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닌텐도/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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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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닌텐도의 역사에 대해 서술하는 문서.

2. 역사

2.1. 1889년 ~ 1970년대

파일:oldnintendo.jpg

메이지 22년인 1889년 9월 23일, 야마우치 후사지로(山内房治郎, 1859~1940)가 운영하는 화투를 제조하는 개인 상점 '닌텐도 곳파이'(任天堂骨牌; 임천당 골패)로 창업했다.

이 시기 로고는 '동그라미 안에 福자'였다. 닌텐도 곳파이에서는 화투를 만들었을 때에 손맛이 들어 치는 재미가 들게 끔 바닥에 내려칠 때 경쾌한 소리가 나도록 화투 앞, 뒷면 사이에 석회 가루를 넣었다.[2] 열심히 화투를 치다보면 석회가루가 터져서 화투를 다시 구매해야 했기에 닌텐도에서는 누구나 손쉽게 화투를 사도록 담배 가게를 유통점으로 개척했다. 이 화투는 현재도 판매하고 있고, 이 당시에 사용하던 가게는 현재는 연구소로 쓰고 있다고 한다.

닌텐도(任天堂)라는 이름이 실제로 어떤 뜻으로 작명됐는지 직접 언급은 없다. '일이 성공하고 실패함은 '하늘'에 '맡기고()'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한다.'라는 사훈에서 닌텐도 사명이 지어졌다는 말이 '닌텐도 이야기' 책에서 나오나 막상 야마우치 히로시는 "증조부가 붙인 이름이지, 사훈은 아니다. 그런 사훈이 있으면 게임 회사 같은 건 안 한다."라는 발언을 했다고 한다.

1929년에 데릴 사위 야마우치 세키료(山内積良)가 2대 사장이 되었으며 이 시기 조선 경성에도 지사를 세워 일제 패망 전까지 운영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닌텐도도 아닌 무려 조선닌텐도 1947년에는 '주식회사 마루후쿠'로 바꾸었다.[3]

그러다가 1949년에 세키료가 죽자 손자인 야마우치 히로시가 뒤를 이어 마루후쿠 3대 사장이 됐다. 원래는 데릴사위인 그 아버지가 이어야 하지만 실종[4]하여 같은 해 와세다 대학 법학부를 중퇴하고 22세 나이에 뒤를 이었다.

1950년에는 '닌텐도카루타(주)'로, 1951년에는 '닌텐도곳파이(주)'(任天堂骨牌 株式会社[5])로 각각 사명을 바꾼 뒤 세계 최초로 플라스틱 재질 트럼프 카드를 생산해(1953년) 흥했고, 디즈니 캐릭터들을 인쇄한 디즈니 트럼프(1959년)로 다시 흥하여 일본 최대 카드 생산 회사가 된 동시에 세계 최대 카드 생산 회사를 목표로 삼았다.[6]

그러나 야마우치가 견학을 간 세계 최대 카드 제조 회사인 미국 USPC(마술을 하는 사람들이 카드 마술용으로 자주 쓰는 바이시클 카드를 만드는 회사로 유명하다.)가 생각보다 초라한 조그만한 회사임에 충격을 먹었고 카드를 판매하기만으로는 모자라다고 느낀 후 택시, 러브 호텔, 유모차, 디즈니 캐릭터 후리카케, 인스턴트 라이스 등 이것저것 사업을 벌이게 된다.

닌텐도가 실패한 여러가지 사업 아이템 인스턴트 라이스는 오늘날 '햇반'과 달리 컵 야키소바처럼 온수를 부었다 따라내는 방식이다. 그 당시로서는 매우 기발한 아이디어였지만 정작 중요한 맛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실패. 야마우치도 시식해보고 “먹을 게 못된다.”라고 혹평했다. 이 모든 사업이 전부 실패해서 닌텐도는 도산 위기에 처했다.

결국 야마우치 사장은 1963년에 회사명을 마지막으로 현재 이름인 '주식회사 닌텐도'로 바꾼 뒤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느낌에서 아이들 놀이 기구를 만들어 보자."라고 결심, 아날로그 장난감들로 원펀치 투펀치 잽을 날리며 몸을 만들기 시작했다.

완구 사업 연간에는 당시 공장 설비 유지 보수 엔지니어였던 요코이 군페이를 중심으로 1966년에 만능 팔인 '울트라 핸드'를 개발했고 야구공을 칠 수 있도록 던져주는 야구공 피칭 머신인 '울트라 머신', 잠수함 잠망경을 닮은 '울트라 스코프' 등 울트라~ 시리즈 일련를 발표했다. 울트라~ 시리즈가 히트하자 닌텐도는 태양전지와 반도체 기업이던 일본 샤프 우에무라 마사유키를 영입해 장난감용 레이저 광선총을 개발했다. 특히 닌텐도에서는 기발하게도 오일 쇼크로 문 닫은 볼링장들을 인수해 광선총용 실내 사격장을 만들어 인기를 끌었다.

한편 장난감 사업 일환으로 1968년에 N&B Block이라는 레고 짝퉁을 만든 흑역사도 있다. 심지어 판촉광고에 레고 블럭과 호환된다는 간 큰 홍보 문구를 내세웠다가 결국 레고사로부터 소송을 당했으나 승소했다고 한다.[7] 하지만 1970년대에 판매를 중단했다고 한다. 닌텐도 위키아의 관련문서

2.2. 1977년 ~ 1983년

그래도 이로는 아직 많이 부족했고 업계에서 버티고 있는 대기업들을 이길 수단을 찾던 닌텐도에서 결정한 바는 당시로서는 첨단 산업이었던 전자 완구, 즉 비디오 게임이었다.

전자 게임기 사업으로 방향을 전환한 닌텐도는 1977년요코이 군페이를 중심으로 개발 정보부를 신설했다. 요코이 군페이샤프와 협력하여 닌텐도 최초 휴대용 게임기인 '게임 & 워치'를 출시해 일본 내 흥행에 성공했고 '레이더 스코프'라는 제목인 아케이드 게임을 만들어 역시 인기를 끌었다.

이 때 오일 쇼크로 기업들이 신규 채용을 꺼리던 시기에 가나자와미술공예대학에서 산업 디자인을 전공하고 막 졸업한 젊은 디자이너가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과 친구였던 아버지빨로 낙하산으로 꽂혔다. 선배들은 그를 곱게 보지 못했지만 그는 훗날 지금 닌텐도를 만든 바로 '미야모토 시게루'였다. 그래도 시게루가 고학력자이기도 했고 본인이 열정을 가지고 포트폴리오와 프레젠테이션을 하여 본인 능력을 보여줬기에 히로시도 어느정도 납득은 했다. 아버지 인맥 빨로 꽂힌 낙하산 인사였지만 게임 개발 역량에서는 천재적이라 흔히 '낙하산 인사가 공수부대' 라는 농담이 돌곤 한다.

1980년 닌텐도는 해외 사업에도 자신감을 갖고 야마우치 사장 사위인 아라카와 미노루를 초대 사장으로 첫 해외 지사이자 북미 지사인 닌텐도 오브 아메리카를 설립, 미국에 레이더 스코프 게임기를 수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인기를 끄는데 완전히 실패하여 악성 재고만 쌓여갔고 창고 비용조차 감당하지 못해서 설립한 지 몇 달도 안돼 야반도주까지 계획할 정도로 나락에 빠졌다. 아라카와는 일본 본사에 SOS를 보냈고 이를 접수한 미야모토 시게루는 당시 개발이 끝났으나 라이센스 획득 문제로 아직 출시하지 못하고 있던 뽀빠이 아케이드를 약간 수정한 게임을 긴급히 닌텐도 오브 아메리카로 보냈으니 이 게임이 바로 그 유명한 '동키콩'이다.

아라카와와 그 직원들은 밤새도록 레이더 스코프 기판을 동키콩 기판으로 교체하고 새로운 스티커를 붙이는 작업을 벌였다고 한다. 그 후 시험 삼아 근처 바에 설치했는데 엄청난 인기를 끌어 미국 전역에서 주문이 폭주했고 재고를 모조리 털어냄은 물론 몇 달만에 6만대를 팔아치우며 대박을 쳤다. 동키콩이 활약하여 단 2년만에 닌텐도 오브 아메리카는 창고 비용을 걱정하던 처지에서 연 1억 달러 이상 매출을 기록하며 HQ 건물 수백 평을 보유한 중견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 때 닌텐도 오브 아메리카와 법무 및 재무 담당으로 계약했던 변호사 하워드 링컨은 닌텐도로부터 자산을 보호해 달라는 전화를 받았는데 처음에는 마침내 그 듣보잡 회사가 망해서 파산 절차를 의뢰하려고 전화했나 생각했다고 한다. 그는 킹콩 저작권 재판에서 승소하는데 도움을 준 후 닌텐도 오브 아메리카 부사장으로 선임되었고 1994년에는 아라카와를 이어 2대 사장에 취임하였다.

이 과정에서 닌텐도 오브 아메리카 본사는 계속 월세를 미납하고 있었는데 이에 분노한 건물주 마리오 시갈리가 찾아와서 항의했다. 그런데 닌텐도 직원들은 자신들을 갈구는 이 건물주 아재에게서 엄청난 아이디어를 하나 떠올린다. 원래 아무런 이름없이 점프맨이라고만 불리던 동키콩 주인공 명칭을 외모가 닮았던 건물주 이름을 따서 '마리오'라고 지어버렸다. (마리오라는 이름이 공식으로 등장하는 시기는 동키콩 아케이드 후속작인 동키콩 Jr이다.) 훗날 마리오는 닌텐도에서 개발하는 게임 여기저기 투입된다. 처음에는 자신을 갈구는 건물주가 싫어서 만들었지만 점차 이 '마리오'라는 캐릭터에게 정이 들었고 결국 그를 주인공으로 하는 슈퍼 마리오 시리즈라는 게임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그 후 1983년 미국 메이저 영화 배급사 유니버설 픽처스동키콩킹콩 저작권을 침해했다며 소송을 걸고는 오히려 닌텐도에게 180만 달러(인플레이션 감안 현재 가치 4677만 달러)를 갖다 바치고 자폭하면서 닌텐도 사명이 미국 전역은 물론이고 세계에 알려지며 국제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됐다.

