다. 나의 계획은, 그들의 갈망하는, 소망하는 것들을 이루어주는 것이다. 그 무스타파 케말은 여러분이요, 우리 모두이다. 평범하지 않고, 생기넘치고, 성공을 이루는 무스타파 케말 말이다!
Saban kılıçtan üstündür.
쟁기는 칼보다 강하다.
Vatanını en çok seven, işini en iyi yapandır.
조국을 가장 사랑하는 이는, 자기 일을 가장 열심히 하는 자이다.
Vatanın bütünlüğü, Milletin istiklali tehlikededir. Milletin istiklalini yine milletin azim ve kararı kurtaracaktır.
온 조국이, 민족의 독립이 위험에 처해있다. 민족의 독립은 다시금 민족의 단합과 결심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아마시아 회의에서)
Siz orada yalnız düşmanı değil, Milletin ters talihini de yendiniz.
그대는 적뿐만이 아니라, 민족의 운명도 극복했소. (2차 이뇌뉘 전투 이후 이스메트 이뇌뉘에게 보내는 축하전보에서)
Hattı müdafaa yoktur, sathı müdafaa vardır. O satıh bütün vatandır. Vatanın her karış toprağı vatandaşın kanıyla sulanmadıkça terk edilemez.
전선 사수란 존재하지 않는다, 지역 사수가 있을 뿐이다. 그 지역은 온 조국이다. 조국의 다양한 지역이, 인민들의 피로 물들수록 우리는 물러나서는 아니 된다. (사카리야 전투 당시)
Peygamberimiz tilmizlerine dünya milletlerine İslamiyeti kabul ettirmelerini emretti, bu milletlerin hükümeti başına geçmelerini emretmedi. Peygamberin zihninden asla böyle bir fikir geçmemiştir.
우리의 예언자들은 제자들에게 세상 모든 민족들에게 이슬람을 받아들이도록 하라고 명령했지, 이 민족들의 정권을 장악하라고 명령하지는 않았습니다. 예언자들의 지혜속에는 결코 이러한 생각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 (칼리프 제도를 폐지하면서)
Arkadaşlar, efendiler ve ey millet, iyi biliniz ki, Türkiye Cumhuriyeti şeyhler, dervişler, müritler, meczuplar memleketi olamaz. En doğru, en hakiki tarikat, medeniyet tarikatıdır.
동지들이여, 신사들이여, 오 국민들이여, 잘 아시다시피 튀르키예 공화국은 성직자, 데르비쉬, 율법학자, 광신도들의 나라가 될 수 없습니다. 가장 올바르고, 가장 진정한 교단은 문명입니다.
Sarık ve cüppeyle artık dünyada muvaffak olmanın imkanı yoktur. Yaptığımız muazzam inkılaplarla medeni bir millet olduğumuzu cihana ispat ettik.
터번을 쓰고 쥡베[46]를 입고 세상에서 성공할 가능성은 없다. 우리가 행한 위대한 혁명을 통해 문명적인 국민이 되었음을 우리는 전 세계에 선포했다. (모자법 선포당시)
Herhalde alemde bir hak vardır ve hak kuvvetin üstündedir.
아마도 세상에 진리라는게 있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진리는 힘을 바탕으로 하지 않을까.
Âhiren Kur'ân'ın tercüme edilmesini emrettim. Bu da ilk defa olarak Türkçeye tercüme ediliyor. Muhammed'in hayatına âit bir kitabın tercüme edilmesi için de emir verdim. Halk, tekerrür etmekte olan bir şeyin mevcut olduğuna ve din ricâlinin derdinin ancak kendi karınlarını doyurup başka bir işleri olmadığını bilsinler.
처음으로 쿠란을 우리의 언어로 번역하도록 명령하였소. 이것은 최초로 튀르키예어로 번역되는 것이오. 무함마드의 삶에 대한 전기도 번역하도록 명령하였소. 인민들이 상습적으로 읽게 하여, 종교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배만 채울 뿐 다른 일은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도 깨닫길 바라오.
Arabistan'ın muhtelif yerlerinde insan heykellerinden ve nebat resim ve suretlerinden ibaret ağaçtan ve taştan putların muhafazasına mahsup yerler vardı. Muhammed'in neş'et etmiş olduğu Mekke'deki Kabe denilen mabet bu yerlerin en büyüklerinden idi. İbrahim oğlu İsmail ile birlikte Kabe'yi bina etmişlerdi. Cebrail kendilerine o zaman beyaz ve mücella olan Haceriesved'i getirmişti, bu taş sonradan günahkarların ellerini sürmelerinden dolayı kararmıştı. Bunların hepsi, bittabi sonradan uydurulmuş masallardır.
