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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명나라를 이어 중국을 296년간[1] 지배한 청나라의 역사이다. 역대 중국 왕조중 원나라와 더불어 영토가 가장 넓었으며 여러 다른 종족들이 소속된 다민족 국가이기도 했다. 본래 전신은 미개인으로 여겨지던 여진족들 이였으나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합하면서 왕조를 띄었고 숭덕제 시기 스스로 황제를 칭했으며 도르곤 섭정 시기에 산해관을 넘어 명나라를 멸망시켰고 강희제 시기엔 잔존세력인 남명과 동녕 왕국까지 제압하면서 명의 영향력을 완전히 소각해 중원 지배권을 얻었다.이후 강희제 ~ 건륭제 시기동안 전성기를 유지했으나 제8대 황제이자 19세기 도광제의 임기 중 서방의 침입인 제1차 아편전쟁이 일어난 데 이어 함풍제 시기 일어난 태평천국의 난과 제2차 아편전쟁을 계기로 세계에 청의 약함이 만천하에 드러남과 동시에 열강의 식민지 취급을 받다가 1912년 철도 국유령에 반대함을 원동력으로 한 신해혁명이 일어나 청 왕조는 멸망했다.
1917년 7월 1일 장훈복벽이 발생해 일시적으로 부활했으나 동년 7월 12일 돤치루이의 공격으로 장쉰이 물러나면서 11일만에 폐지되었다.
청나라는 북쪽으론 러시아 제국, 남동쪽으론 조선을, 남서쪽으론 동남아시아(대월의 후 레 왕조 → 떠이선 왕조, 시암, 버마)를 맞대고 있었고, 복속한 세력으론 명나라(남명), 동녕 왕국, 몽골 제국, 위구르, 토번, 준가르가 있으며 대월의 떠이선 왕조 같은 경우 형식상의 주군-신하 관계를 맺었다. 몽골의 경우 2대 황제인 숭덕제 시기 복속했다.
북쪽에 위치한 러시아 제국과 2차례의 영토에 관한 조약을 맺은 기록이 있다. 첫번째는 강희제 시기 표트르 대제와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은 것이고, 두 번째는 옹정제와 예카테리나 1세가 맺은 캬흐타 조약이다.
2. 건국
자세한 내용은 여진족/역사 문서 참고하십시오.2.1. 건주여진
15-16세기 명나라와 이민족의 판도 ■ 여진족의 분포 ■ 15세기경 오이라트의 판도 / ■ 16세기경 몽골(북원)의 판도 ■● 15-16세기경 왜구의 활동과 침입 지역 |
이후 오이라트와 몽골 세력 그리고 여진 부족들이 요동의 안정을 위협하자, 명나라는 장성지대와 마찬가지로 산해관-개원-봉황성을 연결하여 요동도지휘사사를 방어하는 요동변장의 축조를 시작했고, 그리하여 완성된 요동변장은 요동도사에 위협이 되었던 몽골과 여진을 방어하는 방어선이자 명나라의 내지와 외지를 구분하는 국경으로 설정되었다.
명나라는 요동변장 동쪽의 혼하 유역과 그 부근에는 건주삼위(建州三衛)를 두어 건주여진을 관리했다. 건주삼위는 원래는 골치아픈 건주여진을 관리하기 위한 명나라의 행정체계였으나, 명나라가 혼란스러워지자 이들은 오히려 16세기 중반부터 명의 요동 변경을 약탈하는 동시에 동북쪽으로는 해서여진의 여러 부족과 각축전을 벌이며 팽창을 시도했다. 16세기 후반부터 차하르 몽골의 투먼 자삭투 칸의 간접적인 지배를 받던 건주여진의 세력가 왕고(王杲) 및 왕올당(王兀堂) 등에 의해 여진의 요동 공격은 더욱 빈번해졌다. 허나 여진족들도 자기들끼리 치고받고 싸우느라 독자적인 거대 세력은 만들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청나라의 황가인 아이신기오로 가문이 바로 이 건주여진 출신이다. 태조 이성계 아래에서 싸운 것으로도 알려진 아이신기오로 먼터무는 조선을 섬기다가 1411년 태종이 무역을 중단하자[5] 경원군을 약탈했는데, 결국 조선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화의를 맺었다. 먼터무는 1433년 명 조정으로부터 우도독으로 임명되는 등 꽤나 잘나갔지만 결국 여진족 간의 다툼에 휘말려 죽어버렸다. 먼투무가 죽자 그의 부족과 아이신기오로 가문은 랴오닝성의 허투알라에 정착해 건주위에 편입되었는데,[6] 이때부터 본격적인 건주여진으로서의 아이신기오로 가문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2.2. 누르하치의 등장과 여진 통일
건주여진도 내부로는 여러 가문으로 갈라져 있었으며, 누르하치의 조부인 기오창가가 당시 기오로 가문의 수장이었다. 기오창가 시절 기오로 가문은 일족들이 모여 '닝구타 버일러 연맹'을 조직하긴 했으나 건주여진 내에서 썩 높은 직위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았었다.기오창가는 소자하 유역의 숙수후부(Suksuhu Aiman)의 허투 아라(Hetu Ala)를 중심으로 부족을 통솔하며 다섯 아들을 두었고 이중 4남이 바로 누르하치의 친부 탁시였으며 그런 탁시가 1559년 처음으로 득남한 아이가 바로 훗날 금 태
당시 건주여진은 여러 세력으로 나뉘어 다투고 있었는데, 개중에는 기오로 가문의 수장 기오창가도 있었다. 기오로 가문은 건주여진 내에서도 높은 직위를 차지하고 있지는 못했으며 일족들이 '닝구타 버일러 연맹'을 조직한 정도였다. 기오창가는 소자하 유역의 숙수후부(Suksuhu Aiman)의 허투 아라(Hetu Ala)를 중심으로 부족을 통솔하며 다섯 아들을 두었고 개중 4남이 탁시였다. 탁시는 1559년 처음으로 득남하는데, 이 아들이 바로 청의 초대 황제이자 천명제라 불린 누르하치이다.
누르하치의 어릴적은 썩 좋지 못했는데, 그가 9살이던 시절 친모가 타계하면서 탁시는 해서여진의 1인자 '완 한'의 딸인 컨저(Kenje)와 재혼했으나 컨저는 누르하치를 대놓고 핍박했으며 누르하치가 독립할때도 장남이었음에도 약간의 재산만 건네주었다.[7] 또한 누르하치의 청년기에 '아타이 장긴'의 난을 막기 위해 그가 점거한 성을 찾아간 조부 기오창가와 친부인 탁시가 협상을 이끌어가던 중[8] 명나라 군대가 아타이 장긴의 성을 공격하고 이 싸움에 휘말려 조부와 친부가 죽어버리게 된다. 이 일로 누르하치는 부족의 추장이 되었으며 멍나라도 1583년 그들의 사망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며 누르하치를 건주좌위지휘사로 임명하고 사과의 의미로 교역 허가서 30통과 말 30필을 배상금조로 주는등 나름대로 챙겨주었다 이는 명나라 입장에선 꽤나 배려한 편이었으나 누르하치는 이를 마냥 반기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 사건이 평생을 명나라에게 원한을 품게 되는 시발점이 되었다.
누르하치 | 사르후 전투 |
추장이 되며 권력을 쥔 누르하치는 얼마안가 계모인 컨저(Kenje)를 순장시키고 적극적으로 세를 확장하여 허투 아라의 주인이 됨과 동시에 닝구타 일족의 통합[9]을 이루어내며 세력을 팽창시키고 조부와 부친의 사망을 야기한[10] 니칸 와일란마저 죽이면서 부족 내부를 단힙시킨다. 1586~89년에는 왕야부(완안부)와 후너허부(혼하부)를 정복해 건주여진 8부를 모두 통일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후에도 세력을 더욱 팽창하여 해서여진과 야인여진마저도 통일해 여진족을 모조리 통합하는 대위업을 이루었다. 누르하치는 1606년에는 내할하의 바야우드 오톡의 엉거더르 타이지에게 '쿤더런 칸'(쿤두런 한)이라는 존호를 받았으며, 1616년 2월에는 '겅옌 한'의 칭호를 취했다.
이후 그는 1616년에 금나라의 계승 의지를 표명하며 자신의 나라 또한 후금, 즉 아이신 구룬(Aisin Gurun)[11]을 건국했으며, 자신의 씨족명인 '기오로'에 '아이신'을 덧붙여 아이신기오로(Aisin Gioro)로 가명을 개창했다. 이후 사르후 전투에서 승전하여 요동 지역을 석권하고 동시에 해서여진의 예허부를 최종적으로 통합하는 등 지속적으로 팽창을 거듭했다. 특히 사르후 전투 승리 이후 몇 년만에 요동 70여 개 도시들을 정복하고 1621년에는 대도시 랴오닝과 선양시를 함락, 1625년 봄에 수도를 선양으로 천도했다. 누르하치는 1618년부터 '7대 한(恨)'을 내걸고선 대명 선전포고를 쏘아올렸고 이는 명나라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12] 하지만 7대 한을 발표하고 8년 만인 1626년, 영원성 전투에서 원숭환이 통솔하는 명군에게 대패하고 큰 충격을 받아 몇 달 뒤 병사하고 말았다.
3. 건국 이후
3.1. 홍타이지
3.1.1. 대대적인 구조개혁
홍타이지의 정궁 선양고궁의 대정전 |
누르하치는 사르후 전투로 대표되는 나름의 뛰어난 맹장이긴 했으나, 결단코 우수한 지도자라 볼 수는 없었다. 명나라에 대한 원한인지는 몰라도 그는 한족을 매우 가혹하게 다루는 걸로 유명할 정도였는데, 점령지의 한족의 생활 공간을 박탈하고 포로로 잡은 한족 대부분을 만주족의 장원 내 노비로 만들었으며, 노예들이 버티지 못해 도망가면 즉결 처형시킬 정도로 그들에게 일방적으로 가혹하게 법을 집행했다. 이는 그가 여진족 추장이 아닌 후금의 지도자를 자칭하고 나서도 크게 바뀌지 않아서 한족도 관리로 받아들이긴 했으나 그들이 고관대직에 앉을 순 없었고 언제든 만주족 고관들에게 재산과 가솔을 뺏기기 십상에, 아내가 겁탈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다보니 누르하치 재위기간동안 후금 내에서는 수시로 한족에 의해 만주족을 노린 독살, 암살, 반란 시도가 벌어졌고 그런만큼 내부적으로 엄청난 불안정에 시달려야 했다.
그런 와중 누르하치가 급사하게 되자 누르하치의 8남이자 4명의 버일러[13] 중 네 번째 버일러(Duici Beile)였던 홍타이지가 2남이자 대버일러인 다이샨의 지지로 한의 지위를 계승해 2대 황제로 재위에 오르면서 여진족 시절에서 크게 차이나지 않은 약탈 기마 민족의 방식을 뜯어고치는데 적극적으로 나서며 상황을 반전시킨다.
홍타이지는 즉위 직후 바로 한족과 여진족의 생활구역을 분리해 직접적인 충돌을 줄였으며 항복한 한족도 처형하지 않고 처벌 감경, 호적 설치를 하며 그들을 대위하면서 한족 관료도 이전보다 중용하고 그들의 신변과 재산을 적극적으로 지켜주기 위한 조치를 도입했다. 또한 후금이 아직 나라로서 부실하다는걸 받아들이고 유능한 한족 관료들을 장원, 가옥, 노비등 막대한 재산을 안겨주며 중용했고 새로 창립한 팔기군에서도 만인팔기와는 별개로 한족으로 구성된 한인팔기를 만들어 한족들 역시 팔기제 안으로 편입시켰다.
단지 한족을 받아들인 것을 넘어 누르하치가 이를 갈며 와신상담하던 명나라의 선진적인 문물을 받아들이는데도 적극적이었다. 기존 후금과는 비교도 안되는 선진적인 행정 시스템을 본받아 내삼원을 만들어 내정을 강화하고 6부와 도찰원, 이번원을 설립하는등 정부 체제를 개혁하여 그럴듯한 중앙 정부의 구색을 갖추었고 새로운 인재 발굴을 위해 과거제도 도입하여 수백명의 관료를 등용했으며 또한 누르하치가 사로잡아 노예로 만들었던 전직 관료나 지식인들을 수소문해 찾은 200여명을 면죄 및 복권시켜 관직을 내렸다. 또한 한족 신하의 조언을 받아들여 후금이 아닌 '청나라'로 국명을 바꾸며 국가로서 고유한 정체성을 갖추었다.
한족에 대한 예우와는 정반대로 동족들, 정확히는 누르하치 재위 시절 중용되었던 만주족 출신 권력자들에 대해서는 오히려 냉혹한 편이었다. 이는 누르하치와 홍타이지가 보는 황제의 입지가 정반대였기 때문인데, 누르하치는 본디 8개의 가문과 4명의 버일러, 하나의 지도자가 서로 크게 차이나지 않는 입지를 가지며 조화롭게 통치해나가는 것이었으나 권력기반을 굳힌 홍타이지 입장에선 오히려 자신의 권위를 넘볼만한 존재를 냅둘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는 2대 버일러인 아이신기오로 아민과 3대 버일러인 아이신기오로 망구르타이를 숙청하고 대버일러이자 자신의 후견인이기도 했던 아이신기오로 다이샨마저 죽이지만 않았을 뿐 그의 권력을 상당히 축소시키는데 성공하면서 이를 기점으로 팔기회의에서도 더이상 특정 기(旗)의 지도자 따위가 아니라 최종 결정을 내리는 최종 결정권자가 되었다. 즉 이를 기점으로 홍타이지는 정황기와 양황기의 힘을 등에 업은 청나라의 명실상부한 최고 통수권자 자리에 오른 것이며 청나라가 명나라 정복 후 빠르게 중앙집권 체제를 갖출 수 있는 반석을 만들어낸 것이다.
