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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거란 전쟁/음악#s-2.1| Part 1
비상]]
서도밴드
2023. 12. 15.[[고려 거란 전쟁/음악#s-2.2| Part 2
폭풍]]
김장훈
2023. 12. 29.[[고려 거란 전쟁/음악#s-2.3| Part 3
적동
(붉은겨울)]]
안예은
2024. 01. 18.[[고려 거란 전쟁/음악#s-2.4| Part 4
그 겨울에
나는]]
IYAGI (이야기)
2024. 02. 03.그 외 오리지널 스코어는 음악 문서 참고.
1. 개요2. 내용 비판3. 제작진들에 대한 비판
3.1. 10-11월, 제작진의 방영 전 인터뷰3.2. 12-1월, 원작자의 방영 초 비판3.3. 1월 13-14일, 17-18회 방영 이후3.4. 1월 23일, 제작진과 원작자의 공방3.5. 1월 24일, 원작자의 추가반박3.6. 1월 25일, 제작진의 제1시청자청원 답변3.7. 1월 26일, 시청자들의 트럭 시위3.8. 1월 27일, 제작진의 제2시청자청원 답변3.9. 1월 29일 이후
4. 유사 사례5. 여담1. 개요
KBS 대하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의 17회를 기점으로 시작된 역사 왜곡 논란을 정리한 문서.2. 내용 비판
2.1. 17~20회 비판 (5도 양계 개혁 시기)
2.1.1. 1월 13일, 17회
- 현종 비하
- 개혁을 꾸려나가려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그려내지 못했다. 호족 제압의 당위성은 있으나 대신들과 최소한의 화합 없이 무조건 빨리 일을 실행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만 하다가 결국 대부분의 신료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다. 이는 역사에 없는 기록이므로 지나치게 격하시킨 왜곡으로 볼 수 있다.
- 탁사정을 용서한 일도 현종을 너무 성인군자처럼 그리려다가 불공을 드린답시고 대도수의 부인과 양규의 부인을 포함한 전쟁 영웅의 유족들을 탁사정과 같은 자리에 있게 하는 무리수를 벌이는 모습까지 보여주었다. 이 정도면 현종을 사이코패스 수준으로 묘사하면서 눈물짜기를 시도한 것밖에 안 된다.[1]
- 강감찬이 뜻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역사에도 없는 파직을 시켰다. 일반적으로 중앙 정계에 있는 공신을 임금과 뜻이 다르다는 이유로 내칠 때는 지방관에 파견해 잠시 자리를 비우게 하면 될 뿐 사직한 관료들도 다 불러들이면서 강감찬만 파직한 건 그저 현종을 억지쟁이로 만든 수준의 연출이다. 실제로 1012년 강감찬은 동북면행영병마사로 파견되기도 했다. 최사위/채충순처럼 지방으로 좌천시키는 식으로도 충분히 설득력을 확보할 수 있는 상황이다.
2.1.2. 1월 14일, 18회
- 현종 비하
- 아무리 경험 없는 어린 군주라고 해도 너무 암군처럼 그려진다는 비판 여론이 폭발하였다. 목종이 훨씬 더 성군같다거나 극중의 현종을 현쪽이라고 비하하는 별명도 생겼다. 오늘 회차 무리수 전개 모음 #
- 현종이 강감찬과 뜻이 부딪치자 목을 조르려 한 장면도 현종 비하 논란이 일었다. 과거 이정우 작가의 작품 태종 이방원에서 이방원과 신덕왕후가 서로 목을 조르려고 했던 장면이 있었음이 발굴되었다.
- 현종이 징징거리며 말을 몰고 나갔다가 수레에 치여 낙마하는 장면은 지나친 비하라는 반응이 컸다. #[2]
- 황당한 전개로 유명한 〈재벌집 막내아들〉 드라마판에 비유하여 '개경집 땡중아들'이라는 조롱도 나왔다.#[3]
- 암군이었던 고려 우왕이 실제로 궁 밖에서 낙마해 수레에 실려 돌아왔던 전적이 있기 때문에(『고려사』 우왕열전 7년 6월), 현종을 암군으로 비하하려는 제작진의 역사 왜곡 의도가 있다는 평도 나왔다. #
- 이 낙마 씬을 계기로 KBS 홈페이지에서는 이를 비난하는 시청자들의 의견이 대량 게시되기 시작했다. #
- 지나친 호족 위세 과장
- 고려가 호족의 힘이 강해 왕권의 위협이 될 수도 있다는 설명은 역사적 사실과도 부합하고 17~21화에 걸쳐 등장하는 호족들이 반발해 생겨난 사모임은 충분히 개연성이 있을 수 있지만 기존 퓨전사극들의 비밀조직인 밀본을 연기했던 안석환, 송옥숙 배우가 등장하면서 우려를 더 했다. 이에 '또 대하드라마에 퓨전 사극 요소를 도입하는 것이냐 제대로 역사를 반영해달라'는 비판 여론도 나왔다. #
- 다만 중앙에서 지방 유력호족들이 누군지 모를리도 없어 비밀결사라 칭하긴 무리가 있으며 <천추태후>처럼 망국의 부활 등 비역사적 요소가 아닌 이권단체에 가까운 모습이다. 이는 김훈-최질의 난으로 이어질 포석으로 예측되기도 했으며 실제 21화에서 그렇게 전개되었다.
2.1.3. 1월 20일, 19회
- 원정왕후 비하
- 실제 역사에선 몽진과정 유산의 아픔을 현종과 공유하는 사이이며 현종이 소중하게 여긴 사람들을 모신 현화사에 초상화 걸린 유일한 왕비이기도 하다. 원정왕후는 현종의 첫 왕후로 생전부터 사후까지 왕후의 지위를 유지했다. 실제 아들을 낳아 현종의 후대를 잇게 한 원성왕후는 현종 생전에는 후궁이었으며 현종 사후 아들이 왕위에 오르면서 태후가 되었고 사후에야 원성왕후로 추대되었다. 즉, 현종 생전 황가의 여인들 중에선 원정왕후만이 유일하게 왕후로의 지위를 가졌던 것이고 실제 황가 여인들 중 오직 원정왕후만이 현화사에 초상화가 걸렸다. 현화사는 현종이 직접 부모를 위해 창건한 왕실 사찰로 실제 역사상 현종에게는 원정왕후가 그만큼 각별했던 것이다. 괜히 억지로 두 사람간의 갈등을 조장하니 시청자 입장에선 둘 다 실제 기록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역사 왜곡이라고 느낄 수 밖에 없다.
- 원정왕후가 직접 나서 국문을 진행하여 원성왕후를 꿇리는 점은 역사에 당연히 없다. 심지어 친국을 참관하다가 한 마디씩 얹는 것을 넘어 원성왕후를 조롱하고 겁박하며 자기 스트레스를 푸는 것처럼 묘사해 놨다. 질투심에 눈이 멀어 황제이자 부군이 중병으로 쓰러진 사이 정전을 자기 마음대로 희롱하는 간신배에 소인배로 만들어 버렸다. 다음화 예고편에서 "내쫓으려다 그 여식까지 들였소"라며 원성왕후를 질투하는 징징거림은 유산 직후에도 황실의 안위를 걱정하며 현종에게 여인을 더 들여 자손을 보라고 했던 귀족스럽던 모습과 배치되는 옹졸함이라 캐릭터성 붕괴와 전환을 납득하기 어렵다는 시청자 반응도 많다.
- 현종 다음 왕의 어머니가 원성왕후일 뿐인데, 원정왕후는 기록이 적다고 하여 별로 중요하지 않게 여겼는지 개혁에 반대하는 왕후로 설정한 것으로 보이는데 결국 원성왕후를 올려치기 위해서 원정왕후가 나쁘게 가는 괴상한 구도를 잡은 것이 아니냔 해석이 나왔다. #
- 언론들이 OSEN 최이정 기자의 기사를 인용해 퍼뜨린 '여성 서사 증가'라는 표현이 화제가 되자 피난길 함께 겪고 유산도 해서 생전 애틋했던 아내를 질투로 멀어진 악녀로 폄하하는 것이 여성 서사냐는 비판도 나왔다. 원정왕후는 악역으로 묘사되는 19회에서도 밤을 새워가며 의식불명의 현종을 간호하는데 돌아온 건 그녀를 꺼리는 현종의 매정한 말뿐이어서 현종을 싸패처럼 묘사한다 너무한 거 아니냐는 비판이 많다. 이래서야 누가 악역인지 주객전도가 된 꼴이다.
- 권위적으로 해석된 개혁 과정
- 김은부가 비리를 저지른 간신으로 폄하되었다. 그래 놓고 '황제의 장인이 되면 죄가 없어진다'며 논리보다 권위로 짓누르는 식의 전개를 펴며 강감찬과 김은부와 현종을 함께 폄하했다.
- 원작자는 "고려의 지방제도는 소손녕의 침공을 계기로, 성종과 서희가 서북면과 동북면을 설치하고 중앙군을 정비하여 기본 뼈대를 완성시킵니다. 현종 때의 개혁은 거기에 살을 붙이는 정도"였으며 드라마의 묘사가 '전혀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 차라리 궁중암투(내부)보다 해적등장(외부)에 의한 전개가 개연성이 있다. 1011년 8월 동여진 해적의 대대적 침략에 고려 3대 수도인 동경(경주)마저 침략당했다. 이에 현종은 '김은부 개혁안 반대파'인 강감찬을 동북면행영병마사로, '김은부 개혁안에 따라' 강민첨을 안찰사로 동시에 파견한다. 강감찬은 문제를 일으키며 현실을 배우고 강민첨이 경주 호족들을 달래가며 여러 곳에 성을 쌓는 것을 보면서 김은부도 현실을 배운다. 이 과정에서 개혁안이 보다 다듬어지고 1012년 1월 현종이 5도 양계로 발표하는 것이 개연성이 있다.
2.1.4. 1월 21일, 20회
- 현종 비하
- 황제가 고작 십수명의 호위만을 대동했으며 호족들의 무장들보다 훨씬 적은 수임에도 그 한 가운데로 나아갔다.
- 몽진 과정 때와 같이 '나를 베시오'라는 무리하게 들이미는 스토리 전개를 사용했으며 호족은 겁도 없이 황제의 목에 칼까지 들이밀었다. 당연하지만 한반도의 역사에서는 아무리 신권이 강했던 시기였어도 감히 왕의 목에 칼을 들이밀게 된다면 그 즉시 삼대가 멸족될 역모죄였다. 참고로 고려는 이미 4대 황제 광종 시절에 저딴 짓을 하려고 든 호족들의 모가지를 모두 육체와 분리시켰던 적이 있다.
- 원성왕후 캐릭터 붕괴
- 황제도 오가기 어려운 지역들을 여인의 몸으로 홀로 오가며 탐문하고 호장 박진과도 당당히 마주하는 등 당당했던 캐릭터를 주었던 이전 화들과 달리 궁녀들에게 김씨 부인으로 '놀림받는' 처지로 몰락하고 수동적인 캐릭터가 되었다. 당당한 캐릭터로 갈 것이라면 궁녀들을 휘어잡는 모습을 보이거나 겸손한 캐릭터로 갈 것이라면 궁녀들과 교감하는 소탈한 모습을 보였어야 개연성이 있다.
- 강감찬 캐릭터 붕괴
- 거란에 포로가 되어 고문을 받는다는 무리수적인 전개가 들어갔을지언정 인물 묘사만큼은 확고했던 강감찬의 캐릭터성마저 무너진다.
- 작품 내에서 이전까지의 강감찬은 소신을 굽히지 않고 외골수적이며 그것을 남에게 드러내는 면모를 보일 때도 많은 인물이기는 했으나 국익이나 대의를 위해서는 이러한 면을 숨기고 연기를 하거나 거짓을 말하는 등 소신과 반대되는 행동도 능청스럽게 잘 해 왔던 인물로 그려졌다. 그런데 20회에서는 강감찬이 호족 비밀 회합에서 황제를 모욕하는 호족들의 언사를 견디지 못하고 분노해서 정론을 말하다가 죽을 위기에 처한다. 이러한 전개는 강감찬에 대한 그동안의 묘사와 상반된다.
- 기존의 캐릭터성대로라면 강감찬이 호족 회합에서 분노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아야 개연성이 충족된다. 대신 중요한 정보를 파악해서 현종에게 도움을 주거나 심지어 호족들에게 기막힌 술책이라도 주는 것처럼 유도한 후 현종에게 그 계책을 알려서 호족들을 제압하는 데 공헌을 하는 등의 내용이 들어갔어야 강감찬에게 어울렸을 것이다. 그러나 호족 회합을 다룬 20화 후반부 전개에서는 강감찬이 감정을 추스리지 못하는 면모만 튀어나왔다.[4][5]
- 한편 위 같은 내용으로 인해 추가로 발생한 문제도 있다. 당시 강감찬의 나이는 60대인데 11세기라면 아무리 잘난 집안 사람이라도 진갑을 넘겨서 사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게다가 강감찬은 삼한벽상공신 강궁진의 아들이다. 강궁진이 진주 강씨의 분파인 금천 강씨의 파시조이고 강감찬이 강궁진의 아들임을 본다면 한마디로 강감찬이 집안에서 가장 큰 어른이 되어야 마땅하다. 설령 그보다 나이 많은 어른이 있다고 해도 아버지의 배경과 한림학사승지라는 기관장급 관직까지 지낸 경력을 생각하면 강감찬의 발언권도 부족할 수 없고 따라서 당시 금천 강씨 가문의 수장은 강감찬이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럼에도 20화에서는 강감찬이 집안에 반기를 든다며 정체불명의 호족이 목을 베려고 드는 비역사적인 묘사가 나왔다. 이것은 금천 강씨에 대한 몰이해의 소산이며 작가 이정우가 강감찬이 집안에서 어떤 위상을 가졌는지에 대한 역사적 고찰 자체를 하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21회에서 해당 인물이 강감찬을 조카라고 부름으로써 숙부임이 확인되었으나 상술한 대로 강감찬의 입지도 상당하였을 테니 작중 묘사 같이 말단마냥 쭈그려 있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 뜬금없는 CG
- 뜬금없이 강감찬 낙성대 설화를 재현하여 리얼리즘을 강조하던 본작의 분위기도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그간 고려사에 기재된 유성이나 돌풍 등의 기이한 일화들을 이전까지는 최대한 배제한 주제에 갑자기 판타지로 극을 전개하여 매우 비판이 많이 쏟아졌다.[6]
- 차라리 본작의 부실한 병력을 보충하는 CG가 나왔으면 모를까 구가의 서처럼 퓨전사극 같은 데서나 나올 판타지스러운 CG가 나와서 정통사극이 아니라 판타지 사극이냐는 반응과 태왕사신기, 외계+인 3부, 별에서 온 그대, 신비한 TV 서프라이즈가 되어 버렸다는 반응이 나오면서 사람들에게 엄청난 비난과 조롱을 받았다.[7] 차라리 곽주 전투의 유성 기록을 재현하는 게 낫겠다는 의견도 강하게 제시되었다. # 한마디로 역사를 다루는 드라마에 역사적 사실이나 고증을 생각하지 않고 작가가 오로지 자신의 작품이라는 생각으로 폭주했다는 것이다.