참고로 위 유니버셜 소송은 당시 닌텐도, 유니버셜 스튜디오 두 회사 모두 사운을 걸고 항소에 항소를 거듭하며 갈데까지 간 치열한 소송전이었다. 이 법정 전쟁을 승리로 이끈 변호사 '존 커비'에게 닌텐도는 변호사 비용 외에도 보너스로 요트를 선물했는데 이 요트 이름이 바로 동키콩이었다. 닌텐도는 또한 존 커비에게 “자기 소유 선박에 동키콩이라는 이름을 쓸 수 있는 권리”를 명시적으로 부여했다. 즉 존 커비는 자신이 소유한 어떤 배에든 동키콩이란 이름을 붙일 권리가 있다. 또 커비라는 이름은 또 다른 닌텐도 캐릭터(별의 커비)에게 붙여졌다.
미국 법정에서 일본 기업이 미국 기업에게 이처럼 대승리한 일은 결코 쉽거나 흔한 일이 아니었기에(더구나 당시는 미국인들이 일본 기업을 매우 경계하던 시절이다), 닌텐도가 존 커비에게 고마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최종 판결문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유니버설 스튜디오킹콩이 자사 상표가 아님에도 킹콩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으며, 이는 닌텐도의 권리를 함부로 침해한 것이다.[8]
(2) 유니버설은 닌텐도를 협박해 로열티를 유니버설에게 지불하거나 동키콩 제품의 시판을 중지하라고 협박했다.
(3) 유니버설은 소송 과정에서 자신에게 유리한지에 따라 킹콩퍼블릭 도메인이라고 주장하다가 퍼블릭 도메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등 수시로 주장을 번복했다.
판결: 유니버설이 소송 과정에서 보인 이러한 행태는 소송 목적이 진실 규명과 정의 추구가 아니라 사법 시스템을 악용해 사리를 챙기려는 목적임을 명백히 보여주었다.

2.3. 1983년 ~ 1990년

그 해 말, 아타리 쇼크에 의해 북미 게임산업계 전체가 한 순간에 증발해 버릴 무렵, 닌텐도는 일본에서 게임에 필요한 부분 밖의 기능은 모두 없애서 성능을 극대화시키고 하드웨어보다 소프트웨어를 중시한, 그 유명한 패밀리컴퓨터를 발매했다. 이때 닌텐도는 당시에 PC 및 아케이드 게임 개발을 하던 몇몇 일본 회사들을 세컨드 파티로 영입했다.

그리고 1985년, 북미/유럽판 패미컴인 닌텐도 엔터테인먼트 시스템인 'NES'를 출시함으로써 닌텐도는 아타리 쇼크가 만든 폐허에서 솟아올라 세계 비디오 게임 산업 왕좌에 오르게 되었다.

(원래 닌텐도는 아타리로 패미컴을 미국 시장에 유통하려 했고 이미 협상도 1983년 5월 경 완료되어 사인만 남겨두고 있었다. 그러나 몇 달 후 발생한 비디오 게임 시장 붕괴 여파로 아타리와 그 모회사인 워너 브라더스도 손 쓸 수 없는 경영 위기에 빠지면서 계약금을 지불할 수 없게 되자 닌텐도가 단독으로 나서게 되었던 터였다.#)

이 때 닌텐도는 직접 먼저 게임을 테스트해서 품질을 일정 이상 만족하는 게임만 Seal of Quality 마크를 붙이고 닌텐도 라이선스를 주는 방식(서드 파티 제도)을 도입하는 등 게임 질 전체를 보장하여 저질 게임으로 붕괴된 상황에 몰린 비디오 게임 산업과 가정용 게임기 시장을 다시 살려내었다. 즉, 아타리 쇼크로 거의 사장된 가정용 게임기 업계는 충분한 관리만 따르면 명품 엔터테인먼트 산업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선례를 보였다. 덕분에 서구권에서는 닌텐도를 비디오 게임 산업을 살려낸 구세주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패미컴 시절에는 닌텐도라는 명사가 게임기를 가리키는 대명사로 쓰였다고 하니 그 당시 열기를 짐작할 수 있다. 이는 미국에서 MP3 플레이어를 브랜드 불문하고 'iPod'이라고 부르는 일이나 한국에서 빵 사이에 마시멜로를 넣고 초콜렛으로 코팅한 과자를 '초코파이'라고 부르는 일과 비슷한 현상이었다.
(일례로 바트 심슨노래에서 “우린 돈을 걸고 닌텐도를 했어.”(played Nintendo for cash)라는 말을 했으며 브루스 윌리스는 허드슨 호크라는 영화에서 좋아하는 여성에게 “나랑 닌텐도 할래요?”(play Nintendo with me?)라는 대사를 했다. 즉 대중 문화에서 '닌텐도'란 단어가 '게임'이란 뜻으로 쓰이던 시절이었다.)

1989년 닌텐도는 게임 & 워치를 만든 노하우를 활용해 요코이 군페이가 주도하여 개발된 '게임보이'를 출시해 휴대용 게임기 시장도 완벽하게 평정한다. 경쟁기종으로 아타리 링스, 세가 게임 기어가 있었으나 게임보이와 비교하면 태풍 앞 산들바람에 불과했다.

이 시기에 닌텐도는 테트리스 저작권 분쟁으로 유명 퍼즐 게임 테트리스 휴대용 게임기 라이센스를 획득하는데 성공했고 게임보이와 번들 판매함으로써 기존 게이머 외 많은 인구를 게임계로 끌어들였다. 심지어 미국 제41대 대통령 조지 H. W. 부시게임보이를 소유했다고 한다. 게임보이1995년까지 미국에서만 1,500만대가 넘게 팔리는 대흥행을 기록했으며 2003년 단종될 때까지 게임보이 컬러 등 시리즈를 포함해 누적 1억 1,800만대 이상 팔렸다.

여담으로 패미컴, 게임보이, 슈퍼 패미컴까지 연이어 히트한 1990년대 초반 닌텐도는 경상 이익만 이미 1천 억 엔을 넘는 회사였다. (1990년 9월 13일의 발표에 따르면 매출 4,400억엔, 경상 이익 1,270억엔) 당시 삼성, LG(당시 금성), 대우, 현대 등 한국 10대 그룹 경상 이익 총합을 다 합쳐도 닌텐도에 못 미쳤다고 한다.

2.4. 1990년 ~ 1995년

1988년, 세가에서 메가 드라이브/제네시스를 출시해 4세대 콘솔 시장 포문을 열자 닌텐도는 1990년, 뒤늦게 패미컴/NES 후속작 슈퍼 패미컴/SNES를 출시했다. 경쟁사보다 2년이나 늦은 출시였으나 슈퍼 패미컴은 훨씬 우월한 그래픽 기술과 함께 닌텐도와 주요 서드 파티 모두 크고 이름난 게임을 우후죽순으로 쏟아내면서 곧바로 메가 드라이브 판매량을 제쳤고 닌텐도는 계속해서 세계 비디오 게임 시장을 점유율을 지배했다.

특히 일본 양대 RPG(드래곤 퀘스트 시리즈,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가 전부 닌텐도로 몰려서 일본 내 경쟁 플랫폼인 PC 엔진세가메가 드라이브는 슈퍼 패미컴을 상대할 수가 없었다.

다만 패미컴 시절과는 달리 서구권에서는 아케이드 게임의 이식에 충실했고 후반으로 갈수록 서양 게이머 입맛에 맞는 액션, 슈팅, 스포츠 장르가 많았던 메가 드라이브가 슈퍼 패미컴보다 높은 판매량을 기록했는데 그럼에도 메가 드라이브는 세가가 수지타산을 무시하고 기기를 적자로 판매하고 마캐팅에 지나치게 거액을 투입한 실책으로 만년 적자였던 반면 닌텐도 SNES가 거둔 수익은 남다르게 높았다.

1991년 미국 비디오 게임 시장에서만 점유율 85%를 기록하면서 절대 인라는 위치에 오른 닌텐도는 서드 파티들에게 철저한 기기 독점을 요구했고 게임 개발툴을 비싼 값에 팔아 먹었으며 NES/SNES 게임팩 제작을 독점하면서 개당으로 값비싼 라이센스료를 징수함도 모자라 각 타이틀 판매량을 제멋대로 예측해 팩 생산량을 조정하기까지 하고 개발에까지 개입해 놔라 대추놔라 하는 엄청난 갑질을 일삼았다. (대표 사례로 파이널 판타지 II에서는 교회가 너무 많이 나온다는 이유로 파이널 판타지 V는 아예 북미 유저 취향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퇴짜를 놓았다. 스퀘어는 그 후 미련없이 소니에게 붙어 기획 단계에서 닌텐도 64로 출시할 예정이었던 파이널 판타지 VII을 플레이스테이션 독점으로 개발해 출시한다.) 닌텐도로서는 저질 게임들이 난립함을 막아 제2 아타리 쇼크를 방지함이라는 나름대로 변명할 여지가 있으나 서드 파티 개발사들은 닌텐도가 벌인 지나친 통제 정책에 점차 지쳐가고 있었다.

닌텐도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소매상에게까지 갑질을 하며 게임 카트리지 시장 가격도 통제하는 한편 무분별한 협박과 공급 차단으로 불공평한 지분 계약을 맺어 유통망까지 뒤흔들었고 (이 때 당시 세계 최대 장난감 유통회사인 토이저러스 이익 중 25%가 닌텐도 게임에서 나왔다고 한다.) 종국엔 미국 반독점법으로 고소당해 벌금을 물기도 했다. #

1991년 미국 공영 방송 PBS닌텐도 비디오 게임 시장 독점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도 했으며 닌텐도 오브 아메리카 부사장이었던 하워드 링컨이 여기서 한 인터뷰에서 "우리는 (게임 질을 높이는) 도박을 했고 이제 그 과실을 수확할 뿐이다. 이가 바로 자본주의."라는 오만한 발언을 대놓고 하기도 했다. 그만큼 당시 닌텐도에게 대적할만한 적수가 아무도 없었던 뜻이다.