3.1.2. 몽골 복속
릭단 칸과 홍타이지의 전쟁 | 대원전국옥새[14] |
누르하치 재위 시절 후금은 국경을 맞댄 여러 나라와 알력다툼을 벌였는데, 내몽골 일대를 차지한 차하르 몽골또한 그중 하나였다. 사르후 전투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종종 국경지대에서 분쟁은 있을지언정 서로 큰 다툼을 벌이는건 기피했으나 사르후 전투에서 대패한 명나라가 다급해져 차하르 몽골에 혜택을 주는 대신 지원을 요청하면서 이때까지 서로 꺼려오던 전면전이 결국 발발한 것이다.
내몽골의 링단 칸은 구원 요청을 받아들여 내륙 할하족과 코르친족 5개 부에서 1만 명의 대군을 차출해 철령으로 보냈으나, 이들이 도착했을 땐 이미 후금에 의해 철령이 함락당한 이후였고, 몽골의 지원군마저 사기가 충천한 후금 군대에 의해 역으로 격파당하면서 손해만 본 채 다시 내몽골로 후퇴한다.
누르하치의 뒤를 이어 즉위한 홍타이지 또한 몽골 제국에 의해 멸망한 금나라의 전철을 밟지않기 위해 명나라보다 내몽골을 먼저 평정하기로 결정했다. 링단 칸의 세력을 약화시키고자 다구르, 어웡키 등 다양한 몽골 부족들을 결혼 동맹이나 군사 동맹으로 포섭하거나 정복했고, 양면전술을 쓰며 링단 칸을 몽골 내에서 고립시켜 나갔다. 특히 여기엔 과거 링단 칸이 몽골인들 사이에서 주류인 황모파가 아닌 적모파로 개종해 반감이 컸던 것도 큰 영향을 끼쳤다. 링단 칸도 후금의 침입을 막기 위해 분전했으나 이미 전세는 홍타이지에게 기울어진 뒤였고, 결국 끝없이 도망을 거듭하다 1634년 간쑤성에서 병사하고 그렇게 수뇌가 죽어 와해된 차하르 몽골을 복속시킨다.
홍타이지는 링단 칸의 아들인 에제이(어저이 콩고르)를 부마로 삼고 그 과정에서 획득한 대원 전국옥새와 조선 정복 그리고 몽골 통합을 구실로[15] 1636년 4월 11일, 홍타이지는 스스로 '관온인성황제'[16]라 칭제하고 국호를 대원을 계승한 다이칭 구룬(Daicing Gurun, 大淸)을 변경한다.[17] 또한 기존의 주션(Jušen: 여진)이란 족명을 금지하고 만주족으로, 동북삼성 일대를 만주라고 새로 이름 붙인 것도 이 때다.
3.1.3. 조선 복속
그렇게 명 정벌의 큰 걸림돌인 몽골을 발빠르게 정리하는데 성공했으나, 아직 청나라에겐 조선이라는 또다른 걸림돌이 남아있었다. 비록 땅은 작을지언정 얼마 전 왜란을 거치며 군사적으로 강성해진데다가 명나라에 대한 충성심도 높았기에[18] 청나라가 명나라와 전면전을 개시하면 조선이 청나라의 배후를 칠게 뻔했다. 이때문에 홍타이지는 내몽골 정리를 마치고 얼마 되지 않은 1627년 아이신기오로 아민에게 3만 대군을 보내 조선을 침공시키도록 하며 후방 안정을 도모한다. 이것이 바로 정묘호란이다.사실 정묘호란 시점까지만 해도 후금 입장에서도 썩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링딘 칸을 축출하고 내몽골에 영향력을 뻗치기 시작했다지만 아직 완전히 내몽골을 먹어치우진 못했고, 당시엔 아직 자신의 권위를 넘볼 여지가 있는 버일러들을 일소하지도 못했으며 국가 내에서도 큰 기근이 들기도 했다. 즉 나라의 대외로 우환이 남아있었던 것. 그러나 조선은 그 이상으로 인조반정으로 인한 정치적 혼란과 이괄의 난으로 인한 광해군을 거쳐 형성된 북방 방어선의 무력화등으로 약해진 상태라 이괄군의 잔당등을 통해 이런 소문을 접한 홍타이지는 나름대로 무리해서라도 조선을 찔러볼 수 밖에 없었고, 여러 탐탁찮은 부분을 남기긴 했으나[19] 결과적으로 후금에 유리하게 강화를 체결하는데 성공하며 형제관계를 맺으면서 한시름을 덜게 된다.
당장 한시름 덜어낸 후금은 가도에 위치한 모문룡을 정리하고 본격적으로 명나라와 전면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또한 불안 요소가 남아있던 조선을 상대로 635년 12월부터 '봉서(奉書)'와 '치서(致書)' 문제를 트집잡고 공경을 요구했으며, 1636년 2월에는 자신의 존호례에 조선국왕의 동참을 요구하며 군신관계 수립을 추진했고 인조 정권이 이에 반발하고 심지어 화친이 단절되어 전쟁에 대비할 것을 알리는 인조의 교서가 청 측에 입수되고 뿐만 아니라 4월 존호례에서 조선 사신들이 고두를 거부하여 양국 관계는 완전히 파탄났다. 홍타이지는 12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으로 쳐들어왔으며, 결국 삼전도에서 조선 국왕의 항례를 받아 조선을 속국으로 만들고 명과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시키는 데에 성공했다.[20]
이후 청나라와 명나라는 본격적으로 양국의 국운을 건 전쟁을 계속한다. 명청교체기 혹은 명청전쟁이라 불리는 치열한 전쟁에서 청나라는 대승을 거두고 명나라를 연전연패의 길로 몰아 넣는다.
4. 명청교체기
자세한 내용은 명청교체기 문서 참고하십시오.산해관 | 숭정제의 자살 |
후금은 1621년에 요동을, 1636년에 막남의 칼카 5부와 차하르 등에 대한 지배체제를 확립했다. 심양을 성경(聖景)으로 개칭하고 여진족을 만주족으로, 국호를 후금에서 청나라로 바꾸고 중국식으로 칭제한 것도 1636년의 일이다. 청나라는 파죽지세로 세력을 확장해나갔다. 그 와중 명나라 최후의 명장 원숭환이 방비하는 영원성은 함락시키지 못해 불가피하게 영원성을 우회해 베이징을 포위하기도 했다.[21] 수도가 포위되자 기겁한 명나라는 급하게 청나라와 화의를 맺었으며, 심지어 얼마 안가 숭정제가 의심병이 도져 원숭환을 처형시키면서 청에 대항할 마지막 명장마저도 덧없이 사라지고 만다. 청나라는 1642년에 송산 전투에서 승리하여 만리장성 동북 지역을 석권했다.[22] 결국 청나라는 산해관 이북 모든 명나라 영토를 빼앗는 데 성공해 산해관에 진입하기 위한 준비에 돌입하게 된다.
이 시점까지 청나라가 명나라를 상대로 대부분 승전을 거두긴 했지만, 결코 명나라를 멸망 및 점령시킬 수 있을 정도의 국력은 아니었다. 군사력이 우월하다할지언정 청나라의 군사 기반은 대부분 기병이었고 오래전부터 서양과 교류를 해오며 화기를 발전시켰던 명나라와 달리 화기또한 부실했기에 공성전에는 상대적으로 취약했다. 압도적인 군사의 양과 질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영원성에서 고배를 들이켰던 것도 이런 이유였다. 또한 인구 수로만 보자면 청나라가 명나라보다 압도적으로 적었기에 군사적으로 점령할지언정 내부적으로 민심을 완전히 가라앉히지도 못했다.
그러나 이런 불안요소마저 시간이 갈수록 퇴색되었는데, 명나라는 수십년간 암군이 연이어 재위에 오른데다가 대기근과 자연재해마저 겹쳐 내외부의 우환에 시달리고 있었고 거기에 청군의 약탈까지 겹치며 국력이 그 크기에 비해 유명무실했다. 그에 비해 청나라는 적극적으로 부패했거나 포로로 잡힌 명 관료들을 끌어들이며 명나라의 기술력과 문화, 병졸들을 흡수하면서 명나라와의 간극을 좁혔다.[23]
명나라가 암군들의[24]과 천재(天災)의 연발로 휘청거릴때도 장거정등의 명관료들이 필사적으로 개혁을 이끌어나가며 명나라의 기틀을 유지시키고 있었으나 이미 몇명의 관료들로 상황을 역전시키기엔 명나라는 썩을대로 썩은지 오래였다. 당시 상황이 얼마나 나빴냐면 쌀값이 재해전에 비해 7배나 올랐으며 이 가격이 7년 내내 큰 차이 없이 유지되는등 경제적으로 무너졌으며[25] 황제들의 폭정으로 황실 재정도 파탄나 실업자와 반란이 속출했다. 명나라 역사를 통틀어 보자면 극후반 들어 순식간에 국력이 반토막이 났으니 수치로만 보더라도 아찔함을 느낄 정도.
화룡점정으로 명나라를 몰락시킨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청나라가 아닌 한족 반란군인 이자성이 벌인 이자성의 난이었다. 청나라와 자잘한 반란을 막는데 국방력을 대부분 할당했던 명나라는 이자성이 일으킨 난에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간단히 베이징을 함락당했고 숭정제마저 못 버티고 자살하면서 권력의 공백이 생기자 이자성이 냅다 베이징에 입성해 순나라의 황제를 참칭하게 되고, 끝까지 산해관에서 청군을 틀어막던 오삼계는 이 소식을 접하고 냅다 관문을 열어재끼며 도르곤과 혈맹을 맺으면서 청군에 투항하게 된다. 이렇게 형성된 명청 연합군은 오삼계의 지휘하에 산해관 전투에서 이자성의 반란군을 대파, 잔당이 시안으로 도망가고 비어버린 베이징에 무혈입성을 하게 된다. 같은 해 순치제[26]는 도르곤의 제안을 받아들여 베이징을 도읍으로 삼고 천지신명에게 제를 올려 전 중화의 천자임을 선포하게 된다.
한편 당시 명나라에서는 성능이 개선된 신형 화기가 개발되고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철심동체 주조법과 니형 주조법, 실랍법을 이용해 무게와 비용을 줄이고 내구도가 향상되어 더 많이 쏠 수 있게 된 정료 대장군으로 철심동체 주조법의 원리는 남북 전쟁 때 미군보다도 200년 빠른 것이었다.
하지만 명군과 후금군의 전투를 생각해보면 상당수가 총병일 명군을 상대로 하는 후금군은 최대 사정거리에서 깔짝깔짝 거리다가 기회가 생기면 기동력을 이용해서 측면 공격하거나 여차하면 돌격 후 근접전을 벌였을 테니, 내구력을 늘린 신형 화기라는 건 크게 의미가 없다. 명군에게 직접적인 도움이 되려면 후장식 소총처럼 연사력이 크게 증가하거나 아니면 대기병 전투에 유리한 대형 총검 같은 것들이 발명되었어야 했다.
더구나 이자성 등이 명나라를 개판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저런 신형 무기가 명군에 보급되어 전투력이 조금이라도 상승하기 전에 명나라가 이미 구제불능인터라 청나라는 명나라를 무너뜨리는 것에 성공했다. 특히 청의 북경 점령 과정을 보면 천운이라는 단어가 떠오를 정도다. 실제로 '하늘의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아' 같은 말들이 많이 있고 당시 상황도 그래서 로또로 성공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때를 기다리며 참고 또 참은 것도 능력은 능력이다.#
4.1. 순치제의 천자 공포
순치제 | 1644년 11월의 세력 지도 |
한편 명나라의 황족들은 이 와중에도 정신 못 차리고 갈래갈래 나뉘어 서로 황제를 칭했는데, 이를 남명 정권이라고 한다. 허나 남명은 타고난 무능함 때문에 진격해오는 청나라 군대에 맞서 싸우기는커녕 도망이나 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은 난징에서 칭제한 홍광제 정권이었다. 그러나 홍광제의 남명 조정 역시 당파 싸움과 환관의 난립으로 개판이나 다름없었다. 1645년 도도가 양저우를 공격했고, 홍광제는 도망치다가 우후시에서 사로잡혀 베이징으로 압송되어 처형당했다.
홍광제가 교살당해 죽자 2대 융무제, 3대 영력제 등이 난립하며 등장했지만 제대로 된 정권을 세우는 데에는 실패하고 모조리 청나라 군대에 쓸려나갔다. 이정국, 정성공 등 여러 명나라 장수들이 싸웠으나 이미 망해버린 나라를 다시 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27] 얼마 지나지 않은 1661년 청나라가 윈난성을 침공, 영력제는 미얀마로 도망쳤지만 오삼계가 미얀마를 협박해 영력제를 끌고와 죽여버렸다.[28] 이로써 청나라는 중화의 유일한 황제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청 조정은 먼 강남 지방은 관리하기도 어려웠기에 큰 공을 세운 오삼계, 공중명, 상가희에게 각각 평서왕, 정남왕, 평남왕 등 번왕직을 내리고 이들에게 관할권을 맡겼다.