- 전개 지연 우려
- 이에 제2차 여요전쟁(6~16회) 및 속도감 있었던 빌드업(1~5회)에 반해 무리한 궁중 암투 및 호족 탄압 전개에 무려 5회(17~21회)씩이나 낭비할 가치가 있었는지에 대한 비판이 나왔다. 1018년의 제3차 여요전쟁 자체를 묘사할 4개의 회차를 제외한 6년간의 내용을 8회(21~28회)만에 담아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 단순하게 전개를 지연시킨 것이 아니라 기존 캐릭터들과 개연성, 핍진성을 붕괴시키는 묘사들이 나와 논란이 더했다.
- 이럴 바엔 2차 여요전쟁 당시 무리하게 각색해 삽입한 강감찬의 활약과 17~21회의 강감찬과 김은부 묘사에 쓴 시간 등을 대폭 줄이고 현종의 몽진, 양규와 김숙흥의 활약을 더 넣었어야 하지 않았냐는 비판이 나왔다. 물론 그렇게 넣어도 위에 언급했듯이 2차 여요전쟁 자체에 절반 가까이 소모되었기 때문에 차라리 전간기 시기를 제대로 다루면서 제3차 여요전쟁으로 가야지 않냐는 의견도 나왔다.
2.2. 21~24회 비판 (고려-거란 외교전 시기)
- 21회
- 호족과의 갈등을 신속히 일단락하고 3차 여요전쟁과 김훈 최질의 난의 빌드업을 쌓았다.
- 여전히 악녀+내부의 적으로 캐붕이 고쳐지지 않고 남편과의 사이가 악화되는 원정왕후는 비판이 많이 쏟아졌다.
- 현종도 여전히 안일한 모습을 보이는 것으로 일관되게 묘사하였다.
- 22회
- 부패한 관료도 딸을 취해 장인으로 삼고 권위로 누르면 끝! 식의 무리했던 전개를 여러 신료들의 다양한 입장들을 논의하는 조정으로 묘사하면서 이전의 평면적인 의견 개진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모습을 보였다.
- 원정왕후가 원성왕후와 화해를 시도하려는 묘사를 넣어 이전까지의 캐릭터 붕괴 및 에피소드를 수습하려는 게 아니냐는 시청자들의 기대를 갖게 했다. 다만 김은부가 죽는다는 가정 하에 기반이 사라진 원성왕후에게서 현종의 총애만 빼앗으면 원성을 얼마든지 요리할 수 있다는 계산으로 행동한 것이었다면 기존 각본과 연장선을 갖는다.
- 고려 사신이 거란에 갔다가 강동 6주를 내놓으라고 협박받은 역사를 바꿔 거란 사신이 고려에 찾아와 주장한 것으로 왜곡하였다. 이 부분 자체는 각색으로 볼 수 있다고 쳐도 고려가 10차례 사신을, 거란이 5차례 사신을 보내며 치열하게 진행했던 외교전을 단 한 번으로 퉁치는 걸로 일괄 삭제한 것은 큰 문제다.
- 23회
- 이제야 1012년으로 넘어갔다.
- 김은부가 풀려나는 개연성을 위해 1014년에나 있던 거란사신 억류 사건이 이 때도 있었으며 소배압과 강감찬이 압록강에서 만나 빅딜을 했던 것처럼 각색, 왜곡했다.
- 현종과 김씨 부인을 바라보는 원정왕후의 보이지 않는 질투를 내용으로 계속 담는다. 차라리 처음부터 원정왕후와 현종, 원성왕후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그리고 원정왕후의 질투심이나 분노를 줄였더라면 핍진성도 확보하고 역사 왜곡 논란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 최질이 문관에 대해 불만이 거센 캐릭터로 설정되었고 실제로도 그러한 인물이었지만 과할 정도로 각색되었다. 유방이 참지정사에서 서북면행영도병마사로 임명됐을 때 박진이 '또 문관이군요'라고 반응하자 왜 무관들한테 그런 직책을 주지 않고 문관들한테 주는 거냐고 분개하며 김훈이 그래도 참지정사는 1차 전쟁 때 자신을 증명한 사람이니 언성을 낮추라고 비호하자 "그게 왜 그 자의 공입니까? 그 자를 도운 무관들의 공이지!"라며 큰 소리를 치는데 유방은 1차 전쟁에서 안융진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을 때 낭장 직책을 역임한 엄연한 무관이었다. 즉, 다른 사람은 몰라도 유방을 문관이라는 이유로 비난하는 것은 앞 뒤가 맞지 않는다.[8]
- 여진족 관련 내용이 대거 생략되었다. 동해안 여진족 해적의 대규모 침략, 이를 사전에 대비했던 강조의 혜안, 거란을 막는 서북면만큼 동북면이 중요시되었던 이유, 강감찬과 강민첨이 군사적으로 합을 맞추는 경험, 거북선보다 앞서 있었던 고려의 철갑선인 과선을 이용한 해상 전투, 일련의 사태로 강감찬을 탄핵했으나 현종에 의해 오히려 면직되는 이인택, 해적 노략질이 힘들어지자 생계를 위해 거란의 앞잡이가 되어 전쟁을 재개하는 동여진, 거란이 서쪽을 칠 때 여진도 동쪽으로 동시에 치는 전략, 고려에 관직도 해서 지리와 물자 위치들을 잘 파악해 거란에 귀하한 여진인, 이를 바탕으로 소배압이 남하하게 된 오판... 등의 내용이 일괄 삭제되었다.
- 24회
- 원정황후 문제와 박진의 이간질은 고쳐지지 않고 오히려 더 악화되었다는 평도 있다.# 박진은 이제는 무슨 알라딘 자파마냥 최면마술을 쓰느냐며 제발 오리지널 인물 주제에 극에 개입을 그만 해 달라는 시청자 의견이 많았다.#
- 동북면에서 뜬금없이 고위급 문관 총지휘관인 강감찬을 무술대련 시키며 조리돌림시키는 고려군의 황당한 묘사도 시청자들의 어이를 상실하게 했다. 태양의 후예급의 유치하고 찌질한 플롯이란건 둘째치더라도 강감찬 역이 최수종이라 종종 까먹는 사실이긴 하지만 비슷한 연배도 아닌 환갑 넘은 노인네를 무관텃세로 조리돌림한다는게 알력싸움 기준에서도 가당키는 하냐는 반응이 많았다. 연이어 나올 김훈·최질의 난 진압의 공로자가 될 인물이자 이때 방어사로 있던 이자림을 너무 유유부단하게 표현한 것도 사료에 비추어봤을 때 캐릭터성 미스라는 지적이 나왔다. #
- 이러한 암투나 조리돌림은 풀 테이크로 나왔지만 정작 중요도로는 비교 할 수가 없는 흥화진의 정신용 장군이 국지도발을 감행하는 거란군을 격퇴했던 1014년 '2차 흥화진 전투'는 나레이션을 곁들인 지나가는 장면으로 끝내 버리면서 이에 대해 또 다시 불만이 쏟아졌다. ##
- 나올 때마다 제일 재밌는데 분량은 거의 증발한 거란 진영의 묘사도 문제이기는 하지만 이 쪽은 양이 적어서 아쉬운 것이지 연출의 질에 관한 평가는 오히려 거란 진영 묘사가 나올 때마다 호평이어서 새 일월이 따로 있지 않다는 소리마저 나올 지경이었다. #1#2 아예 야율융서와 소배압의 관계야말로 제대로 된 진정한 로맨스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 거란 성종의 해안길 침입 구상에 앞서 현종의 용주성 축성, 거란 소배압의 내륙길 우회 구상에 앞서 현종의 안의진-운림진 축성 등 고려 현종 및 관료들의 치열한 고민과 혜안은 삭제되었다.
- 전반적으로 24회는 끔찍하다고 할 만했던 17~21회의 재림이라는 평가까지 나올 정도로 논란이 매우 커졌다. #, #, #
2.3. 25~28회 비판 (김훈·최질의 난 시기)
- 무신들 비하
- 정당한 분노 및 명분의 비하
- 난의 근본 원인은 장연우-황보유의가 무신들의 영업전을 빼앗아 문신들의 녹봉으로 쓰는 정책을 냈기 때문이다. 역사학자들은 논문들을 통해 황보유의가 관료로서 실력이 좋지 않고 결국 김훈과 최질 등이 문관 겸직에 대한 욕망도 작용했겠지만 영업전 건이 불만을 품을 만한 일이었기 때문에 난을 일으켰다는 것을 중론으로 한다.[9] 실제 고려사에 반란 세력이 요구한 것은 어사대 혁파와 문관직 겸직이 전부지만 제작진은 이것을 단지 거병의 명분으로만 삼고 반란 자체는 일어날 일이었던 것처럼 묘사했다.
- 결과적으로 앞서 논란이 돠었던 17~20회는 별 문제 없이 진행된 지방 관제 개편을 억지로 논란으로 만들면서 그 시점엔 별다른 실책이 없던 현종의 이미지를 실추시키고 정작 진짜로 현종의 실책이라고 평가받는 김훈·최질의 난 부분에서는 현종을 억지로 미화하는 이상한 청개구리식 묘사를 한 셈이 되었다.
- 행패 과장 및 지능 비하
- 고려사/고려사절요 등은 '겉과 속이 다른', '성품이 거칠고 비루', '문외한', '정사가 어지러워져' 등으로 반란군 정권을 비판하긴 하지만 이는 어사대 혁파 및 무관들의 정사 참여 이후 어지러워진 정사에 대한 평가다.
- 밤의 주연 자리에서 "우리들의 세상"이라거나 "만세"를 외치며 임금을 참칭하는 등 무례한 묘사는 납득이 어렵다.[10]
- 엄연히 임금의 눈 앞에서 대낮에 궁녀를 겁탈하려는 묘사는 납득이 어렵다.[11]
- 최질이 현종의 면전에서 사적 감정을 담아 중추사 강감찬을 발로 차고 고함을 지르는 묘사도 납득이 어렵다.[12]
- 재상 유진이 "김훈과 최질의 머리로는 생각할 수도 없다"는 것을 배후에 박진이 있다는 근거로 삼는 등 무관들을 멍청한 세력으로 매도하지만 이들은 앞선 전쟁에서 사명감을 가지고 싸웠으며 고위급 무관들로서 학식과 실력이 결코 낮지 않은 사람들이다.
- 박진의 머리를 얻은 멍청한 최질이 우직한 김훈을 패싱하고 권신이 되어 현종에게 정책들을 제안하는 것으로 묘사했는데 실제 역사는 김훈이 현종에게 정책을 제안했다. 따라서 드라마 같이 '1인 군부독재로의 귀결' 전개를 하려고 했다면 (박진 따위는 없이) '완항령에서 임기응변을 잘 펼친 김훈이 암투에 더 능하고 통주성을 잘 지켜내서 최질은 외골수 스타일이었다' 식으로 배우 선정 및 역할 묘사를 줬어야 개연성이 있다.
- 김훈·최질의 난이 아닌 이각·곽사의 난이 연상되게 궁궐에 들리도록 만세삼창, 궁녀 겁탈, 임금 앞에서 칼겨누기와 발길질, 지능 비하 등 저질스러운 연출이자 역사에 없던 일들로 전쟁 유공자 및 군인들을 비하하는 역사 왜곡 전개를 하면서 이를 비판하는 청원들도 올라왔다. #1, #2
- 역사 왜곡 이유에 대한 추측
- 이처럼 실제 역사적 사실과 다르게 반란 세력을 이토록 무지몽매하며 상도덕을 저버린 이들로서 일차원적으로 표현한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로, 실제 역사 속에서 '최후에 현종이 이들을 주살한다'는 단 한 가지의 단순하고 말초적인 사이다 서사와 이 연출을 위한 정당성 부여를 위해 반란 세력을 단순하고 무능한 순수악으로 연출하여 의도적으로 시청자들의 비호감을 사려고 했거나 작가가 이들 반란 세력에 대해 현종에게 궐기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니 문관을 포함한 저들이 선이며 이들이 악이라는 일차원적이며 이분법적인 시선으로 바라봤다고 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다.[13][14] 하지만 현종에게 당위성을 부여한다고 해도 김훈과 최질이 권력에 취해 빠르게 타락하는 동안 현종은 과오를 딛고 대오각성하는 것으로 그려도 될 일이었다.
- 2군, 서북면/동북면 군사 관련 문제
- 지채문이 2군(응양군, 용호군)을 동원하여 반란군을 막겠다고 말하며, 이후 김훈과 최질이 6위의 군사들 외에 2군까지 포섭하는데 정작 고려군의 2군은 김훈, 최질의 난 이후에 설치된 것이다.[15] 시대 순서를 틀린 불멸의 크리넥스 같은 묘사가 된 셈이다.
- 25~26회에서 현종이 난을 진압하기 위해 서북면과 동북면의 군사를 동원하려 했고 그들이 개경까지 진군했다고 묘사되는데 정사에는 그런 기록이 없다. 게다가 사료상 무관들이 궁을 침범해 현종이 요구를 들어준 것은 단 하루에 일어난 일이었다. 서북면/동북면에서 개경까지는 보병으로 15~20일, 파발로도 5일은 걸리는 거리인데 고작 하루만에 군사들이 개경까지 이동했다는 묘사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고려 시대에 KTX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대체역사물이나 축지법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양판소가 아니라면 말이다.