1990년대 들어 소닉 더 헤지혹이 대성공하여 닌텐도에 이어 콘솔 비디오 게임 시장에서 강력한 2인자 반열에 오른 세가가 게임팩보다 훨씬 많은 용량을 저장하고 프로세스할 수 있었던 컴팩트 디스크 즉, CD를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메가 CD를 출시하자 닌텐도 역시 같은 시기 발매된 SNES에 쓸 CD-ROM 주변 기기를 개발을 결정하고 CD 개발사 겸 메가 CD 제작에도 관여한 소니에게 SNES용 CD-ROM 기술 라이센스를 완전히 보장하기로 하고 계약을 맺었다. 닌텐도는 이 프로젝트에 'PlayStation'이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러나 닌텐도는 1년도 되지 않아 소니와 한 계약을 일방으로 파기해버렸고(이유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닌텐도 오브 아메리카 사장 아라카와 미노루가 북미에서 CD-ROM이 엄청나게 성장함을 보고는 소니에게 비디오 게임기용 CD-ROM 라이센스를 보장할 경우 게임용 매체 제작 주도권을 잃게 되리라 주장해서라는 이야기가 있다.) 또 다른 CD 개발사인 필립스에게 이 프로젝트를 넘겨 버린다. 그때까지 소니가 SNES용 CD-ROM 개발 프로젝트에 쏟아부은 자사 자금만 15억 엔(약 160억원)에 달하는 거금이었기에 그야말로 엄청난 뒤통수를 맞은 셈이었다. (소니는 처음에는 당황해서 이 프로젝트를 어떻게든 살리려고 세가에게 차세대 게임기 공동개발을 제안하였으나, 세가는 이미 새턴이라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거절당했다. 결국 독자적인 게임기 개발을 검토하기 시작했는데, 임원 회의에서 대다수의 중역들이 가정용 게임기 시장 단독진출은 불확실하다는 부정적인 판단을 내리고 프로젝트를 중단할 것을 건의했으나 게임기용 CD-ROM 개발을 책임지고 있던 쿠타라기 켄이 여기에 나타나 오가 노리오 당시 소니 그룹 회장에게 '닌텐도가 회장님 서명이 담긴 계약서를 휴짓조각으로 만드는 모욕을 주었는데 이런 대접을 받고도 복수하지 않으면 앞으로 다른 회사가 우릴 어떻게 생각하겠냐'며 복수혈전을 주장, 오가 노리오 회장은 이 발언을 되새김질 하고는 분노가 폭발해 바로 닌텐도를 깨부술 독자 게임기를 만들기를 지시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에 따라 소니는 독자 노선으로 방향을 전환, 게임 부문을 전담할 자회사인 소니 컴퓨터 엔터테인먼트를 설립했다. 이미 당대 세계 최고 문어발 전자 기업으로서 강력한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던 소니는 당시로서는 최신 기술을 총동원해 세계 최초로 실시간 3D 렌더링이 가능한 초고사양 게임기를 만들어냈고 그렇게 탄생한 게임기가 바로 1994년 출시된 플레이스테이션이었다. 소니플레이스테이션 개발 환경을 C/C++로 타사보다 쉽게 만들었으며 우수한 자금력으로 여러 실력있는 게임 개발사들을 발굴해 적극 인수 합병했고 서드 파티에 무료로 개발툴을 지원하는 한편 보다 저렴한 라이센스 비용을 보장하면서 게임 개발에 있어서는 게임 제작사들을 완전히 믿고 방임하는 태도를 취했다.

닌텐도가 벌인 압제에 지친 서드 파티들이 이렇게 관대한 정책을 제시한 소니로 적극 이전하기 시작했고 아직 2인자였던 세가 역시 세가 새턴플레이스테이션과 같은 시기에 발매시켜 경쟁을 시작하자 뒤늦게 위기를 느낀 닌텐도는 1995년에 아직 미완성 상태였던 3D 글래스 게임기 버추얼 보이를 개발 담당자인 요코이 군페이가 반대함에도 묵살하고 부랴부랴 출시했으나 대차게 실패한다.

닌텐도가 벌인 오만함이 굴린 눈덩이는 이제 괴물이 되어 나타났고 그동안 해온 실책이 불러온 대가를 크게 치르게 된다.

2.5. 1996년 ~ 2005년

1996년 닌텐도는 게임기로서는 세계 최초로 64비트 CPU가 탑재되고 카탈로그 스펙으로는 플레이스테이션을 압도하는 성능을 가진 닌텐도 64를 출시했으나 여전히 라이센스 욕심에 눈이 멀어 자신이 제작을 독점하고 있던 카트리지 매체를 버리지 못했고 그 결과 CD-ROM에는 담기가 가능했던 고화질 이미지를 사용하지 못하게 되어 성능 이점을 상실한데다 당시 일본인 10명 중 1명은 가지고 있었을 정도로 거대한 기반을 갖추고 있었던 슈퍼 패미컴 타이틀 개발도 완전히 중단시켜버리는 삽질을 저질렀다. 이에 플스와 닌텐도 사이에서 눈치를 보던 수많은 서드 파티 회사들은 더 이상 고민 없이 닌텐도를 버린다.

게다가 소니가 2년 일찍 출시한 플레이스테이션은 파격인 가격, 혁신 마케팅, 닌텐도에게 등을 돌린 서드 파티들이 한 대활약에 힘입어 세계 시장을 단숨에 장악해버린지 오래였다.

캡콤남코소니로 옮겨서 각각 바이오하자드, 철권 등 각종 평가가 좋았던 신작들을 플스 독점으로 출시하면서 닌텐도를 압박했다. 특히 스퀘어소니로 옮겨서 파이널 판타지 7을 플스 독점으로 낸 일이 가장 치명타였다. 나중에 스퀘어와 합쳐지는 에닉스 역시 비슷한 시기 신작을 PS로 많이 발표하기 시작하고 특히 드래곤 퀘스트 7을 플스 독점으로 출시한다는 소식을 발표하면서 닌텐도에게 더욱 위기를 안겨준다. 거기에 코나미에서는 플스 독점으로 출시한 메탈기어 솔리드가 예상 외로 대흥행을 기록하기도 하면서 플레이스테이션은 1위 자리를 더 공고히 지킨다.

다른 경쟁자인 세가 새턴이 듀얼 프로세서라는 생소한 구조로 개발 환경이 어려움과 더불어 세가 특유 각종 삽질로 스스로 자멸해버린 덕택에 닌텐도 64는 2위라도 지킬 수 있었으나 수명 주기 동안 플레이스테이션은 1억 200만대 이상 팔린 데에 비해 닌텐도 64는 3,200만대에 그쳤다. 플레이스테이션 실적과 비교했을 때 격차가 너무도 벌어진 2위였고 닌텐도는 더 이상 자신이 게임 업계 1인자가 아님을 실감하고 큰 충격을 받아야 했다.

6번째 콘솔세대에 들어서 이미 재정으로 불황 상태에 놓였던 세가1998년 11월에 야심차게 드림캐스트를 출시했지만 완전히 실패했고 판매 부진으로 누적되는 막대한 적자를 극복하지 못하면서 2001년 1월에 결국 게임기 시장에서 철수를 선언한 후 일개 서드 파티로 전락했다.

한편 닌텐도는 닌텐도 64 시절 여러 문제점을 반성하고 개선하여 2001년 9월에 게임큐브를 발매했지만 현재까지도 기록이 깨지지 않는 역사상 최고 판매량 콘솔 게임기 '플레이스테이션 2'에게 결정타를 제대로 맞아 거치형 시장은 간신히 수지타산을 맞추는 수준까지 몰락하고 만다.

2001년 11월에는 닌텐도 인수 합병 및 미야모토 시게루 헤드헌팅을 시도하다가 물을 먹은 마이크로소프트가 단독으로 게임기 시장에 뛰어들었고 Xbox를 발표하였다. 엑스박스는 일본 시장에서는 참패했지만 본고장인 북미에서는 선전하면서 종합 판매량 2위를 차지해 게임큐브는 3위로 밀리게 된다. 수명 주기 동안 플레이스테이션 2는 1억 5,768만대 이상 팔렸고, 엑스박스는 2,400만대 이상 팔렸으나 게임큐브는 총 2,175만대에 그쳤다.

닌텐도는 닌텐도 64에 이어 게임큐브마저 다시 한 번 더 소니에게 크게 패함도 충격이었지만 게임기 업계의 완전 신인이었던 마이크로소프트에게 까지 패함은 더욱 굴욕이었다. 거기에 게임큐브는 판매 부진으로 불량 재고가 쌓이면서 2003년 9월부터 9개월동안 재고 소진하려고 생산을 중지하게 되는 상황까지 처하고 만다.

하지만 야마우치 사장이 한 "오락 산업은 언제 불황이 될지 모르고 언제 호황이 될지 모른다."라는 말 덕분인지 몰라도 전성기 시절에 모아놓은 자본으로 적어도 회사가 기울어지진 않았으며 닌텐도 64로 나온 슈퍼 마리오 64(1996)와 마리오 카트 64(1996), 스타폭스 64(1997), 골든아이(1997), 반조-카주이(1998), 젤다의 전설 시간의 오카리나(1998), 대난투 스매시브라더스(1999), 동키콩 64(1999), 게임큐브로 나온 대난투 스매시브라더스 DX(2001), 메트로이드 프라임(2002)은 걸작 반열에 올라 후에 나올 3D 게임 기본 토대가 되어 여전히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다만이 시기부터 CD 기반 3D 서드 파티 게임이 주류가 되어있었고 서드 파티들을 모조리 플레이스테이션 진영에 빼앗긴 닌텐도는 자사 발매 게임들은 자사 게임기로만 할 수 있다는 메리트로 게임기를 홍보할 수 밖에 없었다. 닌텐도 64 이후 닌텐도 가정용 콘솔 게임 소프트 중에서 대략 8할 이상이 닌텐도가 개발 및 제작에 참여한 게임임을 보아도 당시 닌텐도가 겪은 암흑기는 그 영향력이 컸다.