청나라가 일단 만주족이 주체가 되어 이루어진 나라이며, 초기에 들어왔을 땐 격렬한 저항을 받았기 때문에 특히 남명 정권이 있던 강남 쪽에서는 사람이 나날이 잔뜩 죽어 나갔다. 지금의 양저우(揚州)나 쑤저우(蘇州) 등이 있는 지방에서는 수십만 단위로 대학살이 저질러졌다고 한다.# 특히 만주족이 강요한 변발은 흔히 중국 무협 영화에 나오는 뒷머리만 남기고 앞머리만 미는 그런 변발이 아니고 뒤통수에 동전 크기만 한 부분만 제외하고 모조리 밀어버리는 일명 '금전서미'라 불리는 변발이다.[29] 이 변발은 19세기 말 조선의 단발령과는 비교도 못 할 정도로 한족의 격렬한 저항을 불러 일으켰다. 원나라의 몽골인들도 변발을 했지만 만주족이 강요한 금전서미는 다른 이민족계 왕조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압적이라 한족에게는 큰 수치였고 컬쳐 쇼크 그 자체였다.[30] 그리고 청나라는 변발을 거부하는 한족의 저항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면서 수많은 한인들이 학살당하여 강남은 말 그대로 피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4.2. 융화 정책 시도
이 모든 저항을 짓밟은 이후 순치제는 간신히 굴복한 한족에게 융화 정책[31]을 펴 한족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는 법령 등을 발표하여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데 주력했으며, 그 뒤에도 저항이 있긴 했는데 훌륭한 황제들이 나와 당근과 채찍으로 차례차례 강온 양면술을 써가며 통치해나갔다. 다만 황비홍 머리로 불리는 이 변발만은 철저히 지키게 했고 청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이는 한족을 통치하기 위해 그들의 습관을 인정해줄 필요는 있지만 거기에 묻혀서 자신들의 존재가 사라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다만 초기에는 장난에서 수만 명을 죽이고 장인시에서 대략 십만 명을 학살하는 등의 잔혹한 수단으로 강요했으나 나중에는 딱히 적극적으로 안 죽이고 혼란한 정세와 전쟁으로 그렇게까지 신경도 쓰지 않았는데, 여러 이유로 자발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나왔다.[32][33] 의복 역시 관리들에게는 만주족 의복을 강요하고 신민들에게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나중에 가자 신민들이 죄다 만주족의 의복을 입고 다녔다. 그러나 전족은 홍타이지, 순치제, 강희제 등이 적극적으로 전족을 제거하려고 해도 변화시키지 못하고 청나라 시기에 다른 소수민족들까지 전족을 채택했다. 청나라 황제들은 만주족의 정체성과 문화를 중시하여 전족을 한 사람들을 무분별하게 죽이기도 했으나 전족만큼은 오히려 만주족에게까지 유행하기도 했다.특히 청나라가 한족문화를 받아들이긴 했어도 어디까지나 통치에 필요하기 때문이지, 만한차별정책이 폐지된 것은 아니었다. 입관 후 하급 행정구역인 부나 현의 수장은 한족에 비해 지나치게 적은 인구 때문에 한족이 대다수를 차지했으나, 총독과 순무를 비롯한 고위 지방관들은 명나라 때의 총독, 순무가 누리던 권한을 팔기에서 파견된 주방팔기의 장군에게 상당부분 이양해야 했고, 그나마도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는 요충지의 총독, 순무는 기인 중에서만 보임되었다.
5. 전성기: 강건성세
자세한 내용은 강건성세 문서 참고하십시오.5.1. 강희제 : 천고일제(千古一帝)
강희제의 남순 | 강희제 |
강희제는 삼번의 난을 진압한 이후에도 수많은 외부 세력들과 싸우며 불안정한 청나라의 입지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티베트와 준가르가 청나라를 주시하고 있었고, 루스 차르국도 청나라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던 상황이었으며, 내부적으로는 간쑤성과 산시성의 태수 왕부지, 차하르부 등이 베이징 교외에서 반란을 일으키는 사건이 터지기도 했다. 강희제는 침착하게 대응해 왕부지를 잡아죽이고 차하르의 반란을 진압했다. 1683년에는 타이완으로 도망가 끊임없이 저항하던 동녕 왕국(명정)을 펑후해전에서 승리하여 멸망시키는 데에 성공했으며, 명나라 정성공의 손자인 정극상에게는 해징공의 작위를 내려 팔기에 편입하는 노련한 유화책을 선보였다.[37]
북쪽 국경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 야크샤 전투 등 사사건건 아무르강 유역에서 충돌하던 러시아와는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어 국경을 확장했고, 이후 약 200여 년간 러시아와의 국경 분쟁을 차단했다.[38] 러시아와 평화를 맺은 청나라는 이후 외몽골 지역에 3번씩이나 친정해 그곳을 점거하고 있던 준가르 칸국을 몰아내고 영토를 확장했다. 이후 준가르 칸국의 잔존 세력들이 티베트 지역으로 도망가 달라이 라마의 힘을 빌어 청나라에 대항하려 하자, 심지어 달라이 라마를 갈아치우는 초강수를 두며 아예 티베트까지 청나라의 영향권으로 넣어버렸다. 강희제 시기 청나라의 영향권은 북동쪽으로 스타노보이 산맥, 서쪽으로는 발하슈호, 동쪽으로는 오호츠크해와 사할린에 이르며 명실상부한 동방 최고의 강대국으로 군림했다.
중국 역사상 최고의 성군으로 꼽히는 강희제는 백성들의 삶 개선에 지대한 관심을 쏟았다. 집권 직후부터 한족에 대한 가혹한 대우를 완화하고 황무지 개간을 돕기 위해 면세기간을 늘렸으며 부정부패 혁파, 관정 개선에 온 힘을 기울였다. 강희제는 '사람을 늘리되 세금은 늘리지 않는다'는 정책 하에 지세를 고정시켜버렸고, 외래 농작물을 도입해 청나라의 인구는 금세 폭증하여 1억을 가볍게 넘겼다. 또한 즉위 직후 진푸와 유성룡 등 능력있는 인물들을 기용해 황하를 치수토록 하는 대업적을 남겼다. 뿐만 아니라 6차례에 걸쳐 남방을 순회하며 백성들의 형편을 직접 살피고 하천공사를 감독했다. 남서방 창설처럼 학식 있는 한족 관료 등용은 물론, 저 멀리 유럽 선교사들마저도 능력만 있다면 누구든지 중용하기도 했다. 강희제는 무려 61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재위하며 성공적인 외치를 이룩하는 한편 내적으로는 명청교체기의 피해를 완전히 복구하는 등[39] 청나라의 기틀을 다잡았다.[40]
5.2. 옹정제 : 일 중독 개혁군주
옹정제 | 옹화궁 |
옹정제는 타고난 일 중독자로, 하루에 4시간만 자면서 나랏일에 모든 열정을 쏟아부었다. 부친 강희제가 상대적으로 외치에서 업적을 남겼다면, 옹정제는 내정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옹정제는 강희제 말기 심해지던 부정부패와 느슨해진 공직기강을 바로잡는데 전력을 다하여 청나라가 향후 200년을 더 버틸 여력을 만들었다. 모선귀공제를 실시해 관리들이 받는 뇌물을 양지화, 중앙에서 뇌물의 흐름을 철저히 관리, 감시했으며 국고를 횡령한 관리는 파직한 뒤 끝까지 쫒아가 돈을 받아냈다. 또한 밀접 제도를 만들어 현장의 목소리를 직접 들으며 황제의 뜻을 지방에 직통으로 전달하였다. 청나라라는 거대한 기계를 황제 혼자서 움직였던 셈이다.
강희제 말기의 계승 다툼으로 흔들리던 황권을 공고화하기 위한 일환으로 군기처를 설치하여 6부를 거치지 않고도 바로 황제의 의중을 시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개토귀류(改土歸流)라는 정책을 실시했는데, 이는 윈난, 구이저우, 광둥, 광시, 쓰촨, 후난, 후베이성의 토사(土士)들의 자치권을 빼앗고 대신 주와 현을 설치해 중앙정부의 개입력을 높이는 정책이었다. 기존에는 지방 유력자들이 수도에서 멀다는 것을 핑계로 알아서 자치를 시행하고 있었는데, 이를 아니꼽게 보던 옹정제가 자치권을 박탈한 뒤 중앙에서 파견하는 관리들로 대체한 것.[42] 무엇보다 지정은제를 확립해 정세를 지세와 통합, 빈곤층의 조세 부담을 감경하는 동시에 부유한 지주층의 부담을 늘렸다. 당연히 기득권층의 반발이 어마어마했지만 옹정제는 심지어 반대파의 관직 진출을 막아버리는 극단적인 강경책까지 써가며 이를 관철했다. 이 덕에 청나라의 인구는 폭증했고 도광제 시기에는 무려 4억 명을 넘겼다.
또한 다두 왕국의 마지막 후신들을 한족의 군사작전을 통해 그대로 토벌하여 대만 원주민들의 부족 동맹 연합 왕국이었던 다두 왕국을 멸망시키고[43] 그곳의 영토를 청나라의 관할로 삼으며 타이완 섬을 청나라의 복건성 영토로 편입하여 타이난을 중심으로 타이완 섬을 통치했다.
옹정제는 당시 극도로 정교한 동군연합 체제를 확실하게 굳혔고, 이로 인해 청나라의 황제는 한족의 천자이자 몽골의 대칸, 티베트의 법륜성왕이자 이슬람의 보호자라는 전무후무한 칭호를 한꺼번에 거머쥐게 되었다. 이같은 업적 덕분에 예전에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라는 평이 많았지만, 현대에 들어서 재평가 되어 강희제 말기 조금씩 흔들리던 제국을 엄격하게 다잡아 청나라의 전성기가 오래도록 이어질 수 있게 한 황제라는 평가가 주류이다. 옹정제는 이처럼 하루하루 일만 하다 결국 재위한 지 13년 만인 1735년 58세의 일기에 과로로 숨졌다. 그의 뒤를 이어 강희제의 손자이자 옹정제의 아들이었던 홍력이 황위에 올랐는데, 이 자가 바로 청나라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건륭제이다.
5.3. 건륭제 : 화려한 절정과 쇠락의 시작
건륭제 | 청나라의 최대 강역 |
건륭제의 치세는 조부였던 강희제의 자비로움을 앞세운 치세와 친부인 옹정제의 엄격하고 냉정한 통치 방식의 중간 즈음으로 요약된다. 어느 쪽이든 건륭제또한 재위 초기에는 둘의 뒤를 이어 명군으로서 자질을 여실히 드러냈기에 청나라 인구는 극에 달했을때 3억에 다달라 세계 인구의 3분의 1을 일개 국가가 관리하던 초대규모 인구대국이었다. 여러 명군들이 발전시켜온 국력은 건륭제 시기에 그 정점을 찍었으며 당시 한창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치던 프랑스, 영국, 스페인을 넘을 정도였다.
건륭제의 치세는 청나라가 대외적으로 그 절정을 맞이하던 때였다. 건륭제는 즉위 후 약 20여년 뒤인 1757년 티베트, 신장 지역에 대대적인 토벌군을 이끌고 친정하여 기존에 해당 토지에 자리잡은 준가르를 민족 멸절 수준으로 쓸어버리면서 톈산북로를 차지하고 서부 지역에서의 통치권을 공고히 했다. 1759년에는 대소화주의 난을 진압한 뒤 톈산남로까지 장악했으며, 1762년에는 일리장군을 세워 발하슈호까지 이르는 신장 지방의 거대한 영토를 관할토록 했다.[44] 뿐만 아니라 구이저우성에서 일어난 묘족의 난, 중국 남부 쓰촨성 등지에서 일어난 반란들[45]도 깔끔하게 쓸어버리면서 내란의 싹을 잘라버렸다.
이렇게 위험 세력을 철저히 찍어누르는 한편, 그렇지 않은 나라 또는 압도하지 못한 나라와 외교를 맺는데 적극적으로 나서며 당근과 채찍 전술을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었다. 당시 주로 동남아나 서남쪽 국가들과 이런 외교관계를 맺었으며 당시 4번이나 침공하다가 4번 모두 점령에 실패한 미얀마의 꼰바웅 왕조[46]를 위시해 1784년에 태국의 짜끄리 왕조, 1788년에 꼰바웅 왕조, 그 이후에도 베트남의 후 레 왕조와 떠이선 왕조[47]등과 사절을 주고받고 조공을 받았으며 재위 말년인 1792년에는 네팔의 구르카 왕국이 티베트를 침략하자, 후한 답례품을 주고선 침략을 막은 뒤 부탄 왕국, 시킴 등과 형식적인 군신 관계를 맺어 서남 국경을 안정시켰다.
건륭제는 외치만이 아니라 내치에도 크게 신경을 썼으며 이를 증명하듯 조세 제도를 개혁하고 사고전서[48]를 발행하며 문학을 집대성하는등 정치와 문화등 다방면으로 신경을 썼다. 특히 문학에 관심이 많던 건륭제는 '속삼통(續三通)', '황조삼통(皇朝三通)', '대청회전(大清會典)' 등의 사서를 편찬토록 했으며 홍루몽, 요재지이, 유림외사 같은 중국 최고의 소설들이 쏟아져나온 것도 이 때다. 그 외에도 고금도서집성 등 여러 기념비적인 저작을 남겼다. 그런 한편 정권 유지도 중시했기에 아이러니하게도 청나라의 문자의 옥은 명나라 시절에 비해서 압도적일 정도로 심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당장 청나라가 지정한 금서(禁書)의 양이 명나라가 지정한 것에 비해 12.6배에 이르렀을 정도였다. 그만큼 사상 통제를 엄청나게 강력하게 시행했다는 이야기.
건륭제 | 니오후루 허션 | 매카트니 경을 알현하는 황제 |
청나라는 이 때 중국 역사상 가장 긴 태평성대를 맞으며 경제적으로 전세계에서 독보적인 1등을 차지하여 세계 경제의 중심지로 변했고, 문화적으로도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는데, 무려 130여 년에 달하는 이 청나라의 전성기를 '강건성세'라고 부른다. 이 시기에 청나라는 심지어 현재의 중국보다도 더 넓은 영토를 자랑했으며, 워낙 풍요로운 문물 탓에 전세계의 상인들이 청나라로 몰려 교역을 하는 통에 세계의 은이 청나라로 빨려들어왔다.[49] 당시 청나라는 세계 GDP의 32.9%를 홀로 독차지했으며 은의 블랙홀이라고 불릴 정도로 번영을 누렸다.
이렇듯 건륭제의 치세는 청나라의 전성기가 본격적으로 개화한 시기로 평가되나, 아이러니하게도 청나라 몰락의 시초가 된 것 또한 건륭제 재위 기간이었다.
건륭제 말년에 영국의 조지 매카트니 경이 접견을 청하며 찾아오면서 태국, 베트남등 아시아 지역만이 아닌 서방의 유럽과도 교류가 확대되기 시작했는데, 전성기를 이끈 자부심때문인지 건륭제는 매카트니 경에게 매우 오만한 태도를 보이며 그를 국외 추방했고, 이는 매카트니가 앙심을 품고 본국에 청나라를 매우 강도깊게 비난하는 보고서를 쓰게 되고[50] 결과적으로 아편전쟁으로 이어지는 단초를 제공했다.
