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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6-01-11 10:20:48

형만


위서(魏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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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제기(帝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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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서기(序記)」 2권 「태조기(太祖紀)」 3권 「태종기(太宗紀)」
탁발부 · 대나라 탁발규 탁발사
4권 「세조·공종기(世祖恭宗紀)」 5권 「고종기(高宗紀)」 6권 「현조기(顯祖紀)」
탁발도 · 탁발황 탁발준(浚) 탁발홍
7권 「고조기(高祖紀)」 8권 「세종기(世宗紀)」 9권 「숙종기(肅宗紀)」
원굉 원각 원후
10권 「효장제기(孝莊帝紀)」 11권 「폐출삼제기(廢出三帝紀)」 12권 「효정제기(孝靜帝紀)」
원자유 원공 · 원랑 · 원수 원선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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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열전(列傳) ]
13권 「황후전(皇后傳)」
신원황후 · 봉황후 · 기황후 · 평문황후 · 소성황후 · 헌명황후 · 도무황후 · 도무선목황후 · 명원소애황후 · 밀황후 · 태무황후 · 경애황후
경목공황후 · 문성문명황후 · 문성원황후 · 헌문사황후 · 효문정황후 · 풍폐후 · 효문유황후 · 효문소황후 · 선무순황후 · 선무황후 · 선무영황후
효명황후 · 효정황후
14권 「신원·평문제제자손전(神元平文諸帝子孫傳)」
탁발흘라 ,탁발제, · 탁발영문 · 탁발육 · 탁발인 · 탁발수낙 · 탁발퇴 · 탁발소연 · 탁발욱 · 탁발목진 · 탁발육수 · 탁발비간 · 탁발여 · 탁발고
탁발돈 · 탁발석 · 탁발위 · 탁발대두 · 탁발제 · 탁발처진 · 탁발니
15권 「소성자손전(昭成子孫傳)」 16권 「도무7왕전(道武七王傳)」
탁발식군 · 탁발한 · 탁발준(遵) · 탁발건(虔) · 탁발순 · 탁발의열
탁발굴돌
탁발소 · 탁발희 · 탁발요 · 탁발수 · 탁발처문 · 탁발연 · 탁발려(黎)
17권 「명원6왕전(明元六王傳)」 18권 「태무5왕전(太武五王傳)」
탁발비 · 탁발미 · 탁발범 · 탁발건(健) · 탁발숭 · 탁발준(俊) 탁발복라 · 탁발한 · 탁발담 · 탁발건(建) · 탁발여(余)
19권 「경목12왕전(敬穆十二王傳)」
탁발신성 · 탁발자추 · 탁발소신성 · 탁발천사 · 탁발만수 · 탁발낙후 · 탁발운 · 탁발정 · 탁발장수 · 탁발태락 · 탁발호아 · 탁발휴
20권 「문성5왕전(文成五王傳)」 21권 「헌문6왕전(獻文六王傳)」
탁발장락 · 탁발략 · 탁발간(簡) · 탁발약 · 탁발맹 원희 · 원간(幹) · 원우 · 원옹 · 원상 · 원협
22권 「효문5왕전(孝文五王傳)」 23권 「위조등전(衛操等傳)」 24권 「연봉등전(燕鳳等傳)」
원순 · 원유 · 원역 · 원회 · 원열 위조 · 막함 · 유고인 연봉 · 허겸 · 장곤 · 최현백 · 등연
25권 「장손숭등전(長孫嵩等傳)」 26권 「장손비등전(長孫肥等傳)」 27권 「목숭전(穆崇傳)」
장손숭 · 장손도생 장손비 · 울고진 목숭
28권 「화발등전(和跋等傳)」 29권 「해근등전(奚斤等傳)」
화발 · 해목 · 막제 · 유업연 · 하적간 · 이율 · 유결 · 고필 · 장려 해근 · 숙손건
30권 「왕건등전(王建等傳)」
왕건 · 안동 · 누복련 · 구퇴 · 아청 · 유니 · 해권 · 차이락 · 숙석 · 내대천 · 주기 · 두대전 · 주관 · 염대비 · 울발 · 육진 · 여락발
31권 「우율제전(于栗磾傳)」 32권 「고호등전(高湖等傳)」
우율제 고호 · 최영 · 봉의
33권 「송은등전(宋隱等傳)」
송은 · 왕헌 · 굴준 · 장포 · 곡혼 · 공손표 · 장제 · 이선 · 가이 · 설제
34권 「왕낙아등전(王洛兒等傳)」 35권 「최호전(崔浩傳)」 36권 「이순전(李順傳)」
왕낙아 · 차노두 · 노노원 · 진건 · 만안국 최호 이순
37권 「사마휴지등전(司馬休之等傳)」 38권 「조옹등전(刁雍等傳)」 39권 「이보전(李寶傳)」
사마휴지 · 사마초지 · 사마경지 · 사마숙번
사마천조
조옹(刁雍) · 왕혜룡 · 한연지 · 원식 이보
40권 「육사전(陸俟傳)」 41권 「원하전(源賀傳)」 42권 「설변등전(薛辯等傳)」
육사 원하 설변 · 구찬 · 역범 · 한수 · 요훤
43권 「엄릉등전(嚴棱等傳)」 44권 「나결등전(羅結等傳)」
엄릉 · 모수지 · 당화 · 유휴빈 · 방법수 나결 · 이발 · 을괴 · 화기노 · 순퇴 · 설야저 · 우문복 · 비우 · 맹위
45권 「위랑등전(韋閬等傳)」 46권 「두근등전(竇瑾等傳)」 47권 「노현전(盧玄傳)」
위랑 · 두전 · 배준 · 신소선 · 유숭 두근 · 허언 · 이흔 노현
48권 「고윤전(高允傳)」 49권 「이령등전(李靈等傳)」 50권 「울원등전(尉元等傳)」
고윤 이령 · 최감 울원 · 모용백요
51권 「한무등전(韓茂等傳)」
한무 · 피표자 · 봉칙문 · 여나한 · 공백공
52권 「조일등전(趙逸等傳)」
조일 · 호방회 · 호수 · 송요 · 장담 · 종흠 · 단승근 · 감인 · 유병 · 조유 · 색창 · 음중달
53권 「이효백등전(李孝伯等傳)」 54권 「유아등전(游雅等傳)」 55권 「유명근등전(游明根等傳)」
이효백 · 이형 유아 · 고려 유명근 · 유방
56권 「정희등전(鄭羲等傳)」 57권 「고우등전(高祐等傳)」 58권 「양파전(楊播傳)」
정희 · 최변 고우 · 최정 양파
59권 「유창등전(劉昶等傳)」 60권 「한기린등전(韓麒麟等傳)」 61권 「설안도등전(薛安都等傳)」
유창 · 소보인 · 소정표 한기린 · 정준 설안도 · 필중경 · 심문수 · 장당 · 전익종 · 맹표
62권 「이표등전(李彪等傳)」 63권 「왕숙등전(王肅等傳)」 64권 「곽조등전(郭祚等傳)」
이표 · 고도열 왕숙 · 송변 곽조 · 장이
65권 「형만등전(邢巒等傳)」 66권 「이숭등전(李崇等傳)」 67권 「최광전(崔光傳)」
형만 · 이평 이숭 · 최량 최광
68권 「견침등전(甄琛等傳)」 69권 「최휴등전(崔休等傳)」 70권 「유조등전(劉藻等傳)」
견침 · 고총 최휴 · 배정준 · 원번 유조 · 부영 · 부수안 · 이신
71권 「배숙업등전(裴叔業等傳)」 72권 「양니등전(陽尼等傳)」
배숙업 · 하후도천 · 이원호 · 석법우 · 왕세필 · 강열지 · 순우탄 · 이묘 양니 · 가사백 · 이숙호 · 노시경 · 방량 · 조세표 · 반영기 · 주원욱
73권 「해강생등전(奚康生等傳)」 74권 「이주영전(爾朱榮傳)」 75권 「이주조등전(爾朱兆等傳)」
해강생 · 양대안 · 최연백 이주영 이주조 · 이주언백 · 이주도율 · 이주천광
76권 「노동등전(盧同等傳)」 77권 「송번등전(宋翻等傳)」 78권 「손소등전(孫紹等傳)」
노동 · 장열 송번 · 신웅 · 양심 · 양기 · 고숭 손소(孫紹) · 장보혜
79권 「성엄등전(成淹等傳)」 80권 「주서등전(朱瑞等傳)」
성엄 · 범소 · 유도부 · 유도빈 · 동소 · 풍원흥 · 녹여 · 장습 주서 · 질열연경 · 곡사춘 · 가현도 · 번자곡 · 하발승 · 후막진열 · 후연
81권 「기준등전(綦儁等傳)」 82권 「이염지등전(李琰之等傳)」
기준 · 산위 · 유인지 · 우문충지 이염지 · 조영 · 상경
83권 「외척전(外戚傳)」
하눌 · 유나신 · 요황미 · 두초 · 하미 · 여비 · 고조 · 우경 · 호국진 · 이연실
84권 「유림전(儒林傳)」
양월 · 노추 · 장위 · 양조 · 평항 · 진기 · 상상 · 유헌지 · 장오귀 · 유란 · 손혜울 · 서준명 · 동징 · 조충 · 노경유 · 이동궤 · 이흥업
85권 「문원전(文苑傳)」
원요 · 배경헌 · 노관 · 봉숙 · 형장 · 배백무 · 형흔 · 온자승
86권 「효감전(孝感傳)」
조염 · 장손려 · 걸복보 · 손익덕 · 동락생 · 양인 · 염원명 · 오실달 · 왕속생 · 이현달 · 장승 · 창발 · 왕숭 · 곽문공
87권 「절의전(節義傳)」
우십문 · 단진 · 석문덕 · 급고 · 왕현위 · 누제 · 유갈후 · 주장생 · 우제 · 마룡팔 · 문문애 · 조청 · 유후인 · 석조흥 · 소홍철 · 왕영세 · 호소호 · 손도등 · 이궤 · 장안조 · 왕려
88권 「양리전(良吏傳)」
장순 · 녹생 · 장응 · 송세경 · 노옹 · 염경윤 · 명량 · 두찬 · 배타 · 두원 · 양돈 · 소숙
89권 「혹리전(酷吏傳)」
우락후 · 호이 · 이홍지 · 고준 · 장사제 · 양지 · 최섬 · 역도원 · 곡해
90권 「일사전(逸士傳)」
휴과 · 풍량 · 이밀 · 정수
91권 「예술전(藝術傳)」
조숭 · 장연 · 은소 · 왕조 · 경현 · 유영조 · 강식 · 주담 · 이숙 · 서건 · 왕현 · 최욱 · 장소유
92권 「열녀전(列女傳)」
임성국태비
93권 「은행전(恩倖傳)」
왕예 · 왕증흥 · 구맹 · 조수 · 여호 · 조옹(趙邕) · 후강 · 정엄 · 서흘