휴대용 게임기 산업에서는 게임보이 이후로도 이어서 완벽한 패권자로 군림했다. 1989년도에 나오자마자 빅 히트를 친 게임보이1996년까지 전세계 4,000만대를 팔아치우고 있었다. 같은 해 게임보이 수명이 다 되어간다고 생각되었을 무렵 닌텐도는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이 지원하여 세컨드 파티 게임 프리크가 개발하여 게임, 애니메이션, 만화, 장난감 등 거의 모든 엔터테인먼트 방면에서 전세계에서 신화에 가까운 흥행을 기록한 '포켓몬스터'를 발매, 휴대용 시장을 다시 한 번 한 거대한 시장으로 만들어내었으며 포켓몬스터는 이후 닌텐도에게 마리오, 젤다 만큼이나 확고한 돈줄로 자리매김했다.

휴대용 시장에서 게임보이 경쟁 기종들이 하나같이 경쟁 기종으로서 파급력이 떨어지는 편이었다 보니 확실히 휴대용 게임기 시장에서는 1990년대 끝까지 닌텐도가 독보였다. 게임보이 이후에도 '게임보이 컬러', '게임보이 어드밴스'로 휴대용 시장에서는 완벽한 1인자로 군림한다.

하지만 휴대용 시장 자체가 거치형 시장보다 아직 틈새 시장에 불과한 시점이었는지라 회사 전체의ㅣ 수입은 전성기 때에 한참 못 미치는 수준으로 떨어져 있었고 그나마인 수입도 매해 떨어지고 있었다. 이 상황은 NDS 발매 전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2.6. 2005년 ~ 2010년

이 시기는 한국닌텐도 1차 전성기기도 하다. 2004년 12월 연말 소니는 PS2 빅히트를 발판으로 당시로서는 휴대 기기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성능과 각종 멀티 미디어 기능을 갖춘 플레이스테이션 포터블(이하 PSP)을 출시해 닌텐도 앞마당인 휴대용 게임기 시장도 장악하려 하였다.

닌텐도는 이 대답으로 PSP와는 완전히 대척점에 위치한 '닌텐도 DS'(이하 NDS)를 같은 달 출시했다. NDS는 야마우치 히로시 전 사장 입김이 담긴 마지막 작품으로서 NDS 특유한 병렬 더블 디스플레이 구조는 그가 한 제안이었다고 한다. 이는 이미 게임 & 워치 멀티 스크린과 펀치 아웃! 시리즈 아케이드 게임기에서도 사용된 적이 있었던 구조였기에 닌텐도 개발팀에게는 매우 익숙한 기술이었다.

미야모토 시게루가 관중들이 하는 엄청난 환호 속에 직접 링크의 검과 방패를 가지고 등장함으로 유명한 2004년 E3 무대에서 발표된 NDS는 듀얼 스크린과 터치 스크린이라는 파격인 기획으로 2005년 쯤에 본격으로 인기를 끌었다.

닌텐도는 이 시기에 서드 파티와 코어 게이머 시장을 소니에게 빼앗겨 버린 사실을 순순히 인정하고 소니와 직접 충돌을 최대한 피하면서 아직 비디오 게임에 관해서는 완전히 불모지대였던 여성, 어린이, 중년, 노인들을 새로운 타겟으로 설정했다. 이에 따라 새로운 IP 개발자 및 디자이너들을 게이머가 아닌 인력으로 구성했고 닌텐독스, 두뇌 트레이닝 시리즈, 동물의 숲 같은 전연령을 겨냥한 게임들이 만들어졌다.

여기에 여전히 강력함을 뽐내던 뉴 슈퍼 마리오브라더스, 포켓몬스터DP 디아루가·펄기아 등 주요 IP들이 강력하게 지원 사격하여 NDS는 8,000만대 정도를 판매한 PSP를 누르고 1억 5,402만대를 팔면서 모든 휴대용 게임기를 통틀어 역대 최대 판매량을 달성한다.

그동안 쌓은 경험과 역량, 2002년에 새로 취임한 사장인 이와타 사토루가 보인 야심찬 비전을 담고 출시된 NDS는 그때까지 거의 젊은 남성으로 제한되어 있었던 게임 인구저변을 전성별, 전연령층으로 확대하는 데 성공했고 수명 주기 동안 1억 5,402만대라는 총 판매량을 기록하면서 그 동안 게임기 시장 주류였던 거치형 콘솔마저도 압도한 히트를 쳐 휴대용과 거치형을 모두 아우르는 게임 업계 전체 파이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특히 NDS는 플레이스테이션 2와 함께 하드웨어 베스트 셀러 위치를 차지했다.

2006년 닌텐도는 차기 거치형 콘솔에도 이러한 전략을 그대로 계승하여 체감형 게임기인 'Wii'를 출시, 누적 카피 8,000만장 이상 팔린 Wii Sports와 2,200만장 이상 팔린 Wii Fit 등 기능성 게임들과 슈퍼 마리오 Wii 갤럭시 어드벤처 및 그 후속작인 슈퍼 마리오 Wii 2 갤럭시 어드벤처 투게더, 젤다의 전설 스카이워드 소드 같은 타이틀이 대히트하면서 수명 주기 동안 최종 판매량 1억 1,443만대라는 대박을 치게 되었고 PS3, Xbox 360을 누르고 7세대 콘솔 전쟁 최종 승자로 군림했다. 휴대형, 거치형 양방면에서 패미컴과 슈퍼 패미컴, 게임보이 시대 영광을 재현하는데 성공하면서 "닌텐도가 부활했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Wii 출시 연도인 2006년한국닌텐도가 설립되면서 직접 한국 시장에 진출했고 패미컴 이후 별 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던 한국 게임 시장에서도 오랜 암흑기 끝에 대박을 치게 되었다.)

이 시기엔 패밀리컴퓨터게임보이, 슈퍼 패미컴 시절 누린 영광을 사실상 되찾았다고 봐도 무방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2010년 5월에는 소니와 한 오랜 싸움에서 승리하였음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이와타 사토루와 닌텐도의 개발진들이 만들었고,
그 결과로 자신들이 안았던 오래간만의 행복은 오래 가지 못했다.

2.7. 2010년 ~ 2014년

DS와 Wii 덕분에 한때 7만 가까이 도달했던 닌텐도 주가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을 계기로 계속해서 떨어져 2012년 1월 27일 기자회견 당시 9,980까지 떨어졌다가 10,250으로 회복하는 큰 혼란을 보였다.

단기 수익이 하락한 가장 큰 이유는 외화(달러)로 자산을 많이 보유하고 있어서 엔고 영향을 크게 받았기 때문이다. 120원 하던 주가가 80원 이하로 떨어진 셈. 하지만 일본 정부가 개입함에도 1달러당 75엔을 바라보고 있던 2011년 11월에 엔고 현상이 떨어질 날은 머나먼 일인 듯했다. 하지만 닌텐도에서는 막대한 환차손을 보면서도 가격을 조정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2012년 4월 26일에 2011 회계년도 결산 발표가 났다. 결론은 상장 이후 50년만에 처음 겪어본 적자. 닌텐도는 2011년 회계 연도(2011년 4월 ~ 2012년 3월)에 순손실 423억엔(약 5,909억원)을 냈다고 발표했다. 오로지 엔고에 따른 달러자산 손실 때문일까? 물론 엔고도 영향이 없다고 할 수는 없으나 엔고를 감안하고 보아도 영업 적자가 373억 2,000만엔이다. 매출은 3년 연속 감소에다가 지난 해 같은 기간보다 무려 36% 줄어든 6,476억엔(약 9조 470억원)이다. 엔고와는 무관하진 않으나 대개 원인은 쉽게 말해 제품이 안 팔려서 적자가 난 탓이다.(기사)

일본 내 언론에서도 우려하는 목소리를 냈다.(#)

2010년 들어서는 일본내에서 Wii가 플레이스테이션 3보다 NDS가 PSP보다 적게 팔리기 시작했다. 3DS 판매가 호조를 보이긴 했지만 소프트 판매량은 미묘한 수준. 세계로 눈을 돌리면 아직까지는 소니마이크로소프트에 비해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2012년 닌텐도에서는 Wii U를 출시했다. 하지만 출시 직후부터 Wii U는 평이 좋지 못했고 결국 소매점들이 게임큐브 재림을 우려했을 정도로 Wii U는 기대 이하인 판매량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는 경쟁사들과 비교해 킬러 타이틀이 적음이 원인이 되어 발생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사람들이 할 게임이 없음을 계속 지적했다. 2013년 초에 닌텐도에서 낸다고 한 작품은 많지만 출시된 게임은 그리 많지 않다. 이 시기를 서드 파티가 감당해 주면 좋았지만 Wii U는 성능이 차세대기(PS4엑스박스 원)에 비해 좋지 못해 서드 파티 참여가 좋지 못했다.

꼭 그래픽이 좋아야만 좋은 게임임은 아니나 현대 게임은 대체로 좋은 그래픽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고 이를 이루고자 빠른 연산 속도 메모리 확보가 필수다. 이때 성능이 낮은 Wii U로 엇비슷한 퍼포먼스를 보이려면 다른 콘솔에서보다 더욱더 최적화가 잘 이루어져야만 하고 이는 많은 비용으로 연결된다. 대개 저사양 게임을 만들 때에 비용이 덜 드는 이점을 살리지 못했었다. 게다가 최적화를 아무리 잘 한다고 해도 쓰인 부품들이 세대가 다르다 보니 차세대기에 적용된 고급스러운 효과를 적용하기는 힘겨웠다.

