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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02 05:09:08

무함마드 알리 진나

파일:Flag_of_the_Governor-General_of_Pakistan_(1952–1956).svg
파키스탄 총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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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직위: 파키스탄 자치령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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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 초대 총독
무함마드 알리 진나
محمد علی جناح | Muhammad Ali Jinnah
파일:external/sai.columbia.edu/Quaid-E-Azam_Muhammad_Ali_Jinnah_Founder_of_Pakistan.jpg
<colbgcolor=#00247D><colcolor=#F7E017> 본명 마호메드 알리 진나바이
(મહમદ અલી ઝીણાભાઇ / Mahomedali Jinnahbhai)
출생 1876년 12월 25일
인도 제국 카라치
(現 파키스탄 신드 주 카라치)
사망 1948년 9월 11일 (향년 71세)
파키스탄 자치령 카라치
(現 파키스탄 신드 주 카라치)
재임기간 파키스탄 총독
1947년 8월 14일 ~ 1948년 9월 11일
직업 법조인, 정치인, 독립운동가
학력 링컨스 인(Lincoln's Inn)[1]
(변호사 자격 취득) (1895년)
소속 정당 (1906년 – 1920년)
[2] (AIML) (1913년 – 1947년)
서명 파일:무함마드 알리 진나 서명.svg

1. 개요2. 생애3. 기타4. 대중매체에서

1. 개요

파키스탄 자치령의 초대 총독. 오늘날 파키스탄에선 국부격 건국의 아버지로 존경받는다. 인도·파키스탄의 독립운동가이자 당시 인도내 많은 이슬람교도들의 지도자격 인사였다.

초기엔 인도국민회의의 주요 구성원으로도 활동하며 이슬람교도와 힌두교도들의 화합을 주장했지만, 점점 힌두주의가 강해지던 인도에서 이슬람교도와 힌두교도가 평화롭게 공존할 수 없다고 생각해[3], 이후엔 인도국민회의를 탈당하고 별개의 나라를 세우자는 2국가 이론을 전개했다.[4] 실제 1930년대부터는 이슬람 분리독립운동을 추진했는데, 영국 정부와 총독부를 상대로 인도 총독부와는 별도의 이슬람 거주지 총독부 설치 및 독립을 설득했다.

결국 1947년파키스탄, 발루치스탄동벵골 지역에 따로 파키스탄 자치령이 설치되었고, 인도와는 별도로 독립을 약속받게 되었다. 허나 파키스탄영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1956년)하는 것을 보진 못하고 1948년에 사망하고 만다. 다만 파키스탄이 1947년 실권을 쥔 별도의 자치령 지정을 받아 실질적인 독립은 이룬 상태였다.[5]

2. 생애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Majinnah6.jpg
청년 변호사 시절의 진나

영국령 인도 제국 카라치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유한 이슬람 가정에서 태어나 인도 민족주의자가 되어 영국으로 유학한 뒤,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고 귀국하여 무료 변론을 했다.

처음에는 인도민족주의이슬람의 이익이 상충되지 않는다고 믿으며, 인도 국민회의 활동과 인도의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그러나 진나는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운동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여담으로 인도 공화국 초대 총리가 되는 자와할랄 네루 역시 비폭력 운동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라 적극적인 파업 투쟁을 벌였지만, 스승격인 간디를 한평생 존경했다.

진나는 힌두교 중심적인 인도 국민회의에 반발하여 결국 1930년대부터 영국 총독부와 별도로 교섭해, 이슬람 신자가 많이 살고 있었던 인도 서북부와 동북부 지역을 힌두계 인도와는 별개의 독립국가로 독립시켜줄 것 또는 인도 총독부와는 별도의 총독부를 설치하고 자치권을 준 뒤 독립시켜달라고 호소했다.

1920년대에 진나는 인도 국민회의를 탈퇴했다. 그러나 193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이슬람교 - 힌두교 사이의 타협이 가능하리라 믿고, 중재하려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20년 동안의 화합 노력이 힌두 중심적인 인도국민회의에 의해 끝내 좌절된 것이다. 1930년대에 가면 진나는 별도의 이슬람 민족운동을 지도하게 되었다.자료 이때문에 마하트마 간디자와할랄 네루와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고 말았다.

진나의 설득은 받아들여져 1947년 영국은 파키스탄 지역과 동벵골(현 방글라데시) 지역 등 이슬람 인도인들이 많이 사는 곳에 별도의 파키스탄 자치령을 설치하고, 인도와는 별도로 독립을 시켜준다는 약속을 했다.