- 차라리 역사기록이 엄연히 있는 반란 직후 개경 주변 승려들이 반란에 반대하여 군사적인 움직임을 조직했으나 김훈-최질 정권이 현종을 볼모로 삼고 개경의 계엄령을 선포해서 탄탄히 방비하자 결국 무산된 것을 스토리로 냈으면 되었을 일이다. 이건 실제 역사에도 있음직한 설정이기도 한데 현종은 대량원군 시절에도 몽진 때도 사찰에서 생명을 건졌기 때문에 즉위 후 각별히 사찰들을 키우고 방문해 왔다. 현종은 고려 국왕들 중에서 직접적으로 사찰세력의 보호를 받은 국왕이기도 하다. 따라서 2~3회의 살해위기로부터 살아남았던 때처럼 각 사찰에 밀지를 몰래 보냈을 개연성이 충분하다. 참고로 개경 주변의 사찰세력들은 교종 계통의 사찰들로 고려왕실과 문벌귀족들의 후원으로 성장했기에 문벌귀족들을 정변으로 제거한 무신정권에 가장 위협적인 적대 세력이었는데 김훈-최질에 이어 훗날 두 번째 무신정권을 세운 이의방에게 정면으로 도전하기도 했으며, 이의방은 이에 대응하여 귀법사를 비롯한 사찰들을 불태우고 승려들을 학살하기도 하였다. 또한 승려 종참은 앙심을 품고 아예 정중부 아들 정균의 부하가 되어 이의방을 암살하는데 공을 세우기까지한다. 정중부나 정균도 무신이기는 하지만 온건파에 속한 인물들이라 연합이 가능했다. 이후에 무신정권 집권자들도 교종 계통 사찰세력들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종 계통 사찰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해서 교종 계통 사찰들을 견제하였다. 대표적으로 선종 계통 승려들이 주도한 신앙결사운동을 무신정권이 지원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려사를 읽어보지도 않았는지 이정우 각본가는 진압세력으로 사찰세력의 승도들이 아닌 아닌 당시에 있지도 않은 2군, 거리가 멀어서 도우러 올 수도 없는 서북면/동북면 군대를 진압세력으로 선택하는 최악의 역사왜곡을 하고 말았다.
- 원정황후를 우매한 반란 가담자로 비하
- 사실상 가장 논란이 큰 부분으로, 원정황후가 사전에 상장군인 김훈이나 최질도 아니고 종7품 주부에 불과한 박진에게 거래를 제의받아 이를 수락한 모습, 현종이 반란 진압을 위해 동원하는 군사들에게 따로 교서를 내려 돌려보내거나 심지어 궁궐을 지키는 병사들을 공격하라는 교서까지 내리는 등 반란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모습을 보인다. 물론 작중에서 반란을 알게 된 원정황후가 뒤늦게서야 실상을 깨닫고 박진에게 격분하거나 교서를 내린 것도 박진의 강압을 이기지 못한 것으로 묘사되지만 결국 적극적으로 반란에 개입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심각한 역사 왜곡으로 간주되고 있다.[16]
- 당연히 실제 역사에서 원정황후는 반란과 전혀 관계가 없으며 앞서 설명했듯이 현종은 그녀의 사후 황후들 중 유일하게 현화사에 초상화를 걸어둘 정도로 현종과의 금슬이 좋았다. 그러나 이 드라마에서는 원정황후가 원성황후에 대한 질투심에 눈이 멀어 반역에 동조하고 이 때문에 관계가 사실상 반쯤 파탄나기까지 하는 황당한 전개가 이어졌다.
- 김은부와 원성황후의 추방 역시 반란과 관련해서 전해지는 기록이 없으며 당연히 개경에서 추방당했다는 기록 또한 없다. 더구나 원정왕후 본인이 반란 직후에 박진에게 원하지 않는다고 하였음에도 박진이 이를 강행한 것도 억지 전개다.
- 박진을 필두로 한 막장 전개와 추락하는 핍진성[17]
- 일개 충주 호장 따위가[18] 상장군[19]을 꼭두각시로 만들어 제멋대로 막 부려대고 최질 또한 그가 시키는 온갖 비열한 짓거리들을 그냥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하라면 무조건 다 하며 하는데다 원정왕후마저 그한테 철저히 조종당하는 것까지 모든 것들이 개연성이 너무 떨어진다. 심지어 박진은 후술하겠지만 신하들만이 아닌 군주제 국가의 언터쳐블인 황제와 황실까지 마음대로 우롱하면서도 유유히 돌아다니며 막 깽판을 쳐대는 모습을 보인다.
- 현종 캐릭터성 붕괴와 일관성 없는 묘사
- 자신을 적대하는 자들에게도 "나를 베어보거라"라며 당당한 태도를 취하던 지금까지의 현종과 달리, 27화에서는 침실로 들어온 박진이 칼을 들고 날뛰면서 조롱하는데도 겁쟁이처럼 벌벌 떨기만 하는 추태를 보여 현종의 캐릭터성마저 제대로 붕괴되었다. 사실 이전까지 보였던 현종의 당당한 태도도 시청자들에게 비판을 받은 부분인데, 명색이 주인공에 일국의 군주라는 인물이 자기 목숨 가지고 우직하게 객기만 부리는 무능한 자로 표현되었다는 평가다. 또한 그 객기조차도 군주의 권위를 상징한다고 하지만 정작 김훈·최질의 난 파트에서는 황실 능멸이 극에 달하는 전개로 권위라곤 거의 없다시피 표현된지라 묘사도 일관되지 못하다.
- 각본가의 전근대 사회에 대한 몰이해
- 떨어지는 대사의 질부터 시작해서, 이 김훈 최질의 난 시기에서 작가가 전근대 사회에 대한 몰이해가 눈에 띄게 드러나기 시작한다. 눈앞에서 자신을 시해하려 든 대역죄인을 어떻게 하지조차 못하는 황제, 심지어 그 대역죄인은 이후 황제의 침실에 들어가 황제를 희롱하고 깽판을 치며, 군주 앞에서 무슨 국회폭력마냥 떼거지로 개싸움을 벌이는 신하들 등 동양의 전근대 사회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이상한 장면들이 대부분이다.
- 저질 전개로 망해버린 전체 일정 지연
- 이미 예고한 대로 고려 거란 전쟁은 총 32부작 작품이다. 쓸데없는 역사 왜곡과 퓨전 사극과 권위주의적인 개연성도 핍진성도 없는 3류 정치질 암투로 점철된 쪽대본으로 너무나 많은 회차를 날려먹었다.
- 25~26회는 원래 설 연휴에 방영 예정이었으나 앞서 역사 왜곡 논란을 겪고 제작진이 "더 높은 완성도를 위해" 결방까지 하고 만든 역사 왜곡 편이어서 시청자들을 우롱하려는 것이냐는 비판이 더욱 거세게 일어났다.[20]
- 27~28회 내에 김훈·최질의 난을 마무리 짓는다고 해도 29회부터 32회까지 겨우 4개의 회차가 남게 되었다. 이래서는 '제목이 고려-거란 전쟁'인 것조차 무색한 지경이다.
- 상식적으로 전간기를 다루며 "통주 전투, 영주 전투, 압록강 전투 등을 거치며 정신용 등 고려군 지휘부가 거란의 유인책에 궤멸되는 것"이 1화, "곽주에서 고려군이 통주전투에서처럼 평지전을 벌여 수만명이 죽게 되는 것"이 1화, "송이 외교적으로 고려를 박대하고, 귀주성에선 반란도 일어나고 가뭄도 일자, 거란이 지휘부-군사도 잃은 고려의 흥화진을 이번엔 가질 수 있게 되겠다 싶어 쳐들어왔으나 막아낸 것"이 1화는 되어야 하지만 이러한 전간기 양군의 전략 진화가 일괄 삭제. 편집될 것이 예상되었다.
- 제3차 여요전쟁도 아무리 신속했던 기동타격전이었다고 한들 제2차 여요전쟁(6~16회, 10회분) 전개 속도를 생각하면 3회분은 다뤄야 삼교천, 자주-마탄, 금교, 위주-연주, 귀주대첩으로 이어지는 내용을 다 다룰 수 있지만 1회에 프롤로그로 공개했던 전투씬 몇 개만 달랑 남은 다큐멘터리로 드라마가 끝날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전투 뿐만 아니라 3차 여요전쟁의 발발과 전후 처리도 다뤄야 하는데 이 모든 것을 다루기엔 4회분은 굉장히 빡빡하다. 귀주대첩은 30분 분량으로 사전 촬영하여 제작진과 갈등을 빚던 원작자 길승수도 기대해도 좋다고 할 정도였으나 현재의 전개라면 기껏 사전촬영한 귀주대첩도 대폭 편집하거나 귀주대첩만 잘 나오고 나머지 묘사는 날림이 될 가능성이 커졌다.[21]
- 이 지경이면 당초 제작진이 요구했던 시즌제대로 1~16회를 시즌 1로 하고 17~32회를 새로 다시 찍어 시즌 1만큼의 완성도를 갖추고 난 다음 시즌 2로서 새로 재방영하는 것이 훨씬 더 낫다는 의견도 나왔다.
- 27회
- (수준 낮은 창작) 박진이 왕 살인미수 혐의를 띄었는데 최질이 보호하여 왕 앞에서 풀어줌 - 작가가 중세에 대해 몰상식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왕을 시해하려고 한 것은 대역죄 중 대역죄로 삼족이 멸해질 중죄다. 정적을 숙청할 때 역모죄를 덮어씌우는 이유도 그만큼 말을 꺼내는 것조차도 모든 변호의 여지를 봉쇄하는 가장 무서운 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력을 늘리기 위해 왕을 시해하려 했다고 떠드는 이를 그대로 살려둔다? 아무리 최질이 권력을 장악하였다고 하여도 이런 말을 하고 다니는 박진을 살려두는 것은 자신도 역적임을 만천하에 공표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정신나간 짓이다. 최질의 이런 행위는 고작 개경 일부밖에 장악하지 못했음에도 서북면, 동북면에서 거란과 여진에 대응하는 정예 병력의 군권을 가진 정적들에게 가장 확실한 대의명분을 갖다 바치는 자살행위나 다름없다.[22] 작가의 각본 수준을 보여주는 대표적 장면이라고 할 수 있겠다.
- (수준 낮은 창작) 김훈이 현종에게 설득되어 최질을 습격했으나 박진의 조언을 따른 최질이 매복하여 1인자의 지위를 굳힘 - 이랬다면 김훈은 나중에 처벌받더라도 서경에서 죽는게 아니라 따라 처벌받거나 유배 정도로 처벌이 감해질 수 있고 역사는 김훈 및 최질의 난이 아니라 그 수괴인 박진의 난으로 기록했을 것이다.
- (있던 사실 왜곡) 거란 사신이 친조를 요구, 고려가 최질을 도통사로 동원령을 선포 - 거란은 1012년 이후 친조를 요구하지 않고 강동 6주만을 요구했고 1015년의 국지전을 앞두고 사신을 보내지 않았다. 이 때 고려와 거란은 대대적 동원령이 없었으므로 국지전적 성격의 전쟁이었다.
- (있던 사실 왜곡) 이번에도 전쟁씬을 통 패스했다. 1월의 교두보 공방전, 흥화진 공방전, 통주 유인전이 일괄 삭제되었다. 거란 성종과 소배압의 대화씬을 통해 3월 전투가 예정되어 있음은 보였으나 1월 전투들은 아예 없었던 것으로 확정지었다.
- (수준 낮은 창작) 박진이 현종의 주위를 물리치고 단도를 들고 들어가 마음껏 희롱 - 무신들을 등에 업은 인물이라도 개경부윤 따위가 칼을 품은 자가 왕에게 온다는 것은 경호 원칙을 완전히 무시한 행동이다.
- (있던 사실 왜곡) 이자림이 무인정권으로부터 '몰래' 개경을 빠져 나가 서경판관에 임명되었고 암살계책도 현종이 내렸고 서북면병마사가 유방이 진압을 주도했다고 나오지만 실제 역사는 이자림이 중추원의 일직 김맹을 거쳐 현종에게 계략을 전하였으며 현종이 이자림을 서경유수판관에 임명하는 것도 군부가 의심하지 않을 만큼 이자림은 평소 인망이 있었다. 명백한 고증오류인데 이러한 계책으로 난을 진압하며 현종은 국성인 왕씨를 하사할 정도로 이자림에게 대우할 정도의 공이었다. 연회 직후인 5일 뒤 거란이 용주를 공격했으나 실패했던 만큼 서북면 군사들의 이동은 개연성이 없다. 이자림이 서경유수판관이어야 함에도 조원이 서경유수판관으로 잘못 방송되었다.
- (수준 낮은 창작) 최질이 현종을 친조 명목으로 거란 땅에 인질로 보내 영구집권하려고 함 - 실제 역사에서 음력 3월 3일 현종의 서경 행차 명목은 적혀있지 않다. 그냥 강조 때보다 기반이 약한 김훈-최질 정권이 현종도 대동하여 전방으로 나서야 했다 정도로 묘사하면 개연성이 있었을 것이다.
- (수준 낮은 창작) 최질이 현종을 북방에 보내는 결정이 황후들에게조차 전달되지 않았는데 신하들과 백성들도 울부짖을 만큼 개경엔 또 알려졌다고 나왔지만 일반인도 출장이나 여행가면 준비 시간이 필요하다. 하물며 군주는 긴급한 상황이 아닌 이상 준비는 물론이고 이동할 지방에, 친조는 거란에까지 미리 통보해야 하니 짧게 잡아도 준비에 며칠 걸리나 최질이 한 건 군사를 모아 겁박한 것 뿐 아무 준비도 없는데도 친조를 즉석에서 결정해 바로 출발한다.
- 쓸데없이 가상인물 박진 추앙, 가상역사인 원성왕후-김은부-지채문 유배 등의 분량만 늘어나고 적의 위협 앞에서 현종을 "해치지 마라"는 말 밖에 못하는 인질이자 바보로 만들어 비하한다는 비판[23]과 무신들의 비하는 더욱 심해져 삼류 아침드라마를 보는 것 같다는 시청자들의 비판이 커졌다. 시청자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막장 드라마의 스토리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며 이정우 작가에 대한 비난이 속출했다.