아라비아 반도 각지에서 사람의 형상에서, 식물의 모습과 형태를 따와 나무와 돌로 만든 우상들을 보관하는 곳들이 있었다. 무함마드가 출생한 메카의 '카바'라 불리는 집은 이러한 곳중 가장 큰 곳이었다. 아브라함(İbrahim)은 아들 이스마엘(İsmail)과 더불어 카바를 지었다고 한다. 가브리엘(Cebrail)이 그 당시 새하얗고 밝은 운석을 가져왔다고 하는데, 이 돌은 훗날 죄인들의 손을 타면서 검게 변했다고 한다. 이러한 것들은 전부 훗날 만들어진 이야기들이다. (고등학생들을 위한 역사교과서, 1931)
Bizim devlet idaresinde takip ettiğimiz prensipleri, gökten indiği sanılan kitapların dogmalarıyla asla bir tutmamalıdır. Biz, ilhamlarımızı, gökten ve gaipten değil, doğrudan doğruya hayattan almış bulunuyoruz.
우리는 국가 업무에 따른 원칙들을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경전의 도그마처럼 여겨서는 결코 안 됩니다. 우리는 지식을 하늘에서부터, 신비로운 계시에서부터가 아니라 일상 속에서 찾고있지요.
Türkiye Cumhuriyetinde herkes Allah’a istediği gibi ibadet eder. Türk Cumhuriyetinin resmi dini yoktur. Türkiye’de bir kimsenin fikirlerini, zorla başkalarına kabul ettirmeye kalkışacak kimse yoktur ve buna müsaade edilemez.
튀르키예 공화국에서는 누구든 원하는 대로 유일신에게 기도드릴 수 있습니다. 튀르키예 공화국의 국교는 없어요. 튀르키예에서는 누구든 자신의 신념을 강제로 타인에게 강요하는 짓을 할 자는 없으며 또한 이러한 행위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Bizim dinimiz, milletimize hakir, miskin ve zelil olmayı tavsiye etmez. Tam tersine Allah da, Peygamber de insanların ve milletlerin izzet ve şerefini korumalarını emrediyor.
우리의 종교는 국민들에게 천한, 나태한, 기생충같은 삶을 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정반대로 하느님과 예언자들은 인간의 국민의 숭고함과 명예를 지킬것을 명령합니다.
Din bir vicdan meselesidir. Herkes vicdanının emrine uymakta serbesttir. Biz dine saygı gösteririz. Düşünüşe ve düşünceye muhalif değiliz. Biz sadece din işlerini, millet ve devlet işleriyle karıştırmamaya çalışıyor, kasde ve fiile dayanan taassupkar hareketlerden sakınıyoruz. Gericilere fırsat vermeyeceğiz.
종교는 양심의 문제이다. 모든 사람들은 양심의 명령에 따르는데 있어 자유롭다. 우리는 종교를 존중하며, 생각과 사고에 간섭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만 종교 업무를 민족과 국가의 사업에 간섭하지 않게 하는데 노력할 따름이며, 계급과 지위에 기반한 광신주의적 행동을 억제할 뿐이다. 우리는 결코 반동주의자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을 것이다. (반세속주의, 반공화국 봉기 당시)
Ben diktatör değilim. Benim kuvvetim olduğunu söylüyorlar, evet, bu doğrudur. Benim arzu edip de yapamayacağım bir şey yoktur. Çünkü ben zorâki ve insafsızca hareket etmesini bilmem. Bence diktatörlük, diğerlerini râm edendir. Ben kalpleri kırarak değil, kazanarak hükmetmek isterim.
저는 독재자가 아닙니다.[47] 제게 힘이 있다고들 말하는데, 네, 옳습니다. 제가 바란다면 못하는 일이 없지요. 왜냐하면 저는 강제로, 그리고 무자비하게 행동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생각건대 독재란, 다른 이들을 억압하는 것을 말합니다. 저는 다른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서가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얻어가며 통치하고 싶습니다.
Ben istese idim derhâl askerî bir diktatörlük kurardım ve memleketi öyle idâreye kalkışırdım. Fakat ben istedim ki, milletim için modern bir devlet kurayım.
내가 바랐더라면 당장 군대를 불러 독재정권을 세워 우리 나라를 군사독재로 통치할 수도 있었네. 하지만 나는 우리 민족을 위한 현대적인 국가를 세우고 싶었다네.