94권 「엄관전(閹官傳)」
종애 · 구락제 · 단패 · 왕거 · 조묵 · 손소(孫小) · 장종지 · 극붕 · 장우 · 포억 · 왕우 · 부승조 · 왕질 · 이견 · 진송 · 백정 · 유등 · 가찬 · 양범
성궤 · 왕온 · 맹란 · 평계 · 봉진 · 유사일
95권 「유총등전(劉聰等傳)」
유총 · 석륵 · 유하 · 모용외 · 부건 · 요장 · 여광
96권 「사마예등전(司馬叡等傳)」 97권 「환현등전(桓玄等傳)」 98권 「소도성등전(蕭道成等傳)」
사마예 · 이웅 환현 · 풍발 · 유유 소도성 · 소연
99권 「장실등전(張實等傳)」
장실 · 걸복국인 · 독발오고 · 이고 · 저거몽손
100권 「고구려등전(高句麗等傳)」
고구려 · 백제 · 물길 · 실위 · 두막루 · 지두우 · 고막해 · 거란 · 오락후
101권 「저등전(氐等傳)」
저족 · 토욕혼 · 탕창강 · 고창 · 등지 · 만족 · 요족
102권 「서역전(西域傳)」
선선 · 차말 · 우전 · 백정 · 차사국 · 언기 · 쿠처 · 소륵 · 속특 · 파사 · 남천축 · 읍달
103권 「연연등전(蠕蠕等傳)」
연연 · 우문막괴 · 단질육권 · 고차
104권 「자서전(自序傳)」
위수
※ 105권 ~ 114권은 志에 해당. 위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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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흠정 24사 관련 틀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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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본기(本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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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위본기1(魏本紀一)」 2권 「위본기2(魏本紀二)」 3권 「위본기3(魏本紀三)」
탁발규 · 탁발사 탁발도 · 탁발황 · 탁발준(浚) · 탁발홍 원굉
4권 「위본기4(魏本紀四)」 5권 「위본기5(魏本紀五)」
원각 · 원후 원자유 · 원공 · 원랑 · 원수 · 원보거 · 원흠 · 원곽 · 원선견
6권 「제본기상(齊本紀上)」 7권 「제본기중(齊本紀中)」 8권 「제본기하(齊本紀下中)」
고환 · 고징 고양 · 고은 · 고연 고담 · 고위 · 고항
9권 「주본기상(周本紀上)」 10권 「주본기하(周本紀下)」
우문태 · 우문각 · 우문육 우문옹 · 우문윤 · 우문천
11권 「수본기상(隋本紀上)」 12권 「수본기하(隋本紀下)」
양견 양광 · 양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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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전(列傳) ]
||<-4><tablewidth=100%><tablebgcolor=#000000> 13·14권 「후비전(后妃傳)」 ||
신원황후 · 봉황후 · 기황후 · 평문황후 · 소성황후 · 헌명황후 · 도무황후 · 선목황후 · 소애황후 · 명원밀황후 · 태무황후 · 경애황후
울구려황후 · 문명황후 · 문성원황후 · 헌문사황후 · 효문정황후 · 폐후 풍씨 · 효문유황후 · 효문고황후 · 우황후 · 고황후 · 호황후 · 효명황후 · 효무황후 · 문황후 · 도황후 · 우문황후 · 약간황후 · 효정황후 · 누소군 · 원황후 · 이조아 · 원황후 · 호황후 · 곡률황후 · 호황후 · 목야리 · 풍소련 · 원씨 · 질노씨 · 원호마 · 독고황후 · 아사나 · 이아자 · 양려화 · 주만월 · 진월의 · 원락상 · 울지치번 · 사마영희 · 독고가라 · 소황후
15권 「위제종실전(魏諸宗室傳)」
탁발흘나 · 탁발영문 · 탁발육 · 탁발인 · 탁발수낙 · 탁발퇴 · 탁발소연 · 탁발욱 · 탁발목신 · 탁발육수 · 탁발비간 · 탁발여 · 탁발고
탁발돈 · 탁발석 · 탁발위 · 탁발대두 · 탁발제 · 탁발처진 · 탁발니 · 탁발식군 · 탁발한 · 탁발준(遵) · 탁발건(健) · 탁발순 · 탁발의열 · 탁발굴돌
16권 「도무7왕·명원6왕·태무5왕전(道武七王·明元六王·太武五王傳)」
탁발소 · 탁발희 · 탁발요 · 탁발수 · 탁발처문 · 탁발연 · 탁발려(黎) · 탁발비 · 탁발미 · 탁발범 · 탁발건(健) · 탁발숭 · 탁발준(俊) · 탁발복라 · 탁발한 · 탁발담 · 탁발건(建) · 탁발여(余)
17·18권 「경목12왕전(敬穆十二王傳)」
탁발신성 · 탁발자추 · 탁발소신성 · 탁발천사 · 탁발만수 · 탁발낙후 · 탁발운 · 탁발정 · 탁발장수 · 탁발태락 · 탁발호아 · 탁발휴
19권 「문성5왕·헌문6왕·효문6왕전(文成五王·獻文六王·孝文六王傳)」
탁발장락 · 탁발략(略) · 탁발간(簡) · 탁발약(若) · 탁발맹 · 원희 · 원간(幹) · 원우 · 원옹 · 원상 · 원협 · 원순 · 원유 · 원역 · 원회 · 원열
20권 「위조등전(衛操等傳)」
위조 · 막함 · 유고인 · 울고진 · 목숭 · 해근 · 숙손건 · 안동 · 유업연 · 왕건 · 나결 · 누복련 · 염대비 · 해목 · 화발 · 막제 · 하적간 · 이율 · 해권
21권 「연봉등전(燕鳳等傳)」 22권 「장손숭등전(長孫嵩等傳)」
연봉 · 허겸 · 최굉 · 장곤 · 등언해 장손숭 · 장손도생 · 장손비
23권 「우율제전(于栗磾傳)」 24권 「최영등전(崔逞等傳)」
우율제 최영 · 왕헌 · 봉의
25권 「고필등전(古弼等傳)」
고필 · 장려 · 유결 · 구퇴 · 아청 · 이후 · 을괴 · 주기 · 두대전 · 거이락 · 왕낙아 · 거로두 · 노노원 · 진건 · 내대간 · 숙석 · 만안국
주관 · 울발 · 육진 · 여락발 · 설표자 · 울원 · 모용백요 · 화기노 · 순퇴 · 우문복
26권 「송은등전(宋隱等傳)」
송은 · 허언 · 조옹(刁雍) · 신소선 · 위랑 · 두전
27권 「굴준등전(屈遵等傳)」
굴준 · 장포 · 곡혼 · 공손표 · 장제 · 이선 · 가이 · 두근 · 이흔 · 한연지 · 원식 · 모수지 · 당화 · 구찬 · 역범 · 한수 · 요훤 · 유숭
28권 「육사등전(陸俟等傳)」 29권 「사마휴지등전(司馬休之等傳)」
육사 · 원하 · 유니 · 설제 사마휴지 · 유창 · 소보인 · 소정표
28권 「노현등전(盧玄等傳)」 29권 「고윤등전(高允等傳)」
노현 · 노부 고윤 · 고우 · 고덕정 · 고익 · 고앙
32권 「최감등전(崔鑒等傳)」 33권 「이령등전(李靈等傳)」
최감 · 최변 · 최정 이령 · 이순 · 이효백 · 이예 · 이의심
34권 「유아등전(游雅等傳)」
유아 · 고려 · 조일 · 호수 · 호방회 · 장담 · 단승근 · 감인 · 유연명 · 조유 · 색창 · 송요 · 강식
35권 「왕혜룡등전(王慧龍等傳)」 36권 「설변등전(薛辯等傳)」
왕혜룡 · 정희 설변 · 설치 · 설징
37권 「한무등전(韓茂等傳)」
한무 · 피표자 · 봉칙문 · 여나한 · 공백공 · 전익종 · 맹표 · 해강생 · 양대안 · 최연백 · 요훤 · 이숙인
38권 「배준등전(裴駿等傳)」 39권 「설안도등전(薛安都等傳)」
배준 · 배연준 · 배타 · 배과 · 배관 · 배협 · 배문거 · 배인기 설안도 · 유휴빈 · 방법수 · 필중경 · 양지
40권 「한기린등전(韓麒麟等傳)」 41권 「양파등전(楊播等傳)」
한기린 · 정준 · 이표 · 고도열 · 견침 · 장찬 · 고총 양파 · 양부양소
42권 「왕숙등전(王肅等傳)」 43권 「곽조등전(郭祚等傳)」 44권 「최광등전(崔光等傳)」
왕숙 · 유방(劉芳) · 상상 곽조 · 장이 · 형만 · 이숭 최광 · 최량
45권 「배숙업등전(裴叔業等傳)」
배숙업 · 하후도천 · 이원호 · 석법우 · 왕세필 · 강열지 · 순우탄 · 음중달 · 장당 · 이묘 · 유조 · 부영 · 부수안 · 장열 · 이숙표 · 노시경 · 방량
조세표 · 반영기 · 주원욱
46권 「손소등전(孫紹等傳)」
손소(孫紹) · 장보혜 · 성엄 · 범소 · 유도부 · 녹여 · 장요 · 유도빈 · 동소 · 풍원흥
47권 「원번등전(袁翻等傳)」 48권 「이주영전(爾朱榮傳)」
원번 · 양니 · 가사백 · 조영 이주영
49권 「주서등전(朱瑞等傳)」
주서 · 질열연경 · 곡사춘 · 가현도 · 번자곡 · 후심(2) · 하발승 · 후막진열 · 염현 · 양람 · 뇌소 · 모하 · 을불랑
50권 「신웅등전(辛雄等傳)」
신웅 · 양기 · 고도목 · 기준 · 산위 · 우문충지 · 비목 · 맹위
51·52권 「제종실제왕전(齊宗室諸王傳)」
고침 · 고악 · 고성 · 고영락 · 고현국 · 고사종 · 고언귀 · 고령산 · 고준 · 고엄 · 고유 · 고환(高渙) · 고육 · 북제 · 고식 · 고제 · 고응 · 고윤
고흡 · 고효유 · 고효연 · 고효완 · 고장공 · 고연종 · 고소신 · 고소덕 · 고소의 · 고소인 · 고소렴 · 고백년 · 고량 · 고언리 · 고언덕
고언기 · 고언강 · 고언충 · 고작 · 고엄 · 고곽 · 고정 · 고인영 · 고인광 · 고인기 · 고인옹 · 고인검 · 고인아 · 고인직 · 고인겸 · 고각 · 고선덕
