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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4 18:04:25

콘스탄티노스 1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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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 제105대 황제
콘스탄티노스 10세
Κωνσταντῖνος Ι΄
파일:Constantine_X_full_portrait.jpg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콘스탄티노스 두카스
Κωνσταντῖνος Δούκας
출생 1006년
동로마 제국
사망 1067년 5월 23일 (향년 61세)
동로마 제국 콘스탄티노폴리스
재위 기간 로마 황제
1059년 11월 24일 ~ 1067년 5월 23일 (7년 6개월)
전임자 이사키오스 1세
후임자 로마노스 4세
부모 아버지 : 안드로니코스 두카스
배우자 에브도키아 마크렘볼리티사
자녀 미하일 7세 두카스
콘스탄티오스 두카스
안드로니코스 두카스
콘스탄티노스 두카스
안나 두케나
테오도라 안나 두케나
조이 두케나
종교 기독교(정교회)
1. 개요2. 생애3. 치세
3.1. 균형 정치3.2. 4.23 쿠데타3.3. 꼬이는 방위 정책3.4. 북방 정책3.5. 이탈리아 정책3.6. 국내 정책3.7. 말년
4. 평가5. 참고 문헌6. 크루세이더 킹즈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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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콘스탄티노스 10세의 노미스마.png
콘스탄티노스 10세의 노미스마

로마 제국 제105대 황제이자 동로마 제국 두카스 왕조 초대 황제.

로마 제국의 제105대 황제이자 두카스 왕조의 창건자로서 아나톨리아의 파플라고니아 귀족 출신이며 고위 장교로서 군공을 쌓아 명성을 떨쳤고, 정권을 이양받은 후 문민 통치를 통해 원로원과 문관들의 칭송을 받았으나, 건강 악화와 외교 능력의 부족으로 인해 재위기 중의 혼란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해, 이후 제국이 셀주크에게 아나톨리아 내륙을 빼앗기는 원인을 제공하였다.

2. 생애

본명은 콘스탄티노스 두카스. 모이시아(Moesia) 절도사직을 역임하였으며 역시나 파플라고니아계 군부 출신인 안드로니코스 두카스의 아들이다. 1057년에 일어난 이사키오스 콤니노스의 쿠데타를 재정 측면에서 지원하며 미하일 6세 정부를 뒤엎는 데 일조하였다. 그 공로로 이사키오스 시대에 제국 내 2인자로서 암약하였다. 이사키오스 1세가 사망할 무렵에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모이시아의 절도사를 지내고 있었다.

이사키오스가 1057년 3월에 일으킨 쿠데타에 연루되어 있었다. 그는 페트로에 전투 이후 정부와 반군이 협상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친분이 있는 관료들 및 가까운 친척인 세계 총대주교 미하일 케룰라리오스와 협력하여 정부를 뒤엎는 공작을 벌였다. 그 결과 미하일 6세는 자발적으로 퇴진하였고 반란군은 더 큰 피해를 보지 않고 정권을 접수할 수 있었다.

이사키오스 1세는 그와 케룰라리오스의 인척 관계를 두고서 그가 자신의 지위를 위협할 수 있다고 간주했다. 그리하여 케룰라리오스는 실각되었지만 그 과정 가운데서 황제 역시 정권의 정통성에 큰 타격을 입었다. 결국 1059년 말 병으로 쓰러지자 이사키오스 1세는 정권의 후계자로 콘스탄티노스를 지명하였다. 미하일 프셀로스의 서술에 의하면 콘스탄티노스는 평소에 기부를 많이 하여 사회에서 꽤 명망이 높았다고 한다.

3. 치세

1059년 11월 24일 혹은 25일, 콘스탄티노스 10세로서 제위에 올랐다. 그로서는 기존 원로원과 여론 그리고 군부 사이에 벌어져 있는 갈등 구도를 진정시키고 국가를 정상화해야하는 과제가 놓여 있었다. 특히 이사키오스의 압제적인 태도에 대한 불만이 팽배하여 있었으므로 이를 진정시켜야 했다.