- 28회
- 이자림이 중추원 일직(日直) 김맹(金猛)을 통해 현종에게 "한고제가 운몽에서 놀이한 고사를 아십니까?"라고 말하며 권한 연회를 이용한 계책을 이자림, 지채문, 원성왕후 등과 계획을 짜면서 대화 중에 간접적으로만 언급하고 이후 원성왕후가 절에서 현종에게 계책을 전하는 것으로 표현되어 이자림의 역할이 축소되었다. 실제 역사에서 김훈과 최질의 난을 제압한 1등공신은 당연히 이자림이지만 현종의 밀명을 받아 서경으로 전달한 것 외에는 별다른 공적이 없고 계책을 내는 것은 원성에게, 연회에서 최질 일당을 처단하는 것은 무장인 지채문과 도용수에게 넘어갔다. 원성과 지채문이 행적에 없이 북방으로 올라가 맹활약했다는 창작은 천추태후와 같은 접근이다.[24]
- 29회
- 박진과 최질을 처단한 뒤에도 그들의 가족들에겐 죄를 묻지 않겠다고 했는데, 이 역시 너무나도 말이안되는 억지 전개로 실제 역사에서의 현종 역시 김훈, 최질의 가족들을 몰살시키는 식에 극단적 처분은 내리지 않았지만, 엄연히 연좌제를 적용하여 그들의 친형제들과 아들들 만큼은 외딴 오지로 유배 시키고 그들의 일가친척들의 관직 및 등용문 자격을 영구 박탈시킨 것을 생각하면 명백한 역사 왜곡이다. 심지어 박진 같은 경우는 황제에게 칼을 겨둬 암살하려 한것도 모자라 아예 나라 전체를 팔아넘기려 한 매국노로 그 죄가 최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인간적이고 사악한 천인공노할 온갖 만행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식솔들에게 아무런 죄를 묻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연좌제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현대 감성으로 각본을 짠 것이기에 도저히 납득이 불가능한 본작 최악의 무리수에 막장 오류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25]
3. 제작진들에 대한 비판
3.1. 10-11월, 제작진의 방영 전 인터뷰
2023년 10월 31일, 전우성 감독은 "역사 기록에 충실한 이야기 전개가 펼쳐질 것이다. 중요한 역사적 기록은 충실히 담아내되, 극적인 이야기로 각색해 시청자가 즐길 수 있는 스토리를 만들어낸다는 점이 여타의 드라마와 차별화되는 KBS 대하 사극만의 정체성이라 생각한다. '고려 거란 전쟁'에는 고려사에 기록된 당시 사건이 대부분 망라되어 있으면서도 이를 잇는 강력하고 매력적인 서사가 구축되어 있다. 재미있는 역사 교과서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라며 이정우 작가에 대한 무한신뢰를 드러냈다. #2023년 11월 7일, 이정우 작가는 "역사를 연구하는 여러 전문가를 만나 자문을 받고, 그 시대를 공부하는 작업을 가장 먼저 했다", "주요 인물들에 대한 개인적인 해석을 최대한 배제했다, 기록이 적을 때에는 작가의 상상력이 오히려 독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몇 줄 안 되는 그 인물들의 업적이 곧 캐릭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현종이란 위대한 군주에 대해 알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 등을 말했다. #, 발굴
3.2. 12-1월, 원작자의 방영 초 비판
12월 9일, 길승수 원작자는 (8회 통주 전투에서 강조의 최후가 허망하게 묘사된 것에 대해) "대본 작가가 대본을 잘 못 쓰고 있죠. 앞으로는 나아지기를 기대합니다~"라고 비판했다. 길승수 원작자는 윤지혜 작가, 김한솔 PD를 칭찬하고 이정우 작가를 몹시 비판하는 스탠스를 취했다.1월 10일, 길승수 원작자는 (16회 양규-김숙흥의 비중 축소에) "흥화진 전투, 삼수채 초반부, 양규 전사씬은 김PD가 썼으며, 이정우 작가는 '태종 이방원의 조사의의 난'이나 쓸 그릇"이라고 비판했다. #, #
3.3. 1월 13-14일, 17-18회 방영 이후
제2차 여요전쟁 이후 전후복구에 대한 내용을 다룬 17회부터 극에 대한 논란이 발생했는데 소위 '고려궐안전쟁', '이정우 강점기' 등으로 요약되는 암흑기로 해당 평가는 다음주 20화 방영까지 계속 이어졌다. 출판된 원작 소설의 분량이 끝난 데다 제작 초반부에 있었던 윤지혜 작가[26]의 영향 및 김한솔 PD가 연출하던 전쟁 장면이 사라진 17회부터는 역사적 사료와 원작자의 지침을 완전히 무시하고 이정우 작가, 전우성 PD 측의 전횡으로 그려진 대본으로 인해 이전의 방향성과 미장센을 상실해 드라마의 질이 나락으로 떨어진 것으로 평가받는다.1월 15일, 길승수 원작자는 "원작계약은 2편(고려의 영웅들) 뿐만이 아니라, 지금 쓰고 있는 3편(구주대첩)까지 했다", "당연히 현종의 낙마는 원작 내용 중에는 없다", "대본 작가가 자기 작품을 쓰려고 무리수를 두고 있다", "정말 한심하다" "작가가 정신들 차리기를 기원한다", "대하사극이 아니라 정말 웹소설 같았다"고 말했다.
1월 17일, 길승수 원작자는 "이정우 작가가 양규를 자기가 쓴 캐릭터가 아니라고 해서 비중을 확 줄였더군요. 그래서 양규 가족들에게 현종이 감사하는 장면도 삭제"했다고 비판했다. #
1월 18일, KBS 시청자 청원에 원작 소설의 전개대로 진행하라는 청원이 올라와 5일만에 KBS가 답변해야 하는 기준선 1천명을 돌파했다.
1월 19일, 오마이뉴스 역사담당 김종성 기자가 5도 양계 개혁과정이 막장 드라마로 진행되는 것에 대해 장문의 비판 기사를 올렸다. # 김종성 기자는 해당 회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지적했다.
고려의 지방제도 개편이 시행된 때는 음력으로 현종 3년 1월이다. 양력 1012년 1월 26일에서 2월 24일 사이의 일이다. <고려사절요>는 이때 "12주 절도사를 폐지하고 5도호와 75도 안무사를 설치했다"고 알려준다. 제2차 고려거란전쟁 직후에 이런 방식의 지방제도 개편이 있었던 것이다. 만약 이 개편으로 국가적 분열이 일어났고 평정심을 상실한 현종이 낙마하는 정도의 상황까지 조성됐다면,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에 짤막하게라도 그것이 언급됐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런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어느 정도의 반발이 있었을 수도 있지만, 기록만 놓고 본다면 드라마에서 묘사된 대혼란은 실제로는 없었다고 볼 수 있다. 또 호족 가문 출신인 강감찬이 현종과 극단적 갈등을 빚었다면, 이런 사실이 고려사 강감찬 열전에 언급됐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강감찬 열전에 나타나는 것은 제2차 고려거란전쟁 이후로 강감찬의 조정 내 입지가 꾸준히 좋아졌다는 내용뿐이다. 드라마 장면이 지나치게 과장된 것은 사실이다.
고려 전기에 중앙 군주와 지방 호족 간의 대립이 심했던 것은 사실이다. 현종 3년의 지방제도 개편에는 '군주 대 호족'이라는 쟁점도 당연히 담겨 있다. 종전보다 훨씬 많은 지방관이 파견된 것은 중앙 왕권이 호족에 비해 상대적으로 신장됐음을 의미한다.현종 3년의 개편에는 그런 쟁점과 더불어 '군주 대 지방관'이라는 또 다른 구도도 담겨 있다. 군정장관의 성격이 농후한 절도사를 폐지하고 민정장관 성격이 상대적으로 강한 안무사를 대거 파견한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제2차 고려거란전쟁 과정에서 권력이 비대해지기 쉬웠던 지방 군정장관 직을 없애는 작업이 전쟁 직후에 전개됐음을 의미한다.
즉 호족들이 볼 때는, 강력한 절도사가 사라지고 온건한 안무사가 찾아오니 이는 그들에게 유리한 조치였다. 현종이 볼 때는, 이전보다 강하지는 못해도 훨씬 많은 수의 지방관을 파견하게 되니 호족들을 더 촘촘히 견제할 수 있었다. 호족들의 시선을 '절도사 폐지'로 돌리면서 왕권을 확대시키는 절묘한 조치였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정치적 반발이 최소화돼 <고려사절요>에 별다른 이야기가 기록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추론할 수 있다.
하지만 <고려거란전쟁>에서는 전쟁 중에도 현종과 호족의 갈등이 심했다는 점만 강조됐다. 이 구도에만 치중하다 보니, 현종과 절도사 간에도 갈등이 있었다는 점은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
<고려사> 지채문 열전에 따르면, 제2차 전쟁 중에 현종이 지금의 완주군 삼례읍에 있는 삼례역에 당도했을 때에 전주절도사 조용겸은 꽤 '캐주얼'하게 현종을 영접했다. 지채문열전은 그가 "야복(野服) 차림으로 어가를 맞이했다"고 말한다. 평복 차림으로 임금 앞에 나섰던 것이다.
만약 그런 차림이 전쟁 중이라 부득이했다면, 복장 문제가 역사서에까지 기록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무례하거나 고의적이라는 인상을 줬기에 기록됐을 것으로 보는 게 합리적이다. 현종이 삼례역에 들어가지 않고 장곡역으로 발길을 돌린 것은 '전주는 후백제 도읍이라 태조께서도 싫어하신 곳'이라는 신하의 조언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절도사 조용겸의 태도에도 영향을 받은 것일 수 있다.
조용겸이 임금을 자극할 의도가 있었다는 점은 후속 행동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장곡역에 머무는 현종을 위협하는 무력 시위까지 연출했다. 왕족을 보좌하는 전중소감 유승건 등을 대동하고 북을 치며 장곡역을 소란스럽게 만들었다. 현종을 호위하는 지채문이 역문을 급히 잠궈야 했을 정도다.
지채문이 지붕에 올라가 "너희들이 어찌 이럴 수 있느냐?", "너희는 누구냐?"라고 호통치자, 조용겸 무리는 "그렇게 말하는 너는 누구냐?"라며 조롱을 던졌다. 임금이 있는 데서 그랬으니, 사실상 임금을 조롱한 셈이다.
지채문이 유승건에게 '왕명이니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자, 유승건은 "네가 나오지 않으면 나도 들어가지 않겠다"고 맞받아쳤다. 실상은 현종을 겨냥한 하극상 발언이었던 셈이다. 전쟁 중에 고려 국왕의 권위가 얼마나 추락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사건 당시에는 힘이 없어 그냥 덮어둔 현종은 거란군이 압록강을 넘어 철수(1011.3.6)한 지 6개월 뒤인 음력으로 현종 2년 8월 2일(양력 1011년 9월 2일) 조용겸과 유승건 등의 관직 자격을 박탈하고 유배형을 선고했다. 삭탈관직까지 시켰으니, 그때까지 얼마나 꾹꾹 참고 있었겠는지를 느낄 수 있다.
그로부터 4, 5개월 뒤인 1012년 1월 하순에서 2월 하순 사이에 현종은 절도사 제도를 폐지했다. 조용겸의 도발이 절도사 폐지에 직접적 영향을 줬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그 도발이 절도사에 대한 현종의 경계심에 영향을 줬을 수는 있다고 볼 수 있다.
현종 3년의 지방제도 개편을 건의한 이들은 최사위·장연우·황보유의 등이다. 이 중에서 최사위와 장연우는 직접 참전한 중앙관이자 문신들이다. 지방 절도사에게 권한이 집중하는 것을 경계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다. 조용경 사례와 이들의 이해관계를 고려하면, 전쟁 중에 강력해진 절도사들에 대한 중앙 문신들의 견제가 제도 개편을 추진한 원동력 중 하나였으리라는 판단이 가능하다.
중앙 문신들의 이해관계와 관련해 1995년에 <한국학보> 제80집에 실린 김갑동 원광대 교수의 논문 '고려 현종대의 지방제도 개혁'은 "왕권이 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지방의 절도사들에게 군사력이 집중되면 자신들의 지위도 보장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추론한다. 현종의 지방제도 개편이 큰 불상사를 초래하지 않으로 보이는 것은 중앙 문신들의 호응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고려거란전쟁>에 묘사된 현종의 지방관 파견 시도는 호족에 대한 견제의 의미도 있지만, 강력한 지방 군정장관에 대한 견제의 의미도 있었다. 이 드라마가 현종의 제도 개편을 중앙군주 대 호족의 대결 구도로만 보여주고 이 개편이 엄청난 후폭풍을 낳았다는 식으로 묘사한 것은 당시의 정치현실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2024년 1월 19일 김종성 기자의 비판 기사 중 일부
고려 전기에 중앙 군주와 지방 호족 간의 대립이 심했던 것은 사실이다. 현종 3년의 지방제도 개편에는 '군주 대 호족'이라는 쟁점도 당연히 담겨 있다. 종전보다 훨씬 많은 지방관이 파견된 것은 중앙 왕권이 호족에 비해 상대적으로 신장됐음을 의미한다.현종 3년의 개편에는 그런 쟁점과 더불어 '군주 대 지방관'이라는 또 다른 구도도 담겨 있다. 군정장관의 성격이 농후한 절도사를 폐지하고 민정장관 성격이 상대적으로 강한 안무사를 대거 파견한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제2차 고려거란전쟁 과정에서 권력이 비대해지기 쉬웠던 지방 군정장관 직을 없애는 작업이 전쟁 직후에 전개됐음을 의미한다.
즉 호족들이 볼 때는, 강력한 절도사가 사라지고 온건한 안무사가 찾아오니 이는 그들에게 유리한 조치였다. 현종이 볼 때는, 이전보다 강하지는 못해도 훨씬 많은 수의 지방관을 파견하게 되니 호족들을 더 촘촘히 견제할 수 있었다. 호족들의 시선을 '절도사 폐지'로 돌리면서 왕권을 확대시키는 절묘한 조치였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정치적 반발이 최소화돼 <고려사절요>에 별다른 이야기가 기록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추론할 수 있다.
