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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이동휘가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1][2]
* 원문
기원 4247년 1월 7일 余의 最新 最望 最愛하는 同志 親舊시여!空前絶後한 國恥民辱을 未雪한 지 벌셔까지 年이 지나가고 一收齡만 增添하엿고나 ...(중략)...此地方은 已往 急進 多數 매우 勇敢 有望이외며四.俄領 一帶는 花發逋 以南 各地를 一次 巡回하매 散心된 民心을 聯合하여 同志의 不平을 和平케 하며 腐敗한 習慣과 無精神者 引導하며 勸業會을 整理도 하며 汨汨無暇日夜에 休息할 날이 업사외다. 近日 此處 形便은 漸次 進步가 되여가며 前日 海港의 社會로는 不可同日이 語외다. 現狀대로 數個月 支過하면 可爲할 希望 富하외다...(하략)...紀元 四二四七年 一月 七日 誠齋(이동휘) 義弟 謹呈于 島山(안창호) 先生 閣下
* 번역
여의 최신, 최망, 최애하는 동지 친구시여! 공전절후의 국치민욕(나라의 치욕과 백성의 모욕)을 아직 씻지 못한 지 벌써 여러 해가 지나고, 나이만 한 살 더 먹었구나...(중략)...러시아 영토 일대는 하바롭스크에서 남쪽 각지를 한 번 순회하며, 분열된 민심을 결집하고 동지들의 불평을 평화롭게 해결하며, 부패한 습관과 무기력한 자들을 이끌었습니다. 권업회를 정리하며 공동체를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최근 이곳 상황은 점차 진보하고 있으며, 과거 항구의 사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졌습니다. 현재 상황이 지속된다면 몇 달 안에 희망찬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하략)...기원 4247년 1월 7일 성재 이동휘 의제 도산 안창호 선생 각하께 드림
권업회(勸業會)는 1911년 5월 19일 러시아 연해주에서 창립된 대한민국의 항일독립운동 단체로, 1914년 8월 7일 러시아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당시 20만명에 가까운 대규모 한인사회를 바탕으로 한 권업회의 초대 회장에는 최재형(독립운동가), 부회장에는 홍범도가 선임되어 러시아 당국의 공인을 얻어 활동했다.[3] 창립 발기는 5월 19일 이종호, 김익용[4][5], 강택희, 엄인섭[6] 등에 의해 이루어졌고, 이튿날 57명의 찬동자가 총회를 개최한 것이 권업회의 시작이다.[7]* 원문
기원 4247년 1월 7일 余의 最新 最望 最愛하는 同志 親舊시여!空前絶後한 國恥民辱을 未雪한 지 벌셔까지 年이 지나가고 一收齡만 增添하엿고나 ...(중략)...此地方은 已往 急進 多數 매우 勇敢 有望이외며四.俄領 一帶는 花發逋 以南 各地를 一次 巡回하매 散心된 民心을 聯合하여 同志의 不平을 和平케 하며 腐敗한 習慣과 無精神者 引導하며 勸業會을 整理도 하며 汨汨無暇日夜에 休息할 날이 업사외다. 近日 此處 形便은 漸次 進步가 되여가며 前日 海港의 社會로는 不可同日이 語외다. 現狀대로 數個月 支過하면 可爲할 希望 富하외다...(하략)...紀元 四二四七年 一月 七日 誠齋(이동휘) 義弟 謹呈于 島山(안창호) 先生 閣下
* 번역
여의 최신, 최망, 최애하는 동지 친구시여! 공전절후의 국치민욕(나라의 치욕과 백성의 모욕)을 아직 씻지 못한 지 벌써 여러 해가 지나고, 나이만 한 살 더 먹었구나...(중략)...러시아 영토 일대는 하바롭스크에서 남쪽 각지를 한 번 순회하며, 분열된 민심을 결집하고 동지들의 불평을 평화롭게 해결하며, 부패한 습관과 무기력한 자들을 이끌었습니다. 권업회를 정리하며 공동체를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최근 이곳 상황은 점차 진보하고 있으며, 과거 항구의 사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졌습니다. 현재 상황이 지속된다면 몇 달 안에 희망찬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하략)...기원 4247년 1월 7일 성재 이동휘 의제 도산 안창호 선생 각하께 드림