3.1. 균형 정치

정권을 인수하자마자 콘스탄티노스는 원로원을 소집하여 이들을 달래는 연설을 했다. 그 내용은 사회적 정의를 충실하게 구현하고 온화한 정치를 펼치겠으며 잘못된 점은 시정하겠다는 약속이었다.
나는 현전하는 가장 위대한 명예를 공유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천상의 임금으로부터 지상의 일을 맡도록 지명 받았습니다. 그분과의 계약을 실패하지 않고 자연의 섭리와 본을 따라 친절하고 열정으로 임함으로써 젊은이들에겐 아버지와 같이, 동년배에게는 형제와 같이, 노인에게는 지팡이와 자식과 같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나의 치세 동안 번영을 누릴 것이며 예언자들의 예언이 성취됨을 목격할 것입니다. 이는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굽어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시대의 그 어떤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슬픔과 비탄, 불리한 박탈로 인하여 고통 받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행 조치로서 콘스탄티노스는 미하일 6세 때 주요 고위 관직이나 원로원 의원을 지내다가 이사키오스 1세에 의하여 해임, 추방된 사람들을 다시 초빙하여 원래의 직위와 직급을 돌려주었다. 팽배한 불만은 잠시 가라앉는 듯 보였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여전히 불만을 품는 이들이 있었다. 이들이 파플라고니아 군벌의 재집권을 반대한 원로원인지 아니면 정권에서 밀려나는 군부였는지는 모른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콘스탄티노스가 집권한지 불과 5개월만에 중대한 결단을 내렸다는 점이다.

원로원 측이 일을 벌인 것이라면 이는 콘스탄티노스의 조치에도 불구하고 원로원을 설득하는데 실패했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군부의 행동이라면 마땅히 콘스탄티노스의 군부 견제에 대한 반응이었을 것이다. 둘 중 어느 쪽이든 이후 콘스탄티노스 10세로서는 정권의 유지를 위하여 원로원에 더 유화책을 펼치고 군부 쪽에 대해서는 거리를 두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3.2. 4.23 쿠데타

1060년 4월 23일은 성 요르요스축일이었다. 콘스탄티노스 9세가 규정한 이래로 이 축일에는 황제가 반드시 참석하여 망가나 수도원에 있는 요르요스의 예배당까지 도보 행진을 한 뒤 하루종일 이어지는 축제를 참관해야 했다. 이는 단순히 종교적 축일로서의 기능 뿐만 아니라 황제에게 청원할 이유가 있는 사람에게는 중요한 회견의 기회를 제공하며 황제에 대한 여론의 지지를 점검하는 기능도 갖추고 있었다. 문제는 바로 그 날, 시내는 혼잡하고 황제도 정부를 떠나있는 그 시점이 쿠데타에도 최적의 시점이었다는 점이다. 모반을 꾀하는 인사들 다수는 제국 해군까지 포섭하면서 대대적인 쿠데타를 준비하고 있었다.

다만 군대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무작정 밀어넣을 수는 없었다. 예상치 않은 희생이 발생하게 되면 쿠데타는 바로 끝장이었다. 이들은 먼저 도시 내에 미리 심어둔 자신들의 세력으로 시내 각지에서 가짜 시위를 벌여 축제 참여 시민들을 대거 시위로 끌어들인다. 정부와 공권력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게 혼란이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심지어 경찰력을 행사할 수 있는 콘스탄티노플 시장 역시 쿠데타군 측에 가담해 있었다. 그러면 망가나 수도원 단지에 있는 황제는 위기감을 느껴 바로 옆에 위치한 바닷가의 배를 집어타고 황궁의 항구로 도망가려 할 것이었다. 그 때 해군 함정이 황제에게 접근하여 구출하는 척 올라타게 하고는 바다로 바로 나아가 물에 빠트려 죽인다는 계획이었다.