Çocukken fakirdim. İki kuruş elime geçince bunun bir kuruşunu kitaba verirdim. Eğer böyle olmasaydı, bu yaptıklarımın hiç birini yapamazdım.
어렸을때 난 가난했었지. 내 손에 2쿠루쉬가 들어왔다 하면 1쿠루쉬로 책을 사곤 했지.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지금 내가 이루어낸 것들 중 아무것도 이루어내지 못했을거야.
Orduya ilk katıldığım günlerde, bir Arap binbaşısının 'Kavm-i Necip evladına sen nasıl kötü muamele yaparsın' diye tokatladığı bir Anadolu çocuğunun iki damla gözyaşında Türklük şuuruna erdim. Onda gördüm ve kuvvetle duydum. Ondan sonra Türklük benim derin kaynağım, en derin övünç membaım oldu. Benim hayatta yegane fahrim, servetim, Türklükten başka bir şey değildir.
군대에서 보낸 첫 날, 한 아랍인 소위한테 "네놈이 감히 '우위의 민족'[48]한테 어찌 그리 무례할 수 있느냐"라고 뺨을 맞은 아나돌루의 한 소년의 두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보고 나는 튀르키예인의 감정을 느꼈네. 거기서 보고, 들었지. 그 다음 튀르키예인이란 개념은 나의 깊은 뿌리가 되어, 가장 명예로운 샘이 되었네. 나의 삶의 유일한 명예요, 복인 튀르키예인으로서의 긍지 외에 다른 것은 없다네.
Cumhuriyetin, şahısların hayatlarına bağlı kalmayarak kökleşmesi ve ölmeden önce milletin hürriyete alışması için muhalif parti kurmak istiyorum.
나는 공화국이 특정 인물들의 삶에 속박되지 않은 채 뿌리내리게하고, 내가 죽기 전에 국민들이 자유에 적응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야당을 세우고 싶다네. (아타튀르크가 1930년 8월 12일, 당시 주 프랑스 튀르키예 대사였던 페트히 베이에게 한 말)
Yaz Müfit, zaferden sonra hükümet biçimi cumhuriyet olacaktır.
쓰게나 뮈피트, 승리 이후 정부의 형태는 공화국이 될 것이라고. (1919년 아타튀르크가 마즈하르 뮈피트 칸수에게 기사를 서술하면서 한 말.)
Bir millet ki resim yapmaz, bir millet ki heykel yapmaz, bir millet ki tekniğin gerektirdiği şeyleri yapmaz, itiraf etmeli ki o milletin ilerleme yolunda yeri yoktur.
그림도 안 그리고, 동상도 안 만들고, 기술이 필요한 일들을 안하는 민족이 있다면, 단언컨대 그 민족의 발전의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İnsan topluluğu kadın ve erkek denilen iki cins insandan mürekkeptir. Kabil midir ki, bu kütlenin bir parçasını ilerletelim, ötekini ihmal edelim de kütlenin bütünlüğü ilerleyebilsin? Mümkün müdür ki, bir cismin yarısı toprağa zincirlerle bağlı kaldıkça öteki kısmı göklere yükselebilsin?
인간 공동체는 여성남성이라 불리는 두 성별의 사람들로 구성된다. 이 집단 중 일부는 전진시키자 하고, 다른 일부는 무시하자고 하면 전체가 나아갈 수 있겠는가? 하나의 집단의 절반은 쇠사슬로 묶어놓고, 나머지 부분은 하늘처럼 떠받들여지는 것이 가당키나 하는가?

11.1. 연설영상

공화국 건국 10주년을 기념한 연설로 그의 생전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Bugün cumhuriyetimizin onuncu yılını doldurduğu en büyük bayramdır.
오늘은 우리 공화국의 10년째 되는 가장 큰 국경일입니다.

Kutlu olsun!
축하합니다!

Bu anda büyük Türk milletinin bir ferdi olarak bu kutlu güne kavuşmanın en derin sevinci ve heyecanı içindeyim.
또한 저는 위대한 튀르키예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이 경축일을 맞이하며 가장 깊은 기쁨과 흥분 속에 있습니다.

Yurttaşlarım!
나의 국민들이여!
Az zamanda çok ve büyük işler yaptık.
짧은 시간동안 우리는 많고, 거대한 일들을 해냈습니다.
Bu işlerin en büyüğü, Temeli, Türk kahramanlığı ve yüksek Türk kültürü olan Türkiye Cumhuriyetidir.
이 일들 가운데 가장 위대하고, 근본적인 것은, 튀르키예인의 영웅심과, 고도의 튀르키예인의 문화를 갖춘 튀르키예 공화국을 세운 것입니다.