개발비가 덜 들지도 않으면서 그래픽은 더 안 좋고 거기다 판매량마저 시원치 않으니 서드 파티는 점점 닌텐도를 외면해 가고 있었다. 그리고 게이머들에게 친숙하지 못한 Wii U 패드를 제대로 활용할 줄 아는 게임 제작사가 적은 점도 문제로 지적됐다.

닌텐도에서 그 때까지 하이스펙 타이틀 개발을 등한시한 점도 발목을 잡았다. Wii U는 닌텐도 하드웨어 중에서는 첫 HD 그래픽을 제공하는 하드웨어로 당연히 닌텐도에서는 그때까지 HD 그래픽인 게임을 개발한 경험이 없던지라 게임 개발 과정에서 많은 난항이 있었고 출시가 예정돼있던 퍼스트 파티 타이틀 투입이 대폭 지연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서드 파티 게임이 잘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 퍼스트 파티 타이틀까지 발매가 지연되자 Wii 막바지와 마찬가지로 소프트 부족 현상이 일어났고 결국 Wii U는 스타트 대시에 실패한 터였다.

하지만 닌텐도 3DS는 사정이 나쁘지 않았다. 발표 당시만 해도 비난 일색이었던 닌텐도 3DS는 막상 출시된 뒤에는 좋은 평이 많이 늘었다. 여기에 '제2 파판7 사태'라고도 불리는 몬스터 헌터 4 3DS 출시를 전환점으로 서드 파티들이 많은 킬러 타이틀을 내놓았다. 경쟁기인 PS Vita가 힘을 쓰지 못해 DS - PSP 시절 시장을 나눈 과거와 달리 사실상 닌텐도 원탑 체제가 다시금 유지되었다. 그러나 닌텐도 재정을 흑자로 돌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서드 파티가 대거 이탈한 후 소니에게 게임 산업 왕좌를 넘겨주고 물러났었던 닌텐도 1차 암흑기 당시에는 그나마 확고한 2위라도 고수했기에 사정이 나았으나 2차 암흑기였던 이 시기에는 외부에서나 내부에서나 정말 회사 미래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막장까지 몰려 있었고 시장 분석가들에게서 닌텐도가 결국 플랫폼 제공자 지위에서 탈락하고 세가와 같은 전철을 밟게 되리란 예측도 우후죽순으로 나오고 있었다. 게임 산업 주도축이 미국을 비롯한 서양으로 빠르게 기울고 있었으며 기껏 만들어 놓은 라이트 유저층이 빠르게 모바일로 이탈하는 등 게임 시장 환경도 닌텐도에게 매우 적대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그렇게 이와타 사토루 사장에게는 이런 전례없는 난국을 타개해야 하는 너무나도 큰 부담이 주어지게 되었다.

2.8. 2014년

Wii U 판매 부진 및 여러 악재가 더해지면서 닌텐도에서 기존 노선을 계속 유지함이 과연 올바른 판단인가 하는 우려는 계속 되었으며 결국 2014년 1월에 발표된 2013년 손실이 발표되면서 그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결국 닌텐도에서는 2014년 1월 30일에 새로운 경영 방침을 발표했다. 새로 발표한 경영 방침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2014년 1월 오는 3월 끝나는 2013 회계 연도에서 당기 순손실 250억엔(약 2,500억원) 적자가 예상되었는데 미국 시장에서 3년 연속 적자를 냄이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닌텐도에서 Wii 후속작으로 야심차게 내놓은 Wii U는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분위기 속에서 극심한 부진으로 겨우 500만대가 넘어서서 당초 계획상 판매 대수였던 900만에 크게 못 미치는 판매 대수인데다 출시 한 달만에 300~400만 판매를 넘어선 플레이스테이션 4엑스박스 원과 비교되어 더욱 참혹한 결과로 비추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언론에서는 대체로 닌텐도에서 iPhone으로 대표되는 스마트폰 게임 시장에 진출하지 않음이 오산이고 무엇보다 신형 Wii가 스마트폰 게임과는 차별된 그래픽을 가진 게임을 원하는 유저들을 사로잡기에는 성능이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닌텐도 이와타 대표가 "게임기를 수만엔에, 게임 소프트웨어를 수천엔에 파는 전통 방식이 힘을 잃었다."라고 발언하여 닌텐도 자사 하드웨어 집중 전략을 바꿀지도 모른다는 관측을 낳기도 했지만 보수하는 경영을 고수하는 닌텐도가 '젤다'나 '마리오' 같은 자사 초대박 게임들을 닌텐도 하드웨어가 아닌 스마트폰용 게임으로 '내던지는' 유래없는 선택을 하는 건 현재로서는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에 귀추가 주목되기도 했다.

그리고 결국 실적 부진 우려로 2014년 1월 20일에 닌텐도 주가가 한때 전 거래일(17일) 대비 19%나 밀리면서 1990년대 이후 최대폭 하락을 기록했다. 주가가 큰폭으로 하락은 주식회사라면 흔한 일이지만 일본이 잃어버린 10년에 허덕였을 때도 2008년 금융 위기 때도 아랑곳 없는 모습을 보인 닌텐도라서 언론에게 주목을 받았었다. 떨어진 주가는 얼마 되지 않아 다시 회복세를 보였다.

2014년 2월에 소니 인터랙티브 엔터테인먼트 재팬 아시아, 일본 마이크로소프트 지사와 함께 공동으로 자녀 보호 캠페인을 전개하였다.

2014년 4월 22일에 닌텐도에서는 대만에서 닌텐도 제품을 취급하던 자회사 닌텐도 유한 회사를 해산하고 대만쪽 직원들은 대부분 해고한 다음 모든 업무를 홍콩 닌텐도로 이관한다고 밝혔다. 닌텐도 유한 회사는 1991년에 설립되어 닌텐도에서 지분 100퍼센트를 보유한 형태로 23년 동안 이어졌으며, 뉴스 등에서는 이 해산을 닌텐도 본사의 적자로 생긴 부진으로 인한 자회사 축소의 일환으로 보고 있다.

평소 닌텐도 최고 경영자 등이 공공연하게 '현금을 잔뜩 보유하고 있으므로 구조 조정 안해도 괜찮다'고 떠들던 닌텐도이지만 이번 사태로 어디까지나 일본 본사나 적어도 중요 지사 한정인 꼴이 되어버린 셈이었다. 한편으로는 2014년 1월에 중국 정부에서 상하이 자유무역지구 개방과 함께 14년 동안 금지해온 콘솔 게임 봉인을 해제함에 따라 본격으로 중국 대륙 쪽에 판매 중심을 옮기랴는 조치 중 하나이지 않을까 하는 의견도 있었다.

2014년 5월 7일에 2013 회계연도(2013년 4월~2014년 3월) 실적 발표를 통해 매출 5천 717억엔(5조 7천 490억원), 영업손실 464억엔(4천 666억원), 순손실 232억엔(2천 333억원)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이번 매출은 지난 1월에 발표된 예상 매출 5천 900억엔(5조 9천 330억원)에도 못 미치는 결과다. 닌텐도의 5년 연속 매출 감소와 3년 연속 영업적자에 이와타 사토루 대표는 책임을 통감한다면서도 책임 완수는 그만둠이 아니라 사업 추진력을 회복시켜 안정하게 이익을 냄이라고 답해 연임 의사를 확고히 내비쳤고 새로운 사업 추진력으로 안정된 이익을 창출한다고 밝히며 자신감을 나타냈다.

2014년 10월 29일에 2014년 3분기에 영업순손익을 242억 엔(2,343억원)이란 흑자로 전환하는 데 성공했다. Wii U로 낸 마리오 카트 8 등이 꾸준한 실적을 거두고 3DS에는 슈퍼 스매시브라더스 for 닌텐도 3DS / Wii U 등의 킬러 타이틀이 많이 나온 덕에 기기견인이 상당히 효과를 보았다고 한다. 또한 예상치를 훨신 윗도는 수익이 나온 것은 또 엔저로 인한 환차익으로 재미를 보아서이기 때문이다.

2015년 1월에 발표한 2015년 3월기 제3사분기 결산발표에서는 나쁘지만은 않은 결과를 발표했다.
분기 순이익은 595억 1500만엔으로 작년 동기 대비 5배에 가깝다. 다만 이건 작년 동기가 워낙 폭망해서 그런거고 전반으로 볼 땐 나쁘지만은 않은 매출을 올렸으며 그 전 분기에 이어 일단 흑자가 나왔다는 데 의의가 있다. 닌텐도가 완벽하게 회복했다고 말하긴 그렇지만 적어도 심각한 경영난에서는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고 본다.

하지만 결국 이 발표에서 Wii U는 퍼스트/세컨드 파티 게임(또는 서드 파티 독점)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다시 증명하였으며 이는 Wii U가 앞으로 출시될 퍼서트/세컨드 파티 게임들에 크게 좌지우지될 수 있다는 의미다. 2015년 라인업도 만만치 않은 타이틀이 있고 그 중엔 젤다의 전설 신작도 포함되어 있지만 퍼스트/세컨드 파티 특성상 제한될 수밖에 없는 타이틀의 양 때문에 이 소수 기대작들이 얼마나 견인해 줄 지 관건이다.

2.9. 2015년

파일:external/timedotcom.files.wordpress.com/satoru-iwata-nintendo-dena.jpg

2015년 3월 17일 17시경, 일본의 모바일 게임업체인 DeNA와 업무・자본 제휴를 맺는다는 취지의 공동기자발표회를 통해 자사 IP를 스마트 디바이스로 확대해 나갈 것을 발표하였다. 기자회견 전문 번역 이는 이전부터 스마트폰 시장에 진출할 생각이 없다고 발언해온 이와타 사토루 사장이 결심한 사항으로, 다소 경직된 문화를 가진 닌텐도로서는 이례적인 행보라고 볼 수 있다. 스마트 디바이스를 통한 닌텐도 IP의 게임은 2015년 연내에 선보일 예정으로 귀추가 주목되고 있었다. 다만 UX를 중요시 여기는 닌텐도답게 기존에 나온 게임의 이식작 등은 내놓지 않을 것이며, 철저히 모바일엔 모바일 전용 게임을 내놓을 거란 방침이다.