고매덕 · 고질전
53권 「묵기보등전(万俟普等傳)」
묵기보 · 가주혼원 · 유풍 · 파륙한상 · 금조 · 유귀 · 채준 · 한현 · 울장명 · 왕회 · 임상 · 막다루대문 · 사적회락 · 사적성 · 장보락
후막진상 · 설고연 · 곡률강거 · 장경 · 요웅 · 송현 · 왕칙 · 모용소종 · 질열평 · 보대한살 · 설유의 · 모용엄 · 반락 · 팽락 · 포현 · 피경화
기연맹 · 원경안 · 독고영업 · 선우세영 · 부복
54권 「손등등전(孫騰等傳)」
손등 · 고융지 · 사마자여 · 두태 · 울경 · 누소 · 사적간 · 한궤 · 단영 · 곡률금
55권 「손건등전(孫搴等傳)」
손건 · 진원강 · 두필 · 두태 · 울경 · 장찬 · 장량 · 장요 · 왕준 · 왕굉 · 경현준 · 평감 · 당옹 · 백건 · 원문요 · 조언심 · 혁련자열 · 풍자종 · 낭기
56권 「위수등전(魏收等傳)」
위수 · 위장현 · 위계경 · 위난근
57권 「주종실전(周宗室傳)」
우문호 · 우문련 · 우문낙생 · 우문중 · 우문측 · 우문신거
58권 「주실제왕전(周室諸王傳)」
우문진 · 우문직 · 우문초 · 우문검 · 우문순 · 우문성 · 우문달 · 우문통 · 우문형 · 우문강 · 우문현 · 우문정 · 우문실 · 우문찬 · 우문지
우문윤(允) · 우문충 · 우문태(兌) · 우문원 · 우문연(衍) · 우문술(術)
59권 「구락등전(寇洛等傳)」 60권 「이필등전(李弼等傳)」
구락 · 조귀 · 이현 · 양어 이필 · 우문귀 · 후막진숭 · 왕웅
61권 「왕맹등전(王盟等傳)」
왕맹 · 독고신 · 두치 · 하란상 · 질열복귀 · 염경 · 사녕 · 권경산
62권 「왕비등전(王羆等傳)」 63권 「주혜달등전(周惠達等傳)」 64권 「위효관등전(韋孝寬等傳)」
왕비 · 왕사정 · 울지형 · 왕궤 주혜달 · 풍경 · 소작 위효관 · 위진 · 류규
65권 「달해무등전(達奚武等傳)」
강자일 · 약간혜 · 이봉 · 유량 · 왕덕 · 혁련달 · 한과 · 채우 · 상선 · 신위 · 사적창 · 양춘 · 양대 · 전홍
66권 「왕걸등전(王傑等傳)」
왕걸 · 왕용 · 우문규 · 경호 · 고림 · 이화 · 이루목 · 달해식 · 유웅 · 후식 · 이연손 · 위우 · 진흔 · 위현 · 천기 · 이천철 · 양건운 · 부맹 · 양웅 · 석고 · 임과
67권 「최언목등전(崔彥穆等傳)」 68권 「두로녕등전(豆盧寧等傳)」
최언목 · 양찬 · 단영 · 배과 · 당영 · 류민 · 왕사량 두로녕 · 양소(楊紹) · 왕아 ,왕세적한웅 · 하약돈
69권 「신휘등전(申徽等傳)」
신휘 · 육통 · 사적치 · 양천 · 왕경 · 조강 · 조창 · 왕열 · 조문표 · 양대 · 원정 · 양표
70권 「한포등전(韓襃等傳)」
한포 · 조숙 · 장궤 · 이언 · 곽언 · 양흔 · 황보번 · 신경지 · 왕자직 · 두고 · 여사례 · 서초 · 단저 · 맹신 · 종름 · 유번 · 류하
71권 「수종실제왕전(隋宗室諸王傳)」
양정 · 양찬 · 양상 · 양홍 · 양처강 · 양자숭 · 양용 · 양준 · 양수 · 양량 · 양소(楊昭) · 양간 · 양고
72권 「고경등전(高熲等傳)」
고경 · 우홍 · 이덕림
73권 「양사언등전(梁士彥等傳)」
양사언 · 원해 · 우경칙 · 원주 · 달해장유 · 하루자간 · 사만세 · 유방(劉方) · 두언 · 주요 · 독고개 · 걸복혜 · 장위 · 화홍 · 음수 · 양의신
74권 「유방등전(劉昉等傳)」
유방(劉昉) · 유구 · 황보적 · 곽연 · 장형 · 양왕 · 배온 · 원충 · 이웅
75권 「조경등전(趙煚等傳)」
조경 · 조분 · 왕소 · 원암 · 우문필 · 이누겸 · 이원통 · 곽영 · 방황 · 이안 · 양희상 · 장경 · 소효자 · 원수
76권 「단문진등전(段文振等傳)」
단문진 · 내호아 · 번자개 · 주나후 · 주법상 · 위현 · 유권 · 이경 · 설세웅
77권 「장정화등전(張定和等傳)」
배정 · 이악 · 포굉 · 고구 · 영비 · 육지명 · 양비 · 유욱 · 조작 · 두정
78권 「장정화등전(張定和等傳)」
장정화 · 장윤 · 맥철장 · 권무 · 왕인공 · 토만서 · 동순 · 어구라 · 왕변 · 진릉 · 조재
79권 「우문술등전(宇文述等傳)」
우문술 · 왕세충 · 단달
80권 「외척전(外戚傳)」
하눌 · 요황미 · 두초 · 하미 · 여비 · 풍희 · 이혜 · 고조 · 호국진 · 황보집 · 양등 · 을불회 · 조맹 · 호장인 · 여씨
81·82권 「유림전(儒林傳)」
양월 · 노추 · 장위 · 양조 · 평항 · 진기 · 유헌지 · 장오귀 · 유란 · 손혜울 · 서준명 · 동징 · 마자결 · 이흥업 · 양원의 · 풍위 · 장매노 · 유궤사
포계상 · 형치 · 유주 · 마경덕 · 장경인 · 권회 · 장사백 · 장조무 · 곽준 · 심중 · 번심 · 웅안생 · 악손 · 기준 · 조문심 · 신언지 · 하타 · 소해 · 포개 · 방휘원 · 마광 · 유작 · 유현 · 저휘 · 고표 · 노세달 · 장충 · 왕효적
83권 「문원전(文苑傳)」
온자승 · 순제 · 조홍훈 · 이광 · 번손 · 순사손 · 왕포 · 유신 · 안지추 · 우세기 · 유변 · 허선심 · 이문박 · 명극양 · 유진 · 제갈영 · 왕정 · 우작
왕주 · 유자직 · 반휘 · 상덕지 · 윤식 · 유선경 · 조군언 · 공덕소 · 유빈
84권 「효행전(孝行傳)」
장손려 · 손익덕 · 동락생 · 양인 · 염원명 · 오실달 · 왕속생 · 이현달 · 장승 · 창발 · 왕숭 · 곽문공 · 형가 · 진족 · 영선 · 황보하 · 장원
왕반 · 양경 · 전익 · 유인 · 유사준 · 적보림 · 화추 · 서효숙
85권 「절의전(節義傳)」
우십문 · 단진 · 석문덕 · 급고 · 왕현위 · 누제 · 유갈후 · 주장생 · 마팔룡 · 문문애 · 조청 · 유후인 · 석조흥 · 소홍철 · 왕영세 · 호소호
손도등 · 이궤 · 장안조 · 왕려 · 곽염 · 지용초 · 을속고불보 · 이상 · 두숙비 · 이악 · 유원 · 장수타 · 양선회 · 노초 · 유자익 · 요군소
진효의 · 두송지 · 곽세준 · 낭방귀
86권 「순리전(循吏傳)」
장응 · 노옹 · 염경윤 · 명량 · 두찬 · 두원 · 소숙 · 장화업 · 맹업 · 소경 · 노거병 · 양언광 · 번숙략 · 공손경무 · 신공의 · 유검 · 곽현 · 경숙
유광 · 왕가 · 위덕심
87권 「혹리전(酷吏傳)」
우락후 · 호니 · 이홍지 · 장사제 · 조패 · 최섬 · 저진 · 전식 · 연영 · 원홍사 · 왕문동
88권 「은일전(隐逸傳)」
휴과 · 풍량 · 정수 · 최곽 · 서칙 · 장문후
89·90권 「예술전(藝術傳)」
조숭 · 장심(1) · 은소 · 왕조 · 경현 · 유영조 · 이순흥 · 단특사 · 안악두 · 왕춘 · 신도방 · 송경업 · 허준 · 유준세 · 조보화 · 황보옥 · 해법선 · 허준 · 위녕 · 기모회문 · 장자신 · 육법화 · 장승 · 강련 · 유계재 · 노태익 · 경순 · 내화 · 소길 · 양백추 · 임효공 · 유우 · 장주현 · 주담 · 이수 · 서건 · 왕현 · 마사명 · 요승원 · 저해 · 허지장 · 만보상 · 장소유 · 하조
91권 「열녀전(列女傳)」
난릉공주 · 남양공주 · 초국부인
92권 「은행전(恩倖傳)」
왕예 · 왕중흥 · 조수 · 여호 · 조옹(趙邕) · 후강 · 구락제 · 왕거 · 조묵 · 손소(孫小) · 장종지 · 극붕 · 장우 · 포억 · 왕우 · 부승조 · 왕질 · 이견 · 유등 · 가찬 · 양범 · 성궤 · 왕온 · 맹란 · 평계 · 봉진 · 유사일 · 곽수 · 화사개 · 안토근 · 목제파 · 고아나굉
93권 「참위부용전(僭偽附庸傳)」
혁련발발 · 모용외 · 요장 · 풍발 · 걸복국인 · 저거몽손 · 소찰
94권 「고려등전(高麗等傳)」
고려 · 백제 · 신라 · 물길 · 해족 · 거란 · 실위 · 두막루 · 지두우 · 오락후 · 류구 · 왜국
95권 「만등전(蠻等傳)」
만족(蠻) · 요족(獠) · 임읍 · 적토 · 진랍 · 파리
96권 「저등전(氐等傳)」
저족 · 토욕혼 · 탕창 · 등지국 · 당항 · 부국 · 계호국
97권 「서역전(西域傳)」
선선 · 포산국 · 실거반 · 권우마국 · 차사국 · 우전국 · 고창 · 차미 · 언기 · 구차 · 고묵국 · 온숙국 · 울두국 · 오손국 · 소륵국 · 열반국 · 토호라
소월씨 · 아구강국 · 속특국 · 파사국 · 복로니국 · 색지현 · 가색니국 · 고창 · 차미 · 여국
98권 「연연등전(蠕蠕等傳)」
연연 · 우문막괴 · 단질육권 · 고차
99권 「돌궐등전(突厥等傳)」
돌궐 · 철륵
100권 「자서전(自序傳)」
이연수
(1) 본명이 장연(張淵)으로 당고조 이연(李淵)을 피휘하여 심(深)으로 개칭되었다.
(2) 본명이 후연(侯淵)으로 당고조 이연(李淵)을 피휘하여 심(深)으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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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c143c><colcolor=#fff> 평서문정백(平舒文定伯)
邢巒 | 형만
시호 문정백(文定伯)
작호 평서현 개국백(平舒縣開國伯)
형(邢)
만(巒)
홍빈(洪賓)
생몰 464년 ~ 514년 10월 15일
부친 형수년(邢修年)
출신 하간군(河間郡) 막현(鄚縣)
아들 형손(邢遜)
1. 개요2. 생애3. 가계