Bundaki muvaffakiyeti Türk milletinin ve onun değerli ordusunun bir ve beraber olarak azimkarane yürümesine borçluyuz.
이것의 성공에는 튀르키예 국민들의, 그리고 귀중한 우리 군대의 하나되고 협동된 위대한 발걸음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Fakat yaptıklarımızı asla kafi göremeyiz.
하지만 우리가 해낸 것들은 결코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Çünkü daha çok ve daha büyük işler yapmak mecburiyetinde ve azmindeyiz.
왜냐하면 더욱 많은, 그리고 더욱 위대한 일들을 해야하며 이는 또한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Yurdumuzu dünyanın en mamur ve en medeni memleketleri seviyesine çıkaracağız.
우리는 우리의 국가를 세계에서 가장 발전하고, 가장 문명화된 조국의 단계로 나아갈 것입니다.
Milletimizi en geniş refah, vasıta ve kaynaklarına sahip kılacağız.
우리 국민들은 가장 풍부한 복지, 자가용, 그리고 부를 소유할 것입니다.
Milli kültürümüzü muasır medeniyet seviyesinin üstüne çıkaracağız.
우리의 민족문화를 현대화되고 문명화된 단계를 넘도록 나아갈 것입니다.

Bunun için, bizce zaman ölçüsü geçmiş asırların gevşetici zihniyetine göre değil, asrımızın sürat ve hareket mefhumuna göre düşünülmelidir.
이를 위해서는, 우리의 시간관념은 지난 세기같이 느긋함에 빠져서는 안되고, 현대의 빠르고 활동적인 개념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Geçen zamana nispetle, daha çok çalışacağız.
지난 세월에 비해, 우리는 더욱 열심히 일할 것입니다.
Daha az zamanda, daha büyük işler başaracağız.
더욱 짧은 시간에, 우리는 더욱 큰 일들을 성취해낼 것입니다.
Bunda da muvaffak olacağımıza şüphem yoktur.
여기에서 또한 성공할 것이라는 의심은 없습니다.
Çünkü, Türk milletinin karakteri yüksektir.
왜냐하면, 튀르키예 민족성은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Türk milleti çalışkandır.
튀르키예 민족은 근면합니다.
Türk milleti zekidir.
튀르키예 민족은 영리합니다.
Çünkü Türk milleti milli birlik ve beraberlikle güçlükleri yenmesini bilmiştir.
왜냐하면, 튀르키예 국민은 민족이 통합하고 협동하여 강하고 패배하지 않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Ve çünkü, Türk milletinin yürümekte olduğu terakki ve medeniyet yolunda, elinde ve kafasında tuttuğu meşale, müspet ilimdir.
그리고 또한, 튀르키예 민족이 발걸음을 걸어가는 진보와 문명의 길에서 손으로, 머리로 지식의 불꽃을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Şunu da ehemmiyetle tebarüz ettirmeliyim ki, yüksek bir insan cemiyeti olan Türk milletinin tarihi bir vasfı da, güzel sanatları sevmek ve onda yükselmektir.
또한 중요하게 강조 해야 할 것은, 위대한 하나의 인간집단으로서 튀르키예 국가의 역사적인 하나의 성질에서도 아름다운 예술을 사랑하고, 발전하는 것입니다.
Bunun içindir ki, milletimizin yüksek karakterini, yorulmaz çalışkanlığını, fıtri zekasını, ilme bağlılığını, güzel sanatlara sevgisini, milli birlik duygusunu mütemadiyen ve her türlü vasıta ve tedbirlerle besleyerek inkişaf ettirmek milli ülkümüzdür.
이는 즉, 우리 국민의 위대한 성질을, 피곤해않는 근면성을, 창조적인 두뇌를, 과학에 대한 관심을, 아름다운 예술을 사랑하는 것을, 민족의 단결된 마음을 쉴새없이 나아가며, 모든 종류의 방법과 행동으로 육성하며 발전하는 민족국가입니다.
Türk milletine çok yaraşan bu ülkü, onu, bütün beşeriyete hakiki huzurun temini yolunda, kendine düşen medeni vazifeyi yapmakta, muvaffak kılacaktır.
튀르키예 민족에 매우 어울리는 이 이상은, 온 인류에 진실로 평화롭고 확신찬 길에서, 스스로 생각하는 시민적 의무를 다 하는데에서 성공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Büyük Türk Milleti,
위대한 튀르키예 국민이여,

On beş yıldan beri giriştiğimiz işlerde muvaffakiyet vaat eden çok sözlerimi işittin.