또한 스마트 디바이스로의 진출과 더불어 이와타 사장은 'NX'라는 차기 플랫폼을 이례적으로 일찍 발표하며 이후로도 콘솔 플랫폼을 소홀히 하진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으며, 차기 플랫폼의 정보는 2016년에 발표하고 싶다는 발언을 하며 게이머들의 기대감을 높였다. Wii U가 발매된지 아직 3년밖에 되지 않은 시점이라 발표가 너무 이르다는 평도 없진 않지만, 게임보이 어드밴스에뮬레이터 문제 등으로 인해 2001년 발매 이후 불과 3년 뒤인 2004년에 닌텐도 DS에게 자리를 내준 것을 생각하면, 닌텐도 측에선 더 이상 Wii U를 끌고 가기엔 어려운 것이라 판단하고 재빨리 세대 교체를 하려는 생각을 한 듯하다.

이 발표 후 닌텐도의 주가는 수직상승하여 2011년 6월 이후 약 3년 9개월만에 최고치를 찍었다.

닌텐도에서는 2015년 E3때 NX나 스마트폰 게임들에 대해서 발표를 안한다고 선을 그었다. 무엇을 발표할 지는 이제 미지수.

한편, 2015년 5월 8일, 닌텐도에서는 2014년 회계연도(2014년 4월 1일~2015년 3월 31일) 실적발표에서 매출액 5,497억 8,000만 엔, 영업이익이 247억 7,000만 엔, 순이익이 418억 4,300만 엔을 올렸다고 발표했다. 회계연도 연간 기준으로 영업이익을 낸 것은 4년만에 처음으로 전년도에 닌텐도가 영업손실 464억 2500만 엔, 순손실 232억 2,200만 엔을 기록하였던 것에서 흑자 전환하는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매출액은 전년도에 기록한 5,717억 2600만엔에서 3.8% 감소하여 2009년에 매출액이 정점을 찍은 이후 6년 연속 감소하며 여전히 매출액 감소세가 지속되고 있다.

2015년에 모바일 시장 진출 발표 후 닌텐도의 주가는 승승장구 했고, 5월 말에 출시한 간만의 신규 IP인 스플래툰이 일본 매장 내에서 죄다 매진되어 버릴 정도로 엄청난 판매량을 보이면서 Wii U의 판매량이 약간 감소했다.[9] 특히 스플래툰의 성공은 항상 오래된 IP만 우려먹는다는 비판을 날려버렸고, 개발자로써의 닌텐도의 능력이 여전하다는 것을 과시하는 효과를 주었다.

아미보 역시 매우 순조롭게 팔리면서 전 세계적으로 판매 수량을 못따라가 품절하는 사태가 속속 터지면서 사실상 닌텐도가 다시 옛 위상을 되찾을 것 만 같았다.

그러나 2015년에 열린 E3 2015는 다시 한번 닌텐도에서 서드 파티들을 버린 대가가 무엇인지 상기시켜 주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특히 닌텐도와 Wii U 유저들에겐 앞으로의 타이틀 보릿고개를 어떻게 넘길 것인지가 큰 과제가 되었다. 심지어 보여줄게 없다면 차라리 E3를 아예 참가하지 않았거나[10], 저번 닌텐도 다이렉트를 하지 않고 그때 발표한 내용들을 이번에 발표하는게 더 좋았을 것이라는 평도 있다.

게다가 E3가 끝난지 1달도 채 되지 않아서 7월 13일에 이와타 사토루 사장이 7월 11일 경에 암으로 별세했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미야모토 시게루와 다케다 겐요가 임시로 사장 일을 맡는다고 했다. 현재 NX의 발표와 모바일 시장 진출이 남아 있는데, 이와타의 갑작스러운 별세로 닌텐도의 앞날은 매우 불투명해졌다.

이와타 사토루 문서에도 있지만 14일 오전 2시에도 트위터에 #ThankYouIwata 태그는 자꾸만 늘어나고 있었고 전 세계 많은 게이머들과 심지어 다른 경쟁 게임사 대표 인물도 애도를 표하였다.

그리고 2015년 8월 27일, 포케토루(pokemon shuffle)가 출시되었고 2015년 9월 10일에 포켓몬 GO가 발표되었다. 하지만 이 두 게임 모두 DeNA와 협력해서 만든 게임들이 아니다.

2015년 9월 16일부터 키미시마 타츠미[11]가 이와타 사토루 후임으로 닌텐도 사장으로 부임한다.

2015년 10월 29일, 결산 설명회로 향후 계획이 더 공개되었다.
닌텐도 팬덤 사이에서 "닌텐도에서 게임기 뿐만 아니라 스마트폰도 직접 만든다면 어떨까?"라는 의문이 있었는데 실제 닌텐도에서 출시한 게임보이패미콤과 비슷한 모양을 가진 스마트폰을 직접 만들어 본 컨셉 디자인의 사진이 화제가 되었다. 사진을 보면 알 수 있지만 게임기와 스마트폰이 합쳐진 상상도를 보기만 해도 "닌텐도에서 만든거 맞네?"라고 생각할 정도로 매우 친숙하다. # ## ### ####

2.10. 2016년

이 해부터 닌텐도가 본격으로 모바일 게임 시장에 진출하였다. 소니 인터랙티브 엔터테인먼트(이하 SIE)는 그 전에도 KNACK과 연동할 수 있는 넥의 퀘스트, 리틀 빅 플래닛 3와 연동할 수 있는 런 색보이 런을 출시하였고 후에 포워드웍스SIE 재팬 스튜디오, 니폰이치 소프트웨어, 스퀘어 에닉스와 공동으로 모바일 게임을 제작해 출시할 예정이며 SIE 형제뻘 되는 애니플렉스에서도 Fate/Grand Order를 출시했고 그 후로 마기아 레코드 마법소녀 마도카☆마기카 외전, 키라라 판타지아를 연이어 출시하였다. 마이크로소프트엑스박스 시리즈 IP 모바일 게임이 없었을 뿐이었지 마이크로소프트 자체 제작 모바일 게임은 있었다. 이로서 콘솔 3사 간 모바일 게임 경쟁 시대 막이 올랐다.

2016년 3월에 Miitomo가 출시되었다. Mii에게 옷입히고 다른 Mii랑 대화하는 앱인데 닌텐도 측에서도 이는 게임보단 SNS라고 했다. 게임으로서 기능은 별로 없다. 초반에는 닌텐도에서 만들었다는 점 때문에 꽤 많은 사람들이 다운받았으나 늦게 나온 SNS라는 한계점 때문에 금방 인기가 사그라들었다.

2016년에 파이어 엠블렘동물의 숲을 모바일 버전으로 내놓는다는 발표가 있었고 각각 파이어 엠블렘 히어로즈, 동물의 숲 포켓 캠프라는 이름으로 출시되었다.

2016년 4월 27일에 닌텐도에서 2015년 회계연도(2015년 4월 1일~2016년 3월 31일) 실적발표가 있었는데 매출액은 5,044억 5,900만엔, 영업이익이 328억 8,100만엔, 순이익은 287억 9,000만엔이라고 발표했다. 닌텐도가 기록한 2015년 회계 연도 매출액 5,044억 5,900만 엔은 2014년 회계 연도 닌텐도 매출액 5,497억 8,000만 엔에서 8.2%가 감소하며 무려 7년 연속으로 매출액이 하락했다. 그나마 영업 이익은 전년도에 247억 7,000만엔이었는데 32.7%가 증가하였고 순이익은 반대로 418억 4,300만엔에서 59.2%가 감소했으나 순이익 감소는 닌텐도 스위치 개발 및 생산 투자 영향이 있어서 나쁘게 볼 수는 없다.

2016년 5월에는 닌텐도는 퍼스트 파티 IP를 이용한 CG 영상 사업에 진출한다고 발표했다. 단순히 라이선스를 주는 수준이 아니라 파트너사와 함께 컨텐츠를 자체 제작하겠다고 하며 파트너사는 세계에서 규모가 있고 경험도 있는 업체를 모색 중이라고 한다.

2016년에 출시 예정이던 NX 출시일을 2017년으로 연기한다고 했다.

E3 2016에선 2015년보다도 더욱 초라한 라인업을 가져왔지만 오랜 개발 끝에 드디어 타이틀이 공개된 젤다의 전설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가 가히 엄청난 인기를 구사하면서 게임 개발사로서 닌텐도는 아직 살아 있음을 증명했다.

2016년 7월에 출시한 포켓몬 GO가 전 세계에서 큰 인기를 끌다 못해 사회 현상이 되기 시작하면서 단 하루만에 주식이 20% 넘게 폭등하며 미국 App Store에서는 하루만에 최고 매출 1위로 올랐다. 7월 주가가 두 배나 뛰어올라 3만을 찍었지만 8월에는 2만대로 다시 내려온 상황이다. 닌텐도에서 개발한 게임은 아니라서 닌텐도가 모바일 게임도 잘 만든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닌텐도 IP가 모바일에서도 큰 힘을 가질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2016년 9월 7일(현지시각)에 iPhone 7 발표장에 미야모토 시게루가 깜짝 출연하여 마리오 시리즈 첫 모바일 게임인 슈퍼 마리오 런을 발표하였다. iOS 선행 출시라고 했다. 이쪽도 발표 후 주가가 폭등하였다.

2016년 10월 20일, 드디어 NX가 Nintendo Switch라는 이름으로 정식 공개되었다. 그리고 이 날을 기점으로 로고 디자인이 회색에서 빨간 바탕에 흰색 글씨로 변경되었다. 광고 말미에 타사 휴대폰 광고처럼 해당 로고가 붙는다. 해당 광고가 적용된 첫 게임은 3DS판 마리오 파티 스타 러시. (이례로 포켓몬스터 소드·실드는 광고 말미에 로고를 붙이지 않았다.)

통칭 닌텐도 3대 게임이라 불리는 마리오, 젤다, 포켓몬이 각각 눈부신 활약을 한 년도로 마리오, 포켓몬은 모바일 게임으로 나와 흥행에 성공하고 젤다는 신작을 발표해 게이머들 사이에서 닌텐도가 가진 명성을 재확인시켰다.