하지만 <고려거란전쟁>에서는 전쟁 중에도 현종과 호족의 갈등이 심했다는 점만 강조됐다. 이 구도에만 치중하다 보니, 현종과 절도사 간에도 갈등이 있었다는 점은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
<고려사> 지채문 열전에 따르면, 제2차 전쟁 중에 현종이 지금의 완주군 삼례읍에 있는 삼례역에 당도했을 때에 전주절도사 조용겸은 꽤 '캐주얼'하게 현종을 영접했다. 지채문열전은 그가 "야복(野服) 차림으로 어가를 맞이했다"고 말한다. 평복 차림으로 임금 앞에 나섰던 것이다.
만약 그런 차림이 전쟁 중이라 부득이했다면, 복장 문제가 역사서에까지 기록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무례하거나 고의적이라는 인상을 줬기에 기록됐을 것으로 보는 게 합리적이다. 현종이 삼례역에 들어가지 않고 장곡역으로 발길을 돌린 것은 '전주는 후백제 도읍이라 태조께서도 싫어하신 곳'이라는 신하의 조언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절도사 조용겸의 태도에도 영향을 받은 것일 수 있다.
조용겸이 임금을 자극할 의도가 있었다는 점은 후속 행동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장곡역에 머무는 현종을 위협하는 무력 시위까지 연출했다. 왕족을 보좌하는 전중소감 유승건 등을 대동하고 북을 치며 장곡역을 소란스럽게 만들었다. 현종을 호위하는 지채문이 역문을 급히 잠궈야 했을 정도다.
지채문이 지붕에 올라가 "너희들이 어찌 이럴 수 있느냐?", "너희는 누구냐?"라고 호통치자, 조용겸 무리는 "그렇게 말하는 너는 누구냐?"라며 조롱을 던졌다. 임금이 있는 데서 그랬으니, 사실상 임금을 조롱한 셈이다.
지채문이 유승건에게 '왕명이니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자, 유승건은 "네가 나오지 않으면 나도 들어가지 않겠다"고 맞받아쳤다. 실상은 현종을 겨냥한 하극상 발언이었던 셈이다. 전쟁 중에 고려 국왕의 권위가 얼마나 추락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사건 당시에는 힘이 없어 그냥 덮어둔 현종은 거란군이 압록강을 넘어 철수(1011.3.6)한 지 6개월 뒤인 음력으로 현종 2년 8월 2일(양력 1011년 9월 2일) 조용겸과 유승건 등의 관직 자격을 박탈하고 유배형을 선고했다. 삭탈관직까지 시켰으니, 그때까지 얼마나 꾹꾹 참고 있었겠는지를 느낄 수 있다.
그로부터 4, 5개월 뒤인 1012년 1월 하순에서 2월 하순 사이에 현종은 절도사 제도를 폐지했다. 조용겸의 도발이 절도사 폐지에 직접적 영향을 줬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그 도발이 절도사에 대한 현종의 경계심에 영향을 줬을 수는 있다고 볼 수 있다.
현종 3년의 지방제도 개편을 건의한 이들은 최사위·장연우·황보유의 등이다. 이 중에서 최사위와 장연우는 직접 참전한 중앙관이자 문신들이다. 지방 절도사에게 권한이 집중하는 것을 경계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다. 조용경 사례와 이들의 이해관계를 고려하면, 전쟁 중에 강력해진 절도사들에 대한 중앙 문신들의 견제가 제도 개편을 추진한 원동력 중 하나였으리라는 판단이 가능하다.
중앙 문신들의 이해관계와 관련해 1995년에 <한국학보> 제80집에 실린 김갑동 원광대 교수의 논문 '고려 현종대의 지방제도 개혁'은 "왕권이 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지방의 절도사들에게 군사력이 집중되면 자신들의 지위도 보장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추론한다. 현종의 지방제도 개편이 큰 불상사를 초래하지 않으로 보이는 것은 중앙 문신들의 호응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고려거란전쟁>에 묘사된 현종의 지방관 파견 시도는 호족에 대한 견제의 의미도 있지만, 강력한 지방 군정장관에 대한 견제의 의미도 있었다. 이 드라마가 현종의 제도 개편을 중앙군주 대 호족의 대결 구도로만 보여주고 이 개편이 엄청난 후폭풍을 낳았다는 식으로 묘사한 것은 당시의 정치현실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2024년 1월 19일 김종성 기자의 비판 기사 중 일부
1월 20일 길승수 원작자는 "작가가 늦게 합류한만큼 겸손한 마음으로 대본을 써야 하는데, 자기 작품을 쓰려는 욕구가 강하더군요. 그래서 대본이 역사도 무시하고 원작도 무시하며 점점 산으로 갑니다"#, "대하사극이 아니라면 참 좋았을 것을", "본방 사수는 포기했습니다", "장인으로 삼으면 비리가 덮혀진다는 발상도 놀랍더군요", "대본 작가가 kbs를 말아먹는군요.ㅎㅎ", "고려의 지방제도는 소손녕의 침공을 계기로, 성종과 서희가 서북면과 동북면을 설치하고 중앙군을 정비하여 기본 뼈대를 완성시킵니다. 현종 때의 개혁은 거기에 살을 붙이는 정도였죠. 어느 정도 갈등이 있었을 수 있으나 드라마에서 처럼은 전혀 아니고, 대본 작가가 그런 점들을 전혀 숙지하지 않고 대본을 쓰고 있죠." 등의 비판을 하였다. #
1월 21일, KBS 시청자청원에 현 대본 작가인 이정우를 강판해 기존의 윤지혜 작가를 다시 데려오거나 원작자가 직접 집필하고 더 나아가서 연기대상 시상식 때 수여한 작가상도 수상 취소 혹은 박탈하라는 청원까지 올라왔는데 더 빨리 3일만에 1천명을 돌파했다.
3.4. 1월 23일, 제작진과 원작자의 공방
1월 23일 오전 9시경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전우성 감독(PD)의 '텐아시아'와의 인터뷰가 보도되었다. "2022년 하반기, 이정우 작가가 '고려거란전쟁'에 본격적으로 합류하며 대본 집필에 돌입했다. 이 작가는 소설 '고려거란전기'를 검토한 후 자신이 생각한 이야기의 방향성과는 맞지 않다고 판단했고 전 감독 역시 이 작가의 의견에 공감했다."[27], "(대신해서) 드라마 자문 경험이 풍부한 조경란 박사를 중심으로 자문팀을 새로이 꾸렸고, 든든한 조력자를 얻은 이 작가는 1회부터 스토리 라인 및 씬별 디테일까지 자문팀의 의견을 수렴하여 대본을 집필" 등을 말했다. #1월 23일 오전 10시경 길승수 원작자의 한국경제와의 인터뷰가 보도되었다. # 이에 의하면 본래 예정되어 있던 다른 작가[28]가 어째서인지 교체되었고 이정우 작가에게 기획 단계에서 제3차 여요전쟁을 다룬 새로운 소설의 원고까지 전달한 동시에 강의까지 해 줬지만 30분만 듣고 필요 없다고 일축하였다고 한다. 본인도 등장인물이나 사건 등과 관련한 전반적인 내용에 대해 자문을 더 이상 하지 않는 대신 다른 사람을 소개하였으나 정작 이정우 작가가 자문을 제대로 받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김한솔 PD에게는 계속해서 전쟁 장면과 관련해서 자문을 하였으나 그 외에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다고 한다.[29] 그나마 촬영 전에 몇 회분의 대본을 길승수 작가에게 보냈다고는 하지만 그가 수정해야 할 내용 등을 전달했는데도 답을 주지 않았고 수정 없이 그대로 나왔다고 한다.
1월 23일 오후 2시경 길승수 원작자가 오전 전우성 감독의 해명보도를 보고 "웃기지도 않는군요. 전PD가 먼저 내부적인 진행상황을 공개했으니, 저도 이제는 부담 없이 공개해도 되겠군요"라며 내막을 공개했다. 길승수 작가에 의하면 원래 천추태후가 메인 빌런에 현종과 대립하며 거란의 침공을 불러들이는 전개가 드라마 기획 단계에서의 방향성이었다고 한다.[30] 작가는 당시 조선구마사의 예를 들어 반대했고 이 시나리오는 무산되었으나 원정왕후에게 이때의 문제가 일부 돌아간 듯하다고 밝혔다. #
1월 23일 오후 3시경, 전우성 연출감독과 이정우 작가가 전우성의 페이스북을 통해 발표한 입장문이 다수의 언론들을 통해 보도되었다. 헤럴드경제(오후3시경), 머니투데이(오후4시경), 데일리안(오후4시경), 서울신문(오후5시경)
{{{#!folding 전우성 입장문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안녕하세요? 대하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의 연출을 맡고 있는 전우성입니다.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의 원작 관련 논란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우선 많은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으며 방영중인 와중에 이런 논란이 벌어진 것에 대해, 메인 연출자로서 막중한 책임감을 느낍니다. 이번 드라마의 기획부터 제작의 전과정을 책임지고 있는 입장에서 몇가지 사실관계를 밝힙니다. 드라마 원작 계약은 매우 다양한 형태가 존재합니다. 원작의 설정, 줄거리를 그대로 따르는 리메이크 형태부터 원작의 아이디어를 활용하기 위한 계약까지 다양합니다. <고려거란전쟁> 원작계약의 경우는 리메이크나 일부분 각색하는 형태의 계약이 아니었습니다. 소설 <고려거란전기>는 이야기의 서사보다는 당시 전투 상황의 디테일이 풍성하게 담긴 작품입니다. 꼭 필요한 전투 장면을 생생하게 재현해보고자 길승수 작가와 원작 및 자문계약을 맺었고 극 중 일부 전투 장면에 잘 활용하였습니다. 하지만 길승수 작가는 이정우 작가의 대본 집필이 시작되는 시점에 자신의 소설과 '스토리 텔링의 방향성이 다르다'는 이유로 고증과 관련된 자문을 거절하였고 수 차례 자문에 응해줄 것을 요청하였지만 끝내 고사하였습니다. 이후 저는 새로운 자문자를 선정하여 꼼꼼한 고증 작업을 거쳐 집필 및 제작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길승수 작가가 저와 제작진이 자신의 자문을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기초적인 고증도 없이 제작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에 당혹감을 느낍니다. 아울러 길승수 작가가 자신만이 이 분야의 전문가인 것처럼 말하는 것에도 동의할 수 없습니다. 이 드라마의 자문자는 역사를 전공하고 평생 역사를 연구하며 살아온 분입니다. 참고로 작년 여름, 소설 <고려거란전기>는 <고려거란전쟁>으로 제목이 바뀌어 재출간되었습니다. 영하20도를 넘나드는 강추위속에서, 오늘도 배우들과 제작진들은 최선을 다해 방송제작에 임하고 있습니다. 이런 논란이 불거진 것에 대해 다시한번 죄송하다는 말씀 전하며, 앞으로도 시청자들께서 보내주신 관심과 사랑에 보답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 |
{{{#!folding 이정우 입장문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최근 원작 소설가가 블로그를 통해 대하드라마 '고려거란전쟁'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한 것이 기사화되고 이것이 와전되어, 시청자들에게 많은 부분에서 오해가 생기는 것 같아 제 입장을 전달합니다. 가장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대하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은 소설 '고려거란전기'를 영상화할 목적으로 기획된 것이 아닙니다. 대하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은 KBS의 자체 기획으로 탄생했으며 처음부터 제목도 '고려거란전쟁'이었습니다. 원작 계약에 따라 원작으로 표기하고 있으나 이 소설은 대하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을 태동시키지도 않았고 근간을 이루지도 않습니다. 저는 이 드라마의 작가가 된 후, 원작 소설을 검토하였으나 저와는 방향성이 맞지 않는다는 판단을 내렸고, 그때부터 고려사를 기반으로 처음부터 이야기를 다시 설계했습니다. 제가 대본에서 구현한 모든 씬은 그런 과정을 거쳐 새롭게 창작된 장면들입니다. 시작부터 다른 길을 갔고 어느 장면 하나 일치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건 원작 소설가가 가장 잘 알 거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처음부터 별개의 작품이었기 때문에 사실 원작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합니다. 그런데도 원작 소설가가 '16회까지는 원작의 테두리에 있었으나 17회부터 그것을 벗어나 이상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식으로 표현하는 의도를 모르겠습니다. 이 드라마는 분명 1회부터 원작에 기반하지 않은 별개의 작품이었습니다. 원작 소설가가 이렇게 자신의 원작과 드라마의 내용을 비교하며 거리를 두려는 이유가, 혹시라도 드라마의 오점이 자신의 원작 소설에 해가 될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라면 제가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이 드라마는 일부 전투 장면 이외에는 원작 소설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1회부터 그랬고 마지막 회까지 그럴 것입니다. 자신의 글에 대한 자부심이 있다면 다른 작가의 글에 대한 존중도 있어야 합니다. 원작 소설가가 저에 대한 자질을 운운하며 비난하는 것은 분명 도를 넘은 행동입니다. 그런식이라면 저도 얼마든지 원작 소설을 평가하고 그 작가의 자질을 비난할 수 있습니다. 다만 제가 그러지 않는 것은 타인의 노고에 대한 당연한 존중 때문입니다. 이 드라마를 어떻게 구성하고 이끌어가는지는 드라마 작가의 몫입니다. 저는 제 드라마로 평가받고 소설가는 자신의 소설로 평가받으면 되는 일입니다. 제가 굳이 이런 입장을 밝히는 이유는, 이 드라마에 대해서는 영광도 오욕도 모두 제가 책임질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잘못된 정보들이 진실로 굳어지는 것을 막기 위함입니다. 마지막으로 이것은 KBS와는 무관한 저의 견해임을 밝히는 바입니다. | }}}}}} |
- 전우성의 주요 주장은 다음과 같다.
- 소설의 줄거리를 따르는 형태로 계약하지 않았으며 극 중 일부 전투 장면에만 소설을 활용했다.
- 수차례 요청했음에도 길승수 작가가 고증과 관련된 자문을 거절했다. 길승수 작가만 분야 전문가가 아니다.
- 평생 역사를 연구한 새로운 자문자(조경란 석사)를 선정하여 꼼꼼한 고증 작업을 거쳐 집필 및 제작을 진행하고 있다.
- 이정우의 주요 주장은 다음과 같다.
- 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은 KBS 자체 기획이며 소설을 영상화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 소설과 드라마의 방향성이 다르며 어느 장면 하나도 소설과 일치하는 것이 없다.