2. 배경
1910년 일제에 의해 조선이 강점되는 경술국치 당시, 러시아와 일본은 상호 협력관계였다. 1910년 7일 체결된 제 2차 러일협약을 통해 미국의 만주 진출에 대항해 러일 양국은 공동전선을 구축하고, 만주에서 양국의 이익을 적극적으로 도울 것을 약조했다.[8] 이로 인해 재러 동포들에 의해 러시아령에서 1900년대 초반까지 이어졌던 十三湍激筆(십삼도의군), 靜明會(성명회)와 같은 무장 투쟁들이 탄압당했고, 일본의 요구를 받아 한인 신문이었던 대동공보 또한 폐간시키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십삼도의군과 성명회의 지도자들 42명이 체포되었고, 1911년에는 '러일범인인도조약'이 체결되며 정치범의 인도를 협의하게 됐다.[9] 이 조약을 바탕으로 러시아는 한인 독립운동가들을 시베리아 등지로 유배 및 추방하게 된다. 이로 인해 러시아령에서의 항일 운동은 위축될 수 밖에 없었다.국면이 바뀌게 된 것은 한인들에 대한 긍정적인 입장의 총독 곧닫지(Gondatti)가 부임하고 나서이다. 곧닫지 총독은 대조선인 유화정책을 펼치며 러일범인인도조약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10]
이루크츠크 이동(북만주를 합함)에 널려있는 조선인의 현상과 그 무리의 배일사상은 오늘날 우리의 연구치 아니치 못할 문제라. 루령(러시아령) 조선인 중에 맨 처음에는 즉 서력 一千八百八十년 즈음에는 러시아에 귀화하여 종교도 고치고 우수리 지방과 토포시에트 방면에 농업하기로 이주한 것이 수천 인이 있었으나, 이러한 조선인은 다만 국적뿐 아니라 사상, 습관도 일찍이 러시아에 동화된 까닭에 한국의 합병은 그 무리에게는 자못 상관이 없게 되었더라. ...(중략)...우리의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른데 있지 않고 곧 일·루(일본·러시아) 범죄인 인도조약을 힘써 실행하는 것이 곧 원하는 바라.이 조약[11]의 체결은 당초 러시아의 간절한 요구에서 나온 것으로 우리는 이에 응낙한 것이라. 곧 일·루전쟁(러일전쟁) 뒤에 러시아 혁명당이 벌처럼 일어남을 인하여 한 것이니, 이에 대하여 우리도 또한 조선인의 정치범인으로 루령(러시아령)에 들어간 자를 잡아 달라하여야 이 조약은 비로소 성립된 것이라 할지니, 이전에 우리 정부에서는 조약 설립 전에 좋은 뜻으로 러시아의 二 대 국사범을 잡아 보내어준 것과 같은 사실이 있는 것을 불구하고 러시아는 오늘날 왕-조선인을 보호하여 툭하면 우리의 촉탁을 등지는 것과 같은 것은 일·루(일본·러시아) 친목에 대하여 우리는 섭섭한 일이 없지 못하니, 대개 러시아 당국자가 조선인에 대한 정책을 ●●하여야 할 지경이면 지난 동안 극동총독은 누가 왔든지 각각 의견이 같지 않았는데, 지금 곤다띠[12] 총독은 극단으로 지나인 배척하면서도 조선인이 러시아에 귀화하는데 대하여는 일종 특례를 열어 일정한 집이 있거나 또 몇 해 되었거나 이것을 물론하고 입적을 청원하는 동시에 귀화를 허가하는 방법을 실행하며 또 조선인 포용주의(包容主義)를 가진 것을 알겠더라.[13]
위 자료는 『권업신문』1913.8.31에 실린「루령(러시아령) 거류 조선인 문제」라는 글로, 당시 일본이 러시아에 보낸 외교시보를 번역한 것이다. 이를 통해 당시 곧닫지 총독의 대조선인 유화정책을 엿볼 수 있다.