1. 개요

북위의 인물. 삼국시대 조위에서 태상을 지냈던 형정의 후손. 평성강자 형영의 손자. 주부 형수년(邢修年)의 아들.

2. 생애

형만은 젊어서 학문을 좋아하여, 책 꾸러미를 지고 스승을 찾아다녔다. 집이 가난하였으나 절개를 굳게 지켜, 마침내 널리 경전과 사서를 두루 읽게 되었다. 그는 글재주와 모략이 있었으며, 수염이 아름답고 풍채가 매우 위엄 있어, 주군(州郡)에서 표를 올려 그를 천거하여 중서박사(中書博士)에 임명되었다가, 원외산기시랑(員外散騎侍郎)으로 옮겼다.

태화 17년(493년) 정월, 효문제는 형만의 재능을 알아보고 크게 아껴 이어 겸원외산기상시(兼員外散騎常侍)로 삼고, 남조제나라에 사신으로 파견하였다. 형만은 귀국한 뒤 통직랑(通直郎)에 임명되었고, 중서시랑(中書侍郎)으로 승진하였는데, 효문제의 신임이 깊어 자주 좌석에 참여하였다.

효문제가 약을 복용하며 행차하던 도중 사공부(司空府) 남쪽을 지나가다가 형만의 집을 보고 사자를 보내어 말하였다.
"오늘 약을 마시며 여기까지 오다가 경의 집을 바라보고 문득 발걸음이 멈추었다. 동쪽으로 덕관(德館)이 보이니, 마음이 자연히 의지하는 바가 있구나."
형만이 대답하였다.
"폐하께서 중경(中京, 낙양)으로 도읍을 옮기시어 영원한 대업을 세우시려 하시니, 신의 뜻도 오직 위나라와 함께 흥망을 같이하려는 데 있습니다. 어찌 장구한 세월을 도모할 집을 짓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효문제가 사공 목량(穆亮)과 상서복야 이충에게 말하였다.
"형만의 이 말은, 뜻이 크도다."
이후 관리가 수재(秀才)와 효렴(孝廉)의 시험에 대해 아뢰자, 조서가 내려졌다.
"수재와 효렴은 그 시험의 의미가 서로 다르다. 형만은 재능이 맑고 청렴하니, 수재의 시험을 치르게 하라."
그리고 얼마 뒤에 형만은 겸황문랑(兼黃門郎)이 더해졌다.

태화 21년(497년) 4월, 효문제는 폐태자 원순이 반역을 꾀한다는 참소를 믿고, 형만과 함양왕 원희에게 조서를 내려, 독이 들어간 초주(椒酒)를 들고 하양(河陽)으로 가 원순에게 사사를 명하게 하였다.

태화 21년(497년) 10월, 효문제가 친히 남쪽으로 가 남양태수 방백옥이 수비하는 완성(宛城)을 포위하여 공격하는 동안, 형만도 종군하여 신야(新野)를 공략하느라 뒤늦게 완성에 도착하였다. 효문제가 말하였다.
"방백옥은 하늘이 그 마음을 어지럽히고, 귀신이 그 생각을 미혹시켰도다. 위태로운 나라를 지키며 임금에게 거역하더니, 이제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
형만이 대답하였다.
"신야가 이미 무너졌고, 여러 성이 모두 붕괴하였습니다. 다만 방백옥만이 위태로움을 알지 못하고 있으니, 평정되어 멸망할 날은 바로 눈앞에 있습니다."
효문제가 말하였다.
"이곳에 이르러 비록 아직 잡거나 멸하지는 못했지만, 성과 해자가 이미 허물어졌으니 머지 않아 사로잡힐 것이다. 지금 공격을 서두르지 않는 것은, 바로 중서시랑의 노포(露布)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 뒤 정식으로 황문랑에 임명되었고, 겸어사중위(兼御史中尉)와 영주대중정(瀛州大中正)이 더해졌다. 이후 산기상시(散騎常侍) 및 겸상서(兼尚書)로 승진하였다.

경명 2년(501년) 정월, 선무제가 태극전전(太極前殿)에 올라 여러 신하들에게 친정(親政)의 뜻을 선포하고, 효문제가 후사를 부탁해 세웠던 팽성왕 원협 등 여섯 보정대신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형만이 시중 장이와 함께 조처가 비정상적이라 여겨 수도 낙양을 떠나서 달아났다. 이에 어사중위 견침이 상소하여 "호랑이도 외뿔소도 아니면서 광야로 달아났다"고 둘을 탄핵하니, 선무제는 조서로 엄하게 꾸짖었다.