2018년 4월 27일 Cygames와 협력해 만든 모바일 플랫폼 전용 게임 드라갈리아 로스트를 발표했다. 기존 IP를 모바일 게임으로 이식하지 않고 닌텐도 오리지널 신작 IP 모바일 게임은 이 게임이 최초였다.

2.11. 2017 ~ 현재

콘솔 게임기 사업에서 더 이상 후퇴할 곳이 없어진 닌텐도는 2017년 3월 이와타 사토루 사장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작정하고 혼을 갈아 3년 간 개발 끝에 만들어 낸 거치기와 휴대기를 혼합한 하이브리드 게임기 '닌텐도 스위치'를 발매, 8.5세대 게임기 전쟁 선구자로 발판을 깔아놓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런칭 타이틀인 '젤다의 전설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가 대흥행하면서 '세상에서 첫 1달간 가장 빨리 팔린 게임기'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놀라운 성공으로 Wii U 시절 항상 목말라왔던 서드 파티도 관심이 크게 늘었다. 젤다 뒤로 '마리오 카트 8 디럭스', 첫 공개 후 점점 반응이 좋아져서 기대작이 된 ARMS, 스플래툰 2 등이 지속 견인을 이어옴으로써 연 생산량을 2배로 올려잡는 흥행을 기록했다. 초기지만 닌텐도 스위치 흥행으로 밝은 미래가 점쳐졌다.

이를 증명하듯 2017년 5월 닌텐도 주가는 2008년, 즉 2차 전성기 후로 최대치를 갱신했으며 이는 전년 포켓몬 GO 덕분에 오른 수치를 더욱 초과한다.

E3 2017에서 새로운 대형 게임들을 대거 발표하며 성공이었다는 평을 받았다. '슈퍼 마리오 오디세이'는 IGN 선정 E3 2017 최고 게임에서 선정 되었으며 발매 예정 게임 중 메트로이드 프라임 4는 메트로이드 프라임 시리즈 부활을 알리며 두터운 서양 팬덤에게 큰 호응을 받았다. 현 상황을 보면 적어도 2018년까지는 순조로우리라 보며 새로운 전성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란 평을 받았다.

2017년 9월 19일 크레디트 스위스 증권이 닌텐도가 앞으로 낼 수익에 대해서 아웃퍼폼, 즉 호조로 계산했으며 앞으로 목표 주가를 55,000대로 잡았다. 이 수치는 2007년 후 최고 수치. 향후 스위치 5년간 판매량을 1.3억대 가량으로 추측했다. (같은 기간 동안 NDS 판매량 1.13배, PS2 판매량 1.5배 정도로 Wii 전체 판매량을 상회하는 수치다.) 한마디로 '제3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2017년 10월 27일 닌텐도는 슈퍼 마리오 오디세이를 발매해 젤다의 전설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에 버금가는 대박을 친다. 반년 전에 발매한 브레스 오브 와일드와 비슷한 수준으로 엄청난 고평가를 받으며 미국과 유럽에서 주간 가장 빠르게 판매된 타이틀 기록을 따고 10개월 동안 천만 장 이상을 판매했다. 이렇게 한 해에 천만 타이틀을 두 개나 내놓는 충격 행보는 이번 세대에 닌텐도가 얼마나 칼을 제대로 갈고 나왔는지 알 수 있게 만들어줬다.

닌텐도 삼대장이라고 불리는 마젤포 정규 시리즈가 오랜만에 전부 발매된 해이기도 하다.[12] 마리오 시리즈는 발매 텀이 들쑥날쑥하고, 젤다의 전설 시리즈는 2년 단위로 나오고, 포켓몬스터만 거의 1년 단위로 발매되기에 생각보다 겹치는 해가 드문 편이다.

2018년에는 한 해 동안 북미 최다 판매 콘솔에 등극했고, 닌텐도는 미국내 전체 비디오 게임 시장의 연간 수익 중 34%를 차지하면서 게임 퍼블리셔들 중에 가장 높은 수익을 기록했다. # 특기할 만한 것은 12월 7일에 출시된 슈퍼 스매시브라더스 얼티밋의 판매량으로, 출시 한 주도 안 돼 북미에서만 500여만장을 찍고, 12월 말까지 500여만장을 더 팔아 무서운 속도로 한 달만에 천 만 타이틀에 등극, 같은 해 4월에 출시된 갓 오브 워(2018), 9월에 출시한 스파이더맨 PS4를 누르고 2018년 NPD 소프트웨어 판매 순위 5위에 랭크 되었으며, 이는 독점 게임으로서는 2010년 헤일로 리치의 기록을 능가해 비디오 게임 역사상 최다 한 달 판매량을 찍은 것이다. #[13]

2019년 5년, 스위치 일본 내 판매량이 PS4(+Pro)의 판매량을 추월하면서 사실상 일본 내 주력 게임기가 되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PS4(+Pro)의 누적 판매량은 5년 3개월간 쌓은 것인데 스위치는 발매 2년 2개월만에 추월했다는 점이다. 전세계 판매량도 순조로운 바 PS4 전세계 판매량을 추월할 날도 시간 문제로 보인다.

2019년 10월 31일 닌텐도는 상반기(일본 회계연도 기준 2019년 4월~9월) 실적을 공개했다. 이번 상반기에 닌텐도는 매출 4,439억 엔(한화로 약 4조 7,930억 원), 영업이익 942억 엔(한화로 약 1조 171억 원), 당기순이익 620억 엔(한화로 약 6,694억 원)을 기록했다. 작년 대비 영업이익이 53.4% 늘었다. 이 영업이익은 2009년 이후 10년만에 최고 영업이익을 기록한 것이다. 닌텐도는 2019년 1분기에는 스위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자사 예상보다 모두 많이 팔렸고, 2분기에는 자사 및 타사 소프트웨어가 실적을 견인했다고 설명했다. 4월부터 9월까지 닌텐도 스위치 소프트웨어 총 판매량은 5,849만 장으로 2018년 동기보다 38.8% 증가했다. 특히 디지털 매출이 2018년 동기보다 83% 늘어난 716억 엔인데 이에 대해 닌텐도는 스위치 게임 디지털 버전 매출과 유료 온라인 서비스 ‘닌텐도 스위치 온라인’ 구독자가 모두 점진적으로 늘어난 효과라고 설명했다.

2016년 슈퍼 마리오 런 이후로 진출한 모바일 게임 시장도 매출 효과를 보고 있는데, 진출 이후 2020년 1월 26일까지 약 10억 달러(한화로 약 1조원)의 이익을 냈다고 한다. # 특히 아동층보다는 청소년층 이상의 수요를 노린 파이어 엠블렘 히어로즈가 6억 5,600만 달러의 수익을 내서 전체 수익의 절반 이상을 기록했고, 가장 최근에 나온 마리오 카트 투어는 슈퍼 마리오 런을 제치고 출시 4개월 만에 8,600만 달러의 수익을 냈다는 점이 괄목할 만한 점이다. 수익의 약 90%가 일본과 미국에서 나왔다. 게다가 이 수치는 포켓몬 GO와 같은 포켓몬의 모바일 게임은 제외한 수치다. 포켓몬 GO는 2019년 10월 기준 30억 달러(약 3조원)의 수익을 냈으며, 이것까지 포함하면 닌텐도는 더욱 많은 수익을 낸 셈이다.

하지만 닌텐도의 모바일 게임들도 여느 모바일 게임 회사들처럼 캐주얼 게임 위주로 출시하고 있으며, 과금 유도 및 P2W 논란도 불거지고 있다. 이는 닌텐도도 어쩔 수 없는 것이 모바일 게임 항목을 들어가보면 알겠지만 AAA 게임 하나를 이식해서 내는 것보다는 과금 요소가 있는 게임들이 압도적으로 이익을 내기 좋은 구조고, 이용자들도 욕하면서 과금하는 판국이라 결국 과금 유도형 캐주얼 게임이 넘쳐나는 것이 모바일 게임 시장의 현 상황이다. 더군다나 닌텐도는 오래전부터 자신들만의 플랫폼을 구축해놓은 상황인데 안 그래도 품질 관리가 잘 안 되는 모바일 게임 플랫폼에서 굳이 AAA 게임을 낼 이유가 없다. 닌텐도 또한 모바일 게임 시장에서는 프랜차이즈를 내새운 과금유도형 캐주얼 게임을 주로 내고 AAA 게임들은 닌텐도 스위치를 통해 출시할 것으로 보인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과 같은 모바일 게임 시장 상황이 닌텐도한테는 호재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초창기 모바일 게임 시장에서는 콘솔로 나오던 AAA 게임들이 스마트폰으로 마구 이식되면서 휴대용 게임기를 만들던 닌텐도한테 치명타를 입힐 것으로 예상되었다. 하지만 AAA 게임들은 주로 유료 게임인데다가 불법 복제 문제등도 불거져서 개발비 대비 수익성이 좋지 않았고, 과금 유도형 캐주얼 게임들은 간단한 조작 체계나 간단한 수준의 그래픽으로도 고수익을 내고 모바일 게임 시장을 완전히 장악해버리면서 대다수의 게임 회사들은 AAA 게임을 모바일 게임으로 내지 않게 되고, AAA 게임을 원하는 게이머들 덕분에 콘솔/PC 게임 시장은 유지되었으며, 닌텐도 3DS 역시 스마트폰 사이에서 생각보다 긴 수명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닌텐도는 그에 대한 대답으로 모바일 게임 시장 진출과 동시에 콘솔과 모바일 게임 시장의 중간을 노린 닌텐도 스위치를 출시했고 이 전략은 대성공한 셈이다. 거기다가 서구권이 주가 된 AAA 게임 시장도 2020년대 초반 들어서 여러가지 문제에 직면하고 있는 상황이라 닌텐도가 본의 아니게 반사이익을 얻고 있는 상황이다.