물론 일전에 체결된 러시아와 일본의 조약들로 인해 러시아 당국은 표면적으로는 조선인들의 단체에 대해 배타적인 입장을 취할 수 밖에는 없었으나, 러일전쟁으로 인한 적대감이 잔존하는 상태이기에 러시아 당국은 내심 조선인들이 실업이나 교육을 표방한 독립운동단체를 조직하기를 바라고 있었다.[14] 이러한 상황을 모두 충족한 것이 바로 권업회였다. 권업회는 재러동포들에 실업을 권장하고, 노동을 소개하며, 동시에 교육 사업을 전개했다. 권업회의 명칭인 권업(勸業)을 생각해 보면 표면적으로는 한인사회의 이권을 위해 일하는 단체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사실상 권업회는 한인사회의 이권 뿐 아니라 항일 운동을 전개하는 극동러시아의 항일 거점으로서의 역할 또한 수행했다.[15][16]
이렇게 창립된 권업회의 초기만 해도 재러 한인 사회는 북도파, 서북파, 남도파 등의 출신 지역을 기반으로 한 분파 간 알력 다툼이 존재했다. 그러나 정순만 피살 사건과 같은 동족상잔의 비극 이후로 재러 한인들은 조국 독립이라는 명제를 달성하기 위해 뭉치게 되었고, 세력 간 통합을 이루게 된다.[17][18]
즉 권업회는 곧닫지 총독의 대조선인 유화정책라는 상황과 조국 독립이라는 목표로 '이종호의 북도파’, ‘정재관의 서도파’, ‘이상설의 기호파'가 뭉치게 된 것을 바탕으로 설립된 극동러시아 지역의 대규모 단체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19]
3. 조직
3.1. 1914년 1월 기준 권업회 조직도[20][21][22]
권업회는 신한촌에 중앙 본부를 두고 하바로프스크를 비롯한 주요 거점에 지회와 분사무소를 설치했고, 회원은 남녀 구분 없이 21세 이상의 성인이면 누구나 가입할 수 있었으며, 회원을 신중히 엄선해 가입시켰다.[23]
회원이 되기 위해서는 3인 이상의 보증인이 연서한 입회 원서를 의사부에 제출해야 하며, 입회 원서 제출자가 50인에 달하면 의사부는 정기 총회나 임시 총회를 소집하여 입회 원서를 심사한 후 허가를 얻은 자는 의사부 의장이 주재하는 엄숙한 입회 의식을 치뤄야 했다.
- 본회
- 니꼴라예프스크지회
- 회장: 김주악
- 부회장: 최운학
- 총무: 김능한
- 서기: 김게을기
- 검사원: 정길남, 최세면, 이주형, 고명수, 김빠레리
- 화발포지회
- 이만지회
- 회장: 강이
- 부회장: 장명중
- 총무: 박대성
- 서기: 박공삼, 강알점이
- 의사원: 주도심, 이병희, 감성문
- 검사원: 채한묵, 최형권, 김다니이
- 소왕령지회
- 회장: 김야곱포
- 부회장: 김시약
- 총무: 안민학
- 재무: 김리직
- 서기: 김삼손, 한창근
- 의사원: 문창법, 장성일, 김도맨디
- 검사원: 김와실리, 빅토르핀, 황두진, 박와실리, 김이완
- 교육부장: 문창범
- 실업부장: 김인학
- 종교부장: 김박홍
- 언론부장: 박병순
- 사찰부장: 최주형
- 연추지회
- 회장: 박윤여
- 부회장: 김알렉산드르
- 총무: 김뽀들이
- 재무: 정니꼴라이
- 서기: 채니꼴라이, 김미하유
- 의사원: 최봉준, 박이반니완노비치, 전니골라이, 채두성
- 검사원: 그리고리미하유노비치(아인), 김안들레이, 박제방, 최와실리
- 도비허지회
- 회장: 빅창욱
- 부회장: 강진석
- 총무: 김종철
- 재무: 이영석
- 서기: 채규영, 김윤하
- 의사원: 허남윤, 강윤용, 김문약
- 검사원: 최내범, 가여천, 오정여, 신동육
- 교육부장: 최만익
- 실업부장: 오두현
- 러시아지역 종교부장: 신여천
- 사찰부장: 채(?)상정[26]
- 빠쓰께분사무소
- 소장: 김사현
- 재무: 허봉의
- 서기: 이기, 최승건
- 의사원: 이도연, 김낙원, 김명세, 이명극, 여응규, 신학선
- 검사원: 허계
- 탕랑수분사무소
- 소장: 이공보
- 재무: 이면기
- 서기: 한강일