외교는 물론 내치에 있어서도 과거의 영광에 비해 빛바랜 모습을 많이 보였는데, 기본적으로 나라에 외환이 없이 치세가 길어지면서 부정부패가 심해지고 군대의 기강이 해이해졌음에도 이를 관리하긴 커녕 오히려 간신 니오후루 허션에게 푹 빠져 그에게 어마어마한 권력을 부여하고 강남 지역에 6번이나 대규모 순행을 다니는등 청나라의 문제점을 바로잡긴 커녕 오히려 심화시키는데 앞장섰다. 허션은 황제의 총애를 등에 업고 온갖 비리를 저질렀고[51], 청나라는 겉으로는 세계 최강대국이지만 속으로는 깊숙히 썩어들어갔다. 입관한지 100년도 더 지나버리자 팔기군과 녹영은 방탕하고 썩어빠진 군대로 타락했다. 건륭제의 실책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건륭제는 청나라에 입맛에 맞지 않는 서적들과 학문을 탄압하는 정책, 즉 문자의 옥을 대대적으로 펼쳤다. 물론 강희제와 옹정제도 어느 정도 학문 탄압을 하기는 했지만, 단순하게 청나라의 실정을 지적하는 목소리나 개혁 요구 등까지 모두 없애버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건륭제는 그저 청나라 중앙정부의 뜻과 맞지 않다는 이유로 학자들을 탄압했고, 이는 결국 중국 학문의 소실과 퇴색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 때문에 후세의 건륭제에 대한 평가는 꽤 엇갈리는데, 청의 최전성기를 이끈 명군이라는 평도 있는 반면 부정부패를 심화시키고 나라가 썩어들어가는 것을 보지못한 암군이라는 평도 있다. 둘중 한 쪽이 틀리다기보다는 '황제 한 명의 재위기간'에서 이정도로 극단적으로 치세와 망조가 든 적이 없었기 때문에 평가가 나뉘게 된 것.
그래도 본인의 젊은 시절까지 쌓아온 기반 덕택에 60년에 달하는 그의 치세동안[52] 망조가 두드러지진 않았으나, 그의 후계자인 가경제가 재위에 오른 이후 곪아있던 병폐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이러나저러나 건륭제 시기가 청나라의 최전성기였던 것만은 분명하다.
6. 불안정과 쇠퇴
6.1. 제1차 아편전쟁
자세한 내용은 제1차 아편전쟁 문서 참고하십시오.임칙서 | 몰수한 아편을 소각하는 임칙서 |
건륭제는 재위에 오른지 60년 지난 85세 시기에 자신의 15남 가경제에게 양위하였으나, 대신 본인은 상황 자리에 오르며 여전히 실권을 쥐고 있었다.[53] 연이은 실책으로 망조가 들기 시작한 건륭제의 말기 이후 가경제의 재위 기간에서 내부의 병폐가 본격적으로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지방의 관료들의 부정부패는 날이 갈수록 심해지며 멈출줄 몰랐고, 이를 억제해야했던 조정마저 파벌을 이루며 서로 싸우거나 매관매직등을 통해 사익을 다투기 급급했다. 군대도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장비는 노후화되고 군법은 느슨해졌으며 병사들도 해이해져갔고 필연적으로 국고가 비어가기 시작하자 이를 메꾸겠답시고 온갖 세금을 쥐어짜내며 백성들을 박해한지라 백련종, 천리종, 자한기르 호자의 난 등 여러 봉기가 들끓을 정도로 민심이 흉흉했다. 자연마저도 등을 돌렸다는 듯이 1815년에선 현재 인도네시아에 위치한 탐보라 화산이 폭발하였고 이로 인해 북반구에 극심한 기강 이변을 초래하며 운남대기근이 발생했다. 또한 건륭제 말기에 외교관으로 찾아온 매카트니 경이 일방적으로 홀대당한 건으로 앙심을 품은 영국은 이를 빌미로 청나라와의 친교는 논외로 한 채 청나라에 아편을 밀수하며 돈을 빨아들이는 한편 청나라 전반을 마약굴로 만들어갔다.
그런 악재가 겹쳐가는 와중 가경제가 1820년에 승하하며 도광제가 재위에 올랐다. 도광제는 여지껏 선제가 외면해왔던 아편 건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1839년 흠차대신 임칙서를 광저우로 파견해 아편을 엄격히 단속시켜라는 명을 내린다. 광저우에 도착한 임칙서는 양광총독 등녕진(鄧寧進), 광둥 수군 제독 관천발(關泉發) 등과 힘을 합쳐 해안 방비를 정비하고 아편 상인들을 단속했다. 관리들 주도로 벌어지던 아편 판매가 금지당했고, 시민들 역시 아편 피우기가 금지되었으며 모든 아편 흡연 도구들을 기간 내에 반납하도록 조치했다. 또한 3월 16일까지 모든 외국 상인들에게 아편을 강제로 내놓으라고 엄포를 놓는 등의 극약처방을 내렸다.[54] 허나 영국 상인들은 임칙서의 명령이 중국 관리들이 으레 하던 뇌물 뜯기용 협박이라 여겼고, 기일이 되어도 아편 상자를 청 당국에 제출하지 않았다.
하지만 임칙서는 장난이 아니었다. 외국 상인들이 지시를 거부하자 그는 장병들에게 계류지를 둘러싸라 명한 뒤, 외국인과 접촉하는 자는 모두 반역도라 선포하고 350명의 상인들을 6주간 억류했다. 결국 외국 상인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임칙서에게 아편 21,306상자를 넘겨줬다. 임칙서는 황제에게 조서를 올린 뒤 사람 3명 깊이의 구덩이를 파 6월 3일부터 아편을 불태우거나 땅에 묻어버리기 시작했다. 기록에 따르면 쉬지않고 이렇게 메우거나 태우기를 반복했음에도 양이 너무 많아 무려 3주가 지난 6월 25일에서야 처리가 끝났다고 할 정도였다. 이게 그 유명한 임칙서의 호문 아편 소각 사건으로 서양은 물론 중국에까지 어마어마한 충격을 몰고왔다.
아편을 중국에 팔아대며 막대한 이익을 내던 영국은 이 사건을 빌미로 1840년 중국에 전쟁을 선포했다.[55] 이것이 바로 제1차 아편전쟁이다. 영국 해군소장 조지 엘리엇이 이끄는 군대가 광저우 해안가로 파병됐다. 그러나 광저우의 방비가 워낙 철저해 대신 북상해 저장성 저우산시 딩하이를 7월 6일 함락했다. 허나 개전 때까지 정작 도광제와 조정 대신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 상태였고, 영국군이 어디에 와있는지조차도 몰랐다. 반면 영국은 산업혁명으로 미친듯이 발전하고 있었고 강력한 함대, 화포와 장비를 갖추고 있었으나 청군은 무능한 지휘부에 소극적인 대응으로 일관했다. 영국 함대가 톈진 앞바다에까지 이르자 황제는 전쟁 책임을 물어[56] 임칙서를 파면한 뒤 직예총독 기선에게 협상을 시켰으나, 영국이 홍콩 할양이라는 조건을 요구하자 결국 협상은 완전히 파토나버리고야 만다.[57]
1843년 영국 함대에게 격침당하는 청나라 수군 |
도광제는 기선을 직위해제한 뒤 혁산, 양방 등 장수들을 광둥성으로 보내 영국군과 맞서도록 했다. 하지만 조지 엘리엇이 1841년 2월 24일 호문 요새를 공격했고, 광둥 해군 제독 관천발이 강력히 저항했으나 결국 패퇴했고 호문 요새는 함락당했다. 불과 4~5일 만에 광저우 일대의 모든 요충지가 영국에게 함락당했다. 패배가 명확해지자 혁산은 광주화약(廣州和約)을 맺어 광저우에서 군대를 철수하고 광저우 상인들더러 영국에게 무려 은 6백만 냥을 물어주도록 했다. 은을 받아챙긴 영국은 일단 광저우에서 철수했지만, 반영 감정은 조정도 통제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치솟아 삼원리 반영사변이 일어나는 등 영국과 청나라 간 양국 감정은 감당불가한 수준으로 악화일로를 걸었다.
혁산은 자신의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 허위로 무공을 조작하거나 황제에게 거짓 승리를 보고하는 엄청난 병크를 저질렀다. 게다가 영국이 5월에 지난 1월 27일에 임시로 맺었던 천비 가조약의 인준을 거부하며[58] 다시 군대를 파견했다. 1841년 8월 21일, 전함 10척, 선박 4척, 수송선 22척으로 구성된 함대가 중국 남부를 초토화하기 시작했다. 청나라 군대는 끊임없이 연패하며 후퇴했고, 1842년 8월에는 제2의 수도 난징 코앞까지 당도해 난징이 함락되기 직전에 이르자 결국 1842년 8월 29일 난징조약을 체결하며 전쟁을 끝맺었다.
청나라는 억지로 난징의 경해사에서 중국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불평등 조약인 난징조약을 맺어야만 했다. 청 조정은 영국의 요구 대부분을 그대로 수용했다. 홍콩 섬을 영국에 할양했고, 상하이, 광저우, 푸저우, 샤먼, 닝보 5개 항구를 개항해 영국인들이 무역통상거주를 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 영국이 이와 같은 권리를 얻어내자 다른 서구 열강들도 개떼같이 달려들어 비슷한 권리를 얻어갔다. 1844년 7월 3일에는 미국과 망하조약을 체결했고, 10월에는 프랑스와는 황푸조약을 체결했으며 영사 관할권과 선교권을 내어줬다. 아편 전쟁은 청나라라는 거대한 제국이 이미 늙어 이빨빠진 호랑이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폭로한 사건으로, 향후 100년간 지속될 암울한 시대의 서막이었다.[59]
6.2. 태평천국 운동과 제2차 아편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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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전 | 태평천국 운동 |
실제로 함풍제 본인이 재위에 오른지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1851년 염군의 난과 5천년 중국 역사상 최대이자 최악의 민란이라 불리는 태평천국의 난이 발발했다. 염군의 난은 청나라 조정이 지방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했음을 입증해보였고, 태평천국의 난은 민중의 마음이 아예 청나라에서 떠났음을 증명했다.
무너지는 청나라에 실망한 민초들은 태평천국의 난을 일으킨 흉괴 홍수전 곁으로 금세 모여들어 대군을 이루었고, 불과 2년만인 1853년에 청나라의 제2의 수도나 다름없는 난징을 점령했다. 난징을 장악한 홍수전은 도시를 천경(天京)이라 개칭하고 태평천국의 수도로 삼았다. 홍수전은 토지개혁을 중심으로 한 천조전무제를 발표, '평등'을 기반으로 한 국가 비전을 발표하기까지 하며 청나라의 질서를 갈아엎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난징을 점령한 홍수전은 곧바로 수도 베이징을 노렸다. 태평천국군이 북상해 톈진 교외까지 다다르자 기겁한 함풍제는 서둘러 증국번, 좌종당, 이홍장 등에게 각기 상군(相軍)과 회군(淮軍) 등 지역 의용군을 조직케 하여 태평천국 진압을 맡겼다. 청나라 입장에선 다행이게도 태평천국도 초창기의 대의가 무색하게 난징 점거 후 극심한 내분과 부정부패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특히 홍수전이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내부 인사를 숙청한 천경사변 이후 태평천국의 국력은 수직하향했다. 홍수전은 이수성, 진옥성, 홍인간 등에게 조정을 맡긴 채 궁녀들과 놀아났고, 그나마 반전을 노리며 노력하던 홍인간은 부르주아적 요소를 도입한 자정신편(資政新篇)을 실시했으나 내부 반발과 현실의 한계로 실패했다. 그와중에 익왕 석달개는 쓰촨성으로 쳐들어갔다가 금천 일대에서 청군의 습격을 받아 전멸해버리고 말았다. 결국 1864년 7월에 증국번의 형 증국관이 수도 난징을 함락하고 태평천국을 멸망시킴으로써 난은 13년만에 끝나게 된다.[60]
불타는 원명원 |
이번에는 아예 수도 베이징의 함락을 목표로 삼고 진격했다. 톈진, 퉁저우가 연달아 함락당했고 팔리교 전투에서 1만 2천의 팔기군이 처참하게 패배하며 베이징으로 향하는 길이 활짝 열리고 말았다. 베이징이 함락당할 위기에 처하자 패닉에 빠진 함풍제와 조정은 열하로 도망쳤고, 1860년 영프 연합군은 황제의 여름 궁전 원명원을 약탈, 불태워버렸다. 결국 청나라는 저자세로 나아가 러시아의 중재로 영프와 기존에 맺던 톈진 조약에 더불어 베이징 조약까지 추가로 체결해야 했다. 동시에 러시아 제국 역시 중재에서 끝내지 않고 무력 시위를 통해 아이훈 조약을 체결, 청나라는 드넓은 연해주와 아무르 강 이북의 광대한 영토를 러시아에게 빼앗기는 수모를 겪었다.
7. 서태후의 등장
서태후 |
신유정변의 전개는 이렇다. 원래부터 서태후는 고명 8대신의 일원이던 이혁보국군왕 숙순과 대단히 사이가 좋지 않았다. 또한 베이징에 남아있던 공충친왕 혁흔은 고명대신으로 지명되지 못한 것에 불만이 컸는데, 이 둘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힘을 합치게 된 것. 당시 혁흔은 서양 열강들과 조약 체결 뒤 열하로 황제를 조문하러 갔는데, 이때 서태후와 비밀리에 연락해 쿠데타를 계획했다. 9월 14일 산동도감찰어사 동원순이 두 태후들이 수렴청정을 하도록 상소를 올렸으나 고명 8대신들이 일언지하에 거부하면서 사이는 더욱 악화되었다. 10월 26일 황제의 시신이 베이징으로 운구되었는데, 동태후와 서태후는 먼저 입궁한 뒤 나중에 따라들어오는 숙순 등 8대신들을 모조리 체포해 숙청했다.이 것이 바로 신유정변이다. 서태후는 권력을 완벽히 틀어쥔 직후, 8대신이 올린 '기상'이라는 연호도 폐지하고 동치(同治)라는 새로운 연호를 지어 쓰도록 했다.