실제로 4월 23일 당일 시내 수십, 수백여 장소에서 일시에 시위가 발생했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황제와 정부 각료들은 크게 당황했다. 실제 진상은 꾸며진 시위였기 때문에 정확한 소식은 전해지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시위는 더 이상 확대되지는 못했다. 축제 때문에 시내를 돌아다니던 시민들은 처음에는 시위대를 보고 왜 시위를 하고 있는지 지켜보다가 곧 관심을 돌려 집으로 돌아가거나 그 자리에서 시위를 구경하는 것으로 일관했다. 때문에 시내는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과 여전히 축제 분위기에 들뜬 주민들 그리고 시위대가 마구 뒤섞여 누구도 진상을 알 수 없는 개판 혼란이 일어났다.

쿠데타군의 예측대로 콘스탄티노스는 가족들을 대동한 채 해안가로 향했다. 그런데 마침 해안가에는 황제가 잘 알고 있는 행정관이 소유한 배가 한 척 있었다. 당연히 이에 올라탄 황제는 최대한 빨리 바닷길로 황궁으로 향했다. 뒤늦게 해안에 접근한 해군 함정들은 황제가 탄 함선에 정지 명령을 내리며 추격전을 벌였다. 하지만 끝내 황제를 체포하는 데에도 실패했다.

궁정으로 급히 소집된 내각은, 그러나 여전히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 불안감에 젖어 있었다. 시위 진압을 책임져야 할 콘스탄티노플 시장은 자기 집에서 조용히 상황만 살피고 있었다. 외부에서 군대라도 들어오지 않는 한은 정리될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콘스탄티노스 황제의 동생인 부제 요안니스는 시내의 소란을 전해 듣고는 재빨리 소규모 경호대를 대동한 채 중앙대로로 들어왔다. 한창 시내에서 북적이던 시민들은 요안니스와 군대가 혼란을 진정시키기 위해 들어오자 길 양쪽으로 비켜주고는 이들에게 박수를 치며 환영했다. 낙동강 오리알이 된 가짜 시위대들은 곧 상황이 나가리된 것을 파악하고선 집으로 도망가 숨거나 교회당으로 도망쳐 보호를 요청했다.

상황이 서서히 쿠데타 측에 불리하게 돌아가는 낌새가 보이자 저택에서 정세를 관망하던 시장은 이 무렵에 급히 집을 나와 가짜 시위대들을 진압했다. 그리고는 궁으로 들어가 자신의 활동을 보고했다. 하지만 곧이어 내각에서 시장이 하루종일 무엇을 했는지 질문하기 시작하자 말문이 막힌 그는 곧 공개적으로 고발되었으며 나중에는 유배되었다.

정변이 진압되고나서 후폭풍은 거셌다. 오랫동안 계속해서 가담자들이 체포되어 법정에 올랐으며 이들에 대한 심문만으로 오랜 시일이 걸렸다. 다수의 죄인들은 사법 거래를 통해 더 많은 연루자들을 증언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체포, 기소되어 일부는 감옥에 투옥되었고 다른 이들은 재산 몰수형이나 유배형, 연금형에 처해졌다. 하지만 그 이상의 형량은 부과되지 않았다. 콘스탄티노스가 유혈을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단지 시민권 박탈만으로 충분한 형벌이라고 밝혔다.
이들의 명예나 돈을 박탈하기보다는 이들을 자유인이 아닌 노예로 취급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자유를 빼앗은 것은 내가 아니다. 법률이 이들의 조국으로부터 추방시킨 것이다.

3.3. 꼬이는 방위 정책

콘스탄티노스는 연이은 전쟁으로 국고가 피폐하고 이사키오스 1세의 재정 개혁은 큰 반발에 부딪혀 무산된 상태의 국가를 이어받았다. 그로서는 추가적인 세원 확보가 불가능하였으므로 이제는 불가피하게 세금을 좀 더 엄격하게 걷고 조금 더 올려받는 방법을 택해야 했다. 문제는 동부 소아시아의 방어선이 이중적인 문제에 부딪혔다는 것이었다. 1057년 쿠데타로 상당수 인력을 상실한 동부의 군부대는 오랫동안 회복이 느리게 진전되었다. 거기에 1060년 2차 쿠데타 시도까지 일어났으니 정부로서는 불완전하나마 군대에게 임금 지불과 보급을 원활하게 공급할 계제가 되지 못했다.