- 간사원: 이지송, 이병식, 김원백
- 수청 구허통분사무소
- 소장: 강재성
- 서기: 정순철, 박창학
- 간사원: 장득재, 신흥주, 이상준, 김중선, 박낙천, 최화준
- 재무: 이도현
- 종교부장: 류우용
- 교육부장: 김병흠
- 실업부장: 김보현
- 종교부장: 신여천
4. 권업회의 활동
4.1. 언론활동, 《권업신문(勸業新聞)》
* 「아령[27]동포에게 고하노라」, 『勸業新聞』(1913.7.21.), 이동녕
* 「조카와 친고 찾소」[28], 『勸業新聞』(1914.07.19.), 김춘여
* 「광고료(廣告料)」, 『勸業新聞』(1912.05.26), 제 4호[29]
* 「조카와 친고 찾소」[28], 『勸業新聞』(1914.07.19.), 김춘여
* 「광고료(廣告料)」, 『勸業新聞』(1912.05.26), 제 4호[29]
권업회는 1911년 7월 3일[30] 청년근업회와 통합했다. 당시 청년근업회에서는 1911년 6월 18일부터 대양보를 발행하고 있었고, 사장에는 최재형, 주필에는 신채호[31][32]가 있었다. 그 후 1911년 12월 17일 러시아가 공식적으로 권업회를 인정하자, 권업회에서는 신문부를 따로 두고 신문부 총무에 한형권, 부장 겸 주필에 신채호 [논의] [34]등을 임명하며 신문 간행을 준비하고 마침내 1912년 4월 22일 권업회의 기관지인 권업신문 제 1호를 석판 인쇄로 창간하게 된다. 권업신문은 순한글로, 매주 일요일에 간행되었다.[35] 이후 1914년 8월 30일까지 총 126호가 간행된다.[36] 권업신문은 크게 논설과 잡보로 구성되었는데, 논설에서는 권업회의 입장을, 잡보에서는 재러한인의 동향을 게재했다. 권업신문에 참여한 주요 인물로는 신채호, 이상설, 윤해 , 김하구, 장도빈 등을 들 수 있으며, 이들은 대부분 국내외에서 언론에 종사했던 인물들이다.[37]
신문에서는 재러한인의 권익옹호와 민족문제에 대해 다뤘다. 재러한인의 권익옹호 측면에서는 농작지 개척, 입적청원 등의 활동을 전개했으며 민족문제에서는 재러한인의 계몽과 민족의식 고취에 대한 기사를 작성했다. 대표적으로 1912년 8월 29일 국치일을 맞아 기념호를 내고 발표한 신채호의 논설 '이날'을 들 수 있다. 이 글에서 그는 “동포들에게 일본에 치욕을 당한 이날을 기억할 것”을 강조했다. 1913년에도 국치일을 맞아 특별호를 간행했는데, 2면에는 이상설이 ‘창회자’라는 이름으로 '이날을'이라는 글을 싣었다. 또한 105인 사건을 비롯 항일운동 기사들을 싣기도 했다.[38]
권업신문은 그 당시 해외에서 간행된 몇 안되는 민족지 가운데 하나라는 점에서 의의를 가지고 있으며, 미주의 신한민보, 신한국보를 비롯한 항일민족의식을 선도하는 3대 언론으로 꼽해기도 한다. 특히 권업신문은 신한민보와도 서한으로 교류했음을 자료들을 통해 알 수 있다.[39][40] 권업신문은 후에 폐간되고 한인신보가 이를 계승하게 된다.[41]
4.2. 교육활동
권업회는 교육활동에 있어서도 큰 중점을 두었다. 블라디보스토크 개척리에서 신한촌으로 이주한 계동학교를 개편해 한민학교(韓民學敎)로 확장했을 뿐 아니라 한인마을이 들어선 곳마다 한인학교가 설립되었다. 설립된 한인학교에서는 민족주의 근대교육을 수행했다. 그중 한민학교는 1912년 권업회의 주관으로 신한촌 한민회와 공동으로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 세워진 4년제 한인학교로, 단순 교육 기관 그 이상의 역할을 수행했다.[42] 한민학교는 제 28소학교로도 불리며 신한촌 중심에 위치했다.[43] 한민학교는 『한인신보』의 사무실 및 각종 반일운동의 집회장소로 이용되었으며, 민족주의 교육을 상징하는 장소로서 기능했다.[44]이외에도 장로교계의 삼일여학교와 정교회의 해광학교 등 다양한 한인 학교들이 존재했고, 권업회는 이러한 학교들을 여러 방면에서 지원했다.