PlayStation 5, Xbox Series S/Series X와의 9세대 콘솔 전쟁에서도 경쟁자의 8세대 거치기보다도 성능이 떨어졌던 스위치는 밀리기는 커녕 세계 판매량 1위를 선점했으며 수명 주기 기간 동안 갱신 모델도 성능 향상 없이 디스플레이 교체만 이루어졌을 뿐이다. 미국 시장에서는 2018년 12월부터 2021년 9월에 PS5한테 1위 자리를 내줄 때까지 무려 33개월 연속으로 판매량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 이후 10월 OLED 모델 출시로 한 달만에 다시 판매량 1위 자리를 탈환한 후 2022년 동안 계속 판매량 1위를 수성했다. 2023년 들어서는 PS5의 재고가 정상화되고 스위치의 수명주기가 끝자락에 왔다는 기대감에 따라 판매량이 전년대비 20% 이상 하락하고 있다. 따라서 2024년경에 스위치의 차세대기가 투입될 것이란 전망이 힘을 얻고 있다.

1세대 스위치 마지막 초신성인 젤다의 전설 티어스 오브 더 킹덤은 2023년 5월 15일에 발매 후 18일까지 출시 3일만에 판매량 1천 만장을 돌파하면서 포켓몬스터 스칼렛·바이올렛과 역대 스위치 발매 소프트웨어 판매 속도 공동 1위에 올랐으며 전작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를 넘어 젤다의 전설 시리즈 역사상 가장 빠른 판매 기록을 달성했다.

거의 모든 닌텐도 프랜차이즈 작품들이 스위치 세대에서 최고 흥행을 달성했고 스위치 세대 작품들과 그 전 세대 작품 간 흥행 차이가 차원이 다르다. 마리오 카트,[14] 동물의 숲,[15] 3D 마리오 시리즈,[16] 젤다의 전설 시리즈[17]가 대표적이다. 소프트웨어 판매량의 관점에서는 그야말로 전례가 없는 수준. 2세대 스위치는 1세대 스위치 하위 호환이 될 가능성이 높아서 여기서 더 올라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닌텐도가 본격으로 헐리우드 영화 산업 진출한 시도는 2014년 전부터 계획되었다. 첫 단추로는 당연히 닌텐도 간판 캐릭터인 슈퍼 마리오가 선택되었으며 애니메이션 제작하려고 소니 픽쳐스유니버설 픽쳐스(유니버설은 2021년 개장한 테마파크 슈퍼 닌텐도 월드를 공동 제작한 회사다.)를 놓고 저울질하다가 2018년 슈퍼배드미니언즈로 유명한 3D 애니메이션 영화 제작사인 유니버설 픽쳐스 산하 일루미네이션 엔터테인먼트를 제작 협력사로 선정하고 2022년에는 일본 여러 게임 및 애니메이션 3D CG 하청 작업을 주로 하던 다이나모 픽쳐스를 인수해 닌텐도 프랜차이즈 CG 영화 제작 지원을 담당할 자회사 '닌텐도 픽쳐스'를 설립했다. #

미야모토 시게루가 최종 결정권을 가진 프로듀서 겸 캐릭터 작가로 참여하여 게임 기반 영화 제작에 그 게임 원작자가 직접 참여함은 상당히 이례인 일이었다. 닌텐도가 1993년 흑역사 때와는 다르게 이 일에 얼마나 진지하게 임하고 있는지 보여줬다. 한편 영화 제작에서도 미야모토 시게루 특유 밥상 뒤집기가 시전될지 귀추가 주목되었는데 2023년 4월로 결국 개봉이 연기되었다.

4월 5일 개봉 후 단 5일만에 비디오 게임 원작 영화 역대 최고 흥행 기록을 갈아치운 일은 시작에 불과했고 2023년 상반기 개봉 영화 최대 흥행 기록, 겨울왕국 2를 넘어 애니메이션 영화 역대 최고 오프닝 기록을 세우는 기염을 토하면서 지난 40년에 육박하는 세월 동안 슈퍼 마리오는 인기가 조금이나마 줄어 들기는 커녕 오히려 한 층 더 막강해졌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였다. 더욱 놀라운 점은 이 기록이 여러 영화 평론가 및 리뷰 사이트들에서 나온 혹평, 평가 절하와 더불어 20일 가량 한국, 일본 개봉 지연으로 세워진 기록이라는 점이다. 개봉 25일차에는 2023년 개봉 영화 최초로 10억 달러 흥행을 돌파했고 최종 13억 달러를 돌파하면서 겨울왕국을 제치고 역대 세계 애니메이션 영화 흥행 2위를 기록했다.

미야모토 시게루일본경제신문과 한 인터뷰에서 첫 슈퍼 마리오 애니메이션 영화 대흥행으로 마리오디즈니 미키 마우스와 어깨를 나란히 놓도록 할 수 있는 목표가 가까워졌다고 말하면서 닌텐도는 탤런트 사무소 같은 곳으로 앞으로도 미디어화에 투입할 예능인들이 이미 충분히 있으며 마리오 외 닌텐도 영화 시리즈 차기작이 이미 제작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스위치 하드웨어 판매량 하락과 더불어 매출액과 영업 이익이 감소하는 상황에서 주요 IP 헐리우드 진출이라는 모험이 성공하면서 닌텐도 미래 전망은 어느 때보다 밝아졌다.

2023년 11월에는 미야모토 시게루가 직접 닌텐도 공식 트위터 계정으로 소니 픽처스와 공동으로 젤다의 전설 실사 영화가 제작되고 있음을 발표했다.

2024년에 들어서며 본격적인 닌텐도 스위치으로의 세대교체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으며, 5월 7일, 공식적으로 올 회계년도[18] 안에 신기종을 발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다만 신기종과는 별개로 6월 닌텐도 다이렉트를 통해 젤다의 전설 지혜의 투영, 마리오&루이지 RPG 브라더십!, 메트로이드 프라임 4 비욘드 등의 신작을 공개하며 스위치의 시대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분명히 하였다. 특히 메트로이드 프라임 4 비욘드와 2월 포켓몬 프레젠트를 통해 공개된 Pokémon LEGENDS Z-A 등의 신작이 2025년 발매로 확정되며 적어도 2025년까지는 스위치로 신작이 발매될 예정이다.

3. 참조 및 외부링크


[1] Switch 발매 이전에 만들어진 이미지라 닌텐도 스위치Joy-Con, Pro 컨트롤러가 들어가 있지 않다.[2] 이 아이디어도 그냥 떠오른게 아니라 후사지로가 원래 닌텐도를 창업하기 전에 시멘트 회사 대리점 사장(현 일본 태평양 시멘트 교토 대리점)이여서 석회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3] 상기한 동그라미 안에 福자 마크를 사명으로 채택함으로 보인다. 마루(丸)는 ○ 또는 숫자 0을 뜻하고 후쿠는 福 일본어 발음이다.[4] 사실 이는 좋게 표현함이고 실제로 바람피우고 잠적했다. 히로시가 대를 이었을 시점에는 사망했다.[5] 창업 당시 상호명에 주식회사만 붙은 이름이다.[6] 그 시절 특촬물인 잭커 전격대에 나오는 트럼프도 닌텐도에서 만들었다.[7] 레고도 과거 키디크래프트사의 제품을 따라만든 적이 있었기 때문에 패소한 것으로 보인다.[8] 킹콩은 원작(1933년판)을 만든 영화사인 RKO의 상표이며, 유니버설은 1975년에 리메이크 영화를 만들면서 RKO에 소송을 걸어 킹콩 상표가 퍼블릭 도메인이니 자신들도 킹콩이란 영화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즉 애당초 킹콩은 유니버설의 상표가 아니다.[9] 2015년 닌텐도 회계연도 1분기(4월 1일~6월 30일) Wii U 전세계 판매량이 47만대인데, 전년도 같은 분기 판매량이 51만대이다. 하지만 차세대 게임기 NX를 전격적으로 발표하여 정상적이라면 Wii U 판매 감소 현상이 나타나야 한 것을 감안하면 선방한 것.[10] 허나 이건 매우 위험한 의견이다. 게임 콘솔 제작사가 E3에 참가하여 앞으로의 계획을 발표하지 않는다는 건 해당 콘솔 소유자는 물론 주주들에게 엄청난 악영항을 주고, 그 여파는 다름아닌 닌텐도 자사에 돌아오게 된다.[11] 전 닌텐도 아메리카 사장[12] 지금까지 단순 이식작을 제외한 세 시리즈가 동시에 발매된 해는 2002년(슈퍼 마리오 선샤인, 젤다의 전설 바람의 지휘봉, 포켓몬스터 루비·사파이어), 2004년(슈퍼 마리오 64 DS, 젤다의 전설 4개의 검+/젤다의 전설 이상한 모자, 포켓몬스터 파이어레드·리프그린/포켓몬스터 에메랄드), 2006년(뉴 슈퍼 마리오브라더스, 젤다의 전설 황혼의 공주, 포켓몬스터DP 디아루가·펄기아), 2009년(뉴 슈퍼 마리오브라더스 Wii, 젤다의 전설 대지의 기적, 포켓몬스터 하트골드·소울실버), 2013년(슈퍼 마리오 3D 월드, 젤다의 전설 신들의 트라이포스 2, 포켓몬스터 X·Y), 2019년(슈퍼 마리오 메이커 2, 젤다의 전설 꿈꾸는 섬(2019), 포켓몬스터 소드·실드이다.[13] 이후 이 기록은 2022년 11월 출시 후 한 달만에 2000만장을 판매한 포켓몬스터 스칼렛·바이올렛이 가져갔다.[14] 마리오 카트 8 디럭스 5,701만장, 마리오 카트 Wii 3,738만장.[15] 모여봐요 동물의 숲 4,338만장, 튀어나와요 동물의 숲 1,305만장[16] 슈퍼 마리오 오디세이 2,695만장, 슈퍼 마리오 갤럭시 1,280만 장[17] 젤다의 전설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 3,235만 장, 황혼의 공주 800만 장[18] 2025년 3월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