정시 원년(504년) 6월, 가뭄이 크게 들자, 형만이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신이 들으니, 옛날의 명왕(明王)들이 덕으로 천하를 다스릴 때에는, 예외 없이 곡식과 비단을 귀히 여기고 금과 보석을 가볍게 여겼다고 합니다. 곡식과 비단은 나라를 편안하게 하고 백성을 기르는 방법이지만, 금과 옥은 헛된 사치로 덕을 해치는 물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황께서는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일을 깊이 살피시어 모든 사치스러움을 없애셨습니다. 복식(服飾)과 기물(器物)은 검소함을 숭상하시어, 조각하거나 장식하는 것을 귀히 여기지 않으셨고, 소박함을 보배로 여기시어, 기이하고 화려한 것을 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심지어 종이와 명주로 장막을 만들고, 구리와 쇠로 고삐와 안장을 만드셨습니다. 조정을 절약으로 가르치시고, 백성에게 근면함과 근심을 보이시며, 밤낮으로 부지런히 하여 크고 작은 일마다 신중히 하셨습니다. 진주와 구슬을 천하게 여기시며, 그것들이 필요 없음을 보이셨고, 창고의 금은 나라의 급한 곳에 필요한 만큼만 쓰셨으며, 더 이상 사거나 쌓아 국고를 낭비하지 않으셨습니다. 경명(景明) 초가 되어 폐하께서 태평의 세업을 이어받으시자, 사방 국경이 평온해지고, 먼 곳과 가까운 곳이 모두 귀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오랑캐의 조공이 잇따르고, 상인들이 서로 들어와, 바치는 물품이 예전보다 갑절이나 많아졌습니다. 비록 절약을 더했으나, 해마다 답례품으로 만금이 새어 나가고, 진귀한 물건은 항상 남아돌지만, 국가가 쓸 수 있는 물품은 늘 부족했습니다. 이제 분량과 한계를 정하지 않으면, 해마다 감당할 수 없을까 두렵습니다. 지금부터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면, 모두 받지 않게 하소서."
선무제가 그 말을 따랐다. 얼마 후, 형만은 정식으로 상서(尚書)가 되었고, 산기상시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정시 2년(505년) 정월, 양나라의 한중태수 하후도천(夏侯道遷)이 한중(漢中)을 들어 위나라로 귀순하자, 조서가 내려져 형만을 사지절(使持節)•도독정양한제군사(都督征梁漢諸軍事)로 삼고, 임시로 진서장군(鎮西將軍)의 호를 더하여, 군대의 진퇴와 징벌의 모든 일을 편의에 따라 처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정시 2년(505년) 4월, 형만이 한중에 이르렀을 때, 백마(白馬) 서쪽은 아직 항복하지 않았다. 형만은 녕원장군 양거(楊舉), 통군 양중애(楊眾愛)와 범홍아(氾洪雅) 등에게 병사 6,000명을 주어 토벌하게 하였다. 군대의 기세가 미치는 곳마다 적들이 모두 항복하였으나, 보곡성(補穀戍)의 성주 하법정(何法靜)만은 성을 지켜 항거하였다. 하지만 양거 등이 군대를 진격시키자 하법정은 패주하였고, 형만의 군대가 승세를 타고 쫓아가 관성(關城) 아래에 이르렀다. 그때 양나라의 용양장군 이시숙(李侍叔)이 반란을 일으켜 성을 들어 항복하였다. 양나라의 보국장군 임승유(任僧幼) 등 30여 명의 장수가 남안(南安), 광장(廣長), 동락(東洛), 대한(大寒), 무시(武始), 제구(除口), 평계(平溪), 통곡(桶穀) 등 여러 군(郡)의 백성 7,000여 호를 이끌고 잇따라 항복해 왔다.

얼마 뒤, 양나라의 평서장군 이천사(李天賜)와 진수태수 왕경윤(王景胤) 등이 병사 7,000명을 거느리고 석정(石亭)에 주둔하였다. 통군 한다보(韓多寶)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쳐서, 이천사의 선봉 조저(趙䐗)를 격파하고, 1,300명을 참수하거나 사로잡았다. 또 통군 이의진(李義珍)을 보내 진수(晉壽)를 치게 하였더니, 왕경윤이 밤에 달아나 버려 마침내 평정되었다. 이에 조서가 내려졌다.
"형만이 그곳에 이르렀으니, 반드시 판관(板官)을 두어 처음 항복한 자들을 위무해야 한다. 그 품계의 높고 낮음을 의양(義陽) 도독을 불러 임명했을 때의 예를 따르게 하라."
이에 형만을 사지절•안서장군(安西將軍)•양·진2주자사(梁秦二州刺史)로 임명하였다.

양나라의 파서태수 방경민(龐景民)이 멀리 있음을 믿고 항복하지 않자, 형만은 파주자사(巴州刺史) 엄현사(嚴玄思)를 보내 토벌하게 하였다. 결국 방경민이 참수되고, 파서(巴西) 지역이 모두 평정되었다. 양나라의 무제 소연은 다시 관군장군 공릉(孔陵) 등을 보내 병사 20,000명을 거느리게 하여 심갱(深坑)에 주둔하게 하고, 관군장군 증방달은 남안(南安)을 굳게 지키게 하며, 관군장군 임승포와 보국장군 이전(李畎)은 석동(石同)에 주둔하게 하였으나, 형만의 통군 왕족(王足)이 그들을 곳곳에서 공격하여 모두 격파하였다. 이때 양나라의 보국장군 악보명(樂保明), 녕삭장군 이백도(李伯度), 용양장군 이사현(李思賢)의 머리를 베었고, 적은 마침내 궁지에 몰려 회거책(回車柵)에 틀어박혀 버텼다.

왕족이 또 나아가 양나라의 보국장군 범준(範峻)을 공격하였고, 그밖의 전투에서도 베고 사로잡은 자가 거의 만 명에 달하였다. 공릉 등이 흩어진 병력을 모아 재동(梓潼)으로 달아나 의지하였으나, 왕족이 다시 쳐서 양나라의 보국장군 부백도(符伯度)를 참수하였고, 살해되거나 물에 빠져 죽은 자가 만 명이 넘었다. 그리하여 개척한 땅과 복속한 백성이 동서로 700리, 남북으로는 1,000리에 이르렀으며, 군(郡) 14곳, 호군(護軍) 2부대, 그리고 수많은 현(縣)과 수자리를 얻었다. 이에 형만이 상주문을 올려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양주(揚州)와 성도(成都)는 만 리나 떨어져 있어, 육로는 이미 끊겼고 오로지 수로(水路)에만 의지하고 있습니다. 소연(蕭衍)의 형의 아들 소연조(蕭淵藻)는 지난해 4월 13일 양주를 출발하여, 올해 4월 4일에야 촉(蜀)에 도착하였습니다. 수군이 서쪽으로 올라가면 1년이 지나야 도착하므로, 밖에서 원군을 받을 수 없으니, 첫째로 공략할 만한 이유입니다.

익주(益州)는 얼마 전 유계련(劉季連)의 반란과 등원기(鄧元起)의 공격과 포위로 인해, 군수품이 모두 흩어지고 창고가 텅 비었으며, 지금까지도 회복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백성들은 이미 겁에 질려, 더 이상 굳게 지킬 뜻이 없습니다. 이것이 둘째로 공략할 만한 이유입니다.

소연조는 치세의 일에 익숙하지 않은 애송이로, 익주에 이르자마자 등원초(鄧元超)와 조량종(曹亮宗)을 죽였으며, 전쟁터에서 장수를 참수하였으니, 이는 사람을 다스리는 방도를 잃은 것입니다. 범국(範國)의 혜진거(惠津渠)에서 소연조가 패하여 퇴각할 때, 그 심복을 결박하여 옥에 가두었는데, 지금 소연자가 기용한 자들은 모두 숙장(宿將)이나 명망 있는 인물이 아니라, 곁에서 따르는 젊은 무리들뿐인 것으로 확인됩니다. 그들이 백성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잔혹하고 포악하게 행동하니, 민심이 이미 흩어졌습니다. 이것이 셋째로 공략할 만한 이유입니다.

촉(蜀)이 믿는 것은 오직 검각(劍閣)뿐이었는데, 이제 이미 남안(南安)을 함락시켜 그 험지를 빼앗았으니, 그 경내의 땅을 이미 삼분의 일 차지한 셈입니다. 남안에서 부성(涪城)으로 나아가는 길은 평탄하여, 군대를 전진시키는 데 아무런 방해가 되지 못했습니다. 앞서 온 군대는 연이어 패했고, 뒤따르는 무리들은 이미 혼이 빠졌습니다. 이것이 넷째로 공략할 만한 이유입니다.

옛날 유선은 한 나라의 땅을 차지하고 있었고, 강유가 그를 보좌했으나, 등애가 면죽(綿竹)에 이르자 즉시 항복했습니다. 부견 때에는 양안주융이 석 달 만에 한중(漢中)을 점령하고, 넉 달 만에 부성(涪城)에 이르렀으며, 군대가 주(州)에 이르기도 전에 주중손(周仲孫)은 달아났습니다. 환온이 서쪽을 정벌했을 때에도 열 달이 채 되지 않아 평정했습니다. 이처럼 촉 땅은 예로부터 오래 지키기 어려운 곳이었습니다. 더구나 소연조는 소연의 조카로서, 가장 가까운 혈육이니, 만약 패하면 죽을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 군이 부성을 함락시키면, 소연조가 어찌 성 안에 앉아 스스로 고립되어 괴로움을 당하려 하겠습니까? 만약 출전해 싸운다면, 촉의 군졸들은 단지 칼과 창에만 익숙하고, 활쏘는 자가 매우 적어, 설령 멀리서 쏘아도 사람을 상하게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다섯째로 공략할 만한 이유입니다.