당시 연해주 지역에 위치한 학교는 계동학교, 동령학교, 희랍교부속소학교, 보의학당, 한민학교, 한민여학교, 학교(연해주 향산동(香山洞)), 조선인노어학교, 보통학교, 단급소학교, 이급소학교 등을 비롯해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부터 니콜리스크까지 다수의 지역에 분포해 있었다.[45]
4.3. 한인 실업권장
권업(勸業)회는 권업(勸業)이라는 뜻에 맞게 한인들의 실업의 권장하고 권익을 향상시키기 위한 업무 또한 수행했다. 특히 1861년 개편된 러시아의 이미 규칙에 따라 한인들은 러시아 이주가 쉬워졌는데, 이는 당시 극동러시아 지역이 저개발 상태로, 인구밀도도 낮고 방치되어있던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러시아 당국의 계산과 한인의 실업을 장려한다를 겉으로 표방했던 권업회는 매우 잘 맞았다. 권업회는 당시 러시아 당국의 한인 우호 정책과 더불어 한인들의 러시아로의 귀화를 지원하고, 어업 전진기지로의 건설, 토지 조사를 통한 한인 정착, 블라디보스토크 항만과 도시 건설 등에 참여하며 한인들의 경제활동을 증진했다.[46]4.4. 권업회의 이면, 대한광복군정부
권업회는 표면적으로는 재러 한인들의 권익 보호 및 교육을 진흥하는 단체처럼 보이지만, 사실 '조국독립'의 목표를 위해 무장 독립 운동을 지원하고자 했다. 1914년 재러한인 러시아 이주 50주년을 맞아 이상설[47]을 정도령으로 선출해 국내외 독립운동을 주도 및 독립군 항전을 준비했다. 이 과정에서 양군호와 해도호를 비롯한 여러 비밀 결사를 운영하기도 했다. 그러나 제 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내전의 장기화로 인한 어지러운 정세 속에서 러시아는 일본과 동맹국이 되게 되고, 한인의 러시아 내 활동이 탄압받으며 큰 타격을 받고 해체되게 된다.[48]5. 권업회의 해산
<매일신보>, 「勸業會 해산, 勸業新聞 발행금지」, 재단법인 한국연구원 소장본
본 자료는 매일신보사에서 발행되었던 자료로, 권업회가 해산, 권업신문이 발행금지 되었던 것을 다루고 있다.
5.1. 권업회 해산 그 이후, 사이토 마코토 부임, 흔들리는 연해주 정세
권업회 해산 이후 우수리스크, 블라디보스토크를 포함한 연해주 지역 정세는 큰 위기를 맞게 된다. 먼저 러시아는 적백내전[적백내전]이라고도 불리는 러시아 내전으로 혼란스러운 국면에 접어들며 길고 긴 이념 싸움을 시작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연해주 지방의 한인들은 일본과 싸우기 위해 적군에 가담했다. 한인들은 주로 이념적인 측면보다는 일본과 싸우기 위해서 적군에 가담했다.[53] 당시 일본은 적군의 대항 세력인 백군을 이용해 간접적으로 연해주 지역의 항일 세력을 통제하려 했고 직접적으로는 개입을 하지 않았으나,[54] 1919년 8월 12일, 국내외 항일 운동가들의 적극적인 검거를 주장하던 사이토 마코토가 조선의 3대 총독으로 부임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같은 해 9월 강우규 선생의 수류탄[55] 저격을 당하게 된다. 여기서 문제가 된 것은 바로 강우규 의사가 노인 동맹 단원이었으며, 본 동맹은 블라디보스토크를 근거로 했다는 것이다.이후 사이토 마코토는 러시아 극동 지역과 만주의 직접적인 통제를 일본 총리에게 촉구한다. 더불어 이전과 같이 백군을 이용해 간접적으로 통제하는 방식이 아닌, 헌병대의 파병을 통한 직접 통제를 할 계획을 수립하게 된다. 그러던 중 러시아 내전의 진행 과정에서 백군 진영이 무너지게 된다. 간접적으로나마 통제하던 백군 진영이 무너지자 재러 한인 동포들과 만주, 연해주 등지의 독립운동가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항일 운동을 전개한다.[56]
