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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이동휘가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1][2]
* 원문
기원 4247년 1월 7일 余의 最新 最望 最愛하는 同志 親舊시여!空前絶後한 國恥民辱을 未雪한 지 벌셔까지 年이 지나가고 一收齡만 增添하엿고나 ...(중략)...此地方은 已往 急進 多數 매우 勇敢 有望이외며四.俄領 一帶는 花發逋 以南 各地를 一次 巡回하매 散心된 民心을 聯合하여 同志의 不平을 和平케 하며 腐敗한 習慣과 無精神者 引導하며 勸業會을 整理도 하며 汨汨無暇日夜에 休息할 날이 업사외다. 近日 此處 形便은 漸次 進步가 되여가며 前日 海港의 社會로는 不可同日이 語외다. 現狀대로 數個月 支過하면 可爲할 希望 富하외다...(하략)...紀元 四二四七年 一月 七日 誠齋(이동휘) 義弟 謹呈于 島山(안창호) 先生 閣下
* 번역
여의 최신, 최망, 최애하는 동지 친구시여! 공전절후의 국치민욕(나라의 치욕과 백성의 모욕)을 아직 씻지 못한 지 벌써 여러 해가 지나고, 나이만 한 살 더 먹었구나...(중략)...러시아 영토 일대는 하바롭스크에서 남쪽 각지를 한 번 순회하며, 분열된 민심을 결집하고 동지들의 불평을 평화롭게 해결하며, 부패한 습관과 무기력한 자들을 이끌었습니다. 권업회를 정리하며 공동체를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최근 이곳 상황은 점차 진보하고 있으며, 과거 항구의 사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졌습니다. 현재 상황이 지속된다면 몇 달 안에 희망찬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하략)...기원 4247년 1월 7일 성재 이동휘 의제 도산 안창호 선생 각하께 드림
권업회(勸業會)는 1911년 5월 19일 러시아 연해주에서 창립된 대한민국의 항일독립운동 단체로, 1914년 8월 7일 러시아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당시 20만명에 가까운 대규모 한인사회를 바탕으로 한 권업회의 초대 회장에는 최재형, 부회장에는 홍범도가 선임되어 러시아 당국의 공인을 얻어 활동했다.[3] 창립 발기는 5월 19일 이종호, 김익용[4][5], 강택희, 엄인섭[6] 등에 의해 이루어졌고, 이튿날 57명의 찬동자가 총회를 개최한 것이 권업회의 시작이다.[7]* 원문
기원 4247년 1월 7일 余의 最新 最望 最愛하는 同志 親舊시여!空前絶後한 國恥民辱을 未雪한 지 벌셔까지 年이 지나가고 一收齡만 增添하엿고나 ...(중략)...此地方은 已往 急進 多數 매우 勇敢 有望이외며四.俄領 一帶는 花發逋 以南 各地를 一次 巡回하매 散心된 民心을 聯合하여 同志의 不平을 和平케 하며 腐敗한 習慣과 無精神者 引導하며 勸業會을 整理도 하며 汨汨無暇日夜에 休息할 날이 업사외다. 近日 此處 形便은 漸次 進步가 되여가며 前日 海港의 社會로는 不可同日이 語외다. 現狀대로 數個月 支過하면 可爲할 希望 富하외다...(하략)...紀元 四二四七年 一月 七日 誠齋(이동휘) 義弟 謹呈于 島山(안창호) 先生 閣下
* 번역
여의 최신, 최망, 최애하는 동지 친구시여! 공전절후의 국치민욕(나라의 치욕과 백성의 모욕)을 아직 씻지 못한 지 벌써 여러 해가 지나고, 나이만 한 살 더 먹었구나...(중략)...러시아 영토 일대는 하바롭스크에서 남쪽 각지를 한 번 순회하며, 분열된 민심을 결집하고 동지들의 불평을 평화롭게 해결하며, 부패한 습관과 무기력한 자들을 이끌었습니다. 권업회를 정리하며 공동체를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최근 이곳 상황은 점차 진보하고 있으며, 과거 항구의 사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졌습니다. 현재 상황이 지속된다면 몇 달 안에 희망찬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하략)...기원 4247년 1월 7일 성재 이동휘 의제 도산 안창호 선생 각하께 드림