서태후와 동태후는 수렴청정을 시작했으나 동태후는 정치에 눈이 어두웠기에 사실상의 권력자는 서태후였다. 11월 1일부터 서태후가 자금성 양심전에서 수렴청정을 시작했고, 황제가 성인이 되면 즉각 수렴청정을 중단할 것이라 단언했으나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때부터 서태후는 매일같이 고관대작들을 불러 정사를 논의했다. 양궁 태후들이 내외비를 낭독하고, 황태후들이 칙령 초안을 작성하면 두 황태후의 검토를 거쳐 직인을 찍는 식이었다. 서태후는 능수능란한 여걸로, 마구잡이로 국정을 처리하진 않았다. 그녀는 관리들의 정책 비판도 타당하다 싶으면 수용하는 쪽이었고, 상벌을 엄격히 했으며 관리들 임명도 신경쓰는 편이었다. 또한 역대 왕조에서 수렴청정한 여인들의 기록을 모아 그 경험과 교훈을 요약해 읽어보기도 했을 정도. 같은 해 중국은 서구화와 근대화를 시작한다.
7.1. 양무운동과 동치중흥
자세한 내용은 양무운동 문서 참고하십시오.양무운동으로 설립된 강남제철소의 모습 |
서구 열강들과의 전쟁과 지난 반란 진압으로 청나라 군대의 낙후함을 뼈저리게 느끼던 증국번, 이홍장, 좌종당, 장지동 등의 인물들이 양무파의 주류를 이루었다. 이들은 서구의 발전한 무기를 도입해야 한다고 믿었고, 유럽의 강력한 함선과 총포 등을 들여왔다. 뿐만 아니라 서구의 기술이 연속적으로 도입되어 근대적인 은행, 우편 및 기타 인프라 시설들이 건설되었고 외국어 인재 양성 기관인 경사동문관을 설치, 유럽, 미국, 일본 등지로 수많은 유학생들을 파견했다. 이같은 청나라의 근대화 노력을 양무운동이라고 부른다.
이홍장과 관리들은 중국 최초의 기선 회사이자 민간 기업인 '윤선초상국', 강남 제철소, 한양 제철소 등을 설립해 근대화에 박차를 가했다. 1862년에는 중국 최초의 자체 설계 증기기관이 만들어져 중국 산업화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렸고, 동시에 북양함대, 남양함대, 복건함대 이렇게 3개의 대함대가 창설됐다. 양무운동은 일시적으로 청나라의 산업력과 군사력을 상당히 강화하는 효과를 불러왔고 이 중흥기를 '동치중흥(同治中興)'이라고 부른다. 1865년 일어난 염군의 반란은 보르지기트 셍게린첸의 만주 기병과 몽골 기병대의 공격을 받아 전멸당했으며, 좌종당과 이홍장이 마지막 근거지를 끝장내며 몇 년간 지속되던 화북 일대의 혼란을 종결지었다. 좌종당은 1862년부터 1878년까지 둥간의 난, 야쿱 벡의 난을 진압하고 러시아로부터 일리 일대를 되찾았다.
7.2. 청불전쟁과 연이은 자연재해
자세한 내용은 청불전쟁 문서 참고하십시오.랑선 지방을 함락하는 프랑스군 |
그러나 간명 조약이 체결된 직후, 프랑스는 조약의 허점을 이용해 바로 청을 통수치고 푸저우의 마미 조선소에 폭격을 가해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린 뒤[62] 복건함대를 모조리 수장시켰다. 청나라는 다시 프랑스와 재대결할 수 밖에 없었다. 프랑스는 곧 랑선 지방을 점령했으며 광시성까지 위협했다. 청나라는 몇 안되는 용장 풍자재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해 광시성을 방비토록 했다. 풍자재는 의외로 분전하며 프랑스군을 꺾는데 성공했고, 흑기군과 힘을 합쳐 생각 외로 우월한 교환비를 냈다. 프랑스에 패전의 가능성이 전해지자 충격받은 쥘 페리 총리 내각은 총사퇴까지 했을 정도. 이대로라면 은근히 괜찮은 결과를 낼 수도 있었겠지만... 청나라 조정이 베트남을 포기하고 정전, 철병하라는 악수를 두면서 모든 게 꼬여버렸다. 1885년 여름 이홍장이 톈진조약을 맺어 조공국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하고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63]
프랑스와의 전쟁 이후 변방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한 청나라는 타이완섬을 성(省)으로 승격했다. 그러나 청나라의 시련은 끝나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영국이 1885년 미얀마의 꼰바웅 왕조를 공격해 점령했던 것. 청나라는 영국 주재 외교관 증기택을 시켜 무단 침략에 항의했다. 하지만 이빨 빠진 호랑이조차 되지 못한 청나라가 압도적인 국력 차의 영국을 꺾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고 1886년에는 어쩔 수 없이 영국의 미얀마 정복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광서제 재위기에는 유난히 자연재해도 많이 일어났다. 광서 4년인 1875년에 하남, 섬서, 산서, 직예, 산동 지방에 심각한 가뭄과 기근인 '정무기황(丁戊奇荒)'이 몰아닥쳤다. 특히 산시성에서는 1백만 명이 굶어죽었고 개중 타이위안현에서만 95만 명이 죽었다고. 이 기근으로 죽은 청나라 백성들은 무려 950만 명에서 2,000만 명에 이르렀다. 청나라 전체 인구의 2~4%가 증발해버린 어마어마한 타격이었다. 2천만 명의 난민들이 생겨났고 치안은 극도로 불안정해졌다. 중국 역사에서도 이와 같은 기근은 쉽게 보기 힘들어 230년 만 최악의 기근이라 칭했을 정도였다. 어찌나 상황이 심각하던지 서양 언론에서까지 이를 다루었다. 뉴욕 타임스는 1876년 6월에 이를 보도하며 청나라의 부패한 행정력과 낙후된 인프라에 책임을 돌렸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1887년 9월 30일에는 허난성 정저우에서 황하의 둑이 터져 상상을 초월하는 물이 쏟아져나왔다. 대략 200만 명이 물에 휩쓸려 사망했다고 한다. 자연재해로 인한 인명피해 2위를 차지한[64] 초대형 재해로 근대 중국을 넘어 인류 역사상 최악의 재앙 중 하나로 꼽힌다. 터진 둑의 입구는 100m에 가까이 넓어졌고 기존 황허의 흐름이 바뀔 정도였다. 황허에서 나온 물들이 인근 지아루 강과 화허로 흘러들어갔고 허난, 안후이, 장쑤 3개 성의 20~30개 현들이 물에 침수됐다. 청나라는 필사적으로 터진 둑을 틀어막았고 1889년에 성공적으로 치수를 완료하며 재앙은 일단락됐다. 둑을 재건하는 데에 무려 1,100만 냥의 은이 소요됐고 이는 청나라 1년 재정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거금이었다.
8. 외세의 침략과 자강(自强)의 몸부림
8.1. 청일전쟁의 패배
청일전쟁 |
1894년에는 조선에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다. 조선 조정은 혼란을 잠재워달라는 명목으로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했고, 이에 질세라 일본도 일본인들을 보호한다는 핑계로 한반도에 군대를 투입했다. 일본, 청, 조선 군대가 모두 나선 덕에 동학농민운동 자체는 곧 진압되었으나 문제는 일본이 그 후에도 철군하기를 거부했던 것. 결국 그해 7월 일본군이 아산만 인근 풍도에 정박한 청 함대를 공격하면서 청일전쟁이 터지고야 만다. 청나라와 일본은 조선을 전장으로 삼아 여러 곳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결정적으로 황해 해전에서 청나라가 대패하며 일본에게 전쟁의 주도권을 넘기게 되며.이를 통해 기세가 오른 일본 함대는 랴오둥 반도와 웨이하이 일대까지 진격하며 전장은 조선에서 중국 본토로 넘어간다.
그러나 당시 청나라군의 총사령관이였던 이홍장은 본인의 권력 기반인 병사들을 일본과의 싸움에서 잃을까봐 우려해 열성적으로 싸우려 들지 않았다. 결국 뤼순과 다롄 등 핵심 도시가 점령당했고 웨이하이 전투에서 북양함대가 궤멸당하는 등 청군은 본인들이 오합지졸임을 만천하에 드러내며 추하게 몰락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어 타이완섬, 펑후 제도, 랴오둥 반도를 일본에 할양했고 일본 정부의 4년치 세입에 맞먹는 은 2억냥을 배상했다. 게다가 충칭, 쑤저우, 항저우 등을 개항했으며 일본인이 중국에 공장을 설립할 권리도 내주었다. 다만 랴오둥 반도를 일본이 차지한다는 것에 불안을 느낀 서구 열강들이 삼국간섭을 벌여 다시 청이 돌려받긴 했지만, 그 대가로 은 3천만냥을 추가로 뜯어냈고 서구 열강들도 각종 이권을 챙겨갔다.
8.2. 열강의 중국 침탈
1902년 풍자화 | 열강에게 분할 당하는 청[65][66] 르 프티 주르날, 1898년 |
1898년에는 미국이 필리핀을 점령하면서 마침내 동아시아에 한 발을 내딛었다. 서구 열강들이 한창 중국을 갈라먹고 있는 것을 목도한 미국은, 만일 한 나라가 중국을 통째로 집어먹는다면 미국의 권익이 침해될 것을 우려해 '문호개방정책'을 주장했다. 특정한 지역에 대해 모든 나라의 모든 국민에 대하여, 평등한 상업 및 공업 활동의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주장으로, 원래는 반대가 절대다수였지만 영국을 시작으로 점차 모든 유럽 열강들이 이에 동의했다. 1899년에는 중국을 영토적으로 통일된 상태로 유지하는 대신, 모든 국가들이 중국 시장에서 똑같은 권리와 자유를 누리며 마음껏 중국을 뜯어먹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서구 열강들은 끊임없이 나약한 청 조정에게서 철도 부설권, 광산 채굴권, 채권, 항구 조차권 등 온갖 이권들을 뜯어가며 중국의 경제침탈에 열을 올렸다.
문호개방정책으로 중국은 다행히 영토적으로 쪼개지거나 아예 분할당하는 것만큼은 면했지만, 그게 끝이었고 내적으로는 중국 역사상 유례없는 최악의 국난을 당하고 있었다. 서구 열강들은 중국을 제 앞마당처럼 휘저었고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강한 제노포비아가 생겨났다. 이 즈음에 일어난 의화단 운동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발생했다. 당시 조정을 장악한 서태후는 의화단을 이용해 1900년 6월 21일 열강 8개국에 전쟁을 선포했는데, 이로 인해 망해가는 청나라 홀로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8개국 연합군을 혼자서 상대하는 대참사가 벌어지고야 만다.
8.3. 마지막 부흥 시도
자세한 내용은 변법자강운동 문서 참고하십시오.광서제 | 캉유웨이 |
캉유웨이는 1895년 10월 난징으로 내려가 또다른 개혁운동의 거두 '장지동'을 만났고, 그의 지원을 받아 상하이에도 강학회 지부를 창설, 1896년에는 연달아 잡지 강학보(强學報)를 펴냈다. 그러나 청나라 조정은 정부와 독자적으로 개혁 여론을 불지피는 캉유웨이의 움직임을 썩 좋게 보지 않았고, 결국 베이징 강학회를 해산시키고 말았다. 강학보 역시 출판이 중지됐고 상하이 강학회 역시 얼마 가지 않아 형해화됐다. 이렇게 개혁의 움직임이 잠시간 탄압받긴 했지만, 워낙 청나라의 상태가 심각했기에 곧 다시 개혁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8월에 시무보(時務報)가 창간되어 일반 대중들에게 정치와 개혁에 대한 관심을 가질 것을 촉구했고 이로써 한동안 억눌려졌던 근대화 여론이 다시 분출되기 시작했다.
1897년 독일 제국이 칭다오 일대를 점거하자 보다못한 캉유웨이는 또다시 탄원을 올렸다. 당시 황제였던 광서제도 어느 정도 개혁에 열의를 보였다. 캉유웨이 등을 임용하여 대대적인 개혁을 펼치고, 입헌군주정을 만들려 했던 것이다. 황제는 1898년 6월 11일 친히 천안문 광장에 행차해 '명정국시(明定國是)'를 반포하고 대대적인 개혁에 나설 것을 천명했다. 광서제가 꿈꾼 개혁은 정치, 군사, 사회, 문화, 교육 전반을 총망라하는 본격적인 쇄신 정책으로 이를 변법자강운동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서태후, 위안스카이를 필두로 한 보수파들이 이 개혁에 극렬히 반발했고, 결국 1898년 9월 21일에 서태후가 쿠데타를 일으켜 황제를 중난하이에 유폐하고 개혁을 모조리 원점 재검토시킴으로써[67] 청나라 최후의 희망도 헛꿈으로 날아가 버리고야 말았다.[68]
8.4. 의화단 운동과 8개국 연합군
자세한 내용은 의화단 운동 문서 참고하십시오.1894년 청일전쟁의 패전 이후, 청나라는 완전히 동네북 신세가 되어 모든 열강들에게 쥐어털리고 다녔다. 게다가 자연재해에 궁정 다툼과 뿌리깊은 부정부패, 농민들의 반란까지 겹치면서 청나라는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가는 지경에 이르렀다. 게다가 외국 선교사들과 기독교도들이 청나라 관료들과 충돌하면서 상황은 더욱 안좋아지고 있었다. 그러던 1900년 봄, 의화단[69]이라는 무리가 옛 백련교 세력을 기반으로 크게 성장하기 이르렀고, 이들은 외세에 반감을 품고선 기독교도들을 척살하고 교회를 불태우는 등 반외세 운동을 펼쳤다. 의회단의 세는 크게 불어나 곧 조정의 암묵적 허가와 함께 베이징에까지 진출했다.[70]
의화단원들이 베이징에서 활보하며 외국인들을 공격하는 지경에 이르자 영국의 요구로 외국 군대가 외국인 거주지를 보호하기 시작했다. 5월 31일부터 8개국에서 파견한 435명의 수병들이 베이징 외국인 거주지를 방어했다. 상황은 날로 심각해졌다. 의화단원은 6월 5일 톈진으로 향하는 철도 노선을 차단, 6월 11일에는 일본 서기 스기야마 아키라가 살해당했다. 같은 날 독일의 클레멘스 폰 케텔러 공사가 의화단원 1명을 잡아죽이자 그에 대한 보복으로 베이징의 교회와 외국인 시설들을 무작위로 습격해 파괴했다.