...그러나
5.2. 연해주 4월 참변, 한인 학살과 조선인거류민회
1920년 4월 4일 밤[57], 일본군은 철병하겠다는 공식적인 선언과는 반대로 무장 해제당한 한인 부대들을 공격하고 신한촌 일대의 한인 학교를 비롯, 한인 마을을 공격하기 시작한다.[58] 이는 연해주 4월 참변의 서막을 알리는 것이었다. 4월 참변으로 권업회의 핵심이라 불리던 최재형(독립운동가)을 비롯한 다수의 한인 지도자들이 사살[59]되었을 뿐 아니라 연해주 한인사회는 큰 타격을 입었다.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는 약 300명이 살해되기도 했다.[60] 이로 인해 반일 운동을 전개하던 상당수의 한인들은 만주나 아무르주로 피신하게 되며 연해주 한인사회에는 긴장감과 분노가 감돌게 된다. 이후 일본은 한인사회를 회유하고자 조선인거류민회를 설립[61]했으나 친일 문제를 비롯 이념 싸움, 한인 간 갈등, 러시아 내전의 전세 역전 등 복잡한 정세 속에서 1922년 일본군이 러시아에서 철수하며 해산된다. 이후 반일 인사들에 의해 한인민회가 조직되게 된다.[62]
6. 의의와 논의사항
권업회는 1910년대 비교적 짧게 존속된 단체였으나, 20만명에 가까운 거대 재러 한인사회를 바탕으로 러시아 극동지역의 독립운동을 지원했을 뿐 아니라, 한인사회의 권익을 위해서도 일했다는 점에서 단순히 독립운동만 전개한 독립단체로 보기보다는 독립과 더불어 한인사회의 전반적인 발전을 위해 중추적인 역할을 한 단체로 확장해서 볼 필요가 있다.더불어 기관지로 발간된 《권업신문(勸業新聞)》의 경우 대표적인 재외 한인 동포들의 매체로, 광고를 통해 한인 사회 내부를 전달했을 뿐 아니라 여러 한인 유력자들의 기고, 한인사회의 교육에 대한 글, 국제 정세에 대한 글을 싣었다. 《권업신문(勸業新聞)》은 신채호 선생을 주필로 「조카와 친고 찾소」와 같은 사적인 글부터 「아령 동포에게 고하노라」와 같은 기고문까지 다양한 성격의 글들을 게재하였으며, 권업회에 대한 홍보와 가입 독려 등 한인 사회에서 단순 언론 그 이상의 역할을 수행했다.
이러한 점에서 미루어 보았을 때, 권업회는 러시아로부터 연해주 한인의 자치기관의 지위를 인정받아 러시아 당국의 행정기능을 대행했을 뿐 아니라 한인들의 권익 보호 및 교육 장려, 한민학교 설립 등의 교육적 측면과 한인농업단지 조성 등의 계획을 세우고 연해주 인근의 단체와 조직과도 소통하는 등 재러 한인 사회의 중추 그 이상의 역할을 수행한 단체로 볼 수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은, 권업회가 비교적 일찍 해산되며 한인 노령이주 50주년 기념사업 계획이 적극적으로 이행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더불어 권업회의 활동은 겉으로 러시아 당국이 원하는 방향성과 일치해야 했기에, 무장 독립 투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하고자 했던 이동휘, 이상설, 이동녕 등의 민족운동가들과는 그 노선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독립전쟁을 통해 주권을 회복하고자 했던 민족운동가들은 1914년 이상설을 정도령으로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우게 되고, 무장 운동을 전개하려 했으나 모체인 권업회가 해산당한 뒤 큰 타격을 입고 해체되게 된다.[63] 이후 설립된 연해주 지역에서의 단체들과 한인민족운동이 연해주 4월 참변과 자유시 참변 등으로 위축되고, 혼란한 정세로 인해 큰 규모로 성장하기 어려웠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권업회가 얼마나 중요하고 큰 역할을 수행했었는지를 알 수 있다.