여러분들은 15년 전부터 함께 해온 일들에서 성공을 약속하는 많은 저의 말들을 들었습니다.
Bahtiyarım ki, bu sözlerimin hiçbirinde, milletimin hakkımdaki itimadını sarsacak bir isabetsizliğe uğramadım.
행복하게도, 이러한 약속들이 아무데에서도, 국민의 신뢰를 저버리는 실패가 되지 않았습니다.
Bugün, aynı iman ve katiyetle söylüyorum ki, milli ülküye, tam bir bütünlükle yürümekte olan Türk milletinin büyük millet olduğunu, bütün medeni alem, az zamanda bir kere daha tanıyacaktır.
오늘, 저는 똑같은 믿음과 확신속에서 말하건대 민족국가에, 완전한 하나의 공동된 발걸음에 임한 튀르키예 국민들이 위대한 민족이 된 데에, 온 문명세계는, 짧은 시간에 한번 더 알게될 것입니다.
Asla şüphem yoktur ki, Türklüğün unutulmuş büyük medeni vasfı ve büyük medeni kabiliyeti, bundan sonraki inkişafıyla, atinin yüksek medeniyet ufkunda yeni bir güneş gibi doğacaktır.
결코 의심할 나위 없이, 튀르키예민족의 잊혀지지 않는 거대한 문명의 성질과 위대한 문명의 능력은 이 이후에도 발전함과 더불어 미래에는 고도 문명의 지평선에서 새로운 태양과 같이 떠오를 것입니다.

Türk Milleti!
튀르키예 민족이여!

Ebediyete akıp giden her on senede, bu büyük millet bayramını daha büyük şereflerle, saadetlerle huzur ve refah içinde kutlamanı gönülden dilerim.
영원히 흘러가는 매 10년마다, 이 위대한 국경일을 더욱 큰 자긍심과 행복으로 평화와 번영으로 축하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Ne mutlu Türküm diyene!
나는 튀르키예인이다 라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Ankara, 29 Ekim 1933
앙카라, 1933년 10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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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자 개혁 이전의 아랍 문자 표기. 튀르키예 독립전쟁 시기 이후 아타튀르크는 가지 무스타파 케말(Gazi Mustafa Kemâl)이라고 서명했다.[논란] 정확한 생일에 대해서 논란이 있어 실제 생일은 알려진 게 없다. 호적에는 1881년 1월 4일생으로 기록되어 있어 불명확하나 현재로써는 5월 19일 설이 유력하게 여겨지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생애 문서 유년기 문단 참조.[3] ولايت سلانيك / Vilâyet-i Selânik. 빌라예트는 현대 대한민국으로 치면 도(道)에 해당하는 최상위 지방행정단위이며 셀라니크는 도시 이름인데, 빌라예트 중에서는 각 지역의 중심 도시 이름을 그대로 쓰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은 그리스, 북마케도니아, 불가리아로 나뉘어 편입되었다.[4] Sancak-i Selanik, 빌라예트 산하의 행정구역. 현재는 그리스와 북마케도니아 지역에 해당한다.[5] 형과 누나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전부 요절했으며 아타튀르크는 네 번째 자녀였다.[6] 공식 수료는 1905년 1월 11일.[7] 불가지론자였다는 설도 있다. 확실한건 1923년 이전까지 아타튀르크는 종교에 대해서도 꽤 자주 발언하던 편이었으며, 본격적으로 "튀르크인"의 민족주의 이론을 받아들이기 이전까지는 이슬람에 기반해 서구 제국주의자들로부터 민족의 독립을 지켜야한다고 발언하곤 했다. 하지만 칼리파제 폐지 이후 1925년부터 아타튀르크의 종교에 대한 시각은 '미개와 야만'의 이미지로 굳어가기 시작했다. 