상황이 도저히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영국의 세이무어 경이 이끄는 2,000명의 연합군이 추가로 다구를 떠나 톈진을 거쳐 베이징으로 향했다. 그러자 중국 의용군들이 톈진과 베이징 사이의 철도를 파괴한 뒤, 란팡과 양춘 사이에 함정을 파고 연합군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다. 세이무어 경이 이끄는 연합군이 함정에 들어오자 의용병과 2,000명의 청군이 기습공격을 퍼부었고 이로 인해 연합군은 400명의 사상자를 입는 등 상당한 피해를 보았다. 소식을 전해들은 청 조정은 크게 기뻐하며 치하했다.[71]
자금성에 입성하는 연합군 | 황제의 옥좌에 앉은 미국 수병들 |
청나라 병사와 의화단원들이 베이징의 외국인 거주지를 둘러싸고 격렬한 포위전을 벌였고, 잡히면 죽는다는 걸 알고있던 외국인들은 죽기살기로 저항했다. 한편 열강들도 가만있지 않았다. 열강 8개국은 무려 55,000명 규모의 대군을 결성하고 알프레드 가셀리 영국 중장에게 지휘를 맡겼다. 연합군은 7월 14일 톈진을 함락했고 별다른 저항없이 바로 베이징으로 진군했다. 청 지방관들도 서태후의 방어 명령을 잘 따르지 않았고 기껏 나선 군대들도 죄다 썩어빠진 어중이떠중이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그 결과 연합군은 8월 14일에 베이징에 도착했고 그날 당일 베이징이 함락당했다. 서태후와 광서제는 재빨리 시안으로 도망치는 추태를 보였다.
베이징을 함락한 8개국 연합군은 베이징을 잔혹하게 약탈했다. 수많은 중국인들을 강간, 살해했고 민가와 궁궐을 약탈했다. 1900년 9월부터 1901년 3월까지 무려 반년에 달하는 기간 동안 연합군은 직예성 일대를 쓸어버리며 의화단이 있다고 조금이라도 의심가는 지역이면 죄다 불지르고 파괴했다. 집과 논밭이 불탔고 주민들을 집단윤간한 다음 우물에 던져버리는 참사가 곳곳에서 일어났다. 베이징에서는 약탈품들이 매주 일요일마다 경매에 올라 유럽으로 팔려나갔다. 청나라는 굴욕적으로 굽히고 들어올 수 밖에 없었다. 청나라는 신축조약을 맺어 9억 8천만냥을 열강 11개국에게 지불해야 했고 베이징부터 산해관 일대의 무장을 모조리 해제하는 굴욕을 겪었다. 이 조약으로 청나라는 반쯤 식민지 신세로 전락하고야 만다.
청나라의 끝없는 굴욕으로 청 황실의 명성은 나락까지 추락했고, 원래부터 지배층 만주족과 피지배층 한족으로 분리된 민족 구성이었기 때문에 한족 지식인들은 '청나라' 자체마저도 일종의 '외래 민족 침략 세력'으로 보고 만주족의 청 왕조로부터 한족 민중의 독립을 추구했으며 이것이 폭넓게 받아들여졌다. 태평천국 운동 때도 사망자가 많았던 이유가 태평천국에 가담한 한인들이 만주족과 청에 대한 반감으로 만주족을 학살하자 그에 대한 보복으로 청군이 태평천국군 포로들의 항복을 받아주지 않고 학살했기 때문이다. 태평천국군의 지휘관들의 경우 능지처참에 처해졌다. 이 때문에 한족에게서 만주족에 대한 증오가 커졌고 신해혁명 때는 청이 멸망하자마자 수많은 만주족이 한족에게 학살당하기도 했다. 만주족의 청나라에 대한 충성을 멈추지 않았던 친청 한족도 끝내 체념하고 청나라의 멸망을 받아들이거나 혁명군에 적극적으로 투항한 이들을 제외하면 만주족과 함께 학살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9. 멸망
9.1. 러일전쟁
자세한 내용은 러일전쟁 문서 참고하십시오.러일전쟁 |
러일전쟁의 가장 직접적인 결과는 일본이 남만주 일대를 지배하고 조선에 대한 통치를 강화하게 된 것이었다. 뤼순과 다롄 같은 관동군 조차지와 남만주철도의 장춘 남부 구간은 모조리 일본의 지배 아래로 들어갔고, 내만주에도 관동군이 주둔하기 시작해 사실상 만주 일대를 장악해버렸다. 게다가 일본은 근대화를 이룩해 백인 열강과의 전면전에서 승리한 최초의 비서양 국가로 떠올랐으며 에도 막부 말기에 맺은 불평등 조약을 걷어치우는 등 국제적인 위상도 어마어마하게 올라갔다. 다만 포츠머스 조약에서 북위 50도 이남의 남사할린 섬 밖에 얻어내지 못하고 러시아로부터 배상금도 받지 못하자 이에 분노한 일본인들이 히비야 방화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9.2. 최후의 개혁 : 청말신정
의화단 운동으로 수도 베이징마저 함락, 약탈당하는 굴욕을 겪은 청나라 조정과 서태후는 더이상 가만있으면 안되겠다는 위기감에 휩싸였다. 1901년 4월 청 조정은 총체적인 개혁 계획을 짜기 위해 감찰정무처를 설치, 이홍장이 책임을 맡았고 장지동과 유근이 등 개혁파가 조정을 주도했다. 청나라는 '강초회주변법삼절(江楚會奏變法三折)'을 발표해 먼저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을 벤치마킹하고, 최종적으로는 입헌군주정으로 전환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1906년 청나라 재정부는 중앙 및 지방 관공서의 세입을 통일하고 외채 상환액을 조정, 지방 은행들의 신용도를 평가하고 누락, 허위 기재된 지방 예산 보고서에 대해 처벌하는 등 썩어빠진 청나라의 재정 실태를 개선하기 위한 6대 원칙을 발표했다. 또한 일본의 러일전쟁 승리로 인해 충격을 받은 총독들은 위안스카이를 필두로 직예, 성경, 호광, 양광, 광시성 등 6개 성(省)에서 과거제를 폐지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청 조정 역시 이같은 의견을 받아들여 결국 1,000년도 넘게 유지되어온 과거제를 공식적으로 폐지, 서구식 제도를 받아들이기에 이른다.
1908년 8월에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헌법으로 불리는 흠정 헌법 대강(欽定憲法大綱)을 발표했다. '측년주비사의청단(逐年籌備事宜清單)'을 발표한 것도 이 즈음. 청나라는 이 개혁으로 '신민의 권리와 의무', '의회법', '선거법' 등 정말 기초적인 근대화의 주춧돌을 놓았으며 개혁 2년차에 지방 의회 선거를 실시하고 9년차에 정식 헌법을 반포하겠다고 천명했다. 청나라 조정이 구상한 헌법은 전반적으로 전제군주제의 성격이 강하지만, 기본적으로 권력분립의 가치를 중시했으며 청나라 신민들에게 발언권, 출판권, 저술권, 집회권, 결사권, 재산권, 피선거권 등의 권리를 부여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동시에 청 조정은 언론과 정당에 대한 규제도 완화했다. 이를 청말신정(淸末新政)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미 망하기 직전의 청나라에 이는 너무나도 늦은 개혁일 뿐이었고 11월 15일 청나라를 떠받치던 기둥 광서제와 썩은 기둥 서태후가 동시에 세상을 떠나고야 만다.[74]
9.3. 끊임없는 개혁가들의 봉기
쑨원 | 황싱 | 쑹자오런 |
1895년 4월 17일 청나라가 일본과 굴욕적인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했다. 망해가는 나라에 분노한 흥중회가 10월에 홍콩을 중심으로 광저우 무장봉기를 기획했으나 계획이 유출되면서 청나라 조정의 대대적인 수색을 받고 실패했다. 1900년에 중국 북부에서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 6월에 8개국 연합군이 베이징을 공격하자 동남호보(東南互保)를 결성, 청 조정의 지시를 거역하고 외국 군대와의 직접적인 충돌을 피했다. 1900년 초에는 담사동의 절친이자 장지동의 제자 탕차이창(唐才常)이 '동아동문회'의 지원을 받아 비밀리에 정기회(正氣會)를 조직하고 대외적으로는 '동문역사'라는 가짜 이름으로 활동했다.
정기회는 날로 세력을 불려갔고, 탕차이창의 급진적인 호소가 개혁파, 정부에 실망한 청나라 군인들, 흥한파 등에게 인기가 있었기에 그해 3월에 자립회(自立會)라는 더 명확한 이름으로 바꾸었다. 동시에 친리샨, 우루쩐 등이 군사령관을 맡아 따로 군대를 운용했고, 비융니안이 당을 맡아 각지에 연락을 취했고 캉유웨이, 량치차오 등이 화교들로부터 자금을 조달했다. 1900년 7월 26일에는 상하이 예원에서 회의를 소집해 룽홍을 의장으로, 얀푸를 부의장으로, 탕츠창, 왕캉니안, 정관잉 등 10명을 간사로 뽑았다. 자립회는 자립군을 동원해 한커우, 한양, 안후이성, 후난성, 장시성 등지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북쪽으로 가 광서제를 구출한 뒤 한족 중심의 입헌군주정 수립을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탕차이창은 쑨원의 협력까지 받았으나 결국 캉유웨이의 재정 지원을 받는 데에 실패했다. 결국 장지동이 계획을 청 조정에 누설하는 바람에 당차이창을 포함한 12인이 한커우에서 체포, 우창시에서 참수당했고 자립군은 봉기하기도 전에 장지동이 진압해버렸다. 너무 빨리 와해되어버린 탓에 광둥성의 흥중회가 개입할 시간조차 없었다.
쑨원도 가만있지는 않았다. 1900년 쑨원은 군사혁명을 일으키기로 결심하고 정스량, 천샤오바이, 양쿠운, 영국과 일본 조력자들과 함께 홍콩으로 입국했으나 영국 당국이 입국을 거부했다. 9월 25일에는 일본 흑룡회의 도움을 받아 시모노세키를 거쳐 대만으로 갔다. 대만 총독부는 일본의 지시를 받고선 쑨원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타이베이에 본부를 차린 쑨원은 10월 8일 정실량 등에게 심천시에서 봉기를 일으킬 것을 지시했다. 이를 '후이저우 봉기'라 부르고 금세 최대 2만 명의 병력을 확보했지만 10월 19일, 일본의 내각이 바뀌어 이토 히로부미가 정권을 잡자 일본의 지원이 끊겼고 탄약과 식량 부족으로 금세 와해되어버리고 말았다. 봉기는 곧 청나라에 완전히 진압당했고, 쑨원은 일본의 도움을 받아 곧 일본으로 송환됐다.
이후에도 무장 봉기와 청나라 전복 시도는 꾸준하게 일어났다. 1904년 10월에는 화흥회의 황싱이 호남민간회(湖南民間會)의 지도자 마푸이의 도움을 받아 서태후의 생일인 음력 10월 10일에 창사에서 의거를 일으킬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계획은 어김없이 누설되었고, 마푸이는 1905년 봄 핑샹에서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도쿄에서 화흥회, 흥중회 등이 합쳐져 중국혁명동맹회가 만들어졌고, 1906년 봄 류다오이와 차오샤오난 등을 후난으로 보내 핑샹, 류양, 리링 3개 지역에서 동시에 봉기를 일으켰다. 12월 초에 반란이 일어났고 며칠만에 몇몇 시와 현을 함락했다. 반군은 '중화민국군기격문(中華國民軍起義檄文)'을 발표하고 반란에 참여할 것을 선동했지만 청 조정이 수 만명의 대군을 동원해 반란군을 진압하면서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1910년 11월 3일 쑨원은 차오승, 황승, 후한민, 덩쩌주 등 중국동맹회의 핵심 요인들을 거느리고 말레이 반도 페낭섬에서 열린 페낭 회의에 참석했다. 이전에 동맹회가 변경지방에서 시도한 봉기들이 죄다 실패해버린 탓에 혁명의 기세가 갈수록 꺾여가자, 동맹회는 결국 대도시 광저우에서 봉기를 일으켜 동맹회의 역량을 총동원해 결사항전하자는 전략을 꺼내들었다. 1911년 4월 27일 차오승, 황승 등이 광저우에서 황화강 봉기를 일으켰다. 반란군은 청군과 치열한 시가전을 벌였지만 결국 병력의 열세로 실패했다. 72인의 순교자는 황화강에 장사됐고 묘를 함께 세웠다. 동맹회는 이 사건으로 상당한 인력 손실을 감수해야만 했는데, 사망자 대다수가 동맹회의 엘리트였기 때문.