7. 기타
권업회 말기 및 해산 이후 시점의 연해주 지역 단체들의 경우 그 자료가 부족한 경우가 많다. 이는 당시 러시아 내전으로 인해 정세가 혼란스러웠을 뿐 아니라 1차 세계대전과 일본의 연해주, 만주 지역으로의 영향력 확대로 인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의 단체로는 대한광복군정부, 한족 중앙 총회, 대한국민의회 등이 있다.8. 같이 보기
[1] 이동휘가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 1914년 1월 7일, 독립기념관[2] [3] 출처: 권업회 (勸業會)-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4] 김립으로 잘 알려져 있다. 훗날 고려공산당과 국제공산당 간 신경전에서 불거진 모스크바 자금 운용 문제로 인해 피살당한다.[5] 반병률. (2006). 잊혀진 비극적 민족 혁명가, 김립. 내일을 여는 역사, (26), 98-112.[6] 일제의 밀정으로 유명한 그분 맞다(...)[7] 윤병석. (2009). 1910년대 국외항일운동 Ⅰ-만주•러시아: Vol. 16권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8] 신승권,「러시아와 한국독립운동」(『한민족독립운동사』6, 국사편찬위원회, 1989), 291쪽[9] 김정주,『조선통치사료』7,(한국사료연구소, 1971) 614쪽[10] 『권업신문』.1913.8.31.「루령(러시아령) 거류 조선인 문제」, 독립기념관[11] 러일범인인도조약[12] 곧닫지 총독(...)[13] 『권업신문』.1913.8.31.「루령(러시아령) 거류 조선인 문제」, 독립기념관[14] 박환. (1993).《勸業新聞》에 대한 일고찰. 사학연구, (46), 145-208.[15]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 일대...[16] 윤병석, 「1910년대 연해주 지방에서의 한국독립활동」(『국회한국인사회와 민족운동』, 일조각, 1990)[17] 당시 재러 한인사회의 세력 간 갈등은 심한 상태였고, 정순만 피살 사건과 관련해서는 신한민보와 같은 미주 한인 언론과 미주 한인 지도자들도 첨언을 할 정도로 큰 사건이었다.[18] 박걸순. (2009). 沿海州 韓人社會의 갈등과 鄭淳萬의 피살. 한국독립운동사연구, 34, 243-281.[19] 김슬기. (2022). 제1차 세계대전 시기 제정 러시아의 전시정책과 연해주 한인사회의 대응. 한국독립운동사연구, 79, 153쪽.[20] 『권업신문』.1914.2.8.「포고」.[21] [22] 윤병석의 위 서적에서 재인용[23] 권업회-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24] 청산리 전투 참전, 한국광복군 참모장 등으로 항일 무장투쟁에 활약 후 대한민국의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을 지냈다.[25] 신흥무관학교의 주역인 그 분 맞다.[26] 이름이 명확치 않다[27] 러시아령. 러시아의 한자식 표기 중 하나인 아라사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28] 회령군 고령사는 김은세(金銀世)는 본인의 조카 ●●(年 四十四) 정미년 오월분에 아령(러시아령)으로 왔는데 간곳을 몰라 이에 광고하오며 또 남순현(南順現)은 본인의 극진한 친고인데 계묘년 十월분에 서로 이별한 후 간 곳을 알지못하나 이에 같이 광고하오며 이 두 사람 잇는 곳을 아시는 이는 해삼(블라디보스토크) 권업신문사로 통기하여 특히 감사하겠삼.[29] 第一면에는 매일一행에 十錢第二, 三면에는 매일一행에 十五錢第四면에는 매일 一행에 五錢열 줄 안에 드는 광고는 열 줄 값을 받고 一삭 동안에는 百에 十을 감하며 각 면에 노동과 고용할 처소를 구하는 광고는 특감하여 각 면 매일 一행에 二전씩 감하며 화변(花邊)이나 대서(代書)로 게재하는 광고는 제一면에 十五錢, 제二, 三면에 二十錢, 제四면에 十錢씩이요. 외국인의 광고는 국문과 한문으로 번역하여 소원대로 게재함.[30] 러시아력[31] 단재 신채호 선생은 대양보부터 초기 권업신문까지의 주필을 맡게 된다.[32] 반병률. (2016). 단재 신채호의 러시아 연해주 독립운동. 한국학논총, 46, 365-392.[논의] 신채호의 주필 활동 시기에 대해서는 논문마다 견해가 갈린다. 후술할 각주의 논문은 1912년 9월 주필 사임설을 부정하고 1913년 7월 경까지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며 글을 써왔다고 주장한다[34] 김주현. (2015). 단재 신채호의 <권업신문> 활동 시기에 대한 재검토. 한국독립운동사연구, 51, 5-44.[35] 박환. (1993).《勸業新聞》에 대한 일고찰. 사학연구, (46), 145-208.[36] 1914년을 끝으로 권업신문은 정간되었다.[37] 박환. (2000). 러시아 지역의 한인 언론사. 신문과방송, 145-151.[38] 한국언론진흥재단. (2007). 