1062년 / 1063년에는 여기에 조금 변화가 오는 듯 했다. 1054년 이래로 거의 10년 가까운 기간 동안 아르메니아 등 여러 지역을 노략하며 파괴를 일삼던 사무크(Samouch) 등이 지휘하는 유목민 부대가 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방어군과 크게 충돌한 끝에 궤멸당한 것이다. 동부 지역에 긴장감을 초래하였던 무리였으므로 이들이 토벌되었다는 소식은 콘스탄티노스로 하여금 동부 변경의 방어 능력이 현 상태로도 충분하다고 판단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바로 비슷한 시점에 중앙 정부의 부족한 지원을 보충하면서 자발적으로 방어할 수 있도록 아르메니아 일대의 방어 기능을 재편하고자 했다.

아르메니아 토착민 출신인 판그라티오스라는 사람은 그 때 정부에 접촉하여 이베리아(Iberia) 관구의 수도인 아니(Ani)의 절도사로 봉해줄 것을 요청하면서 중앙 정부의 지원 없이 자급자족하도록 방어군을 재편하겠다고 제안했다. 그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인 콘스탄티노스는 아르메니아 전방의 방어 기능을 이런 방식으로 강화하고자 했다. 하지만 판그라티오스는 약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여러 시행 착오에 부딪히며 성내의 곡물 비축도 제대로 완료하지 못했다. 외려 국경을 통과해 지나가던 셀주크 군대를 공격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물론 국경을 멋대로 넘었다는 점은 셀주크 제국측 잘못이긴 했지만 셀주크 군대가 그렇다고 어떠한 적대적 행동을 하지 않았기에 곧바로 공격한 것은, 아직 부족한 이베리아 지역의 군사적 능력을 고려하건대 무리한 조치이긴 했다.

이 무렵 셀주크 제국은 1050년대 말에 벌어졌던 부와이 왕조의 반격을 물리치고 페르시아와 메소포타미아의 지배자 위치를 굳혀놓은 상태였다. 1062년부터 새로운 술탄이 된 알프 아르슬란은 1064년, 대대적으로 아르메니아로 진격했다. 여러모로 재편 과정에서 대비가 되어있지 않던 아니는 지휘관들은 지휘권 분쟁 끝에 도망쳐버리고 8월 16일에 함락되어 폐허로 전락했다. 셀주크 군대는 곧 돌아갔지만 이들을 따라왔던 또다른 대규모 튀르크 유목민 부족들이 무너진 아르메니아 국경을 따라 수시로 진입하여 노략과 파괴를 일삼았다. 전방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동로마는 이들이 알프 아르슬란 술탄의 셀주크 정규군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때부터 동로마 제국과 셀주크 제국 사이의 답답한 상황이 계속되었다. 셀주크 제국은 중간지대에서 제멋대로 활동하는 문제거리 유목민들의 통제를 위해서 동로마와 가능한 원만한 관계를 추구하려 했고, 그러한 사정을 셀주크가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니 더욱 상황을 알 수 없이 그저 튀르크 유목민들의 공격을 당할 뿐인 동로마는 셀주크 제국이 계속 동부 지역에 침공을 가하며 위기를 조성한다고 간주했다. 이런 양자간 의사 소통 부재는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로 이어지는 직접적 도화선이 된다.