9.4. 신해혁명과 제정의 붕괴
자세한 내용은 신해혁명 문서 참고하십시오. 우창 봉기 신해혁명의 시발점으로 봉기 당일 우창을 점령했으며 본격적인 청 멸망이 시작되었다. |
당시 황제는 1909년 즉위한 선통제였지만 나이가 고작 5살에 불과했다. 청 조정은 1911년 10월 27일 혁명을 진압하기 위해 위안스카이를 흠차대신으로 임명, 11월 1일에는 내각총리대신으로 임명했다. 위안스카이는 혁명군을 상대로 상당한 전과를 세웠지만 정작 총구를 돌려 청 왕조를 폐지, 1912년 2월 12일 선통제를 퇴위시켜 버림으로써[76] 청나라는 1616년에 천명제 누르하치가 나라를 세운 지 296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그렇게 청나라는 한족의 배신으로 흥하였다 한족의 배신으로 망하는 아이러니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으며, 더 나아가서 기원전 221년에 전국시대 진나라의 시황제가 천하를 통일하고 자신을 황제라고 칭하면서 2,100여 년 넘게 이어져 왔던 중국의 황제 자리마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3월 10일에는 위안스카이가 베이징에서 중화민국의 2대 대총통으로 취임하면서 중국은 위안스카이가 이끄는 북양정부의 손으로 넘어갔다.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는 청조 멸망 이후에도 북양정부와 체결한 "청실 우대 조건"에 따라 자금성에 잔류했는데(청나라 소조정),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황실 우대 조건
1. 대청 황제는 물러난 이후, 「존호는 계속 유지되며, 폐지되지 아니한다」. 중화민국은 대청 황제를 "외국 군주를 대하는 예"로 우대한다.
1. 대청 황제는 물러난 이후, 세금 사백만 냥을 사용하며, 이후 신 화폐가 주조되면 사백만 원이 중화민국에 의해 지급된다.
1. 대청 황제는 물러난 이후, 자금성에 잠정적으로 계속 거주하며, 이후 이화원으로 옮기게 된다. 시위(侍衛)하는 사람 등은 계속 쓸 수 있다
1. 대청 황제는 물러난 이후, 그 종묘와 능침에 대해 영구히 제사를 받들며, 중화민국은 적절히 호위하는 병사를 두어 그것을 신중히 보호한다.
1. 덕종(광서제)의 능이 아직 완성이 안 되었으므로, 제도에 맞게 수리하며 옛 예법에 맞게 한다. 그 경비는 중화민국이 지출한다.
1. 궁중에서 고용하는 집사 인원은 계속 유지되나, 이후에는 환관은 더 고용할 수 없다.
1. 대청 황제는 물러난 이후, 지금 가지고 있는 자산은 중화민국이 특별 보호한다.
1. 현재 보유한 금위군은 중화민국 육군부에 편제되며, 그 수 및 녹봉은 예전과 같이 한다.
* 청 황족 대우 조건
1. 청나라 왕공 작위는 예전과 같이 유지된다.
1. 청 황족은 중화민국 국가의 공권과 사권에 대해서는 보통 국민과 같다.
1. 청 황족의 사유재산 일체는 보호된다.
1. 청 황족은 병역의 의무가 면제된다.
* 만몽회장 각족 대우 조건은 생략
1. 대청 황제는 물러난 이후, 「존호는 계속 유지되며, 폐지되지 아니한다」. 중화민국은 대청 황제를 "외국 군주를 대하는 예"로 우대한다.
1. 대청 황제는 물러난 이후, 세금 사백만 냥을 사용하며, 이후 신 화폐가 주조되면 사백만 원이 중화민국에 의해 지급된다.
1. 대청 황제는 물러난 이후, 자금성에 잠정적으로 계속 거주하며, 이후 이화원으로 옮기게 된다. 시위(侍衛)하는 사람 등은 계속 쓸 수 있다
1. 대청 황제는 물러난 이후, 그 종묘와 능침에 대해 영구히 제사를 받들며, 중화민국은 적절히 호위하는 병사를 두어 그것을 신중히 보호한다.
1. 덕종(광서제)의 능이 아직 완성이 안 되었으므로, 제도에 맞게 수리하며 옛 예법에 맞게 한다. 그 경비는 중화민국이 지출한다.
1. 궁중에서 고용하는 집사 인원은 계속 유지되나, 이후에는 환관은 더 고용할 수 없다.
1. 대청 황제는 물러난 이후, 지금 가지고 있는 자산은 중화민국이 특별 보호한다.
1. 현재 보유한 금위군은 중화민국 육군부에 편제되며, 그 수 및 녹봉은 예전과 같이 한다.
* 청 황족 대우 조건
1. 청나라 왕공 작위는 예전과 같이 유지된다.
1. 청 황족은 중화민국 국가의 공권과 사권에 대해서는 보통 국민과 같다.
1. 청 황족의 사유재산 일체는 보호된다.
1. 청 황족은 병역의 의무가 면제된다.
* 만몽회장 각족 대우 조건은 생략
이 조건으로 선통제는 자금성 안에서는 청 황제로 행세할 수 있었고, 자금성 내에서는 계속 선통 연호가(음력과 함께) 쓰였다. 이후 청나라 황족들과 복벽파들이 복벽운동을 전개했지만 자기 자신이 황제가 되고 싶었던 위안스카이는 오히려 1914년 11월 23일 복병 정치 징치령을 발표해 복벽파들을 억눌렀다. 그리고 1915년 12월 12일 홍헌제제를 단행함으로 자기 자신이 황제가 되어버렸다. 이후 이에 반발하는 호국전쟁이 일어나면서 위안스카이는 3월 23일 제제를 취소하고 6월 6일 사망했으며 전국 각지가 군벌들이 할거하는 개판으로 떨어진 와중에 복벽파 장쉰이 쿠데타를 일으켜 장훈복벽을 단행함으로 1917년 7월 10여일 동안 청이 부활하기도 했으나 돤치루이가 이를 진압하면서 복벽 운동은 실패로 끝나고 북양정부에 실질적으로 귀속되고 만다.
특히 북양정부는 청실 우대 조건을 지키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군주제를 혐오하던 군벌 펑위샹이 2차 직봉전쟁 와중에 1924년 11월 5일 핍궁사건을 일으키면서 선통제가 자금성에서 쫓겨나게 되었으며 동년 11월 5일에 청실 우대 조건이 수정되면서 사실상 청 황제 존호는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선통제는 톈진에 도착한 이후부터 일본 제국의 보호를 받게 된다.
1931년 11월에 장제스는 선통제가 톈진에 남는다면 청실 우대 조건을 회복시켜주겠다는 제안을 하지만, 도이하라 겐지가 획책한 천진사변을 비롯한 수차례의 암살 협박을 받아왔기 때문에 선통제는 거절한다. 게다가 북벌군이 1928년 베이핑을 점령한 다음에 장쭝창의 부하인 쑨뎬잉이 국민혁명군에 투항하면서 벌인 동릉 도굴 사건이 처벌당하기는커녕 오히려 방조되었고 서태후의 능묘에서 나온 야명주가 쑹메이링의 신발을 장식하는 데 쓰였단 소문에 선통제는 난징 정부에 완전히 학을 뗐다.
결국 그 달 10일에 선통제는 만주로 가게 되고, 이듬해(1932년) 일본이 세운 괴뢰 정권 만주국의 황제가 되기에 이른다. 일본은 만주국이 청의 후신이라고 선전했지만 현실은 일제의 괴뢰국이었다.[77]
[1] 후금이 세워진 1616년 기준이며, 본격적으로 중국대륙을 지배한 기간은 명나라가 망한 1644년 부터이므로 이보다 조금 짧다.[2] 명나라 홍무제가 1371년 요동에 설치한 행정구역. 사령부는 랴오양시에 위치했으며 관할구역은 현재의 랴오닝성 일대였다. 그러나 명의 국력 약화와 여진의 침략 때문에 점점 강역이 축소되더니 결국에는 요하 중류 지방으로 관할 구역이 줄어들었다.[3] 명 조정이 헤이룽장성 등 동북삼성을 관리하기 위해 설치한 행정구역.[4] 건주여진은 본디 금나라 완안씨가 통일했던 5개의 부족 '오국부'의 후손으로, 원나라가 쇠퇴하자 훌리가이와 오두올리 부족 5만 호가 남하하여 만들어진 일족이다.[5] 먼터무는 1411년에 풍주로 가서 훌리가이부와 합류하고 1412년에 명나라에 귀부했으며, 건주좌위지휘사에 임명되고 동(童)씨 성을 하사받았다. 이때문에 태종이 먼터무와의 무역을 거부한 것.[6] 정통제는 1442년 먼투무의 아들 동샨에게 건주좌위지휘사 직을 수여했다. 기존의 건주우위에서 좌위를 떼어내 건주위, 건주우위, 건주좌위를 만들어 '건주삼위' 체제를 완성한 것도 바로 이 즈음이다. 이 지휘사는 세습직이었으나 기본적으로 명나라에 조공을 바쳤고 직위 세습 시 황제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7] 탁시가 아들을 일부러 외면했다기보단 완한의 권세가 탁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기에 탁시 입장에서도 컨저를 막을 수 없었다.[8] 장긴의 친부이자 당시 건주여진의 지배자인 건주좌위지휘사 '왕고'가 요동 총병 이성량과 맞부딪힌 끝에 패배해 처형당하고 간신히 이성량을 피해 생존한 장긴이 세를 수습한 뒤 또다시 난을 일으키는데, 하필 장긴의 아내가 기오창가의 손녀이자 탁시의 조카였기에 이 일에 가문이 엮이는걸 막기 위해 나선 것이었다.[9] 닝구타 일족은 그의 조부인 기오창가의 여섯 형제들의 부족으로, 이들을 통일했다는 것은 누르하치가 닝구타 일족 소속 가문중 하나의 추장에서 그치는게 아니라 기오로 가문을 온전히 지배하게 되었단걸 의미한다.[10] 두 사람이 장긴을 설득하러 들어갈 때 명나라 군대를 부추겨 장긴의 성을 습격하게 유도한 인물이 다름아닌 니칸 와일란이었다.[11] '아이신'은 '금'을 의미하고 '구룬'은 '나라'를 의미한다.[12] 누르하치는 7대한에 스스로를 명나라를 '남조', 자신을 '북조'라고 칭하며 명나라와 대등한 칸을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명나라를 정복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밝히기까지 했다.[13] 버일러란 여진족의 귀족 작위로, 연맹 안의 다른 족장들을 소유주로 지정하고, 그들에게 밭, 동물, 사람 등의 재산을 부여할 수 있는 배타적인 권리를 가졌다.[14] 현재 남아있는 중국의 옥새들 중 가장 정통성이나 상징성이 높은 옥새. 청나라 황제들은 이 옥새를 근거로 자신이 몽골의 칸이자 옛 몽골 제국, 원나라의 계승자임을 주장했다.[15] 실제로는 후금이 몽골계 세력을 하나로 합치거나, 조선을 정복한 적은 없다. 국내 호란사 연구에서 지적되듯이 후금은 조선이 신속했다고, 조선은 형제관계라고 여겼다. 일례로 정묘호란 이후 귀국하는 아민을 만난 홍타이지가 조선이 항복했다고 발언한 것이 그것이다.[16] 寬溫仁聖皇帝, Gosin Onco Hūwaliyasun Enduringge Han[17] 아이러니하게도 이 때부터 청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이어진 시간은 딱 276년, 청이 멸망시켰던 명나라와 똑같은 시간 동안 중국을 지배했다.[18] 그나마 광해군 시절까지만 하더라도 후금과도 나름대로 외교를 이어나갔기에 후금 입장에서도 적대국가로 판단해야할지 긴가민가했던 수준이었으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실각시킨 인조는 철저히 친명배금 기조를 밀고나가면서 후금과 대놓고 척을 지면서 결국 적대국가로 확정짓게 된다.[19] 왕자를 보내라 했음에도 왕자가 아닌 원창군을 인질로 보내며 명나라의 연호인 '천계'를 쓰지 말라 했음에도 대놓고 후금에 보내는 문서에 쓰다가 이후엔 아예 아무 연호도 쓰지 않는 식으로 조약을 우회하는등 여전히 청에 대한 반항감을 여실히 드러냈다.[20] 참고로 조선은 청나라 최초의 조공국이기도 하다.[21] 기사년의 변이라고 부른다. 청군은 영원성을 방비하던 원숭환이 급히 지원하자 한 발 물러서 퇴각했다. 원숭환 참조.[22] 1629년부터 1643년까지는 여섯 차례 화북을 공격하여 무인지경으로 약탈함으로써 기근과 대규모 반란으로 마비된 행정력에 더욱 악화시켰다.[23] 청에게 항복한 항장중 대표적인 인물이 서광계와 손원화로 이들은 화기를 발사할 때 필요한 거리 측량과 각도 정위에 관한 학문을 서구에서 배우고 있었고 총규, 총척 및 구도의의 사용 및 탄약 장전 기술을 개선한 훈련을 받은 명군의 정예였었다. 이들이 항복하면서 그들이 가진 기술력이 죄다 청나라로 넘어간 것이다.[24] 정덕제는 좋은 군주상은 아니었으나, 가정제나 만력제에 비빌 정도로 암군이냐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25] 가격이 이 모양이니 평범한 백성들이 제돈 주고 쌀먹을 수 있을리가 만무했고 기아에 시달리다 못해 나무 껍질이나 풀을 파먹는걸 넘어 썩은 송장까지 뜯어먹어야 했을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었다.[26] 홍타이지는 송산 전투 때부터 이미 건강이 악화되어 대업을 바로 눈앞에 둔 1643년에 사망했고 그 뒤를 이어 순치제가 새 황제로 즉위했다.[27] 그나마 정성공이 타이완섬으로 도망쳐 네덜란드를 내쫒고 동녕국을 세웠지만, 동녕국 역시 영력제 사망 이후에는 남명의 연호를 계속 쓰긴 했지만 명나라 재건에는 별다른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28] 영력제가 역적의 상판을 보기 싫다고 일갈하자 아무 말 않고 죽여버렸다고 한다.[29] 영화의 변발은 청나라 후기에 생겨났다.[30] 특히 청나라 이전의 한인들은 머리카락을 소중하게 여겨 승려를 제외하곤 머리를 깎는다는 것 자체를 큰 수치로 여겼다. 실제로 한족 왕조의 형벌 중에서 머리카락을 강제로 깎아 모욕을 주는 형벌도 있었다.[31] The Manchu Way: The Eight Banners and Ethnic Identity in Late Imperial China에 의하면 한족을 포함하여 다른 민족들이 만주족의 군사기술을 검증받고 만주로 세탁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진 만주족이 나와도 방관했다. 