종교에 대한 공식발언도 오스만 제국시기에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데르비시 종단 해체 당시 "현대 문명에 어울리지 않는다" 정도가 전부이다.[8] 1935년에 수여받았다.[9] 1921년 제정된 기초조직법(Teşkîlât-ı Esâsîye Kanunu) 제1조에서 오스만어로 쓰인 어구이다. 이후 언어순화 운동으로 개정된 표현은 아타튀르크의 영묘인 아느트카비르(Anıtkabir)와 튀르키예 공화국 헌법 제6조 서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현대어로는 "Hâkimiyet, kayıtsız şartsız milletindir" 혹은 "Egemenlik, kayıtsız şartsız ulusundur"이다. 혹은 이 두 단어가 섞인 표현들도 볼 수 있다. 아타튀르크 시절에 millet을 고대 튀르크어와 몽골어에서 비롯한 ulus로 바꾸었지만 현대에는 쓰임새가 많이 줄었다.[10] 이슬람 근본주의자들과 이슬람 학자들(그중에서 한발리파 계열과 그 학파에서 파생된 와하브파와 살라프파)이 부정적으로 보는 대상은 이슬람이 아닌 것과 이슬람에 맞지 않다고 인식되는 것들이며 특히 서구, 기독교, 유대인, 세속주의, 민주주의가 그 대상이 된다.[11] 실제로 아타튀르크의 업적은 이순신처럼 국가의 멸망 위기를 막아낸 유명한 장군이였고 세종대왕처럼 국가를 완성하고 안정화시킨 뛰어난 군주였다. 정말로 이순신의 업적과 세종대왕의 업적을 동시에 달성한 것.[12] 튀르키예 학교 교실에 들어가보면 튀르키예 국기와 아타튀르크 사진이 걸려있다.[13] 그리고 아타튀르크 대로를 교차하는 그 다음 큰 대로는 거의 언제나 이뇌뉘 대로(İnönü Caddesi)가 된다.[14] 한국도 화폐 도안 변경은 정치인들에게 이득은 없는데 '어딜 감히 최고존엄이신 세종대왕을/ 최고의 장군인 이순신 장군을 떼고 이것을 붙일려는 것이냐?' 는 등의 리스크만 있기에 도안 변경은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15] 아타튀르크가 일부러 자손을 남기지 않았던 것에서 시작됐다.[16] 툰젤리 도의 행정자료를 보면 이 반란이 일어나기 전인 1935년에 시행된 인구조사에서 툰젤리 도 전체 인구수가 101,099명, 1940년도 인구주택총조사에서 전체 인구수는 94,639명으로 집계되어있다. 아타튀르크 시절의 인구조사는 매우 철저해서 인구조사 기간 동안에는 지방의 경우 외출조차도 철저하게 통제해서 조사했다.[17] 튀르크인의 아르메니아인 학살은 오스만 제국이 있던 1890년대부터 꾸준히 이어져왔기 때문에 온전히 아타튀르크의 책임으로 돌리기는 애매하다.[18] 정확하게 말하면 PKK와 의견을 같이하는 쿠르드 분리주의자들. 다수의 쿠르드인들은 튀르키예에 속하며 PKK에 동조하지 않고 살고 있다. 오히려 PKK 때문에 자신들까지 잠재적인 반란자로 몰린다며 불쾌해하는 쿠르드들도 있다. 일제강점기의 조선이나 지금의 북한을 떠올려보자. 1930년의 한반도 시민 대다수나 지금 북한의 주민들은 부자유와 부조리를 인지하고도 그냥 살고 있었다.[19] 2014년 튀르키예 대통령이 되었다. 이슬람주의 정당인 정의개발당 소속이며, 아니나다를까 집권하고 반세속(케말)주의 정책으로 시끌벅적하다.[20] 당시 아랍권 지역 인구가 적었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무함마드 알리 파샤의 통치기 당시 오늘날 인구 1억을 자랑하는 이집트의 인구가 고작 200만이었다.[21] 튀르키예 독립전쟁 막판 그리스가 대책없이 밀리는 것을 본 영국이 '동트라키아 및 코스탄티니예와 에게 해 섬들 및 키프로스 중 택일할 것'을 요구하였던 관계로 키프로스를 방치한 것이고 이라크 쿠르디스탄 지역의 튀르크멘인과 쿠르드인이 튀르크 민족국가를 형성하는 데 방해가 되리라 판단해 영유권을 포기했다.[22] 오스만 제국 시절 튀르크인들은 성씨를 사용하지 않았다. 오스만 제국 시절 사람들의 이름은 오늘날 아랍인의 이름에서 볼 수 있듯, 본명과 부계명을 사용해 호칭하거나, 출신지나 별칭, 관직이 있을 경우 관직이나 호칭을 붙여서 썼다. 이를테면 아타튀르크의 이름은 '알리 르자 오을루 무스타파(Ali Rıza oğlu Mustafa)', 좀 더 옛날식으로 표기하면 '무스타파 빈 알리 르자(Mustafa bin Ali Rıza)'라고 불렀었다. 17세기 오스만 제국의 대재상인 쾨프륄뤼 메흐메트 파샤(Köprülü Mehmet Paşa)의 경우, 앞에 붙은 쾨프륄뤼는 가문의 이름이나 성이 아니라, 출신지(현 북마케도니아의 벨레스)를 의미하며, 뒤에 붙은 파샤는 고관에 대한 칭호이다.