3.4. 북방 정책

1059년에 이사키오스 1세의 원정으로 발칸 북쪽에 자리잡았던 페체네그유목민들은 이스트로스 강을 건너 도주했다. 그러나 1065년이 되자 이들은 재차 오우즈족의 이름을 걸고 대규모 민족을 이루어 남하했다. 불가리아와 모이시아의 향군(鄕軍 : Themata)들이 이를 저지하려 했으나 쉽게 격파당하고 말았다. 오우즈족 이하 유목민들이 북쪽에서부터 마케도니아와 트라키아 각지로 흩어져 약탈을 일삼자 위기가 고조되었다. 콘스탄티노스는 대군을 소집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지만 가뜩이나 군부와 갈등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대군을 소집해도 지출할 막대할 경비는 물론 이들을 통제할 자신도 없어했다. 그리하여 일단 시간을 번다는 명목 아래 외교 사절단을 오우즈족에게 파견하여 선물 공세로 침략을 늦추고자 했다. 그러나 민심은 재차 악화되어 어서 출정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하여 황제는 동방에서 군대가 수도에 도착하기 이전에 150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미리 출발했다. (통상 지역의 병력을 소집하고 수도에서 출발하는 황제는 150명의 병력을 데리고 출발하며 이후 각 지역에 설정된 집결 지점에서 각 군세를 인수하는 방식으로 병력을 집결했다고 한다.) 그러나 오우즈족은 바로 그 직후 불가리아 지역 향군과 제국에 충성하는 토착 유목민 부대의 반격으로 붕괴되었으며 나머지 세력들도 풍토병으로 고생하다 끝내 다시 강을 건너 도주했다. 콘스탄티노스는 이에 만족하며 포로들에게 시민권을 주고 지도자들에게는 원로원 의원의 자격을 주어 사회 내부로 받아들였다.

1066년에는 페체네그족이 다시 침입을 위해 남하하였으나 모이시아 절도사인 로마노스 디오예니스에 의하여 완전한 패배를 당하고는 북쪽으로 물러났다. 페체네그족이 다시 공격을 시도하게 되는 것은 8년 뒤 네스토르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의 일이었다.

북방에 있어서 콘스탄티노스는 바실리오스 2세 이래의 정책을 그대로 고수하였다. 발칸 산맥 이북은 적의 거점으로 활용되지 않도록 일부러 저발전 지역으로 남겨두고 주요 거점만 유지했으며 유목민들을 동맹으로 끌어들여 이 지역의 방어를 확립했다. 천연의 청야 작전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져 있는 공간을 두어 완충지로 삼는 이 정책은 상당히 유효하여 콤니노스 왕조 시대에도 이어졌다.

3.5. 이탈리아 정책

1058년 이탈리아 도독직이 공석이 된 이래 로베르 기스카르는 재빠르게 기회를 이용, 남이탈리아에서 동로마의 영토를 대부분 빼앗았다. 1060년, 이에 대한 대응으로 마침내 콘스탄티노스 10세는 미리아르흐(Miriarch)를 새로 도독으로 기용하고 대규모 병력을 파견했다. 미리아르흐는 1060년에서 61년 사이 기스카르가 시칠리아 원정을 떠난 것을 기회로 삼아 반격을 펼쳤으며 바리(Bari), 타란토(Taranto) 등을 탈환했다. 이후 기스카르는 원정에서 복귀하여 재차 반격을 꾀하여 여러 지역을 재점령한다. 그 뒤에도 이탈리아 남부에서는 양측의 전쟁이 계속되었다. 전 도독이었던 아르이로스(Argyros)는 물론 새 도독으로 부임한 아불하레(Abulhare)도 서로 협력하며 반격을 이어나갔다. 1067년과 1068년에는 브린디시(Brindisi)와 타란토(Taranto)를 재차 탈환하며 동로마군의 반격이 이어졌다. 그러나 1067년 5월에 콘스탄티노스가 사망하고 그해 말부터는 동쪽 변경이 완전히 붕괴되어 이탈리아 전장은 상대적으로 방치되었다. 1068년 아불하레와 아르이로스 둘다 사망하자 기스카르는 거침없이 남이탈리아를 휩쓸었으며 1071년 4월 15일에 마지막으로 남은 거점인 바리를 점령했다.