신이 듣기로, 기회를 타서 움직이는 것이 훌륭한 무략의 법도이며, 어리석은 자를 공격해 멸망시키는 것이 《춘추(春秋)》가 밝힌 의리라고 하였습니다. 방패와 창을 버리고 천하를 안정시킨 일은 없었고, 정벌하지 않고 천하를 통일한 사례도 없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폐하께서는 문무의 대업을 계승하시어, 반드시 천세에 걸칠 운수를 누리실 분이십니다. 중원의 풍요를 아우르시고, 강대한 병력까지 겸비하시어, 하늘 아래를 깨끗이 평정하실 때가 지금입니다. 그리하여 옥좌에 오르신 첫 해에 수춘(壽春)이 달려와 귀부하였고, 지난해 장수를 보내셨을 때 의양(義陽)이 이미 평정되었습니다. 회수 이남은 바람처럼 조용하고, 형주와 면수 또한 숙연하여 평안합니다. 폐하께서는 마침 전쟁을 그치고 무기를 쉬게 하며, 시기를 기다려 다시 움직이려 하셨는데, 하늘이 성스러운 덕을 보태어 시운이 빠르게 다가왔습니다. 비록 전란을 가라앉히고자 하시더라도, 이 상황은 어찌할 수 없이 전쟁을 피할 수 없는 형세입니다. 이에 하후도천(夏侯道遷)이 진심으로 귀순하였고, 한중(漢中)의 영토는 곧 해방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신은 재주가 없으나 전장에 나아가 책임을 맡게 되었고, 스스로 문관임을 자각하여 군사적인 모략에서는 자신하지 못해 한중에 이르러서는 다만 국경을 보전하고 땅을 지키는 것을 도모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형세가 험난하고 동서의 적들이 도적질을 일삼으니, 신은 위로는 나라의 위엄에 의지하고, 아래로는 장졸들의 힘을 빌려 싸웠습니다. 변방의 장수들이 명을 받들어 싸워 자주 작은 승리를 거두어, 그 기세를 타고 세력을 모아 검문(劍門)의 큰 요충지를 공략하였고, 이미 남안(南安)을 함락시켜 요새를 차지하였습니다. 전군이 길게 나아가 재동(梓潼)에 이르렀고, 신화(新化)의 백성들이 번연히 귀순하여 은혜를 느꼈습니다. 부성(涪城)과 익주(益州)를 바라보건대, 하루 혹은 밤낮 사이에라도 공격하여 함락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병력이 적고 식량이 부족하여, 당장은 전진하기 어려운데, 이대로 머뭇거린다면 민심을 잃어 도리어 적이 될까 두렵습니다. 지금 치지 않으면, 뒤에 다시 도모하기 어려울 것이니, 신은 감히 어리석은 의견을 내어 속히 쳐서 평정하기를 원합니다. 만약 공이 없다면, 그 책임은 나누어 신이 법에 따라 처벌받을 것입니다. 또한 익주는 부유하고 인구가 10만 호가 넘으니, 그 규모가 수춘(壽春)과 의양(義陽)의 세 배에 달합니다. 이익을 취할 만하고 공격할 만한 땅이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만일 조정에서 백성을 보호하려는 뜻을 두시고, 아직 정벌로 다스릴 뜻이 없으시다면, 신이 이곳에 있는 것은 무의미하니, 돌아가 부모를 봉양하여 미미하나마 자식의 도리를 다하게 하소서."
선무제가 조서를 내려 말했다.
"만일 도적이 감히 엿보고 넘보는 징조가 있다면, 형세를 관찰하여 기회를 보아 베어 없애라. 그러나 만약 그러한 일이 없다면, 백성을 편안히 하고 영토를 지켜, 변방의 마음을 안정시키라. 촉(蜀)을 완전히 취하는 일은 이후의 조서를 기다려 시행하라. 이제 막 민촉(岷蜀)을 휩쓸어 서남쪽을 번개처럼 평정하려는 때인데, 어찌 부모를 그리워한다는 이유로 중도에 사직을 청하느냐! 마땅히 더욱 힘써 꾀하고, 반드시 큰 계략을 펴도록 하라."
이에 형만이 다시 표문을 올려 아뢰었다.
"옛날 등애와 종회는 18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중원의 재정과 물자를 기울여서야 비로소 촉(蜀)을 평정하였는데, 그 이유는 오직 실력으로 겨루는 전쟁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신은 재주가 옛사람에 미치지 못하고, 지략과 용맹 또한 부족하거늘, 어찌 겨우 2만의 병력으로 촉을 평정하겠다고 감히 바라겠습니까? 그럼에도 신이 감히 청하는 까닭은, 이미 요충지를 점거하였고, 군사와 백성들이 모두 의(義)를 사모하여 따르니, 우리가 쳐들어가기는 쉬우나, 그들이 반격해오기는 어려워, 힘을 다해 나아가면 반드시 이길 수 있는 이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왕족(王足)이 이미 전진하여 부성(涪城)에 바짝 다가갔습니다. 만일 부성을 함락시킨다면 익주는 곧 손안의 포로와 다름없으나, 그것이 빠르냐 늦느냐의 차이일 뿐입니다. 또, 재동(梓潼)은 이미 귀순하였고, 그 백성이 수만 호에 이르건만, 조정이 어찌 이를 버려두고 지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만일 지킨다면, 그 경계를 지키는 고을만 헤아려도 이미 1만 호입니다.

신이 이제 청하는 병력은 25,000명이오니, 증원이라 해도 그리 많은 수는 아닙니다. 또한 검각(劍閣)은 천하의 험지로 예로부터 유명한 곳인데, 장재의 명문에 이르길, '세상이 어지러우면 거스르고, 세상이 태평하면 따른다.' 하였듯, 이 한마디야말로 실로 두려워해야 할 말입니다. 신은 진실로 정벌이 위험하고 쉬운 일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군대가 검각을 넘은 이래로, 이미 머리털이 백발로 물들 만큼, 걱정과 두려움으로 하루도 마음을 놓지 못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억지로 나아가려 하는 것은, 이미 이 땅을 얻고서 스스로 물러나 지키지 않는다면, 선황(先皇)의 은혜를 저버리고, 폐하의 녹봉과 작위를 배반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신은 밤낮으로 마음을 다하며 여러 차례 간청드린 것입니다. 또 신의 계책으로는, 먼저 부성(涪城)을 공략하여 점차 앞으로 나아가고자 합니다. 만약 부성을 함락시킨다면, 곧 익주의 땅을 둘로 나누고, 수로와 육로의 요충지를 차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밖에 원군이 없고, 고립된 성 하나로 스스로를 지키고 있으니, 어찌 오래 버틸 수 있겠습니까? 신은 이제 군대마다 서로 이어지고, 위세가 연이어 높아져, 먼저 만전의 대비를 세운 뒤 공격하려 합니다. 그리하여 이를 얻으면 크게 승리할 것이며, 얻지 못하더라도 스스로를 온전히 지킬 것입니다."
그러나 선무제는 형만의 건의를 따르지 않았다. 이에 왕족이 부성(涪城)에서 임의로 군대를 철수하였으므로, 끝내 촉 땅은 평정되지 못하였다.

정시 2년(505년) 11월, 당초 형만이 바서(巴西)를 평정한 뒤, 장수 이중천(李仲遷)을 보내 그곳을 지키게 하였다. 이중천은 양나라의 장수 장법양(張法養)의 딸을 얻었는데, 용모가 아름다워 크게 미혹되었다. 그리하여 군량을 낭비하고, 마음을 술과 여색에만 두었으며, 공무를 물어 처리할 줄 아는 자가 아무도 없을 정도로 문란하였다. 형만은 이 일을 알고 몹시 분노하여 이를 갈았고, 이중천은 그가 자신을 처벌할 것을 두려워하여 반란을 꾀하였다. 이에 성 안의 백성들이 그를 참수하여 그 머리를 들고, 성을 들어 양나라의 장수 초희원(譙希遠)에게 항복하니, 그리하여 파서는 다시 양나라가 탈환하였다.

정시 2년(505년) 12월, 무흥(武興)의 저족 양집기(楊集起)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형만은 통군 부수안을 보내 평정하게 하였다.

정시 3년(506년) 정월, 형만이 파견한 부수안이 저족 무리를 멸하고, 양소선(楊紹先)을 사로잡아 낙양으로 압송하였다.

형만이 처음 한중에 부임했을 때에는 풍아하고 온화하여, 호족들에게는 예로써 대하고, 서민들에게는 은혜로써 어루만졌으나, 1년 남짓 지나자 점차 백성의 처지에 따라 자의로 처형하고, 거주민들을 죽이거나 포로로 삼아 노비로 만든 자가 200여 명에 이르렀다. 또한 상인들과 함께 재물을 모으며 사사로이 이익을 취하니, 세상 사람들이 그를 더럽게 여겼다. 이에 조정에서는 그를 불러들여 탁지상서(度支尚書)에 임명하였다.

정시 3년(506년) 7월, 당시 양나라에서 군사를 보내 서연(徐兗)을 일대를 침범하고 노략질하니, 변경의 진채와 보루가 잇달아 함락되었다. 조정은 이를 깊이 근심하여 형만을 사지절(使持節)‧도독동토제군사(都督東討諸軍事)‧안동장군(安東將軍)으로 임명하고, 상서는 예전과 같이 유지하였다. 선무제는 동당(東堂)에서 형만을 위로하며 이렇게 말했다.
"소연이 변경을 침범하여, 열흘이 멀다 하고 그 기세가 더욱 심해지고 있다. 여러 군대가 서로 어지럽게 움직여, 연이어 요새들이 함락되고, 송(宋)과 노(魯)의 백성들이 특히 심한 참화를 겪고 있다. 경이 갓 수도로 돌아온 지 오래되지 않아,
부모 곁을 떠나기 어렵다는 것을 짐 또한 실로 알고 있다. 그러나 동남쪽의 중임은 장군이 아니면 맡을 이가 없으니, 장군은 힘써 공훈을 세워, 짐의 뜻에 부응하라. 예로부터 충신이면서도 불효하지 않은 자가 많았다."
형만이 아뢰었다.
"비록 적들이 목숨을 바쳐 여러 성을 지키고 있으나, 짐승 같은 무리의 수가 많을 뿐, 역순의 도리가 달라 머지않아 멸망할 것입니다. 하물며 신은 폐하의 신묘한 계책을 받들고 법도를 따라 그들을 치게 되니, 평정할 날은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있을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부디 동남쪽을 근심하지 마시옵소서."
선무제가 말했다.
"한나라의 광무제가 말하기를, '집금오가 언(郾)을 치면 짐은 더 이상 걱정이 없다.'하였다. 이제 장군이 군사를 통솔하니, 짐이 무슨 염려가 있겠는가?"