진나는 이슬람 지역 총독부 설치 및 분리독립을 주장하면서 영국의 인도 총독들도 설득했다. 1947년 영국은 파키스탄, 발루치스탄과 아프간-인도의 국경지대, 동벵골을 포괄한 지역에 새로 파키스탄 자치령을 새로 세웠다. 그리고 군사권과 외교권까지 포함된 자치권을 허용하면서 총리와 의회 설치까지 허용했다. 영국의 자치령은 1931년의 웨스트민스터 헌장에 따라 내정에 대한 권한뿐만 아니라 군사권과 외교권도 가지고 있었다.

파키스탄 자치령의 총리[6]는 파키스탄 자치령의 초대 총독으로 진나를 추천했고, 그는 1947년 8월 14일 파키스탄 자치령의 초대 총독으로 부임했다. 이로서 파키스탄은 인도와의 별도의 자치령 설치와 동시에 인도와는 다른 나라로 독립하는 것이 확정되었다. 이에 간디네루 등은 크게 반발했다. 다만 현실적으로 보면 누가 와도 분리를 막긴 쉽지 않긴 했다.

진나는 인도 각지 및 인도차이나 주변 지역, 히말라야 등에 흩어져 있었던 무슬림들을 끌어모아 정착을 지원했고, 서구식 민주주의 제도를 도입했다. 오랫동안 결핵폐렴을 앓아왔던 그는 총독으로 재직 중이었던 1948년 9월 11일 카라치에서 71세로 사망했다.

파일:파키스탄 진나.jpg
카라치에 위치한 모하마드 진나의 영묘(마자르 에 카이드)

진나는 이슬람 인도인들의 국가 건설론을 주장했다. 그래서 영국령 인도 총독부와는 별도의 이슬람 거주지 총독부 설치를 영국 정부에 청원하여 파키스탄 총독부를 설치하도록 했는데 이는 파키스탄이 인도와는 별도로 독립하는 근거가 되었다. 진나는 생전에 파키스탄의 완전한 독립을 보지는 못했지만 파키스탄에서는 그를 국부 혹은 건국의 아버지로 칭송한다. 진나의 생일은 파키스탄의 공휴일 중 하나로 지정되어 있는데, 날짜가 공교롭게도 12월 25일, 즉 성탄절과 같다. 이 때문에 이슬람권이라 크리스마스를 공휴일로 기념하지 않는 파키스탄인들도 정작 12월 25일 당일에는 쉬게 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3. 기타

4. 대중매체에서



[1] 런던에 소재한 4대 법학원 중 하나.
위키피디아 참고
[2] 인도 연합 무슬림연맹(IUML)의 전신[3] 그래서인지 파키스탄이 분리되고 간디까지 힌두교 극단주의자들에게 암살된 이후부터 네루 총리는 이 사태의 원흉격인 힌두 극단주의를 인도 주류 정치에서 배제시키려고 노력한다.[4] 다만 따로 독립한 이후에도 인도와 파키스탄은 수차례 전쟁을 치르며 현재도 평화가 제대로 자리잡지 못하고 있는게 함정. 물론 독립을 안 했어도 내부 갈등이나 내전으로 인해 평화가 자리잡지 못했을 수 있지만, 이후에도 비교적 민주주의가 유지된 인도와 달리 파키스탄은 1958년부터 수십년간 군사정권과 민간정권이 이어지는 혼란한 시절도 겪기 때문에 묘하긴 하다. 진나가 오래 살았으면 어찌 됐을지 모를 일이지만 그는 1948년 사망한다.[5] 자치령에서 영국 국왕이나 파키스탄 총독은 실질적인 권한이 없었으며, 현지의 직선제 의회에서 선출된 총리가 내정은 물론 군사, 외교 부문에서 실질적인 권한을 수행했다. 게다가 파키스탄 자치령 초대 총독도 진나였다.[6] 형식상 영국 국왕이 임명한다. 아마도 자치령 초대 총리 리아콰트 알리 칸이 지명했거나 직전 총리가 지명한 모양.[7] 이란의 사례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8] 흔히 이집트시리아, 리비아처럼 아랍 사회주의를 자처하거나, 북예멘처럼 근본주의적인 왕정을 무너뜨리며 나섰던 아랍의 세속적 군부정권과는 반대 성향을 띈다.[9] 이 시위를 기념하는 방글라데시의 주요 국가 기념일 중 하나이자 유네스코에서 세계 모어의 날로 기념하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