[23] 당대 튀르크인 입장에서 이교도인 그리스군을 상대로 분전했기 때문에 붙여진 호칭으로, 오스만 제국의 건국자인 오스만과 그 아들인 오르한도 가지 호칭을 사용했었다.[24] 그리고 의회는 아타튀르크 본인에게만 저 성씨를 허가했기 때문에 아래에 나오는 양녀들과 여동생을 포함한 가족들과 아타튀르크는 성이 다르다. 원래는 저 성을 쓸 당시 만약 아타튀르크에게서 자손이 태어나면 '아타단(Atadan)'이라는 성을 붙일 예정이었지만, 아타튀르크가 자손없이 죽는 바람에 그럴 일도 없게 되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아타튀르크의 여동생인 마크불레가 아타단 성을 받았지만 마크불레에게도 자손이 없었기 때문에 현재는 아무도 쓰지 않는 성이 되었다.[25] 원래 역 이름은 탄도안(Tandoğan)이었지만 2016년에 바뀌었다.[26] 하지만 알바니아인이나 그리스인들 역시 튀르키예인과 마찬가지로 금발이 별로 없는 편이다.[27] 이는 현대 튀르키예인의 정의로 굳어진다.[28] 정확하게 말하면 무슬림 밀레트만 금주였고 나머지는 술을 만들든 마시든 팔든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다만 무슬림에게 술을 파는 행위에 대한 규제는 있었다.[29] 튀르키예인들에게 '애주가 아타튀르크'는 여전히 금기다. 2008년의 "‘무스타파(Mustafa)’라는 제목의 이 다큐멘터리는 튀르키예의 유명 언론인이자 다큐멘터리 작가인 잔 뒨다르(Can Dündar, 1961~)가 제작, 감독한 작품. 그런데 이 필름에서 뒨다르가 튀르키예 국민으로서는 신성불가침의 영웅인 아타튀르크를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평을 받은 게 문제였다. 이 때문에 아타튀르크를 모독하는 것 자체를 범죄시하는 튀르키예의 많은 사람은 이 필름을 보고 나서 뒨다르를 강력히 비난했다. 이 필름에서 또 하나 문제가 되었던 묘사는 그의 음주 장면이었다. 영화에서 아타튀르크는 앙카라의 집무실에서 외로움을 느끼며 매일 세 갑의 담배를 피우고, 병째 술을 마시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튀르키예 국민들은 이 또한 아타튀르크를 호주가로 묘사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신동아[30] 전매사였던 테켈(Tekel)이 2004년 민영화 되면서 이제는 다른 민영업체 메이 이치키 공업 및 무역유한회사(Mey İçki San. ve Tic. Ltd. Şti.)에 팔려서 생산되고 있다.[31] 국제정세와는 별개로 아타튀르크는 무솔리니를 개인적으로도 탐탁치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무솔리니는 생전 군 복무 경력이 단 한번도 없었으나 자신이 강한 지도자인 것처럼 보여지기 위해 일부러 군복 차림을 고수했는데, 진짜배기 군인 출신인 아타튀르크의 입장에서는 군복을 정치용 소품으로 악용하는 모습이 당연히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참고로 제 3세계의 여러 독재자들이 군복 차림을 즐겨입는것도 무솔리니와 같은 맥락이다. 보다 정확히는 이미 전근대 시절부터 여러 국가원수들이 강한 이미지를 연출하려고 군복을 입고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트렌드(?)가 있었고 이걸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나 독일의 히틀러 같이 열강 대열에 뒤늦게 합류한 국가들이 따라하기 시작했으며 그 전통(?)이 제 3세계 독재자들에게 유입된 것이다.[32] 사실 이슬람권 국가의 지도자들 중 개방적인 성향인 이들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게 똑같이 욕을 먹는다. 파키스탄의 국부인 무함마드 알리 진나힌두교도 등 이교도들에게 관대했다는 이유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게 까이며,(이는 반대 경우도 마찬가지라서 인도의 국부인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도 힌두교 극단주의자에게 암살당했다.) 