정시 3년(506년) 8월, 이보다 앞서 양나라의 보국장군 소급선(蕭及先)이 병사 20,000명을 이끌고 와서 고성(固城)을 침범하여 함락시켰고, 관군장군 노현문(魯顯文)과 효기장군 상문옥(相文玉) 등이 병사 10,000명을 거느리고 고산(孤山)에 주둔하였으며, 장수 각념(角念) 등은 병사 10,000명을 거느리고 귀몽(龜蒙)을 교란하니, 토착민들이 이에 호응하여 열 집 가운데 다섯 집이 반역하였다. 이에 형만은 통군 번노(樊魯)를 보내 상문옥 등을 토벌하게 하고, 별장 원항(元恆)에게는 소급선을 공격하게 하였으며, 통군 필조후에게는 각념 등을 치게 하였다. 번노는 상문옥 등을 크게 격파하고, 패잔병을 80여 리까지 추격하여 4,000여 명을 참수하였다. 원항 또한 고성을 함락시켰고, 필조후 역시 각념 등을 무찔렀으므로, 연주(兗州) 일대가 모두 평정되었다.

정시 3년(506년) 9월, 형만은 적장 남회공(藍懷恭)을 수구(睢口)에서 격파하고, 군대를 진격시켜 숙예(宿豫)를 포위하였다. 그러나 남회공 등은 다시 회수(淮水) 남쪽에 성을 쌓아 수로와 육로를 끊으려 하였다. 형만은 몸소 여러 군대를 거느리고 회수 남쪽에서 전진하였고, 평남장군 양대안에게 북쪽에서 압박하게 하였으며, 통군 유사조 등에게는 강을 따라 뗏목을 엮게 하여 적의 배와 선박을 불태웠다. 모든 군사가 일제히 진격하여 참호를 메우고 성에 올라 불을 질렀다. 불길이 강 한가운데서 치솟자 사방에서 동시에 공격하였고, 마침내 적의 성을 함락시켜 포로와 사살자가 수만 명에 달하였다. 남회공은 양대안에게 전장에서 목이 베였으며, 그의 열후(列侯)·열장(列將)·직각(直閣)·직후(直後) 등 30여 명을 사로잡고, 포로와 사살자는 10,000명이었다. 숙예가 평정되자, 소병(蕭昞) 또한 회양(淮陽)에서 패하여 도주하였고, 형만은 두 요새에서 쌀 400,000여 석을 노획하였다.

정시 3년(506년) 10월, 선무제는 형만에게 옥새가 찍힌 서신을 보냈다.
"대장이 사나운 오랑캐를 크게 섬멸하여, 그 위세가 적의 진영을 떨게 하였고, 회수(淮水) 밖의 안개가 걷히며, 서주(徐州) 일대의 적이 발을 거두었으니, 황실의 책략이 넓게 펼쳐져 통일의 기운이 시작되었다. 공사(公私)가 모두 평안하니, 어찌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있겠는가! 역적 소연의 이번 침공은 나라를 기울게 할 짓이었다. 지난날 숙예(宿豫)가 함락되고 회양(淮陽)이 포위되자, 흉악하고 간사한 무리들이 기세를 부풀리며 황실의 군사에 맞서려 하였다. 장군은 충성과 지략을 아울러 드러내어, 불길이 맹렬하고 서리가 초목을 시들게 하듯, 벼락이 대산(岱山)의 그늘을 울리고, 바람이 기역(沂嶧)을 휩쓸 듯이 하였다. 그리하여 천벌을 피하던 도적들이 하루아침에 모조리 멸망하고, 대역 죄인들이 천 리 안에서 목이 꺾였다. 그 공로와 전과의 뛰어남은 예로부터 둘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양구(揚區)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고, 남은 불씨는 반드시 모두 없애야 한다. 승세를 타서 동쪽과 남쪽에서 협공한다면 남은 적을 남김없이 쓸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즉시 삼군을 격려하여 때를 따라 경략을 펼치고, 동남에 위세를 떨치며 강가를 깨끗이 정화하라. 현재의 수고를 잊고, 영구한 평안을 도모하라. 진퇴의 계책은 장군의 높은 식견에 맡긴다."
또한 별도로 조서를 내려 말하였다.
"회양(淮陽)과 숙예(宿豫)는 이미 평정되었으나, 양성(梁城)의 도적들이 여전히 무리를 모아 저항하고 있다. 마땅히 승세를 타서 동시에 그들을 섬멸해야 한다. 이제 20,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회수를 건너, 정남장군(征南將軍)과 함께 협공하여 진격과 공략의 방책을 도모하라."
당시 양성(梁城)의 적이 패주하자, 정남장군 원영이 그 승세를 타고 종리(鐘離)를 공격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다시 형만에게 명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합류하게 하였다. 형만이 표문을 올려 아뢰었다.
"조서의 뜻을 받들어 신에게 회수를 건너 정남장군과 서로 협공하여 승세를 타고 진격하라는 명을 받들었습니다. 참으로 뜻깊은 회합이지만, 신이 어리석은 생각으로 헤아려보니 다소 미진한 점이 있습니다. 남쪽을 도모하려면 바람의 흐름을 살펴야 하고, 타국을 정벌하려면 먼저 군량을 갖추어야 합니다. 용병하고 전쟁을 다스림은 반드시 미리 계산을 세워야 하니, 억지로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 할 수 없으며, 적의 무능을 바라보는 데에만 기댈 수 없습니다. 만약 단지 땅을 약탈하고 백성을 죽이려 한다면 분명 여러 번 승리할 수 있겠으나, 성을 공격하고 고을을 빼앗고자 한다면 그 결과를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그것을 얻더라도 얻는 이익은 많지 않으며, 만약 얻지 못하면 손실은 반드시 클 것입니다.

소연은 강동(江東)의 병력을 모두 기울여 올해의 원정을 감행하였습니다. 피로한 군사들이 죽고 다쳐 크게 패배하여 돌아가니, 임금과 신하가 함께 계책을 잃고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비록 들판에서의 싸움은 우리와 대적할 수 없더라도, 성을 지키는 데에는 그들 또한 능히 버틸 수 있어, 지금 공격한다 하더라도 쉽게 함락시킬 수는 없습니다. 또 광릉(廣陵)은 멀리 떨어져 있어 강에서 40리나 되고, 종리(鐘離)와 회음(淮陰)은 회수 바깥에 있습니다. 설령 그 땅들이 귀순하여 들어온 것이라 하더라도 군량이 부족해 수비가 어려울까 두렵습니다. 하물며 공격을 더한다면 병사들의 수고가 심하지 않겠습니까? 또 정남장군의 병사들은 이미 두 철을 싸움터에서 보냈기에 지치고 병들어 죽은 자가 많아, 그 형세는 짐작할 만합니다. 비록 승세를 이어받을 형편은 되더라도, 먼 곳까지 진출할 힘은 없을까 두렵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의견으로는, 우선 옛 진영을 수리하고 변경을 튼튼히 하며, 중원을 휴식시켜 기운을 회복한 뒤, 후일의 원정을 도모함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강동과의 분쟁은 오래 가지 않아 다시 일어날 것이니, 힘을 기르고 때를 기다리는 것이 최상의 계책이라 여깁니다."
이에 조서가 내려졌다.
"회수를 건너 정남장군과 협공하는 일은 앞서 내린 조서대로 시행하라. 어찌하여 이처럼 머뭇거리며 다시 이런 청을 올리는가! 속히 군사를 진격시키라. 그 진군과 공략의 방책은 정남장군의 긴요한 판단에 따르라."
형만이 다시 표문을 올려 아뢰었다.
"소연이 우리 국경을 침입한 지 오래되어 왕사(王師)가 오랫동안 수고하였는데, 이제 그가 달아나니, 실로 변방의 근심이 제거되었습니다. 이는 성스러운 황위(皇魏)의 신령한 보우와 하늘이 적을 꺾어 주신 결과이지, 신 등과 같은 하찮은 자들의 능력으로 이룰 수 있는 승리가 아니었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의견으로는, 지금이야말로 마땅히 변경의 진영을 수리하고 굳게 지키며, 후일의 군사 행동을 도모해야 할 때라 생각합니다. 게다가 소연은 아직 살아 있으니, 그 흉악한 몸이 제거되지 않는 한, 사마귀가 수레바퀴를 막으려는 헛된 욕심처럼 그의 야심이 스스로 멈출 리 없습니다. 그의 야심이 스스로 멈출 리 없으니, 오직 방비를 넓혀 그가 다시 쳐들어올 때를 대비해야지, 군대를 멀리 출동시켜 스스로 피로해지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지금 중산왕(中山王)이 종리(鐘離)로 진격하였는데, 신은 그 일의 타당함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만약 진정으로 얻고 잃음을 헤아린다면, 만 가지 안전을 돌보지 않고 곧바로 광릉(廣陵)을 기습하여 그 내부로 들어가 적의 허를 찌른다면 혹 승산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단지 병사를 주둔시키려 한다면, 소밀(蕭密)의 잔여 군세가 아직 그곳에 있고, '군량이 없다'고 하지만 운반선이 다시 도착하였으니, 80일치의 군량으로 성을 빼앗겠다는 것은 신이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일입니다. 또 광릉과 임성(任城)의 일은 이미 전례로 삼을 만한데, 어찌 이번에도 다시 그 잘못을 되풀이하려 하겠습니까?