3.6. 국내 정책

콘스탄티노스는 다시금 원로원의 문을 열고 원로원 집단과 시민 대중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 그 과정 중에서 새로 편입된 오우즈족 시민권자에게까지 원로원 의원직이 나누어졌다. 또한 점점 사회가 발전하고 복잡해지는데 비하여 여전히 콘스탄티노스 9세 시절에서 나아가지 못하는 법학을 완전히 정착시키는데 성공하여 심지어 병사들조차도 무기를 내려놓고 법학을 공부하여 변호사 자격을 획득하려는 새로운 유행을 만들어냈다. 다만 국방 정책의 실패로 인해 재차 여론의 지지를 잃게 되었으며 결국 카파도키아 군부의 새로운 도전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재정은 콘스탄티노스 10세 정권의 갖은 노력 끝에 상당히 회복되었다. 재정 수지도 양호한 상태가 되었고 연대기 기록에 따르면 비축금 역시 예전 시대의 절반 정도까지 수복되었다고 언급된다. 다만 재정이 소진되는 최악의 상황에 대한 두려움과 군부에 대한 경계 태도가 적정한 군비 지출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제대로 사용되지 않았다는 점은 단점으로 지적할 수 있다.

또한 1063년 9월 23일 새벽에는 대규모 지진이 일어나 많은 도시와 건축물이 파괴되고 인명 손실이 잇따랐다. 이후 2년 동안 여진이 계속 이어지더니 1065년, 니케아 지역에서 재차 큰 지진이 일어나 많은 지역이 파괴되었다. 1066년 5월에는 큰 꼬리를 가진 밝은 별이 홀연히 출현하여 동과 서를 가로질렀다. 동시기 잉글랜드에서도 큰 소동을 일으켰던 이 별은 바로 핼리 혜성이었다. 여러가지 일이 겹치면서 사람들은 자연 현상임은 알고 있으면서도 불안한 내색을 감추지 못했다.

3.7. 말년

1065년, 59세의 나이에도 직접 원정을 나갈 정도로 건강이 괜찮은 편이었던 콘스탄티노스는 그해 10월이 되자 건강이 크게 악화되어 병석에 누웠다. 무려 1년 7개월 동안이나 자리에 누워있던 그는 1067년 5월에 이르러 숨을 거두기 직전에 이르렀다. 그는 이제 이제 겨우 성년이 되는 아들 미하일 7세와 아내 에브도키아가 제위를 지키기 어려울 것임을 깨달았다. 그리고는 군부가 나서지 못하도록 한 가지 계책을 짰다. 그리하여 에브도키아는 남편의 요구에 따라 앞으로 재혼을 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엄숙하게 선언했다. 그 이후 5월 22일, 콘스탄티노스는 사망했다.

4. 평가

콘스탄티노스는 이사키오스의 쿠데타로 일어난 혼란을 수습하는데 노력을 다했으며 이 때문에 군부와의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다. 적어도 이러한 노력을 인정받았는지 치세 초 4.23 쿠데타가 일어났을 당시 시민들의 암묵적 지지를 받아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또한 몇 년 동안이나 방치되었던 재정 문제도 손을 대어 임박한 재정 위기를 피할 수 있었다. 그가 축적한 재정으로 로마노스 4세가 대규모 병력을 모집할 수 있었으며 또한 이후 미하일 7세 역시 몇 차례나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는 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 또한 정부의 폭정으로 비춰질 수 있는 일을 일절 중단하고 원로원의 문호 개방 및 실용 법학의 완전한 정착을 통하여 콘스탄티노스 9세의 정책을 다시 한 번 영속화하는데 성공했다. 그의 이러한 업적은 이후 12세기의 동로마 사회를 특징짓는 하나의 시금석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치세는 심각한 어두움 역시 드리워 있었다. 이사키오스의 쿠데타 이래로 동부 전선의 수비력은 이전에 비해 약해져 있었다. 1048년의 두 차례, 1054년의 한 차례 공세를 통하여 셀주크 제국의 군대도 막아내었던 동부 전선의 병력들은 쿠데타로 차출된 병력들이 내전으로 상당수 희생되면서 충원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으며 그 과정에서 재정 능력의 한계와 중앙 정부와 군 사령관들 사이의 불화 및 경계로 인한 보급 지연 등의 문제가 겹쳐 수비 능력은 점점 위험해졌다. 1054년부터 동부 전선에서 셀주크 왕조의 통제와는 상관없이 동로마의 동부 내륙 지방 깊숙이까지 진출하여 파괴를 일삼던 유목민 군대를 1062년~1063년에 들어 격파하긴 하였지만 만성적인 재정적 문제와 변경방어 문제는 고질적이었다. 1063년에 들어 콘스탄티노스가 시도한 아르메니아 - 이베리아의 자생적 방위 능력 구비 사업은 새로운 절도사인 판그라티오스가 무리하게 셀주크 제국과의 갈등을 자극함으로서 파탄을 맞았다. 이때 새로 유입된 대규모 유목민들은 폐허가 된 아르메니아 - 이베리아를 돌파하여 유프라테스 유역에 다다랐으며 간헐적인 공격 끝에 이곳까지 무너뜨리게 된다. 이 점에 있어서는 결국 최종 명령권자인 콘스탄티노스가 책임을 지지 않을 수가 없다.