2. 조직
2.1. 1914년 1월 기준 권업회 조직도[8][9]
- 본회
- 니꼴라예프스크지회
- 회장: 김주악
- 부회장: 최운학
- 총무: 김능한
- 서기: 김게을기
- 검사원: 정길남, 최세면, 이주형, 고명수, 김빠레리
- 화발포지회
- 이만지회
- 회장: 강이
- 부회장: 장명중
- 총무: 박대성
- 서기: 박공삼, 강알점이
- 의사원: 주도심, 이병희, 감성문
- 검사원: 채한묵, 최형권, 김다니이
- 소왕령지회
- 회장: 김야곱포
- 부회장: 김시약
- 총무: 안민학
- 재무: 김리직
- 서기: 김삼손, 한창근
- 의사원: 문창법, 장성일, 김도맨디
- 검사원: 김와실리, 빅토르핀, 황두진, 박와실리, 김이완
- 교육부장: 문창범
- 실업부장: 김인학
- 종교부장: 김박홍
- 언론부장: 박병순
- 사찰부장: 최주형
- 연추지회
- 회장: 박윤여
- 부회장: 김알렉산드르
- 총무: 김뽀들이
- 재무: 정니꼴라이
- 서기: 채니꼴라이, 김미하유
- 의사원: 최봉준, 박이반니완노비치, 전니골라이, 채두성
- 검사원: 그리고리미하유노비치(아인), 김안들레이, 박제방, 최와실리
- 도비허지회
- 회장: 빅창욱
- 부회장: 강진석
- 총무: 김종철
- 재무: 이영석
- 서기: 채규영, 김윤하
- 의사원: 허남윤, 강윤용, 김문약
- 검사원: 최내범, 가여천, 오정여, 신동육
- 교육부장: 최만익
- 실업부장: 오두현
- 러시아지역 종교부장: 신여천
- 사찰부장: 채(?)상정[12]
- 빠쓰께분사무소
- 소장: 김사현
- 재무: 허봉의
- 서기: 이기, 최승건
- 의사원: 이도연, 김낙원, 김명세, 이명극, 여응규, 신학선
- 검사원: 허계
- 탕랑수분사무소
- 소장: 이공보
- 재무: 이면기
- 서기: 한강일
- 간사원: 이지송, 이병식, 김원백
- 수청 구허통분사무소
- 소장: 강재성
- 서기: 정순철, 박창학
- 간사원: 장득재, 신흥주, 이상준, 김중선, 박낙천, 최화준
- 재무: 이도현
- 종교부장: 류우용
- 교육부장: 김병흠
- 실업부장: 김보현
- 종교부장: 신여천
3. 권업회의 활동
3.1. 언론활동, 《권업신문(勸業新聞)》
권업회는 1911년 7월 3일[15] 청년근업회와 통합했다. 당시 청년근업회에서는 1911년 6월 18일부터 대양보를 발행하고 있었고, 사장에는 최재형, 주필에는 신채호[16]가 있었다. 그 후 1911년 12월 17일 러시아가 공식적으로 권업회를 인정하자, 권업회에서는 신문부를 따로 두고 신문부 총무에 한형권, 부장 겸 주필에 신채호 등을 임명하며 신문 간행을 준비하고 마침내 1912년 4월 22일 권업회의 기관지인 권업신문 제 1호를 석판 인쇄로 창간하게 된다. 권업신문은 순한글로, 매주 일요일에 간행되었다.[17] 이후 1914년 8월 30일까지 총 126호가 간행된다. 권업신문은 크게 논설과 잡보로 구성되었는데, 논설에서는 권업회의 입장을, 잡보에서는 재러한인의 동향을 게재했다. 권업신문에 참여한 주요 인물로는 신채호, 이상설, 윤해 , 김하구, 장도빈 등을 들 수 있으며, 이들은 대부분 국내외에서 언론에 종사했던 인물들이다.[18]