알제리의 전 대통령이었던 우아리 부메디엔튀니지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하비브 부르기바는 대통령 재임 중 여성의 사회적 활동과 술 판매를 보장, 허용했다는 이유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게 비난을 받기도 한다. 특히 부메디엔은 알제리 대통령 재직 중이던 1978년에 갑자기 돌연사했는데 이러한 그의 죽음을 두고 부메디엔의 세속주의 노선에 반발하던 이슬람 원리주의자가 부메디엔을 독살했을거라고 의혹을 제기하기도 한다.[33] 튀르키예에서는 전통적으로 아침을 푸짐하게 먹는 편이다. 기본적으로 초르바를 한 그릇 비우고, 그 다음에 수죽이라고 불리는 소시지, 오이, 토마토, 올리브, 치즈 몇종류, 삶은 달걀, 홍차와 함께 먹는 것이 기본적인 아침식사이다. 현대에는 일상이 빡빡하다보니 제대로 아침 챙겨먹는 사람들이 줄고있지만 시골에서는 여전히 저렇게 푸짐하게 챙겨먹는 것을 볼 수 있다. 저 시절 기준으로 아타튀르크는 엄청 간단하게 먹은 것이다. 아타튀르크는 기본적으로 과식이 건강에 해롭다고 생각해서 평생을 (당시 기준으로 소탈한) 식습관을 고수했다.[34] 튀르키예어로 아이를 뜻하는 초주크(çocuk)의 테살로니키 사투리가 추주크(çucuk)인데 적당한 동남방언으로 옮겼다.[35] 그리스에서 스파나코피타(Σπανακόπιτα / Spanakópita)라고 불리는것으로 페타 치즈시금치로 만든 소를 채운것이다.[36] 이스탄불 신공항, 아타튀르크 국제공항, 사비하 괵첸 국제공항[37] 정치력으로 새로운 치료법을 모색하고 요양을 보내는 등 전쟁 말기인 1943년까지 버틴 사례도 있긴 하다.# 황금 옥좌[스포일러] 영화의 마지막에 떨어져 죽은줄 알았던 어린 케말이 죽지 않고 정신을 잃었다 다시 깨어나서 밀밭을 달리며 노는 장면으로 끝난다. 그 노는 장면에서 아타튀르크의 튀르키예 공화국 건국 10주년 행사 연설 육성이 배경으로 깔려 있다.[39] 위대한 세기에서 바예지트 황자 역으로 출연했다.[40] 원역사와 달리 루마니아가 동맹국에 합류해 갈리폴리를 뚫을 이유가 떨어지긴했고 처칠은 러시아를 오래 살리고 오스트리아의 부담을 늘리기위해 이탈리아와 가까운 이스트리아 반도에 상륙작전을 개시했다.[41] 갈리폴리 상륙작전과 독립전쟁이 있는 원역사와 달리 위상이 떨어진 상황에서 편을 늘리고 명분확보를 위해 술탄과 손을 잡은것으로 보인다.[42] 케말 입장에선 기껏 유지한 국가가 대공황으로 무너지기 일보직전인데 합스부르크가 자금지원까지 해주니 합스부르크의 경제 회복 정책을 지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혼자 있는 집무실에서 빈을 향해 절을 하며 주인공에게 감사를 표했다.[43] 이건 원래 로마속담이다[44] 이 말에 대해선 튀르키예 독립 전쟁 당시 그리스군을 지칭한다는 설과, 제1차 세계 대전 종결후 이스탄불로 귀환한 아타튀르크가 보스포루스 해협에 떠있는 협상국 군함들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는 설 두 가지가 있다. 아타튀르크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Veda와 그 시기를 배경으로한 액션영화 Son Osmanlı는 두 번째 설을 따랐다.[45] 아타튀르크의 영묘가 건설되기 이전까지 임시로 보관되던 현 앙카라 민족학 박물관에서 아타튀르크의 관이 놓여있던 자리에서 확인할 수 있다.[46] 로브 형태의 아랍 전통의상으로 튀르키예에서는 이슬람 성직자들이 착용하는 옷.[47] 이오시프 스탈린도 이와 똑같이 말했다. 그리고 아타튀르크도 스탈린도 독재자로 평가받고 있다. 물론 아타튀르크의 정치적 억압 강도는 스탈린에 비해서 훨씬 유화적인 편이었지만 어쨌든 야당을 해산시키거나 반대파에 대한 억압은 없지는 않았기 때문이다.[48] 압뒬하미트 2세의 반동개혁과 관련된 표현이다. 당시에는 민족들을 별칭으로 불렀는데, 압뒬하미트 2세는 범이슬람주의로 심지어 오스만 제국의 공용어를 아랍어로 바꾸려 했다. 그동안 천시했던 아랍인들에 대해 "우위의 민족(Kavm-i Necip)이란 호칭을 붙여주면서 우대했던 것도 그와 관련된 정책이다. 한편 아르메니아인은 '충성스러운 민족'(Millet-i Sadıka)라고 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