그가 후계자로 남긴 미하일 7세나 에브도키아는 이 문제에 적절하게 대응을 할 수 없었으며, 1067년에 유목민들이 소아시아 방어선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내륙 지역을 잔혹하게 노략한 문제로 시민의 지지는 완전히 땅에 떨어지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콘스탄티노스 10세의 탓은 아니겠으나, 그가 와병한 1065년 10월 이래로 무엇인가 현상 변화를 위한 본격적인 시도를 하지 않은 점은 아쉬운 점이라 할 수 있다. 즉 재능과 비전은 있었으나 여건이 따라주지 않았고, 어쩔 수 없는 판단 착오로 과거의 문제를 미처 해결하지 못해서 후대 황제들에게 짐을 남겼던 셈이었다.

5. 참고 문헌

Alexander D. Beihammer, Byzantium and the Emergence of Muslim-Turkish Anatolia, ca. 1040-1130, Routledge Press, 2017.
Attaleiates, Anthony Kaldellis, History, Harvard University Press, 2009.
John Skylitzes, John Wortley Tr., A Synopsis of Byzantine History, 811-1057,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1.
Michael Psellos, E. R. A. Sewter Tr., Chronographia, Yale University Press, 1952.

Telemachos C. Lounghis, 'The Byzantine historians on politics and people from 1042 to 1081', Byzantion Vol.72, No. 2, 2002.

6. 크루세이더 킹즈 시리즈

1편과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 1066년 시나리오의 비잔티움 황제로 플레이할 수 있다. 세력은 어느 정도 갖춰져 있지만 시작부터 아르메니아 왕국 권역에 셀주크 제국의 침략이 걸려있는 상태고 콘스탄티노스도 고령인데다가 능력치도 매우 나쁘다. 그리고 후계자인 장남 미하일도 젋은 나이지만 능력치가 나쁘고, 봉신들의 충성도도 낮아서 두카스 가문의 초반 난이도가 높다. 다행히 Holy Fury DLC가 출시된 후 동로마의 기본 계승법이 제국 선거제로 바뀌면서 미하일이 아닌 능력치가 최대한 좋은 다른 두카스 가문원(성인일 수록 유리하다)을 지명한 뒤, 지지도가 확실한 상태에서 콘스탄티노스가 죽고 후계자 대에 안정화에 성공하면 동로마의 자체 체급이 좋아서 난이도가 쉬워진다.

본편의 3번째 작품인 크루세이더 킹즈 3에서 1066년 시나리오의 비잔티움 황제로 플레이할 수 있으며, 셀주크와의 전쟁이 걸려 있는 상황이나 본인이 고령인 점은 전작과 마찬가지로 동일하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셀주크와의 전쟁에서 선방하는데 성공하여, 셀주크를 몰아내고 승전하거나 현상유지로 휴전을 맺는 경우도 잦았다. Roads to Power DLC가 나오고 나서 제국이 행정제 정부로 개편되었는데 초반 제국 중앙군이나 지방군이나 셀주크군에 비해 병력이 매우 적기 때문에 초반 셀주크와의 전쟁 난이도가 상당히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