만약 지금 출정한다면, 적은 견고한 성에 틀어박혀 싸우지 않을 것이며, 성벽과 해자는 깊은 물로 둘러싸여 있어 함부로 메워 돌파할 수 없습니다. 그저 헛되이 겨울을 맞을 뿐이니, 병사들은 고통과 피로로 스스로 쇠약해질 것입니다. 신이 만약 그곳으로 간다면, 군량은 어떻게 조달하겠습니까? 여름에 출정한 병사들은 겨울옷을 지니지 않았는데, 만약 얼음과 눈을 만나면 무엇으로 추위를 이기겠습니까? 신은 차라리 '겁이 많아 나아가지 않는다'는 꾸지람을 받는 것이 낫지, '패전하고 헛된 행군을 했다'는 죄를 받고 싶지는 않습니다. 종리(鐘離)는 천연의 험지이니 조정의 귀인들도 그 사정을 잘 아십니다. 만약 성 안에 내응이 있다면 모를 일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필시 함락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정복하지 못할 때의 치욕을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신의 말이 옳다고 믿으신다면 부디 신을 머물게 하시고, 신이 가기를 꺼린다고 보신다면 신이 거느린 병권을 모두 중산왕에게 맡기소서. 그가 자유로이 처분하게 하시되, 신은 단기(單騎)로 그를 따라 동서로 달리며 보좌하겠습니다. 속담에 '밭을 갈려면 밭 가는 노비에게 묻고, 비단을 짜려면 베짜는 여종에게 물어라.' 하였습니다. 신은 비록 무예에 뛰어나지 않으나 감히 정벌군의 장수 자리를 맡고 있으므로 전황의 가부(可否)는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신이 이미 어려움을 말씀드렸는데, 어찌 억지로 출정을 강요하실 수 있겠습니까?"
이에 조서가 내려졌다.
"안동장군이 자꾸 군대를 물리길 청하고, 머뭇거리며 나아가지 않으며, 군략에 어긋나는 말을 하니 매우 기대에 어긋난다. 군사와 말이 이미 충분하니 더는 지체할 수 없다. 신속히 나아가 동서의 군세와 호응하여 승세를 타고 적을 쓸어버리며 기회를 놓치지 말라."
그럼에도 형만이 거듭 상주하여 귀환을 청하자 선무제가 마침내 이를 허락하였다. 과연 원영은 패하여 퇴각하였고, 세상 사람들은 모두 형만의 판단과 식견에 탄복하였다.

처음에 시중 노창(盧昶)과 형만은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노창과 원휘는 모두 선무제의 총애를 받던 인물이었으며, 어사중위를 지내는 최량(崔亮) 또한 노창의 편이었다. 노창과 원휘가 최량에게 형만을 탄핵하게 하며, 그 일이 성공하면 선무제에게 말해 그를 시중으로 삼아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이에 최량은 형만이 한중에 있을 때, 양민을 노략질하여 노비로 삼았다고 상주하였다. 그러자 형만은 노창 등의 무리에 의해 모함당할까 두려워, 그가 한중에서 얻은 파서태수 방경민(龐景民)의 딸 방화생(龐化生) 등 아름다운 여인 20여 명을 원휘에게 바쳤다. 그중 몇 사람은 절세의 미색이었기에, 원휘는 크게 기뻐하며 노창을 배반하고, 형만을 위해 선무제에게 아뢰었다.
"형만은 새로 큰 공을 세웠고, 이미 사면을 받은 바 있습니다. 지금 다시 이런 죄를 따지는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
선무제는 그의 말을 받아들였다. 또, 당시 외척 고조는 형만이 적을 무찔러 공이 있음에도 노창 등의 무리에게 공격받는 것을 알고 그를 도와 변호하였으므로, 형만은 끝내 죄를 면할 수 있었다.

영평 원년(508년) 10월, 현호(懸瓠)의 군주(軍主) 백조생(白早生)이 예주자사 사마열을 살해하고 성의 남쪽으로 들어가 점거하였다. 무제 소연은 관군장군 제구인(齊茍仁)을 보내 군대를 거느리고 현호를 점령하게 하였다. 이에 조정은 형만에게 절(節)을 주어 우림(羽林)의 정예 기병을 거느리고 이를 토벌하게 하였다. 이때 형만은 평서현 개국백(平舒縣開國伯)에 봉해지고, 식읍 500호를 하사받았는데, 이는 그가 숙예를 평정한 공을 상으로 내린 것이었다. 선무제는 형만을 동당(東堂)에 나와 형만을 불러 위로하고 전송하며 말했다.
"사마열은 성문을 엄중히 지키라는 경계를 삼가지 않아, 지혜가 부족하여 스스로의 몸조차 도모하지 못하였다. 그로 말미암아 단지 한 명의 신하를 잃은 데 그치지 않고, 나라의 큰 군략을 크게 훼손하였다. 현호(懸瓠)는 수도 근처에 매우 가까운 곳이며, 동남 방면의 방패와 요새인데, 지금 도공(度公)이 그곳에 있어 짐의 걱정이 더욱 깊다. 백조생은 홀로 설 수 있는 자가 아니니, 반드시 오(吳)·초(楚) 쪽과 멀리 손을 잡을 것이다. 백성들도 그와 함께 악한 마음을 품으면 양쪽이 군사를 일으켜 싸움이 될지도 모른다. 경은 문무를 겸비한 인재이며, 조정의 남중(南仲)이므로, 경으로 하여금 유성처럼 신속히 움직여 적의 예측을 벗어나게 한 것이다. 경의 생각에는 백조생이 도망치겠는가, 아니면 수비하겠는가? 또 언제쯤이면 평정할 수 있겠는가?"
형만이 대답하였다.
"백조생은 깊은 계략이나 큰 지혜를 가진 자가 아닙니다. 단지 사마열이 백성에게 포악하였기에 민심이 분노한 틈을 타서 일을 일으켰을 뿐이며, 백성들은 흉악한 위세에 눌려 부득이하게 그를 따른 것입니다. 설령 소연의 원군이 들어온다 해도, 수로(水路)가 통하지 않아 군량 수송이 끊기면 결국은 포로가 될 뿐, 큰 해를 끼치지는 못할 것입니다. 백조생이 소연의 군대와 연합하더라도 이익에 눈이 멀어 반드시 성을 지킬 뿐 도망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제 왕사(王師)가 이르면 백성들은 반드시 돌아서서 우리에게 귀순할 것입니다. 성을 포위하면 그 길은 막혀 도망할 수 없고, 한 해가 지나기 전에 반드시 그 머리가 수도에 올려질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너무 염려하지 마시옵소서."
선무제가 웃으며 말했다.
"경의 말이 어찌 이리 호쾌한가! 과연 짐이 경을 보내는 뜻을 깊이 이해하였구나. 경의 어버이가 나이 들어, 바깥에서 오래 수고함을 알고 있으나, 충과 효는 아울러 이루기 어려운 법이다. 하나 지금은 재능을 써서 나라를 구할 때이니, 사양할 수는 없느니라."
이에 형만은 기병 800기를 이끌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속행하여 닷새 만에 포구(鮑口)에 이르렀다. 적은 대장군 호효지(胡孝智)를 보내어 7,000명을 거느리고 성에서 200리 떨어진 곳에서 길을 막아 싸움을 걸어왔다. 형만이 그를 격파하고, 승세를 타고 빠르게 진격하여 현호에 이르자, 백조생이 성에서 나와 싸움을 걸었으나, 또다시 크게 무찔렀고, 곧바로 여수(汝水)를 건넜다. 대군이 이어 도착하자, 형만이 포위를 길게 벌였고, 이때 조서가 내려져 형만을 사지절•가 진남장군(假鎮南將軍)•도독남토제군사(都督南討諸軍事)로 삼았다.

영평 원년(508년) 12월, 중산왕 원영 또한 삼관(三關)을 정벌하다가 현호에 이르렀는데, 후군이 아직 이르지 않았고, 앞의 적이 다소 많자 겁내어 감히 진격하지 못하여, 형만과 군대를 나누어 좌우에서 협공하였다. 양나라의 장수 제구인 등 21명이 성문을 열고 항복하였으며, 형만은 백조생 등 같은 무리 수십 명을 참수하였다. 예주(豫州)는 이로써 평정되었고, 형만은 군대를 거두어 수도로 돌아왔다. 선무제가 동당(東堂)에 나와 위로하며 말했다.
"경은 한 달도 되지 않아 요사한 무리들을 평정하였으니, 공훈이 크고 아름다워 옛사람에게도 부끄럽지 않다 할 만하오."
형만이 아뢰었다.
"이는 전적으로 폐하의 성스러운 책략과 위엄, 그리고 원영 등 장군과 병사들의 힘 덕분이니, 신에게 무슨 공이 있겠습니까."
선무제가 웃으며 말했다.
"경이 한 달 사이에 세 번이나 승전을 거둔 것이 놀랄 만할 뿐 아니라, 공을 이루고도 스스로 자랑하지 않으니, 참으로 선비 중 으뜸이라 할 만하구나."
형만은 숙예에서 크게 승리하고, 또 현호를 평정한 뒤로는 그 행실이 더욱 단정하고 올바르게 변하여, 더는 재물을 마음에 두지 않아 군수품을 털끝만큼도 탐하는 일이 없었다. 그리하여 전중상서(殿中尚書)로 승진하고, 무군장군(撫軍將軍)의 칭호가 더해졌다.

연창 3년(514년) 9월 12일[1], 형만이 갑자기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났다. 향년 51세. 형만은 문무를 겸비한 인재로, 조정과 백성들이 모두 그를 우러러보았으며, 위아래가 함께 그의 죽음을 슬퍼하였다. 선무제는 조서로 비단 400필과 조복 한 벌을 하사하고,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 및 영주자사(瀛州刺史)로 추증하였다. 처음에는 선무제가 기주(冀州)의 자사로 추증하려 했으나, 황문랑 견침(甄琛)이 예전에 형만에게 탄핵을 당한 일이 있어
"영주는 형만의 본래 고향이니, 사람들의 바람도 거기에 있습니다."
라 하니, 선무제가 그 말을 따랐다. 그런데 견침이 실제로 조서를 작성하면서 "우대하여 거기장군 및 영주자사로 추증한다."라 하였으므로, 세상 사람들은 그의 속좁음을 비웃었다. 시호는 '문정백(文定伯)'이라 하였다.

3. 가계


[1] 갑오년 갑술월 정사일. 음력으로는 9월 12일이고, 양력으로는 10월 15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