그래서인지 오늘날 중화권에는 법적으로 만주족이면서도 정작 DNA상으로는 퉁구스인이나 북방 한족보다 남방 한족에 더 가까운 이들이 의외로 적지 않다.[32] 대지(the Good Earth)를 보면 한족임에도 변발을 멋있게 여기고 아끼는 사람들이 나온다.[33] 서양으로 치면 오스만 제국에서 튀르크계 무슬림 지배층의 문화를 따라하는 피지배 민족들이 점차 생겨난 것과도 비슷하다.[34] 전 황제인 순치제가 죽기 전에 어린 강희제를 보좌하라고 임명한 특별 대신이다. 허나 지나치게 많은 권한을 손에 쥐게 되면서 오히려 황제를 깔보는 수준에 이르자 강희제가 참다참다 숙청해버린 것이다.[35] 번이란 청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 3명의 옛 명나라 장군들, 즉 오삼계, 상지신, 경정충 등에게 '번왕'의 칭호를 내리고 각자 운남성, 광동성, 복건성을 자치적으로 다스리게 해준 특권이었다. 허나 이들이 자체적으로 소금을 만들고 동전을 주조하는 등 막나가기 시작하자, 강희제가 이를 정리해버린 것이다.[36] 오삼계는 처음에는 옛 명나라를 재건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래서 반란 초기에는 숭정제와 영력제의 위패에 참배하기도 했다.[37] 하지만 한족의 대만 이주로 인해 툰샤오 사 사건이 벌어진다.[38] 참고로 네르친스크 조약은 중국이 서양 국가와 맺은 첫 근대적 조약이며, 공문서에서 스스로 '중국'이라 자국을 칭하는 보기드문 예이기도 했다.[39] 이미 강희제 중기에는 명청교체기의 혼란이 대부분 수습된 상태였다고 한다. 이후 건륭제 시기에 강남 지역의 견직, 도자기, 면방직 산업이 정점에 달하며 중국 경제는 역사상 최고의 고점을 찍게 된다.[40] 이 때문에 중국 학계에서는 청나라의 진정한 건국군주가 강희제라는 이야기도 있다. 괜히 '천년에 한 번 나올 군주'라는 뜻의 '천고일제(千古一帝)'라는 별명이 있는게 아닌 셈.[41] 이 과정에서 옹정제가 강희제를 독살하고 제위를 찬탈했다던가, 아니면 유서를 위조했다는 소문이 많이 떠돌았다. 그러나 2013년에 옹정제가 정상적으로 제위를 물려받은 것이 맞다는 조사 결과가 나오면서 291년 만에 황위 찬탈 누명을 벗을 수 있게 되었다.[42] 다만 현실과 타협해야 했기에 완전히 자치권을 박탈한 것은 아니고, 토사들에게 관직을 내린 뒤 반쯤 세습직으로 이어갈 수 있게 했다.[43] 이 사건을 대갑서사항청사건(大甲西社抗清事件)이라고 부른다.[44] 실제로 현재 중국 영토의 1/6이 건륭제 시기에 확장된 영토이다. 중국 수천년 역사동안 불려오던 덩치에 버금가는 수준을 단 수십년만에 이뤄낸것.[45] 현 쓰촨성 진천현과 소금현 등지에서 난이 일어나 1747년부터 1749년까지 격전이 일어났고, 특히 진천현의 경우 1771년에 제2차 진천 반란이 일어나기까지 했다. 반란은 1776년에야 진압당했다.[46] 1769년 마지막 전쟁 이후 결국 침공및 점령을 포기하고 우호관계로 들어섰다.[47] 후 레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민제가 구원을 요청하자 원군을 보냈으나 후 레 왕조를 이미 무너트렸던 떠이선 왕조의 군대에게 패배하고 회군, 이후 떠이선 왕조가 먼저 저자세로 나서면서 조공을 바치자 청나라도 떠이선 왕조를 안남국왕으로 책봉해주며 군신관계를 맺었다. 물론 떠이선 왕조조차 얼마 못가 신생국 응우옌 왕조에게 멸망딩했다.[48] 1733년 건륭제의 지시로 편찬이 시작된 책으로, 중국 역대 왕조들의 서적을 모조리 모아 총집대성한 서적이다.[49] 애초에 아편전쟁의 원인이 바로 이것이었다. 유럽 상인들은 중국의 비단, 차, 도자기 등을 사가기 위해 은을 지불하는데, 정작 중국은 자신들에게서 사가는 것이 없으니 심각한 무역적 불균형이 벌어졌던 것. 영국은 이 손해를 메꾸기 위해서 중독성이 강한 아편을 청나라에 밀매하기 시작했고, 청나라가 이를 금지하려 들자 영국이 반발하며 전쟁이 터진 것이다.[50] 매카트니는 5개월간 청나라에 체류하면서 나름대로 청나라의 내부 사정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고 청나라의 위세는 인정하되 치세가 장기간 이어지며 발생하는 문제점또한 정확히 파악했다. 실제로 '중국은 낡고 큰 배다. 지난 150년 간 전복되지 않은 이유는 운이 좋게도 극도로 조심스러운 선장을 만났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선장을 만나면 언제든지 침몰할 수 있다. 중국에는 현대적인 군수 산업이 전혀 없으며, 중국의 군사력은 영국에 비해 3~4배는 뒤쳐져 있다'라고 평했다고 한다. 극단적으로 요약하자면 지금 황제는 '어리석은 선장'이니 여차하면 우리가 충분히 노려볼만하다.고 평가한 것.[51] 가경제 시기에 황제가 친히 허션을 족친 결과 그의 집에서 무려 청나라 20년치 세입에 달하는 재물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재물들은 모두 내탕금에 들어갔다.[52] 실제로 건륭제가 재위에 있던 기간은 대략 60년 조금 넘는 수준으로 강희제를 이어 2번째로 오랜 기간 재위에 머물렀던 왕이었다. 심지어 이 조차 상황제로 2년 넘게 활동한데서 드러나듯 저 기록을 넘어서도 실질적으로 황제로 군림했다. 당장 건륭제가 가경제에게 황위를 명목상으로나마 양도한 이유부터가 자신이 존경하는 강희제의 기록을 넘기기 싫다.라는 간단한 이유 하나였으니...[53] 사실 이 자체가 윗 문단에 상술했듯 강희제의 재위 기록을 넘기기 싫다며 쇼한 것에 가깝기 때문에(...) 건륭제 입장에선 몸이 약해진것도 아니니 딱히 권력을 놓으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54] 물론 국내 상인도 아닌 외국 상인들을 상대로 이렇게 되면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약탈이 되어버리므로 아편 1상자당 동일한 규격의 차 5상자로 바꿔주겠단 합의점을 제시했다.[55] 사실 아편 소각 사건과 아편전쟁 사이에는 상당한 텀이 있으며, 그동안 중국과 영국 모두 내외적으로 많은 고충이 있었고, 실제로 '아편전쟁'이란 이름이 워낙 유명하지만 '사를 회고하면 아편은 단지 전쟁에 직결되는 원인이지 근원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란 말마따나 아편전쟁 시점에선 아편 자체가 명분중 하나일뿐 핵심은 아니었다.[56] 이에 대해선 조정과 임칙서의 영국해군에 대한 인지 차이도 컸는데, 임칙서는 저들이 무력 시위를 벌일 매우 높은 가능성으로 적으로 돌변할 잠재적 적대 관계라고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으나 조정은 저들을 단지 일전에 피해입은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서 온 사절단정도로나 인지했다. 그렇기에 조정은 '사절단을 상대로 흉흉한 무력행사를 하려 해? 임칙서 제정신인가?'같은 커다란 오판을 저지른 것. 이에 대해선 양측의 기술과 군대의 차이가 컸음에도 임칙서가 필사적으로 막아서 그나마 적은 피해를 본 것을 '겨우 하소연하러 온 이들 상대로 그렇게나 피해를 본거 보면 심각하게 무능한거 아닌가?'하는 지대한 착각이 큰 영향을 줬다.[57] 배상금같은 여러 자잘한 조건도 있었으나 이 자체는 역사적으로 많이 있던 사례인만큼 이상할건 없었으나 영토를 타국에세 양도하라라는 조건만큼은 망하면 망했지 중화사상을 저버리지 못하던 청나라 입장에선 금시초문인 상황이었고 동시에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58] 대략 600만 냥의 배상금과 홍콩 할양, 영국 시민을 청 황제와 동등하게 대우 같은 말도 안되는 조약이 있었다. 영국에게도 고작 600만 냥으로는 전쟁까지 일으킨 수지가 맞지 않았고 청나라 입장에는 아예 눈이 뒤집히는 조항들이었다.[59] 청의 쇠퇴기에서 중국의 불평등조약이 개정된 1940년대까지의 시기를 중화권에서는 백년국치라 일컫는다.[60] 참고로 이때 증국관이 워낙 포악하게 난징 시민들을 다루는 바람에 백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길가에 널부러진 시체 열의 아홉은 노인들이었고, 2~3살 짜리 아이들도 심심풀이로 죽였으며 이렇게 죽은 사람들이 20만~30만에 다다를 정도였다. 또한 40대 이하의 여자들은 직접 잡아가 강간하는등 남녀노소 안가리고 죽거나 죽는게 나은 꼴로 만들었다.[61] 분명 청 조정은 북당으로 상륙하라 요청했으나 영국이 통보 없이 마음대로 대고에 상륙해 대고의 방어 시설들을 철거했다. 명백한 조약 위반이었다.[62] 특히 마미 조선소는 은 2천만냥을 쏟아부은 양무파들의 희망이자 중국 근대화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는데, 이걸 프랑스가 완전히 파괴해버리면서 심각한 타격을 입고야 말았다.[63] 청나라의 실세였던 이홍장은, 군사력을 베트남에 끊임없이 투사하는 프랑스보다는 근대화된 지 얼마 안 된 일본이 더 약하고 쉬운 상대라 생각했기에 베트남을 버리고 조선을 보호국으로 남기고자 했다. 그래서 그리 나쁘지 않은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프랑스에게 베트남을 통째로 갖다 바쳤다. 이홍장의 이 선택은 결국 9년 후에 큰 후환으로 되돌아온다.[64] 1위는 1931년 중국 대홍수다.[65] 왼쪽부터 대영제국의 빅토리아 여왕, 독일 제국의 빌헬름 2세, 러시아 제국의 니콜라이 2세, 프랑스의 마리안, 일본 제국의 사무라이, 그 뒤엔 청의 이홍장을 묘사했다. 당시 청나라에 주둔하고 있던 주요 열강들의 이권 경쟁을 풍자하고 있는데, 독일이 중국이라고 쓰인 파이에 칼을 꽂고 영국을 견제하고 있고 영국 역시 마찬가지로 독일을 견제하고 있으며 프랑스와 러시아는 독일과 영국이 싸우는 그 틈에 목을 내밀고 큰 파이 조각이 어디 없는지 유심히 들여다 보고있다.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 역시 한 몫을 차지하기 위해 심각한 표정으로 파이를 들여다 보고있다. 뒤에선 이홍장이 열강들에게 중국이 유린당하는 걸 보면서 소스라치게 놀라고 있다. 미국은 청나라에 대한 본격적인 이권 침탈 경쟁에 이 그림에 묘사된 나라들에 비해서는 뒤늦게 합류했기 때문에 묘사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66] 사실 이 그림을 서양 왕실 및 황실 간의 혈연 관계를 고려해서 보면 그야말로 콩가루 집안을 다룬 막장 드라마가 따로 없다. 자세한 건 빅토리아 여왕 문서 참조. 요약하자면 빌헬름 2세는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자이며 니콜라이 2세 역시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사위이다.[67] 다만 초등학교와 중등학교를 건립하는 것은 폐지하지 않고 남겨두었다.[68] 꼭 103일만에 개혁이 중단되었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백일변법'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사건으로 약간 싹을 틔웠던 청나라의 근대화 정책이 숨을 거두었다는 평을 듣는다. 서태후도 청나라가 멸망하기 직전에 개혁 조치를 단행했지만, 그래봤자 이미 늦은 시도였을 뿐이다.[69] 무술을 바탕으로 생겨난 무력 집단으로 갈수록 종교적 색채를 띠었다.[70] 이는 결국 8개국 연합군이라는 대참사를 불러오게 된다.[71] 한편 세이무어 경은 인근의 병기고로 후퇴해 필사적인 방어전을 펼치다가, 6월 25일날 8개국 구원군이 도착하면서 구사일생으로 겨우 목숨을 건져 톈진으로 돌아갔다.[72] 서태후는 중국 병사들이 베이징을 떠나는 외국인들을 호위해 줄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걸 그래도 믿는 사람은 없었다.[73] 뿐만 아니라 외국인 남자를 죽이면 하나당 50냥, 외국인 여자는 40냥, 아이는 30냥을 주겠다는 포상금마저 걸었으며 의화단 폭도들은 베이징의 외국인 구역을 철저히 에워쌌다.[74] 서태후는 죽기 직전인 1908년 청 최후의 황제 선통제를 고작 3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시키고 세상을 떠난다.[75] 청나라 조정의 철도, 도로 국유화를 막기 위해 일어난 봉기. 특히 쓰촨-한커우 철도와 광둥-한커우 철도가 핵심이었고 쓰촨성에서 가장 반발이 심했다.[76] 국내외 여론도 위안스카이의 총통 취임에 큰 반대는 없었다. 혁명가들은 위안스카이가 청 황제를 퇴위시키고 더이상의 내전을 봉합할 만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여겼고, 때문에 1912년 1월 22일에 쑨원도 위안스카이가 공화정 수립에 동의한다면 대총통직을 넘겨주겠다고 인정할 정도였다.[77] 국제 학계에서도 만주국을 청나라의 후신이라고 보는 견해는 거의 없다. 실제로 1930년대 일본에서도 만주국의 시조를 천명제가 아닌 선통제로 지정했는데, 이는 그가 청나라를 계승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왕조를 열었다고 보는 시각을 드러낸 것이었다.