- 본 드라마는 소설과 별개의 작품이며 일부 전투 장면 이외에는 소설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 드라마를 어떻게 구성할지는 드라마 작가의 몫이며 자질을 운운하며 비난하는 것은 도를 넘는 일이다.
- 이에 제작진이 길승수 원작자, 임용한 박사도 거절하고 자문위원으로 내세운 조경란 석사에 대한 관심이 생겨났다.[31]
- 1998년 서강대학교 사학과에서 "신라 중고기 가르침과 왕권"을 주제로 "석사" 졸업했다. 석사논문
- 2006년, <주몽>을 자문했다.
- 2008년 12월, 2010년 4월 신라 선덕왕 및 냉수리비문 관련 기고문을 낸 것이 평생 학술활동의 전부다. #
- 2011년, <계백>을 자문했다.
- 2012년, <대왕의 꿈>을 자문했다. KBS의 흑역사 드라마다.
- 2013년, <불온>을 자문했다. 조선 성종 시대 의문의 살인사건을 다룬다.
- 2013년, <제왕의 딸 수백향>을 자문했다. 역사 왜곡 논란이 일자 갈아엎어 가상 역사 드라마나 다름없어졌다.
- 2014년, <정도전>을 자문했다.
- 2015년, <징비록>을 자문했다.
- 2021년, <옷소매 붉은 끝동>을 자문했다.
- 2021년, <태종 이방원>을 자문했다. 고려 거란 전쟁의 이정우 작가가 맡았으며 상술한 논란이 있다.
- 2022년, <붉은 단심>을 자문했다.
- 2023년, <연인>을 자문했다.
- 2024년 시점 사단법인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편수부장으로 재직 중이다.
- 이 이력만 봐도 조경란 석사의 자문이 어떤 식이었을지 알 수 있다. 조경란 석사가 박사 학위가 없다고 하더라도 역사 전문가일 수는 있지만 문제는 그간 이력을 보면 자문 범위가 지나치게 넓다는 데 있다. 근대 이전 한국사 모든 시대, 모든 분야에 걸쳐 자문에 이름을 올린 셈인데 그 어떤 사학자도 전공인 시대가 있거나 전쟁사나 경제사, 생활사 등으로 전문적으로 연구한 영역이 있게 마련이다. 아무리 뛰어난 학자라고 해도 한국사 전시대, 전영역에 걸쳐 통달했다고 할 사람은 있을 수 없다. 쉽게 말해 말이 자문이지 역사적 사실과 문제점을 꼼꼼히 짚어 교정해 주는 게 아니라 그저 이름 얹어주는 사람 수준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당장 이덕일의 비판점을 생각해 보자.
- 이 입장문에 대한 시청자들의 반응/여론은 원작자에게 기운다.
- 전우성 PD의 주장대로 '꼼꼼한 고증'을 거쳤다고 하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무리수와 인물 비하, 역사 왜곡이 만천하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 이정우의 입장문도 비판받았다. 입장문에 사과나 반성, 개선의 다짐 등이 전혀 없을뿐더러 이 사태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고 원작과의 선 긋기에만 집중하는 행태를 보였기 때문이다. 당장 자신의 입장문 안에서도 소설과 일치하는 장면이 없다는 말과 전투 장면은 소설에 기반했다는 말이 모순되며 그나마 소설을 참고했다는 그 전투 장면도 삼수채 전투는 원작과 완전히 다른 무리수 전개로 이미 혹평을 받은 바가 있다. 이처럼 이정우 본인의 자질 미달과 역량 부족으로 인해 원작만 따라가도 충분히 수작이 될 수 있던 드라마가 망해 가던 상황인데도 끝까지 자신만의 전개를 고집하는 모습은 여론의 지지를 전혀 얻지 못했다.
1월 23일 오후 5시경 길승수 원작자는 블로그를 통해 해명 기사 내용을 반박했다. # 길승수에 따르면 중간에 교체되어 들어온 작가 이정우가 자문 담당인 길승수에게 보조 작가가 담당할 업무인 페이퍼 작성을 시켰다.[32] 이에 길승수가 자신이 맡을 업무가 아니기 때문에 페이퍼 작성을 거절하자 감독 전우성이 자택 근처까지 찾아와 이정우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나올 필요가 없다며 먼저 길승수를 자문 담당에서 빼 버렸다. 결국 길승수는 임용한 박사를 후임 자문으로 추천했으나 전우성은 "알아서 하겠다"고 답했다고 한다. 이렇게 이정우의 주장을 반박한 다음 '대하사극인데 역사적 맥락을 살리지 못한 것을 사과하고 앞으로 최대한 노력하겠다'라고 하는 것이 최선의 대응책이라며 작가와 감독의 추태를 지적했다.
1월 23일 저녁 이후 제작진과 원작자의 주장을 요약하려는 기사들이 계속 쏟아졌다. 서울경제(오후6시경), 이데일리(오후7시경) 스타뉴스(오후7시경), 중앙일보(오후8시경), 스포티비뉴스(오후8시경)
3.5. 1월 24일, 원작자의 추가반박
1월 24일, 길승수 원작자가 '스포티비뉴스'와 단독 인터뷰를 통해 더 상세하게 제작과정을 밝혔다. # 2020년 말에서 2021년 초 쯤에 처음 제작진과 만났고 한동안 아무 소식이 없다가 1년 후인 2022년 6월에 다시 연락이 와서 KBS를 제대로 방문했는데 원래 전우성 PD는 자신을 부르고 싶지 않았으나 다들 여요전쟁에 대한 공부가 덜 된 상황이라서 드라마 제작 자체가 진행이 잘 안 되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불렀다고 한다. 본래 있던 다른 작가도 본인의 강의를 받아 도움을 얻었고 갑옷과 관련한 미술 자문도 같이 하였는데, 갑자기 작가가 이정우로 교체되었고 '고려거란전쟁' 역사책의 원고를 보내줬는데도 이와 관하여 거짓말을 하였다고 밝혔다.[33]덧붙여 원래는 이렇게까지 이슈화하고 싶지 않았지만 드라마가 이상해지자 시청자들이 자신의 블로그에 몰려오게 되었고 이에 따라 자중하려고 했으나 KBS 측에서 먼저 댓글을 달지 말라면서 자신의 의사 표명을 막기 위해 전화한 것을 언급하며 답답하다고 말하였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문제에 대하여 "저를 욕할 게 아니라 그냥 시청자들 앞에 사과하고 남은 드라마를 역사적 사실에 충실하게 만들면 된다.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하지 말고 역사대로만 만들면 간단한 얘기"라는 반응을 보였으며 대하사극을 역사로 인식하면서 드라마를 보고 역사를 배우려는 시청자들의 입장을 준수하여 "제작진이 내 작품을 만든다는 생각이 아니라 대하사극의 좋은 대본을 쓴다는 마음으로 책임감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작가진이 최소 2022년 말에 긴급하게 교체된 관계로 완전한 사전제작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에 참고할 자료가 존재하는 2차 전쟁 시기까지는 그러한 부족함이 적게 드러날 수 있었지만 극이 어느 정도 진행된 이후인 2차 전쟁 직후부터는 확연하게 이러한 부분이 드러났다. 애초에 역사저널 그날을 통해서 드라마 방영분과 촬영 시기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드러나기도 했고 22회 방송분에서 기존에 문제로 여겨졌던 여러 부분이 일부 수정된 모양새를 보이는 점에서 보면 드라마는 프롤로그에서 제시했던 귀주대첩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사실상 촬영을 하면 거의 그대로 방영하는 체제로 간 것으로 보인다. 결국 제작진은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설날 기간인 2024년 2월 10~11일에 결방을 결정했다. 현실적으로 약 1주의 시간을 번 셈이긴 하지만 그동안 얼마나 나아질지는 의문이다.
드라마의 방향성과 핍진성이 결여된 것이 시청자의 불만과 이어졌다는 점을 제작진이 생각해 봐야 하는데 소통의 기회는 만무하고 오히려 위에 나온 해명들을 일관하면서 화를 더 키우도록 만들었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김한솔 PD를 비롯한 다른 제작진들과 최수종, 김동준, 김혁, 이시아 등을 비롯한 출연 배우들이 짊어지게 된 상황에 처했다. 야율융서 역의 김혁이 한 언론사와 이번 사태와 관련한 입장을 밝히면서 "지금도 뼈를 스치는 추위 속에서도 저희 '고려 거란 전쟁'은 촬영을 감행하고 있다. 솔직히 이런 상황에 저희 배우들도 맡은 역할에 몰입해서 연기하기도 맘이 무겁다."고 조심스럽게 언급했다. 관련 기사[34]
3.6. 1월 25일, 제작진의 제1시청자청원 답변
{{{#!folding 1월 25일, KBS 시청자센터 제작진 청원 답변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대하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을 사랑해 주시는 시청자 여러분께 감사 인사드립니다. 우선 최근 불거진 여러 혼란에 대해 제작진으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며 사죄의 말씀 올립니다. 또한 대하드라마 '고려거란전쟁' 방송 내용에 관해 시청자분들의 애정 어린 비판과 따끔한 질타의 목소리 역시 엄중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시청자분들의 의견을 적극 반영해 완성도 높은 드라마를 만들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청원하신 내용과 관련한 제작진의 답변입니다. KBS는 2021년경부터 공영방송 50주년 특별기획 대하드라마를 준비하였고 그의 일환으로 대하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을 기획하였습니다. 자료가 상대적으로 부족한 고려시대의 경우 역사의 행간을 메우기 위한 작가의 상상력이 필요하고 이를 통해 드라마만의 재미와 감동을 전달합니다. 이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과장'과 '왜곡'을 피하기 위해 제작진은 역사서에 기초한 고증과 전문가의 자문을 통해 면밀하게 대본 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작품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길승수 작가의 소설 '고려거란전기'의 판권을 구매하게 되었고 전투 장면 등의 고증에 도움을 받았습니다. 판권 구매한 소설 '고려거란전기'는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의 참고 자료 중 하나였고 '고려거란전쟁'의 드라마 내용은 1회부터 사료와 전문가의 자문을 받아 새롭게 창조한 것임을 밝혀드립니다. 최근 대하드라마 '고려거란전쟁'에 대한 시청자들의 우려와 걱정의 목소리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프로그램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라는 점 역시 제작진은 깊이 새기고 있습니다. 대하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은 남은 회차를 통해 고난에 굴하지 않고 나라를 개혁하여 외적의 침입을 물리치고 동북아에 평화의 시대를 구현한 성군 현종의 모습을 더욱 완성도 있게 그려나가겠습니다. 프로그램을 통해 지켜봐 주시고 앞으로도 많은 성원과 사랑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 }}}}}} |
시위 전날인 1월 25일 KBS는 제1시청자청원에 답을 하였다. 결과적으로 KBS측의 답변은 이전에 이정우 작가가 낸 답변과 큰 차이가 없었고 성의 없는 사과는 물론이고 사실상 자기들 마음대로 하겠다는 말이기 때문에 여론은 나아지지 않았다. # 부당한 대우를 받았던 원작자 길승수 작가에 대한 사과도 없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았다. #
3.7. 1월 26일, 시청자들의 트럭 시위
결국 1월 26일 금요일 오전 9시부터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KBS 본사 앞에서 트럭 시위까지 벌어졌다. #1 #2 해당 시위는 오후 5시 쯤에 종료되었다. #3.8. 1월 27일, 제작진의 제2시청자청원 답변
{{{#!folding 1월 27일, KBS 시청자센터 제작진 청원 답변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대하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을 사랑해 주시는 시청자 여러분께 감사 인사드립니다. 최근 불거진 여러 혼란에 대해 제작진으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며 사죄의 말씀을 올립니다. 대하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의 완성도를 위한 시청자분들의 고견에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시청자분들의 의견을 적극 반영해 완성도 높은 드라마를 만들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청원해주신 내용과 관련한 제작진의 답변입니다. 대하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의 모든 대본은 이정우 작가가 직접 집필한 것입니다. 1회부터 방송을 마친 20회까지 이정우 작가 단독으로 역사적 자료를 통한 고증과 전문가의 자문을 통해 완성하였습니다. 이 점 오해 없으셨으면 합니다. 향후에도 대본 집필은 이와 같다는 점을 알려드립니다. 대하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은 설연휴를 맞아 일요일 스페셜 방송을 준비중이며, 본방송은 1주간 결방할 예정입니다. 그 기간을 통해 완성도 높은 작품 제작에 만전을 기하겠습니다. 제작진은 최근 대하드라마 '고려거란전쟁'에 대한 시청자들의 우려와 걱정을 잘 알고 있으며, 상황을 엄중히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프로그램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라는 점 역시 깊이 새기고 있습니다. 대하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은 남은 회차를 통해 외적의 침입을 물리치고 동북아에 평화의 시대를 구현한 현종과 강감찬 장군의 호국정신을 완성도 있게 그려나가겠습니다. 프로그램을 통해 지켜봐 주시고 앞으로도 많은 성원과 사랑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 }}}}}} |
시위 다음날인 1월 27일 제작진은 상황을 엄중히 받아들이고 있으며 설 연휴를 맞아 1주 휴방을 통해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겠다고 밝혔다. # 그럼에도 여론의 악화만 계속되었는데 제작진은 〈고려 거란 전쟁〉의 악평의 원인을 '이정우 작가의 독단적 행위'라며 꼬리 자르기 식으로 발뺌하는 태도를 보인 데다 문제가 '역사 왜곡 및 원작의 도용과 훼손'이란 점[35]임에도 이를 '작품의 퀄리티와 완성도 및 예술성'이라는 관계가 없는 논지로 논점을 흐리는 태도를 보였다. 1주일 동안의 결방으로 퀄리티를 높이겠다는 방침을 내세운다고 해도 만에 하나 문제점이 해결되지 않거나 악화될 시 더더욱 대하드라마를 넘어 KBS의 드라마 제작진, 더 나아가 KBS 전체에 대한 불신만 키울 수 있는 양날의 검과 같거나 그냥 조치하는 시늉만 하는 시간 때우기에 가까운 조치를 했다고 봐도 무방한 방법을 선택했다고 볼 수 있다.[36]
미디어오늘 기사를 통하여 두 차례의 시청자청원에 대한 답변에 대해 'KBS의 해명 가운데 사극이 모두 역사적 내용만 다룰 순 없다는 대목은 억울하다는 메시지로 읽힌다'고 하면서 동시에 '정통사극', '대하사극' 마케팅으로 역사성을 강조한 착시를 일으킨 것은 KBS라는 지적도 나왔다. # 한마디로 KBS의 자업자득이란 뜻이다.