신문에서는 재러한인의 권익옹호와 민족문제에 대해 다뤘다. 재러한인의 권익옹호 측면에서는 농작지 개척, 입적청원 등의 활동을 전개했으며 민족문제에서는 재러한인의 계몽과 민족의식 고취에 대한 기사를 작성했다. 대표적으로 1912년 8월 29일 국치일을 맞아 기념호를 내고 발표한 신채호의 논설 '이날'을 들 수 있다. 이 글에서 그는 “동포들에게 일본에 치욕을 당한 이날을 기억할 것”을 강조했다. 1913년에도 국치일을 맞아 특별호를 간행했는데, 2면에는 이상설이 ‘창회자’라는 이름으로 ‘이날을’이라는 글을 싣었다. 또한 105인 사건을 비롯 항일운동 기사들을 싣기도 했다.[19]
3.2. 교육활동
3.3. 한민회 주도 및 한인 실업권장
4. 최재형의 피살과 해체
러일전쟁으로 인해 러시아에 대한 일본이 영향력이 커진 상황에서 1914년 7월 28일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며 연해주지역 한인의 민족운동은 급격히 침체되고 말았다.[20] 러시아는 당해 7월 31일 총동원령을 선포했고, 블라디보스토크 요새 경내에는 전시 계엄령이 내려졌다. 결국 당해 8월 15일 일본과 러시아의 전시동맹 체결이 이루어졌고 8월 20일 연해주 당국은 권업회를 해산시켰다. 이는 일제가 권업회를 해체시켰다는 대중적 사실과는 달리 연해주 당국이 독자적으로 내린 결정이다.[21]5. 의의
6. 기타
7. 둘러보기
8. 같이 보기
[1] 이동휘가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 1914년 1월 7일[2] [3] 출처: 권업회 (勸業會)-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4] 김립으로 잘 알려져 있다. 훗날 고려공산당과 국제공산당 간 신경전에서 불거진 모스크바 자금 운용 문제로 인해 피살당한다.[5] 반병률. (2006). 잊혀진 비극적 민족 혁명가, 김립. 내일을 여는 역사, (26), 98-112.[6] 일제의 밀정으로 유명한 그분 맞다(...)[7] 윤병석. (2009). 1910년대 국외항일운동 Ⅰ-만주•러시아: Vol. 16권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8] 『권업신문』.1914.2.8.「포고」.[9] [10] 청산리 전투 참전, 한국광복군 참모장 등으로 항일 무장투쟁에 활약 후 대한민국의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을 지냈다.[11] 신흥무관학교의 주역인 그 분 맞다.[12] 이름이 명확치 않다[13] 러시아령. 러시아의 한자식 표기 중 하나인 아라사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14] 회령군 고령사는 김은세(金銀世)는 본인의 조카 ●●(年 四十四) 정미년 오월분에 아령(러시아령)으로 왔는데 간곳을 몰라 이에 광고하오며 또 남순현(南順現)은 본인의 극진한 친고인데 계묘년 十월분에 서로 이별한 후 간 곳을 알지못하나 이에 같이 광고하오며 이 두 사람 잇는 곳을 아시는 이는 해삼(블라디보스토크) 권업신문사로 통기하여 특히 감사하겠삼.[15] 러시아력[16] 단재 신채호 선생은 대양보부터 초기 권업신문까지의 주필을 맡게 된다.[17] 박환. (1993).《勸業新聞》에 대한 일고찰. 사학연구, (46), 145-208.[18] 박환. (2000). 러시아 지역의 한인 언론사. 신문과방송, 145-151.[19] 한국언론진흥재단. (2007). 산업실태조사 재외동포 언론 실태와 현황. 한국언론진흥재단.[20] 이정은. (1997). 3.1운동을 전후한 연해주 한인사회의 독립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11집.[21] 김슬기. (2022). 제1차 세계대전 시기 제정 러시아의 전시정책과 연해주 한인사회의 대응.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79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