산업실태조사 재외동포 언론 실태와 현황. 한국언론진흥재단.[39] 권업신문사 사원 윤해가 신한민보사에 보낸 서한(1914.2.20.), 독립기념관[40] 1914년 2월 20일 권업신문사 사원 윤해가 신한민보사에 보낸 서한. 작년 9월 13일과 10월 3일자로 발부한 공함을 3, 4개월이 지나도록 회답 못한 데 대해 유감을 표하고 본보 대금 12원 50전을 영문 우편함 184호로 신채호의 명의로 발송했다고 하나 아직까지 우편국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없다고 했다. 본사로 부치는 신한민보나 각종 통신을 영문으로 해삼위 우함 213으로 기록해 보내면 누락되지 않을 것 같다고 신한민보사에 알렸다.[41] 김치보-공훈전자사료[42] 한민학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43] Из доклада комиссии по обследованию событий 4- 6 апреля в г. ладивостоке, представленн ого Временному правительству - Приморской областной земской управе (연해주 젬스트보 임시정부에 보내는 블라디보스토크 4월 4-6일 사건 조사위원회의 보고서에서), 1920, РГИА ДВ, ф.28, оп.1 д.1119. лл.71-73, А.А. Торопов, Н.А. Тройцкая, Э.В. Ермакова, Корейцы на российском Дальнем Востоке (вт.пол.ⅪⅩ-нач.ХХ вв.): Документы и материалы в 2-х книгах, Владивосток: РГИАДВ, 2004, с.1, 재인용[44] 國學資料院, 『日帝暗黑期統治史料集10』, 서울: 國學資料院, 2001 재인용[45] 1916. 12 현재(일제의 조선군 헌병대 조사) 강덕상의 ≪현대사자료≫ pp.165∼168 재인용[46] 연해주에 한인 1만명 정착해 만든 독립운동 중심기지죠, 조선일보, 2023.02.02.09:49[47] 후술하겠지만 권업회에서도 이상설, 이동녕, 이동휘 등은 무장독립투쟁을 통한 주권 회복을 강하게 주장하는 민족주의자적 면모가 두드러지는 인사들이었다.[48]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종호, 공훈전자사료관,(https://e-gonghun.mpva.go.kr/user/IndepCrusaderDetail.do?goTocode=20003&mngNo=8911)[49] 이정은. (1997). 3.1운동을 전후한 연해주 한인사회의 독립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11집.[50] 김치보-공훈전자사료[51] 김슬기. (2022). 제1차 세계대전 시기 제정 러시아의 전시정책과 연해주 한인사회의 대응.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79집[적백내전] 볼셰비키 정부군과 대항군의 이념 싸움으로 번진 러시아 내전에 관해서는 러시아 내전 문서에서 자세히 확인할 수 있다.[53] 이는 곧 자유시 참변이라는 안타까운 참변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54] 하라 테루유키, 「러시아 연해주에서의 한인 운동 1905년 ~ 1922년」, 『소비에트 한인 백년사』, 태암, 1989년, 29쪽[55] 김영범(金榮範), 제26권 의열 투쟁 Ⅰ - 1920년대, 30쪽 ~ 32쪽[56] 반병률, 「러시아 연해주 지역의 4월 참변과 한인 학살」, 충남대학교 충청 문화 연구소, 『제노사이드와 한국 근대』, 2009년, 145쪽[57] 논문에 따라 5일 새벽으로 규정하기도 한다.[58] 山崎眞雄(朝鮮總督府 事務官)→朝鮮總督 외 2명, 浦發 제69호, 「大檢擧後二於ケル鮮人ノ感想」, 1920.4.12., 121쪽, 『在外鮮人關係綴』재인용[59] 당시 최재형은 우수리스크의 부시장으로 있었다. 그러나 일제에 의해 총살당한다.[60] 하라 테루유키, 「러시아 연해주에서의 한인 운동 1905년 ~ 1922년」, 『소비에트 한인 백년사』, 태암, 1989년, 31쪽, 재인용[61] 송영화. "1920년 ‘4월참변’ 후 일본의 통제와 블라디보스토크 한인사회." 국내석사학위논문 성균관대학교 일반대학원, 2019. 서울[62] 박환, 「러시아혁명 이후 블라디보스토크 조선인거류민회의 조직과 활동」(『한국민족운동사연구』 90,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7)[63] Byung Yool Ban(반병률),<Korean Nationalist Activities in the Russian Far East and North Chientao, 1905∼1921>(Ph. D. Dissertation, University of Hawaii, 1996), pp. 162∼1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