3.9. 1월 29일 이후
1월 29일 22회 방영 직후 기준 한 제작진에 의하면 "대본 자체는 27회까지 다 나왔고 25~27회는 촬영 중"이라고 밝혔다. # 이후 해당 회차의 김훈·최질의 난 관련 내용이 공개되자 결과적으로 논란을 잠재우는 것은 고사하고 오히려 불 난 집에 기름을 붓고 부채질을 하는 격이 되었다.2월 1일, 원작자는 '16회에서 바로 21회로 건너뛰어도 드라마 보는데 전혀 지장이 없다'는 의견에 동조하며 21~22회는 어느 정도 실제 역사를 따라가기 시작한다고 보았다. #
2월 20일, 원작자는 김훈, 최질의 난이 묘사된 25~26회에 관해서는 궁녀를 건드리는 장면은 정말 역겨우며 반란 전후에 거란군과의 대치가 전혀 묘사되지 않은 것을 두고 평행세계를 그린다며 비판하였다. #
같은 날 조원 역으로 출연한 김중돈 배우의 인스타에 올라왔던 사진을 통해 26회 방영 시점에서 대본이 최소한 30회까지는 완성되었다는 사실 및 30회에서 제3차 여요전쟁의 장면을 다루는 점을 알 수 있다.[37] #
2월 23일, 마지막회의 대본이 나왔고 내용에 대한 함구령이 내려졌다고 한다. #
2월 25일, 원작자는 27화 리뷰에서 더 이상 지적하기도 지친듯 제목으로 대놓고 '작작 하자'라며 도대체 뭘 만들고 있는 거냐며 한탄하는 한편 제작 초기 제작진과의 미팅에서 "KBS 대하사극 제작에 참여하는 건 명예로운 일이다."라고 했던 일을 언급하며 이제 보니 자신만 그랬던 것 같다며 씁쓸함을 내비쳤다. #
결국 8년여에 걸친 고려와 거란의 기 싸움, 3차 전쟁은 뒷전이고 가상 인물을 동원해 억지로 채워넣은 고려 내분기가 3/4을 차지한 괴상한 드라마로 종결되고 말았다. 1화에서 보여준 비장감 넘치는 귀주 대첩도 31/32화에서 짤막하게 다뤄진 뒤 결말 후 느닷없이 강감찬이 은퇴하고[38], 현종이 궁궐에서 목종/천추태후/강조 등의 사이로 지나가 옥좌 앞에 서는 장면으로 급하게 마무리되었다.[39]
4. 유사 사례
4.1. 사극에서의 유사 사례
사극에서 역사의 공백을 묘사하는 것은 제작진의 재량이지만 개연성의 부재는 비판의 대상이 된다. 고려 시대 초기의 국내 기록이 고려사, 고려사절요를 제외하면 기록이 매우 부족한 편이라서 고증이 어렵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경제사 등이 부족한 것이지 정치사는 편년체로 압축되어 읽기도 쉬워 충분히 다룰 수 있음에도 중요한 것들을 소홀히 다루거나 아예 왜곡 폄하하여 다룬다는 논란이 발생했다. 사극 중에서 이와 유사한 사례로 다음과 같은 작품들이 거론되기도 한다.- 여인천하(2001) - 역사 왜곡으로 시정권고가 들어간 대표적인 사례다.
- 킹덤 오브 헤븐(2005) - 의상 고증은 뛰어나지만 역사적 서사와 당대 사고방식 고증으론 300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하지만 스토리 텔링 자체에 설득력이 있었기 때문에 역사와는 다르더라도 큰 비판은 받지 않고 오히려 명작이라고 불린다.[40][41][42]
- 천추태후(2009) - 근초고왕(2010~2011) - 광개토태왕(2011~2012) - 대왕의 꿈(2012~2013) - 소위 KBS 대하드라마 흑역사 계보라고 불린다. 그러나 이 흑역사들도 뭔가 하나씩 장점이 있긴 하거나 남기기라도 했다.
- 바이킹스(2013~2020) - 라그나 로스브로크와 롤로가 친형제로 등장하고 주인공급 캐릭터들이 다른 역사적 인물들의 행적을 빌어오는 등 서사의 각색 비중이 굉장히 크지만 드라마의 시대적 배경은 문헌보다 전승 중심으로 전해지기도 하거니와 캐릭터성이 엉망이 되는 일은 없었다.
- 징비록(2015)(정형수, 정지연) - 드라마 초반부의 전투 연출(흥화진 전투/부산진 전투)로 처음에는 호평을 받았으나 16~20회의 극중 퀄리티 급락 및 고려 거란 전쟁만큼은 아니지만 인물 묘사의 입체성 부족으로 인해 비판을 받은 것이 비슷하다.
- 조선구마사(2021)(박계옥) - 역사 왜곡, 위인 폄하 비판으로 단 2회 만에 조기종영(엄밀히 말하자면 중도종영)되었다.
- 태종 이방원(2021~2022)(이정우) - 같은 작가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는 그나마 정사대로 가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역사 왜곡 논란은 없었던 대신 말 학대 논란이 터지면서 조기 종영 위기까지 갔었다가 가까스로 방영을 재개할 수 있었다. 이를 의식한 듯 '동물 보호에 신경 쓴다'는 문구를 고려 거란 전쟁 매 회차 앞에 삽입해왔다.
4.2. 원작자-극화 제작진 간 갈등 사례
- 갈매기의 꿈(1973) - 원작 소설의 작가 리처드 바크가 영화가 개봉되기도 전에 원작 왜곡이라고 비판하였고, 파라마운트 픽처스에게 소송을 걸 정도로 제작진과의 갈등이 심하였다. #
- 네버엔딩 스토리(1984) - 원작 소설과의 심한 차이로 인해 원작자 미하엘 엔데가 소송을 걸 정도였으나 결국 승소하지는 못하였다고 한다. #
- 불멸의 이순신(2004~2005) - 원작 소설 계약 중 김훈의 《칼의 노래》가 있지만 해당 소설의 전개를 제대로 차용한 것이 거의 없는 데다 원균 맹장설을 채택하였고 김훈 본인도 드라마와 선을 그었다.[43]
- 근초고왕(2010~2011) - 원작 소설은 이문열의 《대륙의 한》이지만 드라마가 원작과는 딴판의 전개에 사실상 허접한 환빠물이 되면서 이문열 본인도 소설을 재출간할 때 드라마와 선을 긋는 모습을 보였다.
- 치즈인더트랩(2016) - 제작진이 일방적으로 원작자와의 논의 사항을 무시하여 원작자가 자신의 블로그에서 14회 방영 후 이런 제작진의 태도를 공개적으로 비판하였는데 본작도 원작자가 방영 도중에 내부 사정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내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 재벌집 막내아들(2022) - 재벌집 막내아들(드라마)/비판 문서 참고. 결말 자체가 원작을 훼손했다는 비판이 있다.
- 섹시 타나카 씨(2024) - 일본에서 발생한 매우 유사한 사례인데 원작자에 대한 방송국 및 각본가의 조롱, 원작 충실 계약이행 위반 등으로 원작자인 아시하라 히나코가 극단적인 선택까지 한 사건이다. 현지에서는 이로 인해 조선구마사처럼 드라마의 흔적과 기록들이 모조리 말소되었고 방송국과 각본가에 대해 '살인자'라는 거센 비난이 나왔다. 사건 이후 원작 기반 드라마들의 제작사 및 방송국이 원작 및 원작자를 무시하는 행태들에 대해 폭로가 이어지며 대원작 업계와 방송 업계의 갈등으로도 번지는 등 사태가 커졌다. 본 논란과 비슷한 시기에 발생한 데다 피해를 입은 원작자가 공방 중에 해당 드라마에 대한 반박문을 쓰면서 일이 커져 한국인들의 관심을 받았다.
5. 여담
- 유튜브 등지에 드라마에 대한 비판을 하면 '꼬우면 보지 마라' 등의 극성 팬들의 댓글이 심심치 않게 달렸다.
* 이정우 작가의 막장, 날림 전개로 인하여 비난의 짤들이 돌아다닌다.
[1] 이 문제점은 탁사정을 용서한 이유에 현실적인 문제 하나 정도만 끼워넣었어도 해결되었을 부분이다. 실제로 탁사정은 자신이 이끌던 동북면의 군사들을 싹 데리고 서경을 버렸기에 전쟁 후에도 도순검사의 군권을 그대로 행사할 수 있었다. 만약 그런 탁사정을 섣불리 처벌하려 들었다간 고려판 이괄의 난이 벌어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며, 전쟁이 끝난지 얼마 안된 고려에게는 엄청난 치명타가 되었을 것이다. 특히 본작의 탁사정은 자기 한몸 보신을 위해 반란을 일으키고도 남을 인간이다. 이러한 사정을 현종의 죄책감과 적절히 섞어 묘사했어도 이렇게 까이지는 않았을 것이며 해당 장면 역시 9화에서 강감찬이 거란 진중에서 포로 아이에게 눈물을 머금고 거짓말하는 장면과 비슷한 효과를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본인이 불러놓고 유족들 위로한답시고 '반란 일으킬까봐 일단 불러올린거고 곧 명분 찾아서 내칠거다' 할 수는 없으니. 물론 그 자리에 탁사정을 동석시킨다는 것 자체가 쉴드 불가이긴 하나 굳이 동석시키지 않아도 이러한 불만을 충분히 나타낼 수 있다.[2] 작가의 전작인 태종 이방원이 말 학대 사건으로 폐지 논란까지 벌어졌는데 또 정신을 못 차리고 원 역사에도 없는 말 학대+배우 학대를 다시 진행한 것에 대해서도 매우 부정적인 여론이 많다.[3] 고려 최고의 성군이자 한반도에서도 손꼽히는 명군 현종이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쳐온 충신을 자기 뜻에 따르지 않는다고 마구잡이로 비난한다. 실제로 작중 김은부의 행동은 참작할 여지가 있다지만 어쨌든 탄핵당해도 할 말 없는 것도 사실인데 앞뒤 분간도 안 하고 달려가서 일국의 중신을 지낸 노신의 목을 조르려고 한다. 뒤에 일어나는 황당한 교통사고는 둘째치고 한국 사극에서 묘사된 웬만한 폭군들도 멱살을 잡거나 칼을 겨누거나 했어도 저렇게 목을 조르려는 시늉은 자주 보기 힘든 장면인데 이런 말도 안되는 억지 픽션을 집어넣는 건 해도 해도 너무 하는 거 아닌가라는 비판 여론이 매우 강하다. 이건 그냥 픽션으로 봐줄 게 아니라 역사 왜곡 수준이라 재밌게 보던 사극이라 더 열 받는다는 여론이 많다.[4] 물론 20회 내용을 보고 예측해 보면 강감찬이 이미 강씨 가문에게 언질을 듣고 나서 현종에게 출두해 달라고 미리 요청했을 수도 있지만 언제 현종이 들이닥칠지, 언제 자신이 죽음을 당할지까지는 예언자가 아니고서는 알 수 없는데 굳이 목숨을 걸고 말할 필요는 없었다. 만약 20회가 의도한 것이 현종에게 미안한 마음이 가득한 강감찬은 미리 호족들에게 죽을 생각이었고 그 때 들이닥친 현종에게 그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호족 타파에 명분을 실어준다는 의도일 수도 있겠지만 그 때 분노한 현종이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하다가는 안그래도 적대적인 호족들을 상대로 더더욱 거센 반박을 초래할 수도 있으니, 강감찬이 주장하는 온건하고 점진적인 개혁에도 맞지 않는 방향성이었다.[5] 사실 현종을 모욕하고 있을 때 호족 대모(배우 송옥숙)가 태조 왕건을 언급하였는데 이 때 대놓고 전생에 태조 대왕이었던 강감찬을 클로즈업하였다. 덩달아 강감찬도 태조 대왕 이야기를 듣자마자 놀란 기색의 표정이었던 것을 봐서 자기 과거 이야기에 급발진해 버린 거 아니냐는 우스갯소리도 나오기도 했다.[6] 작품 종영 후 공개된 스페셜에서 이 부분은 김한솔 PD가 연출을 담당하였다고 밝혔다. #[7] 유성이 떨어지는 장면은 어머니의 태몽이 그랬다는 식으로만 처리했어도 비현실성에 대한 비판은 줄었을 것이다.[8] 애초에 유방은 작중 첫 등장 시점에서도 친종장군 직책을 역임하고 있던 무관이었다.[9] 박종기 (1998) 『11세기 고려의 대외관계와 정국운영론의 추이』, 김두향 (2005) 『고려 현종대 정치와 이계(吏系) 관료』, 김보광 (2014) 『고려 성종·현종대 太祖配享功臣의 선정 과정과 의미』, 오치훈 (2018) 『고려 전시과의 운영과 영업전·구분전』[10] 앞서 유금필이 인망이 높아 백성들로부터 '만세'를 받자 왕건에 의해 숙청을 당할 뻔하기도 하였다. 강조 역시 군사들이 정변 직후 만세를 부르는 것을 듣고 놀라서 그들을 타이르기도 하였다.[11] 후대에 일어난 무신정변의 주동자들도 엄연히 임금의 여인인 궁녀를 건드리는 일만큼은 벌이지 않았으며 실제로 그들을 성추행까지 하면서 막나간 이들은 정균, 이지영 정도의 소수다. 이지영은 그 시대에도 동생 이지광과 함께 쌍도자로 불릴 정도로 악명을 떨치고 있었다. 그런 이지광조차 무인시대에서는 이지영이 궁녀를 겁탈하려고 하자 미친 것이냐고 기겁했다.[12] 무인시대에서는 석린이 명종 앞에서 투구를 던지기 전에 지시한 조원정에게 정말 이래도 되냐고 반문했다. 군주의 권위는 아무리 권신이라도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영역인 것이 핍진성이라 엄연히 사료에 남은 사건을 재현함에도 이런 묘사를 추가한 것인데 이 드라마는 그런 점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13] 단적으로 이야기해 보자. 전란 중 거란군의 악행의 경우 실제로 거란군은 유목민족으로서 영토는 넓은 데 인구가 적고 주변국에 비해 농경 지식이 풍부하지 않았으므로 당사 침략국의 백성을 약탈하기도 했다. 게다가 이들이 시작한 이 전쟁마저도 명분이란 게 중요시되어 작중 거란군 측에서도 여러 번 언급되기도 했다. 이들의 악행이 마땅한 사유가 없는 것은 아니었고 기록된 사실을 통해 양규 및 김숙흥을 연결하여 향후 그들의 거란군을 향한 격분을 연출함에 개연성을 줄 수 있었다. 그런데 무관들의 반란 직후 묘사된 무관들의 행패는 이렇다 할 명분조차 사라졌다. 분명 반란 전까지만 해도 거란군을 상대로 가장 처절하고 치열하게 싸워주었던 무관들이 반란 직후 고작 몇 화만에 상도덕마저 저버린 인간으로 타락해 버렸다.[14] '최후에 현종이 이들을 심판한다'는 결과를 위해 없어도 될 것까지 무리하게 짜낸 개연성을 위해 희생된 셈이다. 다시 말하자면 전자의 예시는 거란의 약탈과 양측의 치열한 전투를 통해 전쟁이 어째서 참혹한지 묘사할 수 있었다면 후자는 역사에 대한 깊은 고찰과 탐구 없이 어차피 죽을 운명이라며 이들의 명분과 행동원리에 대해 조명하지 않고 멀쩡한 사람을 고작 욕구만 따르는 무능한 바보로 전락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 거란군을 두고 야만인이라며 비난하던 작중 고려 측 인물들을 생각하면 참으로 통탄할 수밖에 없다. 물론 창작자로서는 가장 편하고도 위험한 길이다. 제작자 입장에서는 깊게 생각할 것 없이 이게 가장 편한 길이니까 말이다.[15] 정확히 말하자면 고려사 및 고려사절요 등의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듯이 1017~1018년 이전까지 고려군의 2군은 존재하지 않았다. 원작 소설에서는 1010년대 초반의 중앙군이 올바르게 6위만 소개되었기 때문에 더욱 비교되는 부분이다.[16] 전제 왕조에서 왕족은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역모에 이름만 올려도 처벌을 피할 수 없었다. 그나마 왕이 관용을 베풀면 유배로 끝나지만 최악의 경우엔 사약을 받았다. 황후가 반란에 관여했다면 아무리 협박받았어도 폐비될 일이다.[17] 본 드라마가 현 문서에 서술되어 있는 수많은 역사 왜곡 논란이 있음에도 그중에서도 본작을 괴상한 막장극으로 더럽혀 버린 진정한 최악의 원흉은 바로 박진 캐릭터라 할수있는데, 본 인물은 정말이지 아무리 픽션이라 해도 그야말로 역대 한국 사극 들을 전부 뒤져봐도 거의 찾아보기가 힘든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괴랄한 전개들을 보여준다.[18] 작중에서 당대 호족의 위세가 과장되어 나온다 하지만, 그런 설정 속에서도 진짜배기 거물 호족들은 따로 있고 박진은 잘해봤자 중견 수준인 말단 호족에 가깝게 묘사된다. 당장 박진 본인부터가 유진을 만날 때 유씨 집안에 비하면 본인은 그저 한미한 호족이라고 인정하기도 했다.[19] 무관들이 오를 수 있는 정3품의 최고 지위로 오늘날로 따지면 아무리 낮게 잡아도 중장급 이상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지위다.[20] 후술하였듯이 27회까지의 대본 자체는 이미 22회 방영 시점에서 완성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시청자들의 원성을 가라앉히기 위한 수작일 뿐이었다.[21] 하지만 귀주대첩도 1화의 재탕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갑자기 우천취소급 편집으로 날림하여 거센 비판을 받게 되었다.[22] 당장 삼국지만 봐도 소제를 시해하는 역적질을 감행한 동탁은 황제를 끼고 있었음에도 전국에서 거병하는 반동탁 연합군을 직면해야 했으며, 협천자로서 동탁보다 더 우월한 정치적 감각을 보여준 조조도 완벽하게 명분을 장악하지 못해 유비를 필두로 하는 군벌들의 저항에 죽을 때까지 골머리를 썩어야 했다. 본작의 최질은 온갖 폭압적인 행동으로 인해 정계를 전혀 휘어잡지 못했고, 박진을 비호하며 본인도 역적임을 공표한 이상 아무리 황제나 황후가 명령을 내리게끔 해도 거병을 막을 수 없음이 뻔하다.[23] 역사적 사실 여부를 떠나 작품 자체의 스토리만으로 평가하더라도 엄청난 무리수다. 군주가 휘하 신하들의 반란을 제대로 제압하지 못했다는 것은 권력 체제를 제대로 장악하지 못 했다는 무능함의 극치이거니와 하물며 중추사 강감찬이 머나먼 곳에서 서북면 군사들을 이끌고 왔을 때도 이 대역죄인들을 참형에 처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돌려보낸 것은 그나마 도우러 온 아군의 사기와 신뢰마저 떨어뜨리는 가장 최악의 패착이기 때문이다. 이는 같은 시간대 거란의 성종의 대사로도 언급된다.[24] 원성왕후는 전하기만 했을 뿐이라고 해도 묘사상 계책을 이자림이 주도적으로 낸 게 아니라 그저 적이 더 많으니 방심시켜야 한다고 말할 뿐이었다. 원성왕후가 이를 현종에게 전해 연회를 이용하는 것으로 전개가 흘러가서 이자림이 주도하는 면이 약해졌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활약이 축소된 것은 틀림없다. 그나마 29회에 가장 처음 연회를 이용할 계책을 낸 것이 이자림이었다고 할 여지는 남아 있다.[25] 태조 왕건에서도 적지 않은 호족들이나 신라 왕실에 대한 우호적인 정책과 민심 안정으로 성군으로 고평가 받는 왕건조차 호족들의 배신으로 삼년산성 전투해서 패배하자, 당시 왕건을 배신했던 호족들의 가족들을 전부 끌고와 어린 아이들이라도 예외없이 철퇴로 처형하라고 일갈한 것과는 매우 정반대다.[26] 언제 하차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최소한 2023년 2월 이전에 하차한 것은 분명한데 2023년 2월에 이정우 작가가 본작의 대본을 담당한다는 기사가 나왔기 때문이다.[27] 고칠 거면 역사에 기반해서 고쳐야 하는데 그것도 신경 안 쓰고 있다는 것을 자인한 셈이다. 참고로 고거전은 대하사극이라 역사 고증이 필수나 다름없다.[28] 본작에 관한 최초 보도로 보면 알 수 있듯이 '윤지혜' 작가를 말하는 것이다.[29] 대신 "원작뿐 아니라 역사적 사실과도 다르게 가고 있다"고 밝혔는데 17회부터의 전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30] 당연하지만 강조의 정변이 명분이 되어 거란이 고려를 침공하게 된 것이 실제 정사이고 소설도 그렇게 흘러간다.[31] 자문경력 출처들 #1 #2 #3[32] 이것은 원작자의 경력을 무시하는 행위로 사실 이전부터 질이 나쁜 드라마 각본가들은 대작가의 명작품을 제외하고 원작가의 원작품을 무시하는 경향이 암암리에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33] 정확히 말하자면 길승수 작가는 "자문 계약을 했을 당시에는 '고려거란전쟁' 역사책을 출간하기 전이었다. 한참 작업 중이었는데도 텍스트로 원본을 제공하고 강의까지 했다. 이정우 작가에게도 당연히 제공을 했다. 이후 이정우 작가가 그 책을 보고 1~2달 만에 시놉시스를 썼고, 카카오톡으로도 '작가님 덕분에 시놉시스 완성 잘했다'고 메시지를 보내왔다. 이후에 이 책이 출간되고 나서 '고려거란전쟁'의 스토리텔링 북이라고 띠지가 나갔는데 KBS에서 그걸 떼라고 연락이 왔다고 했다. 황당해서 몬스터유니온에 얘기를 했는데, "이정우 작가한테 물어봤더니 원고를 본 적이 없다고 했다'고 하더라. 증거가 엄청 많은데도 이건 남의 연구물을 빼앗겠다는 것 아닌가"라고 답답해했다.[34] 다만 해당 이슈 이후 22회까지의 감상으로 미뤄볼 때 김혁은 본인 파트에 대본이나 촬영 당시 아무 문제가 없기 때문에 저런 입장을 내놓은 것 아니냐는 웃픈 반응도 있었다. #[35] 사실 드라마 회차 시작 전 연령고지 다음에 '본 드라마는 역사적 인물 및 사건들에 상상력을 더해 재창조된 이야기이며, 실제 역사 기록과 다를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라고 미리 알려주지만 그래도 언론플레이로 이정우 작가 본인이 "인물을 재해석하기보다는 인물을 알리는 것에 주력했다"면서 역사를 철저히 재현하겠다고 한 일과 더불어 '정통 대하사극'이나 '공영방송 KBS'에 대한 기대가 컸던 만큼 이 논란으로 실망이 커진 것으로 보인다.[36] 드라마 제작 환경 특성상 이미 대여된 세트장과 소품 대여 일정을 변경하는 것은 그렇다치고 전개에 따라 배우들의 연기와 역할, 앞서 전개된 내용과 성격이 변경된다면 그건 그것대로 드라마의 몰입성을 해치는 일이기도 하다. 이미 원작 및 역사와 동떨어진 전개가 진행된 이상 고작 1주일 안에 그것을 모두 덮어 버릴 연출이 나오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미봉책에 불과한 셈이다.[37] 따라서 제3차 여요전쟁을 29-30회 중 삼교천 전투, 30회 중 자주-마탄 전투, 31회 중 금교역 전투와 위주-연주 전투, 32회에서 귀주 대첩 등으로 나누어 다룰 것이 예상되었다. 김훈·최질의 난을 27-28회 내에 신속히 끝낸다고 쳐도 고려-거란의 전간기 충돌 및 전략의 진화 내용이 28-29회 단 2화로 대대적 축약하는 것이 확정된 것이다.[38] 강감찬이 귀주 대첩 직후 사직을 청한 것은 사실이나 현종이 궤장을 하사하며 만류했고 실제 은퇴는 1년 후에 이뤄졌다.[39] 참고로 이렇게 급하게 마무리한 건 이정우 작가의 전작 태종 이방원과 똑같은 행태다. 그나마 태종 이방원의 경우 30년에 달하는 시간대로 인해 1화당 1년 정도의 분량을 전개시켜야 해서 생략된 역사적 사건들이나 각본의 허술한 부분은 있었을 지언정 역사적 사실에 대한 심한 왜곡과 늘어지는 부분은 거의 없이 속도감 있게 밀어붙였다. 반면 본작은 10년도 안되는 시간대를 32화로 방영하는 주제에 끽해야 1-2화로 끝낼 수 있는 지방개혁과 김훈, 최질의 난을 각 4화씩으로 질질 늘어뜨리는 추태를 부렸고 그 자리를 가상 인물과 역사 왜곡으로 채워버렸다.[40] 다만 킹덤 오브 헤븐의 역사 왜곡(?)을 고려 거란 전쟁에서 일어난 것과 궤를 같이 한다고 봐야 할지 의문이다. 중심 인물들의 개인적인 뒷배경들을 바꾼 것은 사실이지만 적어도 역사적 사실 내에서 역할을 과대평가나 과소평가하는 줄타기 하나는 확실히 했기 때문이다. 보두앵 4세를 초종교적인 성인군자로 표현하였지만 보두앵 4세가 현대 역사가들도 인정하는 요절한 명군이었던 것은 사실이고 비록 정치적 필요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말년에는 무슬림 영향권에 대하여 적대적인 활동을 줄인 것도 사실이다.[41] 킹덤 오브 헤븐에서는 역사로나 영화상에서도 관대하고 위대한 지도자로 그려진 살라딘은 두말할 것도 없고 예루살렘 왕실과의 결혼으로 무능하지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다 왕국을 말아먹은 기 드 뤼지냥, 보두앵 4세가 총애하고 믿었던 영주인 빌리앙 역시 유럽에서 순례를 왔던 사생아 대장장이라는 이상한 뒷배경으로 설정했지만 전체적인 예루살렘 공방전의 전개상의 역할에서는 고려 거란 전쟁의 황후들의 스토리 인플레이션 수준의 말도 안되는 활약같은 것은 없다. 굳이 따지자면 시빌라 여왕과 빌리앙의 로맨스 정도일 텐데 이마저도 결국에는 필요에 의해 기와의 결혼을 유지하는 선택을 하였고 최종적으로 예루살렘 공방전에서 대단한 역할은 하지 못하는 것으로 전체적인 역사적 개연성은 챙겼다. 비록 킹덤 오브 헤븐은 개인서사에 대해 고증은 지키지는 않았더라도 적어도 누구의 역할을 과대평가하거나 과소평가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42] 결론은 킹덤 오브 헤븐이 고려 거란 전쟁 수준의 역사 왜곡을 하려면 적어도 시빌라 여왕이 주도적으로 보두앵 4세에게 기와의 파혼을 주도하거나 본인이 칼을 잡고 예루살렘 성에 침투한 무슬림 군대와 싸우는 모습을 보였다면 논란이 됐을 수도 있다. 그나마 이런 맥락에 부합하는 캐릭터는 빌리앙의 아버지인 고드프리 정도인데 고드프리도 사실 분량이 많지 않고 실제 빌리앙의 아버지인 빌리장과 예루살렘 왕국의 수도사인 티레 드 기욤의 역사적 역할을 얼추 섞은 창작 캐릭터 정도였던 걸 생각하면 분량 압축을 위한 선택이지 역사 왜곡을 하려는 의도는 없었다고 봐도 좋다.[43] 제작진이 원균 맹장설을 채택하자 SNS가 2020년대에 비해 크게 활발하지 않았던 2004년에 시청자 항의가 쏟아져 나와 스토리가 약간 수정되었던 걸 감안하면 SNS가 활발한 2010년대부터는 역사 왜곡 지적이 일어나기 쉽다. 여담으로 불멸 제작진은 해명하면서 "철저히 조선왕조실록에 기반해 집필한다!"는 개드립을 당당하게 주장했다가 대중들에게 한 차례 더 비난을 얻어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